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醉月 2013. 4. 1. 01:30

 

역사 다큐 ‘백년전쟁’의 이승만 죽이기

역사 왜곡해 친일파 몰고 사진 합성해 ‘플레이보이’ 비하

 

이정훈 기자 | hoon@donga.com

인혁당 재건위 사건 유가족들이 세운 4·9통일평화재단의 제작 지원을 받아 민족문제연구소가 만든 ‘백년전쟁’은 그들이 주장하듯 진실한 역사를 찾아가는 다큐멘터리인가. 그들은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세력을 친일파로 규정하기 위해 있지도 않은 사건을 만들어냈다. 친일이라는 좁은 시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어떻게 한국 근현대사를 왜곡했는지 추적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 4·9통일평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만든 역사다큐 ‘백년전쟁.’

지난해 18대 대통령선거 직전 민족문제연구소(민문연)가 4·9통일평화재단의 지원을 받아 ‘백년전쟁’이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을 만들었다. ‘백년’은 일본에 강제 병합된 1910년부터 지금까지를 가리킨다. 주 내용은 대한민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후 친일파를 비롯한 식민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지금까지 외세에 영합하는 세력과 자주독립을 하자는 세력이 싸우고 있다는 것이다.

‘백년전쟁’은 1980년대 대학가 운동권 조직인 ‘언더(under)’들이 대한민국이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를 놓고 벌인 ‘사구체론(사회구성체 논쟁)’을 연상시킨다. 우리나라 운동권은 마르크스-레닌의 순수 공산주의를 따르자는 세력과 북한식 공산주의인 주체사상(주사)을 따르자는 세력으로 양분된다. 순수 공산주의를 하자는 세력은 ‘민중민주주의(PD)’를 강조하고, 주체사상을 따르자는 일파는 남조선 해방을 뜻하는 ‘민족해방(NL)’을 앞세운다.

민중민주주의파는 ‘민민투’로 약칭되는 ‘반제(反帝)반파쇼 민족민주화투쟁위원회’를 만들었다. 주체사상 신봉파는 ‘자민투’로 약칭되는 ‘반미자주화 반파쇼민주화투쟁위원회’를 구성했다. 민민투는 정치적으로 한국은 전통적인 식민지가 아닌 새로운 식민지 단계에 와 있고, 경제적으로는 국가가 독점재벌을 만들어 끌고 나가는 자본주의라며 ‘신(新)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론’(약칭 신식국독자론)을 내놓았다. 자민투는 한국은 여전히 해방시켜야 하는 식민지이고, 반쯤 자본주의화했다며 ‘식민지반(半)자본주의론’(약칭 식반자론)을 제시했다.

 

인혁당 재건위와 4·9재단

양측이 자기 판단을 관철하기 위해 사상투쟁을 벌인 것이 바로 사구체 논쟁이었다. 이 논쟁에서 보다 폭넓은 지지를 끌어낸 것은 ‘식반자론’을 내세운 주사파(NL)였다. 1980년대 말부터 NL계열이 대부분 대학에서 총학생회를 장악했기에 한국 대학의 운동권은 주사파 일색이 됐다. 그러나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고 1997년 주체사상을 만든 황장엽이 망명해 김일성 식 주체사상의 허구를 증언함으로써 주사파는 몰락했고, 덩달아 대학 운동권 세력도 힘을 잃었다.

민문연은 1948년 친일파 척결을 위해 국회가 만든 반민특위의 정신을 계승해 친일파 연구를 하다 1989년 타계한 임종국 씨의 유지를 잇자며 1991년에 만든 ‘반(反)민족문제연구소’에서 유래한다. 이 연구소는 2009년 친일인명사전을 내놓아 파문을 일으킨 바 있다. 현재 소장(3대)은 문학평론가로 불리는 임헌영 씨인데, 그는 1979년의 남민전 사건으로 투옥된 적이 있다. 임준열이 본명인 그는 조선공산당을 재건한 박헌영과 같은 ‘헌영’을 필명으로 사용하다가 필명이 더 알려진 경우다.

4·9통일평화재단은 1974년 인혁당 재건위(2차 인혁당)사건과 맥이 닿는다. 1964년 중앙정보부에 검거돼 유죄선고를 받은 인혁당 관계자들이 출소 후 ‘경락(經絡)연구회’란 이름으로 인혁당을 재건했으며, 1974년 중앙정보부가 검거한 서울대생 중심의 운동권 조직 민청학련을 배후 조종했다는 것이 이 사건의 골자다. 경락연구회가 과연 인혁당 재건위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았다. 또 재판 과정에서 이들이 고문을 당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법원은 인혁당을 재건한 조직이 실재한 것에 주목해 8명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검찰은 대법원이 사형 확정판결을 한 18시간 뒤인 다음 날 바로 형을 집행해 ‘사법살인을 했다’는 비판을 들었다. 이 사건에 대한 판단이 바뀐 것은 ‘과거사법’을 만들어 과거 공안사건을 재조사한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2005년 이 법을 근거로 만들어진 국가정보원 과거사위는 이 사건 수사 과정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유족들의 청구로 열린 재심(2007년)에서 법원은 고문이 있었다는 것 등을 인정하고, 과거 재판에서 검찰이 제시한 자료는 증거 능력이 없다며 무죄 판결을 내렸다. 유가족들은 정부로부터 개인별로 보상금을 받았다. 보상금의 총액은 수백억 원으로 알려져 있다. 유가족이 이 보상금의 일부를 기금으로 8명이 처형된 4월 9일을 기려 만든 것이 4·9통일평화재단이다. 민문연은 이 재단의 제작지원을 받아 ‘새로운 스타일의 역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고 유튜브에서 밝혔다.

