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산청읍에서 금서면을 거쳐 삼장면으로 방향을 정하면 길고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만난다. 길을 오르면 구름 뭉치에서 떨어져나온 조각구름이 옆으로 지나간다. 미처 산을 넘지 못한 조각구름은 산자락 곳곳에 기대어 머무른다. 이곳에서는 흔한 풍경을 옆으로 아래로 흘려보내면 고갯마루에 있는 뜰에 닿는다. 입구 표지석에 적힌 이 고개 이름이 '밤머리재'다. 뜰 한쪽에 버스를 고쳐 만든 매점, 그 뒤에 벌통 정도가 사람 손길이 닿은 것들이다. 별스러운 치장이 없는 뜰 끝에서 옆구리만 보였던 산줄기가 아래로 펼쳐진다. 지리산을 품은, 지리산이 품은 고장 산청은 이렇게 제모습 한 자락을 넌지시 드러낸다.
밤머리재를 넘어 삼장면을 지나면 시천면이다.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은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그가 끝까지 벼슬을 마다하고 머무르며 후학을 길렀던 집이 산천재(山天齋)다. 산천재 앞뜰에는 남명이 심었다는 매화나무 '남명매'가 있다. 그 너머로 어지간해서 제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지리산 천왕봉을 볼 수 있다. 큰 어른은 말년을 보낼 자리 하나조차 허투루 정하지 않았다. '산천재' 이름에는 산이 하늘을 품었다는 뜻이 담겼다. 지리산이기에 어울리고, 남명이기에 쓸 수 있는 이름이었을 테다.
산 넘어 산, 그 너머에 산
산청군 전체면적(794.7㎢) 가운데 논밭은 겨우 12%(98㎢) 정도다. 어디라고 할 것 없이 우뚝 솟은 산은 말 그대로 '첩첩산중'이다. 서쪽에는 천왕봉(1915m)을 중심으로 하봉(1781m)·중봉(1875m)·제석봉(1806m)·연하봉(1667m)·영신봉(1651m)·삼선봉(1284m) 등 지리산 자락이 함양·하동군과 경계를 이뤘다. 북쪽으로 갈전산(764m)·바랑산(796m)·소룡산(760m) 너머에는 거창군이 있다. 합천군과 산청군 사이는 황매산(1108m)·부암산(695m)이 가로막았다. 여기에 웅석봉(1099m)이 산청 가운데 우뚝 솟아 군립공원을 이뤘으며 그 주변에는 둔철산(811m)·구곡산(961m)·정수산(828m)·이방산(715m) 등이 겹겹이 둘러싸고 있다.
북에서 남으로 흐르며 산청 가운데를 가르는 강은 경호강(鏡湖江)이다. 이름에 '거울처럼 맑다'는 뜻이 담겼다. 강폭이 넓고 유속이 빨라 최근에는 래프팅 명소로 꼽힌다. 경호강은 황매산에서 흘러나오는 양천강과 단성면에서 만난다. 그리고 이 물이 지리산에서 흘러나오는 덕천강과 더불어 남강을 이룬다. 산청 땅을 흐르는 물은 예부터 맑기로 유명했다. 높고 깊은 산에서 솟는 샘이 맑은데다 개발을 핑계 삼은 손때도 타지 않았다. 곳곳에 우뚝 솟은 산(山)과 맑은(淸) 하천을 품은 이 땅은 생김새부터 이름값을 톡톡히 한다.
첩첩산중, 처음부터 없는 땅에 짓는 농사는 뻔했다. 영세한 농가는 산을 깎아 억지로 땅을 만들어 작물을 심기도 했다. 하지만, 겨우 굶주림을 면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감자·고구마·옥수수 등 구황작물 재배가 효율적이었다. 산에서 나는 약초나 나물로 살림을 불리기도 쉽지 않았다. 필요한 이들에게 내다 팔 곳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 여기 사람들은 산청읍에서 40분 정도 걸리는 진주장이 익숙했다. 뒤집어 보면 산청에 그럴듯한 거래 터가 없었던 게 된다. 산청에서는 한때 산에서 나는 대나무와 싸리를 엮어 가공품을 만들기도 했다. 옛날에는 집집이 있었던 복조리·키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실생활에서 대나무 가공품이 용도를 잃자 겨우 기념품 수요만 남는다. 더는 살림에 큰 보탬이 될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여기 사람들이 작물 덕을 본 것은 1970년대 들어 밤나무와 감나무를 심으면서부터다. 특히 겨우내 얼고 녹으면서 여문 산청 곶감 맛은 빼어났다. 이곳 사람들은 산청보다 곶감이 많이 나는 곳은 있어도 맛있는 곳은 없다고 여긴다. 생산량은 내세울 정도가 아닌 딸기·사과·배를 특산물로 꼽는 이유도 같다. 산은 너른 땅을 내주지 않은 대신 어렵게 맺은 열매에는 제법 공을 들였다. '고품종 소량 생산'은 이 땅이 품은 한계와 가능성을 두루 고려한 당연한 결론이었다.
