歲寒에 옹골지다 털갈이는 표범처럼 축복인가, 욕심인가 한겨울에 핀 봄소식 한 가닥 설중매를 찾아서
무리 가운데 있어도 혼자인 나무가 있으니,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한 소나무다. 소나무는 아뜩한 절벽에 뿌리 내린다. 억척스럽다.
소나무는 검질긴 바위짬에서 자란다. 거쿨지다. 이 나무를 베어 종묘를 모시고, 경복궁을 짓고, 남대문을 세웠다. 아기가 태어나 금줄을 치고, 장을 담가 항아리에 두른 것이 솔가지이며 임금의 관(棺)이 된 것이 솔 둥치다. 소나무는 빈부가 나누어 쓰고 귀천이 더불어 아낀다. 그 끈기는 민초의 생김새요, 그 지조는 군자의 됨됨이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 이인상이 그린 ‘설송도’를 보자. 어둑시근한 겨울 땅거미에 소나무 두 그루가 눈을 오달지게 뒤집어썼다. 잔가지 번거롭지 않으니 노송임을 알겠다.
차고 시린 눈이 덮인들 늘푸른나무가 욕되겠는가. 기화요초 만발할 때 소나무의 상록은 시답잖지만 헐벗고 얼어붙은 세한이 오면 기색이 옹골지다. 앞에 꼿꼿한 나무는 치솟는다. 뒤에 휘우듬한 나무는 앙버틴다.
‘그림자는 꼴을 따른다(如影隨形)’고 했던가. 솟고 버티는 자태가 곧 소나무의 성품일진대, 가혹한 이 겨울을 견뎌내라고 가르친다. 무엇을 바라고 견디란 말인가. 굽거나 곧은 모양에서 까닭을 찾는다. 굽은 나무는 선산을 지키고 곧은 나무는 대들보를 꿈꾼다.
니은 디귿 이응 그리고 이 아 으…. 한글 자모를 뒤섞어 놓은 듯한 그림, 도대체 무엇인가. 돋보기를 대고 보면 자세하다. 자모 사이사이에 잔털이 촘촘하다. 아랫부분에 마주보는 기역 자는 눈썹이고, 밑에 둥그스름한 부분은 눈자위다.
맞다, 표범이다. 표범이긴 한데 껍질 그림이다. 단원 김홍도의 이 그림 참 대단하다.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이 소장한 북한의 국보다. 터럭 한 올 한 올 다 그리려고 만 번이 넘는 잔 붓질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보꾹 그림을 그리다 등이 활처럼 굽었다. 짐작컨대 단원은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을 테다.
그 고역을 치르며 표범 가죽을 구태여 그린 이유가 뭘까. 가죽은 한자로 ‘혁(革)’이다. ‘혁’은 또 고치고 바꾼다는 뜻이다. 표범은 철따라 털갈이한다. 무늬가 크고 뚜렷해진다. ‘군자표변’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군자는 표범이 털갈이하듯 선명하게 변한다. 선비인들 다르랴. 사흘만 안 봐도 눈 비비고 볼 상대로 바뀐다. 그것이 ‘괄목상대’다.
새해가 되면 다들 마음먹이를 다시 한다. 해도 군자나 선비가 못 되는 이는 ‘작심삼일’이다. 단원은 오종종한 인간을 꾸짖는다. 인두겁을 써도 표범 가죽 쓴 듯 행세하라.
고슴도치가 오이 서리한다. ‘외밭의 원수는 고슴도치’라는 익은 말로 가늠컨대, 녀석은 오이 장수 속을 꽤나 끓였다. 오이를 따는 고슴도치는 제 깐에 수를 낸다. 오이 곁에 엎드려 한 바퀴 구른다. 등엣가시에 오이가 꽂힌다. 구르는 재주가 굼벵이 못잖다.
화가는 그림 위에 ‘뱃살 두둑한 늙은 나무꾼(廣腹老樵)’이라고 써놓았다. 문인화가 홍진구의 별명이다. 이 그림은 이야기가 있다. 오이는 넝쿨 밑동에 작은 것이, 끝동에 큰 것이 주렁주렁 열린다. 해서 ‘과질면면(瓜 綿綿)’이란 말이 나왔는데, 자손이 잇따른다는 뜻이다. 가시 많은 고슴도치도 숨은 뜻이 ‘번성’이다. 꼴이 흉해도 고슴도치는 제 새끼를 함함하다 한다. 저 오이를 지고 가서 새끼를 먹인다.
