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돌조각의 비밀은 신비한 화강암의 힘
열다섯 살에 석굴암을 보고 돌의 신비한 매력에 빠진 그는 좋은 스승과 인연의 이끌림으로 조각가의 길을 걸어왔다.
조각하기 힘든 화강암으로 불상과 보살상 외에도 석탑과 비석 같은 문화재를 재현하고 창작품도 만들어왔다.
살다보면 아주 소중한 것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처음부터 늘 그 자리에 있어서, 너무나 흔해서 그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한다. 가족, 친구가 그렇고 공기나 물이 그렇다. 발에 차일 만큼 흔해서 ‘무가치함’을 뜻하는 돌 역시 그렇다. 석장 이재순에게 돌은 지구를 지탱하는 소중한 존재다.
“흔히 돌을 우직하고 멍청한 것으로 알지만 저 산도 돌이 없으면 서 있지 못하고 땅을 2, 3m만 파도 돌이 나옵니다. 사실 흙도 돌의 다른 모습이지요. 그러니 돌 없이는 세상이, 아니 우주도 이루어질 수가 없어요.”
우주의 숱한 별 가운데 물이나 공기 없는 별은 있어도 돌 없는 별은 없으니, 그의 말은 일리가 있다. 어쩌면 우리 발밑의 돌이야말로 저 하늘의 별과 가장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고대인들은 큰 돌에 별자리를 새겼고, 돌로 무덤을 만들었고, 가장 신성한 조각도 돌에다 남겼다.
“돌은 나무나 금속보다 더 오래 견디니 소중한 것일수록 돌에다 남기려 한 거지요. 특히 화강암은 내구성이 가장 뛰어난 돌이어서, 이집트 신전 앞의 스핑크스는 사암으로 만들었지만 신상은 화강암으로 만들었어요.”
숭배 대상인 신을 표현하기 위한 돌이라니, 이쯤 되면 돌에도 격이 있다고 해야 할까. 화강암은 쥐라기와 백악기에 형성된 돌로 이미 1억~2억 년은 된 것인데, 앞으로 얼마나 긴 억겁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낼지 가늠이 안 된다. 그러니 지상에서 영원성을 담을 수 있는 물질은 돌밖에 없고, 신의 형상을 돌로 만든 것은 당연해 보인다.
“산도 돌 많은 산을 영산(靈山)이라고 했으니, 돌에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는 것 같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은 무슨 소원이든 한 가지는 꼭 들어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천년 넘게 비바람을 견딘 화강암 부처님인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찾아와 빌었겠습니까? 그 세월과 사람들의 염원을 고스란히 담고 있어서 더욱 영적인 기운을 내는 것 같습니다.”
화강암의 나라
강한 돌, 화강암은 가장 한국적인 돌이기도 하다. 산이 7할을 차지하는 이 땅에서 나오는 석재의 9할이 화강암이다. 게다가 채취 역시 힘들지 않게 죄다 바깥에 나와 있다.
“밖으로 드러난 돌을 뜬돌(부석浮石)이라고 합니다. 땅을 파서 돌을 캐는 채석장과 달리 땅 위의 돌을 가지고 오기 때문에 예전에는 돌 캐는 곳을 부석소라고 했지요. 워낙 산이 많고 절벽도 많아서인지 떨어진 돌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만큼 흔하다보니 우리 민족이 가장 즐겨 이용한 소재가 바로 돌이고, 화강암이다. 풍화작용에 강한 화강암은 그러나 결이 치밀해 조각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섬세한 조각보다는 부드러운 선으로 특징을 잘 잡아 표현하는 ‘원만한 조각’을 주로 한다.
“같은 화강암이라도 입자가 작은 것(소매)으로는 섬세하게 표현하지만 보통 화강암으로는 원만한 조각이 자연스럽게 어울리죠. 또 색깔이 예쁘거나 문양이 화려한 돌은 시간이 지나면서 칙칙해지는데, 우리 화강암은 처음에는 아무 색깔도 안 나다가 세월이 흐를수록 고상한 빛을 띠게 됩니다.”
