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지리산(2)지리산의 자취
한국 역사와 문화를 움직인 ‘찬란한 동력’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지리산에 오른다. 지혜로운 자 물을 즐기고 인자한 자 산을 즐긴다 했다. 제 아무리 세상 이치를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이다가도 장엄한 운해 앞에 서면 고개가 숙여지고 칼날 같은 설원에 닿으면 숙연해진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인이 지리산을 찾고 즐기는 이유가 아닐까.
특히 지리산은 예부터 북방의 백두산과 함께 어머니같은 포용력과 의연한 자태로 사대부들의 경외와 사랑을 한 몸에 받아왔으니, 옛 사람들도 분명 지리산을 찾은 이유는 따로 있었을 것이다.
도내 역사 속에 지리산은 어떻게 담겨 있을까? 국립진주박물관과 함께 20회에 걸쳐 예부터 영산으로 불리던‘역사 속의 지리산’을 들춰본다. ‘지리산의 자취’를 시작으로 지리산의 사계·차·새 등 생태에서부터 고인돌·선사·가야문화·불교사상·지리산 전설과 민담·도교 불교사상·지리산이 키워낸 약용식물 등 문화까지 도내 역사 속에 녹아있는 지리산을 따라가 본다.
△ 한국 사상의 산실 지리산
신라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의 산’으로 받아들여지며 일찍부터 성산으로 숭배된 지리산은 한국 성모신앙의 모태가 되었다. 또한 고려에 들어서는 태조 왕건의 비인 위숙왕후로 상징되었다.
불교의 전래로 성모신앙으로 상징되는 지리산의 민간신앙은 불교에 융합돼 간다. 토착신앙과 관련된 석장승이 지리산 사찰 입구에 유독 많이 서 있는 것이 그 같은 사실을 대변한다.
지리산 지역은 고려에 들어서 다시 불교계의 중심지가 된다.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과 함께 참선을 통해 불도를 터득하는 선종이 번성하던 때 대각국사 의천은 교종의 천태종을 세운다. 순천에 있는 선암사가 바로 국사가 천태종을 개창한 곳이다.
▲ 삼국시대 <성모신앙 + 불교>-지리산 석장승 성모신앙의 모태…산길 따라 불교와 유학 교류
1170년 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교종은 탄압을 받고 선종불교가 대두된다. 보조국사 지눌은 신앙결사인 수선사를 중심으로 지리산 자락인 송광사에서 조계종을 개창하게 된다. 또한 지리산은 몽골의 침입으로 국난을 당했을 때 호국불교의 상징으로서 팔만대장경이 판각된 곳이기도 하다.
특히 진주는 최씨 무인정권과 인연이 깊다. 최우의 큰아들 만종이 출가한 곳이 산청의 단속사인데 조계종이 지리산에서 성립될 수 있었던 것도 최씨 무인정권의 영향력과 무관하지 않다.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도 붉다’는 삼홍시로 지리산 단풍의 화려함을 노래한 바 있는 실천 유학의 대가 남명 조식 선생. 그가 조선시대에 등장하면서 지리산은 우리나라 유학본산 중 한곳으로 자리잡게 된다. 남명에 앞서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해 사림의 싹을 길렀고 여기서 정여창·김일손이 도학과 문장 절의로 이름났는데 남명이 이를 이어 집대성한다. 61세에 산청에 둥지를 튼 그는 지리산에 전승돼 온 불교사상을 아우르며 실천적 유학사상을 성립시킨다.
▲ 조선시대<불교 + 실천적 유교>-함양 남명조식선생상 △ 저항과 혁신의 보루, 지리산
근대에 들어와 외침과 변혁의 시기를 맞으며 지리산은 저항과 혁신의 역사적 현장이 된다. 지리산을 둘러싼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농민항쟁과 의병활동은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외침과 변혁의 시기 영·호남이 연대했던 곳
1840년대 진주는 농민층 내 소유와 경영을 둘러싼 계층분화가 극심했고 많은 농민들이 빈궁에 허덕였다.
1846년 진주 나동리의 경우 약 6%의 토지소유자가 44%의 농지를 소유했으며, 63%에 달하는 빈농층은 18%의 농지를 소유했다. 또한 경영상의 분화도 극심해 1845년 가서리의 경우 1결 이상 경작하는 부농은 3.6%이며, 이들의 경작면적은 29.6%에 달했다.
부세를 이용한 수탈이 심각해지면서 진주농민들은 한층 더 궁핍해졌다. 관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횡령한 후 그 횡령분을 농민 부담으로 전가하려 했다. 그렇지 않아도 파탄 지경에 다다랐던 농민들은 극도로 분노한다.
1861년 산청 단성에서 단성민란이 일어나고 진주농민항쟁이 이를 잇는다. 류계춘 선생이 이끈 진주농민항쟁(1862)은 19세기 초반이래 전국 각처에서 다양하게 나타났던 소규모의 농민항쟁을 총결산하는 동시에 이를 전국규모로 확대하는 신호탄이었다.
지리산은 한말 의병 전쟁때 영·호남 의병의 장기항전 기지로도 부상한다. 중부 이북지역의 의병들이 해외의 간도나 연해주로 망명갈 때 이들은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들에게 지리산은 의병항쟁의 마지막 보루가 되었던 것이다.
산길을 따라 불교와 유학이 교류하고 변혁의 시기에는 영·호남이 연대했던 곳, 지리산. 지리산 자락 800리는 하나의 생활권인 동시에 문화권이었으며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
하늘하늘 ‘내게 오라’ 하는 손짓
‘뱀사골 지나 노고단 가는 길 안개가 내렸다/느닷없이 나무의 뼈들이, 그 뼈를 싸고도는/수액이 빛나는 게 보였다/나이테가 견디어 온 한 해 한 해의 금들/나무의 아픈 허리를 자꾸 흔들어댔다/임걸령표지판 아래 꽃들이 길을 열어보였다’(조재영의 ‘지리산에서’ 부분)
지리산을 예찬하는 글귀에는 꼭 ‘그 분’들이 오신다. 지리산의 사계를 고스란히 안고 오는 구름과 야생화다.
지리산에 오르다 하얀 솜털 옷을 입고 나타난 매력적인 연인을 만난 적이 있다면 그는 초가을이면 절정에 달하는 골안개다. 지리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섬진강 골안개는 봐도 봐도 지겹지 않은 지리산의 매력이다.
지리산은 섬진강을 끼고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어 안개장관을 자주 연출한다. 지리산을 표현한 시마다 한구절씩은 ‘안개와의 끈질긴 인연’이 담겨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한 편의 예술을 수십·수백 컷 담으려는 사진작가들에게 안개는 첫눈에 반하는 연인임이 분명하다.
▲ 섬진강 골안개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산 감싸는 안개·야생화
16년을 지리산과 동거하며 <하늘에 수놓은 구름이야기>를 최근에 펴낸 섬진강 문화학교 인소혁 교장은 하늘위로 떠있어 그나마 굽이치는 마을이라도 보이는 것이 안개구름이라면 땅바닥까지 자욱이 깔려 속세를 감추는 것이 안개라고 말한다.
구름의 높이가 그다지 높지 않아서 간간이 파란하늘을 보일 때가 있다. 산 사진 중 낮은 구름 사이로 스며나온, 햇빛이 촘촘하게 늘어선 나무들을 비추는 장면은 이때 나오는 것이다.
지리산의 가을이 안개구름의 계절이라면 여름은 구름결이 폭포를 이루며 산등을 넘는 듯한 형상을 연출하는 폭포구름이 매력을 발산한다.
구름보다 사계절을 먼저 반기는 것은 자연의 섭리에 따라 제 몸을 불태우는 야생화다.
특히 지리산 촛대봉과 영신봉 사이에 있는 해발 1600m 높이의 둘레 30리에 이르는 고원분지는 계절마다 고운 빛을 발하는 야생화의 뜰이다. 세석평전이라 불리는 이곳은 봄·여름·가을·겨울에 걸쳐 20여종의 꽃이 군락을 이룬다.
관광객 발길 끄는 매력으로…예술 작품 소재로
춘삼월 봄이 오면 영신봉 아래 잔설 속에서 아기갯버들이 버들강아지를 피우고 연달아 처녀치마가 군락을 이루며 피어난다.
지금 5월은 영신봉 산등을 타고 얼레지가 나풀거릴 때다. 보랏빛 뽀얀 얼굴을 새초롬하게 떨구고 있는 얼레지는 깐깐하기 그지없다. 일본·한국 등지에서만 자라는데 뿌리가 깊어 분주가 어려운데다 발아에서 꽃이 필 때까지 5년이 걸린다. 어찌보면 가장 세계화할 수 있는 한국적인 꽃인 것이다.
늦여름부터는 키가 큰 참당귀와 궁궁이가 키를 같이하며 산녘을 물들이고, 찬바람이 불면서부터는 황기가 보랏빛 긴 꽃술을 내저으며 초원을 덮는다.
구월이 오면 가을 첫머리에서 별꽃을 뿌려 놓은 듯이 쑥부쟁이·산구절초가 고원 위에 잔치를 벌이고 있을 무렵 용담꽃도 풀섶을 헤치며 꽃잎을 벌린다.
그렇게 오늘도 지리산의 야생화는 아무 대가없이 손을 내밀고, 구름은 지리산의 기운을 돋운다.
하늘이 주신 기후, 천년의 향 넘쳐나게 하고
‘초엽따서 상전께 주고/중엽따서 부모께 주고/말엽따서 남편께 주고/늙은 잎은 차약지어 /봉지봉지 담아두고/우리아이 배 아플 때/차 약 먹여 병 고치고/무럭무럭 자라나서/경상감사 되어주오’
함양 마천의 차민요다. 요즘 지리산은 천년의 향이 서리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3대 차 재배지인 하동에서는 지난 4월 20일 곡우를 전후해 아낙네들이 마대를 하나씩 꿰차고 찻잎을 따기 시작해 ‘결실의 절정’을 맞고 있다.
지리산의 차는 828년 신라 흥덕왕 3년에 첫 외래종이 지리산으로 들어와 대중화된다. 삼국사기에 보면 ‘겨울에 사신을 당에 보내 조공하였다. 돌아오는 사신 대렴이 차 종자를 가져오니, 왕이 이를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이미 선덕여왕때(632~647)부터 있었으나 이때부터 크게 일어났다’라고 전한다.
현재 하동 쌍계사 입구에 차를 처음 심은 곳이라는 뜻이 담긴 기념비가 있긴 하지만 이 씨를 지리산 어느 곳에 심었는지 기록이 없어 오늘날 구례 화엄사쪽이냐 하동 쌍계사쪽이냐를 두고 다투고 있다.
지리산이 차 시배지로 된 것은 타고난 기후 덕분이다. 야생차밭이 늘어선 하동 화개면 일대는 연평균 기온이 섭씨 13.8도, 강수량은 1400㎜다.
