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차길진_못다한 영혼이야기_21

醉月 2011. 3. 15. 08:45

성공하는 인생은 멀리 있지 않다

배가 난파하게 되면 사람은 물속으로 빠지게 된다.
사고가 나서 다행히 생명을 건진다 해도 구조를 받지 못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생명을 잃고 만다.
바로 목이 말라서 귀한 생명을 잃는 것이다.
이것을 다시 말하면 온 천지 사방에 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조난을 당한 사람들은 물을 먹지 못해서 죽고 마는 것이다. 바닷물이 정화된 식수가 아니고 먹게 되면 계속해서 갈증만 나게 되는 소금물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람의 물결에 떠밀리면서 살고 있지만 실제로 우리의 생명을 구해 주고 위험에 처한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세상이 온통 불신의 벽으로 둘러싸인 것으로 보는 부정적인 관점일지는 모르지만 사실 우리는 이렇게 나와 마음이 통하고 생명을 같이하고 죽음을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을 거의 두지 못하고 살고 있다.
결국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순간에 가서는 우리 모두는 혼자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사람들이 물결처럼 떠밀려 다녀도 막상 죽음을 맞닥뜨리는 순간, 그 죽음에서 해방시켜 줄 생명의 은인들은 그렇게 많지 않고 사실 거의 없다.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생명의 원초적 고독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죽음의 절대성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 생활, 그리고 영혼의 세계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실제로는 영혼의 세계와 함께 살고 잇는 세계이다. 모든 움직임과 사건, 그리고 일마다 알게 모르게 영혼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어떤 때는 버릇으로, 어떤 때는 이성으로 일들이 결정되곤 하지만 인간사의 길흉화복과 성공·실패는 거의 대부분 영혼들의 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나는 감히 이야기를 하거니와 어떤 사람의 인생이 성공하느냐, 그리고 사업이 잘되느냐, 못되느냐는 사실 99%가 운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러한 나의 말에 많은 사람들이 ‘웃기는 소리 마시오’라고 할지 모르지만 크게 성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의 노력과 도전과 더불어 이 ‘운(運)’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함께 했기 때문에 성공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운을 찬찬히 뜯어보면 조상의 음덕이 대부분이다.
선한 조상과 덕과 선을 쌓고 실천한 조상을 둔 사람들은 될 것 같지 않은 일도 잘된다. 또 반대로 무엇인가 될 것같이 무르익은 일을 하다가도 조상의 음덕이 없고 집안의 덕과 선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은 막판에서 무너져 내리기 일쑤이다.
그러나 인생의 성공은 99%가 운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그 운을 크게 불리고 또 나머지 1%의 노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물음이 나올 수 있다.
나는 또 여기서 감히 말하거니와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99%의 운을 능가하는 새로운 운명률이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너무 쉽다고 믿지 않는다든가 놀라지 말기를 바란다.
그것은 ‘한 순간의 마음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인생이 성공하길 바라고 후손이 번성하고, 하는 일마다 잘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바로 바른 마음을 갖는 것, 이 하나뿐이다.
마음을 바로 하고 복을 짓고 선업을 베풀어야 한다.
혹자는 말한다. ‘뭐 줘야 할 것이 있든가 베풀 게 있어야 하지. 돈 한푼 없는데 어떡합니까?’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이야기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집 안에 있는 헌 빗자루를 들고 대문을 박차고 나가서 골목길을 깨끗이 청소 하라. 그리고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무엇이라도 도와 주라. 그것이 바로 자신의 바른 마음으로 덕과 선한 인연을 쌓는 길이다.
마음을 바르게 갖고 남에게 덕을 베풀면 나에게 덕이 오게 된다. 일상 생활에는 덕을 짓고 선업을 쌓을 수 있는 일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저 나 혼자 편안한 일, 나에게만 관계된 일만 하려고 하니까 덕과 공덕을 쌓지 못하고 그 반대 급부로 운이 안 트이는 것이다.
조상의 음덕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생을 통해 좋은 선업과 덕을 쌓는 길이다.
또한 회사를 위해, 조직을 위해 자신의 노력을 다 바쳐 열심히 일하라는 것, 이것 또한 그보다 더 큰 선업이 없는 것이다.
회사를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상사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열심히 일한다. 승진을 해서 마누라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 이것이 모두 밝고 긍정적인 동기들이며 욕망들이다.
그러나 이것을 넓게 보면 한 사람의 직장인이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은 곧바로 세상 모든 사람들을 위해 큰 선업과 덕을 쌓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자동차를 만드는 엔지니어, 에어컨을 만드는 기술자, 지하철을 움직이는 기사 아저씨, 길과 골목을 깨끗이 청소해주시는 환경 미화원 아저씨, 이들 모두는 눈에 보이지도 드러나지도 않게 세상을 밝히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모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선업을 쌓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우리는 바로 자신이 매일매일 하고 있는 일을 ‘직업(職業)’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마음은 복을 짓는 밭’이라는 말이 있다. 불교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는 분들은 여러 번 들어봤을 만큼 일반화된 불교의 도덕률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무엇인가.
바로 마음 먹기에 따라서 자신의 주위에는 복을 짓고 선업을 쌓을 기회가 산더미처럼 쌓여있다는 것이다. 바다에서 조난을 당한 사람들이 구조를 받지 못하면 귀한 생명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토록 많은 물천지에서 먹을 물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업이 잘 안 되고 하는 일이 실패하면 운이 없다, 부모와 조상들이 돈이 없다, 가정이 불우하다, 집안이 좋지않다고 이야기 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결코 큰 운명의 바다에서 살아 남을 수가 없다. 물이 천지인 바다에서 물을 못 찾아 죽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주위가 온통 먹을 물 천지인 사람이 있다. 바로 부모와 조상들의 돈, 권력, 명예를 바라지 않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열심히 해서 잘되어 집안과 부모님의 이름을 빛내야지’하는 바른 마음을 갖고 이웃을 위해 또는 회사를 위해 열심히 물건을 만들고, 청소도 하고, 배달도 하고, 경영도 하고, 배우고 가르치는 것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은 없던 운도 스스로 찾아오게 된다.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지극히 간단한 것이다.
세상을 밝게 보느냐, 아니면 어둡게 보느냐에 달려 있다.
모든 일을 역동적 사고를 가지고 긍정적으로 보느냐, 아니면 침체된 사고를 가지고 부정적으로 보느냐 하는 것의 차이일 뿐이다.
바른 생각은 힘있는 행동을 만들고 힘있는 행동은 성공을 만든다. 바로 운명이 바뀌고 팔자가 바뀌는 것이다.
부모의 돈과 권력, 명에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것이 없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자기 스스로 도전해서 나의 노력과 역할로 그러한 새로운 인연의 싹을 만든다는 것, 이러한 것이 얼마나 멋진 것인가.
성공하는 인생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바른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주위에서부터 선업을 행하고 열심히 일할 때, 운이 찾아오고 운명이 흰 구름을 차고 오르는 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통일을 원하는 한 사람

