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오귀환의 디지털 사기 열전_06

醉月 2009. 12. 4. 08:55

[화식열전1] 사마천, 애덤 스미스의 뺨을 치다

현대에도 적용되는 <화식열전>의 놀라운 부의 철학… 그 스케일과 정보성, 풍부한 실증성에 감탄

2100여년 전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했다.

“물건값이 싸다는 것은 장차 비싸질 조짐이며, 값이 비싸다는 것은 싸질 조짐이다.”

“△식량 △자재 △제품 △산과 택지의 4가지는 백성들이 입고 먹는 것의 근원이다. 이 근원이 크면 백성들은 부유해지고, 그 근원이 작으면 백성들은 가난해진다.”

“빈부의 도란 빼앗거나 안겨주는 것이 아니다. 교묘한 재주가 있는 사람은 부유해지고, 모자라는 사람은 가난한 것이다.”

교묘한 재주가 있으면 부유해지고…

» 진시황의 병마용은 당시 도자기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잘 보여준다.
“창고가 가득 차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을 것이 넉넉해야 영욕을 안다.”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여들고, 모두 이익을 위해 분명히 떠난다.”

“관직의 지위에 따라 받는 봉록도 없고, 작위에 봉해짐에 따라 받는 식읍의 수입도 없으면서 이런 것을 가진 사람들처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소봉(素封·무관의 제왕 정도로 의역할 수 있음)이라고 한다.”

“만일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고 처자식은 연약하고 명절이 되어도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지 못하며 옷을 입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우면서도 이런 것들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비할 바 없을 만큼 못난 사람이다. …오랫동안 가난하고 천하게 살면서 인의를 말하는 것만을 즐기는 것 또한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대체로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길에는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이 상업만 못하다. 비단에 수를 놓는 것이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것만 못하다. 말단의 생업인 상업이 가난한 사람들이 부를 얻는 길인 것이다.”

“부유해지는 데는 정해진 직업이 없고, 재물은 정해진 주인이 없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기왓장 부서지듯 흩어진다. 천금의 부자는 한 도읍의 군주와 맞먹고, 거만금을 가진 부자는 왕과 즐거움을 같이한다.”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어떻게 2100여년 전 사람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렇게 오늘날과 똑같단 말인가.

어떤가? ‘물건값이 싸다는 것은 장차 비싸질 조짐이며, 비싸다는 것은 싸질 조짐이다’라는 말은 그 시대 사마천이 이미 애덤 스미스의 수요·공급의 법칙과 비슷한 개념을 알고 있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 아니,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요즘 주식투자의 철칙을 말하는 듯하다.

‘소문에 사고 뉴스에 팔아라’ ‘백성들이 먹고 입는 것의 근원이 크면 백성들은 부유해지고, 작으면 가난해진다’는 말은 그대로 성장과 분배에 관한 파이 이론을 연상시킨다. 저 유명한 ‘파이를 키워야 분배의 몫도 커진다’는 것이 그 표현이다.

 

소봉(素封), 화려한 백수!

» 종이 만드는 공정을 나타낸 그림. 한대 초기의 제지업의 실태를 보여준다.
여기까지 놀라지 않은 사람도 사마천 시대의 ‘소봉’과 오늘날의 ‘화백’을 비교하면 놀라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으리라. 사마천 시대의 소봉은 이런 부를 가진 사람을 말했다.

△말 50마리를 키울 수 있는 목장(또는 소 167마리나 양 250마리를 키울 수 있는 목장이라도 좋다)

△돼지 250마리를 키울 수 있는 습지대

△1천마리의 물고기를 양식할 수 있는 연못

△안읍의 대추나무 1천그루

△강릉의 귤나무 1천그루

△하나라의 옻나무밭 1천묘

△생강과 부추밭 1천묘

…이런 사람들은 관직에 나가지 않아도, 작위를 받지 않아도 계속 안정적으로 풍부한 수입이 들어왔다. 왕이나 제후, 장군이나 재상을 크게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저잣거리를 기웃거릴 필요도 없고, 다른 마을에 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수입만 기다리면 된다. 오늘날의 ‘화백’은 ‘화려한 백수’의 준말이다. 벌어들인 돈으로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해 평생 쓸 만큼의 재산을 형성해놓은 사람들이다. 따로 직장을 나가는 것도 아니라서 겉보기에 백수 같지만, 부동산 임대료 수입을 시작으로 주식 배당금, 부동산 시가 상승에 따른 자산 증식, 금융소득, 그 밖의 종합소득 등 엄청난 고소득을 올린다. 그야말로 ‘현대판 소봉’인 것이다.

» 중국 전국시대의 구슬 주판.
‘재화를 증식한 사람들’을 기록한 <사기열전>의 ‘화식열전’은 그 규모와 정보성, 풍부한 실증성 등으로 오늘날의 우리를 감탄시킨다. 특히 오늘날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진실의 권위마저 갖추고 있어 <사기> 전체의 품격을 드높인다.

화식열전이 보여주는 관점은 매우 탁월하다.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1.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근본은 경제다.

2. 경제는 자유방임주의를 큰 뼈대로 하면서 적절한 국가의 개입을 보완책으로 결합시킨다.

3. 인간의 본성은 부귀를 지향한다.

4. 상업이야말로 인간의 의식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5. 지경학(地經學)도 지정학(地政學)만큼이나 중요하다.

6. 부는 권력, 명예 등 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7. 재테크에서는 시테크도 매우 중요하다.

8. 아껴쓰고 부지런한 것은 기본이고, 나아가 반드시 기이한 방법을 사용해 부자가 됐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사마천은 노자류의 고립주의나 한나라의 중농억상(重農抑商) 가치관을 비판하고 있다. ‘백성들이 제각기 자신들의 음식이나 옷 습속에 만족하며 서로 왕래하지 않으면서도 행복해한다’는 노자류의 가치관은 그야말로 ‘근대의 풍속을 돌이키고 백성들의 귀와 눈을 막으려 하는 것’으로서 실행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또 건국 이래 지속적으로 상업억제책을 써온 한나라 조정과 달리 거시적 관점에서 상업 및 상인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지를 표출한다. 한나라에서는 상인의 대두를 견제하기 위해 △인두세 부담 2배로 늘림 △민간에서의 화폐주조 금지 △소금과 철의 전매화 △균수법 실시로 국가 조달 행위를 상인으로부터 지방관리로 이관 △상공업자에 대한 재산세를 일반인의 2.5~5배로 증세 등의 조치를 취했다.

 

“노자류의 가치관은 백성 눈귀 막는 것”

멀리는 2700여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에 중국에서 이런 식의 부의 증식이 과연 가능할 수 있었을까? 만일 가능했다면 그 배경은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선 일단 전국시대 또는 한나라 초기의 경제 규모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국책>에 실려 있는 저 유명한 연횡책의 유세가 소진의 말을 경청해보자.

» 초나라 강릉 지역에서 출토된 칠기류. 대단히 정교해 감탄을 자아낸다.
“제나라 수도 임치의 성 안에 7만호의 가옥이 있고, 각 가옥마다 3명의 장정이 있다고 치면 이 도시만으로도 21만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부유해서 생활에 여유가 있으므로 음악을 듣는다든지, 투계나 개의 경주를 할 수 있는 회장이 갖춰져 있다. 또 쌍륙(雙六·윷놀이 비슷한 도박)이나 축국(蹴鞠·축구 비슷한 놀이)을 하는 곳도 있다. 한길에서는 수많은 마차가 어지러이 붐비어 수레바퀴가 마주 부딪치고, …사람도 집도 모두 풍요해서 의기가 왕성하다.”

실제로 고고학적 연구 결과 임치성의 크기는 서벽 2812m, 북벽 3316m, 동벽 5209m, 남벽 2821m의 크기로 추정된다고 한다. 나아가 당시 임치만이 아니라 위나라의 수도 대량과 온, 조나라의 수도 한단과 형양, 초나라의 완구, 정나라의 양책, 제나라의 설, 연나라의 계와 하도 비슷한 규모의 대도시였다고 한다. 당시 세계적인 규모의 이런 도시는 모두 상업이 발달하고 제철이나 제염 등의 수공업이 번영했다고 전해진다. 청동기나 칠기 등의 제품도 대량 제조돼 판매됐다. 또 전국시대에는 청동기도 완전히 실용적인 그릇이 돼 널리 보급되고, 값비싼 견직물이며 금과 옥 등 가공품도 유통됐다. 도시의 발달과 각종 산업의 융성 그리고 풍부한 인구를 바탕으로 각계각층에서 소봉의 부를 이루는 사람들이 적잖게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직업의 귀천을 뛰어넘는 진보성

그러면서도 이 사회에선 이른바 상도라는 것이 엄연히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에 따르면 당시 교통이 발달한 대도시에서의 상업은 대략 연 20%의 이익을 적당한 마진으로 보았다. “한 해에 술 1천독, 식초나 간장 1천병, 소나 양, 돼지의 가죽 1천장, 쌀 1천가마, 땔감 1천수레, 목재 1천장, 구리 그릇 1천개. 말 200마리, 소 500마리, 단사(수은) 1천근, 무늬 있는 비단 1천필, 누룩 1천홉, 말린 생선 1천섬, 절인 생선 1천균, 밤 3천섬, 여우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 1천장 등(모두 100만전이 본전)을 팔면 20만전의 이익을 얻는다. 아니면 현금 1천관(100만전)을 중개인에게 빌려주고 2할의 이식을 받아도 좋다. …다른 잡일에 종사하면서 2할의 이익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재물을 활용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아가 사마천은 당시 소봉을 이룩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직업의 귀천을 뛰어넘는 진보성을 보여준다.

» 중국 제남시 서한묘에서 출토된 도자기 제품으로 된 명기. 한나라 때 귀족의 생활 모습을 잘 보여준다.

“밭에서 농사짓는 것은 (재물을 모으는 데는) 졸렬한 업종이지만, 진나라의 양씨는 밭농사로 주(州)에서 제일 가는 부호가 됐다. 무덤을 파서 보물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전숙은 그것을 발판으로 일어섰다. 도박은 나쁜 놀이지만, 환발은 그것으로써 부자가 됐고, 행상은 남자에게는 천한 일이지만 옹낙성은 그것으로 천금을 얻었다. 술장사는 하찮은 일이지만, 장씨는 그것으로 천만금을 얻었으면, 칼을 가는 것은 보잘것 없는 기술이지만, 질씨는 그것으로 제후처럼 반찬솥을 늘어놓고 호화로운 식사를 즐겼다. 양의 위통을 삶아 파는 것은 단순하고 하찮은 일이지만, 탁씨는 그것으로 기마행렬을 거느리고 다녔다. 말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대단찮은 의술이지만, 장리는 그것으로써 종을 쳐서 하인을 부르게 됐다. 이것은 한 가지 일에 전념한 결과이다.”


‘화식열전’에 숨은 처절한 경험

사마천이 ‘화식열전’을 쓴 데는 개인적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자신이 돈이 없어 처참한 궁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한 무제 때 흉노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 투옥돼 남성의 성기를 거세하는 궁형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앞둔 때가 있었다. 당시 한나라는 속전제를 채택하고 있어 그가 50만전으로 정해진 속전을 낼 경우 이 형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마천 일가는 한달의 기한 동안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50만전은 투옥 직전 대부로 출사하고 있던 사마천으로서는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 사마천 자신이 쓴 ‘화식열전’의 내용에 비춰보면, 50만전이라는 돈은 소봉의 부를 누리는 부자가 2년 반을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금액이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사마천 집안은 채 20만전도 모으지 못했다. 부인이 집에 있는 솥단지까지 팔아 간신히 5만전을 구하고, 다시 친정 부모님께 사정하고 빌어서 10만전을 추가로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 동료 공경대부들에게도 사정을 호소했으나 ‘천자의 뜻을 거스린 죄수의 가족’이라고 문도 열어주지 않기 일쑤였고, 일부 마음씨 좋은 공경대부도 몇천전 정도 빌려주며 등을 떠밀었다고 한다.

이런 처절한 경험이 있었기에 사마천은 돈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고, 돈과 관련된 세상의 인심도 포착할 수 있었다. 그가 ‘화식열전’에 쓴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여들고, 모두 이익을 위해 분명히 떠난다”는 글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한편 이 ‘화식열전’을 열전의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 자서’ 바로 앞에 배치한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이 글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배치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태사공 자서는 열전 마지막에 들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기> 전체의 서문으로 평가되곤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화식열전’의 기조가 한나라 조정의 중농억상책을 비판한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 해 20만전 수입 정도를 기준으로 하는 소봉의 사례를 대단히 구체적으로, 대단히 풍부하게 열거한 것은 그가 이 정도 돈의 의미와 힘을 얼마나 연구하고 천착했는지 이해하게 해준다. 그 사례의 2가지 정도만 있어도 그는 자신의 남성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식열전2] 노예들의 유통 프랜차이즈!

화식열전에 나타난 주인공들의 흥미로운 재테크… 오늘날의 주식투자 그대로 빼닮은 방법론도

 

“중국 전국시대 인물인 백규는 시세의 변화를 살피기를 좋아했다. 그는 사람들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때 사들이고, 세상 사람들이 사들일 때 팔아넘겼다. 풍년이 들면 곡식은 사들이고 실과 옻을 팔았다. 그리고 흉년이 들어 누에고치가 나돌면 비단과 풀솜을 사들이고 곡식을 내다팔았다. 이처럼 백규는 풍년과 흉년이 순환하는 것을 살펴서 사거나 팔아 해마다 물건 사재기하는 것이 배로 늘어났다.”


“오지현의 나(나-한자임)라는 사람은 목축이 본업이었다. 그는 가축이 늘자 신기한 비단을 사서 남몰래 융왕에게 바쳤다. 왕은 그 대가로 나에게 열배나 더 많은 가축을 주었다. 그래서 그의 가축은 골짜기 수로 말과 소의 수를 셀 정도가 됐다.”

» 말은 부자가 되는 주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였다. 화식열전에 나오는 목축업자 나라든가 교요는 모두 말로 부자가 된 사람들이다.
그림은 흉노와 한나라군의 기마전.
 

이극 vs 백규

“파촉에 청이라는 과부가 살았는데, 그 조상이 단사(丹沙·수은)를 생산하는 동굴을 발견해 물려받았다. 이 단사 광산을 여러 대에 걸쳐 독점해 재산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는 가업을 지키고 재물을 이용해 자신을 지켜 사람들로부터 침범당하지 않았다.”

“조나라 출신인 탁씨는 원래 철을 캐고 제련해 부자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진나라에 조나라가 망해 포로가 되는 바람에 재물을 빼앗기고 강제 이주까지 당하게 됐다. 비슷한 처지에 빠진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나라 관리들에게 남은 재산을 털어 뇌물로 바치면서 가까운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청탁했다. 그러나 탁씨는 먼 곳이라도 옮겨가겠다고 해서 촉 땅의 임공으로까지 갔다. 그는 철이 생산되는 산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쇠를 녹여 그릇을 만들었다. 그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기술자로 이용하면서 주변 지역과 교역해 부자가 됐다.”

