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鄭夢周의 인물됨과 그 전승

醉月 2013. 3. 11. 01:00
鄭夢周의 인물됨과 그 전승 *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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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1. 시작하는 말
2. 실천적 문화 운동가
3. 개혁적 정치가, 걸출한 외교관
4. 풍류 호방하며 다감한 시인
5. 전승된 정몽주 인물됨의 추이
6.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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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작하는 말
정몽주(鄭夢周 : 1337-1392)와 관련하여 우리가 쉽게 떠올리는 것은 '不事二君'한 만고의 '忠臣'이란 이미지다.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기 위해서 죽음이 예상되는데도 그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던 불굴의 '忠節人'으로 기억한다. 그것은 그가 고려조 사람으로 조선의 탄생을 적극 저지하려 했던 인물이지만 충신의 전형적 인물로서 조선시대 내내 기려졌고 그런 점만을 강조했던 사회문화적 환경 탓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범인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충신이 되었다. 물론 그가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초개 같이 버렸던 고려의 충신이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지나치게 충신으로만 한정해버림으로써 그가 본래 지녔던 다양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사실 우리 역사 속의 적지 않은 인물들이 본래 모습 이상으로 존엄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존엄함 때문에 그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갈 수 없고 그래서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 우리는 정몽주를 둘러싸고 있는 충신이란 높은 담을 해체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충신의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며 그가 가졌던 다양한 모습을 훨씬 풍성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현전하는 자료를 통해서 정몽주의 생애를 추적해 보면, 그가 충신이란 이미지만을 가지게 하는 존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실로 그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으니 고려말 성리학의 祖宗이요, 문화운동가며, 개혁의 정치가이고, 웅대한 기상을 가졌을 뿐 아니라 화려한 언술을 지닌 걸출한 외교관, 풍류 호방한 시인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그의 다양한 모습을 뒷받침하고 있던 기본적인 세계관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대부적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 유교사상이었다. 이 글은 바로 이같은 정몽주의 모습을 추적해 본 글이다. 한편 이글은 정몽주의 인물됨이 어떻게 전승되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2. 실천적 문화 운동가
정몽주의 여러 모습 중에 문화운동가로서의 모습이 두드러진다. 그가 벌인 문화운동이란 그가 살던 고려땅에 건전한 유교문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터전을 닦는 것이었다. 그가 이러한 문화운동에 가장 중점을 두었고 그의 진가를 발휘했던 것은 신학문 운동이었다. 그 신학문이란 다름 아닌 성리학을 이른다.

 

정몽주가 살았던 고려는 불교가 풍미했던 시대였다. 그러나 정몽주 시대에 이르러 불교는 그 본래의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고등종교로서의 모습을 잃고 말폐만을 끼치고 있었다. 사원의 경제적 비대, 사찰의 남설, 규모가 큰 불교 행사, 승려의 세속화 등으로 외적의 침략과 난리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건지기는 커녕 수탈까지 자행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고려대는 광종이래 과거를 통해서 인재를 등용하였다. 과거 제도는 처음 귀족중심의 지배층 사회에 새로운 인재를 발굴해서 활력을 불어넣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것은 글 잘 짓는 사람을 뽑는 제도로 바귀고 말았다. 그것도 모방을 일삼는 문장가를 양산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러한 불교의 세속화와 사장중심의 문화분위기를 바꾸어 새로운 시대로의 도약을 예비하고자 했던 왕이 공민왕이었다. 공민왕의 개혁정치는 성리학을 공부한 신흥사대부를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일부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오랜 난리 끝에 없어진 성균관을 복구하여 성리학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이러한 신학운동의 분위기가 어떠했는가는 정몽주의 절친한 벗이었던 이숭인의 글을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지난 날 오천 정몽주 . 인산 최언부 . 밀양 박자허 등이 성균관 교관이 되었는데 나 또한 외람되게 그 대열에 끼인 것이 7.8년이 되었었네. 이 때 학도들이 날로 이르러 기숙사에 거의 수용할 수 없었다네. 교관들이 새벽에 일어나 성균관문으로 들어가 강당에 올라서면 학도들은 뜰의 동서에 차례로 서서 손을 마주잡고 몸을 굽혀 예를 다한 뒤 각기 공부하고 있는 경전을 잡고서 좌우 전후로 담장처럼 나아갔네. 그리고 교관들이 가운데에 있고 학도들이 수업을 마친 뒤, 또 서로 어려운 것을 펴서 절충한 뒤에 끝났네. 글을 읽는 소리가 해가 다하도록 끝이 나지 않았었지. 나와 몇 사람들은 얼굴에 희색이 가득하여 말하기를, "아마 우리 유학이 흥할 것이다."라고 했었네.......

 

위에서 학생들이 날마다 와서 기숙사에 다 수용할 수 없었다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성균관이 명실상부한 흥학의 중심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학생들이 끊임없이 몰려들고 글 읽는 소리가 날이 다하도록 끊어지지 않을 정도의 면학분위기 조성은 정몽주를 비롯한 젊은 학관들의 적극적인 강론활동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수업이 끝난 다음에도 분명치 않은 것은 절충해서 해결한 뒤에야 그만두었다는 것을 보면 당시 학문 활동의 열의와 적극성이 짐작된다. 이처럼 정몽주 등의 적극적인 강론활동은 당대의 학문풍토를 사장학(辭章學)에서 경학(經學) 중심의 학문으로 일신하였다. 이 학문 운동의 주체로서의 정몽주의 활약과 명성은 다음 정도전의 글에 잘 묘사 되어 있다.

