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안영배 기자의 풍수와 권력_05

醉月 2014. 8. 25. 01:30

새만금 간척지 미래 한국의 서울 될까?

안영배 │동아일보 출판국 전략기획팀 기획위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새만금 개발사업이 진행 중인 고군산군도와 군산 및 변산 일대는 바다가 뭍으로 변한다는 예언의 실현화 현장이다. 고려가 풍수적으로 권력의 기운을 보충하려고 주목했던 곳이자, 삼국시대엔 미륵신앙의 핵심 근거지로서 미륵 용화(龍華)세계가 구현되는 터전으로 지목된 곳이기도 하다.
과연 새만금 지역은 미래 한국의 신수도가 될 수 있을까.

[한국의 대표적 미륵 성지로 꼽히는 금산사 미륵불상. 미륵불(가운데)이 새만금 지역을 바라보게 조성돼 있다.]

 

한반도에서 전북 군산과 변산을 포함한 새만금 지역은 우리 국토 경계선을 바꿔놓는 매우 ‘주목받는’ 지역이다. 풍수적으로도 한반도의 기운을 바꿔놓을 만큼 민감한 지역이기도 하다. 최근 새만금 개발사업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방한을 계기로 새삼 주목받는 분위기다. 한중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중국 간 경제협력 사례로 새만금 한중 경협단지(차이나밸리) 조성사업이 공동성명 부속서로까지 공식 발표됐다. 정상회담의 공식 의제로 채택됐다는 것엔 중요한 의미가 있다. 한중 경협단지 개발이 단순히 양국 정상의 립서비스 수준에 그치는 게 아니라 양국 중앙정부의 공조로 적극적으로 추진될 것이며, 국제적으로도 새만금 사업에 대한 각국의 투자 유치 활성화에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환경파괴 문제로 숱한 논란을 일으키기도 한 새만금 사업은 군산, 김제, 부안 앞바다를 연결하는 세계 최장의 방조제(33.9km)를 건설함으로써 4만100ha에 달하는 간척지를 확보하는 국책사업이다. 서울 면적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땅이 새로 생겨나는, 단군 이래 최대 국토 확장 사업일 것이다. 이 사업이 계획대로 진행된다면 100만여 명의 인구가 이 지역에 거주하게 되며,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중심 도시로 성장할 것이라고 한다. 새만금 사업의 장밋빛 청사진을 보면 한 나라의 수도 기능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다.

 

서해안 융기설과 ‘群倉萬里’

새만금 사업은 필자가 ‘신동아’ 7월호에 소개한 고군산군도의 선유도와도 연결돼 있다. 선유도를 포함한 고군산군도 일대까지가 모두 개발사업 영역으로 포함돼 뭍으로 변하게 되고, 선유도 망주봉 일대에 서린 강한 권력의 기운 역시 풍수적으로 새만금 간척지와도 불가분 연계되기 때문이다.

 

사실 새만금 사업이 진행되는 군산과 부안 일대의 지형이 바뀐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예언돼왔다. 조선시대 때 전라감사를 두 번이나 지낸 이서구(李書九·1754~1825)는 “수저(水低) 30장(丈)이요, 지고(地高) 30장(丈)이라”는 말로 부안군 변산 앞바다의 바닷물이 30장(약 90m) 밑으로 빠지면서 땅이 30장 높이로 올라오게 된다고 예언했다. 이는 서해안에서 발생하는 지각변동을 의미한다. 어찌 보면 새만금 사업은 서해안 지각변동의 전초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서해안 융기설은 예전부터 우리나라의 여러 선지자가 자주 거론했다. 지구가 선천(先天)시대를 마무리하고 후천(後天)시대로 돌입하면서 대규모 지각변동을 겪게 된다고 예언한 김일부(金一夫· 1826~1898)는 그가 남긴 ‘정역(正易)’에서 ‘수석북지(水汐北地) 수조남천(水潮南天)’이라는 글귀를 남겼다. “지구의 북쪽 땅에서 물이 빠지고, 남쪽 하늘로 물이 모여든다”라는 의미다.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탄허(呑虛·1913~1983) 스님은 북극의 얼음 녹은 물이 적도 부근으로 모여들고 이는 결국 일본의 침몰과 한국 서해안의 융기로 이어지는 지각변동을 낳게 된다고 예언한 바 있다.

