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시와 함께하는 우리 산하 기행_07

醉月 2012. 1. 30. 07:19

‘실상(實相)’이 보이지 않아 가슴속에 들여놓은 절

남원 함양

 

황석산성에서 바라본 전경

 

조선 말, 정수동이가 그랬다던가. 수동의 마누라가 아이를 낳았다. 미리 미역을 준비하지 못한 터라 마누라가 수동에게 장에 가서 미역을 좀 사오라고 했다. 수동이 시장에서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데 때마침 바삐 어디론가 행차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자네들, 어디 가는가?”

“어이, 마침 잘 만났네. 우리 지금 금강산 유람 가는 길인데 자네도 같이 가지 않으려나?”

“그래?”

수동이 그 길로 친구들을 따라붙었다. 금강산 구경을 잘 하고 돌아와 봤더니 그새 아들놈은 두 돌이 지나 있었다던가. 자고로 여행은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는데 요즘 세상에 이랬다간 제 명대로 살지 못할 수도 있을 법하다.

벌써 10년은 됐음직하다. 대전에서 살던 때인데 서울 친구 둘이 사전 기별도 없이 대전의 내 직장에 쳐들어왔다. 내가 수동이처럼 물었고 친구들이 수동이처럼 말했다.

“자네들 어디 가는 길인가?”

“응, 지리산 가는 길인데 같이 가지 않으려나?”

“좋지.”

그렇게 남원으로 내뺐다. 그곳에서는 후배인 이모 시인까지 불러내어 지리산 백무동으로 들어갔다. 겨울, 산길에 눈이 쌓여 있어서 자동차가 애를 먹었다. 영원사 절간 못 가서 차를 세우곤 등산을 했다. 서로들 정처 없이 나섰다가 즉흥으로 “도솔암에나 올라가보자” 해서 시작한 산타기인지라 신발 하나 제대로 갖춰 신은 이가 없었다. 발목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땀을 흘리며 올랐다.

다들 ‘글장이’여서 그런지 전해주는 이야기도 그럴싸했다. 이태 전 겨울이었다지. 두 친구가 처음으로 도솔암을 찾았는데 산중 암자에는 스님조차 없더란다. 이미 날도 저문지라 두 친구는 염치 불고하고 빗장을 따고 법당 내실까지 쳐들어갔다. 쌀을 찾아내 밥을 지어 먹곤 군불까지 지펴 따뜻한 방에서 하룻밤 신세를 졌다. 다음 날 돈 몇 만 원이랑 편지 한 장을 불전에 남기곤 산을 내려왔단다.

 

그 겨울의 지리산 백무동

한 시간 넘게 힘든 산행을 한 끝에 도솔암 절 마당에 올라섰다. 맞은편으로 훤칠한 천왕봉이 빤히 쳐다보이는 명당이었다. 이 겨울엔 젊은 비구승 한 분이 암자를 지키고 있었다. 어렵게 청을 놓아 더운밥도 얻어먹었다. 친구들이 그 겨울에 신세진 바를 토설하며 용서를 구했는데 스님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빙긋이 웃기만 했다. 정말, 친구들이 지어낸 얘기인지도 모르겠다.

 

암자를 나와서는 굳이 임간도로를 걸었다. 다시금 눈발이 분분히 뿌렸다. 앙상한 나뭇가지들만 강설 속에 서 있는 적막한 겨울 지리산의 정취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산을 내려와서는 잠깐 실상사에 들렀다가 이 시인의 안내로 만수천 개울 너머의 간판 없는 찻집에 들어가 몸을 녹였다. 낡은 기와채의 좁은 마당에 갈탄 난로가 켜져 있어 금세 심신이 훈훈해졌다. 지리산이 좋아 굳이 이곳에 옮겨와 산다는 노처녀 주인이 끓여주는 뽕잎 차의 향이 참 좋았다. 후덕하며 섬세한 배려는 동동주 한 잔과 두부김치 한 접시에도 그대로 배어 있었다.

 

해 질 무렵에는 만수천 냇물을 따라 생초 방향으로 길을 떠났다. 찻집 여주인이 일러준 냇가 숙소를 찾기 위해서였다. 아득한 높이의 천왕봉 기슭을 돌아 흐르는 산골 냇물을 따라가는 길에서 마주하는 풍광 또한 눈을 즐겁게 했다.

 

주인의 취향을 일러주듯, 암석으로 통문을 만들고 돌담 안에다 반듯한 집을 세운 업소에서 여장을 풀고 취흥을 즐겼다. 아침에는 간밤 숙취가 있음에도 상쾌한 산 공기와 명랑한 물소리를 곁들인 덕에 심신은 깃털처럼 가볍기만 했다.

이후, 나는 두세 번 더 지리산을 찾으면서도 이 여정을 반복했다. 계절 따라 동행 따라 정취가 다른 경우는 있었지만 자연과 사람에게서 받는 아름다운 감흥은 달라지지 않았다.