“제나라 사람들은 노예를 업신여겼는데 조간만은 이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대했다. 사납고 교활해 사람들이 싫어하는 노예들을 발탁해 그는 생선과 소금 장사를 시켰다. 그는 노예들의 그런 능력을 빌려 결국 수천만금의 부를 쌓았다.”

“선곡에 사는 임씨의 조상은 창고 관리였다. 진나라가 싸움에 졌을 때 호걸들은 모두 앞다투어 금·은·옥을 차지했으나, 임씨만은 창고의 곡식을 굴 속에 감춰두었다. 그 뒤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형양에서 대치하자, 쌀 한섬 값이 1만전까지 뛰었다. …호걸들이 차지했던 금·은·옥은 모두 임씨의 것이 됐다.”

“오초 7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장안에 있는 크고 작은 제후들은 토벌군에 가담하기 위해 이잣돈을 얻으려 했다. 돈놀이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후들이 이길지 어떨지 아직 모르겠다’며 기꺼이 빌려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무염씨만은 천금을 풀어 빌려주었다. 그러면서 이자를 원금의 10배로 했다. 석달 만에 난이 평정되고 제후들은 승리했다. 무염씨는 겨우 한해 만에 원금의 10배를 이자로 받아 재산이 관중 전체의 부와 맞먹게 됐다.”

“한나라가 흉노를 친 뒤 변경의 땅을 넓혔을 때, 교요라는 사람만이 말 1천 마리, 소 2천 마리, 곡식 수만종을 얻었다.”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에 나타난 주인공들의 재테크는 매우 흥미롭다. 2500여년 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 진시황릉의 모습. 아직 발굴하지 않은 황릉 속에는 단사(수은)로 이뤄진 '대해'가 설치돼 있다고 전해진다.
특수물질로 장묘용으로 쓰인 이런 단사를 통해 청은 거부를 유지했다.
 

무협용 소재로 충분한 청의 이야기

먼저 백규부터 보자. 이 사람의 방법론은 오늘날의 주식투자에 대입해도 그대로 들어맞을 것만 같다.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들의 정통적인 방법론을 그대로 빼닮아 있는 것이다. 당시 그와 대치되는 재테크론자로 ‘화식열전’에 나타난 사람은 위나라의 이극이다. 이극은 ‘토지의 생산력을 발휘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고 기록돼 있다. 추정컨대 당시 중국 대륙은 통일되기 전이라 황하나 회하의 치수관리를 천하적 관점에서 실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천하적 스케일의 치수정책은 한나라의 통일 이후 사실상 본격화되고 있다.

따라서 통일 이전 생산력의 증대는 (1)제한된 각국 농경지의 생산력 최대화 (2)국내-국외 상업 및 무역의 확대라는 2가지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백규는 이 가운데 각국간 경쟁과 견제 때문에 불안정하고 취약할 수밖에 없는 (2)의 방법론에 온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농경지의 생산력 증대를 지향하는 이극의 방법론이 주류적 방법론이라면, 백규의 그것은 비주류적 방법론인 셈이다. 백규의 방법이 성공하는 요체는 바로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는 데 있다. 이 문제를 백규는 당시의 천문학과 순환론에 기대고 있다는 약점을 보여주긴 한다. 목성 뒤에 있는 세성을 가리키는 태음을 이용해 풍년과 흉년, 가뭄과 홍수를 추산하고 그에 따라 전략물자의 매입·매각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 보면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밖에 백규가 취한 방법을 보면 나름대로 백규가 대단한 강점을 지녔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돈을 불리려면 값싼 곡식을 사들이고, 수확을 늘리려면 좋은 종자를 썼다.” “거친 음식을 달게 먹고, 하고 싶은 것을 억눌렀으며… 노복들과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했다.” “시기를 보아 나아가는 것은 마치 사나운 짐승이나 새처럼 빨랐다.”

청이라는 사람은 유일한 여성으로서 눈길을 끈다. 그의 특징은 거부를 약속하는 세습광산을 훌륭히 지키고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화식열전’만 보면 이 여성이 친가로부터 세습을 받았는지 시가로부터 받았는지 불분명하다. 어쨌든 그의 부는 단사라는 당시 각광받던 특수물질 때문에 가능했다. 단사는 바로 진시황의 지하 황릉에 대량으로 집어넣었다는 그 물질이다. 당시 진시황은 지하 황릉에 단사로 된 ‘대해’를 설치하는 컨셉트를 잡아놓고 있었다. 그가 통일 뒤 바다에 심취한 것이라든가, 장묘문화와 관련된 단사의 특수성 등이 결합해 단사의 대해를 지하에 자리잡게 한 것이다.

단사는 고대 중국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에서도 분묘용으로 각광받았다. 대단히 넓은 폭의 온도대에서 물질 본래의 상태를 유지하는 특성이 있었던 것을 인간들이 주목한 것이다. 당시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의 이 황금알을 낳는 수은광산을 노린 자가 한둘이었겠는가? 도적은 도적대로, 탐관은 탐관대로, 토호는 토호대로 이 여성을 노리는 눈길과 손길, 음모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 법하다. 이 여성의 이야기는 사실 무협지나 무협영화의 소재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조간의 재테크도 혀를 내둘게 한다. 노예를 이용해 유통 프랜차이즈를 대대적으로 성공시켜 거부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2500여년 전에 등장한 노예들의 유통 프랜차이즈라니!!! 사람들한테 버림받은 사람들을 긁어모아 신화에 도전하는 ‘공포의 외인구단’인 셈이다.

 

전쟁에서 승리할 제후쪽에 베팅하라

» 진나라 때의 반량전. 반냥의 명목가치와 실질가치를 지녔던 진나라의 반량전은 한나라 들어 점차 얇아져 실질가치가 크게 떨어지게 된다.
무염씨의 이야기에 이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지경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러면서도 경탄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저 유명한 유럽의 유대계 재벌 로스차일드 가문이 나폴레옹 전쟁 때 워털루 전투의 승리 예측을 통해 거부를 움켜주고 세계적인 부를 쌓은 것과 그대로 빼닮았다.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런던·파리·나폴리·빈·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5대 도시를 무대로 금융업을 하고 있었다.

주로 왕가에 전비를 대부해주고 거액의 이자를 받는 방식이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전투에서 영국쪽이 승리할 것을 로스차일드 가문은 독자적인 정보망을 통해 정확하게 예측하고 막판에 영국의 전쟁채권을 무더기로 사들인 것이다. 무염씨도 엄청난 동광산을 배경으로 거금을 주조해 경제력을 갖춘 오초 7국과, 황제의 정통성을 장악한 한나라 제후쪽 사이의 전쟁에서 제후쪽에 베팅해 크게 성공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승패를 어떻게 맞혔는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천금의 거금을 투자하는 무염씨가 나름대로 확신할 만한 정보와 판단 근거를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승패가 예측과 달리 정반대로 갔다면 그는 단순히 천금을 날릴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날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오월이 집권해 황제에 즉위했다면 반대편에 거금을 지원한 무염씨를 그대로 놓아둘 리 없다. 어쨌든 이 판단 하나, 예측 하나로 그는 당시 관중의 부를 장악하고 있던 전씨 일족을 능가할 정도가 된다. 그것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벌어들인다.

사마천의 ‘화식열전’에 나오는 20여명의 부자 가운데 정치에 직접적으로 깊이 관여한 인물이라든가 화식의 방법론이 자세하지 못한 사람들을 빼면 12명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백규로부터 교요에 이르는 사람들을 분석하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2명 가운데 3명만이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했고 나머지 9명(75%)이 제조업과 유통업(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12명 가운데 3명 정도가 독점적 성격의 사업을 한 것으로 집계된다. 청이라는 여인이 단사라는 특수물질의 광산을 운영한 것, 나라는 사람이 융 왕에게 비단 선물을 바쳐 다시 거대한 목축지와 많은 가축을 대가로 받아 목장과 사육 가축을 계속 선순환적으로 늘린 것, 그리고 교요가 흉노 땅 점령 뒤 말·소·양·곡식을 특혜로 받은 것 정도가 사실상 독점적 성격의 사업을 한 셈이다. 이 가운데서도 나의 경우는 그 방식을 다른 사람도 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중간 정도의 독점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전쟁특수를 통해 치부를 한 사람도 3명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유씨 황제 경제에 대해 난을 일으킨 오초 7국의 난 때 제후들에게 고리로 전비를 빌려줘 거부를 챙긴 무염씨와, 흉노 평정 뒤 특혜를 받은 교요 그리고 진나라 패망 때 창고 곡식을 숨겼다가 초한대전 때 거금을 움켜쥔 임씨가 그렇다.

 

한 가지 사업에서 점차 다각화로 진화

유통형 프랜차이즈를 해서 돈을 번 사람이 노예를 이용한 조간 말고도 또 한 사람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사사라는 사람이 바로 장사에 대해 적극적인 주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동원해 수레 이동형 유통 프랜차이즈를 성공시킨 것이다.

이와 함께 한 가지 기술이나 방식으로 부를 이룬 사람들이 점차 사업 다각화쪽으로 진화해갔다는 점도 눈에 띈다. 공씨의 경우 처음에는 탁씨나 정정처럼 제철을 통해 부를 이룩한 다음에는 큰 못을 만들어 양식업을 하고, 다시 제후들과 사귀며 거액의 거래를 하며 이익을 얻었다. 병씨의 경우 대장장이로 성공한 뒤 그 물건을 내다파는 행상도 겸업하고 나중에 그렇게 모은 돈으로 대부업에까지 진출한다.


고대 부자들의 영욕

» 진시황의 병용. 시황제는 성년남자의 분가와 결혼을 촉진하는 등 경제우대정책을 썼으며, 경제인도 크게 우대했다.
고대의 부자들은 영욕을 항상 함께 먹고 살았다. ‘화식열전’에 나오는 사람 가운데 융왕에게 특혜를 받아 목축으로 크게 일어선 나와, 단사광산의 여주인공 청은 모두 진시황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진시황은 나를 군(君)으로 봉해진 자들과 똑같이 대우해 봄 가을 정해진 때마다 대신, 제후들과 함께 조회에 들게 했다. 일개 목축업자가 황제의 행사에 대신처럼 정기적으로 참례했던 것이다. 청도 진시황으로부터 ‘정조 있는 부인’으로 평가받아 빈객으로 대우받았다. 진시황은 나아가 그를 위해 여회청대(女懷淸臺)를 지었다. 청을 중심으로 여성들이 모여 담소하고 교류할 수 있는 누각을 지어준 것이다. 유교문화권의 황제와 다른 기개와 스케일을 느끼게 한다. 당시 오랑캐의 땅으로 평가받던 촉 땅의 한 광산주를 위해 황제가 엄청난 대접을 해준 것이다.

진시황이 이처럼 경제인을 우대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무엇보다 진나라를 부국으로 이끈 경제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진나라의 경우 (1)성년남자가 한 집에 2명 이상 있으면서 분가하지 않으면 세금을 배로 물리는 등 경제단위의 증대에 힘썼으며, (2)농업과 양잠에 노력해 곡식과 견사를 많이 생산하는 사람은 일생 동안 세금을 면제해주는 등 국력 증대에 온갖 신상필벌 제도를 도입하고 있었다. 이런 전통을 진시황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부자들은 동시에 관직에 나서는 것이 오랫동안 막혀 있었다. 춘추전국시대는 물론 한나라 초기까지 이 전통은 유지됐다.(여불위의 경우는 이런 전통을 깬 것으로 그 의미를 지닌다.) 이에 따라 아무리 거금을 모아도 상업은 ‘말단의 생업’이라는 취급을 받았다. 이런 억상정책은 한나라 때 농업정책의 실패, 흉노전쟁 등 대외전쟁 확대, 세수 감소 등에 따라 일종의 공개적인 매관매직 정책을 대대적으로 채택하면서 무너진다. 따라서 상인들은 부의 증식을 위해, 신분 안정을 위해 부를 기울여 제후들과 교제하거나 그 뒤를 지원하는 역할을 떠맡곤 했다.

 

[화식열전3] 돈과 권력도 모두 얻으리라

거부를 먼저 이룬 뒤 권력 추구에 성공한 여불위, 대정치가였다가 상인으로 변신한 범려

 

“농업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은 몇배이겠는가? 아무리 많아도 10배 정도일 것이다. 보석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은? 아무리 많다고 해도 100배를 넘지는 못할 것이다. 만일 왕을 세워서 이익을 얻는다면 과연 몇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건 헤아릴 수 없다. 무한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진나라와 조나라의 장평 싸움에서 패배한 조나라의 포로 수십만명이 생매장돼 떼죽음을 당한 지 1년 뒤인 기원전 259년, 조나라 수도 한단에는 앞으로 진나라의 역사를 바꿔쓸 세 사람이 모여들고 있었다. ‘상인’과 ‘왕손’과 ‘무희’….

인질로 온 ‘왕손’에 접근한 여불위

» 중국 고관들의 공적인 삶을 나타내는 고분벽화. 거부를 이룬 사람 가운데 일부는 권력까지 추구하곤 했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가운데 주인공인 상인의 이름은 여불위(呂不韋), 한나라 양책 사람으로 사업차 조나라에 들어와 있었다. 그가 돈을 번 수법은 대단히 정통적이다. <사기열전>에 따르면, “큰 상인으로 여러 곳을 오가면서 물건을 싸게 사들여 비싸게 되팔아 집안에 1천금의 재산을 모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건 지난호 ‘화식열전2’에 소개한 백규가 쓰던 상술과 그대로 닮았다. ‘사람들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때 사들이고 사람들이 사들일 때 팔아넘겼다’는 그것이다. 한단에서 사업거리를 찾던 그에게 ‘재미있는’ 정보 하나가 들어온다. 진나라 ‘왕손’ 하나가 인질로 조나라에 와 있는데, 본국에서 돌보지 않는데다가 조-진 대전 때문에 사는 게 형편없다는 것이다.

“이 진귀한 재물은 사둘 만하다!”

이게 여불위의 첫 반응이었다. 여불위는 왕손 이인을 찾아갔다. 그는 앞으로 재산을 기울여 왕손의 가문을 크게 만들어주겠다고 설파한다. 그리곤 평생 번 재산의 절반인 500금을 왕손 이인에게 주어 빈객을 사귀는 등의 비용으로 쓰도록 하고, 자신은 나머지 재산인 500금을 들고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들어간다. 여불위가 벌었다는 ‘1천금’은 일반적으로 큰 돈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 뒤 정확하게 ‘500금’으로 기록된 점에 미뤄 정확한 ‘1천금’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진나라는 소왕이 무려 50여년이나 왕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태자인 안국군 밑으로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다. 도대체 차기 태자 이후의 왕권은 누구에게 갈 것인지 전혀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여불위는 가지고 간 자금을 동원해 안국군으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화양 부인과 그 언니를 설득해 이인을 화양의 양자로 삼게 한다.

“아름다운 얼굴로써 남을 섬기는 사람은 아름다운 얼굴이 스러지면 사랑도 시든다고 합니다. 자식이 없는 지금 효성스러운 자를 양자로 들여 후사를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귀한 자리에 있고, 남편 사후에는 양자가 왕이 되므로 끝까지 권력을 잃지 않게 됩니다. 그 적격자가 바로 이인입니다.”