 

이뿐 아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 수많은 기행 이적을 보인 강증산(姜甑山·1871~1909)과 원불교의 창시자 소태산 박중빈(1891~1943)은 새만금 사업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말도 남겼다. 강증산은 ‘남통만리(南通萬里)’라는 말로 서해를 개척해 우리 민족이 살 땅이 새로 나온다고 했고, 소태산은 ‘군산 앞쪽으로 창고가 만 리나 생겨난다’는 뜻의 ‘군창만리(群倉萬里)’를 예언했다. 이 때문에 오늘날 강증산을 교조로 받드는 증산교와 소태산을 받드는 원불교 신도들은 새만금 지역이 미래의 새 땅으로 부상할 것임을 예의주시하고 있기도 하다.

 

한반도에서 새로운 땅이 생길 경우, 이를 풍수적으로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먼저 한반도 풍수를 거시적으로 조망해보기로 하자. 이에 대해 언급한 이로는 조선시대 때 천문학 교수를 지낸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1509~1571)를 대표적으로 꼽을 수 있다. 유학자이면서 당대 최고 풍수지리가로 평가받은 남사고는 ‘산수비경(山水秘經)’에서 “한반도는 백두산 호랑이가 앞발로 만주 땅을 희롱하는 형상이며 백두산은 호랑이 코에, 호미곶(경북 포항의 영일만 동쪽)은 호랑이 꼬리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새만금 지역은 호랑이의 자궁

 

한반도를 호랑이 형세론으로 이야기할 경우 군산과 부안을 포함하는 새만금 지역은 호랑이의 아랫배, 즉 자궁에 해당한다. 이곳으로 흘러내리는 만경강과 동진강은 자궁의 길이 될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 기록되는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두고 풍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새만금방조제가 호랑이 자궁의 입구를 막은 데다, 만경강과 동진강 하구가 간척지로 변해 자궁의 길마저 없애버려 자손줄이 끊기는 형국이라는 것이다.

 

한편으로 한반도를 바다에 둘러싸인 물고기 형상으로 보는 풍수론도 있다. 이에 의하면 군산 및 변산 일대가 물고기의 배[魚腹]에 해당하며, 물고기의 내장은 금강이라는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물고기의 내장이 썩어 들어가면 민중이 그리워하는 새 세상이 열리게 된다는 풍수적 예언도 유행했다. 실제로 소백산맥에서 발원해 군산만으로 흘러드는 금강은 하구에 둑이 건설됨으로써 내장이 썩어 들어가는 모양새다.

흥미롭게도 한반도를 동물 모양에 비유한 두 풍수론에선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군산과 변산 지역이 생명을 잉태하는 부위라는 점이다. 그리고 지금 이곳이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낡은 몸을 벗고 새로운 몸체로 변신하기 위해 대공사 중에 있다는 것이다.

 

허균이 꿈꾼 해상왕국 신수도?

 

새만금 지역 모형 전시물.

반면 현재의 서울은 그 기운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세종시에 새 행정수도가 건설된 것도 풍수적으로 보자면 서울의 땅 기운이 더는 수도 기능을 감당할 능력을 상실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조선의 도읍지 서울, 곧 한양의 지기(地氣)가 쇠하고 있다는 주장은 이미 광해군(재위 1608~1623) 때 풍수사 이의신에 의해 일찌감치 제기된 바 있다. 이의신은 임진왜란과 역병의 창궐, 조정 관리들의 분당 싸움, 한양 도성 주변 사방의 산들이 헐벗은 것 등이 모두 도성의 왕기(旺氣)가 이미 쇠한 데서 기인한 것이므로 도성을 교하현(한양과 개성의 중간 지점인 파주 일대)에 세워 순행(巡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광해군은 여기에 솔깃했지만 이항복 등 조정 관리들의 반대로 무산됐는데, 이 같은 풍수 논리엔 지기의 변화가 국운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고가 개입돼 있다.

