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한국인의 茶_03

醉月 2012. 8. 22. 06:11

한국 전통차에서 찾는 현대인의 웰빙
현대생활의 차

모든 사물은 각자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데, 그 특성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다. 차는 차가 지닌 특성이 있고, 이 특성이 거세되면 차의 존재가치가 상실되고 만다. 그 존재가치를 인식하고 최대한 살려주는 일이 차나무의 생존을 돕고 차를 만드는 일이다. 4세기부터 16세기까지 한민족이 문화 전성시대를 이루었던 것은 차의 역할이 모체였다. 한민족의 차문화는 차의 존재가치를 존귀하게 여겨, 차와 사람이 평등하게 공존하며 서로 돕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전통차는 16세기 이후 현재까지 그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다. 전통의 단절은 개인뿐만 아니라 그 민족의 가치를 상실하게 한다.



차의 대량생산과 커피의 유입으로 인한 폐해
과학의 힘을 빌려 차의 대량생산이 이뤄져, 차문화가 보편화되고 모든 사람들이 차를 생활화한다면 그또한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차의 수요가 왕성하지 못하고 품격만 저하된다면 없는 것만 못하다. 한국 차의 품격은 본성을 지키는 데 있었다. 차가 지닌 고귀한 품격에 과학이 개입하여, 대량생산을 목표로 한 기계화로 말미암아 오히려 대중의 취향을 차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였다.
과학의 가치는 본질을 규명하는 데 있다. 과학은 관념적인 다른 분야와는 달리 내용을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파악하는 학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취약점을 공략하는 데 과학을 악용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과학은 이기적인 탐욕을 도모하는 수단이 아니다. 일본의 차나무 개량에 이어 동남아 여러나라에서 보다 많은 수확을 목표로 차 생산지를 확장하고 있다. 차나무만이 지닌 천성과 품격에 과학이 개입한 오류는 아닐지 염려된다. 자연은 인간에게 모든 생명의 평등 원리를 보여주지만, 사람들은 자연을 배신하고 굴복시켜 자기만족을 얻으려 애쓰는 이기심만을 보인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일방적인 굴복은 없다. 오로지 인과가 있을 뿐이다. 자연의 파멸은 인간 파멸의 결과로 올 뿐이다. 인간이 개발한 과학문명의 이기들은 풍부하고 편리한 생활을 제공하는 대신, 자연을 오염시키는 등 인간에게 위협적인 대가를 치르도록 요구하고 있다.



한국인의 현대생활에 빼놓을 수 없는 음료는 20세기에 미국에서 들어온 커피다. 커피는 15세기 에티오피아에서 양치는 목동이 우연히 발견한 것이 그 기원으로 알려져 있다. 16~17세기에 유럽으로 건너가 18세기부터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음료로 급성장했다. 커피나무는 열대산 상록관목으로 습한 기후에
서 자란다. 재스민 같은 흰 꽃이 피고 자홍색의 작은 열매가 송이로 열리며 붉은 색으로 익는다. 야생상태에서는 키가 8~9m 자라지만 이를 억제하여 열매를 수확한다. 씨는 길이가 15~18mm이고 다육질 과육이며 두 개의 씨알이 묶여 있다. 이 씨를 볶아 가루로 만들어 물에 끓여 마시는데, 쓴 맛이 주류이고 주성분은 카페인이다.
커피나무는 이 카페인을 유해물질의 침입을 막아내는 독으로 사용하여 스스로를 보호한다. 이 독은 인체 내에 들어와 중추신경을 강하게 자극한다. 약간의 흥분과 개운함을 주기 때문에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며 잠이 오지 않게 한다. 복잡다단한 현대사회에서 갖은 스트레스와 불안의 심리를 겪는 현대인들은 커피 카페인의 힘을 빌려 잠시나마 위안을 얻으려 한다. 습관적인 커피 음용은 카페인의 과용을 부르기 마련이다. 커피를 장기간 과용한 사람들은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심리적 불안과 두통을 호소한다. 또한 속쓰림의 증상은 식도염, 위궤양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한국사회의 일상을 지배하는 커피
현재 한국의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커피자판기 없는 곳이 없고 거리마다 커피하우스가 있다. 식당에는 “커피는 셀프입니다”라는 메모가 붙어있고 집집마다 노소간에 몇 잔이고 커피를 마신다. 직장인은 아침밥을 걸러도 커피는 필수요, 점심 후 커피 한 잔은 밥값에 버금가지만 당연히 섭취해야 할 디저트이며, 퇴근해서 마시는 커피는 하루의 피로와 스트레스를 가시게 한다고 여긴다. 현대 한국인의 행세는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또는 길을 걸어가며 손에 든 커피와 함께 계속되고 있다. 커피를 마셔야 문화인이고 현대인이라는 이미지가 우리들 무의식중에 들어있는 듯하다. 한국인 1인당 커피 소비량은 연 평균 400잔이며 이는 외화 50억 달러에 상당하는 양이다.
한국은 금수강산과 더불어 불교와 유교를 토대로 인문학을 발달시킨 아름다운 나라였다. 이렇게 유구한 문화를 독특하게 보존하고 증진시켜 온 모체에 한국의 차문화가 있었다. 불교의 본원이자 핵심인 선수행은 차와 분리할 수 없다 여기며 기라성 같은 조사스님들을 배출하였고, 고려와 조선시대의 수많은 선비들이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차시를 읊은 흔적은 한국이 차의 나라였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제 한국 전통차는 역사 속에서 그 자취마저 희미해졌다. 일본 차나무와 녹차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커피의 막강한 지배 앞에 무기력하다.
한국에 상륙하여 어느덧 만연해진 커피문화가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하여 한번쯤 되돌아봐야 한다. 한국은 근대에 들어 서구지향적인 성향이 고착되었다. 특히 미국을 흠모하는 경향이 짙어 학문, 예술, 교육, 종교 등의 많은 분야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면서 이를 ‘선진’이라 믿는다. 자기 것이 없는 선진추종은 자신뿐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근간을 흔들게 된다. 커피를 마시는 세계 인구는 1/3이지만 커피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곳은 커피벨트라 하여 한정되어 있다. 커피 생산지가 아닌 곳에서 습관적 소비가 지나치게 증가한다면 곤란하게 될 수도 있다. 지배자의 성취는 피지배자가 무의식 속에 지배에 대해 정당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위험을 예견하고 안전을 도모하는 것만이 생존 경쟁의 우위에 설 수 있는 길이다.




