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식열전1] 사마천, 애덤 스미스의 뺨을 치다
현대에도 적용되는 <화식열전>의 놀라운 부의 철학… 그 스케일과 정보성, 풍부한 실증성에 감탄
2100여년 전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했다.
“물건값이 싸다는 것은 장차 비싸질 조짐이며, 값이 비싸다는 것은 싸질 조짐이다.”
“△식량 △자재 △제품 △산과 택지의 4가지는 백성들이 입고 먹는 것의 근원이다. 이 근원이 크면 백성들은 부유해지고, 그 근원이 작으면 백성들은 가난해진다.”
“빈부의 도란 빼앗거나 안겨주는 것이 아니다. 교묘한 재주가 있는 사람은 부유해지고, 모자라는 사람은 가난한 것이다.”
교묘한 재주가 있으면 부유해지고…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여들고, 모두 이익을 위해 분명히 떠난다.”
“관직의 지위에 따라 받는 봉록도 없고, 작위에 봉해짐에 따라 받는 식읍의 수입도 없으면서 이런 것을 가진 사람들처럼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소봉(素封·무관의 제왕 정도로 의역할 수 있음)이라고 한다.”
“만일 집이 가난하고 어버이는 늙고 처자식은 연약하고 명절이 되어도 조상에게 제사를 올리지 못하며 옷을 입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려우면서도 이런 것들을 부끄러워할 줄 모른다면, 비할 바 없을 만큼 못난 사람이다. …오랫동안 가난하고 천하게 살면서 인의를 말하는 것만을 즐기는 것 또한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
“대체로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되는 길에는 농업이 공업만 못하고, 공업이 상업만 못하다. 비단에 수를 놓는 것이 저잣거리에서 장사하는 것만 못하다. 말단의 생업인 상업이 가난한 사람들이 부를 얻는 길인 것이다.”
“부유해지는 데는 정해진 직업이 없고, 재물은 정해진 주인이 없다.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는 재물이 모이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서는 기왓장 부서지듯 흩어진다. 천금의 부자는 한 도읍의 군주와 맞먹고, 거만금을 가진 부자는 왕과 즐거움을 같이한다.”
믿기 어려울 지경이다. 어떻게 2100여년 전 사람의 입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렇게 오늘날과 똑같단 말인가.
어떤가? ‘물건값이 싸다는 것은 장차 비싸질 조짐이며, 비싸다는 것은 싸질 조짐이다’라는 말은 그 시대 사마천이 이미 애덤 스미스의 수요·공급의 법칙과 비슷한 개념을 알고 있었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가? 아니, 오히려 어떤 의미에서는 요즘 주식투자의 철칙을 말하는 듯하다.
‘소문에 사고 뉴스에 팔아라’ ‘백성들이 먹고 입는 것의 근원이 크면 백성들은 부유해지고, 작으면 가난해진다’는 말은 그대로 성장과 분배에 관한 파이 이론을 연상시킨다. 저 유명한 ‘파이를 키워야 분배의 몫도 커진다’는 것이 그 표현이다.
소봉(素封), 화려한 백수!
△말 50마리를 키울 수 있는 목장(또는 소 167마리나 양 250마리를 키울 수 있는 목장이라도 좋다)
△돼지 250마리를 키울 수 있는 습지대
△1천마리의 물고기를 양식할 수 있는 연못
△안읍의 대추나무 1천그루
△강릉의 귤나무 1천그루
△하나라의 옻나무밭 1천묘
△생강과 부추밭 1천묘
…이런 사람들은 관직에 나가지 않아도, 작위를 받지 않아도 계속 안정적으로 풍부한 수입이 들어왔다. 왕이나 제후, 장군이나 재상을 크게 부러워하지 않아도 된다. 저잣거리를 기웃거릴 필요도 없고, 다른 마을에 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수입만 기다리면 된다. 오늘날의 ‘화백’은 ‘화려한 백수’의 준말이다. 벌어들인 돈으로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해 평생 쓸 만큼의 재산을 형성해놓은 사람들이다. 따로 직장을 나가는 것도 아니라서 겉보기에 백수 같지만, 부동산 임대료 수입을 시작으로 주식 배당금, 부동산 시가 상승에 따른 자산 증식, 금융소득, 그 밖의 종합소득 등 엄청난 고소득을 올린다. 그야말로 ‘현대판 소봉’인 것이다.
화식열전이 보여주는 관점은 매우 탁월하다. 대략적으로 정리하면 이렇다.
1.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근본은 경제다.
2. 경제는 자유방임주의를 큰 뼈대로 하면서 적절한 국가의 개입을 보완책으로 결합시킨다.
3. 인간의 본성은 부귀를 지향한다.
4. 상업이야말로 인간의 의식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5. 지경학(地經學)도 지정학(地政學)만큼이나 중요하다.
6. 부는 권력, 명예 등 더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
7. 재테크에서는 시테크도 매우 중요하다.
8. 아껴쓰고 부지런한 것은 기본이고, 나아가 반드시 기이한 방법을 사용해 부자가 됐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사마천은 노자류의 고립주의나 한나라의 중농억상(重農抑商) 가치관을 비판하고 있다. ‘백성들이 제각기 자신들의 음식이나 옷 습속에 만족하며 서로 왕래하지 않으면서도 행복해한다’는 노자류의 가치관은 그야말로 ‘근대의 풍속을 돌이키고 백성들의 귀와 눈을 막으려 하는 것’으로서 실행할 수 없다고 반박한다. 또 건국 이래 지속적으로 상업억제책을 써온 한나라 조정과 달리 거시적 관점에서 상업 및 상인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지를 표출한다. 한나라에서는 상인의 대두를 견제하기 위해 △인두세 부담 2배로 늘림 △민간에서의 화폐주조 금지 △소금과 철의 전매화 △균수법 실시로 국가 조달 행위를 상인으로부터 지방관리로 이관 △상공업자에 대한 재산세를 일반인의 2.5~5배로 증세 등의 조치를 취했다.