 

내가 열 여섯 열 일곱살 때 성률을 익혀서 대우어(對偶語)를 짓는 공부를 하였다. 하루는 민자복이 내게 말하기를, "내가 정선생(정몽주)을 뵈었는데 선생께서 말씀하시길, '사장(詞章)은 말단의 기예일 따름이네. 이른바 몸과 마음을 닦는 학문이 있으니 그에 대한 설이 {대학}과 {중용} 두 책에 다 갖추어져 있다네.'라고 하셨네. 지금 이순경이 두 책을 끼고서 삼각산 절에 가서 공부하고 있는데 자네는 그런 사실을 아는가?" 하였다. 내가 그 소리를 듣고 두 책을 구해 읽는데 비록 얻는 것은 없었지만 스스로 꽤 즐거웠다. 나라에서 과거를 보였을 때 선생은 삼각산에서 내려와 연거푸 세 번이나 우두머리를 차지해 명성이 자자했다. 나는 자주 가서 뵙고 평소처럼 이야기를 하면 드디어 가르침을 내려 주셨는데 평소 듣지 못했던 것을 들었다. 뒤에 부친상을 당해 영주에서 2년 동안 있다가, 이어 모친상을 당해 더 있게 되어 모두 5년이었다.

 

선생이 {맹자} 한 부를 보내주시어 삭망(朔望)의 틈새에 매일 한 쪽을 읽거나 혹 반 쪽을 읽었는데 알 수 있는 곳도 있고 의심이 나는 곳도 있어서 선생께 나아가 바로잡고자 하여 송경으로 돌아왔다. 목은 이색선생께서 재상으로서 성균관을 이끌며 성명지설(性命之說:성리학)을 창도하고 부화한 인습을 물리치고자 선생과 이자안, 박자허, 박성지, 김경지 등을 뽑아서 학관으로 채우고 경학을 강론하였다. 선생은 {대학}의 제강(提綱)과 {중용}의 회극(會極)에서 도를 밝히고 도를 전하는 뜻을 얻고, {논어}와 {맹자}의 정미함에서 조심하고 간직하며 함양하는 요체와 체험하여 확충하는 방법을 얻고, {역경}에 이르러서 선천(先天)과 후천(後天)이 서로 본체와 작용이 됨을 알고, {서경}에서 정일집중(精一執中)이 제왕이 심법을 전하던 것임을 알고, {시경}에선 민이물칙(民 物則)의 가르침에 근본을 두었고, {춘추}에서는 그 도의(道誼)와 공리(功利)가 갈라지는 것을 분별하였으니, 우리 오백년 동안 이렇게 이치를 지극하게 밝힌 사람이 몇 사람이나 있었겠는가? 여러 유생들이 제 각기 공부에 대한 견해를 고집하고 있어 사람마다 설이 달랐는데 질문에 따라 강론하여 분석하는 것이 털끝만큼의 차이가 없었다. 목은 선생께서 기뻐하여 칭찬하기를, "달가(정몽주의 자- 필자 주)는 아주 명쾌하고 탁월해서 횡설수설해도 적중하여 타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 ......


여기서 우리는 정몽주의 학문 노선이 경학이었고, 그가 당시 성균관 강학 활동의 주체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이색이 좌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지만 이론이 분분할 때 그가 명쾌한 분석과 강론으로 교통정리를 해줌으로써 실제적인 좌장 역할을 해냈던 것이다. 그의 성리학자로서의 명성은, 위 예문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다음과 같은 일화가 그것을 말해준다. 당시 그의 강설은 특출하여 동료들의 의표를 넘어서는 것이 많았다고 한다. 이 때만 해도 성리학서로는 사서 중엔 {朱子集註}만이 전해져 있어 모두들 주자의 해석에 기대고 있는 형편이었으므로 그의 새로운 견해가 가끔 동학들에게 의문을 산 것이다. 후에 운봉호씨(雲峯胡氏)의 주석서가 들어와 비교해 보니 정몽주의 것과 똑 들어맞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이색이 칭찬한 것은 바로 이러한 그의 명석함과 독창성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정몽주의 학문운동과 교화의 장은 성균관 내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오랫동안 여러 번 경연관을 지내면서 임금들을 가르쳤다. 그가 주로 진강한 내용은 {서경}의 <이훈(伊訓)>과 <열명(說命)>편이었다고 한다. 이것은 임금이 유교의 경세제민적(經世濟民的) 덕목들을 갖추어서 성리학적 이상사회를 실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신하가 임금을 마주하고서 임금에게 치국의 도리를 가르치는 경연의 장이야말로 그의 학문운동의 최고 최상의 자리였을 것이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임금이란 존재가 이념과 운동을 실제화할 수 있는 가장 중심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한편 정몽주는 성리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몰두한 것은 아니다. 그러한 학문이 계속 이어지고 생활화될 수 있도록 그 제도적 뒤받침과 실천의 행동을 보였다. 그가 서울에 5부 학당을 개설하고 지방에 향교를 설치하도록 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향약을 실시하여 성리학적 이념이 향촌 사회까지 배어들게 하려고 애를 썼다. 뿐만 아니라 불교의식에 습합되어 있던 상제를 {주자가례}로 대신토록 하였고, 그가 부모상을 당했을 때 유교식으로 여묘살이를 하여 스스로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런 것들은 훗날 조선사회가 유교사회로 나아가는데 뚜렷한 선례가 되었다.

 

이상에서 정몽주가 진행한 문화운동이 성리학운동이고 그것을 일반화하고자 하는 운동이었으며, 그가 운동의 중심부에 서 있었던 매우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운동가였음을 보았다. 정몽주가 구현하고자 했던 성리학적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는 고려대에는 일반화되지 못하였다. 그것은 그의 한몸에 지탱되었던 고려가 그가 죽음으로써 끝이 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 입장 차이로 그와 길을 달리했던 그의 동료들에 의해 건국된 조선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그 지배 이념으로 하였다. 그리고 그의 행적과 사상은 吉再-金宗直-趙光祖로 전해져 조선 사회가 사림 중심의 사대부 지배 사회로 전환되는데 결정적적인 역할을 했다.