적당한 기온·강수량에 깊은 땅심…차 시배지로 적당
땅심이 깊고 자갈이 섞인 하동 땅은 차나무가 땅 속으로 깊게 뿌리 내려 온갖 좋은 성분을 빨아들이기에 좋다. 게다가 섬진강과 지리산에 인접해 안개가 많고 일교차가 큰 것도 좋은 차를 내는데 한몫 거든다.
차의 인기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식을 줄 몰랐다. 요즘이야 참살이 분위기를 타고 제주도는 귤나무 대신 차나무를 심으면 80%를 지원해 줄 정도로 차 몸값이 천정부지로 올랐지만 역사 속에도 차는 관가에 바치는 귀한 물품이었다.
공납폐단이 심해지면서 차가 나지 않는 거창에서는 무명 30필에 차 1말을 바꾸어 바칠 정도로 차 공출이 심해 백성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이규보는 차나무를 불살라 차 공납을 금하면 남녘 백성들이 편히 쉬게 될 것이라 읊었다고 전한다. 점필재 김종직은 함양 군수로 가면서 백성들에게 차를 요구하지 않고 관에서 스스로 구하여 바치도록 하기 위해 관영차밭을 만든다.
지리산 화개동 다법은 지금처럼 고상하지만은 않았다. 차 민요에서도 전해지듯 탕약으로 여겨 겨울 감기때는 땀내는 약으로 썼다고 한다. 또한 진감선사도에는 떡차를 가루 내지 않고 돌솥에 그냥 달여 마셨다고 전한다.
▲ 하동 쌍계사 입구에 자리잡은, 차를 처음 심은 시배지라는 뜻이 담긴 기념비. 돌솥에 달여 마시고 감기약까지…소박한 화개동 다법
이는 차탕법이라 불리는데 전남 순천 등에서는 아직도 내려오고 있으며 차에 생강·돌배·오미자·설탕·사카린까지 타서 마신다고 한다. 우려서 마시는 지금의 다법인 우림 녹차법은 명나라 다법을 초의스님이 요즘말로 하자면 ‘벤치마킹’한 것이다.
흔히 차는 우려 마실 때 온도가 70~80도가 적정하다고 한다. 하지만 카페인은 높은 온도에서 날아가므로 90도를 넘기는 것이 좋다. 또한 녹차는 첫잔 속에 영양소가 적어도 95%가 있어서 두 잔을 만들고는 미련 없이 버려야 한다.
물에 우렸을 때 사르르 제 몸을 그대로 푸는 것이 가장 좋은 녹차잎이다. 아시아 어딜가나 가장 알아주는 차는 우리의 녹차다. 홍차는 녹차를 80% 발효한 것이고 보이차는 90% 이상 발효한 것이라 비타민 등 영양소가 거의 없다.
옛 사람들이 즐기던 차의 풍류가 있었다. 봄 매화가 손짓할 때 매화 한 잎 띄우고, 여름 연꽃이 필 때 백연을 띄우고, 가을 국화가 필 때 국화꽃을, 차디찬 12월에는 차꽃을 띄웠다. 예절이나 차의 효능만 강조되는 요즘, 차 고유의 ‘맛·향·멋’을 떠올려보는 것은 어떨지.
그리고 약 30년만인 92년에 모습을 나타냈고 다시 95년에 50만 마리 정도가 나타났으며 다시 10년 후인 2005년에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지리산국립공원이 최근 모니터링을 통해 보고한 새 종류는 50종. 공식적으로 보고된 67종에 비해 줄었지만 모니터를 시작한 2001년부터 변함 없는 수치다.
‘많이 먹어 봐야 맛을 안다’는 말처럼 새는 이동성이 좋아 환경에 민감하다. 하지만 수치를 보면 지리산은 그나마 새들의 안식처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지리산 국립공원 생태담당 박선홍씨는 “무엇보다 지리산은 1차 생산자인 식물이 잘 보호돼 있고 지형적으로 계곡과 고지가 넓게 분포돼 있어 새들의 중간 정착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지리산에 많이 분포하는 새는 박새와 뱁새다. 탐방객이 가장 집중되는 화엄사 계곡에는 박새가 주를 이룬다.
몸길이 약 14㎝정도로 머리와 목·윗가슴은 검고 흰색 뺨과 날개에 두 줄의 가는 흰색 띠가 돋보인다. 한국 숲에 사는 조류의 대표적인 우점종이기도 하다.
뱀사골 계곡은 동고비가 우위를 점하고 있다. 동고비는 나무줄기를 자유자재로 기어다니는데, 머리를 아래로 한 채 거꾸로 다니기도 하고 굵은 나뭇가지 아래쪽을 기어다니기도 한다.
울음소리가 크고 금속성 소리를 내며 둥지는 딱따구리의 낡은 둥지나 나무구멍을 이용해 튼다.
현재 통제구역인 칠선계곡에는 흔히 뱁새라 불리는 붉은머리오목눈이가 우점종이다. 붉은머리오목눈이는 한국의 대표적인 텃새.
동작이 재빠르고 움직일 때 긴 꽁지를 좌우로 쓸듯이 흔드는 버릇이 있다.
번식기 이외에는 보통 30~50마리씩 무리지어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시끄러울 정도로 울어댄다.
새들이 자연을 좇다 인간이 만든 덫에 걸리는 것은 부지기수. 특히 지리산의 도로는 동물을 비롯해 새들에게는 죽음의 통로임은 어쩔 수 없다.
지난해 ‘로드킬’실태조사에서 매일 8마리, 한달 245마리 야생동물이 숨지고 있다고 발표됐다.
지금 짝짓기 중…안정위해 등산객 주의를
여기에는 천연기념물인 소쩍새가 55마리, 큰소쩍새 17마리가 포함돼 있었다.
상춘객들이 붐을 이루는 지리산은 4~7월 짝짓기가 한창인 새들에게는 치명적이다. 인간과 새가 무엇이 다르랴. 옛날 산모가 있는 집에 금줄을 치듯, 짝짓기나 산란기 때는 어미도 새끼도 안정을 취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새들을 위해 등산객이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두 가지다. 소리치지 말 것과 과일 껍질을 버리지 말 것.
인간이 깨끗하게 먹겠다고 과일껍질을 까지만 그 껍질에 있는 농약은 그대로 새들의 몸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외형은 각양각색 혼령은 영혼불멸
지난 4월 전남 화순 고인돌 축제에서 선사인이 다시 살아났다. 선사인 10여명이 채석장에서 캐낸 수백㎏에 달하는 거대한 돌을 직접 옮겼다. 고인돌을 만드는 것이다. 선사시대 사람들에게 자연환경은 생사를 좌우하는 신이었다. 따라서 인간보다 오래도록 잔존하고 있는 거목이나 거석을 항상 우러러봤다.
고인돌은 세계적으로 동북아시아에 가장 많이 분포돼 있다. 우리나라에 약 3만6000여 기로 세계적으로 밀집도가 가장 높다. 그 중에서도 전남지방에 약 2만여 기, 영남지방에 4800여 기가 분포해 지리산 주변 일대보다는 남해안 반도지역에 고인돌이 밀집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전남을 중심으로 인접지역인 전북·경남·전북지역이 고인돌 유적 수의 84.5%를 차지한다.
▲ 마산 진동 유적 경남지역 유적 대부분 지리산 동쪽에 밀집
경남지역에서 확인된 고인돌 유적수는 2004년 11월 현재 대략 412개소인데, 이중 지리산 주변인 산청과 하동, 함양, 남해, 진주, 사천에는 150개소에 약 500여 기가 알려져 있다. 고인돌 밀집 분포지역도 전남은 여수반도 등 남해안에 몰려 있으나 경남은 남해안보다 지리산 동쪽에 더 밀집돼 있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형태의 고인돌이 존재한다. 그래서 선조들이 부르는 고인돌 별칭도 다양했다. 자연석이 땅에 묻혀 있는 것을 독바우, 바둑판식 고인돌은 괸바우라 불렀다.
덮개돌의 형상에 따라 명칭도 다양했는데 지리산인근 구릉지에도 거북 형상을 한 고인돌이 있다. 전남 구례 중학교와 구례군청에서 남동방향으로 300m정도 가다보면 나오는 구례 봉서리 고인돌이다. 거북형상을 한 고인돌은 당시 선조들에게는 신앙의 대상이었다. 장수와 치병을 위한 거북신앙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우리네 선조들은 고인돌을 훼손하는 일은 자신과 자손에 해가 된다고 믿었다. 그 믿음 때문에 수천년간 고인돌은 자연보존의 파수꾼 역할도 톡톡히 한 셈이다.
신앙의 대상으로 인식돼 훼손없이 잘 보존
지리산과는 거리상 좀 떨어져 있지만 최근 가장 눈길을 끌었던 고인돌의 무덤형태가 있다. 창원 덕천리, 마산 진동리, 사천 이금동, 김해 장유 율하 고인돌이다. 이 무덤은 거대한 묘역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무덤 한 변 길이가 50m에 이르고 거대한 장방형 묘역을 석축을 쌓아 돌렸다. 그 가운데 무덤방도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혈연집단보다는 정치적인 지배자의 출연을 암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사천 남강댐 본촌리 돌널(무덤)에서 각각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가 발견(1995~99년 대평리 유적)됐다. 당시 죽은 이를 널 속에 안치한 후 다른 사람의 치아를 뽑아 넣어준 장송의례 즉, 복상발치가 행해졌던 것이다. 목이 잘린 인골도 남강댐 옥방에서 확인됐다. 목이 잘린 사람은 전쟁희생자, 개인 항쟁 행위자, 부정한 죄를 지어 참수를 당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고인돌, 그래서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다. 하지만 고인돌은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 뿐만 아니라 선사인들의 피땀과 삶의 지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이자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이다.
지리산과는 거리상 좀 떨어져 있지만 최근 가장 눈길을 끌었던 고인돌의 무덤형태가 있다. 창원 덕천리, 마산 진동리, 사천 이금동, 김해 장유 율하 고인돌이다. 이 무덤은 거대한 묘역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무덤 한 변 길이가 50m에 이르고 거대한 장방형 묘역을 석축을 쌓아 돌렸다. 그 가운데 무덤방도 확인됐다. 전문가들은 혈연집단보다는 정치적인 지배자의 출연을 암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한편 사천 남강댐 본촌리 돌널(무덤)에서 각각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보이는 치아가 발견(1995~99년 대평리 유적)됐다. 당시 죽은 이를 널 속에 안치한 후 다른 사람의 치아를 뽑아 넣어준 장송의례 즉, 복상발치가 행해졌던 것이다. 목이 잘린 인골도 남강댐 옥방에서 확인됐다. 목이 잘린 사람은 전쟁희생자, 개인 항쟁 행위자, 부정한 죄를 지어 참수를 당한 자라고 볼 수 있다.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고인돌, 그래서 무심코 지나치기 일쑤다. 하지만 고인돌은 선조들의 간절한 바람 뿐만 아니라 선사인들의 피땀과 삶의 지혜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세계문화유산이자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이다.
