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같은 진실 ‘9200년 배달역사’
‘명나라 있음에 조선 존재’ 有明朝鮮 최대 수치
한동안 왕조조선의 사대주의와 일제의 강점기를 겪어오면서 찬란하였던 조국의 역사가 강탈과 날조, 왜곡의 너울에 가리어져, 반도사관(半島史觀)으로 추락되었었다.
반도사관이란 대륙을 다스렸던 조국의 역사를 부정하고, 한국은 예로부터 대륙의 강대국의 속국으로 존재하거나 아니면 본도(本島)라고 하는 섬나라 일본에 소속되어 독립국가의 경험도 없이 유지해왔었다고 하는 지정학적 반도의 역사관이다.
일제가 세뇌시킨 식민지 교육용어가 우리의 찬란한 역사를 가리어 온 것이다. 이제 여기서는 모든 왜곡과 날조를 한꺼번에 걷어버리고 신화가 아닌, 신화처럼 보이는 참된 우리의 정통역사를 전하고자 한다.
◇역사자료의 수난
우리나라의 역사만큼 훌륭한 나라는 지구상에 없었다. 지구촌에서 맨 처음(처음=아시=시작. 아시아=처음의 땅=아침의 나라. 지구상에서 맨 처음으로 세워졌다는 나라를 아시아 즉, 아침의 나라라고 하였다. 아침의 나라를 아사달=아시아=古代의 朝鮮이라 했음) 위대하고 자랑스럽게 세운 평화의 나라, 동방군자지국(東方君子之國)이었고, 일찍이 동방의 등불이었던 조용하고 자애로운 봉황의 나라 아시아의 중심국가 COREA였다.
그러나 국가의 역사가 가장 오래(약9200년)되다보니 수천년 또는 수백년만에 한 번씩 수난을 겪었다. 그 때마다 역사를 부러워했던 침략자들이 빼앗아가고 불태워버리고 왜곡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흠집을 낸 것이 이제는 아이들이 배우지 않으려고 할 정도로 비굴하게 찌그러진 역사가 되어졌음을 확인하게 된다.
보라! 조국(祖國)의 역사를 상고시대(上古時代)로부터 대략 살펴보자. 환국시대(桓國時代를 桓因시대로 誤用)는 비정한다 하더라도 소호금천씨의 청구나라가 있었던 배달겨레제국 1500년, 고대조선의 삼한12국 3600개성을 경영하였던 단국천제시대 2000년, 고구리 900년(700년이라 함은 건국연대의 왜곡에서 비롯되었음으로 900년임), 신라 1000년, 가야 500년(前가야부터서는 1500년이나 수로황이후로는 500년임), 백제 650년, 발해 260년, 고리 475년, 조선왕조(朝鮮王朝) 500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토록 긴 역사 속에서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겼던 압박과 설움의 기간(1945~1910년=35년)은 고작 35년이 아니었던가?
이스라엘은 나라를 빼앗기고 방황하던 세월이 2000년이 넘었었고 세상의 모든 나라들의 흥망성쇠가 다 수백 년씩 주기적으로 끊어지고 이어지는 것을 반복하였었지만, 우리나라처럼 35년을 빼고는 일만 년에 가까운 당당한 역사를 가진 나라는 없다.
다만 뺏기지 않았으면서도 부끄러운 유명조선(有明朝鮮)시대라고 하는 이성계장군의 조선왕조 500년의 수치가 우리역사 약9200年史에서 가장 큰 수치역사기간으로 존재할 뿐이다. 유명조선이란 명(明)나라가 있음으로서 조선(朝鮮)이 존재한다는 뜻인 사대교린주의의 낙인이다.
왕조의 공식표기 서두에는 ‘유명조선(有明朝鮮)’이라고 쓴 것이 수치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상고시대 국가(오늘날 中國의 上代에 있었던 나라)들 중에는 320년을 넘긴 나라가 하나도 없다. 진시황제가 황제나라를 선포했지만 고구리(高句麗)가 두려워서 만리장성의 일부분을 보수하다가 13년 만에 망해버렸다.
20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리를 쳐들어왔던 수양제의 수(隋)나라도 37년만에 망했다. 짧게는 며칠에서부터 보통 50년~150년 정도 지나면 패망한 나라가 대부분이다.
가장 길었던 나라가 송(宋)나라지만 건국319년 만에, 마의태자를 따라나섰던 신라유민이 세운 금씨의 나라라고 불렸던 금(金)나라에게 멸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고 보면, 항상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연장선상에서 지나(CHina)의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리면서 살아왔었는지를 이해하게 된다.
과연, 靑나라황족은 신라 마의태자의 후예였는가?
日本천황가는 김수로황의 후예로서 김해김씨인가?
석가와 공자와 예수는 동이(東夷)의 혈통으로 밝혀지고 있다.
중국(支那:China)은 왜 동북공정을 선포했고 일본은 왜 독도(돌섬)를 다께시마(대나무섬)라고 우기는가.
명쾌한 답이 우리역사속에서 함성으로 들려오고 있다.
우선 난해하고 딱딱한 학문적 내용이었지만, 가능한 한 문외한이라도 쉽게 읽고, 이해가 되도록 하게 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하였다. 대중화하여 쉽게만 풀어 쓰도록 하다 보니 적합한 용어를 찾는데 애로점이 아주 많았고 전문가로서는 오히려 더 난해하다고하더라는 귀띔도 들었음을 밝힌다. 다만, 역사의 진실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누구의 간섭 어느 세력으로부터의 압력을 받거나 또는 압력 받을 것을 의식하지도 않았다는 것과 필자의 신인본주의의 양심에 따라서 거리낌 없이 서술하였음으로 피차간에 실감하면서 이해하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소호금천씨’집필이유를 밝히겠다.
첫째 지금도 우리나라의 사학계(한국사교수와 국사교사의 대부분)기득권이 유명조선(有名朝鮮)반도사학(半島史學)의 왜식사학연장선상(倭式植民史學延長線上)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족을 매도하였던 간교한 버릇을 기계적으로 반복하는 다중기만의 역사학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유명조선이란‘명나라가 존재함으로서 조선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이성계의 사대교린주의이고 반도사학이란 ‘반도(半島)는 본도(本島)에 예속 된다 즉, 한반도의 역사는 대일본제국의 본도에 예속되어야한다’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역사학원칙에 따라서 “한국의 중고대 역사는 한반도내에 국한되어야한다”는 왜식사학이다. 그들은 상고사(上古歷史)와 중고사(中古歷史)의 사료들을 부정하거나 기피하면서 이미 기성화된, 빗나갔던 왜식날조역사를 옹호하기 위하여 변명논고를 쓰는데 급급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신진세력의 접근을 막기 위해 국고 또는 공사립출연금의 국학연구비를 독식해버렸다. 급변해가는 태평양시대의 현실에 있음을 직시하면서 이들의 혼을 깨어나게 해주지 않는다면 조국이 다시 불행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는 위기의 벼랑으로 기울게 될 수밖에 없다는 의식에서 붓을 든 것이다.
둘째 앞으로 세계를 운영하는 중심의 축이 서양에서 태평양 주변국으로 옮겨오고 있다고 하는 시대적 기대감으로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매우 고무되어 있다. 따라서 정말로 동양적 가치관과 동양문화의 풍토가 이제는 ‘인류의 비전’으로 평가받을 수 있겠구나하는 설렘과 희망을 갖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특별히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공 일본 등 3국은 흐름을 저마다 유리하게 해석하며 태평양시대의 균형(均衡)자로서 중심국가가 되리라는 선언을 하고 나서기 시작하는데, 이러한 시대적인 변화추이에 부응하여 명실 공히 동북아의 중심 국가로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고 세계의 중심 국가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주인공은 과연 어느 나라일까? 하는 것이고, 이에 대비하여 우리대한민국이 감성적(感性的) 의욕만이 아니라 실제로 무한한 에너지원의 핵이 되는 역사관 정립이 바로 되어야하기 때문이기도 한다.
셋째. 역사는 왜곡보다도 더 분통터지는 것이 역사의 몰이해다. 왜냐하면 왜곡된 부분은 사실역사를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찾아내기도 쉽고 또 찾아내어 재정립하면 되는 것이지만, 고대역사 중세역사 자체를 몰이해하는 지금의 역사학계는 상고시대의 역사적인 인물들을 모두 중국인의 조상으로 매도(賣渡)함으로서 오히려 우리민족 역사관정립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해버렸으면서 중세시대에 와서도 신라의 건국시조와 고구려의 건국시조는 물론이고 가락국의 건국시조까지 우리민족의 근본이 되는 인물들을 모두 아기로 태어난 인간이 아니고 커다란 알에서 나온 별난 임금으로만 고집함으로서 역사를 신화로 매도해버리는 우를 범했다. 따라서 우리역사의 기원이란 일 만년은 커녕 반만년도 안되게 만들었다. 5000년 역사의 3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겨우1600여년 내외의 미천한 역사로 교과서를 조작해버렸지 않은가. 상고시대 역사는 중국에 매도(賣渡)했고 중대역사는 신화로 묻어버렸다. 우리 동포의 대부분은 BC58년에서 AD42년 사이에 알에서 나온 이들의 후손이며, 그 외 백성들은 상고시대 미상의 또다른 신화 속에서 나왔다는 것으로 만들어놓으면 결국 우리는 인류사에서 소외되는 하나밖에 없는 별종이 되어 버린다. 이를 바로잡아 역사로서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넷째 필자는 스스로 중심 국가가 되겠다고 하는 나라들을 하나씩 점검하며 그 들의 과거사로부터 근세사에 이르기까지 역사와 역사적 시련을 통해서 다져진 민족성과 문화적 잠재역량을 어느 정도 비축하고 있느냐하는 것을 파악하던 중에, 이미 교과서적으로 인식되었던 역사사실에 있어서 대단한 오류와 오해가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었음으로 이를 공개하고자 하는 것이다.
다섯째. 지금까지 자의거나 타의거나 간에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었던 기존의 교과서적역사와 성씨별 또는 종친 간의 족보를 밝히겠다는 것이다. 은연중에 상식으로 통했던 내용의 대부분이 조작되었다는 것을 알리겠다는 것이다. 또한 비밀리에 뜻을 전달하려 하였던 은유필법의 시대적 표현이 진실을 쉽게 알 수 없도록 잠금 장치로 봉인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 곧이곧대로 직역하여 엉뚱한 이야기가 쏟아져왔던 잘못을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잘못 알아온 은유필법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풀어서 종족간의 대 통합과 백성간의 화합을 이루려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과 집필과정이 필자로서는 매우 힘에 겨운 것이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에 맞추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에서는 세상의 진리가 묻히고 말 것 같은 위기감이 느껴졌다.이러한 숨겨진 역사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필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라는 생각이 집필 과정에서 큰 힘이 되었다. 조심스럽게 바라는 것은 이 자료가 혹시라도 종족 간 또는 종교 간의 다툼을 일으키는 빌미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학파간의 무기가 되지도 말고, 정서의 논제나 역사의 시금석 또는 삶의 조리기구가 되어 순수하게 이용되기를 바란다. 또한 여기에 수록되지 않은 성씨의 뿌리에 대해서는 요청에 따라서 시리즈로 집필할 예정임을 밝혀두는 바이다.