오이 철에 안 어울리는 국화를 그려놓은 까닭은 뭔가. 국화 뿌리 적신 물을 마시면 오래 산다는 옛 기록이 있다. 국화는 일쑤 장수(長壽)와 통한다. 홍진구가 들려주는 얘긴즉슨 이렇다. “자손 많이 낳아 다복하시고 오래토록 수를 누리십시오.”
해석을 달리해도 괜찮다. 속담에 ‘고슴도치 외 따 지듯’이 있다. 잔뜩 오이 등짐을 진 고슴도치처럼 과욕
을 부리거나 빚에 허덕이는 꼴을 가리킨다. 선조들의 그림은 보는 이의 심정에 따라 다르다. 옛 그림의 너름새가 낙낙하다.
장안에서 쫓겨난 당나라 시인 유종원은 좌천의 낙담을 시로 곱씹었다. 낯설고 물 선 타관, 마음 둘 곳 없으매 진종일 외로움이 죄어쳤다. 그의 오언시 ‘강설(江雪)’은 한가한 서경(敍景)이 아니다. ‘산이란 산, 새 한 마리 날지 않고/ 길이란 길, 사람 자취마저 끊겼는데/ 외로운 배, 삿갓과 도롱이 쓴 늙은이/ 홀로 낚시질, 차디찬 강에 눈만 내리고’
원시의 운은 절묘하다. 절(絶) 멸(滅) 설(雪)이 압운이다. 입 밖으로 소리 내보라. 잇소리 ‘ㄹ’의 뒤끝이 적막강산으로 번진다. 산, 길, 강은 인정머리 없고, 버림받은 시인의 하소는 메아리 없다. 회한에 차 낚싯대 드리운들 세월 말고 무엇이 낚이랴.
최북은 조선 화단의 반항아다. 힘센 이가 그를 푸대접했다. 그는 유종원의 심회를 그림으로 옮긴다. 눈 내린 외딴 강마을, 맵짠 추위에 나는 새도, 지나는 사람도 가뭇없다. 큰 삿갓에 띠옷 걸친 사내가 오도카니 낚시질한다. 세상은 오롯이 적멸인데, 조각배 탄 저 사내 무엇을 기다려 요지부동인가.
다시 보니 솟은 나무가 점점이 푸르고 붉은 기운을 내뿜는다. 북풍한설에 이파리와 꽃이라니, 어림 반푼어치 안될 소리. 봄은 ‘무통분만’하지 않는다. 아, 알겠다. 봄이 조산(早産)을 꿈꾸는구나. 조리돌림당한 인재를 다독이려 이른 소식 전하는구나.
입춘이 코앞인데, 내 코가 석자다. 매화 암향이 그리워 연신 벌름거린다. 성급하기는 저 노인도 한가지다. 하얀 나귀를 탄 노인은 챙 넓은 모자에 귀마개를 싸매고 털가죽을 망토처럼 걸쳤다. 입성으로 보건대 날은 차다. 아지랑이는커녕 샛바람조차 먼데 시방 매화 찾으러 간단다. 우물에서 숭늉 내놓으라는 꼴이다.
노인은 당나라의 전원시인 맹호연이다. 진사시에 낙방하자 댓걸음에 낙향한 그는 세상잡사에 등을 돌렸다. 삭막함이 제 분수라고 여겨 고향집 사립문을 잠갔다. 그러고도 셀 성품이었다. 그는 읊었다. ‘마주봐도 허튼 소리 안 한다네/ 뽕과 삼나무 키우는 얘기뿐’. 그에게도 좀이 쑤시는 날이 있었다. 바로 입춘! 책력에 나오는 절기는 늘 성마르건만 입춘이 춘삼월이라도 되는 양 그는 행장을 꾸린다.
그는 장안의 동쪽 ‘파교’라는 다리를 건너 눈 덮인 산을 나귀 귀가 얼어붙도록 헤맨다. 외가지 설중매라도 뵙자는 염원이다. 옛 문인의 탐매(探梅)는 깔축없이 탐애(貪愛)다. 그 욕심 아무도 못 말린다.
그러한들 따르는 종이 무슨 죈가. 노인은 마지못한 종에게 눈총을 보낸다. 가여울 손 그는 홑적삼에 밑 짧은 바지차림이다. 깁신을 신어도 발목은 시리다. 찬 목덜미로 자꾸 손이 간다. “매화는 무슨 얼어 죽을 매화라고….” 푸념 소리 들린다. 이 아이는 모른다. 빙설 속에 핀 한 가닥 매화는 춘풍에 날리는 복사꽃 만 점과 바꿀 수 없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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