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 구층탑九層塔 구한九韓의 실체]
[머리말]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타난 기록대로라면, 신라가 선덕왕善德王 14년(645)에 황룡사 구층탑을 건탑建塔한 것은 불력佛力을 빌어 인근 외적을 물리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동방東方 중심국으로까지 우뚝 서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사업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래서 바로 직전直前까지도 40여성을 빼앗는 등 영토를 침탈하고 수많은 자국自國 백성들을 살상한 원수怨讐 백제百濟였지만, 대의大義를 위해 그 기술자들을 국도國都로 청하여 왕실王室과 국가의 염원念願이 담긴 구층탑九層塔을 건축하고자 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 기록을 검토해 보면 반드시 가정假定이나 추정推定을 하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점들이 몇 가지 발견된다. 건탑 추진 과정에서 발견되는 받아들이기 힘든 점과 건탑 목적에 비추어 명기되어야 할 대상과 실제가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본다.
첫째, 삼국유사에서 밝힌 황룡사의 건탑 목적을 그대로 따르자면, 신라가 백제에 보백을 공여하면서까지 공장 파견을 요청한 행위는 당시 양국이 앙숙怏宿 관계였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율배반적二律背反的 요소를 다분히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신라 군신들이 국가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구층탑을 건축하고자 합의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당시 정세로 볼 때 신라를 극도로 압박했던 백제의 공세攻勢로부터 탈출하는 데 있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백제와의 치열한 투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백제만이 가진 독보적인 건탑 기술을 이용하겠다는 발상은 좋은 정치적 책략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적국敵國을 패퇴敗退시키기 위한 염원이 담긴 상징물을 적국 스스로 만들게 한다.’는 모사가謀士家나 할 만한 발상發想을, 순수해야 할 국가적 염원念願의 시현示現 방법으로 채택했다는 것은, 건탑의 목적과 수단 사이에 다른 요소가 개입하지 않는 한,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다.
예를 들어 6.25 전쟁 중 남한이 북한을 물리치고 나아가서는 세계의 중심국으로 발돋움하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을 표출한 조형물을 건축하고자 하는데, 타국에서 핵심 기술자를 초빙해야만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과연 어느 나라에서 기술자를 데려 오고자 했을까? 동맹인 미국을 비롯한 건축 역량을 보유한 다른 국가 몇 곳이 거론되었을 것이지만, 아무리 뛰어난 조형물을 건축할 수 있다 하더라도 북한이나 그 동맹국만은 대상에서 제외되었을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특정 사업을 위해서는 현실적으로 가장 유익한 상대라 하더라도, 처절한 전쟁을 전개하고 있는 상태에서 국민감정이 이를 받아들일 있을 것인가?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쟁에 머물 뿐 문화 교류와는 별개의 것이라며, 열린 마음으로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기나 할 것인가?
당시 신라 정부는 ‘인국항복 隣國降伏’ ‘구한내공 九韓來貢’ ‘왕조영안王祚永安’ 이란 점층적인 목적을 지닌 탑을 건축하고자 결정한 후에 구체적 실현 방안에서는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기술 부족으로 자력으로는 구층탑을 건설하지 못하니, 이웃나라에 요청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우선적으로 당나라에, 거절당한다면 적국이지만 물밑 협상은 가능했던 고려… 등 순차적으로 물색했을 것이다. 하지만 건탑을 하지 못할지언정 백제에게만은 손을 벌리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백제는 642년 7월 신라 사십여 성을 함락시켜 큰 인적, 물적 피해를 야기한 최대 난적이었기 때문이다.
【선덕왕 11년(642). 가을 7월에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8월에 다시 고구려와 공모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 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왕이 사신을 당 나라로 보내 태종에게 급한 사정을 통보하였다. 秋七月,百濟王義慈大擧兵 攻取國西四十餘城 八月又與高句麗謀欲取党以絶歸唐之路. 王遣使告急於太宗】
그리고 김춘추의 행보를 가능케 했던 고려와는 달리, 양국은 일절 협상을 하지 않은 채 서로 죽이고 빼앗는 상황만을 되풀이 하던 시기였다. 원한怨恨과 보복報復 같은 사람의 본성本性은 시대가 바뀐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때 ‘혹시 탑을 건설해 줄 수는 없는가’라 감히 백제에 의향을 타진하지는 않았어야 한다. 하지만 신라는 643년 보백을 공여供與하면서 건탑 요청을 하였다. 서로 시퍼런 칼날을 겨룬 지 불과 1년도 되지 않아, 그리고 언제 다시 처절한 전투를 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에 변함이 없는 시점時點에서 일종一種의 원조援助를 요청한 셈이다. 중대重大 역사役事를 백제에 의지하고 있던 시기인 644년에는, 신라는 고마움을 벌써 잊은 것인지 아니면 고마움 따위는 애초 없었던 것인지 앙갚음을 하여 백제의 일곱 성을 빼앗았다.
【선덕왕 13년(644). 가을 9월 왕이 유신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하였다. 유신은 크게 승리하여 일곱 성을 빼앗았다. 秋九月 王命庾信爲大將軍(上將軍) 領兵伐百濟 大克之 取城七.】
왕실王室의 영구永久한 염원念願을 품은 탑의 건축에 백제인 기술자를 고용하는 것조차도 부정탄다하여 금기禁忌시 될 판에 오히려 금은보화金銀寶貨를 주고서 파견을 공식 요청했다는 것, 그리고 국보를 만들어 주어 ‘이 은혜를 어찌 갚을지…’라도 해야 할 판에 건탑 중이었던 이듬해 군사 반격을 감행했다는 것은, 잠깐 동안 생각해서는 당시 전개된 상황을 짐작하기조차 힘들다. 오늘날 우리들이 지닌 보편적인 감정과는 달리, 그 시대 사람들은 죽고 죽이는 전쟁은 전쟁터에서만 국한되어야 하고 문화 교류까지 중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대승적 차원의 생각을 한 것일까?
당시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은 나머지 이를 승려 간의 교류로 한정짓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추정 해석이 발붙일 만한 여지는 없다. 건탑을 제의한 자장이 승려라 하여 정치와 무관한 승려들이 일을 벌인 것이라 생각한 듯한데, ‘請工匠於百濟... 受命而來’에서 정부 간의 거래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거기에다 자장이 진골 귀족 출신이라 정치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과 황룡사가 승려들만의 공간이 아니란 점에서 황룡사의 건탑이 ‘양국 승려 간의 사업’이란 해석은 너무 터무니없다.
신라 요청에 대한 백제의 대응을, 어떤 가정假定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해하고자 할 경우에는 바보스럽기까지 하다. '이웃나라를 항복시키려는 염원을 담기 위해 구층탑을 건축해 볼까 하는데, 당신들의 건탑 기술技術을 빌려 주시오' 라는 적국의 요청에, 금은보화를 받고 '그럼 거래가 성사되었으니 기술자를 파견하겠소’ 라고 응해 줬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상황에 대한 설득력을 얻는 해석을 내놓기 위해서는, 신라가 백제에 건탑을 청할 때 ‘인국항복 隣國降伏’ ‘구한내공 九韓來貢’이라는 실제 목적은 숨긴 채, 듣기 그럴싸한 이유를 둘러 대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란 가정을 반드시 해야 한다. 아래 기록을 살펴보면, 백제는 신라가 품은 진정한 의도를 모른 채, 건탑을 도왔던 것이라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처음 기둥을 세우는 날에 공장은 본국 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을 꿈으로 꾸었고, 이에 마음속에 의심이 난 공장이 일을 멈추었다. 갑자기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더니 노승 한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금전문으로부터 나와서 그 기둥을 세우고는 사라졌다. 그러자 공장은 곧 자신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初立刹柱之日 匠夢本國百濟滅亡之狀 匠乃心疑停手 忽大地震動 晦冥之中 有一老僧一壯士 自金殿門出 乃立其柱 僧與壯士皆隱不現 匠於是改悔 畢成其塔】
백제 정부가 신라의 진정한 의도를 알고 있었다면 공장을 아예 파견하지 않았을 것임은 분명하다. 혹시 상대에게 드러낼 수 없는 다른 피치 못할 이유가 있어서, 본 목적을 알고 있거나 내심 짐작하고도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면 파견된 공장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반대로 공장이 신라의 건탑 의도를 모르고 있었다면 백제 정부도 몰랐을 가능성 또한 높다. 왜냐하면 정황상 공장은 단순한 기능공 혹은 심부름꾼에 불과한 존재는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라가 행하는 국보급 역사에 본국의 지시에 어긋나지 않게 협조하여야 하면서도, 긴급한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진행 여부를 독자적으로 판단해야 한다. 일종의 사신과 같은 임무를 행해야 하는 셈이다.
만약 신라가 작업 도중 백제 장인匠人들과 마찰이 생겨 사람을 억류抑留라도 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백제의 탑과 유사한 규모로 건축한다 해놓고 더 훌륭한 탑을 강요해 올 경우 어떻게 처신處身할 것인가 등 독자적 판단으로 결정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다. 이런 경우 상황에 맞는 적절한 행동을 바란다면 공장工匠이 기능공技能工이었건 책임자였건, 임무에 걸맞은 지위를 보유한 자者라 봐야 한다. 따라서 신라에서 백제에 표방한 건탑 목적 정도는 사전에 알고 있었을 것이라 보는 편이 타당하다. 백제 정부와 파견 공장의 관계를 이렇게 연결 지을 수 있다면, 공장 아비지가 본국이 멸망하는 꿈을 꾸고 나서야 의심하여 작업을 멈추었다는 말로 볼 때, 백제 정부는 진정한 건탑 목적을 모른 채 신라를 도운 것이라 봐야 한다.
둘째, 구한九韓이라 거명된 국가가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불분명하다. 북北으로 연한 말갈靺鞨과 남南으로 접한 일본日本은 항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명기明記 (藏曰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 되어 있지만, 정작 최대 난적難敵이었던 백제百濟와 고려高麗를 가리키는 명칭名稱은 보이지 않는다. 신라인들이 백제를 두고 당나라 동해에 있었던 ‘응유鷹遊’로 불렀을 것이라던가 ‘예맥濊貊’[동예東濊와 옥저沃沮]이 분명 여러 기록에서 고려高麗와 구분되어 불리고 있음에도 이를 고려高麗로 간주看做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어 타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 또 물리쳐야 할 대상에 당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중화中華’와 그에 이미 복속된 ‘오월吳越’이 각각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이상한 점이다. 이 둘은 ‘한韓’이 아니어서 구한九韓 중에 포함되기 어려울 뿐더러, 동맹국이자 수세에 몰린 처지에 있었던 신라를 구할 유일한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 ‘말갈靺鞨’과 ‘여적女狄’(혹은 여진女眞 三國遺事 : 해동안홍기는 구한을 일러 일본, 중화, 오월, 탁라, 응유, 말갈, 단국, 여진, 예맥이라 하였다. 海東安弘記云 九韓者 一日本二中華三吳越四탁羅五鷹遊六靺鞨七丹國 八女眞 九穢貊 )을 둘 다 말갈로 보고 하나의 실체를 두 번 언급한 것으로 해석한다던가, 신라를 가장 많이 괴롭혔던 일본을 가장 아래에 놓고 가장 세게 눌러 제압制壓한다는 등의 시중市中에 떠돌아다니는 낭설浪說은 잘못된 것임을 금방 판단할 수 있다. 한 실체만을 두 번 언급할 이유를 찾기 어렵고, 일본이 가장 적대해야 할 적이란 인식은 오늘날의 역사 경험으로부터 생겨난 기준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간 배치되는 모순점이 비단 여기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서史書들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에 으레 동양사東洋史라는 건 대개 부정확한 기록들과 누락漏落된 부분이 많아 사실事實 규명糾明이 어렵고, 저자著者 중심의 세계관으로 위, 변조가 된 것 투성이기 때문에 황룡사皇龍寺 구층탑九層塔 구한九韓에 관한 규명 시도도 불가능하며 어떠한 해석도 모순矛盾을 안고 있을 것이라는 행태를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과연 그럴까?
