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속상관의 모함으로 투옥돼야 했던 운명, 조선 사회의 부정부패와 끝까지 타협하지 않는 길 택해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금속줄과 대나무통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됐다. 적국인 전라도라고 하지만 검붉게 치솟아 오르는 연기는 마치 이런 상황을 분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감옥에 넣어 물을 먹이고, 목에 쇠사슬을 채우고, 달군 쇠를 대어 지지는 것은 이 덧없는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일본에서 포르투갈 상인들이 왔는데 인상(人商·인신매매상)도 있다. 그들은 본진의 뒤에 따라다니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사들여 줄로 목을 묶어 모아서 앞으로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지팡이로 몰아붙여 두들겨 패댄다. 아방나찰이라는 지옥귀신이 죄인을 벌주는 것이 이와 같으리라고 생각될 정도다.”
왜 전라도는 처참한 지옥이 되었나
» 이순신 장군의 영정. 가장 도덕적인 삶을 사는 대가로 숱한 고난을 겪어야 했던 그는 민족을 구함으로써 그 모든 고난을 뛰어넘었다.
1597년 6월 일본 구주 안양사의 주지 게이넨은 우스키성의 영주 오오타 히슈우의 군의관으로 조선에 와 8개월 동안 목격하고 경험한 것을 <일일기>(日日記)라는 일기 형식의 기록으로 남겼다. 그가 본 조선인의 참상은 일본 전국시대의 여러 전투를 보거나 경험했을 이 승려조차 ‘난생처음 보게 된다’고 털어놓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수군의 맹활약으로 “일본군이 한치도 밟을 수 없었다”고 할 정도로 안전했던 전라도 지역이 이처럼 1597년 이후 처참한 지옥으로 변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순신을 모함한 원균 등 악독한 지배층과 어리석고 무능한 군주 선조의 독단 때문이다. 선조의 명령으로 이순신을 투옥시키고 대신 원균을 삼군수군통제사로 세운 뒤 조선 수군이 1597년 7월16일 일본 수군에게 대패한 것이다. 이 패전 뒤 채 20일도 안 돼 전라도는 게이넨의 일기에 묘사된 것과 같이 살육과 방화, 고문, 인신매매, 구타 등등의 아수라장으로 변한다.
그뿐인가. 조선인의 코와 귀를 무더기로 잘라 일본으로 가져간 일본군의 악랄한 만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조선 수군의 패배 한달 뒤부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 때 조선으로 출병한 일본 다이묘(大名·영주)들에게 “전공의 증명은 수급의 수로 하지 않고 베어서 가져온 코의 수로 계산한다”는 군령을 내린 것이 1597년 8월이다. 당시 일본군은 임진왜란 때 돌파하지 못한 곡창지대이자 전략 요충인 전라도 지역을 대대적으로 공략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주로 전라도 백성의 코를 베어낸 뒤 소금으로 절여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 10만에 이른다고 일본 역사가들은 추정한다. 전공에 눈이 먼 일본군은 조선군은 물론 남녀노소, 승려, 노비, 초동에 이르기까지 비전투원의 코까지 무더기로 베어냈던 것이다.
나아가 게이넨의 일기에 나와 있는 것처럼 조선인 포로를 대대적으로 노예로 끌고 간 시기도 이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1597년 일본 나가사키에 들른 이탈리아 노예상인 프란시스코 가르데는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매우 많은 수의 조선인들이 노예로 끌려와서 헐값으로 팔리고 있다.”
일본으로 잡혀간 강항도 경험담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전라도 무안군에는 도적선 600~700척이 수 리에 걸쳐서 넘치고 있었으며, 그 배에는 우리나라 남녀가 왜병과 거의 반반이 될 정도다. 배마다 통곡하는 포로들의 소리는 산과 바다를 흔들 정도였다.”
이렇게 일본으로 잡혀간 도공, 제약기술자, 금제련공, 농부, 부녀자 등 조선인이 적게는 5만명, 많게는 10만명을 헤아린다. 임진왜란 7년 가운데 ‘살육전쟁’ ‘노예전쟁’의 양상은 바로 이 정유재란 시기- 이순신이 수군 지휘관에서 물러난 시기- 에 결정적으로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바꿔 말해 이순신이 그대로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조선 남해안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다면, 조선 민중의 피해는 결정적으로 줄어들었을 수 있었다. 어느 의미에서는 정유재란을 다시 일으키는 것을 일본이 포기했거나 적어도 굉장히 주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노량대첩을 그린 현대화. 그는 이 마지막 전투에서 ‘단 한명의 왜적도 놓아주지 않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진두지휘하다가 적의 총탄에 맞아 순국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놀래키다
임진왜란 당시 남해 일대에서 일본 수군을 연파해 일본의 조선 점령과 중국 진출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이순신은 그때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일본군의 침략을 거의 유일하게 대비한 조선군 지휘관이자,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해 결국 일본의 야심적인 수륙병진책(水陸竝進策)을 파탄시킨 민족의 구원자 이순신은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처지로 내쫓겨 있었다. 일본은 평양성을 점령한 고니시 유키나가군과, 함경도까지 진격한 가토 기요마사군에게 전라도를 돌아 황해를 북진하는 수군의 보급선이 연결된다면 조선 점령을 매듭짓고 중국까지 치고 들어간다는 수륙병진책을 세워놓고 있었다. 이 전략은 바로 이순신의 분전으로 뿌리부터 파탄되고 있었다. 일본이 그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는 전쟁에 관한 한 일가견이 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수군의 연전연패 소식에 놀라 아예 ‘조선 수군과는 교전하지 말라’고 지시를 내린 데서도 그대로 알 수 있다. 그 누구도 일본군에게 승리하지 못할 때 오직 승전에 승전을 거듭해 종2품인 삼도수군통제사에, 정2품 정헌대부에까지 올랐던 그를 당시 조선 왕조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파직하고 고문까지 한 뒤 ‘무등병’으로 내몰아놓고 있었다. 백의종군 첫날 순신은 죄인이라는 이유로 종의 집에서 자야 했다. 이게 그의 첫 백의종군도 아니다. 42살 때인 1585년 북방 함경도 조산보의 만호로 전직된 그는 반드시 필요한 증원군을 요청했으나 직속상관이 묵살하는 바람에 결국 여진족 침략병들을 아주 적은 병력으로 맞아 싸워야 했다. 그는 이 전투에서도 용전분투해 나름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렸는데도 오히려 문책을 두려워한 직속상관의 모함으로 투옥됐다. 조선은 그런 나라였다. 순신은 그런 조국을 가지고 있었다.
원균 등과 선조가 합작해서 그에게 씌운 죄목은 네 가지다.
(1)조정을 속였으니, 임금을 업신여긴 죄
(2)적을 쫓아 공격하지 않아 나라를 등진 죄
(3)남의 공을 가로채고 남을 모함한 죄
(4)임금이 불러도 오지 않은 한없이 방자한 죄
공인으로서 엄격한 도덕성과 청렴결백한 생활을 고집했던 순신은 당시 부정부패로 물든 조선 사회와 타협하지 않아 숱한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 네 가지 죄목을 정확히 분석하는 것은 순신이 그 질풍노도의 시대를 어떻게 살았는지, 그 결과 어떤 고난을 겪었는지 이해하게 해준다. 따라서 지면의 한계를 무릅쓰고 그 하나하나의 진실을 파헤쳐 들어가본다.
첫째 죄목은 순신이 부하 장령들의 공적 보고를 믿고 그대로 위로 상주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가 공적에 큰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이미 삼도수군통제사로서 정2품 정헌대부에까지 오른 그다. 순신은 나중에 조명연합수군의 승리를 위해 명나라 제독 진린에게 ‘모든 공적을 돌릴 테니 대신 지휘권을 달라’고 제안한 사람이다. 그는 부하의 공훈을 세워주어 사기를 높이기 위해 그런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선조, 이순신 사형까지 염두에 둬
» 일본군의 조총. 이 조총은 당시 조선군이 쓰던 중국식 화승총에 비해 월등히 화력이 뛰어났다.
두 번째 죄목은 일본의 반간계(反奸計)에 놀아난 조정이 잘못된 명령을 내린 것을 실행하지 않은 것이다. 일본군 대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첩자 요시라를 경상우병사에게 보내 “가토 기요마사가 부산 앞바다를 건너올 테니 조선 수군이 체포하라”고 충동질한 것을 순신은 의심해 실행하지 않는다. 실제로 이 반간계는 이순신을 제거하기 위해 일본군이 기획한 것으로 조선 조정은 그대로 걸려든 것이다.
세 번째 죄목은 원균의 주장에서 비롯됐다. 1592년 최초 해전인 옥포 해전에 대한 논공행상은 당시 옥포의 관할권을 가지고 있는 부대의 지휘관인 원균이 구원부대의 지휘관인 순신보다 높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원균은 일본군의 침입이 있자 경상우수영의 군선들을 모두 불태워버리고(왜군에게 빼앗기면 활용당한다는 이유로) 단지 1척(나중에 그의 부하들이 5척을 더 가지고 합류)의 배를 가지고 합류했다. 이에 비해 순신의 함대는 판옥선 24척 등 모두 85척의 함대를 가지고 참전하고 있다. 게다가 원균은 일본군이 수백척의 배로 부산에 상륙할 당시 전혀 공격조차 시도하지 않은 바 있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펴는 것이 먹혀들어가고 있다.
네 번째 죄목은 세자 광해군이 군사를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제2정부 격인 ‘분조’(分朝)를 전주에 설치하고 순신을 전주로 오라고 명령한 것을 이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여수에 있는 수군의 최고 지휘관을 백면서생이나 다름없는 세자가 수백 킬로나 먼 내륙에까지 와서 보고하라는 것을 어떻게 볼 것인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나다
»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쓴 채 압송되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있다.
선조는 처음 순신을 파직하고 투옥시키며 아예 사형시킬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순신이 어떤 자인지 모르겠어! 명나라의 관원들이 그들의 조정을 속이지 못하는 짓거리가 없는데, 그 못된 버릇을 우리나라 사람이 닮아가고 있어. 이순신이 부산에 있는 왜영을 불태웠다고 허위 보고를 했으니, 영의정! 이것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제부터 이순신이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일본군 제2군 대장)의 머리를 베어들고 온다 한들 그 죄를 어찌 갚을 수 있겠는가?”
결국 순신은 우의정 정탁 등의 간절한 구명운동으로 석방된다. 민족의 구원자가 어리석은 암군의 명령 하나로 죽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살아난 것이다. 파직돼 죄인이 돼 백의종군길에 나선 아들을 보러 멀리 여수에서 아산으로 오던 순신의 노모는 결국 아들을 보지 못하고 숨지기도 했다. 죄인의 누명을 쓴 채 어머니마저 잃은 순신은 ‘간과 쓸개가 녹아내리는 것 같은’ 삶 속에서 탄식한다.
“해가 캄캄하게 보인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다. 빨리 죽기만 기다릴 뿐이다.”
임진왜란은 "노예전쟁"
임진왜란은 우리 민족에게 처참하기 짝이 없는 전쟁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륙 침략 야욕으로 시작된 이 전쟁은 어느 의미에선 세계에서 가장 전투력이 뛰어난 국가와 가장 준비되지 않은 국가 사이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일본은 150여년에 이르는 전국시대를 거치며 세계 어떤 군대보다 전투력이 높은 상태였다. 특히 1543년 조총이라 불리는 장총을 서양으로부터 전래받은 이후 대대적으로 생산하고 실전에 배치한 상태였다. 이미 통일 되기 25년 전인 1575년 오다 노부나가군은 3천명으로 이뤄진 조총부대를 운용해 다케다 신겐군의 기마군단을 격파했을 정도다. 일부 역사가들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조총을 보유한 국가로 꼽기도 한다.
» 일본군이 울산성 전투에서 바주카포를 연상시키는 대형 화포를 사용하는 그림.
이런 무력을 갖춘 군대 15만8천명이 1592년 조선을 침략한 것이다. 당시 부산성을 지키고 있던 조선군의 병력은 600명이었다. 7년 동안 계속된 이 전쟁에서 일본군은 조선인 18만5738명, 명나라인 2만9014명 등 모두 21만4752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집계된다. 특히 히데요시는 정유재란(당시 침략군 병력은 14만명 규모)을 일으키며 이렇게 명령했다.
“해마다 출병해서 그 나라 사람(조선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그 나라를 빈 터로 만들 것이다.”
일본은 이런 잔학극을 저지르는 한편 5만~10만명에 이르는 조선인을 무더기로 끌고 갔다. 일제의 강제 연행 440여년 전인 임란 때부터 이미 그런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을 기본적으로 ‘노예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당시 도공들이 얼마나 많이 잡혀갔는지 조선에선 거의 30여년 동안 찻잔도 제대로 생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에 끌려간 도공들은 사쓰마 등지에서 세계적인 도자기를 생산해 유럽에 대거 수출하는 등 일본 도자기 산업의 발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일본에 끌려간 사람 가운데 일부는 노예로서 또다시 포르투갈 등 유럽으로 팔려갔다.
전쟁 뒤 조선은 일본군의 살육과 전염병, 질병 등으로 인구가 격감해 경지 면적이 170만결에서 54만결로 크게 축소됐다. 3분의 1 이하로 줄어든 것이다. 한마디로 국가의 존립마저 불투명할 정도로 내몰리고 있다. 한양의 경우 임진왜란 170년 전인 1428년(세종 10년) 11만명에 이르던 인구가 전쟁 뒤 3만8천명으로 줄어들었다.
울돌목에서 불가능의 목을 치다
궤멸한 조선수군을 맨손으로 일으킨 이순신… 모든 지식과 역량을 쏟은 명량해전 승리의 비결
» 한산도에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면서 원균에게 넘겨준 조선 수군의 전력은 대략 이렇다. ‘군함 300여척, 천자포 등 대포 300문, 군량미 9914석, 화약 4천근….’
그 수군이 1597년 7월15일 거제도 해역 칠천량에서 크게 패했다. 아니, 그냥 진 것이 아니라 ‘궤멸’됐다고 할 수 있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배를 버리고 육지로 달아나다 죽고, 함대는 일본군의 수륙 합동작전 앞에 무참하게 박살나고 말았다. 경상 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빠져나온 12척의 배만이 격침의 운명을 피해갈 수 있었다. 총 300척을 자랑하던 무적의 조선 수군 함대 가운데 하룻밤 사이에 160여척이 일본군에게 격파돼 남해바다에 수장됐다. 일본군은 칠천량 승리 뒤 한산도 일대와 고성 일대 포구에 남겨진 조선 수군의 배도 찾아내 모조리 불태웠다. 순신이 온 정열을 쏟아부어 일본침략군의 유일한 대항세력으로 성장시킨 조선 수군…. 그 피와 땀과 눈물로 일군 조선의 무적함대가 7년 동안의 임진왜란 기간 동안 단 한번 처음 당한 이 참패로 사실상 궤멸한 것이다. 7월18일 패전의 소식을 들은 날 순신은 <난중일기>에 이렇게 적어놓고 있다.
무의 상태, 교서 한장만 들고…
“정유. 맑음. 새벽에 이덕필이 변홍달과 함께 와서 전하기를 16일 수군이 밤 기습을 당해 통제사 원균을 비롯해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및 여러 장수들과 많은 사람이 해를 입고 수군이 크게 패했다는 것이다. 듣고 있으려니 통곡이 터져나오는 것을 이길 길이 없다.”
순신은 이때 복권된다. 수군 전멸에 경악한 선조가 경림부원군 김명원, 병조판서 이항복, 도원수 권율 등으로부터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하시라’는 제안을 받고 동의한 것이다. 선조는 순신을 재임명한다는 교서를 내린다.
“오! 국가가 의지해 보장받은 것은 오직 수군뿐이었건만 하늘이 아직도 화 내림을 후회하지 않는지 흉적의 칼날이 다시 번뜩여 마침내 3도의 대군을 한 싸움에 다 없애버렸도다. 이제부터 바다 가까운 성읍들을 누가 막아주랴? 한산도가 함락됐으니 적이 무엇을 꺼리랴? …오로지 경은 일찍이 발탁해 수사로 임영하던 날부터 이름이 드러났고, 다시 공업을 떨치어 임진년의 대첩 후에는 변방의 군사들이 만리장성처럼 든든하게 믿었건만 지난번에 경의 직책을 갈고 죄를 입은 채로 종군하게 한 것은 사람의 도모하는 바가 착하기만 하지 않은 데서 그리 된 일이라. 이같은 패전을 당한 이제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무슨 할 말이 있으리오. 이제 특별히 경을 복권하고 복상 중인데도 뽑아내 백의종군으로부터 충청·전라·경상 등 3도의 수군통제사를 겸직할 것을 제수하노라.”
순신이 이 재임명 교서를 받았을 때의 정황은 어떠했을까?
조선 수군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수군 궤멸에 따라 지상군도 곳곳에서 그대로 무너지고 있었다. 수령들은 ‘적이 다시 침략해온다’는 막연한 정보만 갖고 무리하게 청야령(淸野令·적군이 아군의 시설물, 식량, 군수물자를 활용하지 못하도록 이것들을 불태우고 사람들을 소개시키는 명령)을 발동하곤 했다. 피난민은 저마다 산간으로 숨어들어가고 성읍과 도시는 폐허로 변해 있었다. 이와 달리 일본군은 칠천량의 대승으로 조선 수군이 완전히 전멸한 것으로 판단하고 지상전 중심의 호남 점령 전략을 추진했다. 일본군은 바다를 돌아 서해로 진출하는 대신 경상도 사천에 상륙해 서북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남원성을 점령하고 전주마저 점령했다. 임진왜란 이후 수군의 제해권 장악으로 안전했던 호남은 갑작스런 일본군의 진격과 학살, 약탈로 생지옥으로 변해버렸다.
1597년 8월3일 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를 받았을 때 그에게는 군관 9명과 군사 6명뿐이었다. 수군이 궤멸하고 호남지역의 지상군마저 스스로 무너져내리는 처참한 상황에서 그는 교서 하나만 들고 거대한 파도처럼 밀어닥칠 적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해야 했다. 거의 무와 다름없는 상황에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다.
이 역경에서 순신이 선택한 길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1) 희망부터 복원한다
(2) 판단은 빨리, 행동은 총력전으로
(3) 내가 잘하는 싸움으로 판을 이끈다
(4) 죽으려 하면 산다
희망 복원, 빠른 판단, 총력 행동
» 명량해전도1. 일본 군함이 밀집 형태로 해협을 통과하여 이순신 장군의 기함을 포위하고 있다.
뒤편으로는 조선 수군의 군함 12척이 일렬횡대로 늘어서 있다.
첫째, 그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뒤 경상도 운곡에서 하동, 구례, 곡성, 보성으로 이동하면서 백성들과 지방 수령들에게 희망을 전파한다. 백성들의 호응과 지원이 없으면 전쟁을 이길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그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있던 백성들에게 자신이 복권됐으므로 믿고서 생업에 종사하라고 설득한다. 백성들은 “사또가 다시 오셨으니 이제 우리는 살았다”고 환호하며 다투어 술을 갖다 바칠 정도로 호응한다. 이와 함께 일본군의 호남 진격으로 목숨을 걱정하던 수령들에게도 행정력을 복원해 전쟁에 다시 임할 것을 독려한다. 그 결과 군사들의 모병이 가능하게 된다. 피난민은 줄고 백성들까지 참여하는 총력전 체제가 급속도로 자리잡게 된다.
둘째, 순신은 급박한 상황에서 머뭇거리지 않고 정확하게 판단한 뒤 곧바로 실천해나갔다. 그가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명된 8월3일부터 명량대첩이 벌어지게 될 9월16일까지 가진 시간적 여유는 고작 한달 열흘. 그사이 그는 총력을 다해 아직까지 안전한 군량창고를 최대로 확보하고 남은 군함을 찾아내 함대를 재편성한다. 이와 함께 수군 장수들을 확보하고, 군사들도 계속 충원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군기확립을 위해 휘하 장수 이몽구가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장 80대를 치는 등 근본을 철저하게 다졌다.
셋째, 그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싸움터, 바다를 끝까지 지켜냈다. 그는 기본적으로 임진왜란에서 조선의 바다가 얼마나 중요한지 철저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전략 개념이 불명확한 조정에서는 한때 남은 군함이 12척에 지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고 “약한 수군력으로 더 이상 해전을 수행할 수 없으면 육지로 올라와 육전을 해도 좋다”는 명령까지 내린다. 그러나 그는 절대 해전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12척의 군함으로 적을 막아내겠다는 강한 결의를 보였다. 순신은 나아가 이 바다의 전장을 치밀하게 연구해 명량해협에서 적을 저지·격파하는 전술을 세운다.