 

없는 사실로 만든 역사 공작

 

친일파 연구를 했던 故 임종국씨.

민문연은 이승만·박정희는 각 2편, 전두환·노무현은 각 1편씩 모두 6편의 ‘백년전쟁’을 각 50분 정도 분량으로 제작하겠다고 했다. 현재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소재로 각 1편씩만 내놓았다. 민문연이 ‘백년전쟁’을 ‘새로운 스타일의 역사 다큐’로 규정한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대한민국 역사를 민문연 스타일로 정리하겠다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민문연이 제시한 역사관을 토대로 사구체 논쟁 같은 것을 해보자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면 이 다큐는 사실을 토대로 해야 한다.

신념은 좌파와 우파로 나뉘더라도 역사 인식만큼은 사실을 토대로 해야 한다. ‘백년전쟁’은 사실을 토대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가. 민족문제를 다루겠다는 민문연이 사실이 아닌 것을 근거로 역사 다큐를 만들었다면 그 조직의 본연성에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일방적인 사실과 허위 사실로 역사를 만드는 것은 민족 정통성을 부정하는 심각한 ‘역사 공작’이다. 단순한 실수와 다르다.

1차 인혁당이 실존했다고 증언한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부정해서 그렇지, 인혁당 사람들은 정말 순수한 사람들이었다”고 강조했다. 순수한 사람들은 사실을 사실로 볼 수 있다. 재미를 위해 유튜브 특유의 희화화·비틀기·단순화를 할 수 있지만, 역사 다큐라고 한 만큼 ‘백년전쟁’은 사실에 충실해야 한다. 두 편의 ‘백년전쟁’을 보면서 민문연의 역사 인식을 따져보기로 한다.

이승만을 다룬 ‘두 얼굴의 이승만’(이하 ‘두 얼굴’)은 이승만을 친일파와 파렴치범으로 규정한다. 이승만을 친일파로 규정한 근거는 두 가지로 판단된다. 첫째 광복 후 친일파 척결에 반대했고, 둘째 일제 때 다른 독립운동가와 마찰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이승만을 박사학위를 억지로 받아내고 여성과 놀기 좋아한 바람둥이로 묘사해 이승만의 도덕성에 일격을 가했다.

‘두 얼굴’이 주장하는 ‘이승만=친일파’를 거시적으로 살펴보자. 이승만은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기에 그에 대해서는 만인만색의 의견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란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1919년 그는 상하이의 (통합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1948년 건국한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이승만이 친일파라고?

‘두 얼굴’은 나치 독일을 거론하며 이승만을 콜라보·친일파로 몰았다.

박정희처럼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것도 아닌데 왜 그가 대통령에 추대됐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3·1운동 9년 전인 1910년 이승만은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엔 프린스턴 같은 아이비리그 대학도 매년 1~3명의 박사만 배출했기에 박사는 매우 드문 존재였다. 박사가 된 이승만은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쳤고, 미국인들은 박사인 그를 인정했다.

3·1운동 후 국내외에서 생겨난 여러 임시정부도 그를 인정했다. 13도 대표가 모여 만든 ‘국내 임정’ 한성정부는 미국에 있던 이승만을 지금의 대통령과 비슷한 ‘집정관총재’로 추대했다. 내각제를 채택한 상하이(上海) 임정은 그를 국무총리로 추대했다. 여타 임정도 이승만을 주요 보직에 추대했다.

그 후 상하이 임정이 여타 임정을 통합하며 대통령제로 바꿔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에 추대했다. 이승만이 친일파였다면 독립의 기운이 펄펄 끓던 시절 상하이 임정을 비롯한 여러 임정에서 그를 핵심적인 지위에 추대할 수 있었을까.

이승만이 친일파였다면, 그를 추대한 여러 임정의 사람들, 그리고 그를 압도적인 표 차로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한 제헌의원들도 친일파였다는 굴레를 벗기 어렵다. 196명이 투표한 제헌의회에서는 무려 180표(91.8%)가 이승만에게 쏟아졌다. 김구는 13표, 서재필은 1표였다. 이승만이 전략적인 판단으로 반일(反日)의 강도를 낮춰, 강경 반일을 외친 사람들과 맞섰던 것을 근거로 그를 친일파라고 규정한다면,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사람을 간단히 종북세력·친북파라고 몰아버리는 것과 뭐가 다른가.