농사지을 땅도, 공장 세울 땅도 마땅치 않았던 산청이 오롯이 지킨 이름은 '청정골'이다. 산청군도 지역이 살길을 산과 강이 얽히고설킨 풍광에서 찾는다. 그렇다고 산청군이 오래전부터 관광산업 덕을 봤으리라 지레짐작하는 것은 오해다. 빼어난 자연환경은 이미 갖췄지만 이를 떠받치는 접근성은 뒤늦게 따라왔다.
1990년대까지 산청을 찾는 바깥사람들은 대부분 진주를 거쳐 국도로 에둘러 갈 수밖에 없었다. 산청 가는 길이 수월해진 것은 2001년 대전과 진주가 고속도로로 이어지면서다. 이 길은 2005년 통영까지 이어지면서 '통영대전고속도로'로 이름이 바뀐다. 통영대전고속도로 단성·산청·생초 나들목(IC)이 산청 입구다. 고속도로 개통으로 산청은 군 단위에서는 드물게 나들목 3곳을 둔 지역이 된다. 물론, 관광산업에 대한 산청군 고민도 이를 바탕으로 시작한다.
나라에서 가장 어여쁘다는 마을
원나라 사신으로 간 문익점(1329~1398)이 목화씨를 붓통에 숨겨와 널리 보급했다는 일화에서 이 나라 무명 역사는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목화를 처음 키웠다는 곳이 산청 단성면에 있다. 그 자리에 '목면시배유지(木綿始培遺址)'가 들어섰다. 이곳에 들어서면 '삼우당 문선생 면화시배 사적비'라고 쓴 비석이 보인다. 그 옆에는 무명 가공 과정, 역사, 제품 등을 알리는 전시관이 있다. 전시관 옆에는 1000㎡ 정도 규모로 목화를 키운다.
문익점은 고려 말인 1360년 문과에 급제했다. 김해부사록, 순유박사를 거쳤으며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온 게 1363년이다.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과 3년 만에 목화재배에 성공했다. 무명은 옷감이라고는 삼베뿐이었던 백성에게 추운 겨울을 수월하게 넘길 수 있게 했다. 또 고려 말부터 조선시대까지 국가 기간산업으로 한몫을 맡는다. 씨앗 하나가 바꾼 삶과 세상은 작은 게 아니었다. 산청 신안면에는 문익점을 추모하는 사당인 '도천서원'이 있다. 그리고 이 서원 옆에 문익점 묘소가 있다.
목면시배유지가 있는 단성면에는 '남사예담촌'도 있다. 돌을 쌓고 그 사이를 흙으로 메운 어깨 높이 담이 마을 전체를 둘러싼 곳이다. 경계를 짓는 게 담을 쌓는 목적이라면, 이곳 담은 그 기능부터 어긋난다. 남사예담촌 담 안에서는 집과 마당과 길이 경계가 사라진다. 집 안에 들어섰다 싶으면 어느덧 골목이고, 골목을 따라 걸으면 뉘 집 마당이다. 이곳 담은 안과 밖을 애써 가르지 않는다. 안을 바깥에 내주고 밖을 안으로 당기는 조화를 만드는 장치가 바로 담이다. 지난해 창립한 민간단체인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연합'은 남사예담촌을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로 지정했다. 단아한 고택과 정겨운 담이 어우러진 이 마을에 대한 찬사다. 남사예담촌에서는 산청이 자랑하는 선비 한 명이 남긴 흔적을 만날 수 있다.
면우 곽종석(1846~1919)은 어려서부터 유·불·선 학문을 두루 익히다 주자학 공부에 힘을 쏟았다. 20대 초반에는 이미 학자로 이름을 떨쳤다. 그 재능을 높게 평가한 조정은 벼슬을 권했으나 곽종석은 국운이 기울었다며 마다했다. 그래도 1905년 을사늑약 때는 약정 폐기와 더불어 오적(五賊)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1919년 '파리 강화회의'를 앞두고 곽종석을 중심으로 영남 유림이 모인다. 이들은 파리 강화회의를 국제사회에 독립을 청원할 기회라고 판단한다. 이에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하는 열강 대표에게 건넬 문서를 준비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 뜻이 같은 영·호남 유림이 뭉치면서 유림 대표 137명이 문서에 서명한다. 파리에 보내는 긴 편지(2674자), 그 기초 책임자는 곽종석이었다. 이를 파리 강화회의에 제출하고, 영·국문 번역을 거쳐 각국 대표와 외국 공관, 국내 향교에 보낸 게 바로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개요다. 일제강점기 통틀어 유림이 펼친 가장 조직적인 독립운동이다. 이 일로 곽종석을 비롯한 유림은 모두 교도소에 갇힌다. 곽종석은 징역을 살다 병보석으로 나왔으나 1919년 8월 숨을 거둔다. 남사예담촌에는 곽종석을 기리는 유림과 제자들이 세운 '이동서당'이 있다.
남사예담촌에서 시천면으로 가면 '남명조식유적지'가 나온다.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조식은 말년을 산청에서 보냈다. 이곳 역시 조식과 관련된 유적을 귀하게 보존하며 큰 어른에 대한 예우를 아끼지 않는다. 산청은 해마다 10월이면 남명 사상을 기리는 '남명선비문화축제'를 개최한다.