넷째, 병력과 군함 수, 그리고 화력 등에서 압도적으로 불리한 조선 수군이 막강한 일본군에게 승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오직 죽을 각오로 싸울 때라야만 기적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결사의 각오를 현실화하면서 기적은 일어난다. 세계사에 기록된 해전, 명량해전에서 승리한 것이다.
»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의 주력 무기로 활용된 대포격인 총통. 이 총통을 배에 장착해 대장군전, 단석, 화포, 조란탄 등을 발사했다.
명량해전(울돌목 싸움)은 순신의 해전 가운데 가장 눈물겹고 감동적인 전투이다. 조선 수군이 사실상 궤멸된 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수군을 동원해 일본 수군 대함대에 맞서 기적 같은 승리를 쟁취했기 때문이다. 당시 명량해전 직전까지 순신이 동원할 수 있었던 배는 군함 13척과 초탐선 32척뿐이었다. 초탐선은 첩보선으로 활용할 수는 있었으나 승선 인원이 적고 무장력도 약해 실제 해전을 수행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에 반해 칠천량에서 승리한 일본 수군은 최소 133척 이상의 군함으로 이뤄져 있었다. 일본 군함의 수는 <이충무공전서> ‘행록’에는 333척, <징비록>에는 200여척, <명량대첩비>에는 500여척, <난중일기>에는 133척으로 기록돼 있다. 이러한 군함 수의 차이는 울돌목 포구가 좁아서 싸움에 직접 참가한 일본 군함과 후방의 넓은 바다에서 전투 결과를 지켜보던 일본 군함이 분리돼 있었던 데서 생겨났다.
울돌목의 조류가 바뀌던 순간
9월16일 이른 아침, 셀 수 없이 많은 일본 함선이 명량해협을 향해 오고 있다는 첩보가 전해지면서 명량해전은 시작됐다. 일본 함선이 통과하려는 해협은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 화원반도와 진도 사이에 있는 길이 2km 정도의 수로다. 평균폭이 500m지만, 배가 다닐 수 있는 가장 좁은 곳은 150m에 지나지 않는다.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최저수심은 1.9m이며, 조류의 속도가 11.5노트로 매우 빠르다. 예부터 물 흐르는 소리가 마치 울음소리 같다고 해서 울돌목이라고 불렀다. 일본 수군은 명량의 순류를 타고 거침없이 전진해왔다. 일본군 함대는 해협을 따라 좁고 길게, 거의 2km에 걸쳐 행렬을 이룬 채 다가왔다. 순신은 군함 13척을 일렬 횡대로 쭉 늘어세워서 적과 맞섰다. 그러나 순신의 독려에도 조선 수군의 전열은 무너졌다. 명량의 급류를 역류해서 맞아야 했기 때문에 격군들이 노를 힘껏 저어도 조금씩 뒤로 밀린 것이다.
순신의 기함은 이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적을 기다렸다. 일본군은 순신의 기함을 보자 한꺼번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때 순신이 기수에게 신호를 보냈다. 기수가 깃발을 올리자 육지 양쪽 끝에 숨어 있던 장정들이 물레를 돌려댔다. 물레에 연결된 채 바닷속에 늘어져 있던 쇠줄이 팽팽해지면서 위로 당겨졌다. 일본 배 밑바닥이 뾰족한 것을 이용한 철쇄전법에 앞장선 선두함이 걸렸다. 그 뒤를 빠른 조류를 타고 달려오던 다른 배들이 들이받기 시작했다. 연달은 추돌 현상으로 일본 배들은 급속도로 진형이 무너져갔다. 혼란에 빠진 일본 군함을 향해 일제 공격이 벌어졌다. 조선 군함에서 탄두에 철갑을 두른 초대형 화살인 대장군전이 발사됐다. 머리통만 한 단석들도 발사됐다. 화포와 조란탄도 발사됐다. 순신의 기함이 분전하면서 조선 수군의 다른 함선들도 총공격에 나섰다.
17전 17승, 가장 빛나는 승리
» 거북선 내부의 모습. 거북선 안에서 총통을 발사하는 조선 수병의 밀랍인형 모형.
순신의 기함이 붉은 갑옷을 입은 채 죽은 적장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주검에서 목을 베어 내걸었다. 일본군은 동요했다. 다시 조류가 조선 수군의 순류쪽으로 바뀌자 전세는 완전히 조선 수군쪽으로 기울었다. 일본 수군은 결국 철수하기 시작했다. 조선 수군이 13척의 배로 133척이 넘는 함대를 이겨낸 것이다. 이 전투에서 일본 수군은 31척이 격침된 반면 조선 수군은 한 척의 피해도 없었다. 이 해전으로 조선 수군은 호남 지역의 제해권을 되찾게 됐다.
순신이 일본군과 싸운 전투는 대략 17차례. 그는 이 전투에서 모두 이겼다. 17전 17승을 거둔 것이다. 이 전투 가운데 가장 빛나는 것이 바로 가장 최악의 조건에서 싸워 이겨 정유재란의 운명을 사실상 결정한 이 명량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전 생애와 전 지식, 전 역량을 던져 조선의 운명을 바꿔냈다.
이순신은 일본에게도 군신
러-일 전쟁 때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파한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은 승전 뒤 자신을 넬슨 제독에 버금가는 군신(軍神)으로 치켜세우는 말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넬슨은 군신이라고 할 정도의 인물이 되지 못한다. 해군 역사상 군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독이 있다면 이순신 한 사람뿐이다. 이순신과 비교하면 나는 하사관도 못 된다.”
당시 도고 함대의 수뢰사령(水雷司令)인 가와타 쓰도무 소좌는 ‘함대가 출동할 때 이순신 장군의 영에게 빌었다’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마땅히 세계 제일의 해장인 조선의 이순신을 연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인격, 그의 전술, 그의 발명, 그의 통제력, 그의 지모와 용기, 그 가운데 어느 한 가지도 상찬의 대상이 아닌 게 없다.”
» 한산도 제승당에 있는 노량해전 그림. 이순신 장군이 적탄에 맞아 숨진 것을 숨긴채 전투를 벌이고 있다.
나아가 일본은 일제시대에도 통영 충렬사에서 진해 해군사령부의 주도로 이순신 장군에 대한 진혼제를 지냈다고 한다. 과거 일본의 적장이었던 이순신을 사실상 그들의 군신처럼 떠받든 것이다. 일본의 국민작가로 ‘국사’(國師)라는 칭송을 받은 시바 료타로는 이런 이순신 열풍에 대해 이렇게 풀이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이후 해군을 창설한 뒤 아직 자신이 없었기에 동양권에서 배출한 유일한 해군 명장 이순신을 연구하고 대단히 존경하게 됐다.”
<근세일본사>에는 이순신과 노량해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순신은 이기고 죽었으며, 죽고 나서도 이겼다. 조선전쟁 7년 동안에… 참으로 이순신 한 사람을 자랑 삼지 않을 수 없다. 일본 수군의 장수들은 이순신이 살아 있을 때에 기를 펴지 못했다. 그는 실로 조선의 영웅일 뿐만 아니라 동양 3국을 통틀어 최고의 영웅이었다.”
한편 구한말에 활동했던 미국의 선교사 겸 사학자로 <대한제국흥망사> 등 역저를 남긴 헐버트(H. B. Hulbert)는 한산대첩과 관련해 이렇게 평가한 바 있다.
“한산도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해전이야말로 도요토미의 조선 침략에 사형 선고를 내린 것이며, 도요토미의 명나라 정벌의 웅도를 좌절시킨 일전이었다.”
*살라미스(Salamis) 해전: 기원전 480년 아테네 함대를 주력으로 한 그리스 함대가 병력과 장비가 우세한 페르시아 해군을 폭이 좁은 살라미스만으로 유인해 대승을 거둔 전투.
[스티브발머] 그의 인내가 빌 게이츠를 키웠다
마이크로소프트의 2인자 스티브 발머의 성공스토리… ‘유비-제갈량’커플과 같은 눈물과 가슴은 없어라
2천여년 전 주군과 참모는 철저한 주종 관계로 맺어져 있었다. 대표적으로 <삼국지> 시대의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를 보면 한눈에 이해할 수 있다. 참모는 자신의 모든 능력을 기울여 군주의 성공(집권 또는 천하통일)을 위해 헌신한다. 나아가 그가 아무리 훌륭한 능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충성이라는 기본 도덕률에서 벗어난다면 세인들의 존경을 받을 수 없다. 그는 더 이상 신하가 아니며, 자연히 더 이상 훌륭한 참모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의 삼국시대를 통일한 사마의의 가문은 새로운 진왕조의 시조는 될 수 있을지언정 참모의 자격은 상실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21세기 우리에게 다가오는 명참모의 이미지는 어떤 것일까? 한편으로는 더 이상 봉건왕조의 주종 관계가 존속하지 않는 시대,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적 가치관이 사회의 지배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은 세계화와 디지털 정보혁명의 시대. 과연 명참모란, 명참모의 충성이란 존재하기나 할 수 있는 것일까?
» 빌 게이츠(오른쪽)가 명참모 스티브 발머(왼쪽)를 영입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는 21세기 최강기업으로 치닫는다. (사진 / Rex Features)
저승의 문과 저승사자 사이
“마침내 나는 결심했습니다. 빌 게이츠는 정말로 내가 아는 한 가장 똑똑한 친구였습니다. 누구보다 뜨거운 정열을 지녔으며 집중력이 대단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으며, 철저히 파고들어갔습니다. 또 그 일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친구의 일이라면 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는 나의 친구니까 함께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마이크로소프트의 돌격대장이자 명참모인 스티브 발머가 미래 컴퓨터산업의 제왕 빌 게이츠와 만난 것은 1973년 여름 미국 하버드대학 기숙사에서다. 시애틀에서 온 괴짜 천재 게이츠와 디트로이트에서 온 열혈남자 스티브 발머는 3600km나 떨어진 두 도시만큼이나 서로 대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곧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로 친해진다. 발머는 하버드 출신 친구 가운데 유일하게 게이츠의 평생 친구로 남았으며(게이츠는 그만큼 괴팍스럽고 까다로운 인간이었다), 사업까지 같이 하기에 이른다. 발머는 1980년 마이크로소프트에 28번째 직원으로 입사해 20년도 안 돼 이 회사를 세계 최대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성장사와 함께하는 빌 게이츠와 스티브 발머의 관계는 이런 표현들을 낳았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게이츠와 발머의 합작쇼’이다.”
“많은 이들이 빌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를 이끌어오고 있는 것으로 여기지만, 내막을 훤히 알고 있는 정통한 사람들은 마이크로소프트의 거대한 승리의 뒤에는 스티브 발머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게이츠는 기술자이고 전략가이며, 총사령관이다. 그에 반해 발머는 사업가이자 모사(謀士)이자 야전사령관이다.”
“게이츠가 반독점소송을 맡으면 발머는 회사를 운영한다.”
한술 더 떠서 이런 표현까지 나왔다.
“그 둘은 저승의 문과 저승사자다(the Pearly Gates and the Em-ballmer). 한 사람이 저승을 마련해놓으면 또 한 사람은 죽음을 가져다준다.”
이처럼 마이크로소프트의 역사에서 두 사람의 관계는 절대적이다. 게이츠가 마이크로소프트의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지만, 그곳에 도달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사람은 발머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두 사람의 합작으로 이뤄낸 마이크로소프트의 성공을 간략하게 따라가보자.
빌 게이츠의 고함에 사표를 던지다
*1968년: 빌 게이츠와 폴 알렌, 시애틀 레이크사이드의 사립고교에서 컴퓨터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모임 만듦.
*1975년: 빌 게이츠와 폴 알렌, 각각 하버드대와 워싱턴주립대를 중퇴한 뒤 합자회사 마이크로소프트 설립.
*1978년: 100만달러 매출 달성.
*1980년: 스탠퍼드 경영대학원을 중퇴하고 P&G 등에서 일하던 발머, 마이크로소프트 사장 비서로 합류. IBM의 첫 PC에 운영체제를 공급하는 역사적인 계약 체결.
*1981년: 시애틀컴퓨터로부터 86-DOS를 5만달러에 매입. 이 소프트웨어를 수정해 그해 8월 정식으로 출시된 IBM PC의 운영체제인 MS-DOS로 탈바꿈시킴. 그해 매출 1600만달러 기록. 회사 형태를 합자회사에서 주식회사로 재정비.
*1982년: IBM PC가 창출한 수요 폭발로 매출 3400만달러 달성.
*1984년: 5개 사업 부문으로 기업구조를 정비. 각 사업 부문별 부사장 체제 도입.
*1985년: 총매출 1억4천만달러, 수익 3120만달러 달성. 주당 21달러의 가격으로 전체 회사 주식의 12% 공개. 그해 말 주가는 90달러를 넘어섬.
*1990년: 마이크로소프트 시장가치 210억9천만달러에 추산돼 IBM과 GM을 능가. 빌 게이츠는 70억달러가 넘는 추정가치로 미국 내 최고 부자로 선정됨.
» 마이크로소프트의 신제품 '오피스 2000'을 출시시키는 스티브 발머. 그는 마케팅과 브랜드 관리의 대가였다. (사진 / GAMMA)
한마디로 발머가 합류하고 나서 마이크로소프트는 초고속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다. 발머가 들어오고 난 뒤 30명도 안 되는 직원은 약 5만명으로, 연간 매출은 1250만달러에서 200억달러 이상으로, 현금보유액은 아주 미미한 수준에서 360억달러 이상으로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발머가 입사해 인사·회계·법무 등 회사 운영에 관한 책임을 맡았을 당시 마이크로소프트는 모든 회계기록이 수작업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게다가 회사는 초기 벤처기업이 대부분 그렇듯 모든 종류의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회사 급여가 너무 낮다는 이유로 몇몇 직원들은 시애틀 노동청에 조정신청을 내는 판이었고, 회사는 너무 많은 일을 벌여놓은 상태였다. P&G에서 브랜드 관리와 마케팅 등의 실무 경험을 쌓은 발머는 맨 처음 마이크로소프트가 이미 주문을 받아놓은 일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적어도 50명을 더 채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발머의 이런 판단에 게이츠는 그 유명한 성질을 부렸고, 열정과 경쟁심에서 누구한테 뒤지지 않는 발머도 여기에 맞섰다. 게이츠가 “누구 망하는 꼴 보고 싶어?”라고 고함을 지르자 발머는 사표를 던진다. 둘 사이에 벌어진 최초이자 가장 강력한 이 위기는 결국 게이츠의 아버지가 화해를 주선해 해소된다. 회사에 다시 돌아온 뒤 발머는 강력한 인사권을 행사하는 등 회사를 대대적으로 개혁하기 시작한다. 그 뒤의 성공신화는 앞에 간략하게 정리한 성공의 역사로 짐작할 수 있다.
스톡옵션이라는 ‘황금수갑’ 첫 도입
결국 발머는 마이크로소프트를 성공시킴으로써 자신의 성공도 함께 일구어낸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주식을 빌 게이츠, 폴 알렌 두 창업자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이 보유하고 있는 스티브 발머는 한때 세계 제10위권 부자에 오를 정도로 부도 쌓았다. 이와 함께 세계 최강기업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경영자(CEO)로서 명예도 획득한 뒤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21세기형 새로운 유형의 ‘명참모’라 할 수 있는 발머의 성공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1) 2인자는 분수를 알고 참을 줄 알아야 한다: 첫째 덕목은 바로 이 인내다. 게이츠는 그 천재성만큼이나 독특하고 견뎌내기 어려운 특성을 지닌 인물이다. 이런 ‘주인’을 섬긴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더구나 지금 시대는 운명적으로 주군에 대해 충성하는 것 이외에 다른 대안의 주군을 선택하기 어려운 봉건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누구든, 언제든 떠날 수 있지 않은가? 빌 게이츠의 고교 2년 선배로 창업 동지인 폴 알렌조차 게이츠와 함께하면서 숱한 어려움과 마음고생을 겪어야 했다. 오죽하면 그조차 결국 호지킨스병이라는 일종의 암을 얻어 회사를 떠나야 했을까? 알렌은 게이츠와 의견충돌을 벌인 뒤 항상 먼저 사과한 것은 자신이었다고 술회한 바 있다. 게이츠가 한번도 먼저 사과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히려 가장 친하기에 가장 견뎌내기 어려운 게이츠 같은 유형의 지도자에게 발머는 참고 또 참았다. 어쩌면 그가 해야 했던 가장 큰일 가운데 하나는 ‘게이츠의 화풀이를 받아주는 일’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그는 회사가 성장하자 더 큰 규모의 회사를 운영해본 경험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다른 사람들이 회사 경영을 책임지도록 자신의 지위를 낮출 줄 알았다.
(2) 21세기형 이익분배 시스템을 도입했다: 초기 회사는 게이츠와 알렌의 파트너십에 의한 합자회사였다. 따라서 주식도 두 사람만이 독점하고 있었다. 발머는 이런 회사를 정상적인 주식회사로 발전시키면서 회사에 반드시 필요한 최고 인재들에게 지분을 나눠주는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해 결국 관철한다. 1981년 지분은 게이츠 53%, 알렌 31%, 발머 8%, 천재적인 프로그래머 찰스 시모나이 1.5%, 다른 창업 공신 프로그래머 1.5% 등으로 나눠졌다. 다시 이 초기 지분 분배에서 배제된 임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하기 위해 스톡옵션제도라는 ‘황금수갑’ 시스템을 도입한 것도 발머다.
» 미국 시애틀 근교의 마이크로소프트 본사 전경. 회사 건물은 게이츠와 발머가 다녔던 하버드대학 기숙사 건물의 콘셉트를 따왔다.
(사진 / Rex Features)
(3) 인재가 최고의 성공요소라는 전략: 발머는 바로 최고의 인재를 찾아내야 한다는 철학을 게이츠가 구현한 첫 성공사례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발머는 그 바통을 이어받아 최고의 인재찾기에 나서 대성공을 거둔다. 헝가리 출신의 천재적인 프로그래머 찰스 시모나이를 찾아낸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램 개발을 성공시킨 시모나이도 다시 친구 프로그래머 리처드 브로디를 추천하는 등 인재찾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쟁력을 비약적으로 높인다. 발머는 소프트웨어산업에서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게이츠의 철학을 기업의 관점에서 철저하게 실천한 경영자이자 인사책임자였다. 이렇게 해서 발머를 통해 ‘뛰어난 지능과 에너지와 추진력을 갖춘 사람들’이 마이크로소프트에 지속적으로 충원되는 기업문화가 정착한다.
악역이란 악역은 모두 떠맡다
(4) 악역을 마다하지 않는다: 발머는 IBM PC용 운영체제의 바탕이 되는 Q-DOS를 헐값에 매입하는 작업을 게이츠와 함께 벌인 것을 시작으로 마이크로소프트의 어두운 역사 부분에서 나타나는 온갖 악역을 떠맡는다. 물론 게이츠가 책임을 회피한 채 뒷전에 물러앉은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발머가 있어서 더 비정상적이고 교묘한 ‘더티플레이’가 빈번하게 벌어진 것은 틀림없다. 물론 그 악역의 상당 부분을 발머 스스로가 떠맡곤 했다. 초기에 또 다른 경쟁 운영체제인 CP/M의 라이선스마저 얻은 뒤 자신들의 MS-DOS보다 6배나 비싸게 매겨 사실상 고사시키는 전술을 실행한 것도 발머였다. 마이크로소프트 내부의 애플리케이션과 운영체제 부서 사이에 철저한 보안이 유지된다고 사실상 속여 독립 소프트웨어 개발업체들로부터 애플리케이션 소스 코드를 공개하도록 유도한 것도 발머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가 아직 개발도 안 한 윈도의 기능을 향상시킨다고 미리 발표하는 수법으로 사전에 다른 경쟁자의 진입 의지를 교묘하게 꺾어버리는 더티플레이를 적극적으로 치고 나갈 때 마케팅과 브랜드 관리의 책임을 지고 있었던 것도 바로 발머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의 이런 비정상적이고 때로는 무자비한 사업 관행은 한편으로는 마이크로소프트 자체에는 대성공을 가져다주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많은 회사들의 분노를 유발하고 끝내 숱한 반독점법 소송을 불러오는 사태로 이어졌다.
스티브 발머의 이야기는 이처럼 아직도 진행형인 성공신화로 채색돼 있다. 그런데 그를 ‘21세기의 명참모’로 추천하면서도 뭔가 빠진 듯한 느낌은 왜일까? 그의 돈과 명예와 성공담에 우리는 경탄하면서도 가슴을 울리는 깊은 감동을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게이츠와 발머, 확실히 그들에게는 머리와 성공이 있다. 하지만 유비와 제갈량과 같은 가슴과 눈물은 발견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21세기 성공담의 비극인 것일까?