조나라에서 냉대만을 받던 ‘잊혀진 왕손’이 일약 대국 진나라의 태자 계승자로 업그레이드된다.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보고 길목을 선점한 큰 도박이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여불위는 한발 더 나아가 당시 자신이 총애하던 ‘무희’를 왕손 이인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양보한다. <사기>에 따르면 ‘화가 치밀었지만, 이미 자기 집 재산을 다 기울여 이인을 위해 힘쓰고 있는 것은 진기한 재물을 낚으려는 것임을 떠올리고 마침내 여자를 바쳤다’는 것이다.

» 여불위가 식객을 모아 편찬한 <여씨춘추>(왼쪽)와 여불위의 실제 자식으로 추정되는 진시황.

무희인 조희는 당시 임신하고 있었지만, 이 사실을 속이고 이인에게 가 마침내 아들 정을 낳고 정식 부인으로 세워진다. 이 아들 정이 바로 나중에 진시황이 된다. 이런 놀라운 공로로 이인이 양부 안국군(효문왕)의 뒤를 이어 왕(장양왕)에 오르자, 여불위는 즉위한 그해에 바로 승상으로 임명되고, 장신후라는 후작까지 받는다. 그리고 하남 낙양의 10만호를 식읍으로 받는다.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뒤에 죽고 정이 왕에 오르자 여불위는 다시 상국으로 승진한다. 왕은 그를 ‘중부’라고까지 불렀다. 한때 여불위의 집안에 있는 하인의 수는 1만명을 헤아렸으며, 식객도 3천명에 이르렀다는 기록까지 있다. 그가 아무리 상인으로 성공해 부를 긁어모은들 과연 이런 부와 영광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범려, 오나라를 멸망시키다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이 모두 1천금의 자금과 절묘한 기획력, 정보력 등의 합작품으로 이뤄진 것이다. 당시 상인들이 비록 거금을 보유할 수는 있어도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거의 막혀 있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여불위의 성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자기의 실제 자식이 통일 천하의 황제가 되는 거대한 꿈마저 실현된다면? 여불위의 야심은 실로 크고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여불위가 거부를 먼저 이룬 뒤 권력까지 추구해 성공한 경우라면, 정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도 있다. 대정치가였다가 상인으로 변신한 범려가 그렇다. 범려는 월나라왕 구천의 명참모였다. 월나라가 오나라와 반세기에 걸쳐 싸울 때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범려의 공이 거의 결정적이었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패한 뒤 살아남기 위해 항복교섭을 담당한 것을 비롯해 월나라의 생존책, 부국강병책, 오나라의 교란책 등이 모두 그의 지모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월나라가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자, 범려는 “월왕(구천)은 목이 길고 입이 까마귀 부리처럼 뾰족하고 눈은 매처럼 매서우며 이리처럼 걷지 않는가. 이와 같은 인물과는 어려움을 함께할 수는 있지만, 평화를 함께 즐기기는 불가능한 법이다.” “스승 계연의 7가지 계책 가운데 월나라는 5가지를 써서 뜻을 이루었다. 나라에서는 이미 써보았으니, 나는 이것을 집에서 써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표표히 사라진다. 그가 가족과 함께 월왕의 감시를 벗어나 이름마저 ‘치이자피’로 바꾼 뒤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제나라 해안 지방이다. 범려 일족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 열심히 일한 결과 수십만금의 재산가가 됐다. 제나라 사람들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재상이 돼달라고 부탁해오자, 범려는 애써 모은 재산을 모조리 친구나 향당에 나눠주고 값나가는 보물만을 가지고 그곳을 떠난다.

» 전 재산을 털어 진나라 왕손에게 투자해 성공한 거상 여불위(왼쪽)과 상신의 시초로 꼽히는 범려. 범려는 월왕 구천의 패업 달성 뒤 참모의 직책에서 재빨리 도망쳐 상인으로 변신해 대성공을 거둔다.
그가 두 번째 정착한 곳은 도(陶)라는 교통 요충지이다. 오늘날 산둥성과 허난성의 경계에 가까운 정도현 근방으로 춘추시대 당시 노(魯)나라 송(宋)나라 위(衛)나라 조(曹)나라 정(鄭)나라 등 여러 나라가 서로 복잡하게 국경을 접하고 있고, 제(齊)나라 진(晋)나라 초(楚)나라 같은 대국의 전진 거점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도는 천하의 중심으로 사방의 여러 나라와 통해 물자의 교역이 이뤄지는 곳이다.” 이렇게 판단한 그는 이 교통 요충지에서 상업을 벌였다. 농업에서 상업으로 비즈니스의 중심을 옮겨간 것이다. 이때부터 이름도 ‘주공’(朱公)으로 바꿨다. 이 ‘도땅의 주공’이 줄어서 ‘도주’(陶朱)가 되고, 이것이 나중에 중국 문화권에서 부호를 일컫는 대명사로 발전하게 된다.

범려가 부를 일군 방법은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 구천의 검. 범려가 그대로 남았다면 이런 검으로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것이다.
첫째는 노나라의 돈이라는 가난한 사람이 그에게 찾아와 부자가 되는 법을 묻자 가르쳐주었다는 것이다. 그 가르침대로 돈은 의씨라는 땅의 남쪽에서 소와 양을 사육한 지 10년 만에 재산이 왕과 공자에 버금가게 됐다고 한다.

두 번째는 장사를 하며 물자를 쌓아두었다가 시세의 흐름을 보아 내다 팔아서 이익을 거두었는데, 사람의 노력에 기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엇갈린 두 사람의 최후

결국 범려는 (1)부국강병책 (2)농업으로 거부를 이룩하기 (3)목축업으로 왕공의 부를 만들기 (4)상업(유통업)으로 거부를 이룩하기 등 네 부문을 모두 직접 현실화해 성공한 만능의 정치인이자 경제인임을 증명한다. <사기>는 구체적으로 그가 19년에 걸쳐 세 차례나 천금을 벌었으며, 두 차례에 걸쳐 가난한 사람들과 먼 형제들에게 나눠주었다고 전한다. 나중에 그가 늙고 쇠약해지자 그는 일을 자손에게 맡겼다. 자손들은 가업을 잘 운영해 재산을 늘려 거만금에 이르는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여불위와 범려를 비교하면 재미있다.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보면 어느 정도 비슷하다. 범려의 경우 거의 패망 직전까지 간 나라를 구해내 화려하게 재기시켰다는 점에서 더 극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불위의 통치로 진나라가 통일의 기틀을 확고하게 닦았다는 점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지모와 계략은 서로 특장점이 확연하게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범려는 정통파적이고 충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여불위는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였다. 두 사람의 결말은 아주 대립적일 정도로 다르다. 여불위의 경우 결국 실제 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진시황으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그대를 하남에 봉했고, 10만호의 식읍을 내렸소?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 관계가 있기에 중부라고 불리오?’ 이런 편지를 받고 그는 독주를 마시고 죽는다. 또한 진시황의 통일 제국과 그 후손들도 오래지 않아 멸망하고 만다. 이와 달리 범려는 자손이 번창하고 가업이 번창해 ‘도주’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중국문화권에 남기게 된다. 권력에 끝까지 집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이렇게 컸다.

권력도 정욕처럼 ‘칼날에 묻은 꿀’이었던 것이다.


베를루스코니, 탁신, 정몽준…

부와 권력은 서로 분리된 채 견제하는 경향이 강했다. 과거 대다수 문명권에선 이런 불문율이 어느 정도 지켜져왔다. 그런 견제와 균형을 통해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지혜에서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현대에 이를수록 위협받고 있다. 미디어 발달과 함께 부를 가진 사람이 미디어의 힘을 이용해 권력까지 거머쥐려는 욕구가 커져가기 때문이다. 부과 권력 그리고 명예에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 부동산으로 시작해 미디어 재벌이 된 그는 두 차례 이탈리아 총리에 선출된다. (사진/ GAMMA)
부와 권력 그리고 명예를 동시에 추구한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이탈리아의 미디어 재벌에서 총리에 오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다. 이탈리아의 경제 중심지 밀라노에서 부동산 개발로 떼돈을 번 그는 텔레비전의 미래를 일찍부터 내다보고 적극적으로 투자했다. 그 결과 <레이테4> <카날레5> <이탈리아1> 등 3개 민영방송사를 장악하고 종합출판, 영화, 인터넷, 보험, 부동산 등에서 거부를 이룩하게 된다. 그는 유럽의 명문 축구클럽 인터밀란의 소유주이기도 하다. 이런 부를 바탕으로 그는 우파 정치인으로 정치에 도전해 1994년과 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때 부패 혐의로 기소까지 된 그가 이렇게 서유럽 최대의 사회주의 정당국가 이탈리아에서 정치적 성공을 거둔 것은 현대정치의 아이러니로 꼽힌다.

타이의 탁신 시나왓 총리도 비슷한 흐름의 대표주자로 꼽을 수 있다. 미국 유학파인 탁신 시나왓은 자신의 회사 어드밴스드 인포메이션 서비스(AIS)가 타이의 휴대전화 사업권을 따내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는 대성공에 힘입어 거부를 이룩했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위성통신 사업과 디지털 방송, 인터넷 등에 진출해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됐다. 그 뒤 정치에 뛰어들어 하원의원, 외상을 거쳐 애국당을 결성하고 마침내 총리에까지 오른 것이다.

세계적인 부호가문 미국의 록펠러 가문도 전통적으로 ‘정치 진출은 피한다’는 가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록펠러 3세의 동생인 넬슨 록펠러가 1974년 당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지명으로 부통령에 취임해서 이 가훈이 깨졌다. 록펠러 4세도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주지사와 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역시 세계적인 부호가문인 미국의 듀폰 가문도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가문의 불문율이 있었지만, 4대째인 피에르 듀폰이 델라웨어주 하원의원 주지사를 지냈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인 피에르 듀폰은 198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지명전에 나섰다가 중도에 사퇴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지난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그의 아들인 현대중공업의 정몽준 회장도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를 결정짓는 단계까지 간 바 있다.

필리핀에서는 이런 경향이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과거 마르코스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암살된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과 그의 부인으로 나중에 대통령이 된 코라손 아키노 여사는 모두 부유한 가문 출신이다.

 

 

 

 

 

 

 

 

 

 

 

 

 

 

 

 

 

 

유대교를 넘어 세계종교로

예수, 사회적 약자들을 파격적으로 끌어안고 모든 계급이 참여하는 그리스도교의 길을 열다

» 예수는 세계종교의 창시자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순교한 경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그가 나신 곳은 이름 없는 한 벽촌
그의 어머니는 보잘것없는 시골 여인
그는 나이 삼십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이름 없는 비천한 목수

그에겐 한권의 저서도 없으며
그에겐 아무런 지위도 없으며
그에겐 따뜻한 가정도 없으며
그에겐 큰 도시의 학문도 없으며
그에겐 큰 도시의 견문조차도 없이
그의 여행은 기껏 200마일도 못 되는 거리

진실로 그에겐 세상의 이른바 위대하다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그가 내어놓을 수 있는 이력서는 오직 그 자신의 한 몸뿐
그 자신의 삶은 또한 이토록 비참한 것
삼년의 전도와 사랑의 실천 끝에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오히려 무리들의 배척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

그러나 그 후 이천년이 흘러간 오늘
그는 오히려 인류의 역사를 영도해온 중심인물”


로마 점령 세력, 위협을 느끼다

오늘날 대략 18억~20억의 인류가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 인류의 3분의 1 정도가 신자라는 계산이 나오는 셈이다. 그 신자들이 2000년 역사를 통해 인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도 많겠지만, 확실히 그리스도교는 인류 문명에 가장 크고 깊은 영향을 끼친 요소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깊은 강도 작은 물줄기 하나에서 시작되듯, 그리스도교의 시원을 이루는 예수의 존재도 역사적으로는 매우 작고도 미약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기원전 4년쯤 로마제국에 정복돼 있던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와 약혼자인 목수 요셉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는 대부분 <신약성서>의 4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기록돼 전해지고 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의 족보는 유대인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 다윗왕을 비롯해 멀리는 이른바 ‘믿음의 조상’ 격인 아브라함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혹은 ‘양아버지’)는 당시 모두 ‘일반 대중’인 ‘암 하아레츠’(Am ha’aretz)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수에게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라는 4명의 형제와 적어도 2명의 누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수는 약 30살이 됐을 때, 세례 요한에 의해 요단강에서 세례(정확하게는 온몸을 물속에 들어가게 했다가 나오는 ‘침례’가 맞다)를 받았다. 세례 뒤 예수는 갈릴리에서 천국을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치기 시작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 유대인 대중들에게 예수(가운데 상의 벗겨진 차림)의 처리를 묻는 로마 총독 빌라도(가운데 흰 토가 차림).

곧 그의 주변에는 ‘오클로스’(Ochelos)인 민중들이 몰려들어 따르게 된다. 예수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이들 오클로스에게 새롭게 해석되는 하나님을 비롯해 심판과 자비 그리고 사랑 등에 대해 설교했다. 이와 함께 그는 병든 자와 불구자를 고치는 등 많은 기적도 일으켰다. 추종자들이 늘어가자 예수는 설교와 사역 활동을 더 폭넓게 펼치기 위해 제자 12명을 두었다. 나중엔 다시 70명을 더 두어 각처에 파송한다. 예수는 제자들이나 민중들에게 세련된 신학을 가르치는 대신 비유와 예화를 들려주며 설명했다. 비유는 재미있으면서도 교훈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예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점을 자주 비판했다. 반면에 종교 지도자와 율법학자 등 정통 유대교도들은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등 율법을 공개적으로 무시하는가 하면, 세리나 창녀 등 정결하지 못한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했다. 예수를 추종하는 민중들이 늘어나면서 그의 영향력을 예의 주시하던 유대교 최고지도부와 로마 점령세력은 위험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무장봉기가 간헐적으로 벌어지고, 열심당 등 봉기를 위한 비밀결사들이 다각도로 활동하고 있었다. 결국 예루살렘에 입성해 설교와 사역 그리고 활발한 토론 활동을 벌이던 예수는 체포돼 ‘로마제국 식민지의 정치범’으로서 그 극악함으로 유명한 십자가형을 받고 숨진다.

 

‘자기’의 성채를 과감히 부숴

그러나 예수의 영향력은 그가 죽은 뒤 다시 부활했다는 소문과 제자들이 다시 불붙인 포교 활동 등으로 더 광범한 차원에서 더 강도 높게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가 인류 역사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불과 3년 남짓한 짧은 공생애(公生涯)에 예수가 이렇게 큰 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종교의 관점에서 분석해보자.

1. 유대교의 자기중심주의를 뛰어넘는 이타주의를 펼쳤다.

2. 유대교의 계급적 제한성을 극복해 당시 다수파인 사회적 약자의 마음을 얻었다.

3. 율법을 뛰어넘는 자비(또는 사랑)의 존재를 최고 가치로 승화했다.

4.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이방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포교길을 열고 세계종교로 도약했다.

