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의 땅, 내몽골 오르도스를 가다
"신라金氏는 匈奴(흉노) 출신인가"라는 숙제를 풀기 위한 탐험
文武王은 흉노 휴도왕의 후손
흉노의 옛땅을 답사하기 전에 흉노는 누구이며, 흉노와 우리 역사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국립경주박물관 현관에 전시되어 있는 문무왕릉(文武王陵)의 비문에 따르면 신라 김씨는 흉노(匈奴)의 후예이다. 비문에서 문무왕의 출자(出自)를 밝히는 구절인 전면(前面) 제5행에 “투후(秺侯) 제천지윤(祭天之胤)이 7대(代)를 전하여……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투후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김일제(金日磾: BC 134-86)다. 휴도왕은 흉노 제국의 주권자인 선우(單于) 휘하 24 왕장(王將) 중 하나였다. 김일제는 한(漢)의 거기(車騎)장군 곽거병(霍去病)에게 포로가 되어 처음엔 말을 사육하는 노예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말(馬) 마니아인 한 무제(武帝)의 총애를 받았고, 마감(馬監)·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올랐으며, 망하라(莽何羅)의 난 때 무제의 위급을 구한 공로로 투후에 봉해졌다. 그는 흉노 種(종)의 일파인 휴도족이 제천(祭天)의 금인(金人)을 만들어 숭배하는 풍속에 주목한 한무제에 의해 金씨로 사성(賜姓)되었다. 금인은 샤마니즘적 청동 신인상(神人像)으로 보인다.
비문의 제6행에는 “15대 祖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라 되어 있다. 비문은 여러 조각이 나고, 글자도 마모되어 전문을 해독하기 어렵다.
성한왕에 대해서는 신라김씨의 시조인 김알지(金閼智)로 보는 견해, 알지의 아들인 세한(勢漢)으로 보는 견해, 알지의 7세손으로 김씨 중 최초로 신라의 왕위에 오른 미추왕(味鄒王)으로 보는 견해 등이 엇갈리고 있다.
이 비는 능비(陵碑)로 보는 것이 다수설이지만,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하여 동해에 산골(散骨)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사가 전하고 있어 약간의 의문이 남는다. 문무왕의 시신을 경주의 사천왕사 근처에서 화장하고 부근에 의릉(擬陵)을 만든 것이거나, 사천왕사를 창립한 문무왕을 기려 그곳에 능비만을 세운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신라·가야의 금관과 각배(角杯)
문무왕릉의 비문만으로 신라김씨의 출자(出自)를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신라김씨가 유목기마민족과 친연성이 깊다는 증거는 적지 않다. 경주 대릉원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은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묘제와 동일하다. 또 거기서 나온 금관 역시 유목기마민족의 그것과 같은 신앙과 사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한국 민족이 단일민족이라는 것은 허구이다. 대륙에서 내려온 북방계와 배를 타고 건너온 남방계도 있다. 북방계라고 해서 모든 같은 계통은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가는 동북아의 명문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사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 부여는 반목반농(半牧半農)의 국가였다.
그러나 신라김씨와 가야김씨는 부여계가 아님이 확실하다. 그들이 유목기마민족 출신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남긴 유물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 鷹形金冠
그 대표적인 것이 금관과 짐승의 뿔로 만든 각배(角杯)다. 금관과 각배는 옛 신라· 가야 지역에서만 발굴되었을 뿐, 백제·고구려의 옛 판도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 각배는 기마민족의 휴대용 뿔잔이다.
우리 국보로 지정된 신라의 기마무사 토기가 주목된다. 말을 탄 무사는 오연하게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의 뒷머리는 편두(偏頭)이다. 편두라는 것은 투구를 쓰기에 좋도록 어릴 적에 돌로 눌러 납작 머리로 만드는 것이다. 군대에 갔다 온 남자라면 체험했겠지만, 뒤통수가 튀어나온 사람이 철모를 쓰면 잘 벗겨진다. 또 기마무사가 탄 말의 잔등에는 동복(銅鍑)이 실려 있다. 동복은 기마민족의 휴대용 청동제 솥이다.
어떤 이는 문무왕의 능비에서 투후의 자손을 운운한 것은 사대주의의 표현이라고 말한다. 이건 어림도 없는 소리다. 백제·고구려의 멸망 후 문무왕은 전후처리 문제를 놓고 당시의 세계제국 당(唐)과 사생결단의 7년 전쟁을 감행해 승리한 자주정신의 화신이다.
문무왕이 중국을 향한 사대주의자였다면 굳이 그의 선조를 흉노 출신 투후라고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우선, 흉노라는 글자부터 흉측하다. 匈奴는 ‘떠들썩한 종놈’이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이렇게 자기 주변의 민족을 모두 오랑캐로 경멸했다.
▲ 오르도스 청동기(靑銅器)
흉노는 기원전 3세기부터 중국 북방 초원지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마민족이다. 목축을 생업으로 삼으면서 가축을 데리고 물과 풀을 찾아 이동했다. 남자는 활을 잘 쏘고, 전쟁이 일어났다 하면 즉각 갑옷을 입고 전사가 되었다. 중국의 전국(戰國)시대, 흉노와 접경했던 연(燕)·趙(조)·秦(진)은 잦은 흉노의 침구(侵寇)에 전전긍긍해, 각각 장성을 쌓아 방어에 힘썼다. 진의 시황제(始皇帝)는 중국을 통일한 후 장군 몽념(蒙恬)에게 30만 대군을 주어 흉노의 남부 영토인 오르도스를 점령하고,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고유문자가 없었던 흉노는 자신들의 역사를 스스로 기록하지 못했다. 흉노의 역사를 파악하려면 현장 답사에 앞서 중국의 사서를 참고할 수밖에 없다. 우선, 사마천(司馬遷)의 <史記>흉노열전에 기록된 유명한 일화를 소개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흉노를 東아시아의 패권국으로 만든 영웅의 등장에 관한 기록이다.
▲ 오르도스 북단 黃河 연안. 강변 좌우에 경지가 조성되고 건물도 들어섰다.
영웅 모돈의 골육상쟁 쿠데타
두만(頭曼)이라는 흉노의 선우에게는 모돈(冒頓: 흉노족은 묵특이라고 읽은 듯함)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그러나 두만 선우는 후비(後妃)가 낳은 어린 아들을 사랑해 모돈을 폐적하고, 후비의 어린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고 획책하다. 모돈은 서쪽의 강국 월지(月氏: 서북방의 유목국가)에 인질로 보내졌다. 그런 직후, 두만은 일부러 월지에 대한 토벌군을 일으켰다.
당연한 일이지만, 월지는 인질로 잡고 있던 모돈을 죽이려 했다. 위기일발, 모돈은 준마를 훔쳐 타고 본국으로 도주했다. 두만의 노림수는 빚나갔지만, 그는 자기 아들을 다시 보고, 1만기의 장군으로 임명했다.
장군이 된 모돈은 부하들에게 맹렬히 기사(騎射) 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어느 날,
“모두 잘 들엇. 내가 명적(鳴鏑: 우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신호용 화살)을 쏜다면 너희들은 명적이 날아가는 곳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날려라. 따르지 않는 자는 참한다!” 라고 명령하고, 사냥에 나섰다. 모돈은 그날 자신의 애마를 향해 명적을 날렸다. 부하들 중에는 화살을 발사하지 않는 자도 있었다. 모돈은 용서 없이 그들의 목을 날려 버렸다.
또 어느 날, 모돈은 자신의 애첩을 향해 명적을 날렸다. 망설이다 화살을 쏘지 않은 부하들을 역시 참했다.
이런 냉혹한 훈련을 시킨 다음, 모돈은 어느 날 아버지 두만 선우의 애마를 향해 명적을 날렸다. 부하들은 한 사람도 남김없이 그를 뒤따라 화살을 쏘았다. 이제, 그는 부하들이 그의 명령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곧, 두만 선우를 따라 사냥에 나섰다. 모돈은 사냥 중에 갑자기 두만을 겨냥하여 명적을 날렸다. 과연, 부하들은 명적의 나는 방향을 향해 모두 화살을 쏘아 두만을 사살했다. 모돈은 아버지를 죽인 데 이어 계모와 이모제(異母弟), 그리고 복종하지 않는 중신들을 모조리 참살했다. 모돈은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모돈의 쿠데타에 관한 <사기>의 기록은 설화적인 분식이 더러 느껴지지만, 흉노가 선우 승계문제로서 자주 골육상쟁을 벌인 것은 확실하다. 다음 일화는 더욱 흥미있는 기사이다.
북방 초원지대 석권
모돈의 즉위 당시, 흉노 동쪽에는 동호(東胡)가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동호라면 단군조선의 중심세력과 친연성이 깊은 종족이다. 단군조선과 동호는 대흥안령(大興安嶺)산맥 동쪽의 요서(遼西)지역에서 이웃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모돈이 찬탈했다는 정보는 즉각 동호의 왕에 전해졌다. 동호왕은 사자를 보내 두만 선우의 천리마를 양도하라고 요구했다. 모돈 선우는 여러 신하에게 자문했다. 신하들은 “천리마는 흉노의 보물, 당연히 거부해야 합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모돈은, “한 마리의 말을 아껴서 이웃나라와의 우호를 저버릴 수 없다”고 측근의 의견을 물리치고 동호의 요구에 선선히 응했다.
모돈이 자기를 두려워한다고 판단한 동호왕은 얼마 후 두 번째의 사자를 보내왔다. 이번에는 후비(后妃) 1인을 양보하라고 요구했다. 모돈의 부하들은 모두 격분해 “공격 명령을 내려 달라”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모돈 선우는 이 때도, “여자 하나를 아껴서 이웃나라와 우호를 손상시킬 수 없다”면서 측근을 누르고 총애하는 후비 중 1인을 동호에 보냈다.
동호는 점점 교만해져 드디어 흉노와의 국경을 침략하기 시작했다. 흉노와 동호의 중간에는 1000여 리에 걸친 불모지가 펼쳐져 있었다.
“귀국이 우리나라와의 경계로 삼고 있는 황무지는 귀국에 있어 쓸모없는 땅이다. 이 황무지를 우리 쪽이 영유하려고 한다”
모돈 선우는 측근들과 상의했다. 몇 명이 이렇게 말했다.
“아무런 쓸모없는 황무지입니다. 주더라도 차질이 없을 겁니다”
이 말을 듣고 모돈 선우는 격분했다.
“땅은 나라의 근본, 촌토도 내줄 수 없다”
그는 주어도 좋다고 말한 부하들을 한 사람도 남김없이 참해 버렸다. 그리고 말에 올라타, “이제부터 동호를 토벌한다. 늦는 자는 참한다”라고 전군에 포고했다. 즉각 동쪽으로 군사를 몰아 동호를 습격했다. 동호는 모돈 선우를 용맹하지 않은 바보로 생각해 평소 대비에 소홀했다. 모돈 선우는 순식간에 동호를 격파하여 동호왕을 죽이고, 주민과 가축을 탈취했다.
▲ 한고조와 흉노의 모돈 선우가 결전을 벌인 平城(대동市 서쪽)
위의 설화는 흉노가 일반적으로 말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땅을 그렇게 가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과 기만과 기습이 그들의 상용 전법임을 나타내는 기록이다. 내륙 유라시아의 기마민족에게 이러한 사고와 행동은 거의 공통적이다.