[실크로드] 동서양이 평등할 때 꽃핀 길
인류의 문명을 풍부하게 증폭시킨 실크로드, 힘의 균형이 깨질 땐 전쟁과 학살의 길로 돌변
8세기 중국의 장안, 사람들은 풍요 속에서 서역풍을 널리 즐기고 있었다. 봄놀이의 절정기에는 저마다 이란식의 모자를 쓰고, 이란식의 신을 신고, 이란식의 옷을 입은 채 온종일 꽃구경을 하며 보냈다. 석양이 질 무렵 귀족의 자제들은 백마에 올라탄 채 호희(胡姬)라 불리는 이란계 여성들을 찾아 술집으로 몰려갔다. 남색 아이섀도로 요염하게 짙은 화장을 한 호희들은 서역의 음악과 노래 그리고 춤으로 장안의 남자들을 유혹했다.
» 실크로드. 동서양은 이 길을 통해 서로 문물을 주고받았다. 불교·기독교·이슬람교 등 종교는 물론 종이, 화약, 나침반도 이 길을 따라 전파됐다. (사진 / Rex Features)
이란의 호희에 흠뻑 취했던 이백
그뿐인가. 당 태종조차 이런 정서에 깊이 빠져들었다. <책부원귀>에 따르면 태종은 서역의 고창국 원정에서 얻은 마유포도란 우수한 포도 종자를 궁궐의 뜰에 심어 재배한 뒤 스스로 8가지 포도주를 담갔다. 태종은 이 ‘황제의 포도주’를 여러 신하들에게 하사하곤 했다. 황제가 앞장서서 서역풍의 음주 문화를 유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300여년 전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이처럼 서양의 문물이 한껏 꽃피고 있었다. 실크로드 때문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동양과 서양이 엄청난 문명과 물자를 서로 주고받으며 인류의 지평을 넓혔던 것이다.
실크로드라는 이름이 인류문명사에 공식적으로 등장하기 이전부터 동양권과 서양권은 갖가지 형태로 교류해왔다. 고고학자들은 중국 허난성과 간쑤성 등에서 출토된 채색도기와 만리장성 지대에서 출토된 수많은 청동 제품 그리고 유라시아에 널리 흩어져 있는 옥제품 등은 모두 실크로드를 통해 이동했던 것으로 추정한다. 역사적으로 실크로드의 존재를 가장 먼저 기록에 남긴 역사가는 그리스의 헤로도투스(기원전 484~425년)이다. ‘역사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도 불리는 그는 명저 <역사>(Historiai)에 스키타이 교역로에 대해 기술하면서 돈강 하구로부터 볼가강과 우랄강을 건너 동북쪽으로 산재한 많은 민족을 묘사한 기록을 남겼다. 동양에서는 사마천(기원전 145~86년)이 <사기열전>의 ‘대완전’ ‘흉노전’ ‘서남이열전’ 등을 통해 중국 서쪽의 이민족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상당히 풍부하고 드라마틱하게 전하고 있다.
동양과 서양에서는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각각 반대편으로 진출해 양쪽을 연결하려는 시도가 이어져왔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실크로드는 점점 거대한 실체로서 인류의 생활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실크로드는 중국의 장안에서 시작해 만리장성을 따라 서북쪽으로 전진해 가욕관에 이른 다음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파미르 고원에 이르고, 다시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을 거쳐 소아시아에 이르는 길이 6400여km의 대장도로 완성돼갔다.
서양에서 실크로드의 완성에 가장 크게 공헌한 사람으로는 누구보다 먼저 알렉산더 대왕을 들 수 있다. 그는 기원전 334년부터 323년까지 11년 동안 벌인 동방원정을 통해 실크로드 서쪽 방면의 도로망을 사실상 완성했다. 그리스의 마케도니아를 출발해 오늘날의 터키와 시리아를 거쳐 이스라엘과 이집트까지 정복한 그는 다시 페르시아를 석권한 다음 인도와 히말라야를 향해 전진한다. 원정은 멀리 동쪽의 힌두쿠시산맥과 인더스강에까지 이어진다. 곳곳에 자신의 이름을 따 ‘알렉산드리아’라는 첨단 도시를 건설한 그의 공로로 히말라야로부터 그리스에 이르는 서쪽 지역의 도로망이 대부분 틀을 잡는다(오늘날 아프간 사태로 유명해진 헤라트와 칸다하르 등이 다 이때 알렉산드리아로 건설된 도시들이다). 알렉산더는 나아가 많은 그리스계의 식민을 단행해 실크로드의 비약적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인도 불교미술에 큰 획을 긋는 간다라 미술에서 섬세한 불상과 화려한 사찰의 신전이 등장한 것도 이 그리스계 식민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진나라와 한나라의 지속적인 서역 경영
» 나침판이 설치된 방위기계. 이런 나침판이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에 전해졌다.
동양에서는 진나라와 한나라라는 통일왕조의 지속적인 서역 경영이 실크로드의 활성화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서역로를 직접 여행하고 기록을 남긴 장건과,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복해 중국판 실크로드 네트워크를 이룩한 반초의 공로를 빼놓을 수 없다. 기원전 139년 장건은 자원해서 흉노의 후방에 있는 유목민족 대월지국과 동맹을 맺기 위해 초원으로 진입한다. 한나라와 적대하고 있던 흉노를 치기 위한 외교전략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흉노에 두 차례나 체포돼 장기간 억류되는 고초를 겪은 뒤 13년 만에야 흉노인 아내와 함께 중국의 장안으로 돌아온다. 그의 서역 국가에 대한 보고를 기초로 한나라는 서역 경영에 적극적으로 나서 결국 흉노 세력을 간쑤성 일대에서 몰아내고 하서4군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특히 서역의 명마에 심취한 한무제의 명령으로 한나라의 사자들은 좋은 말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서쪽으로 파견됐다. 사마천은 이렇게 기록했다.
“사절단은 길에서 서로 마주칠 정도로 빈번하게 오갔다. 사절단의 규모가 큰 것은 수백명, 작은 것은 백여명이었다. …사절단이 많을 때는 해마다 수십회, 적을 때도 5~6회씩 파견됐다.”
서방의 상인들도 계속 장안으로 몰려들었다. 빛나는 보석류와 향료, 약품, 동물 등이 명마와 함께 장안성에 넘쳤다. 서방 상인들은 비단과 칠기, 금 등 중국의 특산품을 서방으로 가지고 갔다. 물자뿐만이 아니다. 다양한 학문과 지식, 이국적인 예술과 생활양식, 심지어 갖가지 동식물까지도 활발하게 교류됐다. 유사 이래 가장 다양한 문명과 물자가 광범위하게 뒤섞이기 시작한 것이다.
»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가욕관. 여기서부터 실크로드는 타클라마칸사막으로 돌입한다.
실크로드는 그 뒤 역대 왕조의 성쇠에 따라 발전하거나 쇠퇴하는 등 부침을 자주 겪는다. 그러다가 당나라가 세계제국을 건설하면서 크게 융성하게 된다. 당이 타림분지에까지 안서도호부를 설치하고 물자와 사람의 교류를 적극 장려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방과 서방 양쪽에서 정세가 크게 변하면서 또다시 활기를 잃는다. 소아시아 지역을 지배하던 로마 세력이 점차 영토를 잃고 대신 아랍인 세력이 커지면서 유럽과 중국의 적극적인 교역로가 막히게 된 것이다. 동쪽에서도 당이 안녹산의 난 등으로 큰 혼란을 겪어 실크로드에 신경쓸 겨를이 없게 됐다. 이런 교착 상태는 서기 13~14세기 몽고의 융성에 따라 해소되기도 했으나, 19세기 서세동점의 시기 때까지 대체로 이어진다.
인류 전체의 생존역량을 높이다
실크로드의 역사적인 성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동서양 문명의 상호 발전에 영향 : 동서양 문명은 2천년 이상 실크로드를 통해 교류하면서 서로의 발전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문명이 뒤섞여 더 탄력적이고 유용한 문명양식으로의 진화가 가능했다. 나아가 부분적이나마 식량 등 각 문명권 지역의 의식주상의 결핍을 실크로드의 교역을 통해 상호 보완했다고도 할 수 있다.
2) 인류의 생활양식에 결정적인 요소의 나눔: 무엇보다 제지술이 이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서 서양으로 전래돼 인류의 지적문화 재산의 대폭발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다. 이와 함께 문자와 십진법, 화약, 나침판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주요한 문물을 주고받았다.
» 실크로드의 서쪽 아시아 끝인 이스탄불. 대상을 통해 중국에서 날라온 비단은 이곳에서 배로 유럽으로 들어갔다.
3) 세계종교의 전파: 불교를 비롯해 기독교·이슬람교·마니교·조로아스터교 등이 모두 이 길을 따라 동양과 서양으로 퍼져갔다. 인류의 정신문명은 이 길을 통한 각 종교의 전파와 교류를 통해 더 풍부해지고 탄력적으로 변모해갔다고 할 수 있다.
4) 의학적 관점에서 인류 전체의 생존 역량을 강화함: 오랜 시간에 걸쳐 아시아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가 교류하면서 인류의 상호 면역력이 증대됐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더 다양하고 새로운 종족과의 결혼 가능성을 크게 높여 치명적인 유전병 인자들의 발생 빈도를 크게 줄일 수 있었다. 결국 인류의 총체적인 생존 역량을 장시간에 걸쳐 비약적으로 높인 셈이다.
활발한 ‘21세기판 실크로드’구상
현재 아시아 국가를 중심으로 바다와 하늘에 빼앗긴 실크로드의 영광을 재현하려는 다양한 계획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중국의 신장웨이우얼과 파키스탄을 고속도로로 연결하려는 판아시안하이웨이 계획을 비롯해 러시아의 시베리아철도를 남북한과 중국에 연결하려는 계획 등은 모두 이같은 ‘21세기판 실크로드’ 구상이다. 과연 실크로드는 21세기에 화려하게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점과 관련해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역사의 교훈이 있다. 실크로드는 서로 반대편 지역이 혜택을 공유하는 호혜평등의 원칙을 지킬 때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그 원칙이 깨질 때, 양쪽의 힘의 균형이 깨질 때 실크로드는 평화와 번영의 길이 아니라 전쟁과 학살의 길로 돌변했다.
미국이 실크로드에 들어선 뒤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전쟁이 터진 것도 우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왜 비단길인가 ?
» 비단옷을 입은 그리스 신화의 무녀 메나드 그림. 비단의 제조방법이 그리스에 전달된 것은 6세기 이후이므로 이 무녀도의 비단옷은 중국산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중앙아시아를 관통하는 교역로를 통해 오고 간 수많은 물자 가운데 특히 비단의 이름을 따서 이 길의 이름을 붙인 사람은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프레디난트 파울 리히트호펜이다. 그는 독일어로 비단길인 ‘자이덴 슈트라센’(Seidenstrassen)이라는 조어를 만들었고, 이는 곧 세계에 널리 전파됐다. 실크로드는 이 독일어 표현에서 비롯된 영어식 표현이다.
이처럼 서양인에게 실크, 비단은 가장 중요한 교역품이자 최고의 명품이었다. 역사적으로도 비단은 기록에 남은 동서양 사이의 최초의 교역상품이기도 하다. 비단의 인기는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 폭발하기 시작했다. 당시 로마의 비단 열풍은 대표적인 철학자이자 저술가인 세네카의 <행복론>에서도 그대로 확인된다.
“비단옷은 신체를 보호할 수가 없으며, 부끄러움마저 가릴 수 없다. 그 옷을 한번이라도 입어본 여성이라면 마치 자신이 벌거벗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는다. 바로 이 천이, 침실에서조차 남편에게 자신의 몸을 보여주기를 꺼려 하는 부인네들이 공공연하게 자신의 몸매를 드러내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가며 상인을 부추겨 먼 미지의 나라에서 가져온 것이다.”
로마인들은 이 비단을 ‘세리카’(serica), 중국인을 ‘세르인’이라고 불렀다. 한자 ‘사’(絲)의 중국식 발음 ‘시’가 동양과 서양의 숱한 중계상을 거쳐 로마에 전해지면서 세리카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비단은 처음 서쪽으로 향하며 그리 비싼 편은 아니었다. 흉노 등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과 거래하며 중국인은 유목민의 좋은 말 한필에 비단 40필로 계산했다. 여기에 먼 거리를 수송하며 위험 경비와 관세가 계속 덧붙고 중간상인들의 폭리까지 겹쳐 가격이 폭등했다. 특히 로마에서의 폭발적인 비단 열풍 때문에 값은 더 뛰었다. 로마인들은 비단 수입에 따른 재정 적자를 우려하는 여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 풍조를 멈추지 않았다. 한편 실크로드의 서쪽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파르티아인들은 비단에 대한 중계무역의 권리를 독점하기 위해 비단에 관한 정보를 계속 비밀에 붙이고 그 대신 비단과 중국에 대해 신비화하는 설화 등을 만들어 서양에 유포하곤 했다. 바로 이런 흐름이 중국과 동양에 대한 서양의 신비주의적 인식을 형성하는 데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장보고] 신라가 낳은 최고의 벤처정신
청해진을 세계적인 국제 무역항으로 만든 장보고, 그 지칠줄 모르는 도전
“서기 830년대 신라 청해진(오늘날의 완도)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온갖 물건과 외국 사람들이 몰려들곤 했다. 당나라에서 수입된 비단, 두루마기, 금띠, 채색 비단, 흰 앵무새, 금은 세공 그릇, 공작 꼬리, 에메랄드, 물소뿔, 거북 껍질, 양모 제품, 페르시아 직물, 자단 목재, 당나라 카펫, 상아로 만든 아홀 등이 선착장에 무더기로 풀어졌다. 창고에 짐을 부리고 나면 이번에는 당나라로 향하는 물품들을 무더기로 배에 싣는다. ‘과하마’라는 작은 말, 약재인 우황, 인삼, 바다표범 가죽, 금, 은, 사냥매인 해동청, 개, 대화어아금·소화어아금·조하금·조하주·어아주·누응령 등의 고급 직물, 베, 머리털…. 다른 한편에선 일본으로 향하는 배에도 짐이 실린다. 칼, 금, 은, 세발짜리 솥, 비단, 명주, 베, 가죽, 말, 개, 노새, 말안장, 버선 등 신라 특산품과 함께 당나라에서 수입한 향료와 약품, 낙타 등이 배에 오른다.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에서 들여온 명주, 명주의 원료인 면 등이 부려진다.”
중국·일본의 정사에도 기록돼
» 장보고는 동아시아 바다의 중심으로서 완도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중심지로 육성해 성공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1200년 전, 신라의 청해진은 세계적인 국제 무역항으로서 크게 번성하고 있었다. 며칠마다 당나라와 일본의 배가 몰려와 무역품을 산더미처럼 부리는가 하면 신라의 특산품들이 무더기로 실려 일본과 당나라로 떠나갔다. 서쪽으로 나가는 선단은 당나라의 산둥반도 덩저우를 시작으로 창장강 지역의 양저우, 중국 강남의 항저우, 광저우까지 사실상의 정기 항로를 운항하고 있었다. 동쪽으로는 일본 후쿠오카, 하카다 등지로 진출해나갔다.
바다의 실크로드 동쪽 끝부분에 해당하는 당나라-신라-일본-발해로 이어지는 해상무역의 중심부인 청해진에 거점을 두고 동아시아 지중해의 번영을 주도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신라의 장보고 무역선단이었다.
장보고라는 이름은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의 정사에 각각 뚜렷하게 기록돼 있다. 그만큼 그의 업적은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한국의 경우 그는 <삼국사기>에 ‘장보고열전’으로 실려 있고, <삼국유사>에도 기록돼 있다. 신라의 왕권 세력은 그를 ‘반역자’로 몰아 죽였지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장보고가 의리와 용맹이 있다 하더라도 중국의 사서가 아니면 그 자취가 없어져 위대함이 알려지지 못할 뻔했다”는 표현으로 그를 높이 평가한다. 중국에서는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인 두목이 저서 <번천문집>(樊川文集)에서 그를 가장 먼저 평가하고 나섰다.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으로서 동방의 나라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두목의 저서를 바탕으로 중국의 정사 <신당전>도 그를 ‘동이전 신라조’에 자세히 기록해놓고 있다. 일본에서는 정사인 <일본후기> <속일본기> <속일본후기>에 모두 실려 있다. 일본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 셈이다. 특히 장보고 시대에 중국을 여행한 일본의 승려 옌닌(圓仁)은 기행문인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 전체의 약 3분의 1을 할애해 장보고와 청해진 네크워크에 대해 자세히 기록해놓았다.
장보고는 서기 800년이 되기 직전에 오늘날의 완도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활보 또는 궁복(弓福), 궁파(弓巴)로 불린 것으로 보아 활을 매우 잘 쏜 것 같다. 당시 신라는 엄격한 골품제도에 따라 운영되고 있었다. 결국 장보고는 신분 상승 등을 위해 당나라로 건너간다. 당시 당나라는 신분제도가 엄격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제도를 통해 관직에 인재를 임용하는 등 신라보다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그곳에서 무술과 상업을 배운 그는 30살 무렵 당나라 서주 무령군(武寧軍)의 소장(小將)으로 임관됐다. 일종의 군관이 된 것이다. 당시 무령군의 주된 임무는 당나라 조정에 반기를 든 평로치청의 번수 이사도가 이끄는 평로군을 소탕하는 일이었다. 이사도는 고구려 유민 출신 이정기가 서기 765년 평로치청절도사 후희일을 몰아내고 스스로 번수 자리에 오르며 일으킨 3대 55년에 걸친 반란의 마지막 지도자였다. 서기 819년 평로군 토벌 뒤 장보고는 무령군을 떠나 중국과 일본, 신라를 오가며 무역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군에 복무하거나 퇴역 뒤 무역을 하는 동안 당나라 곳곳에서 신라인을 노예로 인신매매하는 것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서기 828년 신라로 귀국한 그는 흥덕왕에게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건의한다.
중앙정부에 암살당하다
“지금 신라의 연해 지방은 이름만 신라 땅이지 해적들의 소굴과 다름없습니다. 해적들은 신라 백성들을 잡아다가 당나라에 노예로 팔아먹고 있습니다. 소신이 그곳에서 여러 번 불쌍한 동포를 보았고, 더러 구출하기도 했사오나 창해일속(滄海一粟·바닷물 속의 좁쌀 한톨)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적들을 소탕하지 않으면 장차 그 화를 면하기 어려울 것으로 아뢰나이다.”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신라 조정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1만명의 군졸’을 줘 청해진을 설치하도록 한다. 이 ‘1만명의 군졸’은 정식 군대 병력이 아니라 청해진 지역의 주민을 규합해 일종의 민군 조직을 그 정도 규모까지 거느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그는 스스로 ‘청해진 대사’라는 직명을 사용한다. 신라 관직에는 이런 명칭이 원래 없었다. 그리고 그는 관직에 나설 수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따라서 이 관직은 실제 있는 관직이 아니라 조정이 어쩔 수 없이 타협책으로 그 명칭의 사용을 묵인해준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는 청해진을 근거지로 삼아 1만명의 민군 조직을 활용해 해적과 노예무역을 소탕하는 작전에 돌입해 성공한다. 그의 이름은 신라는 물론 당나라와 일본에까지 퍼져나간다.
그 뒤 장보고는 이 민군 조직을 무역선단으로 재조직해 신라-당나라-일본 사이의 삼각무역을 육성한다. 이런 활동은 청해진을 중심으로 당나라 산둥반도 그리고 일본 하카다를 잇는 무역 네트워크로 발전하고, 이 네트워크의 뼈대 위에 다시 나라별로 내부 네트워크를 가동하는 방식으로 확대재생산된다. 동아시아 삼국무역의 중심세력으로서 장보고의 청해진 선단은 경제적 부와 군사력으로 중앙정부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구가하기에 이른다.
