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경남 거제 지심도

醉月 2015. 3. 25. 17:53

동백섬이라 불리는 지심도는 3월 말이면 섬 전역이 동백꽃으로 뒤덮인다. 여기저기 떨어져 흩어진 동백꽃과 나뭇가지에 매달린 동백꽃이 관광객들의 춘심을 붉게 물들인다. 곽성호 기자 tray92@


그 섬을 동백섬이라 부른단다. 이 계절에는 거제 자체가 동백꽃으로 붉게 타오르거늘 거기서 다시 동백섬이라는 이름을 얻었단다. 3월 하순의 여행지를 거제로 정해놓고 큰 고민 없이 선택한 곳이 지심도였다.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그 무엇이 있었다. 이름이 너무 알려졌거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은 가급적 피한다는 나름대로의 원칙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지심도의 동백꽃은 12월 초순부터 피기 시작해 4월 하순에 자취를 감춘다. 절정기는 3월 중순부터 4월 초순이다. 그러니 지금이 가장 좋을 때다. 나무에 매달린 꽃보다는, 미련 없이 고개를 꺾고 땅 위에서 또 한 번 피어나는 꽃을 보고 싶었다. 가슴 속에 지지 않는 꽃 한 송이를 간직하고 싶었다.

거제에 가면 꼭 들러볼 데가 또 한 곳 있다. 바로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지심도가 눈앞에서 뚝뚝 지는 꽃을 보여주는 곳이라면 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역사에 새겨진 눈물을 보여주는 곳이다. 같은 비극을 막으려면 오늘의 모습을 어제라는 거울에 자꾸 비춰봐야 하는 법. 남쪽 끝, 아름답고 슬픈 꽃들이 피는 땅, 거제로 간다.

거제에는 유난히 몽돌해변이 많다. 그중에서 으뜸으로 꼽는 곳이 학동의 흑진주몽돌해변이다. 해안을 따라 넓게 펼쳐진 검은 몽돌을 배경으로 나들이 나온 한 가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곽성호 기자 tray92@



#지심도=장승포에서 지심도로 가는 뱃길은 설렘으로 시작한다. 봄은 벌써 바다 깊은 곳까지 채색을 마쳤다. 눈길 닿는 곳마다 쪽빛 물결이 출렁거린다. 바람은 부드러운 손길로 바다를 연주한다. 뱃전에 부딪힌 파도가 하얀 이를 드러낼 때마다 배도 승객도 출렁거린다.

배를 타는 시간은 15분 안팎으로 길지 않다. 섬에 내리면서 곧바로 언덕길을 오른다. 잠깐 돌아보니 떠나온 곳도 머리 아픈 일도 아득하게 멀다. 저만치 파도가 오가며 “내려놓아라, 내려놓아라” 노래한다. 이 섬에서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걸어도 될 것 같다. 조금 올라가면 동백나무들이 가지 끝마다 붉은 등을 내걸고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바닥에도 점, 점, 점 주단을 깔아놓았다. 밤에 내린 비로 나무의 동백은 보석을 머금었고, 땅 위의 동백은 은빛을 얻었다.

▲ 관광객들이 여기저기 흩어진 동백 낙화를 모아 하트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첫 번째 만나는 건물인 동백하우스에서 왼쪽 길을 택한다. 관광객들은 대개 오른쪽 길로 접어들어 마끝∼국방과학연구소∼탄약고∼활주로 코스로 걷는다. 지심도에서는 길이나 방향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어느 길을 택해도 하나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니, 길을 잃어도 괜찮다. 길은 잃은 사람만이 다시 찾을 수 있는 법. 잃었다 싶으면 저만치서 기다려주는 게 길이다. 이 섬에서는 또 볼거리 한둘쯤은 놓쳐도 괜찮다. 어디를 가도 볼거리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