새 이름으로 정한 벼슬 이름은 다음과 같다. 행사를 주관하는 직책은 까치, 황제의 뜻 대변자는 종달새, 군사를 지휘하여 나라를 지키는 국방장관은 독수리, 백성을 감찰하는 사법관은 매 그리고 통신을 맡은 체신부장관이 제비, 농사를 주관하는 농림부장관 뻐꾹새, 시중드는 비서는 집비둘기, 직업을 관리하는 다섯 분류 장관 닭, 그리고 금계와 백조 등이 그것이다.
이 많은 벼슬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분이 바로 봉황으로 상징되는 소호금천씨였다. ‘삼성기’와 ‘삼국사기 열전’및 ‘산해경’과‘중국의 고대신화’의 기록에 나타난 소호금천씨 편의 묘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금산(金山:알타이)과 당산(堂山) 그리고 아사달(白山)에 이르는 거대한 제국인 배달나라의 동쪽에 “대여·원교·방호·영주·봉래라는 다섯 개의 산으로 둘려진 넓은 평원이 있었는데, 높은 곳에 황금으로 궁궐을 축성하고 난간을 백옥으로 드리우니 가히 신선이 사는 곳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실체나 구체적인 규모가 신약의 요한계시록(21:11~27)을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소호국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흰옷을 입고 있었으며, 날짐승이나 들짐승들까지도 거의 흰색이었다. 태평성대의 대표적인 시대로 또 정치의 이상향인 덕치(德治)의 상징으로 묘사되는 순임금의 치세의 비결도 동방의 청구나라 치세를 본 따른 것이라고 전한다.
동양 고대의 인문지리서인 ‘산해경’에는 소호금천씨의 태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전설을 전한다.
“도처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열매들은 한결같이 진주와 보석 같았으며, 사람이 따먹으면 장생불사하는 효험이 있기 때문에 ‘생명과’라 하고, 모두들 행복한 생활과 장수하는 인생의 즐거움을 누리고 살았다.
‘봉황의 나라’라고 일컫는 소호금천씨의 나라는 흰옷을 입은 백성과 하얀 새, 하얀 짐승, 그리고 꽃이 만발하여 항상 노래가 그치지 않은 신선의 나라로서 ‘하늘나라’라고 불렸으며, 그 나라는 조정 대신들의 직책도 새의 이름으로 붙여져서 ‘집비둘기는 봉황의 나라님을 모시는 천사’ ‘제비는 통신을 맡은 체신장관’ ‘독수리는 군대를 맡은 병권 책임자’ ‘뻐꾸기는 농사를 맡은 책임자’ ‘매는 법률과 형벌을 맡은 법관’ ‘종달새는 조정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일일이 발표하는 대변인’ ‘ 닭은 다섯 종으로 나뉘어 건축, 금공, 도공, 피혁공, 염색공 등의 책임을 맡은 담당관’의 직책을 맡게 함으로서 천국의 직제를 갖추었다고 했다. 이는 소호금천씨의 나라가 하늘나라이니 날아다니는 새들로 신하를 삼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소호금천씨의 이복동생인 태호복희씨가 등장한다. 아버지 태우의 천황과 화서씨(華胥氏)의 사이에서 남매가 태어난다.
아들 태호복희씨는 하느님으로부터 묵시를 받아 삼신산에서 천제를 올리고 8괘와 결승을 받았으며, 딸-여와는 흙으로 사람을 만들고 기를 불어넣어서 농부나 병사로 활용하였다고 하는 어머니의 신으로 알려지고 있다.(여와는 팔레스타인에 전해지면서 전쟁의 신 jehova로 변질되었다).
태호복희씨는 태우의천황의 열 두 번째 아들이라고 한다. 태호복희씨는 소호금천씨의 대를 이어 청구나라를 맡게 되면서 소호금천씨의 아들 중(重-후에 목신이 됨)을 후계자로 삼았다. 대신 소호금천씨는 태호복희씨의 아들 해(該-후에 금신이 됨)를 후계자로 삼아 서쪽의 끝이라고 하는 수명국(遂明國=須密由=須密夷國=슈메르)나라를 맡도록 하였다.
이에 대하여 소씨의 족보인 부소보서(扶蘇譜序)에는 소호금천씨의 아우로서 서역(西域)에 봉하여진 밀유(密由)가 수미을(須美乙) 즉 신국(新國)을 세웠다는 것임으로 나라이름을 ‘수밀유(수메르)국’이라고 부르게 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소호금천씨가 슈메르에 태호복희씨의 아들 해(該)를 데리고 가서 밀유(密由)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되도록 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바그다드 파라오의 주인공은 해의 후예인 동이인(東夷人) 임이 분명하다고 보는 것이다.
후에 소호금천씨는 큰아들 목신(木神)이 장성하자 소호국(청구나라)을 맡은 태호복희씨의 후계자가 되게 하고, 태호복희씨의 아들 해(該)를 작은 아들로 삼아 서방 욕수(須密由國=슈메르국)로 데리고 가서 욕수지방을 다스리는 금신(金神)에 임명하여 서방 1만2천리의 땅을 다스리도록 임무를 맡겼다.
본인은 다시 돌아와 장류산(장백산맥 동쪽에 있는 머리산으로서 백두산을 말 함)에 들어가 유하면서 태양의 빛을 감독하고 천상의 형벌을 관장하였었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해가 질 무렵에 노을이지는 것은 욕수로부터 아들 해(金神)가 원신(元神)이신 큰아버지 소호금천씨가 유한다는 장류산(金山)이 있는 동쪽을 향해서 매일 태양 빛의 점검을 받는 것으로 여겨졌다. 욕수란 묵은 갈대가 계속 싹이 나고 자란다는 뜻의 지명이며 구약성경에서 ‘팔레스타인과 갈대아 우르’라고 하는 곳(우르/욧바/욥바/욕브하/욧바다/욕므암/욕느암/욕드엘/요단/윳다 등 메소포타미아와 아랍지방)이 바로 이곳인 바 ‘홍광’이라고도 불렀었다.
이같은 사실은 슈메르 유적에서 발견된 점토명판에서 확인이 되고 있다. 이 점토명판의 해석에 의하면, 슈메르인들의 근국(根國) 즉‘뿌리가 되는 조상의 나라’는 동방의 해 돋는 나라이고 그 해 돋는 나라로부터 그들의 선조가 이 곳 유브라데스강과 티크리스강 사이의 둔치 메소포타미아에 흘러들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5500여 년 전의 소호금천씨에 대한 역사가 고대의 유물과 금석문의 연구를 통하여 학문적으로는 점점 실재 존재했던 사실역사(歷史)로 밝혀져 가고 있는 것이다.
유태인의 역사서이기도 한 구약에 연관된 지명도 바이블고고학의 개가에 의해서 실재 위치가 확인되는 등 베일이 벗겨지면서 당시 슈메르문명의 주인이 동양의 선진문화민족이었던 동이인 이였었다는 결정적인 열쇠가 찾아진 것이다.
슈메르 문명의 정신문화와 언어가 동호(東夷=東胡=tungus) 즉 퉁구스족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서양에 알려진 동이(東夷)라는 동방나라에서 유입되었다는 사실은 이제 반론을 펼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
슈메르인들이 당시의 자화상으로 점토명판에 기록하여 두었던 유물들이 발견하였고 그 자화상의 점토명판이 해독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다음에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할 계획이다.
향후 학자들의 연구를 기다려 보아야겠지만 이미 공개된 자료만 가지고도 진실접근은 이미 이루어진 상태다. 그 자료도 비교적 많이 남아있다. 고대의 단제조선시대(檀帝 朝鮮時代를 단군시대로 비하전수 되고 있음)의 자료가 부족한 것도 고대 조선에 관한 자료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랑스러운 역사를 시기하는 이웃나라의 수작에 의해서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러한 움직임은 계속되고 있다. 그동안 보아온 것처럼 사대종교인과 사대정치인 등 외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반민족부류들이 조국을 폄하하면서 사료인멸에 동조하는 일을 계속해오고 있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다.
거기에 소호금천씨의 역사는 이 시대를 위하여 봉인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지난날에는 깨닫지 못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다행이기도 하다.
이 이야기를 전개하는 중에 순임금이 나오기 때문에 기록에 나온 내용을 옮겨본다.
순임금 : 순(舜)은 고대조선의 시조 단제 왕검(檀君으로 오해되고 있으나 壇帝 王儉이라 해야 맞다)을 모시던 신하(臣下)로서 원로(元老) 유호(有胡=有蘇)씨의 큰아들이다. 단제(壇帝) 왕검의 처남이기도 한 그는 적제축융(赤帝祝融)의 후예이기 때문에 혈족으로는 소씨(蘇氏)이며 알백(소호금천씨에게 드리는 제사를 맡은 제사장)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하였으나, 왕검을 배신한 요(堯)임금의 두 딸을 취하여 요(堯)임금의 사위가 됨으로서 부모에게 버림을 받게 되었다.
아들이 없는 요(堯)임금에 이어서 당도(塗山)의 대를 이은 순(舜)임금이 되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 백성들에게 좋았던 시절을 요순시대(堯舜時代)라고 하는 것은 초대단군 임금인 왕검시대를 이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순(舜)임금은 결국 왕검 단군의 지시를 거역함으로서 신하인 우사공(虞司空)에게 배신당하여 살해되었으며, 두 부인은 더럽힘을 당하지 않으려고 몸을 강물에 던져 자결하였다. 순(舜)임금을 살해한 우(虞)사공은 호남에서 하(夏)나라를 건국하여 우(禹)임금이 되었다. 그럼으로 소호금천씨는 단제(檀帝)임금의 고대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알백이라는 벼슬을 두어 제례모심을 받았다는 것이고, 단군왕검의 고대조선은 소호금천씨의 후예국가라는 입증이 되는 것이다.
인류사에 있어서 시원문화를 여신 분으로서 배달겨레(한웅시대)의 제5세 한웅 태우의(太虞儀 / BC3512?3420)의 장자이며, 동방구이(九夷)족 중에서 으뜸이라는 동이족의 원조(元祖 : 약5400~5500년 전)이다.