어릴 적에 먹은 짜장면 맛을 기억하는 분들은 대부분,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모르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어디 짜장면뿐이겠는가.
지금부터 2~30년 전 입고 먹고 자는 기본적인 의식주가 궁핍할 때 어렵게 기회를 만들어 먹을 수 있었던 음식들은 아직까지도 우리들 머리에 천국의 진수 성찬맛(?)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지금 먹고 입는 게 흔한 이때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짜장면과 어릴 때 먹었던 짜장면은 과연 크게 차이가 있을까.
대답은 아니다. 오히려 지금 흔하게 먹을 수 있는 짜장면의 재료와 조미료 가미 방법 등이 과거 어린 시절 먹었던 짜장면보다 더욱 훌륭한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또 다르게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은 보통 반찬이 많으면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음식이 맛있었다고 기억하게 하는 것은 결코 반찬의 가짓수가 아니라 시장기와 음식을 먹었던 그 때의 상황이 더욱 중요했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결국,
“어릴 때 먹었던 짜장면 맛이 이 세상에 살면서 먹어본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할 때 새벽일을 마치고 근처 허름한 음식점에서 먹던 국밥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고 말하는 분들은 그 당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 곧 ‘의식의 집중’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닷가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석양이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할 무렵 파도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린다고 이야기한다.
이 또한 듣는 것마저도 의식의 집중이 이루어지는 환경이 만들어지면 평소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상황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예증하는 것이다.

최근 월스트리트에서 증권 업무를 보고 있는 우리 나라 대기업의 현지 법인에 근무하는 친구와 다운타운 부근의 고급 레스토랑에서 저녁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저녁을 먹고 나온 기분은 동굴 속에서 식사를 하고 나온 기분이었다.
물론 고급 레스토랑 전부 다는 아니겠지만, 그 레스토랑은 전체적으로 분위기를 아늑하게 만들기 위해서인지 촛불같은 간접 조명을 많이 쓰고 웨이터의 주문 받는 소리나음악소리마저도 아주 조심스럽고 낮았기 때문에 흡사 몇 사람만이 큰 홀에서 식사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레스토랑에서는 북쪽으로 보이는 맨하탄 야경뿐 아니라 멀리 서쪽으로 펼쳐지는 뉴저지의 석양을 감상할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안에서 모아지는 의식을 가지고 밖의 경치는 물론 사무적인 이야기나 친구들과의 이야기도 보다 친밀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수십 년간 종교계에 몸을 담고 기도와 참선, 구명시식 등을 진행하다 보면 세상사의 번잡에 대해,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까?”
하고 물어오는 분들이 많다.
그들에게 특별한 대응책을 가르쳐 주기보다는,
“기도를 통해 정신을 한곳에 모으고 정성을 다하고 마음으로부터 바라는 것을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라.”
는 이야기를 해주지만 그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가져오는 결론은 개인에 따라, 집단에 따라 천양지차가 잇다.
결국 실패한 분들의 입장을 살펴보면 기도가 가지는 의식의 집중, 곧 한곳에 모으면서 주위의 잡된 생각을 떨쳐 버리고 목표를 향해 몸과 마음을 투입하는 것에 실패했기 때문인 것이다.
기도는 그만큼 무서운 것이다.
과거 이조시대 궁중에서 왕비와 후궁들 간에 얽혀진 질투심에서 야기되어 발달했던 ‘방중술(일종의 정신 동력. 피해자의 초상 등을 걸어놓고 저주와 증오를 퍼부어 원격으로 질병이나 재앙을 가져오게 만들었던 사술(邪術))’도 사실은 나쁜 의미에서 기도가 쓰여진 것이다.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왜 통일이 안되는가?”
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물론 또한 많은 사람들이 정치, 경제, 종교, 사상 등 통일을 위한 노력들을 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가들에게는 외람된 말씀이지만 아직까지 민족이 통일되지 못한 것은 사실 통일을 목표로 어느 한 사람도 생사의 결단을 걸고 기도를 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진정 통일을 원하는 어느 한 사람이라면 진실로 천지신명과 통하는 기도를 했다면 현재 이렇게 통일을 둘러싸고 민족간에 갈등과 수치스런 싸움은 끝이 나고야 말았을 것이다.

어째서 인간은 영(靈)을 알 수 없는가

어째서 인간은 영(靈)을 알 수 없는가.
이 문제는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규명해 내려 했던 문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무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새는 틀림없이 자기의 둥지로 찾아온다. 꽃은 계절만 되면 어김없이 꽃을 피우고 그리고 열매를 맺는다.
또 지혜라고는 있을 것 같지 않은 벌들도 사람이 감히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집을 짓고 규율이 있는 집단 생활을 한다.
이러한 일들에는 자연계의 지혜가 작용하고 있다.
인간이 영계나 영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도 실은 육체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자연계의 지혜에 의해 작용 받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계는 그 불가사의한 지혜에 의해서 인간에게 자연적 수명을 다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영과 영계의 존재를, 그리고 그 영원성을 인간이 죽기 전까지는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도록 하고 있다.
인간이 영의 일을 모르는 이유는 또 한 가지 있다.
인간은 영과 육체의 두 요소로 성립되어 있지만 인간이 자신의 육체에 깃든 영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에서 말하는 영의 존재란 인간의 의식, 이성, 사유 등과는 다른 얘기이다.
때문에 자유를 갈구하는 인간은 반드시 자기를 지배하려 하는 영과 대항해 두 요소 사이에서는 투쟁이 벌어질 것이 뻔하다.
또 반대로 인간 속에 깃든 영은 이러한 일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자연계의 존재인 인간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로 영은 인간, 그 자체가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이 영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자기의 전체는 모두가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영의 무리 가운데는 흉령이라는 것이 있어 이 영은 자기와 관계있는 자의 생명과 사고를 파괴로 몰아넣으려고 노린다. 만약 이 영이 인간의 육체에 들어가는 경우, 그 육체가 자신이 아니고 인간의 것이라는 것을 알기만 하면 당장 그 육체에 해를 끼친다.
그러나 흉령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한 그것을 자신으로 알고 귀중히 여겨 이 육체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용을 한다. 이처럼 인간사에는 자연계와 영계의 두 세계를 합친 큰 세계의 지혜가 작용하고 있다.
심령학계의 태두로 일컬어지는 스웨덴의 보르그는 이 영계와 자연계에 대해 ‘이 세상이란 영계의 넓고 무한한 공간속에 두둥실 떠 있는 하나의 고무공’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고무공 내부에도 빈틈없이 영계가 스며들어 있는데 고무공 내부는 자연계와 영계의 두 세계가 동일한 공간 속에 공존하고 있다.”
고 말한다.
그는 공간의 시간성에 대해 독특한 이론을 제시한다.
어느 공간에 책상이 하나 놓여 있는데 그곳에다 다른 책상을 놓으려면 그 책상을 치우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여기서 시간성을 배재하면 두 책상은 동일한 공간에 놓여 있는 셈이다.
여기서의 시간성은 다분히 자연계의 시간일 뿐이다.
자연계의 관념이라 할지라도 시간과 공간이 그 성질을 달리하고 있듯이 그것은 엄연히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다만 공간의 성질이 다를 따름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영계의 문제를 생각할 때도 이승의 자연계적 물질계적 습관에 젖은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영이란 공기라든가 정기(精氣)와 같은 것이거나 혹은 공중에 떠다니고 있는 에테르 같은 것이다.
영은 인간처럼 육체라고 하는 형태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일종의 영체를 갖고 있다. 그리고 지성과 이성이라든가 감각면에서는 인간이 갖고 있는 것을 소유하고 있으며 인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심령학자들의 일치된 분석이다.
지혜 있게 살려고 하는 사람, 보다 커다랗게 눈을 뜨고 이 세상을 보려 하는 사람들이 영의 세계, 다시 말해 이승, 자연계와는 다른 차원의 4차원의 세계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째서 인간은 영을 알 수 없는가에 대한 결론도 머지않아 보편적으로 밝혀질 것을 기대해 본다.

