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란 무엇인가
선시 (禪詩) - 선(禪)은 언어를 부정하는 불립문자(不立文字)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므로 언어에 뒤따르는 사고작용마저 선은 용납하지 않는다. 대신 선에서는 오직 자기 자신 속에서의 직관적인 깨달음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 선(禪)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다. 선을, 그 깨달음을 제삼자에게 알리자면 여하튼 어떤 식으로든 표현의 방법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임제는 제자들의 물음에 대한 대답 다신 크게 고함을 질렀고(臨濟喝), 덕산은 무조건 몽둥이를 휘둘러댔던 것이다.(德山棒).
일반의 상식에서 벗어난 이런 식의 미치광이짓을 통해서 그들은 솟구치는 깨달음의 희열을 어느 정도 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미치광이짓을 통해서는 깨달음의 그 섬세한 느낌은 도저히 절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자칫하면 저 관념의 바다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지도 모르는 그 깨달음의 섬세한 느낌을 전달하기 위하여 시(詩)를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란 언어의 설명적인 기능을 최대한 억제시킨 비언어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승들은 그 들의 깨달음을 시를 통하여 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첫번째 선시의 출현(以詩萬禪)이다.
이렇게 하여 남성적인 '선'은 여성적인 '시'와 만나 더욱 활기차게 발전해 갔다. 선이 시와 결합하여 이런 식으로 발전해가자 이번에는 시인들 사이에서 시의 분위기를 심화시키기 위하여 선에 접근하는 풍조가 일기 시작했다. 이것이 두번째 선시의 출현(以禪入詩)이었다.
첫번째 선시는 대통신수(大通神秀)를 위시한 중국·한국·일본 선승들의 작품인데, 깨달음의 희열을 읊은 오도송, 개오시(開悟詩=悟道頌)와 산생활의 서정을 노래한 산거시(山居詩=山情詩)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두번째 선시는 주로 왕유(王維)를 위시한 당송 시인들의 작품인데 선적(禪的)인 분위기가 풍기는 선 취시(禪趣詩)와 산사의 풍경을 읊은 선 적시(禪迹詩)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선승과 시인들 사이에서 이런 식으로 선시를 쓰는 풍조가 일자 선과 시는 상호보충적이며 둘이 아니라는 직관파 시론가들의 선시론(禪詩論)까지 나오게 되었다.
"시는 선객(禪客)에게는 선을 장식하는 비단 위의 꽃이요, 선은 시인들에게 있어서 언어를 절제하는 절옥도(切玉刀)이다.
詩爲禪客添花錦 禪是詩家切玉刀一元好問."
"선의 핵심은 깨달음에 있다. 시의 핵심 역시 깨달음에 있다. 오직 깨달음을 통해서만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될 수 있고 자기 자신만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禪道惟在妙悟 詩道亦在妙悟 惟妙悟乃爲當行 乃爲本色一嚴羽 · 滄浪詩話."
직관파 시론가의 대표적 인물인 엄우의 이 묘오론(妙悟論)은 후대에 시를 지나치게 선적(禪的)으로 해석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금 여기서 논할 성질의 것이 아니므로 우선 접어두기로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선시(禪詩)란 무엇인가?
선이면서 선이 없는 것이 시요(禪而無禪便是詩),
시이면서 시가 없는 것이 선이다(詩而無詩禪儼然).
그러므로 선시란 언어를 거부하는 '선'과 언어를 전제로 하는 '시'의 가장 이상적인 만남이다. 부정이라는 남자와 긍정이라는 여자의 가장 이상적인 만남이다.
선종은 당대(唐代)에 크게 흥성하였으며, 초·중당 시기에 많은 시인들이 선종의 영향을 받았고, 시를 창작함에 있어 선의 묘오(妙悟) 경지를 수용하여 원선입시(援禪入詩)로 선미(禪味) 농후한 시를 읊게 되었다.