3. 개혁적 정치가, 걸출한 외교관
정몽주가 살던 시대는 불교가 그 이념으로서 작용하고 있던 때였다. 불교의 승려가 왕사나 국사가 되어 자문에 응하고 그 지도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몽주가 과거에 합격하여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공민왕 때에도 승려 출신의 신돈이 정권을 장악하여 공민왕의 개혁정치를 도왔다.

 

그러나 정몽주는 불교가 아닌 성리학을 이념으로 삼아 자신의 개인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을 운영해 간 성리학도였다. 공양왕이 승 찬영(粲英)을 왕사로 맞이하려 할 때 그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장점을 설명하고 불교를 배척하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거기서 그는 성리학을 신봉하는 유자(儒者)의 도는 모두 일상사에 해당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예를 들어 음식이나 남년관계는 사람이 누구나 함께하는 것이며 거기에 지극한 이치가 있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불교는 친척과 이별하고 남녀 관계를 끊고 홀로 암혈에 앉아 초의목식(草衣木食)하며 공을 관조하고 적멸하는 것을 숭상하니 이것이 어찌 일상적인 도라고 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허공에 매달려 기묘한 뜻을 담론하여 일체를 환상과 망녕속에 돌려 버리어 결국은 임금과 부모까지도 머물을 곳이 없게 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일상들을 우리의 삶으로 인정하지 않고 모두 거짓된 것이요 망녕된 것이라고 치부하는 불설을 그는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가까운 친척들과 어울려 사는 일을 더 중요하게 본 것이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도가 아니겠느냐하는 것이다. 이렇게 불교를 배척하면서 세세한 일상의 도를 중시했던 그로서는 일반 백성들의 삶에 남다른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일반백성들에게서 먹는 문제와 남녀관계는 그들의 삶의 전부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일반 백성들이 안도하고 삶을 도모할 수 있는 세상을 구현하기 위해 성리학적 세계관을 그 이념으로 선택한 듯하다. 따라서 그의 개혁정책이 백성들의 삶을 도모하는 정책이 중심을 이루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정몽주가 관심을 가진 개혁 가운데 먼저 전제(田制)의 개혁을 들 수 있다. 고려말에 이르러 권문세가들이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아 대토지를 사유하는 일이 극에 달하였다. 특히 우왕대에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인임 일파는 산천을 경계로 할 만큼 커다란 토지를 점유하고 있었다. 몇몇 귀족들에 의한 대토지 소유는 상대적으로 국가의 수입을 줄이는 것이었고 백성은 백성대로 부담이 이중으로 늘어 삶을 도모하기가 매우 힘들었다. 그러므로 권문세가의 사유토지를 개혁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에 정몽주는 임금에게 사전을 혁파할 것을 청하여 실시하도록 하니, 백성들이 그로 인해 살길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정몽주는 또 지방제도를 개선하여 수령들의 백성 침탈이 심한 것을 막기 위해 청렴하면 명망이 있는 사람을 뽑아 수령으로 내려 보내도록 하였으며 감사를 파견하여 부정과 비리를 막도록 하였다. 뿐만아니라 중앙에 경력도사(經歷都事)를 두어 서무를 관장토록 해 금전과 곡식의 출납을 기록하게 하여 국고가 새거나 낭비되는 일이 없도록 하였다. 이것은 당시 도평의사사가 국정을 전담하였지만 금곡의 출납은 육방 소속의 하급관리들이 맡아 권한을 남발하거나 실제의 수치를 속이는 일이 많았는데, 경력도사 같은 중간단계의 관제를 둠으로로써 그 남발을 줄일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밖에 의창(義倉)을 설립해서 흉년이나 재해가 발생했을 때 백성들을 구제하도록 했으며, 수참(水站)을 설립하여 조운을 편리하게 하여 국고 수입의 증대를 꾀하였다. 그리고 조정의 해이한 기강을 바로잡아 국가의 체모를 세우고자 명과 원의 법제도를 본받은 신율을 편찬하여 국가 경영의 줄기가 서도록 했다.

 

위와 같은 정몽주의 기존 제도의 혁파와 새로운 제도의 설립은, 앞서 살핀대로 경국제민의 유교적 이상국가를 세우기 위한 것으로 그 바탕은 민본주의가 아닌가 한다. 따라서 그는 민본적 개혁주의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정몽주의 업적 중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걸출한 외교관으로서의 활약이다. 그는 명나라에 세 번, 일본에 한 번,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외국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이때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사신 임무를 수행하는 실로 초인적인 활약을 보였다. 정몽주의 외교적 성과를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말의 국내외 정세에 대해 개략해 볼 필요가 있다.