조식이 남긴 사상은 '경의(敬義)' 두 글자에 담긴다. '자신을 수양(敬)해 근본을 세우고 정의(義)를 과감하게 실천하라'는 가르침은 당시 선비들을 크게 깨우쳤다. 이 같은 남명 사상은 오늘날에도 조선 실학을 꽃피운 뿌리로 평가받는다. 남명조식유적지에는 그가 제자를 가르쳤던 산천재(山天齋)가 있다. 뒤편에는 남명 사상과 유물을 볼 수 있는 '남명기념관'을 세웠다. 남명조식유적에서 서쪽으로 더 가면 후학들이 그를 기려 세운 '덕천서원'이 있다. 그리고 서원 앞에는 '성인이 마음을 씻는다'는 뜻이 담긴 정자, 세심정(洗心亭)이 남아 있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1912년 단성면에서 태어난 영특한 아이 이영주가 출가한 것은 25살 되던 해인 1936년이다. 속세 이름을 버리고 얻은 법명은 성철. 해인사에서 하동산(河東山) 대종사가 내린 가르침을 받아 세상 이치를 깨친 그는 오직 구도에만 몰입했다. 성철은 1947년 경북 문경 봉암사에서 '부처답게 살자'며 결사를 이끌었다. 당시 흔들리던 선풍(禪風)은 서슬 퍼런 승려들 덕에 그 중심을 완전히 잃지 않을 수 있었다.
성철은 1955년 해인사 초대 주지로 임명됐으나 취임하지 않고 수행에 정진했다. 이후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추대됐다. 그리고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됐다. 1993년 입적한 성철은 철저한 수행, 청빈한 삶으로 이 나라에 소박하지만 단호한 가르침을 남겼다. 현대 한국 불교계가 낳은 큰 어른이다.
단성면에는 복원한 '성철대종사생가'가 있고 그 자리에 겁외사(劫外寺)를 세웠다. 입구에 들어서면 잘 정돈된 경내 한가운데 성철 동상이 있다. 그 뒤쪽에는 유품을 전시한 포영당이 있다. 포영당에서 군더더기 없고 소박한 법어와 누더기 옷과 신발 등 유품을 볼 수 있다. 아무리 봐도 지나치게 치장한 절과 큰 어른을 추어올린 동상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애써 그를 그리는 중생들 마음이 간절했다고 넘겨보지만, 겁외사가 더 소박했으면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어쨌든 성철이 남긴 그 유명한 법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에서 느닷없이 고장 이름 '산청(山淸)'을 떠올린다.
명산을 두루 품은 산청에는 유명한 절도 많다. 사찰마다 낀 높은 산과 빼어난 계곡은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늘 깊은 인상을 안긴다. 지리산에 있는 법계사는 이 나라 사찰 가운데 가장 높은 곳(1450m)에 있다. 544년 창건된 이 절에는 적멸보궁에 부처 진신사리를 모셨으며 불상은 없다. 법당 옆에는 보물 제473호 '법계사삼층석탑'이 있다. 중산리에서 법계사로 가는 길은 '중산리 계곡'을 따라가는 길이기도 하다. 법천폭포, 유암폭포, 무명폭포를 비롯해 계곡 곳곳에 난 웅덩이에는 피서객이 끊이지 않는다.
삼장면에 있는 대원사와 내원사는 사찰만큼이나 계곡이 유명하다. 지리산 자락에서 뿜어 나오는 시원한 물줄기는 단단한 바위를 이리저리 깎아내며 그 기세만큼 시원한 눈맛을 자랑한다. 이곳 역시 여름내 피서객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신등면에는 정취암이 있다. 68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이 절은 대성산 절벽 사이에 소박하게 자리했다. 단아한 암자에서는 구불구불 길게 이어진 길과 산청 땅을 둘러싼 산자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정취암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율곡사가 있다. 이곳에는 못 하나 쓰지 않고 목침으로 짜 올렸다는 법당이 눈길을 끈다. 작은 절이지만 대웅전(보물 제374호)·괘불탱(보물 제1316호)·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도유형문화재 제373호) 등 보물이 많다.
깊은 산속 순박한 사람들이 겪은 모진 설움
사방으로 검은 비석이 줄맞춰 서 있다. 비석 모양새는 '거창사건 추모공원'에서 본 것과 같다. 비석이 선 묘역 한쪽에는 봉분 두 개가 따로 있다. 봉분 옆 표지판에는 '미등록 희생자(남·여)의 묘'라고 적혀 있다. '산청·함양양민학살사건 희생자 가운데 법적 등록을 마치지 못한 분을 모신 자리'라고 설명해놓았다. 금서면에 있는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한쪽 구석에 자리한 봉분은 그래서 더욱 서럽다. 이곳에서는 나라가 이 땅에 지은 씻을 수 없는 죄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 1951년 2월 7일,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가 빨치산 토벌을 내세워 산청·함양을 휩쓸며 죽인 민간인은 705명. 그 추악한 군홧발은 거창을 짓밟기 이틀 전에 이 곳을 지나갔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은 1996년 '거창사건등관련자명예회복에관한특별조치법'을 근거로 조성됐다. 공원은 2001년 조성 사업에 들어가 2004년 완공된다. 이 법에서 산청·함양이 겪은 고통은 거창과 달리 고작 '등' 한 글자에 담긴다. 이곳 사람들은 '거창사건 등'에서 비치는 소홀함 탓에 또 서럽다.