상호 원인과 결과가 되는 A, B, C라는 일련의 사건이 일어난 경우를 생각해 보자. B라는 사건이 발생했다면 먼저 원인이 되는 A란 사실이 있기 마련이고, 그 사건은 다시 C의 원인이 된다. 사건을 기술할 때 B가 누락된다면A를 C의 원인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원인(A)과 결과(C)가 잘못 연관되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을 정도라면, 금방 이상한 점을 알아챌 수가 있다. 하지만 B가 누락되었어도 새로운 인과 관계를 맺은 A와 C가 관련성이 없지 않다면, 이 둘을 직접적인 원인과 결과로 맺을 개연성이 있다.
‘이웃나라 항복과 구한 내조’라는 건탑 목적이 ‘백제의 기술자 파견’과 ‘구한의 대상과 명칭’이 전혀 상통하지 않는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따라서 이도 다른 고대사 기록에서 자주 볼 수 있듯이, 인과 관계를 형성하는 사건이 중간에 누락된 채 전달된 것이라 판단해야만 한다. 즉, 누락된 연결 고리를 찾는 것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접근에 있어서 우선 과제가 된다는 말이다. 누락된 연결 고리는 당시대의 정세와 건탑 배경, 그리고 탑에 나타난 구한의 배열순서 및 명칭, 호격 등 다양한 관점과 분석 방법을 통해 설득력 있게 추정해 낼 수 있다. 삼국유사에 나타난 건탑 목적과 구한 대상만을 단순히 연결 지어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행위와 실체를, 이 단서들과 분석 방법들을 통해 하나하나 밝혀낼 것이다.
[본 문]
[삼국유사 황룡사 구층탑皇龍寺九層塔 : 신인은 예배하고 또 물었다. "그대 나라에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있느냐?" 자장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인에 접하였고, 여제[고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여 이웃의 침입이 종횡으로 심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걱정입니다." 신인이 말하기를 "지금 그대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고 있는데,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다. 이 때문에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꾀하는 것이니 속히 본국으로 돌아가라.” 이에 자장은 "그럼 고국에 돌아가서 어떻게 하여야 도움이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신神이 말하기를 '황룡사皇龍寺의 호법룡護法龍은 내 장자長子인데 범왕梵王의 명命을 받들어 가서 그 절을 지키고 있다. 본국에 돌아가서 절 안에 구층탑을 세우게 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은 조공朝貢하러 오며 왕업王業은 영원히 평안할 것이요, 탑을 세운 후에 팔관회八關會를 베풀고 죄인을 구하면 외적外敵이 해치지 못할 것이다. 다시 나를 위하여 경기京畿 남안南岸에 정사精舍 하나를 짓고 함께 나의 복福을 빌면 나 또한 덕德을 갚으리라'하고 말을 마치고 옥을 받들어 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 정관貞觀 17년 계묘癸卯 16일 당제唐帝가 내린 경經상像가사袈裟폐백幣帛 가지고 환국하여 건탑建塔을 상上에게 요청하니 선덕왕善德王은 군신群臣과 의논하였다. 군신群臣이 말하기를 공장工匠을 백제百濟에 청한 후에 비로소 가능합니다.'하였다. 이에 보백寶帛으로 백제百濟에 청하였다. 아비지阿非知란 이름의 기술자가 명命을 받고 와서 목석木石 작업을 경영하였다. 이간伊干 룡춘龍春(혹은 룡수龍樹)이 책임자가 되어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렸다.
神人禮拜 又問 汝國有何留難 藏曰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隣寇縱橫 是爲民梗 神人云 今汝國以女爲王有德而無威 故隣國謀之 宜速歸本國 藏問歸鄕將何爲利益乎 神曰 皇龍寺護法龍 是吾長子 受梵王之命 來護是寺 歸本國 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設八關會 赦罪人 則外賊不能爲害 更爲我於京畿南岸 置一精廬 共資予福 矛亦報之德矣 言已 遂奉玉而獻之 忽隱不現 (寺中記云 於終南山圓香禪師處 受建塔因由) 貞觀十七年癸卯十六日 將唐帝所賜經像袈裟幣帛 而還國 以建塔之事聞於上 善德王議於群臣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 乃以寶帛請於百濟 匠名阿非知 受命而來 經營木石 伊干龍春(一作龍樹)幹蠱率小匠二百人]
삼국유사에 기록된 황룡사 구층탑의 건축 목적은 신라의 입장에서 본 것으로 이는 역사서에 잘 기술되어 있지만, 백제가 신라에 탑을 건축해 준 행위에 대한 동기를 추정할 만한 직접적인 기술記述은 남아 있지 않다.(보백은 당시의 양국 관계로 볼 때, 이유가 되지 못함을 설명하였다.) 남아 있지 않은 사실에 대한 추정을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지만, 역사 사건은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에 현재의 모습을 투영한다면 짐작 정도는 할 수 있다. 추정 단서는 구한九韓의 ‘나열 순서’와 ‘호격’이며, 이로부터 당시 백제가 신라의 건탑 제의를 받아들인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 시도해 보는 것도 적지 않은 의미는 있을 것이다.
가. 신·구당서에 나타난 삼국의 상대적 위치
▪ 신당서新唐書 : 백제국百濟國도 본래는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이다. 일찍이 마한馬韓의 옛 땅으로서 경사京師에서 동으로 6,200리 밖에 있으며, 대해大海의 북쪽, 소해小海의 남쪽에 위치한다. 동북으로는 신라新羅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월주越州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국倭國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려高麗에 이른다.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 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 신당서 : 신라新羅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한漢 낙랑樂浪 땅에 위치하니,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동쪽은 장인長人에 닿고, 동남쪽은 일본日本, 서쪽은 백제百濟, 남쪽은 바다에 연해 있으며, 북쪽은 고려高麗이다. (東夷 新羅) 新羅, 弁韓苗裔也. 居漢樂浪地, 橫千里, 縱三千里, 東拒長人, 東南日本, 西百濟, 南瀕海, 北高麗
▪ 신당서 : 고려高麗는 본래 부여扶餘의 별종別種이다. 국토는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에 이르고, 남으로는 역시 바다를 건너 백제百濟에 이른다. 서북으로는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하고, 북은 말갈靺鞨과 접한다 高麗, 本扶餘別種也. 地東跨海距新羅, 南亦跨海距百濟, 西北度遼水與營州接, 北靺鞨. 其君居平壤城,
오늘날의 지리 관점으로는 위와 같은 인식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기껏 내놓은 해석이라고 하는 게, 백제와의 사이에 있었던 바다는 아산만이나 경기만으로 견강부회하고 신라와의 사이에 있었던 바다[海]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으니 오류라 한다.
[이 句節과 관련하여 『魏書』百濟傳에는 ‘其國 …… 處小海之南’으로, 『周書』百濟傳에도 ‘西南俱限大海’로 되어 있으며, 『北史』百濟傳에서는 ‘西南俱限大海 處小海南’이라 하였다. 여기서의 小海는 牙山灣 一帶를 가리킨 듯 하나, 坂元義種은 本文의 譯註에서 大海는 濟州海峽을, 小海는 京畿灣을 가리키는 듯 하다고 하였다(「譯註中國史書百濟傳」p.293)] - 국사편찬위원회 주석
[이는 隣國의 地理에 밝지 못한데서 온 誤謬이다. 高句麗와 新羅는 엄연히 陸續되어 있었으므로 ‘南隣新羅’했어야 옳았을 것이다.『舊唐書』高句麗傳의 ‘東渡海至於新羅’를 檢討없이 그대로 옮긴데서 생긴 잘못이다.] - 국사편찬위원회 오대사五代史 주석
주석에서 三國을 인국이라 평가했지만, 당은 고려, 신라, 백제를 인국일 뿐 아니라 자국의 일부로도 간주했다. 그래서 낙랑군공신라왕, 요동군공고려왕, 대방군왕백제왕 등으로 봉한 것이다. 삼한은 왜인처럼 관심 밖에 있던 대상으로 가끔 교류를 한 정도가 아니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면서 끊임없이 동정動靜을 살펴야만 하는 상대였다. 또, 이민족들이 중원을 점령한 후에는 반드시 복속을 시키거나 나라의 명운을 걸고 결전을 치러야하는 강력한 경쟁자이기도 했다. 이는 다름 아니라 삼한의 지리적 근접성 때문이며, 그들이 우리의 地理地形에 크게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지리 기록은 역사 어느 항목 중에 비해서도 객관적인 것이며,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것이다. 자국이나 마찬가지인 인국의 지리에 밝지 못한 나머지, 아주 기초적이라 할 수 있는 바다의 위치를 일국의 정사에서 잘못 지정했다는 해설은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지금과 맞지 않는다 하여 오류로 몰아붙이는 태도는 역사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주요 단서를 날려 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는 무식한 사고방식이다. 누구나 하찮게 생각하는 모퉁이돌이 반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사료 하나하나를 신중하게 대해야 올바른 역사를 찾아 낼 수 있음은 긴 말이 필요 없는 것이라 하겠다.
여기에서는 왜 당시 지리 인식과 오늘날과 큰 격차가 있었던 것인지 이유에 대해서까지 다루지는 않는다. 단지 지리 인식이 달랐다는 것은 틀림없으며, 이로 인해 우리가 오늘날의 지리 인식에 기반을 둔 무조건적인 역사 해석은 잘못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만은 명확히 해두고자 한다.