이 화살을 날린 자는 누구인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지혜가 발달해서 도구를 사용하고 언어를 통해 상호 정보를 교환하고 문명과 문화를 발달시킨 것 등이 다른 동물과 틀리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 인간을 다른 동물과 차별화 시키는 것은 사념(思念)이라고 하는 의식, 곧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개나 동물에게 의약품을 실험하기 위해 독약 등을 투입했을 때 그 대상물은 생리적인 고통만을 느끼게 된다. 약물을 투입한 사람의 목적이나 그 과정을 생각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단지 고통을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 몸부림칠 뿐이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독약을 먹게 되었을 때를 상상해 보자.
이 약물을 넣은 자는 누구인가. 왜 나는 이 독약을 마시게 되었는가. 내가 죽으면 나의 가족과 나의 재산은 어떻게 되는가 등 생리적인 고통보다 더 큰 정신적인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
결국 인간은 똑같은 독약을 먹었을지라도 다른 동물이 느끼는 바와 같이 생물학적이고 직접적인 고통보다는 정신적이고 보다 다원적인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사념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고 있지는 못하지만 생활 어디에서나 쉽게 목격할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이 낯선 사람을 보면 울곤 한다. 아기를 안고 있는 엄마는 아기가 낯을 가린다고 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낯선 사람과 아기 사이에 이미 사념의 교환, 영파(靈波)의 교환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들의 뇌파는 순수하며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는 정신의 빈 그릇으로 비유할 수 있다.
그러한 아기가 낯을 가린다는 것은 결국 아기를 어르고자 하는 사람의 나쁜 영파를 감지했기 때문이며, 그러한 나쁜 영파가 전기 담요나 전화에 ‘찡’하고 신호가 오고 전기가 통하듯 아기의 사념, 곧 정신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결국 이같은 사실은 인간이 영파의 덩어리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불경에는 마음을 한 순간 쉬고 사물을 바로 보는 정관(正觀), 정사(正射) 등의 팔정도(八正道)를 이야기하고 있으며 성경에서도 창공에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를 예로 들며 인간이 마음을 한 순간 쉬며 자신과 세계를 돌아볼 것을 가르치고 있다.
독약을 먹은 인간이 생리적 고통보다도 정신적인 고통, 곧 이 독약을 준 자는 누구인가. 누가 나에게 원한을 가지고 이런 짓을 했는가를 먼저 생각하듯이, 인간은 바로 그러한 사념에 의해서 오히려 더욱 큰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이다.
인간사에 있어 우뚝 솟아 있는 인류의 성현들은 모두 안정된 의식과 사랑하는 마음, 이웃에 선행 등을 통해 지상에서 평화의 나라가 수립되고 천국이 설 수 잇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결국 이같은 가르침은 모든 인간들이 욕망을 쉬고 자신의 위치를 돌아봄으로써 평상심을 찾고 본심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다.
어느 누가 이야기했는가.
인간은 화살을 맞으면 화살을 빼기 이전에, 고통을 느끼기 이전에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보며,
“이 화살을 날린 자가 누구인가?”
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을…….
인간은 어느 누구나 사념의 덩어리, 뇌파의 덩어리, 마음의 한 묶음을 가지고 있다.
인간이 지구 위에 살면서 느끼는 고통의 대부분은 바로 고통의 근원을 마음 안에서 찾지 않고 밖에서 찾기 때문인 것이다.
4대 성현이 인간들을 가르칠 때 큰 도덕보다는 작은 도덕율, 야망보다는 작은 선행을, 외부의 적보다는 내부에 있는 본성의 적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친 것도 이 때문이다.

 

영혼과 우주의 시스템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질서이다.
질서는 단지 한 인간의 개체를 유지하는 기본이 될 뿐 아니라 우주 전체의 현존을 있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우주의 질서, 인간 내부의 질서는 사회학적인 조화와 종의 영속성이란 생물학적인 개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천지(天地) 간의 질서는 바로 우주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변하지 않는 불변의 법칙들로서 행성들, 해와 달, 지구를 움직이는 기본적인 힘이 된다.
이러한 질서는 어떠한 한 인간에 의해, 그의 단순한 의지에 의해 좌우되거나 깨지지 않는다. 만약 천지간의 질서를 변화시키려거나 파괴시키려하는 자가 있다면 스스로 큰 질서의 틀에 끼여 파멸해 버리는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한 철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파괴할 수 있는 법칙은 유일하게 인간이 만든 법칙뿐이다.”
인간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법칙,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인간은 탄생해서 죽는 순간까지 천지간 대우주 법칙과 인간 개개인의 내부에 존재하는 소우주 법칙에 의해 지배를 받으며 살아간다.
또한 대우주 법칙과 소우주 법칙은 긴밀하게 관계를 맺고 있으며, 한 인간의 운명과 생로병사에 이르기까지 만사가 대우주 법칙과 소우주 법칙의 반응과 조화속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연과 필연을 말할 때, 이 세상에 우연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일은 없다. 모든 것은 결국 우주 법칙들의 상호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결과론에 불과한 것이며, 다만 전체 우주 법칙의 외연(外緣)적 부분을 고찰하지 못했을 때 우연이라는 말을 하게 된다.
우연히 일어난 일, 우연히 마주친 사람 등의 일반적 표현은 결국 인연에 따라, 우주의 법칙에 따라 나타나고 만나는 필연적인 사건들인 것이다.
이러한 세상 만사에 배후에서 그 조화와 반응을 조정하고 있는 우주 법칙들은 최종적인 목표, 곧 우주의 완성, 큰 깨달음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
인간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주 법칙이라는 질서 속에서 완성을 향하여 나가는 프로그램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인간은 이러한 우주의 커다란 법칙과 가치를 인식할 때, 깨어있는 정신을 가질 수 있으며 보통 인간의 수준을 넘어 최종적인 완성된 인간의 모습에까지 접근할 수 있다.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
이것이 천지간의 가장 큰 우주 법칙이다. 모든 창조물과 조물주의 존재, 완성의 경지,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생각한다는 것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오히려 하나의 개체, 개체들에게는 의식한다는 것,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주의 창조, 생명의 창조와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한 인간, 한 개인의 의식은 극히 작은 부분이지만, 그 작은 부분은 결국 커다란 세계 역사를 사유하고 가치를 탐구하는 기본적인 요인이 되기에 가장 귀중한 것이다.
현대에 들어와서 발달되기 시작한 인지과학(認知科學, cognitive science)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의식에 대해 궁극을 캐어 들어간 결과 ‘인간은 우주로 열린 작은 창’이라는 종교적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장차 계속될 학문인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본질을, 의식의 가치를 어디까지 규정한 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발전과 발달을 거듭하고 있는 과학이 종교의 우상과 편견을 현재까지 수없이 파괴시키고 변화시켜 왔기 때문이다.

