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_13

醉月 2012. 8. 29. 06:36

사람 사는 이야기 품은 청정한 풍경들

충북 괴산

사람의 역사를 품고 있는 속리산 화양동계곡 

 

속리산은 잘생긴 바위와 소나무가 많은 산이다. 송석(松石)이 빼어난 것은 산 자체의 지기(地氣)가 탁월함을 뜻한다. 속리산의 수많은 계곡 또한 모두 수려한데 괴산군 청천면의 화양동계곡도 그중 하나다. 훤칠한 바위들을 감싸고 어루만지며 흐르는 골물은 손 시리게 차고 맑으며 암벽과 수림이 이를 껴안으며 곳곳에 승경(勝景)을 빚어낸다.

한편으로 화양동계곡은 ‘사람의 역사’를 곁들이는 덕에 볼거리뿐만 아니라 생각할 거리를 주는 자연이다. 우암(尤庵) 송시열의 족적은 이 깊은 산간에도 뚜렷이 남아 있다.

계곡 초입에서 만나는 만동묘(萬東廟)부터 둘러보자. 만동묘는 도산서원 등과 더불어 조선 4대 서원으로 손꼽힐 만큼 유명했던 서원이다. 10년 전만 해도 비석 하나와 초석들만 빈 터에 남아 있었지만 2006년 복원 공사를 거쳐 현재의 형태를 갖췄다. 굳이 만동묘까지 복원을 해야 하느냐고 당시에도 논란이 많았지만 아무튼 조선 후기 수백 년간 가장 위세가 등등했던 서원 하나가 이곳에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우암 송시열

세상 떠나기 전, 송시열은 제자 권상하를 불러 중국 명나라의 신종과 의종 두 황제를 제사 지낼 묘우(廟宇) 짓기를 당부했으며 권상하는 스승의 유훈에 따라 전국의 유림을 동원해 이 서원을 지었다. 노론 천지의 세상에서 권력과 돈을 끌어들여 공사를 해치우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나아가 조정에서는 좋은 일을 했다며 세금도 안 내는 광대한 논밭과 노비들까지 서원에 딸려주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명나라 황제의 은혜를 잊지 않고 영원토록 기린다는 뜻을 담은 서원이니 모화(慕華)사상이 깊던 당대에는 명분도 좋았다.

경치 좋은 곳에 고래등 같은 시설이 있으니 글줄깨나 하는 한량들에게는 이보다 좋은 놀이터가 없었다. 그리고 권력 쥔 자들이 다 이곳을 거쳐 갔으니 시골 현령 자리라도 하나 얻을라치면 엽전 꾸러미를 짊어지고 와서 이 물에서 놀아야 마땅했다. 머잖아 만동묘가 우암의 제자들이 주축이 된 노론의 아지트로 변한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곳에서 자기네 파당의 영원한 권세를 위해 갖은 궁리를 짜내고 오만 가지 상소를 올리곤 했다. 마음에 안 들면 시골 원님이며 관찰사를 불러다 종아리를 걷어차기 예사였으며 서원 운영 경비를 뜯어내기 위해 양민들을 윽박지르고 두들겨 패는 일도 빈번했다. 대원군 이하응이 거렁뱅이 신세로 떠돌던 시절 이곳에 들러 밥 한 끼 얻어먹으려다가 갖은 수모를 당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훗날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할 때 당연히 만동묘가 제1순위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백성들은 만동묘를 없앤다는 데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가게들이 있는 마을을 지나면 개울 너머로 암벽 위에 제비집처럼 얹힌 독서당을 볼 수 있다. 한때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있던 송시열이 책을 읽던 집이다. 경치가 너무 좋고, 너무 시원한 데 앉은 별당이라 나 같으면 되레 책 한 페이지를 읽지 못할 듯싶은데 옛 분들은 참 대단하시다. 한데, 끼니 때마다 밥상을 나르고 또 손님이 왔다고 술상이며 바둑판까지 짊어지고 벼랑길을 오르내리는 상놈은 어쩌노. 쯧쯧.

조선왕조실록에만도 그의 이름이 3000번 이상 나온다는 송시열. 그리고 전국 42개 서원에서 배향을 받고 있는 그에 대한 긍정 부정의 논란은 지금도 그치지 않고 있다. 그를 추앙하는 쪽에서는 공자 맹자의 반열에 그를 놓아 송자(宋子)라 부르기를 서슴지 않지만 반대쪽에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학문을 갖고 자파의 이익만을 추구한 독선자’로 치부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아무튼 그는 타협을 모르는 성품 때문에 사람 관계가 좋지 못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는 조선 중기 당쟁을 더 심화시키고 치열하게 한 원인이 되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83세 때 그는 제주도 유배지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전북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정승을 지낸 이를 사약을 내려 죽인다는 것은 조선 역사에서도 극히 드문 일이었다.