“노자류의 가치관은 백성 눈귀 막는 것”
멀리는 2700여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에 중국에서 이런 식의 부의 증식이 과연 가능할 수 있었을까? 만일 가능했다면 그 배경은 무엇일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선 일단 전국시대 또는 한나라 초기의 경제 규모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전국책>에 실려 있는 저 유명한 연횡책의 유세가 소진의 말을 경청해보자.
실제로 고고학적 연구 결과 임치성의 크기는 서벽 2812m, 북벽 3316m, 동벽 5209m, 남벽 2821m의 크기로 추정된다고 한다. 나아가 당시 임치만이 아니라 위나라의 수도 대량과 온, 조나라의 수도 한단과 형양, 초나라의 완구, 정나라의 양책, 제나라의 설, 연나라의 계와 하도 비슷한 규모의 대도시였다고 한다. 당시 세계적인 규모의 이런 도시는 모두 상업이 발달하고 제철이나 제염 등의 수공업이 번영했다고 전해진다. 청동기나 칠기 등의 제품도 대량 제조돼 판매됐다. 또 전국시대에는 청동기도 완전히 실용적인 그릇이 돼 널리 보급되고, 값비싼 견직물이며 금과 옥 등 가공품도 유통됐다. 도시의 발달과 각종 산업의 융성 그리고 풍부한 인구를 바탕으로 각계각층에서 소봉의 부를 이루는 사람들이 적잖게 생겨날 수 있었던 것이다.
직업의 귀천을 뛰어넘는 진보성
그러면서도 이 사회에선 이른바 상도라는 것이 엄연히 작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천에 따르면 당시 교통이 발달한 대도시에서의 상업은 대략 연 20%의 이익을 적당한 마진으로 보았다. “한 해에 술 1천독, 식초나 간장 1천병, 소나 양, 돼지의 가죽 1천장, 쌀 1천가마, 땔감 1천수레, 목재 1천장, 구리 그릇 1천개. 말 200마리, 소 500마리, 단사(수은) 1천근, 무늬 있는 비단 1천필, 누룩 1천홉, 말린 생선 1천섬, 절인 생선 1천균, 밤 3천섬, 여우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 1천장 등(모두 100만전이 본전)을 팔면 20만전의 이익을 얻는다. 아니면 현금 1천관(100만전)을 중개인에게 빌려주고 2할의 이식을 받아도 좋다. …다른 잡일에 종사하면서 2할의 이익을 올리지 못하는 사람은 재물을 활용한다고 말할 수 없다.”
나아가 사마천은 당시 소봉을 이룩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예시하며 직업의 귀천을 뛰어넘는 진보성을 보여준다.
“밭에서 농사짓는 것은 (재물을 모으는 데는) 졸렬한 업종이지만, 진나라의 양씨는 밭농사로 주(州)에서 제일 가는 부호가 됐다. 무덤을 파서 보물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지만, 전숙은 그것을 발판으로 일어섰다. 도박은 나쁜 놀이지만, 환발은 그것으로써 부자가 됐고, 행상은 남자에게는 천한 일이지만 옹낙성은 그것으로 천금을 얻었다. 술장사는 하찮은 일이지만, 장씨는 그것으로 천만금을 얻었으면, 칼을 가는 것은 보잘것 없는 기술이지만, 질씨는 그것으로 제후처럼 반찬솥을 늘어놓고 호화로운 식사를 즐겼다. 양의 위통을 삶아 파는 것은 단순하고 하찮은 일이지만, 탁씨는 그것으로 기마행렬을 거느리고 다녔다. 말의 병을 치료하는 것은 대단찮은 의술이지만, 장리는 그것으로써 종을 쳐서 하인을 부르게 됐다. 이것은 한 가지 일에 전념한 결과이다.”
사마천이 ‘화식열전’을 쓴 데는 개인적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그 자신이 돈이 없어 처참한 궁형을 받아야 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한 무제 때 흉노에 어쩔 수 없이 항복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 투옥돼 남성의 성기를 거세하는 궁형이라는 끔찍한 형벌을 앞둔 때가 있었다. 당시 한나라는 속전제를 채택하고 있어 그가 50만전으로 정해진 속전을 낼 경우 이 형벌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사마천 일가는 한달의 기한 동안 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했다. 50만전은 투옥 직전 대부로 출사하고 있던 사마천으로서는 도저히 마련할 수 없는 거금이었다. 사마천 자신이 쓴 ‘화식열전’의 내용에 비춰보면, 50만전이라는 돈은 소봉의 부를 누리는 부자가 2년 반을 한푼도 쓰지 않고 모아야 하는 금액이다. 일설에 따르면 당시 사마천 집안은 채 20만전도 모으지 못했다. 부인이 집에 있는 솥단지까지 팔아 간신히 5만전을 구하고, 다시 친정 부모님께 사정하고 빌어서 10만전을 추가로 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밖에 동료 공경대부들에게도 사정을 호소했으나 ‘천자의 뜻을 거스린 죄수의 가족’이라고 문도 열어주지 않기 일쑤였고, 일부 마음씨 좋은 공경대부도 몇천전 정도 빌려주며 등을 떠밀었다고 한다.
이런 처절한 경험이 있었기에 사마천은 돈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고, 돈과 관련된 세상의 인심도 포착할 수 있었다. 그가 ‘화식열전’에 쓴 “천하 사람들은 모두 이익을 위해 기꺼이 모여들고, 모두 이익을 위해 분명히 떠난다”는 글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한편 이 ‘화식열전’을 열전의 마지막 부분인 ‘태사공 자서’ 바로 앞에 배치한 부분도 주목할 만하다. 이 글을 매우 의미심장하게 배치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태사공 자서는 열전 마지막에 들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기> 전체의 서문으로 평가되곤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화식열전’의 기조가 한나라 조정의 중농억상책을 비판한다는 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특히 한 해 20만전 수입 정도를 기준으로 하는 소봉의 사례를 대단히 구체적으로, 대단히 풍부하게 열거한 것은 그가 이 정도 돈의 의미와 힘을 얼마나 연구하고 천착했는지 이해하게 해준다. 그 사례의 2가지 정도만 있어도 그는 자신의 남성을 보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화식열전2] 노예들의 유통 프랜차이즈!