우선 이타주의의 관점부터 살펴보자. 이전까지의 종교는 ‘자기’라는 성채에 굳게 갇혀 있었다. 특히 모세의 율법으로 상징되는 유대교는 강력한 부권을 바탕으로 원시적 공동체주의의 가치를 밀어내고 개인 중심의 ‘사유화’와 인간 상호간의 ‘계약’을 절대화해왔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십계명 중에서)

‘불이 나서 남의 낟가리나 거두지 않은 곡식이나 밭을 태웠으면, 불을 놓은 사람은 그것을 반드시 물어줘야 한다.’(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와 전했다는 ‘배상에 관한 법’ 중에서)

» 예루살렘에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는 예수. 사람들이 ‘복되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이라고 외치고 있다.

이런 모세의 율법을 수천년 동안 자구대로만 고수해온 결과 예수 시대에 이르면 숱한 문제점이 드러난다. “그들(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 손가락도 꼼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더라도 율법상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 사회에서 무엇을 더 기대할 것인가?

두 번째, 계급적 제한성의 해방 역시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당시 유대교의 이른바 ‘정결제도’는 사람들을 엄격하게 차별하고 있었다. 예수는 이런 편견을 깨고 사회적 약자를 과감하게 끌어안았다. 그가 처음 사역을 나선 사마리아는 정통적인 유대인의 가치관에선 이방인과 혼혈이 득시글거리는 ‘더러운 땅’이었다. 나아가 예수가 만나고 접촉했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병든 사람’ ‘죽은 사람’ ‘피흘리는 사람’ ‘나병환자’ ‘혈우병 환자’ ‘창녀’…. 이건 완전히 ‘부정 타는 사람’으로서 사회의 냉대를 받으며 기피되는 사람들이 아닌가? 예수는 이런 이들을 파격적으로 끌어안음으로써 모든 계급이 참여하는 새로운 종교, 그리스도교의 길을 열었다.

 

예수를 신으로 승격시킨 교리상의 발전

세 번째, 예수는 율법보다 사람이 새로운 종교의 중심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 논쟁이다. 그에겐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십계명의 율법조차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게 아니다.’(‘마가복음’ 2장27절) 나아가 건강상태, 사회적 지위, 인종, 종교 등에 따라 누가 의로우냐 거룩하냐 깨끗하냐 바르냐를 가르던 세계에서 과감히 탈피했다. 그런 차별과 장벽은 전면적으로 후퇴한다. 그 대신 새로운 판단기준을 제시한다.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 엘 그레코가 그린 베드로(왼쪽)과 바울. 두 사람의 제자가 예수 이후 그리스도교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마지막으로 이런 교리상의 발전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는 유대인이라는 한계를 넘어 이방인 세계로 빠르게 확산돼나간다. 세계종교로의 질적 변화에 돌입하는 것이다.

한편 나중에 예수를 신으로 승격시키는 교리상의 발전도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죽음 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신의 일면을 그들에게 보여줬다는 믿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예수에게 기도드리는 일이 시작됐다. 결국 예수를 신으로 추앙하는 결정에 이르게 된다. 거의 300여년이 지난 4세기의 일이다. 예수를 성육신(Incarnation)으로 파악하는 교리는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주교회의)를 거쳐 성부-성자-성령이 하나의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설’을 공식화한 서기 381년 ‘니케아 신조’로 발전한다. 카렌 암스트롱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나타난 신’이라는 교리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불교, 힌두교에서도 발전했으며 이런 교리를 통해 이들 종교가 활력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파악한다.

인간은 자신을 닮은 신만을 따르고 좋아하는데, 예수는 그 정점에서 인류를 유혹했던 것인가?

 

‘경영자 예수’에게 배운다

» 로마권력과 하늘나라를 충돌시키려는 교묘한 음모에 대해 예수는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라는 말로 절묘하게 좌절시킨다. 당시 로마 황제 티베리우스가 새겨진 로마 은화.
야후(www.yahoo.com)에서 ‘jesus’를 치면 약 3950만개의 예수 관련 사이트가 나온다. 이 가운데 경영 관련 사이트는 아직 소수이긴 하지만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현대 들어와 예수의 성공을 경영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그 강점을 전수받으려는 노력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 예수>(로리 베스 존스·한언 펴냄)는 △자아극복 △행동 △인간관계 형성 등 3개 분야에서 예수가 보인 강점을 분석하고 있다. 여기 제시된 84가지의 강점 가운데 설득력이 있거나 눈길을 끄는 것들을 정리해 소개해본다.

1.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인간들에게 더 나은 인생 행로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을 교사이자 치유자로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광야의 시험’에서 제시받은 몇 차례의 ‘사업 기회’를 단호히 거부했다. 자신의 사명과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자신의 에너지를 절제했다: 어떤 여인이 군중 사이에서 그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예수는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묻었다. 그 정도로 자신의 에너지를 잘 알았다. 그는 사명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추종하도록 애걸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조종하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지도 않았다. 우리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할 때 우리의 에너지는 새어나가는 것이다.

3.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했다: 죽은 나자로에게 일어나라고 명하기 바로 전에 예수는 ‘항상 자신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감사하는 마음은 열린 마음, 경청하는 마음, 신앙으로 충만한 마음을 의미하기에 리더십의 핵심요소다.

4. 남을 정죄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그는 남을 정죄하는 것도 막대한 에너지가 새어나가는 일로 간주했다. ‘이 몹쓸 종아, 나는 바로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벌주겠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말라.’ 당신은 자신의 진취적인 활동에 지속적으로 마음을 쏟아라.

5.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는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 가능성으로 가득 찬 존재로 보았다. 죄인들이란 다만 화음을 이루며 노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일 뿐이다.

6. 팀을 결성했다: 그는 일단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을 때 지체하지 않고 팀을 결성했다. ‘나를 따르라’고 예수는 외쳤고,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따랐다.

7. 여성들에게 권한과 능력을 부여했다: 예수는 부활 뒤 가장 먼저 여성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여성들의 사명은 더 의심이 많은 남성 제자들에게 가서 그들을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부활한 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엠마오로 걸어가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거의 즉시 예수를 알아보았다. 하나님도 적당한 시기까지 비밀을 고수할 수 있는 처녀인 마리아에게 엄청난 계획을 최초로 말씀했다.

 

[로스차일드] 5발의 화살, 유럽에 명중하다

창업자 마이어 암셀로부터 8대째 내려오는 로스차일드 가문은 어떻게 부와 명성을 쌓았나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선물이요,
태 안에 들어 있는 열매는 주님이 주신 보상이다.
젊어서 낳은 자식은
용사의 손에 쥐어 있는 화살 같으니,
그런 화살이 화살통에 가득한 용사에게는 복이 있다.
그들은 성문에서 원수들과 담판할 때에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할 것이다.“
(구약성서 시편 127편)


» 로스차일드 가문 창업자의 다섯 아들. 왼쪽 위에서 시계방향으로 장남 암셀, 차남 살로몬, 3남 네이선, 4남 칼, 5남 제임스.
 

‘워털루전투 사건’으로 유명해지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마이어 암셀(1744~1812년)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게토(유대인 집단거주 지역)에서 태어난 그는 유대교 랍비양성학교에 다니다가 11살 때 부모가 천연두로 죽자 학교를 그만두고 소년가장으로 경제생활에 들어갔다. 유대인 사설금융업자의 도제로서 경험을 쌓은 그는 통일 이전 독일의 제후 귀족 부호들을 상대로 옛날 화폐와 골동품 등을 팔아 돈을 번다. 이와 함께 의도적으로 독일의 권세가들에게 접근해 결국 헤센카젤공국의 지배자인 하나우공 빌헬름의 신임을 얻어 궁정 어용상인이 된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은 붉은색(rot)과 방패(schild)의 합성어로, 마이어 암셀의 집에 붙은 붉은 방패에서 비롯됐다.

그 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유럽의 군주국가들과 전면적인 전쟁에 들어가 프랑크푸르트를 점령하자 마이어 암셀은 빌헬름의 빼돌린 재산을 대신 관리하는 절호의 기회를 잡는다. 이때 이미 영국에 진출해 있던 야심적이고 모험적인 셋째 아들 네이선(1777~1836년)은 이 비밀자금을 정식으로 투자하기 전에 여러 나라의 국채를 사고 되팔아 엄청난 단기차익을 챙기고 사업적 명망까지 얻는 데 성공한다. 네이선은 이 자금으로 채권, 금, 주식, 밀무역 등에 투자한다. 그 뒤 마이어 암셀의 다른 네 아들도 각각 프랑크푸르트(첫째 아들 암셀), 빈(둘째 살로몬), 나폴리(넷째 칼), 파리(다섯째 제임스)로 진출해 혁명과 전쟁의 대변혁기에 가장 이른 시간 안에 주요 정보를 공유한 채 유럽 전역을 커버하는 선진금융 기법으로 막대한 부를 쌓는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워털루전투 사건’일 것이다. 당시 유럽 전역을 무대로 가장 빠른 정보입수-전달 체계를 구축하던 로스차일드상회는 워털루전투의 결과를 자체 능력으로 런던상회에서 24시간 정도 일찍 알 수 있었다. 이 정보력을 바탕으로 영국 정부의 국채를 몇 시간 일찍 무더기로 사들이는 등의 방법으로 무려 1억3500만프랑의 이익을 얻었다고 알려진다. 한편 다섯 아들은 모두 유럽의 중심국가 오스트리아제국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는다. 작위를 받으며 5발의 화살을 쥔 손이 그려진 문장을 사용한 것을 계기로 그 뒤 형제에게는 ‘5발의 화살’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나폴레옹 전쟁 뒤 로스차일드 가문은 사실상 ‘유럽의 숨은 지배자’가 된다. 전쟁 중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의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하는가 하면, 이베리아반도에 진출한 영국군의 자금 조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네이선은 영국을 겨냥한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을 뚫고 영국 상품의 비밀교역을 주도했다. 결국 세계 최강대국 영국의 재정을 비롯한 금융시장은 네이선이 사실상 좌지우지하게 됐고, 막내 제임스도 프랑스에서 국왕 루이 필립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엄청난 부와 영향력을 과시하는 지위에 올랐다. 이런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로스차일드의 지원이 없으면 유럽의 어느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고대 유대인은 한 왕에게 복종했다는데, 지금은 여러 왕들이 한 유대인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철저히 유대적인 성공요인들

» 로스차일드 가문의 발상지인 창업자 마이어 암셀의 집. 가운데 건물의 왼쪽 부분. 1869년 촬영한 사진.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후 막대한 자금력과 정보력 그리고 각국 정치권력과의 밀접한 유대관계 등을 활용해 유럽을 휩쓴 산업혁명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해 부를 더욱 늘렸다. 프랑스의 경우 프러시아전쟁에서 패배한 뒤 1871, 1872년 두 차례에 걸쳐 배상금을 조달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으며, 영국에서는 몇 시간 만에 400만파운드를 영국 정부에 조달해 수에즈운하의 주식을 영국이 전격적으로 인수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엄청난 부와 이런 뛰어난 공로를 바탕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럽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가문이자 유럽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재벌가문으로 부상한다. 한편 19세기 후반부터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스라엘을 새로 건국하는 민족적 프로젝트에도 깊숙이 관여해 엄청난 자금을 지원했다.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업을 기본으로 석유, 다이아몬드, 금, 우라늄, 레저산업, 백화점 등의 분야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런던의 로스차일드은행은 잉글랜드은행의 대리점으로서 국제 금가격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프랑스의 최고급 포도주 가운데 하나인 보르도의 샤토 무통, 샤토 라피트 등을 생산하는 포도원도 이 가문의 소유이다. 현재 표면적으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10명이 약 15억달러 자산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 자산은 그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가문의 국제적 명성과 신용은 여전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성공을 거둔 요인으로는 이런 것들을 꼽을 수 있다.

1. 단결: 가문의 형제들이 하나의 화살묶음처럼 뭉쳤다.
2. 네트워크 경영: 네트워크를 통해 전체의 효율을 최대로 높이고, 위험을 분산시켰다.
3. 신용경영: 좋은 제품을 싸게 공급해 신용을 쌓고 다음 단계에 더 큰 거래를 장악했다.
4. 정보경영: 가장 정확한 정보로 가장 빠르게 사업기회를 잡아나가는 선진 경영기법을 동원했다.
5. 정경유착: 정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권력자와의 인맥을 형성해 사업기회를 잡는 데 능숙했다.
6. 2세 체제 준비: 자녀들에게 일찍부터 경제교육(상황에 따라선 실무교육까지)을 시켰다.

이런 요인들은 다른 한편으로 대단히 유대적인 성격이 짙다고 할 수 있다. 먼저 형제들이 뭉치는 것은 유대인들의 가족경영 방식과 일치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만든 회사 이름을 보면 ‘로스차일드 부자상회’ ‘로스차일드 형제상회’로 돼 있다. 실제로 월가에서 활동하는 레만 브라더스 은행도 이름 그대로다. 유대인들은 혈육이 같이 사업을 벌여 성공하거나 먼저 성공한 사람이 다른 형제를, 사촌을 차례로 끌어들이는 식으로 사업을 발전시키곤 한다.

» 워털루 전투 회화.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 전투의 결과를 24시간 먼저 알아 채권에 투자해 엄청난 돈을 벌어들인다.

어려서부터 실전형 경제교육을 받다

네트워크 경영은 당시 유대인이 처한 시대상황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유럽 각국에서 박해받는 소수였던 유대인들은 국가간 이동을 자주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동과 이주에 따라 도시마다 유대인 거주지역과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이 자연스럽게 형성돼 있었다. 바로 이 시나고그 등 유대인 공동체가 시대 변화에 따라 중요한 경영 거점이 된다. 자연발생적인 유대인의 상공회의소, 정보시장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시대 변화에 따라 유대인의 존재 방식이 실제로 새로운 경영에 대단히 유용하리라는 것을 일찍 깨닫고 대응한 것이다.

정보경영은 역사를 통해 유대인들이 지적 자산을 축적하거나 계승하고 공유해온 시스템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한편으로는 유대인의 게토로부터의 해방, 산업분야로의 본격 진출, 정치적 권리의 확대 등을 가능하게 했다. 유대인들은 역사상 처음으로 닥쳐온 이런 기회들에 과감하게 대응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지적 역량을 최대로 결합해 승부한 것이다. 그들은 전체의 대세를 정확히 읽고 거기서 벌어지는 개개 사안의 주요 정보를 일찍 파악해 유럽의 전통적인 은행이나 자본보다 훨씬 과감하고 빠르게 투기에 나서 성공한 것이다.

2세들에 대한 경제교육은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로스차일드의 경우 제2대 격인 ‘5발의 화살’ 형제들이 모두 어려서부터 실전형 경제교육을 충분히 마친 상태였다.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 암셀의 사업을 실무적으로 뒷받침해줄 수 있는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돼 있었다. 역사적으로도 유대인의 경제교육은 거의 원초적일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이 성경으로 삼는 모세 5경 가운데 하나인 ‘민수기’를 보면 금방 이해할 만하다.

“이스라엘의 장자 르우벤의 아들들에게 난 자를… 20살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 만한 남자를 다 계수하니 4만6500명이었다. …시므온의 아들들에게 난 자를… 계수하니 5만9300명이었다. …갓의 아들들에게 난 자를… 계수하니 4만5650명이었다. …”

이런 성경 구절을 어려서부터 읽고 암송해온 유대인에게 숫자는 인생의 기초이자 곧 돈벌이의 기초가 됐다고 할 수 있다.