길은 부드럽고 원만하게 이어진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이라는 말 외에 떠오르는 문장이 없다. 숲은 태초의 기운이 그득하다. 그 숲에서 새들이 노래한다. 푸른 나무와 그들이 피워낸 꽃, 그리고 그 꽃을 찾아드는 새들. 원래 이 섬의 주인들이다. 잠시 빌려 쓸 수 있으니 고맙고, 고요를 방해했으니 미안하다. 노래는 들리는데 동박새는 끝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눈이 어두워 못 보는지도 모른다. 꽃과 꽃 사이를 옮겨 다니며 수정을 해주는 그들이 있어 숲은 더욱 풍성해진다. 우리 주변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빛내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긁히고 얽힌 마음이 치유된다. 어지러운 생각을 내려놓은 자리에 고요와 평온이 고인다. 세상을 향해 부리던 심통도 절로 녹는다. 하늘에서 보면 마음 심(心)자를 닮았다고 해서 지심도(只心島)로 부른다는 섬이, 지금 이 순간에는 다른 의미의 지심도(知心島)가 된다. 마음을 알고 평화를 선물하는 섬.

지심도의 동백꽃은 되바라지듯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잎 사이에 숨어 수줍게 핀다. 한꺼번에 우르르 왔다 가지도 않는다. 1년의 반 가까이를 피었다 지고 또 피었다 져서 섬 하나를 온전한 동백섬으로 만든다. 동백꽃만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아름드리나무와 장정 팔뚝만큼이나 굵은 대나무들이 울울한 숲을 이뤘다. 중간에 만나는 작은 매실 밭에는 매화가 만발했다. 바람에 날린 꽃잎들이 길 위에서 동백과 만났다. 흰색과 붉은색의 조화는 또 얼마나 환상적인지.

▲ 해안 비경의 최고 명소로 꼽히는 거제 해금강.

일본군이 만든 방향 지시석을 지나 해안선 전망대로 간다. 해식절벽 아래로 바다가 아득하게 멀다. 섬을 연모하여 달려온 파도는 단 한 번의 포옹 끝에 흰 거품을 남기고 소멸한다. 비장한 종말이다. 인간의 감탄사가 얼마나 볼품없고 내가 가진 언어가 얼마나 가난한지. 조금 더 가면 지심도의 동쪽 끝인 샛끝이 나온다. 샛끝에서 걸음을 돌려 올라가다 아름드리 소나무 길로 접어든다.

얼마 걷지 않아 잔디밭으로 된 활주로가 나온다. 여기가 섬의 정상인 셈이다. 그 끝에 해맞이터가 있다. 오른쪽에도 왼쪽에도 바다가 훤히 열려 있다. 아침에 일출을 보고 저녁때 돌아앉으면 일몰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혼자 웃는다. 바닥에는 풀들이 양탄자처럼 깔렸다. 이곳에서는 봄이 오고 감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우습다. 어디를 둘러봐도 푸른 색, 겨울의 흔적은 없다. 이 섬에 겨울이 다녀가기는 한 것일까? 어쩌면 꿈에 그리던 상춘(常春)의 땅은 아닐까? 배 안에서 잠깐 눈을 마주쳤던 부부가 반대쪽에서 오다가 반갑게 인사를 한다. 서로 다른 길을 택한 모양이다. 얼굴 가득 그려진 미소가 그 어느 꽃보다 화사하다. 마음이 넉넉해진 까닭이다.

작은 언덕을 지나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왼쪽으로 내려가면 마지막 목적지인 포진지와 탄약고가 나온다. 역시 일본군이 남긴 흉터들이다. 동백꽃은 이곳에서조차 환하게 피었다. 애써 피워낸 꽃을 뚝뚝 떨어트려 흉물스러운 구조물을 덮어주었다. 먼저 다녀간 누군가가 동백꽃들을 모아 포진지 한가운데에 하트모양을 꾸며 놓았다. 아름다운 곳에서는 미움마저도 녹여버리자는 뜻일까? 그렇다 해도 눈에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다. 없애달라고 조르기라도 하고 싶지만 오욕조차도 역사인 것을, 함부로 지울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하릴없이 걸음을 돌린다.

