고려대_김 용 수
곽상(郭象)
서진(西晉) 하남(河南) 낙양(洛陽) 사람. 자는 자현(子玄)이다. 일찍부터 노장 사상에 정통했고, 왕연(王衍) 등 청담지사(淸談之士)와 사귀었다. 변재(辯才)에 막힘이 없어 사람들이 위(魏)나라의 왕필(王弼)이 다시 태어났다고 칭송했다. 사도연(司徒掾)과 사공연(司空掾), 태학박사(太學博士), 황문시랑(黃門侍郞) 등을 역임했다. 진혜제(晉惠帝) 영안(永安) 원년(304) 이후 정치에만 전력하여 권세가 하늘을 찔렀다. 저서에 『장자주(莊子注)』 33권이 있는데, 『장자(莊子)』의 본문에 완전히 충실하지는 않지만 역대의 장자 주석서를 두루 읽은 지식을 담았고, 불교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 밖의 저서에 『논어체략(論語體略)』이 있었지만, 일부만이 황간(黃侃)의 『논어의소(論語義疏)』에 산견된다.
1. 글의 연기
이 글은 곽상(郭象, AD 252[?]-312) 「莊子跋」에 나타난 "成性易知"를 중심으로, 그것과 {易傳} 중의 "成性易知"사상의 상호 연관성을 탐색하고, 또한 이것을 토대로 곽상 {莊子注}에 구체적으로 "成性"과 "易知"의 사상이 어떻게 구현되어 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사실상 魏晉을 말하면 곧 바로 떠올리는 것이 魏晉名士들의 독특한 風度와 三玄, 즉 {老},{莊},{易}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 개개인의 인격적 풍도를 언급하면서도 그들을 에워싸고 규정짓는 그 시대 지식인들만의 독특한 생활문화, 즉 "玄風"에 대해서는 딱히 무엇이라고 규정하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다. 그리고 삼현서가 각각 그 시대 지식인들의 삶의 방식에 어떤 방식으로 다가갔으며, 그들의 정신세계 속에서 어떠한 맥락을 가지고 서로 연결되고, 융합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구체적 연구도 아직은 빈약하다. 위진시기의 사상가들이 주로 삼현서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사상을 독자적으로 구축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이 세 종류의 서로 다른 사상을 서로 결합하여 자신들의 철학정신을 구현해 가는 데 유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위진이라는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잉태된 대부분의 주석활동은 기본적으로 이 세 서적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일체의 서적은 주석활동의 범주에 넣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들을 지배했던 정신세계의 대표서적이 곧 삼현서로 요약된다는 의미에서 이 말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위진 시기의 현학 가들의 지식활동을 규정하던 이 세 서적이 동시적으로 유행하였다면 아마 이 세 서적간에도 어떤 유기적 관계성이 존재하고 있던지, 아니면 사상적으로 어떤 공통분모를 형성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직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삼현서가 그 위진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호소력을 지닐 수 있었던 그 나름대로의 감화력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되물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감화력의 바탕이 공통분모에 입각한 것인지, 아니면 서로 이질적이면서도 상호 절충적인 성격에서 비롯한 것인지를 우리는 검토해볼 필요성을 느낄 것이다. 이처럼 당시에 유행하던 삼현서에 대한 주석활동 가운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 삼현서가 주석되는 가운데 서로 사상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융합하는 분위기 속에서 작업이 주로 진행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위진을 살았던 지식인들이 삼현서의 상호 융합적 성격을 구체적으로 자신들의 주석학에 어떤 방식으로 적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직접적 연구를 게을리한 감이 있다. 따라서 필자는 이런 점에 주목하여 곽상의 대표적 작업인 {장자주} 내부에 반영된 {역전}의 사상을 밝혀내고, 이것을 바탕으로 그의 철학이 {역전}의 사상에 얼마나 빚지고 있는지 알아보고, 또한 그의 철학적 사고에 어떻게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그 중에서도 {역전}의 "성성이지"가 곽상의 {장자주}에 어떤 식으로 구체화 되어 있는지를 알아보는 것으로 본 논문의 주요테마로 삼고자 한다.
2. 곽상철학의 치학정신: "成性易知"
필자가 보기에, 학문을 지향하는 연구자라면 아마 반드시 자신의 어떤 학문적 목표가 있을 것이고, 그리고 이러한 학문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어떤 학문적 연구방법론을 구상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학자에게 있어서 자신의 학문적 목표와 방법을 표현한 압축된 문장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그 학자의 "治學精神"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곽상이라는 독특한 사상가에게 있어서 그의 치학정신을 압축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말을 찾아보려면
우선 [장자발]에서 곽상의 치학정신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성성이지"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오늘날의 곽상 연구자에 이르기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구절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상당한 호소력을 지닌 곽상 자신의 힘찬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이 개념을 중심으로 본 논문을 전개해 갈 것이다. 이 "성성이지"라는 말은 곽상의 [장자발] 혹은 [장자후기]라고 불리는 자료의 첫머리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장자발]문은 중국대륙에서는 일찍이 소실되어 그 종적을 감추어 그것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문장이 일본의 高山寺에 보관되어 있다가, 여러 학자들의 연구작업에 힘입어 곽상이 쓴 [장자발]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사료적 가치도 인정받게 되었다. 이 [장자발]은 일본에 보존되어 있는 {舊 莊子卷子本殘卷}에 나오는데, 이 책은 일본학자 狩野直喜와 武內義雄 및 중국학자 王叔岷의 교감작업에 힘입어, {莊子注舊 卷子本}의 "夫學者"이하 이백이자가 곽상 {장자주}의 [후기] 혹은 [발문]에 해당한다는 것임이 밝혀졌다. 그 글의 교감된 문장의 첫머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무릇 학문 연구자는 마땅히 成性易知를 본래의 품덕으로 삼아야지, 이단학설을 연구할 수 있음을 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가 남긴 序文이나 跋文에서 그것을 찾아보는 것이 지름길이 될 것이다.
우선 [장자발]에서 곽상의 치학정신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성성이지"라는 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오늘날의 곽상 연구자에 이르기까지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한 구절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상당한 호소력을 지닌 곽상 자신의 힘찬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필자는 이 개념을 중심으로 본 논문을 전개해 갈 것이다. 이 "성성이지"라는 말은 곽상의 [장자발] 혹은 [장자후기]라고 불리는 자료의 첫머리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장자발]문은 중국대륙에서는 일찍이 소실되어 그 종적을 감추어 그것의 존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문장이 일본의 高山寺에 보관되어 있다가, 여러 학자들의 연구작업에 힘입어 곽상이 쓴 [장자발]에 해당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사료적 가치도 인정받게 되었다. 이 [장자발]은 일본에 보존되어 있는 {舊 莊子卷子本殘卷}에 나오는데, 이 책은 일본학자 狩野直喜와 武內義雄 및 중국학자 王叔岷의 교감작업에 힘입어, {莊子注舊 卷子本}의 "夫學者"이하 이백이자가 곽상 {장자주}의 [후기] 혹은 [발문]에 해당한다는 것임이 밝혀졌다. 그 글의 교감된 문장의 첫머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무릇 학문 연구자는 마땅히 成性易知를 본래의 품덕으로 삼아야지, 이단학설을 연구할 수 있음을 귀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의 중요한 발견을 하게 된다. 그것은 이 말이 곽상자신이 고본 {장자} 52편을 33편 본의 금본 {장자}의 형태로 재편집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장자주}를 모두 완성한 후의 솔직한 고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곽상이 학문을 하는 기본태도이자 학자로서의 치학정신이 그대로 배여있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곽상이 말한 주요골자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위적 행위로서 "成性易知"이고, 다른 하나는 금지적 호소로서 "不以能攻異端爲貴"이다. 곽상이 생각하기에 학문을 하는 당위적 목적은 오로지 "성성이지"의 실천활동 자체에 있지, 일시적으로 유행하는 이단학설을 쫓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함이 아님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먼저 부당위적 행위로서 곽상이 말하고 있는 "攻異端"의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攻異端"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論語·爲政}편에서 유래한다.