» 로스차일드 가문의 3대인 라이오넬 로스차일드가 1858년 영국 하원에 의원으로서 소개되고 있다.

왜 미국에 진출하지 않았나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은 창업자 격인 마이어 암셀로부터 대략 8대째에 이르고 있다. 가문이 초기의 활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과 관련해선 2가지 정도를 꼽을 수 있다. 첫째 1800년대 후반 정세 판단을 잘못해 미국에 진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미국 진출에 대해선 ‘5발의 화살’ 형제 가운데 3남인 네이선 못지않게 사업을 잘한 것으로 평가받는 5남 제임스가 자신의 장남이 낸 미국 진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으로 전해진다. 지나친 유럽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셈이다. 둘째로, 세대가 내려갈수록 선조들만큼 뛰어난 경영인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과 관련해선 조심스럽게 가문 내부의 근친결혼 관련설을 거론하는 의견도 나온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파리상회의 창업자 격인 제임스가 조카딸과 결혼하고 그 딸이 다시 사촌과 결혼하는 등 근친결혼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토록 구대륙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가문에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던 것이다. 역시 신은 모든 것을 다 주시지는 않는 법일까?


유대인, 지독한 부자들

로스차일드 이외에도 많은 경제인들이 세계 경제에서 강력한 힘을 과시해왔다. 특히 20세기 초반 이후 세계경제의 중심이 미국으로 옮겨감에 따라 미국에서 유대인 부호도 많이 나오고 있다.

» 세계경제를 흔든 유대인들. 왼쪽부터 마이클 델,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소로스.
퀀텀펀드를 설립해 운용하는 헤지펀드의 귀재 조지 소로스도 유대인이다. 그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와 관련이 있는 인물로 알려졌으며, 당시 한국을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최상급 대우를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세계적인 소프트웨어 회사인 오라클의 창업자 겸 회장인 래리 엘리슨도 유대인으로 2000년 당시 자산 약 580억달러를 보유해 미국 제2위의 부자로 집계된 바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로부터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물려받은 스티븐 발머, 델컴퓨터의 창업주 마이클 델, 복합 미디어 그룹인 비아컴의 회장인 섬너 레드스톤, 하얏트호텔 체인 등 시카고의 부동산 재벌인 마몬그룹을 소유한 로버트 프리츠커와 토머스 프리츠커도 유대인이다. 블룸버그통신의 회장이었다가 지금은 뉴욕시장으로 선출돼 재임 중인 마이클 블룸버그, 세계적인 화장품 에스티로더의 회장인 레너드 로더, 유명한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도 역시 유대인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로렌스 부시는 1998년 기준으로 유대인이 소유하거나 직접 경영하는 기업이 미국 국민총생산(GNP)의 8~10%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개인 소유 재산으로 본 ‘미국 자산가 상위 400명의 부호 서열’(경제잡지 <포브스> 2000년 10월 간행)을 분석하면 이 가운데 적어도 64명, 16%가 유대인인 것으로 집계됐다. 실제로 미국 전체 인구 중 유대인이 차지하는 비율이 전체의 2%를 조금 넘는 점을 감안하면 부호 집적도가 가장 높은 민족그룹에 들어간다.

미국의 우량 헤드헌팅 회사인 토머스 네프가 1999년 발표한 ‘미국기업 리더 베스트 50인’ 가운데 유대인은 적어도 8명, 즉 16%였다. 이 조사에서 유대인인 사람은 다음과 같다.

# 델컴퓨터: 마이클 델(기업명: 경영자)
# 월트디즈니: 마이클 아이스너
# GAP(의류 소매): 도널드 피셔
# 베어 스턴스(투자은행): 앨런 그린버그
# AIG(보험): 모리스 그린버그
# 인텔(반도체): 앤디 그로브
# 스타벅스: 하워드 슐츠
# 시티그룹(금융 증권): 샌포드 웨일

 

[영국왕실] 엘리자베스, 비밀의 열쇠를 찾아라

영국 왕가는 ‘군주들의 무덤’ 20세기에 어떻게 살아남았나, 그들에게 21세기 미래는 있는가

 

제국이 융성할 때 그 군주제는 ‘안전’하다. 비록 특수한 사정에 따라 군주가 바뀔 수는 있어도 군주제 자체는 제국의 융성이라는 현실의 반대급부로 자연스럽게 존속된다. 그러나 제국이 더 이상 융성하지 못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더구나 공화제가 군주제를 압도하고, 첨단이 전통을 능가하며, 개인이 집단에 우선하는 21세기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

“엘리자베스 2세, 영국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및 기타 해외 영토의 여왕, 영연방의 원수 및 신념의 수호자….”

» 스코틀랜드 근위대 사령관 복장 차림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왕실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왕가라고 할 수 있다. 로마 교황청의 교황을 제외하곤 유럽 어느 왕가보다도 역사가 길다. 현재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는 서기 827년부터 839년까지 잉글랜드를 통치한 잉글랜드 국왕 에그버트왕(Egbert, King of England)의 직계 후손이다. 가계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서기 5세기 초엽 최초의 웨스트색슨 왕 세드릭(Cedric, first King of West Saxons)에까지 이른다. 그러니까 약 1500년의 가문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동시에 엘리자베스 여왕은 서기 1066년 국왕으로 즉위한 노르망디공 윌리암으로부터 따지면 40번째 국왕이 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어떤 일을 해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변해갈 것인지와 상관없이 영국 왕실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손꼽히는 ‘명가문 가운데 명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영국 왕실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명예와 호사, 그리고 부와 특권을 누리고 있다.

“2002년 4월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 즉위 50주년(Golden Jubilee)을 기념해 런던 버킹엄궁 정원에서 열린 야외 콘서트에는 비틀스의 폴 매카트니, 록그룹 퀸, 기타의 신화 에릭 클랩튼, 엘튼 존 등 슈퍼스타들이 총출동했다. 왕실쪽은 콘서트 참석 신청서를 낸 200만명을 대상으로 컴퓨터 추첨을 해 2만4천여명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이 행사는 즉위 50주년을 맞아 영국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 펼쳐진 수천개의 크고 작은 기념행사 가운데 하나다.”

“영국 왕실의 재산은 최대로 60억파운드(약 12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 가운데 약 4분의 3이 여왕의 몫이라고 영국의 한 주간지가 보도했다. 이와 달리 엘리자베스 여왕은 공식적으로 약 3억파운드의 재산으로 영국에서 100위권 부자로 집계되고 있다. 이 경우는 버킹엄궁과 왕관 그리고 왕실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 등을 여왕의 개인 재산에 포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25만파운드가 넘는 유산에 대한 상속세율이 40%이지만, 국왕은 이 상속세를 물지 않는다. 1993년 엘리자베스 여왕과 존 메이저 보수당 정부가 ‘군주로부터 군주로의 상속에는 세금을 면제한다’고 합의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02년 여왕의 모후가 101살로 타계하면서 남긴 유산 7천만파운드(약 1400억원)에도 상속세를 물리지 않았다.”

» 1985년 한 자리에 모인 영국 왕실 멤버들. 맨 오른쪽에 다이애나 빈도 보인다.

“1999년 6월 벌어진 20세기 영국 왕실의 마지막 결혼식인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막내아들 에드워드 왕자의 결혼식은 전세계에 방영돼 약 2억명의 시청자들이 지켜보았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2001년 1년 동안 가든파티, 연회, 리셉션을 통해 7만여명을 접대하는 등 각종 행사와 왕실 유지 비용으로 쓴 돈은 3530만파운드(약 706억원)에 이른다. 여왕은 지난 1년 동안 공식행사에 2200회 참석하고, 22회의 수여식을 열어 2600여명에게 서훈을 수여했다. 그리고 모두 2만1천건의 기념식 메시지를 보냈다.”

 

사랑을 위해 왕관을 버린 에드워드 8세?

영국 왕실은 이런 화려한 무대의 다른 한편에서는 격심한 변화의 소용돌이를 경험하고 있다. 우선 왕가에서는 지난 3세대 동안 매 세대마다 퇴위와 이혼 등 이전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사태가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는 1936년 미국 출신의 이혼녀 심슨 부인과 결혼하기 위해 왕위에서 물러났다. 이른바 ‘사랑을 위해 왕관을 버렸다’는 저 유명한 전설을 낳은 것이다(그러나 이 전설은 최근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비밀문서를 근거로 심슨 부인이 실제로는 나치 독일의 열렬한 지지자로 독일쪽에 비밀정보를 흘렸다는 주장이 나와 크게 손상받고 있다).

다음 세대인 마거릿 공주(엘리자베스 2세의 동생)도 이혼하고, 그 아랫세대인 찰스 왕세자대에 이르면 아예 이혼이 정상인 것처럼 봇물을 이룬다. 찰스를 비롯해 앤 공주, 앤드루 왕자가 줄줄이 이혼한 것이다. 1936년 에드워드 8세의 퇴위를 앞두고 당시 스탠리 볼드윈 총리가 “이혼녀와의 결혼은 군주제의 고결함을 위험에 빠뜨린다”고 발언한 사실을 상기하면 놀랍기 짝이 없는 사태 진전이다.

» 찰스 왕세자의 부인 다이애나 빈과 앤드류 왕자의 부인인 퍼거슨 빈이 애스코트 경마 개장 첫날 화려하고 대담한 옷차림으로 입장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왕자들과 이혼했다.

이와 함께 매스컴의 발달과 대중 정치권력의 확산으로 왕실은 비밀주의 등 전통적 보호막을 사실상 제거당해 위험에 훨씬 쉽게 노출됐다. 전통적인 왕실 기능의 중요성은 지속적으로 축소되거나 후퇴한 반면 오히려 왕실은 현대의 ‘인기인’으로서 자리매김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이에 따라 인기인의 인기순위처럼 국민의 왕실 지지도가 사소한 사건에 따라 춤을 추고, 군주제라는 시스템의 존립 여부가 크게 위협받는다. 2002년 영국의 여론조사기관 모리(MORI)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응답자의 70%가 영국의 미래를 위해 군주제와 여왕을 지지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다이애나 왕세자비와 찰스 왕세자의 이혼, 다이애나비의 죽음 등 충격적인 사건의 영향을 많이 받던 시기인 2000년 6월의 여론조사에서는 왕실 지지도가 사상 최저인 44%까지 떨어졌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영국 왕실은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자랑하던 제국의 영광을 지키는 상징으로서 굳건히 헤쳐나가고 있다. 나아가 유럽에 있는 다른 10개 입헌군주국가의 문화적 구심점으로서, 전세계에 존속하는 28개 군주국가의 대표주자로서 뉴스 메이커의 지위를 놓치지 않고 있다.

 

타협과 조화, 노블레스 오블리주

20세기는 어느 의미에서는 군주들의 무덤과도 같았다. 엘리자베스 2세의 큰아버지 조지 5세의 재위기간인 1910년부터 1936년까지만 해도 13명의 국왕이 사라지고 18개의 왕조가 붕괴됐다. 거대제국 러시아의 차르가 볼셰비키에게 총살되고, 도처에서 왕들은 망명해야 했다. 영국 왕실이 유럽을 휩쓸던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제국주의의 전면 후퇴라는 대격변기를 거치면서도 살아남아 세계에서 가장 오랜 왕가의 하나로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대략 다음과 같은 요인들을 꼽을 수 있겠다.

1. 타협: 역사 발전에 따라 밑으로부터 거세게 솟아오르는 대중의 힘과 일찍 적절하게 타협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충실한 것이다. 절대왕정을 끝까지 고집한 프랑스와 러시아의 왕실이 몰락한 것과 달리 그들은 살아남았다.

2. 유능한 지도세력: 물론 영국 왕정의 타협은 영국의 유능한 지도세력이 주도한 것이다. 귀족을 중심으로 한 이 지도세력은 국내 안정을 바탕으로 기득권의 벽 안에 교착된 구대륙 대신 바다로, 신세계로 진출했다. 왕실은 이 대세에 적절하게 타협하거나 이것을 이용할 줄 알았다.

3. 노블레스 오블리주: 특권계급의 도덕적 의무를 실천하는 데 영국 왕실은 어느 왕실보다 모범적이었다. 그런 실천을 바탕으로 국가적 위기 때 국민적 구심점의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삼촌인 켄트공은 2차대전 때 군부대를 시찰하고 돌아오다가 사망했고, 여왕의 아들 앤드루 왕자도 1980년대 아르헨티나와의 포클랜드 전쟁 때 헬기조종사로 참전했다. 여왕 자신도 1940년 2차대전 때 14살 나이로 직접 의 위문방송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1945년 봄에는 직접 여성봉사부대에 들어가 소위로 복무하기도 했다.

4. 전통과 현대의 조화 노력: 영국 왕실은 가장 전통적이면서도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시대 변화를 수용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의 큰아버지인 조지 5세는 노동당 정부의 등장을, 엘리자베스 여왕은 여성 총리의 등장을 처음으로 받아들였다. 여왕은 또 텔레비전의 위력을 일찍 깨닫고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1953년 자신의 대관식 때 의 중계 제의를 왕실이 반대했음을 알고 여왕은 즉각 허용하는 것으로 바꿨다.

» 다이애나의 장례식에 모인 왕실 남자들. 오른쪽부터 시아버지 필립공, 남동생 찰스 스펜서,
큰 아들 윌리암, 작은 아들 해리 그리고 남편 찰스 왕세자.
 
왕실 유지 비용 등을 둘러싼 논란

텔레비전을 통해 연례연설을 한다는 아이디어를 낸 사람도 여왕 자신이다. 여왕과 찰스 왕세자는 최근 벤처 투자에 나서고 있기도 하다. 여왕 자신은 최근 개설한 영국 왕실의 공식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royal.gov.uk)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누비는가 하면, 세계 각 나라의 왕족이나 국가 지도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낸다.

이런 변신 노력에 힘입어 영국 왕실은 여러 고비를 대체로 잘 헤쳐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 전망이 반드시 밝다고만은 하기 어렵다. 현재 군주제는 엘리자베스 2세의 카리스마와 영국의 과거 영광에 대한 국민적 향수 등에 힘입어 그 순기능을 더 인정받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왕실 유지 비용과 격식의 축소 등을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과연 21세기 격변의 시대에 군주제도가 존속할 수 있을지 증명하는 책무가 영국 왕실에 지워져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윌리엄 왕세손(찰스-다이애나의 큰아들)이 엘리자베스 여왕의 하노버 왕조에서 가장 머리가 좋은 수재이자 만능 스포츠맨으로 영국 국민들에게 광범한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점이 왕실의 큰 위안이다.


왕족은 비즈니스맨?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가운데 하나인 영국 왕실은 국민들의 왕실 개혁 요구에 부닥쳐 운신의 폭이 점차 좁아지는 양상이다. 이런 도전 앞에서 비즈니스에 대한 왕족의 관심도 자연스럽게 높아지고 있다.