 

2006년 복원된 충북 괴산 만동묘는 도산서원과 더불어 4대 서원 중 하나로 꼽힌다

 

도명산 기슭의 살 냄새

경치가 꽤 괜찮은 데마다 8경, 9경이니 별난 이름을 붙여놓는가 하면 골짜기 하나마저 7곡이니 9곡이니 해서 기막힌 풍경이 줄지어 있는 양 소문내는 것도 우리가 중국에서 배운 버릇이지만, 중국의 과장법이 세상에 잘 알려진 것처럼 이 땅의 8경9곡도 이름만 그럴싸할 뿐 볼만한 것이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화양동계곡도 명승지 아홉 곳을 골라 화양 9곡이라고 이름을 붙여놓았는데 이는 차라리 그러지 아니함만 못하다. 그 경치가 다 경치인데 왜 헛된 이름을 붙여 선입관을 갖게 한단 말인가.

매표소에서 제9곡 파천까지는 10리 거리가 조금 못 된다. 상류로 가는 도중 계곡을 가로질러 걸쳐놓은 다리가 하나 있는데 이를 건너가면 도명산(643m)에 오르는 산길을 만난다. 골짝과 숲이 적절히 어울리는 데다 산길마저 완만하고 고요해 가벼운 등산을 하기에는 이처럼 근사한 데가 드물다. 더러 화양계곡의 경치에 실망한 이라 해도 도명산을 한 번 다녀오면 마음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도명산은 규모가 작은 속리산이라고 여기면 된다. 바위와 솔숲이 속리산의 그것을 빼다 박은 듯해서 그렇다. 정상에서 어미 되는 속리산의 연봉들을 바라보는 조망도 탁월하다.

 

도명산 자락 아래 서면

시골 간이역에 서 있던 장다리꽃

닷새 장터에서 맛보았던 허기

잊었던 스승의 숙제 문득 떠올라

새로움으로 불타는

푸른 이마의 높이를 올려 보았지

 

얼굴을 비추던 푸른 옥들은

쓰르라미 소리에 깨어져

급하게 달아나 버리고

 

부드러운 손길들은

견고한 근육들을

팽개쳐 놓고 흘러간다

 

나 이곳에 오래도록 있고 싶구나

떠나면 만나기 어려운 그대

물푸레나무 아래

궁륭이며 넘실거리는 살의 향기

뒤척이며 하얗게 변하는 욕망

 

- 최종원 시 ‘화양동계곡’ 전문

 

도명산 자락에 서면, 장다리꽃이며 배고픔, 옛날 숙제 같은 것이 떠올라 ‘새로움으로 불타는 푸른 이마의 높이’를 올려 본다고 하는데 글쎄, 나한테는 구체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별로 없다. 옛적의 간난과 고적함을 철 따라 변하는 산봉을 보며 환기한다는 뜻인가? ‘얼굴을 비추던 푸른 옥’도 마찬가지다. 산에 대칭되는 물의 심상을 끌어 오려고 한 듯싶지만 ‘옥’이 가지는 본래의 진부한 이미지 덕에 의미까지 반감되는 느낌을 떨칠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물과 바위가 이루는 교합과 별리(別離)의 관계를 남녀의 성적 이미지로 환치시키는 부분은 꽤 인상적이다. 이눔의 물들, 저 스스로 ‘견고한 근육’들을 찾아와 약을 올려놓곤 이내 나 몰라라, 달아난다. 가 봐, 더 멋진 근육들이 있나 해서 가다보면 결국 모래며 진흙뻘이나 만날 것이며 그때쯤이면 투명하던 네 몸에도 벌레들이 득실대고 못된 냄새만 풍기는 일밖에 없을지니…. 회초리로 자주 애용되는 데서도 보듯이, 물푸레나무 가지가 몸에 달라붙는 밀착도는 보통이 아니다. 그 아래의 궁륭(穹?)은 궁둥이처럼 생긴 바위를 말하는 거겠지. 그래야 ‘살의 향기’며 ‘뒤척이는 욕망’이 제 구실을 한다.

수려한 자연 가운데서 어떻게 몸 냄새 진한 시가 나오느냐고 트집을 잡는 이가 있다면, 그는 아직 사람살이와 자연의 기묘함을 잘 모르는 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인적 드문 산간에 앉아 번드레한 바위를 타고 흐르는 맑은 물을 보면서, 문득 명랑한 욕정 하나를 가질 줄 아는 사람이라야 자연과의 교합쯤도 제대로 궁리할 수 있지 않을까.