공자가 이르길: "비정상적이고 말단적인 학문에 힘쓰는 것은 도리어 우리에게 해가 될 따름이다"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하는 이단은 후대의 용법처럼 유가에 학술의 정통성을 부여하고, 그 외의 기타 학문을 모두 이단사설로서 지칭한 것이 아니다. "異"는 정상적 모습을 벗어난 변이를 말하고, "端"은 근본에 대해 지엽말단적인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異端"이란 공자가 생각하기에 그 당시 새롭게 유행하여 일어나던 학설들을 가리킨 말일 것이다. 이런 학설들은 공자의 생각으로는 영원한 진리로서 근본적 위치를 차지할 학문이 아니고, 일시적으로 시대의 부침과 더불어 생멸하는 유행병에 불과하므로 이러한 학문에 탐닉하는 것은 오히려 학문에 정진하는 사람들에게 악영향만을 미치므로 하나의 경고의 메시지를 띄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곽상으로 돌아가서, 그가 말하는 "이단"이란 무엇을 겨냥한 것일까? 필자는 그것은 다름 아닌 {장자}를 두고 한말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곽상이 당시에 유행하던 {장자}에 대한 연구경향을 꼬집은 내용과 그 軌를 같이 하는 표현인 것이다. 사실 곽상과 동시대를 살았던 많은 지식인들이 {장자}를 읽었지만 그들이 {장자}를 접했던 목적은 사뭇 다른 곳에 있었음을 우리는 다음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과거 내가 {장자}를 보지 못했을 때에는 변론가들이 '한 尺의 '와 '連環은 풀 수 있다'는 문제를 놓고 논쟁하는 소리를 듣게되면 그것이 모두 장자의 말일 것이라 생각하여, 마침내 장자를 변론가 가운데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천하]편에서 제자학설들의 장단점을 평가하는데, 이 장에 이르러 "그 도리는 잡다하고,, 그 언론은 실제와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서, 비로소 길거리에서 주워들은 말이 진실을 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또한 국가를 다스리고 인생의 이치를 표현해 내지 않았다면 그것은 실로 쓸모없는 담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귀족자제들이 모두 그것을 유희의 대상으로 삼고, 어떤 경우는 모범적인 언어(글귀)에 물릴 경우에 개념이나 명제를 분석하여 자신의 기개를 펼치고 또한 자신의 사상을 엮어내어 후세에 남긴다. 이로써 사람의 본성이 사악하거나 음탕한 쪽으로 흐르지 않도록 만드니 그것은 오히려 노름에 몰두하는 것보다 현명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이 장을) 남겨두되 자세히 논의하지 않음으로써 즐거운 일을 (후세에) 남겨두고자 한다.
이것은 {장자·천하}편 끝부분에 대한 곽상의 주로, 우리는 이것을 통해 곽상이 {장자}를 접하게 되는 과정과 {장자}의 참된 가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시사 받을 수 있다. 여기서 곽상은 {장자}를 읽는 진정한 가치가 "천하국가를 다스리는 일 및 인생의 이치를 표현하는 것(經國體致)"에 있음을 던져주고 있다. 그런데 그 당시의 귀족자제들이 {장자}를 변론과 유희의 소재거리로 삼아서 {장자}의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곽상은 그들의 이런 유희, 그 가운데서도 "辯名析理"와 같은 행위자체는 도박이나 방탕한 생활을 즐기는 것보다는 유익하다고 여기는 까닭에 심하게 그들을 질타하지는 않는다. 곽상은 이 [천하편]의 제자학설의 장단점을 파악하여, 주를 다는 과정에 {장자}의 올바른 가치를 찾아내려한 것이다. 곽상은 {장자}의 진가치를 변론술을 익히거나 농담을 즐기기 위한 지적 유희에서 찾은 것이 아니라, "경국체치"라는 사회문제 및 인생문제와 깊이 관련하여 찾고있음을 알 수 있다. 경국은 국가사회의 문제를 나타내고, 체치는 인생의 진리와 연계되어 있으므로, 이것은 또한 곽상 {장자주}의 기본종지인 "內聖外王의 道"와도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다. 곽상은 {장자}의 진정신을 "내성외왕의 도"로 잡고, 이것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면서, 동시에 시대정신을 구현하려고 노력한 것이였다. "내성외왕의 도"라는 말은 본래 {장자·천하}의 말이지만, 곽상은 이것을 자신의 장자철학을 귀결짓는 근본적인 뜻으로 사용하였다. 곽상은 그의 [장자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장자는 비록 (공자와 같은 聖人처럼) 이것(無心의 도)을 체득하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말하는데 있어서는 지극하다. 천지의 질서와 만물의 본성을 잘 파악하여 조리를 세우고, 삶과 죽음의 이치를 잘 깨닫고 있다. 그리하여 (장자는) 內聖外王의 道를 밝히어, 위로는 조물자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으며, 아래로는 사물이 각기 스스로 짓는 것임을 안다.
곽상이 {장자}를 이해하는 출발점은 우선적으로 그 시대의 정치사회와 현실인생의 문제, 즉 "經國體致"와 깊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가지고 곽상은 장자의 "내성외왕의 도"라는 철학적 강령을 전개해 나간다. 위의 인용문에서 말한 것처럼 곽상의 "내성외왕의 도"의 초점은 결국 "造物無物"과 "有物自造"로 모아진다. 이것은 결국 곽상철학의 독자적 정신을 구현한 그의 현학, 즉 "獨化", "玄冥"설의 이론기초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造物無物"이란 개체사물 내부의 자연본성을 벗어나서 따로 조물주의 존재나 지위를 세우지 않는 것이다. 개체 사물의 위에 존재하면서 그것들을 생성하고, 주재하던 일체의 조물자적 지위를 부정한 것이다. 이것을 통하여 개체사물은 자신의 내부적 본성 속에서 조물의 작용을 대신하는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이에 다시 곽상은 "有物自造"라는 명제로 자신의 주장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드러내고 있다. "유물자조"란 일체의 존재사물이 모두 자신의 내부적 원리에 의해 자기의 존재를 발견하고 설명할 수 있을 뿐, 그 자신을 벗어난 외부적이고 타의적인 힘의 강제에 의해 자신을 성립시킨 것이 아니라는 언명인 것이다.
"造物無物"과 "有物自造"는 조물자의 절대적 지위를 부정하는 동시에, 그런 지위를 개체사물 내부로 환원시켜, 개체의 독자적 지위를 긍정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곽상은 그 이전의 절대적 인격신으로서의 "上帝"개념이나, 도덕적 지배원리로서 사용되었던 "天"이라는 개념, 그리고 王弼 식의 본체 "無"의 정체적 성격을 파괴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상제"와 같은 인격적인 원리로서의 성격을 "自然"이라는 개념으로 파괴하고, 그것의 절대적 성격은 "理"라는 개념으로 치환하고 있다. 이러한 성격은 곽상 {장자주} 속의 "리"개념을 분석해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우주를 어떤 도덕적 가치나 목적에 종속시키려는 시도에도 반대한다. 일체의 존재사물은 자연의 이법의 무위함으로 변화의 길을 따라갈 뿐이지, 인간적인 의도나 목적성에 종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곽상은 세상의 개체사물에 대해 유가 식의 도덕가치적 입장에 선 해석이나 墨家 식의 인격신을 바탕으로 하는 해석이나 권위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이런 해석은 이미 王弼哲學 속에도 잘 구현되어 있다.