아시아 상고시대의 수많은 임금들 중에 다섯 분을 뽑아 삼황오제(通志-五帝世譜와 史記의 五帝本紀)라고 하는데 여기에서도 첫 번째 임금(①청구임금 소호금천씨 ②전욱임금 고양씨 ③곡임금 고신씨 ④요임금 방훈씨 ⑤순임금 중화씨)으로 꼽히는 위대한 동방동이족의 청구나라 국조(國祖)이다.
우리나라의 모든 성씨가 다 소호금천씨의 후예로서 중도에 사성을 받았거나 창시를 하여 타성(他姓)씨로 갈라져 나가긴 했지만 결국은 자랑스러운 동이(東夷 / ‘夷’자는 본시 ‘仁’자의 옛文字이며, 어질고 자비로운 사람‘이’字였으나, China족이 시기하여 오랑캐‘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질고 자비로운 사람‘이’字라고 해야 한다)족이며 배달겨레라고 자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삼황오제시대는 물론 하(夏)나라, 은(殷)나라, 주(周)나라 때까지는 지나(支那:China)족의 존재가 대륙에서는 없었음으로 대륙의 상대역사(上代歷史:上古史)는 지나(支那:China:中國)와 관계가 없는 원주동이역사, 즉 고대조선족의 역사였다는 것이고, 남쪽 변방의 남만(南蠻)지나(支那:China)족이 북상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삼황오제(五帝)시대인 신조(神鳥 : 鳳凰)의 나라 소호금천씨나 전욱임금과 곡임금 그리고 요임금과 순임금까지도 맹자가 주장하였듯이 지나(China)족이 아니며, 동이족으로서 고대 조선인이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료(史料)가 증명하는 역사로 볼 때 동이(東夷)족이 소호금천씨로부터 이어져 왔던 주류를 간추려본다면, 배달겨레시대의 청구나라 봉황 족, 단국시대(王儉의 朝鮮時代 / BC2333?238년까지)의 오가(五家)를 비롯하여 주(周)나라의 왕족, 춘추시대의 담(啖)나라 왕족, 모돈(漢나라의 上國)나라의 왕족, 한나라 유철(한 무제)에게 배신당한 휴저(休屠-金留 / ‘屠’자는 본시 별이름 ‘저’ 또는 임금이름 ‘저’字였으나 배신자 漢무제가 결국 죽이지 못하게 되자 저주를 하며 죽일‘도’ 백정‘도’字로 왜곡했다고 전한다. 그럼으로 우리는 별이름 ‘저’ 또는 임금이름‘저’라고 해야 한다.)나라 왕족, 한나라를 접수하여 동양최대의 나라를 건설했던 신제국의 왕족, 가야시대와 후한시대부터는 하늘로부터 하강하였다는 태양의 아들과 금궤나 황금덩이 또는 봉황과 오색찬란한 강포에 싸인 알에서 나왔다는 비화(秘話)들을 통해서 소호금천씨의 후손임을 증명하였던 신라국조 박혁거세와 고구려의 7대 임금 추모(고주몽이라 부르는 추모는 해모수 모수리 고해사 고우루 고두막 고무서 다음으로 고구려의 7代 임금이었으나 재임 중에 국호를 ‘高句麗’로 바꾸었다하여 국조로 하는 것은 잘못이다)와 가락제국(6개의 가야나라)의 수로왕 형제(6형제)들로 이어진다.
다만, 소호금천씨의 직계후손 중에서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만이 유일하게 혈맥을 이어 오늘에 이르는 김씨(金氏)로써 대대로 가계를 이어가고 있다.‘金氏’는 본시 ‘금씨’였다. 조선왕조 때 학문을 싫어한 연산군이 김씨로 바꾸어 부르게 했다. 그는 성균관에서 유생들을 몰아내고 색을 즐기는 유흥장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원각사(圓覺寺)를 기생양성소로 만들었으며, 사초를 문제 삼아 선비와 사림(史林)의 학자들을 모두 포학무도하게 살해하였고, 한글로 된 상소문이 있었다는 이유로 한글서적이라고는 모두 없애버렸던 갑자사화와 무오사화의 주인공이다. 연산군은 금(金)씨 가문을 두려워하고 시기하여 고관직의 등용을 금지시키면서 ‘금씨’를 ‘김씨’로 하라 했다고 한다. 만약 ‘김씨’들이 ‘금씨’로 쓰고자 한다면 당연히 회복할 수 있는 성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은 사대주의자들에 의해서 막연하게 중국인으로 매도당했던 조상 소호금천씨와 그 후손들의 동이문자(文字 : 뜻글자)와 글자(契字 : 소리글자), 그리고 경천애인(敬天愛人 :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의 철학과 화락(和樂)충만했던 정통문화사(正通文化史)를 되찾고 재발견함으로서 ‘일찍이 동방의 등불이었던 코리아여! 다시 그 등불을 밝혀드는 날’ 21세기에 평화문화(平和文化)로서 태평양시대를 주도해 나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의 직계 후손들은 모두 하늘이나 봉황의 알 또는 황금 알로 표현하게 되었다. 고구려고분에 나타나는 3족오(다리가 3개있는 검은 새)나, 일본 나라(奈良)현 아스카(明日香)의 ‘기토라’고분벽화에 나타나는 주작(朱雀) 등 고대사회에서의 상상익조(想像益鳥)는 소위 봉조로 시작되는 ‘난생설’의 문화유산으로써 은연중에 그들은 봉황인 소호금천씨의 후손임을 표현하고 과시하는 방법으로 조상이 알에서 깨어났다는 신화로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삼족오로 알려지고 있는 고구려상징의 새가 있는데, 이 새는 봉황사상에 의해서 만들어진 원조봉황 태양조(太陽鳥)이다. 그럼으로 봉황 또는 태양조라고 하여야하나 벽화를 보고 검은색이므로 효도의 상징인 까마귀를 연상하며 쉽게 불려진 탓에 삼족오라는 별명이 붙여졌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태양을 살펴보면 흑점이 있고 태양조의 형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자료에 의하면 태양조는 태양의 자녀로서 수컷은 봉(鳳)이고 암컷은 황(凰)이라 하였는데, 가부장사회가 되면서부터는 암수를 가리지 않고 최고통치자의 상징을 봉황으로 나타낸 것이다.
고대사에서는 소호금천씨의 상징으로 봉황을 나타냈고 그 후예인 동이(東夷)족이 정통성과 권위로 그 상징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삼족봉황이 있으며, 공작과 합성하여 화려하게 치장되기도 하였고, 고구려의 고분벽화 또는 황실의 조형이나 그림에서 발견되고 있다.
다리의 수가 하나 더 달린 3개가 되는 것에 대해 사학자들은 다른 황제들보다도 더 높다는 으뜸의 상징으로 해석하고 있다. 왕 중 왕 또는 황제 중의 황제로서 최고의 권위를 과시한 것이 아니었겠느냐하는 것이지만, 사상사(思想史)에서는 우리겨레의 삼일사상 즉 삼위일체의 철학적 표현인 것으로도 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여인이 태양을 받아 성령으로 잉태를 하였다는 등의 성령잉태설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태양조의 황금 알에서 부화되는 혁거세와 고주몽 그리고 수로황과 금 알지의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에 해당된다.
특히 소호금천씨의 후손들은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황금을 예물로 전수해주는 풍습이 있었다.
황금덩어리를 증표로 전수하는 전통은 한(漢)나라의 의형(義兄)국가였던 휴저(休屠: 한나라고조 유방이 사지에 몰렸을 때 죽이지 않고 화해를 해 줌으로서 의형이 되었던 “모돈 왕”의 후손왕국이 한(漢)무제의 배신습격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아라비아를 지나서 팔레스타인에 이르는 망명객이 되었을 때를 기록하였던 사기(史記)에서도 볼 수가 있다. 그 기록에는 한(漢)무제가 습격하여 황금천인(天人·황금덩어리)을 전차로 아홉 병거(전투수레)나 가득 노획하였다는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망명생활을 하던 휴저왕족(休屠王族)의 개국을 위한 전통문화의식에 도 천부3인(황금 유향 몰약)의 이야기가 나타난다.
이는 동이족의 동방의례를 보임으로서 혈통과 신분과 역할을 확인해 준 것이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동방박사들을 보내어 황금덩어리 등 세 가지 예물을 바치도록 한 것은 고대조선의 초대 단군 왕검이 천부3인 전수로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공인 받은 것처럼 그가 그의 나라를 세워 만왕의 왕이 되리라는 선포를 한 것이다.
양천 허씨와 김해 허씨의 시조가 되는 두 아들에게 가락국의 김수로황은 그들이 소호금천씨의 후손임을 명심하도록 하기위하여 증표로서 황금덩어리를 각각 전수하였다는 이야기가 바로 서울특별시 양천구에 전해내려 오는 금포(김포)의 내력으로 전해오고 있다.
우리 풍습에 백일이나 돌잔치에 ‘금반지’를 선물하는 풍습의 뿌리도 이렇듯이 그 혈통을 인정해주는 연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풍습은 우리가 고대 소호금천씨의 나라와 뿌리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표시가 되어온 것이다. 하지만 현재로는 삼국유사 등 고대사서들을 통해서 김수로황의 직계후손인 김해 김씨만이 소호금천씨의 정통후예이며, 그 혈족임을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소위‘국조 단군’이라고 말하는 고대조선의 건국시조 보다도 약1200년 전의 조상이므로 배달겨레시대의 동이족 후예는 모두가 그의 후손인 것이다. 결국 족보상으로는 김수로황의 후손을 직계라 할 수 있으나, 사실상 우리민족의 대부분이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여씨춘추’ ‘고락’편의 기록에 의하면 순(舜:요순시대의 순임금)의 이야기가 나온다. 순의 아버지가 늙도록 아들을 보지 못하고 있었는때, 꿈에 공작을 닮은 닭이“자식을 점지해주러 왔다”고 나타났다. 그 후 아들을 낳았으니 순임금의 태몽 역시 봉황의 상징인 소호금천씨의 종손은 아니지만, 그 후예의 일족임을 설명하는 것이다. 순(舜)은 성공하여 소호금천씨의 제례를 담당하는 알백(제사장)의 직위까지 올랐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출생을 짐작할 수 있다.
‘초사’‘천문’편에 순(舜)임금의 형 오회가 순을 죽이려고 창고 위에 오르게 한 다음 불을 지른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갑자기 지붕에 불이 붙어 꼼짝없이 죽게 되었을 때에 순임금은 두 팔을 크게 벌리고 하늘을 향해서 “오- 하느님! 이 일을……”하며 기도하는 순간 입고 있던 옷에서 오색찬란한 새의 무늬가 드러나면서 하늘 높이 날아가 위기를 모면하고 살아났다는 것이다.
이 또한 순임금이 소호금천시의 후예 즉 봉황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대조선의 제14대 고불단제 통치42년 가을에 오색찬란한 큰 닭이 성의 동쪽에 있는 자촌의 집으로부터 나오니 사람마다 봉황이라고 하였다는 기록은 후에 고대조선의 제15代 단제가 된 대음의 일가가 소호금천씨의 후예임을 인증하는 예시로 작용하고 있다.
