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예술가의 집

醉月 2012. 1. 23. 11:16

바람과 햇빛이 놀러오는 집 짓고 허허 웃고 살지요
농부도예가 송일근

▲ 폐가를 손질해 사용하고 있는 농부도예가 송일근의 작업실.
농부가 바닥에 철퍼덕 앉아 헤벌쭉 웃고 있다. 벌렁 누워 있는 농부도, 삽 들고 논일 나가는 농부도 뭐가 그리 좋은지 함지박만하게 입을 벌리고 있다. 흙투성이 주름진 얼굴들이 말한다. “인생, 어떻게 사느냐고? 그냥 저냥 웃고 살지.”
   
   전남 담양군 금산리 무월(撫月)마을. 서울에서는 290㎞, 광주광역시에서는 25㎞. 달이 어루만져주는 곳이라는 이 마을에는 농부들의 ‘욕심 없는 웃음’을 흙으로 빚어내는 도예가 송일근(54)씨가 살고 있다. 그 또한 농사꾼으로 살면서, 그가 딛고 선 마을의 흙으로 쓱쓱 빚어낸 ‘농부들’은 하나같이 ‘허허’ 웃고 있다. 그래서 그의 공방 이름도 ‘허허도예공방’이다. 사람도 작품도 모두 웃고 있는 이곳에 오면 누구나 무장 해제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광고의 카피처럼 번잡한 일상의 전원은 잠시 꺼두고 이유 없이 ‘허허’ 웃어도 좋을 듯하다.
   
   도시의 시간과는 속도가 다른 이곳에서 그는 삶의 시계를 자연에 맞추고 산다.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은 자연이 해결해 준다. 자연이 주는 대로 그는 몸만 움직일 뿐이다. 250마지기(5000평) 땅에 농사를 짓고, 그 흙으로 토우를 빚고 생활도자기를 만든다.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에서 나무를 해다가 직접 집도 짓는다. 그가 지금 살고 있는 방 세 칸짜리 집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부부가 10년 걸려 지었다. 이 전에 살던 너와집도 혼자 힘으로 폐가를 뜯어내고 다시 짓다시피 했다. 미술교육을 받은 적도 건축을 배운 적도 없다. 흙과 바람과 햇빛, 늘 보아온 농부들이 그의 스승이다. 그의 누나는 재독화가 송현숙이다. 간호사로 독일 갔다가 독학으로 화가가 된 누나를 보면 예술가의 피를 타고났는지도 모르겠다.
   
   최근 3년은 도예가보다 마을 이장으로 살았다. 농부이자 도예가이자 목수이자 이장인 그를 만나러 먼길을 달렸다. 마을 입구에서 삽을 들고 일하던 남자가 차를 흘낏 보더니 다시 일을 했다. 꼬불꼬불 골목길을 올라가 공방을 구경하고 있자니 한참 만에야 마을 입구에서 일하던 남자가 흙을 털면서 걸어왔다. 송일근이었다.
   
   
   농사짓다, 그 흙으로 농부들 얼굴 빚다…
   

   무월마을은 그의 고향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짧은 직장생활과 사업을 하며 도시를 기웃거렸지만 무공해 산골마을에 익숙한 그의 몸은 도시의 삶을 견디지 못했다. 이곳저곳이 아팠다. 고향은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그의 몸을 품어 다시 건강하게 해주었다. 다시는 고향땅을 떠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대신 고향의 삶을 이어가게 해줄 것이 필요했다. 흙을 밟고 다니던 유년의 기억들은 그를 흙으로 이끌었다. 농사일을 하면서 생활도자기를 만들었다. 만들수록 재미가 있었다. 주변 생활들을 흙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농부의 얼굴을 담기 시작했다. 번지르르한 유약을 입힌 작품들이 아니었다. 토우(土偶)도 생활도자기도 투박하기 그지없다. 그릇은 하나같이 삐뚤빼뚤하고 토우들은 대부분 유약을 입히지 않은 흙빛 그대로다. 그는 생각을 빚고, 나머지는 흙과 불과 시간에 맡긴다. 어떤 작품들은 가마에 굽지도 않고 장독대 위에 앉아 있다 비와 함께 흙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한다. 그는 작품의 주인은 흙이라고 생각한다.
   
   “인체 구조나 비례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그냥 내 이야기를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연에 순응하다 보면 흙이 모든 것을 가르쳐 줍니다. 처음엔 내 의지대로 흙을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흙의 특성에 따라 내가 흙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무심하게 빚어낸 농부들의 웃는 얼굴을 보고 사람들이 즐거워했다. 매끈하고 세련된 도예작품 속에서 투박하지만 꾸밈없는 그의 작품은 신선했다. 두꺼운 화장을 벗겨낸 건강한 ‘생얼’을 보는 것처럼. 토우들의 웃음을 통해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전해졌다. 1997년 첫 개인전을 비롯해 2005년·2006년 일본 나고야 초대전, 그룹전 등 지금까지 30여회의 전시를 가졌다. 10여년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는 소리꾼 장사익의 집에도 그의 농부들이 단체로 함박웃음을 웃고 있다.
   
   
   고향의 흙과 나무로 집을 짓는 목수
   
▲ 송일근의 집에는 어디서든 토우들이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전시실 문 위쪽에 올라앉아 있는 작품들.

   스물여덟에 고향에 뿌리를 내리면서 본가 앞에 있는 폐가를 한 채 접수했다. 너도나도 도시에서 살아보겠다며 고향을 떠나던 때였다.
   
   “그땐 집을 공짜로 주고 떠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만날 얼굴 보던 고향 사람인 데다 땅값도 얼마 안 되고 팔리지도 않으니 아예 등기까지 넘겨주고 갔어요.”
   
   폐가를 뜯어내고 토우를 빚듯 손 가는 대로 집을 고쳤다. 마룻장은 뜯어 식탁으로 만들고 창호지 문이 있던 자리엔 통유리창을 냈다. 깨진 도자기 조각들을 넣어 흙벽을 올리고 지붕 위엔 항아리들을 이어 붙여 굴뚝을 만들었다. 거실 한쪽에 페치카도 들여놓고 구석에 만든 주방 흙벽엔 ‘허허공방’이라는 글씨도 새겼다. 삐그덕거리던 부엌문은 현관문으로 용도변경됐다. 집 앞 나무에 작은 등을 걸어놓고 그 밑에 나무둥치를 놓으니 더 없이 운치있는 정원이 탄생했다. 물론 모든 것은 혼자서 했다. 농사짓고 흙을 주무르는 틈틈이 하느라 1년이 넘게 걸렸다. 이곳에서 토우 빚는 도예가 송일근의 이름이 바깥세상에 알려지고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중엔 장애아들을 자신의 아이처럼 데리고 사는 ‘처녀 엄마’가 있었다. 하나도 아닌 무려 여섯 명이나 되는 아이들의 엄마였다. 그 대단한 ‘엄마’는 아이들에게 흙을 만지게 하기 위해 가끔 공방을 찾았다. 둘을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이 바람을 넣었다. 서른아홉 노총각과 서른일곱 노처녀 정다정은 1997년 ‘허허공방’ 마당에서 부부가 됐다.
   
   침실이라고는 혼자 누우면 꽉 찰 공간밖에 없었던 탓에 집 뒤쪽으로 큰 방을 하나 이어 붙였다. 애초에 오각형으로 만들려고 했지만 땅에 맞춰 만들다보니 그의 작품처럼 삐뚤빼뚤 재미있는 방이 됐다.
   
   “집도 그릇을 만드는 것하고 똑같습니다. 자연과 합일돼야 도자기가 빚어지듯 집을 짓는 것도 기압·바람·햇빛 각도 등 자연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말하는 그는 예측하지 못한 변화 또한 자연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직선은 찾아보기 힘든 이 방에서 아들과 딸이 차례로 태어났다. 한 방에서 네 식구가 ‘오글오글’ 살다 아이들이 크면서 안되겠다 싶어 건너편에 새 집을 짓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부부가 함께였다. 기약 없이 공사를 시작했다. 밭일하다 달려와 벽을 쌓고 작품 만들다 달려와 나무를 깎았다. 한창 손이 가는 아이들 때문에 일은 더욱 더뎠다. 기둥을 세우고 서까래와 대들보를 얹을 때만 마을 사람들이 힘을 거들고 모든 것은 부부가 직접 했다. 힘든 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던 부인은 지붕 위에 올라가 기와를 척척 얹게 됐다.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마당엔 동네 사람들이 마신 맥주 캔이며 고철들로 만든 설치 작품이 곳곳에 서있고 나무들 사이에서 토우들이 웃고 있다. 공사를 시작하고 10년, 코흘리개 두 아이는 중학생이 됐다. 새 집으로 이사해 살고 있지만 마지막 대문을 완성하지 못해 아직 상량문을 적은 종이는 떼어내지 못했다.
   
   
   ‘행복마을’ 만드는 이장 송일근
   
▲ 20여년 전 송일근씨가 폐가를 고쳐 살다 신혼을 보낸 집. 지금은 부인이 바느질 작업실로 사용하고 있다.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면서 한때 90가구가 북적이던 마을은 늙고 조용한 마을이 됐다. 아이들 울음소리도 사라지고 나이든 사람들만 남았다. 채 30가구가 남지 않은 마을엔 폐가만 늘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마을이 사라질 판이었다. 전 이장을 중심으로 전남도가 농어촌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 시작한 ‘행복마을’ 사업을 신청했다. 한옥을 지을 경우 건축비를 지원해 주는 행복마을에 선정이 되고 2009년부터 본격적인 사업이 시작되면서 그가 이장을 맡았다.
   
   그때부터 한옥 짓고 마을에 돌담 치고 농촌체험 문화관을 지으면서 마을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돌아왔다. 젊은 부부들도 들어왔다. 29가구가 39가구가 됐다. 지난해엔 경관우수시범마을에도 선정됐다. 딱 2년만 하겠다고 시작한 이장은 1년 더 연장됐다. 최근 지자체마다 ‘행복마을’ 같은 사업을 경쟁적으로 벌였다가 마땅한 소득원이 없어 실패했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리지만 그는 태평하다.
   
   “사업의 성과가 꼭 소득을 올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을 바꾸면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됩니다. 돌멩이·맑은 공기의 가치를 깨닫게 된 것만 해도 우리는 큰 자원을 얻은 겁니다. 의식을 바꾸는 계기를 만든 것은 소득 이상의 성공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충분히 배부르고 행복합니다.”
   
   
   허허공방의 허허실실 부부
   
▲ (좌)송일근씨 부부가 10년 걸려 직접 지은 집.
(중) 음악매니아인 송일근씨가 조립해 만든 오디오. 창에는 부인이 만든 커튼이 걸려있다. 그릇·시계·이불 등 필요한 모든 것은 부부가 직접 만든다.
(우) 송일근씨의 도예작품이 전시된 공간.

   고향인 그보다 더, 이 마을의 풍경과 어울리는 사람은 부인 정씨다. 욕심 없기로는 그보다 한 수 위인 정씨는 말한다. “눈이 오면 오는 대로, 바람 불면 부는 대로, 햇살 쏟아지면 또 그대로 좋으니 날마다 행복이 바로 이런 것이지요. 이곳에 사는 것을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씨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바느질을 가르치고 소리꾼을 초청해 소리를 배우기도 한다. 집안 곳곳에는 정씨가 만든 쪽이불·조각보·조각 커튼이 그의 도예작품과 맞춤처럼 어우러져 있다. 바느질을 언제부터 했느냐고 정씨에게 물었더니 “어느 날 하고 있습디다. 배운 것도 아닌디 DNA가 가르쳐준 것이제. 못쓰는 천 조각들 모아서 필요한 것은 다 만들어 쓴다”고 말하며 웃는다.
   
   “공부는 잘하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고, 우리 애들에게는 실컷 놀라고 말해요. 공부 못해도 걱정 안해요.” 날씨가 좋은 날은 두 아이들에게 “학교 가지 말고 놀러가자”고 조른다는 정씨를 카메라 앞에 세웠더니 싫다는 말은 못하고 한마디 던졌다. “사진을 찍지 말고 차라리 원하는 대로 그림을 그리지 그러느냐”고.
   
   “먼길 떠나기 전에 따뜻한 차 한잔 하고 가라”는 말에 부부가 지은 집에 앉았다. 대나무로 창살을 해 만든 창 밖으로 평화로운 마을이 내다보였다. 음악 매니아인 그가 심상치 않아 보이는 오디오로 가더니 음반을 한 장 골랐다. 호른형 스피커는 그가 직접 조립한 것이라고 했다. 지인이 녹음해 줬다는 대피리 연주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숨소리까지 생생한 날것 그대로의 대피리 소리에 온몸이 빨려들었다. 순간 그 공간이 바깥세상과는 아득하게 멀어지는 듯했다.
   
   “밥해 주면 먹어 주고, 빨래해 주면 입어 주니 얼마나 고마워요. 남편이 아니라 영원한 내 편”이라는 부인과 “밭을 매다가도 집으로 뛰어들어가 찻잔에 매화꽃잎 띄워놓고 꽃놀이 하는 철없는 아내가 밉지 않다”는 남편, 그들이 이 달빛마을에 10년 동안 지어 올린 것은 집이 아니라 ‘무공해 행복’이었다.

 

화강석으로 여체를 빚고 집안에 우주를 초대하고 

돌로 누드 빚는 조각가 김오성
천문대가 있는 조각공원

▲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 내에 달의 분화구 모양을 본떠 만든 ‘둥근 집’. 조각가 김오성의 작품이 전시돼 있다.
변산에 오면
   변산의 별들이
   왜 아름다운지를 안다
   쏟아지는 운석을 쪼아서
   별밭을 만들어 놓은 금구원 조각공원
   
   변산에 오면
   하늘의 별자리를 옮겨 놓으려고
   자기 몸을 깎아서 별을 만드는
   김오성을 만난다.
   -정군수의 ‘별’
   
   
   전북 부안 변산반도 서쪽 끝, 호랑가시나무 숲을 배경으로 알몸의 여인들이 봄볕을 즐기고 있다. 나무 그늘에 누워 책을 읽는가 하면, 두 손을 모으고 요가를 하고 있기도 하고, 나무 위에 올라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도 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들은 자연의 일부처럼 자유스럽다. 누드의 여인들은 조각가 김오성(66)의 작품이다. 이 여인들이 있는 곳이 바로 위의 시에 나오는 금구원 조각공원이다.
   
   김오성은 50년 가까운 세월, 단단한 화강암에 자신을 새겨왔다. 그의 50년 조각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곳은 한국 조각공원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농민교육가였던 부친(김병렬)이 1966년에 터를 잡아 조각공원으로 조성한 것을, 김오성이 2003년 문화관광부에 사립미술관으로 등록하고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으로 개칭했다.
   
   조각공원 안에는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모양의 지붕을 한 김오성의 집이 있다. 집에는 돔 모양의 천문대가 함께 붙어 있다. 천문대에는 미국 아스트로 피식스(Astro-Physics)사(社)의 206 EDF 삼겹렌즈 스타파이어 굴절망원경과 178㎜ 스타파이어 굴절망원경이 있다. 두 대의 천체망원경은 20여년 전 서울의 웬만한 아파트 한 채와 맞먹는 돈을 주고 사들인 것이다. 이곳은 개인 천문대로는 국내 1호이다. 김오성은 이곳에서 돌에 생명을 불어넣듯 여체를 빚고, 별들이 쏟아지는 밤이면 우주여행을 떠난다. 그래서 김오성은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 입구에 ‘금구원 조각공원천문대’라고 적힌 또 하나의 팻말을 나란히 걸어놓았다.
   
   
   농사꾼에서 조각가로
   
   김오성이 조각가로 걸어온 길은 간단치 않다. 그의 학력은 중졸이다. 미술에 재능이 있었지만 가정 형편은 그를 농장에 주저앉혔다. 부친은 이리농림학교 출신으로 농민 교육에 뜻이 깊었다. 그 공로로 1964년 제5회 3·1문화상을 수상했다. 수상자 중에 근대 조각의 선구자인 김경승(1915~1992)이 있었다. 그 인연이 이어졌다. 아들의 재능을 아까워 한 아버지는 김경승의 문하로 아들을 보냈다. 김오성은 그곳에서 20년을 있었다. 그중 10년은 난방도 안되는 연구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수련을 했다. “한겨울 추위는 정말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때 끈기와 인내를 배웠습니다.”
   
   돌의 성질을 배우기 위해 전통 석공을 찾아가기도 했다. 석공이 돌에 대해 웬만큼 공부하고 독립할 수 있기까지는 보통 3년이 걸린다. 석공들 틈에서 꼬박 3년을 씨름하다보니 돌을 다루는 데 자신감이 생겼다. 틈틈이 작업한 작품은 고향으로 내려보냈다. 아버지가 농민학교 설립의 꿈을 안고 조성한 부지는 그의 작품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조각공원으로 입소문이 났다.
   
   부족한 학력을 성실함으로 채운 김오성은 1972년 국전 입선, 1974년 국전 특선을 했다. 홍익대나 서울대 출신이 아니면 살아남기 힘들다는 곳에서 중졸의 독학생은 결국 조각가가 됐다. 1986년 서울 종로구 관훈동 백악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스승으로 모시던 조각가 백문기(대한민국예술원회원·1927년생) 선생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만큼 한 것도 대단한 것이다. 전시 결과에 대해서는 크게 기대하지 말아라.”
   
   작품이 한 점도 안 팔렸을 경우 김오성이 실망할 것을 염려해 미리 마음단속을 시킨 것이었다. 웬걸,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작품의 80% 이상이 팔렸다.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전시회는 성공적이었습니다. 한국은행 측으로부터 작품 주문도 받았습니다. 작품 값으로 받은 돈이 4000여만원이었어요. 당시 4000만원이면 서울시내 어디든 30평대 아파트를 살 수 있었습니다.”
   
   
   집 살 돈으로 천체망원경을
   
▲ 전북 부안의 관광명소가 된 금구원 야외조각미술관(금구원 조각공원). 조각공원 내에 천문대가 있는 김오성의 집이 있다.

   별을 유난히 좋아했던 김오성은 꼭 갖고 싶은 것이 있었다. 당시 서울 종로에 있던 화신백화점 진열장에 망원경이 있었다. 가난한 김오성은 지날 때마다 한참을 쳐다보면서 “돈이 생기면 꼭 망원경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전시 성공으로 돈이 생기자마자 김오성은 당장 화신백화점으로 달려갔다. 수십만원하던 망원경은 그 새 값이 2배가 올라있었다. ‘이왕 사는 것 제대로 된 것을 사자’는 생각에 이곳 저곳 알아보다 천체망원경을 직접 제작하는 미국업체 아스트로 피식스를 알게 됐다. 카투사로 군 복무를 한 덕분에 몇 마디 영어는 가능했다. 미국으로 무작정 ‘망원경을 제작해 줄 수 있겠냐’는 편지를 보냈다. 절차를 알아보기 위해 관세청을 쫓아다니고, 아스트로 피식스와 수십 차례 전화를 주고받은 끝에 드디어 178㎜ 굴절망원경을 손에 넣게 됐다. “처음 편지를 보내고 22개월 만이었습니다. 망원경을 받고 얼마나 신나는지 1500만원을 들인 것이 아깝지 않았어요. 전화료만 100만원 이상이 나왔어요. 당시 이 정도의 망원경은 국내에서 구경하기 힘들었습니다. 육영재단이 운영하는 육영천문회에서도 망원경을 대여해 갈 정도였어요.”
   
   망원경을 사느라 집을 사는 것은 포기했다. 그때 망원경 대신 집을 샀더라면 지금은 수십억원이 됐을 텐데 후회는 없을까. “남들은 보기 힘든 우주를 실컷 봤는데 후회 안 합니다.” 김오성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화랑가에서 주목받는 조각가가 되면서 주문이 밀려들었다. 일본 지바현의 한 사업가로부터 조각공원 조성 의뢰를 받는 등 대형 프로젝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1억원이 넘는 계약금을 받았다. 장남 역할도 하고 작업에도 전념할 겸 고향 변산으로 내려갔다. 조각공원 내에 천문대가 있는 집을 지었다. 물론 설계도 직접 했다.
   
   
   조각공원에 별을 초대하다
   
▲ 천문대 위에 있는 돔은 좌우로 열리고 180도로 회전할 수 있다.
“건축도 모르면서 그야말로 독불장군식으로 멋대로 지은 거죠. 경주 첨성대처럼 튼튼한 건물을 짓고 싶었습니다. 두께 30㎝가 넘는 화강석을 쌓아올렸어요. 아마 수백 년이 지나도 끄떡없을 겁니다. 땅에서 습기가 안 올라오도록 지반 위에 만 개가 넘는 빈 병을 깔았어요. 설계도를 그려놓고 보니까 못이 몇 개 필요한지까지 계산이 나오더라고요.”
   
   돔 형태의 천문대는 연세대학교의 천문대를 보고 철공소에 특별 주문했다. 천체를 관측할 땐 돔 천장이 좌우로 열리게 돼 있다. 360도로 회전도 가능해 별의 움직임을 따라갈 수도 있다.
   
   제대로 천문대를 만들어놓고 보니 좀 더 좋은 망원경을 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처음 망원경을 사면서 사귀어 놓은 아스트로 피식스에서 마침 ‘새로운 망원경이 나왔다’며 연락이 왔던 터였다. 결국 ‘206 EDF 스타파이어 굴절망원경’이 천문대에 놓이게 됐다. “국공립·사립 천문대를 불문하고 당시엔 최고 성능의 망원경이었습니다. 2000여만원이 들었지만 실제 유통 과정을 거쳐 구입했다면 1억원짜리급이었어요. 한참 뒤에서야 대전시민천문대에 성능이 비슷한 억대의 망원경이 들어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때가 1991년이었다. 당시 국내에서 일반인이 천체망원경을 볼 수 있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소문을 듣고 변산 구석까지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날씨가 흐려 못 보는 경우에는 근처에 방을 잡아놓고 며칠을 기다리다 기어코 보고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돈은 안 받았다. 낮이고 밤이고 사람들이 끓었다. 단체로 몰려온 학생들에게 라면 끓여주고, 재워주고, 밥 먹여주며 ‘별’ 보여주는 재미에 날 새는 줄 몰랐다. “일종의 사명감이었어요. 우리나라 천체과학에 기여한다는 자부심도 있었고요.” 공로를 인정받아 1994년엔 김용관 과학상을 수상했다.
   
   무료 천체 관측을 중단한 것은 부친의 병환 때문이었다. 1997년까지 이곳에서 우주여행을 하고 간 사람은 6000여명에 이르렀다. 1997년 이곳에서 헤일밥 혜성(Hale-Bopp Comet)을 보고 간 소년이 청년이 돼서 며칠 전 인사를 오기도 했다.
   
   많은 사람의 손을 타다보니 망원경도 이곳저곳 고장이 생겼다. 사람들 접대하느라 고생하는 부인에게도 미안했다. 최근에는 관람료 1만원을 내걸고는 있지만 안면 있는 사람들에겐 공짜로 하다 보니 실제로 돈을 받는 경우는 많지 않단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고향에 내려올 때 추진되던 대형 프로젝트가 어긋나면서 한때 통장이 텅텅 비기도 했다. 포항 호미곶 등대 옆에 있는 호랑이 조각, 해남 땅끝마을 조각공원에 있는 작품 제작 등이 이어지면서 어렵게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었다.
   
   집은 곧 수리에 들어갈 계획이다. 처음 설계할 때 몇 가지 실수를 보완하고 지붕 쪽 피라미드를 높일 생각이다. “피라미드의 기울기를 높이면 다락방 공간이 훨씬 넓어지겠죠. 큰 창도 만들어 사람들이 놀러 와서 묵어갈 수 있도록 할 겁니다.” 증축 계획을 설명하던 그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달력을 들고 나왔다. 달력 뒤 하얀 여백에 직접 그린 설계도를 보여줬다. 지붕 각도며 못 개수까지 꼼꼼히 기록돼 있었다. 신이 나서 어려운 건축 이야기를 계속 하는 바람에 중간에 말을 끊어야 했다.
   
   
   “시간이 없다”
   
▲ 천문대 내에는 아스트로 피식스사의 206 EDF 굴절망원경이 있다.
그동안 조각공원엔 작품이 늘었다. 달 분화구 모양을 본뜬 둥그런 전시장에 있는 소품을 비롯해 130여점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최근엔 대형 작품을 많이 했다. 받침대까지 포함해 8m에 이르는 여인상은 원석의 무게가 57t에 달한다. 거대한 사각형의 원석에서 매끈한 여체를 빚어내기까지 5~6년의 세월이 걸렸다. 수만 번의 정과 망치질에 손톱이 빠지는 것은 예사다. 무거운 돌을 들다보니 허리도 고생이다. 돌 조각은 조각 중에서도 막노동에 속한다. 그야말로 시간과 땀이 빚어내는 고행의 예술이다. 갈수록 돌 조각가를 찾기 힘든 이유이다. 더구나 미술에 대한 기초도 배우지 않고 맨몸으로 뛰어들어 하나하나 스스로 깨쳐나갔으니 훨씬 더디고 힘들었을 것이다.
   
   “남들이 KTX를 타고 달릴 때 난 자전거로 달린 셈입니다.” 김오성은 자신의 조각인생을 이렇게 말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아 있는 고대 건축물들을 보세요. 수많은 사람들의 노동과 죽음이 없었으면 그런 작품이 어떻게 가능했겠어요. 문화를 남겨주기 위해서 몸으로 부딪치는 것이 예술가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돌을 만집니다. 하고 또 하다보면 작품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예전엔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이디어가 발전하기도 하고. 명작이 어느 날 갑자기 나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그는 마음이 바쁘다고 했다. 큰 작품을 하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떠오르는데 체력이 버텨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한번 몰입하면 하루 10시간씩 작업을 하고, 수십 톤의 화강석과 씨름하니 웬만한 젊은 사람도 버티기 힘든 일이다.
   
   “돌 값이 만만치 않아요. 8m 크기의 작품이면 원석 값만 2500만원입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으니 대출이라도 받아서 할 수 있는 데까지 작업할 생각입니다. 하고 싶은 작품이 많은데 앞으로 몇 년이나 할 수 있을지….”
   
   지난해 조각공원에서 전시회를 열고 새롭게 제작한 대형작품 4점을 선보였다. 올해도 가을께 전시를 계획하고 있다. 그의 예술적 피는 아들로 이어졌다. 아들 정우씨는 홍익대학교 조소과에 다니고 있다. 전시관에는 아들 작품 두 점이 아버지의 조각과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는 자신이 걸어온 길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알기 때문에 아들에게 구상 조각가의 길을 강요하지는 못하지만 요즘 대세인 비구상 조각들은 못마땅하다. 그가 생각하는 예술은 땀냄새가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경 126도 29분, 북위 35도 37분. ‘별’ 천지인 그곳에 한 장인(匠人)이 묵묵히 자신을 깎고 있었다. 거칠디 거친 그의 손은 화강석을 닮았다.

 

집 안에 소나무를 모시고 화폭에 무위자연을 담고…
평창동 ‘ㅁ’자 집의 윤명로 화백

서울 종로구 평창동 비탈길 끝자락, 해발 220m에 위치한 그 집은 넓은 창마다 풍경화가 걸려 있다. 한쪽 창으론 북한산이 손에 잡힐 듯하고, 다른 쪽 창으로는 건너편 북악산의 봉우리가 마주하고 있다. 그 창밖으로 바람이 지나가고, 새가 놀다 가고, 산 벚꽃이 피고 지면서 계절이 흐른다. 풍경은 어느 순간 형태가 있는 듯 없는 듯, 캔버스 안으로 들어가 또 다른 풍경을 만든다. 사람들은 그 그림에서 기암괴석을 보기도 하고 겸재의 산수를 보기도 한다. 국내 대표 추상화가이자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인 윤명로(75·전 서울대 미대 학장) 화백. 추상화이면서 산수화 같고, 서양화이면서 동양화라고 할 수 있는 윤 화백의 그림은 바로 그의 집에서 바라본 풍경을 꼭 닮았다.
   
   윤 화백의 집은 독특한 구조로 사람들에게 꽤 알려져 있다. ㅁ자형의 집 한가운데 200살이 넘은 소나무가 단단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밖에서 보면 마치 큰 소나무가 집을 뚫고 나온 것 같다. 소나무는 집을 지은 후 옮겨 심은 것이 아니다. 집터에 있던 소나무를 살리려고 네모로 빙 둘러 건물을 짓고 중정(中庭)을 만들어 소나무에 내어준 것이다. 중정 쪽으로는 모두 통유리를 만들어 건물 내부 어느 곳에서도 소나무를 볼 수 있게 했다. 집 한가운데를 차지한 소나무 덕분에 이 집은 유명세를 타게 됐다. 윤 화백은 취재하고 싶다는 전화를 하자 “오래된 데다 좋은 집도 아닌데 자꾸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한사코 거절했다. 귀에 댄 휴대폰이 뜨끈해질 때까지 설득을 하자 윤 화백은 한숨을 푹푹 내쉬면서 마지못해 허락을 했다.
   
   강원도에 폭설 소식이 있던 지난 4월 18일 윤 화백 집을 찾았다. 윤 화백과 부인 한승재(65)씨가 함께 취재진을 맞았다. 한씨 역시 서양화가이다. 거실엔 윤 화백의 작품보다 큰 한씨의 작품이 걸려 있었다. 집 이야기가 나오자 윤 화백보다 한씨의 기억력이 더 빨랐다. 자연히 한씨 쪽으로 대화가 기울었다. 옆에서 말할 순서를 뺏긴 윤 화백이 한마디를 던졌다. “근데 오늘 한승재 인터뷰 하러 온 거요? 윤명로 인터뷰 하러 온 거요?”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부부가 들려준 집의 역사는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재미있고 유쾌했다.
   
   
   집 한가운데 소나무를 모시다
   
▲ 집 앞쪽으로 소나무 10여그루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그 숲으로 다람쥐와 꿩, 작은 새들이 쉴 새 없이 날아든다.
윤 화백이 이곳에 집을 지은 것은 35년 전이었다. 평창동 1세대인 셈이다. “홍제동 89㎡형(27평) 아파트에 살 때였는데 주말이면 도시락 싸들고 아이들과 함께 이 곳으로 소풍을 오곤 했어요. 여기가 소나무 밭이었는데 터가 너무 마음에 들어 땅을 분양받고 다음 해 집을 짓기 시작했어요. 이곳을 왔다갔다 하니까 하루는 정보요원인 듯한 사람이 따라와서 ‘신분증을 보여 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만큼 외진 곳이었어요.”
   
   3.3㎡당 2만7600원에 소나무밭이었던 경사지 약 562㎡(170여평)를 분양받았다. “설계를 맡은 건축사 친구가 소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돋워 길과 평평하게 만들어서 집을 짓자고 그래요. 근데 생각해보니 집은 헐었다 다시 지을 수 있지만 소나무가 저만큼 크려면 몇백 년을 기다려야 하잖아요. 소나무가 좋아서 땅을 샀는데. 그래서 설계를 바꾸자고 했어요.”
   