 

14세기 중엽 고려말 이르면 중국에서는 홍건적이 일어나 대륙을 휩쓸고 고려까지 침범하여 개경을 함락하기도 하였다. 뒤이어 일어난 명은 원나라를 북으로 쫒아내고 그 세력권을 요동과 고려로 뻗치면서 고려에게 사대와 아울러 무리한 양의 공물을 요구하였다. 한편 왜구들은 중국의 동남해안과 우리나라 남서해안에 출몰하며 노략질을 일삼았다. 이 때는 고려가 원의 부마국으로 원의 간섭을 받은지 100년 가까이에 이르는 시기였다. 당시 공민왕은 원의 간섭을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고자 밖으로 배원정책과 안으로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된 신흥사대부들을 등용해서 개혁정책을 강력하게 실시한다. 마침 원이 쇠약기를 맞은 터라 이러한 공민왕의 정책은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이인임 일파에 의해 공민왕이 시해되고 구귀족들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공민왕의 개혁정책은 중단되었고 대외정책도 친원정책으로 바꾸었다. 정몽주 신흥사대부층의 선봉장이 되어 쇠약한 원보다는 신흥하는 명에 사대를 하는 것이 고려에게 유리하다고 상소하였다. 그러나 이인임 일파는 이러한 사대부들에게 죄를 씌워 죽이거나 멀리 유배를 보내버렸는데 정몽주도 언양에 유배되었다. 한편 명은 자기내 사신이 고려인 김의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보아 이인임일파에게 장악된 고려정권이 자기들에게 우호적이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원정을 운운하며 전보다 훨씬 강력한 압력을 가했다. 정몽주의 외교 활동은 이와 같이 복잡 다단한 국내외 정세가 얽혀 있을 때 행해졌는데 어느 시기보다도 외교적 능력이 요구되는 때였다.

 

정몽주는 공민왕 말년에 서장관으로 명에 처음 다녀왔었다. 그 때 그의 일행은 태풍을 만나 정사인 홍사범이 익사하였고 그는 말다래를 배어 먹으며 13일을 견딘 끝에 살아 돌아왔다. 이어 우왕대에 명에 여러 차례 사행을 시도하여 두 번 다녀 올 수 있었다. 당시는 고려와 명과의 관계가 매우 험악했던 때였다. 명이 고려의 사대를 의심하며 장차 고려를 정벌하겠다며 세공을 증액시켜 말 5천필, 금 5백근, 은 5만냥, 가는 베 은 5만냥에 해당하는 양에다 5년 동안 밀린 세공을 바치라고 위협하며 먼저 사신으로 갔던 홍상재와 김보생 등을 장류(杖流) 시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외교관계를 단절한 형편이었다. 이 때 정몽주 서슴치 않고 사행에 임하여 뛰어난 언술로 명태조를 설득시켜 홍상재 등을 방환시키고 명과의 관계를 회복한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가서 그동안 밀린 세공과 증액된 세공을 크게 감액받고 돌아온다.

 

한편 일본에 사신을 다녀올 때도 앞서 명에 다녀올 때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 때는 먼저 간 사신 나흥유가 패가대(覇家臺)에 억류되었다가 겨우 목숨을 보전하고 돌아온 뒤라 누구도 가지 않으려는 상황이었다. 그는 유배에서 풀려나자 곧바로 일본에 가서 뛰어난 논리로 고금의 교린외교의 이익을 설명하여 패가대의 주장(主將)을 감복시켰다. 그리하여 삼도의 왜인들로 하여금 고려를 침범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포로로 끌려간 수백명을 쇄환케 했다. 이 후에도 그는 일본과 관계가 악화될 때 마다 자신의 글을 가지고 가도록 해서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가 일본에 가서 성취한 외교적 업적으로 앞서와 같은 실질적인 소득도 있지만 한편으로 고려의 고급 사장(詞章) 문화를 전달하는 문화대사로서의 역할도 휼륭히 수행해 낸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일본에 체류하는 동안 시인으로서 명성을 떨쳤다. 매일 당시 일본의 지식인을 대표하던 승려들이 찾아와 자진하여 그를 가마에 태우고 명승지를 여행하며 그로부터 시를 받아냈던 것이다. 이러한 명성은 대단해 정몽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는 승려들이 제를 올리며 명복을 빌었다고 하며, '매화 피는 창앞에 봄이 이른데, 판잣집엔 빗소리만 요란하구나〔梅窓春色早 板屋雨聲多〕'라고 한 시구는 절창(絶唱)으로 오랜 뒤까지 일본시단에 전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일본으로 사신을 보낼 때 문장가를 대동하게 했던 것은 이런 정몽주의 경력 때문이었다. 이상에서 정몽주의 외교관으로서의 활동은 당면한 문제만을 푸는 것에 있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그는 명에 사신으로 가서는 명의 지나친 요구를 슬기롭게 극복하여 실질적인 혜택을 얻어냈으며, 한편 발달된 명문화를 직접 접하여 배우고 그것을 고려에 이식하기도 하였다. 그가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했던 것도 그런 예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평자에 따라서는 이러한 그의 성향을 두고 그를 모화의 선구자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보다는 선진 문화를 적극적으로 흡수해서 모국의 문화적 역량을 키우고자 했던 적극적인 문화운동가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4. 풍류 호방하며 다감한 시인
정몽주를 떠올릴 때, 절의의 충신 또는 성리학자로서의 이름 때문에 도학군자의 근엄한 모습을 연상하기 쉽다. 범사에 실수가 없고 위의가 단정한 빈틈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자잘한 일에 구애받지 않는 호방한 면모를 보인다. 그것은 그가 웅혼한 기상을 타고났기 때문일 것이다. 불과 26세의 나이에 그의 스승 김득배가 홍건적을 격파하고도 효수당한 참혹한 상황을 당해서 그의 시신을 수습해 묻어둔 적이 있고, 악화된 외교 관계로 목숨을 담보해야 했던 일본이나 명나라 사행길을 그는 마다 않고 다녀왔던 기백이 넘치는 장부였다. 그러므로 타고난 호기가 지나쳐서 자신이 가야할 성리학자로서의 길을 그르치게 한다고 토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호방한 성격과 웅대한 기상은 그의 시문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푸른 시내 높은 절벽 고을 안고 돌아드는 곳