화식열전에 나타난 주인공들의 흥미로운 재테크… 오늘날의 주식투자 그대로 빼닮은 방법론도
“중국 전국시대 인물인 백규는 시세의 변화를 살피기를 좋아했다. 그는 사람들이 버리고 돌아보지 않을 때 사들이고, 세상 사람들이 사들일 때 팔아넘겼다. 풍년이 들면 곡식은 사들이고 실과 옻을 팔았다. 그리고 흉년이 들어 누에고치가 나돌면 비단과 풀솜을 사들이고 곡식을 내다팔았다. 이처럼 백규는 풍년과 흉년이 순환하는 것을 살펴서 사거나 팔아 해마다 물건 사재기하는 것이 배로 늘어났다.”
“오지현의 나(나-한자임)라는 사람은 목축이 본업이었다. 그는 가축이 늘자 신기한 비단을 사서 남몰래 융왕에게 바쳤다. 왕은 그 대가로 나에게 열배나 더 많은 가축을 주었다. 그래서 그의 가축은 골짜기 수로 말과 소의 수를 셀 정도가 됐다.”
이극 vs 백규
“파촉에 청이라는 과부가 살았는데, 그 조상이 단사(丹沙·수은)를 생산하는 동굴을 발견해 물려받았다. 이 단사 광산을 여러 대에 걸쳐 독점해 재산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그는 가업을 지키고 재물을 이용해 자신을 지켜 사람들로부터 침범당하지 않았다.”
“조나라 출신인 탁씨는 원래 철을 캐고 제련해 부자가 된 사람이다. 그런데 진나라에 조나라가 망해 포로가 되는 바람에 재물을 빼앗기고 강제 이주까지 당하게 됐다. 비슷한 처지에 빠진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은 진나라 관리들에게 남은 재산을 털어 뇌물로 바치면서 가까운 곳으로 가게 해달라고 청탁했다. 그러나 탁씨는 먼 곳이라도 옮겨가겠다고 해서 촉 땅의 임공으로까지 갔다. 그는 철이 생산되는 산을 찾아 들어갔다. 그리고 쇠를 녹여 그릇을 만들었다. 그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기술자로 이용하면서 주변 지역과 교역해 부자가 됐다.”
“제나라 사람들은 노예를 업신여겼는데 조간만은 이들을 사랑하고 귀하게 대했다. 사납고 교활해 사람들이 싫어하는 노예들을 발탁해 그는 생선과 소금 장사를 시켰다. 그는 노예들의 그런 능력을 빌려 결국 수천만금의 부를 쌓았다.”
“선곡에 사는 임씨의 조상은 창고 관리였다. 진나라가 싸움에 졌을 때 호걸들은 모두 앞다투어 금·은·옥을 차지했으나, 임씨만은 창고의 곡식을 굴 속에 감춰두었다. 그 뒤 항우의 초나라와 유방의 한나라가 형양에서 대치하자, 쌀 한섬 값이 1만전까지 뛰었다. …호걸들이 차지했던 금·은·옥은 모두 임씨의 것이 됐다.”
“오초 7국의 난이 일어났을 때 장안에 있는 크고 작은 제후들은 토벌군에 가담하기 위해 이잣돈을 얻으려 했다. 돈놀이하는 사람들은 모두 ‘제후들이 이길지 어떨지 아직 모르겠다’며 기꺼이 빌려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무염씨만은 천금을 풀어 빌려주었다. 그러면서 이자를 원금의 10배로 했다. 석달 만에 난이 평정되고 제후들은 승리했다. 무염씨는 겨우 한해 만에 원금의 10배를 이자로 받아 재산이 관중 전체의 부와 맞먹게 됐다.”
“한나라가 흉노를 친 뒤 변경의 땅을 넓혔을 때, 교요라는 사람만이 말 1천 마리, 소 2천 마리, 곡식 수만종을 얻었다.”
사마천의 <사기> 화식열전에 나타난 주인공들의 재테크는 매우 흥미롭다. 2500여년 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다.
무협용 소재로 충분한 청의 이야기
먼저 백규부터 보자. 이 사람의 방법론은 오늘날의 주식투자에 대입해도 그대로 들어맞을 것만 같다. 주식으로 돈을 벌었다는 사람들의 정통적인 방법론을 그대로 빼닮아 있는 것이다. 당시 그와 대치되는 재테크론자로 ‘화식열전’에 나타난 사람은 위나라의 이극이다. 이극은 ‘토지의 생산력을 발휘시키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고 기록돼 있다. 추정컨대 당시 중국 대륙은 통일되기 전이라 황하나 회하의 치수관리를 천하적 관점에서 실행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천하적 스케일의 치수정책은 한나라의 통일 이후 사실상 본격화되고 있다.