화강암 예찬을 듣지 않더라도 그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화강암 조각이 우리나라 사람의 가슴에 깊이 들어와 있음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돌의 거친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은은한 백색 돌에 새긴 부드러운 선. 어쩌면 너무 매끄럽지도 않고, 지나치게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아서 더 신비하고 다정한 느낌을 주는지도 모른다. 화강암 조각이 비록 섬세하지 않다 해도 우리 석장의 솜씨가 섬세하지 않은 건 결코 아니다. 외국 조각가들은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이 만지는 우리 돌조각가의 솜씨에 경탄하곤 한다. 조각하기 힘든 그 단단한 돌에 조각을 해왔으니 무른 돌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경기도 구리에 있는 이재순의 실내 작업장에는 소매 화강암으로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한 관음보살상이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어 눈길을 끈다. 하지만 마음을 끄는 것은 역시 저 바깥 태양 아래 바람을 맞는 원만한 조각품들이다.
석수의 길로
1955년생인 이재순의 고향은 전남 담양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적당한 높이의 월봉산과 어울리는 적당한 들판, 그리고 물 좋고 인심도 좋아 ‘훌륭한 고장’인 담양은, 돌보다는 대나무와 인연 깊은 곳이다. 팽이 치고 썰매 지치고 연 날리며 놀던 어린 시절, 그는 팽이나 썰매, 연과 얼레를 직접 만들 정도로 솜씨가 좋았다. 이 솜씨 좋은 담양 소년은 죽세공품을 만드는 채상장이 됐을 법한데, 이모가 석물공장에 일하러 다니는 바람에 돌과 인연을 맺게 된다.
“이모 소개로 두 외삼촌과 형이 석물공장에 나가게 됐고, 외삼촌이 서울로 올라오면서 저도 나중에 서울로 왔습니다. 형은 광주에서 석물 일을 배우다 왔지만, 저는 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상태로 올라왔지요.”
처음 서울에 왔을 때 그의 나이 열네 살. 그러나 곧 광주로 내려가 양복점에서 두세 달, 가구점에서 반년 정도 일을 했다. 솜씨가 좋았으니 훌륭한 소목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주인 아들 때문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목수 일은 재미도 있고, 주인도 좋아했습니다. 제가 중학교 검정시험을 보겠다고 하니 개인교습까지 받게 해줬는데 밤마다 주인 아들과 어울리는 패거리가 드나들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더군요.”
그래도 가구점에서 익힌 결구법(나무를 끼워 연결하는 법)이 나중에 돌 일 할 때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돌 작업에도 목공의 결구법과 비슷한 방식이 있기 때문이다.
“양복점에서 배운 바느질도 도움이 됐어요. 조각 역시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정으로 일일이 쪼아 다듬거든요. 지금 보면 모든 일이 다 석공이 되기 위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사람의 운명이란 이처럼 오묘한 것이니, 주인 아들의 행패도 나무랄 수가 없다. 그의 인생 여정은 마치 훌륭한 석장이 되기 위해 누군가가 짜놓은 각본처럼 보일 정도다. 열다섯에 다시 서울에 올라온 그는 돌 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당시 한창 짓기 시작한 성북동의 고급 주택과 남산 어린이회관, 연세대 정문 일을 했다. 그리고 2년도 채 못 돼 문화재 일을 주로 하던 김부관 선생 작업장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런 중요한 만남에 특별한 계기가 있지 않나 물으니, 그저 일자리가 있어서 ‘일하러 간 것’이라는 ‘쿨’한 대답이 돌아온다.
“김 선생님은 불국사의 청운교와 백운교를 복원하신 분입니다. 제가 그곳에서 일하는 동안 마침 불국사 복원 작업이 있었어요.”
비록 그는 현장에서 일하지는 못했지만 불국사에 들어가는 돌을 준비하고 다듬는 치석(治石) 일을 서울 창동 작업장에서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조각의 명수이자 그에게 가장 중요한 스승인 김진영 선생 밑으로 들어간다. 이번에야말로 특별한 인연이 있었을 법한데 역시 “그쪽에 일손이 필요하다 해서 일하러 간 것”이라고 한다. 여느 장인처럼 일자리를 찾아간 것뿐인데 처음엔 석조건물이나 다리 등 구조물 복원에 뛰어난 장인을 만나 치석하는 법을 배우고, 그다음엔 조각 명장 아래로 들어간 것이다. 더구나 두 사람 다 문화재를 복원하는 일을 많이 맡는 당대 최고의 장인이니, 정말 짜놓은 각본 같지 않은가.
“김 선생님은 돌조각으로는 최고였지요. 4·19탑을 만드셨고 전통 비(碑), 용이나 사자 같은 조각을 잘하셨습니다. 조선시대 말 경복궁의 석조물을 만든 이세욱을 잇는 김맹주의 제자로 정통의 기술을 이어받으셨지요.”