» 완도 장좌리 앞에 있는 작은 섬인 장군섬. 그곳에 장보고의 군영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장보고는 서기 838년 신라 왕실 내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청해진을 찾아온 왕족 김우징을 지원해 왕성 공격에 나서 승리를 거둔다. 김우징은 이 승리로 신라 제45대 신무왕이 된다. 그러나 장보고와 신무왕의 밀월 관계는 신무왕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 장보고의 딸를 태자비로 맞이하겠다는 거사 이전의 약속을 새로 즉위한 문성왕이 기존 중앙정치 세력의 반대와 견제로 이행하지 못하면서 급격히 긴장 상태로 돌입한다. 서라벌과 청해진 사이에 군사 충돌의 위험마저 예견되는 가운데 서라벌쪽은 암살자를 보내는 것으로 선수를 친다. 한때 장보고의 부하 장수로 중앙에 먼저 진출해 있던 염장을 위장 탈출시켜 장보고에게 접근토록 한 것이다. 장보고는 그를 신뢰하고 같이 술을 마시다 결국 암살된다. 그의 암살 뒤 청해진은 염장의 통제 아래 놓였으나 유능한 사람들이 탄압으로 죽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가버려 급격히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결국 문성왕 13년인 서기 851년 신라 조정은 청해진을 폐쇄하고 그곳 백성들을 벽골군(전라북도 김제)으로 집단 이주시켜버린다. 이로써 청해진은 국제 무역항으로서의 기능은 사실상 정지돼버린다.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조화
장보고의 삶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평생을 도전하는 벤처 정신으로: 그는 처음 신라라는 숨막히는 신분사회의 벽에 막히자 과감하게 개인의 창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넓은 대륙 당나라로 건너간다. 그곳에서 무령군의 소장으로서 작은 성공을 이룬 그는 노예무역으로 고통받는 동포를 구하는 민족 프로젝트를 스스로 기획하고 창업해낸다. 그 누구보다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는 삶을 산 것이다. 다시 해적 소탕에 성공한 뒤에는 1만명의 군사력과 총체적 역량을 모아 청해진 무역선단으로 전환한다. 나중에 왕족 김우징을 도와 왕성 공격에 나선 것도 그의 도전정신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 역사상 이처럼 매 상황마다 도전 정신으로 헤쳐나간 사람은 거의 볼 수 없지 않은가?
(2)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조화: 그는 이미 1200여년 전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의 조화를 성공시켰다. 민족주의자도 국제주의적 시야와 철학을 가져야 한다. 그는 그것을 가르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다. 거꾸로 국제주의도 민족주의와 만나야 제대로 발전할 수 있다는 교훈도 가능하다.
» 다음 세대를 위해 디자인한 장보고 캐릭터. 가운데 장보고인 '리틀 보고 짱'. 오른쪽이 버들. 왼쪽이 장보고의 동료 정년.
(3) 지경학(地經學)의 대가: 그는 청해진이 자신의 고향이라고 해서 그곳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 삼국무역의 중심지역이기 때문에 그곳을 거점으로 해적 소탕이라든가 삼국무역도 가장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곳이 신라 중앙권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비정치적 거점을 확보하는 것을 용인받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을 것이다. 그는 지리와 경제를 잘 읽은 탁월한 지도자이다.
(4) 외부확장형 인물: 그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새롭게 기획해서 선점하는 식으로 성공을 거두는 유형이다. 당나라로의 도항, 해적 소탕 기지로서의 청해진 기획, 해적 소탕 뒤 청해진의 무역선단으로의 재빠른 변신 등이 다 그렇다. 그런데 그가 신라의 전통적인 중앙권력으로 진출 방향을 돌린 것은 이런 자신의 장점을 망각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새로운 땅이 아니라 기성 진입자가 수백년 동안 득시글거리며 피를 빨아먹고 있는 곳으로 향한다? 그 기득권으로 방향을 돌리면서 장보고는 좌절한다. 그리고 단 한번의 좌절이 그의 죽음으로 직결된다.
해양왕국의 꿈은 왜 꺾였는가
(5) 패배하지 않아본 자의 방심: 그는 늘 성공 가도만을 달려왔다. 그 결과 평민 출신으로 ‘감의군사’ ‘진해장군’이라는 지위에까지 오른다. 신라 역사상 전례가 없는 신분 파괴적 계급 상승을 기록한 것이다. 늘 성공만을 구가한 결과 그는 쉽게 사람을 믿는 단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위장 잠입한 옛 부하 염장의 칼에 찔리고 만다. 믿는 사람에게 찔리는 사람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하지만 그의 죽음으로 청해진이 무너지고 해양왕국의 꿈이 꺾인 것이 슬프고 슬플 뿐이다. 한국 역사에서 바다는 그렇게 막혀버렸다.
대륙으로 퍼져나간 신라인들
» 일본 후쿠오카 시립박물관에 있는 견당선 모형. 당시 일본의 견당선은 신라 배를 모방했기 때문에 가장 장보고 선단의 배와 유사하지 않을까 추정되는 모형이다.
장보고가 살던 9세기 무렵 중국에는 신라인 거주지역이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가장 많이 신라인들이 몰려 살던 곳은 산둥반도를 비롯해 추저우(楚州), 롄수이(漣水), 양저우(揚州) 등 창장강 유역과 화이수이강 유역이다. 산둥반도는 한반도와 가장 가깝다는 지리적 특성과 그 배후에 많은 인구들이 모여 있어 시장성이 높은 지역이고, 양저우는 ‘바다의 실크로드’를 따라오는 이슬람 상인들의 최종 기착지였다. 전체적으로 신라인들은 당나라의 동해안을 따라 산둥에서 저장성 닝보에 이르기까지 퍼져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런 해안도시에서 큰 강과 운하를 따라 흘러들어가고 있다.
당시 당나라는 당에 체류하는 이민족의 지위를 법적으로 보호해주는 율령을 제정하는 등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정책을 취했다. 이 때문에 외국에서 많은 사절단과 상인, 유학생, 종교인들이 몰려들었다. 자장, 의상, 혜초, 지장이나 최치원 등이 당나라로 간 것도 다 이런 흐름에 따른 것이다. 신라인들은 곳곳에 ‘신라방’ ‘신라촌’으로 불리는 외국인 거주지역(‘번방’)을 형성했다. 자신들의 행정 업무를 위해 ‘구당신라소’라는 기관을 설치하고, 그 관리자로 신라인을 임명했다. 일본 승려 옌닌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에 ‘총관’ ‘압아’로 나오는 직책은 다 이것을 지칭한다.
신라인 사회는 자신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서 거주지역마다 불교 사찰을 두었다. 대표적인 것이 장보고가 산둥반도 문등현 적산촌에 세운 법화원이다. <…순례행기>에 따르면 서기 839년 11월16일부터 이듬해 정월 15일까지 법화원에서 법화경을 강의했는데, 이것이 끝날 무렵에는 신라인 남녀 신도 250명이 참석했다고 한다. 경전 강의나 예배하고 복을 비는 방법은 모두 신라 풍속대로 했다는 것이다.
당시 신라인들은 목탄운송업, 조선업, 선박수리업, 상업, 농업 등에 종사하며 청해진 무역선단 일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한다. 정보 취합과 전달, 유통 지원 등 다양한 형태의 활동이 <…순례행기>를 통해 확인된다. 신라인들은 대단히 진취적인 기상을 발휘하며 대륙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로마 가도] 현대 유럽을 탄생시킨 로드무비!
375개 주요 간선도로를 지닌 8만km 길이의 제국 대동맥, 2천년 동안 문명의 자양분을 공급하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17세기 프랑스의 시인 라퐁텐이 우화시에서 이렇게 표현한 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그의 조국 프랑스야말로 로마제국 시대에 로마 이외의 지역에서 가장 로마화한 지역이었다. 지금도 프랑스 곳곳에는 로마의 유적이 그대로 보존된 채 각국의 관광객을 끌어모으고 있지 않은가?
라퐁텐이 로마를 간다면…
라퐁펜이 로마 시대에 살았다면 그는 어떤 식으로 로마에 갔을까? 당시 파리라는 도시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일단 그 근처에 살았다고 치면, 그는 맨 먼저 자기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 아우구스토두눔(Augustodunum)으로 가야 한다. 갈리아로 불리던 프랑스를 정복한 사람은 아우구스투스의 양아버지 카이사르다. 카이사르가 죽은 뒤 아우구스투스는 기원전 27년 갈리아 일대를 순방했고, 그것을 기려 도시 이름을 아우구스토두눔으로 지은 것이다. 이 도시에서 라퐁텐은 남쪽으로 로마 가도를 타고 아렐라테(Arelate)까지 내려간다. 오늘날의 아를(Arles)인 아렐라테에서 라퐁텐은 ‘비아 이울리아 아우구스타’라는 이름의 도로를 타고 동쪽으로 향할 것이다. 앞에 ‘비아’(Via)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봐서 이 도로는 돌로 포장된 도로임에 틀림없다. 이 포장도로를 따라 알프스에 닿으면 이제부터는 이탈리아다. 이탈리아에서 다시 비아 아우렐리아를 따라가면 그대로 로마에 도착하는 것이다.
» 로마 전성시대의 로마 가도 네트워크. 이탈리아는 로마시대부터 불리던 이름이고, 아시아는 터키 지역을 일컫던 지명이다. 로마 시대의 지명이 오늘날 어떻게 반영됐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영문 지도를 그대로 실었다.
로마 가도는 로마인의 실용주의가 반영된 최고의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의 유명한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로 <지리지>를 쓴 스트라보는 이렇게 기록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이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은 3가지를 제공했다. 길, 수도, 하수도가 그것이다.”
실제로 로마인들은 새로운 길이 개통되는 것을 해외전쟁에서의 승리나 중요한 정치적 결정에 뒤지지 않는 공적으로 평가했다. 이 때문에 황제나 집정관들은 경쟁적으로 도로를 건설하려 했다. 이에 따라 새로운 도로와 도시에 이런 지도자들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유행처럼 제국을 휩쓸었다. 초기 귀족정 시대의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인 ‘아우렐리우스’ ‘발레리우스’ ‘에밀리우스’ ‘지우릴리우스’ 같은 이름이라든가, 강력한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 ‘클라우디우스’ ‘베스파시아’ ‘도미트리우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등의 이름이 지금껏 많이 남아 있는 것은 다 이런 영향 때문이다.
초기 가도는 동맹도시와의 연결을 위해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어 해안 염전지역과 로마를 연결하는 도로도 건설됐다. 로마와 동부 아드리아해의 염전도시를 연결하는 가도에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급여를 ‘Salary’라고 하는 것은 로마군에게 급여로 소금(Salt)을 지급한 데서 유래했다)라고 이름 붙인 것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가도는 로마인에게 매우 친근한 존재였다. 가도를 따라 고대신을 모시는 갖가지 시설물이 들어선 것이라든지, 묘지가 늘어선 것은 그런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가도는 정치적 선전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기원전 71년 노예 검투사 스팔타쿠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로마군은 노예 6천명을 로마제국의 1번 도로라 할 수 있는 ‘비아 아피아’(아피아 가도)를 따라 십자가에 매달아 처형하는 방식으로 선전하면서 심리적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비아 아피아는 로마에서 남동 지역의 주요 항구인 타렌툼(오늘날의 타란토)를 잇는 길이 261km의 도로로 기원전 312년 당시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에쿠스가 건설한 도로이다. 로마인들은 이 도로를 ‘모든 길의 황후’(레지나 비아룸)이라고 부를 정도로 중요시했다.
지역 하나하나가 모두 흥미로운 땅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표현은 반대로 로마에서 모든 곳으로 진출했다는 말이 된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뒤 국력을 급격히 밖으로 분출해나갔다. 유럽은 물론 아시아, 아프리카 3개 대륙으로 제국을 넓혀가는 과정에서 로마 가도는 제국의 대동맥으로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맨 처음 뻗어나간 곳은 동쪽이다. 로마제국 초기 발달 단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문명은 그리스이기 때문에 동쪽이 가장 중요한 진출 방향이 될 수밖에 없었다. 비아 아피아의 종착지인 타렌툼이 바로 그리스를 향한 거점 항구였다. 심지어 항구도 그리스인 식민자들이 건설했다. 비아 아피아는 다시 북쪽에 있는 아드리아해의 항구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까지 확장돼 연결됐다. 브룬디시움에서 배로 아드리아해를 건너면 항구도시 아폴로니아에서 바로 ‘비아 아에그나티아’가 이어진다. 기원전 130년 무렵 건설된 이 가도는 디라키움을 거쳐 마케도니아를 종단해 그리스 북부 항구 살로니카에 도착한다. 지난번 아테네 올림픽 당시 중계방송으로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이 된 살로니카에서 다시 필리피를 거쳐 트라키아 해안을 따라가면 마침내 비잔틴(오늘날의 이스탄불)에 이르게 된다. 이 지역 하나하나 다 흥미로운 땅이기도 하다. 필리피는 카이사르를 암살한 브루터스가 안토니우스-옥타비아누스(훗날의 아우구스투스) 연합군과 싸워 패배해 자살한 곳이고, 트라키아는 노예 검투사 스팔타쿠스의 고향이다.
동서 로마를 잇는 대동맥이 완성된 뒤 로마인들은 서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기원전 120년 무렵 알프스를 넘어 갈리아쪽으로 진출한 로마인들은 맨 처음 피레네 산맥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알프스-피레네 라인은 당시 ‘비아 이울리아 아우구스타’로 불렸다. 이 가도의 진출에 따라 오늘날의 아를, 님므, 안티브, 액생 프로방스, 상 레미 등이 생겨났다. 피레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스페인인 이베리아반도로 진출한 로마인은 남쪽으로 전진해나갔다. 그 결과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14년 죽기 전까지 이베리아반도에 건설한 로마 가도는 2천km에 이른다. 나중에 그 길이는 7천km까지 확대된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스페인의 주요 도시들이 건설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비아 도미티아’에 연결된 ‘비아 아우구스타’의 건설로 등장한 오늘날의 도시는 바르셀로나(로마명 바르키노), 타라고나(타라코), 발렌시아(발렌티아), 사군토(사군툼), 카르타헤나(카르타고 노바) 등이다. 다시 로마 가도는 내륙쪽으로 진출해 코르도바, 라코루냐 등에까지 이어진다.
» 서기 106년 로마인이 스페인에 건설한 알칸타라 다리. 오늘날에도 그 정교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갈리아쪽으로 진출한 로마 가도는 아를에서 론강을 따라 올라가 리옹을 거쳐 도버해협까지 이른다. 도버해협을 건넌 로마 가도는 다시 런던(로마명 론디니움·Londinium)을 거쳐 웨일스, 스코틀랜드 접경까지 나아가고 있다. 갈리아 중부에서 동쪽으로 나아가는 로마 가도는 라인강을 거쳐 다뉴브 지역까지 퍼져나가 중부유럽과 동부유럽을 거의 망라하는 규모로 확장돼 있다.
속도전과 개방, 그리고 시스템
로마 가도의 특징은 대략 이렇다.
(1) 현대유럽의 탄생자: 로마 가도의 확장은 사실상 유럽의 형성과 맥을 같이한다. 오늘날 유럽국가들이 로마제국 당시의 로마 속주의 이름을 국가명의 어원으로 삼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그렇다. 영국 지역을 가리키는 브리타니아, 스페인 지역을 가리키는 히스파니아, 마케도니아 지역을 가리키는 마케도니아 등이 모두 로마 당시의 지명을 그대로 쓰고 있다. 사실상 로마제국의 팽창은 그대로 유럽의 팽창이라고 할 수 있다.
(2) 서구 문명의 대동맥 역할: 단순히 영토적 의미에서의 통합이라면 로마제국 붕괴 뒤 유럽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국의 가도를 통해 문자와 종교, 로마법, 통화, 건축술, 과학, 예술, 의술, 패션, 사상, 발명품 등 최고급의 문명이 거의 그대로 전지역에 동일하게 전파될 수 있었다. 문명적 동질성이 유지된 것이다. 로마제국 이후로도 이 로마 가도를 따라 서구 문명의 갖가지 요소가 활발하게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경합하면서 서구 문명은 동질적 발전 단계를 밟아나갈 수 있었다.
(3) 속도전+개방+시스템: 제국의 팽창에 따라 로마인은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개방이냐 방어냐의 선택에서 그들은 개방을 선택했다. 통일된 특정 지역을 밖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쌓기보다 속도전 개념에 입각한 신속이동 배치전략을 선택한 것이다. 그들은 제국의 군대를 가장 빠른 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으로 변환 배치할 수 있도록 도로망을 네트워킹하고 이것을 시스템으로 완성해 가동했다. 그 결과 로마는 가장 짧은 시간 안에 가장 효율적인 정복을 이뤘을 뿐만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4) 평등사회에의 지향성: 로마는 비록 노예제 사회로 운영되고 있었지만, 도로에 대한 관점에서는 대단한 평등성을 지향하고 있었다. 특히 다른 고대제국들의 도로에 관한 통치철학이 보여주는 폐쇄성과 비효율을 아예 시작부터 극복하고 있다. 황제부터 노예까지 모든 로마 안에 있는 자들이 이 도로를 이용하도록 했다. 군인, 순례자, 병자, 사상가, 학자, 창녀, 사기꾼, 범죄자들이 이 도로를 통해 이동했다. 심지어 침략자들이 이 도로를 이용할지라도 그들은 자신 있게 밀어붙였다.
기록 분야에서의 놀라운 것들
(5) 정보-기록의 중요성 재확인: 로마 가도는 건축물로서도 이야기하는 바가 많지만, 그와 부속된 기록 분야에서도 대단히 놀라운 것들을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로마 가도는 로마의 도로원표(마일 제로·mile zero)에서 43개 속주 여러 도시의 거리를 정확히 기록해놓았을 뿐 아니라, 1마일마다 이런 거리표를 기록한 기둥(이 기둥이 ‘칼럼’이다. 이 기둥에 글을 써놓았다는 데서 오늘날의 신문 칼럼이 유래했다)을 세워놓았다. 이와 함께 도로를 건설한 사람의 이름을 비롯해 갖가지 주요한 내용을 기록해놓았다.
로마 가도는 주요 간선도로만 모두 375개, 총길이 8만km에 이르는 대걸작품이다. 일부 간선도로는 지금까지도 유용한 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로마 가도는 오늘날 유럽을 만드는 기초가 됐을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2천년 동안 문명의 자양분을 공급하는 대동맥이었던 것이다.
제국의 도로, 로마에서 인도까지
» 로마인들이 도로를 건설하는 모습의 상상도.
로마뿐만 아니라 유명한 고대 제국들은 모두 대형 도로를 건설했다. 로마인들에 훨씬 앞서 이집트의 파라오들과 중동 지역의 절대군주들도 그런 역사를 이룩해놓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문명권마다 도로에 대한 지배자들의 생각이나 철학이 매우 달랐다는 점이다. 파라오들은 도로를 절대자인 자신과 자신의 군대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제한했다. 파라오의 권위를 과시하는 제사나 행사, 군사행진 등을 위해 도로를 건설한 것이다. 이와 달리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도로를 상업용으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중국의 도로는 진시황의 대역사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진나라는 흙을 다져서 강도와 내성을 강화하는 공법인 판축 공법을 사용했다. 이 판축 공법으로 도로뿐만 아니라 만리장성도 만들었던 것이다. 천하를 하나의 시스템으로 묶는다는 이런 관념은 후대로 내려가면서 전란이 빈번해지면서 크게 후퇴한다. 도로망 역시 침략자에게 악용된다는 생각이 팽배해 결국 도로망을 정비하지 않는다는 통치관으로 후퇴한다. 우리나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대해 당시 위정자들이 침략에 악용될 수 있다고 징벌한 것이라든지 도로방치 정책을 쓴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고대 제국 가운데 도시 안의 도로망이 가장 발달했던 곳은 인도라고 할 수 있다. 서기 4세기 무렵 알렉산더대왕이 동방원정에 나서 인도까지 들어갔을 때 알렉산더 군대는 그곳에 건설돼 있는 도로를 보고 깜짝 놀란다. 당시 마케도니아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석재 도로망이 완비돼 있었던 것이다. 이 점과 관련해 오늘날 도로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way’의 어원을 보면 매우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way’는 중세 영어 ‘wey’에서 유래하는데, 라틴어 ‘veho’(‘I carry’의 뜻)의 파생어라고 한다. 이 ‘veho’는 또 그 어원이 인도 산스크리트어 ‘vah’(‘carry’ ‘go’ ‘move’의 뜻)라고 한다. 이 단어와 알렉산더 원정군이 목격한 인도 도로와의 직접적 연관성을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한편 현대의 차량용 도로를 나타내는 영어 단어 ‘road’는 고대 영어 단어 ‘rad’(‘to ride’라는 뜻)와 중세 영어 단어 ‘rode’(a mounted journey·탈 것을 이용하는 이동이나 여행)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몽고의 길] 동서양의 운명을 역전시키다
실크로드 한계 뛰어넘은 몽고의 길… 화약·나침판 등 전파로 중세 유럽에 강력한 영향
“대칸의 사자가 칸발릭(북경)을 출발하면 어느 길을 택하든지 40km마다 ‘쟘’이라고 부르는 역을 만난다. ‘쟘’은 역사(驛舍)라는 뜻이다. …어떤 역사에는 말 400마리가 사절용으로 언제나 준비돼 있다. …길도 제대로 없고 민가도 여관도 없는 외딴 시골을 지나는 경우에도 어디서나 역사가 세워져 있다. 단지 그 간격이 좀 길어져서 하루의 이동거리가 40~50km 아닌 56~72km가량일 뿐이다. …정말 이 제도만큼 대규모의 것은 일찍이 볼 수 없었다. …이런 역참들에는 사절을 위해 모두 30만 마리 이상의 말이 상비돼 있다.”