따라서 통일 이전 생산력의 증대는 (1)제한된 각국 농경지의 생산력 최대화 (2)국내-국외 상업 및 무역의 확대라는 2가지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백규는 이 가운데 각국간 경쟁과 견제 때문에 불안정하고 취약할 수밖에 없는 (2)의 방법론에 온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농경지의 생산력 증대를 지향하는 이극의 방법론이 주류적 방법론이라면, 백규의 그것은 비주류적 방법론인 셈이다. 백규의 방법이 성공하는 요체는 바로 정확한 타이밍을 맞추는 데 있다. 이 문제를 백규는 당시의 천문학과 순환론에 기대고 있다는 약점을 보여주긴 한다. 목성 뒤에 있는 세성을 가리키는 태음을 이용해 풍년과 흉년, 가뭄과 홍수를 추산하고 그에 따라 전략물자의 매입·매각에 나섰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 보면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밖에 백규가 취한 방법을 보면 나름대로 백규가 대단한 강점을 지녔으리라는 것을 짐작케 한다. “돈을 불리려면 값싼 곡식을 사들이고, 수확을 늘리려면 좋은 종자를 썼다.” “거친 음식을 달게 먹고, 하고 싶은 것을 억눌렀으며… 노복들과 고통과 즐거움을 함께했다.” “시기를 보아 나아가는 것은 마치 사나운 짐승이나 새처럼 빨랐다.”
청이라는 사람은 유일한 여성으로서 눈길을 끈다. 그의 특징은 거부를 약속하는 세습광산을 훌륭히 지키고 발전시켰다는 점이다. ‘화식열전’만 보면 이 여성이 친가로부터 세습을 받았는지 시가로부터 받았는지 불분명하다. 어쨌든 그의 부는 단사라는 당시 각광받던 특수물질 때문에 가능했다. 단사는 바로 진시황의 지하 황릉에 대량으로 집어넣었다는 그 물질이다. 당시 진시황은 지하 황릉에 단사로 된 ‘대해’를 설치하는 컨셉트를 잡아놓고 있었다. 그가 통일 뒤 바다에 심취한 것이라든가, 장묘문화와 관련된 단사의 특수성 등이 결합해 단사의 대해를 지하에 자리잡게 한 것이다.
단사는 고대 중국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에서도 분묘용으로 각광받았다. 대단히 넓은 폭의 온도대에서 물질 본래의 상태를 유지하는 특성이 있었던 것을 인간들이 주목한 것이다. 당시 중원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의 이 황금알을 낳는 수은광산을 노린 자가 한둘이었겠는가? 도적은 도적대로, 탐관은 탐관대로, 토호는 토호대로 이 여성을 노리는 눈길과 손길, 음모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을 법하다. 이 여성의 이야기는 사실 무협지나 무협영화의 소재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조간의 재테크도 혀를 내둘게 한다. 노예를 이용해 유통 프랜차이즈를 대대적으로 성공시켜 거부를 이룩했기 때문이다. 2500여년 전에 등장한 노예들의 유통 프랜차이즈라니!!! 사람들한테 버림받은 사람들을 긁어모아 신화에 도전하는 ‘공포의 외인구단’인 셈이다.
전쟁에서 승리할 제후쪽에 베팅하라
주로 왕가에 전비를 대부해주고 거액의 이자를 받는 방식이었다.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영국군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전투에서 영국쪽이 승리할 것을 로스차일드 가문은 독자적인 정보망을 통해 정확하게 예측하고 막판에 영국의 전쟁채권을 무더기로 사들인 것이다. 무염씨도 엄청난 동광산을 배경으로 거금을 주조해 경제력을 갖춘 오초 7국과, 황제의 정통성을 장악한 한나라 제후쪽 사이의 전쟁에서 제후쪽에 베팅해 크게 성공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승패를 어떻게 맞혔는지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천금의 거금을 투자하는 무염씨가 나름대로 확신할 만한 정보와 판단 근거를 가지고 있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만일 승패가 예측과 달리 정반대로 갔다면 그는 단순히 천금을 날릴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날릴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오월이 집권해 황제에 즉위했다면 반대편에 거금을 지원한 무염씨를 그대로 놓아둘 리 없다. 어쨌든 이 판단 하나, 예측 하나로 그는 당시 관중의 부를 장악하고 있던 전씨 일족을 능가할 정도가 된다. 그것도 1년이 지나기도 전에 벌어들인다.
사마천의 ‘화식열전’에 나오는 20여명의 부자 가운데 정치에 직접적으로 깊이 관여한 인물이라든가 화식의 방법론이 자세하지 못한 사람들을 빼면 12명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백규로부터 교요에 이르는 사람들을 분석하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2명 가운데 3명만이 농업과 목축업에 종사했고 나머지 9명(75%)이 제조업과 유통업(상업)에 종사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 12명 가운데 3명 정도가 독점적 성격의 사업을 한 것으로 집계된다. 청이라는 여인이 단사라는 특수물질의 광산을 운영한 것, 나라는 사람이 융 왕에게 비단 선물을 바쳐 다시 거대한 목축지와 많은 가축을 대가로 받아 목장과 사육 가축을 계속 선순환적으로 늘린 것, 그리고 교요가 흉노 땅 점령 뒤 말·소·양·곡식을 특혜로 받은 것 정도가 사실상 독점적 성격의 사업을 한 셈이다. 이 가운데서도 나의 경우는 그 방식을 다른 사람도 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사실상 중간 정도의 독점성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전쟁특수를 통해 치부를 한 사람도 3명 정도라고 할 수 있다. 유씨 황제 경제에 대해 난을 일으킨 오초 7국의 난 때 제후들에게 고리로 전비를 빌려줘 거부를 챙긴 무염씨와, 흉노 평정 뒤 특혜를 받은 교요 그리고 진나라 패망 때 창고 곡식을 숨겼다가 초한대전 때 거금을 움켜쥔 임씨가 그렇다.
한 가지 사업에서 점차 다각화로 진화
유통형 프랜차이즈를 해서 돈을 번 사람이 노예를 이용한 조간 말고도 또 한 사람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사사라는 사람이 바로 장사에 대해 적극적인 주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동원해 수레 이동형 유통 프랜차이즈를 성공시킨 것이다.