1952년 선포된 이승만 라인(평화선)을 보라. 그가 친일파였다면 독도 영유권을 분명히 한 평화선을 선포했을까. 이승만의 반일노선은 일관됐고 생각 이상으로 강력했다. 대한민국 정부 출범 나흘째인 1948년 8월 18일 그는 처음으로 한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일본에 대마도를 한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할 것이다”라고 천명했다. 미군정 치하 일본의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반발하자 9월 9일 대마도는 대한민국의 영토라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1949년 1월 8일 연두회견에서는 “대일(對日) 배상문제는 임진왜란 시부터 기산(起算)해야 한다” “대마도는 별개로 취급돼야 할 것이다”라고 밀어붙였다. 이승만은 6·25전쟁에서 한국을 도와준 미국이 그렇게 권해도 일본과 수교하지 않았다.

 

나치 독일까지 동원

그런데도 ‘두 얼굴’은 나치 독일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를 이용해 이승만을 친일파로 만드는 공작을 한다. 허무맹랑한 것으로 사실을 바꾸었으니 공작이다.

‘두 얼굴’은 괴벨스가 “우리가 어떤 나라에 쳐들어가면 그 나라 국민은 자동적으로 세 부류가 된다. 한쪽엔 저항세력(레지스탕스), 다른 쪽엔 협력자(collaborator, ‘콜라보’로 약칭)가 있고, 그 사이에 머뭇거리는 대중(masses)이 있다. 그 나라 국민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온갖 부(富)가 약탈되는 것을 참게 하려면, 머뭇거리는 대중이 레지스탕스 무리에 가담하지 않고 콜라보 편에 서도록 설득해야 한다”라고 연설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본이 침략하자 조선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독립운동가와 친일민족반역자, 그 사이에 대다수의 민중이 있었다.…일본은 친일파를 앞세워 땅과 쌀과 이름과 말(언어), 심지어 그들을 전쟁에 동원해 생명까지 빼앗았다. 이에 맞서 독립운동세력은 해외로 나가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군을 조직했다”라며 이승만을 콜라보로 몰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승만을 바로 친일파로 모는 것은 불가능했기에 “한국에 온 미군정 세력은 친일파를 앞세워 자주독립 세력을 짓밟기 시작했다”라고 우회한다.

미군정 세력이 친일파를 앞세웠다는 대목도 찬찬히 살펴보자. 미국은 핵무기까지 써가며 일본과 치열하게 싸워 한국에 들어왔다. 그런 미국이 친일파를 썼다면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판사 위폐사건과 대구폭동

 

정판사 위폐사건 재판. 공산주의자들이 대한민국을 흔들 목적으로 위폐를 인쇄 유통시킨 사건이다.

‘두 얼굴’이 ‘미군정은 자주독립 세력을 짓밟기 시작했다’고 한 것은 미국이 친일파 처벌법을 인준하지 않은 것, 독립정부를 세운 후 제헌의회가 만든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제대로 집행되지 않은 것을 섞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미군정이 책임져야 하지만, 뒤의 것은 미군정이 아닌 우리가 책임져야 할 문제다.

광복 후 순수 미군정을 받던 우리는 1946년 12월 12일 의회에 해당하는 ‘과도입법의원(議院)’을 개원하고, 1947년 6월 3일엔 ‘남조선과도정부’를 출범시켰다.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갖게 된 것이다. 과도정부 출범 직후인 1947년 7월 20일 과도입법의원은 친일파를 척결하기 위해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 처단 특별법’을 통과시켰으나 미군정의 인준을 받지 못해 공포되지 못했다.

일본과 전쟁까지 치른 미군정이 이 법을 인준하지 않은 것은 심각한 좌우 대립 때문이었다. 친일파일지라도 전향을 했다면 그들을 이용해야 할 만큼 좌익과의 싸움이 심각해진 것이다.

광복 직후 박헌영이 재건한 조선공산당은 대일 항쟁기에 조선은행권을 인쇄했던 서울 소공동의‘정판사(精版社)’ 건물에 입주해 기관지 ‘해방일보’를 발행했다. 그리고 정판사를 통해 1200만 원의 위조지폐를 인쇄해 유통시키다 과도정부 출범 전인 1946년 5월 경찰에 적발됐다. 경찰은 조선공산당이 남조선 경제를 교란하고 활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위폐사건을 일으켰다고 발표했다.

경찰에 쫓기던 해방일보 사장 권오직은 북조선으로 도주했다. 정판사 위폐 사건은 대한민국을 부정한 사건이었다. 대한민국이 본격적인 좌우갈등에 들어섰다는 징표였다.

이 사건 5개월 전인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외무장관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이승만과 김구를 필두로 한 한국인들은 격렬히 반대했다. 박헌영도 반대했다. 그런데 그 직후 북한에 가서 김일성,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온 로마넨코 민정담당 부사령관, 폴리얀스키 서울주재 총영사 등과 회의를 하고 돌아온 박헌영이 1946년 1월 2일부터 찬탁으로 돌아섰다. 모스크바의 결정을 맹종한 것이다.

그 결과 민족진영의 반탁, 공산주의자들의 찬탁 시위가 경쟁적으로 터져 나왔다. 신생 독립국에서 불거지는 노선 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미국은 신탁통치를 하자는 입장이었지만 그렇다고 친공(親共)은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런 기로에 정판사 위폐사건이 터졌으니 미군정은 좌익 척결을 시급한 문제로 볼 수밖에 없었다.