   그렇게 소나무를 집 한가운데 모신 ㅁ자집이 탄생했다. 중정에는 석탑과 심상치 않아 보이는 큰 돌들이 박혀 있었다. 윤 화백이 “저 돌이 이런 데 있을 것이 아니에요. 옛날엔 쉽게 구했는데 신라시대에 썼던 주춧돌이에요”라고 말했다. 45도 경사에 위치해서인지 집은 2층 같기도 하고 3층 같기도 하다. 길보다 내려앉은 집 뒤쪽을 옹벽이 막아주고 남향인 앞쪽으로는 햇빛이 쏟아져 들어와 아늑하고 따뜻했다. 아래층 작업실 앞에는 10여그루 아름드리 소나무가 작은 숲을 이루고 있다.
   
   한국 대표 건축가 고 김수근씨도 생전에 놀러 오면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 “참 좋다”고 감탄을 하는 집을 얻었지만 그 대가는 만만치 않았다. 가장 불편한 것은 물이었다. 수도 연결이 안돼 종로구청에서 매일 물차가 와서 퍼주고 갔지만 물은 늘 부족했다. 비가 오면 고무관을 연결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쓰곤 했다. 그렇게 10년을 보내고서야 수도가 들어왔다. 교통도 불편했다.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승용차도 없었고 마을버스도 물론 없었다. 큰길까지 내려가려면 10~20분은 걸어야 했다. 아이들이 학교 갔다 올 때면 ‘아이스케이크’를 입에 물고 숨이 턱까지 차서 올라오곤 했다. 그 길은 겨울이면 미끄러워 차가 안 다닌 덕에 아이들의 전용 스키장이 됐다.
   
   
   편리함을 포기하고 자연을 얻다
   
▲ 집 한가운데 중정을 만들고 소나무를 살린 윤명로 화백의‘ㅁ’자집. 눈 무게에 못 이겨 가지가 부러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주 가지치기를 해준다.

   불편함을 감수하는 대신 얻은 것도 많았다. 한씨는 “참 재미있게 살았다”며 당시의 추억을 끄집어냈다. “그땐 봄이면 달래며 산나물이 지천이었어요. 만날 먹을 것 싸들고 뒷산에 올라가 놀다오곤 했어요. 아예 음식 해먹을 도구를 바위틈에 숨겨 놓고 다닐 정도였어요. 지금처럼 집이 많지 않다 보니 서로 가족처럼 지냈어요. 젊은 세대가 없어서 특히 어르신들이 많이 챙겨줬어요. 둘 다 밤에 그림 그리느라 늦게 잠드는데 새벽이면 산에 가자고 벨을 누르는 통에 괴롭기는 했지만요. 하하.”
   
   윤 화백의 집에는 작고 단아한 고가구가 많다. 나무 상자를 좋아하는 한씨가 오래전부터 수집해 온 것들이다. 길쭉한 영정함부터 반닫이, 약재서랍장 등이 눈에 거슬림 없이 집과 하나가 돼 있었다. 한씨는 “수십 년 전만 해도 누가 쳐다보지도 않던 것들이었는데 지금은 너무 비싸 사기 어려운 것들이 됐다”고 말했다. 어느날 동네 어르신이 집에 놀러왔다가 돌아가서는 그러더란다. “교수고 화가라더니 살기가 어려운 모양이야. 그 집엔 순 고물밖에 없어.” 그 어르신이 며칠 후 반짝반짝 화려한 샹들리에를 선물했다. 한복바지에 양복저고리처럼 이 집과 어울리지 않은 샹들리에는 한동안 거실 천장에 어색하게 매달려 있어야 했다. 가게가 멀다 보니 부족한 것이 있으면 서로서로 해결해 줬다. ‘이웃사촌’ 중에 드라마 작가 김수현의 집도 있다. 김수현과 윤 화백 모두 밤에 주로 작업을 했다. 김수현은 소문난 골초였다. 윤 화백도 뒤지지 않았다. 당시 통행금지가 있었던 때라 한밤에 담배가 떨어지면 김수현 집으로 달려갔다. 김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한 갑 빌린 것은 갚지 않기로 하자”는 협정까지 맺었다.
   
   다른 집에는 없는 것이 이 집엔 또 하나 있다. 아래층 작업실 안쪽 벽에 있는 작은 샘이다. 그 샘의 사연이 재미있다. “지나가던 노인이 이쪽을 가리키면서 ‘여기 물이 있으니 한번 파봐라’라고 하는 거예요. 물이 귀하던 시절이었으니 그 말을 듣고 팠는데 진짜 물이 나왔어요. 노인이 가리킨 쪽에 오리나무가 두 그루 있었어요. 노인은 물 많은 곳에서 자라는 오리나무를 보고 분명 그곳에 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샘은 동네 사람들의 약수터가 됐다. 수돗물이 펑펑 쏟아지는 요즘에도 한씨는 그 물로 밥을 짓고 차를 끓인다. 설거지나 빨래는 수돗물을 사용하지만 음식을 만들 때는 약수를 사용한다.
   
   
   “밥 주세요!”
   
▲ 단아한 고가구가 잘 어우러진 거실에 앉아 있으면 창밖으로 북한산과 북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교통이 불편한 곳이었지만 이 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고 났다. 동료 화가며 서울대 재학시절 연극반 활동을 하며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윤 화백의 집은 사랑방이었다. 늘 사람들이 끓었던 데는 한씨의 몫이 컸다. 사람 좋아하는 한씨는 손님들이 몰려들어도 귀찮아하는 법이 없었다. 밥상이며 술상이며 뚝딱 차려냈다. 이 집에 오는 사람들은 한씨의 부엌이 무엇이든 나오는 ‘요술부엌’인 줄 알았다. 통행금지 직전인 12시 2분 전에 우르르 몰려들면 그 뒤론 한씨의 몫이었다.
   
   대표적인 사람들이 윤 화백과 함께 ‘화단의 삼총사’로 통하는 김종학·김봉태 화백이다. 서울대 미대 동창인 세 사람은 아직까지도 ‘내 것 네 것 없이 흉허물 없는’ 사이다. 서로의 작품에 대해서 터놓고 비판하고, 좋으면 칭찬도 하고, 격론을 벌이기도 한다. 화단의 분위기를 아는 사람이면 이런 관계가 얼마나 어려운 줄 알 것이다. 한씨의 말이다. “선생님이 없을 때도 집에 들러 밥 달라고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어요. 양말이랑 일회용 칫솔을 박스째 사다놓고 살았어요. 두 분 다 집에 오면 으레 자고 가는 줄 알았으니까. 좋은 친구들이 있어 잘 살았던 거죠.”
   
   극단 학전 대표인 김민기도 단골손님 중의 한 명이었고, 가수 조영남도 있었다. 어느 날 조영남이 자신의 그림을 좀 봐 달라고 가져왔다. ‘화투장’ 그림을 가져왔기에 “노래 대신 그림 그려도 되겠네”라고 한마디 던졌는데, 최근에 조영남이 방송에 나와서 “그 말을 듣고 계속 그림 그릴 용기를 얻었다”고 말하더란다.
   
   이 집의 손님은 사람들뿐이 아니다. 거실에 앉아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중정으로 박새 같은 작은 새들이 계속 날아들었다. 집 앞쪽 소나무 사이로는 청설모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가끔씩 꿩들도 날아온단다. 중정에 있는 석탑은 새들이 알을 품는 장소가 됐다. 집 밖에 바구니를 걸어놓으면 그곳에 알을 낳기도 한다. 한씨가 윤 화백에게 특별한 선물을 받은 이야기를 했다. “어느 날 집에 오는데 선생님이 두 손을 모으고 마중을 나왔어요. 선물이라면서 손을 내밀어 보래요. 손 안에 있는 것을 건네주는데 새끼 다람쥐였어요. 한동안 온 식구가 그 다람쥐 키우는 재미에 푹 빠졌어요.”
   
   
   “윤명로 죽다”
   
▲ 윤명로 화백의 2009년 작품 ‘바람부는 날’

   “서울 시내에 비가 내리는 날, 이곳에는 눈이 내릴 때도 있어요.” 윤 화백의 말처럼 ‘서울 속 다른 서울’에 살면서, 그 자연을 화폭에 풀어내는 그가 세상을 다시 돌아보게 된 일이 있었다. 일명 ‘윤명로 사망’ 사건. 한씨의 말이다. “5~6년 전이었어요. 가나아트에서 막 전시회를 열 때였어요. 아침에 지인이 전화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 윤명로 선생님이 돌아가셨냐고 묻더라고요. ‘신문에서 부음을 봤다’고 하는 거예요.” 알고 보니 동명이인의 서울대 철학과 교수였던 윤명로씨의 부음이었다. 이름이 같아 학교에 있을 때부터 인사를 나누던 사이였다. 그날 같은 전화를 몇 번 더 받아야 했다.
   
   다음 날 전시회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섰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윤명로’는 죽었는데 산도 그대로고 나무도 그대로고 세상은 변한 것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동안 무심하게 봐왔던 세상이 달라보였어요. 그 뒤로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지 몰라요.”
   
   정형민 서울대 미술관장은 윤 화백의 작품에 대해 ‘자신의 숨결에 붓을 맡기는 무위의 미학을 터득한 듯하다’고 평했다. 중국의 국가급 미술관인 중국미술관 판디안(范迪安) 관장은 “잔잔한 물이 흐르듯 ‘붓은 접었지만 뜻은 이어진다’는 작가의 신념이 선을 통해 흘러나온다. 마음과 손이 일체가 되어 동양 문인화의 현대적 모습을 견인하고 있다”고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윤 화백의 그림에서 ‘무위자연’을 보게 되는 것은 창문에 북한산을 걸고,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온 삶과 작품이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은 결국 작가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길이다. 그 길을 찾기 위해 윤 화백의 작품도 변화를 거듭해 왔다. “전통은 무덤이 아니라 미래다”라고 믿는 윤 화백에게 변화는 하나의 여정이다. 지난해 중국 베이징에서 성공적으로 열린 중국미술관 초대전은 그 여정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시켜줬다. 판디안 관장은 “중국 화단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윤명로가 앞서서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윤 화백은 ‘국적 불명 팝아트’ 따라하기 바쁜 젊은 세대에게 ‘전통에 뿌리를 둔 미래’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것이 교육자로 살아온 원로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방향은 아직 나도 모르겠어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시대의 평가에 맡기고, 나는 내가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사진촬영을 하느라 바깥을 왔다갔다 하는 사이 한씨가 따끈한 매실차를 내왔다. 이사 와서 심은 매화나무의 매실을 따서 담근 것이라고 했다. 이 집에 들어서면 그 매화나무의 진한 향이 맨 처음 손님을 맞는다. 손님맞이 40년 고수인 한씨가 매실차에 매화꽃잎을 띄워주었다. 서울의 중심 광화문에서 자동차로 불과 10여분, 그곳에는 서울보다 반 걸음 늦은 봄이 윤 화백의 붓 끝에서 꽃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맨 아래층에 위치한 윤명로 화백의 작업실. 윤 화백은 “최근 전시를 연 덕분에 작업실 청소까지 하게 돼 모처럼 깨끗하다”고 말했다.

▲ (좌) 남향인 집에서 바라본 자연은 윤 화백의 캔버스 속으로 들어간다.
(우)이 집은 돌 하나도 평범한 것이 없다. 중정에 있는 신라시대의 주춧돌.

아, 이것이 사는 맛!
안성 호숫가에서 ‘장자’와 노는 시인 장석주비워낸 마음에 꽃을 들이고 호수에서 詩를 건지고

▲ 장석주 작가의 뒤쪽 벽면에 빔 프로젝터의 스크린이 있고, 그 양쪽에 장서 2만여권의 일부가 보인다.
깡마른 체구에 책 읽기를 유난히 좋아하는 소년이 있었다. 소년의 독서열은 왕성했지만 집안 형편은 책 한 권 사줄 여유가 없었다. 소년은 틈만 나면 책이 있는 친구 집으로 달려갔다. 세계문학전집이니 위인전집이니 그 집에 있는 책을 먼저 읽은 것은 친구보다 소년이었다. 소년이 중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쓴 시 ‘겨울’이 청소년들의 필독서였던 잡지 ‘학원(學園)’에 실렸다. ‘학원’지는 당시 쟁쟁한 학생 문인들을 배출해냈다. 소년의 시를 선택한 사람은 고은 시인이었다. 고등학생 때 쓴 단편소설도 ‘학원’지에 실렸다.
   
   집안 형편 때문에 자신의 뜻과는 다르게 경기상고에 진학한 소년은 학업에 흥미가 없었다. 철학자처럼 말없이 책만 읽었다. 이 철학자 때문에 학교가 발칵 뒤집어진 일이 있었다. 자칭 ‘평화주의자’였던 소년은 교련 수업을 거부했다. ‘평화주의자’에게 돌아온 것은 무지막지한 ‘몽둥이찜질’이었다. 그 일로 소년은 학교를 박차고 나왔다. 정규 학력은 ‘고2’로 끝이 났다. 학교 대신 매일 서울시립도서관과 국립도서관의 참고열람실로 등교했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소년에게 필요한 공부는 학교가 아니라 도서관에 있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평생 책만 읽고 살아도 행복할 것 같았다. 1975년 월간문학(1968년 창간) 신인상 공모에 시가 당선되면서 소년은 진짜 시인이 됐다. 1979년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평론이 동시에 당선됐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장석주(56)다.
   
   
   ‘수졸재’에서 ‘호접몽’으로
   
▲ 지난 봄 완성한 새 집필실 ‘호접몽’

   시인은 10년 전 또 한번 규격화된 삶의 밖으로 자신을 유폐시켰다. 번잡한 서울을 벗어나 느리게 살기 위함이었다. 경기도 안성 금광호숫가에 집을 짓고 삶의 속도계를 ‘느림’에 맞췄다. 살림집 옆에 지은 작은 집필실에는 수졸재(守拙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삶과 문학 앞에 납작하게 엎드려, 그 낮음을 지키고 산다’는 시인의 뜻이 담겨 있다. 수졸재에는 손때가 묻은 장서 2만여권이 빼곡히 차 있다. 웬만한 도서관 규모이다. 시인은 일주일이면 10여권의 책을 읽고, 한 달에 책 값으로 수십만원의 돈을 기꺼이 지불한다. 시인은 “‘책 사는 데 돈 아끼지 말자’가 우리 집 가훈 중 하나”라고 말했다. 늘어나는 책을 더 이상 수졸재가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지인들 불러 맑은 공기 안주 삼아 술 한잔 기울일 수 있는 공간도 만들고 싶었다.
   
   수졸재에서 호숫가 쪽으로 몇 걸음 더 옮겨 넓은 집필실을 짓기 시작했다. 이곳에 내려온 후 장자와 노자에 빠져 사는 시인이 ‘장자’에 나오는 ‘호접몽(胡蝶夢)’을 본떠 이름을 붙인 새 집필실이 이번 봄이 오기 전 막 완공됐다.
   
   165㎡(50여평)의 ‘호접몽’은 새 건물 냄새가 아직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이곳도 역시 서가가 사방 벽을 둘러 차지하고 있었다. 수졸재에 있는 책 중 3분의 1만 옮겨왔다는데도 서가는 대부분 채워져 있었고, 미처 꽂지 못한 책들이 곳곳에 쌓여 있었다. 한쪽 벽에는 시인의 야심작인 빔 프로젝터 스크린이 설치돼 있었다. 그 옆에는 지인이 기증했다는 앤티크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가 연주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는 시인은 ‘호접몽’을 위해 만타레이 혼(Mantaray Horns) 스피커도 새로 장만했다. 시인이 음악을 틀었다. 생생한 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새삼 이곳의 이름이 ‘호접몽’임을 알 것 같았다. 시인은 이곳에서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꿈속의 나비가 장자가 된 것인지’ 꿈과 현실의 경계마저 초월한 장자처럼 살고 싶은 것이다. 시인은 지인들을 불러 영화를 보고 문학을 논하고 작은 연주회를 열 꿈에 부풀어 있었다. 시인은 “지난 주말에도 후배 시인 20여명이 다녀갔다”고 했다. 바닥 한쪽에 줄줄이 늘어선 포도주병들이 그 말을 확인시켜줬다.
   
   
   느리지만 게으르지 않게
   
▲ ‘호접몽’ 창밖으로 백로가 날아오르는 금광호수가 한눈에 들어온다. 왼쪽엔 밤나무숲이 있다.

   ‘호접몽’이 완성되면서 시인은 바깥 활동을 줄이기 시작했다. 3년 동안 진행했던 국악방송의 ‘문화사랑방’도 지난해 말 그만뒀다. 대학 강의도 끊고 웬만한 취재 요청도 거절하고 있다고 했다. 격주로 하고 있는 시·소설 창작교실만 남겨뒀다. 써야 할 책도 많고 그 새 빨라진 삶의 속도를 다시 늦추기 위해서다. 당분간 집필에만 전념할 생각이다.
   
   시인은 스무 살에 등단해 서른여섯 해 동안 60여권에 이르는 책을 펴냈다. 그중 30여권은 이곳에 내려와 10년 동안 쓴 책이다. 올해 출판사와 새로 계약된 책만 6권이고, 내년에 또 6권이 대기하고 있다. 그 많은 작업량이 가능한 것은 ‘느리게 살면서도 게으르지 않은’ 시인의 성실함 덕분일 것이다. 또 도시보다 훨씬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덕분이기도 하다.
   
   시인의 하루는 호수가 깨어나기도 전인 새벽 4시에 시작한다. ‘호접몽’으로 출근해 맑은 차를 마시고 클래식 음악을 들으며 정신을 명민하게 깨운다. 새벽 시간부터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시작해 낮 12시까지 ‘근무’를 한다. 도시인이 하루 종일 할 일을 반나절 안에 끝내는 것이다. 대신 오후는 게으름에 몸을 맡긴다. 등산화 신고 서운산이니 칠현산이니 근처의 산을 오른다. 오이 하나 입에 물고 고찰도 둘러보고 나무에 등을 기대고 명상에 빠지기도 한다. 일주일에 서너 번, 한 번에 서너 시간씩은 이렇게 자연에 마음을 풀어 놓는다.
   
   
   공중파 ‘9시 뉴스’를 장식하다
   
   ‘새벽에 일어나 명상하고 낮에는 마당의 풀을 뽑고, 한가롭게 산길을 걸었다. 종일 찻물만 마시며 몸속에 쌓인 독소를 뽑아내니 불평과 근심은 줄어든 대신 한가로움은 두터워졌다. 통장 잔고는 준 대신에 마음에 감미로움은 많아졌다. 오랜만에 만난 벗들은 물과 모란과 뻐꾹새를 벗 삼아 한거를 즐기는 동안 내 뾰족하던 인격은 두루 원만해지고 눈빛은 다정해졌다고 말한다.’
   
   시인이 책에 쓴 것처럼 지금은 누구보다 평화롭지만, 이곳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누구보다 바쁜 도시의 삶을 살았다. 1979년 2대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나자 출판사 고려원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해왔다. 고려원 편집부장을 거쳐 1981년 아예 도서출판 ‘청하’를 설립했다. 시인이 직접 쓴 헤르만 헤세의 ‘잠언록’ 등 베스트셀러가 심심찮게 나오면서 출판사는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1987년엔 제대로 ‘사고’를 쳤다. 서정윤 시인의 시집 ‘홀로서기’가 대박이 났다.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이렇게 이어지는 시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념시가 주축을 이루던 시단에서 ‘홀로서기’는 서정시 열풍을 일으키며 시집으로는 유례없이 밀리언셀러를 기록했다. 1, 2권 합쳐 200만부 가까이 팔렸다. ‘홀로서기’가 사람들을 울린 덕분에 출판사 사장인 그는 서울 강남에 5층짜리 빌딩을 샀다. ‘때가 되면 물이 보이는 시골에 내려가 살겠다’는 생각으로 땅도 샀다. 그 땅이 지금 ‘수졸재’와 ‘호접몽’이 있는 곳이다. 23년 전 3.3㎡당 8만원에 샀던 땅은 그 새 10배가 올랐다.
   
   1992년에 진짜 ‘사고’가 터졌다.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 사건이다. 청하에서 펴낸 ‘즐거운 사라’는 노골적 성 묘사를 이유로 외설 시비와 함께 큰 파장을 일으켰다. 저자인 마광수와 출판사 대표인 장석주는 나란히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TV에서 격렬한 토론이 벌어지고 문인들이 성명서를 내는 등 떠들썩했지요. 덕분에 난 공중파 9시 뉴스에까지 등장했어요. 음란물 제작·배포 혐의로 마광수 교수와 함께 구속돼 61일을 살다가 나왔어요. 출판업을 그만둬야 할 때가 왔나보다 생각했지요.”
   
   시인은 구속에 대한 억울함보다 출판인에 대한 사회적 대우에 절망했다. 14년 동안 500여권의 책을 펴내며 문학출판 시대를 이끌었던 ‘청하’의 정리 작업에 들어갔다. “강남의 빌딩도 팔고 205㎡(62평)짜리 빌라도 팔았어요. 수십억원으로 인쇄소, 제본업자 등 거래처 돈을 모두 갚고 나니 수중에 전셋값 정도만 남더라고요.”
   
   1993년이었다. 다시 전업작가로 돌아갔다. 7년간 꼼짝 않고 들어앉아 ‘21세기 한국문학의 탐험’이라는 원고지 2만장 분량의 5권짜리 책을 집필했다. 1900년부터 100년간의 한국 문학사와 한국인의 삶을 기록한 작품이었다.
   
   
   노자와 장자를 만나다
   
▲ 소문난 독서광인 장석주 시인의 집필실에는 2만여권의 장서가 보관돼 있다.

   숙제를 마친 듯 대작을 털고 난 시인은 2000년 홀로 안성으로 내려왔다. 생각과는 달리 막상 부딪친 ‘느림’은 여유가 아닌 막막함, 외로움, 두려움이었다. “빵집이며 커피점이며 도시의 편의시설이 전혀 없잖아요. 세상 밖으로 혼자 떨어져 나온 느낌이었어요.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책 읽고 걷는 것밖에 없었어요. 1년 동안은 아무것도 안 하고 호수의 물만 쳐다봤어요.” 적막한 시간에 몸이며 마음이 적응하기까지 1년여가 걸렸다. 그렇게 외로움과 물에서 건져낸 언어들은 ‘물은 천 개의 눈동자를 가졌다’(2002년)라는 시집으로 묶여 나왔다.
   
   분별없이 시끄럽던 마음이 가라앉자 ‘그 마음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때부터 마음 공부를 시작했다. 시인은 “노자의 ‘도덕경’과 ‘장자’를 백 번은 족히 읽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장자’를 읽으면 읽을수록 ‘비움’과 ‘느림’의 가르침에 끌렸다. ‘느림을 부정하는 것은 생명의 본성을 거스르는 것이다’라는 걸 알았다. 노자, 장자와 함께 한 마음 여행의 결과물은 ‘장석주의 장자 읽기’ ‘그 많은 느림은 다 어디로 갔을까’ 등 책으로 묶여졌다.
   
   장자와 노자를 읽으며 비워낸 마음에 풀과 나무가 들어오고, 물과 바람이 들어왔다. “안성 장날에 나가 사온 모란과 작약이 한 뼘씩 자라고 꽃망울이 맺히는 것을 보면서 마음도 한 뼘씩 자라는 것을 느꼈어요. ‘아, 이게 사는 맛이구나’ 하고 나무와 꽃들을 사다가 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집 마당엔 없는 나무가 없다. 앵두나무, 배나무, 단풍나무, 대추나무, 매화나무, 해당화, 영산홍…. 시인이 자연 속으로 들어가자, 자연이 시인의 시 속으로 들어왔다.
   
   
   ‘대추가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 시인의 야심작 ‘연못’에는 잉어와 미꾸라지가 살고 있다. 6월쯤이면 수련으로 덮인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천둥 몇 개, 벼락 몇 개…’
   
   낯익은 글귀일 것이다. 2년 전 서울 광화문 교보빌딩 건물 외벽에 내걸렸던 시다. 시인이 2005년 펴낸 ‘붉디 붉은 호랑이’라는 시집에 실린 ‘대추 한 알’이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이 시는 2011년 새로 바뀐 중학교 2학년 교과서(창비)에도 실렸다.
   
   시인의 마음 밭에 뿌린 씨는 이제 열매를 맺었다. 이런저런 강연 요청도 많고 출판사들도 앞다퉈 그를 찾는다. 잡지며 신문에 글을 쓰고 받은 원고료에 인세까지 상당하다. 줄어들었던 통장 잔고는 다시 넉넉해졌다. 시인은 “성실하게 일해서 전업작가도 억대 연봉을 벌 수 있다는 것을 후배 시인들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10년 전 시인을 막막하게 만들었던 자연은 시인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호접몽’ 옆에 있는 밤나무 숲은 여름날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주고, 찰랑찰랑한 호수는 시인의 마음에 상상력을 불어넣고 더불어 주머니도 풍요롭게 한다. 텃밭에서 자라는 야채들은 시인의 몸을 건강하게 만든다. 이제 시인은 말한다. “더는 인생이 덧없다 하지 마라. 쏜살같이 지나가는 덧없는 것들…이라고 죄 없는 인생을 갖고 험담하지 마시라. 생명으로 가득 찬 이 지구별에서 산다는 것은 나날이 기적이다.”
   
   시인은 얼마 전 닭장을 만들었다. 새벽에 닭이 우는 소리에 깨고, 닭이 방금 품은 따뜻한 계란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침밥 위에 올리고 싶어서다. 이곳에 내려오면 꼭 하고 싶었던 일 중 하나였다. 장닭 소리에 잠이 깬 시인이 ‘호접몽’에서 전해줄 다음 메시지가 무엇일지 궁금했다. ‘호접몽’ 창밖, 금광호수 위로 백로가 날아올랐다.
  
 

분청사기 맥을 잇는 도예가 김용윤
40년간 수만 점 마음에 드는 작품? “아직 한 점도 없어요”

▲ 1970년대에 시간이 멈춘 듯한 ‘김용윤 도예연구소’. 도예가 김용윤은 부뚜막처럼 생긴 한 뼘 공간에서 20대부터 시작해 60대가 되도록 물레를 돌리고 있다.
한눈에 도예가의 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월문리. 길에서 보이는 3층 건물 벽면 전체에 항아리며 도자기 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색색의 도자기 파편에 부딪힌 빛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건물 옆으로는 봉분 크기의 장작 가마 6기가 계단식으로 줄줄이 늘어서 있고, 가마 옆엔 소나무 장작이 잔뜩 쌓여 있었다. 웃음기 없이 무뚝뚝한 남자의 손을 잡고 악수를 했다. 손은 두껍고 투박했다. 33년 전 이곳 남양주로 들어와 터를 잡고 분청사기의 맥을 잇고 있는 도예가 김용윤(61)이었다. 그가 2층 전시장으로 안내했다. 전시장엔 높이 1m에 이르는 큰 항아리부터 컵에 이르는 생활자기까지 1000점이 넘어 보이는 작품이 보기 좋게 진열돼 있었다. 전시장 위층, 창고로 사용하고 있는 3층엔 이보다 많은 작품이 가득 쌓여 있었다.
   
   투박한 손으로 작은 찻잔에 차를 끓여냈다. 주전자며 찻잔이며 모두 그의 손으로 빚어낸 작품들이다. 그가 도자기 주전자에 담긴 물로 찻물을 끓이며 말했다. “도자기에 물을 담아놓으면 물이 정화가 돼요. 도자기가 숨을 쉬니까. 이 물을 사용하면 차 맛도 좋아요.”
   
   그는 첫인상처럼 과묵했다. 말이 없는 사람은 인터뷰 대상자로서는 반갑지 않다. 질문을 던지면 단답형으로 꼭 필요한 대답만 했다. 팩트(fact)만 있고 스토리가 없었다. 살을 붙이려면 부지런히 질문을 던져야 했다. “왜요?” “그래서요?” “언제요?” “그런데요?”
   
   그럼에도 대화는 자주 끊겼다. 작품을 둘러봤다. 매끈한 청자·백자와 달리 투박한 분청사기가 그와 꼭 닮아 보였다. “작품과 작가가 닮았다”고 말을 하자 생전 웃을 것 같지 않던 그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가 말한 ‘도예가 김용윤’의 이력은 굵고 짧았다.
   
   
   “우리나라 최고의 도예가가 되겠다”
   
▲ 지난 1995년에 지은 3층짜리 전시장 건물. 벽면 전체에 분청사기 파편들이 박혀 있다. 건물 앞에 이곳에 처음 들어올 때 내장산에서 옮겨 심은 작은 단풍나무가 건물 높이만큼 자라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그가 이곳 남양주로 들어온 것은 서울공업고 요업과를 거쳐 홍익대 공예과를 졸업하고 스물아홉 살 때였다. 대학을 막 졸업했을 때 그는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나보다 학벌 좋은 도예가는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어요.” 선배가 운영하는 도자기 회사에서 1년간 일을 했다. 도자기 공장에서 어린 시절부터 잔뼈가 굵은 도공들을 만났다. 학교에서보다 오히려 그들에게 배운 것이 더 많았다. ‘학벌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도예가로 승부를 걸겠다는 생각으로 1978년 남양주 산골로 들어와 작업실을 지었다. 가마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은 그의 손을 거쳐 만들어졌다. 흙을 옮기고 물레를 돌리고 장작 패고 가마에 작품 넣고 빼고, 도예는 그야말로 중노동이고 체력전이다. “도예가는 체력이 튼튼해야 좋은 작품이 나옵니다. 체력만큼은 타고난 것 같아 부모님께 감사하죠.” 물레로 단련된 그의 체력을 말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몽골을 방문했을 때다. 비행기 활주로가 비포장인 탓에 비가 내리자 비행기가 뜨지 못했다. 기다리는 사람들과 비행장에 있는 몽골 직원들이 나뉘어져 팔씨름 대회가 벌어졌다. “10전 10승, 몽골 청년들이 모두 내 팔에 나가떨어졌어요. 그 친구들이 씩씩거리면서 달려가더니 어디서 몸집이 좋은 사람들을 계속 데려오더라고요.”
   
   
   “텃밭에서 나는 것만큼만 먹고 살자”
   
▲ 시행착오 끝에 세 번째로 만든 6기의 장작가마. 일 년에 두 번 장작에 불을 때는 날에는 예술인들이 모여 불꽃과 함께 작은 축제를 벌인다.

   홀로 흙에 묻혀 살기를 4년, 서울에 나갔다가 우연한 자리에서 한 아가씨를 만났다. 아가씨가 도예를 배우겠다며 매일 서대문에서 남양주를 오갔다. 사실 도예는 핑계였다. 무뚝뚝한 남자가 뭐가 좋았는지 아가씨는 올 때마다 반찬 나르느라 바빴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아가씨가 이틀 동안 소식이 없었다. 산골에서 흙이나 주물럭거리는 남자한테 시집가겠다는 딸의 말에 그쪽 집안에서 한바탕 난리가 난 것이었다. 그 아가씨가 부인이 된 신금옥씨다. 결혼을 하고 한때 서울에 매장을 두면서 생활자기를 만들어 판 적도 있었다. 경제적인 여유는 있었지만 안주하게 될까 두려웠다.
   