시간의 법칙에 대하여 생각해 볼 때, 우주 공간 모두는 시간의 지배를 받고 있다. 시간을 고대, 현재, 미래로 나누어 생각한 것은 인간이지만 그 한계를 벗어나 자유자재로 시간을 제어하거나 통제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주 창조 당시, 조물주는 인간과 만물을 시간이라는 한계속에 가둬놨으며 그 한계는 결국 인간에게, 만물에게 벗어날 수 없는 법칙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시간의 법칙이 단지 직선적으로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연장되는 디지털 속성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의 단적인 예를 두 가지로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가 3단계로 나뉘어질 수 있도록 단순구획된 것이 아니고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하나로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연기(延期)론에 바탕을 둔 이야기지만, 현재는 과거의 인연에 따라 결정지어지는 기대치라는 것을 생각할 때 시간이 가진 직선적 개념은 사라지게 된다.
또한 먼 미래는 우리가 살아온 먼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결국 우주의 시간은 시작과 끝이 없는 연결된 고리로써 서로가 서로에게 밀접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심지어는 작용과 반작용을 주고 받는 하나의 몸체를 가진 실체이다.
둘째, 시간은 갈수록 압축되어 나간다는 것이다.
간단한 말로 과거의 천년이 근대의 백년이고 근대의 백년을 현대의 10년 꼴로 시대는 급변하고 발전해 나가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놓고 볼 때 인간이 불을 쓰고, 도구를 만들게 되기까지는 수십만 년이라는 기간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그 후 인간이 사회 조직을 만들고, 국가를 만들고, 경제 제도를 만들게 되기까지는 수천 년의 세월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 후 인간이 전기를 발견하고, 컴퓨터를 쓰고, 전화로 서로 대화하게 된 것은 단지 수십 년 만의 변화에 불과하다.
앞으로 물질 문명의 속도가 가속화되어 나감에 따라 인간이 인간의 문화나 물질 발전 속도를 조절하지 못하는 상황에 닥칠 날이 올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체내의 엔트로피(entropy)가 높아져서 최종적으로는 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부조화가 발생함으로 말미암아 사회 전체가 불균형으로 발전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시간도 물질의 압축과 팽창처럼 시간의 영속(永續)에 따라 압축되며 결국 블랙홀의 최종 단계에 큰 폭발이 일어나는 것과 같이 인류 역사의 시간도 큰 폭발 속에서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물질은 운동을 계속한다.
우주간에 창조된 모든 것은 운동을 하고 있다. 아니 우주 자체가 운동하는 유기체다.
작게는 모든 분자, 원자, 소립자에서부터 크게는 행성과 성단(星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운동하고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현재 이 자리에 서 있는 한 개인이 ‘나는 변하지 않는다. 나는 현상을 유지하고 싶다.’고 제아무리 소리쳐도 그의 몸과 마음뿐 아니라 환경 또한 시시각각으로 변하고 있다.
어떤 권력자라도 높은 직책을 차지하고 영원토록 그 자리를 차지하고 싶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그 자리가 남에 의해서 대체되어져야 한다. 물질에 대한 소유권도 마찬가지이며 인간의 만남 또한 영원한 것은 없다.
우주간에 아니 우주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법칙은 인간이 그러한 변화 자체를 냉엄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들, 존경하는 부모, 훌륭한 스승, 신뢰할 수 있는 제자와 후배들 모두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물질적인 형태를 벗고 죽음이라는 단계를 통해 내 곁에서 사라진다. 아니 어떤 단계에 가면 내가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그 모든 것을 잃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가지는 숙명이며 천지간의 불변의 법칙이기 때문에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변화시킬 수 없다.
인간이 이러한 변화의 큰 바다에서 자신의 본심을 지키고 완성으로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변화의 이면에 있는 변화의 가치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변화는 잇는 가치를 잃는다는 패배적인 관점이 아니고 새로운 가치를 계속적으로 창조해 가는 혁명적인 개념이다.
결국 인생은 새로운 것을 찾아나가는 여행이며, 그 여행 자체를 인정한다면 변화는 오히려 성취와 완성을 자극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우주의 법칙에는 다음의 여러 법칙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① 의식하는 상념의 법칙(The law of conscious thought)
    의식하는 상념없이는 아무 것도 창조될 수 없다.
    만물은 우주심의 의식하는 상념이나, 그의 분령들의 의식하는 상념에 의해서 창조되는 것이다. 모든 주관적인 창조물들은 부분 의식이나  

    관계 의식의 상념 결과이다.
    부분 의식은 인간 영혼이고, 전체 의식은 신이다. 카발리에 의하면 이 우주속의 모든 인간 영혼들을 합치면 거대한 사람이 되는데 이를 

    Adam-Kadon이라 부른다. 이는 곧 신(神), 하느님이라 부르는 신성한 인간이다.


② 시간의 법칙(The law of Time)
    시간이란 물질의 방사(放射)와 물질의 운동이 나선형 공간관을 지나가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나선형 공간관은 우주 공간이

    이동하는 통로이다.


③ 물질의 영구 운동 법칙(The law of perpetual movement of Matter)
    모든 원자, 모든 전자, 모든 분자들은 항상 운동하는 상태에 있다. 이와 동시에 그 자신의 입자들을 계속 방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온화의

    물질 붕괴 현상은 새로운 형태의 물질을 발생시킨다.


④ 음(陰)과 양(陽)의 법칙(The law of positive and negative)
    음극과 양극의 두 극성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못한다. 만물 속에 있는 이 둘의 존재는 형상화의 기본이다.


⑤ 진동의 법칙(The law of vibration)
    모든 것들은 각기 다른 진동률을 지니고 있다. 이 진동률에 따라서 형상화되는 형태가 결정된다.


⑥ 진보의 법칙(The law of progression)
    모든 공간들 속에서는 정체되어 있는 것은 없다. 만물은 계속적인 운동과 변화와 진보를 하고 있다. 유한계와 무한계의 모든 곳에서 이것을

    깨닫는 자는 집착에서 해방된다.