다시 세운 새 누각 눈이 확 트인다.
남쪽 들의 누런 구름 풍년임을 알려주고
서산의 맑은 기운 아침이 온 것을 느끼게 한다.
풍류로운 태수께선 이천 석의 녹봉이이라
오랜만에 만난 벗에게 삼백 잔의 술을 낸다니
밤이 깊어지면 곧바로 옥피리를 불어대며
밝은 달 높이 잡고 함께 실컷 놀아보세나.
[중양절에 익양태수 이용의 명원루에 짓다]

 

정몽주가 중양절에, 옛 벗 이용이 새로 수리한 명원루를 방문하여 축하의 뜻으로 지어준 시다. 누각이 위치해 있는 곳은 푸른 시내가 흐르는 바위절벽 위인데, 그 절벽 앞을 흐르는 냇물은 마을을 안아 돌아 나간다고 하여 누각이 뛰어난 승경에 위치해 있음을 알게 한다. 그리고 '눈앞이 확 트인다'고 한 것에서 절벽위에 우뚝 솟아 있는 명원루를 상상할 수 있다. 3.4행은 누각에서 내려다 본 경치다. 남녘 들에는 누렇게 익은 넓은 들이 펼쳐져 있고, 서산의 맑은 기운을 보니 아침이 온 모양이다. 이렇게 확 트인 공간에서 오랜만에 만난 벗에게 태수는 삼백 잔의 술을 낸다하니 밤늦도록 옥피리 불며 신선처럼 흠뻑 놀아보자는 것이다. 여기 '삼백 잔의 술'이란 시어가 과장되어 있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 과장을 통해서 작자의 호방한 기상을 드러내고 있다. 즉 시적주체의 감정은 과장이 아니다. 옛 친구와 해후하였으니 반갑기 그지 없는데다 태수는 정치를 잘하여 풍년을 맞고 있다. 그러니 술맛이 평소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삼백 잔의 술'이란 과장이라기 보다는 시적 주체의 고양된 감정 상태에 걸맞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조선조 때 허균은 이 시를 두고 '훨훨 호탕하게 날아갈 듯 한 것이 그 사람 같다'고 하였으니, 정몽주의 당시 호방한 감정을 추상하여 내린 평이라 하겠다.

 

가슴 속 호연지기를 펴보고자 한다면

감로사 누각 앞에 와 볼지어다.
석양무렵 옹성에 뿔피리 소리
빗발 끝에 과포로 돌아가는 배
옛 가마솥엔 양(梁)의 역사 아직도 남아 있고
높은 다락은 초(楚)의 산천 곧바로 누르는 듯.
올라와서 반나절이라도 스님 만나 얘기하면
팔천 리 우리나라로 가는 길을 잊을 것이네.
[다경루에서 계담스님에게 주다]

 

이 시는 정몽주가 명나라 사행길에 강소성 감로사의 다경루에 들러 지은 것이다. 감로사의 다경루에서 본 경치를 웅장하게 그렸다. '석양 무렵 옹성에 뿔피리 소리, 빗발 끝에 과포로 돌아가는 배'라고 한 구절에서 시청각적 웅장한 스케일을 느낄 수 있다. 뿔피리는 옛날 군중에서 아침 저녁으로 시간을 알릴 때나 군대의 사기를 돋울 때, 또는 임금이 행차할 때 경계하기 위해서 쓰던 몸체가 길고 끝이 큰 피리를 말한다. 해가 지는 석양무렵에 장중하게 울려퍼지는 뿔피리 소리를 연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비가 막 그친 뒤의 경물은 평상시보다 훨씬 뚜렷하게 보인다. 그 때 마침 포구로 돌아가는 돛배의 모습은 여느 때 보다도 웅장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감로사에 있는 옛날 양무제가 만들었다는 수만 근 짜리 무쇠솥은 지금도 남아서 그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고, 감로사의 다락이 멀리 남으로 초땅을 압도할 것 같다고 했다. 이같은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감로사의 다경루에 올라와 보니 가슴속이 탁 트이면서 호연지기를 펼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다. 게다가 감로사에 거처하는 계담스님과 차 한 잔 나누며 얘기라도 나누게 되면 험난한 여행길이나 인생사의 어려움을 다 잊을 것 같다는 것이다.

 

웅장한 풍경속에 처한 시적 주체의 호연한 기상을 느끼게 하는 시편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 초의 변계량은 호매준장(豪邁峻壯)하며 횡방걸출(橫放傑出)한 기상을 이 시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크고 웅장한 시공에 접했을 때 절로 기운이 일어나고 솟아오를 것 같은 느낌이 일기도 하지만 때론 엄청난 스케일에 압도될 때가 있다. 고려 때 김황원이 대동강가 부벽루에 올랐을 때, "긴 성의 한 면은 강물이 넘실넘실, 큰 들 동쪽 머리엔 점점이 산이로다〔長城一面溶溶水 大野東頭點點山〕"하고는 시상이 막혀 시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일화는 바로 후자와 같은 경우일 것이다. 우리는 위 시에서 중국대륙의 유구한 역사와 장대한 경물에 압도되지 않고 맞서서 웅혼한 기상을 토하고 있는 대장부 정몽주를 그려 볼 수 있다.

 

정몽주는 이렇듯 웅대한 기상과 호탕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국에서 봄날 눈속에 새싹이 돋는 것을 보고 고향생각에 가슴아파하는 평상인의 감정을 소유한 다정다감한 시인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고향에서 멀리 떨어져 있게 되면 향수에 울먹이게 된다.