 

흥미롭게도 이의신의 주장과 궤를 같이하는 참언이 당시에 나돌았다. ‘일한(一漢) 이하(二河) 삼강(三江) 사해(四海)’라는 말과 함께 장차 서울이 바뀐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일한은 한강을, 이하는 교하를, 삼강은 강화도를 뜻했다. 한강은 이미 한양의 도읍지로 행사되고 있고, 교하는 이의신이 주장한 신도읍지이며, 강화도는 고려시대의 임시 도읍지였으니, 남은 것은 바다뿐이다. 이 바다는 어디를 가리키는 것이었을까.

 

풍수학자인 김두규 교수는 ‘사해’는 남해(南海)를 가리킨다고 보았다. 여기서 남해는 한반도 남쪽의 바다가 아니라 ‘동국여지승람’의 편찬자인 서거정이 지목한 ‘남해제도(南海諸島)’를 가리키는 것이며, “동쪽으로 삼각산 봉우리가 보이고 서쪽으로는 강화도가 두르고 있는 곳”이라고 했다.

 

그런데 필자는 당시 이 참언을 퍼뜨린 이로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1569~1618)이 지목됐다는 사실에 유의한다. 일생을 풍운아로 산 허균은 부안과 변산을 누구보다도 사랑한 사람이다. ‘홍길동전’에 나타난 이상향인 율도국이 바로 변산 앞바다의 섬을 모델로 했다는 얘기나 부안의 기생 매창과 시로써 플라토닉 러브를 나눈 얘기, 허균이 부안에서 반역을 도모했다는 설 등은 허균이 이 지역에 매우 집착했음을 대변한다. 따라서 허균이 새 도읍지로 지목한 ‘사해’는 변산 앞바다나 변산 앞바다의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이는 필자가 새만금 지역을 미래 한국의 새 핵심 도시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실 허균 이전부터 이 지역은 관심의 대상이었다. 풍수적으로도 변산과 그 앞바다의 고군산군도가 주목할 만한 곳임은 이미 고려시대 기록에서도 나타난다. 고려 왕실은 선유도 망주봉 일대에 왕이 임시로 와서 머무는 행궁을 건설하고, 개성의 주산인 송악산의 산신을 이곳으로 모시고 와 사당까지 지을 정도였다. 조선고지도엔 이곳에 고려의 왕릉이 묻혀 있다고 표시될 정도였으니 고려 왕실이 이곳에 각별한 관심을 쏟았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고려는 수도인 개경을 놓아두고 왜 외진 섬을 지목했을까. 바로 고려에서 횡행한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 때문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생로병사의 윤회 수레바퀴는 사람뿐만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땅도 비켜갈 수 없다. 지기는 왕(旺)하는 때가 있으면 쇠(衰)하는 시기가 있다.

 

풍수설에 따라 개경을 도읍지로 정할 정도로 풍수를 신봉한 고려 왕실은 지기쇠왕설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훈요10조’라는 유훈에서 “서경(西京·평양)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을 이루고 있어 길이 대업을 누릴 만한 곳이니, 사중(四仲·쥐, 말, 토끼, 닭의 해)마다 순수(巡狩)해 100일을 머물러 안녕을 이루게 하라”고 각별히 당부할 정도였다. 개경을 수도로 삼되, 수(水)의 기운이 좋은 서경의 지기를 끌어 씀으로써 고려의 국운을 왕성히 하라는 왕건의 유훈은 이후 서경길지설로 유행하다가 후에는 서경천도론으로까지 이어졌다.

 

서경길지설과 함께 지금의 서울인 남경길지설 또한 일찌감치 대두됐다. 고려 문종(재위 1046~1083) 때부터 남경의 지기를 주목한 이후 숙종 원년(1096)엔 김위제가 ‘도선비기(道詵秘記)’의 예언에 따라 남경 천도를 주장했다. 이에 따라 숙종은 ‘남경개창도감’이라는 기구를 설치하고, 3년 후인 1104년 남경의 궁궐을 완성하기도 했다.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도 지기쇠왕설을 믿고 한양 천도를 단행했지만 결국 이성계에게 나라를 뺏기고 말았다.

