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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댓잎 서걱거리는 소리를 들어 보셨습니까? 지금 율곡사에 가시면 봄을 담을 푸른 댓입 소리를 들어실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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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꺾은 기억을 떠올려 봅니다. 어릴 적, 시계를 만든답시고 토끼풀꽃 참 많이도 꺾었습니다. 진달래꽃. 그 시절 우리들에겐 참꽃이었습니다. 참 많이도 따 먹었습니다. 배고팠던 시절이었지만, 배를 채우자고 그랬던 건 아닙니다.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해서 그랬고, 누가 더 혓바닥이 붉어지는지 시합을 하느라고 그랬습니다. 버들강아지를 꺾어다가 사이다 병에 꽂아둔 일도 두어 번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시절 이후, 의도적으로 꽃을 꺾어본 기억은 별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생명의 소중함? 뭐, 이런 거창한 이유로 그랬던 건 절대 아닙니다. 꽃을 꺾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을 뿐입니다.
첩첩 산 고을 산청의 정수산(淨水山) 율곡사(栗谷寺) 가는 길. 경호강으로 흘러드는 여울의 뚝 버들이, 아련한 옛 기억을 들추어냅니다. 뚝 버들에 핀 봄이 여울에 제 얼굴을 비춰보고 있습니다. 여울은 제 흥에 겨워 깔깔대느라 버드나무의 봄단장 따위에는 관심이 없는 듯합니다.
아직 산색은 겨울입니다. 이러다가 문득 꽃잎들이 봄비에 젖어 내릴 때면 혀 꼬부라진 소리로 ‘봄날은 간다’고 비탄조의 가락을 읊조리겠지요. 제대로 봄을 느껴 보지도 않고서 말입니다.
며칠 전 서울 인사동에서 허리 부러진 봄을 만났습니다. 장식용 돌함에 심어진 관상용 청 보리 싹은 심란하게 파랬습니다. 한겨울을 살아낸 자긍의 빛이 아니었습니다. 누구 하나 눈길을 주기는커녕, 짓이겨진 담배꽁초만 뒹굴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담배꽁초를 짓이긴 사람에게도 봄은 와 있을 겁니다. 머릿속 가득, 신문과 방송에서 꺾어다 나른 화려한 봄의 이미지가 총천연색으로 난무할 것입니다. 도시인들의 고단한 삶을 위로해 주려는 신문과 방송의 충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사람들의 감성마저도 지배하기로 작정한 듯한 호들갑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현대인들은 바짝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자기 감성의 주인 노릇도 하기 힘든 가련한 동물입니다.
정수산 율곡사의 들머리인 율현 마을에는 유난히 느티나무가 많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대개 느티나무를 정자나무라고 부릅니다. 정자(亭子)의 실재 여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느티나무가 사실상의 정자 노릇을 하니까요. 산색은 아직 겨울 빛이었지만 정자나무 아래로 떨어지는 빛은 봄기운이 완연했습니다. 공터 옆 마을회관에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목소리에도 활기가 넘칩니다. 이제 본격적인 농사를 앞둔 마지막 한가를 마음껏 즐기는 것 같습니다. 봄은 봄입니다.
전각 다섯 채에 불과하지만 왜소하다는 느낌 전혀 없어
날씬한 콘크리트 포장길이 끝나자 계곡물 소리가 율곡사의 풍경소리인 양 먼저 길손을 반겨줍니다. 절터를 마련해 준 석축 위로 전각들의 지붕이 가지런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전각 뒤로는 대숲과 솔숲이 청신한 기운을 드리우고 있습니다. 바람에 일렁이는 댓잎이 은빛 햇살만 골라내어 절 마당으로 흘려보냅니다. 그 빛을 그냥 밟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먼저 정수산을 올라서 땀을 좀 쏟고 나서 절을 둘러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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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축에서 왼쪽 계곡으로 정수산(828.2m)을 오르는 등산로가 나 있습니다. 경쾌한 계곡물 소리가 등을 떠미는 대로 산자락에 올라붙습니다. 10분쯤 가쁜 숨을 토해내고 나자 능선에 올라섭니다. 20분쯤 지나자 새신바위가 나타납니다. 산 전체가 흙산이어서 그런지 유난히 도드라져 보이는 암봉입니다. 남쪽 기슭은 전체가 암벽인데 진주 대동기계공고 산악회 OB들이 길을 낸 이후 진주 지역의 산악인들이 암벽등반을 즐기는 곳 중 하나라고 합니다.