모돈 선우는 동호로부터 개선하면, 이번엔 서쪽으로 진격해 월지를 궤주시키고, 월지왕의 머리를 베어 술잔으로 사용했다. 이어 말머리를 남쪽 오르도스(황하 중류의 대만곡부· 大彎曲部)로 돌려 누번왕(樓煩王)과 백양왕(白羊王)의 영지를 병합해 일찍이 진(秦)의 장군 몽념에게 빼앗겼던 옛 영토를 모두 회복했다.
흉노에게 굴복한 漢 고조
당시 중국에서는 한왕(漢王) 劉邦(유방)과 초패왕 항우(項羽)가 격렬한 패권전을 전개하고 있었던 만큼 모돈 선우의 초원지대 석권을 견제할 여력이 없었다. 이 무렵 모돈은 30여만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
흉노는 전쟁을 할 때 반드시 별과 달의 상태를 본다. 달이 차면 공격에 나서고 달이 기울면 바람처럼 회군했다. 적의 수급이나 포로를 얻은 자는 선우로부터 큰 잔의 술이 하사되었다. 노획품과 포로는 포획한 병사의 소유가 되었다. 따라서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 모돈 선우는 그 후 북방의 혼유(渾庾)· 정령(丁靈)·격곤('730;昆) 등을 하나하나 굴복시켰다.
바로 이때(BC 202년) 漢의 高祖 유방이 항우를 죽이고 중국 천하를 통일했다. 고조는 韓王 신(信: 초한전쟁의 영웅 韓信과는 다른 인물임)을 대왕(代王)으로 전봉하여 마읍(馬邑: 山西省 북부)에 도읍을 두게 했다. 그러나 그는 흉노의 맹공을 받고 마읍이 포위되자 대왕 信은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여 선우의 신하가 되었다.
代王 信을 휘하에 거느린 모돈 선우는 승세를 타고 다시 남하, 태원(太原: 현재 산서성의 성도) 에 쇄도해 진양성(晋陽城)을 포위했다.
항우를 격파하여 자존심이 드높았던 고조가 흉노 선우의 도전을 묵과할 리 없었다. 고조는 스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흉노 정벌에 나섰다. 이제, 북방 초원의 최강자와 농경지대의 최강자가 東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결승전을 벌이게 된 것이다.
흉노의 전법은 실로 교묘했다. 모돈 선우는 약세를 가장하며 슬슬 물러나, 한군을 북방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정예를 후방에 감추어 놓고, 허약한 병사와 비루먹은 말들을 전면에 내세웠던 것이다. 평성(平城)으로 북상하던 유방이 걸려들었다. 평성은 현재 산서성 대동시(大同市) 서부이다.
▲ 오르도스의 샹샤란 사막
그러나 추격을 너무 서둔 나머지 한군의 대열이 길게 늘어져 후속의 보병 32만은 훨씬 후방에 처져 있었다. 모돈은 이것을 노려 정예 기병 40만을 몰아 고조가 이끈 선두부대 10만기를 평성 동북쪽 백등산(白登山)에 몰아넣고 포위했다.
고조는 7일간 후방의 본대와 분단된 위기 상황에 처했다. 흉노는 서쪽은 백마, 동쪽은 청룡마(백마에 푸른 빛이 섞인 말), 북쪽은 흑마, 남쪽은 적황색 말을 탄 부대를 배치, 물샐 틈 없이 포위했다.
한군은 아무리 포위망을 뚫으려 해도 뚫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추운 겨울이어서 한병은 20%가 동상에 걸려 손가락이 떨어져 나가는 고통을 당했다. 반면 흉노의 기병은 추위에 익숙해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고조는 군사 진평(陳平)의 계교로써 포위를 풀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고조는 화공에게 미인화를 그리게 하고 그 미인화와 후한 뇌물을 모돈의 알씨(閼氏: 선우의 后)에게 보냈다.
흉노 선우의 알씨는 정치·군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쟁에 종군해 선우 유고(有故)시에는 부대를 지휘했다. 이런 기마민족의 여성 파워는 훗날 몽골족에도 계승되었다. 이때 한의 사자가 알씨에게, “지금 한나라 황제는 곤경에 처하여 미인도의 여인들을 모돈 선우에게 바치고 화(和)를 청하고자 하십니다”라고 말했다. 알씨로선 이런 미인들이 오면 선우의 총애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알씨는 모돈에게 진언하기를, “설령 이 싸움에 이겨 한나라 땅을 손에 넣는다고 거기서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두 임금이 다 하늘의 가호를 받고 있는데, 굳이 서로가 괴롭힐 필요까지는 없는 것 아닙니까”했다.
사실, 순수 유목기마민족인 흉노는 농경지역에 대한 영토적 관심은 없었고, 약탈과 조공품 수탈이 침략의 목표였다.
마침 이때 모돈 선우는,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韓王 信의 휘하 장군 왕황(王黃)과 조리(趙利)가 기일이 되어도 나타나지 않자, 혹시 그들이 한(漢)과 내통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래서 알씨의 진언을 받아들여 포위의 일각을 풀었다.
고조는 재빨리 탈출하여 후방의 대군과 합류했다. 이에 모돈은 병력을 이끌고 북으로 회군하고, 고조도 장안으로 돌아왔다. 고조는 당초 약속대로 사자 유경(劉敬)을 선우에게 파견하여 황실의 여자와 비단·곡물·누룩 등 막대한 진상품을 바치고 흉노와 정전협정을 맺었다. 이후 약 70년간 東아시아의 패권국은 한이 아니라 흉노 선우국이었다.
흉노 선우국의 전성시대
BC 2세기 흉노는 동쪽은 열하(하북성 북부)로부터 서쪽은 東투르키스탄까지, 북은 바이칼호변, 남은 長城지대에 이르는 모든 민족을 지배하에 두었다.
黃帝·치우 신화의 현장
북경(北京) 국제공항에 내린 필자 일행 12명은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북경 서북쪽 관문인 거용관(居庸關)과 팔달령(八達嶺)장성을 넘었다. 이 일대가 한나라 때는 상곡(上谷)이라 불렸는데, 흉노를 막기 위한 최전선 기지였다. 상곡 땅을 지나 하북성 탁록현(涿鹿縣)에 도착했다. 북경공항에서 전세버스로 2시간 남짓한 거리다.
▲ 북경 서북부 팔달령 장성
탁록은 중국사람이 ‘중화문명의 開祖(개조)’로 숭배하는 황제(黃帝)가 동이족 치우(蚩尤)와 결전을 벌였다는 전설의 현장이다. <사기>5제본기(五帝本紀)에는 황제가 탁록 벌판에서 치우를 사로잡아 목을 베고 중국사상 처음으로 천자(天子)에 오른 것으로 되어 있다.
현재, 완공단계인 거대한 중화삼조당(中華三祖堂)에 들렀다. 삼조당 내부엔 황제를 중심으로 좌우에 치우와 炎帝(염제)의 거대한 상을 모셔 놓았다. <사기>엔 ‘흉폭한 반란 수괴’로 묘사된 치우를 현대 중국이 느닷없이 그들의 조상으로 받들겠다는 것이다. 동이족의 역사도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겠다는 동북공정(東北工程)의 속셈이 드러난 현장이다.
2002년 월드컵대회에서 우리 응원단인 ‘붉은 악마’는 어떤 근거에서인지 모르지만, 치우를 우리 민족의 수호신인 것처럼 그려진 깃발을 흔들었다. 치우는 네 개의 눈, 여섯 개의 손, 구리로 된 머리, 쇠로 된 이마를 가진 괴물의 모습이며, 사람처럼 말하며 모래나 돌 따위를 먹으며, 금으로 만든 무기를 사용했으며 안개를 뿜어내는 조화도 부렸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소수민족인 묘족(苗族)도 치우를 자기들의 시조로 받들고 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중국의 5제는 황제(黃帝)에 이어 전욱(顓頊)· 곡(嚳)·요(堯)·순(舜)으로 되어 있으며, 舜으로부터 선양(禪讓)을 받은 우(禹)가 하(夏)왕조를 열었다고 되어 있다. 중국인은 스스로를 ‘黃帝의 자손’ 으로 칭해 왔지만, 황제는 물론 그 후의 요·순·우도 전설상의 인물이며, 우 왕조도 역사적 실체로 검증된 바 없다.
▲ 탁록의 치우총
▲ 탁록에 있는 치우泉
답사단에 참가한 치우 연구자의 권유에 따라 탁록의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치우총(塚), 치우천(泉), 치우북채(北寨) 등 유적을 둘러보았다. 치우총의 봉분은 누군가에 의해 도굴되어 큰 구멍이 뻥 뚫려 있다.
▲ 탁록 塔寺村에 있는 치우 首塚
치우 수총(首塚: 목무덤)을 찾기 위해 흉려곡(匈黎谷)이라는 험한 고갯길을 돌고 또 돌아 탑사촌(塔寺村)에 이르렀다. 10여 가구가 사는 산골 외딴마을 탑사촌에서 조상 대대로 치우 수총에 제사를 지내 왔다는 집안의 周德瑞(주덕서)라는 이름의 칠순노인을 만났다.
그에 따르면 황제에게 패전한 후 치우의 부하들이 이곳에 도망쳐와 치우의 목을 묻었다고 한다. 수총에는 묘비가 세워져 있었는데, 1960년대 중반-70년 초반 문화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의 습격·파괴를 막기 위해 땅속 깊이 묘비를 묻고, 그 자리에 아무 글자도 새기지 않은 백비를 세워 놓았다고 한다.
보행이 불편한 周씨 노인을 부축하여 산 중턱의 ‘수총’앞에 이르렀다. 백비의 석질은 의외로 좋았다. 치우연구회 회원 등은 백비 앞에 미리 준비해간 막걸리를 올려놓고 넙죽 큰절을 올렸다.
▲ 탁록 中華三祖堂에 있는 치우石像. 우측은 '중화문명의 開祖'로 숭상되는 黃帝의 성상
날이 저물어 탁록 읍내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우리 답사단은 미리 호텔을 예약하지 않고 그날그날 편리한대로 숙소를 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신종 플루의 영향인지, 세계적 경제 위기의 탓인지 호텔 방 구하기가 쉬웠다.
그런데 호텔 이름이 공교롭게도 헌원따샤(軒轅大夏)이다. 헌원이라면 바로 치우를 죽인 黃帝의 이름이다. 훤원의 성은 공손(公孫)이다. <사기>에 헌원은 치우를 물리친 후 탁록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지만, 물론 신화이다. 아무튼 신화의 체계는 漢族 헌원이 기마민족치우를 토벌하고 중국을 건설했다는 것이다.
呂태후에게 보낸 선우의 외설적 편지
중국의 秦漢(진한)과 흉노가 대치하던 최전선은 어양(漁陽: 北京)·상곡(上谷: 하북성 懷來 동남)·대(代: 하북성 蔚縣 동북)·안문(雁門: 산서성 右玉 서부)·定襄(정양: 내몽골 和林格爾 서북)·운중(雲中: 내몽골 托克托 동북)·오원(五原: 내몽골 包頭市 서쪽)·삭방(朔方: 내몽골 杭錦旗 北황하 남안)이었다.
北京 서쪽을 달리는 태행(太行)산맥을 지나면 북위 40도 전후, 표고 약 1000m의 황토고원지대인데, 우리 일행의 답사코스도 바로 이 지역이었다(지도 참조).