   “텃밭에서 거둘 수 있는 것만큼만 먹고 살자.”
   
   그는 말 한마디로 매장을 정리하고 작품에 전념했다. 당시 대학마다 도예과가 생기기 시작했지만 가마는 물론이고 작업장 시설을 갖춘 곳이 많지 않았다. 대학에서 이곳으로 학생들을 보냈다. 한때 이곳은 실습을 하는 학생들로 북적였다. 덕분에 생활은 걱정이 없었다. 작품에 전념할 수 있게 부인이 매니저 역할을 해주었다. 매일 해야 할 일, 진행해야 할 작업, 전시 관련 일 등 스케줄 관리는 부인이 모두 맡았다. 작품 외에 그가 가장 시간을 많이 투자한 것은 후학을 기르는 일이었다. 한남대에 9년, 서울산업대에 10년, 서울대에 5년 동안 출강을 했다.
   
   그와 함께 도예를 시작했던 많은 선후배들이 생활을 이유로 작가의 길을 포기하는 동안 분청사기 분야에서 ‘김용윤’은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 됐다. 단체전 출품 외에 1989년 현대미술관(현대백화점 서울 압구정점)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 한국뿐만 아니라 2005년 일본 도쿄 개인전, 2005년 미국 LA 초대전, 2007년 프랑스 파리시 9구 초대전 등 개인전이 20여회를 넘고 단체전 초대까지 하면 60회가 넘는다. 그의 작품은 영국 빅토리아 알버트박물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미술관, 러시아 페름박물관, LA 이민역사기념관 등 해외 각지에서 한국 분청사기의 멋을 자랑하고 있다.
   
   
   “나는 흙을 빚을 뿐, 나머지는 불의 몫”
   
▲ 수십 년 물레질로 단련된 그의 팔 힘은 청년들도 꼼짝 못한다.

   분청사기는 상감청자의 뒤를 이어 조선 전기(14~15세기)에 발달했다. 청자에 흰색(백토)으로 분칠을 해서 구워낸 것이다. 서민층에까지 폭넓게 사용돼 민족적인 정서를 가장 잘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미술평론가 김병수는 “청자가 깔끔하고 이지적인 느낌이라면 분청사기는 수더분하고 숭늉맛처럼 구수하다. 마치 뚝배기에 끓여놓은 된장맛처럼 토속적인 맛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40년 한 길을 걸어온 그가 생각하는 분청사기의 매력은 뭘까. “기법이 대범하고 다양해요. 작가의 색깔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어요.”
   
   도자기는 인간과 불의 합작품이다. 흙으로 모양을 빚어내는 것은 인간이지만 그것을 완성하는 것은 1250℃에 이르는 불의 몫이다. 불이 만들어 내는 세계는 예측불허이다. 최근에는 불 조절이 쉬운 가스가마를 많이 사용하지만 그는 전시에 내놓을 작품은 꼭 장작가마를 고집한다. 작업이 힘들고 실패도 많지만 장작이 제 몸을 사르고 작품에 불어넣은 생명력은 가스가마와는 비교할 수 없다. 1년에 두 번 그의 장작가마에 불이 들어가는 날은 작은 축제가 열린다. 4월, 10월 불 때는 날에 맞춰 지인들과 근처에 사는 예술가들을 초대한다. 지난 4월 16일에도 70여명이 몰려와 고사를 겸해 ‘돼지고기’ 잔치를 벌였다. 가마에서 나온 숯의 남은 열기에 구워먹는 돼지고기는 별미 중의 별미란다. 공연을 하는 사람들도 부르고 각자 준비해 온 음식도 나눠 먹는다. 불길이 타오를수록 축제도 뜨거워진다. 물론 음주가무가 빠질 리 없다. 보통 오전 8시에 불을 때기 시작해 밤 12시가 되면 불길이 사그라들고 축제도 끝이 난다. 그는 딱 그때까지가 가장 행복한 때라고 말한다.
   
   “가마에서 나온 작품들을 보기가 두렵습니다.”
   
▲ 전시장에 빼곡히 진열된 김용윤의 분청사기 작품들. 군더더기 없고 투박한 작품들이 김용윤을 꼭 닮았다.

   그가 지금까지 빚은 작품들이 족히 수만 점은 될 것이다. 그는 “그 많은 작품 중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 한 점도 없다”고 말했다. 가마에서 나온 작품 중 절반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라진다. “그림은 마음에 안 들면 뜯어고칠 수 있지만 도자기는 불 속에 들어가면 끝입니다. 흙이 불을 만나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 만들어집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는 불에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도예가가 되겠다”며 자신만만하던 20대의 젊은이는 불 앞에 한없이 겸손한 60대가 됐다. “악필법의 대가인 서예가 석전 황욱 선생(1898~1993)이 결혼식 주례를 서주셨어요. 당시 85세였던 석전 선생이 ‘이제 글씨를 좀 알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이 나이가 돼서야 그 뜻을 알겠어요.”
   
   
   “인생도 작품도 이제야 알 것 같아”
   
▲ 전시장에 빼곡히 진열된 김용윤의 분청사기 작품들. 군더더기 없고 투박한 작품들이 김용윤을 꼭 닮았다.

   요즘 그는 어느 때보다 힘들다고 했다. “변화에 대한 부담도 크고, 아직까지 끄떡없는 체력이지만 시력이 약해지면서 스스로 위축되는 것을 느껴요. 미술시장도 이렇게 어려웠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는 시장 탓을 했지만 알고 보니 그를 힘들게 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지난해 초 갑자기 부인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작품관리며 손님접대며 스케줄까지 손발 역할을 해주던 부인이 없으니 뭘 해야 할지 공황상태였다. 다행히 지난해 11월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에 있는 갤러리 수에서 초대전이 열렸고 올해도 6월 22일부터 28일까지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장은선갤러리에서 전시가 계획돼 있다. 두 차례의 전시를 준비하고 작품을 하면서 조금씩 혼자 남은 삶에 적응해 가는 중이다. 그의 옆에는 또 든든한 두 딸이 있다. “시골에서 자라야 큰 사람이 된다”고 주장하며 두 딸을 작은 시골 초등학교에 보냈는데 아이들은 잘 자라주었다. 둘째딸은 서울산업대 공예과를 나와 그의 뒤를 잇고 있다.
   
   분청사기 옷을 입은 건물 옆에 ‘김용윤 도예연구소’라는 간판이 붙은 낮은 집이 있었다. 33년 전 그가 처음 지은 집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마치 시간이 1970년대에 멈춰 있는 듯했다. 벽쪽으로 부뚜막처럼 생긴 곳에 물레가 놓여 있다. 한 평도 안되는 공간, 앉으면 움직일 여유도 없는 그곳에서 그는 30대를 맞고 중년을 지나 머리 희끗한 60대가 됐다. 세월이 검게 내려앉은 벽엔 그릇을 빚는 데 필요한 도구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다. 그 공간에서 30여년 동안 바뀐 것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의 물레에서 몇 걸음 옆으로 도예를 하는 둘째 딸을 위한 물레가 새로 놓였다. 흑백사진 같은 그곳에서 이제는 2대가 나란히 앉아 물레를 돌리고 있다.
   
   20대 때 그는 ‘60대가 되면 물레에서 물러나 한가한 여생을 즐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60대의 그가 말했다. “인생도 작품도 알 듯 말 듯,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작품에도 삶에도 변화를 주고 싶습니다. 평생 마음에 흡족한 작품 한 점이라도 볼 수 있을지 알 수 없지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물레를 돌릴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 길에 그가 “여기까지 오셨는데 컵이라도 하나 드릴까요”라고 물었다. “괜찮습니다. 시간 내주신 것만도 고맙습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두 번도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인생에서 또 다른 여지를 남겨두지 않는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부부조각가 권치규·김경민
세 아이와 만든 동화 왕국

▲ 부부조각가 권치규·김경민의 마당 넓은 집에는 곳곳에 부부의 작품이 놓여 있다.
‘사랑한다는 것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 ‘어린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가 남긴 말이다. 같은 꿈을 꾸고, 그 꿈을 향해 함께 걸어가는 것이 사랑이라면 부부조각가 권치규(45)와 김경민(40), 이들은 행복한 부부이다.
   
   미술계에서 소문난 잉꼬 부부인 이들은 젊은 작가와 중진작가를 잇는 40대 대표작가로 꼽힌다. 권치규는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폭넓은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고, 김경민은 일상에서 건져낸 감각적이고 서정적인 작품들로 아트페어·상업화랑에 단골 초대되는 인기작가이다. 혹시 서울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에서 양복 차림으로 벤치에 벌렁 드러누워 낮잠 자는 남자를 본 적이 있는지? 서울 코엑스 현대백화점 옆에 넥타이 고쳐 매고 서류가방 흔들며 출근하는 ‘롱다리’ 거인은? 바로 김경민 작가의 유쾌하고 발랄한 작품들이다.
   
   이들처럼 부부작가가 동시에 왕성한 활동을 벌이면서 주목을 받기는 쉽지 않다. 한 사람이 성공하면 다른 한 사람은 그 그늘에 가리기 십상이다. 그늘에 묻히는 사람은 십중팔구 가사와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부인 쪽이다. 하지만 그 공식은 이들 부부에게만은 예외이다. 김경민은 작가 이전에 세 아이의 엄마이다. 연년생으로 초등학교 5학년 딸, 4학년 아들이 있고 막내 딸이 이제 7살이다. 한창 엄마 손이 필요한 나이다. 부부는 “작품보다 아이들 잘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 부부가 잘 키운다는 것은 공부 잘하는 아이로 키우는 것이 아니다. 부부는 아이들이 아파트의 편리함보다 자연의 소중함을 먼저 알기를 바란다. 학원 순례에 찌들기보다 땀 흘리며 실컷 뛰어놀기를 바란다. 도시 아이들의 흰 피부보다 햇빛에 그을린 얼굴이 훨씬 건강하다고 믿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그런 집이다.
   
   
   헛간 같은 창고에서 신혼살림
   
▲ 김경민의 작품 ‘꿈꾸는 세상’

   경기도 고양시 일산 동구 문봉동. 일산보다는 파주가 가까운 변두리 동네다. 아파트 숲인 일산 시내에서 불과 10~20분 거리지만 풍경은 전혀 다르다.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에 직접 집을 짓고 지금껏 살고 있다. 처음 집을 지을 때는 주변이 모두 논밭이었다는데 지금은 조립식 공장건물이 즐비하다. 이들의 집 뒤편은 야산으로 연결돼있다.
   
   대문을 들어서자 마치 애니메이션 세트장 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키가 4m를 훌쩍 넘는 남자가 감색 양복을 입고 막 집을 나서고 있었다. 테라스에는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목을 빼고 앉아 망원경으로 집안을 엿보고 있고, 건물 옥상 난간엔 웬 남자가 걸터앉아 태평하게 책을 읽고 있다. 잔디밭에 팔자 좋게 누워 있는 남자도 있다. 엉덩이 쳐들고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내밀고 있는 커플도 있다. 마당 한쪽엔 스테인리스로 만든 나무도 놓여있다. 조각가 부부의 집답게 정원과 건물 곳곳에 부부의 작품을 세워놓은 것이다.
   
   1320㎡의 땅에 건물은 두 채.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는 단층집과 4~5m 높은 곳에 세워진 2층 높이의 건물이 부부의 공동 작업실이다. 10년 전이면 젊은 예술가 부부의 살림살이가 어땠을지 빤한데, 어떻게 이런 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부부의 시작은 창고였다. 블록 벽돌로 지어 겨울이면 바람이 쌩쌩 들어오는 헛간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얼마나 힘들었냐고? 부부의 말을 들어보자.
   
   김: 창고에 살았다고 하면 불쌍하게 생각하겠지만 우리는 힘들지 않았어요. 늘 그렇게 작업해왔고, 조각하려면 으레 그러려니 여겼죠.
   
   권: 산에서 나무 해다 난로 때고 살았어요. 나무꾼과 선녀였죠. 하하.
   
   김: 작업만 할 수 있다면 평생 그렇게 살아도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행복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권: 주인이 번듯한 창고를 지은 덕분에 1년 만에 헛간 신세는 면했죠. 주인이 고맙게도 창고 안에 방까지 만들어줬어요.
   
   김: 그 방에서 둘째까지 낳았어요. 게다가 창고 작업실은 후배 작가들의 아지트였어요. 그 후배들까지 다 거둬 먹였어요.
   
   부부가 그렇게 신혼을 시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부부는 결혼식에 전혀 돈을 쓰지 않았다. 결혼반지도 없고 결혼식도 구민회관에서 무료로 올렸다. 양쪽 집안이 가난했던 것도 아니었다. “결혼식에 쓸 돈을 아껴 땅을 사라”는 것이 부모들의 생각이었다. 결혼식 비용으로 일산 가좌지구에 땅 3300㎡(100여평)를 사두었다. 땅이 있으니 창고에 살아도 마음은 든든했던 것이다. 가좌지구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땅값이 올랐다. 2001년 그 돈으로 지금 살고 있는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아이들은 실컷 놀아야죠!
   
▲ 창고에 살다 10년 전에 직접 지어서 들어온 집. 살림집과 작업실이 있는 건물 두 채로 이뤄져 있다.
큰아이가 학교에 들어갈 즈음 일산 시내 아파트로 옮긴 적이 있었다. 학교 다니기도 편하고 아파트에 가면 친구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웬걸, 아파트 놀이터에 놀러 나오는 아이들이 없었다. 해 넘어가도록 밖에서 놀고 있는 이 집 아이들이 오히려 아파트 아줌마들에게는 ‘이상한 집 아이들’이었다. 어느 눈 오는 날은 이웃주민이 전화를 걸어오기까지 했다. “눈도 오고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아이가 집에 안 들어가고 밖에서 놀고 있으니 어떻게 된 일이냐. 걱정되지도 않느냐”는 것이 용건이었다.
   
   “내 교육관과 안 맞았어요. 나는 아이들이 세상을 폭넓게 받아들이면서 컸으면 좋겠어요. 사람에 대해서도 경계가 없었으면 해요. 아파트촌에서는 왜 그렇게 담을 쌓아놓고 사는지, 서로 그어놓은 선들은 왜 그렇게 많은지. 이 동네에서는 학교가 끝나면 학원이 아니라 마음대로 뛰어노는 것이 당연한 일이에요. 눈 오면 스키복 입고 나가 비탈길에서 미끄럼 타고 놀고, 가난한 집 아이든 다문화가정 아이든 똑같은 친구예요. 이런 생각이 여기선 지극히 평범한 건데 아파트촌에 갔더니 다른 엄마들 사이에서 내가 별나고 특별한 엄마가 돼 있더라고요.”
   
   권치규도 아이들 문제는 이런 엄마의 교육에 100% 맡기고 있다. 부부는 아파트 생활을 1년 만에 정리하고 다시 이곳으로 들어왔다. 아이들이 다니는 동네 초등학교는 학년당 학생 수가 10여명이 전부이다. 한 반이 그대로 6학년까지 올라가니 형제처럼 지낸다. “아들인 둘째는 학교 끝나면 책가방 던져놓고 나가서 놀다 지치면 기다시피 집에 들어와요. 그래도 제 할일은 다 하고 자더라고요. 우리 아들 덕분에 학교에서 얼굴색이 다른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왕따당하는 일이 없어졌대요. 그 아이들보다 우리집 아이 얼굴이 더 새카맣거든요. 하하. 원시적으로 크고 있지만 내공이 쌓여 언젠가는 개과천선할 거라고 믿어요.”
   
   
   작품 속에 가족이 들어있다
   
▲ 권치규·김경민 부부의 공동작업실. 서로의 작품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고 작업을 거들어주기도 한다.

   김경민이 아이들 이야기를 하는 동안 권치규는 연필을 들고 공과금 고지서에다 스케치를 하다 한마디 거든다. “진짜 잘해요. 자기 일이 아무리 바빠도 아이들 일이 먼저예요. ‘잘한다 잘한다’ 내가 계속 최면을 걸어줘요.”
   
   ‘똑소리 나는 엄마’ 김경민은 마당 넓은 집에서 방목하듯 세 아이 키우며 지지고 볶고 사는 일상을 예술로 만들어냈다. 결혼 전에 김경민은 사회적인 주제를 가지고 제법 굵직한 작업을 했다. 육아 때문에 큰 작품을 할 수 없으니 생활 속에서 소재를 찾아내 작은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오히려 작품세계가 확실해지고 따뜻해졌다. 일상에서 포착한 사람들의 표정을 회화적으로 표현한 조각들은 마치 삽화를 보는 듯하다. 김경민 조각들의 낯익은 표정에 사람들은 배꼽을 잡는다. 김경민 작품의 모델은 대부분 남편 권치규와 아이들이다. 튼튼한 팔뚝의 엄마 뒤에 업혀 있는 아빠와 세 아이, TV리모컨 들고 소파에 늘어지게 누워 있는 아빠를 표현한 작품에는 모두 권치규가 들어있다. 권치규는 “내 동상이 전국에 세워져 있다”고 농담을 한다. 얼마 전 자동차쇼에 가서 레이싱모델을 보고 넋을 잃고 있는 권치규의 모습 또한 여지없이 김경민의 눈에 걸렸다. 그 모습을 지금 작품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그 작품은 오는 7월 서울 종로구 소격동 선컨템포러리에서 열릴 전시회에서 선보인다.
   
   김경민이 아이들과 작품에 집중하느라 신경 쓰지 못한 바깥일은 모두 권치규가 맡고 있다. 아내가 참석해야 할 자리도 권치규가 가면 ‘김경민’으로 절반은 인정이 된다. 이를 테면 ‘얼굴마담’인 셈이다. 김경민의 몫까지 뛰어야 하니 권치규의 바깥 활동은 많을 수밖에 없다. 부부의 역할 분담은 확실하다. 부부가 같은 일을 하니 늘 붙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안부를 물어야 할 정도로 얼굴 볼 새가 없다. 김경민은 매주 하루는 강원대에 가서 강의를 하고 사흘은 홍익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권치규 또한 그동안 박사논문에 매달리랴, 두 사람 바깥일 챙기랴, 정신없이 바빴다. 김경민에 이어 오는 9월에 전시도 계획돼 있다.
   
   
   우리에게 작업은 숨을 쉬는 것
   
▲ 권치규의 작품 ‘Life-시선’
부부의 작품은 전혀 다르다. 권치규는 자연과 인간에 대해 탐구하는 작품이 많다. 집의 형상을 통해 인간의 욕망을 묻기도 하고 상생의 삶을 보여주기도 한다. 전시장에 커다란 집 한 채 들여놓고 관객의 발길을 붙잡은 채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작품세계는 다르지만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든든한 조력자다. 권치규는 “처음부터 아내 작품의 팬이었다”고 망설임 없이 말한다. 김경민은 “남편 작품이 꼭 내 작품 같다”며 애정을 표현한다. 힘들 땐 서로 작품을 거들기도 한다.
   
   창고에 살 때부터 후배들 거둬 먹인 부부의 마당엔 지금도 손님들이 끊이지 않는다. 작업 도와주는 제자들이 북적이다 보니 넓은 식탁도 늘 꽉 찬다. 세 아이들은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배려를 배운다. 그 일상과 관계들은 부부의 작품 속에 고스란히 들어간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같은 꿈을 꾸는 부부가 말했다. “우리에게 작업은 숨을 쉬는 것과 같다. 서로의 작업은 이해를 넘은 삶 그 자체이다.”

 

새벽 운무, 비 갠 후의 청량한 산, 미치도록 좋죠 !
지리산 사진작가 강병규

▲ 지리산만 찍는 사진작가 강병규는 지리산이 바라보이는 곳에 갤러리를 짓고 자신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나이 서른. 보통의 남자라면 학교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 빛나는 인생 설계를 할 때이다. 남들이 출발의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이 남자의 인생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시작한 사업이 쫄딱 망하면서 남자의 인생은 산산조각이 났다. 청주사범대학 수학교육과를 졸업한 남자는 안정된 교직 대신 시청각 교재 공급 사업을 시작했다. 혈기왕성했고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직원이 20명에 이를 정도로 사업은 잘 굴러갔고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그런데 3년 만에 어음이 부도가 나면서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됐다. 남자의 집은 물론 농사짓는 부모의 땅까지 경매로 넘어가고도 수억원의 빚이 남았다. 일찍 결혼해 아들과 딸을 두었지만 그 틈에 가정도 깨졌다. 빚을 갚아야 하니 죽을 수도 없었다. 그의 등엔 수억원의 빚이 천형처럼 얹혔다. 보통의 남자들이 ‘빛나는 30대’를 보낼 때 이 남자는 ‘빚뿐인 30대’를 보냈다.
   
   돈을 버는 대로 빚 갚기 바빴던 남자가 자신을 위해 유일하게 욕심을 낸 것은 사진기였다. 힘들 때마다 사진기를 들고 북한산, 덕유산, 지리산을 헤매고 다녔다. 그중 지리산에 오르면 마음이 편했다. 평균 한 달에 두 번은 지리산을 찾아 2~3일 산에 머무르면서 사계절의 풍경을 사진 속에 담았다. 사진 장비며 야영에 필요한 텐트 등 30㎏에 이르는 장비를 메고 몇 시간씩 지리산을 걸으며 ‘나와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살아갈 힘이 생겼다. 지리산은 산세가 험하지 않은 까닭에 산보다는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남자는 지리산을 통해, 사진을 통해 자신의 잃어버린 30대를 보상받고 상처를 치유받았다. 남자는 지금 지리산에 흙집을 짓고 살고 있다. 집 옆에 갤러리를 짓고 자신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이제 ‘지리산의 사진작가’라고 불리는 강병규(47)의 과거이다.
   
   
   찰나 찰나, 미치도록 아름다운 곳
   

▲ 집터와 이어진 소나무 숲. 곳곳에 심어놓은 구절초가 가을이면 장관이다.


   지난 6월 12일 서울에서 300여㎞를 달려 강병규를 찾았다. 전북 남원군 산내면. 천년고찰 실상사로 가는 길목에서 ‘길섶 갤러리’라는 표지판을 따라갔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날 만큼 좁고 꼬불꼬불한 길이었다. 중간중간 비포장길을 어렵게 올라가니 지리산 반달곰처럼 수염이 덥수룩한 강병규가 두툼한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해발 500m, 덕유산 줄기 한 자락에 여러 동의 건물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둥근 모양에 너와지붕을 얹은 흙집, 그 위쪽으로 ‘길섶 갤러리’와 2주 전에 완성했다는 게스트하우스 3동이 강병규가 7년을 걸쳐 일군 것들이다. 갤러리 앞에서 바라보니 건너편에 지리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바래봉·노고단·반야봉… 지리산 속의 또 다른 산인 삼정산을 지나 천왕봉의 능선이 겹겹이 운무(雲霧) 속을 달리고 있었다. 강병규가 갤러리 안쪽에 있는 다실에서 지리산 녹차를 내놓았다. 둥근 모양의 방을 따라 만든 3개의 넓은 창으로 각기 다른 지리산의 풍경이 들어왔다.
   
    “왜 지리산이 좋은가”라고 우문을 던지자 강병규가 말했다.“좋은데 꼭 이유가 필요한가요. 그냥 좋습니다. 부드러운 능선·온화한 산세가 사람을 품어주잖아요.” 강병규는 “사람들이 지리산의 사계 중 어느 때가 가장 좋으냐는 질문을 많이 한다”면서 말했다.
   
   “사람들이 물어볼 때마다 ‘다 좋다’고 합니다. 겨울에 구름이 눈가루가 돼서 산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해가 떠오르며 붉은 물감을 뿌려놓은 것 같을 때, 어떤 그림이 그보다 더 예쁘겠습니까. 여름에 비 그친 다음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운해 사이로 봉우리들이 섬처럼 떠 있는 풍경은 정말 몽환적입니다. 가을엔 단풍, 봄엔 신록들이 하루하루 능선을 따라 달려가는 것이 보입니다. 청량한 아침 마을을 뒤덮은 운무는 어떻고요. 그 찰나 찰나가 미치도록 아름답습니다. 그 순간을 전부 사진에 담고 싶어요.”
   
   빚에 쫓기며 미치지 않기 위해 찾았던 지리산에 미쳐 아예 터를 잡고 살기까지 강병규의 삶을 들어봤다.
   
   
   도시의 삶에 사표를 던지다
   

▲ 갤러리 안에 마련된 다실. 둥근 벽을 따라낸 큰 창으로 지리산의 사계가 지나간다.

나이 마흔. 보통의 남자라면 일도 가정도 자리를 잡고 아파트 평수를 넓혀갈 때 강병규는 빚더미에서 겨우 헤어나왔다. 한 칸짜리 방만 전전하다 서울 강서구 화곡동에 자신의 명의로 된 반지하 연립주택도 마련했다. 잘나가는 IT회사에서 시청각교육 원격 시스템 등으로 인정을 받은 후 대기업 계열사로 옮겼다. IT와 관련한 솔루션 비즈니스를 맡아 정신없이 바빴다. 연봉도 많이 받았고 이제 보통 남자들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도 금요일이면 출근할 때 아예 자동차에 사진·등산 장비를 싣고 퇴근하자마자 지리산으로 달려갔다. 하루 이틀씩 산에서 야영을 하며 필름 속에 지리산의 운무를 담고, 지리산의 맑은 공기로 도시에 찌든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고 나면 살 것 같았다. 언젠가는 지리산 자락에 구절초로 둘러싸인 집을 짓고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도 좋겠다는 꿈을 꾸었다. 서른에 혼자가 된 후 그간 여자는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어느 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크게 배신당한 일이 있었다. 습관처럼 지리산으로 달려갔다. 술 한잔 걸치고 숨가쁘게 달려 온 자신의 삶을 되돌아봤다.
   
   “남자들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30대를 나는 빚 갚느라고 다 보냈더라고요. 나를 위해 뭘 하고 살았나 생각해 보니 아무것도 없었어요. 정년까지 15년 정도 더 직장 생활을 하면 자동차도 바꿀 수 있고 아파트 평수는 넓어지겠지만, 골프 접대하고 술 마시며 정신없이 일만 하고 사는 것이 과연 나를 위하는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었어요. 그 순간 막연히 꿈꾸어왔던 지리산의 삶이 구체적인 목표가 됐어요. 그 길로 서울로 돌아가 바로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흙집 품앗이로 지은 집
   

▲ 강병규가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는 흙집.


   회사에 사표를 내고 도시의 삶에도 사표를 던졌다. 어렵게 마련한 연립주택을 정리하고 퇴직금을 긁어모아 이곳에 땅을 샀다. 임야를 포함해 4만9500㎡(1만5000평)를 3.3㎡당 평균 1만원에 구입했으니 1억5000만원이 들었다. 소나무 숲·구절초·오솔길·동그란 흙집…, 지리산의 삶을 꿈꾸며 그가 그린 설계도였다. 전남 보성에 있는 흙집학교로 달려가 속성으로 집 짓는 기술도 배웠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주변에 먼저 지리산에 들어와 살던 사람들이며 환경단체들이 ‘펜션 사업을 하려는 것 아니냐, 자연을 훼손한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나섰다. 공무원들도 집을 짓는 데 필요한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마을에 방 한 칸 얻어 살며 외로운 싸움을 벌였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힘이 돼 주었다. ‘장사꾼이 아닌 지리산의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강병규의 진심이 통하기까지 1년 반이 걸렸다. 허가가 떨어지고 300만원짜리 중고 굴삭기를 사서 몇 달 동안 땅을 다지기 시작했다. 돈이 없으니 몸으로 때우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동네에 강병규가 다녔던 흙집학교 출신이 있었다. 흙집을 짓고 싶어하는 사람들까지 합류, 7명이 ‘흙집 품앗이 모임’을 만들었다. 7명이 한 팀이 돼서 한 집씩 짓기 시작했다. 1호, 2호…, 마지막 7호가 강병규네 집이었다. 덕분에 인건비는 굳었다. 살림집으로 쓰고 있는 둥근 너와집이 바로 그 집이다. 집이 완성되는 날 강병규는 노모와 함께 눈물을 흘렸다.
   

▲ 갤러리 앞마당에 모닥불을 피울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곳. 장작에 구운 고기 한 점과 술 한 잔이면 낯선 이들도 금방 친구가 된다.


   강병규는 “그래도 예술한다는 사람인데 네모반듯한 집은 싫어 둥글게 지었다”고 말했다. 벽도 바닥도 흙으로 마감을 한 진짜 흙집이었다. 이 집에서도 거실 창으로 지리산이 바로 달려들었다. 살림살이는 한쪽에 잔뜩 쌓여있는 등산 장비 외에는 단출했다. 게스트하우스가 완성되기 전에는 많은 도시 사람들이 이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흙의 기운을 충전해 갔다. 갤러리는 그 후 2년여 지나 짓기 시작했고, 게스트하우스 3동은 지난 겨울 시작해 이제 막 완공된 것이다.
   
   그 땅에 강병규는 꿈을 그대로 옮기고 있다. 갤러리 뒤로는 소나무 숲이 작은 산을 이루고 있고 숲속을 따라 수백미터의 오솔길이 이어진다. 강병규는 “오솔길을 걷다 보면 고라니와 마주치기도 한다”고 말했다. 산이며 집 주변엔 구절초를 곳곳에 심었다. 가을이면 푸른 소나무와 하얀 구절초가 눈부신 이중주를 벌인다. 그땐 사람들을 초대해 구절초 축제를 열 계획이다.
   
   갤러리 안에는 강병규가 사진으로 담은 지리산의 사계가 걸려 있다. 한쪽엔 차를 마실 수 있게 해 놓았다. 누구나 들러 사진을 구경하고 차를 마시며 쉬어가는 쉼터 같은 곳이다. 대신 한곳에 후원함을 두고 운영비에 보태고 있다. 정해진 돈은 없다. 내고 가도 그만, 그냥 가도 그만이다. 게스트하우스도 그렇게 운영할 계획이다. 그림도 팔고, 묵어가는 사람들이 숙박료 명분으로 내는 후원금도 많아져 그 새 커진 살림은 그럭저럭 굴러가고 있다.
   
   
   “둘레길서 만난 뜻밖의 선물”
   

▲ 이 집은 어디서든 문을 열면 숲과 연결돼있다.

갤러리가 지어질 때쯤 온 나라에 걷기 바람이 불었다. 지리산에도 둘레길이 생겼다. 둘레길은 강병규의 집 근처를 지나게 돼있다. 둘레길을 걷다 우연히 이곳에 들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들이 블로그에 올린 글을 통해 조금씩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지난해 겨울 소설가 공지영이 펴낸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라는 책에도 강병규와 길섶 갤러리가 소개되면서 무명의 사진작가는 제법 이름을 알리게 됐다. 요즘에는 지방 방송국의 다큐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예술인을 만나는 프로그램 진행자로 나서기도 한다.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일이 많아지다 보니 정작 작품할 시간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갤러리 안에는 이곳에 들른 사람들이 남기고 간 쪽지 수백 장이 걸려 있었다.
   
   “둘레길 걷다 길을 잘못 들어 들른 곳, 뜻밖의 선물을 만났습니다. 사진 잘 보고 갑니다.”
   