그러나 왕필과 곽상의 차이점은 개체사물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다. 왕필은 개체사물의 통일성을 개체사물을 벗어난, 개체외부의 역량에서 찾았지만, 곽상의 경우는 철저히 사물개체의 내부적 원인에서 찾고자 노력한 것이다. 그러므로 왕필이 개체사물을 통일하는 중심 축으로 내세웠던 "무"를 곽상은 철저히 사물개체의 내부에서 그 성격이나 작용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곽상의 "무"는 사실상 사물개체 내부의 통일성의 원리로서 요구되어진다. 그리고 이 "무"는 "유"라고 하는 개체존재를 기반으로, 그 존재사물의 내부적 현상을 설명하는 기제로 작용하지, 개체외부의 수많은 현상을 통일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장치는 아닌 것이다.
삼가 묻건대 조물자는 有인가? 無인가? 만약 無라면 어찌 사물을 창조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만약 有라면 하나의 존재물로서 뭇 사물들에게 형체를 부여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러므로 다양한 존재사물의 형체는 스스로 지니고 있는 것(自物)임을 밝힌 이후라야 비로소 더불어 조물자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곽상에 의하면 조물자는 무형의 존재로서 개체사물의 내부에 깔려있는 것이다. 그것은 유만으로 설명할 수 없고, 무만으로 서도 설명해 낼 수 없다. 왜냐하면 개체사물의 내부에는 이미 조물의 작용에 해당하는 自物의 공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물음, 즉 조물주는 유인가 무인가에 대하여 곽상은 다시 다음과 같이 회답하고 있다.
무릇 무는 존재사물을 생성할 수 없다. 그런데 존재사물이 생겨날 수 있다는 말은 바로 존재사물의 생겨남은 자신의 내부에서 얻어 지니고 있(自得)기 때문이다.
이것은 유가 유를 만들어 낼 수는 없고 스스로 있을 따름이라는 것을 밝히는 까닭이지, 무가 유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 무가 유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일러 무라 할 것인가? 한번 무이면 영원히 무로서 존재한다. 무가 영원히 무로서 있으므로 유는 홀연히 스스로 생겨나는 것임이 분명하다.
곽상은 무에 대한 일반적 규정으로서는 존재의 부재상태를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무는 존재 유를 생성할 역량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왕필이 말하는 무의 본체적 성격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무의 본체적 성격을 개체유 내부로 가지고 와서 개체사물의 존재근거로 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유의 생성작용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自有"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유"는 "홀연히 생겨난다"고 표현한다. 또는 존재사물이 생겨나는 것은 스스로 얻어 지니고 있음(物生之自得)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有物自造"와 "造物無物"을 합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개체사물 자신은 다른 존재사물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내부에 자신의 존재근거를 지니고 있으므로 조물의 작용을 스스로 품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自物"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존재의 부재상태인) 무라면 사물을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없고, 단순한 개체존재라면 각각 스스로 구체적으로 맡은 일이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맡은 일이 없으면서도 미루어 나가는 자는 그 누구인가? 각각 스스로 운행되어질 따름이다.
무는 어떤 실체성이 없으므로 어떤 일을 추행할 수 없고, 유는 각각 구체적인 일에 제한되어 있으므로 無事일 수 없다. 그런데 여기에서 "無事而推行"이라 함은 곧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유는 有事인데, 無事라고 하였으므로 유에 속하지 않고, 무는 "無所能行"인데, "推行是者"이므로 무도 아니다. 이것을 곽상은 "各自行耳"라는 말로 非有非無로서 개체사물내부의 자연본성이 독자적으로 운행됨을 말하였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有而無를 말하는 것이 된다. 유의 실체성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추행을 찾고, 동시에 무의 무한성으로 유의 제한성을 벗어난다.
무릇 유가 아직 생겨나지도 않았는데, 무엇으로써 생겨난다고 할 것인가? 그러므로 반드시 스스로 있(自有)을 따름이지, 어찌 유가 유이도록 할 수 있는 바이겠는가!
일반적으로 곽상을 "崇有論者"라고 많이 말하지만 곽상의 "유"는 "무"를 내부에 품고 있는 "유"인 것이다. 이에 비해 왕필의 "무"는 "유"를 내부에 품고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곽상이 "무"를 내놓는 것은 주로 개체사물, 즉 "유"의 자기 동일성을 설명하기 위해 서지만, 왕필은 그와 대비적으로 정체 자연으로서의 "무"를 설명하기 위해 개체적 존재사물인 "유"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왕필의 "무"는 다양하고 복잡한 개체"유"의 전체적 통일성을 설명하기 위한 원리이고, 곽상의 "무"는 개체내부의 독자적 통일성, 다시 말해 사물의 내적 근거를 설명하기 위한 요청인 것이다. 단순히 개체의 실존인 "유"만을 가지고는 그 실존내부의 우주적 체현인 사물존재의 자기근거를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곽상은 때때로 "무"를 내놓는다. 그러므로 곽상의 "무"는 현상의 개체사물의 독자성을 떠나서는 성립할 수 없다. 따라서 "유"가 일차적이고 "무"는 이 "유"를 설명하기 위한 보조수단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곽상은 "崇有論者"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곽상철학에서 개체사물을 나타내는 말로는 "物", "有", "性"등과 같은 개념이 있다. 먼저 "물"은 가장 일반적인 용법으로 사용된다. 일체존재사물을 다양성의 측면에서 말하면 "萬物"이고, 이것을 추상적 일반적 언어로 표현하면 "天地"가 된다. "天地"는 "萬物"의 總相(보편개념)이고, "萬物"은 "天地"의 別相(개별개념)인 것이다. 곽상이 생각하는 우주전체란 사실상 추상적 개념의 명목일뿐 그것이 사실적 기술이 아니라는 의미로 여겨진다. 그것에 비해 구체사물들의 개별적 움직임은 언제나 사실인 것이다. 이러한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물들의 배후에서 이것을 하나로 통일할 수 있는 우주적 힘이나 원리를 곽상은 구태여 설정해 두려하지 않는다. 개체사물의 완벽함이 있으면, 그런 개체들의 종합이 곧 우주전체의 완벽함으로 이어진다는 구상으로, 개체의 총합을 양적 확대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가 굳이 우주의 통일적 원리로서 추상적 원리나 인격적 신을 가정하지 않더라고 개체자신의 독자적 완벽성을 확보할 수 있다면, 그것의 총합인 우주자체도 저절로 완미한 존재로서 현상하게 될 것이라는 착상이 깃들여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곽상은 언제나 개체의 개별적 통일성을 설명하려들지, 우주전체의 완미성이나 통일성을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그리고 "유"라는 개념은 곽상철학 중에서 이중적 역할을 맡고 있다. 하나는 일반존재사물 전체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 존재사물을 지칭하는 경우이다. 전자를 보면 현상에 존재하는 일체사물을 "유"라고 부른다.
무가 변화하여 유로 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라 유 역시 변화하여 무로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유라는 것은 천만번 변화해도 결코 무가 될 수는 없다. 결코 무가 될 수 없으므로 자고로 있지 않는 때가 없이 언제나 존재한다.