우리 일행은 7박8일 동안 하북성·산서성의 북부 지역과 내몽골자치주와 오르도스 지역을 답사했다. 여름 7월의 한낮 기온이 35도에 육박했으나 건조한 기후의 영향으로 땀을 많이 흘리지는 않았다.
전국시대에는 진·조·연이 흉노와의 경계를 접해 북방에 각각 장성을 쌓았다. 탁록에서 고속도로로를 6시간쯤 달려 내몽골자치구의 省都 호화호특(呼和浩特)에 도착했다. 호화호특 시가 북쪽 陰山(음산)산맥 자락에는 전국시대 趙 장성이 남아 있다(사진).
▲ 호화호특市 북쪽 음산산맥 기슭에 있는 戰國시대 趙 長城
長城이란 표현이 어울리지 않게 짧게 토막이 난 토성이지만, 최소한 2300년의 세월을 견뎌온 당당한 유적이다.
전국시대 북방 3국의 장성을 연결·보강한 것이 진(秦)의 만리장성이다. 그러나 진 왕조는 중국통일 15년 만에 멸망했다. 바로 이 무렵에 즉위한 흉노의 모돈 선우는 楚漢(초한) 전쟁 시기에 세력을 확대했다. 중국을 통일한 한 고조가 백등산(白登山: 산서성 大同)에서 모돈 선우에게 포위되어 화평을 요청한 사실은 앞에서 거론했다. 한의 화친 정책은 여후(呂后) 때도 계속되었지만, 매우 굴욕적이었다.
고조 유방의 사망 후 한나라의 실질적 통치자는 고조의 아내였던 呂태후였다. 고조의 뒤를 이은 혜제(惠帝)· 소제(少帝) 등으로 이어진 제2-4대 황제는, 정권욕이 강렬했던 여태후의 꼭두각시였다. 사마천의 <史記>에도 혜제 이후 세 황제는 여태후 본기(本紀)에서 부수적으로 다루고 있다. <漢書>에 따르면 이때 모돈 선우는 여태후에게 매우 외설적인 편지를 보냈다.
<고독에 번민하고 있는 나는 늪지에서 태어나 초원에서 자랐노라. 이따금 국경을 넘어 중화(中華)의 땅에서 노닐기를 원한다. 지금 폐하는 혼자 된 몸, 나 또한 홀몸이라 우리 두 임금이 모두 쓸쓸하다. 원컨대 내가 가진 것을 가지고, 당신의 없는 곳을 채움이 어떠하리>
원래, 흉노는 말 위에 올라 초원을 달리는 것과 미인의 몸 위에 오르는 것을 남자의 양대 즐거움으로 삼는 야성적인 민족이었다. 그러나 이때 여태후는 나이 칠순, 이미 여자로서의 용색(容色)을 잃고 있었다. 그런 만큼 모돈 선우의 편지는 연서가 아니라 능멸의 편지였다.
이에 격노한 여태후는 흉노를 토벌하려고 했다. 즉시, 여러 장수들을 모아 대책을 논의했다. 상장군 번쾌(樊噲)가 먼저 말했다.
“원컨대 신이 10만의 군대를 얻어 흉노 땅을 휩쓸고 오겠습니다”
여러 장수들은 여태후가 무서워 감히 이견을 내세우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낭중으로 있던 계포(季布)가 앞으로 나서,
“일찍이 고조께서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도 백등산에서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때 번쾌는 상장군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번쾌가 10만의 군대를 가지고 흉노를 휩쓸 수 있겠습니까.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번쾌가 망녕된 말로 아첨하여 천하를 요동시키려 합니다. 번쾌를 참형에 처하소서”
번쾌라면 여태후에게 여동생(여수)의 남편이다. 그러나 냉정히 판단할 때 흉노와 싸울 시기는 아니었다. 여태후도 이 점을 깨닫고, 더 이상 흉노 정벌을 거론하지 않고, 계속 화친을 추진했다. 여태후는 “소첩(小妾), 나이 이미 칠순, 병이 들어 대선우를 모실 수 없어 송구하다”라는 내용의 답서를 보냈다.
흉노 선우국의 전성시대
여태후가 죽은 후 즉위한 5대 문제(文帝) 그리고 6대 경제(景帝) 때도 한나라는 흉노선우국에 해마다 비단·곡식을 세폐(歲幣)로 바쳤다. 그러나 문제 3년(BC 177) 5월, 흉노의 우현왕(右賢王)이 오르도스를 점령하고, 상군(上郡: 섬서성 楡林 동남)의 요새를 공격했다.
문제는 승상 관영(灌嬰)에게 토벌을 명했다. 관영이 전차대와 기병대 8만5000을 이끌고 우현왕을 공격하고, 문제가 太原(태원)까지 나아가 뒤를 받쳤지만, 때마침 제북왕 흥거(興居)의 반란이 일어나 흉노 토벌은 중지되었다. 그 이듬해, 모돈 선우는 다음 내용의 서한을 문제에게 보냈다.
<천제(天帝)가 세운 흉노의 大선우, 삼가 황제께 문안을 드린다. 별고 없으신가. 이번 사태는 원래 귀국의 수비대가 맹약을 깬 일로 비롯된 것이지만, 나는 인국과의 우호를 손상한 데 대한 징벌의 뜻에서 우현왕(右賢王)에게 서방의 월지(月氏)를 토벌하도록 명했다. 나의 군대는 하늘의 가호와 훈련된 병력, 강건한 말의 도움으로 월지를 항복시키고, 다시 누란(樓蘭)·오손(烏孫)·호게(呼揭) 및 그 주변 27개국을 병합했다.……현재 나의 희망은 무기를 거두고, 병사와 말을 쉬게 하며, 이때까지의 한(恨)을 물에 떠내려 보내고, 화친조약을 부활시키는 것이다. 이에 의해 종전처럼 변경의 백성을 안심시켜 어린이가 튼튼하게 크고 늙은 사람이 평안하게 사는 천하를 만들어 이것을 자손에게 남기고자 한다>
여기에서 누란이라는 것은 신강(新疆)자치구의 로프놀 호반(湖畔)에 번영했던 오아시스 도시국가이고, 오손은 당시 준가리아 분지 북변에 있었던 유목기마민족, 호게는 위구르族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흉노는 東투르키스탄(지금의 신강자치구)의 도시국가로부터 노예·말·펠트·모직물 등을 징세하고, 종래 월지가 주무르고 있던 동서교역의 이익을 장악하게 되었다(지도 참조).
한편 월지는 흉노를 겁내 멀리 이리 분지(盆地)로 도망했지만, 그 후 오손에 의해 이리로부터도 쫓겨나 아무 강 유역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로써 東투르키스탄에 대한 흉노의 지배권이 확립되었는데, 이와 함께 흉노는 감숙(甘肅) 지방을 통하여 티베트系의 강(羌) 등도 영향권에 넣어 한나라를 서북방과 측면으로부터 위협을 가하게 되었다.
이처럼 흉노의 유목기마민족국가는 모돈 선우 一代에 동쪽은 열하(熱河: 지금의 하북성 북부)로부터 서쪽은 東투르키스탄까지, 북쪽은 바이칼 호변(湖邊)·예니세이江 상류 유역으로부터, 남쪽은 장성 지대·오르도스 방면에 이르는 모든 민족을 지배 하에 두었다. 실로 모돈 선우와 그의 아들 노상(老上) 선우 시대는 흉노의 발흥기인 동시에 전성기였다.
위청·곽거병의 흉노 정벌
文帝·景帝의 시기, 한나라는 오랜 전란에 시달린 백성을 휴양시키는 데 힘써 경제가 크게 발전했다. 그래서 중국사에서는 이를 문경의 치(文景의 治)라고 부른다. 景帝 초기, 吳王 유비(劉濞)가 주동이 된 吳楚(오초) 7국의 반란이 일어나고, 반란군의 개입 요청을 받은 흉노가 안문군 장성 북방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러나 오초7국의 난은 곧 진압되었다. 흉노도 정세를 관망했기 때문에 만리장성을 넘어오지 않았다.
BC 141년, 경제가 죽고, 황태자 유철(劉徹)이 17세의 나이로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한의 7대 황제 무제(武帝)이다. 한무제는 중국역사상 진시황과 더불어 秦皇漢武(진황한무)로 일컬어질 정도로 과감했고, 많은 치적을 남겼다.
건원 6년(BC 135), 어전회의에서 흉노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다. 무제는 고조 이래 흉노에 취해 오던 화친정책을 굴욕적이라 하여 공세 위주의 강경책으로 전환했다. 그러나 흉노를 치기 위해서는 수천 리 원정을 감행해야 했고, 그럴 경우 흉노가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피로에 지친 한군에 대해 역습하면 백전백패하게 마련이었다.
그래서 장성 남쪽 안문군 마읍(馬邑: 산서성 북부)에다 30만 명의 복병을 미리 숨겨놓고 이곳에 흉노를 유인해 결정타를 가한다는 작전을 세웠다. 명망이 높은 마읍의 호족 섭일(聶壹)이 흉노로 들어가 선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혹독한 마읍의 관리들을 모두 베어 죽이고, 성을 들어 항복하면 막대한 재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때 흉노의 군주는 모돈 선우의 손자인 군신(軍神) 선우였다. 섭일은 죄수들의 머리를 베어 마읍의 성벽에 높이 매달아 성내의 봉기가 성공한 것처럼 가장했다. 흉노의 밀정이 그것을 마읍 관리의 수급인줄 믿고 선우에게 보고했다. 군신 선우는 10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공격에 나섰다.
그런데 진격로 일대의 초원에 소·말·양 떼가 가득히 방목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의 그림자 하나 비치지 않았다. 푸른 초원을 바라보고 사는 유목민족은 시력이 5.0-6.0인 사람도 허다하다. 수상쩍게 생각한 군신 선우는 장성 가까이에 있는 봉화대 하나를 급습, 그 책임자로부터 한병이 마읍에 매복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냈다. 군신 선우는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고 북쪽으로 회군했고 한군은 막대한 동원비용만 허비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BC 126년, 한무제의 명을 받은 위청(衛靑)·공손오(公孫敖)·공손하(公孫賀)·이광(李廣) 등 장수 넷은 각각 1만기를 거느리고 네 방향으로 흉노 땅에 쳐들어갔다. 이 가운데 공손하는 흉노를 만나지도 못했고, 공손오는 패전해 7000기를 잃었으며, 이광은 흉노에 패해 부대가 전멸하고 자신은 포로가 돼 끌려가다 겨우 탈출했다. 공손오와 이광의 죄는 참형에 해당되었으나 돈을 바치고 사형을 면하고 서인(庶人)이 되었다. 무제 때는 군비 조달에 급급해 사형수도 돈을 내면 사면되었다.
네 장수 가운데 오직 위청만이 상곡으로부터 북진, 흉노가 하늘에 제사지내는 용성을 공략하여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것이 700명에 달했다. 그다지 큰 전과는 아니었지만 건국 이래 70년 만의 경사로서 조야가 흥분했다. 그러나 전체적 전황은 패전이었다.
BC 127년 위청은 기병 3만을 거느리고 안문을 나가 흉노 수천 명을 죽였고, 다음 해엔 운중으로부터 출진하여 장성 바깥 서쪽을 돌아 진나라 말기 흉노에게 빼앗겼던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했다. 그 후 위청은 대장군이 되어 7차례에 걸쳐 원정군을 이끌고 흉노와 싸워 공을 세웠으나, 그 후반엔 그의 생질인 곽거병(霍去病)의 눈부신 전공 때문에 그의 명성은 오히려 빛을 잃을 정도였다.