⑦ 만물 일체의 법칙(The law of oneness)
    신은 모든 것이다. 왜냐하면 만물이 그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유한계의 모든 것들은 우주심의 표현이요, 우주의 한 부분인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이다. 신은 곧 우주 의식(Cosmic consciousness)이다.


⑧ 윤회의 법칙(The law of Reincarnation)
    윤회의 불변의 법칙은 모든 사람에게 경험과 진보의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인간은 유한계에서 더 이상 경험이 필요없는

    지점에 도달할 때까지는 계속 윤회한다.


⑨ 원자의 법칙(The law of atomic)
    모든 진동 주기에서 같은 것은 같은 것을 끌어당긴다. 그래서 양전자들은 같은 균형의 음전자들을 끌어당긴다. 또한 음양의 법칙과 원자

    법칙은 결합해서 작용된다.


⑩ 생명의 법칙(The law of life)
    모든 형태 속에서 생물과 무생물을 결정하는 요소는 영(spirit)의 양(量) 이하이면 무생물이 되고 그 이상이 되면 생물이 된다. 만일 생명체

    내부에서 영의 양이 기준 이하로 떨어지면 죽음이 일어난다.


⑪ 원과 곡선의 법칙(The law of the circle and curve)
    우주적인 관점에서 보면 유한계와 무한계의 만물은 기본적으로 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변화의 법칙과 진보의 법칙을 통하여 모든 것들은

    각에서 곡선으로, 곡선에서 결국에는 원으로 된다. 원이 완성될 때 완전의 순열(順列)이 된다.

    물질계는 각, 아스트럴계 곡선, 맨탈계 이상은 원의 세계이다. 가장 단순한 도형속에서 많은 신비가 숨어 있다.


⑫ 삼각 법칙(The law of the triangle)
    유한계에 나타난 만물들은 영과 영혼과 우주 먼지를 상징하는 삼각형의 3점을 통하여 존재한다. 위 꼭지점을 1이라 하고, 아래 두 꼭지점을

    2 라고 하고 이 세 점으로 둘러싸이는 공간을 3이라고 한다.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만든다. 이 둘은 음과 양이다.


⑬ 물질 세계에서의 의식 법칙(The law of consciousness in the material plane)
    물질 속에 나타난 부분 의식(unit-인간 영혼)은 먼저 물질체를 벗고 의식으로 우주계에 들어가기 전에는 완전하게 우주심에 접촉할 수

    없다. 공간은 그것을 차지하고 있는 것에 의해 특성을 지닌다.
    이 특성들에 의해서 공간이 나뉘어져 있다. 이 지상의 영혼들은 능력을 갖지 못하면 다른 공간(천체)으로 갈 수 없다.


⑭ 영혼의 성장 방향(The direction of Soul growth)
    우리의 모든 경험은 우리에게 더 큰 경험의 길을 제시한다. 경험은 진보를 가져오고 진보는 결국 우주 의식에 접촉하게 된다.


⑮ 의식의 운동의 한계(The limitation of movement of conscious)
    우주 의식은 전체 또는 일부분으로 그 자신의 각과 곡선들의 조화를 이루는 방향과 공간으로만 이동해 갈 수 있다. 낮은 우주 의식은 더

    고도의 우주 의식이 이미 차지하고 있는 공간으로 들어갈 수 없다. 그 이유는 그 자신의 각들과 곡선들이 고도의 우주의식의 각과 곡선에

    익숙하지 못하여 부조화를 만들어 낼 것이기 때문이다.


⑯ 부정(陰)의 법칙(The law of negative)
    인간이 계속 부정의 힘에 묶여 있게 만든 유일한 책임은 그 자신에게만 있는 것이다. 부정은 부정위에서 자라고 부정만을 흡수한다고 한다.


⑰ 시간의 한계(공간과 주기)(The limitation of Time(space and cycle))
   시간이란 물질이 공간을 통과해 가는 물질 운동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며 우주심에 의해 활동하고 있다. 시간은 통과해 가는 공간관에 의해

   제한받고 있다. 즉, 그 운동은 제6차원에 의해 제한된다. 시간(time), 공간(space) 이 둘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공간관(space-tube)을

   지나기 전에 우주의 밤이 온다. 이때가 마지막 날이다.


⑱ 주기의 법칙(The law of cycles)
    모든 원자들은 변화의 법칙에 의해 끊임없이 그 자신의 입자들을 방출한다. 또한 다른 법칙도 따른다. 영이 양성이라면 원자는 음성이므로

    원자는 영을 끌어당긴다. 이렇게 해서 물질 분자가 만들어지고 이 분자들이 모든 다른 종류의 물체와 육체를 형성한다. 더 많은 양의 영이

    유입되면 한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 혹은 진화한다.
    원자는 물질과 에너지의 교차 영역이다. 의식은 시작없는 창조의 산물이고 유체는 시작있는 창조의 산물이다.

    이 둘은 다른 진화의 길을 간다.


⑲ 인과의 법칙(The law of cause and effect)
    나타나 있는 모든 것들은 현재의 결과를 가져온 원인이 먼저 형성되었던 까닭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순간순간의 모든 행위는 그 자신의 결과를 가져올 원인이 된다. 어떤 원인에 의해서 나타난 결과를 만나는 방법에,

    이것은 또 다른 원인이 되어 그 결과를 가져온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그대는 신의 결과라면 신은 그대의 원인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일어나고 잇는가가 아니다.

    어떻게 반응하는 가이다.

 

만법귀일(萬法歸一)

‘도둑에게도 도(道)가 있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도둑도 대도(大盜)가 되려면 남다른 지혜와 용기가 있어야 한다.
어느 집에 어떤 보물이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려면 지혜가 있어야 하며 또 그 집의 담을 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게다가 도둑들도 나름대로의 신의와 믿음이 있어야만 영업(?)을 계속할 수 있다.
훔친 물건을 공평하게 나누고 또 그것을 처분하는 장물아비와의 관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신의이기 때문이다.
용기, 지혜, 신의를 다 갖추었다면 그것이 다 도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처럼 세상에서 가장 지탄받는 나쁜 짓인 도둑의 길에도 도가 있다. 하물며 험난한 우리네 인생살이에 도가 없고 또 그 도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어디 될 말인가.
인생의 도(道)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사람답게 사는 일이다. 사람답게 산다는 것은 자신에게 충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다. 타인의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누구 때문에 자기의 인생이 어떻게 됐고, 또 무엇 때문에 자기가 어떻게 됐다는 얘기를 자주 하곤 한다.
여러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 자신뿐 아니라 남의 문제는 일견 자신의 문제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엄밀히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 세상 일 가운데 남의 일이란 없다. 모두 자신의 일이고, 자신이 지금 처한 환경은 바로 자신이 과거에 행한 일에 대한 결과로써 나타난 것일 뿐이다. 이를 불가에서는 과보(果報)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순간순간 충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도를 지키고 닦아나가는 일인 것이다.
공자님의 말씀 가운데 신독(愼獨)이란 말이 있다.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남이 없도록 삼감을 지킨다’는 말이다.
조용하게 자신을 반추하는 사람에게는 남의 탓이 있을 수 없다. 매순간을 충실하게 살아가는 태도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얼마 전 유수한 연구 기관에서 일한다는 핵물리학자 한 삶이 필자를 찾아왔다. 첨단 과학을 다루는 사람이었는데도 인간 생명의 기원이랄지 영혼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꽤 많은 편이었다.
자연스레 나의 전문 분야인 구명시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이야기를 하던 끝에 자신도 돌아가신 형님의 구명시식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해서 날짜를 정했다.
그러나 구명시식 날짜가 되어도 그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정작 그날이 됐는데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무슨 사연이 있겠거니 하고 짐작은 했지만 영 마음이 개운치 않았다.
어쩌면 과학자라는 자신의 신분에 구명시식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그랬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그때 구명시식을 하겠다는 말이나 하지 말 것이지, 한다고 했다가 안하는 것은 거짓이 아닌가. 이는 자신을 속이는 일일 텐데…….