작위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소호금천씨에 대해서 비록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다하더라도 우리나라의 문화가 정통청구문화로 세습화 되어오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명나라의 신하로서 사대교린(事大交隣)주의를 폈던 이단(이성계)의 왕조조선시대를 제외하고는 황제의 권위를 용(용상)으로 나타내지 않았으며, 봉황(봉상)으로 그 권위를 나타냈었다.
고종이 청나라의 신하인 왕으로 있을 때까지는 용상이라는 권좌에 앉았으나, 사대교린주의를 배척하며 국호를「대한제국」이라고 개칭하면서 용상을 배제하고 봉황(봉상)으로 교체하였던 것이 이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대한민국」시대에 들어와서도 청와대의 대통령권좌를 용상으로 나타내지 않고 봉황상으로 장식하는 전통을 지켜오고 있는 것은 소호금천씨의 봉조사상에 기인한 것이다.
또한 벼슬을 일컬어 ‘작위(爵位)’라고 하는 것까지도 소호금천씨의 청구나라로부터 세습화된 우리의 전통청구문화인 것이다.
정부조직의 작위에 대해서는 공자가 논어를 통해 확인해 주고 있다. 그‘작위’의 어원을 동방군자지국인 청구나라 즉 봉황의 나라에 두고 있다. 새의 이름으로 벼슬을 임명하던 그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공자가 청구의 정부조직에 관한 법도를 노나라에 적용하였던 것이라고 했다. ‘작위(爵位)’의 ‘작(爵)’은 원래 새 작(雀=爵)으로 시작된 새의 이름을 총칭하는 작(雀)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 후에 새 작(雀:참새 작. 공작새 작. 별이름 작)을 봉할 작(雀=爵)으로 고쳐 쓰게 된 것이다.
그것은 공자(孔子)가 동방군자지국(東方君子之國)인 소호금천씨의 청구(靑丘)나라에 있었던 ‘새의 벼슬제도’를 본받아 노(盧)나라에 적용하면서 새 작(雀)자로 사용하였으나, 후세에 벼슬아치들이 권위주의를 의식하게 되면서 자기네들의 위상을 참새로부터 드높이고자 하여 새 작(雀)자를 벼슬이름 작(雀=爵)자로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자전(옥편)에 의하면 작(爵)자를 공(公-) 후(侯-) 백(伯-) 자(子-) 남(男-) 등의 벼슬에 봉직(奉職)한다는 뜻의 벼슬 작 또는 봉할 작(爵)자로 바꾸어 쓰게 된 것이다.
치우장군이 청구의 왕으로 있을 때는 황제(헌원)와 100번에 걸친 수많은 전쟁을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의 유적과 사료들은 옛 우리나라의 영토였던 산동성(지금은 중국) 일대에 엄청날 정도로 현존하고 있다.
치우장군은 후에 천황으로 등극하여 BC2707~2599년까지 ‘자오지 천황’을 역임하였음으로 더러는 치우천황이라고도 하는데, 반만년동안 우리민족의 수호신으로 여겨왔으며, 지난 “2002년 월드컵” 때는 ‘붉은 악마’로 응용되어 기억을 새롭게 한 바 있다.
치우천황은 어린시절부터 같은 문중출신의 종씨이며 친구인 황제(黃帝)헌원과 수없이 많은 전쟁놀이를 하면서 자랐다. 치우와 헌원은 장군이 되어서도 각기 다른 나라를 맡은 군왕으로서 전쟁을 벌인 적이 많았으나, 결국 황제(黃帝)헌원은 치우장군에게 굴복(史記에서는 거꾸로 표현)하였고, 치우장군이 배달제국의 제14대 자오지천황으로 추대되어 등극하면서부터는 헌원이 치우(자오지천황)의 심복이 되어 천황을 평생토록 모시면서 최고의 관리로 살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왜곡되어 잘 못 전해져 오는 것은 지나(중국의 본 이름, 영어로는 china)쪽의 역사조작 때문이다. 그 원인은 명나라 때에 지나(china)족의 고대역사가 미천한데다 자기네들의 선조에 대한 자료가 없었던 관계로 고대조선의 대륙에 있었던 역대국가들 중에서 강건했던 나라들을 골라 대부분을 지나(china)의 고대국가인 것처럼 만들었고, 당시 사람들에게는 덜 알려졌던 황제(黃帝)헌원을 챙겨서 자신들의 조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한(漢)나라의 역사를 살펴보면, 한나라를 건설한 유방(유방: 漢나라를 세운 임금)이 모돈의 나라(동이족 나라 중의 하나이며 한나라에 의해서 흉노족으로 매도됨)를 존중하며 110년간을 형님의 나라로 섬겨왔었음으로 한나라의 형님나라로 기록이 되어있다. 그런데 유철(漢무제의 시호)에 이르러서 배신을 하고 형님의 나라를 급습 하여 패망시킨 뒤, 무례한 산적이 족보를 도적질하여 양반이 되려는 것처럼(오늘날 미국이 아메리카를 양키역사로 조작하는 것처럼)역사를 왜곡한다. 한나라가 이제는 강대국이 되었으니 역사변신을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면서 조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고 곧이곧대로 기록을 하려하였던 사학가 사마천의 사관(史觀)적 지조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불알을 까버린 적이 있다고 전해온다.
그렇게 강대국이었던 한나라 역사에서도 황제 헌원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며 자오지천황(치우장군)의 신하였음을 부인하지 않았었다. 문제는 사대주의를 하겠다면서 애걸복걸하는 조선왕조의 종가역사 상납에 있었다. 이를 받아들인 명나라가 동이의 황제 헌원을 슬그머니 자신들의 상고조상으로 삼아버린 것이다. 명나라가 헌원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삼고는 황제헌원의 황(黃)자가 누루황(黃)자 황제(黃帝)가 아니라 왕들을 다스렸던 임금황(皇)자 황제(皇帝)였던 것처럼 격상을 해버렸다. 여기에 덧붙여 상고시대 소호금천씨의 전통에 의해서 황금을 왕의 상징으로 하였기 때문에 황(黃)자를 임금으로 보아 황제(黃帝)가 곧 황제(皇帝)라 했다. 무공을 조작하여 “황제 헌원이 악신 치우의 도전을 물리쳤다”는 등 저들은 엉터리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역사란 대단한 것이다. 아무리 일본제국주의가 철저하게 역사를 왜곡하고 조작하였으며 인멸까지 하였다하더라도 재발견을 할 수 있었듯이 황제 헌원이 지나(china)족의 상고조상이라고 우겨왔을지라도, 조작의 미완으로 더욱 웃기는 것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자기네 딴에는 철저하게 조작을 하였다 하더라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백제본기나 김유신 또는 비문 등 다른 여러 가지의 역사자료에는 아직도 “김유신은 소호금천씨, 헌원, 김수로의 후예로서 신라의 장군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우리민족의 국가인 고구려를 갑자기 중국에서 자기네 나라라고 우기는 것처럼, 당사국과 주변국의 모든 역사자료의 증거들을 그대로 놔둔 채 황제헌원 만을 쏙 빼서 지나족의 조상이라고 훔쳐갔으니 “황제 헌원은 소호금천씨의 후예이며, 휴저왕은 황제 헌원의 후손”이라는 기록과 한무제가 침략했던 휴저왕국을 “흉노족 휴저왕조를 점령”했다고 기록한 사기(漢나라의 역사)의 모순은 어찌할 수가 없이 되어버렸다. 수 없이 터져 나오는 기록의 모순을 감당해낼 수 없는 웃음거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결국은 도적이 훔친 족보로 행세를 오래 하다보니 이야기가 거꾸로 발전하게 되었고 상고사가 잠시 흐트러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북경에서는 한나라 한(漢)자를 도적놈(漢寇)한 또는 치한(癡漢)한, 불한당(不汗黨)한으로 사용하면서 외국인이 북경(北京)에서 더러운 짓을 하다 걸리면 여권을 빼앗아 한나라 한(漢)자가 들어가는 붉은 도장을 찍어주고 있다. 다시는 재입국을 허락하지 않는 전통이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는 곳이 바로 북경이라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에서는 정도전을 비롯한 진의귀 김거두 등 지성인이라는 유학자들이 이성계의 사대교린주의를 주창하며 황국역사(皇國歷史)를 왜곡하여 왕조역사(王朝歷史)로 만들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까지 명나라의 신하국가에 걸맞도록 개작을 한 탓에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모화사상의 습성에 젖어있다. 한나라 한(漢)의 격을 높이다 보니 황제 헌원은 중국의 시조로서 존경을 받아야하고, 치우천황은 동이(東夷)의 오랑캐 족이라 하여 경멸하는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있음을 본다.
여기에서 확인되는 것은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중원대륙의 뿌리깊은 정서가 반한적(反漢的)이다. 1만년의 역사를 가진 유인시대와 상고한국(桓國)시대와 동이의 배달겨레시대, 고대조선과 백제 고구려 신라가 청나라의 영토로 이어졌다는 것을 과시하는 정서가 강호의 북쪽에는 아직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치우천황은 소호금천씨의 후손이다. 배달나라의 수도를 옛 소호금천씨 나라의 도읍지였던 청구(산동성)로 천도하였고, 구리와 철을 합금하는 야금술을 발달시켜 세계사에 빛나는 고대의 철기과학문명을 이루었다.
기록에 의하면 “치우의 머리는 구리요, 이마는 철이고, 몸은 무쇠로 되어 있는 데다 모래를 먹는데, 5구의 장대와 창, 칼, 다연발 활 틀 등을 마구 만들어내니 천하가 감히 두려워하지 않았겠느냐? 치우는 옛 천자의 호니라”하였다.
고대철기문화의 문을 활짝 연 치우천황의 키가 8척(2m40㎝)이라고 전한다. 철기투구를 쓰고 철기갑옷으로 완전 무장한 8척 장수를 상상해 보라. 그 전통이 가락국에 이어져 왔음을 오늘날 가야고분의 유물로 확인하게 된다. 그동안 전설처럼 알려졌던 대궁(大弓)이 가야고분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대궁은 8척 장수라야 쏠 수 있는 큰 활이며, 大+弓=夷라하여 孔子는 “인내심이 많고 어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가르쳤다. 옥편에는 “어질仁”의 古字다. 모화사상의 사대교린주의자들은 “오랑캐이”라고도 하고 있다.) 사람의 철갑뿐 아니라 철기로 만든 말의 얼굴가리개와 철기로 만든 말의 몸통가리개 등은 1500년전 가락국이외의 어느 나라 유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단한 철기문화유물이라고 할 수 있다.