 

이처럼 도읍지의 기운이 쇠하면 도읍지를 기운이 왕한 곳으로 옮기거나, 최소한 왕한 곳의 기운을 끌어 써야 한다는 게 지기쇠왕설의 핵심이다. 고군산군도의 선유도 역시 지기쇠왕설의 논리에 의해 고려 왕실에서 그 기운을 끌어 쓰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륵신앙의 핵심지, 변산

한편으로 새만금 사업이 진행 중인 부안과 변산 일대는 종교적으로도 주목받던 곳이다. 이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백제계 미륵신앙의 핵심 센터이기 때문이다. 미륵불은 석가모니 부처 사후 지상에 내려와 ‘용화세계(龍華世界)’라는 새 세상을 건설하는 메시아로서 우리 민족의 열렬한 신앙 대상이 돼왔다. 종교로 치면 기독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후 다시 지상에 등장한다는 ‘재림 예수’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정치적으로도 난세에 이르면 혜성처럼 등장한 영웅호걸들이 자신의 나라를 세우려 할 때 어김없이 ‘미륵’이라는 상표를 들고 나왔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 태봉을 세운 궁예 등이 그 대표적 사례다.

 

그리고 이 미륵신앙을 한반도에서 본격적으로 퍼뜨린 곳이 바로 변산이다. 의상봉 꼭대기의 불사의방(不思議房)은 미륵이 지상에 출현한다는 미륵하생 신앙의 근원지다. 통일신라 시대의 백제계 유민인 진표율사는 불사의방에서 강렬한 영적 체험을 했다. 그는 망신참법(亡身懺法·몸에 극단적인 고통을 주는 참회법)이라는 수행법으로 무릎과 팔뚝이 깨져 피가 터져 나올 정도로 수행한 끝에 지장보살로부터 정계(淨戒)를 받았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미륵보살을 친견하는 것이 소망이었던 그는 인근의 영산사(靈山寺)로 장소를 옮겨 더욱 수행에 정진했다. 마침내 미륵보살이 진표율사 앞에 나타나 그의 깊은 신심을 칭찬하고 점찰경(占察經) 2권과 점찰간자 189개를 주었다. 진표율사가 미륵보살의 수기(授記)를 받은 이후 미륵신앙은 이 땅에서 크게 개화한다.

 

진표율사는 이후 금산사(전북 김제)에 16척이나 되는 거대한 미륵보살을 조성했다. 그때부터 오늘날까지 금산사는 한국 미륵신앙의 성지가 된다. 필자는 지난 6월 중순 진표율사가 세운 미륵불상을 보기 위해 금산사를 방문했다.

 

미륵불상을 모신 미륵전(국보 제620호)은 겉모습은 3층 목조건물 형태인데,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3층 전체가 하나로 터진 우리나라 유일의 통층 법당이다. 필자는 높이 11.8m에 달하는 장엄한 미륵불상을 보면서 바로 앞 면전에서 ‘무엄하게도’ 패철을 놓아보았다.

필자는 풍수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들를 때마다 습관적으로 방위를 재본다. 방위를 중요시하는 이기파 이론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건 아니지만, 풍수학을 전공하다보니 버릇처럼 그리된 듯하다. 스마트폰 앱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는 ‘패철’을 내려받아 손쉽게 방위를 재보는 재미도 없지 않다.

 

아무튼 미륵전에 모셔진 미륵불상의 눈이 향하는 곳을 방향으로 재보면서 필자는 흠칫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미륵불상은 진좌술향(辰坐戌向)의 좌향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서서북 방향, 즉 새만금 사업이 진행되는 부안, 군산 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일부에선 미륵불상이 원래는 석련대(石蓮臺)가 있는 곳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석련대의 꼭대기 중앙엔 불상의 양쪽 발바닥에 촉을 끼우기 위해 만든 홈이 두 개 파여 있는데, 금동불입상의 대좌(臺座)에서 흔히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설령 미륵존불이 현재의 석련대 위에 세워져 있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미륵불상이 바라보는 방향 역시 서서남쪽으로 새만금 일대를 가리켜 별 차이가 없다.