특히 지리산을 내려와 낙동강과 만나는 남강은 선사시대를 대변하는 도시형성의 요람이었다. 남강은 덕유산에서 발원해 함양군·산청군을 지나 진주시에서 지류인 덕천강과 합류하고, 의령군과 함안군을 지나 함안군 대산면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남강 상류부에서는 전북 남원시 아영분지와 남원시 운봉면·산내면·함양군 마천면의 골짜기를 흐르는 작은 하천들과 합류한다.
▲ 진주 북동쪽 대평에서 발굴된 유물들과 밭고랑. 갑자기 사라져 물 밑서 말이 없고
그 중 남강 상류부인 진주 북동쪽 대평은 지금은 비록 하나의 촌락이지만 선사시대엔 무척 번창한 도시였다.
이곳은 ‘들췄다 하면 반드시’라고 할 만큼 많은 선사시대 유적들이 발견됐는데 특히 1990년대 후반 대규모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신석기·청동기·삼한시대·삼국시대 유적이 발견돼 ‘선사시대 생활상의 보고’라고 불렸다.
대규모 주거지와 환호(둥글게 경계를 만들어서 외부침입을 막는 마을형태)를 비롯해 밭고랑도 모습을 드러냈으며 그 속에 반달돌칼·돌도끼·돌낫·돌보습·돌괭이 등 경작용 연장이 나왔고 일상적인 먹거리인 조·콩·쌀·참깨·수수 등 곡물이 불탄 채 출토됐다. 당시 청동기 농경에 대한 근거는 곡물이나 농기구에 국한됐을 뿐 직접적인 물증인 밭은 나오지 않았던 터라 당시‘역사를 바꾼 발굴’이었다. 1만평 광활한 밭·400동 넘는 움집 등
그들의 생활상을 상상해보면 이러하다. 대평의 청동기인들은 3000여 년 전 진주 대평 들에서 도시를 이뤘다. 1만평이 넘는 광활한 밭을 일궜고 400동이 넘는 움집에서 수천명이 살아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는 돌과 토기·옥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장인집단도 존재했다. 밭이나 환호 같은 시설물은 대규모 노동인력을 필요로 하기에 청동기시대 대평 지역이 수장을 중심으로 결속해 성장해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게 한다.
그럼, 대평이 당시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 환경·지형·토양 등 모든 여건이 풍족해 최적의 농지로 꼽히는 대평리. 청동기때도 대평은 농사짓기에 가장 적합한 조건을 두루 갖춘 곳이었다.
남강가에 자리잡고 있었기에 모래질의 좋은 흙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지리산 핏줄 받은 ‘청동기 혁명의 역사’
먹고살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남은 것은 따로 비축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대평은 매우 안정된 사회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점차 인구가 증가해 이 지역에서 가장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고 근처에서 찾은 옥돌로 장신구를 생산하는 등 수공업도 발달했다. 그래서 곡물과 옥 등 생산물을 멀리 떨어진 해안지역이나 산간지역과 교역도 가능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천혜의 자연 속에 평화를 누렸던 대평리 청동기인들. 그런데 대평인들이 갑자기 사라졌다. 청동기 후기에 접어들면서 그 많았던 유적의 흔적은 전혀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마을이 쑥대밭이 됐다하더라도 정복자 집단이 천혜의 땅을 가만히 내버려 둘리는 만무하다.
자연 수몰돼 고고학적 궁금증만 남아
자연재해도 생각해볼 수 있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그렇게 아쉬움이 남은 채로 대평 상촌 일대는 자연상태로 수몰됐고 대평 충적지인 본래의 옥방 마을과 어은 마을이 미조사 지역으로 남아 있다.
경남대 이상길 교수는 “대평 유적지는 오랜시간을 두고 발굴이 이뤄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수몰된 게 아쉽다”며 “일본의 경우 몇십년에 걸쳐 유적발굴을 하는데, 우리나라는 여러가지 조건상 그렇지 못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왜 대평인들은 갑자기 사라졌을까? 수몰된 저 속에 무엇이 있을까? 대평 유적의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조사되지 못한 지역에 대한 고고학자들의 궁금증은 커져만 간다.
임나일본부설 잠재울 숨은 보석
고성 송학동 1호분, 고성과 가까운 사천 선진리 고분, 거제 장목고분 등에서 왜계 양식이 잇따라 발견됐다.
금관가야와 대가야의 명성 속에 파묻혀 있는 고성을 중심으로 하는 서부경남의 소가야. 5~6세기 그 곳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하지만 서부경남지역에서 가야유적의 발견은 이런 통설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든다.
왜일까. 무엇보다 대가야에서는 왜의 문물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반면 일본 규슈 서북부의 아리아케 연안지역과 북부 규슈지역과 연관이 있는 유물들은 소가야식 유물이 절대다수다.
또한 함안·고성·산청에서 발견된 서부경남 지역 가야 유물은 김해 금관가야의 마지막 유물을 그대로 잇고 있을 뿐만 아니라 외래 형식을 반영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가야인이 활발한 해상활동 과정에서 왜인들과 관계를 맺게 되고 그 결과 외래 문물이 서부경남 지역에 유입된 것이 아닌가라는 결론에 이른다.
고성 송학동 1호분·거제 장목고분 등
소가야가 왜와 교류했다는 사실은 소가야가 대가야만큼 거대했을 거라는 근거만 마련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이 호시탐탐 노리는 임나일본부설을 깨는 근거도 된다.
20년 전 함안 도항리 말산리 고분에서 파란녹이 발견됐다. 빨간녹은 철을, 파란녹은 청동을 의미한다. 무엇일까 들춰보니 일제시대 헌병군화 경첩. 샅샅이 도굴하고 신발만 남기고 떠난 것이다.
일본은 가야에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이 애타게 찾은 것은 고분 속에 친일계 지배자가 남긴 상징적인 유물이다.
함안의 고분은 대충 헤아려도 1000여 기. <살아있는 가야사 이야기> 저자 박창희씨는 들녘에서 만난 노인들마다 ‘일본 것들이 금 캐듯 다 캐서 가져갔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1917년에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위원들은 함안 도항리 대형고분 52기를 발굴한다. 대충 조사보고서를 꾸민 뒤 160여점의 부장품들을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간다. ‘임나일본부설’을 입증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것인데, 결국엔 실패한 채 도굴꾼 노릇만 한 셈이다.
▲ 왜계 양식인 거제 장목고분 입구벽. 왜계 유물 잇단 발견…교류 흔적 증명
죽음을 앞두면 마음이 선해진다고 했던가. 죽음을 앞둔 이들 고적위원들은 하나같이 ‘임나일본부는 조선에 없다’는 말을 남겼다. 역사학자들은 임나일본부설을 떠들어대지만 일본 고고학자들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또한 일본에서는 입을 다문다.
서부경남 가야유적에 앞서 김해 금관가야에서는 더 확실한 근거가 등장하기도 했다. 4세기 갑옷과 말재갈이 그것이다.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갑옷은 나오는데 마구는 등장하지 않는다.
요약컨대 가야는 기병집단이었고 일본은 보병집단이었다는 것. 임나일본부가 지배했다고 한다면 일본의 보병이 기병을 부수고 식민지를 만들었다는 얼토당토 않은 결론이 나온다.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 나타나는 돌 화살촉 또한 말할 필요가 없는 근거다. 철이 발에 차이던 금관가야에서 과연 일본의 돌 화살촉이 필요했을까? 이는 일본이 가야의 철을 얻어가면서 남긴 자신들의 최고의 물건인 것이다.
왜계교류 관계를 짚어 볼 수 있는 서부경남의 가야유적은 아직 발굴도 연구도 미비한 상태. 하지만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막을 확실한 근거가 될지도 모르는 숨은 보석이다.
희미해진 산 등진 사찰 오색빛깔 매력 발하고
지리산 좋아하는 등산객들은 비가 오면 짐을 싼다. 비가 그친 후 스산한 기운이 감도는 풍경은 지리산만 가지고 있는 매력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매력은 사찰이다. 안개로 희미해진 산을 등지고 있어 사찰의 오색빛이 더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비가 자욱이 내리던 지난 22일 지리산 자락을 따라 역사가 잘 남아있는 사찰을 찾았다. 조선시대 불교의 핍박이 담긴 선암사, 통일신라시대 한 인물의 효가 서려있는 화엄사, 의병항쟁 당시 피의 역사를 전하는 연곡사다.
▲ 선암사 하마비.
△선암사-고귀한 멋 속에 숨은 조선의 역사 = 전남 순천 조계산에 있는 선암사는 아기자기한 멋이 돋보이는 천년고찰이다. 5월 매화꽃 길을 따라 곳곳에 숨어있는 10여 개가 넘는 건물들을 지나면 자신도 모르게 신선이 된 듯하다. 하지만 선암사의 역사는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그 화려함 속에는 조선시대 핍박받았던 불교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찰은 양반들이 여가를 즐기는 공간이자 수탈의 대상이었다. 사찰에 다다르기 전‘하마비’라 적힌 비석이 나타난다.‘말에서 내려라’는 의미의 이 비석이 왜 그곳에 있는 것일까?
조선시대 사찰은 양반들의 핍박에 견디지 못할 지경이었다. ‘하마비’의 의미는 ‘양반들아, 입구에 있는 강선루에서 풍류만 즐기고 가라’는 승려들의 간곡한 부탁이 담겨있는 셈이다.
‘양반아, 괴롭히지 말고 놀다만 가라’
사찰 입구에 있는 현판. 무심코 지나치기 쉽다. 하지만 선암사 입구 현판에 적혀있는 한자 한자는 선암사 역사의 결정체다. ‘고청양산해천사’라 적혀있다. 해발 844m 조계산에 있는 선암사에 바다‘해’자가 웬 말인가.
선암사는 6번이나 화재가 났던 곳이다. 이곳 스님들은 불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 ‘해천’이라는 뜻은 하천이 바닷물이 되어 불을 꺼 달라는 스님들의 간절한 의미가 담겨있다. 조선시대 핍박 속에서도 선암사가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있었다.