곽상은 "무"는 현상존재사물의 생성이나 존재의 원인 또는 근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뿐만이 아니라 현상의 존재사물 역시 "무"의 상태, 즉 개별적 존재사물의 전체가 완전히 소실되는 사건을 지금까지 경험한 적도 없거니와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존재사물의 전체에서 바라볼 경우 "유"는 영원히 존재의 상실로서의 "무"로 환원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지만 개별적 사물을 지칭하는 "유"의 경우는 그 변화를 인정한다. 이러한 개별적 구체사물은 영원히 운동하는 과정 속에 놓여 있으면서 부단히 생멸을 거듭하는데, 곽상은 이것을 존재"유"의 소실상태로서 "무"라고 여기지 않고, "유"의 운동상태로서 말한다. 개체로서의 "유"는 거듭 남, 즉 변화가 생멸하지만 이것은 전체적 입장에서 말하는 "무"가 아니며, 엄밀한 측면에서 존재의 일시적 변이가 일어났을 뿐 존재"유"의 영원한 자기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양적인 총합에 있어서 존재사물의 변화가 없음은 곧 변화란 사물개체 간의 양적 전이, 즉 양적인 운동과정 중의 한 양태일 뿐, 존재 "유"와 비존재 "무"의 완전히 이질적 교차상태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유"는 수천번 변화를 경험해도 영원히 존재의 소실점인 "영"의 상태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구체적 존재물로서 "有"는 자신의 내부에 형이상학적 존재근거를 지니고 있다. 그것을 곽상은 "物各有性"이라 표현한다. 여기서의 "物"은 구체적 존재사물로서 자신의 존재근거를 내부적 원인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그 원인을 "性"이라는 말로 압축하고 있다. 곽상이 말하는 "성"은 구체적 사물의 존재 소이, 즉 내적 근거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외부적 역량으로 변화시키거나 제거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사물마다 모두 자신의 구체적 내용을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어떤 자기 규정성, 즉 한계성을 지닌다. 이것을 곽상은 "極"("性各有極")이나 "分"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사물은 각기 자신의 자연본성이 있고, 그 자연본성은 각기 어떤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명이나 지력과 같은 것을 어찌 발돋움한다고 미칠 수 있는 것이겠는가?
자연본성은 타고난 본분이 있으므로 총명한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지혜롭고, 어리석은 사람은 평생 어리석게 살아간다. 그러이 어찌 도중에 자신의 본성을 고칠 수 있는 경우가 있겠는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연본성은 하지 않을 수 없고,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못한 것은 억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것을 막지만 않는다면 모든 사물이 모두 자득하면서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연본성은 각각 그 본래의 몫이 있다. 이것으로부터 달아날 수도 없고 그것에 덧보탤 수도 없다.
자연본성은 타고난 본분이 있으므로 총명한 사람은 늙어 죽을 때까지 지혜롭고, 어리석은 사람은 평생 어리석게 살아간다. 그러이 어찌 도중에 자신의 본성을 고칠 수 있는 경우가 있겠는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자연본성은 하지 않을 수 없고, 선천적으로 타고나지 못한 것은 억지로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것을 막지만 않는다면 모든 사물이 모두 자득하면서도 그 까닭을 알지 못한다.
"性"은 개체사물마다 모두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으며, 이 "성"이 개체사물의 본질적 성격을 규정하는 내적 근거를 이룬다. 또한 하나의 사물이 일단 한번 자신의 "성"이 결정되고나면, 그 사물은 일생동안 그것의 규정적 본질을 벗어날 수 없게된다. 그러므로 "자연"이라는 말도 개체사물의 범위 속에서 사용된다. "자연"은 다름 아닌 개체사물의 자기본성의 순기능적 자기전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곽상의 {장자주}에서 "자연"이라는 개념은 개체사물과 결합되어 있으며, 구체적으로는 그 사물의 내부본성의 자기실현과 언제나 결부되어 있다. 따라서 곽상이 "自然"을 말할 경우 주로 "物"이나 "性"이라는 말과 결합 되여 언급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세상의 존재사물들은 그 취향 모두 각기 다르다. 그래서 마치 진재와 같은 것이 있어 그것들을 그러하도록 사역하는 것 같지만, 진재의 흔적이나 자취를 아무리 찾으려해도 끝내 찾을 수가 없다. 이는 곧 존재사물은 모두 스스로 그러한 것(物皆自然)이지 그러하도록 사역하는 존재가 없음을 알려준다.
조물자는 주재력이 없다. 사물마다 각기 자신을 짓고 무엇에 의존하는 바가 없다. 이것이 천지의 바른 모습이다.
존재사물("物")과 존재사물의 자연("物之自然")은 동일한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곽상이 有의 범주에 넣는 것은 존재사물의 객관구체성, 즉 물리적 형상을 의미하지, 구체적으로 "자연"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곽상의 "自有" 그리고 "自物"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때 우리는 "유"와 "물"이 "자연"의 공능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自然" 즉 "忽然自爾" "塊然而自生"한다고 할 때의 "獨化"의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유"와 "물"에 "자유""자물"로서의 성격을 부여하는 "자연"은 단순한 형상적 대상물이 아니라 그러한 물리적 대상을 살아 움직이도록 생명력을 부여하는 근본 소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곽상의 "自物"이 개체외부에서 "造物"의 지위를 부정하면서, 그 절대적 역량을 개체내부의 "無物之物"에서 찾으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재사물("物")과 존재사물의 자연("物之自然")은 동일한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 곽상이 有의 범주에 넣는 것은 존재사물의 객관구체성, 즉 물리적 형상을 의미하지, 구체적으로 "자연"의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곽상의 "自有" 그리고 "自物"이라는 개념을 떠올릴 때 우리는 "유"와 "물"이 "자연"의 공능을 내부적으로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自然" 즉 "忽然自爾" "塊然而自生"한다고 할 때의 "獨化"의 성격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유"와 "물"에 "자유""자물"로서의 성격을 부여하는 "자연"은 단순한 형상적 대상물이 아니라 그러한 물리적 대상을 살아 움직이도록 생명력을 부여하는 근본 소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곽상의 "自物"이 개체외부에서 "造物"의 지위를 부정하면서, 그 절대적 역량을 개체내부의 "無物之物"에서 찾으려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物物者는 구체적 실체성이 없으므로(無物) 物은 자연히 물 자신 그대로 있(自物)을 따름이다. 物이 自物로 있을 따름이므로, 그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득한) 冥이다.
사이가 없다는 것은 오로지 물물자의 이름만이 있을 따름으로, 존재사물이 자신의 내부본성에 근거하여 존재하고 있다("物之自物")는 말이다. 물물자는 결국 실체성이 없다. 그러니 사이라는 것이 어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곽상이 사용하는 "造物無物" 혹은 "造物無主"라는 말로서 조물주의 실체적 성격을 부정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조물주의 작용마저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곽상은 그런 조물주의 작용을 개체사물 자신에게서 발견하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체사물은 "자연"을 자신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곽상이 사용하는 "造物無物" 혹은 "造物無主"라는 말로서 조물주의 실체적 성격을 부정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그런 조물주의 작용마저 완전히 부정한 것은 아니다. 곽상은 그런 조물주의 작용을 개체사물 자신에게서 발견하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개체사물은 "자연"을 자신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릇 하늘의 피리소리("天 ")가 어찌 따로 하나의 사물로서 존재하겠는가? 곧 다양한 사물들에 난 구멍과 대나무를 나란히 엮어 만든 종류의 것들이 생명 있는 것들과 접하여, 함께 모여 하나의 천지를 공통적으로 이루고 있을 따름이다. 무는 이미 텅비어 있는 상태이므로 유를 생성할 수 없다. 그리고 유가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는 또한 어떤 생성의 문제를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존재사물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生生者")는 누구일까? 덩그러니 스스로 생겨나올("自生") 따름이다.
피리의 생명은 노랫소리에 있다. 그렇다면 피리에 그런 생명을 부여하는 자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문제를 자연계 전체 사물로 확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의 피리의 생명은 노랫소리에 있다. 그렇다면 자연의 피리가 소리를 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곽상에 의하면 자연의 피리는 이미 그 소리를 자신의 내부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피리가 구성되면서 자연적으로 갖추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결국 이 자연계의 생명체가 구성하는 천지도 다양한 존재사물들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생명의 질서를 복합적으로 엮어내는 것이지, 어떤 초월적 혹은 절대적 존재가 어떤 법칙성을 부여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다.
