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목숨을 믿음과 바꾼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요. 서슬 퍼런 죽음의 위협과 끊임없는 배교의 회유. 그 앞에서 믿음 하나만으로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생명을 미련 없이 툭 하고 꽃잎처럼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충청도 서해안 일대의 내포(內浦)지방에서 천주교 성지(聖地)를 찾아 나선 길이었습니다. 죽음이 붉은 꽃잎처럼 떨어져 피로 굳어진 자취를 둘러보는 내내 맴돌았던 건 그들이 끝내 지키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그 길에서 떠올린 건 교황 프란치스코가 무신론자의 질문에 띄운 편지글이었습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란 사실은, 인간이 넘어설 수 없는 ‘경계’가 있음을 밝히려는 게 아니라 우리 모두 형제라는 사실을 말해 주기 위함입니다.” 교황은 “예수의 비범함은 배척이 아니라 소통의 원천”이라고 했습니다. 예수가 서있는 곳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자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있음을 증거한다’는 뜻이겠지요. 이럴 때 종교는 무릇 ‘관계와 소통’입니다. 종교가 믿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나누고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함께하는 이들에게 온전히 사랑을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는 이야기이겠지요. 가장 처절한 순교가 있었던 자리. 충남 서산시 해미면의 해미읍성 앞에 섰습니다. 스스로의 믿음을 지키며 이웃들과의 관계와 소통을 꿈꾸던 이들이, 단지 그랬다는 이유만으로 비참한 죽음을 당한 자리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가 며칠 뒤 방문하게 될 이곳에는 박해의 시기, 천주교인들의 주검이 줄줄이 내걸렸다던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우뚝 서서 과거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름 햇살이 온통 노랗게 기울 무렵에 그 거대한 나무 아래 섰습니다. 회화나무 가지 끝에 활짝 피어났던 꽃이 분분히 날리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어렴풋이 오래전의 죽음이 지키고자 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비참한 죽음으로 나뭇가지에 내걸린 이들이 스스로의 믿음을 넘어서 ‘함께하는 이’들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해미읍성 위로 숭고한 오후의 노을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 처참했던 죽음의 자리에 화려한 꽃이 피어나다 이 땅의 첫 번째 사제였던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자리인 충남 당진시 우강면의 솔뫼성지. 그리고 가장 처참했던 순교의 장소였던 서산시 해미면의 해미읍성, 이 두 곳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우리 천주교사에서 의미 깊은 곳이다. 두 곳은 특히 방한하는 교황 프란치스코가 잇따라 방문한다는 점에서 더욱 각별하다. 교황은 방한 이튿날인 오는 15일 오후 솔뫼성지에서 아시아 청년 6000여 명 앞에서 질문과 대답으로 이어지는 연설을 한다. 그리고 출국을 하루 앞둔 17일에는 해미읍성을 찾아가 아시아청년대회 폐막미사에서 23개국 청년들에게 강론을 한다. 먼저 당진의 솔뫼성지 얘기부터. 솔뫼는 말 그대로 ‘소나무 동산’이다. 솔숲이 우거진 구릉의 한쪽에 한국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생가 ‘대건당’이 있다. 김 신부의 가문은 4대에 걸쳐 순교한 집안이다. 신부의 증조할아버지 김진후는 해미에서 순교했고, 작은할아버지는 대구에서, 아버지는 서울 서소문 밖에서 목숨을 잃었다. 김대건 신부도 1846년 한강의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4대에 걸쳐 목숨을 바친 순교의 의미만으로도 성지는 경건하다. 기와집으로 복원한 생가가 아무래도 너무 번듯한 듯 해서 어울리지 않지만 그렇다고 경건함의 무게는 다치지 않는다. 무분별한 벌채로 숲이 남벌되던 시절에도 솔뫼의 오래된 소나무들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던 건 이런 경건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잘 자란 솔뫼의 솔숲은 ‘당진팔경’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생가 앞에는 쪽찐 머리에 한복 차림으로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상이 있다. 성모상은 솔뫼성지에서 ‘작은 기적’으로 통한다. 10여 년 전쯤 아이를 낳지 못하던 신도가 이곳에서 기도를 올린 뒤 꿈에 한복을 입은 여인이 아이를 건네주는 꿈을 꾼 뒤 아이를 수태했단다. 성모상은 그 신도가 기부해 세운 것이다. 생가 앞에 성모상이 세워진 뒤에 아이를 못 낳는 이들이 찾아와 기도를 올렸고, 마찬가지로 아이를 갖게 된 경우가 적지 않다. 성지성당의 신부들은 교황 프란치스코의 솔뫼성지 방문 때 이렇게 기도로 낳은 아이들을 초대하기로 했다. 불편한 몸으로 유모차에 의지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지성당의 미사를 단 하루도 거르지 않았던 세 명의 할머니도 아이들과 함께 초청됐다. 미사를 마친 뒤 유모차를 끌고 솔뫼 언덕을 마치 슬로모션처럼 느릿느릿 넘어가는 세 할머니의 모습은 자못 감동적이었다. # 무자비한 죽음의 기억 앞에 십자가를 세우다