명나라 사공도(司空圖)의 운외지치(韻外之致), 미외지미(味外之味) 시론은 사람들에게 명확한 시선일치(詩禪一致)이론을 인식시켰고, 후세 중국 문예 이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송대(宋代)에 이르러 선종은 고도로 발전하면서 더욱 광범하게 유행했고, 사대부에까지 선의 풍류가 일어 시와 선의 관계는 더욱 가까워졌다. 대표적 시인으로 당의 왕유(王維), 두보(杜甫), 백낙천(白樂天), 한산(寒山), 그리고 송의 소동파(蘇東坡), 황정견(黃庭堅), 엄우(嚴羽), 청의 왕사정(王士禎) 등 대가들이 선사상에 심취하여 고격(高格)의 선시를 많이 창작하게 되었고, 이들이 한국이나 일본 시단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언어의 절제와 응축, 그리고 상징을 중시하는 공통점이 시와 선에는 있다. 선은 직관을 중시하고 언어를 초월하기 때문에 그 초월 언어가 상징으로 나타나면 곧 문학이 되는 것이며, 이런 경우 선승(禪僧)의 게(偈)는 시문학으로 나타나게 된다.
오도(悟道)를 목적으로 하는 불교 문학의 절정은 선시이다. 불교적 철학이나 사상을 산문으로 묘사·표현할 수도 있지만, 이보다 직관적인 면에 있어서의 힘은 선시문학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선을 통하여 얻어지는 정심(靜心)은 물심일여(物心一如)의 경지에서 사물의 속성을 신속하게 파악하여 시화(詩化)하는 데 촉매작용을 한다. 또 선의 돈오적(頓悟的) 사유방식은 시 창작에 있어 번득이는 영감을 제공해 준다. 선 체험으로 얻어진 무한한 정신세계와 정제된 심리상태는 묘오(妙悟)와 여유, 함축 그리고 의경(意境)을 표현한다.
선어(禪語)의 상징성과 함축, 그리고 논리 구조를 초월한 선구언어(禪句言語)는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고 기존 관념을 넘어 무의식 세계, 깨달음의 세계까지 정신세계를 확장하는 창조·혁명적인 언어 구조로 재조직되었다. 선이 시로써 문학이 되었고, 시가 선으로써 사상과 깊이를 더해 갖춘 지고한 격조의 시 세계를 창출하였다. 청대 원호문(元好問)의 말처럼 선은 시인에게 좋은 칼을 다듬어 주었고, 시는 선에게 비단꽃을 덮어 주었다.
그러나 게송(偈頌)을 시라고 하지는 않는다. 게송은 범어 gatha((伽陀)의 음역인 게(偈)와 풍송(諷誦)을 합성하여 만든 말로 간명하고 짧게 쓴 운문으로, 경전에서 불설이 설해지는 양식과 성질을 열두 가지로 분류하여 설명하는 12분교의 하나이다.
인간의 모든 문화현상은 언어문자로 기록되고 사유마저도 언어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인간은 언어문자를 떠나서 살 수 없다. 선 또한 마찬가지로 소위 불리문자(不離文字)요, 인언현리(因言顯理), 의언진여(依言眞如)이다. 그러나 선가의 언어는 지극히 압축되고 고도로 상징화한 비약·역설적인 반상(反常)의 언어이다. 일언지하(一言之下) 돈망생사(頓忘生死)하고 일초직입(一超直入) 여래지(如來地)하는 촌철살인적(寸鐵殺人的) 언어이다.
이러한 전형적 선시의 대부분은 사언, 오언, 칠언의 시 형식만 취했을 뿐 성률(聲律), 압운(押韻), 평측(平仄) 등을 무시하기 때문에 한시에서 요구하는 시문학적 우수성은 기대하기 어렵다. 시적 성취를 얻은 선시로는 사대부와의 교류를 읊은 교류시(交流詩), 차운시(次韻詩)가 있다. 자신의 오도 경계를 운수자연(雲水自然)의 풍물에 의탁하여 읊은 우음시(偶吟詩), 산거시(山居詩), 운수시(雲水詩) 등에서는 사대부가 도회에서 얻을 수 없는 묘경(妙境)과 운외지미(韻外之味)를 느낄 수 있다.