이렇게 화려한 계보를 가진 김진영 선생은 당시 망우리에서 신진석재를 이끌고 있는 사장이기도 해서 어린 석공에게 일일이 기술을 전수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김선생은 조각 잘하기로 이름난 권경섭이라는 이를 경주에서 초빙해온 게 아닌가.
“솜씨 좋은 석수를 특별 채용한 것이었지요. 김 선생님 밑에서 10년 있는 동안 권 선생님과 5, 6년을 보내면서 많이 배웠습니다. 권 선생님은 특히 모형을 기막히게 잘 만드셨습니다.”
원만한 조각을 할 때는 직접 돌에다 밑그림을 그려 조각을 해도 되지만 섬세하고 정확하게 조각할 때는 미리 모형을 만들어야 한다. 조각의 기초라고 할 모형 실력까지 완벽하게 갖추게 된 셈이다. 양복점에서 가구점, 돌 다듬는 치석부터 모형 작업까지 그가 배워야 할 것은 다 배운 성싶다. 뛰어난 솜씨? 그것은 타고났으니 스스로 해나가면 될 터였고, 장인으로서 배워야 할 것은 더 없는가? 물론 있다. 바로 예술적 안목과 우두머리 석수로서 다른 석수들을 이끌 능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능력은 바로 김진영 선생이 키워주었다.
“기술은 권 선생님한테 배웠고 세상을 보는 눈이랄까요, 제 눈을 크게 틔워주신 분은 김 선생님이었습니다. 김 선생님은 매우 지적인 분으로 교수나 실내장식가들과 자주 어울리셨는데, 그런 자리에 어린 저를 잘 데리고 가셨어요. 그분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 문화나 불교미술 등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됐지요.”
또 김 선생은 스승으로서 제자를 격려할 줄 알고 사장으로서 사람을 잘 관리하는 ‘노하우’를 가진 이였다. 그는 김진영 선생 아래서 많은 것을 배운 덕에 고작 스물셋 나이에 쉰 명이 넘는 인부를 관리하는 공장장이 되었을 때도 무리 없이 해나갈 수 있었다.
돌 공장에서 쫓겨나 석굴암으로
이처럼 그에게 찾아온 인연은 훌륭한 석수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인연이란 자신이 갖고 있는 의지가 인(因)이 되고 주변 조건이 연(緣)이 된다. 바깥 조건은 이렇게 완벽한데 그의 의지는 어땠을까?
“사실 처음에는 돌에 별다른 애착이 없었지요. 낮에는 돌 공장에서 일했지만 밤에는 야학에 다니며 진학할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김진영 선생님 밑으로 들어오자마자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솜씨 좋고 치석도 할 줄 알았던 어린 그가 선배들보다 일을 잘하니 밉보였던 것 같다. 사소한 실수가 빌미가 되어 쫓겨난 뒤 딱히 갈 곳이 없던 그는 그저 구경이나 해볼까 싶어 석굴암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돌의 매력에 사로잡히고 만다.
“돌로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니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돌이 가진 비밀을 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서 돌에 전념하자는 결심을 하게 됐지요.”
이렇게 큰 발심까지 했으니 곧장 공장으로 돌아간 그가 어떤 마음으로 돌을 다듬었을지, 그리고 어떻게 곧 김진영 선생의 눈에 띄고 어린 나이에 공장장으로 오르게 됐을지 짐작이 간다.
“석굴암에서 언젠가는 나도 이런 석불을 꼭 만들어봤으면 하고 바랐는데, 훗날 대만에서 석굴암과 비슷한 부처님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아 그 소원도 이루어졌습니다.”
앉아서 입적한 대만의 유명한 자항대사를 기리는 자항기념관에 안치할 아미타불상을 조성하기 위해 신도들이 세계의 석불을 다 보고나서 “역시 석굴암이 최고”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에게 청탁을 해와 석굴암 본존불의 1.7배가 넘는 거대한 불상을 만들게 됐다. 1995년 배로 옮겨 안치하는 날, 서방정토를 대표하는 아미타불이 서쪽을 향해 앉자 마침 구름이 걷히고 석양빛이 불상을 비춰 대만 신도들이 탄복을 했다. 석굴암 부처님의 영험이었는지, 아니면 그가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그의 인생은 신기한 대목이 참 많다. 오죽하면 그 자신도 놀랄 때가 많다고 할까.