 

친일파 처벌이냐, 좌익 척결이냐

1945년 말 박헌영이 북한에 다녀온 후 공산 계열은 찬탁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미군정은 공산 세력과의 싸움에 방점을 찍게 된다. 일제는 나치 독일과 마찬가지로 반공을 표방했다. 이 때문에 일제에 고용된 조선인 순사 출신들이 대공(對共) 수사에 투입됐다. 미군정이 이들을 경찰관으로 채용한 것이다.

정판사 위폐사건 5개월 뒤인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좌익이 일으킨 폭동이 순식간에 전국으로 확대됐다(대구폭동). 미군정은 미군 부대와 조선인 경찰부대를 출동시켜 무력 진압했다. 이 폭동으로 경북에서는 박정희의 셋째 형 박상희(김종필 전 총리의 장인) 씨 등 64명이 사망했다. 전국적인 사망자 수는 집계조차 되지 못했다. 정판사 위폐사건과 대구폭동 등을 겪은 뒤 과도입법의원이 친일파를 척결하자는 법을 만들었으나 , 친일 경력을 가진 경찰관으로 좌익과 맞서야 했던 미군정은 이 법을 인준하지 않았다. ‘친일파 척결’은 찬탁을 했던 공산 세력이 민족 세력보다 더 강하게 외치던 구호였다.

이승만과 관련된 친일파 척결은 독립정부 수립 후인 반민특위 활동이다. 이 문제도 좌익들이 대한민국 건국에 보인 태도를 염두에 두고 살펴봐야 한다. 독립정부를 세우려면 헌법이 있어야 하고 헌법 제정을 제1의 목표로 만든 초대 의회를 ‘제헌의회’라고 한다.

미군정기 대한민국은 1948년 5월 10일을 제헌의원을 뽑는 투표일로 정하고 선거운동에 들어갔다. 그러자 좌익들이 대한민국 건국에 결사반대하고 나섰다. 가장 격렬했던 것은 4월 3일 제주도 봉기였다. 좌익들이 주요 관서를 습격해 사망자가 나왔다(제주도4·3사건). 이에 경찰과 국방경비대가 대응해 또 양쪽에서 희생자가 발생했다. 이 혼란으로 제주도의 선거는 무효가 됐다.

  

건국을 거부한 제주도 4·3사건

6월 18일 제주도 주둔 국방경비대 11연대장 박진경 중령이 부대에 숨어 있던 좌익 문상길 대위 등에게 피살됐다. 사태가 커진 것이다. 무장시위대는 일본군이 남기고 간 무기를 들고 한라산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쳤다. 경찰과 국방경비대는 이들이 숨어 있을 것 같은 중산간(中山間) 부락들을 찾아다니며 토벌작전을 벌였다. 여기서 적잖은 희생자가 발생했다.

정부는 병력 증강을 위해 1948년 10월 여수에 있는 14연대에 제주도 출동을 지시했다. 배를 타기로 한 19일, 지창수 상사·김지회 중위 등 이 연대에 숨어 있던 좌익들이 간부들을 사살하며 선동하자, 연대원들이 동조해 여수와 순천을 점령하는, 국군 역사상 최초의 반란사건이 일어났다(여·순10·19사건). 이를 진압하려고 광주의 4연대를 출동시키자 상당수의 4연대원이 합세해 반란군의 규모는 더 커졌다. 당황한 정부가 다른 부대를 투입하자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이동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들은 지리산에서 이듬해인 1949년 내내 준동했다. 4·3사건과 여·순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군에 많은 좌익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색출하는 숙군(肅軍) 수사에 들어갔다.

 

여순사건과 반민특위

 

이승만이 백인 여성들에게 접근해 재벌2세처럼 최고급 식사를 사주며 데이트를 했다면서 보여주는 화면.

좌익 척결이 심각한 과제였던 만큼 숙군 수사와 토벌전에 일제 때 공산주의와 싸운 경험이 있는 이들이 일부 투입됐다. 그러한 숙군 수사에서 ‘남로당 영남유격사령’ 직책을 갖고 있던 박정희 소령이 검거됐다. 체포된 박정희는 그가 아는 군 내 공산세력을 실토하고 전향했다.

1948년 9월 22일 정부는 제헌의회가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을 공포했다. 이 법에 따라 여·순사건 진압작전이 한창이던 11월 25일 국회에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만들어져 1949년 1월 1일부터 가동됐다. 공산 세력은 그들 세력을 살리기 위해 반민특위 활동을 적극 지지했다.

선택을 해야 했던 이승만은 1947년 미군정이 그랬던 것처럼, 좌익 척결을 우선했다. 1월 9일 그는 “반민특위는 초법적이며 북괴와 대치하는 상황에서 지나간 일을 들쑤셔 안정을 저해한다”는 내용의 담화를 발표했다. 경찰도 ‘반민특위는 북한의 사주를 받고 있다’며 반대했다.