위 기록들에서 보듯이 과거에는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라고 명기할 수 있을 정도로 특정하여 인식하였다. 당대의 지리 인식 하에서는 양 지역을 ‘인근’이라 할 만큼 서로 가까운 곳이라 보았다는 말이거나 적어도 인근으로 인식하는 데 바다[海는]는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나. 사방四方을 인식하고 기록하는 순서 [東西南北] 혹은 [東南西北]
역사서를 읽다 보면 일국一國을 중심으로 그 주변국을 나열할 때는 대체로 ‘동서남북’이나 ‘동남서북’ 순順으로 기록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정치 않은 경우도 있지만, 정사류正史類에서 특히 타국을 소개하는 부분에서는 아래 제시된 예例에서 알 수 있듯이 거의 예외가 없다. 이는 훈련된 사관들이 선대先代의 역사서를 통해, 그리고 방위方位에 대한 언어 관습을 숙지熟知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방四方을 가리킬 때 「동. 서. 남. 북」이라고 부르는데, 동양의 여타 국가들도 모두 같은 표현을 사용하고 있고 옛날에도 다를 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하는 통념通念은 잘못된 것이다. 일례一例로 한국과 일본은 현재 동서남북이란 표현을 쓰고 있고, 중국은 동서남북과 동남서북을 크게 차이가 나지 않은 빈도로 같이 사용하고 있다. 또,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관찰하기 쉬운 편년체인 실록을 살펴보면, 15세기 중종 시기를 전후하여 동남서북과 동서남북이란 표현으로 나눠짐을 알 수 있다. 물론 실록에 기록된 조선 개창 이래의 시기뿐 아니라, 과거의 어느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상당한 시기 동안 동남서북이란 표현을 사용해 왔을 것이다.
동남서북은 동서남북보다 사람이 매일 접하는 자연의 순환과 가까운 인식의 흐름이다. 우리가 날마다 보는 해는 ‘아침’에 정동에서 떠서 ‘낮’에는 남쪽 하늘 멀리 주행하다 ‘저녁’에 정서에서 진다. 그리고 ‘밤’에는 해가 동으로 가기 위해 북을 통해 순환하는 것으로 생각되기 마련이다. 만약 운행해 왔던 방향으로 역주하여 동으로 돌아간다면, 해가 다시 정서에서 뜨는 것과 같아 어둠이 닥칠 리 없기 때문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의 순환도 하루의 순환과 동일한 원리이다. 봄이 되어 따뜻해지기 시작한 지구는 여름에 절정을 맞은 후, 가을에 온기를 잃어가다가 겨울이면 혹독한 추위가 닥친다. 또, ‘탄생, 생장, 퇴화, 사멸’을 하는 생명체에도 해당되는 것이니, 자연의 일부인 이상 피해갈 수 없는 순리라 할 수 있다. 이런 자연의 순환을 잘 나타낸 방위 표현이 바로 동남서북이다. 동은 아침, 봄, 탄생에, 남은 낮, 여름, 생장에, 서는 저녁, 가을, 퇴화에, 북은 밤, 겨울, 사멸에 비할 수 있다.
‘동남’과 ‘서북’이란 관례화 된 방위 표현도 이런 순환으로부터 만들어졌을 것이다. 지금은 남동, 북서라는 표현을 같이 섞어 사용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표현을 사용한 지는 겨우 2~300년에 불과하다. 서양 문물이 직·간접적으로 다량으로 전해지면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데, 영어로는 SouthEast[남동], NorthWest[북서]라고 하지 EastSouth[동남]나 WestNorth[서북]라 하지는 않는다. 번역된 표현이 영향을 주기 시작하여 현재는 동쪽에 보다 가까울 때는 동남으로, 남쪽에 보다 가까울 때는 남동으로 구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반면 ‘동서남북’이란 표현은 자연 순환에다 사변思辨의 산물産物을 결합한 것으로 보인다. 밝음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더위가 있으면 추위가 있고, 탄생이 있으면 사멸이 있다는 철학적인 원리가 방위 표현에도 영향을 미쳐, 해가 뜨고[동] 지며[서], 높고[남] 낮다[북]라는 ‘동서’와 ‘남북’이 조합된 말인 것 같다. ‘종횡’이라 하면서도 종에 해당되는 남북을 앞세워 ‘남북동서’라 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하게는 입에 벤 방식이 있는데 바꾸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지만 자연 순환의 원리가 영향을 준 탓도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동서남북이란 말은 횡[동서]이 종[남북]보다 먼저 나오도록 나열하여 자연 순환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으며, 상응[동과 서, 남과 북]되는 개념으로 분할할 수 있도록 하여 철학적 의미도 같이 포함한 것이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위와 같이 해석해 볼 수 있다. 방위에 대한 언어 표현은 단지 표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 의미가 부여되었다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 이와 관련된 인식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표현상 동은 서에 비해, 남은 북에 비해 우선하게 되는데, 예를 들어 집 등의 건축물이 남향이라는 게 영향을 미친 탓인지 보통 앞이라 하면 남쪽을 가리키는데, 전방前方인 남南을 향해 바라보는 사람의 경우 左는 東이 되고 右는 西가 된다. 신체의 바른쪽[오른쪽]이라 더 중요하다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신체에 국한되지 않고 주변으로 넓게 보면 右는 서쪽이 되며, 따라서 左인 동쪽에 비해 열등한 위치가 된다. 左가 右보다 우선[前.後.左.右]하며 더 존대[영.좌.우의정]되는 이유를 이처럼 방위 표현과 여기에 종속된 인식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겠다.
다. 신라와 백제를 중심으로 동서남북(혹은 동남서북) 순으로 배열된 아홉 개 국가(지역)
일국一國을 중심으로 인국隣國의 나열은 방위 표현과 인식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역사서와 탑이 비록 표기 매체는 다르다고 하지만, 표기 순서 자체가 달라질 이유까지는 없다. 따라서 탑도 역사서와 마찬가지로 방위 인식 순順으로 국가들을 배열했을 것이란 생각에 도달할 수 있다.
[표 1] 역사서와 황룡사 탑 표기 비교
역사서 |
황룡사 탑 | |
기록 매체 |
서 적 |
구층탑 |
기록 주체 |
일국一國 |
일국 혹은 이국二國(백제 혹은 신라) |
기록 대상 |
보통 사四~오국五國 |
구국九國[지역] |
認知 순서 |
먼저 읽는 순(상하, 우좌) |
일층一層부터 구층九層 (탑 숫자를 헤아리는 순서) |
기록 순서 |
동서남북 혹은 동남서북 |
좌동 |
▪ 예조에서 제사를 지내는 세조 3년(1457년 1월 7일 여러가지 일에 대해서 아뢰니 그대로 따르다. 헌관獻官에 만약 다른 관원이 임명된다면 집사관執事官은 야명위夜明位의 집사관에 따라 임명 충원充員하는데, 야명위夜明位 동남서북해위 악독 산천위의 헌관은 영의정【사고가 있으면 차관이 한다.】이고
獻官若差他官 則執事官從夜明位執事官 差充 夜明位 東南西北海位 岳瀆山川位獻官 領議政【(自)〔有〕故則次官。】
▪ 일본 국왕이 보낸 성종 1년(1470년) 8월 24일 입도 등이 와서 서계와 토산물을 바치다. 이에 내가 부상 전하의 토벌 명령을 받들어 일본국 동남서북의 입도入道들에게 제후의 모든 군사를 모으게 하여 세천과 산명 두 사람의 큰 진성陣城을 향하여 출발시켜 포위하고
此則予承扶桑殿下之征夷 日本國東南西北入道 集諸侯 諸軍 而發向細川與山名兩大陣城 圍而欲收太平 所以使船 同副船焉
실록에서 ‘동남서북東南西北’으로 명명한 기록은 실록 중 세조 5건, 성종 1건, 중종 1건에서 발견된다. 중종 때는 동서남북東西南北과 동남서북東南西北이 병기倂記 되어 있고, 중종 이전以前은 동남서북東南西北만으로, 중종 이후以後는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만 표기가 되어 있다. 동서남북으로 사방四方을 가리키는 입에 밴 방식이 오랫동안 변치 않고 여전히 쓰이고 있는 것처럼, 동남서북이라는 방식도 15세기 이전에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써 왔을 것이라 추정된다. 이를 삼국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라는 것과 기록 매체의 차이만 있을 뿐 주변 국가를 통한 위치 표기 방식 자체에는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 가정假定하면, 구한九韓은 탑塔의 건립지인 신라 혹은 건립자인 백제를 중심으로 「동. 남. 서. 북」순에 위치한 국가가 된다. 반면 위는 선초나 여말의 기록일 뿐 삼국시대에까지 거슬러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본다면「동. 서. 남. 북」순으로 배치를 한 것이라 판단할 수 있다.
▪ 구당서舊唐書
╺ 高麗는 본래 扶餘의 別種이다. 그 나라는 平壤城에 都邑하였으니, 곧 漢 樂浪郡의 옛 땅이다. 長安에서 동쪽으로 5천 1백리 밖에 있다. ①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新羅에 이르고, ② 서북으로는 遼水를 건너 營州에 이른다. ③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百濟에 이르고, ④ 북으로는 靺鞨에 이른다. 동서로는 3천 1백리이고, 남북으로는 2천리이다 高麗者 出自扶餘之別種也 其國都於平壤城 卽漢樂浪郡之故地 在京師東五千一百里 東渡海至於新羅 西北渡遼水至于營州 南渡海至于百濟 北至靺鞨 東西三千一百里 南北二千里
╺ 百濟國도 본래는 扶餘의 別種이다. 일찍이 馬韓의 옛 땅으로서 京師에서 동으로 6,200리 밖에 있으며, 大海의 북쪽, 小海의 남쪽에 위치한다. ① 동북으로는 新羅에 이르고, ② 서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越州에 이르며, ③ 남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倭國에 이르고, ④ 북쪽으로는 바다를 건너 高[句]麗에 이른다. 百濟國 本亦扶餘之別種 嘗爲馬韓故地 在京師 東六千二百里 處大海之北 小海之南 東北至新羅 西渡海至越州 南渡海至倭國 北渡海至高麗
위처럼 ‘동서남북’ 통상의 나열 순서대로 표기한 기록이 있는 반면, 아래와 같이 동남서북 혹은 특정 부분을 강조 기술한 표기 방식도 많이 발견된다. 특정 부분을 강조한 것이라 함은 어떤 방향을 먼저 표현하고자 하는 의도가 강한 경우인데, 예를 들어 여행지에서 본 좋은 경치를 묘사하고자 한다면, 먼저 기록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도 자신이 가장 감동을 받은 것일 것이다. ‘서쪽은 바다였는데, 그 동안 육지에서만 살아 이런 광대하고 멋있는 광경은 처음 봤다. 동쪽은 산이 아주 험준했으며 남과 북쪽은 들판이 해안을 따라 펼쳐져 있었다’ 이런 식이다. 잘 훈련된 사관史官들이 사서史書 표기 방식의 관례慣例를 깨고 기록의 우선 순위를 바꾼 것은 바로 이런 이유가 있어서였을 것이다. 아래는 특징적인 자연 환경인 대해大海가 원인이 되어 이에 면한 방향을 동쪽과 함께 먼저 기재한 경우이다. 표기 의도를 관례慣例보다 우선시하여 기록한 것 아니면 현재와 같이 당시에도 동남서북을 동서남북과 함께 사용한 것이라 볼 수도 있는데, 어느 경우일 지는 추가적인 연구가 수반되어야 판단할 수 있는 사안이라 하겠다.