대웅전에는 세도정치 권력자인 김조순의 조카가 쓴 글이 있고 화려한 꽃무늬가 돋보이는 원통전은 김조순 일가가 놀던 곳이다. 왕에 버금가는 세력들의 지원이 있었기에 그나마 선암사의 고귀한 멋이 지금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 화엄사 사사자석탑. △화엄사-창건자 연기조사의 뜻이 담긴 곳 = 화엄사는 나무가 아닌 숲을 봐야 진실이 보이는 사찰이다. 사찰에 들어선 후 멀리서 전체를 보면 오른쪽으로 대웅전이, 정면으로는 각황전이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찬찬히 보면 각황전이 석축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 반면 대웅전은 높은 석축 위에 축조돼 있다. 계단도 각황전보다 대웅전이 규모가 크다. 이유인 즉, 가장 중심이 돼야할 대웅전이 시선의 오른쪽에 있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일 수 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효대로 이어지는 각황전 뒤쪽의 계단길은 송림으로 둘러싸여 퍽 운치 있다. 그 길의 끝에는 이 절의 창시자인 연기조사의 효심이 담긴 사사자 석탑이 기다리고 있다.
4개의 사자가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국보 제 34호 화엄사 사사자 석탑. 경주의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양대 이형석탑으로 불린다. 사사자 석탑 옆에는 인물상이 들어가 있는 석등 1기가 있다.
어머니 명복 비는 애틋한 마음
사사자 석탑에 서서 오른쪽 사자를 중심으로 서서 석등을 향해 보면 석등이 사사자 석탑을 향해 애틋한 마음을 전하는 듯하다. 사사자 석탑은 연기조사의 어머니이고 석등아래 있는 인물은 연기조사다.
그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효심탑인 것이다. 석등이 보이는 사사자 석탑쪽에서 시계방향으로 돌아보자. 사자가 서서히 입을 벌리고 사자 아래 있는 비천상은 장구를 치고 악기를 연주하고 피리를 불고있다. 석등아래 연기대사가 어머니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보고만 있어도 1400년 전 통일신라시대로 돌아간 듯하다. 석탑하나로 그 당시 분위기를 재현해낼 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연곡사-피의 역사가 서린 곳 = 화엄사를 떠나 30분쯤 가면 지리산 피아골이 나온다. 그 길을 따라 오르면 밤나무 꽃향이 코끝을 스친다. 정유재란때 왜적 400여명이 하동·악양을 거쳐 이곳을 비롯해 쌍계사·칠불사에 난입해 모두 파괴했다. 연곡사를 중창한 이는 소요태능. 왕실의 신주목을 봉납했던 곳으로 신주목의 재료였던 밤나무가 유난히 많은 이유다.
피의 역사가 묻어있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다른 사찰에서 느낄 수 없는 스산한 기운이 감돈다. 연곡사 기슭에는 고관순의 비석이 있다. 과연 고관순은 누구일까. 게릴라식으로 의병항쟁을 하던 고관순은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연곡사에 본 기지를 두고 활약한다.
그가 찾아간 사람이 매천 황현. 그는 군사를 일으키기 위해 격문을 써달라 부탁하지만 황현이 거절한다. 그리고 그 다음날 고관순이 일본 손에 죽음을 당한다. 그리고 남쪽 초야의 한 시인이 목숨을 끊었다. 매천 황현이다. 왜 그는 고관순을 따라 목숨을 끊었을까.
매천 황현은 황희정승의 후손으로 <매천야록>을 남겼다. 지방출신이라는 이유로 장원급제하지만 대우를 받지 못하자 구례에서 움막을 짓고 후진을 양성한다. 대한매일신문 등을 보면서 세상에 눈을 뜨고 이완용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비롯해 일제만행 뒷이야기를 하나하나 남긴 것이 <매천야록>이다.
생각은 깨어 있었지만 의병으로 나서진 못했다. 고관순이 격문을 써달라 했지만 부끄럽기 그지 없었다. 한번 더 마음을 먹고 다음날 격문을 써주겠다며 고관순을 찾았다. 하지만 때는 늦어 고관순을 비롯해 의병항쟁자들이 싸늘한 시체가 돼 연곡사를 뒹굴고 있었다.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며 몇 번 자결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결국 매천사 뒷마당 저수지에서 맷돌을 짊어지고 자결한다. 연곡사 뒷산 곳곳에는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부도양식은 다 있다. 그리고 끝 길에 고관순 비가 나무에 가려진 채 가는 이들을 아쉽게 보내고 있다.
화엄종 → 선종 → 조계종
지리산은 능선을 기준으로 남쪽면은 겉지리, 북사면은 속지리로 나누어진다. 속지리쪽은 주로 산신·정감록 등 민간신앙과 관계된 유적이 많은 반면 겉지리쪽은 불교신앙이 주를 이룬다. 겉지리 사찰을 눈여겨보면 한국불교의 흐름이 능선처럼 엮어진다.
구례 화엄사에 다다르면 신라중대 화엄사상을 알 수 있고 남원 실상사, 구례 연곡사를 거치면 선종의 깨달음을 느낄 수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는 산청 단속사는 고려후기 조계종의 흔적이 묻어있다. ▲ 승려의 사리가 모셔진 실상사 북부도. △구례 화엄사가 부석사에 가려진 까닭은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이것이 생하면 저것이 생하고/이것이 멸하면 저것이 멸한다’
화엄사상을 잘 표현한 연기대사의 세계관이다. 모든 존재가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 생사 한다는 화(和) 사상이다. 이런 화엄종을 대표하는 사찰은 부석사와 화엄사.
하지만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이 창건한 부석사에 비해 화엄사는 베일에 싸여 있었다. 연기대사라는 인물에 대한 명확한 근거 기록이 없어 인도인이라는 추측이 난무하고 전설적 인물로 치부되기까지 했다.
1979년 신라 화엄사경이 발견됐다. 누가 어떻게 사경을 썼다는 발문이 나오면서 화엄사의 창건자인 연기대사의 실체와 사찰의 연대가 명확해졌다.
이에 따라 화엄사에 있는 사사자삼층석탑(국보 35), 동오층석탑(보물 132), 서오층석탑(보물 133), 원통전전사자탑(보물 300)은 신라문화의 절정기를 이룬 경덕왕 시절의 작품들로 가장 세련된 불교미술의 상징들로 떠오르게 됐다.
그럼 왜 화엄사는 일찍부터 부각되지 못한 것일까. 후삼국시대. 불교교단이 분열하면서 화엄종도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며 견훤을 중심으로 하는 남학파(전남 구례 화엄사)와 왕건을 중심으로 하는 북학파(경북 영주 부석사)로 나눠진다. 고려가 세워지면서 자연히 고려를 지지했던 북학파는 역사가 됐고 남학파는 뒤안길로 묻혔던 것이다.
능선따라 흐르는 한국불교
△선종의 핏줄 실상사, 연곡사
실천불교라 불리는 선종. 인도의 화엄경이 중국으로 건너와 화엄종이 됐듯이 인도의 선 수행 종파는 중국을 거쳐 선종이 된다.
인도의 전통수행법인 ‘비구(생산활동은 안하고 최소한의 양만 빌어서 먹음)’는 중국의 현실 중심적인 사상과 겸해지면서 이상도 현실에서 찾는 실천적 종교인 선종으로 자리잡는다. 선 수행 의미도 확대될 대로 확대돼 생산활동까지도 선이 되고 승려도 농사를 짓게 된다.
선종은 승려의 깨달음이 목적이다. 그래서 선종 사찰을 둘러보면 부처를 모시는 불전의 비중은 줄고 승려들이 수행하는 강당은 두각을 나타낸다. 그 대표적인 사찰이 전북 남원의 실상사다. 928년 신라말 9산 선문 중 최초 선문으로 왕실지원 아래 세워져 9세기 이후 유물들이 가득하다.
선종하면 승려의 사리를 모신 부도를 빼놓을 수 있으랴. 구례 연곡사는 고려 초까지 스님들이 선을 닦는 절로 이름이 높았다. 그래서 구례 연곡사에는 동부도(국보 제53호)·서부도(보물 제154호) 등 신라 말에서부터 고려초까지 빛을 발했던 팔각원당형 부도들이 곳곳에 모셔져 있다.
△고려후기 막강한 영향력 가졌던 단속사
동삼층석탑(보물 제72호)·서삼층석탑(보물 제73호)·당간지주만 터를 지키고 있는 단속사. 현재 휑하니 바람이 이는 이곳은 고려후기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조계종 사찰이었다.
교종과 선종으로 갈라져 대립했던 고려후기. 교선일치를 역설하며 화엄종 출신 승려 의천이 선종을 끌어들여 천태종을 개창한다. 당시 끝까지 선종을 주장한 승려들이 있었으니 이들이 만든 것이 조계종이다.
고려후기 최씨 집권기에 최우가 조계종을 끌어들인다. 그리고 그의 아들인 만종을 단속사 주지로, 만전을 화순 쌍봉사 주지로 보낸다. 고려사에 의하면 이들은 재산을 착취하고 고리대도 일삼는 등 백성을 괴롭혔다고 전한다. 인간은 죽을 때까지 후회한다고 했던가. 속됨을 끊겠다는 의미의 단속사도 인간의 어리석음은 영원히 고칠 수 없었는가 보다.
‘낙태약 된다고 저 장승 코를 어제 밤 비 온 뒤 또 글거갔소/오목오목 들어간 고무신 자국 키 작은 여자가 발버팀쳤소/우뚝하던 그 코가 없어지고도 그 자리가 한 치나 패어드렀네/캄캄한 밤중 타서 찬 칼을 품고 저 장승 코 베려 달려들 때에/약한 맘 얼마나 발발 떨었노 아니다 대담하지 그 처녀아기’ <박금의 장승 민요 ‘장승코’>
장승의 주먹코를 자세히 보면 시커먼 손때가 반질반질하다. 옛 사람들은 아들을 얻고자 장승코를 떼어다 갈아서 청정수에 타 마셨다고들 하니 어찌 그 코가 제대로 남아있겠는가. 아들을 못 얻으면 장승의 벌이요, 얻으면 장승의 은덕이라 여겼다. 그렇게 장승은 조선 백성들의 삶의 이정표이자 동반자였다.
장승은 상단에 사람의 얼굴 형상이, 몸통에는 그 기능을 나타내는 글이 써 있다. 마을 입구나 사찰 앞에서는 수호신으로, 국도변의 역에서는 지역간 거리를 나타내는 이정표 역할을 했다. 영호남지역에서는 현재 ‘벅수’혹은 ‘법수’라고도 부른다.
그 중 지리산 주변지역의 장승들은 한 쌍씩 어우러져 있고 얼굴형은 입체적이다. 툭 떨어질 것 같은 부리부리한 눈, 떡 뒤집어진 입술사이로 쑥 드러나는 치아, 당기고 싶은 긴 타래수염은 잡귀가 지나다가 놀랄만 하게 생겼다.
종류도 목장승보다 돌장승이 많다. 또한 명문이 적혀있는 것도 특징인데 마을 장승에는 수호신의 기능을 나타내는 명문이, 사찰장승에는 불법수호와 경계 기능을 나타내는 독특한 명문이 적혀있다.