당시 남북 대치는 심각했다. 1949년 5월 4일 개성 송악산에선 10명의 장병이 폭약을 지고 북괴군 토치카로 돌격한 ‘육탄 10용사 사건’이 있었다. 같은 날 최전방에서는 대대장 표무원과 강태무 소령이 각각 자기 대대원을 이끌고 집단 월북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좌익 척결에 무게를 실은 것이다.

반면 북한은 친일파 척결을 강조하며 한국을 흔들었다. ‘폭풍의 눈’이 된 반민특위는 1949년 5월 국회 프락치 사건을 겪으면서 중단됐다. 재판을 통해 확인된 이 사건의 실체는, 반민특위를 주도한 의원들이 이삼혁, 이재남 등 남로당 특수공작원을 통해 북한 지령을 받아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13명의 의원이 기소됐는데, 이들이 2심에 항고한 상태에서 6·25전쟁을 맞았다. 서울이 적(敵) 치하에 떨어졌을 때 그중 12명이 북한으로 넘어갔다.

1950년 북한이 남침한 것을 보면 1949년의 좌익 척결은 시급한 문제였음이 분명하다. 남한이 공산화하면 대한민국은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4·9재단의 지원을 받은 민문연은 친일파 척결이 가장 중요하다며 이승만을 친일파로 몰고 있으니 저의가 의심스럽다.

이승만은 친일파가 아니다. 그리고 미군정도 좌익 척결을 우선으로 여겼기에 ‘두 얼굴’은 ‘미군정이 친일파를 앞세워 자주독립 세력을 짓밟기 시작했다’는 괴상한 결론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짓밟혔다’는 ‘자주독립 세력’이다. 미군정과 이승만이 함께 짓밟은 것은 좌익이다. 그렇다면 좌익이 자주독립 세력이라는 말인가.

 

공산주의자들이 자주적?

좌익 가운데 상당수가 독립운동을 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주(自主)’라는 수식어를 달아줄 수는 없다. 좌익은 ‘만국의 공산주의는 하나’라고 봤기에 공산주의의 본산인 모스크바의 지령에 따라 움직였다. 자주가 아니라 심각한 사대를 한 것이다.

김일성을 보자. 김일성은 1930년대 북만주에서 중국 공산당군의 중간 간부로 활동했다. 임정이나 독립군처럼 대한국민의 군이 아니라, 중국 공산당군의 일원이었다. 1935년 만주의 중국 공산당군은 중국인 주바오중(朱保中)이 이끄는 동북항일연군으로 통합된다. 1940년 일제 관동군이 토벌을 강화하자 이들은 연합국인데도 중립조약을 맺고 있어 일본과 싸우지 않고 있던 소련으로 도주했다. 소련 극동군은 이들을 받아들여 88정찰여단(여단장은 주바오중)을 만들었다. 소련군 안의 중국인 부대가 된 것이다. 김일성은 이 부대에서 80명 정도를 이끈 대대장 등을 했다.

연합국은 카이로선언(1943년) 등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더라도 그들의 영토를 확장하지 않는다고 공포했다. 독일군의 공격을 받던 소련은 1943년부터 모스크바 근처까지 쳐들어온 독일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1944년 미·영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키자, 소련군은 독일이 점령했던 동유럽 국가로 진격해 그들을 해방시켰다. 그러나 연합국은 영토를 확장하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에 소련은 해방시킨 동유럽 국가들을 소련과 같은 공산국가로 만드는 공작을 했다.

이승만과 김노디가 맨법 위반으로 기소됐다고 한 ‘백년전쟁’의 화면. 그러나 김노디는 이승만과 동행하지 않았고, 이승만은 맨법 위반으로 기소되지도 않았다. 이 사진은 컴퓨터그래픽으로 합성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이 있었기에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은 88여단 소속의 김일성을 내세워 곧장 북한을 소비에트화했다. 그러니 김일성에게는 ‘자주’라는 단어를 붙여줄 수 없는 것이다.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원과 소련군 신분을 가졌지만, 이승만은 그렇게 오래 미국에 있었어도 미국 국적을 갖지 않았다.

광복 직후 박헌영이 찬탁으로 돌아선 것은 모스크바의 지시 때문이었다. 그 후 국내 좌익은 모스크바의 지령을 받는 김일성 세력의 지시를 받아 움직였다. 6·25전쟁도 소련이 만들어준 작전계획에 따라 일으킨 것이다. 그런데 ‘두 얼굴’은 좌익을 자주세력으로 해놓았으니 참으로 심각한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진실은 ‘미군정이 친일파를 앞세워 자주독립 세력을 짓밟았다’가 아니라 ‘미군정과 이승만은 좌익의 준동이 심각했기에 일부 친일 세력을 활용해 좌익을 제압했다’이다.

 

노선갈등을 친일로 몰아

이승만이 노선 문제를 놓고 독립운동 세력과 갈등한 것도 넓은 시야로 봐야 한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일본은 그전에 맺은 영일동맹을 근거로 영국 미국이 참여한 연합국 편에 섰다. 전후 일본은 승전국으로서 독일이 영유했던 태평양의 섬을 위임통치하게 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과 일본은 밀월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사이가 좋았다.