이와 함께 한 가지 기술이나 방식으로 부를 이룬 사람들이 점차 사업 다각화쪽으로 진화해갔다는 점도 눈에 띈다. 공씨의 경우 처음에는 탁씨나 정정처럼 제철을 통해 부를 이룩한 다음에는 큰 못을 만들어 양식업을 하고, 다시 제후들과 사귀며 거액의 거래를 하며 이익을 얻었다. 병씨의 경우 대장장이로 성공한 뒤 그 물건을 내다파는 행상도 겸업하고 나중에 그렇게 모은 돈으로 대부업에까지 진출한다.
진시황이 이처럼 경제인을 우대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무엇보다 진나라를 부국으로 이끈 경제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진나라의 경우 (1)성년남자가 한 집에 2명 이상 있으면서 분가하지 않으면 세금을 배로 물리는 등 경제단위의 증대에 힘썼으며, (2)농업과 양잠에 노력해 곡식과 견사를 많이 생산하는 사람은 일생 동안 세금을 면제해주는 등 국력 증대에 온갖 신상필벌 제도를 도입하고 있었다. 이런 전통을 진시황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달리 부자들은 동시에 관직에 나서는 것이 오랫동안 막혀 있었다. 춘추전국시대는 물론 한나라 초기까지 이 전통은 유지됐다.(여불위의 경우는 이런 전통을 깬 것으로 그 의미를 지닌다.) 이에 따라 아무리 거금을 모아도 상업은 ‘말단의 생업’이라는 취급을 받았다. 이런 억상정책은 한나라 때 농업정책의 실패, 흉노전쟁 등 대외전쟁 확대, 세수 감소 등에 따라 일종의 공개적인 매관매직 정책을 대대적으로 채택하면서 무너진다. 따라서 상인들은 부의 증식을 위해, 신분 안정을 위해 부를 기울여 제후들과 교제하거나 그 뒤를 지원하는 역할을 떠맡곤 했다.
[화식열전3] 돈과 권력도 모두 얻으리라
거부를 먼저 이룬 뒤 권력 추구에 성공한 여불위, 대정치가였다가 상인으로 변신한 범려
“농업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은 몇배이겠는가? 아무리 많아도 10배 정도일 것이다. 보석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의 이익은? 아무리 많다고 해도 100배를 넘지는 못할 것이다. 만일 왕을 세워서 이익을 얻는다면 과연 몇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건 헤아릴 수 없다. 무한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진나라와 조나라의 장평 싸움에서 패배한 조나라의 포로 수십만명이 생매장돼 떼죽음을 당한 지 1년 뒤인 기원전 259년, 조나라 수도 한단에는 앞으로 진나라의 역사를 바꿔쓸 세 사람이 모여들고 있었다. ‘상인’과 ‘왕손’과 ‘무희’….
인질로 온 ‘왕손’에 접근한 여불위
“이 진귀한 재물은 사둘 만하다!”
이게 여불위의 첫 반응이었다. 여불위는 왕손 이인을 찾아갔다. 그는 앞으로 재산을 기울여 왕손의 가문을 크게 만들어주겠다고 설파한다. 그리곤 평생 번 재산의 절반인 500금을 왕손 이인에게 주어 빈객을 사귀는 등의 비용으로 쓰도록 하고, 자신은 나머지 재산인 500금을 들고 진나라 수도 함양으로 들어간다. 여불위가 벌었다는 ‘1천금’은 일반적으로 큰 돈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으나 그 뒤 정확하게 ‘500금’으로 기록된 점에 미뤄 정확한 ‘1천금’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당시 진나라는 소왕이 무려 50여년이나 왕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으며, 태자인 안국군 밑으로는 20여명의 아들이 있었다. 도대체 차기 태자 이후의 왕권은 누구에게 갈 것인지 전혀 오리무중인 상태였다. 여불위는 가지고 간 자금을 동원해 안국군으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으면서도 자식이 없는 화양 부인과 그 언니를 설득해 이인을 화양의 양자로 삼게 한다.
“아름다운 얼굴로써 남을 섬기는 사람은 아름다운 얼굴이 스러지면 사랑도 시든다고 합니다. 자식이 없는 지금 효성스러운 자를 양자로 들여 후사를 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귀한 자리에 있고, 남편 사후에는 양자가 왕이 되므로 끝까지 권력을 잃지 않게 됩니다. 그 적격자가 바로 이인입니다.”
조나라에서 냉대만을 받던 ‘잊혀진 왕손’이 일약 대국 진나라의 태자 계승자로 업그레이드된다. 미래를 정확하게 내다보고 길목을 선점한 큰 도박이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여불위는 한발 더 나아가 당시 자신이 총애하던 ‘무희’를 왕손 이인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양보한다. <사기>에 따르면 ‘화가 치밀었지만, 이미 자기 집 재산을 다 기울여 이인을 위해 힘쓰고 있는 것은 진기한 재물을 낚으려는 것임을 떠올리고 마침내 여자를 바쳤다’는 것이다.
무희인 조희는 당시 임신하고 있었지만, 이 사실을 속이고 이인에게 가 마침내 아들 정을 낳고 정식 부인으로 세워진다. 이 아들 정이 바로 나중에 진시황이 된다. 이런 놀라운 공로로 이인이 양부 안국군(효문왕)의 뒤를 이어 왕(장양왕)에 오르자, 여불위는 즉위한 그해에 바로 승상으로 임명되고, 장신후라는 후작까지 받는다. 그리고 하남 낙양의 10만호를 식읍으로 받는다.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뒤에 죽고 정이 왕에 오르자 여불위는 다시 상국으로 승진한다. 왕은 그를 ‘중부’라고까지 불렀다. 한때 여불위의 집안에 있는 하인의 수는 1만명을 헤아렸으며, 식객도 3천명에 이르렀다는 기록까지 있다. 그가 아무리 상인으로 성공해 부를 긁어모은들 과연 이런 부와 영광을 누릴 수 있었겠는가?
