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문장의 시제(時制)는 ‘과거형’일 수밖에 없겠습니다. 붉은 수피의 거대한 밑동을 뒤틀며 구불구불 가지를 힘차게 펼치고 선 소나무 한 그루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충북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의 천연기념물 ‘왕소나무’입니다. 열댓 그루의 다른 소나무를 호위병사처럼 거느린 채 당당하게 서 있던 왕소나무는 그 풍모만으로도 ‘왕’이란 이름에 마땅히 값을 하고도 남았었습니다. 거대한 위용이 어찌나 힘차고 대견했던지 마음 같아서는 ‘왕’보다는 ‘대왕(大王)’의 이름을 붙여주고 싶어졌을 정도였습니다. 소나무는 ‘용송(龍松)’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당장이라도 둥치의 굵은 비늘을 털어내면서 하늘로 승천할 것처럼 똬리를 틀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었다지요. 그런데 이 소나무가 28일 태풍에 거짓말처럼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나무가 ‘쿵’하고 쓰러지기 나흘 전. 왕소나무 앞에 서 있었습니다. 어쩐지 나무가 자꾸 발을 붙들어 비가 내리는 이틀 동안 도합 세 번을 찾아 그 앞에 섰습니다. 그게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태풍에 쓰러지고만 왕소나무는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없다는군요. 부러진 가지를 정리하고 넘어져 드러난 거대한 뿌리를 흙으로 덮어주는 정도만 할 수 있을 뿐이랍니다. 기적처럼 숨이 끊어지지 않는다 해도 누운 자세 그대로 자랄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600년 풍상을 다 견뎌온 위풍당당한 왕소나무를 쓰러뜨린 것은 무엇일까요. 순전히 바람 때문일까요, 아니면 건너온 세월 때문일까요. 그도 아니면 제대로 살피지 못한 사람들의 무관심 탓일까요. 왕소나무와 함께 두 그루의 소나무 노거수가 더 있었다 해서 마을 이름까지 ‘삼송(三松)’이라 불렸던 곳. 앞서 두 그루의 거대한 소나무가 차례로 넘어져 버리고, 마지막 남아있던 왕소나무도 이제 생을 다하고 쓰러졌습니다. 왕소나무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 세월 세상을 지탱해온 굵은 정신’ 하나가 속절없이 무너져버린 듯 상실감이 들었습니다. 승천을 앞둔 용의 형상을 한 왕소나무가 있던 괴산의 삼송리, 그리고 지리산 청학동 가평의 판미동과 함께 우리 땅에서 최고의 비밀스러운 길지로 꼽히는 경북 상주의 우복동(牛腹洞). 그리고 청룡과 황룡이 살고 있다는 경북 문경의 쌍룡(雙龍)계곡과 신선이 노닐었다는 선유동(仙遊洞). 서로 경계를 이룬 괴산과 상주와 문경의 외곽을 넘나들면서 길을 이어봤습니다. 행정구역은 땅을 싹둑 잘라버리지만, 길이 어디 그렇던가요. 자르고 구분 지은 도(道)와 시(市)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면서 흐르는 길을 이어붙여서 둥그런 행로를 만들어봤습니다. 교통이 불편하다 해서, 잘 알려지지 않았다 해서 지나치던 곳들을 다 잇고 보니 58㎞ 남짓의 빼어난 여정이 만들어졌습니다. 구태여 그 길을 이은 것은 도처에서 용(龍)과 신선(神仙)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왕소나무는 쓰러져버리고 말았지만 이 길을 따라가면 용의 기운과 신선의 풍류가 계곡에서, 산중에서. 또는 들판에서, 더러는 마을에서 풍경 속과 이야기 속에 녹아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 거대한 둥치의 소나무에서 용의 모습을 보다 충북 괴산과 경북 상주, 문경. 행정구역의 경계 지점쯤에 있는 명소를 지나는 도로를 둥글게 이어붙여 여정을 만들어 봤다. 지역의 ‘중심’이 아닌 경계지점쯤에 있어서 웬만해서는 발길이 닿지 않는 곳들을 한꺼번에 다 돌아보는 코스다. 지금도 경계 끝의 깊은 땅이지만, 예전에는 더 깊었던 곳. 