 

몇해동안 나그네로 먼길을 다니다가

이국 풍속 또 찾아서 동해 끝에 다다르다.
길가는 사람 신을 벗어 존장을 맞이하고
지사는 칼을 갈아 대대 원수 갚는구나.
눈 깊은 약초 밭에 새싹이 돋아나고
달 뜨는 매화 마을에 그윽한 향기 떠도는데
참으로 아름답지만 내 땅 아님 알겠으니
언제나 배를 띄워 고향땅에 돌아갈까?
[정사년 일본으로 사신 가서 짓다]

 

이 시는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심할 때 그것을 중지하고자 해서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지은 시다. 고국에선 볼 수 없는 낯선 풍속이 신기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날 수 있어서 다소 해방감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눈이 깊이 쌓인 곳에서 새싹이 돋거나 달빛 아래 그윽하게 떠도는 매화 향기를 맡다보면 얼마간 향수를 잊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고향에서 느끼는 것과는 다르다. 이 시의 미련은 바로 그런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한 것으로 하루바삐 사행을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고향을 떠나 타향에 오래 있다보면 고향이 그립기 마련이다. 고향에 두고 온 부모 형제와 벗들은 물론 친숙한 고향산하가 눈에 어른거리고 그것이 지나치면 눈물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더구나 낯선 타국땅에서라면 더 그럴 것이다. 정몽주 또한 이러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피하거나 억지부리지 않는 점에서 그의 진솔한 내면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이런 평상인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다음시에서처럼 일반 백성들의 일상적인 삶이 일탈된 것을 안타까와하고 대신 아파해 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번 이별한 뒤로 여러 해 소식 끊기니

변방 거기서 살아계시는지 누가 알리요?
오늘 아침 처음 겨울옷을 부치러가는 이
울며 전송하고 돌아올 제 뱃속에 있던 아이라오.
[남편을 변방에 보낸 아내의 원망]

 

전쟁과 난리는 일반 백성들의 일상적인 삶을 파괴한다. 가장 가까이서 서로 살 부비며 살아야할 사람들을 떨어져 있게 하는 것이다. 생이별의 슬픔과 고통을 그 무엇으로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이 시에서는 아내의 뱃속에 있던 아이가 태어나 그 역시 징집할 나이가 되어 상봉한 경우다. 이 기막힌 모습을 정몽주는 외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병역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고통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작자의 동정이 문면 밖에 넘치고 있다.

 

5. 전승된 정몽주 인물됨의 추이
정몽주와 관련된 전설은 대체로 세 영역으로 나누어 진다. 그의 이름의 유래와 관련된 것, 선죽교와 관련된 것, 묘비와 묘터, 사당 관련 전설 등이 그것이다. 이름의 유래에 대한 전설은 그의 지금 이름인 '夢周'를 포함해서 '夢蘭', '夢龍' 등의 이름을 가지게 된 유래를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선죽교 전설은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부하들로부터 철퇴를 맞아 죽은 뒤 생겨난 대나무와 선죽교 위의 핏자국에 관련된 것들이다. 묘비전설은 정몽주의 직함과 관련된 전설이며, 묘터 전설은 묘터를 잡게 된 유래에 대한 전설이고, 사당 전설은 새로 사당을 수리하게 된 이유를 설명한 전설이다. 이 전설들속에 투영된 정몽주의 인물됨을 중심으로 고찰해 본다.

 

(1) 이름 유래 전설

정몽주의 이름에 대한 유래를 설명하는 전설은 그의 전기인 {고려사} <열전> [정몽주]조에 보이는데, 정몽주의 세 이름에 대한 유래가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실려 있다.

 

① 정몽주의 처음 이름은 '몽란(夢蘭)'이었는데 그것은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잉태 하였을 때 난초분을 안다가 놀라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서 낳았기 때문이다.

② 아홉 살 때 그의 어머니가 동산의 배나무에 흑룡이 올라가는 꿈을 꾸고 놀 라 깨어 나와보니 그였으므로 '몽룡(夢龍)'으로 고쳐 불렀다.
③ 관례를 마치고 그의 이름을 '몽주(夢周)'로 고쳐 불렀다.

 

①과 ②는 그의 이름자가 유래된 것을 설명한 전설이다. 그 이름자 중 '몽(夢)'자는 그의 어머니가 꿈을 꾸고서 지었기 때문이며, '난(蘭)'자와 '용(龍)'자는 꿈꾸었던 대상을 따서 지은 것이라는 설명이다. 여기서 꿈의 대상이었던 난자나 용자는 정몽주의 인물됨과 연결지어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난은 동양에서 일반적으로 절조의 상징이었다. 추위를 이기고 눈속에 피어난 난은 봄소식을 맨처음 알려준다. 때문에 유가 선비들이 영물시로 그것의 절조를 많이 읊었다. 따라서 난자는 정몽주의 충절과 관련된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몽란'이란 이름은 애초에 지었던 이름이 아니라, 그가 충절의 삶을 살았기 때문에, 열전의 찬자가 그의 충절을 높이 사서 지어 붙인 것이 아닌가 한다. 한편, 용은 제왕의 상징이면서 자질이 아주 뛰어난 인물의 상징이었다. 이 또한 정몽주의 뛰어난 천품과 걸출했던 업적과 연결지어 볼 수 있다. 즉 그가 동방 성리학의 조종으로 기림을 받은 점이나 걸출한 외교관으로서 활동한 점, 또 재상으로서 과감한 개혁 정치를 실시한 점은 앞에서도 살펴 본 바다. 그러므로 '몽룡' 이란 역시 전기의 찬자가 정몽주의 뛰어난 자질과 업적을 기려서 붙인 이름일 수 있다.