3. {역전}의 "成性"과 "易知"의 의미
이제 다시 {역전}에서 "成性易知"가 어떻게 사용되는지 알아보자. "成性"과 "易知"는 본래 {周易·繫辭上}에 나오는 말이다. {주역·계사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음양의 주기적인 순환변화를 道라고 부른다. 이것을(天道의 작용) 계속 이어가는 것을 善이라 부른다. 이것을(천도의 작용) 성취해 가는 것을 性이라 부른다. 만물의 본성을 잘 실현해주고 만물의 존재를 (해치지 않고) 잘 보존한다. 이것은 道義가 나오는 문이다.
하늘은 평이함으로 알고, 땅은 간략함으로 능하다. 평이하므로 쉽게 알고, 간략함으로 쉽게 따른다. 쉽게 알 수 있으므로 친함이 나타나고, 쉽게 따르므로 효과가 있다.
{역전}에서는 "成性"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문구가 눈에 뛴다. 하나는 "成之者性也"이고, 다른 하나는 "成性存存"중의 "成性"이다. 먼저 전자의 경우를 보면 학자마다의 해석이 눈에 띄게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成之者"라는 말 가운데 "之"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상이한 해석으로 갈라진다. "之"를 천도자연의 규칙적 변화로 본다면 "性"이란 天道가 人道로 실현되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이런 해석은 곧 {中庸}의 "天命之謂性"과 그 맥락이 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할 것이다. "成之者"란 부단히 천도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인간적인 수양이 곧 "性" 즉 인간의 본래적 본성이라 볼 수도 있다. 天道와 人道 사이의 매개 고리를 "性"이라는 개념으로 연결시켜 놓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주역·계사} "成性"의 의미는 매우 깊다.
{주역·계사전}에서 "成之者性也"를 말하기에 앞서 설정한 것은 "一陰一陽之謂道"이다. 이것은 陰과 陽이 반복 순환하는 가운데는 반드시 변하지 않는 영원한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을 "道"라고 단언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도"는 곧 "易道"이며, "天道"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일종의 자연법칙의 규칙성에 대한 묘사라 볼 수 있을 것이다. "善"은 인간이 자연법칙인 "天道"를 충실히 믿고, 그것에 의존하여 삶을 펼쳐나가는 것으로, "易道"에 대한 믿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繼之者善也"라는 말은 "天人相續之際"를 의미한다. 하늘은 내려주고, 인간은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人道는 天道를 계승하여 자연의 선을 지닌다. 그리고 "成之者性也"는 사람이 천도에 의존하여 어떤 사업을 성취하는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본성이라 생각한다. "成之"의 "之"는 "天道"를 가리킨다. 이곳에서 말하는 "道"는 서양에서 말하는 바의 第一推動者, 혹은 上帝(하나님) 또는 絶對精神이 아니라 "自然"의 "道"를 말한다. 그리고 후자의 "成性存存" 중의 "成性"은 {역전} 중에서는 易道가 사물의 자연본성을 이루어 줄 수 있음을 밝혀준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전] 중의 "成之者性也"와 "成性存存" 중의 "性"이 서로 다른 방향에서 "性"을 설명해주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전자의 경우는 人道의 측면에서 天道를 따르려는 모습이고, 후자의 경우는 天道의 측면에서 人道에로의 실현이다. 사실상 중국철학 상에서 天과 人의 관계 쌍 방향 적인 것이다. 천도가 인도에게 실현된 어떤 부분이 존재하고, 인간은 다시 이런 매개고리를 바탕으로 천도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런 쌍 방향적 교호작용 속에서 중국철학의 중심주제인 "천인합일"의 이상이 성립되어 갔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전}의 "성"개념도 고립되고 단절된 구조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천과 인을 서로 이어주는 징검다리이자 인간이 천도로 다가설 수 있는 사닥다리인 것이다.
곽상도 {역전}의 이런 "成性"의 이념을 차용하여 지식인들의 학문활동의 기본요건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 이것은 학문인이라면 마땅히 인격적 수양을 바탕으로 천도의 완성을 추구해야한다는 메시지가 숨어있는 것이다. 곽상에게 있어 천도의 완성은 다름 아닌 자연본성의 완전한 실현이며. 이러한 경지가 다름 아닌 곽상이 추구하는 "천인합일"의 경지일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易知"의 의미에 관하여 {역전}의 용례를 살펴보자. 우리가 일반적으로 보면 "이지"는 "쉽게 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 "쉽게 안다"는 말이 과연 {역전} 중의 어떤 의미맥락과 이어져 있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그 구체적인 의미를 짚어볼 수 있을 것이다.
乾으로 만물의 시원(大始)을 알고, 坤으로 만물의 養成을 일으킨다. 건은 平易함으로 알고, 곤은 簡略함으로 능하다. 平易하므로 (사람들이) 쉽게 파악할 수 있고, 간략하므로 (사람들이) 쉽게 따른다. 쉽게 파악할 수 있으므로 친함이 있고, 쉽게 따르므로 공효가 나타난다. 친함이 있으니 오래도록 변치 않을 수 있고, 공효가 나타나니 만물을 증대시킬 수 있다. (天道는) 오래도록 변함이 없을 수 있으므로 현인은 자신의 품덕으로 삼고, (地道는) 생산을 증대할 수 있으므로 현인은 이를 이용하여 공업을 성취한다. (천도의) 평이함과 (지도의) 간략함으로서 천하의 모든 이치를 얻을 수 있다. 천하의 이치를 모두 얻을 수 있으니 그 가운데서 (모든 일의 위치가) 정해진다.
"乾知大始"의 "知"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다른 해석이 존재한다. 하나는 "知"자를 "爲"자로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王念孫과 같은 학자는 "知는 爲와 같고, 爲는 또한 作이다"라고 말한다. 高亨의 경우도 이런 해석을 따르고 있다. 그는 "乾知大始"란 "하늘이 하는 바는 만물을 창시하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다른 하나의 해석은 "知"자를 "知覺" 또는 "知見"의 의미로 새기는 경우이다. 金景芳과 같은 학자가 이에 해당한다. 그는 여기의 "知"는 마땅히 "알다(知識)" 또는 "인식하다(認識)"의 의미로 풀이해야 옳다고 주장한다. 필자도 이 후자의 해석이 훨씬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乾"과 "坤"은 이미 "天"이나 "地"와 같은 자연대상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건"과 "곤"은 우리 인간의 인식과 실천 가운데 있는 일종의 반성대상물이고, 이것은 다시 의식의 표상으로서 이제 우리의 어떤 관념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김경방은 "大始"는 바로 乾卦 {彖傳}에서 말하는 "大哉乾元, 萬物資始"이므로, "乾知大始"는 다름 아닌 乾으로 만물이 생성되는 그 시작을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乾以易知"는 "易"의 방법으로 만물생성의 기원("大始")을 인식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식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坤作成物"은 이와 대비적으로 실천의 문제로서, 이것 또한 {단전}에서 말하는 "至哉坤元, 萬物資生"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이것은 마치 坤이 자연의 간략함으로 만물을 생육하듯이, 사람들도 문물을 창조하는 인문활동에 종사한다는 뜻이다. {역}에서 "易"와 "簡"을 말하는 것은 사실상 天道가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無爲而爲"한 활동자체를 가리킨다. 이런 맥락 속에서 晉대 韓康伯은 {계사전}을 注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하늘과 땅의 길(天地의 道)은 인위적으로 힘을 행사하지 않아도 (만물에게) 은혜를 잘 베풀어주며, 수고로이 공을 들이지 않더라도 만물을 잘 이루어준다. 그러므로 이것을 易簡이라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 서서 우리는 {역전}의 "易知"가 천도의 자연 무위한 공능에 대한 인식활동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동시에 "쉽게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두 가지 의미에서 곽상이 말한 "이지"를 보면, 곽상에게 있어서도 두 가지 방향으로 해석을 진행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하나는 "易知"가 "자연"의 무위한 공능에 대한 파악이라는 의미에서이고, 다른 하나는 곽상이 {장자}에 주석을 다는 방식과 관련하여, 평이한 해석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곽상 자신이 경전문본에 대한 해석을 진행할 때 비교적 평이한 이해방식을 취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쉽게 접근하도록 하면서 동시에 고도의 심층적 사유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려는 그의 해석정신의 편린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곽상은 중국 경전 해석학사에서도 그의 해석방법론은 일정한 의미를 지니고, 곽상 이후의 治莊者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4. 곽상철학 중의 "成性易知"의 구현
이제 {역전} 중의 "成性"과 "易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곽상이 자신의 장자철학에 그것을 어떻게 체현해내고 있는지 알아보자. 곽상은 {장자주} 속에서 "成性"이라는 말을 직접적으로 몆차례 인용하고 있다.