진묵 대사가 속가의 어린 시절 혜영 스님을 찾았다.
“너는 왜 여기를 찾아왔으며 무엇을 바라고 왔느냐?”
당대의 고승 혜영 선사가 물었다.
“네, 부처가 되려고 왔습니다.”
총총한 눈의 소년 일옥(진묵 스님의 속명)이 대답했다.
“깜찍한 말이로구나. 어떻게 하면 부처가 된단 말이냐?”
“하기야 제가 본래 부처인데 세상 사람이 몰라주기 때문에 부처가 되는 흉내를 내볼까 하고 왔습니다.”
“네 말과 같이 본래 부처라면 어찌하여 지금 중생의 몸을 받았느냐?”
“스님, 중생과 부처가 본래 둘입니까?”
“허…….”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라면 부처가 되겠다고 수행할 필요도 없지 않느냐? 또 네 말대로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부처니 중생이니 하는 두 이름이 있겠느냐?”
“스님! 아는 사람에게는 둘이란 말도 틀리고 또 둘이 아니란 말도 오히려 우스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깨달으면 부처요, 그렇지 않으면 중생이기 때문입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자신을 아는가 모르는가에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 자신을 속이지 않는 담담한 자세를 배우려 할 밖에요.”
맞는 말이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마음을 비우는 것이 바로 부처가 되는 길인 것이다.

 

거문고 현을 다루는 자세(如調絃之法)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소오난이라는 비구가 있었다. 출가하기 전 그는 예술인이었다.
천성이 밝고 부지런한 그는 공부에 무척 열심이었다. 밤에도 자지 않고 열심히 정진했다. 그러나 결국 깨닫지 못하는 자신의 능력에 비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정을 알게 된 부처님이 소오난을 불렀다.
“네가 세속에 있을 때 거문고를 타본 일이 있지 않느냐?”
소오난은 그렇다고 부처님께 대답했다.
“그럼 그 거문고 줄을 너무 죄면 소리가 어떻더냐?”
“소리가 끊어집니다.”
“너무 늦추면?”
“그때는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줄은 알맞게 골라야 소리가 제대로 나오게 됩니다.”
이윽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다.
“그렇다. 정진도 그와 같이 해야 하느니라. 너무 조급히 서둘러하면 들떠서 병이 나기 쉽고 또 너무 느슨하게 하면 게으름에 빠지게 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너무 집착하지도 말고 게으르지도 않도록 꾸준히 힘써 닦도록 하여라.”
소오난은 이와 같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이날부터 거문고 줄을 고르듯이 정진하여 마침내 도를 깨치게 되었다.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나오는 <여조현지법(如調絃之法)>의 이야기다.
세상사도 마찬가지다.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고 과다하게 욕심내면 되는 일이 없다. 그렇다고 너무 느슨하게 게으름을 부리면 더욱 되는 법이 없다.

필자를 곧잘 찾아오던 소녀가 한참 동안 발길이 없어서 무척 궁금했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길에서 그 소녀를 만났다.
반가운 인사를 나눈 뒤 왜 그리 얼굴을 볼 수 없었느냐고 했더니 교회 일 때문에 바빠서 그랬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답지 않게 인생의 문제며, 세상의 일에 폭 빠져 깊은 관심을 지닌 그녀가 종교를 갖는 일은 필자도 적극 찬동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부처님과 소오난 수좌(首座)의 일화가 생각났던 것이다.
월요일에는 성가대 연습, 화요일에는 주일학교 교사 모임, 수요일에는 수요예배, 목요일에는 성경공부 모임,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청년회 모임, 일요일에는 정기예배와 구역예배로 도무지 틈을 낼 수가 없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교인들 개개인의 생활은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생활의 폭을 이처럼 꼭 교회 안으로 국한시켜야만 진정한 신앙 생활이 된다는 말인가.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예전처럼 활기 있고 발랄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갈 길이 바쁘다며 무척 긴장되어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부담스러워하는 기색마저 읽었다면 필자의 과장일까?

필리핀 속담에 재미있는 것이 있다.
‘두 마리 코끼리가 싸우면 우리 풀밭이 망가진다. 그러나 두 마리의 코끼리가 사랑을 하면 우리의 풀밭이 더 망가진다.’
음미할수록 웃음을 머금게 하는 재미있는 속담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풀밭을 망가트리지 않게 할 수 있을까?
역시중용의 도를 지키게 하는 것이다.
두 마리의 코끼리가 증오가 어린 싸움이 아닌, 또 때아닌 격렬한 애정의 행위가 아닌 적절한 친선의 감정을 갖게 되어 여유롭게 노닐게 된다면 풀밭은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사랑의 행위가 필요할 때가 있다.
그땐 그까짓 풀밭쯤 망가져도 상관없다면 대담한 자세로 적극 임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언제 사랑의 행위를 할 것인가 적당한 때와 장소를 가리는 일일 것이다.

중생 교향곡(衆生交響曲)

스님들이 많이 계신 대(大)가람의 가장 필수적인 요건은 스님들의 수련과 수행하기에 적당한 분위기이다.
사찰은 스님들이 기거하는 수련의 장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교와 사찰의 커다란 목적이며 목표가 중생 구제에 있는 만큼 일반 신도 대중이 친근감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찾을 수 있는 분위기도 중요하다. 그러나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원력으로 용맹스럽게 정진에 나서서 구도의 길을 닦는 스님들을 받들고 돕는 일이야말로 가장 큰 복덕이라 할 수 있기 때문에 불법을 따르는 불자(佛者)라면 이 일에 신경을 써야 마땅하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한국의 유명 사찰, 특히 많은 대중이 기거하는 본산급의 대가람들은 이런 구도장과는 거리가 먼 유원지로 변했다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하루에도 작게는 수천에서, 많이는 수만 명에 이르는 관광객들이 사찰을 찾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우리 나라에서 산색 좋고 물 맑은 좋은 장소는 모두 사찰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부처님의 법력을 다시금 우러러보게 된다.
요즘 사찰을 찾는 관광객들은 입장료를 내고 들어오기 때문에 자신이 투자한 본전을 뽑겠다는 요량으로 사찰내를 온통 휘젓고 다니기 마련이다.