BC 112년, 곽거병은 3회에 걸친 원정을 감행했다. 제1회 원정은 흉노의 절란왕(折蘭王)·노후왕(盧侯王)을 죽이고, 혼야왕의 아들을 사로잡고, 적의 수급과 포로가 8100 명에 이르렀다.
그해 가을의 제3회 원정은 혼야왕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하서(河西)로 진출한 것이었다. 계속되는 패전에 흉노의 이치사(伊雉斜) 선우가 격노하여 혼야왕과 휴도왕에게 그 책임을 물으려 하자 이들 두 왕은 문책이 두려워 한나라에 항복하려 했다. 그런 중에 휴도왕이 항복을 망설였기 때문에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 무리를 빼앗았다.
혼야왕은 한나라 측에 흉노 내부의 사정을 알리고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무제는 곽거병에게 군을 이끌고 가서 혼야왕을 맞으러 갈 것을 명했다.
곽거병이 황하를 건너 혼야왕의 부대에 접근하자 부장의 다수가 동요하여 도망할 낌새를 보였다. 이에 곽거병은 혼야왕의 진영에 급히 달려가 왕과 회견하고, 도망하려고 하는 자 8000여 명을 참살했다, 이때 항복한 흉노는 수만 명에 달했는데, 공식적으로는 10만 명이라고 칭했다.
장안에 도착한 흉노 일행에게 무제는 거액의 은상을 내리고, 혼야왕에 대해선 1만 호의 영지를 주고 누음후(漊陰侯)로 봉했다. 그의 부장 4명도 각각 작위를 받았다.
흉노로 시집간 王昭君(왕소군) "어떤 여자냐고 물으셨습니까. 이번에 하사하신 五女圖 속의 가운데 여성이 좋습니다." 흉노의 쇠퇴 그러면 흉노의 사정은 어떠했을까. 흉노의 민족적 생산 양식은 원래 유목이기는 했지만, 전성기엔 약탈·납공(納貢)·징세·교역에 의한 수익이 훨씬 컸다. 그 많고 적음이가 국가 존립에 직접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즉, 흉노는 매년 한나라를 침입해 마음껏 약탈하는가 하면, 한과의 화평조약에 의해 다량의 비단·곡물 등을 공물로 따로 받아 내고, 開市(개시)라는 흉노·한의 교역시장을 통해 중국산의 물자를 적지 않게 입수했다. 또 오환·선비·정령 등 복속국가로부터 모피 등을 징세하고, 東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 도시국가로부터는 노예·모직물·말·낙타 등을 징발했다. 흉노는 이렇게 수탈한 노예·가축 및 물자를 다른 지역에 전매했다.
▲ 방울머리(鈴首), 동물무늬머리(動物紋首) 靑銅刀 그러나 이와 같은 흉노의 경제사정은, 그 국가 자체의 통제력 및 군사력과 표리 관계에 있어서, 흉노 국가가 번성한 시대에는 그 수익이 막대했지만, 세력이 실추함과 함께 일시에 전무(全無)의 상태로까지 감소하여 흉노국가 붕괴의 중요 요인이 되었다. 한 무제의 등장 이후 흉노는 급속히 쇠운을 맞이한다. 무제는 흉노를 격멸하는 데 국력을 집중하기로 결심하고, 해마다 흉노의 영역 깊숙이 대군을 원정시켰다. 마침 흉노에 선우의 상속문제를 둘러싸고 내홍이 벌어지고, 그 결과로 흉노의 혼야왕이 혼야·휴도 두 부족을 이끌고 한에 항복했음은 앞에서 이미 썼다. 한은 항복한 흉노 기병을 선봉으로 삼아 감숙 방면의 흉노를 격퇴했다. 흉노로선 오른쪽 어깨를 잃은 셈이었다. 그리고 흉노 중 항복한 부족을 북변 5郡에 분산 배치하여 평시에는 정찰·초소의 임무를 맡게 했고, 전시에는 전위(前衛)로 종군시켰다. 이어 무제는 중국안에서도 대대적으로 군마를 사육하여 군에 공급하는가 하면 서방으로부터 이란 계통의 마종(馬種)을 수입해 마필을 개량했다. 위청·곽거병 등은 이 새로 건설·편성한 기마군을 이끌고 원정, 흉노는 내몽골에서 버티지 못하고 고비사막을 건너 외몽골로 도주했다. 한군은 다시 고비사막을 넘어 추적, 바이칼 호반에다 기공비를 세우고 회군하기도 했다. 이로써 흉노는 군사적으로 대타격을 받고, 내부 여러 세력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했다. 이 시기에 예니세이 강변의 투르크계 정령족, 열하 방면의 동호의 후예인 오환족, 이리 강변의 오손족들이 모두 독립했다. 흉노는 대사막 주변을 이동하면서 한군의 예봉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한혈마에 대한 욕망-張蹇(장건)과 비단의 길 무제의 시대, 한은 흉노를 배제하고 천산남로의 오아시스 국가들을 거의 귀복시켰다. 이를 발판으로 이광리(李廣利)가 지휘한 한군은 중앙아시아의 파미르 高原을 넘어 한혈마(汗血馬)의 명산지 페르가나(大宛)까지 정벌할 수 있었다. 한혈마는 달리 때 피땀을 흘리는 용맹한 말이었다. 서역(西域)의 길을 개척하여 한을 세계제국으로 부상시킨 최대 공로자는 장건(張蹇)이었다. 그는 서역 여행 중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면서도 귀중한 서역의 정보를 수집, 본국에 보고했다. 그의 보고는 한의 세계정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BC 139년경, 그는 한 무제의 명을 받고 당시 이리江 유역에 있던 월지국(月氏國)과 동맹을 하고자 長安을 출발했다. 원래, 월지는 몽골고원 서부에 있던 유목국가였는데, 흉노의 공격을 받아 국토를 잃고 국왕의 목은 잘려 그 해골이 흉노 선우의 술잔이 되었던 만큼 흉노에 원한이 많았다. 장건은 도중에 흉노에 붙잡혀 10년간 포로 생활을 했지만, 탈출에 성공하여 대완·강거(康居)를 거쳐 아무다리아 北岸으로 다시 이동한 대월지에 도착했다(BC 129년경). 그러나 대월지는 흉노에 한과 더불어 흉노를 협격할 의사가 없어 동맹에는 실패하고 귀로에 올랐는데,또 흉노의 포로가 되었다. 때마침 흉노에 선우 후계다툼이 벌어지자 그 틈새에 그는 귀국할 수 있었다(BC 126년). 13년에 걸친 대모험이었다. BC 121년, 그는 오손과 공수동맹을 맺기 위한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장건은 이때 많은 금과 비단을 휴대하고, 황제의 부절(符節)을 가진 부사(副使)들을 수행시켰는데, 도중에 그들을 주변 여러 나라에 파견시켰다. 부사들은 서역 여러 나라의 사절·대상(隊商)들을 데리고 귀국했다. 장건의 여행에 의해 서역의 지리·민족·산물 등에 대한 지식이 중국으로 들어와서 동서간의 문화교류와 교역이 발전하게 되었다.
▲ 흉노 박물원 입구의 조형물. 왕소군과 호한야 선우가 손을 잡고 있다 呼韓耶(호한야) 선우의 굴복 한나라의 국력도 거듭된 정벌 때문에 피폐해졌지만, 흉노의 힘도 쇠잔해졌다. 한무제의 증손자인 선제(宣帝) 시대에 흉노에 내홍이 일어나 5인의 유력자가 선우를 다투었다. 2인 선우의 대결로 좁혀졌는데, 호한야(呼韓耶)와 질지(郅至) 형제의 골육상쟁이었다. 호한야는 질지와 싸우기 위해 한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漢이 호한야를 정통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호한야는 현재의 호화호특으로 돌아가서 흉노를 재통일했지만, 장기 내전의 여파로 인민들은 굶주리고 있었다. 드디어 호한야는 한에 항복, 장성을 한과 흉노의 국경으로 정하고, 흉노는 한에 대해 신하의 예를 취하면서 장성 계선의 방비 임무를 맡았다. 이에 대해 한은 매년 다액의 물자를 선우에게 지급하기로 했다. 이후 흉노는 한의 속국이 되었다. 甘露 3년(BC 51), 호한야는 長安에 들어가 스스로 번신(藩臣)이라 칭했다. 선제(宣帝)는 호한야의 궁중 석차를 황족과 모든 제후왕의 위로 하고, 양곡 3만4000 곡(斛)을 흉노에 급송했다. 호한야 선우가 두 번째 입조한 것은 BC 49년이었다. 이 무렵 선제가 죽고 황태자인 원제(元帝)가 즉위했다. 이번에도 호한야 선우는 긴급 원조를 요청했다. 한은 운중군과 오원군에서 보유하던 쌀 2만곡을 흉노에 보냈다. 민심을 얻은 호한야는 흉노 전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했다. 호한야 세력과 연합한 漢軍이 질지 선우를 공격, 살해한 것은 원제 建昭 3년(BC 36년)의 일이었다. BC 33년 1월, 호한야 선우는 세 번째로 입조했다. 이때 그는“漢 황실의 사위가 되어 양국의 친선을 깊게 하고 싶습니다”라고 청했다. 이에 원제는, “짐에게는 적령의 딸이 없다. 어떤 여자가 좋을까…”라고 되물었다. 황실의 여성 중에 흉노로 시집을 갈 희망자가 없었다. “어떤 여자냐고 물으셨습니까. 이번에 하사하신 오녀도(五女圖) 속의 가운데 여성이 좋습니다”라고 호한야가 대답했다. 초원의 군주는 이처럼 솔직했다. “오녀도라니?” 원제는 그런 것을 알지 못했다. 곁에 있던 환관의 설명으로 원제는 오녀도가 무언지 알게 되었다. 유목민인 흉노는 잦은 이동 때문에 빠오(텐트)를 치고 생활을 했다. 빠오는 대개 펠트로 만들고, 때로는 짐승 가죽을 그 위에 덧대기도 한다. 내부는 융단을 깔고, 벽걸이도 있어 의외로 쾌적하다. 이 무렵엔 한의 비단 그림이 벽걸이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한의 조정에서도 벽걸이 用의 비단 그림을 자주 하사했는데, 외교 담당자의 보고에 의하면 풍경화보다 인물화가 환영을 받고, 인물화도 신선도보다는 미인화(美人畵)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오녀도’란 5명의 궁녀를 모델로 삼아 궁정화가가 그린 미인화를 漢 조정에서 호한야 선우에게 증정한 것을 말한다. “그 여자를 불러라” 원제의 명으로 왕소군이 불려나왔다. “왜 이런 미녀가 여태에 내 눈에 띄지 않았는가!”라고 원제는 몹시 애석해 했다. 그러나 이미 흉노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해 버렸던 여자였다. 호한야 선우는 “상곡군(上谷郡)으로부터 서쪽 돈황군(敦煌郡)에 이르기까지 요새의 방비는 흉노 쪽에서 담당하여 한의 변경 경비를 담당하는 이졸(吏卒)을 제대시켜 천자가 백성을 휴양시키게 하고 싶다”고 자청했다. 王昭君은 흉노 땅에서 행복했다 왕소군은 장안을 떠나 북으로 향했다. 후세, 왕소군의 출새도(出塞圖)이라고 하면 수심에 가득한 얼굴로 비파를 안고 말 안장에 옆으로 탄 모습으로 정형화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녀가 꽃가마에 올라 말을 탄 호한야 선우의 호위를 받으며 지금의 호화호특으로 출발했다. 호한야는 손녀 나이의 왕소군이 하마 다칠세라 말에 태우지 않았던 것이다.