【禪과 21세기】선시 읽기(1) 중에서... 김형중(명성여고 교법사·문학박사)
한국에 처음 선(禪)을 전한 이는 법랑(法郞)이다. 그는 신라 선덕여왕 때(632~647) 당(唐)에 들어가 중국 선종 제 4조 도신(道信)의 선법을 받아 왔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선이 전래된 것은 신라 말에서 고려 초기(875~943)에 개설된 구산선문(九山禪門)을 통해서이다. 구산선문이란 '우리나라에 최초로 개설된 아홉 군데 수련장'을 말한다. 이 선문구산파의 선승들은 대부분 마조(馬祖) 문하의 선법을 받아 왔는데 홍척(洪陟 : 智異山 實相寺派 開設)과 도의(道義 : 迦智山 寶林寺派의 元祖) 등이 그 주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지눌(知訥, 1158~1210)의 출현에 의해서 선은 완전히 한국적인 것으로 정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제자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에 이르러 본격적인 선시가 나오기 시작했다.
진각혜심은 공안, 공안시, 공안평론집의 대백과사전인 《선문염송(禪門拈頌)》(30권)을 편찬, 당송 이후의 모든 선어록을 총정리했다. 이 《선문염송》의 출현은 확실히 선종사에 하나의 굵은 획을 긋는 작업이었다. 그것도 한국인의 손에 의해서 그 방대한 선종의 모든 문헌이 체계적으로 총정리된 것이다.
지눌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선승 일연(一然, 1206~1289)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는 정말 귀중한 책이다. 이 책 속에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오던 향가(鄕歌) 14수가 실려 있는데 균여(均如, 923~971)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 11수와 함께 향가 문학의 극치를 이루고 잇다. 이 향가의 시인들로서는 월명사(月明師, ~742~)와 충담(忠談, ~765~) 등이 있다.
그리고 구법승(求法僧) 혜초(慧超, 704~787)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717년 중국에서 인도로 불적(佛跡) 순례를 떠나, 십 년 후인 727년 중국에 돌아와 순례기행문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썼다. 이 책 속에는 가슴을 울리는 순례시가 여러 편 실려 있는데, 이 순례시들은 동서고금의 순례시 가운데 제1급에 속하는 작품이다.
지눌 → 진각을 거쳐 제 6대로 내려가서 원감국사 충지(圓鑑國師 沖止, 1226~1292)가 출현, 정밀하기 이를 데 없는 선시를 썼다. 그런데 지눌이 제창한 소위 보조선(普照禪)은 당의 규봉종밀(圭峰宗密)이 주장한 교선일치(敎禪一致)의 복합적인 선풍이었다. 고려 말이 되자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5),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등에 의해서 순수한 임제선(臨濟禪)이 도입, 본격적인 선시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태고보우선사
태고는 주로 장시풍의 선시를 많이 썼고, 나옹은 직관력이 번뜩이는 단시풍의 선시를 많이 남겼다. 그리고 백운은 한국 선시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해 준 인물이다.
조선에서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 선시의 역사
1392년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정치이념은 유교로 바뀌는데 이 무렵 함 허득통(涵虛得通, 1376~1433)이 출현, 불후의 명작 <금 강경선시 金剛經線詩>를 남겼다. 함허는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인 무학(無學)의 제자였고, 무학은 고려말 임제풍 선시의 거장 나옹의 제자였다. 그러나 나옹의 임제풍 선시는 무학을 거쳐 함허에게 와서 애석하게도 그만 끊겨버리고 만다. 그래서인지 함허의 선시에서부터 체념적인 정서가 한국 선시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배불(排佛)정책은 제3대 태종(太宗) 때(1400~1418)부터 시작되어 세종(世宗)으로 이어지는데 이때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1435~1493)이 출현, 비애감 어린 선시를 남겼다. 그는 원래 생육신의 한 사람이었으나 후에 선승이 되어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정처 없이 떠돌면서 두보(杜甫)를 능가하는 비애풍 선시를 많이 남겼다. 그러나 그는 시를 써서는 곧잘 흐르는 물에 띄워 보내곤 했기 때문에 지금 그의 문집에 남아 있는 작품보다 물에 흘러간 작품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청허는 우리에게 임진왜란 때 활약했던 도승(道僧) 또는 승군 총사령관(僧軍總司令官) 정도로 알려졌다. 그러나 청허는 정말 도가 높은 선승이었고 이백(李白)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이백을 능가하는 선시의 거장이었다.