   “지리산 사계를 다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쪽지마다 수많은 사연들이 적혀 있었다. 강병규는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여기 살고 싶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고 말하고 “특히 싱글인 여성들이 좋아하는데, 막상 ‘들어와 살라’고 하면 다들 도망가더라”면서 웃었다.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인근 인월면에 살고 있다는 오병곤(44)씨 부부가 “우리도 흙집을 짓기 위해 땅을 보러 다니는 중인데 혼자서 흙집을 지었다는 소문을 듣고 왔다”고 말했다. 부부는 강병규에게 흙집 짓는 방법을 꼬치꼬치 캐물었다.
   
   마침 갤러리 앞마당 바비큐장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오씨 부부가 집에 갈 생각은 않고 주저앉았다. 텃밭에서 기르는 상추며 고추가 바로 밭에서 야외 식탁으로 옮겨졌다. 장작불 세기에 따라 높이 조절이 가능한 석쇠에서 삼겹살이 ‘지글지글’ 익었다. 어둠이 내리자 하늘에 아직 덜 차오른 달이 조명으로 걸렸다. 지리산에서 건너온 6월 중순의 바람은 적당하게 서늘했다. 이런 자리에 술이 빠질 수는 없다. 동네 양조장에서 만들었다는 막걸리 맛이 기가 막혔다. 강병규와 오씨 부부, 기자까지 이날 처음 만난 사람들은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 것처럼 술잔을 부딪치며 늦은 저녁까지 대화를 나눴다. 기분 좋게 취한 강병규가 말했다. “내가 꿈꾸던 삶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숲 속의 요새’서 흙과 불과 놀며 나는 실험 중!
‘현대 도예 선구자’ 신상호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자동차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길은 막다른 길처럼 보였다. 4차선 도로 바로 옆 ‘목표 지점’이라고 표시된 곳은 온통 숲이었다. 이런 곳에 무슨 집이 있다는 거지? 내비게이션에 애꿎은 불평을 늘어놓으며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끊어진 것처럼 보인 길이 오른쪽으로 이어졌다. 숲길 양편으로 심상치 않아 보이는 돌 조각 기둥이 죽 늘어서 있었다. 제대로 집을 찾은 듯싶었다. 길을 따라 100m쯤 들어가니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흙의 예술가’ 신상호(65·전 홍익대 미대 학장·산업미술대학원장)씨가 35년 동안 일군 작은 왕국 ‘부곡도방’이 숲에 둘러싸여 있었다.
   
    서울 광화문에서 불과 22㎞. 도심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울창한 자연이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웬만한 미술관에 뒤지지 않을 집 규모도 놀라웠다. 돌담으로 둘러싸인 안쪽에 넓은 잔디밭을 가운데 두고 본채, 사랑채, 신씨의 작품을 전시해 놓은 전시장 두 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돌담 밖으로는 공군 비행장 격납고 같은 아치형의 작업동 두 개가 있다. 정원 곳곳에 있는 작품이며, 건물들이며, 눈 돌리기가 바빴다. 정원 한쪽엔 두 딸이 어렸을 때 만들어준 소꿉놀이용 나무집도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서자 15마리나 된다는 개들이 이곳저곳에서 낯선 이의 방문을 요란하게 알렸다. 정원은 축구 경기도 할 수 있을 만큼 넓었다. 집이 있는 곳부터 길 입구까지 3만3000㎡(1만평)가 조금 안된다고 했다. 집을 둘러싸고 있는 숲은 신씨의 소유는 아니지만 “매일 내가 쳐다보니 내 것이나 다름없지 않느냐”고 신씨가 말했다.
   
   
   변해야 예술이지!
   
▲ 신상호씨 부인 한윤숙씨가 직접 설계하고 인테리어를 한 살림집. 집안 곳곳에 신씨의 ‘구운 그림’ 작품이 걸려 있다. 거실 창밖으로 보이는 정원에도 동물 작품 10여점이 서 있다.

   “변화하지 않는 예술은 죽은 것이다.” 신씨는 숲 속의 요새 같은 도방에 은둔한 채 날마다 또 다른 세계로의 탈출을 도모하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가지는 어디로 뻗을지 자신도 알지 못한다고 했다. ‘신상호’의 카테고리는 도예가지만 그를 ‘도예가’라는 하나의 영역에 가두기는 힘들다. ‘구운 그림(Fired Painting)’ ‘클레이아크(Clayarch)’라는 낯선 용어를 던지며 도예의 경계를 허물고 장르의 벽을 넘나들었다.
   
   ‘구운 그림’은 흙 위에 유약으로 그림을 그리고 도자기처럼 가마에서 구워내는 것이다. 흙으로 빚은 판이 캔버스이고 유약이 물감인 셈이다. 유약이라고 하면 몇 가지 색깔밖에 없는 줄 알았더니 그가 만들어내는 유약은 물감만큼이나 다양하고 화려했다. 그는 “유약의 색깔은 무궁무진하다”고 말한다.
   
    ‘클레이아크’는 도예(clay)와 건축물을 상징하는 아치(arch)를 조합해서 그가 만든 말이라고 한다. 도예와 건축의 접목을 뜻하는 것으로, 구운 그림 조각들을 건축물 외벽이나 내부에 장식하는 것이다. ‘건축에 예술이라는 옷을 입힌다’고 생각하면 쉽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에 가면 금호아시아나 사옥 뒤편에 화려하게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그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건물에도 유리벽 틈에서 ‘신상호표 원색 도자 그림’이 눈길을 끈다. 구운 그림으로 외벽을 입힌 김해 클레이아크 미술관도 그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애초에 김해시청이 분청 도자 박물관을 만들려고 했던 것이 그의 제안으로 전혀 새로운 미술관이 된 것이다. 그는 설립 단계부터 참여해 초대 미술관장을 지냈다.
   
   전통 도예의 길에서 한참 벗어난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현대 도예의 거장’이라고도 하고 ‘도예계의 이단자’라고 폄훼하는 사람도 있다. “청자·백자를 만들어야 진짜 도예가이지 타일에 그림 그리는 것이 무슨 도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말한다.
   
    “예술 따로 삶이 따로일 수 없어요. 생활 속에 있는 것은 순수 예술이 아니다? 난 생각이 달라. 전통을 지킨다고 옛것을 붙잡고 있는 것이 예술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예술의 본질이 뭔가. 크리에이티브 아닌가. 전통도 시대에 맞춰 진화해야 해요. 그래야 도예도 발전하지.”
   
▲ 두 동의 전시장 중 한 곳. 입체부터 평면 작품까지 다양하다.

   한동안은 아프리카에 미쳤다. 한계에 부딪힌 현대미술의 해답이 원시의 생명력을 간직하고 있는 아프리카 예술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프리카를 찾아다니고 아프리카 물건들을 실어 날랐다. 초원을 달리는 동물을 빚어내고 원시의 에너지를 담은 원색을 입혔다. 그 작품들은 ‘아프리카의 꿈’이라는 제목을 달고 지난해 10월 ‘그랜드 하얏트 서울’에서 전시를 가졌다. 그의 작품은 지금 미국 뉴욕에 있는 ‘hpgrp’갤러리에서도 전시 중이다.
   
   입체와 평면을 넘나들고 색채의 마술사라는 평을 듣지만 그의 시작은 청자·백자와 같은 전통 도자기였다. 그의 전통 도예작품은 일본 컬렉터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잘 팔려나갔다. 그는 “돈은 그때 다 벌었다”고 말했다. 그가 부곡도방을 일구고 끊임없이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전통 도예 덕분이었던 셈이다.
   
   
   숲 속의 요새 ‘부곡도방’
   
   그가 이곳에 터를 잡은 것은 1976년. 땅값 싸고 자연이 있으면서 서울에 가까운 곳이었다. 목장을 하던 곳을 3.3㎡당 2000원을 주고 2200㎡(약 650평) 정도를 샀다. 블록으로 지은 100㎡(30여평)의 작은 집이 부곡도방의 시작이었다. 지금도 군사보호구역이라 개발이 미치지 않은 곳이지만 당시엔 오지 중의 오지였다. 아무도 욕심 내지 않은 땅에 언덕 위의 하얀 집을 짓고 “드디어 우리집이 생겼다”면서 행복해 했다. 그 후에 조금씩 땅을 사들이고 사랑채, 살림집으로 사용하고 있는 본채를 차례로 지었다.
   
▲ 가마가 있는 작업장. 헬기 프로펠러, 컨테이너 등 중고로 구입한 군용 물건들도 이 집에 오면 설치작품이 된다.

   서남향인 본채의 거실 전면 유리창으로 마당의 잔디밭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일반 집보다 높은 천장에 서까래며 테이블로 사용하고 있는 원목들에서 반질반질 세월의 윤기가 흘렀다.
   
   집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집은 전부 아내의 작품”이라면서 슬그머니 공을 부인 한윤숙(65)씨에게 넘기고 사라졌다. 한씨도 그도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 출신으로 동갑내기이다. 한씨가 “저 사람은 작품 이외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평생 아이처럼 살았다”고 말하면서 집 지은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이 큰 집을 내가 전부 설계했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놀라는데, 욕구가 강하면 뭐든 하게 돼 있는 것 같아요. 건축이라고는 배운 적도 없는데 모눈종이에다 자 들고 여기저기 재 가면서 모든 것을 내가 했어요. 창 높이, 문 크기, 벽 두께는 물론이고 하다 못해 전기 콘센트 꽂는 위치, 하수도 처리까지 전부 내 생각대로 지은 거예요. 가구도 의자 하나까지 직접 디자인했어요. 살면서 얻은 경험과 필요에 의한 본능, 예술적 감성이 이끄는 대로 한 거죠. 안된다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원하면 방법은 생기게 돼있어요.”
   
▲ 축구장만한 정원을 가운데 두고 전시장 두 곳이 자리잡고 있다. 전시장 외벽이 ‘클레이아크’ 작품으로 장식돼 있다.

   “무계획적인 남편 덕분에 어느 날 갑자기 손님 치르는 일은 보통이다”라는 한씨의 부엌에는 빛깔 좋은 생활 도자기 작품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모두 한씨의 작품이라고 했다. 직접 담근 된장, 고추장, 장아찌 독들이 햇빛 좋은 곳에서 시간을 묵히고 있었다. 부엌 뒤편 텃밭에서는 매일 아침 식탁에 오르는 샐러드용 채소들이 자라고 있고, 닭장에는 매일 신선한 달걀을 낳아주는 닭들이 10여마리 뛰어놀고 있었다.
   
   “살아보니 뭐든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정답이더라.” 한씨의 말처럼 본능이 시킨 대로 만든 집에서 그는 누구보다 본능이 이끄는 대로 작품을 만들고 있다.
   
   한씨는 남편을 두고 “절대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는 성격”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작품을 완성한 순간에 벌써 다른 작품을 생각하고 있어요. 변화를 시도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빨리 앞서가니까 10년쯤 지나야 사람들이 찾고 알아보는 거예요. 요즘엔 또 다른 데 필이 꽂혔어요. 옆에서 보는 내가 정신이 없어요.”
   
   부인의 말에 대해 그도 인정했다. “병이에요. 놀이든 뭐든 싫증을 정말로 빨리 느껴요.” 가장 오래도록 싫증 내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그가 주저 없이 대답했다. “내 마누라. 나의 가장 든든한 응원군이에요. 아내한테 고마운 것은 새로운 것을 하려고 할 때마다 한번도 ‘하지 마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요. 새로운 실험을 계속 할 수 있게 해주는 힘이죠.”
   
   
   “나는 흙을 만지는 도예가”
   
▲ 생명력 넘치는 아프리카 미술의 원색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

   두 동의 전시장엔 ‘변심’의 역사가 보관돼 있었다. 초기의 백자·청자 작품은 없었지만 동물 형상의 머리 조각부터 구운 그림, 클레이아크, 아프리카의 꿈이 담긴 작품까지 30여년 방황과 실험의 역사들이다. 한창 잘나가는 백자·청자를 그만두고 이상한 머리 형상을 들고 나타난 그를 두고 사람들은 “미쳤다”고 말했다. 그는 “예술가가 아니라 돈 버는 기술자가 되는 것 같았다. 내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크기의 한계도 벗어나고 싶었고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다. 전통 도예 밖으로 나온 그를 비난했던 미술계 인사를 2년 전 우연히 만났더니 이렇게 말하더란다. “내가 자네 욕했던 것 아나? 그런데 아직도 자네가 항아리 빚고 앉아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네.” 그는 그 말을 듣고 ‘지난 30년을 잘못 살았던 것은 아니구나’ 싶었단다.
   
   2008년에는 ‘클레이아크’로 금호아시아나, 삼성 사옥에 작품을 설치한 덕분에 국세청으로부터 ‘가장 돈 잘 버는 예술가로 찍혀’ 세무조사를 받기도 했다. 불을 거친 도자 그림은 유화 그림과는 달리 색깔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원하는 색깔을 만들어내기까지 수많은 작품을 버려야 한다. “깨고 또 깨고, 수없이 시행착오를 거치다 보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 생명력 넘치는 아프리카 미술의 원색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들.
아프리카에 미쳐 집안을 온통 아프리카 천국으로 만들었던 그의 관심은 벌써 다른 곳으로 옮겨가고 있다. 요즘 그를 유혹하는 것은 ‘쇠’다. 흙의 단점을 보완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의 머리는 벌써 바쁘다.
   
   “나갈 일도 없고, 나가고 싶지도 않고, 나 혼자 노는 게 가장 좋아. 결혼식, 장례식도 안 가. 골프도 끊고 친구도 끊었어. 그런데도 왜 이렇게 바쁜지 모르겠어.”
   
   달디 단 새벽공기 마시면서 일어나, 하고 싶은 작품 마음대로 주무르며 놀고 있으니 이곳이 그에겐 천국의 놀이터인 셈이다. 세상의 목소리보다 자신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그도 동료 도예가들의 곱지 않은 시선은 편치 않은 모양이다. 인터뷰 말미에 꼭 넣어달라며 그가 말했다. “무슨 짓을 해도 나는 흙을 만지는 도예가다.”

 

반도체 박사가 헤비메탈을? 공학과 음악은 통해요
양평 전원주택의 작곡가 안지홍

▲ 작곡가 안지홍의 전원주택 반지하에 있는 작업실. 녹음에 필요한 음향시설과 다양한 악기가 갖춰져 있다.
일리노이주립대 대학원 재료공학 박사, 삽살개보존회 회원, 삼성전자 개발팀, 밴드 ‘시나브로’ 멤버….
   
   작곡가 안지홍(52)의 인물 검색 정보이다. 공학박사·삽살개·밴드 멤버·작곡가, 잘 어울리지 않는 이력의 조합에서 간단치 않은 삶이 읽혀졌다. 알고 보니 안씨는 수백 편의 드라마와 영화 음악을 작곡했다. 혹시 ‘Homini Hominis Possunt Historiam Condonare~(사람은 역사를 용서할 수 있을지라도)’로 시작되는 드라마 ‘제5공화국’(MBC·2005년)의 장중한 시그널 음악을 기억하는지. 바로 안씨의 곡이다. 그가 음악을 맡은 작품은 드라마 ‘제3공화국’ ‘제4공화국’, 메디컬 스릴러물 ‘M’과 ‘에어시티’ ‘화려한 시절’ ‘청춘의 덫’ ‘베스트극장’ 등을 비롯해 영화 ‘고스트 맘마’ ‘닥터 봉’, CF 음악 등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게 많은 작업을 했는데도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은 의외로 없었다. 어렵게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으로 ‘제5공화국’ 음악이 흘러나왔다. 전화는 몇 차례의 시도 끝에 연결이 됐다. 안씨는 “음악 작업을 할 때는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면서 취재를 흔쾌히 허락했다.
   
   지난 7월 11일 장맛비를 뚫고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에 있는 그의 목조주택을 찾았다. 남한강변을 따라 달려가는 길, 빗줄기가 가늘어진 사이로 물안개 핀 6번국도의 풍경은 어떤 산수화보다 아름다웠다. 남한강과 합류하는 용담천 주변, 예상치 못한 전원주택 단지가 나타났다. 모양이 조금씩 다른 목조주택 25가구가 작은 산을 뒤로 하고 자리를 잡고 있었다. 조경도 잘 돼 있고 집들마다 모양이 독특해서 단지 전체가 이국적으로 보였다. 단지의 맨 위쪽에 잔디 정원이 있는 안지홍의 집이 있었다.
   
   정원에도 큰 개들이 보이더니 집안으로 들어서자 강아지 세 마리가 먼저 손님을 맞았다. 긴머리를 질끈 묶은 안씨가 나왔다. 한눈에도 예술가로 보였다. 다섯 살, 8개월 된 두 딸과 강아지 세 마리, 부부가 살기에 목조주택은 넓어 보이지 않았다. 수시로 달려들어 비벼대는 개들 틈에서 음악이 아닌 개 이야기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그의 삶에서 개는 음악만큼이나 중요한 듯했다. 하긴 부인을 만난 것도 개 때문이란다.
   
   
   유기견들의 엄마와 삽살개 지킴이
   
▲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세월리의 전원주택 단지에 있는 안지홍씨의 집. 왼편에는 부모님의 집이, 오른편엔 안씨의 동생집이 있다.

   두 사람은 개 단체 세미나에서 처음 만났다. 부인 김나형(40)씨는 유기견 단체 운영자였고, 그는 삽살개보존회원이었다. 세미나 후 뒤풀이 장소에서 옆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애견인이라는 것 외에도 두 사람에게는 음악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김씨는 숙명여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고 학원을 경영하던 피아노 선생님. 보신탕집에 끌려가던 것을 구해낸 시추를 비롯해 김씨가 키우는 유기견이 6마리였다. ‘유기견 엄마’인 피아노 선생님과 수십 마리의 개를 키우던 작곡가는 바로 사랑에 빠졌다.
   
   두 사람은 5년 전 바로 이 집 정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은 특별했다. 주례가 없는 대신 김씨가 데려온 유기견 6마리를 더해 35마리의 개들이 증인이 됐다. 부부가 직접 연주를 하면서 ‘성혼’을 알렸다. 밴드·오케스트라·어린이합창단까지 참석해 결혼식은 멋진 야외콘서트가 됐다. 안씨는 “주례 없는 결혼식이 통쾌했다”고 말했다. “우리의 시작을 남이 알려주는 것이 싫었어요.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우리 인생을 오픈하고 싶었습니다.”
   
   개들은 그동안 늙고 병들어 죽는 바람에 그 수가 많이 줄었지만 가끔 유기견이 새 식구로 추가되기도 한다. 그중엔 장애견도 있다. 길에서 교통사고가 나 피투성이가 된 푸들을 수술을 시켜서 데려왔다. 푸들견은 한쪽 다리를 절면서 유난히 사람을 잘 따랐다. 안씨는 “장애견을 키우는 것이 아이들 교육에도 좋다”고 말하면서 애견론을 펼쳤다.
   
   “아이들이 집에서 장애견을 보고 자라니까 장애인에 대한 편견이 사라집니다. 몇 년 개들을 키우다 보면 육식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자연히 생명·환경운동에도 관심을 갖게 됩니다. 아기들 키울 때 개가 있으면 나쁘다고 하는데 잘못된 말입니다. ‘면역력을 키워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옛날에 흙장난하고 놀던 아이들은 아토피가 없었잖아요. 자연이 면역력을 키워준 거죠. 개를 키우면 그 역할을 개들이 대신 해줍니다.”
   
   개들이 점령한 1층을 벗어나 계단을 내려가니 160여㎡ 규모의 넓은 작업실이 꾸며져 있었다. 사방 벽이 원목인 반지하 작업실은 서늘했다. 한쪽 벽에 스크린을 설치해 여름엔 온 가족의 피서지 겸 영화관이 되기도 한단다. 작업실에는 녹음에 필요한 ‘믹서’를 비롯해서 온갖 음향시설이 다 갖춰져 있었다. 악기도 키보드·기타·전자드럼·첼로·미니하프부터 거문고·장구·북 등 국악기까지 다양했다. 기타도 한두 대가 아니었다. 그중에는 그가 설계한 특수회로 전자기타도 들어있었다. 그가 직접 만든 기타를 가리키며 “음악과 공학은 통한다”면서 “외국 록밴드 멤버 중에도 공대 출신들이 많다”고 말했다.
   
   
   공학박사 안지홍, 뮤지션 안지홍
   
▲ (왼쪽부터) 집 부근에 사놓은 땅을 텃밭으로 만들었다. 이탈리아에서 가져온 방울토마토는 주변 친지들까지 즐겁게 해준다.
안씨의 목조주택 2층에서 바라본 단지 풍경.
큰딸 채윤이와 시추 ‘솔비’의 닮은꼴 모습. ‘솔비’는 번식용으로 학대받다 보신탕집으로 끌려가는 것을 데려와 가족이 됐다.

   뮤지션 이전 공학박사 안지홍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초등학교 때부터 음악을 듣거나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작곡가가 아니면 과학자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초등학생 때 이미 AFKN을 통해 미국 팝음악을 듣다 보니 중학생이 돼서는 팝송이 시시해졌다. 그때부터 록에 빠져 고등학생 때는 프로그레시브록(Progressive rock·록 중에서도 진보적인 음악)에 심취했다. 음악으로 먹고살기 어렵던 시대였으니 또 다른 꿈이었던 공대를 진학했다. 그는 고려대에서 금속공학을 전공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음악은 여전히 그의 삶의 일부분이었다. 클래식기타 동호회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아르바이트로 학원에서 기타 강습을 했다.
   
   “당시엔 클래식기타를 가르칠 만큼 실력이 되는 사람이 없었어요. 마침 기타 붐이 일면서 수강생이 엄청 많았어요. 일주일에 세 번 나갔는데도 월급쟁이들보다 훨씬 돈을 많이 벌었어요. 대학 내내 내가 벌어서 학교 다니고 스포츠카를 끌고 다닐 만큼 여유가 있었죠.”
   
   고교시절부터 친구였던 재즈피아니스트 김광민(동덕여대 교수·전 수요예술무대 MC)과 함께 ‘시나브로’란 밴드를 결성해 대학가요제에 나갔다. 그가 작곡한 ‘안개’라는 곡으로 당시 동상을 받았다. 방송음악에도 손을 댔다. MBC 황인뢰 PD 작품으로 인기 어린이 드라마였던 ‘호랑이 선생님’ 음악을 맡았다. 이름이 알려지고 ‘러브콜’이 오기 시작할 때 고려대와 자매결연을 한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박사과정 제1호 교환학생으로 뽑혔다는 연락이 왔다.
   
   ‘반도체재료의 특성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4년6개월. 미국에서도 음악은 계속 그와 함께였다. 기타 강습도 계속하고 작곡도 했다. 취미로 기타 제작을 할 만큼 음악 매니아인 지도교수를 만나 기타 만드는 것도 배웠다.
   
   귀국 후 삼성전자 반도체개발팀을 맡았다. 현재 반도체부문 권오현 사장이 당시 직속 상사로, 세계 최초 64MD램 공정 개발을 담당했다. 삼성전자 CF 음악을 책임지는 등 음악도 놓지 않았다. “논문도 많이 쓰고 개발왕이었다”고 스스로 자랑할 만큼 회사에서 성과도 좋았지만 조직생활을 하기에 그의 DNA는 너무 자유로웠다. “벤처회사를 차리겠다”면서 3년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를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드라마 음악 의뢰가 정신없이 쏟아졌다. 결국 음악이 그를 붙잡아 앉혔다. 그후 ‘공학박사 안지홍’이 아닌 ‘작곡가 안지홍’으로 살고 있다.
   
   그는 요즘 드라마 음악을 멀리하고 있다. “새로운 시도를 하는 드라마도 없고,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너무 많고 재미없어졌어요. 광고도 외국 것 베끼기 급급하고 드라마도 멜로물밖에 없어요. 굶어죽어도 내가 하기 싫은 음악은 안 합니다.”
   
   그런 그가 요즘 올인하고 있는 것은 ‘제대로 된 음악을 하는’ 메탈밴드를 키우는 것이다. 몇 년 전 SBS ‘스타킹’에서 ‘음악신동’을 발굴해 ‘스타킹아이돌밴드’라는 팀을 결성, 훈련을 맡겼는데 초등학생 아이들이 제법이었다. 아예 록밴드 전문 기획사인 ‘엠프엔터테인먼트’를 만들고 아이들을 맡았다. 팀명은 ‘메탈라템(metallatem)’. 그는 ‘메탈라템’에 대한 기대가 대단했다. 아니 흥분돼 있었다. “연예인이 아닌 뮤지션으로 키울 겁니다. 중학생 나이에 실력은 놀랍습니다. 보컬·기타·작곡 모두 됩니다. 세계적으로도 이런 아이들이 없어요. 국내에 록밴드가 설 무대가 많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국내에서 안되면 외국으로 나가야죠.”
   
   
   세월리에서 세월을 즐기며 사는 법
   
▲ 안지홍씨가 특수회로를 이용해 직접 만든 전자기타. 100여가지의 다양한 소리가 난다고 한다.
늦은 나이에 두 딸의 아빠가 된 그는 요즘 삶의 또 다른 재미에 빠졌다. 음악가 부부의 피가 어디로 가겠는가. 다섯 살 채윤이가 벌써부터 작곡을 한다고 자랑을 했다. 둘째 유주가 태어나고 어느 날 채윤이가 “노래를 만들었다”면서 부르더란다.
   
   “안아줘~ 안아줘~ 유주만 안아주지 말고 나도 안아줘~.”
   
   채윤이에게는 슬픈 노래였지만 그는 흐뭇해서 박수를 쳤다. 그의 교육관대로 창의력있는 아이로 커가는것 같아서다. 어떻게 키우느냐고? 마당에서 흙 만지며 뛰어놀고, 개들과 부대끼며 함께 사는 법을 배우고, 텃밭에서 자라는 무공해 야채를 먹으면서,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하게 하는 것. 사교육은 절대 사절. 학교를 안 가겠다고 하면? 그것도 ‘오케이’다! “아이만의 재능이 발견되면 굳이 주입식 교육에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작년에 부인에게 약속했던 온실을 선물했다. 근처에 사둔 2500㎡의 땅에 한편은 텃밭으로 놔두고 한쪽에 큰 유리온실을 만들었다. 요리를 좋아하는 부부가 필요한 허브도 키우고 빵·과자 등을 굽는 공간으로 사용할 생각이다. 텃밭에서 키운 온갖 채소는 식탁을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상추, 호박, 쑥갓, 가지, 더덕, 파프리카, 고추, 옥수수부터 이탈리아에서 씨앗을 가져온 방울토마토, 참외, 수박, 딸기까지 없는 것이 없다. 마트에서 사온 딸기는 입에도 안 대는 채윤이가 텃밭에서 난 딸기는 쓱쓱 닦아 잘 먹는다. 텃밭을 가꾸느라, 생전 흙이라고는 안 만지고 살아온 부부는 반 농사꾼이 됐다. 시골 생활이 처음인 김씨는 처음엔 벌레만 보면 벌벌 떨었지만 이젠 ‘새끼뱀만한 지렁이’를 봐도 끄떡 안 한단다.
   
   텃밭에서 나는 채소로 그는 요리도 잘한다. 유학 시절 이탈리아·그리스·아랍 등 외국인 친구들과 사귀며 익힌 요리 실력이 요즘엔 가족들을 즐겁게 해준다. 채윤이의 돌잔치 때는 집으로 손님들을 초대해 부부의 요리 실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테이블보까지 직접 만들어 정원 잔디밭에서 근사한 파티를 열었다. 그의 집을 가운데 두고 왼편엔 어머니 집이, 오른편엔 동생집이 있다. 덕분에 결혼식이나 돌잔치 때 세 집의 정원이 하나가 된다.
   
   “내 음악이 아니면 굶어죽어도 안 한다”는 대책 없는 가장은 “돈 못 벌면 땅이 알아서 먹고살게 해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긴 풍성한 텃밭이 있고, 아이들과 개들이 뛰어놀 수 있는 정원이 있다. 넓은 작업실에서 그가 작곡한 음악을 피아노와 첼로로 같이 연주해 줄 수 있는 부인이 있고, 그를 흥분시키는 제자들이 있으니 그는 누구보다 부자다. 부부에겐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하우스 콘서트’를 여는 것. 단풍이 곱게 물드는 날, 아니면 단지에 가득한 벚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날, 그의 집에서 열릴 작은 음악회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세계 돌며 봉산탈춤 알리기 30년 세 자매 흉보는 소리 들리지 않나요
헤이리 ‘세 자매 하우스’의 봉산탈춤 이수자 김성해

▲ 봉산탈춤 이수자 김성해씨와 부인 박종설씨의 세 자매가 살고 있는 경기도 파주시 헤이리 예술마을의 ‘세 자매 하우스’. 맨 안쪽에 있는 집이 김성해씨의 집이다.
‘땅콩집’ 바람이 뜨겁다. 땅콩집은 한 필지에 두 가구가 똑같은 집을 지어 비용도 절감하고 공간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부각되면서 새 주거문화로 떠오르고 있다.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도 땅콩집을 지어주는 ‘집드림’ 프로젝트가 진행될 만큼 최근 트렌드로 등장했지만 벌써 몇 년 전 땅콩집을 지어 살고 있는 세 자매가 있다.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예술가들의 마을인 헤이리 9문으로 들어가 골목으로 살짝 접어들면 똑같은 집 세 채가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보인다. 헤이리 사람들은 이곳을 ‘세 자매 하우스’라고 부른다. 어디서 본 듯하다? 지난해 SBS 드라마 ‘산부인과’에서 의사들 숙소로 등장했다. 세 집 중 맨 왼쪽에 중요무형문화재 제17호인 봉산탈춤 이수자 김성해(60)씨와 부인 박종설(58)씨가 살고 있다. 박종설씨의 여섯 자매 중 세 명이 ‘세 자매 하우스’의 주인공이다. 박씨는 그중 셋째이고, 첫째·둘째 언니가 땅콩집 속 땅콩들처럼 나란히 붙어 산다.
   
   
   헤이리의 ‘세 자매 하우스’
   
   문화재청 주최로 10여일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서 한국전통문화공연을 마치고 막 돌아온 김성해씨를 재촉해 약속을 잡고 헤이리의 ‘세 자매 하우스’를 찾았다. 지붕 쪽으로 비스듬한 모양의 육각형 박스 두 개가 대칭을 이룬 집 세 채가 죽 늘어서 있는 것이 한눈에도 독특해 보였다. 헤이리에 여러 번 갔지만 이런 집이 있는 줄은 몰랐다.
   
   집과 집 사이에 작은 정원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 주고 있었다. 세 자매는 이곳을 통해 바깥을 나가지 않고도 서로의 집을 오갈 수 있다. 이 공간은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완충지대이면서, 세 집을 연결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집안으로 들어가니 통유리창 밖으로 중정(中庭)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바깥에서는 보이지 않던 창이 중정을 비롯해 곳곳에서 자연을 불러들인다. 1층은 중정을 중심으로 한쪽엔 거실이, 다른 한쪽엔 방이 자리를 잡고 있다. 2층에는 한편으로 주방과 넓은 거실이, 다른 편엔 침실 두 곳과 화장실이 있다. 두 언니들의 집도 방향만 달리해서 같은 구조로 이뤄져 있다. 집안에 들어서면서부터 진한 꽃향기가 난다 했더니 중정에 심어진 ‘천사의 나팔(엔젤 트럼펫)’이 ‘범인’이었다. 오후부터 밤에만 핀다는 ‘천사의 나팔’ 향기가 2층 공간까지 가득했다.
   