거기에 잠겨있는 용(龍)과 신선(神仙)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길이다. 32번 국도와 922번 지방도, 901번 지방도로를 이어붙인 길은 58㎞ 남짓으로 제자리로 돌아오는 순환 코스니 어디서 시작해도 좋다. 괴산에서 시작하든, 문경이나 상주에서 시작하든 어차피 한 바퀴 돌아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는 여정이니 출발지점을 어디로 삼더라도 별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 그 길 위에서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의 왕소나무를 먼저 찾았다. 승천하는 용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길처럼 가지를 뒤튼 거대한 소나무 앞에 서자 탄성부터 터졌다. 장대하고 우람한 소나무는 거대한 밑동을 시계방향으로 뒤틀어 제 몸을 스스로 휘감으며 똬리를 만들고 있었다. 울퉁불퉁 거친 비늘의 붉은 가지들이 활개를 치듯 뻗어있었다. 용송(龍松)이란 다른 이름은 이래서 얻은 것이었다. 왕소나무 주위에는 호위하고 있는 10여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다른 자리에 있었다면 한그루 한그루가 다 각별한 대접을 받았을 법하지만, 왕소나무의 당당한 위세에다 대니 아예 어림도 없었다. 그러나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흘 뒤인 28일 거센 태풍 속에서 왕소나무는 쓰러졌다. 600년이란 시간은 굳게 땅을 딛고 서 있던 왕의 마지막이었다. 쓰러진 왕소나무가 각별했던 것은 단지 거대하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왕소나무에게서는 범상찮은 기운과 위엄이 깃들어있다. 늙은 거목임에도 붉은 둥치와 가지가 저리도 강건한 수 없었다. 가지 끝 솔잎의 푸름도 맑고 짙었다. 실제로 용이 있다면 이만한 크기와 위엄을 갖추고 있을까. 소나무 앞에서 살아있는 한 마리의 용의 모습을 보았다. 그러나 이제 용은 쓰러져 마지막 숨을 내쉬고 있다. 뿌리뽑힌 왕소나무의 상태를 확인하러 달려갔던 괴산군청과 문화재청 관계자는 ‘다시 세우지 못한다’고 결론 내렸다. 한쪽의 뿌리가 다 잘려버린 상황에서 일으켜 세우면 그나마 남아있던 뿌리마저 손상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게 고작 뽑혀서 드러난 뿌리에다 흙을 덮어주는 것 정도였다. 기적 같은 회생의 실낱같은 희망이 있긴 하지만, 그렇더라도 왕소나무는 남은 삶을 이렇게 쓰러진 채로 누워서 자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왕소나무가 있는 마을에는 한때 마을 이쪽과 저쪽에 두 그루의 거대한 소나무가 더 있었다고 했다. 가지를 뒤틀고 승천하는 용의 형상을 닮은 소나무가 세 그루가 있었다 해서 마을 이름이 ‘삼송(三松)’이다. 하지만 두 마리의 용은 죽었고, 나머지 한 마리만 살아남아서 이마 위로 운무 가득한 대아산과 가령산, 군자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당당히 서 있었다. 그게 불과 이틀 전이었다. 승천하지 못하고 쓰러진 용 한 마리. 왕의 이름을 가졌던 거대한 소나무가 거기 ‘있었다’.
# 상주에서 길 곳곳에 숨어있는 폭포를 만나다 삼송리에서 작은 개천을 하나 건너면 이내 경북 상주 땅이다. 충북과 경북의 경계가 영 흐릿하다.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백악산 무릎쯤에는 옥양폭포가 있다. 길가에서 300m만 걸어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폭포다. 옥양목처럼 맑고 푸르스름한 물이 흘러내린다는 폭포다. 폭포는 색다르다. 거대한 바위들이 폭포를 둘러싸고 있고, 폭포 위로 일부러 놓은 것 같은 돌다리 모양의 바위가 걸쳐져 있다. 석교(石橋) 아래로 폭포가 쏟아지는 모습이다. 이름으로 ‘옥 옥(玉)’에 ‘들보 량(樑)’을 쓰는 이유가 여기 있겠다. 잦은 비로 폭포에는 물이 넘쳐난다. 폭포가 잘 보이는 자리에서 들보 아래로 쏟아지는 물소리를 듣고 옥빛 물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내친김에 인근의 상주 땅에서 이즈음 챙겨서 찾아가볼 만한 곳이 상주학생야영장이다. 