▪ 신당서新唐書
╺ 신라국新羅國은 본래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대漢代의 낙랑樂浪 땅에 있으니, ① 동쪽과 ② 남쪽은 모두 대해大海로 막혀 있고, ③ 서쪽은 백제百濟와 접하였으며, ④ 북쪽은 고려高麗와 인접하였다. 동서로 1천리, 남북으로 2천리이다. 新羅國 本弁韓之苗裔也 其國在漢時樂浪之地 東及南方俱限大海 西接百濟 北鄰高麗 東西千里 南北二千里
╺ 신라新羅는 변한弁韓의 후예이다. 한대漢代의 낙랑군樂浪[郡] 땅에 위치하니, 횡으로는 1천리, 종으로는 3천리이다. ① 동쪽은 장인長人에 닿고, 동남쪽은 일본日本, ② 서쪽은 백제百濟, ③ 남쪽은 바다에 연해 있으며, ④ 북쪽은 고려高麗이다. 新羅 弁韓苗裔也 居漢樂浪地 橫千里 縱三千里 東拒長人 東南日本 西百濟 南瀕海 北高麗
우선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은, 표현 의도에 따른 나열이 아니라 사방四方을 순차적으로 읽는 방위 관례에 따른 나열이다. 표현 의도에 따른 나열은 방위 관례에 따른 순서가 맞지 않는다면 그 때 적용해도 늦지 않다. 구국九國의 층별 배열순서排列順序와 신라를 중심으로 한 방위方位가 어떻게 맞춰지는지 검토해 보자.
일층一層에 기록된 의한 일본日本은 신라의 동남東南 방면에 위치했던 나라였다. 四方으로는 동쪽이라 하여 남쪽보다는 동쪽에 가까운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왜인들은 일본이란 명칭을 7세기 말에 사용하기 시작했는데, 645년에 완성된 탑에서 이런 명칭이 보였으니 조금 앞선 것이 된다.
이층二層 중화中華는 國號가 아닌 別稱이다. 보통 당대當代 中國으로 공인된 唐나라를 가리킨 것이라 간주한다. 하지만 이는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으로 기득권을 유지한 정치인들이 만든 역사서에 不知不識間에 깊은 영향을 받은 후대 史家들의 先入見일 뿐이며, 어느 국가를 가리킨 것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편이 타당하다. 남이 보기에는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스스로나 가족들에게는 나는 잘났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신라나 백제가 스스로 우리는 천손이며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이며 세상의 중심이라고 여기지 못했을 것이라는 신념이야 말로 그릇된 것이기 때문이다. 탑에 기록된 九國이 어느 국가였는지, 구국이 누가나 인식할 수 있을 정도로 탑의 외부로 표기되어 있기나 한 것인지, 또 구국이 표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국隣國에는 알리지 않았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는 만큼, ‘中華는 곧 西雜’이라는 후대 역사서에서 끌어 낸 등식으로 황룡사 탑의 중화를 ‘唐’이라 지목한 것은 합리적인 사고의 산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삼층에 오월吳越이 별도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당의 일부분을 구성했던 山東의 제齊 등을 두고 오월만을 당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는 없다.
삼층三層 오월吳越은 신라의 서남西南 방향인 절강浙江 지방에 자리 잡았던 국가였다. 건탑建塔 당대에는 이미 당에 복속되어 국체國體를 유지하고 있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오월은 당면當面한 경쟁 상대를 표현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건탑 및 九韓 선정選定이 삼국유사에 나타난 대로라면 전통의 경쟁 상대를 지목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기 때문에 오월과 당이 분리되어 표기된 이유도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사층四層 탁라托羅는 탁라乇羅와 글자가 유사하다 하여 탐라耽羅[濟州]를 말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위치는 신라의 西南 방면이다. 탁라가 탐라가 아니라면 중화와 마찬가지로 실체가 분명치 않은 국가로 분류해야 한다.
오층五層 응유鷹遊는 중국의 강소성 인근 동해에 위치한 섬 국가였다. 따라서 신라의 서남이며, 탁라보다는 멀리 떨어져 위치하여 있었다. 오월과 같이 건탑 당시에는 이미 당나라에 복속된 국가였다.
육층六層 말갈靺鞨은 통합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일부가 고려高麗에 복속된 채, 고려의 동북에서 서북 여러 군데로 흩어져 있었다. 말갈 중 어느 부족을 말하는 지 알 수 없어 위치가 다소 불명확한 국가로 여겨야 한다.
칠층七層 단국丹國은 거란[契丹]을 가리킨 것이다. 요遼나라가 발해渤海를 정복한 뒤 발해의 옛 영토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웠다.
팔층八層 여적女狄 혹은 여진女眞은 일반적으로 말갈靺鞨로 보는데, 그렇게 본다면 한 實體를 중복 기록된 것이 되고 만다. 그리고 女眞이라 한 것은 황룡사 관련 기록이 아니라 馬韓에 대한 역사를 기술할 때이다. 아마 해동안홍기에 기록되어 있다며 여진이라 표현한 것은 인용자(일연 등) 자신의 인식 내로 수정 이해하여 여적을 여진이라 판단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해동안홍기란 것도 동도성립기와 다른 책이 아니라 ‘해동의 명현 안홍의 동도성립기’를 略하여 표현한 것이거나 ‘해동 안홍의 기록에’ 라는 뜻인 듯하다. 따라서 여적과 여진 둘 중 어느 것이 정확한 史實이냐를 선택해야 한다면, 위와 같은 이유로 여적을 고르는 것이 타당하다 할 수 있다. 또, 여진이란 표현은 훨씬 후대에 나타나는 것이란 점도 이와 같은 생각이 잘못 되지 않았음을 방증傍證한다 할 수 있다.
구층九層 예맥濊貊은 대체로 함경도에 있었던 동예東濊와 옥저沃沮를 말한다. 예맥은 당시 고려와 신라에 복속된 상태였다. 당나라에 복속된 오월, 응유가 병기되어 있는 것처럼 고려와 신라의 일부여야 할 예맥이 단독으로 나타나 있다.
그런데 九國을 신라 인국을 방위 순서에 따라 배열했을 것이라 추정하긴 했지만, 신라와는 교통에 障碍가 있는 국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짚고 넘어 가야 한다. 교통에 장애가 있다함은 이격離隔 거리가 절대적으로 멀다는 게 아니라, 신라와의 사이에 백제나 고려가 가로 놓여 있어 서로 지리적으로 격절隔絶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고려나 백제가 한강 당항성黨項城을 빼앗으면 신라는 당과 왕래할 수 있는 길이 차단되어 入朝조차 할 길이 없어지게 된다는 상황 인식으로부터 당시대 사람들이 생각했던 신라의 지리적 입지 조건을 잘 파악할 수 있다.
[사십 칠년 겨울 십일월. 사신을 대당大唐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 때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 나라에 조회할 수 없음과 또한 그들이 자주 침입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四十七年 冬十一月 遣使大唐朝貢 因訟: 高句麗塞路 使不得朝 且數侵入]
[십일년 봄 정월,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가을 칠월. 백제왕 의자가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서쪽 지방의 40여 성을 공격하여 빼앗았고, 팔월에 다시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항성을 빼앗아 당 나라로 가는 길을 막고자 하였다. 왕이 태종에게 사신을 보내 급박함을 고하였다. 秋七月 百濟王義慈大擧兵 攻取國西四十餘城 八月又與高句麗謀欲取党以絶歸唐之路 王遣使告急於太宗]
물론 신라의 인국은 삼국[고려, 백제, 왜인]에 불과한데, 구국이나 표기하려면 여제의 건너편에 있는 국가를 대상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도 해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 것이라 보려면 응유, 오월 등 백제의 인국뿐 아니라 돌궐, 선비 등 고려의 인국도 포함되었어야 한다. 응유 같이 세가 미미하면서 이미 소멸한 국가는 제외해 버리고, 강성했던 돌궐, 선비 등을 집어넣었다면 구색이 보다 갖춰졌을 것이다. 이로 볼 때 김부식이 삼국 모두를 我國[우리나라]으로 여겼던 것처럼, 고려까지 아우른 삼한의 인국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라 볼 수 없다. 三韓一家나 三韓一統을 염두에 두고 九國(지역)을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한편, 황룡사탑이 신라만의 독자적 사업이 아닌 나제 양국의 공동 사업이라 점을 감안하여 건탑자와 건탑지에 초점을 맞춰 따로 분석해 볼 수도 있다. 모두 건탑자와 건탑지를 구분하지 않고 해석을 하는데, 엄밀하게 말하면 건탑자는 신라가 아닌 핵심 기술을 제공한 백제이다. 단지 신라는 건탑지만을 제공했을 뿐이다. 그러면 삼국유사와 찰주본기에 드러난 건탑 목적[신라만]보다는 폭넓게, 삼국사에 나타난 삼한이라는 민족의식[삼국 모두]보다는 폭이 좁은, 즉, 羅濟 二國의 관점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접근을 해 볼 필요가 있다. 九國 중 알려진 실체만을 놓고 보면, 백제의 인국이나 백제와 신라의 공통 인국(백제를 통한 인국)으로 보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역사서에 나타나는 대로 판단한다면, 구국은 백제와 직접 맞닿았거나 바다가 놓여 있었지만 신라와는 달리 장애 없이 상망想望 혹은 교통交通할 수 있는 위치에 있던 국가였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넓은 바다가 사이에 가로 놓여 있다는 점이 이들 구국을 두고 백제의 인국이라 말하는데 장애가 된다. 과거의 운송 수단과 능력을 감안하면, 대해에 막혀 있던 국가가 그 건너편의 국가를 인국으로 인식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란 생각은 잘못되었다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과거의 지리 인식은 지금과는 현격히 달랐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신ㆍ구당서’ 기록 중 삼국의 인근이라 거론된 지역들과 바다[해]라 불린 곳을 보면 오늘날과는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과거의 지리 인식을 파악할 수 있다.
