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싣고 유유히 흘러가는 강은 아름답다. 능수버들이 긴 머리채 풀어 지난 계절을 헹구고 바람조차 완보하는 강으로 간다. 지금 찾아가는 강의 이름은 여강(驪江). 공식 이름은 남한강이지만 여강이라는 이름이 더 정겹다. 여강! 가만히 불러보면 가슴이 크게 뛰거나 눈이 감기도록 아련해진다. 여주를 흐르는 강이라는 뜻이 성에 차지 않아, 굳이 문자를 풀어내면 ‘검은 말(驪)을 닮은 강(江)’ 정도가 될 것이다.
여강은 남한강의 물길 중 여주를 휘감아 도는 40여㎞ 구간을 부르는 이름이다. 금강이 부여를 지나면서 백마강이 되듯, 고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부른 옛사람들 덕분에 걸음걸음 여러 강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여강은 서울에서 멀지 않고 풍경이 아름다워 예로부터 많은 시인 묵객들을 불러들였다. 또 풍요롭고 사납지 않아 백성들은 기름진 농토를 얻고 고기를 잡거나 배를 부리며 살아왔다. 오늘은 그 강과 함께 흐른다. 멀리서 바라보기 위해 파사성에 오르고 강이 전하는 말을 들으려 신륵사로 간다.
#파사성 = 성으로 오르는 산길은 이미 봄빛이 농염하다. 바람은 부드럽고 대기는 향기롭다. 몇 걸음 가지도 못하고 지천으로 핀 진달래꽃에 발목을 잡힌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내밀다 주춤한다. 갑작스레 머리를 울리는 옛사람의 한 마디. “그 꽃 한 송이 피우기 위해 그대가 한 일이 무엇인가” 부끄러움에 얼른 돌아선다. 나는 참 많이 얻고 많이 누리며 살고 있구나. 생각해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그런데도 늘 뭔가 불만스럽다. 염치없는 짓이다.
주차장에서 성의 정상까지는 860m. 보통 걸음으로 30분이 채 안 걸린다. 가족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가벼운 등산을 하기에는 최고의 코스다. 새소리에 장단 맞추며 걷다 보니 어느덧 성이 시작된다. 무너진 성곽은 일부 정비되고 일부는 그대로다. 파사성은 신라 파사왕 때 쌓았다고 전해진다. 고대 파사국이라는 나라가 있었던 터라는 전설도 있다.
중간부터는 성곽이 잘 복원돼 있다. 성이라기보다는 잘 닦인 대로를 걷는 느낌이다. 참 기분 좋은 길이다. 문득 돌아보니 성벽이 저 아래 세상을 향해 줄달음쳐 내려가고 있다. 꽃피는 계절, 무엇인들 그리움 한 자락 없으랴. 한 나무에서 두 줄기가 자란 소나무를 그대로 둔 채 성곽을 쌓았다. 이름하여 ‘연인소나무’다. 나무 밑에서 고백을 하면 사랑이 이뤄지고 부부애가 좋아진단다. 한 때 전쟁터였을 곳이 사랑을 고백하는 장소로 바뀐 게 아이러니하다.
오래지 않아 정상에 이른다. 밭은 숨부터 내려놓고 사방을 둘러본다. 막히는 곳 하나 없이 탁 트여있다. 저 아래, 세상이 엎드려 있고 여강이 유장하게 흐른다. 최근에 쌓은 보가 가시처럼 눈에 거스르지만 속 깊은 강은 묵묵히 갈 길을 갈 뿐이다. 다리 위로는 차들이 빠르게 달린다. 세상은 여전히 바빠 보인다. 저곳과 이곳을 흐르는 시간이 다른 게 틀림없다.