1948년 여수·순천사건은 여수 신원리에 주둔한 제14연대 병사들이 군 명령을 어긴 데서 비롯한다. 그 명령은 4·3 항쟁이 일어난 제주로 진입해 이를 진압하라는 것이었다. 명령을 어긴 병사들은 장교 20여 명을 사살하고 항쟁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 여파는 멀리 산청까지 미친다. 험한 산은 적은 병력이 몸을 숨기고 맞서기에 유리했다.
1949년 반군을 진압하려던 국군 3연대 소속 소대병력은 산청 시천면에서 전원 몰살당한다. 국군은 적과 내통했다며 패배 원인을 마을 사람들에게 씌운다. 1950년 1월까지 이어진 '산청 시천·삼장면 학살' 피해자 수는 밝혀진 것만 203명에 이른다.
1949년 8월 시천면에서 벌어진 '산청 사리 골짜기 학살' 역시 내용은 다르지 않다. 국군 3사단 22연대에 희생당한 주민은 36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시천면 외공리에서 자행된 '산청 외공리 학살'은 가해자가 국군인 것만 확인될 뿐, 사건 배경도 피해자 신원과 규모도 분명하지 않다. 외공리 산비탈 입구에는 '민간인 학살이 있었던 곳'이라는 것을 알리는 간판만 외롭게 서 있다. 2008년 발굴 조사가 진행됐던 현장은 잡초만 무성하다. 당시 발견된 유골은 충남 공주대학교로 옮겨졌다고 한다.
이렇듯 서러운 동네인 시천면에는 '빨치산토벌전시관'도 있다. 중산리에 있는 이 전시관은 당시 국군이 빨치산을 어떻게 색출하고 토벌했는지 사진, 기록, 무기 등을 통해 보여준다. 하지만, 전시관 어느 한 쪽에도 이 땅에 서럽게 묻힌 사람들에 대한 배려는 없다. 그 당당하다는 전과를 감탄할 수만은 없는 이유다.
단성면 남사예담촌 어르신들은 대문을 닫아놓지 않는다. 낯선 인기척에도, 느닷없는 질문에도 마루 한쪽 내주며 조곤조곤 얘기 나누기를 어려워하지 않는다. 이곳 어르신들만 보면 산청 사람 순박하다는 말에 거짓은 없다. 자신들이 그렇게 살았고, 살면서 만난 이웃도 그랬을 테다. 그래서 깊은 산속 순박한 사람들에게 역사가 남긴 상처는 더욱 야속하다.
산청 사람들은 지역 특산물로 망설임 없이 '곶감'을 내세운다.
세종실록지리지(1454년) 기록에는 산청지역 공물(貢物)로 감이 바쳐졌다고 되어있고, 고종(1852~1919) 황제 때는 곶감이 진상에 올랐다고 한다.
오늘날 단성면 남사리 남사예담촌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감나무가 있다. 감나무 앞에는 국립산림과학원 측정 결과 '수령 700년'이라는 표지가 있다. 하지만 고려말 하연(河演·1376~1453)이 어머니 자애로움을 기리기 위해 7살 때 심었다는 점에서 따져보면 630년 정도 된다. 측정이 잘못됐거나 하연이 심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이랬든 저랬든 긴 세월을 잇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데, 이 고목에서는 지금도 감이 열린다.
산청 곶감이 상업적으로 대량 생산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다. 산청은 그 이전 1950~60년대에는 임산물 채취하는 것 정도로 먹고살았다. 조금 더 지나서는 대나무 가공업이 중심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다 1970년대 들어서는 밤이 큰 소득원으로 자리했다. 밤이 이곳에 들어온 과정이 특별나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이 전남 광양을 찾았다가 둘러보고서는 밤나무단지 조성 지시를 내렸다. 곧바로 광양에 밤나무밭이 들어섰다. 그즈음 산청으로 시집온 '광양댁'이 친정에 갔다가 밤나무 5그루를 들여와 심으면서 이 지역에도 밤이 흔해졌다고 한다.
그렇게 한동안 밤나무로 재미 볼 무렵 이 지역 사람 몇이 경상남도 농특산물전시장에 갔다고 한다. 그 당시는 곶감을 꼬챙이에 꿰어 내놓던 때였다. 그런데 함안 어느 농민이 곶감을 예쁘게 포장해 내놓은 걸 보고서는 '이거다' 싶었나 보다. 곧바로 삼장면 쪽에서 도입하면서 산청지역 곶감이 본격적으로 상업화됐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지리산 쪽 중산리·내대리 쪽으로 퍼져갔는데, 처음에는 고지대라 곶감 말리기에 맞지 않을 것이라 걱정했단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오히려 일교차 크고 깨끗한 공기 덕에 품질은 더 올라갔다. 그러면서 산청 효자종목으로 완전히 자리매김하게 됐다.
곶감 하는 이들이라면 "칼 두 자루만 있으면 할 수 있다"는 말을 종종 한다. 큰 비용 들이지 않고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밑천이 많지 않았던 이곳 사람들과 맞아떨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돈이 된다 싶으면 소 밀어내고 외양간에서 시작해 조금씩 넓혀 가는 형태였다고 전해진다.