· 백제의 대외 투쟁
- 제기齊紀 2 세조世祖 상지하上之下 영명永明 6년(488년) “위가 병력을 보내어 백제를 공격하였다. 또 진나라 때부터 백제는 요서 진평 2군에 웅거하고 있었다. 永明六年 魏遣兵擊百濟 晉世百濟亦據有遼西晉平二郡也 - 자치통감 권 136
- 이 해에 [北]魏 오랑캐가 또다시 騎兵 수십만을 동원하여 百濟를 공격하여[註021] 그 地境에 들어가니, 牟大가 장군 沙法名·賛首流·解禮昆·木干那를 파견하여 무리를 거느리고 [北魏]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무찔렀다.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 남제서南齊書
어쨌거나 구한이라고 나열된 국가는 오월, 거란, 응유 등과 같은 나라들이 있어, 애초에 韓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거나 ‘韓’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님은 틀림없다. 삼국유사와 황룡사 찰주본기에서 밝힌 건탑 목적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대상 선정이 잘못 되었다는 말이 되고, 선정된 대상을 토대로 거슬러 보면 구국은 단지 신라나 백제의 인국에 불과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어느 하나의 기록이 거짓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서론에서 잠깐 말한 바 있듯이 단편적인 기록만이 전래되는 고대사의 특성상, 앞뒤가 맞지 않는 기록이 있다면 누락된 사건이나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닌지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황룡사 건탑 동기란 것은 백제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임을 이미 알고 있다. 그렇다면 건탑 목적과 결과가 서로 맞지 않는 이유는 이미 밝혀졌다. 건탑 목적이라고 알려진 ‘인국 항복’ ‘구한 내조’ ‘왕조 영안’을 백제에다가 표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신라는 본래 의도를 숨긴 채 다른 이유를 들어 건탑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신라가 목적한 구한이 아닌 인근 九國이 백제에 의해 표기된 것으로 봐야 한다.
[삼국유사 : 회남자의 註에는 동방의 오랑캐는 구종이라 하였다. 논어정의論語正義는 구이는 현도, 낙랑, 고려, 만식, 부유, 소가, 동도, 왜인, 천비라 하였다. 淮南子注云 東方之夷九種 論語正義云 九夷者 一玄도 二樂浪 三高麗 四滿飾 五鳧臾 六素家 七東屠 八倭人 九天鄙]
위 기록은 어떤 기준에 의해 나열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대체로 한나라와 가까운 곳, 그러니까 서에서 동의 순으로 표기된 것으로 생각된다. 동방국을 아홉 국가로 나눴던 것은 아마 위와 같은 기록의 영향인 듯하다.
신라는 구한을 표기하고자 했지만 백제 마음대로 구국을 표기한 것이 아니고, 신라 또한 인국 구국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표기 대상 선정을 방관한 것으로 보인다. 동방 구한이든 인근 구국이든 말갈, 왜인, 고려, 백제만 그 대상에 들어간다면 인국항복이란 일차적인 목적은 달성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당시 신라가 처한 상황에서는 다른 국가들은 일차 목적이 달성된 후에나 가능하며, ‘구한 내조’란 다소 상징적인 의미에 불과할 뿐이다. 현실의 난관을 타개하지 못한 상황에서는 구한 내조를 바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동서남북[동남서북] 순으로 배치된 인국(지역)이란 점이 거의 확실해 졌으니, 이제 실체와 위치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는 ‘일층 일본’[동], ‘삼층 오월[서남]’, ‘오층 응유[서남]’ ‘칠층 단국[서북]’ ‘구층 예맥[동북]’ 을 가지고 별칭으로 표기된 중화와 여적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추정해 볼 수 있다. 황룡사 구층탑의 나열 원칙을 ‘방위 인식 순서에 따른 인국’이라 보면, 이층 중화는 신라의 동남방인 일층 일본과 서남방인 삼층 오월吳越 사이에 위치한 국가라 할 수 있다. 이 위치에서 기록될 만한 나라는 ‘백제’밖에 없는데, 백제가 들어가야 할 자리에 중화中華가 자리 잡고 있다. 또, 칠층 단국과 구층 예맥의 사이인 팔층 여적女狄[혹은 여진女眞]도 동일한 방식으로 추정하면, 여적女狄은 다름 아닌 ‘고려高麗’가 된다.
[신당서新唐書: 백제百濟는…. 서계西界는 월주越州, 남쪽은 왜倭이며, 북쪽은 고려高麗이다. 모두 바다를 건너야 도달한다. 그 동쪽은 신라新羅이다. 百濟… 西界越州 南倭 北高麗 皆踰海乃至 其東 新羅也]
[신당서新唐書: 고려高麗는…. 국토는 동으로는 바다를 건너 신라新羅 이르고, 남으로는 역시 바다를 건너 백제百濟에 이른다. 서북으로는 요수遼水를 건너 영주營州와 접하고, 북은 말갈靺鞨이다. 高麗… 地東跨海距新羅 南亦跨海距百濟 西北度遼水與營州接 北靺鞨]
구한 대상국은 신라를 기준으로 대체로 남쪽에서부터 북쪽 順으로, 동남국[일본]이 가장 먼저, 동북국[예맥]이 가장 나중에 배열되어 있다.
▪ 남방국 : 제일층일본第一層日本, 제삼층오월第三層吳越, 제사층탁라第四層托羅, 제오층응유第五層鷹遊
▪ 북방국 : 제육층말갈第六層靺鞨, 제칠층단국第七層丹國, 제구층예맥第九層穢貊
▪ 동방국 : 제일층일본第一層日本 일본, 제구층예맥第九層穢貊
▪ 서방국 : 제오층응유第五層鷹遊 , 제사층탁라第四層托羅 , 제칠층단국第七層丹國
서 방 |
동 방 | |||||
북 방 |
육층 말갈 |
칠층 단국 |
*팔층 여적 |
구층 예맥 | ||
신 라 혹은 백 제 | ||||||
남 방 |
오층 응유 |
사층 탁라 |
삼층 오월 |
*이층 중화 |
일층 일본 |
마. 백제의 시각이 반영된 상이相異한 호격呼格[일본, 단국]과 별칭[중화, 여적]
왜倭를 일본日本이라 부른 호칭呼稱에서도 어렵지 않게 생각해 낼 수 있는데, 신라가 당시 왜倭를 일본이라는 정식定式 국명으로 부를 이유가 없다. 다소 비하하는 호칭인 왜인倭人 三國遺事 에는 倭人이란 표현이 2건이 나타나는데 둘 다 인용한 구절이며, 직접 기술한 부분에서는 8건 모두 倭國으로 표현하였다. 일본이란 표현도 여러 부분에서 사용되었다.
- 藏曰我國北連靺鞨 南接倭人 麗濟二國 迭犯封陲隣寇縱橫 是爲民梗 神人云. 자장이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는 왜인과 인접하고, 고려와 백제 두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범하니 이웃의 침입이 종횡으로 심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걱정입니다. – 일연이 역사서를 인용한 구절
- 靺鞨(一作勿吉) 渤海 : 羅人云 北有靺鞨 南有倭人 西有百濟 是國之害也 又靺鞨地接阿瑟羅州. 신라 사람들은 북에 말갈이 있고, 남에는 왜인이 있으며, 서에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에 해가 된다고 하였다. 또한 말갈은 그 땅이 아슬라주에 접하여 있다고 하였다. – 일연이 직접 記述한 구절 [連, 接 -> 有로 변형, 縱橫 -> 西로 인식]
- 혹은 敵對的 표현인 왜노倭奴, 왜적倭賊으로 불렀을 수도 있다.
倭國은 일연이 표현한 國號.로, 倭人으로 불렀어야 마땅하며, 일본日本이라는 정식 국명은 상호 호혜 관계였던 백제나 불렀음직한 것이다. 일본이란 국명이 언제부터 불리기 시작했는지, 일본 스스로 처음 불렀던 것인지, 아니면 백제가 해 뜨는 방향에 위치한 국가라하여 불렀던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왜인에 대해 신라가 자국 내부에 건설하는 탑에 이런 정식 국명國名은 절대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적女狄이라 적대감敵對感을 드러낸 표현을 사용한 국가가 발견되기도 하고, 예맥, 말갈, 응유 등 비칭을 사용한 국가가 있는 것과는 상반되는 대우이다.
이 기록을 남긴 안홍安弘이나 일연이 ‘왜倭’라고 탑에 각인된 것을 ‘일본日本’으로 왜곡歪曲 기술記述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동도성립기는 안홍이 황룡사에 체류를 할 당시에 직접 기록한 것이거나, 사후 남긴 글을 모은 문하생들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황룡사탑 건축 당시 구한의 명칭 그대로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또, 일본과는 삼국유사가 기록될 때까지도 왜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꿀만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은 없었다. 오히려 왜구가 자주 변경을 괴롭혔기 때문에 예로부터 이어져 오던 적대나 멸시감은 변치 않았을 것이다. 일연이 시대 조류潮流를 무시하고 개인적인 동기로 보다 듣기 좋은 호칭을 일부러 사용했을 정도로 생각이 부족한 사적私的 인물人物은 아니다. 또 사서에서 인용한 부분은 대부분 원본 그대로 표기한다. 따라서 일본이란 표현은 황룡사탑에 각인된 것, 혹은 전래된 그대로 인용引用 된 것이라 보는 편이 타당하다. (丹國이란 표현도 정식 호칭으로 볼 수 있으며 어느 국가에 의해 불렸을 만한 호칭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만약 그러하다면 왜를 일본이라 불렀다는 말인데, 이런 호칭을 썼다는 것은 요청자 신라의 시각이 아니라 건탑자 백제의 국가관이 반영된 결과라 봐야 한다. 황룡사 건탑에 있어 백제는 기술만을 제공한 조력자 역할에 머문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일본이란 호칭을 쓴 것으로 볼 때, 건탑 주체는 신라가 아니라 백제임이 틀림없다. 신라와 백제 중 어느 나라의 주변 국가관이 반영된 호칭인지 좀 더 살펴보자.
실체 분명 |
실체 불분명 | ||||
존 대 |
중화中華 | ||||
정 식 |
일본日本, 오월吳越, 단국丹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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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 시 |
응유鷹遊, 말갈靺鞨, 예맥穢貊 탁라托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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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대 |
여적女狄 |
인근 아홉 개의 국가에는 탑의 건립지建立地인 신라를 중심으로 보든 탑의 건축자인 백제를 중심으로 보든 말갈, 일본, 고려, 백제(신라)는 반드시 포함되어 있어야 하지만, 백제(신라)나 고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명칭은 일정한 기준 없이 생각해서는 추정조차 하기 힘들다. 다른 기록 매체에 나타나는 백제의 호칭으로 멸칭으로 보이는 광개토대왕비의 ‘백잔百殘’ Naver 백과사전: 백잔은 백제잔적百濟殘敵이라는 뜻으로,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이 396년(영락 6) 일본과 연합한 백제를 정벌하기 위한 이유로서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에 나타낸 말인데, 거기에는 ‘백잔 ·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百殘 ·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으로되어 있다. 고구려는 그 해에 백제를 쳐서 58성城을 빼앗고, 백제왕의 동생을 볼모로 삼았다이 있다. 백잔은 국호라기보다 일종의 별칭에 해당되는 것으로, 왜국을 멸시하고 적대하기 위해 왜노, 왜적으로 불렀던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구국의 명칭 중 여적女狄은 여타 역사서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 명칭으로, 한자 구성으로 보아 위와 같은 별칭에 해당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적은 건탑 주체(백제 혹은 신라)가 당시 적대시했던, 국력이 대등한 정도의 국가였을 것이다. 만약 적성국이면서 국력은 미미했다면 말갈이나 예맥과 같은 멸시하는 호칭[야만국]으로 불렸을 것 같다. 신라나 백제의 강력한 적성국이며 대등한 국력을 보유한 반드시 있어야 할 인국이 누락되어 있다면 그 나라를 여적이라 볼 수 있다. 바로 고려가 이에 해당된다. 고려에서 뒷 글자 려와 적을 합성한 글자로 생각되는데, 격에 맞지 않는 려는 안 좋은 뜻에 단골로 쓰인 녀로 바꾸고 도둑 적을 써서 여적이라 표현한 것 같다.