1790년부터 100여 년에 걸쳐 해미읍성에서 벌어진 살육은 끔찍했다. 믿음에 대한 대가는 무자비했다. 나무에 매달았고, 쇠도리깨로 머리를 때려 죽였다. 돌다리에 수없이 내던져 뼈를 부수기도 했다. 무엇이 사람들을 그리 잔혹하게 만들었을까. 무진박해(1868년) 때는 처형조차 수고스럽다고 생각했던지 아예 들판에 산 사람을 묻는, 말 그대로 ‘생매장’을 하기도 했다. 여름에는 밧줄로 엮어서 개울가에 수장했다. 버려진 시신들이 산더미를 이뤘다. 그야말로 피의 ‘제헌(祭獻)’이 이뤄지던 현장이었다. 해미에서 순교한 이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다. 수천 명에 이른다는 순교자 중에서 확인된 이들만 132명에 달하는데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 중에서는 인언민, 이보현, 김진후, 이 세 명이 교황 프란치스코가 방한해 주재하는 시복 미사에서 복자품에 오르게 된다. 해미읍성에는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흔적이 드문드문 남아 있다. 그중 200여 년 전의 죽음을 현재로 생생하게 가져오는 것이 신자들의 머리채를 매달았다는 회화나무다. 한껏 가지를 뻗으며 번성하고 있는 이 나무는 충청도 방언인 ‘호야나무’로 불린다. 주변에 여덟 그루의 회화나무를 더 심었는데, 나무마다 가지 끝에 환한 백색의 꽃을 피웠다가 이제 막 꽃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회화나무 뒤쪽에는 1935년 ‘해미순교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한 당시 감옥도 있다. 신자들을 처형할 때면 읍성 서문 밖으로 끌고 나갔는데, 그래서 당시 신도들 사이에서 읍성 서문을 ‘천국으로 가는 문’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서문의 난간에는 신도들로부터 뺏은 십자가와 묵주를 놓아 두고 순교자들이 문밖을 나갈 때 밟도록 강요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목숨을 구걸해 보라는 뜻이었다. 서문 밖 그때의 자취에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조성돼 있는데 그 길을 따라가면 순교성지인 해미성지에 이른다. 성지에는 성당과 함께 신도들을 수장했던 연못이며, 신도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서 죽을 때까지 짓찧던 돌다리가 남아 있다. 천국의 문. 죽음이 지나간 지 200여 년 만에 그 자리에 교황이 온다. 서문 옆의 제대에는 23개국 청년들이 장식한 십자가가 세워지고 그 앞에서 교황 프란치스코가 미사를 드리게 된다. # 백사장을 물들인 피의 흔적
시간의 태엽을 감아 보면 연유는 이렇다. 일찌감치 사형선고가 내려졌으나 고종이 마침 병중인 데다 혼인을 앞두고 있어 ‘서울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이 좋지 않다’는 무당과 점쟁이의 말에 따라 처형 장소를 보령으로 바꿨다. 굳이 보령을 택한 건 천주교 탄압과 학살에 항의하던 프랑스 함대의 외연도 정박 사건을 겨냥한 것이었다. 조정은 주교와 신부의 목을 베는 것으로 프랑스 함대에 ‘서양 오랑캐를 내친다’는 의지를 보여주려 했다. 외연도를 바라보며 다블뤼 주교는 목이 베어졌고, 갈매못의 백사장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성지로 향하는 길에는 보령방조제를 거치게 되는데, 방조제를 다 지나서 위쪽을 올려다보면 산 정상 바로 아래 거대한 스카이워크처럼 지어진 전망대가 우뚝 세워져 있다. 근래 새로 세운 ‘팔색보령수필 전망대’다. 천수만 낙조와 갈매못성지 일대의 풍경, 내포의 내륙 등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팔색보령수필’이란 보령 출신 문인 이문구의 ‘관촌수필’의 8가지 주제를 모티브로 경관을 조성했다고 해서 붙인 이름이다. 전망대 반대편 산자락의 절집 선림사를 끼고 비포장도로를 따라가면 금세 전망대에 닿는다. 전망대를 거쳐 바다가 내다보이는 성지로 들어서면 멀고 먼 이역 땅에 와서 스스로 칼날에 머리를 드리웠던 성자의 최후가 떠올려져 가슴이 뭉클해진다. 마당에는 순교비와 기념관, 다블뤼 주교상 등이 있고, 뒤쪽 언덕에는 독특한 모습의 기념성당이 들어서 있다. 놓치지 말아야 할 곳이 바로 기념성당이다. 성당은 뒤쪽 문이 계폐식으로 설계돼 문이 열리면 야외의 공간까지 성당이 된다. 성당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것은 스테인드글라스다. 스테인드글라스의 강렬한 붉은색을 투과한 빛이 성당 내부를 감싸는 모습은 비장하고도 엄숙하다. # 황새바위 순교성지에서 평화를 보다 박해의 시기 천주교도들의 피로 물든 또 한 곳이 공주의 황새바위 순교성지다. 황새바위란 이름은 솔숲 그늘 아래 황새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붙여졌다는 이야기도 있고, 천주교 죄인들이 ‘항쇄’라는 칼을 목에 쓴 채 바위 앞에 끌려가 처형됐다고 붙여진 이름이란 설도 있다. 공주의 공산성을 마주 보는 자리에 있는 황새바위성지는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순교의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이다. 여기서 목숨을 잃은 순교자는 명패로 새겨진 것만 248명에 달한다. 어찌나 많은 이들이 처형됐던지 순교자들이 흘린 피로 바위 앞을 흐르는 제민천의 물이 피로 붉게 물들 정도였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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