▲ 왕소군 묘역인 靑塚 안 '소군 박물원'에 걸려있는 '왕소군 出塞圖' 선우는 왕소군을 알씨로 삼았다. 알씨라는 것은 흉노의 말로 선우의 비를 의미한다. 알씨는 몇 사람이 있었지만, 측실이 아니다. 호한야는 흉노 호연왕(呼衍王)의 두 딸을 알씨로 맞이했지만, 동생이 大알씨였다. 왕소군에게는 영호(寧胡)알씨, 즉 흉노를 편안하게 하는 황비라는 존호가 부여되었다. 흉노의 땅에 들어온 왕소군은 행복했다. 유목국가에는 한나라에서 맛보지 못한 자유가 있었다. 그녀는 선우에게 승마를 배웠다. 승마가 좀 익숙해질 무렵, 왕소군은 임신을 했다. 왕소군이 낳은 아들은 이도지아사(伊屠智牙師)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노령의 호한야는 마치 아기의 생명과 맞바꾸듯 병사했다. 기원전 31년의 일이었다. 대알씨의 장남이 후계자가 되었는데, 그가 제15대 선우 復株累(복주루)다. 흉노의 관습에 의해 새로 등극한 선우는 자기의 생모 이외의 부친의 처첩을 모두 자기 것으로 삼는다. 왕소군은 복주루 선우의 품에 안겼다. 호한야 선우의 애무는 부드러웠고, 젊은 선우의 그것은 거칠기는 했지만 열정적이었다. 왕소군은 젊은 선우에 의해 여자의 성에 눈떴을 것이다. 복주루 선우와의 사이에는 2명의 여아가 태어났다. 장녀는 수복거차(須卜居次), 차녀는 당간거차(當干居次)라 불렸다. ‘居次’라는 말은 내친왕(內親王)을 의미한다. 왕소군이 흉노에 시집을 간 지 40년 만에 한은 외척 왕망(王莽)에게 찬탈되어 멸망했다. 한과 흉노는 그 사이에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왕소군의 제2의 남편 복주루 선우는 재위 10년에 사망했다. 그의 동모제(同母弟)가 계승, 제16대 수해(搜諧) 선우라 칭했다. 수해 선우는 재위 8년에 장안에 입조하는 도중에 병사하고, 大알지의 언니가 낳은 아들이 차아(車牙) 선우가 되었다. 차아는 재위 4년에 죽고, 그의 동모제인 오주류(烏株留)가 승계했다. 복주루·수해·차아·오주류로서 4대에 걸친 형제상속, 그것도 그들의 어머니가 자매관계이다. 오주류 선우는 21년간 재위했다. 흉노의 풍습으로는 부형(父兄)이 죽으면 그 후계자가 부형의 처첩을 차지하게 되어 있다. 이것을 수혼제(嫂婚制)라고 한다. 왕소군이 제2의 남편(복주루 선우)의 동생 3명과 실제의 부부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다. 흉노의 풍습으로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사서에 실리지 않은 지 모른다. 오주류 선우가 즉위 당시 왕소군은 40세를 조금 넘었을 나이였다. 오주류 선우 재위 20년 우골도후(右骨都侯)로서 국정을 장악했던 당(當)이라는 인물은 왕소군의 사위(장녀 須卜居次의 남편)였다. 흉노와 신라의 婚風은 동일 필사본 <花郞世紀>에 따르면 신라 황실의 혼풍이나 섹스관행도 흉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예컨대 신라 화랑의 대모(代母)였던 미실(美室)은 진흥왕, 동륜태자, 진지왕, 진평왕 등 왕과 그 후계자를 잠자리에서 모셨다. 진평왕의 장녀 천명공주(天明公州)는 남편 김용수(金龍樹)가 병사하자 김용수의 동생 김용춘(金龍春)의 아내가 되었다. 이는 父兄이 죽으면 그 처첩을 물려받는 흉노의 수혼제(嫂婚制)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 신라 제29대 왕 무열왕 김춘추(金春秋)는 김용수와 천명공주의 아들이다. 호화호특은 호한야 이후 흉노의 선우정(單于庭)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원래, 궁전이나 궁성을 축조한 적이 없는 만큼 그런 유적이 남아 있을 리 없다. 선우도 이동식 빠오(궁려)에서 기거했기 때문이다. 호화호특 남쪽에 있는 왕소군의 묘는 내몽골 최고의 관광지가 되어 있다. 주변은 황량한 황토지대이지만, 그녀의 묘역만은 초목이 무성해 청총(靑塚)이라고 불리고 있다. 절세미녀의 무덤에 걸맞게 매우 예쁘고 아늑하게 조성되어 있다(사진 참조).
▲ 王昭君의 석상. 사진 오른쪽 뒤 정상에 정자가 있는 봉우리는 왕소군의 묘인 靑塚 묘역 안 ‘昭君박물원’ 2층에는 여러 점의 ‘왕소군 출새도’가 걸려있는데, 모두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다. 이곳에는 5세기 西로마제국과 東로마제국을 약탈하고 막대한 보물을 조공품으로 받아낸 흉노의 수장 아틸라의 그림, 한·흉노전쟁지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왕소군의 사망년도는 역사에 누락되었다. 만약 왕망의 찬탈에 의해 한이 멸망했을 때까지 왕소군이 살아 있었다고 해도 60세 전후였다. 왕망의 유교적 형식주의에 의해 흉노와의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었다. 고조 이래 한은 선우에게 ‘匈奴單于之璽(흉노선우지새)’라는 인장을 주었는데, 흉노에 대한 대우가 지나치다고 판단한 왕망은 흉노를 降奴(항노), 璽를 章(장)으로 고쳐 발급했다. 원래 璽는 황제의 印 이외엔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호한야 선우 이후 흉노가 한에 복속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굳이 降 자를 썼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왕망은 개명(改名) 마니아였다. 長安을 常樂(상락)으로 고친 것은 그렇다 치고, 동방의 고구려(高句麗)도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해 下句麗(하구려)라고 고쳐 불렀던 것이다. 특히 왕망은 흉노 땅에 15명의 선우를 세워서 분열시킨다는 비현실적인 분리통치책을 감행하려 했다. 약 60년간 평화를 누리던 북변의 땅은 갑자기 봉화의 연기가 연이어 오르고 군마가 울부짖고, 인골이 흩어져 있는 모습으로 변했다. 왕망은 왕소군의 첫째 사위인 當(당)을 선우의 위에 올리려는 공작을 진행했다. 當이 병사하자 이번에는 왕소군의 장녀 수복거차의 아들 사(奢)를 선우로 세우려고 했다. 그러나 반란군이 중국 곳곳에 일어나 장안에 들어와 왕망을 주살했다. 이로써 왕망이 창업한 新은 15년만인 BC 8년에 망했다 1000km 군사도로 直道(직도) "산을 깎고 계곡을 메워 개통시킨 직도는 참으로 백성을 혹사하여 건설된 것이었다"(사마천의 '사기') 南北 흉노의 분열 광무제 유수(劉秀)가 창업한 후한(後漢)은 전통적인 국책에 따라 우선 천산남로(天山南路)의 오아시스 제국을 초무하여 이곳으로부터 흉노의 세력을 일소했다. 다시 흉노의 내부에 반란이 일어나고 포노(蒲奴) 선우의 종형 일축왕(日逐王)이 자립, 선우를 자처해 두 선우가 병립해 다투었다. 일축왕은 한에 투항을 요청, 광무제는 일축왕과 그 집단을 장성 남쪽으로 옮기게 해서 북변의 방어를 맡겼다. 이것을 南흉노라고 했는데, 이로써 흉노는 남북으로 분열했다. 몽골에 머물고 있던 北흉노는 외몽골 오르곤 강반에 선우정(單于庭)을 설치하고 西아시아 방면과의 교통로이던 천산남로를 놓고 후한과 자주 싸웠다. 이런 시기에 동방에서 흉노의 지배를 벗어난 선비족은 흉노를 습격해서 優留 선우를 죽이고, 북방의 정령, 남방의 남흉노도 이런 기회를 타고 북흉노를 공격했다. 이에 北흉노는 버티지 못하고 알타이 산중으로 들어갔으나 한·남흉노 연합군의 토벌을 받고, 몽골의 땅을 버리고 천산북로· 이리 강반으로 도주했다. 이것이 유럽에 나타나 로마·게르만 세계에 민족대이동을 일으킨 원동력이 되었던 훈족이었다. 이리하여 몽골 지방은 동방으로부터 진출해 온 선비족이 점령하게 되었고, 흉노의 잔류 부족은 겨우 오르도스 일대에 산재하게 되었다. 필자 일행은 오르도스 답사에 앞서 내몽골자치주 포두시(包頭市)에 들렀다. 包頭박물관은 다양한 암각화 전시로 유명하다. 춘추시대의 인물상(人面像) 암각화, 西夏시대의 草原牧歌(초원목가) 암각화 등이 인상적이었다. 單于天降(선우천강)이라는 글자가 양각된 기와(瓦當), 손잡이 달린 흉노시대의 청동제 훈로(薰爐) 등도 눈길을 끈다.
