敵 伏 失 勝
(적-적↓) (엎드릴-복↓) (잃을-실↓) (이길-승↘)
衆 悅 孤 悽
(무리-중↘) (기쁠-열↓) (외로울-고→) (슬퍼할-처→)
적은 엎드려졌으나 승리는 잃었으니 / 많은 이들이 기뻐해도 홀로 슬퍼한다
김구 (1876~1949) 초명은 昌巖,昌洙,龜. 자는 연상. 초호는 연하. 호는 백범. 임시정부 경무국장(警務局長)으로 취임,
이어서 내무총장(內務總長),국무총리대리,국무령(國務領)을 지내면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31년 한인애국단을 조직. 조국광복에 애섰으며 39년 임시정부 주석에 취임하였고,
광복단을 조직. 45년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일본에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여 본토 상륙을 계획하던 중
미국의 주도하에 급작스럽게 일본이 항복했다.
고국의 민중들이 광복의 기쁨을 누렸으나 김구선생님은 우리가 주도권을 잡지 못했으니 외세의 힘에 휘둘릴 것이라 하여 통곡하였다.
결국 예언대로 외세와 이승만에 의해 나라가 분단되자 통일을 위해 온몸으로 애쓰던 중 안두희에 의해 운명하였다. [백범일지]를 남겼다.
愚 彦 踏 道
(어리석을-우↗) (선비-언↘) (밟을-답↓) (가야할 길-도↗*말할-도↘)
廢 脚 唯 進
(망가질-폐↘) (다리-각↓) (오직-유→/곱게 대답할-유↗) (나아갈-진↘)
어리석은 선비는 길을 밟음에 / 망가진 다리로 오로지 나아갔다
김창숙 (1879~1962) 자는 문좌 호는 심산, 벽옹. 자호(自號)를 대우(大愚) 또는 김우(金愚)라 하기도 하였다.
1909년(순종 3) 성명학교를 창립하고 을사오적매국성토상소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년 유림 대표들이 서명한, 한국독립을 호소하는 유림단진정서를 가지고 상하이로 건너가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우송한 뒤,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이 되었다. 이듬해 귀국 유림단사건의 연루자로 경찰에 투옥되었다.
그 후 출옥하여 22년 베이징에서 신채호와 같이 독립운동지 [천고(天鼓)]를 발행하고, 박은식 등과 [사민일보(四民日報)]를 발간했다
또 서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군사선전위원장으로 활약 27년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앉은뱅이가 되었다
14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8,15를 맞았다. 광복 후 민주의원을 지내는 한편 유도회를 조직하고
재단법인 성균관과 성균관대학교를 창립, 초대총장에 취임하여 사학 육성에도 힘썼다.
6,25 후에는 이승만 하야 경고문사건으로 부산형무소에 40일간 수감되었고, 52년 이시영,
조병옥 등과 함께 반독재호헌구국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이승만 정권과 투쟁하였다.
응용한자
대적(對敵) 필적(匹敵) 적개심(敵愾心) 복망(伏望) 복병(伏兵) 굴복(屈伏) 삼복(三伏) 실격(失格) 실패(失敗) 실업(失業) 실언(失言) 승리(勝利) 승지(勝地) 승경(勝景) 승부(勝負) 중과부적(衆寡不敵) 중구난방(衆口難防) 열락(悅樂) 희열(喜悅) 법열(法悅) 고독(孤獨) 고아(孤兒) 고군분투(孤軍奮鬪) 처연(悽然) 처절(悽絶) 처참(悽慘) |
우매(愚昧) 우열(愚劣) 우롱(愚弄) 우견(愚見) 언사(彦士) 제언(諸彦) 답보(踏步) 답사(踏査) 답습(踏襲) 미답(未踏) 도로(道路) 도정(道程) 사도(斯道) 도파(道破) 폐간(廢刊) 폐기(廢棄) 폐인(廢人) 폐허(廢墟) 각광(脚光) 각본(脚本) 각선미(脚線美) 유일(唯一) 유유(唯唯) 유아독존(唯我獨尊) 진보(進步) 진척(進陟) 진격(進擊) 승진(昇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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