외부로부터 들어왔다는 것은 학습을 빌려 자연본성을 완성하는 것(成性)이다. 비록 학습을 통하여 자연본성을 완전히 실현할 수 있지만, 마땅히 안으로 그 바탕을 지니고 있어야한다. 만약 그 안에 도를 받아들일 수 있는 바탕인 중심이 없다면 聖道를 간직할 수 없다.
사물이 비록 타고난 본성이 있지만 모름지기 그것을 재빨리 익히고 난 후라야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다. …… 후천적 학습을 통하여 자연본성을 완전히 실현하면(成性)은 마침내 스스로 그러한 것 같이 느껴진다.
쌓고 익히는 데 힘을 기울이면 보답이 있다. 그것은 자연본성에 대한 보답하지, 작위적인 일에 대한 보답이 아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익히데 힘써야 할 것은 자연본성의 완전한 실현(成性)일 따름이다. 어찌 인위적으로 그것을 하겠는가!
쌓고 익히는 데 힘을 기울이면 보답이 있다. 그것은 자연본성에 대한 보답하지, 작위적인 일에 대한 보답이 아니다. 그러므로 배우고 익히데 힘써야 할 것은 자연본성의 완전한 실현(成性)일 따름이다. 어찌 인위적으로 그것을 하겠는가!
곽상은 인식의 내용과 인식이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을 모두 선천적 성분 안에서의 일이라 여긴다. 그리고 그는 인식활동 가운데 후천적 학습활동에 의존하여 촉발된 부분에 대해 , 그것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다소 부정적 입장을 취한다. 그래서 곽상은 후천적 학습활동의 작용에 대해 비교적 낮은 점수를 부여한다. 그는 후천적 학습을 단지 선천적 자연본성이 타고난 재능을 촉발시키기 위한 보조수단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할뿐이다.
우물을 파는 것은 샘물을 통하게 하기 위한 수단이고, 시를 읊조리는 것은 본성을 통하게 하기 위한 방편이다. 샘물이 없다면 우물을 팔 이유가 없듯이, 본래의 본성이 없다면 시를 읊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모두 샘물과 타고난 본성의 스스로 그러함을 잊고, 단지 우물을 파고 시를 읊는 말단적인 일에 힘을 쏟는 것을 알고, 그리하여 자랑스러워하며 그것을 지닐려하니 어찌 잘못된 것이 아니랴!
인간의 인식능력의 문제에 대하여, 곽상은 사람마다 타고난 선천적 성분의 범위 안에 서 그 능력이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여긴다. 그가 말하는 "所知之內"는 곧 "性分의 안(性分之內)"을 의미하고, "인식능력과 역량은 각각 한정되어 있다("知力各有所齊限")"라는 성분의 한도 이내를 뜻한다. 그리고 성분의 밖("分外")이란 곧 인식의 극한을 넘어선 영역으로, 일반적인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이성적 인식방법으로는 진입할 수 없는 불가지의 영역으로 간주한다. 그러므로 곽상의 "成性"은 개체자연 본성이 타고난 내재적 성분을 중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철저히 자신의 본성을 실현시켜나가는 것이다.
곽상이 말하는 "易知"라는 것도 "天道"의 "自然無爲"한 공능에 대한 인식활동을 가리킨다. 곽상은 그러한 "천도"가 개체사물의 자연본성에 이미 실현되어 있으므로, 천도의 무위를 파악하는 길은 곧 개체사물의 자연본성, 즉 사물이 선천적으로 고유하게 자신의 내부에 간직하고 있는 "자연의 성"이라는 범위 내에서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천도는 개체사물의 "성" 또는 "성분" 외부에 "리"의 형태로 객관적으로 존재할 뿐만이 아니라, 개체사물에게 있어서는 "성"으로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개체사물의 자기실현이란 사물자신이 고유하게 품부받아 지니고 있는 천도의 고유성인 "性"과 자신의 성분의 바깥에 위치하면서 객관적으로 운행되는 천지자연의 운행질서인 "理"와 하나로 합하여, 그 길을 밟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무릇 사물은 自然(性)을 지니고 있고, 理는 지극함이 있으므로, 그것을 따라 곧바로 나아가면 깊숙한 곳에서 저절로 부합하는데 언어로서 표현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개체의 내부질서의 무위한 고유성("性" 또는 "自然")과 정체로서의 우주자연의 흐름("命")과 이법("理")이 아무런 마찰 없이, 순조로이 조화를 이루는 세계가 만물이 "독화"하는 보편적 화해의 장인 것이다. 곽상은 바로 이런 세계의 건설을 이상으로 지향하면서, 자신이 마련한 이론적 장치의 근거를 철저히 개체사물 내부에서 마련하고자한 것이다. 따라서 곽상은 언제나 개체사물의 내적 고유근거인 "性"에서 모든 문제를 시작하여, 그러한 "性"의 완성에서 우주조형도를 완성하고자 한다. 따라서 그가 {장자}를 해석하는 모형도 이런 방식을 따라 진행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곽상은 {장자} 내7편의 중에서 순차적으로 이런 길을 걸어가면서 자신의 세계관을 정립시키고 있다. 이것을 간단히 말하면 곽상의 문제의식으로 잡고 있는 것은 개체사물 자신의 절대적 행복, 즉 "逍遙"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곽상이 말하는 소요란 곧 "적성"이며 "자득"을 의미한다.
개체사물이 자신이 고유하게 이미 지니고 있는 자신의 독특한 특성 내지 본질을, 타 개체와의 충돌이나 마찰이 없이 원만하게 완성하여 나가는 상태인 것이다. 그것은 어떤 절대적인 기준이 있을 수 없다. 개체마다의 자신의 고유한 기준에 입각한 상대적 절대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그러므로 곽상이 말하는 "足性" 혹은 "適性"은 개체의 자기완성, 곧 "成性"의 내용과 직결된다. 곽상은 그러므로 "自性"의 문제에서 시작하여, "成性"의 逍遙로 확대해 간다. "자성"은 개체사물이 소요할 수 잇는 근거 즉 발판이 된다. 모든 개체사물은 자신이 자신일 수 있는 고유한 근거를 자신의 내부에 이미 절대적으로 지니고 있으므로, 그것을 외부에서 구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로 잠입하여 그것의 성취를 도모해야 비로소 자신의 완성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개체의 완성은 아직 한 단계 낮은 차원에서의 완성이다. 이것을 곽상은 "有待" 즉 어떤 조건에 얽매여 있는 逍遙라고 부른다.
진정한 절대적 소요, 즉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우면서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운 상태는 "無待"의 逍遙라고 부른다. 곽상은 이러한 경지는 聖人의 "無心而順有"하는 경지로서 "玄冥" 또는 "玄同"의 경지에서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유대의 개체사물이 소요하는 경지와 무대의 성인이 소요하는 경지가 결과적으로는 동일한 경지이지만 차원 상으로 보면 성인의 무대의 소요가 한 단계 높은 위치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곽상은 어떻게 "성성"의 소요에로 나갈 것이냐 라는 방법과 논리의 문제에서는 "齊性"의 방법을 취하여, 개체사물마다의 다양한 내부본성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어떤 획일적인 기준이나 근거를 가지고, 그것들을 재단하거나 해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사물이 지닌 고유성을 그대로 그것들만의 고유한 절대성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의 현상사물은 모두 절대자인 것이다.