나무와 꽃과 새에 빠져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나 보다. 돌아가는 배 시간에 늦을 것 같아 조금 서둘러 내려오는 길, 걸음은 앞으로 가자고 재촉하는데 눈은 자꾸 뒤로 향한다. 어느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붉은 덩어리 하나가 툭, 하고 꽃잎을 연다. 아! 동백꽃은 세 번 핀다는 뜻을 이제야 알겠다. 나무에서, 땅 위에서 두 번 피었던 꽃이 가슴 속에서 다시 한 번 활짝 피었다. 봄이 가도 지지 않을 꽃이 되었다. 기껏해야 너비 500m에 길이 1.5㎞에 불과한 섬, 쉬엄쉬엄 걸어도 두 시간이면 너끈하게 돌아볼 수 있는 작은 섬에 마음을 통째로 빼앗기고 말았다.

▲ ‘바람의 언덕’에서 바라보는 한려수도의 풍광은 거제 8경 중 하나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거제는 역시 ‘동백의 나라’다. 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도 곳곳에 동백꽃이 피었다. 하지만 지심도의 동백과는 색깔도 의미도 달라 보인다. 기쁨이나 행복보다 슬픔이나 고통을 더 많이 읽는다. 아픈 역사가 박제돼 걸려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그 어느 전쟁기념관보다 전쟁의 참혹한 뒷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다. 이곳 포로수용소에는 한국전쟁 중에 17만3000명의 포로들이 수용됐다. 반공포로와 친공포로 사이에 유혈 살상이 자주 발생해서, 이념 앞에서 민족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허약한지 낱낱이 보여주기도 했다.

전시관에는 그 당시의 상황을 생생하게 재현해 놓았다. 모형이나 그림을 적절히 배치하고 사이렌 등 음향효과를 잘 활용했다. 특히 영상을 통해서 포로수용소에서의 삶을 실감할 수 있다. 반공포로 학살사건 등 끔찍한 모습도 있지만, 권투시합이나 릴레이 등 게임을 하고 빨래하고 목욕하는 장면은 여느 사람 사는 곳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포로사상대립관, 포로폭동체험관, 야외막사 등 20곳이 넘는 전시관들을 지나면 마지막으로 잔존유적지가 나타난다. 미처 지워지지 않은 수용소의 잔해들이, 현재에도 과거에도 편입하지 못하는 어정쩡한 몰골로 서 있다. 무너진 콘크리트 담장에서 전쟁으로 부서진 민족의 꿈을 읽는다. 아득한 과거가 아니라 불과 60여 년 전에 있었던 비극이다. 그래서 더욱 발길을 돌리기가 어렵다. 비극은 비극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끝나면 안 된다. 함께 기억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이 전시장이나 박물관으로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 밖에 가볼 만한 곳=거제는 별도의 소개가 필요 없을 만큼, 발길 닿는 곳 모두 아름답다. 그중에서도 장승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는 40㎞가량의 해안도로는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다. 중간중간에 만나는 구조라해수욕장, 학동흑진주몽돌해변, 바람의 언덕은 꼭 들러봐야 할 곳들이다.

특히 파도에 밀려 구르는 몽돌 소리는 한국의 아름다운 소리 100선에 선정될 정도로 환상적이다.

또 중간중간에 있는 부두에서 유람선을 타고 돌아보는 해금강, 외도 등도 기억에 오래 남을 명소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는 수용소가 운영될 당시 취사장에서 밥을 짓던 포로들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



지심도는 장승포항에서 남동쪽으로 5㎞ 정도 떨어져 있는 섬으로 거제 8경 중 하나다.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으며 면적이 0.36㎢, 최고높이는 97m다. 해안은 대부분 가파른 절벽이지만 민가와 밭이 있는 곳들은 비교적 평평하다.

지심도는 각종 수목이 빽빽하게 우거진 원시림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남해안 특유의 상록활엽수림이 잘 보존돼 있으며 후박나무, 소나무, 동백나무, 거제 풍란 등 37종의 식물이 자생한다. 그중 동백나무가 전체 숲의 60~70%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희귀식물인 개가시나무와 멸종위기종인 팔색조, 솔개, 흑비둘기 등이 서식한다.