한국에 있는 대가람 가운데 가장 스님들이 수련하기 좋은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곳이 전남 승주에 있는 송광사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도 가야산 해인사가 교학에 더 치중하는 강원(講院) 중심의 대가람이라면 송광사는 참선에 더 치중하는 선원(禪院) 중심의 사찰로 알려져 있다.
또 송광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선문(禪門)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석사자 구산 스님이 계셨던 곳이기도 하다.
송광사 가람을 포근히 안고 있는 조계산의 짙푸른 산색하며 가람을 따라 굽이 도는 산개울, 그윽한 사찰의 정취는 범인들에게도 불법에 귀의하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유려한 경관과 존경받는 방장 선승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그곳 송광사에 많은 관광객 참배객이 줄을 잇는 것은 당연하다.
때문에 송광사에서 공부하는 스님들이 주위가 시끄러워 공부에 집중이 안 된다고 불평과 불만이 대단한 것을 그곳을 방문할 때마다 경험하곤 한다.
특히 한창 구도의 열정에 가득 차 있어 쑥물이 뚝뚝 떨어지는 젊은 남자 스님들일수록 그 불만의 도가 더하다.
그럴 때마다 필자는 그 젊은 스님들에게,
“스님 동중정(動中靜)의 도를 배우십시오. 중생 교향곡의 아름다움을 느껴 보십시오.”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곤 한다.
그 스님들뿐 아니라 바쁘고 복잡한, 그리고 이래저래 시끌벅쩍할 수밖에 없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동중정’의 지혜이다.

조선 말기의 대덕 진묵 스님은 전주 시장 한복판에서 선 공부를 하신 분으로 유명하다.
그 분은 장이 서는 날이면 이른 새벽부터 저자거리에 내려가 하루종일 서성이며 이것저것 구경하시다 장이 파하는 어둑어둑 해질 무렵, 장꾼들과 함께 저자거리를 나서곤 하셨다.
스님께서 저자거리를 나서며,
“오늘 장은 참 잘 보았는데.”
하면 이날 공부가 잘되셨다는 얘기이고 반대로,
“오늘 장은 영 형편 없어. 전혀 수지가 맞지 않았는걸.”
한다면 이는 선공부가 잘 안 됐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필자는 진묵 스님이야말로 중생 교향곡을 잘 아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가운데 산이 나를 보고
한가한 가운데 내가 산을 바라본다
서로 보는 것은 같지만 그 마음자리가 다르니
보이는 것 또한 다르지 않을까
그러나 한가함이나 바쁨이나 모두 한자락 덧없는 마음이거늘
보이는 산이 달라질 리 있으랴
나는 바쁜 가운데 한가함을 찾는
동중정의 지혜를 산에서 배운다
그렇기 때문에 산 아래 마을서 울리는 교향곡
언제나 내 곁에서 울리는
중생 교향곡을 사랑할 줄 알게 되었노라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언제나 시끄러운 저자 바닥 한복판에 있어야 하는 필자가 자기 합리화처럼 애송하는 어느 스님의 『중생교향곡』이란 제목의 시다. 그 분은 등단한 시인이다.
왠지 오늘은 집에 돌아가면 다락방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을 야외 전축을 꺼내 폴 모리아 악단의 경음악곡 『사운드 오브 사일런스』를 듣고 싶다.
그 음악은 시인 스님의 토굴에서 들었던 음악이기도 하다.

내가 부처라는 믿음

회산(晦山) 스님은 조선 말기 암울했던 시기에 크게 선풍을 일으켰던 대덕(大德)이다.
법명을 ‘보혜’로 했던 스님은 울암경의(蔚巖經義)의 법을 이은 분이기도 하지만, 일봉 인곡 선사에게 화엄경을 전수 받고 크게 깨친바 있다는 선교(禪敎)를 두루 섭렵한 통불인이기도 하다.
초의 선사와 선을 농하던 붕우였던 회산당은 문집 1권을 저술로 남겼다. 그의 문집 가운데는 천지팔양신주경 강화(天地八陽神呪經 講和)라는 저술이 발견된다. 어쩐지 그의 선풍이며 불지식과는 어울리지 않는 저술이다.
‘불설 천지팔양신주경’이라 하면 한 번만 암송하면 애 못 낳는 여인이 수태를 하고, 이 경을 두 번만 암송하면 전쟁에 나간 아들이 살아 돌아오고, 세 번만 암송하면 구천을 헤매는 망부·망모가 천상에 오른다는 식의 내용을 담고 있다.
굳이 불설(佛說)이란 접두어를 붙인 것에서 짐작할 수 잇듯이 석가모니 세존께서 생전에 설(說)하신 법문은 아닌 듯싶다.
석가의 가르침은 스스로 자신이 깨쳐 세상과 인생의 이치를 바로 알리는 것이었다.
이같은 맥락에서 보면 우리가 흔히 암송하는 경 가운데는 석존의 가르침과는 영 거리가 먼 듯한 내용을 담은 경들이 많다. 따지기 좋아하는 후학들은 이를 위경(僞經)이라고 분류해서 화엄경, 법화경 등 진경(眞經)과 구별해 그 가치를 폄하(貶下)하기도 한다.
화엄의 높은 경지를 증득(증득)했고 무수한 공안(公案)을 깨친 회산 스님이 천지팔양신주경이 위장이라는 것을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럼에도 스님이 이 신주경의 가치를 높이 두고 자신의 문집 3분의 1을 차지하는 분량으로 그토록 중요하게 다뤘던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민초들, 범부 중생들의 근기(根氣)다.
천지팔양신주경은 그 여원이 중국의 원말(元末) 명초(明初)시대 의정 삼장 화상의 석교문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그 시대나 선말(鮮末)의 우리 상황이 백성들에게는 너무도 힘들고 고달픈 시기였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노파들은 아들의 생사에 가슴을 졸여야 했고 당장 먹을 것, 입을 것도 없는 판에 부모의 제사를 모실 수가 없었다.
부패 왕권의 가혹한 가렴주구는 민조들을 도통 정신 못 차리게 하는 시기였다.
이런 시기에 세상은 무상한 것이니라, 마음을 닦아 선정에 들어야 하느니라, 생노병사가 오직 고통이거늘 빨리 무상도(無常道)를 증득해야 하느니라, 하는 것은 씨나락 까는 소리로밖에 여겨지지 않을 것이 뻔하다.
때문에 새벽부터 밤이슬 내릴 때까지 들에서, 밭에서 허덕여야 하는 민초들에게 신주경은 그야말로 신주 단지와도 같은 것이었다. 굳이 머리를 싸매고 이 이치를 알아내려 하지 않아도 좋았다. 또 지친 몸을 이끌고 절에 올라가 부처님께 꽁꽁 처매둔 쌈지돈을 바치지 않아도 좋았다.
들에서든 부엌에서든 생각날 때마다 이 경을 외우면 아들이 살아온다는 확신에 생기가 돌았고 부모님이 천상에 오른다는 믿음에 활력이 절로 났던 것이다.
회산 스님도 이 믿음을 본 것이다.
남루한 옷에 구부러진 허리, 마디마디 불거진 흙투성이 손, 그러나 믿음이 있는 눈동자는 빛을 발했다. 믿음이 있는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 순간 살아 있다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
자신이 생가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믿음을 지니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생명이 아니다. 그 믿음이 자식을 살아 돌아오게 했고, 그 믿음이 남편을 지극한 보살로 보이게 했기에 자연히 금슬이 좋아져 옥동자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같은 믿음에 차 있는 범부 중생의 빛나는 눈동자 속에는 강가의 모래알만큼 많은 징ㄱ의 중생이 모두성불하기 전에는 자신의 성불을 멈추고 그들을 돕겠다던 10대 발원의 부처님 모습이 들어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현실은 누구에게나 괴로운 법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을 잊으라기보다는 맞서 싸워나가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가르침이 진정한 가르침인 것이다.
극복하는 방법은 믿음만 있다면 저절로 솟아오르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부처님인 것이다.
회산 스님은 석가세존이 아닌 민초 부처님의 설법을 마음으로 들으셨던 모양이다.