女狄 : 고려를 두고 백제가 적대감을 드러내며 부른 별칭. 高麗 중 한 글자(三國遺事에서 신라인을「羅人」으로도 여러 차례 불렀음. ‘羅人’云 北有靺鞨…….. 신라 사람들은 북엔 말갈이 있고)를 따서「麗人」으로도 표현 했을 것. 여기에 적대감을 드러내는 표현인 狄을 人에 대신하여 넣고, 격이 맞지 않은 려麗도 멸시하는 의미로 발음이 비슷한 녀女로 치환. <-> 백잔百殘[百濟殘敵]
중화는 여적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별칭이며, 타칭일 수도 있고 자칭일 수도 있다. 타칭이라면 당이라 생각하기 마련인데, 오월이 따로 병기되어 있어서 당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당이 아니라면 백제나 신라가 중화라 불렀을 만한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화를 자칭이라 본다면 신라나 백제 둘 다 해당될 수 있다. 신라는 수세에 몰린 정세와 건탑을 보백으로 청해야 하는 입장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스스로 중화라는 명칭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백제보다는 훨씬 떨어진다. 반면 백제는 신라와의 싸움에서 절대 우세에 놓여 있었고 탑을 제공하는 입장, 또 당과도 상호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에 있었던 만큼 스스로 중화라 칭해도 별로 꺼릴 게 없는 자유로운 상태였다. 인근 구국 대상에 백제의 인근인 오월이나 응유가 포함되어 있고, 또 일본이란 호칭에서도 백제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중화란 호칭도 신라보다는 백제를 가리킨 것이라 보인다. 그리고 신라 땅에 탑을 건립하고 그 인근 구국을 배열한 것이니 만큼, 신라는 그 대상에서 배제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즉, 중화는 건탑자인 백제가 스스로 칭한 호칭인 것이다.
7세기 백제는 고려와 동맹을 맺었지만 사실 양국의 동맹이 진정한 화해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와 당의 제국 건설과 공세에 대한 부담을 덜기 위해 일시적으로 불가침 조약을 맺은 정도에 불과했다. 백제가 나라가 멸망할 정도의 거센 공격당할 때, 고려는 구원을 위한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보고만 있었을 정도의 느슨한 동맹이었다. 그 전까지는 서로 선대의 왕을 죽인 원수지간으로 지냈던 만큼, 당면한 필요에 의해 연합을 했다 하더라도 수백 년 내려 온 적대감까지 사그러들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7세기 신라가 곤경에 처한 이유도, 성왕을 모략으로 죽인데 대한 보복이 무왕, 의자왕까지 이어져 온 것이라 평가해도 과언만은 아니다. 누구든지 원수를 부를 때는 불러 달라고 원하는 이름 그대로 불러 주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기분 나쁜 뜻이나 음이 담아 변형한 형태가 되기 마련이다. 백잔이란 것도 제와 음이 유사하면서 나쁜 뜻을 지닌 잔을 써서 비하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잔은 잔당이라는 보잘 것 없는 뜻을 포함하기 위해 쓰였을 것이고, 적은 적대감을 표출한 것일 테다. 여는 두말할 것 없이 재수 없는 뜻을 지닌 글자였고 적도 적대감을 드러내기 위해 쓰인 것이 분명하니, 백잔과 여적, 두 나라의 오랜 관계를 대변하는 호칭으로 봐도 무방하다.
역사서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중화와 여적이라는 별칭을 사용했을 만한 국가를 추정해도, 이 역시 방위 인식 순서와 마찬가지 결과가 도출된다. 하지만 당시 신라가 백제[남부여]를 중화라 불렀다거나 백제가 스스로 중화라 칭했다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당시의 정황을 살펴보고 타당 여부를 검증해야 한다.
동양사에서 오랜 군웅群雄 할거割據 시대를 끝내고 파죽지세로 흥기興起한 초강대국과 주변 강국간에는 보통 군신君臣, 형제兄弟의 관계를 맺어 상호 간 불가침不可侵을 확약했다. 그리고 왕의 칭호稱號, 연호年號 등의 등급을 조정하거나 하여 초강대국의 질서와 세계관 내에 편입이 되었다. 이후에도 많은 인적, 물적 교류를 통해 정치 군사 부문 뿐 아니라 경제, 문화 등 여러 부문에서도 상호 의존 관계를 형성하여 오해로 인한 예기치 않은 무력武力 충돌의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예로부터 검증된 방법을 택해 왔다. 이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군사기술과 지리지형 조건이 맞물려 이러한 균형 질서가 수도 없이 반복되며 형성되어 온 것이다. 한편 7세기 중엽 백제는 의자왕 즉위 후 신라와의 관계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였다. 다급해진 신라는 고려에 백제와의 동맹을 파하고 도와 줄 것을 요청했지만 묵살默殺당하였고 당나라는 고려와의 싸움에서도 열세를 면치 못하는 사정이었으니, 사방四方에 신라를 구원해 줄 국가는 없는 사면초가와 같은 상황이었다.
첫째 7세기 중엽 백제의 국력이 신라를 크게 압도壓倒하고 있었으며 쉬지 않고 공격을 하고 있었다는 점, 둘째 구층목탑을 실제로 건립한 사람들은 백제가 파견派遣한 장인匠人들로, ‘건립 주체’를 장소와 비용만을 제공한 신라로만 국한局限시킬 수 없다는 점, 셋째 신라와 인접隣接한 나라들로 아홉 개의 국가가 구성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백제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던 국가들이 더 많다는 점(단지 크나큰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다는 점이 이런 판단을 하는데 장애 요소가 된다.)들을 볼 때 일시적이나마 신라가 백제를 중화中華라 불렀다던가 혹은 백제가 스스로 신라의 땅에서 중화로 부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은, 비록 기록에 뚜렷한 근거가 남아 있지는 않다 하더라도, 개연성蓋然性이 있다 말할 수 있겠다. 즉 백제의 공세에 궁지에 몰린 신라가 조공朝貢을 행하는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들의 주도권主導權을 인정[혹은 휴전休戰 제의提議]하는 모양새를 갖춘 탑을 건립하겠다는 계획을 통보해 왔고 백제는 신라탑 건립의 숨은 의도를 알지 못한 채 이를 수락受諾하고, 공장工匠을 파견하기까지 하여 탑 건축을 도왔다는 해석이 가능해 진다. 신라는 구한 제압이라는 종교적(심리적) 목적의 달성 외에 백제의 공세를 잠시나마 멈추게 하였고, 644년 기습 공격을 가능케 한 실질적인 이익도 얻어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배경으로 신라의 주변국이라는 구한九韓 중, 일본이나 말갈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거나 무엇을 가리킨 것인지 기록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호칭呼稱(국명國名이나 민족명民族名)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表 2】방위方位 表現과 국호國號의 격格
탑층 |
국 가 |
방위 순서 |
호칭의 격 |
9층 |
예맥濊貊 |
동북 |
비하(야만) |
8층 |
여적女狄 |
(정북) |
적대(멸시) |
7층 |
단국丹國 |
서북 |
정식 |
6층 |
말갈靺鞨 |
(북) |
비하(야만) |
5층 |
응유鷹遊 |
서남 |
비하(야만) |
4층 |
탁라托羅 |
(남) |
- |
3층 |
오월吳越 |
서남 |
정식 |
2층 |
중화中華 |
(정서) |
존대 |
1층 |
일본日本 |
동남 |
정식 |
* 방위 인식[東南西北] 및 遠近 순서로 탑에 층층이 배치
* 백제의 국가관에 따라 호칭
* 모두 2字: 吳越國 -> 吳越(국 생략), 丹 -> 丹國(국 삽입)
* 중화와 여적은 통칭이 아닌 별칭이며, 극단적인 대조
마. 신라가 백제에 구층탑 건탑을 요청하게 된 배경
신라는 다른 나라를 놔두고 하필 백제에 구층탑 건탑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한다. 찰주본기와 삼국유사의 건탑 동기가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를 추정이라도 해야 황룡사탑과 구한에 얽힌 의문점들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자장이 신인과의 나눈 대화를 보면 신인은 구층탑을 건설하라고 요구하긴 했지만 구체적인 규모까지 적시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저 적당한 규모로 구층으로만 만들면 된다는 말일까? 아니라면 무언가 표본이 있어서 그와 동일한 구층탑을 건설해야 함을 전제로 한 말이었을까? 그 해답은 신라의 군신들의 답변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군신群臣이 공장工匠을 백제에 청한 후에 비로소 가능합니다.'라고 하였다. 群臣曰 請工匠於百濟 然後方可 乃以寶帛請於百濟]
일반적인 형태의 구층탑 건축이었다면 백제만을 지목하며 청해야 한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건축해야 할 탑이 백제에 있는 것과 동일한 형태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러니까 백제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탑이었을 것이란 말이다. 건탑을 제의한 원향이 唐人이었고, 여제를 견제하던 당태종으로부터 신라가 여러 가지 지원을 받았음에도 건탑에 관한 한 당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렇게 추정할 수밖에 없다. 백제만이 이런 탑을 건축할 수 있었으니, 신라가 구층목탑을 보유하고자 했다면 당연히 백제에 요청해야만 한다.
신라의 국가적 위기는 선덕왕 11년(642년) 백제의 대규모 공격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존망의 위협을 느낀 신라 정부가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했지만, 당제로부터 부인이 왕이라 이웃나라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기 때문이라는 책망을 들은 바 있다. 삼국사 : 12년 봄 정월. 당신 나라는 부인婦人을 임금으로 삼았소. 그렇기에 이웃 나라로부터 경멸을 당하고 있으며, 주인을 잃은 채 도적이 들끓고 있으니 편안한 시절이 없는 것이오. 내가 친척 한 명을 보내 당신 나라의 임금을 삼고자 합니다. 그가 혼자 임금 노릇을 할 수는 없을 것이므로 당연히 군사를 파견하여 보호하다가 당신 나라가 안정될 때를 기다려, 스스로 나라를 지키도록 하게 할 것입니다. 이것이 세번 째 계책이오. 장차 어느 계책을 따르겠는지 그대는 잘 생각하여 보시오. 十二年, 春正月, 遣使大<唐>獻方物…. 爾國以婦人爲主, 爲隣國輕侮, 失主延寇, 靡歲休寧. 我遣一宗支{枝}? 當遣兵營護, 待爾國安, 任爾自守, 此爲三策. 爾宜思之, 將從何事?” 부인이 왕이 되면 그 사실이 국가의 우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백제의 침공을 받고 나서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다. 여자가 섭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왕좌에 앉는 경우는 아주 드문 일일 정도로, 여자의 지위는 형편없이 낮았다. 내외로 이런 문제에 고민을 하던 차에 백제가 파상 공세를 취해 오는 데다 유일한 구원자였던 당제조차 왕이 여자라는 사실에 대해 문제를 삼으니, 내부적으로도 여자를 왕좌에 올렸던 결정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갑자기 증폭되었을 것임은 충분히 상상이 간다. 647년 비담의 반란 그러니까 선덕왕을 비롯한 당시 집권 세력은 내우외환의 위기에 처한 셈이다. 그렇다고 여왕을 폐위할 수는 없으니 마땅히 약점을 보완하기 위한 방책을 강구해야 하는데, 그때 나온 것이 바로 황룡사에 구층탑을 건축하자는 의견이었다.