   2층 거실에 옆으로 길게 난 창을 통해 헤이리의 풍경이 여유롭게 펼쳐졌다. 마주 보이는 앞마당 빨랫줄에 걸린 천 조각조차 이곳에서는 예술적으로 보였다. 김씨가 “앞집은 천연염색 공방을 하는 곳이고, 그 너머엔 서예를 하는 헤이리 예술마을 촌장이 살고 있다”고 말했다. 아파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공간 공간이 독특하게 구성돼 있지만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화장실이다. 화장실에 들어서 하늘을 올려다본 순간 감탄사가 나왔다. 천장이 유리였다. 밤에 변기에 앉아 있으면 별이 쏟아져 들어오고 달이 고개를 내밀 것이었다.
   
   
   집 뒤편 정원은 카페이자 세 자매 수다방
   

▲ (좌) 중정(中庭)에서 집 뒤편에 있는 정원으로 이어지는 곳. 가운데 둘째언니 집 쪽에 있는 넓은 데크는 세 자매의 접선 장소. 온 가족 바비큐 파티도 벌어진다.
(위) 화장실 천장 유리로 푸른 하늘이 들어온다.
(아래) 2층에 있는 주방 공간. 이 집에서는 어디서든 창을 통해 초록 자연이 들어온다.


   세 자매 하우스의 시작은 10여년 전. 헤이리 예술마을 이전 출판인들이 중심이 돼 ‘서화촌’이 계획될 때부터였다. 땅을 분양받아 ‘탈 전시장’을 하고 싶었지만 자신이 없어 망설이고 있던 차에 서화촌이 예술인 마을로 방향이 바뀌었다. 예술인만 자격이 주어지는 회원에 가입하고 여윳돈도 없이 덜컥 1650여㎡(약 500평)를 분양받았다. 김씨가 “당시엔 3.3㎡당 땅값이 80만원이 조금 넘었는데 지금은 200만원이 훌쩍 넘는다”고 말했다. 혼자서는 집을 지을 엄두가 안 나던 차에 부인 박씨가 언니들에게 “같이 집을 지으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해 선뜻 뜻이 모아졌다. 이렇게 헤이리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세 자매 하우스가 만들어졌다.
   
   50만여㎡(약 15만평)에 조성된 헤이리마을에 회원으로 가입한 예술인은 음악·미술·건축·작가 등 380여명. 현재까지 절반 가까운 회원들이 주거공간, 전시장, 카페를 짓고 살고 있다. 2000년 처음 건물을 짓기 시작할 때 ‘공동체’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30~40명의 건축가를 선정했다. 각각의 건물마다 독특한 디자인을 담되 ‘예술인 마을’이라는 취지에 어긋나지 않도록 설계 지침을 존중하도록 했다. 회원들은 선정된 건축가 중에서 원하는 사람을 선택해 설계를 맡겼다. 세 자매 하우스는 건축가 우경국씨(예공아트스페이스) 작품이다.
   
   세 자매 하우스의 보물 같은 공간은 집 뒤편에 숨어있는 정원. 중정을 통해 계단을 올라가면 세 집의 정원이 경계 없이 붙어있다. 정원은 나무가 울창한 작은 동산과도 붙어 있다. 가운데 둘째언니집 쪽에 있는 넓은 데크가 세 자매가 주로 접선하는 장소이다. 봄·가을 햇볕 좋은 날, 세 자매는 이곳에서 커피 마시고 수다 떨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가끔씩 박씨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여 바비큐 파티를 하기도 하고 윷놀이판이 벌어지기도 한다. 김씨는 “처갓집 온 가족이 모이는 날은 장인어른 호주머니가 열리는 날”이라고 말했다. “가족들이 모두 모여서 놀기를 좋아해요. 특히 장인어른이 한 달이 멀다하고 가족들을 소집해 7형제 대항 윷놀이를 시켜요. 1등부터 7등까지 두둑한 상금 봉투도 마련해 놓고 1박2일 대가족 MT가 벌어집니다.”
   
   둘째언니네 정원에는 미술을 전공한 박씨의 형부(최충식 전 대구대 교수)가 수집해 놓은 ‘똥장군’이 줄지어 있었다. 김씨는 “같은 예술인이어서 말도 잘 통하고 헤이리에 있는 산책로를 따라 운동도 함께 다녔는데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면서 아쉬워했다.
   
   
   연극판 선후배서 부부로
   
   두 언니네 정원과는 달리 김씨의 정원은 최근 손길이 많이 닿지 않은 듯했다. 찾아간 날 부인은 집에 없었다. 김씨가 머뭇거리면서 말했다. “탈춤해서 먹고살 수 없잖아요. 아내가 헤이리 근처에서 식당을 합니다. 식당에 매달려 있으니 다른 시간을 낼 수가 없어요. 저도 빨리 도와주러 가야 합니다.”
   
   김씨 부부는 서울연극학교(현 서울예대) 선후배 간이다. 외아들 김형기(30)씨도 서울예대 출신으로 서울예술단에서 뮤지컬 배우로 활약하고 있다. 온 가족이 서울예대 동문인 셈이다. 김씨의 출발은 연극이었다. “원로 연출가 오태석의 ‘태’ ‘초분’ 등 대작에도 출연했어요. 그때 함께 배곯으며 연극판을 뒹굴었던 이들 중에 이호재, 전무송, 김동현이 지금도 활동하고 있죠. 결혼하면서 연극으로는 생활을 할 수 없으니 국립국악원 무용단에 들어갔어요. 월급쟁이 생활이라고는 그때 5년이 전부예요. 그 뒤론 돈을 벌어본 적이 없으니 아내에게 미안하죠.”
   
   탈춤을 배운 것은 서울연극학교 시절이었다. 이사장이었던 유치진 선생이 “연극을 하기 위해 몸을 풀어주는 데 탈춤만큼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면서 커리큘럼에 탈춤을 포함시켰다.
   
   연극판에서 만난 부부는 결혼을 하면서 연극에서 멀어졌다. “가장 노릇 하겠다”면서 연극을 그만둔 김씨가 점점 봉산탈춤에 빠지는 동안, 남편만 믿고 앉아 있을 수 없었던 박씨는 팔을 걷어붙이고 생활전선에 나섰다.
   
   김씨는 1982년 봉산탈춤 이수자가 됐다. 이수자가 되려면 일반회원 자격으로 예능보유자에게 3~4년간 교육을 받은 후 전수자가 된다. 다시 전수자가 된 후 최소 5년이 지나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의 평가를 통과하면 이수자가 되는 것이다. 현재 봉산탈춤 이수자는 30여명. 그중 6명은 전수조교로 예능보유자를 대신해 전수자 교육을 시킬 수 있다. 전수조교를 제외하고 이수자 중에서는 김씨가 가장 고참이다.
   
   봉산탈춤은 황해도에서 추던 탈춤의 하나로 춤사위가 크고 활달하다. 춤이 주가 되고 파계승, 몰락한 양반, 하인, 무당 등이 등장해 재담과 노래를 부르는 가면극 형태이다. 익살과 해학을 통해 현실을 폭로하고 권선징악을 보여주기 때문에 누구나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공연이다. 때문에 해외 공연을 가면 외국인에게도 봉산탈춤은 인기다.
   
   
   봉산탈춤은 ‘K팝’보다 한류 선배
   

▲ 집 뒤편에 있는 정원으로 세 집의 정원이 하나로 연결돼 있다 세 자매 하우스의 보물공간이다.


   김씨는 전수자가 되고부터 거의 매년 해외공연을 다녔다. 1978년 유럽 5개국, 1979년 홍콩·대만, 1980년 유럽 6개국 등 셀 수도 없이 공연을 다녔다. 한번에 버스로 2만5000㎞를 이동한 적도 있다. 마을 사람이 딱 200명뿐인 스페인의 시골까지 다니면서 한국의 전통춤을 알렸다. 말은 안 통해도 파계승이 음주가무를 즐기며 춤 자랑을 하면 같이 어깨를 들썩이고, 노장스님을 꾀어내기 위해 요염한 춤을 추면 박장대소를 했다. 30년 전 보수는 ‘하루 1달러’. 맥주 한 병, 담배 한 갑밖에 살 수 없는 돈이었지만 외국인들의 박수에 신이 났다. “세계 민속극협의회 초청으로 세계 민속춤이 모여서 공연을 하면 외국인들이 모두 우리 춤에 반합니다. 유럽 민속춤은 음악에 맞춰 춤만 추지만 봉산탈춤은 스토리와 대사가 있고 해학이 있잖아요. 관객들을 생각하게 하는 춤이죠. 말이 안 통해도 몸짓으로 알 수 있어요. 이런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외국인들이 깜짝 놀랍니다.”
   
   그러고 보면 K팝보다 앞서 한류를 일으키며 세계를 누비고 다닌 것이다. 내년 3월에도 파리 초청 공연이 있다. 김씨가 아쉬운 것은 봉산탈춤 예능보유자가 김애선씨 단 한 명밖에 없다는 것이다. 22년째 문화재청의 예능보유자 지정이 없었다. 김씨도 30년째 이수자로 머물러 있다.
   
   30여년 한바탕 춤판에 흠씬 빠져 세계를 누비고 다니는 동안 부인의 몸 고생, 마음고생은 굳이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얼마 전에도 부인의 바쁜 사정은 제쳐두고 해외공연을 다녀온 것 때문에 김씨는 부인 눈치를 보기에 바쁜 듯했다. 인터뷰를 하면서도 식당에 손님이 몰려올 시간이 되자 김씨는 연방 시계를 들여다봤다. 마음이 바쁜 중에도 취재진을 배웅하고 서 있는 김씨에게 “어서 가보시라”고 인사를 건넸다. “미안하다”며 돌아서서 부리나케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자니 ‘밥’이 해결되지 않는 ‘예인(藝人)의 현실’이 안타까웠다.

 

바람의 땅에서 마음 비우고 토우들의 천국 일구다
제주도 ‘외딴집’의 강태길·김숙자

제주 공항에 내려 자동차로 40여분, 제주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2리가 나왔다. 사람 구경하기 힘들 만큼 한적한 마을을 비껴 비포장 도로를 따라 들어가다 만난 집. 무릎 높이의 낮은 돌담만이 겸손하게 경계를 알리고 있을 뿐 대문도 따로 없고 시선을 막아서는 것도 없다. 이 집의 번지수는 ‘외딴집’. 우편배달부·택배기사들에게 이 집의 주소는 번지수 필요 없이 ‘성읍2리 외딴집’으로 통한다.
   
   이곳에 사진작가 강태길(60)과 토우를 빚는 조각가 김숙자(60) 부부가 살고 있다. 제법 높은 삼각형의 개오름을 배경으로 1만㎡(3030평)의 넓은 땅에 소박한 집 두 채가 자리 잡고 있다.
   
   한 채는 살림집이고 한 채는 김숙자씨의 작업장이다. 나머지 공간은 바람과 햇살, 달빛의 놀이터이다. 그들이 키운 나무들과 크고 작은 바위들로 가꿔진 정원은 작은 공원 규모다. 이 놀이터에는 이름 모를 새들부터 꿩, 까치, 까마귀가 날아들고 배고픈 노루도 텃밭을 뒤지다 가곤 한다. 나무 종류도 다양하다. 입구에서부터 보기 좋게 줄지어 선 열 그루의 감나무를 비롯해서 팽나무, 비자나무, 단팔수(제주도 자생나무), 계피나무, 자귀나무, 후박나무, 소나무가 적당한 간격을 두고 뿌리를 내리고 있다. 땅이 넓어서인지 집도 나무도 낮은 시선에 걸린다. 이 집의 어느 것 하나 위압감을 주는 것 없이 편안하다. 수직으로 뻗은 도시 풍경에 지친 눈의 피로가 한순간에 풀린다.
   
   
   일기 쓰듯 빚어낸 토우들
   

   입구에서 방문객을 맞는 수국 행렬, 올망졸망 현무암 돌을 따라 만들어놓은 자갈길, 오름처럼 꾸며놓은 뒷마당의 작은 동산, 신록보다 더 여린 연둣빛의 잔디, 흰 수선화 길, 침대보다 편안해 보이는 널찍한 바위…. 정원 곳곳에 보물 같은 공간들이 감탄을 자아내지만 정작 이 집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따로 있다. ‘외딴집’의 진짜 주인인 토우들이다. 김씨의 손을 빌려 태어난 토우들이 1만㎡의 땅에 한 자리씩을 차지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한 무리의 토우들이 모여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나뭇가지에 걸터앉아 있고, 집 옥상 난간에서 다리 꼬고 앉아 내려다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두 팔 괴고 바위 위에 누워 있는가 하면 두 무릎에 고개를 묻고 졸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모를 여자도 있다. 눈, 코, 입, 뚜렷한 윤곽이 없이 둥글둥글한 토우들은 닮았으면서도 모두 다른 얼굴이다. 들여다보니 표정도 제각각이다. 술 한잔 걸치고 히죽 웃는 얼굴, 뾰로통하게 입을 내밀고 있는 얼굴, 눈꼬리 치켜뜨고 화내는 얼굴…. 김씨는 이들을 “일기 쓰듯이 만들었다”고 말했다. 부부의 삶을 빚어 만든 토우들은 그래서 ‘강태길’이고 ‘김숙자’이고 또 누군가이기도 하다. 김씨가 말했다. “사람들이 와서 작품들 속에서 자기 모습들을 찾아내요. 신기하죠? 슬픈 사람은 슬프게, 행복한 사람들은 행복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부부는 제주도 토박이가 아니다. 강씨가 이곳에 내려온 것은 25년 전이고, 김씨는 이제 10년이 됐다. 중앙대 사진학과 출신인 강씨는 ‘딱 3년만!’이라는 생각으로 제주에 내려왔다가 이곳의 오름과 바람에 사로잡혀 눌러앉았다. 김씨는 서울대 조소과와 홍익대 대학원을 나와 경기도 파주 근처 작업실에서 ‘내 맘대로’ 살다가 느닷없이 나이 오십에 결혼과 함께 제주의 삶을 시작했다.
   
   부부는 뒤늦게 만나 결혼 10년이 됐다. 이 집은 강씨가 20년 전에 지었다. 집은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모양이지만 외벽에 큼직큼직한 현무암이 붙어 있어 제주도에서만 볼 수 있는 집이 됐다. 강씨는 “모양도 제각각, 크기도 제각각인 자연석을 붙이려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보통 까다로운 일이 아니라서 요즘엔 쉽게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말했다. 거실을 가운데 두고 앞뒤쪽으로 난 창이 바람의 길을 터주고 있다. 살림살이는 김씨의 작품처럼 군더더기 없이 단출했다. 창이 넓은 탓에 겨울엔 추울 법도 하건만 난방은 거실 한편에 있는 페치카 하나면 충분하다고 했다. 손님이 올 때만 ‘접대용 보일러’를 틀어주는데, 도시 사람들은 그래도 춥다고 한단다. 온전히 제주의 사람으로 제주의 기후에 적응한 부부는 이곳에서 채워가기보다 끊임없이 비워가는 삶을 살고 있었다.
   
   
   20년 세월로 가꾼 땅
   
▲ (좌) 1만㎡ 정원을 차지하고 있는 김숙자씨의 토우들. (중) 집 뒤편 계곡과 경계를 지은 담장. 김숙자씨의 부조 작품이 장식돼 있다. (우) 나무 밑에 쭈그리고 앉은 토우. 김숙자씨의 토우들은 둥글둥글 윤곽은 뚜렷하지 않지만 표정들이 제각각이다.

   “살다 보니 실제로 필요한 것이 많지 않아요. 젊었을 때 아등바등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도 이제 와서 보면 별것 아니에요. 나이가 들어서 변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생각을 앞당겨 준 것이 여기 생활인 것 같아요. 도시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 있지만 여기서는 생각과 똑같이 살 수 있어요.” 김씨가 이렇게 말하기까지는 결코 만만치 않은 결혼생활이 있었다.
   
   강씨는 20여년 넘게 제주도 풍경을 담는 전업 사진작가로 살아왔다. 그의 사진은 제주도의 풍경을 가장 정직하게 담은, 가장 제주도다운 사진으로 평가받는다. 제주에 홀려, 사진에 미쳐 살다 지난 2005년 루게릭병으로 떠난 김영갑과 함께 대표적인 제주의 사진작가로 손꼽힌다. 그렇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사진작가가 작품을 팔아서 먹고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강씨의 생활이 어땠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강씨는 “그냥 어떻게 살아지더라고요.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사느냐고 궁금해 하지만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워요. 없으면 없는 대로, 또 필요하면 어디선가 생기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제주 생활 내내 월급 한번 받은 적 없는 강씨와의 결혼은 속된 잣대로 분명 김씨에게 ‘손해 보는 장사’임에 틀림없었다. 김씨를 낯선 제주의 땅으로 이끈 것은 무엇이었을까. “대학원에 제주도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강 선생의 친구였어요. 제주도 놀러가면 같이 놀고 그랬지. 어떻게 결혼하게 됐냐고? 그냥 인연이죠. 땅이 불렀는지 이 집이 불렀는지. 물이 흐르는 것처럼 여기서 살아야 할 운명이었는지 어느 날 보니 여기 와 있었어요.”
   
   
   3년만 견뎌봐!
   
▲ 흰 수선화 길을 따라 들어가는 김숙자씨의 작업장. 건물 뒤에 강태길씨가 좋아하는 ‘비밀의 정원’이 있다.

   ‘자발적 고립’. 김씨의 표현대로 ‘외딴집’에 스스로 고립된 채 처음 3년은 고통이었다. 누가 옭아맨 것도 아닌데 올가미에 걸린 것 같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김영갑 선생이 위로를 해주곤 했다. “3년만 견뎌봐!” 그의 말처럼 3년이 지나자 비로소 남편도, 제주의 바람도, 변덕스러운 날씨도 적응이 됐다.
   
   옆에서 그 시간을 지켜봐야 했던 강씨는 어땠을까. “3년은 돼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냥 기다렸지. 똑같은 계절을 세 번은 나봐야 여기에 적응해요. 제주의 바람은 겪어보지 않으면 몰라요. 바람의 추위가 차원이 달라. 이젠 그 바람이 안 불면 기다려져요.”
   
   남자처럼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김씨가 말했다. “제주에서 긴 머리로 나가 봐요. 바람에 난리가 나지. 이렇게 짧은 머리를 할 수밖에 없어요.”
   
   3년의 적응기간이 지나고 제주는 김씨의 많은 것을 변화시켰다. 바느질하고 앉아 있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김씨가 이제는 천연염색을 한 천으로 옷을 척척 만들어 입는다. “몇 천원어치 천만 뜨면 옷 한 벌이 나오잖아요. 이젠 돈 주고 옷 못 사 입겠어요. 도시에서는 길에 버리는 시간도 많고 사람 만날 일도 많지만 여기선 시간이 훨씬 많아요. 시간의 95%가 자기 시간이야. 혼자 놀 수 있는 일이 필요해요. 그래서 꼼지락꼼지락 옷도 만들고 그러는 거지.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런 것은 없어요. 예술가들은 원래 혼자 잘 놀아. 설계가 그렇게 돼 있는 사람들 같아요.”
   
   생활이 단순해지고 제주의 삶에 익숙해지면서 김씨의 토우들도 변했다. 강씨는 부인의 작품에 대해 “과거 작품에 있던 디테일한 표현들이 사라지고 선들이 점점 단순해졌다”고 말했다.
   
   김씨의 작품은 단순해서 편안하다. 보는 사람에게 굳이 ‘느낌’을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대로 ‘위로’를 받기도 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듯하다. 김씨의 토우 작품은 고 김영갑의 혼이 담긴 갤러리 ‘두모악’(관장 박훈일)의 마당을 지키고 있기도 하다. 그 작품을 보고 ‘외딴집’까지 찾아오는 이들도 있다. 김씨의 토우들은 부부의 생활을 책임지고 있다. 김씨의 작품을 좋아하는 이들은 “왜 적극적으로 나서서 팔지 않느냐”고 답답해 하지만 김씨는 “딱 이만큼이 좋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생활비가 도시의 몇 분의 일도 들지 않아요. 밥 굶지 않고 사는데 더 이상은 욕심이죠. 김치 먹고 살아도 내가 좋으면 그만이잖아. 고기 반찬? 난 부럽지 않아. 경제적인 것이 두렵다면 못 살겠지. 처음엔 그런 것 때문에 힘들기도 했고 싸우기도 했지만 사람 사는 것이 묘해. 생각지도 않은 인연들이 이어지면서 필요하면 연결이 되더라고요.”
   
   부부의 수입이 빤한데 1만㎡의 집은 어떻게 일궜을까? 강씨가 이 땅을 산 것은 25년 전. 당시 3.3㎡당 3000원이었으니 땅값은 고작 900만원이 들었다. 그나마 강씨를 자식처럼 생각하는 고모가 후원자가 돼주었다. 강씨의 손으로 10년, 김씨가 합류해 10년, 20년의 시간이 쌓여 밭투성이였던 땅은 토우의 천국이 됐다. 물론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부부의 손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시간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돌담만 해도 4년에 걸쳐 쌓다 보니 해마다 노하우가 쌓이면서 단계별로 모양도 높이도 제각각이란다.
   
   
   금주 선언! “마실 만큼 마셨어”
   
▲ 제주도 현무암을 외벽에 붙인 소박한 집. ‘외딴집’이라는 문패가 붙어 있다.

   생활은 애써 모른 척하고 배짱 하나로 버텨온 강씨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을 터였다. 그럴 때마다 강씨는 술을 도피처로 삼았다. 3박4일은 보통, 앉은 자리에서 8박9일을 술로 보내기도 했다. 달빛을 친구 삼아 정원에 놓인 바위, 돌의자들을 순례하며 1차, 2차, 3차… 차수를 늘려가곤 했다.
   
   그런 강씨를 봐야 했던 김씨는 오죽했을까. 힘들 때마다 이곳저곳 걸어다니며 마음을 다스렸다. “결혼은 수련 과정이야. 여기 안 왔으면 몰랐을 것을 얻어 맞으면서 알게 되고 얻게 된 거지. ‘인생에서 꼭 거쳐야 할 훈련과정이 필요해서 여기서 살게 됐구나’ 생각하니까 결국 감사하게 되고, 감사하니까 받아들여지게 됐어요. 그렇게 마음이 풀리니 현실적인 문제들도 풀리더라고요. 그래서 알았죠. 현실이 안 풀렸던 것은 마음 때문이었구나.”
   
   술에 분풀이를 하고 살던 강씨는 또 다른 도피처를 찾으려고 숲으로 들어갔다. “숲 사진을 찍으면서 숲에서 조금씩 치유를 받았어요. 찍어야 되겠다는 의무감이 아니라 숲과 놀면서 즐기게 됐어요. 그러면서 마음도 많이 편해졌죠.”
   
   올 봄 강씨는 ‘금주’를 선언했다. “마실 만큼 마셨고 술 먹고 힘든 것도 싫어서 끊었는데 술 생각도 안 나고 별것도 아니야.” 김씨의 반응도 담담했다. “안 마시면 고맙지. 그만 마실 때도 됐지 뭐.” 김씨가 ‘화려한 과거’를 고백하는 남편을 보면서 말했다. “인터뷰를 해도 술 마신 이야기는 절대 안 하더니 오늘 웬일인지 모르겠네.” 그만큼 강씨의 마음이 편해졌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2015년 제주 정착 30주년이 되는 해 ‘오름-돌-숲-바다’ 전시를 하고 싶다”는 강씨와 “행복을 좇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이젠 걸어가다 바람만 훅 불어와도 행복하다”는 김씨. 부부의 얼굴은 무심한 듯 편안해 보였다. 김씨의 손으로 만든 천연염색 옷을 입고 나란히 서서 배웅을 하는 부부가 그대로 풍경 속으로 들어갔다.
   
▲ 강태길·김숙자 부부의 손으로 일일이 가꾼 1만㎡의 땅. 사진 구도에 훈련된 강태길씨의 조경 감각이 평범하지 않다.
▲ 정원 곳곳에 놓인 크고 작은 바윗돌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의자가 돼준다.

내가 바로 집인데 몸만 누이면 천지가 다 내 집이지!
방랑식객 임지호

▲ 두 번째 개인전을 준비 중인 ‘방랑식객’ 임지호의 경기도 양평 작업실.
자연요리 연구가 임지호(55). 그의 이름 앞에는 ‘방랑식객’이라는 별칭이 따라붙는다.
   
   그가 만드는 요리의 재료는 자연이다. 우리 땅, 우리 바다에서 바람과 햇볕이 키워준 모든 생명이 그의 손에 가면 식재료가 된다. 잡초를 뽑아 짜장면을 만들고, 갯벌을 우려낸 물로 나물 소스를 만든다. 들판에 핀 버들강아지는 찹쌀 반죽·곶감과 만나 감떡으로 변신한다. 나물요리로 먹을 줄만 알았던 두릅·고사리로 양갱을 만들기도 한다. 아파트 뒷산의 이름모를 풀들은 인공 감미료와 인스턴트 식품으로 병든 몸에 치유의 음식이 된다. 화살나무 잎, 어름덩굴, 다래순, 나락나물, 명아주, 방풍나물, 방석나물, 으아리꽃…. 사람들에게는 쓸모없는 잡초에 불과하지만 그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식재료들이다. 그는 자연이 바로 ‘보약’이라고 믿는다.
   
   음식을 담는 것도 형식을 따지지 않는다. 그릇이 없으면 자연에서 취한다. 마당에 뒹구는 기왓장에, 넓적한 돌에 들꽃 하나 얹으면 더없이 멋있는 접시다. 그마저도 없으면 쓰던 도마에 나뭇잎 깔면 그만이다. 독 뚜껑을 깨서 접시로 썼다가 ‘독 깨는 요리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요리가 완성돼도 맛은 절대 보지 않는다. “한번 맛을 보면 그 맛에 얽매이게 된다. 또 남을 대접하기 위해 만든 음식을 내가 먼저 먹을 수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이유이다.
   
   요리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다. 그는 이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배웠다. 경북 안동이 고향인 그는 12살에 가출했다. 이유는 “세상이 너무 궁금해서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는 것이다. 전국 식당의 주방을 떠돌았다. 요리를 배우려고? 아니다. “그 나이에 먹고 자는 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유일했기 때문이다. 요리와 인연을 맺은 후에는 자연의 재료를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 요리 스승은 자연이었다. 그의 파란만장 방랑기는 이미 유명하다. KBS 인간극장과 SBS 스페셜 다큐멘터리를 통해 소개됐다. 외국에서도 일찍부터 그를 알아봤다. 2006년 유엔에서 열린 제3회 한국음식페스티벌에 수석요리사로 초대됐고, 그해 미국의 대표적인 음식 전문 잡지인 ‘푸드아트’의 표지모델이 되기도 했다.
   
   그가 ‘자연요리 연구가’ ‘방랑식객’ 말고 또 하나의 수식어를 붙였다. ‘화가’ 임지호다. 요리만으로도 할 일이 차고 넘칠 텐데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리갤러리’에서 11월에 개인전을 연다. 처음도 아니고 두 번째다.
   
   “별짓 다 하는 거죠.”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전화를 하면서 전시회 소식을 묻자 그가 대답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지난 10월 15일, 그의 집이 있는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운심리를 찾았다. 시간 약속을 잡기 위한 두 번째 전화통화에서 그는 “내일 오전, 가능한 빨리 오라”고 말했다. 하기 싫은 숙제 빨리 해치우고 말자는 심사가 엿보였다. 휴일 아침 일찍 피곤한 몸을 움직였다. 차가 막힐까 염려했지만 서두른 덕분에 속도를 늦출 일은 없었다. 남한강을 끼고 달리는 도로 옆으로 가을이 깊어가고 있었다. 휴일을 반납한 보상이었다.
   
   
   마명산이 바로 뒷마당
   
▲ 남한강이 내다보이는 다락방. 방 한가운데 불상이 모셔져 있다.

   그는 만나자마자 “밥 먹었느냐”는 인사부터 했다. 도로 옆에서 살짝 들어섰는데도 집은 완전히 자연 속에 묻혀 있었다. 집 뒷마당은 산이다. 그가 “마명산”이라고 말했다. 집과 마명산 사이에는 담장도 울타리도 없다. 줄지어 선 밤나무가 그의 집 쪽으로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고 산에서 내려오는 작은 계곡이 마당 한편으로 지나간다. 지붕 위에 저절로 입을 벌린 밤송이들이 떨어져 쌓여 있다. 산에서 내려온 낙엽들은 감당 못할 지경이다. 낙엽을 태우느라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는 마명산에 올라 눈에 띄는 식재료들을 가끔 거둬 온단다. 취, 더덕, 버섯 같은 것들이다. 전국의 깊은 산을 제집처럼 다니는 그에게 마명산은 뒷마당 같을 것이다.
   
   이곳에 들어온 것은 1998년이다. 그가 ‘우리 식구’라고 부르는 동갑내기 부인 강정애씨의 안목이었다. 설계며 인테리어며 강씨의 진두지휘로 빌린 땅에 건물을 올렸다. 떠도는 그를 보다 못한 지인들의 도움이 컸다. 1층은 그의 이름을 건 식당을 만들었다. 식당 입구에 ‘음식은 종합예술이고 약이며 과학입니다’라는 팻말이 걸려 있다. 나무와 광목천만을 사용해 인테리어를 한 식당 내부는 정갈해 보였다. 뒷마당 쪽으로 난 창 밖으로 낙엽이 수북이 쌓여 있다. 창이 아니라 그림인 줄 알았다. 식당 내부에 진짜 그림이 걸려 있다. 그의 작품이다. “이 그림은 돈이 모이라는 뜻으로 그린 것, 저건 직원들과 손님들 간 싸우지 말라고 그린 것.” 그가 친절하게 그림 설명을 했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지자 몰려든 손님들이 그를 보고 알은체를 했다.
   
   반질반질 윤이 난 나무 계단을 올랐다. 2층에 올라가니 전망이 훨씬 좋다. 뒷산이 손에 잡힌다. 2층의 절반은 손님들을 위한 공간으로, 나머지가 부부의 거처다. 전체 대지는 6600㎡(2000여평). 마당은 산책로까지 꾸며놓을 정도로 충분히 넓다. 2층은 자신들의 공간으로 욕심을 낼 만도 하건만 부부는 욕심이 없어 보였다.
   
   “우리 식구가 싫어하는데….”
   
▲ 부부의 집은 건물 2층에 최소한의 공간만을 사용하고있다. 이곳에서 건너뛰어 갈 수 있을 만큼 뒷산이 가까이 있다.