세계기능올림픽
그가 정말 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 있다. 1977년 네덜란드 유트레히트에서 열린 세계기능올림픽 대회에 참가했는데, 본래 석공 분야는 국제대회 참가 자격조차 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저는 국제대회가 있다는 것도 몰랐어요. 부산에서 열린 전국기능올림픽에서 메달을 따고 참가자들과 함께 올라오면서 모임을 만들었는데, 제가 스물두 살로 나이가 많은 편이어서 회장이 됐어요. 그 모임에서 국제대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시는 기계 분야의 기술력을 키우는 데 주력하던 때라 석공 분야는 세계대회에 내보내지 않았다. 그는 국제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에 찾아가 석공도 보내달라고 했지만 예산이 안 된다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낙선 전 국세청장이 새로 회장으로 오면서 “이번에는 세계대회에서 종합우승을 해보자”며 참가 부문을 늘리게 됐다. 이낙선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5·16을 함께한 사람으로 당시 가라앉은 국내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이런 구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재순은 자신이 조르고 부단히 노력한 덕택에 이런 행운을 만난 것이라 믿는다. “달걀로 바위 치기 같아 보이는 일도 꾸준히 하다보면 언젠가는 바위가 깨질 때가 있다”며 웃었다.
이렇게 기적 같은 행운을 만나 참가한 세계대회에서 그가 받은 과제는 기하학적인 도형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런데 재료로 나온 돌이 화강암과는 반대로 아주 무른 석회석이었다.
“도쿄에서 열린 그전 대회에 대리석이 나왔다는 말을 듣고 대리석은 만져봤지만 석회석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지요. 연장부터 맞지 않으니 당황할 수밖에요.”
하루 여덟 시간씩 사흘에 걸쳐 완성해야 하는데, 첫날 그는 자신의 연장을 석회석에 맞게 가늘고 뾰족하게 다듬는 데 하루를 다 썼다.
“첫날 작업은 하나도 못하고 저녁에 숙소로 돌아오자 인솔자들이 저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금메달 가능성이 있는 친구들만 챙겨주더군요. 서러웠느냐고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섭섭하기도 했지만 당시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혼자서 차분하게 작업을 구상하고 정리하는 편이 더 좋았습니다.”
스물두 살, 세계기능올림픽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고 종합우승한 기념으로 청와대에서 훈장을 받았다. 박정희 대통령은 공고에 직접 와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기능에 관심이 많았다. 박근혜 대통령의 당시 모습이 앳되다.
다행히 나머지 이틀 동안 작업을 마칠 수 있었고 결과도 좋아 은메달을 받게 됐다. 그런데 심사위원들이 돌아가며 서명할 때 한국 측에서 이의를 제기했다.
“금메달은 유럽 참가자가 받기로 되어 있었는데, 작품에 흠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지금까지 그 대회에서 심사 결과가 바뀐 것은 이때가 유일할 정도로 드문 일인데, 제가 운이 좋았지요.”
그 작품은 유트레히트 박물관에서 달라고 해서 흔쾌히 기증했다고 한다. 종합우승한 참가자들은 귀국 후 청와대에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동탑산업훈장을 받았는데, 그 자리에는 당시 퍼스트레이디 노릇을 하던 박근혜도 있었다. 37년이 지난 올해 숭례문 낙성식에서 그는 대통령이 된 박근혜를 봤고 얼마 뒤 청와대에 초대받아 가서 이번에는 박근혜 대통령과 기념촬영을 했다.
우리 문화재의 7할이 돌로 된 것이다보니, 그는 문화재를 복원하거나 수리, 재현하는 일을 많이 하게 됐다. 월정사 경내 탑 앞에 앉아 있는 유명한 보살좌상과 원주 거돈사 터의 아름다운 원공국사의 사리탑 등 보물을 재현한 것도 그다. 지금은 고달사 터에서 나온 멋진 구양순체의 원종대사비를 재현하고 있다. 2005년 일본에서 돌아온 북관대첩비의 지붕돌과 기단도 그가 만들었는데, 여기에는 재미난 사연이 있다.
북한 국보가 된 북관대첩비
“임진왜란 때 함경도 의병장 정문부의 전승을 기념한 비(碑)인데, 러일전쟁 때 일본군이 가져가 야스쿠니 신사 뒤쪽에 처박아두었답니다. 기단과 지붕돌은 없이 몸돌(탑신) 위에 커다란 자연석을 얹어놓고요.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이 이를 돌려받을 생각을 하고 제게 지붕돌과 기단을 준비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내어줄지 어쩔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선뜻 응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만약 돌아오지 못하면 예산이 집행되기 어려워 그 부담을 그가 다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런 일이 저에게 온 것은 영광이고, 비가 돌아올지 못 올지는 하늘에 달린 거니 모든 걸 하늘에 맡기고 해보겠다고 했지요.”