이 섬에도 아픈 역사가 새겨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지심도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현종 45년부터라고 한다. 평화롭던 섬에 시련이 닥친 것은 일제강점기부터였다. 일제는 이 섬에 해군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1936년 주민들을 강제로 이전시켰다. 그리고 막사, 병원, 배급소, 포대, 포진지, 탄약 창고 등을 지어 섬 전체를 요새화했다.

그 잔해는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 펜션으로 쓰는 동백하우스는 주둔군을 지휘하던 책임자의 관사였다. 또 일본군배급소, 서치라이트 보관소, 대마도 쪽의 바다를 향해 구축돼 있는 포진지와 탄약고, 남쪽(해금강), 북쪽(부산·진해), 동쪽(대마도) 등이 적혀 있는 방향 지시석도 볼 수 있다.

해방이 된 뒤 주민들이 다시 들어와 거주하기 시작하면서, 현재는 서쪽 사면 11가구, 섬 중간 1가구, 북쪽 모서리에 3가구 등에 20여 명이 살고 있다. 이들은 민박집을 운영하거나 밭농사 등을 짓는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1951년 초부터 공사가 시작되었다. 처음 구상은 6만 명 정도를 수용 한다는 것이었지만 최종적으로 인민군 15만 명과 중공군 2만 명 등 17만3000명의 포로가 수용됐다. 여자포로 300명도 포함돼 있었다. 여기에 경비를 위한 병력과 행정인원 등이 합쳐지면서, 약 10만 명이었던 거제도 인구가 금세 세 배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포로수용소 내의 갈등은 1951년 6월부터 시작됐다. 친공포로들은 수용소 내에 소위 ‘해방동맹’이라는 비밀 조직체를 만드는 것은 물론 인공기를 게양하고 인민군 복장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친공포로에 의한 대표적 반공포로 학살은 1951년 9월 17일에 일어났다. 이날 밤 친공포로 측 해방동맹본부에서는 “부산이 북한 공산군 수중에 들어 왔으며, 그 중 선봉대 1개 대대가 거제도에 상륙하여 포로들을 해방시키려고 전진 중에 있다”고 선전했다. 이와 같은 선동에 자극된 친공포로들 중 일부가 반공포로들을 운동장으로 끌어내어 타살하기 시작했다. 이 사태로 희생된 숫자는 무려 300명에 달했다.

휴전협정에 따라 본격적인 포로송환이 시작된 것은 1953년 8월 5일부터였다. 북으로 송환을 희망하는 친공포로는 대부분 거제도와 제주도에 수용되어 있었으므로, 해로와 육로를 통한 수송 작전이 전개됐다. 이 송환 작전은 한 달 넘게 계속돼 9월 6일 완료됐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포로수송이 끝나면서 폐쇄되었는데 1983년에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 99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 가는 길=통영을 거쳐 갈 경우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을 먼저 들르는 게 좋다. 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 통영나들목에서 신거제대교를 건너 거제대로(14번 국도)를 타고 가다 고현·시청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안내판을 따라가면 된다. 장승포에서 지심도로 가는 배는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4시 30분까지 2시간 간격으로 뜬다. 성수기나 휴일은 증편 운항을 하고 기상 악화 시에는 결항하거나 시간이 변경될 수 있기 때문에 문의하고 가는 것이 좋다.(055-681-6007)

#묵을 곳·먹을 것=콘도, 방갈로 등을 갖춘 거제자연휴양림(055-639-8115)이 있다. 관광·가족호텔 및 펜션으로 거제관광호텔(051-632-7002), 도야거제가족호텔(051-681-6918), 거제도노루귀펜션(051-681-9890) 등이 있다. 베니키아호텔거제(051-991-1000)와 거제삼성호텔(051-631-2114) 등은 거제시청이 선정한 최우수 숙박시설이다. 지심도에도 동백섬민박(010-3655-2411) 등 펜션·민박집이 여러 곳 있다.

거제를 찾은 관광객들은 멍게나 성게비빔밥을 많이 찾는다. 봄에는 도다리쑥국과 제철 물회도 인기다. 지심도로 들어가는 장승포에는 간장게장집이 많은데 싱싱간장게장이 유명하다. 원조해물나라는 해물뚝배기로 많이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