청허 이전의 선시는(매월당 김시습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중국 임제풍 선시의 영향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청허에 와서 한국 선시는 비로소 임제풍에서 완전히 벗어나 한국 특유의 은둔적이며 체념적인 서정풍으로 변모해 버렸다. 《청허당집 淸虛堂集》 속에는 몇백 편을 웃도는 제 1급 선시가 실려 있다. 그러므로 청허는 한국 선시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청허휴정에 의해서 분출된 한국 선시의 광맥은 그의 제자들에게 의해서 찬란하게 꽃피었으니 그 주역들은 다음과 같다.
정관일선(靜觀一禪, 1533~1608)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10)
청매인오(靑梅印悟, 1548~1623) - 그는 '공안선시 公案禪詩'의 거장이기도 하다.
기암법견(寄巖法堅, 1522~1634)
소요태능(逍遙太能, 1562~1649)
중관해안(中觀海眼, 1567~ ?)
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
또한 서산과 동문수학한 부휴선사가 있는데 그는 우수어린 이별풍의 선시를 잘 썼다. 그의 제자 취미수초(翠微守初, 1590~1668) 역시 전원풍의 선시를 남기고 있다.
다음 두보의 영향을 받은 사명유정 계통에서 허백명조(虛白明照, 1593~1661)가 나왔다.
월봉책헌(月峯策憲, 1624~?)
백암성총(栢庵性聰, 1631~1700)
설암추붕(雪巖秋鵬, 1651~1706)
무용수연(無用秀演, 1651~1719)
환성지안(喚惺志安, 1664~1729)
이상 모두 뛰어난 선시를 남긴 선승이다.
서산 이후 또 한 사람의 뛰어난 선시 거장을 우리는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그가 바로 정관일선 계통에서 나온 무경자수(無竟子秀, 1664~1737)이다. 그의 천변만화풍(千變萬化風) 선시는 예지로 가득 차 있으며 시상(詩想)이 단 한 군데도 막힘이 없이 동서남북, 상하좌우로 과거·현재·미래로 마구 굽이치고 있다. 다분히 체념적인 시풍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조선조 중기 이후의 한국선시에 무경자수는 강한 충격을 주고 있다. 무경자수 이후에는 허정법종(虛靜法宗, 1670~1733), 천경해원(天鏡海源, 1691~1770) 등이 돋보인다.
초의의순(艸衣意恂, 1786~1866)은 시승으로보다는 다승(茶僧)으로 더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문장력이 뛰어나 추사 김정희를 비롯하여 당시의 문사(文士)들과 주고받는 화답시를 많이 남겼지만 빼어난 선시가 별로 없는 게 흠이다.(이는 또한 조선조 후기 대부분의 시승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포의심여(浦衣心如, 1828~1875)는 짧은 생애를 통해서 섬세하고 투명하기 이를 데 없는 <감성선시 感性禪詩>를 남겼다.
조선조 말기, 한 사람의 득도인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보월거사 정관(普月居士, 正觀, ~1862~)이다. 어디서 무엇을 했던 사람인지 그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지만, 그러나 그는 당송의 선승을 능가하는 선시를 남기고 있다.