   집 내부를 보여달라는 요청에 그가 마지못해 문을 열며 말했다. 세상 겁날 것 없어 보이는 그도 ‘우리 식구’는 무서운 모양이다. 집안은 생각보다 좁고 간소했다. 현관과 붙은 작은 거실을 제외하고 나머지 공간을 서가로 분리해 서재와 침실로 쓰고 있다. 그가 손짓하더니 좁은 나선형 계단을 올랐다. 다락방 같은 복층이 나타났다. 하얀 광목천으로 된 블라인드를 올리자 시야가 확 트였다. 넓은 창으로 항아리들이 즐비한 앞마당과 함께 가을 하늘이 높게 걸려 있다. 오른쪽 창으로 아래층에서는 나무에 가려 보이지 않던 남한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그때까진 강이 지척인 줄 몰랐다. 아래층의 번잡함은 전혀 올라오지 않는다. 바깥 구경에 눈 돌리느라 보이지 않던 불상이 방 한가운데 모셔져 있다. 불상 앞에 커다란 방석이 놓여 있다. 강씨가 매일 기도를 올리는 곳이라고 했다. 눈 돌리는 곳마다 석상이며 부처가 놓여 있어 짐작은 했지만 불심이 보통 깊은 게 아닌 듯했다. 책 이외에는 별다른 가구 없이 단출하다. 마치 수행자들의 공간 같다. 부인과 인연의 시작이 궁금했다. “스님이 되려고 하던 사람을 데려왔어. 지혜롭고 자기 중심이 확실해. 존경스러워.”
   
   
   “하룻밤에 그림 200점도 그렸어”
   
▲ 뒤에는 마명산이, 옆으로는 남한강이 보인다. 건물 주변은 들꽃 천지다.

   그는 대답이 짧았다. 내키지 않은 질문엔 ‘못들은 척’ 딴청을 피우다 그림이나 요리 이야기에선 말 끊기가 어려웠다. 그는 스스로를 “수행자”라고 했다. 요리도 그림도 수행의 한 가지라고 했다. ‘수행자’가 보기에는 세상에 연연한 호기심이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겠다. 집 또한 그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듯했다. 그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내가 바로 집인데 몸 누이면 그곳이 집이지.”
   
   바람 같은 그에게 집은 잠시 머물다 가는 생에서, 잠시 거쳐가는 곳일 뿐이다. 전국의 산으로 강으로 돌아다닐 때는 날이 저물면 동굴이든 길이든 몸을 누이면 그만이었다. 간첩으로 신고된 적도 여러 번이고, 마을 사람들에게 쫓겨난 적도 적지 않다.
   
   이곳 다락방에서 그림을 그리다 작품이 쌓여가자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우리 식구’가 3년 전 근처에 따로 작업실을 마련해줬다. 그의 차를 타고 집에서 300m 정도 떨어진 작업실로 갔다. 등산화를 신고 있는데도 차에는 여분의 등산화가 뒹굴고 있었다. 언제든 길을 떠날 준비가 돼 있는 것이다. 작업실은 큰 조립식 건물을 빌려서 쓰고 있었다. ‘요리만으로도 바쁜데 얼마나 그렸겠나’ 싶던 생각은 잘못이었다. 작업실은 작품들로 꽉 차 있었다. 500호에 이르는 대작도 여러 점이다. 20호 크기의 작품들이 바닥에 지그재그로 놓여 있다. 서로 물감이 묻지 않게 하기 위해서란다. 선반이며 작업대 위에 있는 드로잉 작품은 셀 수가 없다. 그가 “5000점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것이 4~5년 전이니 놀랄 만한 작업량이다. 낮에는 시간이 없으니 작업은 주로 밤에 이뤄진다. “하룻밤에 드로잉 200점도 그렸어. 미친 거지. 손목 인대가 늘어나서 혼났어. 새벽 1시에 보디페인팅 한다고 옷 벗고 물감 위에 뒹군 적도 있는데 물감이 아주 독해. 보디페인팅은 다신 안 할 거야.”
   
   평면 추상회화, 캔버스 위에 오브제를 붙인 입체 작품, 음식 그림 등 작품의 종류가 다양했다. 그는 앞으로도 하고 싶은 작업이 많다고 했다. 요리가 그렇듯이 그림도 물론 배운 적이 없다. 음식 연구를 하면서 스케치를 한 것이 전부다.
   
   
   또 다른 길을 찾아 떠난다
   
▲ 식당 손님들이 차를 마시고 휴식을 취할 수 있게 2층에 내준 서비스 공간.

   형식에 매이지 않은 그림들은 그의 요리처럼 자유로워 보였다. 시각·소리·향기·전설·맛, 그가 꼽은 요리의 다섯 가지 요소다. 요리의 심상을 캔버스에 풀어낸 것이 그림이다. 그에겐 요리도 그림도 하나인 것이다. 그가 “음식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그림은 영혼의 쉼터”라고 말했다.
   
   한번 붓을 잡으면 끝을 보니, 그의 영혼을 위해 그의 몸은 어지간히 고달플 것이다. 그의 방랑벽의 시작은 아주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여덟 살 무렵부터 허구한 날 강가에 앉아 하염없이 강을 보고 있거나, 산으로 나무하러 돌아다녔다. 아버지는 ‘약방집’ 주인이었다. 대대로 한의를 공부한 집안이었다. 아버지는 유난스러운 아들의 손을 잡고 들과 산을 다녔다. 풀 이름을 가르쳐주고 약성을 설명해줬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들었던 이야기들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다. 식재료의 성질이나 효능에 대해서라면 그는 걸어다니는 사전이다.
   
   부전자전. 아버지에게서 그에게로, 다시 그에게서 두 아들에게로. 큰아들에 이어 둘째아들까지 요리를 하겠다고 나섰다.
   
   “서양요리지 뭐. 하고 싶은 대로 실컷 하라고 놔둬야지. 나한테 돌아오게 될 거야.”
   
   50년 가까이 그는 늘 ‘길 아닌 길’을 좇았다. 최근 그는 다시 길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늘 그랬듯이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길이 될 것이다. 첫 번째는 양평을 떠나는 것이다. 전국을 돌면서 그가 마음에 둔 곳이 있었다. 강원도 화천이다. 그곳으로 힐링센터와 이곳의 식당 ‘산당’을 옮길 생각이다. 힐링센터는 사람들을 위한 치유와 명상의 공간으로 완공이 머지않았다. 이르면 내년이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두 번째는 한식을 들고 세계로 나가는 것이다.
   
   “싱가포르 호텔 기업이 투자해서 싱가포르 7성급 호텔에 한식 레스토랑을 오픈해. 영국에 있는 호텔에도 추진 중이고. 전 세계로 나갈 거야.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할수는 없잖아. 일단 해봐야지.”
   
   선문답 같았던 인터뷰를 끝냈다. 그가 자신의 두 번째 책 ‘방랑식객-생명 한 그릇 자연 한 접시’를 가져와 저자 사인과 함께 그림을 그려줬다. 수십 년 남을 위해 요리를 해온 손은 거칠었다.
   
   “손이 주인 잘못 만나 고생입니다.”
   
   “육신은 일회용이야, 한 생 쓰고 가는 거지 뭐.”

 

“제대로 예술 하려면 거지로 살 각오해야죠”
강화도의 설치미술작가 차기율

▲ 설치미술작가 차기율은 오래되고 버려진 것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작업을 주로 한다. 작업실 곳곳에 그의 작품에 많이 사용되는 돌멩이들이 진열돼 있다.
“예술의 본령이 뭐라고 생각합니까? 그림을 파는 것입니까? 미술이 정신의 산물일까요, 시각적 산물일까요? 시각적 산물이라면 장식미술가와 다른 것이 뭡니까?”
   
   “학연의 폐해가 가장 심한 곳이 미술계입니다. 한국 미술계는 특정대학 출신이 아니면 발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일류를 따지면서 사실은 삼류인 거죠. 진짜 일류는 여유 있고 너그러워요. 컬렉터들도 작가들 학벌 따져서 그림을 삽니다. 웃기는 거죠.”
   
   “우리 미술계는 비평이 죽었어요. ‘너도 좋고 나도 좋고 행복하게 살아라’. 이런 주례사만 읊어대지 제대로 된 비평이 없어요. 비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건강하지 않다는 겁니다. 무책임해요.”
   
   이 남자, 거침이 없다. 미술계를 향한 비판의 날이 매섭다. 후한이 두렵지 않을까.
   
   “난 할 말 다 해요. 학연으로 연결된 것도 아니고, 기득권층에 붙어서 내 작품 팔아먹을 생각도 없어요. 냄새나고 가짜들 모이는 곳엔 가질 않으니 눈치 볼 필요도 없는 거죠.”
   
   예술의 본성을 잃어버린 시대, 구차하게 ‘성공한 예술가’로 사느니 당당하게 ‘변방의 예술가’로 살겠다는 이 남자는 설치미술작가 차기율(50)이다. 2010부산비엔날레 대표작가에다 대표적인 설치미술작가로 꼽히지만, 설치미술과 대중과의 거리만큼이나 미술동네를 벗어나서는 낯선 이름이다.
   
   
   “굶어죽기야 하겠어요?”
   
▲ 한겨울에도 난방이 안돼 전기장판 하나로 버티는 차기율의 집. 이곳에서는 주로 드로잉과 유화작업을 하고 있다.

   인천시 강화군 양도면, 차가 비켜갈 수 없을 만큼 좁은 길을 따라 마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간 곳에 차기율의 집이 있었다. 울타리도 없이 밭과 폐가 사이에 자리 잡은 집은 초라했다. 그동안 취재를 위해 다녔던 널찍하고 잘 가꿔진 ‘예술가의 집’과는 전혀 달랐다. 잠깐, 당황스러웠다. 지면에 실을 ‘사진’ 걱정도 들었다. 진입로의 잡초며 나무들은 사람 손을 많이 타지 않은 듯했다. 그 안에서 걸어 나온 차기율은 야성(野性)의 냄새가 물씬 풍겼다.
   
   현관문이랄 것도 없는 새시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부엌 공간을 제외하고는 방마다 가득 찬 캔버스며 작업도구, 소품, 돌멩이들이 그나마 예술가의 집임을 증명해줬다. 좁은 공간에 정돈은 잘 돼 있었다. 손님맞이 청소를 했다고 말했지만 한쪽 벽면에 줄 맞춰 걸려있는 작업도구들을 보니 원래 깔끔한 성격인 듯했다.
   
   용인에 공장을 활용한 작업실이 한 곳 있어서 큰 작업은 주로 용인에서 한다고 했다. 이곳은 드로잉·페인팅 작업과 작품 구상을 하면서 혼자 생활을 하는 주거지로 삼고 있다. 난방시설이 안 된 실내는 10월 초의 날씨에도 썰렁하게 느껴졌다. 그는 “강화도가 다른 곳보다 평균기온이 더 낮다”고 말했다. 난방도 안 되는 이곳에서 그는 전기장판 하나로 두 번의 겨울을 보냈다.
   
   춥고 가난한 이 공간이 우리나라에서 설치미술을 하며 살아가는 작가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극소수의 작가들을 제외하고는 그림을 팔아서 먹고살기 어려운 것이 미술시장의 현실이다. 더구나 그림처럼 시각적 결과물이 아닌 ‘개념’을 보여주는 설치미술은 ‘돈이 되는 미술’이 아니다. “어떻게 먹고사느냐”는 질문에 그는 태평하게 대답했다.
   
   “예술 하려면 거지가 될 각오를 해야죠. 설마 굶어죽기야 하겠어요. 많이 누리느냐, 적게 누리고 사느냐의 차이일 뿐이죠. 배가 고프더라도 의미 있는 장소에 내 작품이 걸리고, 의미 있는 작업에 신명을 바쳐서 살고 싶어요. 시간이 지나고 이런 방식의 작업이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 주기만 바랄 뿐입니다.”
   
   
   땅이 알아서 살게 해줍니다
   
▲ 집 주변에서 주운 돌로 만든 야외 아궁이.
입구 반대편에 있는 허술한 문을 열고 집 뒤편으로 나갔다. 집안과는 달리 가을 햇볕이 따뜻했다. 뒷마당 손바닥만한 텃밭에 고추, 가지 몇 개가 열려 있었다. 한쪽에 작은 돌을 쌓아 받치고 넓적한 돌을 얹어 얼기설기 만든 야외 아궁이가 있었다. 점심으로 삼겹살을 구워주겠다면서 불을 붙였다. 반질반질한 돌판이며 불을 피우는 솜씨가 한두 번 해본 일이 아닌 듯했다. 간이 테이블을 만들고, 동네에 내려가서 고기를 사오고, 그가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인터뷰보다 점심 준비하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인 것 같았다. 집 앞 매실나무에서 직접 따서 만든 매실장아찌며, 근처 산에서 따왔다는 ‘차기율표’ 산초장아찌, 취나물장아찌를 계속 내오느라 분주했다.
   
   “인터뷰는 술 한잔 하고 천천히 해요. 어휴, 안 하면 어때. 막걸리? 맥주? 일단 마셔요. 술 깨고 저녁까지 놀다가요. 뭘 내올 게 또 없나. 아~, 조금 있다 내가 담근 기가 막힌 술 줄게요. 보리수 열매로 만든 보리수주 마셔봤어요?”
   
   마음이 바쁜 취재진과는 달리 그는 느긋했다. 술 한잔이 도는 사이 두께가 10㎝도 넘어 보이는 돌판이 뜨겁게 달궈졌다. 돌판 위에서 고기가 노릇노릇 익어가자 그는 더 바빠졌다. 안 보이는가 싶더니 어디선가 고추를 따오고, 오이를 따오고, 금방 사라지더니 텃밭에서 딴 갓을 씻어왔다. “민들레가 몸에 좋다더라”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 집 옆으로 돌아가더니 “흰꽃이 피는 토종 민들레”라며 잎을 따왔다. 그의 땅에서 자란 푸성귀에다, 그의 땅에서 주운 돌판에 구운 고기의 맛은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 것 같다. “오징어찌개를 끓여 놓았다”며 밥을 권하는데 배가 불러서 먹을 수가 없었다. 고기로 가던 젓가락이 멈춰질 즈음 그가 또 일어나 달려가더니 집 옆의 밤나무에서 밤송이를 따와 ‘디저트’라며 내밀었다.
   
   “아무리 가난해도 굶어 죽지는 않으니 걱정할 필요없다”는 그의 말을 ‘보물창고’ 같은 그의 땅이 보여주고 있었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 던지는 질문
   
▲ 차기율은 돌멩이 하나에도 큰 의미를 부여한다. 돌멩이를 이용한 다음 작품을 구상 중이다.
고기 냄새를 맡았는지 작은 새들이 계속 날아왔다. 그가 “박새”라고 말했다. 겨울이면 새들이 굶어 죽을까 걱정돼 철사로 묶은 돼지고기 덩어리를 나무에 매달아 놓곤 하는데 ‘박새’들이 가장 잘 먹는단다. 꽁꽁 언 고기를 쪼아 먹는 새들을 지켜보다 보면 몇시간이 훌쩍 지나간단다. 또 그가 이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일 중 하나는 근처 강가에 나가 몇 시간이고 돌멩이를 지켜보는 것이다. 그는 아주 사소한 것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의미를 찾는다.
   
   “구석기시대에 누군가 만졌던 돌을 지금 내가 만지고 있다는 상상을 해봐요. 허투루 볼 수가 없죠. 사소하지만 의미가 있는 것들, 버려져서 묻혀진 것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현대 산업사회에서 거론되는 모든 문제들은 원형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작품의 맥락도 그런 것들과 연결돼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생물학적 본성, 소중한 기억들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 1등만 기억하는 사회에 ‘사소한 것도 기억하자’고 제안하는 겁니다. 독립운동가만이 아닌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의 삶도 위대합니다. 한 명의 1등이 아닌 수많은 민초들이 역사이고 그 역사의 중심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가 한 작업을 보면 그의 말을 이해하기가 쉽다. 지난 2007년 열었던 그의 개인전 ‘도시시굴-삶의 고고학’을 보자. 그는 서울 종로구 통의동의 한 한옥에 머무르면서 방 구들장을 실제로 파내고, 그곳에서 나온 신문지 조각, 깨진 그릇 등을 전시했다. 2009년에도 자신이 태어난 화성, 성장한 인천, 서울에서 각각 발굴한 부산물과, 그 과정의 기록을 보여준 ‘세 개의 장소’라는 전시를 가졌다. 그는 그렇게 건져낸 ‘사소한 것’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수십 년 전 병원진료 기록, 오래된 캐러멜 봉지, 깨진 그릇 조각, 신문기사…, 그런 사소한 것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하고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또 문명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명의 진행방향이 과연 맞는 것인가, 사소함이 거대한 것을 만들어내고 현대사회의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그 어떤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을 관객에게 물어보는 것이죠.”
   
    그가 ‘사소한 것’에 매달리게 된 이유는 뭘까. “아마 성공적인 인생을 살지 못하고 주변의 인생을 살게 됐기 때문일 겁니다. 원하는 대학에 떨어진 후 심한 좌절을 겪었습니다. 화단에서 지방대 출신으로 받은 상처는 말도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런 고난들이 작업 열정을 불어넣고, 예술의 본질에 대한 문제들에 눈을 뜨게 하기도 했지만요.”
   
   그의 작업은 해외 화단에서 오히려 환영받고 있다. 지난 7월 미국 LA에 있는 아트코어 갤러리(Artcore Brewery Annex)의 초대전은 큰 성과를 내며 내년 마이애미 전시로 이어졌다. 그의 가능성을 본 마이애미의 한 상업화랑이 그의 드로잉 작품을 사고, 내년 4월 초대전을 제의한 것이다. “나한테 속은 거지요, 하하. 그들은 나를 ‘아시아에서 온 철학자’로 생각해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가치와 정신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인정해주는 문화가 부럽긴 해요. 편협한 국내 화단에 실망하고 있기보다 아예 해외로 나가는 것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미술 속에는 절대 미술이 없다”
   
▲ 벽에 줄 맞춰 걸어놓은 작업도구들.
그의 말과는 달리 한국을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앞으로 국내에서 할 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아직 구체적으로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분단의 현실을 기록하는 대대적인 프로젝트를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막·극지 등 오지에 대한 관심도 많단다. 발굴 프로젝트도 계속해야 하고, 책도 낼 계획이다. 그는 또 이 집을 작은 도서관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미술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 2000권만 딱 정해서 넣을 겁니다. 전문가들 몇 사람과 리스트를 작성하려고 준비 중입니다.”
   
   도서관 계획에는 ‘후배들이 제대로 된 미술공부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 들어있다. 그는 ‘미술 속에는 절대 미술이 없다’고 생각한다. “미술의 상상력은 다른 학문의 영역에서 가져오는 것들이에요. 진짜 예술을 하려면 인문학자가 돼야 하고 천문학자가 돼야 합니다. 저변이 넓지 않으면 상상력에 한계가 있어요. 우리나라 미술교육은 ‘정신’을 안 가르쳐요. 그러니 예술가가 아니라 기술자가 되는 거죠. 어시스턴트 두고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그림을 찍어내고 있잖아요. 미술 관련 책만 읽어봤자 동굴에 갇힌 사고밖에 할 수가 없어요.”
   
   그가 도서관으로 꾸미고 싶어 하는 이 집은 2년 전에 구입했다. 모교인 인천대학교 겸임교수와 몇 개 대학에 시간강사로 뛰면서 번 돈은 이 집을 사는 데 보태지 않았다. 드로잉·유화 등 순전히 그의 작품을 판 돈을 몇 년간 모아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라는 생각으로 집을 산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돌멩이·새·풀 등과 놀면서 ‘사소한’ 기억들로 시간을 채우고 있었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손에 그가 “선물”이라면서 메추리알 같은 돌멩이를 쥐여 주고는 “마음이 불편할 때 동글동글한 돌을 보면 위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다녀본 예술가의 집 중에서 가장 작고 허름했지만 마음은 어느 곳보다 편한 집, 그곳에서의 ‘사소한 기억’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았다

 

‘脫서울’ 13년, 마당에 쏟아지는 별 주우며 살아요
양평서 ‘스몰 피플’과 사는 노석미 작가

▲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변두리’에서 여섯 마리 고양이와 살며 자급자족의 삶을 꿈꾸는 노석미의 집.
“그럼 용두리 짬뽕집에서 만날까요?”
   
   “우리 동네 오면 꼭 먹어보라”는 그의 말을 듣고 아예 중국집에서 약속을 잡았다.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용두리. 면 중심지에 들어서자 가게마다 비슷한 새 간판들이 시선을 끈다. 얼마 전 일제 정비사업을 한 모양이다. ‘용다방’ ‘아빠이발’ ‘장미스튜디오’…. 출입문이며 실내는 20세기 영화 세트장 모습인데 간판만 ‘번쩍번쩍’하다. 세상의 속도와는 무관하게 과거의 추억을 간직하길 바라는 것은 도시인의 욕심일지 모른다. 그래도 양복 윗도리에 한복 바지를 입은 것처럼 어색해 보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역시 간판만 튀는 ‘용두리짬뽕’집이 보인다. 홍합 그득한 이 집의 짬뽕이 유명세를 타고 있는 듯하다. 평일 점심인데도 허름한 식당 안은 손님이 꽤 많다. 약속시간 10여분 지나 누벼진 ‘몸뻬’를 입은 젊은 여성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화가 노석미(41)였다.
   
   그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바지를 신기하게 쳐다보자 “천을 사다 직접 만들었다”고 말했다. 시골에서 겨울을 나려면 털신과 함께 꼭 필요한 ‘패션 아이템’이란다. 5일장에서 샀다는 6000원짜리 털신도, 모양 없는 몸뻬도 그가 입으니 특별해 보였다. ‘털신을 하나 사갈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세련된 외모도 아니고 모델 같은 몸매도 아닌데 왜?
   
   노석미, 그가 특별해 보인 것은 ‘당당함’ 때문이었다. 주변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자신의 뜻대로 삶을 밀고 나가는 사람의 당당함. 말투는 어찌나 똑 부러지는지 ‘듣고 있다’기보다는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스물여덟 살에 탈(脫)서울, 경기도 인근을 전전하다 양평 끝자락에 땅을 사고 집 한 채 지은 것이 3년 전인 서른여덟 살 때였다. 시골에 혼자 사는 가난한 화가가 당당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인지 ‘노석미’라는 사람이 궁금해졌다.
   
   
   脫서울
   
▲ 노석미의 ‘재산목록 1호’. 헝겊인형 ‘스몰피플’들을 만들기 위해 모아놓은 천조각들.

   노석미는 홍익대에서 회화를 전공했다. 시골에서는 살아본 적이 없는 서울 토박이다. 왁자지껄한 홍대의 밤 문화를 즐기고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20대 젊은이였다. 쑥과 냉이도 구별할 줄 모르는 그가 서울을 떠난 것은 순전히 ‘돈’ 때문이었다. 그림을 그리려면 넓은 작업 공간이 필요했고, 부모에게 ‘독립선언’을 한 20대 후반의 그가 가진 전 재산은 300만원이었다. 경기도 가평, 담도 없는 허름한 집에서 시골살이가 시작됐다. 몰라서 용감했다. 시골에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 알 턱이 없었다. 넓적한 돌 두 개에 엉거주춤 다리를 걸쳐야 하는 재래식 화장실의 공포도, 세상에 벌레의 종류가 셀 수 없이 많다는 것도, 밥숟가락 개수까지 알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동네 노인들의 맹렬한 ‘탐구열’도.
   
   그의 친구들은 장담을 했다.
   
   “5개월도 안돼 돌아올 거다.”
   도시에서 온 ‘수상한 처녀’를 동네 할머니들이 가만둘 리가 없었다.
   
   “배추머리 아가씨 혼자 산다며?”
   
   “글씨, 남자들이 그렇게 드나든다드만.”
   
   초록색 염색을 한 그의 뒷덜미에 대고 할머니들은 ‘뒷담화’를 굳이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새로운 것을 즐겼고 겁이 없었다. 가장 끔찍한 재래식 화장실에서조차 한쪽 벽에 나 있는 구멍으로 슝슝 들어오는 바람을 즐길 정도가 됐다.
   
   산, 나무, 풀, 꽃…, 자연을 가깝게 처음 접해본 그에게는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산으로 들로 틈만 나면 쏘다니며 학창시절에도 하지 않았던 ‘자연 탐구’ 생활을 했다. 돈 때문에 선택한 ‘변두리의 삶’은 돈 주고는 살 수 없는 소중한 자연을 그에게 선물했다. ‘불편에 대한 보상’이었다. 물감 걱정을 해야 할 만큼 텅 빈 지갑만이 걱정거리였다. 그의 신상명세서를 줄줄이 꿴 할머니들의 ‘학구열’은 이제 ‘애정’으로 발전했다. 어느새 ‘수상한 처녀’는 ‘참한 처녀’가 됐다. 야행성이던 생활습관도 바뀌었다. 집안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때문이긴 하지만 규칙적인 아침형 인간이 됐다. 맑은 공기 덕분인지 만성비염도 사라졌다. 그는 시골 사는 행복을 알아버렸다. 밤이면 쏟아지는 별은 축복이었다. 그의 ‘서울 컴백’을 장담했던 친구 중의 한 명은 현재 살고 있는 그의 집 뒤에 땅을 샀다.
   
   
   집을 짓다
   
▲ 1000㎡의 정원 곳곳에 텃밭을 만들었다.

   가평시대는 집주인의 요구로 1년 만에 끝이 났다. 그 이후 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포천으로, 동두천으로 몇 차례 집을 옮겨야 했다. 잡지에 일러스트를 그리고, 전시를 하고, 그림책·그림소설 등 책도 여러 권 냈다. 톡톡 튀는 그의 글과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전셋값 걱정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집을 옮길 때마다 어쨌든 자산은 불어났다. 늘 돈이 없었는데 돈이 모인 것이 그도 신기하다고 했다. 동두천에 아파트도 샀다. 슬며시 ‘내 땅’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1년여 동안 땅을 보러 다녔다. 그가 가진 돈은 1억5000만원 정도였다. 처음 시골살이를 했던 가평을 원했지만 그동안 땅값이 너무 올랐다. 2순위로 생각했던 동두천도 만만치 않았다. 그가 가진 돈에 맞춰 좀 더 깊숙이 들어온 곳이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였다.
   
   1000㎡(약 300평) 남짓한 땅에 ‘하얀 집’을 짓고 3년째이다. 미혼이지만 부양가족이 많다. 늙은 고양이 여섯 마리를 ‘모시며’ 살고 있다. 잔디가 깔린 마당 곳곳에 배추·상추·파가 심어져 있고, 마당 한편에 만든 작은 텃밭에는 호기심에 뿌린 밀씨가 푸른 싹을 한 뼘이나 밀어내고 있었다. 목화나무도 있다. 솜을 얻으려고 심었는데 작년에 겨우 한 주먹을 얻고, 그나마 올해는 실패했단다. 무릎 높이만 했던 복숭아나무는 그새 가슴 높이까지 자랐다. 집 오른쪽으로 돌계단을 내려가면 본격적인 밭이 있다. 이곳은 서울 사는 엄마의 ‘주말농장’이다. 갓·배추·무·당근·고구마·고추 등 온갖 채소부터 허브·딸기 등이 심어지고 뽑히기를 반복한다. 올해도 배추 50포기를 수확해 이른 김장을 담갔다. 밭 한쪽에 김장독이 묻혀 있다. 딸기로 잼도 만들고 허브는 차를 만들었다. 엄마의 힘을 빌리고 있기는 하지만 목표는 ‘자급자족’이다.
   
   마을은 생각보다 가구 수가 많았다. 전원마을 단지 같았다. 그가 “3년 전에 들어올 때는 외딴집이었는데 그새 10여가구가 들어섰다”고 말했다. 덕분에 땅값은 뛰었지만 그는 번잡해지는 것이 싫다고 했다. 내부 구조는 간단했다. 땅 사고 남은 돈은 많지 않았다. 돈에 맞춰 지어야 했고, 사실 복잡한 인테리어도 필요 없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널찍한 작업공간이었다. 천장을 높이하고 복층을 만들었다. 한쪽에 작은 침실과 욕실, 주방을 빼고 나머지 공간은 거실 겸 작업실이다. 거실 한가운데 커다란 페치카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인테리어용이 아닌 생존용이다. 도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겨울이 춥다. 거실엔 물감이며 캔버스들이 널려 있다. 제멋대로 놓여 있지만 화가의 공간은 멋이 있다. 친구가 그러더란다. “인테리어를 안 한 것이 이 집의 인테리어”라고. 색색의 물감들이 값비싼 장식품들보다 훌륭한 인테리어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다. 마룻바닥에 떨어진 물감조차 특별해 보였다. 그가 “내 집을 갖고 난 후 가장 좋은 것은 물감을 맘대로 떨어뜨려도 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소유의 그늘’, 이 집을 얻기 위한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 “집을 지으면 10년은 늙는다더니 세상의 쓴맛을 제대로 봤어요. 일하는 사람들과 부딪치면서 세상에는 못 믿을 사람도 많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요. 소유하지 않았으면 힘든 일도 없었을 텐데, 소유하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였던 거죠. 최소의 소유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공사 현장에서 닳고 닳은 사람들에게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 여자가 얼마나 만만해 보였을지 상상이 갔다. 좌충우돌 시골살이는 지난 10월 출간한 ‘서른 살의 집’이라는 책에 담겨 있다.
   
   
   고양이 실버타운
   
▲ (좌)최연장 14살 ‘시로’부터 여섯 마리 늙은 고양이들이 이 집의 주인 같다. (우)노석미가 직접 그림을 그려 만든 고양이들의 밥그릇.

   침실을 들여다보다 흠칫했다. 포동포동 살이 오른 고양이 서너 마리가 침대 위를 차지하고 누워 낯선 이를 째려봤다. 마치 고양이들이 집주인 같았다. 여섯 마리 중 가장 나이 많은 ‘시로’가 14살이다. 사람 나이로 치면 80대쯤 될 것이다. 네 마리가 10살 이상(사람 나이 60대)이니 그야말로 고양이 실버타운이다.
   
   13년 전 최연장 고양이 ‘시로’와 동거를 시작한 후, 분양 안 된 ‘시로’의 아들 둘, 버림받고 길거리를 헤매던 ‘봉봉’ 등이 가족이 됐다. 2년 전 13살 먹은 ‘똘똘이’ 때문에 혼이 났다. 똘똘이가 아파 동네 동물병원에 갔더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고 하더란다. 놀라서 서울 엄마 집 옆에 있는 동물병원에 갔더니 또 더 큰 병원으로 가란다. 그 길로 동물 종합병원이 있는 분당까지 달려갔다. 진찰비만 100만원 가까이 들었다. 의사가 ‘원인을 찾으려면 검사비가 지금까지 든 돈보다 훨씬 많이 들고 가망도 없다. 안락사를 시키는 것이 어떠냐’고 묻더란다. 울며불며 정신없는 그를 보다 못한 엄마가 “고양이가 죽기 전에 네가 먼저 죽겠다. 고양이는 놔두고 가자”면서 잡아 끌었다. 그는 “죽더라도 내 품에서 보내겠다”며 똘똘이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경을 헤매던 똘똘이가 집에 오더니 눈을 뜨고 “야옹” 소리를 내더란다. 마치 “집에 와서 너무 행복해”라고 말하는 것처럼. 횡성까지 달려가 한우를 사들고 와서 갈아 먹이고 지극정성을 다했다.
   