‘릴레이 연결형’에서 ‘풀코스 완주형’으로
13세기 말엽 베네치아인 마르코 폴로는 25년에 걸친 길고 긴 동방여행을 마치고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후세에 전했다. 아시아 동쪽 끝에서 동유럽까지, 역사상 가장 큰 땅을 지배한 몽고인들은 오늘날 21세기 사람들조차 경탄시킬 만한 놀라운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고 폴로의 <동방견문록>은 밝히고 있다. 이 시스템은 단지 사람을 이동시켰을 뿐 아니라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의 3대 구대륙에서 당시 생산되고 유통되던 다양한 물질적·정신적 자원을 활발하게 이동시키고 교류시켰다. 몽고제국은 철도망과 체신망을 결합한 것과 비슷한 이 놀라운 역체(驛遞) 시스템으로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문명교류를 성공시켰다. 역체 시스템은 바로 몽고제국의 대동맥이었다.
몽고제국 이전 시기에 인류는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을 연결해왔다. 그러나 실크로드는 몇 가지 점에서 제약을 받고 있었다. 첫째, 중국의 장안에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나 시리아 지역에 이르는 방식이 ‘풀코스 완주형’이 아니라 ‘릴레이 연결형’이었다. 한 특정 대상이 실크로드의 처음부터 끝까지 갈 수는 없었다. 한 팀은 일정 구간만을 가고, 다시 다른 팀이 다음 구간을 떠맡아 이동하는 식이었다. 둘째, 동서양 사이에 강력한 이슬람 세력이 등장해 여러 가지 사정에 따라 실크로드가 연결되거나 끊기는 등 불안정하게 운용됐다. 아랍과 페르시아가 사실상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잡고 간섭하거나 방해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런 상황에서 몽고제국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칭기즈칸의 서방원정을 시작으로 몽고제국은 팽창에 팽창을 거듭해 마침내 4대 칸국까지 건설하기에 이른다. 몽고인이 지배하는 제국은 유라시아 대부분 지역을 망라하는 규모로 확대된다. 몽고제국의 깃발 아래 유교문명, 불교문명, 힌두문명, 이슬람문명, 페르시아문명, 기독교문명, 슬라브문명 등 거의 모든 동서양 문명이 공존한 채 활발하게 교류하게 된다. 특히 오고타이 칸국(알타이산맥 일대), 차가타이 칸국(중가리아분지와 타림분지 그리고 아무다리야강 동쪽 지역), 킵차크 칸국(동유럽 지역), 일 칸국(페르시아와 터키 지역)의 4대 칸국이 각각 서로 다른 문명권에 기반해 건설됐다는 사실은 새로운 시스템이 만들어지리라는 신호와도 같았다. 몽고족 형제국가끼리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교류를 강화하면 할수록 각 문명간 교류는 저절로 이뤄지는 것은 아닌가?
그 결과 몽고제국의 판도 아래 획기적인 동서양 교류가 가능하게 된다. 몽고제국의 길은 실크로드의 한계를 이렇게 극복한다.
(1) 동서양 교통로의 비약적 확장: 과거 실크로드는 중국의 장안에서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 또는 로마까지 연결됐다. 이제 몽고 시대에 이르러 그 영역은 동쪽으로는 북경 그리고 거기서부터 다시 남쪽의 국제 항구도시 항주에까지 연장되고, 서쪽으로는 로마를 넘어 중부 유럽까지 넓어진다. 인류의 지평이 사실상 그만큼 확장됐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2) 안전의 증대: 더 중요한 것은 동서양 교류가 훨씬 안전하게 됐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실크로드의 도로망 전체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고 관리하는 단일한 제국이 없었다. 그 때문에 구간구간마다 과도한 관세를 붙이는 제국이나 영지가 많은가 하면, 도적의 공격으로부터도 안전하지 못했다. 이슬람권의 과도한 간섭과 방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몽고제국 아래 동서양은 안전한 교류를 할 수 있게 됐다.
지폐 통용, 유럽보다 400년이나 앞서
(3) 풀코스 완주형의 작동: 이제 동서양을 완주하는 사람은 드물지 않게 등장하게 된다. 마르코 폴로도 그 가운데 하나다. 아랍 문명권의 대표적 여행가 이븐 바투타를 비롯해 교황의 특사였던 카르피니 신부, 프랑스 국왕의 종교사절이었던 기욤 드 뤼브록 등의 동양여행이 가능해진 것도 모두 이 시기 들어서다.
» 몽고의 역참제도를 본격적으로 발전시킨 오코타이 칸.
(4) 동서양 상시 교통 시스템: 몽고의 역체 시스템은 동서양의 상시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 비록 정기편은 아니었지만, 역참마다 갖춰진 상비시설과 안정적인 운영인원 그리고 말 등에 힘입어 상시적인 이동이 가능하게 된 셈이다.
(5) 바닷길의 병행 발전: 몽고제국 아래 동서양을 잇는 바닷길도 함께 발전한다. 육로의 발전에 따라 지리상의 지식이 팽창한 결과다. 몽고제국은 송나라 때 이룩한 조선술과 항해술 그리고 해양운영 경험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 결과 중국권에선 처음으로 ‘동양’과 ‘서양’이라는 관념을 제시한 것도 이 몽고제국 시기다. 무엇보다 유라시아 전역에 퍼진 4대 칸국과 활발한 교역을 하기 위해서도 바닷길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요구됐다.
(6) 동서양 단일시장의 맹아 탄생: 이런 변화의 최종적인 귀결은 사실상 동서양 단일시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몽고제국은 한인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수구화되곤 했던 종래의 중국 왕조와 달리 인적·물적 교류에 대단히 개방적이고 적극적이었기에 대외교역에서도 눈부신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7) 단일화폐의 통용 시작: 제국의 팽창과 교통의 발달은 단일화폐의 필요성을 높이게 된다. 그 결과 교초(지원통행보초)라는 지폐와 차가타이 화폐가 제국에서 널리 통용되기에 이른다. 그 이전 남송 시대인 1170년 지폐가 처음 등장하기는 했어도 이처럼 광범위한 지역에서 광범위한 규모로 통용된 것은 몽고제국 때부터다. 유럽보다 400년이나 앞서 지폐를 통용시킨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실상 동서양 교통로의 획기적 발전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하다.
몽고제국의 뛰어난 역체 시스템은 초기 몽고 지배자 가운데 상대적으로 가장 인덕이 많았다고 평가받는 오고타이 칸에서 비롯됐다. 오코타이라면 야율초재의 진언을 받아들여 중국 개봉의 학살을 피한 칸이기도 하다. <원조비사>는 오고타이 칸의 말이라며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그동안 사신이 왕래할 때에 백성들의 지원을 받도록 했다. 그 결과 왕래하는 사신도 여행이 늦어지고 백성도 고통스럽기 일쑤였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결단하기로 한다. 여러 고장의 천호(千戶·행정-군사적 단위 집단)에서 참호(站戶·역참일을 보는 집)와 마부를 공출해 역참일을 보게 한다. 사신들은 아주 중요한 때를 빼고는 이 역참을 이용해서 오가도록 한다.”
‘급체포’라는 익스프레스 서비스
이런 역참은 크게 두 가지로 갈라졌다. 일반적인 종류의 역참으로는 육로를 이용하는 육참과 선박을 이용하는 수참이 있었다. 육참의 교통수단으로는 가장 널리 이용된 것이 말이지만, 낙타나 소·당나귀·양 등도 이용했다. 개를 이용하기도 했다. 몽고제국 전역에서 이런 역참이 얼마나 많이 운용됐는지는 정확히 알기는 쉽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중국 서쪽 끝인 금숙성 주천에서 대도인 북경까지 모두 99개 있었으며, 중국 경내에만 1400여개가 있었다고 한다.
» 몽고의 역참 이용 허가증이자 패스포트라 할 수 있는 해청부.
일반적인 역참과 별도로 익스프레스 서비스도 운용되고 있었다. 급체포(急遞鋪·몽고말로 찌데뾰)라는 것으로서 조정과 지방행정기관 사이에 긴급문서를 운송하는 특수역참이었다. 일종의 행정행낭 제도라 할 수 있는데, 송나라 때의 비슷한 제도인 급각체(急脚遞)를 본받아 발전시킨 것이다. 급체포는 10리나 15리, 20리마다 설치하고, 급체포 10개마다 우체국장이라 할 수 있는 우장(郵長) 1명과 포졸(鋪卒) 5명을 배치했다. 급체포를 이용할 경우 하루 밤낮에 400리를 주파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런 익스프레스 서비스를 이용하면 일반 역참의 경우 6일 이상 걸리는 거리를 3, 4일 만에 주파했다. 나아가 마르코 폴로를 뒤이어 원나라에 왔던 이탈리아 프란체스코파 선교사 오도리코 다 포르데노네는 저서 <동방기행>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급체포를 통해 황제는 30일 여정 거리에서 일어난 사태를 하룻만에 보고받았다.”
이런 경우에 해당하는 지방에서의 반란 발생 등 긴급사태 때에는 그야말로 분초를 다투는 릴레이처럼 운용됐다. 첫 포졸이 역참에서 가장 힘세고 괄괄하고, 안장이 붙어 있는 말 가운데 한 마리를 골라타고 전속력으로 달린다. 다음 역사에선 이 포졸의 허리춤에 달려 있는 방울이 울리는 소리를 멀리서부터 듣고 역시 최상의 컨디션에 있는 포졸과 말을 준비했다가 이어받아 달린다. 밤에는 횃불을 든 길잡이까지 앞세워 달려 하룻밤 또는 하룻낮에 240km에서 320km를 단숨에 달린다.
유럽 봉건영주들을 함락시키다
이 역체제도의 안전하고 합리적인 이용을 위해 ‘패’라고 하는 패스포트가 등장했다. 일종의 신분증이자 역참 이용 허가증이라고 할 수 있는 패는 크게 △ 금자원형패부 △ 은자패부 △ 해청부 △ 원패의 4가지가 있었다. 해청부는 금패·은패·철패의 3가지로 다시 나뉘었고, 원패는 금자와 은자로 구분됐다.
» 마르코 폴로 형제의 대상을 집어넣어 만든 카탈루니야의 세계지도.
몽고의 길은 서양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당시까지만 해도 동양문명이 서양문명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몽고의 길을 통해 이전까지 아랍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수받았던 제지술·인쇄술·나침판·화약 등 중국 4대 발명을 직접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다. 특히 화약의 대대적인 유럽 전파는 종래까지 난공불락처럼 여겨지던 중세 봉건영주들의 성을 격파해 유럽 지역에 통일국가들을 출현하게 한다. 나아가 나침판의 전래가 유럽 국가들의 항해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서구인에 의한 지리상의 발견 등을 이끌게 됐음도 빼놓을 수 없다. 몽고의 길은 어느 의미에서 동서양의 운명을 역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마르코폴로와 선교사들
몽고의 길은 서구인에게 중국의 존재와 위치를 정확하게 인식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로마인들은 중국을 비단이 나는 지역으로 알았다. 그래서 비단, ‘세리카’가 나는 나라라고 해서 ‘세르’라고 불렀다. 다른 한편으로 로마인들은 동쪽에 있는 큰 나라의 하나를 ‘티나이’라고 인식하고 있었다. ‘티나이’라는 이름은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로마인들은 이 세르와 티나이를 서로 다른 나라로 알고 있었고, 이런 흐름은 로마의 영향을 받아 유럽에서 거의 1천여년 동안 이어진다.
» 원나라 때의 수출품인 도자기. 몽고인의 팔 위에 사냥매를 올려놓고 있다.
13세기 말엽 마르코 폴로가 그런 중국을 향해 본격적인 여정에 나선다. 폴로는 페르시아어와 몽고어, 터키어, 아랍어에 능통한데다 총명하기까지 해 몽고 쿠빌라이 칸의 총애를 받는다. 그래서 17년 동안 쿠빌라이의 신하로 봉직하기도 한다. 그는 양주의 총독을 지낸 적도 있고, 캄보디아·티베트·인도에 파견되기도 했다. <동방견문록>은 마르코 폴로의 25년 여정의 결실로, 그의 구술을 받아 루스티첼로 드 피세가 기록한 것이다. 이 기술을 통해 폴로는 유럽인의 동양관을 획기적으로 바꿔놓는다. 그러나 마르코 폴로조차 중국을 화북과 화남으로 기술하는 등 세르와 티나이를 구분하는 로마의 전통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한계를 한발 더 극복시키고 발전한 것이 마르코 폴로와 비슷한 시기에 프랑스 국왕의 사절로 몽고제국을 방문한 프란체스코파 신부 기욤 드 뤼브록이다. 그는 <몽고제국 여행기>에서 중국의 실체를 좀더 분명하게 밝힌다. 최초로 ‘카타이’(티나이)와 세르가 같은 나라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거친 여러 민족들의 정보를 자세히 기록한다. 그의 저술 이후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중국행이 계속 이어진다.
이런 과정을 거쳐 유럽인의 동양에 대한 인식은 점차 정확해진다. 동시에 비단 등 온갖 진귀한 물품의 산지로서 중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 결국 동양에 대한 이런 관심과 이해관계가 지리상의 발견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고 할 수 있다.
[바다의 실크로드] “세계의 모든 깃발을 휘날려라”
기원전 3천년 전부터 개척된 바다의 실크로드… 종교전쟁 위기 직면한 세계 최대의 원유 수송로
“운송은 문명이다(Transportation is civilization).” -러디어드 키플링(1865~1936)
1980년 중동의 오만 정부는 고대 바다의 실크로드를 재현하는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그 옛날 아랍인들이 사용하던 범선과 똑같은 배를 제작해 걸프해의 주요 출항지였던 소하르(Suhar)를 출발해 중국의 광저우(광주)까지 항해하는 것이다. 165일 만에 완성된 27m 길이의 옛 범선은 ‘소하르’라고 명명됐다. 10세기 무렵 아랍권에서 가장 크고 번성했던 이 출항지를 기리기 위해서다. 소하르는 1981년 1월 페르시아만의 항구를 떠나 7월11일 광저우에 도착했다. 6개월 만에 9656km를 항해한 것이다. 놀랍게도 소하르는 옛 기록과 거의 일치한 항해를 한 것으로 확인됐다. 고대 아랍인들의 항해술과 바다에 대한 정보가 그대로 사실로 입증된 셈이다.
» 유럽의 갤리선단. 16세기 이후 유럽의 선박 제조술은 급속히 발달해 동서양의 역전이 일어난다.
연안을 따라 곳곳에 무역기지를 건설하다
동양과 서양을 이으려는 인류의 시도는 처음 육지를 통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실크로드다. 그러나 바다는 상대적으로 더 높은 위험성이 있음에도 (1) 물동량을 극대화할 수 있고 (2) 화물의 안정성을 높일 수 있다는 측면 등으로 인해 훨씬 더 매력적인 길로 부상한다. 문명의 길, 바다의 실크로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래고도 광범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미 기원전 3000년께에 오늘날의 이라크 지역에 해당하는 바빌로니아와 인도가 바다를 통해 직접 교류한 흔적이 있다고 밝힌다. 무려 5천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셈이다. 이집트에서 홍해를 따라 내려가 오늘날의 소말리아 지역인 푼트에 이르는 항로가 개척된 것도 기원전 2500~300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이집트인들은 육로보다 이 항로가 훨씬 유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곳곳에 무역기지와 보급기지를 건설한 것이다. 이집트의 배들은 나일강의 동쪽 지류를 따라 비터호를 경유, 홍해로 빠져나온 뒤 푼트까지 가서 금, 상아, 흑단, 가구용 목재, 향, 계피, 가죽 따위를 싣고 다시 나일강의 항구로 돌아왔다. 그 뒤 알렉산더의 후계자들이 이집트에 건설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때 이집트에서 활동하던 그리스 상인들이 홍해의 항구로부터 아라비아 해안을 거쳐 인도까지 항해하는 데 성공한다.
로마제국의 등장은 이런 고대 인도 항로의 비약적인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특히 기원전 1세기 중엽 로마 항해사 히팔루스가 아라비아해의 계절풍을 이용해 안정적이고 주기적으로 인도를 항해하는 방식을 개발해 동서 항로의 발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다. 상인들은 7월 이집트를 출발해 계절풍을 타고 9월 말 인도의 항구에 도착한다. 그리고 다시 11월 말 인도에서 귀로에 올라 2월이면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서기 160년 무렵까지는 이 동방 항로가 중국까지 이어진다. 당시 비단은 아직 주로 육로의 실크로드를 통해 로마로 들어갔지만 향수, 향료, 후추, 보석, 약, 진주, 상아, 면화, 무명, 가죽, 티크목재 등 인도산 물품들은 바닷길을 통해 이집트나 이라크 지역으로 간 뒤 다시 로마로 운송됐다.
» 명나라 정화 함대가 아프리카에서 기린을 싣고 돌아온 것을 그린 상상도. 여자가 승선하고 있는 식으로 묘사했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오는 시도와 마찬가지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진출하는 시도도 이어졌다. 이미 서기 1세기 무렵 중국의 내륙으로부터 바다의 실크로드를 거쳐 이집트와 중동 지역으로 나아가는 항로가 활성화됐다. 첫 번째 길은 중국의 낙양으로부터 사천성 성도로 나아간 뒤 양자강을 타고 운남으로 가서 다시 버마의 이라와디강을 거쳐 인도까지 진출하는 길이다. 인도나 실론에서 다시 아라비아해를 건너 홍해로 진입해 알렉산드리아로 간다. 두 번째 길은 중국의 광동 지역에서 베트남의 하노이를 거쳐 수마트라의 팔렘방을 경유해 말라카해협을 돌파한 뒤 인도로 가는 길이다. 인도에서는 다시 아라비아해를 건너 페르시아만으로 진입해 페르시아 지역으로 가거나 유프라테스강을 타고 올라가 바그다드까지 간다. 중국의 역사서 <후한서>에 나오는 “대진국왕(大秦國王·로마황제) 안돈(安敦·안토니우스)이 바친 상아”라는 것이 바로 이런 항로를 거쳐 중국까지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또 중국의 대로마 수출품이던 비단을 비롯해 가죽, 계피, 대황 등이 이 길을 통해 이동했다. 로마로부터는 유리, 모직물, 아마포, 진주, 홍해산 산호, 발트해의 호박, 상아, 꼬뿔소 뿔, 대모, 석면, 향유, 약품 등이 중국에 밀려들어왔다.
도자기·향신료, 전적으로 바닷길에 의존
바다의 실크로드는 일찍부터 도자기와 향신료의 교역로이기도 하다. 운송 과정에서 파손될 위험이 높고 중량도 무거운 도자기를 나르는 데 배만큼 좋은 것은 없었다. 그리고 인도와 동남아 일대에서 생산되는 향신료를 아랍과 유럽 지역으로 대대적으로 운송하기 위해 배와 항구가 발달하게 된다. 육상교통의 위험과 복잡성 때문에 열대와 아열대산 향신료는 거의 전적으로 바닷길에 의존해야 했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도자기의 길’이자 ‘향신료의 길’이었던 것이다.
» 1634년 유럽에서 제작된 항해용 세계지도의 아시아 부분. 한국과 일본도 국명과 함께 실려 있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또한 ‘종교의 길’ ‘문명의 길’이기도 하다. 이 길을 통해 불교의 많은 고승과 순례자들이 오가면서 인류 정신문명의 지평을 넓혔다. 5세기 초 중국 동진의 승려 법현은 육상의 실크로드로 인도에 들어갔다가 바다의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돌아와 <불국기>를 남겼다. 서기 671년에는 당나라의 승려 의정이 뱃길로 인도에 들어간 뒤 25년 만에 역시 뱃길로 돌아와 <남해기귀내전>(南海寄歸內傳)과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 등 여행기 2권을 남겼다. 이슬람교도 이 바닷길을 이용해 전파됐다. 처음 중국까지 진출한 아랍 상인들은 경유지인 동남아시아 일대에 포교를 하기 시작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시대인 13세기 말 오늘날 인도네시아 지역인 수마트라 북부가 이미 이슬람화됐다. 1세기 뒤 말레이반도 서안의 말라카왕국도 이슬람화됐고, 15세기 말부터 16세기 말에 이르는 100여년 동안 말레이반도의 파타니왕국과 케다왕국, 보르네오 북부의 브루나이왕국, 필리핀 남부의 수르왕국과 민다나오왕국, 자바 서부의 반텐왕국, 수마트라 북부의 아체왕국 등이 잇따라 이슬람화한다.