지리산 지역 주변의 장승은 15기인데 그 중 남원에만 10여 개에 이른다. 남원은 삼국시대 이래로 영토분쟁이 잦아 옛 사람들은 장승을 통해 마을의 평화와 안녕을 기원했다고 한다.
지리산 주변 15기, 남원만 10개
그 중 운봉면 서천리 돌장승 2기는 남원 장승 중 외모가 가장 뛰어나다. 방어대장군, 진서대장군 2기 모두 남상이고 형태도 닮았다. 벙거지형 모자에 둥글고 큰 눈을 부라리고 콧방울은 좌우로 넓게 벌어져서 무지하게 보이고 벌린 입은 굵은 윗니가 입술 밖으로 나와 사납게 보인다. 채수염은 구불구불 길게 드리워졌다.
진서대장군은 중국에는 별로 없는 장군명이며 우리나라 장승류에도 유독 진동, 진북, 진남은 없고 진서대장군만 있다. 그 이유는 진서대장군의 기능에서 찾을 수 있다. <장승과 벅수> 저자 김두하 선생은 우리나라의 서쪽인 중국에서 오는 호귀마마를 퇴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국내 대장군의 명문만으로 별 효과가 없자 역으로 중국 황제들을 진서대장군으로 봉하해 마을에 세웠다고 전해 우리 선비들의 해학이 엿보인다.
함양군 벽송사 들머리에는 밤나무로 만든 장승 2기가 마주보고 있다. 한 장승은 멀쩡한데 한 장승은 머리가 없다. 1969년 산불이 났을 때 머리가 타 버려 숯이 되었고 코도 떨어져서 참담한 꼴이 됐다.
명문 적혀있는 돌장승 많아
통나무를 깊이 파 만든 장승은 조각수법이 뛰어나 전남 순천 선암사 입구 목장승과 더불어 명공의 작품으로 꼽힌다.
장승은 조선전기에서 후기로 들어오면서 노표에서 수호신으로 그 역할이 바뀌었다. 조선초기에는 중앙정부차원에서 국도 10리마다 세워 행인들의 여행길을 도왔고 조선후기에는 사찰의 수호신 역할을 했다. 조선후기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외부침략자가 들끓자 사찰 수호신인 장승을 모시기 시작한 것이다. 사찰 입구에 있는 천왕문의 사천왕상 등은 장승을 모방한 것이다.
그럼, 조선후기 사람들은 왜 마을 입구에 장승을 세웠을까. 백성들은 전란을 겪으면서 농토가 화폐화 되고 자연재해까지 겹쳐 기근에 시달린다. 지배층의 억압과 약탈에 견디기 힘든 지경에 전염병까지 들이닥친다. 사면초가 상황에서 농민들은 삶의 터전인 마을을 지키려 장승을 세웠던 것이다.
오늘날 미신쯤으로 폄하되는 장승. 하지만 고난한 삶을 감내해야 했던 조선후기 백성들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간절한 바람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산이 있어도 바위가 없으면 명산이라 하지 않고 시냇물 골짜기에도 돌이 없으면 즐겨 찾지 않았다.
현대에 와서는 돌솥에 밥을 해먹고 돌판에 고기를 구워먹으며 평생 온돌 위에서 살다가 돌로 짠 묘곽 안에서 일생을 마친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석조문화다. 건물이며 관광지 안내표지판, 다리 난간 등을 보며 왜 이다지도 한국인들은 돌을 가지고 무얼 조형하는 것을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세계문화유산 고인돌, 불교문화의 꽃 석탑과 승탑, 최근 문화재로 지정된 돌담까지. 우리나라 환상의 석조미술은 영원함을 기약해주는 돌의 속성을 존엄하게 여기며 동고동락한 우리 민족에게 나타난 당연한 결과다.
▲ 남원 실상사 삼층 석탑. △ 불교문화의 꽃 석탑
석탑‘절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벌여있고 탑들은 기러기 날 듯 줄을 지었다.’
삼국유사에서 서라벌의 거리를 묘사한 것으로 삼국의 불교문화가 찬란했음을 칭송한 것이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목탑을 먼저 만들었으나 영원히 탑을 보전하기 위해 석탑을 염원한다. 백제 미륵사지석탑과 벽돌처럼 잘라 포개 맞춘 신라 분황사 모전석탑이 첫 석탑이다.
특히 통일왕조의 새 역사를 창조한 통일신라시대는 석조미술의 전성기였다. 불국사 다보탑과 더불어 정상의 기량으로서 꼽는 것이 구례 화엄사 4사자 삼층석탑이다. 사자, 악단, 사천왕상, 보살상이 다양한 표정과 자세를 취하고 있어 화려함 속에 조화미가 엿보인다. 이에 석등과 조화를 이룬 ‘파격적인 미’까지 갖춰 석조미술 전성기에 만들어진 최고의 석탑으로 꼽힌다.
통일신라시대 다보탑 등 석조미술 전성기
통일신라말기 선종불교가 널리 보급되자 석탑 기술자들은 고승들의 업적을 기리는 승탑에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승탑 예술이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반면 석탑은 화려한 미는 줄고 간결한 미만 남는다. 남원실상사 삼층석탑을 보면 유난히 머리장식이 화려한데 이는 갸름해진 석탑에 특별함을 주기 위한 보상심리가 담겨있다. 반면 승탑미술은 입체감이 더해져 화려해지는데 실상사 승탑을 보면 사자가 다리를 깨무는 형상을 하고 있고 화순 쌍봉사 승탑에는 아래를 받치고 있는 구름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탑 앞에는 석등이 놓여지곤 했는데 돌의 형태에 따라 팔각석등, 쌍사자석등, 사각성등으로 구분되는데 지리산 인근에는 신라시대 대표적인 형태인 팔각석등이 주를 이룬다.
석조미술고려시대 석탑은 기단과 탑신이 신라석탑에 비해 폭이 좁아지고 탑신은 층수가 많아져 전체적으로 길쭉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전라도 화순에는 우리 민중의 것이라 하기에는 납득하기 힘든 탑들도 있다. X자나 마름모 형을 그려놓은 비슷비슷한 석탑들로 다탑·다불의 성격이 짙다.
민중식이라는 의견이 제기됐긴 하지만 통일신라시대까지 하나를 만들더라도 완벽하게 만들고 남들과 다르게 만들었던 독창적이고 열정적인 성향의 우리민족과는 거리가 멀어 의문이다. 형태나 성향을 보면 몽골에서 온 기술자의 솜씨로 여겨진다.
조선시대에는 유교를 실천이념으로 표방했기에 석조미술은 독창적인 양식을 창출하지 못하고 돌담과 같은 서민들과 함께하는 민예미술로 자리잡는다.
▲ 함안 고인돌 공원. 조선시대 돌담 등 서민들 민예미술로 변화
또한 석조의 꽃을 피웠던 사찰에서는 연곡사 소요대사, 선암사 화상대사 등 주지스님도 탑을 만들고 마지막에는 돌 하나만 얻는 고인돌식 승탑도 등장하면서 석조미술은 끝을 맺는다.
문명에 익숙해진 현대기술자들에게 다보탑을 보여주며 깎으라고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고 한다.
아마도 기계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장인 손길’과 거칠고 우직하면서도 여유와 인정미 넘치는 돌바우를 닮은 우리 선조들의 땀을 흉내내지 못하기 때문이지 않을까.
천왕봉을 바라보며 ‘평화 신라’ 를 노래하다
역사의 장면 1. 1959년 한 청년이 지리산 정상에서 웅장한 불상을 발견하게 된다. 지게로 짊어지고 내려오는데 무게를 이기지 못해 불상의 풍채를 깎으면서 내려와 산청 내원사 양지바른 곳에 모셨다고 한다. (보물 제 1021호)
역사의 장면 2. 1980년 부산시립박물관은 납석제사리함을 입수하게 된다. 사리함 그 겉면에는 비로자나불을 조성하게 된 내력이 이두체 한문으로 적혀 있었다. ‘신라 혜공왕 2년(766)에 비로자나불을 조성해 모시다’(국보 233호)
서기 766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다고 기록돼 있는 납석제사리함. 박경원 선생의 끈질긴 노력 끝에 이 사리함이 산청 지리산 내원사에 있는 석조 비로자나불 대좌의 중대석에서 출토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석조비로자나불은 비로소 766년 조성된 현존 최고의 비로자나불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한국 고대 조각사와 사상사의 숙원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석조비로자나불상은 현재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내원사 정각에 모셔져 있다.
766년 지리산 중턱엡현재 산청 내원사 정각에 자리
지권인을 맺고 가부좌를 하고 있으며 정면에서 보면 무릎이 낮아 보이고 측면에서 보면 등이 편평해 보인다. 내원사로 옮겨지면서 깎였기 때문이다.
비바람에 쓸려 세부표현은 명확하지 않지만 당당하고 세련된 모습이다. 얼굴은 약간 갸름하고 풍만하며, 은은한 미소를 한껏 머금고 있다. 벌어진 어깨와 넓은 가슴은 과장되지 않고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표현됐다. 잘록한 허리와 양 팔 사이에 옷주름이 꼼꼼하게 표현돼 있어 섬세함이 돋보인다. 상체의 폭과 두 무릎의 폭의 비례가 조화를 이뤄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준다.
비로자나가 ‘어디나 비추는 광명’이란 의미가 있는 것처럼, 풍만한 몸체와 섬세한 얼굴윤곽은 햇살이 비출 때 더욱 더 잘 드러난다. 하지만 최근 이 비로자나불이 정각 안에 모셔지면서 그 웅장함은 느낄 수가 없게 됐다.
비로자나불이 처음 모셔져 있던 곳은 지리산 중턱에 있는 석남암사터로, 멀리 천왕봉이 보이는 천하의 절경이었다고 전해진다. 766년 통일신라가 가장 왕성할 때, 왜 경주가 아닌 지리산 중턱에 현존 최고 여래 비로자나불을 만든 것일까.
16세기 후반은 변화의 시기였다. 임진왜란으로 정칟경제·사회·문화가 꿈틀거렸고 명종대는 을사사화, 선조대는 붕당정치의 시작으로 동인·서인이 나누어지는 정국이 계속됐다. 한편 서원과 향약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성리학은 더욱 더 빛을 발했고 이는 조선도자에 영향을 미쳐 분청자기가 백자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이 시기 분청자 요지에서는 귀얄분청자, 분장분청자와 함께 연질백자가 주로 발견됐다. 연질백자로는 진해 두동리, 하동 백연리 요지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찻사발이 대표적이다. 그 당시 일본에서 다완으로 쓰인 조선다완을 대표하는‘이도다완’도 연질백자의 한 예다.
진해 두동리 요지는 2001년 시굴을 거쳐 2002년에 발굴조사됐다. 발굴 결과 여섯 기의 가마와 폐기물 퇴적층이 조사됐는데, 퇴적층은 심하게 교란돼 있었다. 출토 유물은 16세기 전반·중반경의 분청자와 백자들로 사발·접시가 대부분이었다.