범려, 오나라를 멸망시키다
이 모든 권세와 영광이 모두 1천금의 자금과 절묘한 기획력, 정보력 등의 합작품으로 이뤄진 것이다. 당시 상인들이 비록 거금을 보유할 수는 있어도 관직에 진출하는 것이 거의 막혀 있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여불위의 성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자기의 실제 자식이 통일 천하의 황제가 되는 거대한 꿈마저 실현된다면? 여불위의 야심은 실로 크고도 컸다고 할 수 있다.
여불위가 거부를 먼저 이룬 뒤 권력까지 추구해 성공한 경우라면, 정반대의 길을 걸은 사람도 있다. 대정치가였다가 상인으로 변신한 범려가 그렇다. 범려는 월나라왕 구천의 명참모였다. 월나라가 오나라와 반세기에 걸쳐 싸울 때 최종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데에는 범려의 공이 거의 결정적이었다. 월왕 구천이 오왕 부차에게 패한 뒤 살아남기 위해 항복교섭을 담당한 것을 비롯해 월나라의 생존책, 부국강병책, 오나라의 교란책 등이 모두 그의 지모에서 나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월나라가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키자, 범려는 “월왕(구천)은 목이 길고 입이 까마귀 부리처럼 뾰족하고 눈은 매처럼 매서우며 이리처럼 걷지 않는가. 이와 같은 인물과는 어려움을 함께할 수는 있지만, 평화를 함께 즐기기는 불가능한 법이다.” “스승 계연의 7가지 계책 가운데 월나라는 5가지를 써서 뜻을 이루었다. 나라에서는 이미 써보았으니, 나는 이것을 집에서 써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표표히 사라진다. 그가 가족과 함께 월왕의 감시를 벗어나 이름마저 ‘치이자피’로 바꾼 뒤 처음으로 정착한 곳은 제나라 해안 지방이다. 범려 일족은 이곳에서 농사를 지어 열심히 일한 결과 수십만금의 재산가가 됐다. 제나라 사람들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재상이 돼달라고 부탁해오자, 범려는 애써 모은 재산을 모조리 친구나 향당에 나눠주고 값나가는 보물만을 가지고 그곳을 떠난다.
범려가 부를 일군 방법은 기록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두 번째는 장사를 하며 물자를 쌓아두었다가 시세의 흐름을 보아 내다 팔아서 이익을 거두었는데, 사람의 노력에 기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엇갈린 두 사람의 최후
결국 범려는 (1)부국강병책 (2)농업으로 거부를 이룩하기 (3)목축업으로 왕공의 부를 만들기 (4)상업(유통업)으로 거부를 이룩하기 등 네 부문을 모두 직접 현실화해 성공한 만능의 정치인이자 경제인임을 증명한다. <사기>는 구체적으로 그가 19년에 걸쳐 세 차례나 천금을 벌었으며, 두 차례에 걸쳐 가난한 사람들과 먼 형제들에게 나눠주었다고 전한다. 나중에 그가 늙고 쇠약해지자 그는 일을 자손에게 맡겼다. 자손들은 가업을 잘 운영해 재산을 늘려 거만금에 이르는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여불위와 범려를 비교하면 재미있다. 국가에 기여한 공로를 보면 어느 정도 비슷하다. 범려의 경우 거의 패망 직전까지 간 나라를 구해내 화려하게 재기시켰다는 점에서 더 극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불위의 통치로 진나라가 통일의 기틀을 확고하게 닦았다는 점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지모와 계략은 서로 특장점이 확연하게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범려는 정통파적이고 충성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여불위는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심가였다. 두 사람의 결말은 아주 대립적일 정도로 다르다. 여불위의 경우 결국 실제 아들일 가능성이 높은 진시황으로부터 버림받는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로가 있기에 그대를 하남에 봉했고, 10만호의 식읍을 내렸소?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 관계가 있기에 중부라고 불리오?’ 이런 편지를 받고 그는 독주를 마시고 죽는다. 또한 진시황의 통일 제국과 그 후손들도 오래지 않아 멸망하고 만다. 이와 달리 범려는 자손이 번창하고 가업이 번창해 ‘도주’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중국문화권에 남기게 된다. 권력에 끝까지 집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이렇게 컸다.
권력도 정욕처럼 ‘칼날에 묻은 꿀’이었던 것이다.
타이의 탁신 시나왓 총리도 비슷한 흐름의 대표주자로 꼽을 수 있다. 미국 유학파인 탁신 시나왓은 자신의 회사 어드밴스드 인포메이션 서비스(AIS)가 타이의 휴대전화 사업권을 따내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는 대성공에 힘입어 거부를 이룩했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위성통신 사업과 디지털 방송, 인터넷 등에 진출해 엄청난 영향력을 갖게 됐다. 그 뒤 정치에 뛰어들어 하원의원, 외상을 거쳐 애국당을 결성하고 마침내 총리에까지 오른 것이다.
세계적인 부호가문 미국의 록펠러 가문도 전통적으로 ‘정치 진출은 피한다’는 가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록펠러 3세의 동생인 넬슨 록펠러가 1974년 당시 제럴드 포드 대통령의 지명으로 부통령에 취임해서 이 가훈이 깨졌다. 록펠러 4세도 웨스트 버지니아에서 주지사와 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역시 세계적인 부호가문인 미국의 듀폰 가문도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는다’는 가문의 불문율이 있었지만, 4대째인 피에르 듀폰이 델라웨어주 하원의원 주지사를 지냈다. 하버드 로스쿨 출신인 피에르 듀폰은 1988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지명전에 나섰다가 중도에 사퇴한 바 있다.
한국에서는 현대그룹의 정주영 명예회장이 지난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가 실패한 바 있다. 그의 아들인 현대중공업의 정몽준 회장도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후보 단일화를 결정짓는 단계까지 간 바 있다.