▲秦의 直道의 종점인 包頭市 九原 麻池城 유적 황하 만곡부(彎曲部)의 북안에 위치한 포두라면 漢代의 오원군(五原郡)이다. 포두시의 남쪽에는 한대의 마지성(麻池城)의 유적이 있다. 마지성이야말로 오원군의 치소(治所)였던 九原이다. 마지성에서 서남쪽으로 가면 황하가 흐르고, 지금도 도선장이 있다. 마지성 마을에 찾아오니 더러‘九原…’이라 쓰인 간판이 눈에 띈다. 구원이라면 <삼국지>에 등장하는 인물 중 騎射 등 격투기에 가장 능통했던 呂布(여포)의 고향이다. 예컨대 여포는 유비(유비)·관우(關羽)·장비(張飛)가 한꺼번에 달려들어도 격파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인물상 세우기를 좋아하는 중국인이지만, 포두 시내뿐만 아니라 마지성 마을에서도 여포의 기마상 같은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자신이 양부로 섬기던 丁原과 董卓을 죽인 여포는 악당으로서 오랜 세월에 걸쳐 중국인의 미움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생애는 배신의 연속이었다. 그는 처음 병주(지금의 산서성)자사 정원을 양부로 섬겼으나 동탁의 꼬임을 받아 정원의 목을 베고, 동탁의 부하가 되었다(189년). 동탁은 궁술과 마술에 있어 당대 제1인자인 여포를 양자로 삼았다. 그는 적토마(赤免馬)를 타고 일세를 풍미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사람 중에 여포, 말 중에 적토”라면서 그의 무용을 찬탄했다. 헌제(獻帝)를 옹립해 발호했던 동탁은 드디어 찬탈을 기도했다. 이를 막으려 했던 사도 王允은 동향 출신 여포를 이해(利害)로써 포섭했다. 때마침 여포는 동탁의 시비(侍婢)와 통정하는 현장이 발각되어 동탁으로부터 어떤 처벌을 받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상황이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왕윤이 절세미녀인 그의 수양딸 초선을 여포에게 먼저 시집보내겠다고 약속한 뒤 동탁의 첩으로 보냈다. 여포의 질투심을 불지르기 위한 왕윤의 계교였다. 이에 분노한 여포가 동탁의 목을 베었지만, 초선은 가공인물이다. 흔히 중국인들은 춘추시대 말기 吳王 부차를 망국의 군주로 몰락시킨 서시(西施), 흉노 선우에게 시집 간 왕소군, 唐(당) 현종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유발시킨 양귀비(楊貴妃)와 더불어 초선을 중국의 4대 미녀로 손꼽고 있지만, 이 가운데 초선만은 역사 인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초선의 고향이라는 감숙성 주천(酒泉)에 가면 초선의 동상까지 세워놓고 있다. 중국인에게는 <삼국지연의>의 픽션도 역사의 사실인 것처럼 믿으려는 정서가 있다. 여포의 출신성분은 불명이지만, 그의 출신지가 북방 초원지대인 九原이고, 騎射에 능숙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기마민족의 피가 섞인 호한잡종(胡漢雜種)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호족들은 어릴 때부터 안장은 물론 鐙子(등자)도 없는 나마(裸馬)의 등에 올라 사타구니를 바짝 조인 채 달리면서 낮은 자세로 활을 쏘았다. 중국에서 등자가 처음 등장한 것은 5세기였다. 여포가 활약했던 2세기 말에는 등자가 없었던 만큼 어릴 적부터 기사를 익혀오지 않은 漢族이 달리는 말 위에서 활을 쏘거나 창을 휘두르면 낙마의 위험이 높았다. 당시는 의술이 발달하지 않아 낙마하면 치명상을 입게 마련이었다. 북방민족의 중국 移住 북방민족의 중국 이주는 각 시대에 걸쳐 많든 적든 진행되었다. 북방민족의 침입에 앞서 최초의 大이주가 시작된 것은 실은 후한 광무제 때 남흉노의 장성 이남 이주(移住)를 들지 않을 수 없다. 후한 말기, 그들 여기에서 그들은 선우를 받들던 옛 씨족적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여 한의 郡縣과는 別계통의 자치적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인구 증가에 의해 생활난에 빠진 끝에 씨족으로부터 탈퇴, 한의 군적에 드는 자도 많았다. 후한 말, 동탁과 정원이 헤게머니를 다툰 것은 감숙성·청해성에 이주해 있던 티베트계 강족을 병력으로 삼았던 세력(동탁)과 산서성 중부 이북과 내몽골 일대에 이주해 있던 南흉노·선비족 병력을 거느린 세력(丁原)의 다툼이었다. 특히, 한의 북변인 幷州는 중앙에 위치, 그 동쪽은 기주(冀州), 서쪽은 양주(凉州)였다. 동탁은 병주자사 정원을 살해한 후 凉·冀 2州의 호기(胡騎)를 장악, 수도 낙양(洛陽)에서 마음대로 정권을 농단했던 것이다. 후한 천하의 분열을 초래한 것은 동탁이었고, 동탁의 사후에 그 지위를 계승했던 인물이 조조(曹操)였다. 동탁에 의해 시작된 胡騎의 천하 횡행이야말로 중국의 고대사적 발전을 정지시켜 중세적 분열에 빠뜨린 제1보로 평가되고 있다. 조조는 동탁의 옛 부하인 호병을 거둬들였을 뿐만 아니라 새로 유목민 기병을 징발하여 대열에 가담시켰다. 그 하나는 병주의 흉노부족이고, 그 둘은 요서(遼西)의 오환(烏桓) 부족이다. 오환은 선비와 함께 동호의 후예이며, 요서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다. 조조는 기주를 출발해 오환의 본거지 柳城(유성: 지금의 요녕선 朝陽)을 급습하여 선우를 죽이고, 1만여 落(1락은 약 20명)을 붙잡아 기주 내부로 옮겨놓고 그 중으로부터 징집한 오환 돌기(突騎)는 당시 천하의 정예로 일컬어졌다. 북방민족의 중국 이주의 사례로 다소 자세하게 여포를 거론했지만, 포두는 진한(秦漢)시대엔 내몽골 최대의 교통요지였다. 장안 교외의 별궁인 감천궁(甘泉宮)으로부터 포두까지 길이 약 1000km의 군사도로인 직도(直道)가 건설되어 있었다. 직도는 진시황의 명에 의해 장군 몽념(蒙恬)에 의해 축조되어 한 무제 때 흉노 정벌을 위한 병력·병참의 수송로로 사용되었다.
▲秦의 直道 관문 한 무제도 국내 순행 후 직도를 통해 장안으로 귀경했는데, 이때 사마천은 사관(史官)으로서 무제를 수행했다. 사마천의 관심은 장성과 직도 건설에 투입된 엄청난 노력과 그것을 실행한 몽념의 운명이었다. 사마천의 <사기>몽념 열전에는 그때의 인상이 기록되어 있다. <나는 북변에 가서 직도를 통해 돌아왔다. 그곳에 가서 몽념이 건설한 장성의 모습을 보았다. 산을 깎고 계곡을 메워 개통시킨 직도는 참으로 백성을 혹사하여 건설된 것이었다> 몽념 열전에서는 환관 조고(趙高)가 위조한 진시황 명의의 조서를 받은 태자 부소(扶蘇)가 자결한 데 이어 몽념도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그때 목념의 유언이 기록되어 있다. 몽념은 한숨을 쉬면서, “나, 몽념의 죄는 죽어도 당연하다. 임조(臨조: 감숙성)로부터 요동까지 만여리의 장성과 직도를 축조하면서 지맥을 끊은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라고 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논찬(論贊)에서 몽념의 인식을 통렬하게 비판했다. <천하의 민심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던 만큼 진의 명장이라면 강력하게 간(諫)하고 백성의 화합에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의 뜻에 영합하여 토목사업을 일으켰다. 몽념과 몽의(蒙毅) 형제가 주살된 것은 당연하다. 어찌해서 지맥을 끊은 탓으로 돌릴 것인가> 황하의 大彎曲部를 건너 진의 직도 유적이 남아 있다는 오르도스(鄂爾多斯)시 동승구(東勝區)를 답사하기 위해 마지성에서 남하하여 황하 위에 걸린 포두 황하 제1대교를 건넜다. 휴대용 GPS 로 이곳 황하를 측정해 보니 高度(고도) 1005m, 북위 40도 31분, 동경 109도 54분이었다. 황하 만곡부는 고원지대를 흐르고 있는 것이다.
▲비에 젖은 황하. 包頭市 남방 황하 만곡부에서 갑자기 대교가 무너질 듯 흔들렸다. 철광석을 만재한 대형 트럭들이 무서운 속도로 내리꽂을 듯 달려왔다. 대교의 바닥은 트럭에서 떨어진 철광석 등으로 시커멓다. 삐긋하면 트럭에 깔릴 판이었다. 황급히 황하 남안으로 달려와 미니버스에 올랐다. 포두는 현대 중국 유수의 철광 산지이다. 오르도스는 황하 만곡부 안쪽에 들어있는 고원지대로 초원·사막·황무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넓이가 함경남·북도를 제외한 한반도의 면적만 하다. 잡초 이외엔 간간히 속성수인 미류나무의 一字 행렬로 불모지를 면할 정도였다. 가는 길에 샹샤완 사막에 잠시 들렀다. 태고엔 황하 연변에는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황무지가 되고 말았을까. 원래 중국 북부 내륙지방은 연간 강우량이 500mm 이하의 건조지대다. 그럼에도 황하는 세계 4대 문명을 일으킨 중국의 어미 땅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내륙의 황하 양안을 거친 땅으로 만든 주범이다. 고대 중국인은 경지를 늘리기 위해 산림을 파괴했다. 특히 전국시대 이후 계속된 전란기에 부국강병을 위해 철제의 농기구와 무기를 대량 생산했다. 19세기 말기까지 그러했지만, 철을 생산하기 위한 연료로서 산림 목재가 대량으로 소요되었다. 이 때문에 황하의 산림들은 크게 훼손되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외국 원정을 가장 많이 해 최대의 전과를 기록한 한 무제의 시대는 중국의 피크이자 쇠락의 출발점이었다. 한 무제 이후 세계사에 기록될 만한 漢族 국가의 영광은 재현되지 않았다. 사마천은 무제의 잦은 원정과 토목사업, 그리고 순행과 봉선(封禪)에 의한 재정의 피폐상을 기록했다. <사기>평준서(平準書)에 따르면 무제가 즉위하기 전까지 왕조의 창고와 府에는 곡물과 돈이 넘쳐나 곡물뿐만 아니라 동전의 꿰미가 썩어 고약한 냄새를 풍길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무제 때, 잦은 주변국 정벌로 인한 과도한 군사비 지출로 작위를 팔고, 사형수도 돈만 바치면 사면해 주며, 소금과 철의 국가 전매(專賣) 제도를 단행했다. 미니버스의 중국인 운전사와 조선족 가이드는 구릉과 초원·사막을 이리저리 헤매면서 끝내 직도의 유적지를 찾지 못했다. 지나가는 택시를 앞장세워 직도 유적지에 도착했다.
▲秦 직도 재현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東勝 외곽의 직도 유적지는 오랜 침식작용에 의해 폐허화했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왔는데, 유적 복원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다. 엄청난 크기의 관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관문 현판에 예서로 秦直道(진직도)라고 씌어 있다. 관문 남쪽으로 10차선이 될 만한 곧은 도로가 몇 km 뻗어 있다. 아무튼 최근 중국은 역사 현장의 복원에 열정적이다. 그러나 너무 번듯하게 만들어 유적지의 느낌은 들지 않았다. 직도 관문에서 GPS로 측정해 본 결과 고도 1530m이다. 직도 유적의 답사 후 우리 일행은 오르도스 시내로 되돌아와 1박하고, 다음날 오르도스 청동기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흉노 선우의 금관은 우리 경주의 서봉총(瑞鳳冢)에서 발굴된 신라 금관처럼 새가 한 마리가 날렵하게 올라앉은 형태이다. 신라김씨와 흉노의 친연성(親緣性)을 다시 한번 실감케 했다(도록 사진 참조).
▲태양신 벽화 및 금관 흉노는 궁려(穹廬)라는 방차(房車)를 타고 이동하면서 생활했던 만큼 차마구(車馬具)가 발전한 나라였다. 마구에는 동물 의장(意匠)을 베풀어 아름답게 장식되었다. 생활용품과 도구는 비교적 간소했다. 흉노의 기본 병기는 궁시(弓矢)였다. 활은 처음엔 짧은 만궁(彎弓)이었으나, 후에는 중국풍의 장궁(長弓)을 사용했다. 흉노의 독창적인 화활촉은 뿔로 만든 명적(鳴鏑)이다. 광활한 초원의 전투에서 신호용으로 사용되어 효시(嚆矢)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날“무엇을 처음 했다”고 할 때 효시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변형 더듬이식 머리 청동단검 및 고리머리 청동단검 단검도 많이 진열되어 있다. 흉노의 검은 스키타이(흑해 연안의 기마민족국가) 및 고대 페르시아의 아키나케스와 동형의 경로도(俓路刀)이다. 청동제의 투구·찰갑(刹甲) 등 武具도 매우 화려했다. 오르도스의 거대한 칭기즈칸 무덤 몽골족 의상을 입은 소녀 복무원은 양고기와 양유를 먹고 살아선지 탄력적인 몸매였다. 칭기즈칸과의 인연 몽골제국의 창업자 ‘칭기즈칸의 능(陵)’의 소재는 不明이라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오르도스시 남부 이금곽낙진(伊金霍洛津)에 거대한 ‘칭기wm칸 무덤’을 조성해 놓고 있다. 오르도스까지 와서 이곳을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이곳은 칭기즈칸과 무슨 인연이 있는 땅일까? 칭기즈칸은 현재의 감숙성과 오르도스에 위치한 西夏國(서하국)를 정벌하러 갔다가 병이 들어 회군하던 중 사망했다. 혹시 사망 장소가 이금곽낙진 부근인지 모르겠다. 이곳은 섬서성 북부 지역인 유림시(楡林市)와의 경계지역이다.