곶감은 원료 자체가 아무리 좋아도 말리는 조건이 맞지 않으면 품질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일교차 심한 곳에서 얼고 녹기를 수차례 반복하면서 높은 당이 형성되는 것이다. 지리산 가까운 곳은 겨울철 밤낮 온도 차가 많게는 25도까지 벌어진다고 하니 더없이 좋은 조건이다.
오늘날 전국 생산량은 대량화에 초점 맞춘 경북 상주가 55%가량으로 제일 많다. 충북 영동에 이어 산청은 15~20%가량으로 세 번째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산청 곶감을 받은 후 찬사 글을 보내왔다는 얘기는 이곳 사람들이 입에 달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인근 함양에서 부러이 여겨 산청 사람 몇을 데려가 곶감 생산에 노력했는데, 이제는 엇비슷한 품질이 나오고 있다"는 말로 으쓱함을 에둘러 표현한다.
그럼에도 한 끼 식사거리로 내세울 만 한 것을 물으면 이 지역 사람들은 하나같이 머뭇거리기 일쑤다. "그러고 보니 특별한 게 없네"라고 연신 내뱉는다. 그 이유에 대해 이래저래 한마디씩 한다. 요컨대 산청은 부자 고을과는 거리가 멀어 화전민(火田民·산간 지대 나무를 불사르고 그 자리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감자·떡 같은 것을 내놓는 정도에 그친다.
지리적으로 보면 산에 둘러싸여 폐쇄적이다. 대개 이런 지형에서는 그들만의 독특한 음식문화를 일구기도 한다. 하지만 인근 진주가 같은 생활권 역할을 한 탓에, 그쪽 음식에 의지하며 이곳만의 뭔가를 만들어내는 데는 소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몇몇 이름 올리고 있는 것들이 있기는 한데 길어도 50년을 넘지 못할뿐더러, 인근 함양과 겹치는 것도 꽤 된다. 어탕국수·흑돼지 같은 것들이 대표적이다.
어탕국수는 충청도 지역에서 '생선국수'라는 이름으로 먹기도 한다지만, 서부경남 지역에서 즐겨 먹는 향토음식이다. 어탕국수는 식으면 비린내가 올라오며, 면발이 붇기 전 먹는 편이 낫다. 뜨거움에 '호호'거리면서도 면을 입에 넣는 성질 급한 경상도 사람과 궁합이 맞는 편이다.
경호강은 다양한 민물고기 음식을 내놓는 밑천이 된다. 경호강(鏡湖江)은 '거울같이 물이 맑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졌다. 강폭이 넓고 큰 바위가 없어 유속이 빠르다. 물살 센 환경은 곧 밥상에 오른 민물고기 살점을 졸깃하게 한다.
삼복더위를 지나면 경호강에 은어가 몰려든다. 낚시 좋아하는 이들은 인근에 숙소까지 잡고 몇 날 며칠 은어잡이를 즐긴다. 최근 들어서는 일본 사람들까지 몰려들기도 한단다. 바지 걷고 얕은 물에 들어가 낚싯줄 걷어 올리는 모습은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을 떠올리게 한다.
생초면 어서리 쪽에는 민물고기 전문식당이 긴 행렬을 이룬다. 30여 년 전 도로가 나면서 하나둘 들어섰다. 쏘가리·메기·붕어·피라미·은어·빙어 같은 민물고기 이름이 나열돼 있다. 이 가운데 피라미 음식은 경상도 방언 '피리'라는 이름으로 내걸려 있다. 특히 조림으로 내놓을 때는 뼈째 먹을 수 있도록 한번 살짝 튀겨 억셈을 없앤다.
고둥탕 전문점도 여럿 있다. 어느 지역에서는 채소·들깻가루·부추를 넣어 국물을 걸쭉하게 하기도 하는데, 산청은 맑게 내놓는다. 중국산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해 알갱이를 빼지 않고 껍데기째 내놓는 곳도 있다.
산청은 지리산에서 나는 1000여 가지 약초를 활용한 음식에 눈 돌리고 있다. 사찰음식개발과 약선요리타운 조성 추진이 그러한 노력 중 하나다.
산청은 '지리산 고장'이다. 또 하나 산청군 스스로는 '한방 고장'을 내세운다. 산청은 2013년 9~10월 열리는 '세계전통의약엑스포' 준비에 신경 쓰고 있다. 한의학박물관·허준 및 류의태 동상이 들어서 있는 동의보감촌에는 엑스포를 위한 산약초타운·한방자연휴양림·숙박시설 같은 것이 들어선다.
'한방 고장'을 내세울 수 있는 바탕은 '맑은 물'과 지리산에서 나는 갖가지 '약초' 덕이다. 특히 생초면(生草面)은 지명에 '마르지 아니한 싱싱한 풀이 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산청 사람들은 "마을 촌로들에게는 간단한 진맥과 감기약 정도 스스로 지어 먹는 게 예삿일"이라고 전한다.
그럼에도 산청이 '한방'을 본격적으로 들이민 것은 10년 남짓에 불과하다. 그 출발점은 〈소설 동의보감〉을 바탕으로 한 TV드라마 〈허준〉이 큰 인기를 얻으면서다.
드라마에서는 허준(許浚·1539~1615)이 경남 산음, 즉 오늘날 산청에 들어와 '명의' 류의태(柳義泰)를 스승으로 맞는 것으로 이야기를 풀었다. 특히 류의태가 자신 몸을 해부하도록 하는 대목에서 이야기 감동은 극에 달했다.