 

실상사와 만수천 풍경

 

만수천과 실상사

 

승용차를 이용하는 경우, 88고속도로의 지리산나들목을 나오는 것이 이편으로 가는 손쉬운 길이 된다. 인월면을 통과한 뒤 60번 도로로 옮겨 타면 곧 만수천 상류다. 가까운 뱀사골을 둘러보고 산내로 나와 하천을 따라 내려가면 실상사가 있는 남원시 산내면 입석리에 닿는다.

 

개울에 걸린 해탈교를 건너면 먼저 장승 두 기가 찾아오는 이를 반긴다. 원래는 다리 이편에도 한 쌍의 장승이 있었는데 1963년 홍수 때 떠내려갔다는 얘기를 들었다. 홍수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5년 전인가 내가 다시 찾았을 때도 다리 이편 마을은 그해의 만수천 범람으로 입은 생채기가 곳곳에 남아 있었지만 실상사 절간은 멀쩡했다. 마을 편에서 보면 절간의 입지가 마을보다 결코 높아 보이지 않는데도 그렇다. 묘한 착시현상이 이곳에서도 일어난다.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에서도 가장 먼저 개찰(開刹)된 실상사는 들판 가운데 앉은 절이다. 따라서 산간의 절집과 같은 변화 있는 모양새는 아니다. 그러나 절간에 들어서기 직전 몸을 돌려 남쪽을 바라보면 유서 깊은 절이 왜 이곳에 앉았는지 짐작되는 바 없지 않다. 천공을 향해 우람히 치솟은 천왕봉이 정면으로 마주하기 때문이다. 실로 장엄한 이 거대 산봉을 이곳에서처럼 뚜렷하게 대면할 수 있는 자리가 달리 없다.

 

신라 흥덕왕 3년(828) 때 세워졌다는 실상사 또한 여러 차례 소실과 복원의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두 기의 잘생긴 석탑이 있으며 탑 사이에는 꽤 덩치가 큰 석등이 서 있다. 석등에 불을 켜는 일을 위해 돌계단을 붙여놓은 게 이채롭다. 실상사에서도 소문난 명물 둘은 약사전의 철재여래좌상과 보광전의 범종이다. 보는 이를 단번에 압도해버리는 거구의 철불은 특이하게도 맨땅에 좌정하고 있다.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지기(地氣)를 붙잡아 누르기 위해 그렇다는 속설이 있다. 듬직한 얼굴, 당당한 가슴, 불쑥 나온 배…. 마주하는 이의 마음까지 넉넉하게 해주는 근사한 불상이다. 보광전 범종 겉면에는 꽤 복잡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일본 국토의 형상이라고 믿고 있다. 절터를 잡을 때부터 풍수학적 고려가 있었다는데 이렇듯 일본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 것도 이 절의 한 특색이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실상사를 일본의 대항마(對抗馬)로 하는 상징체계가 자연스럽게 민간에 생겨났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근래는 불교의 사회참여 방식을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예로 실상사가 부각되었다. 불살생(不殺生) 실천의 농장공동체 운동, 대안학교 운영 등이 그 예다.

이른 아침 다시 절집을 둘러보고 나온 나는 문 앞에 선 채로 천왕봉을 쳐다보며 심호흡을 한다. 구름에 가려 꼭대기의 형체는 드러나지 않지만 저 높은 곳에도 내가 디뎠던 돌과 흙이 있음을 잠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위에서 내려다봄과 아래에서 쳐다봄이 이렇게 판이하다. 그리고 절 문 앞에서 나눠지는 세 갈래 흙길을 본다. 산으로, 들판으로, 마을로 가는 길이 분명한데 하필이면 그것이 절 문 앞에서 그러하니 괜스레 마음이 쓸쓸하다.

 

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지나온 발자욱 역시 눈에 가리웠으므로

나는 어디에 와 있는지 알지 못한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바람은 바삐바삐 지나가 버리고

눈을 쓴 댓잎의 손가락은 너무 많아

그 방향을 가늠할 수는 없다.

 

實相은 어디 있는가.

 

한 발 한 발 찍은 생각들은

거친 눈보라로 날려가 버리고

어쩌다 손바닥 위에 놓인 생각들은

눈처럼 녹아버려 그 온기를 잡을 수 없다.

 

實相은 정말 있는가.

눈발에 가려

實相은 보이지 않고

흰 눈에 갇혀

눈감은 것처럼 어두운 저녁.

마음의 집을 허물어 버리고

절 한 채를 들여놓는다.

- 김규진 시 ‘실상사 가는 길.1’ 전문 황석산의 기상이 늠름하다.

 

 

차라리 실상은 알지 못해도, 가슴속에 절 한 채를 들여놓을 수 있기만 해도 우리네 삶은 얼마나 훈훈할까. 흰눈 덮어쓴 댓잎들은 손가락이 너무 많다는구나… 하여 그것의 가리킴은 가리킴이 되질 못한다. 산으로 가야 할지 들판으로 가야 할지 아니면 마을로 돌아가야 할지 모르는 이들은 손바닥에 놓은 생각조차 잡지를 못한다. 허무와 고단의 발견과 그리고 체념의 위무를 겨울 실상사에서 얻고 있는 시인의 노래가 적이 가슴을 적셔온다.