그 무렵 캘리포니아에 있던 일부 독립운동 세력이 ‘무장 공군을 길러 태평양을 날아가 쥐 같은 왜왕의 머리를 부수자’고 했다. 국제정치에 정통했던 이승만은 이런 일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미국의 독립운동 세력을 위축시킨다고 보았다.

처지를 바꿔놓고 이런 생각을 해보자. 지금 우리와 북한은 사이가 무척 나쁘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일단의 새터민(탈북자)들이 ‘핵실험을 거듭하는 김정은의 머리를 부숴버리자’며 독자적으로 운용할 무장 공군을 한국에 만들겠다고 하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일본과 싸우고 있던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정부도 우리 임정이 무장조직을 운용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외부 세력이 무장 조직을 갖추는 것은 허락할 수 없는, 주권(主權) 침해 사항이기 때문이다.

장제스 정권은, 1932년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가 도시락폭탄을 던져 일본군 수뇌부를 살상했을 때 “중국의 30만 대군이 하지 못한 일을 한국 청년이 해냈다”며 비로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 조선 청년들로 광복군을 만드는 것을 특별허가했다(1940년). 하지만 1941년 광복군이 조직되자, 중국은 광복군을 임정에서 분리해 그들이 통제하는 조직으로 만들었다. 이를 위해 참모장과 정훈처장 등 광복군의 핵심 요직엔 중국 장교를 집어넣었다. 이러한 제약이 있었기에 광복군은 일본군과의 전투에 나서지 못했다.

조선인이 나라 밖에서 외국 정부의 규제를 받지 않고 군사조직을 만들어 일본과 싸운 사례로는 1920년 대한독립군을 이끈 홍범도의 봉오동전투와 북로군정서를 지휘한 김좌진의 청산리전투를 꼽을 수 있다. 그때의 만주는 무주공산에 가까웠기에 조선인 독립군 부대들이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패배한 일본군이 토벌을 강화하자 이들은 러일전쟁 패배 후 일본을 경계하고 있던 소련에 ‘호감을 갖고’이동했다. 우리가 ‘자유시’라고 일컬었던 스보보드니로 들어간 것이다.

그러나 소련은 자국 영토 안에 허가받지 않은 무력이 있는 것을 허용할 수 없어, 조선 독립군들을 상대로 무장해제를 시도했다. 이때 충돌이 빚어지자 소련은 군대를 동원해 조선 독립군 세력을 공격해 죽이고 체포했다. 1921년 ‘자유시 참변’이 일어난 것이다.

 

‘플레이보이 이승만’

‘플레이보이 이승만’은 포토샵으로 만든 화면이다.

소련군은 생포한 조선 독립군 세력을 재판에 처했는데, 그때 유무죄를 다투는 배심원으로 활동한 사람 중의 한 명이 광복 후 서울에서 인공(人共)을 선포했던 여운형이다. 소련은 살아남은 조선 독립군들을 중앙아시아 각지로 흩어버렸다. 홍범도는 카자흐스탄으로 이동해 극장 수위를 하다 사망했다. 좌익이 개입된 자유시 참변으로 수만 명에 달했던 조선 독립군은 완전히 와해됐다.

외국에서 무장세력을 운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꿰뚫어본 이승만은, 그 나라의 법을 지키는 범위 안에서 투쟁했기에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반면 과격한 투쟁을 외친 열혈 세력들은 세가 모이지 않아, 이승만을 공격했다. 노선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이승만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미국과 일본의 사이가 좋았을 때는 반일운동을 할 인재를 키우는 교육에 집중했고, 미국과 일본이 싸우는 시기에는 강력한 투쟁을 주장했다. 태평양전쟁 말기 CIA(미국 중앙정보국)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군의 OSS(전략정보국)는 일본인과 비슷하고 일본말을 할 수 있는 조선인들로 특수부대를 만들어 한국에 침투시키려 했는데, 그 연결고리가 이승만이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이승만을 향한 숱한 비난은 노선투쟁에서 비롯된 것이지, 이승만이 친일을 했다는 단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자명해진다. 이승만 노선이 오히려 현실적이었다는 판단도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두 얼굴’은 이것을 신랄히 비판한다. 이승만은 친일파라며.

‘두 얼굴’의 공격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정치인의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는 여성문제를 거론한 것이다. ‘두 얼굴’은 “46세의 이승만이 그를 숭배하는 22살짜리 오벌린대 여대생 김노디와 여행을 하고,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최고급 럭셔리 호텔에서 잤다”고 했다. 그러고는 “(이승만은) 백인 여자들에게 접근해 마치 재벌 2세처럼 최고급 식사를 사주며 데이트를 즐겼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백인 여자’가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그러면서 “미국 수사관들은 이승만을 부도덕한 플레이보이라고 판단했던지 그를 기소해버렸다”고 한 후 그 유명한 ‘맨법(Mann Act)’을 들먹인다.

  

맨법은 1910년 제임스 로버트 맨 의원이 발의해 제정된 것으로, 성매매와 간통 방지를 주목적으로 했다. 남성이 많은 백인 여성을 데리고 주 경계를 넘으면 성매매, 부부임을 증명하지 못하는 남녀가 주 경계를 넘으면 간통으로 보고 일단 조사하게 한 것이 맨법이다. 뜻은 좋았지만 이 법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 있어 특정 정치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법으로 악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연예계 종사자들은 여성들과 동행하는 경우가 많다. 유명한 희극배우인 찰리 채플린도 이 법 위반으로 조사를 받아야 했다.