하동 백연리 가마터는 1985년 국립경주박물관 지표조사를 통해 알려졌으며 그 중 1호 요지가 2001년 발굴조사됐다. 출토 도편은 귀얄분청자와 분장분청자의 사발·접시들과 연질백자, 경질백자편이었다.
16C 후반 성리학 조선도자에 영향…분청자기에 백자 흡수
최근 이러한 경남 지방의 연질백자는 지리산과 낙동강 주변지역의 태토(자기를 빚는데 바탕이 되는 질흙) 등 지질학적 상황이 뒷받침됐기에 가능했다. 연질백자는 경질백자에 비해 태토가 자기화돼 있지 않아 퍼석퍼석하고 강도가 약하지만 흡수율이 높고 단열과 내열성이 좋아 다도세계에서 인기가 높다.
주목할만한 것은 일본에 남아있는 조선다완이 주로 이 연질계통의 백자였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일본에서는 ‘조선다완’이라는 찻사발이 전해져 널리 사랑을 받았다. 조선다완은 1537년 차와 관련된 문헌인 <다회기> 등에서 처음 선보였다. <다회기>는 다도의 일기로서 16세기 다도의 모습과 미술을 파악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자료로 알려져 있다.
조선다완은 1573년 후쿠이현의 일조곡 조창씨 유적에서 많은 양이 출토되면서 모모야마시대 천정년간(1573~1591)동안 유행하게 된다.
1980년대 후반 고고학적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뤄지면서 조선다완은 늦어도 1573년에 전래됐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최근에는 오사카·시가 등에서도 유적연대에 부합하는 각종 다완이 출토되고 있어 조선다완 연구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청컨대 천 석 들이 종을 보시게 /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안 나지
나도 어찌하면 저 두류산처럼 될 수 있을까 /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고 의연히 서 있는’
- <남명 조식이 지리산 덕산 시냇가 정자의 기둥에 쓴 시>
1555년 남명은‘단성소’를 올린다. 더 이상 썩은 정치를 묵과할 수 없었기에 조정의 폐정과 실정을 신랄하게 파헤쳤다.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를 ‘과부’로, 명종을 ‘고아’로 묘사했다. 상소문은 정국을 흔들었으며 신하들의 만류가 없었다면 대죄를 면키 어려웠다. 조정의 심장부에 붓끝을 겨눴던 남명. 그의 기개는 과연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남명은 가야산 자락에서 태어났지만 유독 지리산을 좋아했다. 58세 때까지 지리산을 10여 차례 올랐으며 61세 때는 천왕봉 아래 덕산으로 거처를 옮겨 12년 간 자신을 갈고 닦았다. 지리산은 실천적 유학자 남명의 사상적 고향이었다.‘하늘이 우는’ 혼돈의 세상에서 울지 않고 의연히 서 있는 천왕봉처럼, 그는 우뚝 서서 의연히 버팀목이 되고자 했다.
△남명의 지리산 유람
남명은 58세 때 벗들과 섬진강을 거쳐 쌍계사 방면을 유람했다. 아름다운 산수를 유람하면서 ‘아름답다’는 탄식도 했을 터이고, 경외감도 생겼을 것이다. 이는 여행을 하면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이다. 그런데 오랫동안 깊이 학문에 침잠했던 남명의 눈은 그런 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깊이 들여다보기를 자연스럽게 했다.
‘높은 산 큰 내를 보고 오면서 얻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한유한·정여창·조지서 세 군자를 높은 산과 큰 내에 비교한다면, 십 층 높은 봉우리 위에 옥 하나 올려놓고, 천 이랑 넓은 수면에 달 하나 비친 격이다. 물만 보고 산만 보다가 그 속에 살던 사람을 보고 그 세상을 보니, 산 속에서 10일 동안 품었던 좋은 생각들이 하루 사이에 언짢은 생각으로 바뀌어 버렸다. 훗날 정권을 잡는 사람이 이 길로 와 본다면 어떤 마음이 들지 모르겠다.’
남명의 유람은 산수에 남아 있는 고인의 흔적을 통해 그 인물과 그 세상을 만나는 구도여행이었다. 그는 다시 이런 관점으로 현실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높은 산을 오르면서 인간이 선한 데로 나아가기가 그처럼 어렵다는 것을 생각했고, 산을 내려오면서 인간이 악으로 나아가기가 그처럼 쉽다는 것을 생각했다.
‘처음 위쪽으로 오를 적에는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기가 힘들더니, 아래쪽으로 내려 올 때에는 단지 발만 들어도 몸이 저절로 쏠려 내려갔다. 그러니 어찌 선을 좇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악을 따르는 것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니겠는가?’
남명은 지리산을 유람하면서 <유두류록>이라는 유람록을 남겼다. 이 유람록에는 남명의 독특한 산수유람관이 들어 있다. 남명은 이 유람록 끝에 ‘물을 보고 산을 보고, 그리고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았다. ‘간수간산 간인간세(看水看山 看人看世)’라고 썼다. 남명의 이 여덟 자 짧은 구절을 읽으면, 유람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여행을 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남명의 도반 천왕봉
남명은 61세 되던 해 짐을 꾸려 현 산청군 시천면 사리, 흔히 덕산이라 부르는 곳으로 들어갔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 지리산 깊숙한 골짜기인 덕산을 찾은 이유는 무엇일까.
첫 번째는 천왕봉을 마음에 두었기 때문이다.‘덕산복거’라는 시에서 그는‘천왕봉이 상제가 사는 하늘에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갈고 닦는 데 철저했던 사람이 그냥 산봉우리를 바라보기 위해 들어갔을 리는 만무하다. 덕산을 찾은 두 번째 이유는 집을 한 채 짓고 산천재라고 이름지은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산천재’의 산천은 <주역> 대축괘에서 따온 것이다. 대축괘의 괘사를 보면 ‘강건하고 독실하고 휘광하여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고 했다. 자신을 더 강건하고 독실하게 빛나게 갈고 닦아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덕산을 찾은 것이다.
대체로 61세가 되면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신의 사상이 어느 정도 정립돼 설교하길 좋아한다. 그리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남들에게 자신의 것을 가르치고 싶어한다. 그런데 남명은 가르치기보다는 자신을 더 닦고자 했다.
노인이 죽을 때까지 매일 매일 자신을 새롭게 변화시키려고 노력한 점, 그 자체가 인류의 영원한 스승이 되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다. 이것이 바로 몸으로 하는 공부다. 이처럼 몸으로 하는 공부는 이론을 따지기보다 깨달음을 중시한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몸으로 공부를 하는 사람이 없다. 남명을 배워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남명은 덕산에서 12년을 살다가 1572년 음력 2월 28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삶은 요란하지 않고 조용했다. 그러나 가끔씩 천둥처럼 세상에 울렸다. 그리고 남명은 어느덧 지리산 천왕봉이 되어 거기 그대로 있다.
화엄사는 입구가 시원하게 열린 개방형이다. 그릇만큼 채워진다는 말이 있다. 화엄사를 창건한 스님들은 미래를 예견하면서, 이곳을 대총림도량으로 키우려고 했던가보다. 그들의 믿음대로 1500년이 지난 지금, 지리산 최대의 사찰이요 신앙적 중심지로 화엄사는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건축적 측면에서 보면, 화엄사는 풀기 어려운 의문 투성이의 가람이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아보면 절묘한 건축기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보제루 동쪽을 돌아야 하는 이유
보제루 앞에 이르면 좌우로 두 갈래 길을 통해 중심마당으로 올라갈 수 있는데, 대부분의 참배객들은 오른쪽으로 돌아 올라가게 된다. 보제루의 동쪽을 돌아서 중심마당으로 진입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바로 화엄사 전체 가람배치의 가장 중요한 비밀이 될 것이다.
화엄사는 대웅전이 주불전이다. 하지만 대웅전이 각황전보다 훨씬 작은 규모여서 외형적으로 차이가 심하다. 보제루 동쪽을 돌아나오면 대웅전이 먼저 보인다. 보제루를 동쪽으로 돌아서 올라가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이율배반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었다.
보제루의 동쪽을 돌아 오르면 운고각과 적묵당 사이에 서게 된다.
대웅전, 2배 크기인 각황전과 동등하게 부각
이 지점은 중심마당의 남동쪽 모서리에 해당하며, 전체 가람을 바라볼 수 있는 이 곳은 각황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지점이다. 대웅전까지의 거리는 각황전까지의 절반에 불과하다. 2층 7칸의 큰 각황전은 멀리 보이고, 1층 5칸의 대웅전은 가까이 보인다. 각황전이 대웅전의 2배 정도의 크기지만, 거리에 반비례하는 시각적 차이를 이용하여, 결과적으로 두 개의 건물은 거의 비슷한 규모로 보이게 된다.
절대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2개의 건물을, 상대적 시각으로는 동등한 중심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대웅전-각황전의 입체적 역동적 구성
각황전과 대웅전을 동등한 중심 건물로 부각시키기 위한 의도는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당에 놓인 두 5층 석탑의 위치에 주목해보자. 형태가 비슷한 이런 유의 쌍탑은 대웅전 앞 좌우에 대칭되게 놓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화엄사의 두 탑 위치는 좌우로 나란하지도 않고, 대칭적인 거리를 유지하지도 않는다. 서탑이 동탑보다 앞으로 튀어 나왔고, 대웅전 중심에서 동탑보다 2배 이상 떨어져 서 있다. 형태는 유사하지만, 위치는 매우 비대칭적이다.
그러나 두 탑의 위치를 비대칭적으로 보는 관점은 대웅전 좌우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이다. 보제루 동쪽, 이 곳을 시각점이라 부르자. 그 중요한 지점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전혀 다른 장면을 볼 수 있다.
평면도선 비대칭적…실제론 질서잡힌 공간으로 시각화
이 시각점에서 보면, 동탑은 대웅전에, 서탑은 각황전에 소속된 것으로 보인다. 동탑은 정확히 대웅전의 중앙에 놓인 것으로, 서탑은 각황전의 중앙에 놓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시각점 - 동탑 -대웅전이 일직선 상에 놓이고, 시각점 -서탑 - 석등 -각황전을 잇는 축선 역시 일직선을 이룬다.
마치 두 개의 1탑 1금당이 시각점에서 모여 있는 것과 같은 절묘한 양상이다. 이 역시 대웅전과 각황전을 동등한 두 개의 중심 전각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장치이다.
화엄사의 가람배치는 평면적 형식적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입체적이며 역동적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평면도 상에서는 비대칭적이며 불규칙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안정되고 질서가 잡힌 완전한 공간을 이룬다.