바다의 실크로드를 무대로 한 동양의 활약이 15세기 중엽 명나라 제독 정화의 7차례에 걸친 대항해로 절정을 이룬 뒤 포르투갈·스페인·네덜란드 등 유럽국가의 동양 진출이 이어진다. 동서양의 역전이 일어난 것이다.
1498년 바스코 다 가마의 포르투갈 함대가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돌아 인도의 캘리컷에 도착하고, 다시 1519년부터 1522년까지 마젤란의 스페인함대가 남아메리카, 동남아시아, 인도를 거쳐 유럽으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이어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아시아 진출이 본격화해 곳곳에 두 나라의 중계기지와 식민지가 생겨났다. 포르투갈은 희망봉과 페르시아만의 아시아 서부지역, 인도, 티모르, 중국, 일본 등지로 급속도로 세력을 팽창해나갔다. 스페인은 스페인대로 필리핀을 식민지로 삼고 중국 진출을 시도했다.
영국과 네덜란드, 아시아를 먹다
» 필리핀 해역의 침몰선에서 인양한 중국 도자기.
그러나 서양 세력의 아시아 진출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세력은 영국이라고 할 수 있다. 아시아의 신항로가 열린 지 80여년이 지난 1586년에도 100t 이상의 배는 스페인 104척, 포르투갈 92척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반해 1582년 잉글랜드의 각 항구에는 177척이 등록돼 있었다. 또 스페인은 왕가나 국민이나 모두 라틴아메리카의 금광이나 은광에서 쏟아져나오는, 거저 얻는 성격의 부에 집중적인 관심을 쏟았다. 하지만 잉글랜드쪽은 강력한 상인의식으로 무장한 채 장기적인 이익의 창출을 노렸다. 결국 잉글랜드는 강력한 해군력과 재정력을 바탕으로 다른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독보적인 지위를 확립하기에 이른다. 네덜란드 역시 (1) 해양국가로 발전하는 데 유리한 지리적 이점 (2) 현명한 상술 (3) 교묘한 금융기법 (4) 과도할 정도의 욕심에 바탕한 도전의식 등에 힘입어 아시아 교역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를 거점으로 아시아 진출에 박차를 가해 다른 나라를 압도한다. 제국주의 시대 바다의 실크로드는 유럽국가에는 부와 번영을 가져다주었지만, 아시아 국가에는 고통과 분노의 원천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 예수를 묘사한 중국 청대의 청화자기. 아래 알파벳 숫자도 그려져 있다.
20세기 들어 바다의 실크로드는 새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계적인 교역로로서 과거에 누렸던 영광을 회복하는 한편 세계적인 원유 수송로라는 새로운 전략적 중요성이 더해진 것이다.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한 동아시아의 막대한 에너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엄청난 양의 중동산 원유가 이동하는 에너지의 대동맥이 됐기 때문이다. 바다의 실크로드는 현재 세계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원유와 물동량이 통과하는 항로다. 특히 미국의 두 차례에 걸친 이라크 침략에 따라 전세계적으로 종교전쟁이 심화·확대되는 양상을 보여 바다의 실크로드는 역사상 처음으로 ‘대폭발의 위기 국면’에 들어서고 있다. 총 6천여km에 이르는 구간 가운데 가장 좁은 호르무즈해협과 말라카해협이 쉽사리 테러리즘의 위협 아래 놓일 수 있을 뿐 아니라 강력한 이슬람 정권의 등장 등 새로운 변수에 따라 해협 봉쇄라는 극단적인 상황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과연 바다의 실크로드는 이런 종교전쟁의 위기를 벗어나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라는 과거의 찬사를 누릴 수 있을까? 미국의 시인 월트 휘트먼(1816~1892)은 자신이 바라는 바다의 꿈을 이렇게 노래했다.
“오, 바다여, 세계 모든 나라의 깃발을 나부껴라!”
흑산열도에서 양자강까지
» 일본 아리타에서 만든 청화자기. 동인도회사를 나타내는 ‘VOC’가 새겨져 있다.
바다의 실크로드를 여행한 우리 민족 인물들의 첫 기록은 7세기 말~8세기 초 배를 이용해 천축(인도)을 방문한 당나라의 승려 의정의 <대당서역구법고승전>이다. 이 책에는 ‘아리야발마’(阿離耶跋摩), ‘현진’(玄進), ‘현태’(玄太), ‘현각’(玄恪), ‘혜륜’(慧輪), ‘현유’(玄遊), ‘혜업’(慧業) 등 신라와 고구려의 구법승 8명이 나온다. 이들은 모두 당시 불법의 진리를 찾아 목숨을 걸고 천축으로 가 수도하던 승려들이다. 이 가운데 이름을 알 수 없는 신라의 승려 두 사람은 이렇게 기록돼 있다. “이들은 중국의 광동에서 배편으로 교주(베트남의 하노이)를 거쳐 수마트라에 갔고, 다시 수마트라 동남방인 팔렘방에서 배편으로 그 서방인 파로사국에 이르러 불행히도 병사했다.” 이와 달리 고구려의 현유는 스승인 승철 선사를 따라 동남아시아 항로를 이용해 천축의 불교 성지를 두루 순례하고 실론에서 출가했다고 한다.
그 직후 신라의 승려 혜초가 바다의 실크로드로 천축에 들어가 불교 성지를 순례하고 육로로 파미르를 넘어 당나라로 돌아온다. 그 여행기가 <왕오천축국전>이다.
그 뒤 생활고 등으로 신라를 떠나온 사람들이 중국 양자강 유역의 국제항 양주 등지에 밀집해서 살면서 ‘신라방’이 형성된다. 양주의 경우 당나라 당시 바다의 실크로드의 동쪽 종착역으로서 외국 상인이 빈번하게 오가는 대항구인데다, 계절풍을 타면 우리나라의 흑산열도까지 사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아 신라인의 진출이 활발한 곳이었다. 한편 장보고의 청해무역선단의 활동 등으로 신라의 청해진, 울산 등도 바다의 실크로드에 본격적으로 편입돼 아랍과 페르시아 상인들이 빈번하게 오가는 국제도시로 변모한다. <처용가>의 주인공 처용이 아랍인이라는 주장은 이런 배경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 무렵 아랍과 페르시아 학자 17명이 쓴 20여권의 책에 신라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이런 국제적인 항구도시의 전통은 왕족까지 나서 해양활동을 장려한 고려시대까지 이어졌으나, 쇄국주의 기조를 유지한 조선조부터 그 맥이 끊긴다.
[북경·런던·파리] 상처 없는 영광이 어디 있으랴
북경과 런던, 파리는 어떻게 세계사의 운명과 영욕을 함께하며 도시로 성장했는가
구약성서에 따르면 여러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es)에서 하란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돼 있다. 갈대아 우르는 이라크 유프라테스강 중류에 있는 도시로 요즘은 텔 무카이야르라고 불리고, 하란은 터키 남부, 가나안은 이스라엘에 해당한다. 바로 이 우르가 수메르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들의 말에서 온 것으로 그 뜻은 문자 그대로 ‘도시’라고 한다. 영어로 도시의 명사형인 ‘urb’, 형용사형인 ‘urban’이 이 우르(Ur)에서 파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북경은 2300여년의 역사를 지닌 최대 인구국가의 수도다. (사진 epa)
가장 길고 역동적인 역사를 지닌 북경
인류학이나 도시학에서 제시하는 전통적인 도시 발달 과정은 대략 이렇다.
‘사냥과 군집’-‘농업’-‘마을 형성’-‘도시 발생’-‘국가 출현’.
우르의 예에서 보듯이 중동지역에서 고대 도시가 가장 먼저 형성된 이유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필연적인 요인의 상호결합에 따른 영향 때문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1) 대규모 관개와 치수를 위한 통치적 필요성 (2) 장거리 상업 및 교역의 활성화에 따른 새로운 경제적 기회 (3) 농업발전에 따라 잉여농산물이 안정적으로 그것도 충분하게 생겨나게 된 상황 (4) 왕정과 그 통치기구의 제도적인 발전 계속 (5) 대규모 종교행위 및 제례행위의 증대에 따라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공동체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된 능력 (6) 자연과 외부 침략자에 대한 방어 필요성의 증대 (7) 격심한 인구 증가나 급격한 인구 감소 등 인구와 관련된 압력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의 증대….
그 결과 이른바 인류 4대 문명 지역에 고대도시들이 집중적으로 발달하게 된다. 거꾸로 말하면 이런 도시들의 발달에 따라 인류의 문명도 화려하게 꽃피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여러 국가의 수도 가운데 일부는 멀리 이런 고대도시로까지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중국의 북경(北京·베이징)은 2300여년 전 전국시대 때 연나라의 수도에서 비롯됐고, 영국의 런던 역시 2천여년 전 로마군의 브리튼 진주 때 형성된 성곽을 그 모태로 하고 있다.
도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각 나라의 도시 가운데 가장 으뜸 되는 도시를 가리키는 수도는 그 나라의 운명과 영욕을 함께하면서 가장 격심한 변동과정을 거친다. 특정 왕조나 정치세력에게 버림받았다가 다시 오뚜기처럼 부활해 과거보다 훨씬 강대해지는가 하면, 영원히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수도는 거기 살고 있거나 살았던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세대들의 욕망과 탄식의 집합보다 훨씬 더 크고 격정적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주요 국가의 수도 가운데 가장 길고 역동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는 도시는 북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도시는 5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북경원인’(Sinanthropus pekinensis)의 존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류학적인 연원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그 뒤 전국시대 7웅의 하나였던 연나라가 수도를 삼음으로써 처음으로 수도의 자리에 오른 뒤 지금까지 8세기 정도 수도의 자리를 유지했다. 연나라 수도로서의 북경은 기원전 3세기 진나라의 공격으로 크게 파괴됐다.
진나라 이후 한나라에 복속된 북경은 연으로 불렸으나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쇠퇴한 도시로 축소됐다. 오히려 남부의 한족과 북부의 선우족(흉노족)이 서로 맞서는 최전선의 군사도시라는 운명에 휘말렸다. 북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 바로 한족과 북방 유목민족의 경계지역이었기 때문에 연(북경)은 경계선을 넘어 쳐들어오는 유목민족의 공격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그 결과 4세기 초부터 6세기 말까지 거의 4세기 동안 오늘날의 북경을 포함해 연 지역은 유목민족의 지배를 받았다.
» 런던은 로마 점령군의 작은 요새로부터 시작됐다. 이름조차 그들이 지어준 론디니움에서 따왔다. (사진 / GAMMA)
당나라가 이 지역을 유목민족으로부터 수복하고 유주라고 부르기 시작한 이후 한족은 물론 유목민족도 그 전략적 가치를 본격적으로 평가해 개발과 점령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 결과 10세기 초에는 거란족의 요나라가 이 지역을 3개에 이르던 자신들의 복수 수도 가운데 하나로 삼고 남경(南京)이라고 불렀다. 당시 요나라는 북경에 높이 10m의 성벽을 약 23km 길이로 쌓았다. 모두 8개의 문을 설치하고 안에는 화려한 황궁을 세웠다.
로마군단, 런던을 버리다
12세기 중엽에는 다시 만주 북부에서 일어난 여진족의 금나라가 요나라로부터 북경을 빼앗았다. 금은 이곳을 수도로 삼고 중도(中都)라고 불렀다. 금은 더 화려한 황궁들을 많이 지었다.
13세기 초 징기즈칸의 몽고족이 세력을 확장해 이곳까지 진출한 뒤 지속적으로 공격해 결국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황궁이 방화돼 약 한달 동안 불타기도 했다. 몽고가 전 중국을 통일하자 쿠빌라이 칸(원 세조)은 몽고의 카라코룸에 있던 몽고의 고도 대신 이 북경을 새 수도로 삼는다고 결정했다. 1272년 북경은 ‘대도’(大都)라고 명명되고 역사상 처음으로 전 중국의 수도로 군림한다. 성은 과거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증축되고, 대운하와 연결된 운하를 파서 강남의 물자가 직접 황궁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이 시기 마르코 폴로가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 뒤 북경은 한족의 명나라 초기 남경으로부터 수도를 옮겨온 뒤 북경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수도의 자리에 오른다. 그 결과 한족의 명나라와 그 뒤 여진족의 청나라의 통치시기에도 수도로서 계속 지위를 유지한다. 청나라 때 많은 궁들이 성곽 바깥에 추가로 조성됐다. 그러나 1860년 제2차 아편전쟁 때 영국과 프랑스의 군대에 의해 여름황궁인 원명원이 약탈되고 방화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제국주의의 침략피해를 직접 입은 것이다.
중국 북경의 원명원을 파괴한 영국의 수도 런던은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을까?
런던은 로마군의 존재가 없었더라면 역사에 그 이름을 등록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서기 43년 로마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로마군이 영국 지역인 브리튼섬의 남동부를 점령하고 템스강가의 낮은 구릉 2개가 있는 지역에 요새를 세우고 ‘론디니움’(Londinium)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로마 역사가 타키투스는 ‘많은 장사꾼들이 몰려드는 한 유명한 지역’으로서 론디니움을 역사서에 기록하기도 했다. 서기 60년 부디카라 불리는 이케니족 여왕의 공격으로 론디니움이 불에 타고 약탈되자 로마군은 그 뒤 150m 길이의 바실리카(고대 로마에서 재판정이나 예배장소로 쓰던 회당)까지 갖춘 도시로 더 크고 화려하게 재건했다. 이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로마는 크리플게이트 요새를 건설했다. 이런 번영은 2세기 중반까지 계속된다. 서기 150년 로마군은 수공업 공방들과 주거지를 철거했으며, 200년에는 방어 목적을 위해 육지쪽을 향해 방벽까지 세운다. 도시 발전을 막아버린 셈이다.
» 파리 역시 로마군에게 점령됐다. 그러나 로마 이전 독자적인 문화를 지닌 골족이 살고 있었다. (사진 / 한겨레)
중세시기 이 방벽은 재건축되고 확장된다. 로마군이 원래 유지한 6개의 통문 이외에도 더 많은 통문이 생겨난다. 3세기 내내 템스강을 따라 목재 방파제가 설치되고 공공건물이 재건된다. 이와 함께 강을 따라 방벽도 세워진다. 그러나 4세기가 되도록 인구는 서기 125년 당시보다 적은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5세기 초 로마군 군단(로마명 레지온: 300~700명의 기병을 포함해 3천~6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됨)들이 철수하면서 런던은 버려진다.
'파리시’에서 ‘파리’로
로마군 철수 뒤 2세기 동안 버려졌다가 다시 어떻게 해서 색슨족이 이 지역을 장악했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어쨌든 서기 597년 무렵에 이르면 런던은 다시 중요성을 인정받게 되고, 그 결과 교황 그레고리 1세가 성 아구스틴을 로마로부터 잉글랜드로 파견한다. 성 바오로 성당이 세워지는 등 종교가 본격적으로 발흥하고, 7세기 후반에 이르면 런던은 다시 주요한 교역 중심지로 부활하게 된다.
런던은 노르만족의 침략(1066년)을 계기로 미래의 금융, 군사, 정치 중심지로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다. 정복자 윌리엄 1세는 런던 시민에게 종래 에드워드 국왕 때와 똑같은 법을 적용받을 것이며, 아무도 부당하게 대우받지 않을 것이라는 협정을 맺는다. 노르만 출신 국왕들은 웨스트민스터를 자신들의 거주지이자 통치장소로 삼았다. 1085년에 이르면 런던은 1만~1만5천명의 인구로 알프스 이북의 유럽 도시 가운데 가장 큰 도시로 성장한다. 1087년 대화재로 런던의 목재주택과 성 바오로 성당이 불타자 석재와 타일을 이용한 새 건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노천방식이지만 하수천도 도입되기 시작했다. 1300년대까지 템스강 북안에 방파제가 계속 건설돼 항구시설이 크게 확장됐다. 또한 이 시기에 이르러 총 65~100km에 이르는 수도망으로 총 8만명의 거주민이 혜택을 받는 식으로 발전한다. 그러나 도시의 다이내미즘은 1348년 페스트의 창궐로 런던 주민 1만명이 죽는 사태로 크게 위축된다. 16세기에 들어서 런던은 다시 번영을 누리기 시작해 수공업자 길드가 41개에 이르게 된다.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세계 각 지역에 대한 교역 독점권을 누리는 모스크바회사, 터키회사, 동인도회사 등이 등장한다. 인구도 폭발적으로 늘어나 1550년 10만에 이르더니 17세기 초에는 22만명 수준에 이르고 있다. 본격적인 제국주의의 중심도시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과 제국주의 세력으로서 경쟁을 벌였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는 런던보다 늦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원래 오늘날의 파리 센강 안의 시테섬에 골족의 한 분파인 ‘파리시’(Parisii)라는 부족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부족 이름 ‘파리시’에서 도시 이름 ‘파리’(Paris)도 온 것이다. 처음 이 부족의 존재는 ‘루테리아’(Luteria)라는 이름으로 기록됐다. 이 이름은 라틴어로 ‘물 한 가운데 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 지역을 정복한 로마의 줄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전기>(기원전 52년)에 이렇게 기록했다. “이들은 우리에게 항복하기보다 거주지를 태워버렸다.” 로마군이 왔을 때 그들은 잘 조직돼 있었으며, 독자적인 동전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파리, 페스트와 백년전쟁을 뚫고…
» 런던과 파리를 침략했던 로마의 마지막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모습을 그린 회화. 이 도시 역시 1453년 터키군의 공격으로 함락됐다.
로마 점령시기 파리는 거기 살던 부족의 라틴어 이름을 따서 ‘루테리아’라고 불린 채 로마인의 도시로 발전해 점차 센강의 왼쪽 강변을 따라 확대돼갔다. 그 결과 여러 직선도로를 비롯해 광장, 여러 개의 목욕탕, 원형투기장 등 공공건물은 모두 로마식으로 건설됐다.
2세기 후반부터 야만족의 침입이 이어져 3세기 중반에 이르면 센강 왼쪽 강변의 도시는 파괴되고 거주자들은 섬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그 섬을 둘러싸고 두꺼운 석벽을 쌓는다. 4세기 초부터 이 지역이 ‘파리’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5세기 말, 클로비스의 인솔을 받는 프랑크족이 당시 골족이 점령하고 있던 파리를 빼앗는다. 그리고 자신들의 수도로 삼는다. 파리는 서기 584년까지 수도로 있다가 그 다음 왕조인 메로빙 왕조의 수도 이전에 따라 그 지위를 잃는다. 그 뒤 서기 987년 파리공이던 휴 카페가 왕좌에 오르고 파리는 다시 수도의 자리를 차지한다. 카페 왕조의 국왕들이 잇따라 칙령을 발표하고 점차 파리가 정치적 안정성을 되찾아가자 인구도 크게 늘어난다. 11세기 첫 길드가 생겨나는 것을 시작으로 길드가 크게 늘어난다.
» 수메르 고대 도시 우르의 군대 깃발. 구약성서의 짧은 묘사와 달리 대단히 발달한 문화였음을 알 수 있다.
서기 1190년 필리프 2세는 1년 동안 십자군 원정을 떠나며 파리의 통치권을 파격적으로 길드에 위임한다. 1220년 국왕은 자신이 누리던 엄청난 특권인 수입관세권을 도시민들에게 양도하기까지 한다. 이런 중상주의적 정책에 힘입어 상인들은 도량형 관리의 책임까지 양도받는다. 파리에는 소르본 등 많은 대학도 생겨난다.
14세기 파리는 페스트와 백년전쟁 때문에 발전이 크게 위축됐다. 반란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파리는 1415년 백년전쟁의 재발로 영국군과 연합한 브루군드군에게 점령되기도 했다. 1444년 영국과 정전협정을 맺은 뒤에야 파리는 다시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모스크바·워싱턴] 침략자의 발 아래 단단해지다
조국의 생존을 위해 희생물이 되기도 했지만 끝내 부활한 모스크바와 워싱턴
로키산맥의 인디언들은 독특한 늑대사냥법을 가지고 있었다. 왼팔에 두꺼운 보호대를 댄 뒤 늑대에게 물리도록 하고 오른손에 있는 무기로 늑대를 공격해 죽이는 사냥법이다. 최종 승리를 위해 희생물로서 적에게 내어주는 존재인 왼팔…. 역사상 이 왼팔과 가장 닮은 도시가 있다. 바로 모스크바다. 13세기 몽골족을 시작으로 타타르족, 폴란드군, 프랑스군, 독일군의 침략을 겪은 도시, 이런 전쟁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내어주는 희생물이 되기도 했지만 끝내 다시 부활했던 도시가 여기 있다.