붉은 악마로 사용된 치우천황의 도안은 고대 유물에서 수없이 발굴되었던 것이며, 상(商)나라의 청동기로 만든 도철문, 신라의 녹유 귀면와, 고구려의 망와 도철문, 백제의 벽돌로 만든 도철문 등도 보이며, 근래의 것으로는 창경궁의 해치와 평양의 단군릉에 ‘치우’석상이 있고, 국방부의 전쟁기념관은 현관의 천정에 디자인되었다. 그리고 지하철 3호선 안국역 역사의 벽에는 안국(나라의 평안)을 지켜주시라고 여러 곳에 디자인되어 있기도 한다. 치우천왕의 동상이나 석상은 백제 황제들의 능과 함께 중공의 양자강과 황하의 하류지방 즉 백제와 신라의 옛 영토였던 곳을 중심으로 많이 남아 있다. 목상(木像:장승)으로는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볼 수 있는 수호신 천하대장군으로 서 있음을 알아야 한다.
김수로황이 금(金)씨 직계 후예
삼황오제(三皇五帝)란 사기(史記)의 오제(五帝)편과 오제본기(五帝本紀)에 의하면 상고신화시대의 ①천황 태호복희씨 ②지황 황제 헌원씨 ③인황 염제 신농씨라는 신화 주인공 세분과 초기역사시대의 대표적인 제왕으로써 ①소호(少昊)임금 금천씨(金天氏). ②전욱임금 고양씨(高陽氏). ③곡임금 고신씨(高辛氏). ④요(堯)임금 방훈씨(放勳氏). ⑤순(舜)임금 중화씨(重華氏)라는 어진 제왕 다섯 분을 선정해서 말한다.
소호금천씨로부터의 혈통적 직계제왕(諸王) 계보는 후손들에게 대대로 황금덩어리를 전수하여주는 풍속이 있었다.(동방박사가 아기예수에게 황금예물을 주듯 후손임을 증명하는 증표인 동시에 제왕이 되라는 승인 표시) 한나라 때, 휴저왕의 태자로서 한 무제에게 인질로 잡혀갔었으며 가락국 김수로황제(金首露皇帝)의 현조(玄祖)가 되는 일제를 금씨(金氏)라 함으로써 그 후손들의 나라인 가야와 신라의 주류가 되는 성씨로서의 금씨(金氏)와 사성(賜姓)을 받은 후 다른 성씨로서 자자손손 살아가는 후예들이 많다.
더구나 소호 금천씨의 직계로 태여 나서 금씨(金氏)를 사용하지 않은 성씨가 많은데, 그 이유는 대대로 내려오는 동안에 자손들에게 이름을 지어주기도 하지만, 성씨를 주면서 세계(世系)를 이루도록 하는 경우가 있어서 성씨를 사성(賜姓)받은 후손들은 그 성씨를 사용하게 됨으로서 금씨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십여 년 전부터 소위 소호 금천씨의 직계로서 종가성씨임을 자랑하여 왔던 가락김씨(김해김씨+허씨+인천이씨를 합쳐서 가락김씨로 부름)의 족보를 보면서, 이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사명감을 가지고 종친들의 모임이 있을 때마다 종사강의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문중의 어른들은 예상외로 “김수로왕이 시조이시고, 그 위의 조상은 없다는 것”이었다.
“약2000년 전에 하늘로부터 자주색 줄을 타고 붉은 단이 붙은 보자기에 싸여 금합으로 내려왔는데, 그 속에는 해처럼 둥근 황금색 알이 여섯 개나 들어있었다. 이튿 날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금합을 열어보니 모두 알에서 깨어나 용모가 준수함으로 사람마다 절을 하고 하례를 하며 극진히 공경하였다. 그는 열 며칠 만에 자라서 키가 9척이나 되었으며 모두 여섯 개의 알에서 나온 분들이 여섯 개의 가락국을 각각 다스리는 임금들이 되었다. 그 중 첫 번째 알에서 나와 금관중국의 황제가 된 분이 바로 김수로황제이시다”라고만 믿고 있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수로황이 있는 금관가야국을 중국(中國)이라 했는데 이는 여섯 개의 가락국 모두를 통치하는 중심국가(中心 國家)라는 뜻을 담고 있다.
설사 그것이 신화이고 역사가 아니라하더라도 이미 머리에 깊이 새겨진 인식을 바꾼다는 것은 개개인의 자신들에게 있어서는 혁명이라고 해야 할 만큼 어려운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 사회적 인식에서 기존의 관습이나 관념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하는 것을 체험한 바 있다.
동이족의 원조 소호금천씨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역사중심의 종사강의를 하다보면, 종친회의 임원들로부터 더러는 주의를 받은 적도 있다. 그래서 춘제를 맞이하여 김해에 갈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사람들에게 ‘가락국 태조릉 숭선전비문’을 꼭 읽게 한다. 까만 대리석에 음각된 커다란 ‘숭선전비문’을 보면, 3줄까지는 이 비문을 새기게 된 사연이 있고, 네번째 줄로서 본문이 시작되는데 그 네 번째의 줄에는‘탄강하신 가락국시조 수로왕은 소호금천씨지후예(少昊金天氏之後)’라고 분명히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비문을 확인시켜줌으로서 한 사람씩 이해의 폭을 넓혀가곤 했었다.
금(金)씨란 본시 황금(Gold)의 상징이었으며, 황금으로 빚은 황금덩어리는 황금불상(黃金佛像), 금불(金佛), 금천(金天) 즉 하느님(God)이었고, 금씨(金氏)는 제왕(帝王)족이었고, 제왕 족은 금(金)덩어리를 후손에게 전수하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금(金)을 전수받은 이는 “임금(金)”의 금(金)으로 불러져왔었으며, 임금이 존재하는 수도를 금성(金城)이라 했다.
예로부터 지나(支那:China)족 들은 금(金)을 금이나 김으로 발음하지를 못하고 ‘징’과 ‘낑’ 사잇소리를 내곤했다 한나라와 신제국시대에 통해 동방문화를 접하게 되었던 영어문화권에서는 금(金)을 King(징 또는 낑·킹)으로 받아들이게 되는데, 결국 왕권의 상징은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의 금(金)에서 킹(King)으로 보급되어 전 세계의 모든 왕(임금)이 킹(金·King)으로 표준화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이라고 본다.
따라서 영어문화권에서는 아시아 동북부민족을 퉁구스(Tungus)족이라고 부른다. 이는 동호(東胡:퉁후)족 즉 동이족인데도 지나(支那 : China)족들의 혀가 돌아가질 않아서 ‘동호’를 ‘퉁후’라고 발음했기 때문에 영어문화권에서는 퉁구스(東胡·퉁후·Tungus)로 전해졌었다. 금(金) 역시 금천(金天·Gold·God·하느님)과 황금(Gold) 그리고 임금(金·King·왕)과 김(King)씨로 자리 잡은 지 오래되었다.
지금 우리는 왕조 조선 때문에 금(金)씨를 김씨라 하고, 영문표기를 Kim으로 하고는 있지만, 유럽제국과 남미제국 그리고 쿠바에 사는 금씨의 누대(累代) 이민후세 종친들은 김씨(金氏)를 King으로 불러주기 때문에 King으로 사용하는 후손들도 있다. 이미 자신들의 혈통인 성씨를 King(金)으로 확정하여 자손대대로 전수하는 후손들도 아주 많다는 사실을 확인 한 바 있다.
누가 소호금천씨의 후예를 감히 도깨비라고 했던가? 소호금천씨의 청구(靑丘)나라는 왕검단제(檀君任儉)의 조선(古代朝鮮)을 거쳐 은(殷)나라 주(周)나라 춘추시대(春秋時代)의 담국(啖國)과 휴저(休屠)왕국 그리고 해모수의 고구려에 이어지는 4국(고구려. 가야. 신라. 백제)시대를 거쳐 남북조(신라. 발해)시대 로 이어진다. 그 후 왕건의 고려에 이르기까지 제왕 또는 천황의 나라로 이어져 왔다. 국왕이 ‘폐하’라는 호칭을 받아왔었던 유구한 역사의 동방군자국(東方君子之國) 계보(系譜)의 조국(東夷의 나라 KOREA)이다. 옛 우리땅 요동을 되찾기 위해 출정하였던 우군도통사(右軍都統使) 이단(李旦)장군의 위화도회군이라는 착란(錯亂)이 역사의 대혼란을 가져온 것이다.
사대교린주의의 나약한 강헌(康獻)의 왕조(皇朝에서 王朝로 墜落)조선으로 전락해버린것이다. 조선시대는 역사상 가장 저조한 국위수준에서 연명해왔다. 소위 “전하시대(殿下時代)”의 수모를 겪으면서 명(明)과 청(靑) 그리고 일제(日本帝國主義)의 압제를 당했던 근세 500 여 년 동안, 우리국위의 자존심은 처참하게 찢기고 또 왜곡당해 왔다.
그래서 붉은 악마로 전래될 만큼 상대방에게 오금을 저리게 하였던 카리스마의 수호신(守護神)도 한 때는 장난스러운 도깨비로 비하되어 왔었음을 뉘우쳐야 할 것이다.
이제 동이(東夷)의 역사가 회복되고 헌원(黃帝)의 아들로 조작했던 소호금천씨의 위치가 제자리를 찾게 됨으로서 소호금천씨의 후예는 도깨비가 아니라 “붉은 악마” 즉 천하무적의 강력한 치우천황(慈烏支天皇)의 수호천사로 부활해야 한다.
미래를 향해 힘차게 뻗어나가고, 역사적 고토(古土)를 향한 권토중래의 기상이 다시 대륙으로 뻗어나가서 오늘날의 동북공정뿐 아니라, 왕조조선(朝鮮王朝)과 명(明)나라 사이에서 넘겨주고 왜곡(歪曲)하였던 중세의 동북공정까지도 되돌리게 될 것이다. (上代의 皇國歷史를 넘겨주고, 명나라의 신하나라에 걸맞도록 삼국사기 등을 개작했던 사건이 있었음. 지금의 삼국사기는 김부식 저서로서의 가치를 상실한 상태다)
“하느님은 인간을 자식으로 낳으셨으니 사람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시고, 사람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형상은 당연히 자신을 닮은 아들의 형상과 같을 것이다. 이에 변하지 않는 황금덩어리로 부자의 형상은 물론 부자지간의 불변인연(不變因緣)을 느끼도록 한다면 이는 곧 하느님의 형상을 상상하여 마음으로 모시는 것을 잊지 않게 하는 증표가 될 것이다.” 이토록 큰 의미를 부여하였던 소호 금천씨의 철학은 그의 후예들을 통하여 지구촌 곳곳으로 뻗어나가 있다. 어느새 5500여 년의 세월을 자자손손 이어오면서 인류문화의 정통사상(正通思想)과 문명세계의 기조가 되었다는 것은 학문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따라서 고구려와 고구려에서 분국 된 백제, 가야제국과 가야의 혈족이었던 신라, 그리고 신라후손의 나라 청(靑)나라와 4국(고구려 가야 백제 신라)의 사랑을 고루 받으면서 성장하고 개화되었던 일본에 이르기까지 소호금천씨의 후예는 번창하였다. 오늘날 태평양시대의 동북아 3국(남북한. 중국. 일본)을 엮는 혈연적 연대를 이루고 있다. 이미 지구촌 곳곳에 뿌리내려진 문화적 기반의 공감대를 통해서 문명의 충돌 없이 인류평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청구의 세계(지상에 있으나 전쟁과 슬픔이 없으며 늘 보람이 새로워서 하늘나라로 불려졌다는 소호금천씨의 봉황나라)’를 창건하게 될 것이다.