곽상은 이것을 어떤 다른 무엇으로 치환하거나 가감시킬 수 없는 사물마다의 독자적인 고유한 본질로서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곽상은 이런 齊性의 논리를 개체내부의 길과 개체외부의 길로 확대 발전시킨다. 전자는 治內의 문제이고 후자는 治外의 문제인 것이다. 치내의 문제는 개체사물의 내부 본성에 대한 "養性"의 문제이고, 치외의 문제는 개체와 개체간에 얽혀있는 다양한 욕구를 조화하는 문제이다. 이것은 개체의 자연본성이 향외적으로 실현되어지는 과정으로서, 개체적 자연본성과 군체적 사회본성과의 관계성을 주로 해결하려한다. 여기에서 곽상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바로 "無心"이다. 개체의 처세에 대한 교훈으로서, 개체사물은 자신의 독단적이고 이기적 자아에서 유래하는 주관적 자아를 따를 것이 아니라, 전체자연의 조화로운 숨결과 맥을 함께 하는 자연의 결, 즉 理를 따르는 본래적 자아를 가지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이러한 환경들의 다양한 변화에 자신을 내 맡길 것을 강조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無心"이고 "不自用"이다. 따라서 곽상은 {人間世注}에서 말한다.
사람과 무리를 이루고 사는 자는 사람과 떨어지어 살 수 없다. 그러나 사람 사이의 변고가 각 시대마다 옳다고 여기는 것이 다르므로, 오로지 무심으로 自用하지 않는 자만이 변화가 나아가는 바대로 따라갈 수 있으므로 그 누를 둘러매지 않는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곽상은 개체본성의 향내적 실현과 향외적 실현의 조화를 {덕충부}중에서 말한다. 그가 말하는 {덕충부}의 핵심은 向內와 向外의 玄合이다. 개체적 자연본성이 내부에서 충실히 충족조건을 이루고 있다면, 그것은 외부적 객관조건들과 보편적 조화의 상태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곽상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덕이 안으로 충만하면 사물이 밖에서 응한다. 안과 밖이 오묘히 합함에 그 진실함이 마치 符命과 같아서 자신의 형체를 잊는다.
개체존재의 내부적 조건과 외부적 객관조건의 오묘한 조화를 곽상은 "玄同" 혹은 "玄合" 또는 "玄冥"으로서 표현한다. 개체존재의 내부적 조건이란 "性"의 "自得""自足"이고, 이것은 개체사물이 유대의 소요를 경험하기 위한 기반이다. 그리고 개체존재의 외부적 조건은 개체와 객관현실의 문제 사이에서 출현하는 문제로서, 개체의 주체적 조건이 충족되면 외부적 객관조건은 저절로 그것에 부응한다는 설명이다.
개체존재의 내부적 조건과 외부적 객관조건의 오묘한 조화를 곽상은 "玄同" 혹은 "玄合" 또는 "玄冥"으로서 표현한다. 개체존재의 내부적 조건이란 "性"의 "自得""自足"이고, 이것은 개체사물이 유대의 소요를 경험하기 위한 기반이다. 그리고 개체존재의 외부적 조건은 개체와 객관현실의 문제 사이에서 출현하는 문제로서, 개체의 주체적 조건이 충족되면 외부적 객관조건은 저절로 그것에 부응한다는 설명이다.
또한 이것은 역설적으로 개체의 주관적 조건을 모두 버리고 전체자연의 흐름에 내 맡김으로서 이룩되는 경지인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주관적 조건을 버린다는 것은 "無心"의 정신경지로서 자신의 신체적 구속이나 억압에서 자유로움을 경험하는 상태인 것이다. 이처럼 개체본성의 내외적 지향이 서로 충돌이 없이 원만한 조화를 이룸으로써, 그에게는 두 가지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하나는 "大宗師"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應帝王"의 길이다. 전자는 바로 "內聖"의 길이고, 후자의 경우는 "外王"의 길인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의 길은 동일한 조건을 기반으로 삼고 있지만, 그들이 만나는 외부환경의 차이, 즉 "勢" 혹은 "命"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그들의 정신세계는 모두 "無心以順有"({大宗師注})하는 동일한 경계에 놓여있다. 따라서 곽상철학 중에서는 "內聖卽外王"이 성립되는 것이다.
성인 비록 묘당의 위에서 정사를 펴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산림가운데 놓여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치의 지극함에 도달하면 안과 밖은 서로 冥合한다. (따라서) 밖으로 노닒의 극치에 있으면서 안으로 명합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역으로) 안으로 명합하면서 밖으로 자유로이 노닐지 못하는 경우도 없다. 그러므로 성인은 언제나 밖으로 노닐면서 동시에 안으로 명합하고, 무심하면서 동시에 일체의 존재를 따른다. 그러므로 성인은 비록 하루종일 자신의 모습을 밖으로 내보여 활동하고 있어도 그의 정신은 변함이 없고, 세상의 온갖 일(국사)을 처리하지만 (그의 정신은) 담연자약하다.
내성과 외왕이 "즉"이라는 말로 연결될 수 있는 통로는 "무심"과 "자득"에서 찾을 수 있다. 성인의 정신경계는 그가 외부적으로 군왕의 위치에 놓여있든, 자신의 수양에 몰두하는 개인의 치신에 연중하든 거의 별반 차이가 없다. 그들이 언제나 경험하는 것은 "自足其性"한 "無心"의 소요이기 때문이다. 곽상은 이런 관점아래서 {대종사}편의 편목 주에서 아래와 같이 말한다:
비록 천지가 아무리 광대하고, 만물이 아무리 풍부하다고 하더라도, 그것들 (가운데) 宗師로 삼을 만한 것은 無心이다.
그러므로 성인이 이상적 경계로 삼는 것은 이런 무심의 정신상태인 것이다. 무심을 체득한 이상인격이 바로 곽상이 말하는 至人이요 眞人이며 聖人에 해당한다. 그들의 인격적 특성은 "玄同彼我", "與物冥", "與化俱移" 등의 "內外玄合"의 無心을 공통적 내용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곽상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릇 진인은 천과 인을 다르게 보지 않으며, 만물의 취향을 고르게 인정한다. 만물마다의 취향이 서로 틀린 것이 아니며, 천과 인이 서로 다투고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텅비움에 동일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마음을 깊은 곳에 그윽이 합치함에 있지 않은 곳이 없다.
따라서 곽상은 이런 경계에 도달한 성인을 다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이것은 현묘한 경지에서 만물의 본성과 하나가 되고, 변화와 더불어 몸을 하나로 합한다. 그러므로 그를 천하의 종사로 삼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곽상이 생각하기에 자연의 흐름에 맡겨 하는 것(天之所爲)과 인위적으로 하는 일(人之所爲)는 모두 "自然"의 "理"에 의한 안배로서 필연적인 "理의 自爾"이다. 그러므로 무심의 정신경계로 안팎을 조응하고 몸을 사물의 자연본성에 내맡긴다면 그것이 "與衆玄同"인 것이다. 곽상은 말한다:
곽상이 생각하기에 자연의 흐름에 맡겨 하는 것(天之所爲)과 인위적으로 하는 일(人之所爲)는 모두 "自然"의 "理"에 의한 안배로서 필연적인 "理의 自爾"이다. 그러므로 무심의 정신경계로 안팎을 조응하고 몸을 사물의 자연본성에 내맡긴다면 그것이 "與衆玄同"인 것이다. 곽상은 말한다:
자연과 인간이 작위 하는 것이 모두 스스로 그러한 자연에 속한다는 것을 안다면 안으로는 자신의 몸을 내버려두고 밖으로 사물의 본성과 명합한다. (이처럼) 다양한 사물들과 玄同하여 그것에 내맡기면 이르지 못할 것이 없다.