수시로 모스크바를 짓밟은 몽골
모스크바는 서기 1147년이 되어서야 역사서에 기록되기 시작했다. 수즈달공(prince of Suzdal)인 유리 블라디미르비치 돌고루키가 동맹세력인 노브고로드공 세베르스키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저 유명한 ‘대만찬’을 연 것이다. 그 뒤 1156년 돌고루키는 모스크바강과 그 지류 사이의 삼각형 지역에 토벽과 해자로 방어망을 구축한 요새 크렘린을 세웠다. 블라디미르 수즈달공국의 주요 도시가 된 모스크바는 상업지역이 조성되는 등 발달한다. 그 뒤 1236~40년 러시아 전역을 휩쓴 몽골군의 침략을 받고 함락됐다. 공국은 몽골의 속국이 되고 몽골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했다. 공국은 1293년 다시 몽골군의 침략을 받고 약탈됐다. 그로부터 3년 뒤 크렘린은 동쪽에 새로운 방벽을 세우고 자작나무 방책도 완성했다. 새로운 방어망을 갖춘 도시로 재탄생한 것이다. 이때부터 모스크바는 점차 중요성을 인정받고 상업 및 수공업 중심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오카강과 볼가강 사이에 펼쳐진 모스크바 동쪽 지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땅이 매우 비옥했다. 이 때문에 모스크바가 농업 중심 도시로 발달하는 것을 촉진했다. 1326년 러시아정교회가 블라디미르로부터 모스크바로 옮겨오면서 이 도시는 러시아의 정신적 중심지로서의 위치도 획득하게 된다. (1453년 동로마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군에 함락된 이후로 모스크바는 스스로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로마가 제1의 로마라면,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제2의 로마, 그 다음 동방교회의 중심지로 부상한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는 논리다.)
모스크바는 초기 몽골군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는 러시아 공국들의 중심세력으로서 세력을 확장해갔다. 그 결과 몽골군의 공격을 집중적으로 받아 또다시 함락되는 등 러시아 민족의 수난사에서 늘 맨 앞머리에 나오는 도시가 된다. 1382년 몽골군 침략 때에는 도시가 함락됐지만, 1408년에는 예데게이 칸의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몽골을 물리친 도시’로서의 모스크바는 전략적 중요성과 지도력을 인정받아 주변 공국들을 흡수 합병하는 데 박차를 가하게 된다. 드디어 1478년 라이벌이던 노브고로드공국을 합병해 러시아 민족 통일국가의 수도로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도시는 방어망을 확장하고 새로운 궁전과 상업지구, 수공업지구, 거주지 등을 갖추는 등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 크렘린 전경. 모스크바는 외적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희생되는 운명을 여러 번 겪었다. (사진 / Rex Features)
나폴레옹과 히틀러가 지나간 자리
하지만 모스크바는 그 뒤로도 외적의 침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571년 크림반도를 근거지로 하는 타타르족의 침입을 받았다. 그 결과 크렘린을 제외한 도시 전 지역이 점령돼 20만 인구 가운데 3만명만 간신히 살아남았다. 도시는 다시 새로운 성곽을 쌓는 등 방어망을 강화했다. 1584년부터 1592년 사이에는 ‘벨리 고로드’(하얀 도시라는 뜻)라는 부도심 지역에 8km 길이의 돌 성벽을 더 쌓았으며, 도시 외곽에는 50개의 망루를 갖춘 순환형의 대규모 흙성벽을 또다시 세웠다.
그러나 17세기 초 드미트리공 가문이 두 차례에 걸쳐 폴란드군을 끌어들이는 바람에 모스크바는 다시 외적의 지배 아래에 놓이기도 했다. 폴란드군을 물리친 뒤 1613년 로마노프 왕조가 들어섰다. 그러나 도시 빈민들의 생활은 어렵기 짝이 없어 자주 반란으로 이어지곤 했다. 1648년 소금세 증액 문제로 반란이 일어나고, 1662년에는 ‘구리 반란’이 일어났다. 1667년 러시아 남부에서 스텐카 라진의 반란이 일어나자 모스크바에서도 여기에 호응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결국 스텐카 라진의 반란은 진압되고 라진은 모스크바에서 처형된다.
1701년 전제적인 표트르 1세가 핀란드만에 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삼았다. 모스크바는 일시적으로 쇠퇴하기도 했으나 곧 산업과 문화의 중심지로서 기능을 되찾았다. 그 결과 18세기 말엽 모스크바에서는 300개의 공장이 가동하게 된다. 1811년 도시 인구는 27만5천여명에 이른다.
1812년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러시아를 침략하자 모스크바는 다시 러시아 민족의 ‘희생양’으로 승화한다. 전략적 승리를 위해 전술적으로 적에게 내어주는 운명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러시아의 초토 작전에 따라 모스크바에서 러시아군은 철수하고 시민들도 완전히 소개된다. 그리고 도시에는 화재가 일어나 도시 전체 건물의 3분의 2가 붙에 타버린다. 겨울이 되자 프랑스군은 식량과 보급품, 난방이 지원되지 않아 후퇴하기에 이르고 결국 궤멸적 패배를 맛보게 된다.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혁명 이후 모스크바는 다시 소련의 수도가 된다. 그 뒤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모스크바는 다시 한번 적군의 공세 아래에 놓인다. 히틀러의 독일군이 모스크바까지 육박해오자 소련 정부는 공장과 정부기관을 전부 동부 지역으로 소개하고, 모스크바에 계엄령을 선포한 채 항전한다. 제공권을 장악한 독일 공군이 계속 공습을 퍼붓는 가운데 시민들은 도시에 탱크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적으로 도시를 지킨다. 결국 독일군은 점령에 실패하고 퇴각한다.
어수선한 연방의 수도를 정하다
냉전을 통해 소련을 패퇴시킨 미국의 수도 워싱턴은 모스크바에 비해 역사가 매우 짧다. 짧은 만큼 곡절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지만 여기도 만만치 않다. 워싱턴의 역사도 나름대로 꽤 흥미롭다.
1776년 7월4일 미국의 독립선언 당시 워싱턴은 아직 미국의 수도가 아니었다. 미국의 독립은 13개 주 대표가 필라델피아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공포하는 형태로 이뤄졌다. 게다가 초기 국가 형태는 영국의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아메리카 대륙의 13개 주의 느슨한 형태의 연방제(Confederation)로 시작됐던 것이다. 이에 따라 수도의 개념조차도 1783년 6월 필라델피아의 옛 시청에서 열린 대륙회의에서 본격적으로 논의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재정은 빈약했고, 새 국가는 대외 채권을 발행할 여력이 없었다. 영국과의 독립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 정부는 독립전쟁에 참전한 군인들에게 엄청난 급여 채무를 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1783년 6월20일 급여를 받지 못한 한 떼의 군인들이 의회에 탄원서를 낸다는 명목으로 필라델피아에 진입한다. 당시 유혈 사태로까지 발전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 의원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연방의 수도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된다. 이런 위협적인 분위기가 없는 상태에서 새 국가를 안정적으로 통치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한 것이다. 그 뒤 6년여 동안 의회는 여러 후보 지역을 놓고 토론을 거듭했다. 남부 출신 의원과 북부 출신 의원들은 번번히 이견을 드러내곤 했다. 이런 이견 속에서도 대체적으로 포토맥강 어름에 수도를 둔다는 정치적인 타협이 이뤄졌다. 결국 정확한 수도의 위치를 결정하는 일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된 조지 워싱턴에게 맡겨졌다. 낙점된 행정구역(District)은 북으로는 조지 타운을, 남으로는 알렉산드리아를 면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 미국 국회의사당. 워싱턴은 초기에 너무 멀고 외진 곳에 있다는 이유로 천도 논쟁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사진 / Rex Features)
조지 워싱턴은 당시 새 수도 부지의 상업적 잠재성을 고려했다. 워싱턴이 끼고 있는 포토맥강은 주요한 담배시장이 개설돼 있는 조지타운까지 배로 갈 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다시 쿰버랜드 갭을 가로지르는 운하를 건설하면 당시 막 이주자들이 진출해 들어가기 시작한 광대한 ‘서부 지역’이 연결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수도의 부지를 결정하기 전에 워싱턴은 개인적으로 운하건설회사까지 세웠으나 곧 이 회사에 걸린 자신의 지분을 처분했다.
워싱턴은 이와 함께 민주당의 이상주의자이자 우수한 엔지니어인 피에르 샤를르 렁펑에게 수도건설 계획을 수립하도록 의뢰했다. 그는 이 계획의 중대성을 금세 알아차리고 더 거대한 계획으로 발전시켰다.
1793년 9월 워싱턴이 수도의 표석을 처음으로 설치하는 것을 시작으로 백악관 등의 공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백악관은 아일랜드 출신인 제임스 호밴이 설계했다. 이어 주변에 각종 정부 청사가 잇따라 들어섰다. 1800년 10월 정부문서보관소를 비롯해 정부기관과 공무원들이 필라델피아에서 워싱턴으로 이주한다. 존 애덤스 대통령도 백악관에 최초로 입주하고, 의회도 새로 완공된 의사당 상원 건물에서 처음으로 회의를 개최한다.
영국군 공격으로 더욱 단단해지다
» 모스크바 성바실리 성당. 모스크바는 러시아정교회의 중심지가 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사진 / GAMMA)
그러나 초기 워싱턴은 그야말로 황무지 안에 도시를 의도적으로 건설한 형태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반시설의 부족과 교통 불편 등이 뒤따라야 했다. 그 결과 여러 의원들과 시민들은 “끔찍하게 먼 거리에 있는 도시” “서부의 거대한 중앙시장” “끔찍한 오두막으로 채워진 수도” “황무지 그 자체인 도시” 등의 표현을 붙여주었다. 1808년 토머스 제퍼슨이 대통령 임기를 마칠 무렵까지도 워싱턴의 인구는 5천여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의회와 언론에서는 틈만 나면 수도가 너무 멀고 가기 어렵다는 이유로 천도할 것을 주장하곤 했다. 이런 소란 속에서 1814년에는 미영전쟁의 여파로 조지 콕번이 이끄는 일단의 영국군이 워싱턴에 진입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소동 때문에 워싱턴은 한때 버려진다. 콕번은 미국의 의회와 백악관 그리고 해군병기창을 태워버리라고 명령한다. 이 사건으로 미국인들은 워싱턴이 자기들의 수도라는 사실을 훨씬 강렬하게 자각하게 된다. 그 결과 천도 논의는 모두 사라지고 워싱턴은 명실상부한 연방의 수도로 자리잡게 된다. 이런 영향으로 남북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워싱턴은 끝까지 사수됐다. 남부의 버지니아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어 남군이 여러 방면에서 워싱턴을 공격하곤 했다. 북군의 사기를 꺾어버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북군은 그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사수한다는 결의로 맞서 이를 관철해냈다. 남북전쟁 뒤 워싱턴은 합중국의 확고한 수도로서 그 지위를 탄탄하게 구축하게 된다. 워싱턴은 살아남아 승리한 것이다.
화려한 계획도시, 알렉산드리아
알렉산드리아에 남아 있는 '폼페이우스 기둥'과 스핑크스. (사진 / 한겨레 권삼윤 기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고대국가의 대표적인 계획도시라고 할 수 있다. 기원전 332년 마케도니아아의 알렉산더대왕이 이집트를 정복하고 건설하기 시작한 이 도시는, 그 뒤 서기 642년 이슬람 세력에 함락될 때까지 거의 1천년 동안 번영을 구가했다.
처음 알렉산더대왕은 이집트를 지중해쪽으로 개방시키기 위한 전략으로 파로스섬이 있는 나일강 하구를 주목했다. 그는 파로스섬을 바라보는 바위 지대에 항구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맨 처음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에게 파로스섬에만 도시를 건설하라고 충고했지만, 알렉산더의 야심은 훨씬 컸다. 그는 동에서 서로 거의 70km에 이르는 대도시를 세우고 거기에 제국의 수도를 두려 했다. 이런 의지에 따라 기초설계까지 직접 맡았다. 파로스섬과 이집트 본토를 잇는 거대한 도로 다리를 만들어 항구를 섬과 대륙 양쪽에 모두 두려 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도시를 완성하기 훨씬 전에 동방으로 원정을 떠난다.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그의 의지는 동방원정 당시 여러 점령지에 알렉산드리아라는 이름의 도시를 세운 데서도 읽을 수 있다.
알렉산더의 죽음 뒤 마케도니아의 장관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의 권력을 잡고 알렉산드리아를 수도로 삼는다. 그리고 알렉산더가 구상했던 개념에 따라 도시를 본격적으로 건설하기 시작한다. 도서관과 박물관, 체육관이 건설되고,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파로스의 등대도 건설된다. 서기 4세기에는 1561개의 목욕탕이 이용되고, 400개에 이르는 극장에서 그리스의 연극이 상연되기에 이른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기간시설과 왕조의 학문 장려 정책에 따라 고대의 뛰어난 학자들이 대거 알렉산드리아로 몰려들어 학문과 문명의 꽃을 활짝 피웠다는 점이다. 시와 문학, 연극 등이 발달하고 수학·철학·지리학·의학 등도 발전을 거듭한다. 기하학원론이 완성되고 지구의 원주율을 근사치까지 얻어내는 데 성공한 것도 이곳이다. 기체학과 증기의 제어장치에 대한 연구도 진행됐다.
그 결과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문화와 이집트 문화를 로마에 전달해주는 가교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상으로도 기독교 교리 논쟁의 중심 지역으로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된다.
[중국·일본·독일] ‘계획 천도’가 성공한다
준비 안 된 최악의 케이스는 동탁의 장안 천도… 도쿠가와 가문의 도쿄 천도는 백년대계 결단
서기 190년 1월 중국 한나라 마지막 황제 헌제를 옹립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의 공격을 받는다. 원소, 조조 등 전통적인 중원 사인세력이 그의 황제 폐위와 학정에 대해 반대의 기치를 내걸고 수도 낙양 근교까지 진격해온 것이다. 오늘날의 감숙성인 농서 출신의 동탁은 자신의 근거지와 훨씬 가까운 장안으로 천도할 것을 결심한다. 당시의 수도 낙양은 후한 시기의 수도로서 중원 사인세력의 근거지였다. 이에 반해 서쪽의 장안은 전한 시기의 수도로서 좀더 개방적이고 새외민족의 영향권과도 멀지 않았다. 서량태수 출신의 동탁은 강족 등 이른바 새외민족을 자신의 군단에 대거 흡수해 세력을 키워왔었다.
» 동탁의 준비 없는 장안 천도는 곧바로 실패로 이어졌다. 장안성의 모습이 남아 있는 서안의 시가지.
동탁, 낙양을 불태우다
서기 190년 2월 천도는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황제를 겁박해 상국의 지위에 오르는가 하면, ‘검리상전’(劍履上殿·신하가 칼을 찬 채 황제의 전상에 오르는 것)의 특권까지 가진 그는 극악한 방식을 동원했다. 가능한 한 재보는 모조리 확보하고, 옮길 수 없는 궁궐과 민가는 상대편이 이용할 수 없도록 불태워버리는 전술을 쓴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다시는 낙양에 미련을 가지지 못하도록 하려는 속셈도 작용했다. 먼저 황제를 장안으로 옮겨놓은 뒤 그는 낙양 일대에 있던 역대 황제의 능묘를 도굴하기 시작했다. 부장품을 대대적으로 약탈한 것이다. 부자들을 죽여 재물을 빼앗는가 하면 죽이지 않은 부자들은 장안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백성들도 강제 이주를 위해 끌고 갔다. 이처럼 대대적인 파괴와 방화, 강제 연행과 약탈의 아수라장 속에서 낙양은 파괴됐다.
<삼국지> 초반부에 묘사된 동탁의 이 장안 천도는 무자비한 독재자에 의한 천도가 얼마나 파괴적이고 끔찍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이 천도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1) 경합형 수도 논쟁의 강제적 해결방식
(2) 기본적으로 권력자의 근거지 지향주의에 따른 천도
(3) ‘준비 안 된 천도’ 가운데서도 최악의 케이스
(4) 이런 문제점 때문에 결과적으로 곧 실패작이 됨
먼저, 당시 낙양과 장안은 서로 경합하는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낙양과 장안은 각각 독자적인 문화와 지지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낙양은 이렇게 표현됐다.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차분한 도시다. 장안만큼 시끌벅적하지도 않고 꽤나 조용한 편이다.” 장안은 다르다. “얼빠지도록 낙천적이고 화려하고 활기찬 국제도시다. 시내 거리에서는 이국인들이 낙타를 끌며 지나가고, 협객들은 어깨바람을 가르며 돌아다녔다. 도박은 장안의 주된 오락거리였다.” 오랑캐적 배경을 가진 동탁이 유교적이고 안정지향적인 중원의 도시 낙양을 싫어했음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이 개인의 독단에 의한 천도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한편 이런 두 도시 사이의 경합 양상은 현대에 이르러 여러 나라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영국계 도시 토론토와 프랑스계 도시 몬트리올 사이의 경합이 치열하게 벌어진 캐나다를 비롯해 시드니와 멜버른이 각축한 오스트레일리아, 상파울루와 리우데자네이루가 경합한 브라질 등이 그렇다.
» 중국위 한나라 마지막 황제 헌제가 장안에서 탈출해 이동해간 조조의 근거지 허창의 현재 모습.
미래를 내다본 도쿠가와 이에야스
둘째, 이 천도가 권력자의 근거지 지향주의에 따라 이뤄졌다는 것은 쉽사리 이해할 수 있다. 동탁은 장안으로 간 뒤 좀더 쉽게 농서쪽으로부터 새외민족 등 자신의 지원세력을 끌어올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군사적 측면에서만 볼 때 동탁을 격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근거지 지향주의는 그로부터 1200여년 뒤 중국 명나라 초기 영락제가 조카 건문제와 싸워 이긴 뒤 건문제의 근거지인 남경 대신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천도한 사례에도 극적으로 반영된다.
셋째, 동탁이 천도를 결행할 때는 전란 중이었다. 전쟁 때 수많은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키는 끔찍한 천도를 한 것이다. 나아가 반동탁연합군이 공격을 시작한 것이 1월, 이주를 시작한 것이 2월이다. 단 한달 만에 천도를 계획하고 실천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이 안 되는 천도가 벌어진 셈이다.
넷째, 결국 이런 치명적인 과오와 약점으로 천도 자체도 곧바로 실패하고 만다. 동탁의 사후 장안은 부하 장군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한다. 그나마 서기 196년 헌제가 장안을 탈출해 낙양을 거쳐 조조의 허창으로 들어감으로써 수도의 지위마저 상실한다. 장안 천도 6년 만의 일이다. 그 뒤 장안은 400년쯤 지나서야 수나라와 당나라의 수도로서 부활한다.
일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도쿄(에도) 천도는 동탁의 장안 천도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치밀한 계산과 준비를 거친데다 기본적으로 과거가 아닌 미래를 내다보는 프로젝트로서 실행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장안과 도쿄의 운명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갈라진다.
서기 1590년 7월 새로운 지배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굴종해야 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새로운 영지 에도에 들어간다. 그를 견제하는 히데요시의 영지교체책에 따라 종래의 거점 영지에서 밀려나 동쪽 변방 관동평야의 미개척 영지로 강제로 이주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에도는 보통 사람의 눈에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톱밥을 이겨 만든 초가 지붕에는 농성하던 병사들이 불붙은 화살을 만든답시고 흙을 발라놓았다. 그 바람에 흙이 섞인 빗물이 흘러내려 다다미가 썩고, 집이 무너져 갈라진 지붕 사이로 햇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현관 계단은 선창 판자 두장을 얼기설기 묶어둔 조잡한 것이었다. …에도는 바다와 강과 연못이 산재한 물투성이 땅이었다. 개척지였다고는 하지만 예로부터 갈대와 억새가 우거진 습지와 황량한 들판이 이어진 드넓은 평야였다. 에도성은 히비야 후비 구릉지대 끝부분에 있었고, 제방은 바닷물에 씻겨나가 보이지도 않았다.”