정상은 그리 넓지 않다. 병사들은 이 좁은 공간에서 물을 길어 밥을 해먹고 배설을 하고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적들을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공간이 그뿐이랴. 한 사람의 공간은 발밑이 아니라 시야가 닿는 곳까지여야 한다. 눈을 멀리 둘 때야 세상이 제대로 읽힌다. 넓지 않은 잔디밭에서는 봄풀들이 키를 재고 있다. 불현듯 ‘왕국은 간데없고 성터에 봄풀만 수북이 자랐다’고 쓴 옛 시가 떠오른다.
누군가 돌멩이들을 모아 탑을 쌓아놓았다. 그 옆에 앉아 강물을 바라본다. 온갖 생각들이 스쳐 지난다. 파사왕 때 쌓은 婆娑城이 아니라 나쁘고 그릇된 것을 깨뜨린다는 뜻의 破邪城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흐린 세상이 조금이라도 맑아질 수 있다면. 멀리서 흐르는 강물이 꿈틀, 손짓한다. 이제 그만 내려가란 뜻일까? 가까이 오라는 뜻일까? 툭툭 털고 일어나 사람 사는 곳으로 내려간다.
#신륵사 = 이 땅의 아름다운 절집을 꼽으라면 신륵사를 빼놓을 수 없다. 강과 절이 이처럼 잘 어울리는 곳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여주시를 지나 여주대교를 건너면 나지막한 봉미산(鳳尾山)이 나오고 그 기슭 너른 터에 깃든 고찰이 신륵사다. 신륵사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 여강이다. 갈증을 끄듯, 일주문을 지나자마자 정자에 올라 강과 눈을 맞춘다. 파사성에서 보았던 강이건만 또 달라 보인다.
바깥마당을 지나 맨 먼저 만나는 것은, 원효대사가 아홉 마리의 용에게 항복을 받고 지었다는 구룡루다. 그다음이 극락보전이다. 신륵사를 여러 번 찾는 이유를 물으면 탑들이 보고 싶어서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신륵사에는 보물 제180호 조사당, 보물 제230호 대장각기비 등 숱한 문화재가 있지만 그 중의 백미는 네 개의 탑이다.
먼저 극락보전 앞에서 다층석탑(보물 제225호)을 만난다. 조선시대 세워진 이 탑은 조금 특이하다. 우선 재질이 흰 대리석이다. 하층 기단의 하대석에는 연꽃문양이, 중대석에서는 파도문양이, 상층 기단에는 용과 구름문양이 조각돼 있다. 용 문양이 얼마나 생생하고 정교한지 한참 빠져든다. 석탑에 용을 새기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이다. 탑은 곳곳이 깨졌지만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두 여인이 촛불을 밝히더니 탑 앞에 서서 경건하게 손을 모은다. 무슨 염원이 저리 간절할까. 함께 손을 모은다.
극락보전 왼쪽의 조사전을 못 보는 것은 영 아쉽다. 수리 중인지 구조물을 뒤집어쓰고 있다. 대신 그 앞 늙은 향나무에게 안부를 묻는다. 600년도 더 살았다는 이 나무는 곳곳에 치료 흔적이 역력하지만 정정하게 가지를 펼치고 있다. 관음전과 명부전 사이에는 키 큰 목련나무가 꽃으로 우산을 만들어 썼다.
산길로 오른다. 낯선 발소리에 놀랐는지 새 한 마리가 후드득 날아오른다. 미안한 마음에 까치발로 걷는다. 주머니를 털어내듯 마음이 조금씩 가벼워지더니 평온이 온몸을 감싼다. 근원 모를 희열이 가득 차오른다. 생사가, 구름 한 조각이 나고 멸하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는 뜻을 조금은 알 것 같아 혼자 고개를 주억거린다.