필리핀에서는 이런 경향이 특히 강하게 나타난다. 과거 마르코스 독재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벌이다 암살된 베니그노 아키노 상원의원과 그의 부인으로 나중에 대통령이 된 코라손 아키노 여사는 모두 부유한 가문 출신이다.
유대교를 넘어 세계종교로
예수, 사회적 약자들을 파격적으로 끌어안고 모든 계급이 참여하는 그리스도교의 길을 열다
그의 어머니는 보잘것없는 시골 여인
그는 나이 삼십에 이르기까지 오히려 이름 없는 비천한 목수
…
그에겐 한권의 저서도 없으며
그에겐 아무런 지위도 없으며
그에겐 따뜻한 가정도 없으며
그에겐 큰 도시의 학문도 없으며
그에겐 큰 도시의 견문조차도 없이
그의 여행은 기껏 200마일도 못 되는 거리
…
진실로 그에겐 세상의 이른바 위대하다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그가 내어놓을 수 있는 이력서는 오직 그 자신의 한 몸뿐
그 자신의 삶은 또한 이토록 비참한 것
삼년의 전도와 사랑의 실천 끝에도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오히려 무리들의 배척
제자들의 배신과 부인
…
그러나 그 후 이천년이 흘러간 오늘
그는 오히려 인류의 역사를 영도해온 중심인물”
로마 점령 세력, 위협을 느끼다
오늘날 대략 18억~20억의 인류가 적극적으로나 소극적으로 그리스도교를 믿는 것으로 추산된다. 현 인류의 3분의 1 정도가 신자라는 계산이 나오는 셈이다. 그 신자들이 2000년 역사를 통해 인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도 많겠지만, 확실히 그리스도교는 인류 문명에 가장 크고 깊은 영향을 끼친 요소 가운데 하나임에 틀림없다. 깊은 강도 작은 물줄기 하나에서 시작되듯, 그리스도교의 시원을 이루는 예수의 존재도 역사적으로는 매우 작고도 미약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기원전 4년쯤 로마제국에 정복돼 있던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마리아와 약혼자인 목수 요셉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는 대부분 <신약성서>의 4복음서인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기록돼 전해지고 있다. ‘마태복음’에 따르면 그의 족보는 유대인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운 다윗왕을 비롯해 멀리는 이른바 ‘믿음의 조상’ 격인 아브라함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어머니와 아버지(혹은 ‘양아버지’)는 당시 모두 ‘일반 대중’인 ‘암 하아레츠’(Am ha’aretz)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예수에게는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이라는 4명의 형제와 적어도 2명의 누이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예수는 약 30살이 됐을 때, 세례 요한에 의해 요단강에서 세례(정확하게는 온몸을 물속에 들어가게 했다가 나오는 ‘침례’가 맞다)를 받았다. 세례 뒤 예수는 갈릴리에서 천국을 선포하고 병든 자를 고치기 시작했다.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곧 그의 주변에는 ‘오클로스’(Ochelos)인 민중들이 몰려들어 따르게 된다. 예수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두루 다니면서 이들 오클로스에게 새롭게 해석되는 하나님을 비롯해 심판과 자비 그리고 사랑 등에 대해 설교했다. 이와 함께 그는 병든 자와 불구자를 고치는 등 많은 기적도 일으켰다. 추종자들이 늘어가자 예수는 설교와 사역 활동을 더 폭넓게 펼치기 위해 제자 12명을 두었다. 나중엔 다시 70명을 더 두어 각처에 파송한다. 예수는 제자들이나 민중들에게 세련된 신학을 가르치는 대신 비유와 예화를 들려주며 설명했다. 비유는 재미있으면서도 교훈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예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점을 자주 비판했다. 반면에 종교 지도자와 율법학자 등 정통 유대교도들은 그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등 율법을 공개적으로 무시하는가 하면, 세리나 창녀 등 정결하지 못한 계층의 사람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했다. 예수를 추종하는 민중들이 늘어나면서 그의 영향력을 예의 주시하던 유대교 최고지도부와 로마 점령세력은 위험을 느끼기 시작했다. 당시 팔레스타인 지역은 로마제국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무장봉기가 간헐적으로 벌어지고, 열심당 등 봉기를 위한 비밀결사들이 다각도로 활동하고 있었다. 결국 예루살렘에 입성해 설교와 사역 그리고 활발한 토론 활동을 벌이던 예수는 체포돼 ‘로마제국 식민지의 정치범’으로서 그 극악함으로 유명한 십자가형을 받고 숨진다.
‘자기’의 성채를 과감히 부숴
그러나 예수의 영향력은 그가 죽은 뒤 다시 부활했다는 소문과 제자들이 다시 불붙인 포교 활동 등으로 더 광범한 차원에서 더 강도 높게 확산되기 시작한다. 그리스도교가 인류 역사의 새로운 주인공으로 무대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불과 3년 남짓한 짧은 공생애(公生涯)에 예수가 이렇게 큰 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종교의 관점에서 분석해보자.
1. 유대교의 자기중심주의를 뛰어넘는 이타주의를 펼쳤다.
2. 유대교의 계급적 제한성을 극복해 당시 다수파인 사회적 약자의 마음을 얻었다.
3. 율법을 뛰어넘는 자비(또는 사랑)의 존재를 최고 가치로 승화했다.
4.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이방인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포교길을 열고 세계종교로 도약했다.
우선 이타주의의 관점부터 살펴보자. 이전까지의 종교는 ‘자기’라는 성채에 굳게 갇혀 있었다. 특히 모세의 율법으로 상징되는 유대교는 강력한 부권을 바탕으로 원시적 공동체주의의 가치를 밀어내고 개인 중심의 ‘사유화’와 인간 상호간의 ‘계약’을 절대화해왔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너희 이웃의 소유는 어떤 것도 탐내지 못한다.’(십계명 중에서)
‘불이 나서 남의 낟가리나 거두지 않은 곡식이나 밭을 태웠으면, 불을 놓은 사람은 그것을 반드시 물어줘야 한다.’(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와 전했다는 ‘배상에 관한 법’ 중에서)
이런 모세의 율법을 수천년 동안 자구대로만 고수해온 결과 예수 시대에 이르면 숱한 문제점이 드러난다. “그들(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깨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 손가락도 꼼짝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더라도 율법상으로는 죄를 짓지 않는 사회에서 무엇을 더 기대할 것인가?