» 유기농 사업가로 성공한 찰스 왕세자(가운데)와 그룹 스파이스 걸스.
특히 영국 왕실은 벤처에 대한 지향이 상대적으로 매우 강한 편이다. 선두주자라 할 수 있는 찰스 왕세자는 유기농 사업가로 성공해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1996년 다이애나 세자빈에게 위자료로 약 300억원을 지불해 거의 빈털터리가 됐다고 한다. 그런 그가 유기농 식품업체인 ‘더치 오리지널스’의 성공으로 경제적으로 재기하는 데 성공할 것으로 보인다. 창업한 지 14년 되는 더치 오리지널스는 웰빙 바람에 힘입어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다. 찰스 소유의 왕실 영지인 ‘더치 오브 콘월’에서 생산되는 100% 유기농 재료로 전통 비스킷과 쿠키, 저장식품을 만드는 이 식품회사는 2003년 매출 5200만유로(한화 약 730억원)에 150만유로의 순익을 내 영국 유기농 기업에서 선두로 자리잡았다. 사업 확장에 따라 초콜릿, 크리스마스 푸딩 등도 생산하고, 자연 상태에서 키운 쇠고기와 돼지고기, 햄, 소시지도 취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찰스는 이 회사 제품의 라벨에 자신이 직접 그린 수채화를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이런 사업적 배경 때문인지 찰스는 1999년 유전자 변형 곡물의 수입을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며 정부에 공개질문서를 보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 2세도 지도서비스를 하는 겟매핑닷컴(getmapping.com)에 투자해 한때 주식가치가 10배로 뛰어 60만파운드에 이른 적도 있다. 그러나 여왕의 투자는 투자 목적이라기보다 영국의 지도를 디지털로 제작해 온라인으로 서비스하는 회사의 성격을 평가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여왕의 막내아들 에드워드 왕자도 아던트프로덕션이라는 영화사 겸 텔레비전 프로덕션을 세워 사업을 벌였다. 세계적인 부호로 알려진 브루나이 국왕이 이 회사에 20만파운드를 투자하기도 했다. 에드워드 왕자는 말레이시아와 브루나이 왕실을 등장시키는 ‘로열가든’이라는 텔레비전 연속극을 기획하다가, 브루나이 방문 중 공무 대신 영화사 일을 했다는 비난이 일자 그 사업에서 손을 뗐다. 에드워드 왕자의 부인 소피 공작부인도 홍보사 일에서 손을 뗐다.

 

[오나라 오씨] 오씨, 영원에 도전하는 가문!

왕조의 몰락과 참극 속에서도 살아남아 한국 · 대만 · 일본을 거쳐 전 세계로

 

삼국지 영걸 가운데 한명으로 유명한 오(吳)나라의 손권은 서기 230년 장군 위온과 제갈직을 시켜 갑사 1만명을 데리고 바다 건너 이주와 단주로 가게 한다. 인구가 모자라 천하통일에 결정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것을 깨닫고 그런 식의 ‘사람 사냥’을 해서라도 인구를 늘리려 한 것이다. 지금의 대만인 이주까지 원정을 나서는 처절한 노력까지 기울여보지만, 결국 오나라는 그 50년 뒤인 서기 280년 압도적인 인구와 물자를 갖춘 진나라에 멸망하고 만다.


2500년 전의 오나라가 부활하다

» 오씨의 존속에 크게 기여한 사실상의 시조격인 계찰. 왕위를 양위하는 등 그의 높은 인격과 도덕성을 기려 공자는 직접 비문을 쓰기도 했다.
오나라는 그로부터 620여년 뒤인 중국 오대십국시대에 다시 부활한다. 당나라 말기 회남절도사였던 양행밀이 서기 902년 양주를 수도로 삼아 역사상 세 번째 오나라를 세운 것이다(한나라 초기 ‘오초칠국의 난’으로 반란국가로 등장한 오나라까지 치면 역사상 네 번째임). 서기 10세기에 등장한 이 오나라는 35년이라는 짧은 기간만 존속하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이 사건은 중국 역사상 끊임없이 소멸을 반복하는 ‘오나라’라는 존재의 무거움을 새롭게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왜 양쯔강 이남의 강남에서는 2500년 전 사라진 춘추시대의 오나라가 지속적으로 민중의 마음을 뒤흔들며 되살아나곤 했던 것일까? 무엇이 유독 오나라라는 왕조의 처절한 부활을 반복적으로 가능하게 했던 것일까?

바로 이런 오래고도 뿌리 깊은 염원을 반영한 듯한 사건이 역사 속에서 벌어진다. 오나라의 국명을 모태로 하는 ‘오씨’라는 가문이 전세계에 퍼져나가 오나라의 정체성을 지금까지 이어가는 것이다. 기원전 473년 최초의 오나라가 멸망한 뒤로부터 거의 2500년, 왕조는 갔어도 가문은 살아남았다.

오나라는 오태백이 처음으로 지금의 장쑤성 쑤저우 지방에 봉해진 이후 25대 왕 부차 때까지 이어지다가 멸망했다. 이 25대를 내려오는 동안 언제 정확히 오씨라는 성이 정립됐는지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주류에서 벗어난 왕족들이 망명이나 투항 등으로 다른 성씨를 갖게 되는 일도 생겨났다. 결정적으로 오나라가 월나라에 멸망당한 이후 왕족의 여러 지파를 중심으로 자신들을 오씨라는 정체성으로 일체화한 집단이 폭발적으로 많아진다. 왕조가 존속할 때는 오히려 희미하던 정체성을 멸망 뒤의 고난 속에서 더 명확하게 인식하고 강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역사를 보자.

» 합려의 명으로 오자서가 쌓았다는 소주고성. 소주는 오나라가 망한 뒤 월나라에게 크게 파괴됐다가 후대에 복원됐다.

“오나라 19대 왕 수몽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맏아들은 제번, 둘째는 여제, 셋째는 여말, 넷째는 계찰이었다. 계찰이 현명하고 재능이 있어서 수몽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사양했다. 할 수 없이 큰 아들을 옹립하면서 형제순으로 차례로 즉위토록 유언을 남겼다. 결국에는 계찰이 왕위에 오르도록 배려한 것이다. 유언에 따라 왕위는 이어졌지만, 다시 계찰 차례에 이르자 이번에도 그는 오나라 사람들의 간곡한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가족을 떠나 밭을 갈며 거절의 뜻을 분명히 했다. 할 수 없이 왕위는 셋째 여말에 이어 그 아들 요에게 돌아갔다. 이것이 오나라의 운명에 결정적인 전기가 된다. 맏아들 제번의 아들 공자 광이 자신에게 올 왕위가 요에게 잘못 갔다면서 요를 암살하는 쿠데타를 일으켜 오왕에 등극한 것이다. 이 공자 광이 합려이다. 이 전격 쿠데타 당시 요의 아들인 공자 촉용과 개여는 전쟁에 나가 초나라군에 포위돼 있었는데, 이 소식을 듣고 초나라에 항복한다. 초나라에 투항한 형제는 초나라 서 땅에 봉해져 각각 촉용씨와 개여씨의 시조가 된다. 오로부터 분리된 성씨가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에는 다시 합려의 동생 부개가 반란을 일으킨 뒤 역시 초나라로 항복해 당계씨의 시조가 된다.

월나라의 파괴, 오나라의 멸망

어쨌든 오나라는 합려왕 때 크게 번성한다. 손자와 오자서의 보좌로 합려는 초나라 수도를 함락하는 등 큰 전과를 올린다. 그러다가 배후에서 갑자기 습격해온 월나라 군사와 싸우던 중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사망한다. 저 유명한 오월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오월대전에서 초기 대승을 거둔 오왕 부차는 교만함과 간신들의 아첨에 빠져 나라를 멸망으로 몰고 간다. 오자서와 공손경 같은 충신들을 죽인 그는 결국 월나라에 패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한다.

» 진시황릉의 동마차. 진씨는 진시황의 후예라는 영성 연원설 등 3가지 연원설이 있다.

오나라의 멸망은 ‘오’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던 국가 지역 핏줄의 3가지 가운데 2가지의 단절을 가져왔다. 나라는 망해 월나라의 식민지가 됐다. 양쯔강의 뱃길을 중심으로 무역국가로서 번영을 구가하던 수도 오(오늘날의 쑤저우)도 파괴됐다. 역사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월나라 사람들은 오나라에 대한 복수심으로 오나라의 건축물을 철저히 파괴했다. 부차가 세운 고서대도 부서지고, 수도 오도 파괴를 면할 길이 없었다.’ 사마천은 이 파괴 이후의 양상을 ‘오나라의 폐허’(吳墟)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무너진 성벽은 과연 여기가 한때 번화하던 오나라 수도였는지 도저히 믿을 수 없게 했다. 석양은 핏빛으로 물들었다‘라고 표현한 이도 있다.”

이 참극에서도 3가지 가운데 하나는 가장 확실하게 살아남았다. 핏줄, 바로 오씨라는 성씨다. 그러나 오씨라는 성이 살아남기 위해 치러야 했던 고통은 매우 컸다.

“왕족 가운데 많은 이들이 전쟁에서 죽거나 포로가 되고 유랑민이 됐다. 부차의 아들인 태자 화와 그 아들도 패망 몇해 전 포로로 붙잡혀 월나라로 끌려갔다. 새로 세워진 태자 우와 고멸 등 왕자들도 월나라에 포로로 잡혀갔으며, 다른 왕자 전문은 피살됐다. 또 다른 왕자인 경기와 그 가족은 송나라와 초나라로 달아났다. 그 밖에 많은 왕족들이 월나라의 박해와 노예가 되는 길을 피해 달아나야 했다. …오씨 대부분은 집을 떠나 월나라의 노예가 되거나 월나라 사람 밑의 예속민이 돼야 했다. 월나라 벽지로 강제이주돼 노역을 해야 했던 사람도 많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나라 멸망 뒤 오씨를 살아남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왕권을 둘러싸고 내부 싸움을 벌였던 왕들과 그 후손이 아니라 양위파 계찰과 그 후손이다. 역사를 다시 보자.

진(秦)씨의 연원에 대한 세가지 설

» 오나라의 초석을 닦은 손책, 손씨 가문은 춘추시대에 망한 오나라를 다시 부활시켜 천하통일을 노린다.
“오나라가 망할 때 계찰의 장손 오복번은 노모와 처 그리고 식솔을 이끌고 도망쳐 동정호 부근으로 갔다(역사서를 보면 계찰은 이전까지는 성이 없이 계찰로 불리다가 오나라 멸망 뒤부터 ‘오계찰’로 표기되는 변화가 일어난다). 지금 호산으로 불리는 무봉산 남쪽에까지 간 그는 월나라 사람들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성과 이름을 감추고 자신의 가운데 이름을 따서 ‘복씨’라고 성을 바꿨다. 그리고 세세손손 그곳에 은거한 채 살았다. 바깥 세상과도 절연한 채 집안 사람들은 물고기를 잡고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갔다. 맨 처음 남매끼리 결혼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 문중결혼으로 가계를 이어가던 그들은, 그러나 자신들의 조상을 잊지 않았다. …그 가문은 1500여년이나 흐른 남송 때 다시 ‘오씨’라는 성을 되찾는다.

계찰의 둘째아들 오정생 일파는 가장 가문이 융성해진 경우이다. 제나라로 피난한 그는 제나라 공주와 결혼해 아들을 낳은 뒤 ‘나라를 되찾는다’는 결의를 담아 아들 이름을 ‘후번’이라고 짓기도 한다. 오후번은 나중에 노나라의 상국이 되고, 그 아들 오번은 공자의 제자 안회의 제자가 된다. …”

이 계찰의 아들 다섯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오씨 가운데 대종을 이루게 된다. 왕권 다툼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왕들과 그 후손들이 투항 등으로 다른 성씨로 정착하는 등의 변화를 많이 겪은 데 반해 그와 그의 자손은 오씨의 정통으로서 가문을 가장 활발하게 흥성시킨 셈이다. 이런 역사를 가진 오씨는 그 뒤 한국과 대만, 일본을 거쳐 전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왕조가 사라진 이후에도 성씨로 남아 존속하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진(秦)나라의 진씨도 주목할 만하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왕조 진나라가 비교적 단명했기에 그 연속성에 대한 관심도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씨의 연원에 대해선 오씨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구별짓기는 쉽지 않다. 대략 3가지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1. 영(?)성 연원설

2. 희(姬)성 연원설

3. 로마 연원설

영성 연원설은 진시황 진왕조와의 관련성을 가장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경우이다. 영은 원래 진시황의 성이다. 진시황의 이름이 정이었으므로 풀네임이 영정(?政)으로 된다. 이 설은 사마천의 <사기> ‘진본기’(秦本記)의 기술을 근거로 하고 있다.

“주나라 효왕이 섬서성에 살던 목축업자 비자에게 봉읍을 주어 영씨의 제사를 계승하게 하고 이름을 진영(秦?)이라 했다.”

이 진영의 후손이 나중에 진왕이 된다. 그러니까 진나라 멸망 뒤 진나라 왕족의 성씨를 가지고 있던 집단이 진씨라는 성씨로 정체성을 이어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진시황의 혈족임을 정확하게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 시조쪽은 중원의 한족보다는 주변민족일 가능성도 강력하게 시사한다.

 

전쟁으로는 왕조를 지킬 수 없었다

희성 연원설은 진씨가 주공 단의 후예로 희성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주장이다. 주공 단의 큰아들 백금이 노나라 노씨의 시조가 되고, 다시 그의 지차 자식 가운데 진읍에 봉해진 자손에서 진씨의 시조가 나왔다는 것이다.

로마 연원설은 매우 독특하다. 한나라 초기 반초의 서역 경략 뒤 로마로부터 사신과 사람이 지속적으로 오가는 등 교류가 활성화됐으며, 서기 4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중국에 들어와 살기 시작한 로마인들이 진씨 성을 갖게 됐다는 주장을 편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서역을 비롯해 유럽쪽에서 중국을 ‘지나’(차이나, 진)로 부르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3가지 연원설을 가진 진씨는 어쨌든 한나라 이후 부침을 겪으며 존속 발전해오다가 점차 관중 지방과 중원에서 확장돼 강남, 서천, 요령 등지로 무대를 넓혀갔다고 한다. 그 뒤 서역적 기풍과 세계주의적 분위기가 강하던 당나라 때 비약적으로 발전했다고 평가받는다. 특히 안록산의 난 이후 진씨 등 진나라 후손들은 본격적으로 강남으로 진출해 두각을 나타낸다.

그 옛날 진나라는 조나라와 전쟁을 벌여 이긴 뒤 포로 40만명을 죽인 적이 있다. 그 뒤 이번에는 초나라 항우의 군대에 사로잡힌 진나라 병사 20만명은 초나라 멸망의 보복으로 생매장당한다. 이런 피로 피를 씻는 전쟁으로는 어느 왕조도 영원히 자신을 지킬 수는 없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인간이 영원히 지킬 수 없는 국가(왕조) 대신 가문으로 영원에 도전하기 시작했던 것은….