새신바위 꼭대기에서 고개를 낮추자 울창한 소나무숲 속에 둘러싸인 율곡사가 아련합니다. 새신바위는 율곡사를 창건한 원효 스님이 이곳에서 산세를 굽어보고 절터를 잡았다는 전설이 전하는 곳입니다. 그 이름의 내력은 이렇습니다. 법당을 완공한 뒤 화공이 이레 동안 안을 들여다보지 말 것을 당부하고 단청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동자승이 이레 째 되는 날 몰래 문틈으로 법당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러자 벽화를 그리던 새 한 마리가 붓을 떨어뜨리고 날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새가 날아가 앉은 바위가 바로 새신바위라는 것입니다. 후대에 누군가가 만든 전설일 텐데, 이와 같은 전설은 더러 있습니다. 변산의 내소사가 대표적입니다. 진위 여부를 따질 일이 아니라, 성스러운 곳의 장엄은 사람의 손끝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습니다.
새신바위에서 또 30분쯤 걷자 제법 넓은 억새밭이 나타납니다. 나른한 봄꿈에 잠기기에 딱 좋은 곳입니다. 바라보기만 해도 모든 것이 탁 놓아져 버리는 그런 분위기입니다. 억새밭에서 정상을 오르는 길은 인공조림한 잣나무숲 사이로 나 있습니다. 마냥 걷고 싶게 만드는 고운 오솔길입니다. 억새숲에서 정상까지는 10분 조금 더 걸리는데, 정상의 분위기는 우뚝한 느낌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 정수산의 매력입니다. 자신의 정상성은 한껏 낮추는 대신, 다른 산의 우뚝함을 바라보게 하는 데는 으뜸인 조망처입니다. 북으로 황매산이, 남서쪽으로는 지리산 천왕봉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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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물 제374호인 대웅전을 중심으로 산신각, 현당을 비롯한 5채의 전각이 전부인 절이지만 왜소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습니다. / 먹는 일의 소중함을 이보다 더 정직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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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로움이라는 말의 최대치를 보여 주는 모습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 닫집의 화려함보다는 정갈함이 더 돋보입니다. / 높아질수록 작아지는 꿈. 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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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일토록 찾았던 봄, 절 마당 매화가지마다 피어 있네‘
율곡사는 앞서 말한 대로 원효 스님이 651년(신라 진성왕 5)에 창건했다고 합니다. 이후 903년(경순왕 4)에 감악(感岳)이 중창했다는 것 외에 전해오는 역사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보물 제374호인 대웅전이 조선 중기의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무렵에 중창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듬은 기단석 위 막돌 주초, 민흘림 둥근 기둥의 대웅전은 신라 문화의 바탕 위에 선 조선의 건물입니다. 조선 중기에 세워진 사찰들은 거의 기단석을 다듬은 돌로 쓰지 않았습니다.절을 나서려는데 대웅전의 꽃문살이 발길을 돌려 세웁니다. 눈에 담아두고 싶을 정도로 고운 꽃입니다. 어느 이름 모를 여승이 남겼다는 시가 떠오릅니다.
종일토록 봄을 찾았지만 봄은 없었네.
짚신이 다 닳도록 산으로 들로 헤맸네.
돌아와 매화 향기에 미소 짓나니
봄은 매화 가지마다 활짝 피어 있네.
봄이든 깨달음이든 ‘바로 지금 여기’를 떠나서 찾지 말라는 말이겠지요. 한 걸음 더 내딛으면, 찾고자 하는 바를 모양에 한정하지 말라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봄 찾기에도 주인 노릇이 절실한 세상입니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정수산 산행 쪽지정보
율곡사에서 정수산 정상까지는 걸음에 따라서 1시간30분~2시간 정도 걸린다. 원점회귀까지 3시간이면 충분하다.
새신바위를 거쳐 정상까지는 3.4Km. 돌아올 때 새신바위 못미처서 왼쪽 등산로를 택하면 길을 줄일 수 있다.
출발지점인 계곡의 물은 그냥 먹어도 좋을 만큼 깨끗하다. 이후로는 물이 없다. 새신바위의 조망도 좋지만, 정상에서 바라보는 천왕봉과 황매산은 참으로 고품격이다. 눈높이로 명산을 바라보는 특별한 감흥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