이를 바탕으로 산청은 허준·류의태를 전면에 내세워 '동의보감 고장' 브랜드화에 애썼다. 금서면 특리에 있는 동의보감촌에는 허준 동상과 류의태 동상이 각각 자리하고 있다. 금서면 화계리에는 류의태가 한약제조에 사용했다는 '류의태 약수터'가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허준이 산청에 들어와 의술 활동을 펼쳤다는 사료적 뒷받침은 되지 않았다. 나아가 류의태라는 인물 자체는 문헌과 기록에 없는 허구라는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드라마에서 산청이 배경이고, 류의태라는 인물이 등장한 까닭은 1960년대 한 논문에 담긴 '설'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대신 산청에는 신기에 가까운 의술을 펼쳤다는 실존 인물 유이태(劉以泰 혹은 劉爾泰·1652~1715)가 있다. 허준보다는 약 100여 년 후 인물로 천연두·홍역에 대한 의학서인 〈마진편(痲疹篇)〉을 남겼다. 유이태는 고향 거창을 떠나 산청군 생초면 신연마을로 와서는 돈 밝히지 않고 신분 상관없이 아픈 이들을 돌봤다고 한다.
하필 생초면으로 온 이유는 외가가 있기도 했거니와, 특히 이곳 물과 약초가 좋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이태는 한방에 칡을 잘 사용했다고 하는데, 죽어서는 산청군 생초면 갈전리(葛田里)에 묻혔다. '갈전'은 '칡뿌리 밭'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러나 오늘날 유이태에 대한 흔적은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묘소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이정표 하나 없이 거친 산속에 자리하고 있어, 아는 이 아니고서야 찾기 어렵다.
신연마을에서 약방으로 사용했다는 곳을 들춰보려면, 이 마을 주민이 "흔적 없어진 지 오래됐다"고 전한다. 그나마 책 읽고 글 쓰던 방이 생초면 송정마을에 있었고, 낚시를 즐긴 곳이 생초면 압수마을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유이태가 환자를 낫게 했다는 약수터가 오부면 오전리 도로변에 남아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곳 역시 유이태에 대한 그 어떤 흔적도 두지 않았다.
오늘날 산청에 유이태는 남아있지 않고 이곳과 연관 없는 허준, 그리고 허구 인물 류의태만 드러나 있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다.
다른 이야기를 이어보자면 산청에는 유독 오래된 나무가 많다. '매화' 하면 광양을 퍼뜩 떠올리게 되는데, 들여다보면 산청이 전혀 덜하지 않다. '전국 5대 매화' 가운데 세 그루가 산청 땅에 뿌리내리고 있다. 단성면 남사예담촌 하씨 고택에 있는 '원정매'는 670년 넘은 것으로 전해진다.
한때 벼락을 맞기도 하고, 원줄기가 고사하기도 했지만, 밑동에서 새로운 가지가 뻗어나 여전히 그 향을 잃지 않고 있다. 단성면 운리 단속사지에 있는 '정당매'는 640년 세월을 잇고 있고, 산천재에 남명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남명매'는 450년 세월을 담고 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인 남사예담촌에는 최소 600년 넘은 감나무, 서로 가지가 교차해 있는 300년 된 회화나무, 220년 된 단풍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신등면 평지리 물산마을에는 '원앙송'이라 불리는 120년 된 소나무 두 그루가 한 몸을 이루며 금실 좋은 부부 자태를 뽐내고 있다.
산청은 지리산을 안은 덕에 대원사계곡·내원사계곡이라는 무릉도원을 선물 받았다. 하지만 지난 시간 속에 큰 상흔이 자리하고 있다. 흔히 '죽었다'는 의미로 곧잘 쓰이는 '골로 갔다'는 말이 삼장면 유평리 대원사계곡을 두고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1950년대 빨치산·토벌대가 이곳 골짜기로 들어가면 너나 할 것 없이 누구 하나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하여 '골로 갔다'고 했다.
내원사계곡 또한 마찬가지 아픔이 담겨있다. 빨치산 마지막 2인으로 남은 이홍이·정순덕은 계속된 저항을 이어갔다. 그러다 1963년 11월 12일 이홍이는 사살, 정순덕은 생포되며 빨치산토벌 작전이 막 내린 곳이 삼장면 내원사계곡이다.
이러한 산청은 오늘날 시천면 지리산빨치산토벌전시관, 금서면 산청·함양사건추모공원을 통해 엇갈린 역사를 담으려 하고 있다.
산청읍 내리에는 성심원이 자리하고 있다. 뒤로 웅석봉 자락이, 앞으로 경호강이 흐르는 인적 드문 곳을 찾아 1959년 들어왔다. '한센'에 대한 주홍글씨 속에 오랜 시간 세상과 단절해 있었지만, 이제는 범람 걱정 없는 성심교를 통해 세상과 마주하고 있다. 성심원은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먼 이웃'인 산청 주민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높은 산이 있으면 깊은 골이 있다. 그 골로 맑은 물이 흐르면 계곡이다. 첩첩산중 물 맑은 곳 산청이 계곡으로 다른 지역 뒤에 설 까닭이 없다.