 

백제 미륵불상이 서남향인 까닭

금산사 미륵불상은 왜 변산 쪽의 서해안을 바라보고 있을까. 단순히 불상 조성 과정에서 건물 배치상 그렇게 된 것일까, 아니면 변산 쪽에서 새로운 세계인 미륵 세계가 펼쳐짐을 암시하는 것일까. 애초 금산사 방문을 위한 여행은 내친김에 삼국 시절 백제 미륵신앙의 구심점이었던 익산의 미륵사지로 이어졌다.

 

신라에 병합되기 전 백제 무왕은 백제가 미륵하생의 땅으로 선택되기를 희망하며 익산 용화산 아래에 미륵사를 크게 지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선화공주와 혼인한 백제 무왕은 선화공주와 함께 용화산(현재 미륵산)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찾아가던 중에 갑자기 연못 속에서 미륵삼존의 출현을 목격하게 되고, 여기에 미륵사를 창건하게 됐다고 한다. 원래 미륵사는 미륵삼존불을 모신 3동의 금당과 금당 앞으로 각기 중앙의 목탑 1기 및 동서 양쪽의 석탑 2기가 배치됐으나, 현재는 동탑만이 복원돼 있을 뿐이다. 다행히 미륵불을 모신 금당터와 탑지는 원형대로 발굴돼 중앙의 미륵불이 서 있었을 방향은 가늠할 수 있다.

 

필자는 중앙 금당지 한가운데서 다시 한 번 패철을 놓아보았다. 놀랍게도 이곳에 모셔졌던 미륵불 역시 서남향으로 변산 쪽을 향했다. 정확한 각도를 재어보니 남북 자오선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23도 기울어진 방향을 바라보며 미륵불이 조성돼 있었던 것이다.

 

금당터에서 방향을 재어본 뒤 중앙의 목탑 터와 동편의 석탑을 둘러보면서 필자는 묘한 감흥을 받았다. 목탑 터는 전형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대한 천기(天氣)의 응집터였다. 다만 천기 중에서는 사람에게 해로울 수 있는 살기(殺氣)가 군데군데 섞여 있었는데 정확하게도 목탑과 두 석탑이 서 있는 자리에 해당했다. 즉, 미륵사의 탑은 살기를 막아주는 비보사탑이었던 것이다. 9층으로 옥개석을 한 동탑의 경우 층층마다 탑의 옥개석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기 중의 살기를 완화시키는 완충작용을 함으로써 지상에서는 살기가 전해지지 않도록 배려했던 것이다. 목탑과 현재 복원 중인 서탑 역시 마찬가지 기능을 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이렇게 정화된 천기 역시 미륵사지에서 강한 에너지를 뿌리면서 미륵불이 바라보는 저 멀리 서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었다. 미륵사와 항상 대비되는 신라의 황룡사 9층목탑의 경우처럼 기(氣)에너지가 굴절 현상에 의해 다른 목적지를 향해 뻗어나가는 것이다. 미륵사를 세우고 익산에 신 도읍지를 건설해 지상의 용화세계를 펼치려 했던 백제 무왕의 꿈은 아직 때가 멀었음인지 좌절되고 말았다. 대신 미륵사를 건설한 백제의 장인들은 먼 후세에 새만금 지역의 찬란한 세상을 내다보고 미륵불상과 탑을 세웠던 것일까.

새만금 사업이 앞으로 어떻게 진척될지는 더 지켜볼 일이다. 다만 백제인이 꿈꾼 미륵 신세계의 구현지로서, 또한 서해안 시대를 여는 미래 대한민국의 기지로서 새만금 사업이 성공하기를 풍수학자로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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