조선왕조, 동이문자를 명나라 글자로 상납…漢文으로 왜곡
한문은 한글있어야 완전…간체 30년 지나면 불편해질 것
실로 고대 아시아대륙의 역사와 문화의 중심에 우뚝 섰던 유일무이한 ‘배달겨레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서는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저절로 느끼기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상고시대 당시에서는 한(漢)나라의 뿌리는 물론 한족(漢族)의 존재도 찾을 수가 없었고, 앙소(仰韶)문화유적과 용산(龍山)문화유적 그리고 홍산(紅山)문화유적지까지는 동이의 삼황오제유적지임이 확인되었기 때문에 소위 지나(CHINA)족으로 인식되는 상대(上代)는 주(周)나라말기부터 춘추전국시대에 남만족계에서 등장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음으로 한문구(大汶口)문명과도 관련이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漢)나라로부터 그들의 뿌리를 비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한나라는 불과 2200년 전(BC206년)에 농민반란으로 인해서 스스로 무너져버렸던 진시황조의 강역이 무주공산으로 되자 어부지리로 등장하게 된 유방의 야만세력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 한(漢)나라는 문자가 없었으므로 당시 그 지방에 통용되던 동이문자 즉 한문(漢文)이 아닌 한문(桓文:배달나라 문자)을 차용하여 썼을 뿐이라고 사기(史記)를 통해서 자인하고 있는데, 이는 금세기 최강국을 과시하는 미국이 문자가 없어서 영어와 불어를 차용하여 자기네 것인 냥 쓰고 있는 것과 같다는 표현을 한 것이다.
생각해 보자! 5000년이나 된 동이(東夷)의 문자 한문(桓文)을 그보다도 약2800년 후에 생겨 난 신생국가 한(漢)나라가 빌려 썼다는 것은 당연한 사연이지 않는가? 그러나 이러한 문자를 고리황실을 찬탈한 이단의 조선왕조가 명나라의 신하나라로 전락하면서, 뿌리 깊은 동방군자나라 고리(高麗)의 동이문자를 명(明)나라에 ‘진서(眞書)’라며 상납(上納)하게 되었으니, 마치 ‘한나라 한(漢)의 문자’인 것처럼 한문(漢文)으로 바꾸어 왜곡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되레 한문(역사를 )인 것처럼 한문(韓文)을 한문(漢文)으로 인식하고 있는 실정이 억울하여 다시 한문(桓文) 또는 한문(韓文)으로 명명하고자 국회에 입법제의를 준비하는 중이다.<韓文에 대해서는 부록에서 상세히 다룰 계획이다.>
이와 같이 조선왕조의 자기 비하는 유명조선의 사대주의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니, 황조를 왕조로, 태자를 세자로, 황후를 왕비로, 짐은 과인으로 낮추어 부르기 시작하였던 것도, 이긴 전쟁은 비긴 것으로 비긴 전쟁은 진 것으로 진 전쟁은 항거하다 벌 받은 것으로 개작, 조공을 받았던 것은 모조리 조공을 바친 것으로 뒤집어서 조작해 놓았던 것까지도 천조(天朝)를 섬기는 왕조(王朝)의 시작에서 비롯되었던 것임이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지금에 와서는 공개된 비밀에 속하면서 500년의 왕조조선사에 누가 될까봐서 쉬쉬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역사 학자로써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면 학자로서의 자질에 문제가 있는 것이고, 알면서도 모른 체 비켜가려고만 한다면 이는 학자로서의 양심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문자(文字:韓文=한문)는 주었어도 글자(契字:韓契=한글)는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한문은 한글이 있어야만 완전하게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고 한글은 한문이 있어야만 문명사회로서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에 문자와 글자를 분리시키는 것은 미래를 망각하고 마구잡이로 사는 데까지 살아보자는 자포자기사회관에서 나타나는 현상인 것이다. 그동안 한문폐지(韓文閉止) 또는 한글전용(韓契全用)을 주장했던 자들은 친일파(親日派) 주시경이의 오류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한 자들이거나 맹목적인 추종파들과 민족문화를 모르는 자가 한글의 뿌리와 원형을 망각하고 국수주의적 역정을 내는 경우가 허다했음을 보았다.
지금도 중국인들이 한문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한글을 모르기 때문이고, 더구나 일본이 한문을 백제의 이두(吏讀)식으로 간체를 개발하여 가다가나(カタカナ)를 만들었듯이 간체를 개발하였지만, 앞으로 30년만 지나면 오히려 더 불편해질 것이라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다시 원형의 한문을 배워야 한다는 고민에 빠져있는 바와 같다.<한글(韓契)에 대해서도 부록에서 따로 다루기로 하겠음>
오늘날에도 강대국가에 의존하여 사대주의를 계속하여야 한다며 미국의 눈치를 살피는 정상배들이 있어서 ‘자주국방’라는 말이나 동북아의 ‘균형자’라는 말만 나오면 “안보를 위협하는 말”이라면서 “미국의 비위를 그슬리게 하는 용어사용을 하는 경솔한 지도자”라고 윽박지르는 세력도 이와 마찬가지이고, “반도(半島)”라는 말이 조국을 비하시키는 용어이고 본도(本島)에 예속(隸屬)되는 일제신조어(일본이 조선정복을 기획했던 정한론(征韓論)에서 만들어 낸 단어)로서 일본의 식민지라는 법정용어인데도 정치인들이 즐겨 쓰는 용어중의 하나인 ‘한반도(韓半島)’가 되어있는 것이라든지, 반도사관(半島史觀)이 망국사관으로서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여전히 ‘반도’라는 용어는 부끄럼 없이 쓰는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가? 라고 묻고 싶다.
일제강점기는 35년으로 끝났지만, 정치인들은 일제 36년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한다. 광복된 날 1945년 8월 15일에서 나라 빼앗긴 날 1910년 7월 29일을 빼면 35년에서도 14일이나 모자라는 것이 분명한데, 일본이 ‘식민통치 36년’이라고 하니까 우리도 그냥 36년으로 맞추자는 지식인들 때문에 온 국민이 치욕의 기간을 1년 더 늘려서 일제36년을 부끄럼 없이 쓰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더 심각한 문제는 치욕의 35년보다도 훨씬 긴 광복이후 6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를 왜곡된 채로 가르치는 왜식역사교육의 대한민국정부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 것인가? 맨날 정상배들의 싸움구경만 하다가 세월을 보냈다는 변명이 합당한가하는 것이다.
필자가 지하철공사와 2년 반 동안 승강이를 벌였던 일이 있었다. 삼청동 103호(청와대 동쪽 문)에 살 때로 기억된다. 주로 안국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이용하였다. 홈에 들어서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열차가 들어오는 것을 안내하는 방송이 어김없이 나왔다.
‘벨소리~ 구파발, 구파발행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두리번거리면서 안전선으로 느껴지는 노란색 라인을 확인하고는 한 걸음 밖으로 나가려는데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밖으로 물러나지 않고 내 상식대로 한 걸음을 안으로 들어섰다가 열차의 문이 열리면 탔다. 몇 개월이 지나도 방송 문안이 시정되지 않은 것이다. 하루는 역무원에게 항의를 했다.
“저기 노란 선이 안전선이지요?” “예 그렇습니다” “그럼 안전선 안쪽은 어디를 말합니까?”하고 물었더니 “왜 물으십니까? 그것도 몰라요? 지금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는 이 쪽이 안쪽 아니요?”하면서 답답하다는 심산으로 손가락질로 홈을 가르쳐 보이면서 열을 냈다. “예 이쪽이 안쪽 맞지요?” “암 그렇지요” 필자도 손으로 철길을 향해 보이면서 “그런데 왜 안전선 안으로 들어 오라는 게 아니고 철길 쪽인 밖으로 한 걸음 물러가라는 방송을 합니까?”라고 되물었더니, 역무원은 주춤하면서 “당신보다 다 똑똑한 전문가들이 검토하고 결정해서 안내 방송하는 것이니 그렇게 알면 되지 뭘, 그런 것을 가지고 꼬치꼬치 따지십니까? 내 원 참-!” 귀찮다는 듯이 눈을 흘기고는 가버렸다.
마침 벽걸이 민원 함을 찾아내고 거기에서 엽서를 꺼내어 ‘안내방송의 문안시정’을 요구하는 메모를 하여 넣었다.
7개월이 지났다. 방송은 시정되지 않고 여전히 안전선 밖으로 내모는 실정이었는데 다행히 ‘KBS 동서남북’이던가? 하는 프로에 필자가 초청되어 역사연구에 관한 대담방송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지하철의 안내방송을 예로 들게 되었다. 앵커가 “그렇게 왜곡된 역사에 대해서 왜 국민들은 모르고 있었을까요?”라고 질문을 했을 때였다.
필자는 “사학자들이 역사를 몰라서 밝히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교과서개정 심의위원들이나 현직교수로써 대학에서 제자를 양성하는 학자들의 대부분이 일제의 하수노릇을 하였던 스승으로부터 전수한 탐구방법과 주지된 내용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어지는 과정이었다면, 다수의 국민들은 격변하는 대한민국에 살면서 ‘일제강점기’로부터 ‘광복’과 ‘미군정시대’ 그리고 ‘6·25’와 ‘4·19’와 ‘5·16’을 겪었으며, 제3·4·5·6·7공화국으로 넘어오는 50여년 동안 헌법을 아홉번이나 바꿔가면서 실로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정신없이 사느라 정신없는 역사에는 무감각하였지 않았겠습니까? 이를테면 지하철의 안내방송이 ‘열차가 들어오고 있사오니 손님 여러분께서는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물러나 주십시오.’했을 때 아무런 이의나 저항도 없이 자연스럽게 ‘안전선 안으로 한 걸음 물러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 하 하 듣고 보니 그렇군요. 저도 지하철을 이용하면서 흔히 듣던 방송입니다만, 선생님께서 지적해 주시는 이 시간까지도 몰랐습니다. 이 방송을 통해서 지하철공사는 재검토해 주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라고 한 적이 있다.