 

③의 경우는 그 이름이 생기게 된 계기만을 말해 줄 뿐 이름자의 뜻과는 관련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앞의 두 이름의 끝자가 확연히 드러나는 사물을 지칭하는데 비해서 그것은 추상성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설이 개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진 것이었다. '몽주'란 이름과 관련하여 생긴 전설이 한편 발견되는데 내용을 요약하여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③-1 어느날 정몽주의 아버지가 낮에 방에서 책을 보다가 잠이 들었는데 꿈에 한 훌륭하게 생긴 사람이 나타나 나는 중국의 주공(周公)인데 하느님의 명으로 너희 집에 다시 태어나기로 했으니 지금 당장 안방에 들어가 합방하라고 하였다. 꿈을 깬 그가 안방에 들어가서 합궁을 요구했으나 그의 아내가 낮에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여 응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방에 돌아와 책을 보다가 다시 깜박 잠이 들었는데, 또 아까 보았던 주공이라는 사람이 아까 한 명령을 실행하지 않은 것을 문책하며 시간을 지연하지 말고 빨리 합궁하라고 하였다. 꿈에서 깬 그는 다시 아내에게 합궁을 요구하여 실행한 뒤 열 달만에 출생하므로 그의 이름을 '몽주(夢周)'라고 지었다.

 

이렇게 앞의 경우보다 더욱 그럴듯하게 정몽주의 최종 이름인 '몽주'의 유래를 설명하였다. 이 전설이 앞의 ①②와 다른 면은 꿈에서 본 대상이 ①②처럼 무의식의 동식물이 아닌 사람으로 되어 있는 점이다. 그것도 역사속에서 비범한 활동을 보였던 인물이다. 즉 '주공'은 요.순.우.탕.문무 등과 더불어 유가에서 성인으로 받드는 인물 중의 하나로 무왕의 아들이다. 그는 주나라 초기에 조카인 어린 성왕을 대신해서 섭정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제도와 이념의 정립을 위해 헌신했던 모범적인 인물이다. 실제로 정몽주가 '몽주'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그의 아버지가 또는 그의 이름을 지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그에게 '주공'과 같은 인물이 되라고 그렇게 지어 주었을 수도 있다.(③처럼 관례를 마치고 지어준 것이 확실하다면) 한편 이 전설은 정몽주가 펼친 사업과 관련지어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정몽주는 중국의 문물제도를 이 땅에 들여와 실현하려고 하였던 이다. 특히 성리학적 유교문화를 받아들여 이 땅에 정착시키려고 과감하게 실천하였던 인물이다. 따라서 이런 그의 사업적 성과를 그 이름에 걸맞게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전설이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그의 이름의 유래와 관련하여 생성된 전설속에서 추상할 수 있는 정몽주의 인물됨은 그의 타고난 천품과 일생 펼친 사업, 그리고 충절의 행위와 관련된다. 즉 ①②는 포은을 충절의 인물, 큰 사업을 펼친 경륜가로 기리고자 하는 의식이 투영된 경우이며, ③-1은 그의 사업적 성과에 걸맞도록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의식이 투영되었다고 보인다. 결국 ①,②,③-1에서 추출할 수 있는 정몽주의 인물됨은 충절(忠節)과 사대부적 경륜가로서의 면모이다.

 

(2) 선죽교 전설

선죽교(善竹橋)는 정몽주에게 죽음을 안겨 주었던 곳이다. 그는 여기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 조영규 등에게 철퇴를 맞아 피를 흘리며 죽었다. 이러한 역사 사실은 다음 두 가지 이야기로 전설화했다. ①그 때 흘린 피가 핏자국이 선죽교에 남아 있다는 것과, ②그가 죽은 뒤 그 다리 아래서 대나무가 솟아나왔고 그 당시인들이 그것을 기려 선죽교(본래 이름은 選地橋였음)로 고쳐 불렀다고 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①에 대해서는 조선후기의 홍세태(洪世泰 : 1653-1725)가 '피가 어떻게 돌 속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하며 본래부터 망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실학자 정동유(鄭東愈 : 1744-1808)도 돌의 문채가 우연히 피와 같았을 것이며, 조선초부터 송도와 관련된 많은 글들이 있지만 그런 사실을 쓴 글이 전혀 없음을 들어 선죽교 돌의 핏자국설은 망언이라 하여 실학자다운 고찰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정호인이란 정몽주의 후손이 송도유수를 지내며 선죽교에 비를 세워 "다리 위에 피 흔적이 있는데 옛 노인들이 예전부터 전해 내려오며 이상한 일이라고 한다. 문헌에는 비록 증거가 없으나 옛날 장홍은 피를 흘려 돌을 묻어버렸다고 하니 혹은 그러한 이치도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 긍정적인 말을 하고 있다. 선조의 충절을 사모하는 마음이 그렇게 말하게 한 것일 테다.

 

이상에서 ①② 모두 선죽교 관련 전설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데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실학시대의 고증학적 태도는 인물에 대한 과대포장 의식과 허위 의식을 경계하고 있다. 그것은 후인들이 우연적이며 자연적인 사실까지도 기이하게 생각해서 진실을 덮어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죽교 전설은 시대를 내려오면서 그 전설적 의미가 점차 탈각되어 간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자연 자체와 자연에 대한 의식을 구별하는 지식의 확대와 아울러 충절의식에 대한 사회전반의 변화된 의식의 반영 탓일 것이다.

 

(3) 정몽주의 묘비.사당.묘터 전설

정몽주의 묘비,사당, 묘터에 관련된 설화를 편의상 줄거리를 파괴하지 않는 선에서 줄이어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①정몽주가 태조의 부하인 조영규 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됨으로써 고려는 망하고 이씨 왕조가 들어섰다. 본조(조선)는 정몽주에게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으로 추증하여 용인에 있는 그의 무덤 앞에 비를 세웠는데 곧 벼락이 쳐서 부서졌다. 정몽주의 후손이 '문하시중(門下侍中)'이란 고려 관직명으로 고쳐 쓸 것을 청하여 지금에 이르렀는데 아무런 일이 없었다.