▲ 몽골 窮廬(궁려) 형태로 조성한 칭기즈칸의 무덤. 오르도스의 伊金霍洛津 소재. ‘칭기즈칸릉’의 참배도는 남경(南京)에 있는 明 태조 주원장(朱元璋) 무덤만큼이나 길다. 한참 계단을 걸어가 빠오 형태의 능에 이르렀다. 빠오 내부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입구는 칭기즈칸 관련 대형 기록화로 장식되어 있다. 몽골제국 시대의 무기류·생활용구도 전시되어 있다. 무덤 아래쪽에는 돌무더기가 쌓여 있는 서낭당도 만들어 놓았다. 참배도를 내려오다 몽골족 의상을 입은 소녀 복무원을 만나 기념촬영을 청했더니 대번에 팔장을 끼고 포즈를 취해 주었다. 양고기와 양유를 먹고 광활한 초원에서 거침없이 살아온 때문인지 그녀는 탄력적인 몸매였다. 팔장을 끼고 안겨드는 그녀에게 부딪친 필자의 몸이 오히려 튕겨 나갈 정도였다. 이렇듯 몽골족은 남녀 불문하고 대개 힘이 세고 직정적이다. 문득, 공민왕의 몽골족 왕비 제국대장공주가 머리에 떠올랐다.
▲ 몽골제국을 일으킨 칭기즈칸의 기마상 몽골제국의 간섭을 받았던 고려 말기 100년 동안 고려왕은 몽골 황실의 딸을 왕비로 맞았다. 그 시기에 우리 민족과 몽골인은 피가 많이 섞이고 문화교류도 빈번했다. 따지고 보면 韓民族과 몽골족의 선조들은 애시당초 대흥안령산맥을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에 살았기 때문에 이웃 4촌간이라고 할 만하다. 隋·唐제국의 子宮武川鎭 오르도스에서 호화호특으로 되돌아갔다. 호화호특 북부에 위치한 무천진(武川鎭)을 답사하기 위해서였다. 무천진이라면 수(隋)·당(唐) 황실의 출발지이기 때문이다. 무천진 군벌은 북위·서위·동위·북제·북주 등 북조(北朝)에서 12명의 대장군을 배출했다. 수 文帝나 당 高祖의 집안은 원래 무천진 군벌이었다. 문제 양견(楊堅)이 수를 창업한 이후 무천진 군벌 출신 여덟 집안은 팔주국(八柱國)으로 출세했다. 양제(煬帝)가 3회에 걸친 고구려 원정에서 패전하여 전국 곳곳에서 내란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을 때 당의 창업자 이연은 太原유수로서 변경을 지키고 있었다. 사적으로 치면 이연에게 양제는 외가로 4촌간이다.
▲ 수·당 皇家의 子宮인 武川鎭 거리 수 양제는 그가 건설한 대운하를 타고 내려가 양자강변의 양주에서 머물고 있었다. 태원에서 거병한 이연엔 세 가지 계책이 검토되었다. 첫째, 양주로 내려가 양제를 사로잡는 것, 둘째 대운하를 통해 올라온 강남의 양곡 창고가 집중되어 있는 부도(副都)인 낙양을 차지하는 것, 셋째 무천진 군벌이 이주해 있는 수도 장안에 들어가 그들의 협력을 얻는 것이었다. 결국, 이연은 2남 이세민(李世民)의 진언을 받아들여 장안으로 진군했다. 이때 병력이 부족했던 당은 당시 북방 초원지대의 패권국 돌궐로부터 기병 3000기를 지원받았다. 이것이 창업 초의 당이 돌궐에게 조공을 했던 까닭이다. 무천진 군벌을 거론하자면 중국 최초로 기마민족 정복국가를 건설했던 북위(北魏)를 살펴 보지 않을 수 없다. 북위는 선비족의 척발(拓跋)씨의 나라였기 때문에 척발위라고도 한다. 북위의 첫 수도는 세 번 옮겼다. 첫 수도는 호화호특의 동부 지역인 성락(盛樂)이었고, 두 번째의 수도가 산서성 大同, 세 번째의 수도가 하남성 낙양이었다. 척발위는 반목반농(半牧半農)의 기마민족 출신이면서도 화북(華北)을 통일한 후 중국화정책을 강화해 갔다. 문화가 서로 다른 한족·호한혼혈인·여러 기마민족을 지배하게 되면서 중국식 제도가 국가경영에 가장 효율적임을 깨달았다. 이와 같은 경향은 효문제 때(494년)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더욱 철저하게 시행되었다. 첫째, 胡服·胡語의 금지. 모든 북족(北族)에게 그들 고유의 언어·풍속을 버리게 하고, 예제는 물론 언어까지 중국어를 채택했다. 둘째, 북족의 姓 금지. 척발·독고(獨孤) 등 2字 이상으로 된 복성을 금지하고, 중국풍의 1字 성으로 고치게 했다. 國姓인 척발씨도 스스로 元씨로 개성(改姓)했다. 선비족 유력부족의 8姓(穆陵씨·步六孤씨·尉遲씨 등)은 중국의 명문 4姓(盧·崔·鄭·王)으로 바뀌었다. 셋째, 북족·중국인 간의 통혼의 장려. 효문제 스스로도 중국 4대 명문의 딸을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넷째, 북족의 분리. 평성(平城: 현재의 大同)과 그 부근에 살던 선비족 등 북족, 이른바 代人의 다수를 하남성으로 옮기고 낙양인으로 간주하여 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고, 죽어도 낙양의 북망산(北邙山)에 묻도록 했다. 이로써 선비족은 평성을 중심으로 북방에 거주하는 북족, 이른바 ‘北鎭 충실’을 위해 장성지대에 이주된 북족, 낙양 등 하남에서 이전한 북족 등 몇개의 그룹으로 분리되었다. 이와 같은 정책에 의해 척발위 내부 북족의 중국화가 사회적·문화적으로, 또한 혈액적으로도 강행되어 결국 북족적인 것이 모두 박탈되었다. 알몸이 된 그들은 중국사회, 중국문화 속에 몰입했다. 이는 정복왕조로서의 척발위 자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한 자살적 행위였다. 이리하여 북족 무인들 사이에 불만과 반발이 팽배해졌다. 중국에 최초로 기마민족 정복국가 세운 선비족 척발위를 개창한 도무제가 중국적 군현제를 시행하기 위해 선비 등 북족의 부족제를 폐지했을 때 평성 주위에 8國制를 설치, 북족의 분산을 막고, 그들의 관리 등용의 길을 열어두었다. 그러나 척발위가 북중국 통일사업을 진행해감에 다라 중국인 관료가 정치의 주류를 차지해 북족은 중앙권력의 자리에서 멀어져갔다. 한편 유연(柔然) 등의 발흥으로 장성 지대의 수비가 중요하게 되면 그들은 무천진 등에 배치되어 팔국제도 급속히 축소되어 효문제 시대에는 사실상 8國制는 붕괴했다. 이로써 북족의 다수는 하급 군인으로서 생계가 어려운 천민으로 전락했다. 서기 519년에는 제도상으로도 그들에게는 임관의 길이 막혀버렸다. 중국인 대신의 이같은 계획에 격분한 금위군이 폭동을 일으켰지만, 실권자인 중국인 출신 영(靈)태후는 미온적으로 대처, 척발위의 권위도 실추했다. 한편 북방 방비를 위해 가족을 데리고, 무천진 등 북진에 이주했던 북족계 귀족들도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귀족으로서의 권위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고 노역에 동원되었다. 더욱이 중앙으로부터 파견되어 있던 진도대장(鎭都大將) 이하 간부에게 농지를 빼앗긴 진민(鎭民)이 생활고에 허덕이다 자살하는 비극이 자주 발생했다. 그래서 한번 한곳의 진민이 거병하면 여러 진에서 호응하여 대반란이 되었다. 더욱이 북방으로부터 柔然·高車·鐵勒 등의 침구가 잦았는데, 이를 방어하는 것은 북진의 북족에 다름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척발위의 조정에서는 북족 출신자를 중용하지 않았다. 이에 그들의 마음은 조정을 떠났다. 이때 북족의 인심을 모은 흉노계 호족 이주영(爾朱榮)이 낙양을 공략하여 척발위의 황제·태후·귀족 수천 명을 학살했다. 이로써 척발위는 사실상 멸망했다. 중국에 있어서 최초의 정복국가인 척발위는 중국인민의 통제에는 성공했지만, 정복자인 자기 민족인 북족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와해되었던 것이다. 척발위는 내분으로 동위·서위로 분리되고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간판을 바꾸었다. 북주는 곧 북제를 병합했다. 그러나 북주는 외척 양견에게 찬탈되어 중국은 수의 천하가 되었고, 무천진 군벌의 협조를 얻은 당이 수의 강산을 탈취해 버렸던 것이다. 따라서 수와 당의 子宮은 무천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음산(陰山)산맥의 1750m고지를 넘어 무천진에 도착했다. 북방의 靑山만 넘어가면 외몽골의 초원지대이다. GPS 측정결과 무천현은 북위 41도 5분, 동경 111도 27분에 위치한 고도 1604m의 분지였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몬순의 영향으로 습윤(濕潤)지대에서 살고 있는 우리 일행은 비를 몰고 온 듯했다. 포두의 황하대교를 건널 때, 샹샤완 사막, 그리고 무천진에 들어와서도 잠간이지만 반가운 비가 내렸다. 내륙건조지대에서 만난 비는 가랑비 정도였지만, 여간 상쾌한 것이 아니었다.