그동안 안전선 밖으로 한 걸음 나가라는 살인명령에도 역으로 받아드리면서 용케도 잘 살아가는 지혜가 있는 서울시민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지하철공사에서 필자의 집으로 전화가 왔고 “한글학회와 어문학회를 통하여 재검토를 하고 시민에게 불편이 없도록 시정하여 방송을 하도록 하겠다.”는 답을 받았고 “방송문안을 확정한 후에는 아나운서를 택하여 녹음을 하고 모든 역사에 테이프를 배포하자면 6개월쯤 걸립니다. 그 동안만 양해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필자는 요즘 시정된 지하철역의 안내방송을 들으면서 우리의 역사교과서도 이렇게 시정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역사를 신화화하려는 권위주의도 말고, 역사를 비하시키려는 사대주의도 말고, 역사는 역사 그대로 이해하면서 오늘 우리의 생활이 미래에는 역사로 남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여 옷깃을 여미는 마음자세로 살아가는 사회로 정착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걸어본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도 그로부터 근거하여 고구려와 신라 가야 등 우리겨레의 혈맥(血脈)이 이어져왔다고 서술되어있고 실제로 우리민족 역사에서는 혈통적으로 조상이 되고, 문화적으로 근간이 되어왔던 소중한 존재의 인물이 바로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인 것이다.
흔히 단군을 국조라고 하는데, 그것은 난센스다. 단군은 국조의 이름이 아니다. 단군이란 조선을 창건한 ‘왕검’의 리더멤버십으로서의 직책이지 결코 인격이 아니다. 단군(壇君)이라는 건 ‘제사장 겸 임금’이라는 직책이었을 뿐이지 ‘단군’이라는 인물은 없었다. 고대조선시대에 신정정치를 하면서 통치자의 직책으로서 47대에 거쳐 대대로 단군직책을 지켜 내려왔다. 따라서 국조는 조선을 세운 ‘왕검 단군’이라고 하거나 초대단군이었던 ‘왕검’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BC2333년에 건국한 고대조선보다도 소호금천씨가 세웠다는 지상천국이라는 봉황의 나라(地上天國 鳳凰之國) 청구(靑丘)는 BC 3500년경에 건국된 나라다. 공자가 소위 “옛날에 동방군자의 나라가 있었다.”라고 하였던 그 나라다. 그러므로 고대조선(古代朝鮮) 왜식사학에서는 ‘고대조선’을 고조선이라고 명명하였으나 ‘고조선’이라는 말은 실존국가가 아니라는 뜻으로 신화화하여 가명으로 비하시킨 것을 청구라고 부르기도 했다. 중세에는 신라를 청구라고 부르기도 하였고, 고려까지도 청구라고 불렸던 것은 청구나라로부터 맥을 이어왔다는 의식에서 생겨난 것이다.
우리의 전통문물역사에서 정악의 원류를 ‘청구악장’이라 하고, 해학을 ‘청구야담’이라하며, 전래시조집을 ‘청구영언’ 또는 예로부터 내려오던 가요들을 ‘청구단곡’이라 해오던 사례들이 우리의 전통과 생활 속에는 지금도 소호금천씨의 ‘청구’라는 나라의 숨결이 흐르고 있다는 의미를 실감케 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입구마다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이 버티고 서서 지켜주는 것은 자오지천황의 치우(붉은 악마로 오용되고 있음)시절을 유래한 것이다. 그보다 더 높고 신령스러운 곳에 솟대를 세우고 그 위에 봉황을 상징하는 새를 올려놓았던 유래는 봉조(鳳朝) 즉 소호금천씨 나라의 맥을 이어온 문화이므로 소도가치의 전통적의미가 살아있음을 실감케 하는 것이다.
다만 유명조선의 사대교린시대(조선왕조)에서만 “이 나라는 이씨의 나라”라는 소극적 인식에 의하여 소국으로 전락하였고 그런 조정의 소아적처지에서는 청구나라의 전통적인 자긍문화를 배제하고 모화사상으로 명나라문물을 흉내 내기에 급급하였다. 따라서 자랑스러운 역사문화의 조국을 통칭하여 ‘청구’라는 이름을 사용한다면 ‘동방의 등불’ ‘동방의 세계(동방근국 즉 아시아)’라는 개념으로 부각되기 때문에 명나라의 눈치를 살피며 피해의식으로 긴장하던 조선왕조의 눈에는 큰일 날 사태이며 “금씨(金氏)의 황조가 우려되느니……하는” 우려를 하여 금기시했던 것도 백성들로부터 소호금천씨를 멀어지게 만들었던 여러 요소 중의 하나가 되었다.
요즘은 모르는 이들은 역사를 몰라서 그런다 치더라도 역사를 알고 있다는 국사학계마저도 “그분은 워낙 훌륭하고 중국에서도 뿌리내린 신화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중국인으로 보아야하며 지금에 와서 우리조상이라고 했다가는 중국을 자극하게 될까 싶다”는 이유로 챙기지 못하고 눈치 보는 꼴을 보면 아연질색이다. 고금의 민족사 중에서 가장 부끄러웠던 왕조조선의 사대교린주의가 유명조선(有名朝鮮)이라는 명제에 깔려 명나라의 눈치를 살피다가 종래에는 슬그머니 조상까지 명나라에 넘겨주고 만 꼴이다. 조선왕조의 소아적인 사고의 피해는 너무나 컸다.
왕조는 또 무식하고 포악한 군주를 만나자 무오사화(AD1498)를 일으켰고 이를 계기로 소호금천씨의 직계후손임을 과시하였던 정명의 인사들을 경계하여 개국공신까지 몰살시켰는가 하면, 성씨의 발음까지도 금씨(金氏)에서 김씨(金氏)로 부르도록 하는 개음(改音)칙령을 내렸다. 급기야는 학문의 요람지인 사간원을 폐지시키고 사림(史林)들을 대부분 학살했을 뿐만 아니라 봉황의 나라와 서민문화의 전통은 물론 한글서적과 한글자료들까지도 모두 불태워버렸다. 한글을 폐지시켜 사용도 못하게 함으로서 대중문화의 맥을 끊어 우매한 백성으로 길 들이려했던 일이 있었다. 그런 이후로 일반인들에게는 자연스럽게 소호금천씨는 명나라의 어른이시겠거니 하게 되었고 우리역사학계에서는 반도사관에 의해서 중국역사의 인물로 매도해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정신문화연구회가 AD1990년대에 발행한 민족대백과사전에서도 왜식사학의 힘에 밀려 솟대와 봉황과 샛별과 평화와 백의민족의 원인자인 소호금천씨를 우리역사의 인물에서 도태시키고야 말았으니 이 무슨 굴욕의 역사인가.
이에 겨레의 뿌리가 되는 선조 소호금천씨로부터 이어지는 다양한 역사문화자료를 재발견하게 함으로서 차세대를 위한 민족중흥의 사명을 갖고 한국판 르네상스를 부활시켜 민족사관의 정립과 자긍심이 생성되는 살아 숨쉬는 역사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함에 목적이 있다.
- 前記 晉書에서
동방군자의 나라에만 살면서 가끔은 사해(四海)의 바깥으로 순행을 하였다는 봉황에 대해서 공자가 말하기를 “난세에는 봉황이 나타나지 않는다.”라고 한 것과 “봉황이 나타나면 천하가 태평해진다.”라고 한 것은 소호금천씨는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훌륭한 지도자이며 어진통치자이고 태양의 아들이신 고귀한 존재의 구세주라는 뜻인데 오색조라고도 하고 황조(皇鳥) 또는 난조(鸞鳥)와 태양조(太陽鳥)로도 표현하면서 부분적으로는 기러기, 기린, 물고기, 거북이, 공작의 형상을 따서 상상력을 동원하고 흠모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소호금천씨가 인류 최초로 하느님을 규명하고 공경하였으며, 사람은 누구나 다 하느님이신 한 아버지의 핏줄로부터 자자손손이 이어져 온 자녀이므로 위로는 부모에게 정성과 공경으로 효도를 할 것이며, 서로 간에는 사랑으로 우애하여야 한다는 사랑의 기조(基調:key-note) 위에서 청구(靑丘)나라를 건설한 분이라고 했다. 인류 최초로 제천금인 즉 ‘하느님을 상징하는 황금덩어리로 간직하고 하느님을 숭배하였기 때문에 이웃나라 사람들이 소호금천씨(少昊金天氏)라 불렀으며 그가 세운 청구나라를 ‘지상에 건설된 하늘나라’라고 일컬었다는 기록을 한 것이다.
동이(東夷=東胡=tungus)에 대한 상고시대기록(金文, 胛骨文, 牛骨文)과 고대조선의 단군세기(世紀:古代朝鮮의 歷史書)를 상고하여보면, 하느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너희는 너희를 낳아주신 어버이가 계시지 않느냐? 사람은 누구나 어버이를 통해서 태어났느니라. 또 어버이를 낳아주신 할아버지 내외분이 계셨고, 할아버지 내외분을 각각 낳아주신 상 할아버지 상 할머니가 계셨느니라. 그렇게 끝까지 거슬러서 올라가다 보면 지극히 높으신 한 할아버지가 계시는데 그분이 곧 하느님이시니라. 그럼으로 지극히 높으신 한 할아버지 곧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신앙이며, 돌아가신 조상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제사이고, 살아 계신 어버이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바로 효도니라”라고 했다.
따라서 하느님께 제사를 올리기 위하여 쌓은 제단을 알단(閼壇:金壇:altar:天壇)이라 하였고, 하느님의 아들이 이 땅에 강림하였다는 곳, 즉 시조가 황금(알)으로 나타난 곳을 ‘알터’(altar)라고 했으며 성스러운 땅(聖地)이라 했다. 이것이 유래하여 하느님의 아들을 황금의 전수로 상징하게 되었던 것이며, 황금의 알이 현신 한 곳을 ‘알 터’(altar)라고 했는데, 그 ‘알 터’가 있는 산을 알산(金山:금산:altai:알 터가 있는 산)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동서양의 모든 종교가 성전의 단(壇)을 알단(薛壇) 또는 알터(altar:제단)라고 하게 되었던 어원인 것이다.