중산리 계곡(시천면 중산리) 줄기는 천왕봉에서 비롯한다. 법천폭포, 유암폭포, 무명폭포가 유명하고 곳곳에 넓고 깊은 웅덩이가 펼쳐져 있다. 지리산 중산리 코스는 천왕봉에 가장 빨리 닿는 길(12.4㎞)로 유명하다.
거림계곡(시천면 내대리)은 거림골, 도장골, 자빠진골에서 솟는 물이 모여 이뤄졌다. 최근 시천면 내대에서 청암면 묵계를 연결하는 '지리산순환도로'가 개통돼 관광객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거림공원지킴터'에서 시작하는 지리산 산행길은 중산리와 대원사 코스 중간 정도 거리(16.5㎞)다.
대원사계곡(삼장면 유평리)은 시원한 물줄기와 잘생긴 바위가 눈길을 끈다. 대원사에서 출발하는 지리산 코스는 19.1㎞로 산청에서 통하는 지리산 길 가운데 가장 멀다.
경남지역 절경마다 들른 듯한 고운 최치원(857~?) 흔적은 이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최치원 호를 그대로 이름으로 쓴 고운동계곡(시천면 반천리)이다. 계곡 곳곳에 야영터가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웅석봉 자락에서 비롯한 물은 덕천강으로 향한다. 그 길목이 백운동계곡(단성면 백운리)이다. 다지소, 백운폭포, 오담폭포, 등천대 등이 유명하다.
장당골과 내원골을 타고 온 물은 내원사계곡(삼장면 대포리)에서 합쳐져 대포숲으로 향한다. 내원사로 이어지는 다리 반야교 아래로 흐르는 물살과 바위가 절경이다.
이밖에 오봉계곡(금서면 오봉리), 지막계곡(금서면 지막리), 선유동계곡(신안면 안봉리) 등은 산청이 자랑하는 산과 계곡이 지리산에만 머무르지 않음을 당당하게 드러낸다.
◇성심원 = 1959년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작은형제회'가 설립한 한센인 마을. 지금은 한센병력이 있는 환자, 그리고 1·2급 등록장애인이 생활하고 있다. 성심원은 별도 출입문을 만들지 않고 성심교를 지나오면 누구나 찾을 수 있게 개방해 놓고 있다. 편견 없이 내 이웃 삶을 돌아봄 직하다. 위치: 산청읍 내리 100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 = 1951년 2월 7일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 중 산청군 금서면 가현·방곡마을, 함양군 휴천면 점촌·유림면 서주마을서 민간인 705명이 희생됐다. 한 시대 아픔이 담긴 합동묘역이다. 위치: 금서면 방곡리 722
◇정취암 = 대성산 기암절벽 사이 자리한 사찰로 펼쳐진 경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비 오는 날 찾으면 그 운치가 더해진다. 길이 험하기는 하지만, 차로 절 앞까지 갈 수 있다. 위치: 신등면 양전리 927-2
◇밤머리재 = 금서면~삼장면을 잇는 30리 굽이굽이 고갯길. 그 옛날 이곳 넘을 때 밤을 까먹었다 하여 이름 붙여졌다. 해발 580m 지점에 이르면 너른 터가 나오는데, 구름 펼쳐진 장관에 가슴이 탁 트인다. 위치: 금서면 지막리 59번 국도 변 해발 580m
◇산청 3매 = 전국 '5대 매화' 가운데 3개가 산청에 있다. 670년 된 원정매(단성면 남사리 261, 하씨 고택 내), 640년 된 정당매(단성면 운리, 단속사지 삼층석탑 뒤편), 450년 된 남명매(시천면 사리, 산천재 뜰 안)가 그것이다.