보고 싶던 두 번째 탑이 나타난다. 보제존자석종(보물 제228호). 보제존자는 나옹선사를 말한다. 그는 고려 우왕 2년 신륵사에서 열반에 들었다. 이 종모양의 탑이 바로 사리를 모신 부도이다. 이곳에는 보물이 두 점이나 더 있다. 석종 앞 석등(보물 제 231호)과 보제존자 석종비(보물 제229호). 이끼 옷을 입고 있는 유물에는 세월의 흔적이 깊게 각인돼 있다. 돌을 매개로 옛사람과 만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석종 위에 초봄의 햇살이 나풀나풀 내려앉아 금빛을 입힌다. 마음에도 금빛 한 가닥 들어앉는다.
내려올 땐 다른 길을 택한다. 오른쪽으로 절을, 왼쪽으로 강을 두고 걷는 오솔길은 천상의 길처럼 곱다. 길이 끝나는 곳에 또 하나의 탑, 다층전탑(보물 제226호)이 있다. 벽돌(塼)로 쌓은 이 탑은, 완성된 형태로 남아 있는 국내 유일한 전탑이다. 재미있는 것은, 보통은 탑이 금당의 본존불 가까이 있게 마련인데 이 탑은 강변에 우뚝 서 있다. 어쩌면 등대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여강을 오고 가는 사공들 위해 등불처럼 걸어놓은 건 아닐지. 백성들은 이곳을 지날 때마다 탑을 보며 부처의 가피를 기원했겠지.
강변으로 내려간다. 바위 위에 삼층석탑이 하나 서 있다. 재질도 거칠고 여기저기 깨지기까지 했다. 이 탑의 공식 이름은 여주 신륵사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33호). 이 절에서는 흔하다는 보물도 못되고 경내에서도 한참 밀려났지만, 범인의 눈에는 강물을 지긋이 내려다보며 서 있는 모습이 둘도 없이 고귀하다. 모든 걸 외모로 판단하려 들면 본질을 볼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귀하지 않은 존재가 있으랴. 신륵사에서 단 한 곳을 선택하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이 삼층석탑이 있는 강변으로 올 것이다.
탑 옆에 앉아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을 바라본다. 강이 말을 걸어온다. 네 안쪽을 자꾸 들여다보란다.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아 그저 새겨 넣을 뿐이다. 허상의 틀을 깨고 본원의 자아를 찾으라는 것이겠지. 껍질을 벗어 던지고 진정한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겠지. 강물이 또 한 번 꿈틀, 몸을 뒤챈다.
#그밖에 가볼 만한 곳 = 세종대왕릉과 효종대왕릉이 신륵사와 멀지 않다. 영릉(英陵)으로 부르는 세종대왕릉은 세종과 소현왕후를 합장한 능이다. 능과 소나무들이 조화를 이뤄 엄숙함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인근의 효종대왕릉은 영릉(寧陵)이라 부른다. 경기도 양주에 있던 능을 1673년 이장했다. 세종대왕릉이 합장릉인데 비해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은 따로 떨어져 있다. 능까지 가는 진입로가 아름답다. 전통 목공예 및 불교박물관인 목아박물관도 가볼 만하다.
파사성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강 상류와 하류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파사성을 축성한 시기의 왕으로 전해지는 파사왕(婆娑尼師今·재위 80∼112년)은 신라 제5대 국왕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성을 쌓았다는 문헌적 근거는 없다. 이후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류성룡의 발의에 따라 승군 총섭 의엄(義嚴)이 승군을 동원하여 둘레 1100보의 산성을 수축했다는 내용이 전해진다. ‘대동여지도’에도 파사성이라는 기록이 있다. 발굴 조사에서 삼국시대의 유구(遺構·옛날 건축의 구조와 양식의 자취)가 발견되어 축성 시기가 확인됐다. 성벽의 길이는 936m이고 가장 높은 곳이 6.5m, 가장 낮은 곳은 1.4m이다. 성 내부에 동문터와 남문터 등이 남아 있다.