 

②정몽주가 피살되어 선지교 아래에 버려졌는데 개성의 중들이 수습하여 처음엔 풍덕에 묻었다고 한다. 15년 뒤에 고향 영천에 안장하고자 유골을 운구하며 용인 죽재에 이르렀을 때였다.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부는 바람에 명정이 날아가 지금 무덤이 있는 산턱에 꽂혔다. 바람이 그치를 기다렸다가 다시 상여를 옮기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 때 어떤 풍수쟁이가 나타나 이것은 하늘의 계시이니 명정이 꽂인 곳에 묻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상여가 움직였고, 결국 그곳에 묻었다고 한다.

 

③정몽주의 묘 옆에는 이석형의 묘가 있는데 그 묘자리는 본래 정몽주의 것으로 정하였던 곳이었다.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피살되고, 임시로 개성의 한 곳에 묻었던 것을 고향 영천으로 이장하려고 할 때였다. 개성에서 정몽주의 상여를 매고 용인 풍덕천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 명정이 벗겨져 날아가 지금의 이석형의 묘자리에 떠어졌다. 지관은 명정이 이 곳에 떨어진 것은 정몽주가 스스로 선택한 명당자리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거기에 안장하라고 하였다. 이 때 정몽주의 증손녀이며 이석형의 부인인 정씨도 이 이야기를 듣고는 그 자리가 탐이 나서 그 자리를 남편과 자신의 안장지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낮에 파놓은 유택의 광에 밤새 물을 퍼다 부어 결국은 그곳에 묘를 쓰지 못하도록 하고, 정몽주의 유골은 그 옆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남편이 죽자 포은을 안장하려고 곳에 묻고, 자손들에게 자신이 죽거들랑 남편과 합장해달라고 하고 그렇게 하면 대대로 복록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후 이석형의 후손 중에는 이정구 같은 문장가들이 나와 집안이 번성한 반면 정몽주의 후손 중엔 이렇다할 인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비밀이 조선 말까지 연안이씨 문중에서만 내려오다가 정씨 문중에까지 알려져 이후로 연안 이씨와는 혼사를 맺지 않을 만큼 반목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④정몽주의 사당이 전에 영천에 있었다. 성종 때 손순효가 이 지역을 안찰하며 영천군 경계를 지나가다 술에 취해 말 위에서 졸며 포은촌(圃隱村)을 정신없이 지나쳤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포은인데 내가 거처하는 곳이 퇴폐해서 비바람을 막을 수 없다."라고 하며 부탁하는 듯했다. 손순효는 기이하게 여기고 옛터를 찾아 군민들을 독려하여 사당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몸소 전을 올리며 낙성식을 거행하고 벽에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글을 써 붙이고 넋을 위로했다.

 

①은 정몽주의 묘비에 대한 전설로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 실려 있다. 이 전설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면서도 이성계 일파의 혁성혁명과 이방원(태종)의 정략적 의도를 은근히 풍자하는 의식이 만들어낸 전설일 것이다. '의정부 영의정'이란 태종이 정몽주에게 추중한 조선식 관직명이다.

한편 정몽주의 묘터 관련 전설은 두 편이 전해지고 있다. ③은 ②에 한 두 개의 이야기가 첨가되어 변모되긴 하였지만, ②③ 모두 정몽주의 묘지 유래를 담은 것으로 풍수 사상이 깊게 투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④는 김안로(金安老)의 {용천담저기(龍泉談寂記)}에 보이는 정몽주의 사당과 관련된 기록이다. 이 전설은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일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역주민들이 자기 고장의 명예를 격상시키고자 충절이 뛰어났던 자기 지역 출신인 포은에 기탁하여 이야기를 만들어냈을 가능성도 있다.

총괄적으로 말해서, ①④는 정몽주의 충절을 바탕으로 하여 이루어진 전설이다. 바꾸어 말하면 이와 같은 전설을 만들어낸 사람들은 정몽주를 충절의 표상으로 여긴 것이다. 그러나 ②③에서는 정몽주라는 인물을 매개로 전설을 만들어냈지만 정몽주의 인물됨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미 충절의 도덕적 가치를 중시하던 유교사상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사회가 되었음을 뜻한다.

6. 맺음말
고려말 역사의 주역의 한 사람이었던 정몽주는 고려를 마직막까지 지킨 대표적인 충절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붙여진 '충절의 인물' 또는 '만고의 충신'이란 이미지는 자칫 그의 다양한 면모를 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에게서 지나치게 붙어 있는 '충절'이란 이미지를 떼어버릴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역사 속에 살아 숨쉬는 그의 다양한 면모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충절이란 도덕적 관념의 박제속에서 걸어나온 정몽주는 실로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성리학운동을 선도한 문화운동가로서, 온갖 폐정을 개혁하거나 새로운 제도를 실시한 개혁적 정치가로서, 또는 국익의 도모와 고급문화를 전파했던 걸출한 외교관으로서, 풍류 호방하고 다정다감한 시인으로서의 면모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다양한 모습은 그가 이 땅에 진정한 유교문화를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연구와 실천에 힘쓰는 과정에서 보였던 모습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유교 사대부적 경륜가였다고 할 것이다.

 

한편, 정몽주는 조선의 탄생을 적극 저지했던 인물이었음에도 조선시대에 충절의 전형으로서 받들어진 것은 조선이 충절을 숭상한 유교문화적 기반에서 그 역사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식은 전설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전설속에서도 정몽주는 충절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충절의 유교적 가치관이 그 사회적 도덕규범으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때 그는 충절이란 이름으로 박제된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한 전설속에서 그는 더 이상 충절이란 이름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