춘추전국시대, 지금도 살아있다

» 당나라의 영역을 나타내는 지도. 당나라는 초기는 사회적 번영을 통해, 후기는 인구의 대규모 강남 이주를 통해 성씨의 비약적 발전을 가능했다.
성씨는 역사 발전에 따라 점차 늘어났다. 오씨의 예에서 보듯 역사의 진전에 따라 새로이 지파가 생겨나고 새로운 창성이 이뤄져 늘어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사라지는 성씨도 있지만 그보다는 새로 생겨나는 성씨가 훨씬 많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예를 보자. 서기 1100년대 무렵 북송 시대에 편찬한 <백가성>(百家姓)에는 438개 성이 수록돼 있다. 그러다가 명나라 때에 이르러 <천가성>(千家姓)에는 총 1968개 성이 실린다. 그 뒤 현대에 이르러 편찬된 <중화성씨대사전>은 중국의 56개 민족의 성이 총 1만1969개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성씨 관련 서적인 <중화고금성씨대사전>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존재했거나 존재하고 있는 성씨가 총 1만2천개라고 추산한다.

왕조와의 연관성 아래 부침과 흥망을 같이해온 성씨는 오씨나 진씨 이외에도 많다. 일단 춘추전국시대 나라 이름으로 등장한 것들은 거의 모두 성씨로 진화해 생존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춘추전국시대의 주(周)나라, 진(晉)나라, 제(齊)나라, 위(魏)나라, 한(韓)나라, 노(魯)나라, 정(鄭)나라, 채(蔡)나라, 송(宋)나라, 당(唐)나라 등은 다 성씨로 살아남았다.

물론 멸망한 뒤 다시 세워져 마침내 천하통일을 이룬 나라도 있다. 삼국지 시대를 통일한 사마의 가문 진(晉)나라, 춘추시대 때 사라졌다가 이연 부자에 의해 건국돼 통일을 이룩한 대제국 당나라, 역시 춘추시대 때 사라졌다가 조광윤에 의해 건국돼 당나라 이후의 통일천하를 이룬 송나라 등이 그렇다. 이와 달리 이민족이 세운 나라의 이름은 아무리 통일을 이루는 성과를 올렸어도 성씨로 이어지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몽고족이 세운 원(元)나라, 만주족이 세운 청(淸)나라 등이 그렇다. 또 중국 이외의 나라에서도 이런 경향이 대단히 드물어 눈길을 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고(高)씨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설이 있지만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할 수 있다.

 

[경주 최부잣집] “백리 안에 굶는 이가 없게 하라”

‘부자란 어떠해야 하는가’ 깨달음을 주는 ‘조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 최부잣집 300년의 비밀

 

경주 최부잣집을 생각하면 두 가지 감동적인 장면이 떠오른다.


“서기 1671년 현종 신해년 삼남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 경주 최부자 최국선의 집 바깥마당에 큰 솥이 내걸렸다. 주인의 명으로 그 집의 곳간이 헐린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굶어죽을 형편인데 나 혼자 재물을 가지고 있어 무엇하겠느냐. 모든 굶는 이들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라. 그리고 헐벗은 이에게는 옷을 지어 입혀주도록 하라.’ 큰 솥에선 매일같이 죽을 끓였고, 인근은 물론 멀리서도 굶어죽을 지경이 된 어려운 이들이 소문을 듣고 서로를 부축하며 최부잣집을 찾아 몰려들었다. …흉년이 들면 한해 수천, 수만이 죽어나가는 참화 속에서도 경주 인근에선 주린 자를 먹여살리는 한 부잣집을 찾아가면 살길이 있었다. …그해 이후 이 집에는 가훈 한 가지가 덧붙여진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

» 마지막 최부자로 불리는 최준씨(오른쪽) 형제, 왼쪽의 동생 최윤은 형을 위해 대신 일본참의가 되는 오명을 뒤집어써 해방 뒤 반민특위에 끌려가기도 했다.
(사진/ 황금가지 제공)
 

흉년 때 곡식 창고를 개방하다

흉년은 없는 자에게는 죽음과 절망이었지만, 가진 자에게는 부를 엄청나게 증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최부잣집은 그런 부자들과는 정반대의 길을 갔다.

“최국선은 아들에게 서궤 서랍에 있는 담보서약 문서를 모두 가지고 오게 한다. ‘돈을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없더라도 갚을 것이요, 못 갚을 사람이면 이러한 담보가 있어도 여전히 못 갚을 것이다. 이런 담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겠느냐. 땅이나 집문서들은 모두 주인에게 돌려주고 나머지는 모두 불태우거라’…”

» 최부잣집 창고. 흉년이 들면 굶주리는 이들을 구휼하기 위해 800석이 들어간다는 경주 교리의 이 창고문이 열렸다.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쓴 경제학자 전진문 박사는 최부잣집이 흉년 때 경상북도 인구의 약 1할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구휼을 베풀었다고 추산했다. 보통 춘궁기나 보릿고개 때인 3, 4월에는 한달에 약 100석의 쌀을 나눠줬으므로 1만명 정도가 쌀을 얻어갔다고 가정한다. 어떤 때는 약 800석이 들어가는 큰 창고가 거의 바닥이 나다시피 했다는 것이다. 신라의 수도이던 경주는 그렇게 1천년의 저력에 어울리는 한 부자 가문을 냈다. ‘경주 최부잣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 가문은 조선조 중엽 진취적인 기상으로 농업을 일궈 만석꾼의 지위을 이룩한 뒤 10여대 300년 동안 이 부를 현명하게 지켜내고 선하게 활용해 역사에 이름을 남긴다. 비록 이 집안은 다른 나라의 거대부호 가문처럼 부의 규모가 크지도 않고, 다른 명예와 권세를 추구해 성공하지도 않았지만, 몇 가지 점에서 평가받을 자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1. 모두를 살리는 부: 부의 생성과 축적 그리고 활용에서 누구를 해치지 않고 각 주체를 가능하면 모두 살리는 부를 구현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적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특권계층의 책임)를 구현한 가문으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다.

2. 경제 외적 노하우(know-how): 부를 지켜내는 동력으로서 경제 외적 노하우를 대단히 중요하게 평가했다. 당대만의 성공이 아니라 긴 성공을 위해선 자기와 가문을 제대로 다스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고 대비했다.

3. 가문의 장기 생존과 발전: 가문의 동질성과 순정성을 10여대 300년 동안 유지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드물다. 더구나 전란과 민란, 외침, 식민통치, 체제 대립 등으로 점철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경제적 부와, 선행을 계속하는 명가문의 전통을 이어간다는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

4. 후손 교육의 성공과 그 비결로서의 기록: 드물게 가문의 도덕률, 처세술, 경영관 등 노하우를 기록으로 남겨 후손을 교육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은 2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노하우 자체의 후대 전승이다. 다른 하나는 그 가문의 후손을 제대로 교육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만일 이런 기록이 없었다면 최부잣집 300년 성공의 결정적 비밀인 교육은 성공하지 못하거나 덜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5.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마지막 승부: 일제와 해방 이후 격동기에 가문은 역사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과 대학 설립 자금으로 모두 돌린다. 300년 부를 마지막으로 자신과 가문이 아닌 민족을 위해 던진 뒤 깨끗하게 부자가문에서 내려온 것이다.

» 최부잣집 경주 고택의 안채 모습. (사진/ 황금가지 제공)
 

전재산을 털어 대학 세워

경주 최부잣집은 어떻게 이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을까? 먼저 전진문 박사의 <경주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을 중심으로 가문의 역사를 재구성해보자.

“최부잣집은 경주 최씨 사성공파의 한 갈래인 가암파에 속한다. 가암파의 시조인 최진립은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왜적과 싸우고 나중에 무과에 급제한 뒤 정유재란 때 다시 참전했다. 마량첨사, 가덕첨사를 거쳐 경흥부사, 통정대부가 됐다. 병자호란 때 적군과 싸우다 순국했다. 그의 셋째아들 최동량이 집안을 경제적으로 일으킨다. 그 방식은 형산강 상류의 개울이 합쳐지는 개울가에 뚝을 쌓아 대대적으로 조성한 농토에 소작인과 소출을 반반씩 나누는 병작제를 적용하는 것이었다. 소작인들이 선호하는 선진적인 이 병작제의 적용으로 마을 사람들이나 노비들은 적극적으로 최씨네 땅 개간에 협력했다. 농토가 엄청나게 늘어나게 된다. 나아가 집안 사람들은 스스로 농사일에 앞장서는가 하면 사람의 똥이나 오줌을 이용한 비료법도 적극적으로 활용해 소출을 높였다. 이와 함께 이앙법을 도입해 적은 인원으로 넓은 논을 경작하는 것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3대인 최국선에 이르면 가문은 경상도에서 손꼽히는 대지주 가문으로 성장한다…. 집안은 대대로 근검절약을 근본으로 삼되 가난한 이와 손님들을 후대했으며, 지나치게 재산을 늘리지 않았다. 가훈에 따른 선행으로 가문은 동학혁명이나 다른 민란 때도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일제에 나라를 배앗긴 뒤 최진립의 11대손인 최준은 독립운동 단체에 참가하는 한편 상해임시정부에 독립군 자금을 지속적으로 보냈다. 이런 과정에서 일본 헌병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해방 뒤 최준은 대학을 설립해 국가를 이끌고 갈 인재를 양성한다는 인생의 목표를 위해 전재산을 털어 대구대학과 계림대학을 세운다(두 대학이 합해져 영남대학이 된다). 경주 최부잣집 300년의 부는 이렇게 해서 사실상 모두 교육사업으로 승화돼 돌아간다.”

» 부산에 있던 백산상회 모습.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이 사장을 맡은 백산상회는 상해임시정부로 독립자금을 보내는 통로 가운데 하나였다. (사진/ 황금가지 제공)

경주 최부잣집은 그 역사적 전통만큼이나 가훈으로도 유명하다.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에서 생성된 가훈은 그만큼 절절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적 효과와 교육적 효과도 높았다. 6개조로 이뤄진 가훈을 한번 보자.

1.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이 가훈은 파시조인 정무공 최진립의 유훈에서 비롯됐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의 외침 때마다 조국을 구하기 위해 참전한 최진립은 그러나 병자호란 때 억울하게 귀양을 간 적이 있다. 이때의 뼈저린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당부한다. “사람이 왕후장상의 아들로 태어나지 않은 이상 권세와 부귀를 모두 가질 수는 없다. 권세의 자리에 있음은 칼날 위에 서 있는 것과 같아 언제 자신의 칼에 베일지 모르니…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마라.” 상민으로선 부나 가문을 일구기 어렵다고 보고 진사까지만 하도록 한 것이다. 여기에는 교육을 받지 않으면 부나 가문을 지키기 어렵다는 판단도 깔려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2. 재산은 1만석 이상을 지니지 마라: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후손은 부에의 욕망을 절제해야 했다. 정신수양에 더 신경을 쓰게 된 것이다. 나아가 경제적으로도 이 상한선을 지키기 위해 소작률을 낮추는 등 저절로 부의 혜택이 가문 밖으로 자연스럽게 널리 퍼져나가게 된다.

3.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인심을 얻고 선행을 널리 베풀라는 원칙의 구체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4.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중요한 것은 부의 획득에서 남의 불행을 악용하지 않는다는 근본주의적 태도이다. 이웃과 함께 가지 않는 삶은 오래가지 않고 무너진다는 철학을 신봉하지 않으면 나오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5. 며느리들은 사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근검절약이 만사의 기본이라는 철학을 이보다 구체적인 표현으로 가르치기는 어렵다. 이렇게 교육받은 살림의 주체들은 자연히 낭비나 실패가 적다. 나아가 그런 환경 속에서야 제대로 된 후손의 경제교육, 인간교육도 나올 수 있다. 이 한 가지 구체적 가르침이 실로 300년 부의 기초가 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6.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인심을 잃으면 부자 가문은 죽는다. 사람이 없으면 부는 생성될 수조차 없다. 사성파 2대조 최동량도 마을 사람과 이웃 동네 사람들, 노비들이라는 노동력이 없었다면 그 넓은 농토를 새로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나아가 인심을 잃었다면 그 숱한 변란의 세월 가문은 여러 번 무너지고 말았을 것이다. 실제로 11대조 최현식 때에 가문은 활빈당의 무장 공격을 받았지만 누대에 걸친 선행 덕에 무사할 수 있었다. 이런 두 가지 물음을 상상해본다.

» 경주 최씨 사성공파 가문파 11대 최현식의 회갑연 모습. (사진/ 황금가지 제공)

1) 역사상 존재했던 세계 부자들을 되살려서 앞으로 100년간 가문 경쟁을 시킨다면 누가 가장 성공적일까?

2) 그 부자들을 되살려서 앞으로 500년간 가문 경쟁을 시킨다면 누가 가장 성공적일까?

첫 번째 물음에 대해선 많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로스차일드? 엘리자베스? 록펠러? 빌 게이츠? 그러나 두 번째 물음에선 당연히 경주 최부잣집이 메달 후보에 들어가지 않을까?

존경받는 부를 찾아보기 어려운 요즘, 경주 최부잣집은 ‘제대로 된 부자의 길’을 비춰주는 희망의 빛으로 우리 곁에 돌아와 있다.


조선의 명문가는 어디일까

최부잣집 이외에도 한국에는 명문으로 평가할 만한 가문들이 적지 않다. 베스트셀러 <500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를 쓴 조용헌 교수는 나름의 기준으로 15가문 정도를 꼽았다(기본적으로 그는 고택이 유지된 가문을 선정대상으로 삼고 있다).

1. 경북 영양 출신 시인 조지훈의 종택
2. 경주 최부잣집
3. 광주광역시 기세훈 고택
4. 경남 거창 동계 고택
5. 서울 안국동 윤보선 고택
6. 죽산 박씨의 남원 몽실재
7. 대구의 남평 문씨 세거지
8. 전남 해남의 윤선도 고택
9. 충남 아산 외암마을의 예안 이씨 종가
10. 전남 진도의 양천 허씨 운림산방
11. 안동의 의성 김씨 내앞종택
12. 충남 예산의 추사 김정희 고택
13. 전북 익산의 표옹 송영구 고택
14. 경북 안동의 학봉종택
15. 강릉 선교장

» 서울 안국동에 있는 윤보선 전 대통령 고택의 산정채.
명문가는 선정하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마다 매우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선정된 가문들은 대략적으로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나름대로 가문의 철학과 처세술, 가치관을 반영한 가훈류의 가르침이 전승 유지되고 있다. 어느 가문이든 확실한 가문의 정체성을 유지해왔고 지금도 유지하고 있다. 둘째는 이런 가문들은 어느 정도 경제력을 갖추고 있다. 가옥을 기준으로 한 고택 명문가의 경우 경제력과 시간적 여유가 있지 않으면 그런 조건을 유지해나가기 어렵다. 나아가 가문의 정체성을 음으로 양으로 강제하고 주입하는 메커니즘으로서 경제력의 존재를 무시하기도 불가능하다. 셋째는 역사 인식이다. 아무리 경제력이 뒷받침된다 해도 제대로 역사를 인식하고 살지 않는다면 단절은 아무 때고 찾아올 수 있다. 가치종합체로서 가문은 더 적극적인 정신활동을 요구한다. 마지막으로 자녀교육을 빼놓을 수 없다. 가문의 가치에 공감하는 후세가 계속 충원되지 않으면 가문의 역사성은 쉽사리 단절될 수 있다. 나아가 그런 후손들의 교육이 이뤄졌다 할지라도 적절한 수준의 인재가 가문에 등장하는 행운도 뒤따라야 한다.