   똘똘이는 기적처럼 살아나 지금도 그의 곁을 지키고 있다. 시로, 똘똘이, 후추, 씽…. 아무리 이름을 가르쳐줘도 무조건 “나비야” “야옹아” 하던 엄마가 그 사건 이후로 고양이들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고양이가 딸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았던 것이다. 고양이들은 그의 그림의 단골 주연이다. 그와 여섯 고양이의 사는 이야기는 ‘스프링 고양이’란 제목의 책으로 엮어지기도 했다. 여섯 마리뿐만 아니라 그가 주는 먹이를 찾아 마당을 근거지로 삼는 야생 고양이가 아홉 마리다. 야생고양이들 덕분에 뱀, 쥐들은 얼씬도 못하니 밥값은 하는 셈이다.
   
   
   ‘스몰 피플’과 동거
   
▲ 천장을 높이하고 복층을 만들었다. 침실 등 최소한의 공간을 제외하고는 작업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고양이들 말고도 이 집엔 ‘동거인’들이 또 있다. 일명 ‘스몰 피플’이라고 불리는 헝겊 인형들이다. 그가 시골의 긴 밤을 보내기 위해 바느질을 시작한 것이 그림과 함께 주요 작품 활동이 됐다. ‘스몰 피플’들의 공간은 복층이다. 복층 위로 올라가니 기다란 장 가득 색색의 헝겊들이 가득 쌓여 있다. 그가 “재산목록 1호”라고 말했다. 외국을 다녀오는 길에, 수시로 서울 동대문을 드나들며 모은 천들이다. 블로그를 통해 ‘스몰 피플’을 분양하는 대신 ‘헌 천’을 수집한 적도 있다. 한쪽엔 그동안 그의 손에서 탄생한 스몰 피플들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모여 있다. ‘스몰 피플’로 전시회도 했고, 아트 상품으로 만들어져 팔리고 있다. 늙은 고양이들 모셔야지, 1층, 복층 오가며 그림 그리고 인형 만들어야지, 텃밭 돌봐야지, 하루 해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를 만큼 바쁜 그가 13년 동안 지겹도록 받는 질문이 있단다. “시골에서 심심해서 어떻게 사세요?” 혹시 이 글을 읽고 그를 만나게 되면 그 질문은 절대 하지 마시길.
   
   “사람들은 길이 보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난 길이 보여서 싫다.”
   
   그가 책에 쓴 글인데, 그를 가장 잘 설명하는 말인 듯하다. 일상을 가벼운 터치로 잡아낸 화려한 색채의 작품들 속에는 ‘노석미’만의 암호가 숨겨져 있다. 대학시절부터 노석미는 ‘길’이 달랐다. 한창 유행하던 앵포르멜에 편승해 너도나도 물감 덧칠하느라 바쁠 때, 그는 교실에서 배운 미술교육의 때를 벗겨내기 위해 애를 썼다. 흉내 내고 훈련해서 만들어진 것은 예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노석미에게 대학생활은 ‘배우기’가 아니라 ‘버리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는 삶을 “썼다가, 지웠다가 하는 것이더라”고 말했다.
   
   대책 없이 시골로 들어온 것처럼 그는 실패에 대한 예측이라든가 계산은 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무대뽀’이지만 방향은 확실하다. “내 마음이 시키는 대로”. 남들이 소망에 머물러 있을 때, 노석미는 실행에 옮긴다. 의지대로 삶을 움직이고, 자신의 선택을 즐길 줄 알기에 당당해 보였던 거다. ‘노석미’란 작가가 더 알고 싶어지지 않는가.
   
▲ 노석미의 ‘스몰 피플’ 작품.

200년 고택에서 천년 색의 비밀을 풀다
안동의 천연염색 명장 최옥자

▲ 경상북도 안동 민속촌 내에 있는 최옥자 명장의 집. 조선 후기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만형의 고택으로 남편 이필구씨가 4대 종손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는데 쪽빛보다 더 푸르다. 이 한 단어를 끌어안고 30년을 보냈다.
   
   천년이 지나도 그 푸르름을 잃지 않은 색. 시간이 묵을수록 더 진한 빛으로 푸른색을 토해내는 ‘쪽빛의 진실’을 찾아 나선 것이 30대, 이제 60대가 된 그에게 세월은 명장이라는 칭호를 붙여줬다. 대한민국 명장 512호 최옥자(66). 천연염색 분야에서는 유일한 명장이다. 그는 천연염색뿐만 아니라 쪽 염색을 이용해 천년을 견딘다는 신비의 종이 감지(紺紙) 제작을 재현해냈다.
   
   ‘쪽빛’은 인간과 자연의 합작품이다. 공기, 물, 햇빛, 정성은 물론이고 세월을 숙성시켜야 한다. 19세기 중반 화학염료가 나온 이후 쪽 염색을 비롯한 천연염색은 맥이 끊겼다. 화학염료가 마술처럼 직물에 색을 입히는 세상에서 쪽을 키우고, 그 잎에서 염료를 뽑아내고, 몇 달에서 몇 년씩 발효·숙성을 시키고, 산화와 환원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 쪽 염색이 살아남기는 힘들었다. 설사 쪽잎을 사용한다고 해도 발효과정에서 천연 잿물이 아닌 양잿물(수산화나트륨·가성소다)을 사용하면 진짜 천연염색이 아니다. 우리가 ‘천염염색’이라고 알고 있는 것들 대부분이 화학물질인 양잿물을 사용하고 있다. 1년 이상 공을 들여야 하는 쪽 염색은 한 공정만 잘못돼도 제대로 된 쪽빛을 내지 못한다. 화학물질이 들어간 염색은 빨수록 색이 날아가는 반면 천연염색은 갈수록 색이 살아난다. 그는 무엇보다 화학염색으로 인한 환경오염을 걱정한다. 스승도 없고 자세한 문헌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스승은 ‘실패’였다. 쪽물을 담은 독을 끌어안고 처음 10년 동안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쪽빛의 진실’에 닿을 수 있었다. 진실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었다.
   
   
   200년 고택에서 쪽빛을 일구다
   
그를 만나기 위해 경북 안동시 안동민속박물관 옆 민속촌을 찾았다. 그의 집은 민속촌 내에 있다. 낙동강 700리가 시작되는 곳, 안동댐 아래 진모래골 산비탈에 있는 200년 가까운 고택이다. 그는 조선 후기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만형(李晩瀅·1825~?)의 4대 종부이다. 집 앞에는 ‘이필구 와가(李必久 瓦家)’라는 안내판이 서 있다. 이필구(66)씨는 그의 남편이다. 이만형의 4대손으로 2대 독자이다. 이만형이 퇴계 이황의 11대손이니 남편은 퇴계의 15대 가손이다. 고택은 원래 진성 이씨 집성촌인 도산서원 옆에 있었다.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면서 1976년 안동시가 고택을 이곳으로 옮겨줬다. 원래는 안채·사랑채·행랑채가 있었는데 터가 마땅치 않아 ㅁ자형의 안채만 이곳으로 오고 나머지는 용인민속촌으로 옮겨졌다. 민속촌 내에는 그의 집과 함께 여러 채의 초가집, 조선시대 석빙고(보물 제305호) 등이 옮겨져 왔다.
   
   고택은 한동안 빈집으로 있었다. 최씨는 부산에서 살다가 25년 전 이곳에 정착했다. ‘쪽빛’을 찾기 위해서는 맑은 공기와 물이 필요한 데다 쪽을 직접 재배해야 하니 이만한 환경이 없었다. 3녀1남인 아이들에게 조상의 뿌리가 있는 곳에서 교육을 시키고 싶다는 생각도 안동행을 거들었다.
   
   고택은 달그림자가 비춘다는 월영교(月映橋)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다. 양반가에 어울리지 않는 초가대문이 눈에 띈다. “검소하게 살라”는 퇴계 선생의 뜻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한 번 수리를 거친 지붕을 제외하고는 빛 바랜 나무마다 세월이 삐걱이고 있었다. 마루 위에는 제사 때 각상으로 쓰는 소반 10여개가 줄줄이 걸려 있다. 종부인 그는 일 년이면 제사를 열 번을 지냈다. 마당 한편에는 옛날 화장실, 마른 음식을 보관해두던 곳간이 초가를 얹은 채 과거를 보여주고 있다. 염색일로 붐비던 고택의 마당은 이제 조용해졌다. 3년 전 집 근처 호숫가에 경상북도 지원으로 천연염색 전시관과 작업장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고택을 옮기면서 난방은 보일러로 바꿨지만 문간방 한 곳에는 황토방에 구들장을 놓고 나무를 때는 아궁이를 만들었다. 그를 찾아온 외국인 친구들은 이 방에 미친다. “영국에서 천연염색 전시를 할 때 쪽빛에 반한 영국인 큐레이터들을 사귀게 됐어요. 영국인 큐레이터 세 명이 놀러 와서 며칠간 이 방에 묵었는데, 뜨끈뜨끈 구들장이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르더라고요. 그 친구들이 떠나고 나서 방을 보니 벽에 종이가 붙어 있어요. 뭔가 봤더니 글쎄 ‘This room is paradise’라고 써놨더라니까요.” 이 방에 반해 매년 집 앞 호숫가에 벚꽃이 흐드러질 때면 열흘씩 한 달씩 묵고 가는 일본인 친구도 있다.
   
   
   다도에서 천연염색으로
   
▲ 도산서원 근처 진성 이씨 집성촌에 있었던 고택은 안동댐 건설로 수몰지역이 되면서 1973년 안동시에서 이곳으로 옮겨졌다.

   그와 쪽빛의 인연은 다도(茶道) 때문이었다. 다도에 빠진 세월은 천연염색보다 오래됐다. 지금도 그를 천연염색 명장보다는 다도 선생님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많다. 고택의 사랑방에서 그는 요즘도 일주일에 두 번은 사범과정 교육을 하면서 다도 선생님들을 키우고 있다. 이곳이 그가 만든 ‘다례원’의 본부인 셈이고 그의 제자들이 10여곳에서 ‘다례원’의 이름으로 다도 교육을 하고 있다. 다도 교육을 하는 방은 찻상과 방석 외에는 일절 장식이 없이 정갈하다. 벽에는 그의 스승이 내려준 ‘설헌’이라는 호가 쓰인 팻말만 걸려 있다.
   
   “이 방에 들어오는 순간 차에만 마음을 집중해야 해요. 예전에는 한복을 갖춰 입고 액세서리를 전부 빼지 않고는 이 방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만큼 엄하게 가르쳤어요.”
   
   이사를 온 후 한동안 근동의 사람들에게 고택은 ‘의문의 집’이었다. 아이들은 아침 일찍 학교에 갔다 저녁 늦게 돌아오고, 사업을 하는 남편은 외지에 나가 있었다. 살림하는 집 같지는 않고 가끔씩 한복을 입은 여자들이 하나둘 들어갔다 우르르 몰려나오니 정체가 궁금할 만도 했다. 그가 어느 날 목욕탕에 갔는데 아줌마들이 한창 ‘수상한 집’ 이야기를 하고 있더란다.
   
▲ 푸른색은 쪽풀에서 나오고 붉은색은 홍화에서 나온다. 온도, 공기, 햇빛, 시간, 직물의 종류에 따라 수백 가지의 다른 색이 나온다.

   “저그 민속촌에 있는 고택이 뭐하는 집인 줄 아나?”
   
   “한복 입은 여자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이 수상하데.”
   
   “고급 기생집이라카데.”
   
   이제 고택은 ‘다례원’으로 유명해졌다. 매년 가을이면 이곳에서 한·일 다도교류 행사가 열리기 때문이다. 올 10월에도 행사가 열렸다. 해마다 힘들어서 “올해만, 올해만” 하는 것이 벌써 25회째이다. 천연염색에 관심을 가진 것은 다도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교류를 하던 일본 여성들을 통해서였다. 기모노를 입고 와서 천연염색이라고 어찌나 자랑을 하는지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천연염색에 대한 그들의 자부심이 그의 ‘성질’을 건드렸다. 목표가 생기면 밀어붙이고, 한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고 마는 성격이었다. 다도를 할 때도 차 성분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어 중국 항저우에 있는 농과대학 ‘다학과’에 1년 과정 유학을 다녀올 정도였다. 중국과 수교를 한 직후인 1993년의 일이었다. 한창 아이들이 공부를 할 때였는데도 그의 열정은 아무도 못 말렸다.
   
   
   색의 진실을 찾아서
   
▲ 천연염색 재료인 홍화·쪽잎과 염료를 채취하고 천연잿물을 만드는 과정.

   천연염색에 매달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일본이든 중국이든 천연염색을 배울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배우고 돌아왔다. 일본은 천연염색이 세분화돼서 각 분야마다 장인들이 따로 있었다. 푸른색을 만드는 쪽 염색과 붉은색을 뽑아내는 홍화 염색 장인이 각각 달랐고, 쪽 염색에서도 염료를 만드는 장인과 염료를 발효시키고 염색을 하는 장인이 달랐다. 천연염색의 맥을 잇기 위한 노력이 대단했다. 그럼에도 그들 또한 완전한 해답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일본뿐 아니라 중국도 하나같이 발효과정에서 천연 잿물이 아닌 양잿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말할 것도 없지요. 전부 화학물질인 양잿물을 사용하고 있어요. 진짜 천연염색이 아닙니다. 화학물질이 환경을 얼마나 망칩니까. 한동안 입 다물고 기다렸습니다. 내가 10년 동안 실패의 과정을 거친 것처럼 쪽빛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언젠가는 제대로 된 쪽물을 만들어내겠지. 소용없었어요. 알고서도 침묵하는 것은 직무유기지요. 할 말 하고 싶어 명장도 신청했어요. 타이틀이 있어야 말이 먹히는 세상이잖아요. 쪽밭에 살면서 한여름 더위에 잎을 채취하고 쪽물이 든 독을 붙들고 흘린 땀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100 중에 99%가 가짜들이에요. 그 벽 속에 진실이 갇히는 것이 가장 힘들었어요. 쪽 발효 독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천연염색을 말하고, 진짜를 외면할 때 절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는 노동부가 2년에 한 번씩 선정하는 명장에 도전한 지 4번째 만인 올 9월 5일에 ‘명장’에 이름을 올렸다.
   
   쪽 염색을 연구하다 보니 감지가 눈에 들어왔다. “임진왜란 때 일본이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기술이 뭔지 아세요? 찻사발인 다완하고 종이 만드는 감지 기술, 두 가지뿐이었답니다. 교토박물관에서 고려시대의 금니감지(감지에 금색 글씨)가 걸려 있는 것을 본 순간 너무 가슴이 아파 울었습니다. 우리 보물들이 다 일본에 가 있으니 서글픈 일이지요. 그 자리에서 천년 전 조상들이 한 것처럼 일본에 빼앗긴 감지기술을 살려내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우리나라 보물로 지정된 감지사경 중에는 진짜가 아닌 것도 있어요. 가짜 감지는 물에 담가 보면 알아요. 잉크가 빠져나오듯 색이 흘러나옵니다. 진짜 쪽 염색을 한 감지는 몇 년을 물에 담가놓아도 색이 절대 안 빠져요.”
   
   
   “천연염색 기술을 세계문화유산으로”
   
▲ 40년 가까이 다도를 해온 최옥자 명장은 이곳에서 다도교육을 하고 있다.

   쪽 염색부터 붉은 홍화 염색, 쪽과 홍화가 만나 조화를 부린 초록 염색, 천상의 색이라는 보라 염색, 감지의 진실은 다섯 권의 책으로 엮어져 나왔다. 경상북도에서 운영하는 바이오연구원에 2004년부터 들어앉아 5년 동안 매년 한 권씩 자연이 선물한 색의 신비를 풀어냈다. 그의 책이 나오고서부터 가짜들이 하나둘씩 목소리를 낮추기 시작했다. 올해부터 미술 국정교과서에 그의 책에서 발췌한 천연염색법이 실렸다. ‘인쇄가 나오니 통장번호를 알려달라’는 연락을 받고서야 교과서에 실린 사실을 알게 됐다. “명장이 되는 것보다 훨씬 기쁜 일이지요. 후손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 제대로 된 전통을 이어주는 것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었으니.”
   
   다섯 권의 책에는 염색 과정이 시작부터 끝까지 자세히 기록돼 있다. 그동안 일본, 중국을 헤매며 외롭게 고군분투한 그의 30년 비밀을 아낌없이 공개한 것이다. 아깝지 않았을까? “애초에 돈을 벌자고 한 것이 아니라 전통의 맥을 잇기 위해서였어요. 방법은 알아도 질서를 깨닫고 자연의 이치를 터득하는 것은 세월의 몫이에요. 쪽의 물발이 서는 느낌을 한두 해에 어떻게 알겠어요? 온도, 햇빛, 산도를 맞추고 직물에 따라 수십 가지 수백 가지 다른 색을 만들어내는 자연의 마술을 책만 읽어서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에게 염색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지만 대부분 1년을 버티지 못한다고 한다. 쪽밭을 일구는 일부터 한시도 눈을 떼면 안되는 발효·숙성 과정이 보통의 인내로는 견뎌내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도 힘든 것은 마찬가지였을 터. 그를 움직인 힘은 무엇이었을까. “하다 보면 사명감이 생겨요. 이러다 내가 죽으면 어떡하나, 단절된 전통의 맥은 이어야 할 텐데 하는 책임감이죠. 쪽밭을 일굴 때가 가장 행복해요.”
   
▲ 고택 근교에 마련한 천연염색전시관. 이 곳에 작업장을 마련하고 천연염색 교육도 하고 있다.

   해외에서도 자연에서 뽑아낸 신비의 색에 환호했다. 지난 2002년부터 일본, 중국은 물론이고 영국, 프랑스, 독일, 호주, 러시아, 미국에서 전시를 가졌다. 지난 10월 서울 여의도 국회의원 회관에서 열린 전시까지 국내 전시도 100여 차례. 중국 칭화대 교수들이 찾아와 기술자문을 구하기도 하고 미국 할리우드에서 특별주문이 오기도 한다. 지난해에는 중원대학교 한방산업학부에서 박사 과정도 시작했다. “결과보다 과정을 즐긴다”는 그는 일흔을 앞두고 마음이 바쁘다. “일흔 전에 박사 학위 마치고, 천연염색 기술을 세계문화유산에 올리는 것이 다음 목표예요.”
   
   그 다음은 3년 전 전북 무주에 마련한 연구소에 들어가서 겹겹이 쌓여 있는 별을 보면서 쉬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 목표는 뒤로 훌쩍 늦춰질 것 같다. 명장이 되고 난 후 그를 찾는 사람들은 더 많아지고 그가 할 일도 늘고 있다. 나이를 먹어가며 진한 빛으로 심성을 토해내는 쪽빛처럼, 그의 열정도 나이 들수록 진한 빛으로 세상을 물들여갈 것이다.

 

예술은 끼로 한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시간의 예술’이 진짜!
양평 항금리의 터줏대감 김강용·김인옥

▲ 한옥을 확장해 현대식 건물을 붙였다. 내부에서 보면 집 안에 한옥이 들어앉아 있는 모양이다. 사진 가운데 동그란 나무 그림이 김인옥의 작품이다.
9남매의 장남과 5남매의 장녀가 만났다. 전북 정읍이 고향인 남자가 가진 것은 건강한 몸과 성실함뿐이었다. 대전이 고향인 여자는 내로라하는 집안의 기대주였다. 두 사람은 홍익대 미대 선후배 사이였다.
   
   “아내가 나를 좋다고 졸졸 따라다녔어요.”
   
   “날 좋아하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어요.”
   
   누구의 기억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남자와 여자는 손을 잡고 여자의 부모를 찾았다. 한창 공부하는 동생들이 줄줄이 있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에다 밥 굶기 십상인 화가, 씨암탉은 고사하고 쫓겨나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맞기를 각오한 남자에게 여자의 아버지가 대뜸 물었다.
   
   “그래, 결혼 날짜는 언제쯤 생각하나.”
   
   여자의 부모는 지금까지 속 한번 썩인 적 없던 딸의 선택을 믿었던 것이다. 여자는 남자의 단점들보다는 두 가지의 장점만 봤다. 건강한 몸과 성실함. 여자의 선택은 옳았다. 그 두 가지가 남자를 국내를 넘어 세계 화단에서도 통하는 화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벽돌 화가’로 불리는 서양화가 김강용(61)과 ‘항금리 가는 길’로 알려진 동양화가 김인옥(56)이다.
   
   
   항금리 가는 길
   


   김강용·김인옥 부부는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항금리에서 살고 있다. 항금리는 문화예술인들이 많이 사는 양평에서도 대표적 예술인 마을이다. 부부가 항금리에 집을 산 것은 20여년 전. 항금리 1세대이다. 이 집에 놀러왔다 하나둘 항금리에 터를 잡은 사람들이 늘면서 입소문이 나고 예술인들이 모여들었다.
   
   처음 집을 마련할 땐 주말용이었다. 노후 대비도 할 겸 번잡한 서울을 벗어나 주말만이라도 작업에 전념할 곳이 필요했다. 고향인 정읍은 멀고 조용한 시골을 찾아 들어온 곳이 이곳이었다. 시작은 폐가가 되다시피 한 작은 한옥이었다. 집에 들어간 돈은 2000여만원. 100년이 다 돼가는 집은 서까래며 대들보며 모두 단단한 나무들로, 허투루 지은 게 아니었다. 나무 하나하나가 작품이었다.
   
   “저 보물 같은 나무들을 어떻게 살려서 수리를 하나.”
   
   감탄을 하고 있는데 집을 중개한 사람이 말했다.
   
   “하루면 굴착기로 확 쓸어버릴 수 있으니 걱정 마세요.”
   
   나무 뼈대를 전부 살리고, 툇마루도 살리고, 마당 쪽으로 거실을 확장해 한옥과 어울리게 천장을 만들었다. 서까래엔 상량문도 그대로 남아있다. 10년 후 김강용이 아예 주거지를 이쪽으로 옮기면서 한옥 옆으로 집을 확장해 재미있는 집이 됐다. 현대식 건물 안에 한옥이 들어앉은 모양새로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고 있다. 거실 안쪽에 자리잡은 툇마루 붙은 작은 온돌방은 손님들이 서로 묵고 싶어하는 방이다. 한옥 쪽은 작업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고 다른 쪽은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고 있다.
   
   작은 한옥으로 시작한 집은 주변 땅이 나올 때마다 조금씩 사기 시작해 연못, 소나무, 바위들이 어우러진 넓은 정원을 갖게 됐다. 봄이면 영산홍, 수국 등 온갖 꽃들이 번갈아 눈을 즐겁게 한다. 집 뒷산에는 밤나무가 지천이어서 한동안 가을만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나눠줄 욕심으로 밤을 주우러 다니느라 바빴다.
   
   마을이 다 내려다보이면서도 안쪽으로 들어앉은 덕에 소음이 닿지 않는 이 집에서 김강용은 매일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듯 자신의 예술세계를 쌓아왔다. 작업공간은 먼지 하나 나오지 않을 것처럼 깨끗했다. 마룻바닥에는 물감이 떨어진 흔적조차 없다. 캔버스 앞에 딱딱한 나무의자, 그 옆 책상에 100여개의 붓이 가지런히 정돈돼 있다. 지금까지 방문한 작가의 작업실 중 가장 깨끗한 곳이었다. 캔버스마다 각 맞춘 벽돌들이 한 치의 오차 없이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그의 작품을 꼭 닮았다. 취재에 대비해 대청소라도 한 것일까.
   
   “내 작품은 1㎜를 따지는 정밀한 작업입니다. 주변이 흐트러져 있으면 몰두하기 힘들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청소부터 하고 작업을 시작합니다. 화가 작업실 하면 으레 지저분할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아요. 작품에 따라 작업실도 다양해요.”
   
   
   화가의 부인과 화가 사이에서
   

▲ 거실 창밖으로 정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꽃이 만발하는 봄은 봄대로, 눈 내리는 겨울은 겨울대로 좋다.


   김강용과 몇 걸음 떨어져 거실 안쪽으로 김인옥의 작업공간이 있다. 형제 많은 장남과의 결혼 생활은 신혼 때부터 조용할 새가 없었다. 좁은 신혼집에는 서울 유학을 온 시동생, 시누이들이 끊이지 않았다. 남편 밑으로 8남매였으니 졸업을 시켜도 시켜도 다음 차례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기에다 주머니 사정 빤한 남편의 화가 친구들까지 시도 때도 없이 숟가락을 얹었다. 쌀 한 가마니가 한 달을 못 갔다. 생활은 김강용이 화실을 운영하고 대학 강의를 다니면서 어떻게 살아졌다.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았던 김인옥도 역시 어떻게 살아지더란다. 고생이 뭔지 모르고 얼떨결에 부딪쳐서 가능한 일이기도 했고 주변 사람 거둬 먹이기 좋아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화가’로서의 욕심을 접을 수 없었다. 두 딸 재워놓고 그림 그리고, 그림 그리다 뛰어가 젖을 먹였다. 모두 학교 가고 조용해진 거실이 김인옥의 작업실이었다. 복닥거리는 현실에서 빠져나와 작품만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창 작업이 잘되는데 아이들이 배고프다고 하면 주방으로 달려가야 하고, 개인전 해야지 생각하고 있는데 남편이 ‘개인전 해야겠다’고 하면 말도 못했죠. 그래도 붓만 잡으면 행복했어요.”
   
   김인옥에게 그림은 ‘위로’였고 ‘희망’이었다. 항금리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서울을 오가며 마음속에 담은 풍경은 캔버스에 그대로 옮겨졌다. 현실이 힘들수록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그림에 담았다. ‘항금리 가는 길’이란 제목이 붙은 연작들은 현실은 안 되지만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것, 꿈꾸는 것들을 그린 것이다. 그의 그림은 채색동양화이다. 한지에 분채와 석채 등을 이용해 그린다. 언뜻 보면 유화 같지만 수묵화처럼 담백하면서 따뜻하게 마음에 스며드는 그림이다. 항금리 가는 길은 어린 시절 미루나무가 이어지던 고향길의 기억을 떠올리게도 했다. 가끔 그림을 본 사람들이 “항금리가 어디냐”고 물을 때면 이렇게 대답한다.
   
   “보시는 분의 마음의 고향이에요.”
   
   아트페어에 나갔을 때의 일이다. 엄마 손을 잡고 김인옥의 그림을 보러 온 한 아이의 말을 듣는 순간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알게 됐다.
   
   “아이가 그러는 거예요, ‘엄마, 여기에 오니까 너무 좋아’라고. 내가 그림 그리면서 갈등을 치유하고 행복해진 것처럼 보는 사람도 내 그림을 보고 행복해졌으면 했는데, 그걸 아이도 알아주는구나. 그런 사람들을 위해 게으름을 피면 안 된다는 책임감이 들었어요.”
   
   화가 남편이 보는 ‘화가 김인옥’에 대한 평가는 어떨까.
   
   “지독해요. 하루 서너 시간 자면서 버텨요. 난 예술도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그리는 만큼 늘어요. 나쁜 영화, 나쁜 노래는 있지만 나쁜 그림은 없잖아요? 작가들은 더 좋은 그림, 그보다 더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거죠. 최근 들어 더 좋아졌어요.” 남편에게 후한 점수를 받은 김인옥의 작품은 12월 15일까지 중국 베이징 798예술지구 ‘위드스페이스(WITHSPACE)’ 갤러리에서 전시하고 있다.
   
   
   “예술은 노력에 비례한다”
   

▲ (좌)최근 신축한 2층 규모의 작업실. 김강용의 입체 벽돌 작품이 한쪽에 전시돼 있다. (우)과거와 현대가 공존하는 집. 100년이 다 돼가는 한옥의 서까래와 온돌방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성실과 노력으로 말하자면 이 사람 따라갈 사람이 없어요.”
   
   옆에서 김인옥이 말을 받았다. 김강용은 30여년 캔버스 위에 ‘벽돌’을 쌓고 있다. 다가가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로 사실적인 벽돌이지만 김강용은 자신의 작품에서 벽돌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벽돌이 아니다. 마음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창이다. 그의 작품을 극사실화라고 구분하기도 하지만 김강용은 실제가 아닌 마음속의 상상을 그린 ‘상상화’라고 한다.
   
   모래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수시로 바다를 찾는다. 모래들도 태생이 어디냐에 따라 입자도 색깔도 다르다. 삶이 여백을 채워가는 과정인 것처럼 김강용은 딱딱한 의자에 앉아 왼쪽 위에서부터 오른쪽 아래로 한 치의 빈틈없이 시간을 채우고 이미지를 채워 간다.
   
   내년 2월 독일 전시를 앞두고 있는 김강용은 세계 화단에서의 성공을 자신하고 있다.
   
   “쾰른, 시카고, 마이애미 등 세계적인 아트페어를 나갔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어요. 국내서는 ‘웬 벽돌이냐’며 고개를 갸우뚱할 때 외국에서는 쉽게 공감해주고 작품을 사가는 겁니다.”
   
   2004년 김강용은 승부수를 던졌다. 홍익대 미대 대학원 교수직도 그만두고 미국 뉴욕으로 떠났다. 생활에 한 발을 담고 사느라 그림에 올인하지 못하는 것이 늘 아쉬웠다. 당시 김인옥의 반응은? “나도 꿈꾸던 일이었으니 그 마음을 누구보다 아는데 보내줘야죠.”
   
   화가들이 많이 사는 맨해튼 브리지 덤보(Dumbo)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스스로를 유배시켰다. 2년 동안 입안에 곰팡이 냄새 나도록 입을 닫고 그린 작품이 60여점 쌓였다. 시간을 요구하는 그의 작품을 생각하면 스스로도 놀라운 작업량이라고 했다. 그의 작업실을 찾은 아시아계 미술비평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2006년 뉴욕 맨해튼 뉴호프 갤러리에서 열린 초대전은 성공이었다. 벽돌을 소재로 옆면까지 캔버스를 확장한 그의 그림은 뉴욕 한복판에서 독창성을 인정받았다. 소더비와 크리스티 경매에서도 작품이 팔렸다.
   
   “난 순수한 국내파입니다. 국내서 커서 해외로 나가도 통한다는 것을 후배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여건이 안돼 유학을 못 가는 젊은 작가들, 유학을 못 가 좌절하는 후배들에게 노력하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어요.”
   
   
   “각자 열심히 살자”
   

▲ (좌)청소부터 하고 작업을 시작하는 김강용의 작업 공간. 붓도 한 치의 오차 없이 간격 맞춰 정돈돼 있다. (우)주변 땅을 조금씩 사들여 넓히면서 20년간 가꿔온 정원. 대부분 묘목으로 심은 나무들이 훌쩍 자라 있다.