제왕의 경우도 이와 마찬가지로 "무심"과 관련되어 있다.
무릇 무심히 자화에 맡기는 자는 (자연히 이치에 응하여) 제왕이 된다.
무릇 지인은 그 움직임이 하늘과 같고, 고요함이 땅과 같다. 그가 걸어가는 것은 물이 흘러가는 것 같고, 그가 머무르는 것은 고요한 연못과 같다. 고요한 연못과 흘러가는 물, 그리고 하늘과 같은 움직임과 땅과 같은 머무름은 모두 인위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 것이라는 데서 서로 일치한다. 지금 계함이 그가 시체처럼 고요히 앉아서 좌망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곧 목숨이 끊어질 것이라 하였고, 그가 정신을 움직여 자연의 운행을 따르자 그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라고 말하였다. 진실로 (외부환경에) 응함에 자신의 주관적인 마음으로 하지 않고 리로써 스스로 오묘히 부합하고, 변화와 더불어 오르내리면서 세상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한 후에 외부환경의 주인이 되어 시간의 추이를 따라 영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경지는) 관상쟁이가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응제왕}에서 말하고자 하는 중심골자이다.
위의 단락으로 보면 제왕이란 외부환경의 주인이 되는 것("物主")이다. 외부환경과 마찰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영원히 시간의 변화와 더불어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할 수 잇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不爲而自爾"하는데 있다. 이것을 다시 풀어 곽상은 "應不以心而理自玄符, 與變化升降而以世爲量"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즉 "不爲"는 자신의 주관적 마음으로 외부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理"의 무위하고 무심함으로써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런 무심의 마음에서는 상황이 아무리 복잡하게 변화를 거듭하는 가운데서도 능히 세상을 형량할 수 있는 힘이 있으므로, 외부세계의 노역(物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환경을 다스릴 수 있는 물주("物主")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곽상이 말하는 "무심"은 외부대상세계를 거짓없이 인식하고, 그것에 대처할 수 있는 관건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성인이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할 자격요건이기도 한 것이다. 사물개체의 내부적 완성에 맞추어 "무심"을 살펴보면 그것은 "遺知任天"이 된다. 즉 "무심"하기 위해서는 "遺知"가 당위적으로 요청된다. 그래서 곽상은 "雖知盛, 未若遺知任天之無患也"({대종사주}, 35쪽)라고 말한다. 아무리 인간의 이성적 활동이 최고도로 발휘되더라도 "유지임천"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것으로 보면 곽상은 이성적 지식 혹은 후천적 경험에 의해 습득된 지식의 한계를 지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무리 쌓아도 외부현상을 이해하는 보조적 작용을 할 수 있을 뿐, 개체사물의 내밀한 본성을 진정으로 가늠할 수 는 없다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 서서 곽상은 이런 분별 적인 이성의 작용을 부정하고, "不知"를 강조한다. 다시 말해 "무심"의 실질적 내용으로 "不知"를 가장 중시한다.
천이란 자연을 말함이다. 무릇 인위적으로 작위 하는 자는 일을 이룰 수 없으므로, 일을 한다는 것은 스스로 할 따름이다. 인위적으로 알려고 하는 자는 알 수 없다. 안다는 것은 스스로 알 따름이다. 스스로 안다는 것은 인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므로 안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것에서 나온다. 스스로 할 따름이라는 것은 인위적으로 작위 하는 것이 아니다. 인위적으로 작위 하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작위하지 않는 것에서 나온다. 작위 하는 것은 작위하지 않는 것에서 나오므로 작위하지 않는 것이 중심이 되고, 안다는 것은 알지 못 하는 것에서 나오므로, 알지 못하는 것이 종주가 된다. 따라서 진인은 인위적 지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지를 얻고, 인위적으로 일을 하지 않음으로서 일을 성취하여, 스스로 그러함으로서 생겨나고 앉아서 잊음으로서 얻어진다. 그러므로 "안다"(知) 또는 "한다"(爲)라는 명칭이 끊어지고 떠난다.
결국 곽상이 말하는 "不知"는 이성적 분별적 인식에 대한 부정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선천적 자연본성에 의존하는 지 즉 "自知"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을 안다는 것은 결국 자기자신에 대한 앎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자신의 앎이란 자신의 선천적 본성에 근거를 둔 인식능력인 것이다. 이것을 곽상은 "性知"라고 부르기도 하고 "天然의 知"라고 부르기도 한다. 다시 말해 "自然의 知"가 곧 "自知"이며 "不知"인 것이다. 이러한 지의 고차원적인 능력을 곽상은 또한 "神明"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神明"은 "絶聖棄知" 후에 우주의 진실재의 모습을 통관할 수 있는 신묘한 직관능력이라 할 수 있다.
5. 글의 해탈
곽상철학은 "性"論을 그 기초에 깔고 있다. 그러므로 "性"에서 출발하여 "性"에서 끝이 난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연구자들은 "自性"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成性"에 이르는 길을 걷고있다고 할 수 있다. 곽상은 조물주의 실체적 성격을 부정한다.("造物無物") 따라서 곽상철학의 체계를 연구하려는 이들은 개체 존재사물의 "自性"에 대한 분석으로부터 출발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마침내 "成性"으로서의 "獨化"에 이르러 "自性"의 독자적 완결성을 성취하기까지("有物自造") 철학적 여정은 계속된다. 그러므로 "自性"이 곽상철학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成性"은 그의 철학의 사살상의 종점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과 관련하여 필자가 간략히 언급하고 싶은 것은 곽상철학의 현학체계를 집약하는 "神器獨化"라는 말이다. 곽상철학의 전 체계 속에서 보면 곽상의 "性"이라는 개념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은 다름 아닌 "神器"라는 개념이다. 그리고 그러한 "神器"로서의 "性"의 자기 통일성이 "獨化"라는 구도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神器獨化"라는 의미는 自在의 物로서의 개별적 존재사물(自物)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자연본성을 세계에 실현하는 것이다. 이처럼 곽상은 자신이 사용하는 용어마다 그는 독특한 혜안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혜안을 혼자 독점하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과 더불어 공유하려는 의식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사용하는 철학적 술어들은 철저히 그의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곽상이 이런 철학적 독특성을 보이게 된 이유는 바로 본 논문에서 화두로 삼은 "성성이지"에 있다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곽상은 이단의 서적(?)을 연구하면서도 그가 중점적으로 보려한 것은 "개체본성의 철저한 자기실현과 그 근거에 대한 탐색(成性易知)"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곽상이 말하는 "獨化"라는 개념도 {역전} 중의 "神而化之"의 의미와 근접해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독화"라는 개념도 {老子}의 "自化"와 {莊子]의 "一化"와 "物化" 그리고 {易傳}의 "神化(神而化之의 간칭)"라는 개념의 융합으로서, 곽상이 새롭게 정의해낸 산물이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후일의 과제로 미룬다.)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곽상 {장자주} 속에는 {역전}의 "성성이지"의 사상이 관통하고 있다. 곽상은 자신의 장자철학({장자주}) 곳곳에서 {역전}의 문구를 인용하면서 적절히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그는 유가의 대표서로서 {주역}의 성격과 도가의 대표 격으로서의 {노자}와 {장자} 사이에 존재하는 사상적 차이를 완전히 잊고, 그것들을 융회관통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곽상철학의 "以儒道爲一"적 측면을 여기서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사상적으로 유가적 "명교"와 도가적 "자연"을 하나로 합하여 융회하고 있는 모습은 바로 곽상의 삼현서에 대한 기본태도로부터 우리는 감지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