그럼으로 알(all)은 생명이며 모든 것을 하나로 또는 통째로 아우르면서 오직 하나에 이른다는 것이고, 알은 얼이며 혼을 의미하기 때문에 홍자옥편(弘字玉篇)에서도 알(?)자를 찾아보면 “알(薛)과 얼(義)은 동의어(同義語)이며 동음어(同音語)이고 의(義)라고 한다.”하였음을 확인하게 된다. 또 의(義)는 얼이라 발음하고 얼은 알(薛)과 의(義)로 표기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정통풍속에서는 ‘얼’과 ‘알’이 같은 뜻 또는 같은 음으로 직통하는 언어였으며 의(義)로 사용되는 말이었으니, “얼싸안고 사는 것은 곧 알을 안고 사는 것이고, 알을 안고 사는 것은 하느님을 마음속에 모시고 사는 것”인 바, 얼싸안은 사람의 몸은 하느님을 모시는 제단이 된다는 것임으로 얼싸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랑으로 가득한 선한 사람이며, 얼빠진 사람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즉 혼(넋)이 없는 사람인 반면에 ‘알싸’‘앎’‘아멘’‘응’‘음’‘오음’등은 그러한 이치를 알아 모신다는 동의어로서 깨달음을 표현하는 대답으로 통했던 것이다.
우리민족의 전통 민요에 “얼 얼러 상사 두야”라든지 “늴리리야” 또는 “아리랑” “니나노”등은 민족의 정체성이 스며있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심이 소호금천씨로부터 전수 된 흥에서 울어나는 경천애인(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가락에서 진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말에서 신나게 하는 것이나 신명, 신기, 신심, 신바람 등은 참성단제례의 제례문화에서 대화합을 기본으로 되어진 신앙생활정서이고, 흥은 천단(고려 때까지 이어오며 하느님께 드리던 천제를 이성계의 조선왕조가 사대교린주의정책에 의하여 명나라에 주었기 때문에 왕조로 되어버린 서기1392년 이후로는 북경으로 옮겨갔고, 우리나라는 신하나라로서 감히 하느님께 제사하는 일은 할 수 없게 되었음으로 참성단 천단 등의 단어도 쓸 수 없게 되었던 것이며, 하느님께 직접제사하지 못하는 대신 서원을 통해서 명나라가 지정해 준 공자 관운장 등의 인물들에게만 제사하도록 하였던 것임)제례를 통한 집단운동과 대동제가 춤으로 발산되면서 모두가 한 덩어리가 되는 화목제의 한마당에서 어우러진 것이다.
그런 가락들의 문화가 이어져 왔던 나라가‘구리’‘아라’‘가라’‘가야’‘가락’이라는 나라로서 소호금천씨의 청구로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운 나라였다. 한(漢)나라의 기록(獨斷의 券上)에서는 ‘천자이적지소칭 부천모지고 칭천자(天子夷狄之所稱 父天母地故 稱天子)’라고 했는데 그 뜻은 “천자라는 칭호는 동이족이 창시자요. 그들은 하느님 아버지와 땅 어머니의 피를 받은 민족임을 자처함으로서 천자라고 칭하는 것이다.”는 것으로서 청구는 고대신앙의 종주국이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와 같이 최고의 종교성이 스며있는 하늘나라를 실현하였던 의의 나라가 고주몽(altar의 난생설:고구려창건) 박혁거세(altar의 난생설:신라창건) 김수로황(altar의 난생설:가야창건)에 의해서 2000년 전의 중세에서도 중건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삼국사기는 2000년 전 동이의 나라에는 소호금천씨의 황금알과 알터를 그대로 전수하여 알타이(altar:金山), 알천(金川), 알단(金壇), 알성(金城:경주의 본명) 알영정(金英井) 등 모두 알(閼:金의 발음)字를 사용한 성지가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으며, 중동지방에서도 하느님의 성전과 성물에는 황금(Gold)을 중심으로 하면서 소호금천씨의 의와 그 나라를 염원하여 왔다. 예수’는 동방의 아버지나라를 제시하였고 하느님을 ‘알리’(알리:그리스어ΔΛΘ:영어ELi:시편22/1 Eli Eli Lema Sahachthani)라 하면서 제자들로 하여금 ‘여호와’라 하라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약에는 여호와라는 단어가 쓰여 질 수 없었던 것이다.‘마호메트’는 하느님을 알라(altar의 allah: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라 하면서 ‘여호와’라는 질투와 보복의 이기적인 이름을 과감하게 버렸다.
이토록 소호금천씨의 제천금인은 헬레니즘에 의해서 만들어진 그리스의 신상이나 아피스 같은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 조형물과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이며 철학을 담은 순수한 황금(GOLD) 덩어리(lump)였는데, 황금은 어떤 환경에서도 적응은 하지만 황금(Gold)과 하느님(God)과 하느님께 드리는 제례의 복장에서 유래한 관(冠)으로서의 갓(God?)은 모두 소호금천씨로부터 나온 하느님(the Almighty God)을 금(金)으로 표현하였던 이 역사에서는 제천금인(갇:God)으로 통용(通用)되었었다. 이러한 문화가 서양에 전달되어 지면서 황금(Gold)이 하느님(金:Gold-관:갇:God)으로 인지되었을 것임으로 하느님과 황금의 어원이 동의어로 출발하였으리라는 가정을 할 수 있다.
형상으로 전파되면서 황금인(黃金人)으로 모시었다는 아버지 하느님의 형상이 아들인 사람의 형상으로 인식되는 즉 아버지를 닮은 아들이므로 사람의 형상은 곧 하느님의 형상이며 하느님의 형상은 우상일 수 없다는 이론으로 이해되었고, 3000년 후에는 불교에서 미륵불상을 만들어 모시는 유래의 원인이 되어 부처의 상은 사람의 상이며 최상의 도료는 황금으로 되어야하는 것이다. 우상을 경멸한다는 기독교 원류에서도 하느님을 사람의 형상으로 조각이나 그림으로 표현하게 되었던 것이고, 기독교지류인 프로테스탄트(개혁)의 경우도 “예수가 곧 하느님”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결국은 다빈치가 그린 예수는 그의 혈통적 동이인 또는 지역적 유태인도 아닌 점령자 로마인의 초상화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인성은 졸지에 로마인이 되어버린 것이고, 로마인이 하느님의 대표적인 초상화로 인지된 셈이 된 것이다.
아무튼 약6000년 전에 하느님의 아들로 규명된 인간으로서 아버지 하느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도록 하늘 문을 열어준 이가 소호금천씨라는 것이고, 따라서 소호금천씨의 가르치심은 배달겨레의 정신문화가 되었으며, 고대의 단국(壇國: 檀君으로 오해)조선에서도 종훈(倧訓)과 전계(佺戒)에 앞서서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 이화세계(理化世界)로서 종횡사랑의 밑바탕 사상으로 이어왔음을 확인하게 된다.
BC 2182년 ‘삼랑 을보륵’(乙普勒)이 고대조선의 3대 천제(天帝)이신 ‘가륵’님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던 것으로 보아서도 충분히 알게 된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어 만물이 생겨나도록 하심에 있어서도 그 성품을 다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람 사랑하심이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으니 하느님의 깊은 뜻에 따라 모든 백성들은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임금은 덕망과 의로움으로 백성을 다스리되 그들의 생활을 평안하게 할 책임을 느끼고, 그 책임을 다 함으로써 백성들은 너도나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바르게 다스리는 방법은 온 백성이 합심하여 7일간씩 삼위의 하느님께 나아가 세 차례에 걸쳐 기도회를 가지며, 완전하게 되기 위한 다짐을 한다면 구이나라(東夷를 중심으로 한 아홉 개의 어진(夷)나라)의 다스림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 그 순리는 대체적으로 아버지가 되기를 바란다면 아버지답게 해야 하고, 임금이 되고자하면 임금답게 해야 하고, 스승이 되고자하는 자는 마찬가지로 스승답게 해야 하고, 아들이 되고자하거나 신하가 되고자하거나 제자가 되고자하는 자들도 역시 아들답고 신하답고 제자다워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이 신시(神市)를 열어주실 때 역시 하느님으로써 가르치심을 베풀어주셨던 것이니, 자신을 깨닫고 홀로 마음을 비워 스스로를 구하고자 한 다음에 물질이 있게 함으로써 그 복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능히 미치도록 하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대신하여 자신이 천제(天帝)로서 천하를 위한다 할지라도 홍(弘)은 도(道)로써 펴야하는 것이고, 익(益)은 민중(民衆)에게 베풀어야하며, 본성을 잃은 자가 하나도 없게 하여야 하되, 10000명의 왕을 대하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주인으로 대하여야 합니다. 또한 백성의 병마를 물리쳐주며 원망을 풀어주어 물건하나라도 손해가 가지 않도록 하고, 나라 안의 사람마다 망령됨을 고치도록 하며 곧 진실에 이르도록 하여야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며, 이는 청구나라로부터 시작되어 배달겨레의 모든 후손들에게 두루 베풀게 되니 구이(九夷)의 백성들이 교화되어 하나로 화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수십 종의 동서고대신화의 기록에 의하면 제천금인의 소호금천씨는 작은 아들을 서방 욕수에 보내 수메르를 다스리게 하여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이루었는데, 이 곳 갈대야 우륵 지방의 메소포타미아에 꽃피웠던 문명은 홍수에 쓸려가고 모래더미에 묻혔지만 훗날 이집트에서 사람을 죽이고 망명객으로 스며들었던 모세가 ‘소호금천씨’와 그의 누이 ‘여희’에 대한 전설을 통해서 알게 되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던 것이다. 모세는 이곳에서 40년을 공부하며 소호금천씨와 여희의 역사를 배우고 또 이곳을 떠나서 유리하였던 조상 아브라함의 족보에 대해서도 알게 되어 마침내 5경을 쓰는 동기와 지식적 문화적 배경과 바탕이 되었다,
모세가 그려낸 여호와는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는 ‘엑소더스’의 구심점이 되었는바, 구약전서의 바탕으로 삼게 된 것이다. 구약을 살펴보면 진흙으로 사람을 만들어 부렸던 여희를 중심으로 구성한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소호금천씨의 이복누이인 여희를 야훼장군과 합성하여 강력한 카리스마적인 남성 여호와로 구성하다보니 엉뚱하게도 남존여비사상의 기독교가 되게 하는 우를 범했다고 보는 것이다.
민족주의나 국수주의는 폐쇄적이어서 좋지 않다. 그러나 외래이론에만 의존하는 것은 정신없는 백성을 만드는 것이므로 더 좋지 않는 것이며, 주체성 없이 받아드린 외래문화는 정체성에 대한 프로테스탄트가 됨으로 ‘민족은 분해 되어 도태되고 전통학문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것’과 같은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러므로 역사적 바탕을 기본으로 삼고 인류문화의 발전과정을 정확히 이해하면서 시대(時代)와 연대(年代)를 따져가면서 진실과 열린 마음의 정체성을 가꾸지 않으면 상대이론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시금석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 토대를 무시하면서 보편적인 이론화 작업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종교들의 교파싸움을 일삼으며, 감성적 역정과 편견 그리고 막무가내는 세력공세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할 수 있다.
소호금천씨의 신앙과 종교적 발전에 대해서는‘소호금천씨의 종교’에서 자세히 논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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