   김강용이 양평으로 미국으로 작업실을 옮기며 한 단계씩 올라가는 동안 김인옥도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갔다. 이 집의 가훈은 ‘각자 열심히 살자’. 가훈은 두 딸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말귀도 잘 못 알아 들을 때부터 딸들 앉혀놓고 ‘치맛바람 펄럭이는 옆집 아줌마처럼 못 산다’고 일찍부터 선언했다.
   
   “엄마 아빠가 미술을 하니까 바쁘고 힘들잖아. 우리도 열심히 할 테니 너희도 알아서 열심히 공부해.”
   
   학교 준비물을 깜빡 잊고 간 딸이 “선생님한테 매 맞는다”면서 가져다 달라고 전화하면 엄마의 대답은 이랬다. “그럼 맞고 와.” 한두 번 그러고 나면 준비물은 알아서 척척 챙기더란다.
   
   그림을 그리는 큰딸 재원(30)은 진즉 독립해 ‘알아서’ 살고 있고, 중국에서 공부하고 싶다는 둘째딸 덕분에 김인옥은 중국에서 작업을 많이 하고 있다.
   
   부부는 얼마 전 큰일을 벌였다. 집 위쪽에 2층 규모의 작업실을 지은 것이 막 완공을 했다. 늘어나는 작품을 보관할 곳도 마땅치 않고 큰 작업을 하기에는 현재의 작업실이 너무 작았다. 완공하고 첫 손님이라면서 작업실로 안내했다. 아직 페인트 냄새도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1층은 작품을 전시해 놓고 2층은 넓은 작업실과 작품 보관실을 만들었다. 대형 작품을 운반할 수 있도록 작품용 엘리베이터도 설치돼 있다. 통유리 창밖으로 보이는 양자산의 능선이 김인옥의 작품과 언뜻 겹쳐져 보였다.
   
   김강용은 “새 공간에 적응하려면 한참 걸릴 것 같다”고 말했다. 몸에 익은 한옥 작업실 대신 새 작업실을 만든 것은 필요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해외 화랑 큐레이터나 외국 손님이 놀러 왔을 때 한국 화가들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제대로 된 작업실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주변 화가들에게는 넘치지 않게, 외국인들에게는 모자라지 않게 보이도록 적당한 규모로 짓느라 고민을 많이 했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유난히 귀에 박히는 단어는 ‘성실, 노력’이었다. 부부는 작품은 달랐지만 예술에 대한 생각은 같았다. 사람들이 갖는 편견 가운데 하나가 ‘예술은 자유·방황·일탈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부부는 “성실하게 가정을 일구고 열심히 노력하면서 시간과 함께 예술도 발전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미술시장에서도 ‘꼼수’가 판치는 것이 못마땅한 부부는 입을 모아 말했다.
   
   “세월은 노력하는 사람들 편입니다.”

 

건축상 받은 4억짜리 전원주택 “세 여자와 전쟁 치르며 지었어요”
건축가 강병국의 ‘상연재’

“이 집 설계를 맡긴 사람들요? 제 평생에 최악의 클라이언트였죠.”
   
   건축사 강병국(50·동우건축) 소장이 말한 문제의 건축주는 부인과 두 딸이다. 강 소장이 설계한 ‘이 집’에는 강 소장과 그를 가장 힘들게 한 고객인 ‘세 여자’가 살고 있다. 강 소장이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에 집을 지은 것은 2006년이다. 그전까지 아파트가 아닌, 더구나 서울 밖에서의 삶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계기는 돈 때문이었다. 부인이 운영하던 간호학원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서울 목동의 아파트를 팔아야 했다. 남은 돈으로는 서울에서 아파트 전세밖에 얻을 수 없었다. ‘차라리 서울 근교에 전원주택을 짓자’ 싶었다. 부지를 물색했다. 두 딸의 교육, 땅값, 출퇴근 거리를 고려해야 했다. 오포읍 능평리가 세 가지 조건에 맞아떨어졌다.
   
   강 소장의 전원주택 제의에 두 딸이 먼저 조건을 달고 나섰다.
   
   “알록달록한 집 아니면 싫어! 그리고 수영장.”
   
   노출 콘크리트 방식으로 무채색 일색인 아빠의 건축을 싫어했던 두 딸이 선수를 치고 나왔다. 부인은 한술 더 떴다.
   
   “그럼 난 사우나.”
   
   문제는 돈이었다. 여유만 있다면 수영장·사우나뿐이겠는가. ‘건축가’의 자존심을 걸고 얼마든지 멋있는 집을 지을 수 있었다.
   
   “일 년에 한 달 쓰자고 수영장을 꼭 만들어야겠어?” “원하는 대로 하려면 건축비 예산이 초과된다니까.”
   
   다른 건축주에게는 팍팍 먹히는 ‘예산 초과’란 단어가 ‘세 여자’에겐 도통 통하지를 않았다. 논리적 설득이 아예 불가능했다. 두 딸은 다른 집과 비교해가며 아빠의 자존심까지 건드렸다.
   
   “아빠는 왜 저 집처럼 못 지어?”
   
   부족한 예산, ‘세 여자’의 요구, 건축가의 자존심. 강 소장은 이 모든 것의 접점을 찾느라 고역을 치러야 했다. 건축 기간도 1년여가 걸렸다. 회사 다니면서 틈틈이 도면을 그려야 했고, 돈이 없는 만큼 그의 노력으로 채워야 할 부분이 많았다. 어쨌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고객인 ‘세 여자’의 요구대로 수영장, 사우나가 있는 알록달록한 집을 지었다. 집에는 한학에 조예가 있는 지인이 지어 준 ‘상연재(尙淵齋)’라는 이름을 붙였다. 상연재는 2008년 경기도 건축문화대상 동상을 받았다.
   
   
   알록달록 수영장이 있는 집
   
▲ 땅값·건축비·세금까지 포함, 총 4억원으로 지은 건축가 강병국의 집. 두 딸의 요구대로 수영장이 있는 알록달록한 집을 지었다.

   대지 515㎡(150여평, 도로로 24평 정도가 빠져 실제는 132평), 건축면적 86.9㎡(26평), 연면적 190㎡(58평)의 상연재를 짓는 데는 땅값, 건축비, 세금까지 포함해 총 4억원이 들었다. 옹벽이며 주차장까지 만들어진 땅값이 2억2000만원, 건축비가 1억6800만원, 중개수수료·세금 등으로 1000만원이 조금 넘었다. 건축비는 3.3㎡당 350만원. 일반적으로 400만원 정도가 들어가는데 건축가였기 때문에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다. 돈이 부족해 집 크기도 처음 계획보다 줄어들었다.
   
   12월 17일 상연재를 찾았다. 서울 광화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 남짓 걸렸다. 경기도 분당시와 광주시의 경계에 위치, 분당 중심가에서 차로 10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전원주택단지로 조성된 마을 이름은 ‘솔메마을’이라고 했다. 산이 빙 둘러싸고 있는 사이로 말발굽처럼 30여가구가 들어앉아 있었다. 그중에서 알록달록한 상연재는 주변의 다른 집들과는 확연하게 구별이 됐다.
   
   상연재는 집 입구부터 예상을 깼다. 마당으로 연결되는 보통 집과는 다르게 대문을 열면 벽이 가로막는다. 대문은 보기 드물게 폴리카보네이트(플라스틱의 일종)를 사용하고 중간에 색유리로 포인트를 넣었다. 색유리는 사무실에서 샘플로 굴러다니는 것을 살짝 들고 왔단다. 가장 싼 소재라서 선택했다는 폴리카보네이트 대문은 현대적이면서 독특하다. 대문에서는 집이 보이지 않는다. 벽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면 비로소 탁 트인 마당이 나타난다.
   
   2층으로 지은 집은 남향으로 일자형이다. ‘ㄱ자’ 형으로 짓고 싶었지만 예산이 허락하지 않았다. 폭은 좁지만 좌우로 긴 탓인지 평수보다는 훨씬 커 보였다. 녹이 슬지 않는 징크(zinc)를 테두리로 두르고 그 안에 대문처럼 색유리를 포인트로 넣었다. 집이라기보다는 마치 작은 미술관 같다. 테라스도 돌출 구조가 아니라 방처럼 만들었다. 천장과 정면 쪽을 뚫어 벽면에 빨간색으로 포인트를 줬다. 강 소장의 건축 스타일과는 다른 두 딸을 위한 ‘알록달록한’ 집이 탄생했다.
   
   
   건축에도 반전이 있다
   
▲ (좌) 순전히 재료가 싸서 선택했다는 폴리카보네이트 대문. 대문에서 반 층 정도 올라가야 마당이 나온다.
(중) 세 가지 색깔의 벽지 등 집안 안팎으로 색이 있는 집을 만들었다.
(우) 안방에 만든 천창. 침대에 누워 천창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 시간은 더없이 행복하다.
강 소장은 이 집의 곳곳에 반전을 숨겨놓았다. 동선의 흐름에 따라 긴장과 이완이 반복된다. 대문에 들어서면 막혔다가 확 뚫린 마당이 나타나고, 현관으로 들어서면 막혔다가 천장이 확 트인 거실이 나타나는 식이다. 다음 공간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할 수 있고 공간의 효과도 극대화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현관 쪽의 낮은 천장에 대비돼 거실 천장이 유난히 높아 보인다.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는 수은주에도 불구하고 햇볕이 쏟아져 들어오는 거실은 따뜻했다. 일자형의 집은 폭이 좁아 햇볕이 안쪽까지 충분히 들었다. 빛이 너무 많이 들어 한여름에는 덥지 않을까? 그런 의심을 품었다면 ‘건축가의 집’이란 것을 잠깐 잊은 것이다. 건물 전면에 약간 튀어나오게 둘러놓은 징크가 한옥의 처마 역할을 해서 여름엔 빛을 차단해준다. 여름과 겨울에 다른 태양의 고도까지 고려한 것이다.
   
   1층에 안방·거실·부엌이, 2층엔 두 딸의 방 2개와 작은 컴퓨터방이 있다. 컴퓨터방은 두 딸의 행동을 거실에서 ‘감시’할 수 있도록 유리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너무 비인간적이지 않느냐”는 항의에 부딪혀 그냥 벽으로 만들었단다.
   
   집이 현대적이라면 마당은 ‘매란국죽’ 사군자로 꾸몄다. 한쪽에 대나무 30여 그루를 심고 매화나무와 국화를 심었다. 번식력이 뛰어난 대나무는 곳곳에 무성한 뿌리를 내리고 겨울에도 푸른 잎을 자랑하고 있었다. 마당 양옆으로 소나무 두 그루가 휘어지며 점점 큰 그늘을 만들어 가고 있다. 마당 안쪽으로 두 딸이 소원했던 수영장이 있다. 10m 길이의 수영장 옆으로는 나란히 텃밭을 만들었다. 마지못해 만든 수영장은 기대 이상이었다.
   
   “아이들은 물론이고 여름이면 아내도 큰 튜브 위에 누워서 몇 시간이고 책 읽는 걸 즐겨요. 뉴스에선 폭염이라고 하는데 물속에 있다 보면 추워서 집에 들어올 정도예요. 텃밭도 바로 옆에 있죠, 고기 구워 먹다 더우면 물에 뛰어들면 되죠. 수중등을 설치해서 야경도 끝내주죠. 수영장이 주는 여유를 생각하면 처음에 너무 경제논리로만 따졌다 싶더라고요.”
   
   수영장뿐만 아니라 전원주택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것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 아파트에 살 때는 계절이 어떻게 지나가는 줄도 몰랐지만 여기선 하루하루 자연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낀다. 분당에서 고작 10여분 거리인데도 밤하늘은 별천지다. 안방에 천창(지붕에 낸 유리창)을 만들어 놓아 침대에 누우면 얼굴 위로 별빛이 쏟아진다. 비오는 날이면 ‘후두둑 후두둑’ 2층 높이의 천창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더없이 운치 있다. 부인은 지금도 비가 오면 천창 밑으로 달려와 빗소리를 들으며 행복해한다. 텃밭에서 얻는 기쁨도 크다. 가족 수대로 방울토마토 네 그루를 심고 “하루에 열 개씩은 먹자” 했는데 미처 따먹지도 못할 만큼 주렁주렁 열렸다. 겨울이라 방치된 텃밭에 남아있는 치커리 몇 포기가 무성했을 수확을 짐작하게 했다.
   
   
   사람을 생각하는 건축
   
▲ 안방의 창문을 일반적인 창문과는 다르게 아래쪽에 설치했다. 수영장에 붙은 데크와 바로 연결된다.

   문제는 자연의 여유가 거저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잔디며 텃밭이며 손길을 필요로 하는 것도 상상 이상이었다. 잔디는 왜 그렇게 빨리 자라는지, 텃밭도 조금만 소홀하면 엉망이 되지, 바비큐도 먹을 땐 좋지만 뒤처리하려면 보통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마당 관리는 철저하게 강 소장 담당이다. 강 소장의 노동에는 관심 없는 ‘세 여자’는 전원생활의 즐거움에 푹 빠졌다. 어느날 셋이서 모여 이런 결의를 하더란다. “우리 이젠 아파트에서 살지 말자!”
   
   그나마 이사 와서 1년은 시간 여유도 있고 집 꾸미는 재미도 있었다. 중국산 돌부처며 석탑을 사다가 갈고 다듬어 새로운 조각품을 만들기도 했다. 회사일이 바빠지면서 점점 마당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최근 2~3년은 365일 야근하느라 아예 마당 쳐다볼 시간도 없단다. 야근에 얼마나 지쳤으면 그는 사무실 컴퓨터 모니터에 ‘부적’을 붙여놓았다. ‘야근 물리치고 칼퇴 불러오는 부적’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아직까지 효험은 전혀 없단다.
   
   “그래도 바쁜 만큼 회사가 잘되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몰라서 하는 소리란다. “건축사무소에서 일이 많은 것은 그만큼 하고 있는 일이 없다는 이야기예요. 수주를 따기 위해 계속해서 이곳저곳에 입찰제안서를 들이밀어야 하니 안에서만 정신없이 바쁜 거지요.”
   
   강 소장은 상연재뿐 아니라 수상 경력이 화려하다. 그가 설계한 논산의 생폴 요양원은 2004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을 받았고, 서울 신촌연세세브란스 종합관은 2009년 서울시 건축상 우수상을 수상했다. 호서대 산학중심대학도 아산시 최우수상을 받았다.
   
   그는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이라고 했다. ‘사람’을 생각하지 않은 건물은 조형물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사람을 위해 건물을 지으면서 정작 사람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요. 겉에서 보면 밋밋하지만 살면서 좋아지는 건물이 좋은 건축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식적 요소보다 자연과 빛을 이용한 설계를 좋아합니다. 시시각각 변하는 빛이야말로 더없이 훌륭한 디자인이죠.”
   
   
   영화에게 건축을 묻다
   
▲ 2층 테라스 공간. 밖으로 돌출되지 않고 방처럼 만들었다. 이곳에서 가끔 바비큐 파티가 벌어진다.
그는 건축과 사람과의 연결 고리를 영화에서 주로 찾는다. 영화 매니아인 그는 건축사협회서 주관하는 건축영화제 부위원장을 맡고 있다. 건축영화제는 올해 4회째로 매년 10월쯤 열린다. 그가 전원주택을 택한 이유 중의 하나가 영화 때문이었다. 아파트에서는 아무리 방음에 신경을 써도 마음껏 음향을 즐기기 힘들었다. 집을 지으면서도 신경을 쓴 것이 영화감상을 위한 시설이었다. 높은 천장의 거실 한쪽 벽에 150인치 프로젝트용 스크린을 설치했다. 스크린 뒷벽은 음향효과를 살리기 위해 나무 막대를 일정한 간격으로 배열해 사이사이 홈을 만들었다. 편안하게 소파에 앉아 마음껏 볼륨 높여놓고 영화 감상 하는 행복은 이 집에 이사 와서 누리는 최고의 호사였다. 아쉽게도 몇 년째 영화관은 폐업 중이다. 호환마마보다 무서운 ‘고3’이 닥쳤기 때문이다. 큰딸에 이어 올해 둘째가 줄줄이 대학 입시를 치렀다. 입시도 끝났고 다시 영화관을 꾸밀 기대에 부풀어 있다.
   
   비록 ‘365일 야근’에 삶은 묶여 있지만 예술가의 끼는 호시탐탐 그를 유혹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는 화가를 꿈꿨다. 대학 때는 드러머로 대학가요제에 출전한 적도 있다. 나이 오십을 넘긴 요즘도 영화감독을 꿈꾼다.
   
   가슴 한편에 꿈을 담고 사는 건축가, 그는 두 번째 ‘우리 집’을 구상하고 있다.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남는 상연재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이다. 그중에서 절대 반복해선 안될 ‘실수’가 있단다.
   
   “마당 건사하는 것이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니까요. 잔디 안 깎아도 되고, 텃밭하고 씨름 안 해도 되고, 손길 안 가도 되는 마당을 만들 겁니다. 그런 마당이 어디 있느냐고요? 다 방법이 있어요. 하하.”

 

남도 끝자락 토굴에서 바다가 낳은 分身들과 놀고 있다
소설가 한승원

▲ 소설가 한승원이 고향 장흥에 내려와 지은 작업실 ‘해산토굴’.
남해를 떠돌다 숨어든 바다를 기꺼이 품고, 땅의 기운이 흘러 닿은 곳. 민물과 짠물이 몸을 섞어 끊임없이 생명을 잉태하고, 질펀한 삶이 속살을 드러내는 남도의 자궁 같은 곳, 장흥반도에서 득량만에 이르는 바다가 바로 그런 곳이다. 바다를 바라보고 천관산, 제암산, 사자산, 억불산 등 명산들이 호위하듯 늘어서 있다. 소설가 한승원(73)은 그 바다에 탯줄을 묻었다. 1968년 ‘대한일보’에 소설 ‘목선’이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 40여년, 고향의 바다와 갯벌은 한승원 문학의 텃밭이었다. “내 소설의 9할은 고향 바닷가 마을의 이야기”라는 그의 고백처럼 그의 뼛속까지 바다와 갯벌의 삶이 새겨져 있다. 고향의 바다 냄새가 닿지 않은 도시생활은 그의 몸을 지치게 만들었다. 심장은 엇박자로 뛰고, 비릿한 갯내음에 익숙한 그의 위장은 도시의 음식을 거부했다. 몸의 병만큼 마음의 고통도 깊어졌다. 고향의 바다를 보면 부정맥도 위장병도 씻은 듯이 나을 것 같았다.
   
   50대 중반, 17년 서울살이에 마침표를 찍고 ‘어머니의 자궁’ 같은 고향 바다로 되돌아왔다. 고향을 떠난 것이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진학하고부터이니 35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서울 광화문에서 정남진(正南津), 물리적인 거리만큼 문단에서도 사람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짐을 감당해야 하는 길이었다.
   
   전라남도 장흥군 안양면 율산마을, 득량만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토굴’을 마련하고 지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실제 거처가 ‘토굴’은 아니지만 스님이 수행하듯 글쓰기에 몰두하겠다는 그의 의지를 담아 자신의 호인 해산을 붙여 ‘해산토굴(海山土窟)’이라 이름 지었다. 해산토굴을 방문한 한 스님이 현판을 보고 농담을 하더란다. “날마다 해산(解産)을 하겠구먼요.” 나이 들어서도 작품 활동의 속도를 늦추지 않는 그가 이곳에서 해마다 새로운 소설을 생산하고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포구의 달’ ‘해산 가는 길’ ‘아제아제바라아제’ ‘화사’ ‘사랑’ ‘초의’ ‘키조개’ ‘다산’ ‘추사’ 등 소설을 비롯해 시집, 수필집, 동화책에 이르기까지 그가 40여년간 펴낸 책이 80여권에 이른다. 그는 대표적인 ‘다산(多産)’ 작가로 꼽힌다.
   
   
   해산토굴 가는 길
   
▲ 장흥군에서 지어준 한승원문학학교.
장흥 읍내에서 해산토굴로 가는 길, 오른편 산 중턱에 큰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그가 고향에 진 빚을 갚는 마음으로 썼다는 소설 ‘피플 붓다’(2010년)의 배경이 된 억불산(憶佛山)이었다. 그의 소설 속을 달리고 있는 것처럼 장흥의 풍경들이 낯설지 않게 다가왔다. 율산마을 입구에는 ‘해산토굴 가는 길’이라고 쓰인 커다란 안내석이 서 있다. 장흥군에서 방문객의 길 안내를 위해 세워놓았는데, 간혹 젓갈 삭히는 토굴로 오해를 하고 “새우젓 안 파느냐”면서 불평을 뱉고 돌아서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해산토굴은 70여가구가 사는 마을의 맨 위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토굴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이 낯선 방문객을 막고 나섰다. 비석에는 ‘당신의 출입이 저의 글쓰기를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 토굴주인 아룀’이라는 글귀가 써 있다. 예고 없이 작가의 작업실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아 세워둔 것이란다. 붉은 기와를 얹은 작업실은 지붕이 높은 것 외엔 특별해 보일 것이 없다. 바닷바람이 울타리를 대신하고 있는 대나무를 흔들고, 처마 끝에 매달아놓은 풍경을 건드리고 지나갔다. 풍경이 귀를 씻어 주듯 맑은 소리를 냈다. ‘해산토굴’이라고 쓰인 나무현판 밑의 문을 열고 작가 한승원이 나왔다. 그의 얼굴은 맑고 건강해 보였다.
   
▲ 한승원 문학의 텃밭인 득량만이 내려다보이는 장흥 율산마을.

   토굴로 들어서자 입구부터 신문·책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바닥에도 돋보기며 신문, 편지들이 제멋대로 널려 있다. 그가 바닥에 있는 신문을 보며 “올해 신춘문예 당선 작품들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고 말했다. 토굴은 거실과 집필실을 비롯한 작은방 두 개, 화장실이 전부. 글쓰기에 필요한 것 외에는 일절 장식도 가구도 없이 단출하다. 빈 공간은 모두 책꽂이가 차지하고 있다. 집필실로 쓰고 있는 작은 방은 거실에서 서너 계단 위에 올라가 있다. 그가 “집 짓는 사람이 괜히 멋을 부린다고 계단을 만들어 오르내리기만 불편하다”고 말했다.
   
   집필실에는 책장과 구형 컴퓨터 모니터가 놓여 있는 낡은 책상뿐이다. 그나마 글쓰기 외에는 관심도 없고 시간을 나눌 생각도 없는 주인 덕분에 곳곳에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다. 모니터 가장자리며 책상 옆, 책꽂이 등 빈 공간엔 메모지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메모지엔 문서 작성 등 컴퓨터 사용법부터 작품과 관련된 정보들이 빼곡히 적혀 있다. 이 작은 공간에서 문단에 ‘한승원’이라는 한 세계를 구축한 작품들이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곳을 ‘공장’이라 불렀다. 집필실도 어질러져 있기는 마찬가지. 이곳저곳 책들만 뒹굴고 있는 공간은 진짜 ‘토굴’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소설 속 주인공들과 하루 종일 놀지!”
   
▲ 해산토굴 뒤에 손수 일군 차밭.

   “원체 정리하는 데는 취미가 없어서…, 그나마 온다고 해서 아침에 힘들게 치운 거요.”
   
   그가 겸연쩍게 웃으며 녹차를 내놓았다. 녹차는 집 뒤에 그가 일군 1983㎡(600여평)의 차 밭에서 직접 수확하고 덖은 것이라고 했다. 정남쪽을 향하고 있는 거실 창호지 문을 열자 시선을 막아서는 것 하나 없이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바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고흥반도 끝자락과 소록도, 거금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이곳이 원래 그의 고향은 아니다. 서쪽으로 30여분 더 달려 회진면 회진리 맞은편에 있는 덕도라는 섬이 그의 고향이다. 지금은 연륙교로 연결이 돼 있고 제주행 배가 떠나는 노력항이 근처다. 회진리 옆에 있는 진목리는 소설가 이청준이 태어나고 묻힌 곳이다.
   
   그의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덕도와는 떨어져 있지만 ‘해산토굴’ 터가 마음에 들어 진즉부터 점찍어 뒀었다. 주인이 땅을 안 팔아 마을 가운데에 살림집을 먼저 짓고 살다가 3~4년 늦게 ‘해산토굴’을 지었다. 토굴 뒤 차밭은 대밭이었다. 부인(임감오·71)과 함께 대나무를 뽑아내고 밭을 일군 후 차나무 씨앗을 심었다. ‘병아리 키우듯’ 작은 싹부터 키운 차나무가 올해로 여덟 살이 됐다. 인위적인 재배가 싫어 내버려둔 차나무는 어른 허리 높이만큼 자라 있다. 차밭을 위해 움직이는 일은 봄에 무섭게 번식하는 죽순을 솎아내는 일뿐이다. 차밭 중간중간에 일부러 남겨 놓은 대나무가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이게 바로 대나무 이슬을 먹고 자라는 죽로차예요. 자연이 알아서 다 키워주니 그야말로 유기농이죠. 이제 다른 차는 못 먹어요.”
   
▲ 한승원이 자신의 무덤이라고 마당에 만들어 놓은 삼층석탑과 석상.
‘이태백은 마음이 흔들리면 술을 마시지만 나는 차를 마신다. 차를 마시면 슬픔과 우울에서 깨어난다. 차는 깨달음을 낳는 자궁이다.’ 그가 어느 책에선가 차에 대해 쓴 글이 생각났다. 대밭 자리여서인지 지네가 들끓어 고생을 했다. 지네에게 몸 보시를 한 이야기는 글로 쓰이기도 했다. 이곳의 소소한 일상들은 모두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간다. 그는 매일 오전 6시에 일어나 아침밥 먹기까지 1~2시간, 아침밥 먹고 1~2시간 작업을 한다. 오후엔 주로 낮잠을 자고 따뜻한 날엔 바닷가로 산책을 나간다.
   
   질문에만 대답하며 말을 아끼던 그가 창가에 놓인 난 화분 쪽으로 다가갔다.
   
   “난이 땀 흘리는 것 봤어요? 이게 난이 사력을 다해 꽃을 피우느라 흘린 땀이 굳어진 거예요. 보석 같죠.”
   
   이슬이 맺혀 있는 것 같은 동양란 꽃대를 보여주며 그는 아이처럼 얼굴이 환해졌다.
   
   “양란 뿌리 올라온 것 좀 봐요. 내 혼령이 공중에 떠다니면 빨려 들어갈 것 같아.”
   
   적적하지 않으냐는 물음에 “내 소설 속 주인공들하고 사느라 심심할 틈이 없다”고 하더니 보잘것없는 나무뿌리 하나도 소설가에게는 무한한 상상의 세계가 되는 모양이었다.
   
   
   “미쳐야 한다”
   
   책장 옆에 놓여 있는 그림 한 점이 눈에 띄었다. 장흥 출신의 한국화가 김선두(54·중앙대 교수)의 작품이라고 했다. 메모판으로 쓰라면서 유리 액자를 만들어준 것이란다.
   
   ‘광기(狂氣)’.
   
   유리판에 낙서처럼 휘갈겨 써놓은 단어가 궁금했다.
   
   “미치지 않으면 안 돼요. 미친 듯 글을 쓰자는 생각으로 늘 가슴에 담고 있지.”
   
▲ 해산토굴 앞에 예고 없는 방문객을 막는 비석이 서 있다.
최근 2~3년 그가 펴낸 소설을 보면 미친 게 맞다. 2010년 자전적 소설인 ‘보리 닷되’에 이어 ‘피플 붓다’를, 지난해 3월엔 역시 항구와 포구를 배경으로 한 장편 ‘항항포포’를 펴냈다. 완성해 놓은 소설도 두 편이다. 판소리에 대한 이야기와 전봉준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이 출간 대기 중이고 올 봄엔 시집도 한 권 낼 예정이다. 젊은 작가들도 따라오기 힘들 만큼 왕성하다.
   
   알려져 있다시피 ‘글쟁이’의 유전자는 아들, 딸에게로 이어졌다. 그는 가장 큰 효도는 “業을 잇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 ‘유령’을 펴낸 한동림(44)이 큰아들이고, 소설가 한강(42)이 딸이다.
   
   딸은 아버지에 이어 ‘이상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 부녀가 같은 상을 받는 기록을 남겼다. 사위 홍영희씨도 문학평론가로 활동하는 등 대표적인 문학가족이다. 남매는 1995년, 1996년 잇달아 서울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등단했다. 한강은 최근에 장편 ‘희랍어 시간’을 펴냈다. 그에게 딸의 소설을 어떻게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한마디로 끝내고 만다.
   
   “너무 어려워.”
   
   서로의 색깔이 다르니 남매에게 작품에 대해 말을 보탠 적은 없다. 아버지의 큰 그늘이 남매에겐 부담일 것이었다. 그는 단지 아이들이 치열하게 글쓰기를 바랄 뿐이다. 한길을 걷는 아이들에게 앞서서 걷고 있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치열함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말한다. “살아있는 한 글을 쓰고, 글을 쓰는 한 살아있을 것”이라고.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글을 쓰고 뼈를 묻을 생각이다.
   
   
   “여기가 바로 내 무덤”
   

   “여기가 바로 내 무덤이오.”
   
   그가 마당에 있는 삼층석탑을 가리켰다. 근처 보림사의 삼층석탑을 축소해 만들었다고 한다. 석탑 앞에는 상석(床石)도 만들어 놓았다.
   
   “아이들한테도 나 죽으면 화장해서 저 바다에 뿌리고 나머지는 이 석탑에 보관하라고 일러두었어요. 앞에 묘비도 만들어두었어요.”
   
   상석 옆 시비에는 그의 시 ‘나무’가 적혀 있었다.
   
   “푸른 우듬지 하늘로 쳐들고 있는 나무 근본 진리에 귀의한다는 뜻을 천축나라 왕자가 ‘나무南無’라 말하라 했는데 나는 나 없음의 ‘나무我无’라 소리냅니다. 나 이르고 싶은 곳 어딘지 아십니까. 푸르른 내 고향 하늘太虛입니다.”
   
   죽어서도 고향의 하늘에 이르고 싶다는 그를 위해 고향 장흥군은 ‘해산토굴’ 바로 밑에 토굴보다 훨씬 큰 한승원문학학교를 세웠다. 그곳엔 그의 시 제목을 따서 ‘달 긷는 집’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1년이면 1500여명이 와서 그의 문학 강의를 듣고 간다. 군은 또 해산토굴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여닫이 해변길에 한승원 산책로도 만들었다. 600m의 산책로를 따라 20m 간격으로 그의 시가 적힌 시비 30여개가 이어진다.
   
   그와 함께 산책로로 나갔다. 남도의 겨울바람도 꽤 매서웠다. 산책로와 나란히 아름다운 곡선을 자랑하는 해변이 이어졌다. 그가 ‘꼬마 나폴리’라고 자랑했다. 해변엔 그의 소설 속에서 튀어나온 넓은 갯벌이 싱싱하게 살아 숨을 쉬고 있었다. 그에게는 돈으로 쌓아올린 거창한 집이 필요없어 보였다. 그 바다가, 그 갯벌이 그를 품고 키워준 어머니의 자궁이자 그의 영혼이 숨 쉴 수 있는 집이기 때문이다. 그 집에서 그는 오늘도 갓 건져 올린 싱싱한 언어들로 삶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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