목적지는 야영장이 아니라 야영장 앞의 상오리 솔숲이다. 지금 소나무 숲 아래 보라색 맥문동꽃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어둑한 솔숲의 초록빛 융단에 보라색 꽃이 피어난 모습은 마치 그림과도 같다. 상오리 인근에는 두 곳의 그윽한 폭포가 있다. 속리산 천황봉에서 발원한 장각동계곡의 물길이 깊은 산중이 아니라 들의 바위절벽을 타고 쏟아져 내리면서 만드는 장각폭포가 폭포 위의 정자 금란정과 10여 그루의 소나무와 어우러져 수묵화와 같은 풍경을 빚어낸다. 화북면 소재지 쪽에서 속리산 문장대로 오르는 화북오송 탐방로를 따라가다 만나는 오송폭포도 놓치면 아쉽겠다. 오송폭포는 마치 계단처럼 이뤄진 바위 직벽을 타고 물줄기가 쏟아져 내리는데 장쾌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 용이 노닐던 전설적인 이상향의 땅 길은 상주 땅에서 우복동(牛腹洞)을 지난다. 우복동. 지리산 골짜기의 청학동, 경기 가평의 판미동과 더불어서 전설적인 이상향으로 꼽히는 곳이다. 일생을 ‘사람이 살만한 땅’을 찾아다니며 ‘택리지’를 썼던 이중환. 그는 우복동을 우리 땅에서 최고의 길지(吉地)로 꼽았다. 그는 생전에 우복동 뒤편에 우뚝 솟은 청화산의 기운을 가장 좋아했다. 그가 평생 ‘청화산인’이란 호를 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청화산을 두고 그는 “앞 뒤편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다”며 “흙봉우리 돌린 돌이 모두 수려하고 삼기가 적고 모양이 단정하고 평평하여 빼어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아 자못 복지(福地)”라고 적어두었다. 그 산자락 아래 우복동이 있다. 택리지에 남긴 그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우복동은 ‘밝고 깨끗하며 모양이 단정하고 좋고, 빼어난 기운을 가린 데가 없는 곳’이다. 난리나 재난이 틈입하지 않고, 맑은 기운 속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이어갈 수 있다는 얘기다. 우복동은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인데 ‘용유(龍遊)’는 말 그대로 ‘용이 노니는 곳’이란 뜻이니 그 이름 또한 범상치 않다. 우복동 초입에는 ‘동천(洞天)’이란 글귀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동천암이라고도 하고, 오장비라고도 하는 바위다. 신묘한 필치로 꿈틀꿈틀 바위에 물 흐르듯 새겨놓은 초서체의 글씨는 이 땅의 이름난 명승마다 글을 새겼던 강릉부사 양사언의 것이라기도 하고, 182세까지 살았다는 전설적인 도인(道人) 개운조사가 ‘아나함과’란 경지에 올라 맨주먹으로 새긴 것이라고도 전한다. 바위에 새긴 글자를 보면 그게 누구의 것이든 거의 신선의 경지에 이른 자의 솜씨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상주의 우복동을 지나서 문경으로 들어서면 길가에 병천정이란 정자가 숨어있다. 그 정자 앞의 물길이 바로 청룡과 황룡이 노닐었다는 쌍룡계곡이다. 정자 앞의 계곡에는 회란석이 있다. 보통 돌난간 위쪽의 둥글게 다듬은 부분을 회란석이라고 부르는데, 계곡의 너럭바위가 오랜 물살에 패이고 뚫려서 마치 아이스크림 스푼으로 떠낸 듯, 일부러 물결치듯 깎은 듯한 자취들이 곳곳에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이만무는 이 바위를 가리켜 ‘용의 발톱’ 형상이라 했다. 발톱 사이로 흐르는 옥수가 콰르르 포말을 일으킨다. 쌍룡계곡 풍광의 진수는 화북면에서 농암면 쪽으로 달리다 쌍룡터널을 지나자마자 만나는 도장산 등산로 초입에서 마주할 수 있다. 도장산 등산로 초입은 쌍룡계곡의 물길을 따라가는데, 암봉의 협곡 사이로 물가에 소나무가 자라는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가 있고, 그 옆으로 거대하게 뒹구는 바위 사이로 맑은 물이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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