△긴 참배길 자연스런 이끌림
일단 대웅전 앞으로 유도된 참배객들은 전각들의 운율에 이끌려 각황전 앞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각황전 남쪽 측면과 영산전 사이로 나있는 계단이 다음 단계의 공간으로 유도하기 때문이다.
긴 계단을 가파르게 오르면 희한하게 생긴 4사자석탑과 공양탑이 마주보고 있는 지역에 다다른다. 일명, 효대로서 화엄사의 창건 정신이 담겨있는 매우 상징적인 공간이다. 해탈문에서 시작하여 금강문과 천왕문을 거쳐, 보제루를 돌아, 대웅전 원통각 각황전을 잇는 긴 참배로의 최종적인 대상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참배동선이 구축된 것은 조선조 후기의 일로 추정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가람의 배치형식이 크게 변화되었고, 이에 맞추어 진입과 참배의 동선을 재구성하고, 가람의 질서를 재편하였다. 그러나 기존 건물들과 시설물을 크게 손대지 않았다. 과거의 유산을 존중하고 보존하면서도 전혀 새로운 건축적 질서로 재편시킨 뛰어난 예를 화엄사에서 발견한다.
땅 힘에 대한 믿음이 담긴 서낭이야기. 자연은 모두 하나라고 말하는 청학동 전설. 자연의 힘을 두려워하고 존경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황산대첩의 뒷이야기. 지리산은 짙은 수풀의 뫼이듯이 켜켜이 쌓인 이야기의 산이다.
이야기(설화)는 사람이 삶을 담아서 주고받으며 즐기는 말꽃으로, 살았던 삶이 아닌 '꿈꾸는 삶'을 담고 있다. 따라서 지리산 이야기는 수없이 많은 골짜기와 자락으로 이루어진 팔백리 둘레에 몸 붙여 살아온 겨레의 꿈이자 삶의 거울이다. 그 이야기 속으로 거칠게나마 들어가 본다.
▲ 연못 <그림자못>에 허왕후의 슬픈 전설이 어린 칠불암이 비치고 있다.
△서낭(신령)이야기-풍수지리사상과 땅 힘
옛날 아주 아득한 옛날, 지리산이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오고 있었다. 개울가에서 빨래를 하던 어느 아낙이 그걸 보고 "산이 걸어 나온다"하고 소리쳤다. 그 바람에 그만 그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서버렸다. 하동군 화개면 정금마을 '노루목'에 내려오는 이야기로 풍수지리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동군 화개면 탑리 쌍계사 올라가는 길로 가면 약수정이라는 곳이 있다. 약물이 나오는 우물이다. 옛날에는 본디 쌀이 나온 곳이었다. 꼭 한 사람이 먹을 만큼만 쌀이 나왔는데 하루 먹을 거리를 더 나오게 하려고 구멍을 크게 만들려고 쑤셔 그때부터 쌀이 안나오고 물이 나왔다고 전한다. 쌀은 '땅 힘'에 대한 믿음이 담겨있는 것이다.
△신선이야기-자연은 하나
청학은 신선이 타고 다닌다는 전설의 새라고 한다. 옛 사람들은 청학이 사는 청학동을 신선의 고장이라 여겼다.
일찍이 <정감록>에서는 "진주 서쪽 100리, (중략) 석문을 거쳐 물 속 동굴을 십리쯤 들어가면 그 안에 신선들이 농사를 짓고 산다"고 했으며, 이를 본 고려 때의 이인로, 조선 시대의 김종직과 김일손, 유운용 같은 이들이 청학동을 찾아 나선 일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인로는 <파한집>에서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으니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겨우 통행할 만하고 엎드려 몇 리를 가면 곧 넓은 곳이 나타난다.
사방이 모두 옥토라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다. 청학이 그 곳에 사는 까닭에 청학동이라 부른다"고 했으나 청학동을 끝내 찾지는 못하였다고 고백한다. 김종직은 피아골을, 김일손은 불일폭포를, 유운용은 세석고원을 청학동이라고 짚어 보긴 했지만 모두들 확신하지는 못한다.
지리산에 청학동이라고 불리는 곳은 오늘날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어 사는 청학동 말고도 불일폭포 부근, 세석고원, 청학이골(악양면 등촌리 위쪽), 상덕평 마을(선비샘 아래) 같은 여러 곳이다. 말하자면 지리산 곳곳이 청학동인 셈이다.
△부처이야기-허왕후의 슬픈 전설
칠불암에는 허왕후의 슬픈 전설이 아직도 내려온다.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왕후는 일곱 왕자가 성불하여 속세와 인연을 끊고 세상에 나오지 않게 되자 왕자들을 만나보려고 지리산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불법이 엄하여 허왕후조차 선원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허왕후는 참다 못해 성불한 아들들의 이름을 차례로 불렀다.
그러나 '우리 칠 형제는 이미 출가 성불하여 속인을 대할 수 없으니 돌아가시라'는 음성만 들렸다. 허왕후는 얼굴을 한 번만 보고 싶다고 간청하였다. 아들들은 '그러면 선원 앞 연못가로 오시라'고 했다. 허왕후가 연못 속을 들여다보니 거기 성불한 일곱 왕자가 합장하고 서 있는 모습이 있었다.
그 모습에 감동한 것도 잠깐, 한번 사라진 일곱 왕자의 모습은 그 뒤로는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 연못은 그 뒤로 그림자못(영지)이라 불렀고, 수로왕이 이때 머물렀던 곳을 범왕촌(梵王村)으로 불렀는데, 지금은 범왕리(凡王里)로 바뀌었다. 또 허왕후가 머물렀던 곳은 대비촌(大妃村)으로 일컬었는데, 지금은 대비리(大比里)로 바뀌어 있다.
△사람이야기-황산대첩과 인월의 비밀
황산대첩과 인월의 이야기는 고려 말엽으로 돌아간다.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고 왜구가 삼남을 노략질하며 지리산에 진을 치고 살다시피 했다. 고려는 도순찰사 이성계, 도체찰사 변안렬을 중심으로 왜구 토벌에 나섰다.
토벌군이 남원에 닿으니 왜구 아지발도 본진은 운봉에 있었다. 이성계는 날랜 군사 5백을 뽑아 선봉에 서서 산 위의 왜구를 쳐들어갔다. 적진의 선봉에는 아지발도라는 열대여섯 어린 장수가 뛰어난 무예로 고려군을 무찔렀다. 이성계는 아지발도의 무예를 아껴 사로잡으려 하자 곁에서 이지란이 그를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을 해칠 것이라 했다.
이성계는 마음을 고쳐먹고 아지발도의 가슴에다 깃이 큰 화살을 쏘았다. 그러나 화살은 갑옷을 뚫지 못하고 튕겨 나왔고 아지발도는 더욱 기세를 돋우어 날뛰었다. 이성계는 다시 이지란과 의논한 끝에 화살로 아지발도의 얼굴을 가린 투구를 쏘아 떨어뜨리고 그 틈에 이지란이 재빨리 이지발도의 얼굴에 화살을 꽂았다. 아지발도가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지자 전세는 뒤집어졌다. 수많은 왜구가 토벌군의 칼 아래 쓰러지며 운봉에서 인월까지 이십 리 길을 도망쳤다.
이때 시각이 새벽녘으로 달이 서산으로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달이 넘어가고 어두워지면 피아를 구별할 수가 없어 왜구의 잔당을 소탕할 수가 없어진다. 달빛이 절실해진 이성계는 넘어가는 달을 끌어당기면서 싸워 남아 있던 왜구를 남김없이 무찔렀다고 한다.
달을 끌어당겼다는 뜻의 '인월'이라는 땅이름은 이래서 생겼다고 한다. 들판을 가로질러 흐르는 만수천 물이 죽은 왜구의 피로 온통 물들어 열흘동안 흐르면서 커다란 바위를 붉게 만들었다. 지금도 붉게 물든 바위를 '피바위'라 부른다.
석가모니가 설법하는 장면인 영산회상도를 그린 이 괘불은 본존불인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양 옆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화면 가득히 배치했다. 부처님의 당당하고 건장한 체구, 둥글고 원만한 얼굴은 세상을 감싸안으려는 자비심을 느끼게 한다. 청색, 하늘색, 연분홍색 등이 다양하게 나타나고 복잡하고 화려한 꽃무늬와 장신구가 부처님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괘불은 원래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걸개그림을 말한다. 이때 야외에 설치되는 법단이 '야단'(野壇)인데, 괘불이 걸리는 날에는 사찰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볐다. '야단법석'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왔다. 지난해 7월 진주 금산면 갈전리 월아산 청곡사에 있던 괘불이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즈음 미술회화관 2층에서 1층으로 내리 걸려 관람객이 법석을 이룬 바 있다.
청곡사가 위치한 진주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왕비 신덕왕후의 고향이다. 청곡사는 왕후의 고향에 위치한 사찰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왕실 원당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 1592년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사찰은 전소된다. 그러나 진주성 전투를 치르면서 목사 김시민(1554∼1592)의 통솔로 관민이 단결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된다. 그 충절의 공적인지 청곡사는 전화의 피해를 빠르게 복구하고 17세기 들어 새롭게 중건된다. 이러한 청곡사의 역사적 배경은 1722년 괘불 조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청곡사 괘불'은 총 131인의 시주로 조성되었다. 시주에 참여한 인원을 기록한 시주질에는 승려 93명, 일반인 38명의 이름이 빼곡하게 기입돼 있어 당시 괘불의 성대함을 느끼게 한다.
그럼, 길이 10m, 폭 6.37m에 달하는 괘불은 어떻게 보관됐을까. 청곡사 괘불을 보관하기 위한 나무함인 괘불함은 1722년 괘불과 함께 만들어졌다.
불화는 그림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화승이 제작했으나, 괘불함은 승려가 아닌 일반인이 제작했다. 괘불함은 나무를 전문으로 다루는 장인에게 의뢰되었다.
만들어진 시기와 제작자가 기록된 괘불함은 드문 편이다. 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 보아도 나무의 휘어짐과 틀어짐이 없다. 청곡사 괘불의 화기에는 함을 만든 장인의 이름과 그가 행한 값진 공덕이 기록돼 있다. 함을 만든 장인은 서씨 성을 가진 '서선발'이며 나무를 다루는 장인이란 의미에서 유래한 호칭을 지니고 있다. 이 한 줄의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를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상고시대 천지가 개벽할 때도 침몰하지 않았다고 전하는 삼신산. 도교의 삼신산 중 하나가 방장산인데, 이 산이 바로 지리산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는 지리산을 북두의 4성 중 하나인 태일성의 신이 사는 곳이라 전한다. 태일성은 위진시대 기록에 ‘원시천왕’이라고 언급돼 있다. 그래서 지리산의 주봉을 천왕봉이라 하고 천왕봉의 선계에 오르기 위해 통천문을 거쳐야 한다. 고려조에는 이인로가 신선의 자취를 그리며 청학동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이렇듯 도교사상, 신선사상 하면 꼭 지리산이 언급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에서 조선까지 동방의 선맥이 있던 곳
한국의 선도는 고조선 시대 환인으로부터 시작돼 상고시대 선인으로 이어졌고 신라와 가야 산신과 고려·조선 선가가 그 맥을 이었다. 이렇게 이어진 ‘동방의 선맥’에는 지리산이 중심에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신라시대 화랑의 우두머리 영랑과 현금을 창시한 것으로 알려진 옥보고다. <청학집>에는 ‘사람의 나이 90이 되어도 안색이 어린 아이와 같았으며 노우관을 쓰고 철죽장을 짚고 산수 사이를 소요하며 단군의 선맥을 전했다’고 그가 묘사돼 있다. 또한 ‘일찍이 3천명의 낭도를 거느리고 수련했다’는 일화도 전하는데 그 장소가 바로 지리산 영랑재다. 화랑하면 떠오르는 최치원 ‘낙랑비서’의 그늘에 수련장소인 지리산이 있었던 것이다.