» 도쿠가와의 도쿄 천도는 준비된 천도(계획도시)의 장점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도쿠가와는 탁월한 수도론을 가지고 있었다. (사진/ GAMMA)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 일본의 새로운 패자가 되어 막부통치를 시작한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이처럼 최고 권력자가 된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 때문에 억지로 내놓아야 했던 옛 영지로 돌아가는 길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도쿠가와는 가문의 백년대계를 위해 새로운 땅 에도 일대를 선택한다. 그 결과 에도는 도쿠가와 막부의 수도를 거쳐 오늘날 일본의 수도로까지 비상하게 된다. 1600년 초 도쿠가와 가문의 백년대계 결단이 21세기 세계도시 도쿄를 낳은 것이다.
“다이묘를 교묘히 견제하라”
도쿠가와 가문의 도쿄 천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철저한 계획도시 건설
(2) 경제부흥책으로 신도시 건설 활용
(3) 다이묘 견제정책과 도쿄발전 정책을 교묘히 결합시킴
(4) 낙후된 동일본 지역의 개발을 촉진해 국토 균형발전을 이뤄냄
(5) 도로망과 해상운송망의 발전으로 내수기반 갖춤
첫 번째, 도쿄는 철저한 조사와 계획을 토대로 점진적으로 건설됐다. 도쿠가와는 에도에 입성하기 전에 이미 이 지역에 대해 철저히 조사했다. 이주 뒤에도 탁발승, 행상인, 예능인들을 동원해 조사를 계속했다. 그리고 이곳에 왕도를 건설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린다. 상황에 떠밀려서 도시를 건설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일찍 훨씬 멀리 내다보고 주도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이런 조사를 토대로 간척과 매립, 성곽 축조, 거주지 조성, 항만 건설 등이 이뤄졌다.
두 번째, 무엇보다 과거의 왕도 대신 새로운 왕도를 건설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경제적 판단도 크게 작용했다. 조선 침략의 실패와 내전 등으로 피폐해진 일본 경제를 부흥시키는 데 새 도시 건설이 대단히 유용하다고 본 것이다. 무기 대신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백성들에게 새 성곽과 궁궐, 도로, 주택의 건설은 새로운 기회였다. 건설경기는 고용창출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요소였다.
세 번째, 도쿠가와 가문은 다이묘들에게 새 왕도 건설에 물자와 인력을 제공토록 했다. 그들의 경제력을 축소시키는 부수적인 효과도 노린 것이다. 나아가 다이묘들의 가족을 에도에 의무적으로 들어와(사실상의 인질로서) 살도록 한다. 또한 참근교대제를 도입해 다이묘들이 1년은 에도에서, 1년은 영지에서 살도록 한다. 다이묘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는 한편 도쿄의 비약적 발전에도 기여하도록 한 것이다.
네 번째, 당시 관동평야의 에도조차도 그토록 전란과 다이묘들의 무관심으로 방치될 정도로 일본은 불균형 발전 상태에 놓여 있었다. 에도의 건설은 이런 불균형 상태를 극적으로 해소하고 일본 전역이 고루 발전하는 자극제가 됐다.
다섯 번째, 다이묘에 대한 견제책으로 대대적인 영지교대제를 실시하면서 일본의 교통이 비약적으로 발전한다. 엄청난 인구가 인위적으로 대거 이동해야 했던 것이다. 또한 막부의 강력한 주도 아래 새로운 도로와 하상교통망이 개설돼 경제발전에도 크게 기여한다. 궁극적으로 이런 기반시설의 확충이 개국 이전 일본의 내수산업을 상당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가장 극적인 과정 보여주는 베를린
»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날. 베를린은 냉전시대 이데올로기 전쟁 때문에 도시가 강제로 분할되는 운명까지 겪었다. (사진/ Rex Festures)
서양 국가의 천도에서 가장 극적인 과정을 보여주는 수도 가운데 하나는 독일의 베를린이라고 할 수 있다. 베를린은 간단하게 보더라도 수도- 분할 - 수도 지위 상실 - 도시 통합 - 수도로의 복권 등 복잡한 운명을 헤쳐온 도시다.
처음 베를린이 역사에 이름을 올린 것은 1244년부터다. 베를린은 자매도시라 할 수 있는 쾰른과 함께 13세기 초 건설됐다. 두 도시는 스프리강을 매개로 동서 유럽 사이의 교역을 주도하면서 발전했다. 맨 먼저 베를린의 현재 중심지역인 스판다우와 쾨페닉 지역에 사람들이 모여 살다가 8세기 무렵 베를린과 쾰른 지역에 요새형 거주지가 들어선다. 1411년 브란덴부르크 변경지역은 뉘른베르크 봉건귀족 프레드릭 6세의 지배 아래 들어간다. 이 무렵부터 베를린-쾰른은 독일 역사에서 비록 공국 수준이기는 하지만 수도로서의 지위를 확보한다. 이 무렵 도시 인구는 1만2천명에 이른다.
1640년 프레데릭 빌헬름이 권력을 잡은 뒤 스웨덴 침략자를 막기 위해 요새시설을 크게 강화한 건축계획을 추진한다. 빌헬름은 운하건설에도 박차를 가해 주변 도시와 연결되는 해상교통망을 갖춘다. 1701년 프레데릭 3세가 현재 러시아령 칼리닌그라드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러시아제국의 황제로 등극하면서 베를린은 황궁도시로 결정된다. 1712년 베를린-쾰른과 그 주변도시의 인구는 모두 6만1천명 수준으로 늘어난다. 18세기 내내 베를린은 이처럼 동서남북 모든 방향으로 팽창을 거듭한다.
19세기 초반부터 베를린은 학문과 교육의 중심지로서 발전한다. 훔볼트대학 등 대학들이 본격적으로 건립되고 헤겔, 마르크스 등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 무렵이면 도시는 40만 수준을 웃돌게 된다. 산업혁명과 함께 독일의 강대국화도 급속도로 빨라진다. 그 중심인물이 바로 프러시아제국의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이다. 그의 주도로 1871년 드디어 전 독일이 통일된다. 이때 독일제국의 수도인 베를린의 인구는 82만명 수준에 이르렀다. 베를린의 국제도시로의 발전도 가속화돼 20세기까지 프랑스인, 유대인, 네덜란드인, 폴란드인, 러시아인, 오스트리아인, 터키인 등이 계속 이주해온다.
20세기 들어 독일과 베를린은 우연의 일치로 모두 네 차례에 걸쳐 10월9일마다 역사적인 대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맨 먼저 1918년 10월9일 베를린은 독일공화국의 첫 번째 수도로 결정된다. 그 5년 뒤 같은 날 히틀러가 뮌헨에서 정부의 전복을 시도한다. 결국 진압됐지만, 히틀러의 야심은 저지할 수 없었다. 1938년 10월9일 나치 돌격대가 유대교 회당 및 유대상점 습격사건을 일으킨다. 바로 ‘크리스탈나흐트’(부서진 유리의 밤)로 불리는 사건이다. 그 뒤 1989년 10월9일에는 동독이 28년 동안 동서 베를린을 분단시켜온 베를린 장벽을 철거한다.
독일 10월9일의 기이한 연쇄 체험
이런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베를린은 기구한 운명의 역정을 거쳐왔다. 동서 베를린으로 분단돼 있을 때, 동독은 동베를린을 수도로 삼은 반면 서독은 본을 수도로 두어야 했다. 서베를린이 동독 영내에 섬처럼 고립돼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통일 뒤 베를린은 다시 통일 독일의 수도로 부활한다. 과연 베를린의 고난은 끝난 것일까?
[터키·캐나다·브라질] 천도, 통합과 분열의 두 얼굴
외세극복 투쟁의 상징이 된 터키의 앙카라, 통합론자들의 현명함이 깃든 오타와
유럽과 아시아를 호령하던 대제국이 이제는 거꾸로 서방 국가들에게 침략당하는 운명으로 전락하고 만다. 1919년 오스만 터키,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된 제국으로 외국군이 진주하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 강대국의 군대가 이스탄불 등 주요 도시와 항구를 점령한 가운데 광대한 영토에 퍼져 있던 여러 민족도 저마다 제국의 곳곳에 깃발을 꽂고 자기들의 새로운 국가를 세우겠다고 선언했다. 오스만 터키와 오랫동안 갈등을 빚어온 아르메니아인들은 소아시아 동부의 넓은 지역을 자기네 땅이라고 주장했다. 그동안 오스만 터키에 복속해 있던 그리스는 더욱 강력한 보복정책으로 나왔다. 그리스는 1차 대전 전승국의 지위를 이용해 이번에는 거꾸로 흑해 연안과 소아시아 서부 지역을 그리스에 병합하려 했다. 과거 트로이, 에페소스, 사르디스 등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는 역사적 연고와 함께, 당시까지도 수백만명의 그리스계 주민이 살고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그리스는 나아가 과거 콘스탄티노플이라 불리던 오스만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도 당연히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의 지배 아래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스만 터키는 갈가리 찢기고 있었다. 곳곳에서 터키인들의 항의 시위가 벌어졌다.
케말 파샤, 터키를 구하다
이 격동의 시대, 무스타파 케말 파샤는 터키를 구하기 위해 나선다. 점령군의 영향 아래 놓인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와 달리 그는 터키를 제국이 아닌 공화정으로, 다민족국가의 거대국가가 아닌 터키인 중심의 단일민족국가로 재탄생시키려 했다. 그는 정부가 새로운 의회를 구성하기 위해 실시한 선거에서 당선됐다. 케말 파샤는 의회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선 이스탄불로 가야 했다. 하지만 술탄 정부와 배치되는 그의 국가 구상과 활동 때문에 체포될 것이 분명했다. 이 위기의 순간, 그는 의회에 참석하는 대신 새로운 의원들이 이스탄불로 가기 전에 자신을 만날 수 있도록 터키의 고도이자 내륙교통의 중심지인 앙고라에 거점을 마련했다. 그러곤 거기서 의원들을 만나 새로운 터키의 미래를 설득했다. 앙고라는 이렇게 해서 터키 건국의 아버지 케말 파샤가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는 민족주의적 구상의 복음지로 승화한다.
» 앙카라의 시가지 모습. 터키 앙카라는 무너진 오스만 터키를 새로운 공화국으로 재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Rex Peatures)
케말 파샤가 터키인의 애국적 투쟁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결과 마침내 터키군은 그리스군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1차 대전 전승국과 벌인 외교적 교섭도 잇따라 결실을 맺는다. 결국 4년 뒤인 1923년 터키의 대국민회의는 케말 파샤의 요청에 따라 이스탄불 대신 앙고라가 새로운 터키 공화국의 수도라고 선언한다. 그 뒤 1930년 새 수도 이름은 유럽화된 지명인 앙고라 대신 터키식 지명인 앙카라로 바뀐다.
이스탄불에서 앙카라로의 천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조국해방투쟁의 연장선에서 이뤄졌다: 외세를 극복하는 투쟁에서 자연스럽게 앙카라가 터키민족주의 운동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한 성격이 강하다. 새로운 공화국 방안이 이스탄불에서 자생적으로 일어나 주도권을 잡았더라면 상황은 크게 변했을 것이다.
(2) ‘터키인에 의한 터키화’라는 강력한 민족주의를 반영한다: 이스탄불은 이미 오스만 터키 이전에 비잔틴제국의 수도로서 1100여년 동안 이어져오는 등 사실상 그리스 문명을 계승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강하다. 그리스가 강력한 연고권을 주장하듯이 국제적 논쟁거리의 여지가 많다. 나중에 도시 이름을 터키식으로 다시 바꾼 것도 터키화의 의지를 보여준다.
(3) 터키의 현대화를 지향하는 케말 파샤의 염원이 담겼다: 케말 파샤는 불가리아 소피아 주재 대사관에 근무하는 경험을 통해 유럽의 현대국가와 현대도시가 갖는 강점을 깊이 인식했다. 케말의 현대화 구상을 구현하기에 이스탄불은 그 오랜 역사와 전통 때문에 결정적 제약이 너무 많다. 앙카라는 새로운 현대도시로 개조하기에 더없이 유리했다.
(4)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예상치 못한 결과도 이뤄냈다: 이스탄불은 유럽 지역까지 펼쳐져 있던 대제국 시절 제국의 중심부로서 기능하기에 적합했다. 하지만 소아시아반도 중심의 현대 터키라는 강역에서 보면 완전히 서쪽에 치우쳐 있는 형세다. 앙카라는 그와 달리 새 국가에서 적절하게 중앙부의 위치를 차지한다. 결과적으로 앙카라는 터키의 2대 도시로 새로운 산업 중심지가 되는 등 국토 균형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캐나다, 프랑스계와 영국계의 싸움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도 큰 틀에서는 터키의 앙카라와 비슷하게 ‘구국의 결단’에 따라 수도로 정해진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초기 캐나다를 구성한 양대 세력인 영국계와 프랑스계의 극심한 질투와 경쟁 때문에 자칫 국가가 분열될 수도 있는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선택된 대안이기 때문이다. 캐나다 건국 초기 이 지역은 프랑스계 주민에 의해 먼저 개척됐다. 캐나다 지역을 처음부터 뉴 프랑스라고 부른 것이라든가, 오타와 주변을 흐르는 강 이름이 프랑스식 표현인 가티노(Gatineau)라든가 리도(Rideau)로 된 것만 보아도 쉽사리 알 수 있다. 프랑스계 주민은 퀘벡주를 중심으로 다수민족을 형성한다. 나중에 영국계 주민도 본격적으로 진출해 이웃 온타리오주의 다수민족이 된다. 오타와는 이 지역에 살던 오타와 부족이라는 인디언의 이름에서 따왔다. 처음 이 지역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영국인들에게 목재를 공급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개발됐다. 1812년 미-영 전쟁 당시 이 지역의 하천은 영국군이 미국을 공격하는 루트로 사용되기도 했다.
» 오타와의 시가지 모습. 프랑스계의 몬트리올과 영국계의 토론토가 치열하게 경합할 때 오타와는 대안으로 제시돼 캐나다의 분열을 막아낸다.브라질리아. (사진/ Rex Peatures)
캐나다가 연방국가로 독립할 것이 확실해지자 새로운 수도 선정을 놓고 프랑스계와 영국계가 불꽃 튀는 경쟁으로 돌입하게 된다. 케벡의 프랑스계 주민들은 당연히 몬트리올이 수도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온타리오의 영국계 주민들은 토론토가 수도가 돼야 한다고 맞받아쳤다. 두 도시는 총력전으로 나섰다. 여기에 다시 프랑스계 도시인 퀘벡시티와 영국계 도시인 킹스턴까지 가세했다. 이처럼 프랑스와 영국의 양대 세력이 맞서자 아일랜드 주민들은 아일랜드 주민대로 자신들의 중심도시인 샬럿타운이 수도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일 이 주장이 관철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연방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경고하기까지 한다. 한마디로 수도 문제로 나라가 분열되는 심각한 사태가 올 수 있었다. 다행인 것은 수도를 결정하는 문제를 식민지 모국인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청원해놓았다는 것이다. 더더욱 다행인 것은 수도를 결정하기 위해 제출한 보고서에 그 어느 도시보다 오타와를 강력하게 추천하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빅토리아 여왕의 선택도 오타와로 떨어졌다. 캐나다의 미래를 위한 사람들의 선견지명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캐나다 통합론자들의 현명함은 한번 수도가 결정되자마자 곧바로 의사당 건물의 건립에 들어갔다는 데서도 다시 한번 드러난다. 그렇다고 졸속 공사를 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1860년 영국의 왕세자가 참석한 가운데 정초식을 올리고, 미국의 뉴욕과 펜실베이니아에서 나는 화강암석을 철도편으로 실어오기도 했다. 원래 예정했던 공사 기간 10년이 지나서 1867년 캐나다가 통합 캐나다로 건국됐을 때도 완성되지 못했다. 결국 독립 뒤 12년이 더 지나서야 완공됐던 것이다. 어쨌든 수도 선정 뒤 곧바로 이런 대규모 의사당 건설에 곧바로 착수한 결과 수도 선정 이후 계속 불거진 논란을 종식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된다. 국가적 통합을 상징하는 의사당의 위용 앞에서 다른 도시를 내세우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줄어들었다.
» 오스트레일리아의 수도 캔버라. 캔버라 역시 시드니와 멜버른의 과열된 경합을 해소하기 위한 대안으로 선택됐다. (사진/ Rex Peatures)
오타와의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점을 들 수 있다.
(1) 국가통합을 위한 대안으로 선택됐다.
(2) 미국과의 잠재적 대립 가능성을 상정해 방어 목적을 계산했다.(다른 경합 도시와 달리 좀더 내륙쪽으로 후퇴해 있다.)
(3) 철저한 계획도시의 성격을 띤다.
(4) 기동성 있는 행정으로 도시건설을 뒷받침했다.
(5) 정치 지도자들의 탁견에서 배울 게 많다.
브라질리아, 통일과 단절의 하모니
브라질이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새로운 계획도시 브라질리아로 천도한 가장 큰 이유는 국토의 균형발전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브라질리아로의 천도는 1960년 사회민주당 후셀리노 쿠비체크 데 올리베이라 대통령 때에 이뤄졌다. 전통적으로 브라질은 이전 수도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에서 보듯이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달해 있었다. 그것도 남부에 집중돼 있었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브라질로서는 이런 불균형 상태를 적극적으로 해소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이에 따라 국가의 정치적 영토적 통일과, 해안 지역으로 상징되는 유럽 전통과의 단절을 위해 천도가 기획됐다.
» 브라질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장기간의 고민 끝에 계획도시로 건설된 브라질리아. 그러나 경제적 부작용 때문에 크게 흔들렸다. (사진/ GAMMA)
브라질의 천도 구상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내륙부에 수도를 둔다는 구상은 1789년 초기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호아킴 호세 다 실바 하비에르에서부터 비롯됐다. 그 뒤 1891년 헌법도 내륙부 새 수도 원칙에 대해 천명하기에 이른다. 브라질리아를 새로운 수도 후보로 선정하기 전 약 8년 동안 내륙부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실험이 실행됐다. 1960년 쿠비체크 대통령은 새로운 투자의 활성화와, 국내 시장의 확대와 통합을 목적으로 천도를 본격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과다한 투자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브라질에 대한 금융이 막히게 된다. 결국 브라질 쿠비체크의 밀어붙이기식 팽창정책은 위기를 맞게 된다. 현실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천도였지만, 뭔가 “2%가 부족했다”고나 할까? 수도는 잘못 건드리면 덧나는 존재일 수도 있다.
서울-평양 병립, 두가지 미래
» 조선시대 개경에서 한양으로 천도는 개방형 교역경제에서 현실안주형 농업형태로의 후퇴를 반영하기도 한다. (사진/ 국립민속박물관)
우리 역사에서 천도는 대략 여섯 차례 이뤄졌다. 우선 고구려 때 두 차례, 백제 때 두 차례 경험한다. 고구려는 국내성으로 한번, 다시 평양으로 한번 천도했다. 두 차례 모두 국가정책 방향의 전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국내성으로의 천도는 국방 강화와 국력 팽창이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평양성으로의 천도는 남하정책을 통한 한반도의 통일 의지로 읽힌다. 백제의 천도 역시 고구려와 비슷하다. 하남 위례산성에서 웅진(공주)으로의 천도는 개로왕 등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퇴하면서 야기된 국방상의 이유로 추정되고, 다시 부여 사비성으로의 천도는 새로운 국가 발전의 전기를 붙잡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고려의 개경(개성)은 ‘신왕조 창건 천도’의 특징을 지닌다. 개경은 예성강 하구 벽란도를 중심으로 한 국제무역을 바탕으로 발달한 도시다. 따라서 개경의 정도는 경제적 요인을 대단히 중요시한 천도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개경이 왕조 창건 세력인 왕씨의 본거지였다는 점에서 ‘근거지 이동형’이다. 명나라 초기 영락제가 전임 황제의 근거지인 남경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북경으로 천도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조선시대 개경에서 한양(서울)으로 천도한 것도 신왕조 창건 천도의 성격이다. 기술적으로는 개경의 전진도시인 벽란도가 토사 축적으로 하상이 높아져 항구 기능을 상실하면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고려조의 개방형 교역경제에서 조선조의 현실안주형 농업경제로의 후퇴를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다. 고려조는 세계사의 관점에서 볼 때 정화함대로 상징되는 중국의 해양강국 시대와 맥을 같이하면서 해양교역에 대단히 적극적이었다. 이와 달리 조선조는 해양과 거리를 두는 쇄국형의 성격이 더 강했다.
한편 남북 분단에 따른 서울-평양 양대 수도의 병립은 역사적으로 두 가지 길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하나는 독일 베를린의 예에서 보듯, 통일 뒤 한 도시(서울)로 강제 합병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병립경합형 도시들처럼 제3의 대안을 모색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파주 교하가 유력한 지역이라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