 

[고구려인] 당신도 고구려인일 수 있다

멸망 뒤 당나라 · 통일신라에 몸을 맡기거나 일본 · 돌궐로 이동… 한 · 중 · 일 곳곳에서 ‘족보’도 나와

 

700여년 동안 동아시아에 군림하던 고구려가 망한 뒤 그 주역이던 고구려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중국의 오(吳)나라나 진(秦)나라처럼 고구려도 성씨나 아니면 또 다른 어떤 형태로 자신의 생명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고구려인의 얼굴. 안악 3호분에 나타난 귀족 부부의 얼굴은 가장 고구려적인 얼굴로 꼽힌다. 남편은 정면을 바라본 채 양쪽 사람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다. 부인은 남편을 향해 비스듬히 앉았다. 머리에는 장식이 여럿 꽂혔다.
 

고선지 장군, 서역 정벌로 이름 남겨

고구려는 멸망 뒤에도 처절한 진통을 거듭했다. 평양성 함락 뒤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붙잡혀 중국의 오지로 끌려갔는가 하면 당나라에 대해 무장투쟁을 벌이다 남쪽의 통일신라에 몸을 맡겨야 했다. 트로이 멸망 뒤의 유민처럼 바다 건너 일본으로 신천지를 찾아나선 이도 있었다. 역사를 종합하면 고구려 후손들은 대략 다음과 같이 흩어져갔다고 할 수 있다.

1. 마지막 임금 보장왕과 함께 19만~27만명이 당나라로 끌려갔다.

2. 고구려 옛 땅에 그대로 남아 살았다.

3. 신라와 함께 당나라 축출 투쟁을 벌인 뒤 통일신라로 흡수됐다.

4. 말갈족과 함께 발해를 세웠다.

5. 일본이나 돌궐 등 주변국가로 망명·귀화했다.

고구려 사람들의 운명은 어떠했는지 하나하나 역사를 추적해보자. 맨 먼저 당나라로 끌려간 사람들을 보자.

“서기 668년 9월 말 고구려가 멸망한 뒤 유민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당나라 총사령관 이세적은 당나라로 개선하면서 보장왕 등 수많은 고구려 사람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고구려 멸망 6개월 뒤 고구려 포로 3만8300호(약 19만명)는 회수의 남쪽과 양자강의 남쪽(오늘날의 장쑤성·저장성 일대) 그리고 산남 경서의 여러 주(오늘날의 간쑤성 일대) 허허벌판으로 끌려갔다.”

중국의 역대 왕조는 진나라의 천하통일 이후 적대적인 국가를 멸망시킨 뒤 그 주민들을 전혀 연고가 없는 지역으로 대대적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취해왔다. 그러나 고구려에 대한 당나라의 점령 정책은 상대적으로 이주의 규모가 훨씬 크고 가혹했다. 백제의 경우 패망 뒤 의자왕과 태자 왕자 및 대신 88명, 백성 1만2807명을 당나라로 잡아갔다. 패망 당시 고구려의 인구는 69만호 약 350만명이었다(남한쪽에서는 당시 고구려의 호당 인구를 약 5명으로, 북한에서는 7명으로 잡는다. 북한식에 따르면 당시 인구는 490만명, 멸망 뒤 포로로 잡혀간 사람은 약 27만명이 된다). 백제가 망할 때 76만호보다 인구가 적다. 수나라, 당나라의 거듭된 침략과 기근 등으로 고구려의 국력이 장기간에 걸쳐 지속적으로 약화된 결과이다.

살수대첩과 안시성 대첩에 이어 당 고종 때에 이르러서만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은 모두 9차례에 이른다. 당나라로 끌려간 사람들은 일부 탈출자나 망명자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고구려의 중추 세력이었다. 그런 이들이 중국의 남방과 서역의 오지와 미개척 황무지로 잡혀가 농노나 군인으로 일해야 했던 것이다.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은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곤 했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서역 정벌로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고선지 장군이다.

“고구려 유민의 후손인 고선지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유격장군이 됐다. 그는 유능하고 용맹스러운 장군으로 안서부도호로 원정군을 이끌고 파미르고원의 빙하언덕을 넘어 소발률국을 정벌하는 등 72개국을 항복시켰다. 이어 제2차 원정 때는 석국(타슈켄트) 등도 정벌했다.”

» 안악 3호분에 그려진 활을 멘 병사들. 가장 많은 고구려인의 얼굴이 그려진 회화 가운데 하나다.
 

수십만명이 끌려가고 또 끌려오고…

이 원정은 전술사적 측면에서 대단히 기록될 만한 전격전의 사례로 꼽힌다. 이어 그는 탈라스 전투에서 압바스 왕조의 정예군과 서역국가의 연합군과 싸우다가 패배한다. 고구려 멸망 80년 뒤의 일이다. 탈라스 전투는 한편으로 당나라 세력의 이슬람권 서역으로의 진출을 막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슬람권의 동방 진출도 이 지역에서 저지하는 효과를 가져온 것으로 평가받는다. 또 이 전투는 중국쪽 제지술이 서방으로 전파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문명사적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탈라스 전투 뒤 그는 어림군대장군으로 승진한다(바로 이 때문에 탈라스 전투의 성격에 대해 지금껏 많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수만명을 잃는 ‘패전’을 했는데도 그는 승진하고, 패전했다고는 하지만 조금도 영토를 잃은 것도 아니고, 고선지 자신도 이 전투 뒤 바로 반격해 승리할 수 있었다고 확신했다는 사실 등 때문에 사실상 패전이 아니라는 견해가 나오는 것이다).

고선지는 그 뒤 안녹산의 난 때 정토군 부원수로서 반란군을 막다 누명을 쓰고 황제의 칙명으로 참수된다. 이때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되면서 고선지는 묻는다. “퇴각한 것은 죄이기에 죽음을 마다하지 않겠다. 하지만 군량을 훔치고 관고 안의 물자를 사사로이 썼다는 것은 모략에 지나지 않는다.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보아 부끄러운 것이 없다. …제군들이여, 내가 죄가 없다면 그렇게 외쳐라!” 모든 병사들이 외쳤다. “죄가 없습니다!” <신당서>는 “그 소리가 크고 우렁차 땅을 진동시켰다”고 전하고 있다.

중국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 가운데 3분의 2가량은 나중에 고구려 부흥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해 다시 고구려 지역으로 환원 조치됐다. 검모잠과 안승 등의 부흥운동으로 당나라는 평양에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 지역으로 옮겨야 했다. 당나라 세력이 밀리게 되자 당나라 지도부는 공부상서로 앉혀서 예우하던 고구려의 마지막 임금 보장왕 고장(高藏)을 ‘요동주도독 겸 조선왕’으로 임명해 요동으로 보냈다. 그와 함께 중국으로 끌고 간 고구려 유민 가운데 2만8000호(약 14만명)를 다시 요동 지역으로 돌아오도록 했다. 고구려에 대한 향수와 보장왕에 대한 충성을 통해 옛 고구려 지역의 부흥운동을 잠재우려는 의도에서다. 그러나 비밀리에 말갈족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려는 기도가 발각돼 보장왕은 다시 당나라로 소환돼 공주로 유배를 갔다. 당은 보장왕을 지원하기 위해 고구려 지역으로 소환했던 이 유민들을 다시 중국으로 끌고 가 하남과 실크로드 일대로 보내버렸다. 나라가 망한 뒤 수십만명이 무더기로 당나라 오지에까지 끌려갔다가 다시 끌려오고 또다시 끌려가는 일대 수난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두 번째, 고구려 땅에 남겨진 사람들은 비록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고구려 부흥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옛 고구려 지역은 당나라에 대한 저항과 고구려 부흥운동의 근거지였으므로 당나라는 크게 곤란을 겪었다. 이에 따라 이 지역 유민들에게 영향력이 있는 보장왕의 후손들을 잇따라 ‘조선군왕’ ‘좌응양위대장군 충성국왕’ ‘안동도독’ 등으로 임명했다. 고구려왕의 후손들을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로 만들어 반란과 부흥운동의 흐름을 막으려 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 역사가 지나며 많은 사람들은 한족으로 동화됐다. 그러나 일부 왕족의 후손들은 주몽(고주몽)과 장수왕(고련)의 성인 ‘고씨’로 자기 자신들의 정체성을 일체화하며 1300여년 동안 존속해오는 것으로 확인된다.

» 고구려의 대당전쟁.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그려진 기록화 앞에서 방문객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 곽윤섭 기자)
 

발해, 고구려 정통 후계 국가로

세 번째, 주요 세력의 하나가 통일신라로 흡수됐다. 대표적인 것이 보장왕의 서자 또는 외손자로 알려지는 안승이다. 그는 4천여호의 고구려 유민을 이끌고 신라 땅으로 들어갔다. 신라의 협조로 황해도의 사야도에 근거지를 마련한 뒤, 그는 고구려의 대형을 지낸 장군 검모잠에 의해 고구려국의 왕으로 추대됐다. 그들은 새 나라가 신라의 ‘번방’이 되겠다며 지원을 요청해 신라 문무왕의 동의를 얻는다. 안승 세력은 구월산의 장수산성 등을 근거지로 삼아 옛 고구려 각지에서 일어나는 부흥운동과 연계해 당군에 대한 공격을 벌여 큰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내분을 일으켜 결국 당나라의 토벌군에게 패해 신라로 달아난다. 이와 달리 고구려가 망할 때 포로로 잡혀 신라에 들어간 사람들이 7천여명에 이른다. 이런 식으로 고구려 멸망으로부터 당나라 세력의 축출 때까지 신라에 복속해 들어간 고구려 유민은 10여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네 번째, 고구려 지역 곳곳에서 펼쳐진 부흥운동과 신라의 삼국통일 완성의 결과 당나라 세력은 요동 이서로 급격히 영향력이 후퇴해갔다. 이처럼 고양된 부흥운동을 바탕으로 고구려 지역의 유민들은 자신들에 동조하는 말갈족의 한 갈래와 연합해 대조영을 수장으로 한 발해를 세운다. 고구려의 정통 후계국가가 등장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일부 유민들은 일본과 돌궐 등으로 이동해갔다. 현재 일본에 있는 고구려 후손으로는 고려신사(高麗神祀·일본명=고마진자)가 가장 유명하다(역사상 고구려는 중국과 일본에서 ‘고려’로 알려지거나 사용된 예가 적지 않다). 고구려 멸망 직전 일본에 사신으로 간 고구려 고관의 후손으로 알려진 이들은 13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자신들을 고구려의 후손으로 인식하고 있다. 당연히 현재 중국의 동북공정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은 ‘고구려=중국계’라는 등식에 대해선 말도 되지 않는 논리라고 비판한다. 한편 민속학적으로 이 고려신사의 장승도 북방계형을 띠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700년 대제국이 무너진 뒤 유민들은 각처로 흩어졌다. 그 뒤 1300여년, 한국·중국·일본 등 곳곳에서 고구려의 후손임을 확인하는 족보 등이 공개되고 있다. 횡성 고씨는 “고구려 보장왕의 둘째아들 인승(仁勝)의 20세 손인 고휴(高烋)가 시조로 되어 있는” 족보를 가지고 있으며, 중국 랴오양의 고씨 집성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구려 20대 왕 장수왕의 후손이라고 밝히는 ‘고씨가보’(遼陽高氏家譜)를 공개하고 있다. 또 일본 고려신사의 당주도 고구려 후손을 나타내는 족보가 전승돼오고 있다고 확인한다. 고구려는 죽지 않았다.


고구려인은 한민족

고구려 사람들은 과연 우리의 조상인가? 이른바 중국 ‘동북공정’에 참여하는 중국 학자들은 고구려 멸망 당시 총 70만명 정도의 고구려인 가운데 30만명이 중원 각지로 유입됐다면서 사실상 고구려의 주류가 중국화됐다고 주장한다(이들은 기본적으로 역사서에 나온 당시의 ‘호’를 ‘명’과 동일시하고 있다. 고구려 멸망 당시 69만호는 곧 69만명이라는 것이다).

» 고구려는 한민족과 어떤 혈통적 연관성을 갖고 있을까. 무장한 고구려 기마병의 모습.
고구려인과 오늘날 한민족의 혈통적 연관성과 관련해 서울교육대 미술교욱과의 조용진 교수는 매우 독특한 논지를 펴고 있다. 조 교수는 장수왕의 59대손이라는 고지겸, 60대손이라는 고흥 부자와 오늘날 우리 민족의 체질인류학적 특질을 비교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조 교수에 따르면 고씨 부자의 경우 지금까지 대대로 고구려족과만 결혼해오고 있고, 성페르몬에 의해 촉발되는 근거리간 결혼의 특징(농경사회 이전 채취 시대부터 일반적으로 4km 반경 안에서 배우자를 구하는 특징)을 유지하는 등 유의미한 샘플의 성격을 띠고 있다. 조 교수는 그런 식으로 혈통이 오래 이어졌다면 쉽사리 변화하지 않는 정형을 이룰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고씨 부자의 특징은 고구려 벽화 가운데 안악 3호분에 나타난 남성상과 가장 비슷한 것으로 나타난다. 고씨 부자의 특징과 일반적인 남한 사람들과는 다른 점이 상당히 눈에 띤다. 평균적인 한민족보다 두 부자의 얼굴이 더 넓적하고 양미간도 더 넓다. 코의 폭도 더 크다. 이런 정황을 종합한 결과 고씨 부자는 (1) 안악 3호분 남자 주인공과 흡사하고 (2) 중국의 산동지방인에 가깝고 (3) 한반도에서는 강원도형에 가깝고 (4) 일본인 얼굴의 형태소 배합과 유사하며 (5) 만주족인 석백족과는 다르다고 정리하고 있다. 조 교수는 이런 특징으로 보아 고씨 부자가 고구려인의 후예라면 남방계와 북방계형의 중간형이라고 분석한다. 나아가 고구려인의 경우 이미 국가 형성기 당시 만주 지역에 살던 남방계 원주민과 북방계 이주민이 거의 같은 비율로 섞여서 균질의 유전자형으로 고정된 유전자풀 상태였다고 볼 수 있다는 논지까지 편다. 이 논법을 실제로 고구려 건국 설화에 대입하면 그럴듯하게 들어맞는다. 이미 만주 지역에 살고 있던 남방계적 특질을 지닌 하백족(주몽의 어머니 유화 부인으로 대표되는 농경세력)과 북방에서 내려온 부여족(주몽의 아버지 해모수 세력)이 합쳐져 고구려는 건국되고 있는 것이다!

조 교수는 결론적으로 광개토대왕의 얼굴도 (1) 장수왕 후손 고씨 3대 (2)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의 후손으로 알려지는 횡성 고씨 (3) 역시 보장왕의 4남인 고안승이 이주했다는 전북 익산의 지역인 (4) 안악3호분 벽화의 주인공 (5)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인 후손이라는 고마진자의 사람 등과 서로 통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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