 

길 건너 찻집도 예전 그대로다. 담벼락과 대문에 ‘차(茶)’자 한 자만 써 붙여놓고 손님 받을 궁리를 하는 그 소박함도 변하지 않았다. 여느 때와 달리 사람들이 북적여서 사연을 알아봤더니 그새 시집을 가고 아이까지 낳았는데 내가 간 날이 아이의 돌날이란다. 이런 기쁜 일이. 덕담 몇 마디 주곤 술과 떡을 공으로 얻어먹는다.

 

청정 산수의 용추계곡

수년 전, 덕유산을 종주하던 때다. 해질 무렵 삿갓재대피소에 도착해 등짐을 내려놓은 뒤였다. 문득 남서쪽 하늘을 봤는데 기막힌 풍경화 하나가 그곳에 그려져 있었다. 푸르스름한 하늘에 높고 낮은 먹빛의 산들이 선명한 스카이라인을 긋고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낫날처럼 치솟은 기묘한 산봉우리 하나가 시선을 끌었다. 그 산 꼭대기에는 창백한 초승달까지 박혀 있어서 전위적인 수묵화를 연상케 하는 풍경을 그려냈다. 뒤늦게 관리인으로부터 함양의 황석산이란 설명을 들었다.

 

함양과 거창 경계에 형성된 거대 산군에서도 금원산(1352m), 기백산(1331m), 황석산(1190m), 거망산(1245m)이 빼어나다. 금원산 기백산이 하나의 산맥으로 연결되며 황석과 거망이 또 같은 형세다. 두 산맥의 틈새를 만드는 것이 용추계곡인데 빼어난 산들이 한 덩어리로 붙지 못하도록 골을 파고 물을 흘리는 자연의 조화가 놀랍다. 따라서 용추계곡은 깊고 그윽하며 아름답고 순진하다. 6·25전쟁 때는 빨치산 여장군 정순덕이 이 골짝에서 활약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국군 1개 소대가 그녀에게서 무장해제를 당하고 가까스로 목숨만 부지한 채 하산한 사실은 근래에 밝혀진 일이다. 가까운 곳에 큰 도시가 없는 덕에 사계절 어느 때든 적막하며 사람의 손때를 묻히지 않는 청정 자연을 그대로 지녔다.

 

용추계곡 중간쯤에서 황석산 등산로가 시작된다. 초입에서부터 아득한 천공에 백운을 거느리고 솟은 정상이 바라보이는데 그 광경은 자못 이국적이기까지 하다. 예리한 세모꼴의 그 바위 봉우리는 쉬 피라미드를 연상케 하는데 수림을 뚫고 산을 오르는 동안에는 시시각각 빛깔과 모양새를 달리한다. 황석산의 깊은 숲은 아직도 전인미답의 원시림이나 다를 바 없다. 그 봄날 등산로 지척에서도 고사리는 물론 사람 손 잘 타는 두릅까지 흔하게 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능마루에 오르면 오른편으로 거망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있고, 왼편은 황석산 정상 가는 길이다. 고산초들이 푸른 융단을 만들고 그 위로 진달래꽃들이 터널을 이룬 능마루길을 걷는 흔쾌하고도 벅찬 느낌은 신고(辛苦) 끝에 정상 가까이 이른 자만 가지는 복이다.

암봉을 돌아 내려서면 근래 복원한 황석산성 성벽 위를 걷게 된다. 높고 날카로운 두 암봉 사이의 협곡을 막은 산성인데 함양 땅 안의(安義) 사람들은 이 산성을 특히 자신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여긴다. 정유재란 당시 안의 사람들은 이 높은 데까지 올라와서 성을 쌓고 왜군에게 처절하게 항거했다. 이윽고 성이 무너지자 남자들은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다 전원 죽임을 당했으며 부녀자들은 천길 절벽에 몸을 날려 저들의 단심(丹心)을 마무리했다. 황석산 북쪽 바위 벼랑은 아직도 핏빛으로 물들어 있다고 이곳 사람들은 말한다.

 

정상의 자리는 워낙 비좁아 여러 사람이 올라설 수 없다고 했던가. 그렇다. 황석산 바위 꼭대기에는 네댓 사람이 겨우 설 수 있는 틈밖에 없다. 그 꼭대기에 내 키 하나를 더 세워 맞은편 산줄기를 바라보고 먼 데 지리산 줄기를 더듬는다. 그리곤 그동안 가쁜 숨을 쉬며 헤치고 온 신록의 골짝과 그 너머의 들판을 내려다본다. 내 몸이 허허고립(虛虛孤立)의 진체(眞體)라는 존재의식도 그런 자리에서 더욱 절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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