가장 이상적이고 고귀한 웰빙음료, 차
현대인이 간과하고 있는 것은 커피의 중독성이나 한잔의 커피에 담긴 세계 정세만이 아니다. 커피나무 역시 다른 나무나 채소처럼 농약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이들은 드물다. 스리랑카는 현재 세계 4위의 차생산국으로 세계에 실론티를 수출하고 있지만 본래 커피 생산국이었다. 1869년 녹병균으로 인해 커피나무가 전멸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커피나무 열매 안에서 자라는 ‘나무좀벌레’와 그 유충을 먹고 자라는 삽주벌레의 존재만 보더라도, 열대 다습한 기후에서 농약사용은 필수조건일 수밖에 없다. 사실 농약 자체는 과육 안에 있는 커피열매에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더 심각하게 여겨야 할 것은 커피의 변질이다. 생산지역이 먼 커피는 국내의 대형 커피전문점에 로스팅한 상태로 들어오기도 하고 생두로 들어오는 곳도 있다. 로스팅한 커피는 산화가 빨리 진행된다. 우리는 커피 소비로 이익을 얻는 대기업의 공급 공세가 소비자의 사정을 안중에 두지 않는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인간의 행, 불행은 일차적으로 자기 책임이기에, 사물을 대하고 행동할 때 생각을 먼저 하고 살펴야 한다. 물론 세상을 살며 시대의 흐름과 자신의 기호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그러나 이 흐름을 따르다 자신도 모르게 중독의 구렁텅이에 빠지면 난처해진다. 한두 잔의 커피를 사회활동의 일환으로 마시는 건 수용해야 하지만, 습관성 음용이라면 피부가 얇고 감성적인 한국인에게 부작용을 안겨줄 수밖에 없다. 서구인들과는 체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음식이나 음료 속 유해한 화학성분으로 인해 발병도 더 쉽게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삶을 살면서 뜻을 굳건히 세우고 적어도 그 뜻을 이루기까지는 무탈해야 한다. 종교의 계율도 마음과 몸을 올바르게 간수하여 종교의 목적지에 기필코 도착하자는 것이다. 원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중용이 필요하다. 중용은 확실한 자기 입지를 수립하고 행하면서 모두를 포용하는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한 ‘웰빙’은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기보다 정신적으로 올바른 의사를 지니고 건강하게 살자는 개인의 가치관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본래 자연을 숭상하는 민족이었으며 현대의 웰빙 이전에 이미 웰빙을 추구해왔다. 그 대표적인 음료가 차茶다. 그것은 커피가 들어오기 전이며, 일본 녹차가 생산되기 그 이전이다.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이상적이고 고귀한 음료가 한국 순수 전통 잎차다. 한국 차나무는 지나친 생존 간섭을 싫어하였고 벌레 역시 찻잎을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자생차나무는 희귀하지만 지금도 비료나 농약을 모르고 산다. 차를 법제할 때 찻잎의 승화를 존중하
여 나무로 불을 지핀 가마솥에서 정성을 다해 오래 오래 손길을 접촉하였고, 이에 차와 인간이 화합하였다. 커피의 카페인과 똑같은 성분이 있으면서도 우리 몸에 유익한 이유는 열매와 잎의 차이에 있다. 차의 카페인이 신체에서 조화를 이루게 하는 여러 비타민, 아미노산, 데아닌 등의 덕분이다. 우리 몸의 오장육부를 편안하게 하고 의지와 지혜를 촉발하는 형이상학적인 유일한 음료가 바로 차茶인 이유이다.
독립성을 넘어 폐쇄적인 현대인의 삶은 이웃은 물론 가족도 만나는 일이 드물고, 한자리에 있어도 대화에 서먹함이 묻어나온다. 이때, 가족 중 누군가가 찻상을 내와 함께 차를 마신다면 서로 정분이 통하고 화기애애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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