사실 일본은 비를 내줄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본래 북한 것이니 북한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북한이 한국에 이를 허락할 리가 없다고 본 것이다. 이에 유 청장은 북한에 “서울에 몇 달 둔 다음 북한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했고, 이 제안을 받아들인 북한이 일본에 요구하자 일본이 어쩔 수 없이 내주게 된 것이다.
“유 청장의 묘안이었지요. 그전까지 문화재 환수는 거의 불가능했는데, 이를 계기로 환수 움직임이 활발해졌으니 대단한 일을 해낸 겁니다.”
때마침 용산 중앙박물관 개관에 맞춰 한국으로 돌아온 북관대첩비는 국내 전시 후 그가 만든 지붕돌과 기단과 함께 북한으로 보내졌는데, 북한에서 비를 세우려고 땅을 파니 마침 기단이 출토되어 기단은 원래 것을 쓰게 됐다. 지금 북관대첩비는 북한의 국보193호로 지정됐다.
문화재 일을 하면서 감격스러웠던 순간은 또 있다. 숭례문을 복원할 때 나온 상량문에서 ‘도석수’가 표시돼 있어서 역시 도성을 지키는 성문에서 중요한 것은 화려한 문루가 아니라 이를 떠받치는 육축임을 확인했다. 그가 생석회를 발로 이겨가면서 쌓은 성곽 역시 자연스럽게 남산 쪽으로 용틀임하며 올라가는 모양을 하고 있어서 조각가 최종태(전 서울대 교수)의 칭찬을 들었다. 최 교수는 가톨릭 관련 조각을 하면서 함께 작업한 인연이 있다. 그는 또 조각가 김영중과도 생전에 인연이 깊었다.
“김 선생님이 동아문화센터에서 조각을 가르치던 시절, 제가 7년 동안 배우러 다녔습니다. 우리 전통 조각에 부족한 해부학적 인체 비례 지식이나 인물도상을 관상학과 연결해 해주신 이야기는 재미도 있고 유용했습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은 전통 조각 특유의 넉넉함과 서양 조각의 깔끔하고 세련된 조형미를 동시에 지녔다. 그는 창작품으로 전시회도 자주 열면서 야외에 두던 화강암 조각이 실내에도 어울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작업장에는 작은 조각도 많지만 역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관촉사 은진미륵불을 닮은 큰 입상이다. 2007년 중요무형문화재가 되면서 문화재 보존위원회의 기록용 작품을 만들 때 그는 평소 만들고 싶었던 이 미륵불에 착수했다고 한다.
“이렇게 큰 작품을 손으로 다 한다고 하니 다들 말렸지요. 사실 여섯 달 만에 해내려니 너무 힘들어서 후회도 했지만, 결국 해냈습니다!”
가분수처럼 하체가 살짝 짧은 은진미륵불의 무엇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는지.
“하체가 짧아서 땅에서 솟아나온 힘찬 느낌을 줍니다. 머리가 큰데 옆에서 보면 얇게 만들었어요. 그래서 부담스럽지가 않지요.”
불상이나 보살상은 그 시대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담았다. 신라시대의 세련된 불상이 고려시대 선불교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고 토속적으로 바뀌어가는 경향을 보여주는 이 불상은 그렇게 자유롭고 자연스러워 더욱 사랑스럽다고 한다. 관세음보살로 만든 것인데도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온다는 미래의 부처님인 미륵불로 불리는 이 불상이 조각가의 눈에는 이 시대에 가장 이상적인 모습인가보다. 그런데 그의 손으로 재창조된 미륵불은 지나가는 스님의 눈에 띄어 안산 연암사로 갔고, 지금 작업장 마당에 있는 것은 다시 만든 것이라 한다. 이번에는 기계의 힘도 좀 빌렸지만, 이 큰 걸 또 만들다니 대체 돌에 무슨 재미가 있어서 그런 걸까.
“돌이 매력적인 것이, 무심하게 때리면 무심하게 나오고, 화가 나서 때리면 화난 모습으로 나옵니다. 돌은 거짓말을 하지 않아요.”
아, 그러고 보니 그의 작품은 죄다 그의 마음을 본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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