그는 어느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은 채 자신이 깨달은 경지를 거침없이 읊어내고 있따. 보월거사라는 이름으로 봐서 그는 분명 선승이 아니라 평범한 재가수행자(在家修行者)이다. 말하자면 당대의 백낙천이나 송대의 소동파 같은 인물이다. 보월거사 정관의 느닷없는 출현은 한국 선시에 하나의 불가사의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
그리고 이 무렵 경허성우(鏡虛惺, 1849~1912)가 있었는데 그 역시 느닷없이 튀어나온 선승이다. 왜냐면 그는 이렇다 할 스승이 없이 자신의 힘만으로 깨달음을 체험한 선승이기 때문이다. 그의 선시는 한국 선시 가운데 가장 다양한 색깔을 지니고 있다. 서산대사 청허휴정에게서 비롯된 한국 선시는 마침내 경허성우에 와서 선시가 아닌 인간의 시(人間詩)로 탈바꿈 해 버린 것이다. 경허의 제자인 만공월면(滿空月面, 1871~1946)과 한암중원(漢岩重遠, 1876~1951) 역시 멋진 선시를 남겼지만 경허의 선시에는 전혀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 무렵 시문(詩文)에 능했던 불경의 거장 석전정호(石顚鼎鎬, 1870~1948)가 있었지만 그의 시문 역시 선미(禪味)가 적은 게 흠이다. 《님의 침묵》이라는 현대 시집을 낸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 1879~1944)도 적지 않은 선시를 남겼지만 크게 주목할 만한 작품은 없다.
근래의 선승으로는 원광경봉(圓光鏡峰, 1892~1982)이 있는데 그는 조주풍(趙州風)의 선시를 잘 썼다. 그는 서도(書道)에도 능하여 적지 않은 서예 작품을 남겼다. 뛰어난 전법게(傳法偈)를 남긴 운봉성수(雲峰性粹, 1889~1947)의 제자 가운데 향곡혜림(香谷蕙林, 1912~1978)이 있는데 그는 나옹 혜근의 선시풍에 이어지는 임제풍 선시를 남기고 있다.
출처 - 석지현 스님 엮음, 《선시감상사전》
천지일향(天地一香) 해설깨달음의 노래...(오도송)
죽음을 맞이하며...(열반송/임종게)
마음 다스리기... |
불교와 서예
자유분방한 내공이 뿜어내는 거침없는 필력 ,불교문화와 한국문화
99 x 52.5cm(4) 동예헌 소장 사진자료 - HBMC 불교는 한국문화에서 1천 6백년 동안 굳건한 자리를 지켜 왔다. 특히 신라와 고려시대의 정신사를 이끌어왔기 때문에 불교 교단의 수행자인 승려의 위상은 컸다. 조선시대에는 승려의 위상이 전에 비해 크게 약화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지도 이념의 담당자였던 유학자와는 다른 정신세계를 고양시켜 나간 한 축이었다. 따라서 이런 승려들의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한 단면인 승려의 글씨를 모아 살펴보는 것은 우리 문화사의 한 줄기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이런 작업은 시도되지도 못했다. 우선 이점에서 이번 「고승유묵전」이 갖는 의의는 매우 크다. 시대도 오래지만 외적인 변란과 내적인 조선시대의 핍박를 받으며 불교계의 문화 자산 축적과 전승이 어려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고승유묵을 한데 모을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신라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고승들의 유묵을 한데 모은 서울서예박물관의 전시장을 둘러보며, 전시 담당자의 탁월한 기획력과 추진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를 이끌던 선필 불교가 문화의 중추를 이루던 신라나 고려시대에는 승려가 당대 문화의 주도자였으므로 고승의 글씨가 곧 당대 명필의 글씨였다. 전시 첫머리에 선보인 김생金生의 글씨에서는 신라 제일의 명필답게 신라문화를 선도하던 기품이 드러난다. 봉암사 지증대사비를 쓴 혜강慧江은 83세의 나이에 꼿꼿한 공력을 내뿜는 글씨를 남겼다. 행기幸期 선경禪 순백純白 현가玄可 등을 거쳐 고려 중기에 이르면 탄연坦然이 <중수청평산문수원기重修淸平山文殊院記>에서 빼어난 필력을 보여주는데 이 또한 당대를 대표하는 명필이었다. 매 월당 김시습 유묵 24 x 14.5cm 경남대 데라우찌문고 소장 아암혜장(1772~1811)의 선필
승려들은 세상을 직접 경영하는 몫을 담당하던 유학자와는 다르다. 승려들은 발을 세속에 내딛고 있지만 그들의 마음은 세속을 넘어선다. 때문에 필법筆法을 따라 글씨를 익혀 쓰되 필법을 넘어선 탈속脫俗의 경지가 그들에게는 있다. 수행이 쌓인 수도자는 그 공력이 온몸으로 드러나야 한다. 때문에 고승高僧의 필적에는 글쓴이의 공력이 배어 있어야 한다. 선필禪筆은 이런 수도자의 역량이 밴 일상을 넘어선 글씨여야 제 맛이다. 선이라 해서 교학敎學을 배제한 것은 아니다. 한국불교는 교와 선을 병행해 왔기 때문이다. 교학에 투철한 고승의 유묵 역시 기품 있는 선필이 될 수 있다.