▲ 수·당 호화호특市 북쪽 음산 산맥 기슭에 있는 戰國시대 趙 長城 무천진 시가지는 개척시대의 읍내처럼 황량했다. 읍내엔 전력회사의 고층건물, 술집, 잡화점 등이 ‘武川…’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다. 척발위 당시 북족의 군사시설 유적 등은 찾지 못했지만, ‘武川’이라는 이름만으로 감회가 깊었다. 가게에 들러 기념품으로 백주 한 병을 샀는데 이름이 무골(武骨)을 다수 배출한 지방의 술답게 ‘무황(武皇)’이었다. 수·당의 황가를 흔히 한족으로 알고 있지만, 무천진에 오면 그들의 선조가 북방기마민족 혹은 호한잡종인 것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그들의 행태가 그러했다. <수서>에 따르면 양제는 아버지 문제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양제가 문제의 병석에 들어간 지 얼마 후 “악!”하는 비명 소리가 밖으로 새어나왔고, 문제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법은 다르지만 모돈과 양제는 살부(殺父)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또 바로 그날 밤, 양제는 문제가 총애하던 陳부인을 품에 안았다. 이것은 호한야 선우의 아들 복수루 선우가 왕소군을 처로 삼았던 혼풍과 마찬가지다. 당 고조의 차남 이세민은 형과 아우를 죽이고 아버지를 퇴위시켜 황제로 즉위했다, 그가 태종(太宗)이다. 태종의 아들 고종은 부황과 잤던 武씨를 황후로 삼았다. 그녀가 고종과 함께 당을 공동통치한 측천무후(則天武侯)이다. 고종 사후 측천무후는 고종의 아들을 퇴위시키고 중국 최초의 여제(女帝)가 되었다. 유교의 관점에서 보면 흉노·선비 등 북족의 혼풍(婚風)은 해괴망측한 것이다. 이 점에서는 신라김씨의 그것도 마찬가지다. 일례를 들면 신라 화랑의 대모 美室은 진흥왕·동륜태자·진지왕·진평왕과 모두 성 관계를 가졌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대가야 공략에 제1공을 세운 화랑 사다함의 애인이었고, 제0대 풍월주 설원랑(薛原郞)의 정부였다. 이런 혼풍에 대해 흉노 선우의 측근 중행열(中行說)은 “그것은 宗姓(종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환관 중행열은 한 조정에서 억지로 흉노에 사신으로 파견하자 이에 앙심을 품고 흉노에 귀순하여 한에 대해 갖가지 복수를 했다. 그런 그가 한의 사신을 만나 흉노의 혼풍에 대해 논쟁을 하는 자리에서 위와 같이 말한 것으로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 정확한 의미는 잘 모르게만, 흉노 선우 가문인 연제(攣:虛連題)씨나 신라김씨 왕가는 모두 자손을 번성시키기 위해 난교(亂交)에 관대했던 것 같다. 따지고 보면 신라의 만장일치제 회의체인 和白회의도 몽골의 쿠릴타이 등 북족의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선비족이 남긴 세계문화유산 가장 유명한 것은 제20석굴의 大佛. 北중국에 군림했던 선비족 황제의 존엄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세계 最古 목탑 응현塔 우리 일행은 호화호특 박물관을 둘러본 뒤 산서성 대동시로 이동했다. 앞에서도 썼지만, 대동에는 흉노의 모돈 선우가 漢고조 유방을 위기에 몰아넣었던 평성과 백등산의 소재지이고, 중국의 5악 중 항산(恒山)과 북위 때 조성된 운강석굴(雲岡石窟)도 교외에 위치해 있다. 우선, 대동시 교외에 위치한 응현 목탑을 보러갔다. 이 목탑은 요나라 때 건설된 목탑으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요는 중국사상 두 번째로 기마민족정복국가를 세운 거란족의 나라다.
▲중국사상 두번째의 기마민족 정복국가 遼(요)나라 때 세운 應縣(응현) 목탑. 세계 목탑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세계문화유산이다. 大同市 응현 소재. 목탑을 대충 둘러본 후 갈증 때문에 생수를 사 마시려고 요대가(遼代街)에 있는 초시(超市)에 들렀다. 초시란 슈퍼마켓의 중국식 표기이다. 한강물에 길들어져 온 필자에게 중국제 생수는 왠지 역겨웠다. 대신에 캔 맥주를 구입하니 미지근했다. 캔 맥주를 냉장고에 집어넣어 급속 냉동을 시켜 놓고 기다리면서 냉장고 옆 의자에 앉아 응현목탑을 응시했다. 매우 우아했다. 초시에서 치약과 수건을 구입했다. 중국의 경제발전에 따라 생필품의 질도 크게 향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친절한 초시 종업원은 필자가 구입한 수건을 얼음물로 차게 해 필자의 목에 둘러주었다. 몹시 시원했다. 응현목탑을 뒤로 하고 대동시의 동남 62km(渾源縣)에 위치한 항산(恒山: 표고 2016m)을 찾아갔다. 수목이 거의 없는 바위산이다. 암벽에 매달아 지은 현공사(懸空寺)의 모습은 교묘하다. 지급터 1400여년 전인 북위 말기에 창건했다고 한다. 석가모니·노자(老子)·공자(孔子)를 1실에 모신 특이한 사찰이다.
▲秦漢시대의 五岳 가운데 북악이었던 恒山과 암벽에 매달아 지은 懸空寺. 북위 말기에 창건되었다. 산서성 大同市 渾源縣 소재. 후세엔 바로 남쪽 흔주시에 있는 오대산이 더 유명하지만, 한대엔 항산이 5악 중 북악이었다. 진시황 및 한무제 일행은 이 항산에 올라와 토지의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항산에서 북상하여 대동시내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다음날, 서쪽 교외에 위치한 운강석불로 향했다. 가는 길에 시가지의 교통표지판을 보니 평성대로(平城大路)라고 씌어 있다. 평성은 한 고조 때 중진(重鎭)이었고, 선비족의 정복국가 척발위의 두 번째 수도였다. 현장에 도착해서 앞산을 바라보니 중턱에 40여개의 석굴이 파여 있고, 그 위 산등성이에는 明代에 축조한 보(堡)가 운강석불을 보호하는 병풍처럼 감싸고 있다. 북위 때는 태무제(太武帝) 때 잠시 탄압하기는 했지만, 불교문화의 전성기였다. 그를 이은 문성제(文成帝)는 불교 부흥의 방침을 확실히 하고, 승려 담요(曇曜)를 사문통(沙門統)으로 삼고, 그의 발의로 운강석굴을 조성했다. 운강석굴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 大同市 서쪽 운강석굴의 제20굴의 석가모니像. 선비족 북위 때 건설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석존상의 얼굴은 그의 부조(父祖) 5帝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대불의 크기는 15m 전후이다. 운강의 제16 석굴로부터 제20 석굴의 대불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제20 석굴의 대불이다. 오전 10시, 햇빛이 잘 받는 제20호 석굴부터 다가갔다.
▲ 제20 석굴의 大佛 대불에서는 北중국에 군림했던 선비족 황제의 존엄성을 강렬하게 표현했다. 전체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을 주면서도 눈에 검은 색의 玉을 끼워 넣어 생동감이 넘친다. 척발위의 불교가 어떤 성격의 것이었는지는 불상과 불사를 조영할 때의 원문(願文)과 당시에 가장 존숭된 불경의 내용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가장 존숭된 金光明經(금강명경)은 황실의 상복(祥福)와 국가의 진호(鎭護)·안태(安泰)를 기원하는 의식이 가득 차 있다. 漢族·漢字라는 용어의 起死回生 운강석굴에서 나와 평성의 유적을 답사하러 나섰다. 대동시내 서북부에 평성의 토성과 봉수(烽燧)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漢代의 제도에서는 소규모 봉수라면 대개 3-4명, 큰 봉수에는 10-15인의 병사가 숙영하도록 되어 있다. 봉수는 적 침입 등 긴급사태가 발생하면 경보를 발령하는 제1선이다. 봉수대는 자체 방벽을 갖추었다. 대동은 주위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큰 분지이다. 한고조 유방이 흉노의 모돈 선우에게 포위당했던 백등산은 이름이 바뀐 데다 관광지에서 제외된 탓인지 지도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백등산 아래에‘大白登鎭’이란 동네 이름만 남아 있을 뿐이다. 북경으로 가기 위해 고속도로에 진입,官堡(관보)라는 이름의 휴게소에 들렀다. 이곳 육교에 올라 서북방을 보면 백등산의 전모가 드러난다. 크기는 하나 봉우리가 편평한 산인데, 초목이 자라지 않아 허옇게 보인다.
▲ 한고조의 한군 10만 명이 모돈 선우의 흉노군 40만명에게 포위되었던 白登山. 大同-北京간 고속도로 휴게소 인근 다리에서 촬영. 지형을 보면 지리멸렬한 모습의 흉노군을 얕보고 추격전을 벌인 한고조의 부대 10만이 대동벌판에서 모돈의 흉노 기병에게 역습을 받고 퇴로마저 끊어져 엉겁결에 별로 험하지도 않은 백등산으로 도주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만약 그때 모돈 선우가 한고조의 도주를 묵인하지 않았다면 중국의 운명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모돈 선우로서는 일생일대의 실책이었고, 한족으로서는 기사회생의 순간이었다.오늘날 중국 민족을 漢族, 중국 글자를 漢文이라 부를 만큼 漢은 중국역사를 대표하는 존재이다. 후세의 漢族 왕조인 宋과 明은 주변 기마민족에게 억눌려 전혀 국위를 떨치지 못했다. 반면 신라김씨와 가야김씨는 東아시아사에서 대단한 역할을 담당했다. 우선 신라김씨 아버지와 가야김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문무왕은 삼국통일을 완수하였고, 그 자손은 오늘날 한국 최대의 성씨가 되었다. 또 가야김씨인 수로왕(首露王)의 일곱 아들은 일본에 건너가 천황씨(天皇氏)의 선조가 된 것으로 보인다. <金史>세기에 따르면 신라 멸망 후 신라왕족 김함보(金函普)는 북상하여 여진족(女眞族)의 추장이 되었는데, 그의 6대 후손인 아골타(阿骨打)가 바로 정복국가 금(金)의 태조로 피어났다. 만주족(여진족의 후신)의 정복국가 청(淸)의 황족 애신각라(愛新覺羅)씨는 신해혁명(1911년)으로 멸망 후 그들의 성씨를 김씨로 회복시켰다. 그렇다면 흉노 출신 김일제의 후손이 왜 신라까지 내려왔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BC 87년 한무제는 71세의 나이로 죽었다. 무제는 임종 때 봉거도위(奉車都尉) 곽광(藿光: 곽거병의 동생), 부마도위(駙馬都尉) 김일제, 태복(太僕) 상관걸(上官桀)에게 어린 소제(昭帝)를 보필하라는 유촉을 내렸다. 그러나 소제 즉위 후 1년반 남짓해서 김일제가 병사함으로써 곽광과 상관걸이 득세했는데 두 사람은 불화했다. 곽광과 상관걸의 정권 다툼에서는 곽광이 이겨 정권을 독점했지만, 곽광이 죽으면서 그의 일족도 피의 숙청을 당했다. 반면 김일제의 후손은 7대를 이어가며 투후의 작위를 누렸다. 무제의 사망 후 90년 만에 한나라는 외척 왕망에게 찬탈당했다. 김일제의 후손은 왕망의 新나라에 복무한 것으로 보인다. 新은 창업 15년만에 망하고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후한(後漢)을 세웠다. 왕망에게 협조적이었던 김일제의 7대손은 도주하거나 피의 숙청을 당했다. 사방으로 흩어진 김일제의 후손 중 일파가 김알지로 보인다. 김알지가 서라벌로 들어오면서 배를 타고 왔는지, 말을 타고 왔는지는 알 수 없다. 그 경로는 어느 것이나 가능하다. 그 시절엔 인구가 조밀하게 살지 않았고, 또 오늘날과 같은 철책선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사의 뿌리를 이루는 신라김씨와 가야김씨의 뿌리 찾기는 계속 연구해야 할 과제이다.
황하를 관찰하기 위해 마이크로버스를 세워놓고 대교 위를 걸었다. 강폭은 엄청 넓으나 대하답지 않게 수량은 적었다. 좌우 가장자리의 강바닥은 바싹 말라 있었다. 대교 위에서 건너편 철교 너머에 위치한 도선장을 바라보았다. 대교가 건설된 이후엔 유람선의 뱃머리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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