고려시대 곽여(1059∼1130)는 예종의 총애를 받다가 궁중생활에 염증이 나 지리산에 은거한다. 이어 고려말에는 한유한이 그 맥을 잇는다. 그는 이자겸의 횡포를 보고 벼슬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지리산 덕산 사륜동과 악양면 평사리에 터를 잡아 은거했다고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소두자 이유가 지리산 자초동에 은거한다. 매일 양생술을 익혀 천 번씩 빗질을 해 도를 터득했다고 한다. 이유와 함께 이방보는 지리산의 약초를 캐 선단을 제조했다고 전한다.
이밖에 장산인으로 널리 알려진 장한웅은 도교경전이자 의서로도 유명한 <수진십서>를 입수해 수련했다. 이어 소설 <동의보감>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양예수가 그의 가르침을 잇는다. 양예수는 <동의보감> 편찬에 직접 간여한 인물로 <이향견문록>에 따르면 장한웅의 제자로 도교의학을 성취했다고 한다. 도교의학서 허준의 <동의보감> 이면에도 지리산의 도교사상이 있었던 것이다.
△‘장수의 별’ 노인성과 함께 하는 곳
지리산 법계사에서는 춘분과 추분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장수의 별 ‘남극성’을 편히 앉아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두칠성이 북방에 있어 사람의 죽음을 다스린다면 남두칠성은 남방에 자리해 삶을 다스린다. 남두칠성 가운데 광도가 높은 첫 별이 이른바 ‘남극노인성’인데 노인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도교에서는 남극장생대제라 해 숭배했다.
<사기> <천관서>에 따르면 노인성이 나타나면 나라가 태평하고 나타나지 않으며 병란이 일어났다고 한다. 고대 천문학에서는 사람의 수명을 맡아보는 별이라고 해 이 별을 보면 오래 산다고 믿었다.
신선 그리기를 좋아했던 조선 최고의 신필 김명국은 장수를 상징하는 노인성의 신 수노인을 그리기도 했다. 긴 머리를 한 노인 옆에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이까지 등장했으니, 여느 대가집 그림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지리산에서 ‘노인성 제사’가 시작됐다고 전하며 현재 춘·추분 법계사를 찾는 민간인의 발길이 그 맥을 잇고 있다.
150여 년 전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류계춘 선생이 퍼트린 흥얼거림이다. 갓걸이처럼 양반들이 힘없는 농민들을 자신들이 걸어두는 갓 마냥 여겼다는 내용이다. 경상도우병사의 불법 탐학은 그렇지 않아도 파탄 지경에 다다랐던 농민들을 분개하게 만든다. 1862년 2월 14일 진주에서 참았던 울분과 저항이 터지게 되니 이것이 진주농민항쟁이다.
△남명 실천사상 저항운동으로 이어져
‘조식은 그릇이 우뚝하고 단정하며 재주와 기상이 높고 초연히 스스로 깨달아 세상에 구애받지 않고 홀로 지조를 지켰으며 배우는 사람들이 요령을 얻기가 어려웠다.’
진주농민항쟁의 저항정신은 지리산 자락인 덕산에서 정착한 남명 조식(1501∼1572)의 실천사상에서 엿볼 수 있다. 남명 조식은 명종과 선조가 2번 이상 벼슬을 내렸으나 순응하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절제하고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명 조식을 따르는 남명학파의 인물들 또한 그의 정신을 이었다. 곽재우, 정인홍 등 남명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들은 임진왜란 등 국가의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의병활동을 자처했다.
그 맥이 조선말기 봉건관료에 항거하는 농민항쟁으로 이어졌으며 이어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이었던 형평운동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본량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여 우리도 참사람이 되기를 기함이 본사의 주지이다.’ <형평사 주지>백정이라는 신분은 1894년 갑오개혁으로 법제상으로 해방되었으나, 실질적으로 여러 가지 차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특히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인 지배관계를 온존하는 정책을 써 입학원서나 관공서에 제출하는 이력서 등에 반드시 신분을 기록하도록 했다. 당시의 백정은 호적상 도한(屠漢)이나 붉은 점(赤點)으로 표시하게 했다.
진주 인구 약 1만 5000명 중에 350∼700명을 차지했던 진주 백정들은 1923년 형평사 기성회를 조직해 본격적으로 사회적 불의에 항의하게 된다. 진주농민항쟁에 이은 또 하나의 거대한 저항운동이 싹튼 것이다.
진주농민항쟁에 이은 백정들의 형평운동. 갑자기 터져 나온 울분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도 정의를 곧추세운 남명 조식 선생의 사상적 힘이 대대로 이어졌기 때문이리라.
영화 <서편제>의 대사다. 서편제에 비해 동편제는 낯설다. 하지만 동편제는 춘향가·흥보가 등 우리 판소리계의 한 맥을 잇고 있는 원류다.
섬진강을 경계로 동쪽 부분에서 전승된 소리를 동편제라 한다. 섬진강 동쪽 부분은 남원, 순창, 구례, 곡성, 고창 등 지리산의 정기를 받고 있는 지역이다.
영화 <서편제>에서 나오는 판소리를 들어보면 기교가 많고 구슬프다. 하지만 동편제 소리는 호방하고 남성적이다. 대장단을 위주로 장단을 짜며 감정을 절제하는 창법으로 쭉쭉 뻗는 소리인 '목으로 우겨내는 소리'를 구사한다. 소리에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도 않는다. 잔 가락을 적게 붙이고 매 구절의 끝마침을 명확히 한다. 지리산의 힘찬 기상을 닮은 듯하다.
동편제의 역사적 인물들은 지리산에서 '소리의 힘'을 얻었다.
통일신라시대 악성 옥보고는 지리산 운상원(운봉)에서 거문고를 완성, 전수하며 말년을 보냈다. 동편제 판소리의 창시자인 송흥록(1780∼?)도 지리산에서 묵었다.
송흥록 선생은 민속음악 가운데 가장 느린 진양조를 판소리에 응용해 판소리의 표현영역을 확대시켰다. 특히 <춘향가> 중에서 춘향이 모진 매를 맞고 옥에 갇혀 있을 때 원통하게 죽은 귀신들이 나오는 옥중가는 그가 창작한 독창적인 판소리 창법이다.
옥중가는 '옥중가의 귀곡성'으로 유명한데 진주의 촉석루에서 소리를 할 때 귀곡성을 내자 갑자기 바람이 일고 촛불이 꺼지면서 하늘로부터 귀신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고 한다. 또한 선생이 죽고 난 후 무덤에서는 '내 소리를 받아가라'는 귀곡성이 그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질 정도로 그의 목소리에는 혼이 담겼다고 알려져 있다.
송흥록 선생이 태어나고 전수한 곳은 남원. 국내 유일의 국립민속국악원을 비롯해 기왕 송흥록 선생 생가의 판소리 탯자리와 동편제 거리가 남원에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남원은 송흥록의 손자 송만갑은 물론 김정문, 강동근과 여류 명창인 이화중선, 박초월, 안숙선, 강정숙 등이 태어나 소리를 익힌 곳이기도 하다.
지난 6월에는 하동 악양면에서 동편제 수궁가의 거장인 유성준(1873∼1944) 명창의 묘역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 명창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에 걸쳐 송만갑 등과 함께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불린 인물이다. 송흥록의 조카 송우룡 명창을 사사하고 <적벽가> <수궁가>를 강도근 등 명창들에게 전승하기도 했다. 유성준 명창은 고향인 전남 구례를 떠나 하동 악양면 상신대 마을 인근에서 말년을 보냈고 1944년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지난 6월 발견 당시 후손이 없어 묘역 관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고 전한다.
국립공원 1호인 지리산은 전라남북도, 경상남도 등 3도 5개 시·군에 걸쳐 있는 거대한 산이다. 이 지리산의 식물 분포에 관한 연구는 해방 전 일본인이 시작했다. 해방 후에도 몇 사람이 식물 분포에 대한 연구 보고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약용 식물의 자원 생약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보고는 없었다.
그가 확인한 지리산 약용식물은 총 975종. 그 중 자원이 풍부한 약용(32종), 우리나라 특산 식물, 지리산에 분포하는 약용식물(31종), 멸종 위기의 약용식물(29종)이 있다. 또 이 975종을 당뇨에 좋은 것, 심장에 좋은 것, 항암 작용하는 것 등 약리작용에 따라 분류했다. 그리고 멸종 위기에 있는 것, 희귀한 약용식물 등은 따로 분류했으며, 특히 골담초, 상황버섯 등 7종은 성분 분석을 완료한 것까지 분류해 학계에 보고한 바 있다.
지리산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약용식물은 흰 칡인데, 일반 칡의 변이종으로 당뇨병에 효과가 좋은 자원생약이다. 또 남부지방에는 분포하지 않는다는 약용식물인 삼지구엽초가 지리산에서 발견된 바 있다. 이외에도 송라 월귤나무·긴생열귀나무 등이 있었다.
최근 약용식물은 점차 자취를 감추고 있다. 그 대표적인 식물이 개불알꽃, 참당귀, 천마, 족도리풀, 홀아비꽃대 등이다. 그 수만도 29종에 이른다.
왜 약용식물들이 멸종위기에 이르는 것일까. 성환길 소장은 인위적인 생태계 조절 때문이라고 말했다.
약용식물은 대부분 초본 식물. 이 초본 식물은 산림이 울창한 곳에서는 탄소 동화 작용이 안 돼 멸종된다. 이것이 지리산의 약용식물이 없어지는 가장 큰 이유다. 산림보호라는 명분이 오히려 약용식물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은 산을 잘라 만든 관광도로, 그리고 무분별한 남획 등을 들 수 있다.
산이 베푼 혜택을 무한정 받은 인간이 이제는 산에게 조금이라도 보답해야 할 때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약용식물 재배이고, 약용식물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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