파사성에 가면 꼭 들러봐야 할 곳이 있다. 정상 서북쪽 끝에 있는 계단을 내려가 300m쯤 가면 만날 수 있는 마애여래상이다. 큰 수직 바위에 높이 약 5.5m로 새긴 부처상이 장엄하다. 파사성 축성을 주도한 옛 장군의 초상석각이라 전해지기도 한다. 이 마애불 주변에서 기와 조각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파사성과 관계있는 사찰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바위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감로수처럼 달다.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세운 것으로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어느 날 원효대사의 꿈에 흰옷을 입은 노인이 나타나 지금의 절터에 있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가람이 설 곳이라고 알려주고 사라졌다고 한다. 그 말에 따라 연못을 메워 절을 지으려 했으니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원효대사가 7일 동안 기도를 올리니 아홉 마리의 용이 연못에서 나와 하늘로 올라가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서 창건 유래를 알 수는 없다.
절 이름에 관한 전설도 있다. 고려 우왕 때, 여주에서 신륵사에 이르는 길의 마암(馬巖)이라는 바위 부근에서 용마(龍馬)가 나타나 피해를 주자 나옹선사가 신기한 굴레를 가지고 그 말을 다스렸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또 하나는 고려 고종 때 마을에 사나운 용마가 나타나 붙잡을 수 없었는데 인당대사가 나서서 고삐를 잡으니 순해졌다고 한다. 신력으로 제압했다 하여 신륵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신륵사를 말할 때 나옹선사를 빼놓을 수 없다. 신륵사를 유명하게 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나옹선사는 고려 말의 뛰어난 승려였다. 출생담, 출가담, 풍수담, 도술담 등이 전해질 정도로 전설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용문산, 원적산, 금강산 등에서 수도한 뒤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1371년 공민왕으로부터 금란가사와 내외법복, 바리를 하사받았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면서 다시 왕사로 추대됐으나 회암사를 중수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낙성회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생업을 포기할 지경이었다. 유학자들의 탄핵이 이어졌고 급기야 조정에서는 나옹선사에게 밀양 땅 영원사(瑩原寺)로 떠나라고 했다. 가는 중에 병이 깊어 신륵사에 들었고, 1376년 5월 입적했다. 세수 57세 법랍 38세였다. 신륵사는 임진왜란 때 승군을 조직해 싸웠고, 이때 극락전을 비롯해 대부분의 건물이 불에 탔다. 지금의 신륵사 건물은 현종 12년(1671) 무렵부터 다시 일으킨 것들이다. 신륵사 가는 길 = 중부고속도로→영동고속도로 여주 나들목 삼거리에서 문막·여주 방면으로 빠진 뒤 버스터미널 사거리에서 목아박물관·신륵사 방면으로 우회전. 여주대교를 건너자마자 신륵사사거리에서 다시 우회전하면 된다. 신륵사에서 파사성으로 갈 때는 37번 국도를 타고 양평 쪽으로 달려 이포보까지 가면 된다.
묵을 곳·먹을 것 = 콘도·호텔은 일성남한강 콘도(031-883-1199)와 여주선밸리호텔(031-880-3889)이 있다. 농촌체험과 함께 민박을 할 수 있는 석수황토민박(031-886-4900), 귀담재(031-881-4341), 부부농장(031-886-3757) 등도 이용해 볼 만하다. 파사성에 가면 전국적으로 유명한 천서리막국수촌을 들러보는 것도 좋다. 강계봉진막국수·이포막국수 등 여러 집이 몰려있다. 이포나루가 있을 때부터 3대째 이어오는 흥원막국수는 칼칼하고 개운한 맛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
'풍류, 술, 멋'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오악기행 ① | 남악 형산] (0) | 2015.04.27 |
---|---|
충북 괴산 산막이옛길 (0) | 2015.04.22 |
경북봉화 닭실마을&띠띠미마을 (0) | 2015.04.09 |
강원도 철원 도피안사&고석정&노동당사 (0) | 2015.04.02 |
경남 거제 지심도 (0) | 2015.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