촛불의 미학

촛불은 제 몸을 태워 빛을 발하는 존재이다.
우리는 흔히 확고한 의지를 담고 주위를 밝게 하려는 행위를 촛불에 비유하곤 한다. 또 불가에서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품 가운데 초는 향과 꽃과 더불어 가장 뜻 깊은 공양물로 꼽히고 있다.
제 몸을 태워 세상을 밝히려는 숭고한 희생 정신, 그것이 바로 불가에서 말하는 덕목 가운데 으뜸인 보살도의 정신인 것이다.
촛불 하면 생각나는 구라파의 철인이 있다.
바로 가스통 바슐라르이다.
불란서의 철학자이며 문학가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저서 『불의 정신 분석』 『촛불의 미학』 등은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저작이다.
그는 이 우주를 물, 불, 공기, 흙 등 4원소의 개념으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정신적 요소에 의해 그것들이 결합한 것이 생명체라고 설파하는 등 그의 사유 방식과 논리에는 불교적 요소가 많이 눈에 띈다.
그의 논법 가운데 필자가 가장 흥미를 끌었던 것은 명상이다.
그는 우주의 실체를 포함해 모든 것을 인간의 명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고 설파한다. 그는 한 자루의 촛불에도 우주의 진리, 생명의 원천이 담겨져 있다고 말한다.
촛불이 제 몸을 태우며 발산하는 세 가지 불꽃에는 지순해지려는 인간 이성의 의지, 높이 오르려는 정순한 고요, 불순한 것을 태워없애 깨끗한 곳으로 다가가려는 생명의 본래적 바람, 촛농은 녹지만 불꽃으로 살아 남는 되돌림의 법칙, 이런 것들이 그가 불꽃을 숭배하면서 그 속에서 깨달은 이치라는 것이다.
그는 촛불이 지순한 정신으로 끝없이 자신을 태우듯 인간도 가장 정순한 마음으로 명상에 잠겨 염원하면 무엇이든지 이룰 수 있다고 설파한다. 이는 또 자신의 경험담이기도 하리라.
그러나 그의 저서를 처음 접했던 17년 전에는 어렴풋이 그럴 수도 있겠거니 싶기는 했지만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부처님이 세상 만유의 진리를 깨치신 것도 바로 이 선정(禪定)을 통해서였다.
7년 고행 끝에 부처님은 육신을 괴롭히는 고행이 바른 수행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보리수 나무 아래 가부좌를 틀고 앉으셔서 고요한 삼매(三昧)에 드셨다.
이같은 삼매 속에서 어느 날 석존은 샛별이 떠오르는 광경을 보면서 홀연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이것이 있는 인연 연기의 진리’를 깨달으셨던 것이다.
그날 이후 무수한 현인(賢人) 선자(先者)들이 부처님과 똑같은 선정 삼매의 방법으로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보겠다고 나서게 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바슐라르도 깨달은 선자의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석존을 깨달음으로 인도했던 샛별이나 바슐라르에게 해안을 던져준 촛불은 모두 어둠을 밝혀 주는 빛이라는 점에서 일치한다.

그런데 세상은 원래 어둠이었다.
얼마 전 필자가 늦은 밤 글을 쓰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을 생각으로 촛불을 켜 놓고 그 불꽃을 바라보며 석존과 바슐라르를 생각하다 문득 깨달은 사실이다. 깨달았다기보다는 홀연히 보여졌다는 표현이 바르리라.
우주의 근원, 정신, 이성, 영혼, 운명, 법칙, 그리고 진리라고 불리우는 모든 비물질적인 요소들이 한데 모여 있는 그곳이 필자의 눈에 비쳐졌던 것이다. 그곳은 마치 콜 타르 석탄을 건류할 때 생기는 흑색의 끈끈한 액체가 부글부글 끓고 있듯이 액체도 아니고 고체도 아닌 끈적끈적하다고 느껴지는 물질이 가득 차있는 곳이었다.
세상의 모든 비물질적인 요소가 이곳에 모여 있고 현실 세계의 일은 이곳의 반영이라는 것이었다. 누군가가 말로 설명하는 것은 아니었는데 몸으로 그렇게 느껴졌다.
그곳이 이 지구의 상공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지하에 있는 것인지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차원을 달리 하는 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내 정신의 에센스도 그곳에 한데 어울려 있다고 했다.
평소에 우리 범인들은 우리의 정신 세계가 그곳과 교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정신 세계가 정순하지 못해서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정순한 명상으로 정신 세계를 가꿀 수 있다면 이곳과 직접 교류·교감이 가능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서, 그 동안 바슐라르의 말에 가졌던 한가닥 의문이 씻은 듯이 풀려지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간절히 원하고 바랄 때는 그의 정신이 맑아지고 높아지는데 그 극단이 이곳 근본 세계에까지 이르는 일이라는 것이 확연하게 깨달아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내 생각은 우리 나라의 통일 문제에 닿았다. 그때 쓰고 있던 글이 통일에 관한 글이었기 때문이다.
나 한사람이라도 진정 지순한 마음으로 통일을 염원하고 이를 간구한다면 통일은 기필코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이 서는 것이었다.
인간이 이루고 있는 사회 집단인 국가에도 분명히 운명이란 것이 있다. 한사람이라도 정순하게 나라를 걱정하고 잘되도록 염원한다면 그의 정신이 근본 정신에까지 이르고, 그 속에 묻혀 있는 나라의 운명이란 넓은 에센스가 서서히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 바로 한 사람의 명상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바슐라르의 논리에 대한 설명이자 실체였던 것이다.
이같이 깨달았을 때 필자의 몸에서는 엄청난 화학 변화가 순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의학적으로 말하면 T 임파구가 형성되어 엔도르핀이 쏟아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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