◇전(傳) 구형왕릉 = 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 무덤으로 전해진다. 아직 명확한 자료가 뒷받침되지 않아 '전할 전(傳)'이 앞에 따라붙는다. 돌로 7개 층을 쌓은 것으로,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한국판 피라미드'다. 위치: 금서면 화계리 산 16-1
◇공개바위 = 5개 바위가 30도가량 기울어진 채 탑을 이루고 있다. 육면체 모양 바위는 아이들 놀이 도구인 공기 모양을 하고 있어 더 신비롭게 다가온다. 위치: 금서면 방곡리 산 176-1
◇기(氣) 바위 = 왕산과 필봉산 기가 모이는 명당자리에 석경·거북바위가 있는데, 이 두 개를 '기 바위'라고 부른다. 최근 입소문 타면서 중국·일본 관광객 발걸음도 이어지고 있다. 위치: 금서면 특리 1300-25 동의보감촌 내
◇원앙송 = 120년 된 뿌리 다른 두 개 소나무가 한 몸을 이루며 부부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사랑하는 이들이 소원을 빌면 '부부 연'을 맺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위치: 신등면 평지리 물산마을
◇남사예담촌 =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연합'이 2011년 '1호'로 지정한 곳이다. 전통 한옥과 돌담이 고즈넉한 여유로움을 선사하며 민박도 한다. 위치: 단성면 남사리 281-1(전화 055-972-7107, 홈페이지 yedam.go2vil.org)
◇대원사 계곡 = 우리나라 대표적인 비구니 수행 사찰인 대원사 인근 계곡은 국내 최고 탁족처(계곡물에 발 담그고 더위 쫓는 곳)로 손꼽힌다. 위치: 삼장면 유평리 1
◇지리산 성모상 = 지리산을 수호하는 여신으로 숭상되며 '천왕할매'로도 불리는 석상이다. 중산리 천왕사에 자리하고 있다. 위치: 시천면 중산리 788, 천왕사 내
◇산천재 = 남명 조식 선생 유적지 가운데 하나로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던 곳이다. 맑은 날로 한정되기는 하지만, 산청에서 지리산 천왕봉이 가장 잘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위치: 시천면 사리 384
◇겁외사(성철대종사생가) = 성철 스님 생가터에 지은 절이다. 복원한 생가에는 유품·소장 도서·메모지·유필 자료 등이 전시되어 있다. 위치: 단성면 묵곡리 210
◇어탕국수
△우정식당 = 어탕국수 6000원, 어탕칼국수 7000원, 고둥탕수제비 7000원, 미꾸라지숙회 3만 원, 피라미튀김·조림 소 2만 5000원·대 3만 원/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264-1/055-972-2259
△늘비식당 = 어탕국수·어탕밥 6000원, 어탕칼국수 7000원, 튀김 1만 원, 찜·매운탕 2만~4만 원/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267-23/055-972-1903
◇흑돼지
△장안식당(옛 부산식당) = 흑돼지 삼겹살(150g) 8000원·가브리살(150g) 8000원·목살(150g) 7000원·양념갈비(200g) 7000원·한 마리(450g) 2만 3000원, 국내산 소고기 모둠(180g) 1만 6000원·특수부위(180g) 2만 원·차돌박이(150g) 1만 원, 육회 소 1만 5000원·대 2만 5000원, 김치찌개·된장찌개 6000원/산청군 산청읍 산청리 240-3/055-973-9277
△흑돼지와 누렁이 = 흑돼지 삼겹살(150g) 8000원·모둠구이(150g) 8000원·양념갈비(200g) 8000원, 매운돼지갈비찜 중 3만 3000원·대 4만 원, 한우 꽃등심(150g) 2만 원, 소갈비찜정식 1만 원, 돼지갈비찜정식 8000원/산청군 산청읍 옥산리 128/055-973-8289
◇민물고기
△물레방아식당 = 피라미조림 2인 2만 2000원·3인 3만 원·4인 3만 7000원·5인 4만 4000원, 메기조림 4인 3만 7000원·5인 4만 4000원, 보리밥 1000원/산청군 시천면 원리 290/055-972-8290
△생초식당 = 쏘가리회 시가, 쏘가리탕 대 8만 원·중 7만 원·소 5만 원, 메기탕 특대 4만 원·대 3만 원·중 2만 5000원·소 2만 원, 메기찜·피라미조림 대 4만 원·중 3만 원·소 2만 5000원, 은어회·피라미회·빙어회 대 4만 원·중 3만 원·소 2만 5000원, 어탕국수·다슬기탕 6000원/산청군 생초면 어서리 251-5/055-973-5757
△강변식당 = 자라찜(탕) 자연산 1kg 시가·양식 1kg 8만 원, 메기찜 2인분 2만 5000원·3~4인분 4만 원·5인분 4만 5000원/산청군 산청읍 옥산리 530-1/055-973-2346
◇고둥
△현지네고동 = 고둥정식 6000원, 고둥수제비 5000원, 고둥사라 대 3만 원·소 2만 원, 고둥회무침 3만 원/산청군 금서면 주상리 269-1/055-973-6697
◇약초음식
△약초와 버섯골 = 약초와버섯샤부샤부 1인분 1만 5000원, 약초버섯매운탕·약초버섯맑은탕·약초버섯비빔밥·약초된장버섯탕 7000원, 약초전 5000원/산청군 금서면 특리 1300-5/055-973-4479
△홍화약초식당 = 홍화비빔밥·홍화비빔면·홍화해물칼국수 6000원, 홍화새싹비빔밥·홍화냉콩칼국수 7000원, 홍화동동주 6000원, 홍화파전 8000원/산청군 신안면 외송리 621-10/055-973-9556
△예담원 = 비빔밥 8000원, 정식 2만 원·3만 원·4만 원·5만 원/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280/055-972-5888
◇현지인 추천
△불로식육식당 = 쇠고기국밥·김치찌개 6000원, 돼지고기(200g) 삼겹살·주물럭·대패삼겹 8000원, 한우(170g) 등심 2만 원, 소고기 모둠 1만 6000원, 특수부위 2만 5000원, 육회 소 2만 원·대 4만 원/산청군 산청읍 산청리 247-1/055-973-0050
△영실한우프라자 = 한우(150g 기준) 명품모음 1만 7000원·한 접시 2만 원·꽃등심 2만 5000원·명품스페셜 3만 원·명품스페셜코스 6만 원, 육회 100g 1만 원·200g 2만 원·300g 3만 원, 한방갈비찜 소 3만 원·대 4만 5000원, 곰탕·야채육회비빔밥 7000원, 물냉면 7000원(고기 주문 후 5000원), 육회냉면 8000원(고기 주문 후 6000원), 된장찌개 5000원(고기 주문 후 3000원)/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48-1/055-974-3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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