한국 여성 김노디가 이승만을 존경한 것은 사실이다. 김노디는 이승만이 설립한 한인기독학원 교장 등을 하며 그의 활동을 열렬히 지지했다. 이승만을 ‘아버지와 같은 분(surrogate father)’이라고 표현한 적도 있다. ‘두 얼굴’은 이승만과 김노디가 맨법 위반으로 1920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수사관들에게 잡혀 기소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때 김노디는 샌프란시스코는커녕 캘리포니아 주에도 있지 않았다. 이 사건은 통합된 상하이 임정의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중국으로 가기 위해 미국 동부에서 서부로 오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그때는 미일관계가 좋았기에 여권 없이 중국에 가려는 이승만은 두 나라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3·1운동 후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가 됐기에 워싱턴으로 옮겨가 활동했다. 그런데 상하이 임정에서 대통령으로 추대하자 상하이행 배를 탈 수 있는 호놀룰루로 오면서, 조용히 몇 군데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연설회 등을 열었다. 그가 호놀룰루행 배를 탈 수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로스앤젤레스에서 누군가가 맨법 위반으로 이승만과 김노디를 고발했다.

 

포토샵으로 사진 조작까지

 

‘박정희는 뱀 같은 사내였다’ ‘미국은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 한국 경제를 발전시켜 주었다’고 한 ‘백년전쟁’의 화면.

그러나 김노디는 캘리포니아에 온 사실도 없으니 이승만을 맨법 위반으로 조사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무국적자였다. 당시 미국에는 많은 외국인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었으므로 무국적자 문제는 노동부에서 다뤘다. 맨법 위반으로 고발된 이승만 문제는 캘리포니아 주 노동부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승만은 박사학위를 가진 거물이라 노동부는 이승만의 본 거주지였던 호놀룰루에서 판단하라며 호놀룰루 이민국으로 이첩했다. 이승만은 자유롭게 호놀룰루로 가게 된 것이다. 그때 캘리포니아 경찰은 누군가가 이승만을 노리고 있다고 보고 경찰관으로 하여금 호놀룰루로 가는 이승만을 경호하게 배려했다.

이승만은 호놀룰루의 저명 인사였기에 호놀룰루 이민국 책임자는 무혐의 처분을 하고 이를 캘리포니아 정부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보고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얼굴’은 “미국 수사관들은 이승만을 부도덕한 플레이보이라고 판단했던지 그를 기소해버렸다”라고 해놓았다. 그리고 사람 키를 재는 자를 배경으로 찍은, 그리하여 피의자처럼 보이게 된 이승만과 김노디의 사진을 방영한다. 김노디는 캘리포니아에 온 사실이 없는데 어떻게 이 사진이 나오게 된 것일까.

결론부터 밝히면 이 사진은 포토샵으로 만든 조작이다. 이승만 연구자인 류영익 교수가 만든 ‘이승만의 삶의 꿈’(중앙일보 간행)이라는 책에는 이승만이 김노디를 비롯한 여러 명과 단체로 찍은 사진이 실려 있다. ‘두 얼굴’은 이런 사진에서 이승만과 김노디를 떼어낸 다음 피의자처럼 보이게 키를 재는 자를 배경으로 둘이 같이 있는 사진을 만들어 방영한 것이다.

그리고 “이승만이 22살인 어린 여대생과 바람을 피웠다”고 한 후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특정하지도 못하는 백인 여성들과 놀아났다고 주장했다. 완전한 조작인데, 이는 사자(死者)에 대한 심각한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

‘두 얼굴’ 제작에 참여한 인사는 김노디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지 않았고, 이승만은 샌프란시스코가 아닌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발된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승만과 김노디가 같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고발을 당했다”고만 대답했다. 이승만과 김노디가 자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 대해서는 “CG(컴퓨터 그래픽)로 만들었다”라고 답했다. ‘김노디가 캘리포니아에 없었는데 어떻게 이승만이 맨법 위반으로 기소될 수 있는가’란 질문에는 “기소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에게 법률자문을 해준 분들은 기소한 것과 진배없다고 했는데…”라면서 말끝을 흐렸다.

 

이승만 박사학위가 왜 문제인가

이승만의 박사학위에 대한 시비는 더욱 황당하다. 이승만은 1910년 프린스턴대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는 영세중립론’(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 1912년 출간)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잘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얼굴’은 이승만이 석사학위를 받지 않고 프린스턴대로 갔고, 프린스턴대에 적을 둔 상태에서 하버드대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석사과정을 밟던 학생이 자기 학점을 들고 다른 대학의 석·박 통합과정으로 옮겨가는 것은 지금도 가능한 일이다. 석·박사 통합과정생이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시험을 통과하면 학교는 박사논문이 통과되기 전 석사학위를 준다. 그러한 상황이라면 하버드대는 이승만에게 부족한 학점을 채우게 한 후 석사학위를 줄 수 있다.