두 번째, 계급적 제한성의 해방 역시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당시 유대교의 이른바 ‘정결제도’는 사람들을 엄격하게 차별하고 있었다. 예수는 이런 편견을 깨고 사회적 약자를 과감하게 끌어안았다. 그가 처음 사역을 나선 사마리아는 정통적인 유대인의 가치관에선 이방인과 혼혈이 득시글거리는 ‘더러운 땅’이었다. 나아가 예수가 만나고 접촉했던 사람은 어떤 사람들인가? ‘병든 사람’ ‘죽은 사람’ ‘피흘리는 사람’ ‘나병환자’ ‘혈우병 환자’ ‘창녀’…. 이건 완전히 ‘부정 타는 사람’으로서 사회의 냉대를 받으며 기피되는 사람들이 아닌가? 예수는 이런 이들을 파격적으로 끌어안음으로써 모든 계급이 참여하는 새로운 종교, 그리스도교의 길을 열었다.
예수를 신으로 승격시킨 교리상의 발전
세 번째, 예수는 율법보다 사람이 새로운 종교의 중심으로 자리잡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 논쟁이다. 그에겐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십계명의 율법조차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게 아니다.’(‘마가복음’ 2장27절) 나아가 건강상태, 사회적 지위, 인종, 종교 등에 따라 누가 의로우냐 거룩하냐 깨끗하냐 바르냐를 가르던 세계에서 과감히 탈피했다. 그런 차별과 장벽은 전면적으로 후퇴한다. 그 대신 새로운 판단기준을 제시한다.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헐벗었을 때 입을 것을 주고, 병들었을 때 돌보아주고, 감옥에 갇혔을 때 찾아주라.’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한편 나중에 예수를 신으로 승격시키는 교리상의 발전도 그리스도교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죽음 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가 신의 일면을 그들에게 보여줬다는 믿음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에 따라 예수에게 기도드리는 일이 시작됐다. 결국 예수를 신으로 추앙하는 결정에 이르게 된다. 거의 300여년이 지난 4세기의 일이다. 예수를 성육신(Incarnation)으로 파악하는 교리는 서기 325년 니케아 공의회(주교회의)를 거쳐 성부-성자-성령이 하나의 하나님이라는 ‘삼위일체설’을 공식화한 서기 381년 ‘니케아 신조’로 발전한다. 카렌 암스트롱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나타난 신’이라는 교리가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불교, 힌두교에서도 발전했으며 이런 교리를 통해 이들 종교가 활력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파악한다.
인간은 자신을 닮은 신만을 따르고 좋아하는데, 예수는 그 정점에서 인류를 유혹했던 것인가?
<최고경영자 예수>(로리 베스 존스·한언 펴냄)는 △자아극복 △행동 △인간관계 형성 등 3개 분야에서 예수가 보인 강점을 분석하고 있다. 여기 제시된 84가지의 강점 가운데 설득력이 있거나 눈길을 끄는 것들을 정리해 소개해본다.
1. 자신의 사명에 충실했다: 예수는 자신의 사명을 인간들에게 더 나은 인생 행로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자신을 교사이자 치유자로 보았다. 이 때문에 그는 ‘광야의 시험’에서 제시받은 몇 차례의 ‘사업 기회’를 단호히 거부했다. 자신의 사명과 부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자신의 에너지를 절제했다: 어떤 여인이 군중 사이에서 그의 옷에 손을 대었을 때 예수는 돌아서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고 묻었다. 그 정도로 자신의 에너지를 잘 알았다. 그는 사명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에 불필요한 에너지가 빠져나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는 제자들에게 자신을 추종하도록 애걸하지 않았으며, 그들을 조종하기 위해 에너지를 낭비하지도 않았다. 우리 자신의 일을 소홀히 하면서 다른 사람의 일에 참견할 때 우리의 에너지는 새어나가는 것이다.
3. ‘감사합니다’라고 말씀했다: 죽은 나자로에게 일어나라고 명하기 바로 전에 예수는 ‘항상 자신의 기도를 들어 응답하시는 하나님’께 감사했다. 감사하는 마음은 열린 마음, 경청하는 마음, 신앙으로 충만한 마음을 의미하기에 리더십의 핵심요소다.
4. 남을 정죄하는 데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그는 남을 정죄하는 것도 막대한 에너지가 새어나가는 일로 간주했다. ‘이 몹쓸 종아, 나는 바로 네 입에서 나온 말로 너를 벌주겠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하리라고 생각하지는 말라.’ 당신은 자신의 진취적인 활동에 지속적으로 마음을 쏟아라.
5.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보았다: 예수는 모든 것을 살아 있는 것, 가능성으로 가득 찬 존재로 보았다. 죄인들이란 다만 화음을 이루며 노래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일 뿐이다.
6. 팀을 결성했다: 그는 일단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게 됐을 때 지체하지 않고 팀을 결성했다. ‘나를 따르라’고 예수는 외쳤고, 그들은 주저하지 않고 따랐다.
7. 여성들에게 권한과 능력을 부여했다: 예수는 부활 뒤 가장 먼저 여성들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여성들의 사명은 더 의심이 많은 남성 제자들에게 가서 그들을 확신시키는 것이었다. 부활한 뒤 예수는 제자들과 함께 엠마오로 걸어가면서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제자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거의 즉시 예수를 알아보았다. 하나님도 적당한 시기까지 비밀을 고수할 수 있는 처녀인 마리아에게 엄청난 계획을 최초로 말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