[신인이 말하기를 "지금 그대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삼고 있는데, 덕은 있지만 위엄이 없다. 이 때문에 이웃나라에서 침략을 꾀하는 것이니 속히 본국으로 돌아 가라.”� 이에 자장은 "그럼 고국에 돌아가서 어떻게 하여야 도움이 되겠습니까?" 라고 물었다.… 본국에 돌아가서 절 안에 구층탑을 세우게 되면 이웃 나라가 항복하고 구한九韓은 조공朝貢하러 오며 왕업王業은 영원히 평안할 것이요. 神人云 今汝國以女爲王 有德而無威 故隣國謀之 宜速歸本國 藏問歸鄕將何爲利益乎 神曰 皇龍寺護法龍…. 歸本國 成九層塔於寺中 隣國降伏 九韓來貢 王祚永安矣 建塔之後]
꿈속에서 신인으로부터 계시를 받은 것처럼 신화적 요소를 가미했지만, 중대한 정치적 판단이 필요한 시기였다는 점에서 건탑 제의는 단순히 ‘고승의 꿈속 계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현실적 타개책의 일환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된다. 즉, 꿈속 계시가 정치적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쳤다기보다 정치적 의사결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꿈속 계시로 그럴 듯하게 포장한 것이라 보는 편이 타당할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황룡사탑 건탑 동기가 찰주본기에는 원향의 관심법에 의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던 고승의 정략적 판단을 자장이 신라 정부에 건의했고,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 있었던 신라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난후 대국민 극적 효과를 더 하기 위해 대외적으로는 견당 구법승이었던 자장이 계시를 받았던 것처럼 꾸몄다. 물론 탑이 성공적으로 완성된 이후여야 할 것이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일어날 법하다. 자장이 계시로 받은 내용을, 현실성을 더하기 위해 당대 명망 높은 고승이었던 원향의 관심법을 빌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 건탑 동기가 당대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창작된 풍문이며, 이를 일연이 채집 기록한 것이란 견해도 가능하다 하겠다.
찰주본기와 건탑 동기가 다르다 하여 이를 일연이 직접 창작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럴 가능성은 많지 않다. 왜냐하면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집할 때, 이 대목을 꾸며냈다가 누군가가 무엇을 참고했냐고 물어 오면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다. 고려 정부 전체가 불국토를 만들기 위해 작당을 했다면 모르겠지만, 공적 인물에 의한 역사서 편집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사료 근거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상반되는 두 개의 사실이 전래될 경우 취사선택하는 식으로 자신이 의도하는 바나 주관이 개입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하겠다. 삼국유사는 일연이 개인적으로 저술한 사찬 사서이지만, 오늘날에도 불교의 최고 고승 중의 한 사람으로 손꼽을 만큼 당대의 저명한 인사였다. 역사서를 편집한다고 하면서 근거 없이 편집자가 창작이나 개작을 한다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검증을 받는 과정에서 반드시 엉터리란 비판을 받기 마련인데, 일연과 같은 인물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내놓은 작품을 근거 없이 썼을 것이란 의견은 받아들이기 어렵고, 오히려 고려 정부 차원의 조작이 있었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여러 가지 가능할 법한 경우 중에서 여기에서는 첫째를 취할 것인데, 그러면 사찰에서 관리했던 찰주본기에는 실제 건탑 동기가, 삼국유사에는 대외적으로 표방한 건탑 동기가 적혀 있는 것이라는 견해를 취하게 된다.
유사한 사례로 선화공주 미륵사 삼국유사의 내용과 새로이 발견된 미륵사 창건 내력이 다른 이유를 여러 가지 경우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일연이 통일신라시대부터 민간에서 출처 없이 떠도는 소문을 모아 정리한 것일 수가 있고, 둘째는 선화공주가 미륵사 창건주가 맞지만, 훗날 왕비가 숙청 되는 바람에 자연스레 그 업적도 다른 사람의 공으로 넘어 갔을 경우(후대에 미륵사탑에 위조 기록 삽입), 셋째는 선화공주는 대신라 강경 일변도인 백제와의 우호 관계 유지를 바라는 신라에 의해 제의된 정략결혼(서동요는 신라가 허위로 유포)이었으며, 미륵사 건탑을 선화공주의 업적이라 만들어 내어 희생물이 될 우려가 있는 공주가 정상적인 왕비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꾸며 국민들의 걱정을 해소하기 위해서 등 두 가지 사실이 남게 된 이유를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추가적인 단서가 발견되지 않는 한, 어느 경우가 사실과 가까운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래되는 두 사실 중 하나는 허위이니까 신화에 가까운 쪽은 버려야 한다는 발상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느 것이 진사실인지 여부도 중요하지만, 당대에 널리 알려진 바도 역사에 미친 영향을 감안할 때 또 하나의 사실로서의 가치가 적지 않거나 더 높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 큰 못가에 닿으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했다. "이곳에 큰 절을 세우십시오. 진정 저의 소원입니다. "왕이 그것을 허락하고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의논했다. 이에 법사는 신통한 힘으로 하룻밤 동안에 산을 헐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게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라 했다.- 國史에는 왕흥사라 했다. - 진평왕이 여러 工人들을 보내어 그 역사를 돕도록 했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一日.王與夫人 欲幸師子寺 至龍華山下大池邊 爾勒三尊出現池中 留駕致敬 夫人謂王曰 須創大伽籃於此地.固所願也 王許之 詣知命所 問塡池事 以神力一夜頹山塡池爲平地 乃法像彌勒三 會殿塔廊廡額日彌勒寺 (國事云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
왕이 여자라 이웃나라로부터 경멸을 받는다면, 왕을 폐위시키지 않는 한 이를 모면할 계책은 없다. 단순히 외부로부터 비난을 받는 데 그치는 아니라 인국의 군사 공격의 빌미가 되고 자국은 패퇴를 거듭한다면, 내부에 살아 있던 반란의 불씨까지 발화될 수 있는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이 난관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당시대 절대적으로 신봉되던 불교의 힘을 의지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권위에 대해 도전하던 힘을 맞받아 칠 수 있는 논리는 생각할 수 없으니 불력을 빌어 타개하는 계책이야 말로 최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부처가 공인한 왕이란 사실을 사람들에게 믿게 해야 하고, 반드시 그 징표를 보여 줘야만 한다. 그런데 그 수단을 강구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자신이 부처의 인정을 받은 왕이라는 징표를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만들어 낸 후 이를 현실의 난관 타개를 위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당시 신라가 당면한 난관은 백제의 공격에 대해 더 이상 지탱하기 힘든 지경에 몰린 것이었고, 이 위기를 넘어가는 방안이 최우선적으로 논의되었을 것이다. 백제의 공격에 온 힘을 합해도 버거운 판에 여자를 왕으로 삼은 탓에 백제에 나라가 넘어가고 말 것이라는 흉흉한 소문도 돌았을 것 같다. 민심은 당연히 백제와 신라를 비교해 가며 우리는 이런 것이 부족하다며 자괴감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 절정이 되는 때가 신라가 40여성을 빼앗기고 唐나라로 가는 유일한 통로인 당항성마저 막힐 위기에 처한 642년이다.
원형이 된 백제 구층목탑은 크면서도 조화롭고 우아하게 만들어 백제 인민들의 우러러 섬김의 대상이었을 뿐 아니라 주변국의 부러움의 대상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사례: 왜의 백제대사에 건축한 백제의 구층탑) 만약 백제에 황룡사에 건축한 규모의 구층목탑이 없었다면, 그저 백제의 건탑 기술이 뛰어나다는 이유만으로 군신이 백제에 청해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백제에 보백을 주고도 탑을 건축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게 되는데, 원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도 목적한 바를 달성하지 못해서는 더 큰 권위 실추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닿으려는 욕심으로 높게 쌓으면 쌓을수록 경외의 대상이었던 바벨탑과 같이, 구층목탑도 단순히 예술혼만을 담은 수작이었다기보다 국가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정치적 성격이 더 강했던 것이라 봐야 한다.
이와 같이 신라가 백제 구층탑을 표본으로 하였을 것이라는 점과 신라가 당시 처한 국가적 위기 상황[백제의 파상 공격], 그리고 삼국유사에 나타난 건탑 동기[여자가 왕…]를 고려하면, 신라는 백제에 맞서 백제의 상징과 같은 구층탑을 자국에도 건축하여 부인이 왕으로 있어 실추된 국가적 권위를 동등하게 할 뿐 아니라 거기에다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불교의 살아 있는 화신인 왕의 권위까지 동반하여 끌어올리려 획책한 것이라 생각된다. 즉 국가 차원의 대규모 건탑 행위는 국사 편집 행위와 유사하게, 자국 스스로 뿐 아니라 타국에 대해 권위를 드높이고 선포하는 역할을 한 것이라 그 의미를 풀이할 수 있다. 이런 정치외교적 성취가 원향이나 자장의 머리에서 비롯되고 구체화되었던 것이라 추정된다.