간단히 이해되는 것을 ‘두 얼굴’은 불가능한 것으로 규정해 이승만을 사악한 사람으로 몰았다. 정황이 이렇다면 비난을 받아야 할 쪽은 이승만이 아니라 민문연이다.

앞뒤 상황을 살펴보면 이승만은 ‘두 얼굴’이 주장하는 대로 친일파도 아니고 플레이보이도 아니었다. 이승만의 문제는 경제를 살리지 못했다는 것, 외교에는 달인인데 내치는 잘하지 못했다는 것, 독재를 했다는 것 등인데, 이는 이미 숱한 연구서에서 이미 지적했다. ‘두 얼굴’은 추가로 밝혀낸 것이 없다. 그런데도 허위 사실을 근거로 이승만이 친일파에다 플레이보이라는 역사 다큐를 만들었으니 민문연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박정희를 ‘칭찬’하는 ‘백년전쟁’

박정희를 다룬 ‘백년전쟁’은 ‘프레이저 보고서 1부’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유튜브 영상은 ‘두 얼굴’과 달리 단일 주제로 일관하고 있어 덜 헷갈린다. 1976년 미국에서 박동선을 중심으로 한 코리아게이트 사건이 터졌다. 그러자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산하 국제기구소위원회로 하여금 이 사건을 조사해 1978년 10월 31일 의회에 보고서를 제출하게 했다. 소위원회는 위원장이 프레이저 의원이었기에 ‘프레이저 위원회’, 보고서는 ‘프레이저 보고서’로 불리게 됐다.

이 보고서는 코리아게이트의 배경을 설명하는데, 전체적으로는 박정희의 경제개발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중간 중간 문제점을 지적했는데, 유튜브 영상은 그러한 것만 뽑아내 스토리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한국의 경제성장은 박정희의 공로가 아니라, 미국 정부의 친미 국가개발전략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미국이 자국의 위신을 높이고, 일본을 보호하며, 공산주의와의 대결에서 우위에 서기 위해 한국의 경제를 성장시켜줬다는 것이다. 이 영상은 또 일본은 미국의 지시를 받고, 한국을 일본 의존 국가로 만들기 위한 의도에서 한국의 경제성장을 지원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박정희가 다가키 마사오(高木正雄)라는 일본 이름으로 만주군관학교를 거쳐 만주군 중위를 했고, 하도 영악해 뱀 같은 남자, 즉 ‘스네이크 박(Sna-ke Park)’으로 불렸다고 비꼰다. 박 정권 때 일어난 증권파동과 화폐개혁의 문제점도 거론한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비난해도 지금 한국은 세계 8위의 무역대국, GDP 기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다. ‘백년전쟁’은 1960년 한국 경제력이 세계 101위일 때 북한은 50위였다고 했는데, 지금 한국은 경제대국이 됐고 북한은 150위권 밖으로 추락했으니 이는 박정희의 경제성장을 인정한 꼴이 된다. 그런데도 내레이터는 계속 박 정권의 경제정책을 문제 삼으니 민문연의 역사 인식이 의심스러운 것이다.

 

왜그 더 도그(Wag the Dog)

대한민국은 경제성장을 통해 민주화까지 이룩한 나라다. 동·하계 올림픽과 월드컵 등 대형 국제행사를 거뜬히 치르고 주체사상까지 떠벌일 수 있는 자유 공간을 제공했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에 대해서는 고문을 가한 것을 인정해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내렸다. 민문연은 이러한 민주국가를 친일파가 만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형적인 본말전도, 주객전도다. 사실이 아닌 사상으로 역사를 만드는 전형적인 역사 조작이다.

1997년에 나온 미국 코미디 영화 ‘왜그 더 도그’는 재선이 어려운 미국 대통령이 전쟁을 일으켜 재선을 도모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주(主)가 아닌 종(從)으로 본질을 바꾸려는 노력을 풍자한 것이다. 개가 꼬리를 흔들어야 하는데 거꾸로 꼬리가 개를 흔드는 것을 ‘왜그 더 도그(wag the dog)’라고 한다.

민문연의 역사 다큐야말로 왜그 더 도그다. 대한민국을 만들어온 주류의 노력은 도외시하고, 친일이라는 문제에만 집착해 한국 역사를 재단하려고 하니 역사왜곡에 이르게 됐다.

1980년대의 사구체 논쟁은 사회주의자들끼리의 논쟁이었다. 이 때문에 결론이 한정돼 있어 학생운동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그 논쟁을 벌인 세력은 국가 발전에 참여한 이들이 아니었다. 이제는 한국의 국가 발전에 참여한 세력도 참여하는 진짜 사구체 논쟁을 벌여야 한다.

‘백년전쟁’은 ‘근현대사 진실 찾기 프로젝트’라는 글귀로 대미를 장식한다. 진실로 근현대사의 진실을 찾고 싶다면, 민문연은 진실을 토대로 역사 다큐를 제작해야 한다. 그러지 않을 때는 그에 대한 책임도 져야 한다.

그리고 북한을 놓고도 똑같은 잣대로 진실한 역사 찾기에 나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