묘한 일이다. 시인만 그런 게 아니라 여러 차례 화양계곡에 가면서 나 또한 이 계곡이 풍기는 살 냄새를 맡은 것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백두대간의 한 봉우리인 대야산.(왼쪽) 설악산 12선녀탕을 연상케 하는 대야산 용추계곡. 호리병 모양의 폭포 겸 물웅덩이가 놀랍다.(오른쪽)

 

대야산과 용추계곡

화양동계곡과 선유동계곡은 같은 냇물로 이어지지만 걸어서 가기엔 선유동이 너무 멀다. 일반 차량의 계곡 내 통행이 금지돼 있으므로 선유동을 가려면 다시 입구로 나와 송면으로 가는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거죽의 이름만으로는 선유동이 화양동보다 더 많은 비경을 거느리고 있을 듯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되레 이름값 못하는 골짜기가 선유동계곡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더욱이 여름철에는 좁은 계곡이 사람들로 가득 차는 까닭에 시장 바닥을 방불케 한다.

선유동을 버리고 문경 방향으로 달리면 블란치 고개를 넘게 되는데 이쯤에서 준수한 산 하나가 시선을 잡는다. 백두대간의 한 봉우리 되는 대야산(931m)이다. 피서철이라고 해도 선유동에서 블란치 고개에 이르는 이 길은 아직 한적하다. 근래 새롭게 알려진 덕에 대야산 용추계곡에도 사람들의 내왕이 많아지긴 했지만 근처의 다른 명소에 비하면 대단히 조용한 편이다.

대야산은 등산을 즐기는 이들에게만 좋은 산이 아니다. 경치 좋은 계곡에서 더위를 쫓으며 조용히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안성맞춤이기 때문이다. 산이 충북 괴산과 경북 문경에 접해 있는 까닭에 산행객들은 문경 가은읍을 거쳐 이 산을 오르기도 한다. 블란치 고개를 넘어 드는 것은 괴산에서 하는 행로다. 고개를 넘어가면 산기슭 마을로 드는 샛길이 있다. 30여 가구의 이 마을은 행정구역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농바위마을인데 전국적으로 소문난 장수마을이다. 한때 모 유업회사에서 TV광고의 배경으로 삼았던 곳이기도 하다. 마을은 소백산맥의 분수령인 대야산 밀재를 동쪽에 두고 남으로는 속리산 자락, 서쪽으로 화양계곡, 북으로 쌍곡계곡을 이웃하고 있다.

마을을 지나 골 안으로 들면 근래 조성된 상가촌이 있다. 10여 년 전만 해도 두세 채의 음식점이 단출히 있어서 드문 여행객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했는데 이제는 여느 명소의 상가촌과 다를 바 없이 변했다.

상가를 벗어나면 용추계곡을 거슬러 가는 산길이다. 100여 명이 앉아도 괜찮을 매끈한 바위가 있고 폭포가 있고 크고 작은 물웅덩이를 만들며 바위 위를 흐르는 맑은 물이 있는 계곡 초입의 풍경은 자못 설악산 12선녀탕 주변을 연상케 한다. 그 중에서도 호리병 모양의 폭포 겸 물웅덩이는 그 기묘한 모양새로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행락객들은 대개 이 계곡 초입에서만 놀 뿐 물을 거슬러 멀리 올라가지 않지만 대야산의 비경은 계류 상류로 이어진다. 숲은 무성하고 골은 깊다. 곳곳에 담소(潭沼)와 너럭바위들이 있다. 찾는 이가 드물기 때문에 태고의 적막까지 함께한다. 골 따라 완만히 이어지는 숲길을 걷다보면 이렇게 예쁜 골이 어떻게 여태 사람의 손때를 타지 않고 순결히 남아 있나 싶어 놀라게 되며 한편 뒷날이 걱정스러워지기도 한다.

 

산죽과 잡목들이 우거진 숲길을 한 시간가량 걷다보면 이윽고 밀재에 닿는다. 예전 문경 가은과 괴산을 이어주던 고갯마루다. 밀재에서 북쪽 산길을 따라가면 어렵지 않게 정상에 이른다. 커다란 바위덩이로 이루어진 대야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장관이다. 둘레의 명산들과 산 아래 마을들이 한눈에 들어오는 탁 트인 전망은 힘들게 산을 오른 이의 심신을 시원하게 해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좋은 산은 산에서 만난 낯선 이들을 쉽게 친하게 해주기도 한다. 가을과 여름, 나는 두 차례 대야산을 올랐다. 하산 뒤에는 인정 많은 업소 주인이 챙겨주는 별난 술과 음식 그리고 산 사나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에 취한 가운데 밤하늘의 초롱한 별떨기를 쳐다보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순미(純美)의 정한에 몸을 떨지 않을 수 없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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