이렇듯 신라의 건탑 동기는 역사서 기록들만을 가지고도 별다른 반론의 여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합리적인데, 백제가 건탑 공여를 한 행위는 추정을 하지 않으면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신라가 뭐라 했기에 백제가 자국의 보배나 다름없는 구층탑을 건축해 주었을까? 분명히 신라는 백제에 진정한 의도를 감추었겠지만, 보백과 적대적 의도를 감추는 것만으로 원수지간이었던 두 나라에 그런 국가적 사업이 공동으로 수행되기는 힘들었을 것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건탑 기술자를 타국에 빌려주는 행위는 그 기술까지도 사실상 제공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작업 과정을 지켜보던 신라 장인이 모방을 할 수도 있고, 백제 장인이 몰래 비법을 넘겨 줄 수도 있으며, 극단적으로는 기술자 몇 명이 망명해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백제가 당시 최고의 건탑 기술을 제공했다면, 그에 걸맞은 대가를 요구했을 것이 틀림없다. 보백이야 물질에 불과한 것이라 액수가 다소 많다하더라도 약발은 제한적이다. 예를 들어 최고의 청자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한 장인에게 으리으리한 집을 몇 채 지어줄 테니, 청자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술까지 넘겨달라고 한다면 대부분 거절할 것이다. 장인의 자존심이 이런 불순한 행위를 용납하지 않을 뿐더러, 현실적으로도 기술을 넘겨주면 자신의 가치를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해야 할 건탑 기술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우려를 무릅쓰고도 강행했다면, 백제에게도 그에 맞는 동기가 제공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래서 신라가 건탑 제의를 할 때 적대적 의도를 숨겼을 것이고, 보백으로 마음을 샀을 것이란 정도만으로는 해석이 온전치 않다는 말을 한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백제가 보유한 탑과 같은 것을 만들어야 살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면, 굴욕을 무릅쓰고 내조나 인질 제공 같은 극단적인 책략까지 쓸 필요가 있다. 40여성을 빼앗긴 전례가 없는 패퇴에 신라는 백제에게 항복하겠다는 뜻과 함께, 조만 간에 항복 문서를 갖고 다시 내조하거나 측근 왕족이 인질됨도 약속했다. 그리고 백제가 중화[중국]임을 선포한 구층목탑을 신라 땅에도 지어, 백제의 속국됨을 만방에 선포해도 좋다…는 달콤한 약속을 하지 않았다면, 신라의 건탑 제의에 백제 정부는 미동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면 백제는 보백을 받고 그럼 해볼까라며 건탑을 도운 게 아니라, 아예 스스로 신라 땅에 들어가 건탑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백제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신라와의 전쟁에서 승전을 기념하는 탑을 세운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건축을 시작하고 부족한 기술을 습득했거나 기술자를 회유한 이후에는, 신라는 거침없이 본색을 드러낼 수 있다. 건탑이 한창 중인 644년 신라가 백제를 공격해 7성을 확보한 것도, 645년 백제가 신라를 두 차례 공격한 것도 이런 식으로 설명하면 무리가 없다.
이렇듯 구층탑 건탑은 양국이 전쟁 중에 동상이몽을 한 끝에 탄생한 산물이며, 신라의 책략이 승리했음을 상징한다. 신라가 건탑을 위해 무슨 거창한 약속을 했건 간에 그런 적 없다라 발뺌하면 그 뿐이다. 하지만 구층탑은 이미 세워져 있는 상태로, 신라는 얼마든지 당초 바람대로 활용할 수 있게 된다.
사실 공양미 삼백석을 심봉사에게 요구했던 승려와 마찬가지로, 백제에 있는 것과 같은 구층탑 건탑을 요청한 원향이나 자장도 신라 정부가 이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심봉사가 눈을 뜨게 되었지만, 현실에서는 구층탑을 세웠다 한들 신통력이 작용할 리 없다. 하지만 신라에게는 여자가 왕이라 분산된 민심을 다시 종교적으로 결집시킬 수 있는 대상이 생겨나게 되었다. 자장이 달성하기 힘든 목표를 통해 허탄한 바람만을 안겨준 게 아니라면, 아마 위와 같은 실제적인 효과를 볼 수 있는 목표를 제시했으리라 생각된다. 어쨌든 신라에게 정치적 승리를 안겨 준 황룡사 건탑은 부처님의 은덕 탓인지, 결과적으로는 백제의 멸망을 예고하는 상징물이 되고 말았다.
[맺음말]
이제 추정을 포함하여 정리해 보자면, 삼국유사를 통해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황룡사 구층탑의 건축 동기는 신라가 내부적으로 논의한 진목적에 해당된다. 하지만 인국에 적대적 의도를 담고 있는 내용이라 백제에까지 표방할 수 없어 백제에게는 다른 건탑 목적을 제시하여야만 했다. 그래서 신라 군신들은 건탑 제의에 백제가 솔깃할 만한 내용으로 생각해 낸 것이, 항복 의사를 표하며 그 상징으로 백제에 있는 구층목탑을 신라에도 건축하여 속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해도 좋다는, 건탑 추진을 야기한 정세를 역으로 이용한 안이었다. 백제는 이에 동의하여 신라의 중심부에 자국의 의지로 건탑을 추진하게 된다. 건탑이 상당히 진행되었을 644년, 더 이상 백제의 조력이 필요 없게 된 신라는 본성을 드러내며 백제 일곱 성을 쳐서 빼앗는다. 이에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백제도 이듬해 반격을 가하면서 더 이상 협상이 통하지 않는 교전 상태에 빠져 들었다.
그래서 황룡사 구층탑에는 신라가 의도한 구한이 기록된 것이 아니라, 백제를 통한(시각을 반영한) 신라의 인근 아홉 지역이 기록된 것이다. 당시에 국체를 유지하고 있었던 국가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익히 알려진 국가나 지역[낙랑처럼 오월, 탁라, 응유, 말갈, 예맥은 당시에는 지방명이 됨]을 팔방에 배치하여 자국의 위치를 사방을 기록한 역사서보다 더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역사서에 인국을 기록하는 관례를 따라 동서남북[혹은 동남서북] 순으로 기록한 것이며, 국호가 아닌 별칭으로 기록된 중화와 여적은 각각 건탑자 자신인 백제와 적대국 고려를 가리킨다. 백제 구층탑은 신라와는 달리 인국 항복이나 구한 내조, 왕조 영안 같은 상대국이 볼 때 적대적으로 간주할 만한 국가의 염원은 가미되지 않았다.
이후에 신라는 부인인 왕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권위를 구층탑을 통해 확보하는데 이용했다. 구층탑 완공은 부처가 신라와 함께 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으로 선전하며, 민심 및 정치 안정을 추구하였을 것이다. 목마를 전리품으로 잘못 인식해 성 안으로 들여 놓다 멸망한 트로이와 마찬가지로 상대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백제는, 결과적으로 자국 멸망의 상징물을 스스로 건탑했다는 불명예를 안고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신라의 주도면밀한 책략과 계산에 의한 것임을 어느 누가 깨달을 수 있을 것인가?
【분석 방법 요약】
1. 구층탑에 층별層別로 주변국周邊國을 배치할 때, 무작위가 아닌 일정한 규칙[방위관 혹은 기술 목적]이 존재하였을 것.
가. 각종 史書에서 한 나라의 위치를 기술할 때, 대체로 동서남북이나 동남서북 順으로 상대 위치를 記述하는 고유한 규칙이 존재하였음.
나. 조선왕조실록을 분석하면 15세기[中宗]를 기준으로 ‘以前은 東南西北’, 以後는 東西南北’으로 우리의 방향 인식 관습이 변화하였음.
다. 일층부터 구층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東南[일본] ~ 西南[오월] ~ 西北[단국] ~ 東北[예맥] 順으로 국가가 위치하고 있음. 방위관에 의한 분류가 이상없어 목적별로 분류 여지 없음.
▬이에 따라 일층 일본과 삼층 오월의 사이 이층 中華는 百濟, 칠층 단국과 구층 예맥 사이의 팔층 女狄은 高麗로 추정 가능
라. 史書는 위 ~> 아래와 우 ~> 좌 순으로 글을 읽고 탑(혹은 숫자)은 일(층)으로부터 구(층) 순으로 바라 보며 인식함.
2. 국호國號의 격格에 있어서 존대尊大, 정식定式, 비하卑下, 적대敵對가 혼재混在되어 탑 건립 주체主體의 국가관國家觀이 드러나 있음.
가. 중화中華는 자타에 의한 존칭으로, 물리칠 대상의 표기와는 그 격에 있어 서로 모순되는 표현. 따라서 황룡사 탑에 기록된 아홉 국가는 실제로는 물리칠 대상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없음.
▬중화中華의 호격呼格으로 보아 탑의 건립 주체 자신이었거나 아니면 건립 주체의 조공朝貢 대상국이었을 것.
▬유일唯一한 적대 표현인 여적女狄은 탑의 건립 주체[중화 혹은 중화 연맹국]의 강력한 적성국敵性國이었고 존칭이나 멸칭[倭人, 倭賊 ,契丹]이 있음에도 공식 국명으로 기록된 日本, 丹國, 吳越은 전통적으로 우호국友好國이었으며, 문명화가 덜 된 명칭으로 여겨지는 응유鷹遊, 말갈靺鞨, 예맥濊貊 등은 산발적散發的으로 변경邊境을 괴롭히던 약소국이었을 것.
나. 탑의 건립자建立者는 백제와 신라 양국兩國으로, 평상시라면 백제의 역할이 단순한 탑 건축 기술의 제공(공장工匠 파견)에만 있을 수도 있지만 당시 격변했던 정세로 보아 백제가 신라에 영향력 확대까지 추구하였을 것. 이런 점이 탑의 건축에 영향을 미쳤다면 백제의 국가관(아홉 주변국의 명칭)이 탑에 심어졌을 것이란 추론 가능.
▬ 따라서 신라의 이웃나라 항복 및 조공이라는 목적은 신라 정부가 탑 건축의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한 내부 합의에 불과하고, 대외에 표방標榜한 목적으로까지 볼 수는 없음. 내부 합의한 진목적眞目的을 숨기고 백제가 납득할 만한 가목적假目的[사라진 史實]만을 전달.
▬ 역사에는 가목적이 아니라 진목적[隣國降伏 九韓來貢]만이 단편적으로 남게 되었고, 탑에 기록된 아홉 국가명을 통해 역逆으로 가목적을 추론하지 못하고 단순하게도 진목적만을 아홉 국가와 엮는 바람에 역사적 事實 도출을 試圖조차 못함.
▐ 결 론
▬ 고유 명칭이 아닌 별칭으로 실체가 불분명했던 중화中華와 여적女狄은 탑 건립 주체[백제와 신라]와 배열 순서인 [동남서북] 및 국호의 격[尊定卑狄]으로 볼 때 백제百濟와 고려高麗를 가리킨 것이며, 아홉 국가 호칭呼稱의 격格은 백제[자칭自稱 중화中華, 즉 중국中國]의 주변 국가관이 나타난 것.
▐ 의 미
▬ 황룡사 구층목탑九層木塔의 아홉 국가는 신라가 아닌 백제 국가관을 宣布한 탑으로, 당시 국제 정세로 볼 때 신라에게는 백제의 공세를 잠시나마 멈추게 하는데 기여한 ‘일시적 휴전休戰 상징물象徵物’로 기능한 것으로 추정. 삼국유사는 남겨진 기록의 부실 탓 혹은 의도적으로 政治가 아니라 佛心에 초점을 두고 기술됨.
▬당시 황룡사 구층목탑의 건축은 확대된 영향력으로 자신들의 질서 속에 신라를 편입하려는 백제의 의도와 구층목탑 건축을 통한 난관 타개라는 신라의「숨은 의도」가 맞아 떨어져서 이루어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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