일격 의 선필
이 시기에는 고승의 글씨가 시대를 앞서가는 것이 아니었다. 선교에 뛰어났던 영파 성규影波聖奎의 글씨는 당대의 명필 원교員嶠의 동국진체 글씨를 좇고 있으며, 아암 혜장兒巖惠藏의 글씨가 다양한 서체를 구사한 것은 그가 다산茶山과 추사秋史 등 학자들과 교유를 가졌던 데서 나온 산물이었다. 이제는 승려들의 글씨가 시대를 따라가는 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산이 수룡 색성袖龍 性 등 여러 승려들과 나눈 서간이 눈길을 끄는, 승려와 유학자의 교유로 한 방을 꾸민 기획자의 의도가 참신하다.
추사체를 이룩한 거장 추사秋史 또한 많은 고승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이 시기 선 논쟁을 벌이며 선문을 뜨겁게 달구었던 백파 긍선白坡亘璇과 초의 의순草衣意恂 둘 다 추사와 깊은 우의를 가졌는데 추사 등의 북학자와 깊은 교분을 가졌던 초의의 글씨는 분량도 풍부하고 서체도 다양하다. 추사의 글씨는 일반 서가들에게 뿐만 아니라 승가에도 크게 영향을 끼쳤음을 이들 글씨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색다른 관심을 끄는 것은 추사가 당대 종장宗匠으로 자부하던 백파와 불교에 관한 논쟁을 벌인 필적이 이번 전시에 두 작품이나 출품된 사실이다. 추사의 문집에 실려 있기도 한 이 글씨들은 하나는 문집의 내용과 일치하나 다른 하나는 상당히 다른 부분이 많다. 면밀히 대조할 필요가 있는 이 글씨에 남은 수정 자국은 옛 거장들이 자신의 견해를 상대방에게 내세우기 위해 얼마나 고심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면서 후학의 자세를 가다듬게 한다. 기획자의 부지런한 발품으로 뜻밖에 자료 발굴의 효과도 가져왔다.
전통시대의 선필은 근대에 들어서 어떻게 되었는가. 근대선의 중흥조 경허鏡虛의 글씨에는 법도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글자 너머로 출중한 수행력을 뿜어내는 품격이 있다. 온몸으로 교화를 선도했던 용성龍城의 글씨에는 치밀한 내공이 묻어 있다. 그 정신의 한 면모를 제대로 보여준 만해卍海의 글씨에는 끝까지 지조를 세우며 기개를 드높였던 강고한 의지가 살아있다. 그리고 이 시기 선 수행을 이끌었던 거장 만공滿空의 <즉심시불卽心是佛>이나 <세계일화世界一花>에는 일상을 넘어선 선수행의 품격이 배어나는 선필의 대표적인 한 모습이 있다.
선필은 단지 법도에서 벗어난 파격破格을 주장하며 자유자재로 일필휘지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수행의 내공이 배어 있어야만 중생들의 마음을 울리는 ‘선필’이 될 수 있다.'문화&사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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