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무송과 관우가 마신 술 황주(黃酒)

醉月 2012. 1. 27. 19:14

‘수호지’ 최고 호걸 중 한 명인 무송(武松)은 사발로 술을 18잔을 마시고 고개를 넘다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
무송이 우리가 흔히 아는 중국술 백주(白酒)를 18사발 마셨다면 호랑이를 때려잡기는커녕 주막을 나서지도 못했을 것이다. ‘삼국지’의 관우는 ‘데운 술이 식기도 전에’에 화웅의 목을 베고 돌아와 따뜻한 술을 들이켰다. 관우가 마신 술도 삼국지(189~280)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면 당연히 발효주였을 것이다. 고량주와 같은 독한 술을 데워 마신다는 개념 자체가 어색하다.
중국 4대 기서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어떤 술을 마셨을까.


 옛 중국의 4대 기서(奇書·‘삼국지연의’ ‘수호지’ ‘서유기’ ‘금병매’) 중 하나로 손꼽히는 수호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원래 이름이 수호전(水滸傳)인데, 글자 그대로 ‘물가에서 일어난 이야기’라는 뜻이다. 책 내용은 양산박(현재의 중국 산둥(山東)성 수장(壽張)현 근처로 추정)이라는 수상 세계를 무대로 권력의 부당한 압제에 항거하는 호걸 108명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양산박의 주요 인물 중 상당수는 당시 하급군인과 직책이 낮은 행정관리 출신으로, 비록 그 지위는 높지 않았지만 이들 한 명 한 명이 모두 민중 지도자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북송(北宋·960~1127)의 제8대 황제인 휘종의 치세...   

 

황주의 대표 술인 소흥주. 

 오늘날 볼 수 있는 전형적인 백주의 경우, 알코올 농도가 50도 이상인 제품이 허다하다. 그런데 이렇게 높은 도수의 술을 만드는 데 필요한 증류 기술은 세계 최대 제국을 건설한 몽골의 전성기 때 아랍 세계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중국 명나라 시절의 이시진이 저술한 유명한 약학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서도 ‘증류주인 소주는 과거에는 없었고 원나라 때부터 나타난 술이다. 소주를 만들려면 보통 술을 용기에 담아 끓여서 증기가 오르게 해 그릇에 떨어지는 술 방울을 받아 담는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지금도 볼 수 있는 소줏고리로 소주를 내리는 전통적인 방법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 또한 우리나라 소주가 고려 시절 몽골 침략 당시 몽골군에 의해 그 제조 방식이 소개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랄 일이 아니다. 오늘날 전통 제조 방식에 의한 생산으로 유명세를 타는 안동소주도 과거 안동에 몽골군의 병참기지가 있던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아랍에서 들여온 白酒

물론 일부에서는 간헐적인 자료를 토대로 중국에서의 증류주 역사가 이보다 더 오래되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아직 학문적으로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내놓지는 못하고 있다.

중국술의 기원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의적(儀狄)이다. 서한(西漢) 때의 책인 전국책(戰國策)에는 “옛날 황제(黃帝·중국 전설상의 임금)의 딸 의적이 술을 맛있게 빚어 하나라 우왕에게 올렸더니, 우왕이 이를 맛보고는 후세에 반드시 술로써 나라를 망치는 자가 있으리라고 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 한 명은 하나라의 다섯 번째 왕으로 알려진 두강(杜康)으로, 지금도 그의 고향인 중국 허난(河南)성 뤼양(汝陽)현에서는 두강의 업적을 기린 기념관과 함께 매년 술의 시조로 모시는 제사가 행해지고 있다. 역사학적 고증 측면에서는, 두강 쪽이 보다 많은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어차피 술이라는 것이 특정한 사람의 창의적 발명품이 될 수 없기에 논쟁 자체가 의미 없는 일인지 모른다.

 

이 때문인지 옛 중국의 대표적 시인 도연명(365~427)은 이 두 명을 엮어 ‘의적이 술을 만들었고, 두강은 이를 발전시켰다’라고 나름대로 슬기롭게 이들 관계를 정리하기도 했다. 현재 두강기념관은 ‘옛 두강이 만든 술은 오늘날의 백주가 아니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었다. 따라서 몽골제국(1206~1368) 이전의 중국에서는 증류주인 백주를 마셨던 것이 아니라 도수가 그리 높지 않은, 오늘날의 와인이나 막걸리와 같은 발효주 계통의 술을 마셨던 것이다. 수호지의 무송이 마셨던 술도 그 무대였던 북송이라는 시대를 감안하면 당연히 그런 종류의 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천하의 무송이라 한들 오늘날의 고량주와 같은 술을 사발로 18잔을 마시고 호랑이를 때려잡거나, 30사발이 넘는 술에 맨 정신의 천하장사를 상대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술로써 일세를 풍미했던 천하의 이태백(701~762)인들 그의 유명한 시 ‘월하독작’에서 ‘꽃발 가운데 술 한 항아리(花間一壺酒) / 함께 한 이 없이 홀로 마신다(獨酌無相親)’를 읊으면서, 그 독한 고량주를 혼자서 항아리째 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시상이 떠오르기는커녕, 즉시 혼수상태로 들어가 생명이 위태한 지경에 처했을지 모른다.

또 다른 중국 4대 기서의 하나인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유명한 장면 하나를 생각해보자.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부연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소설이다.

 

중국 한나라 말기의 혼란기에서 시작해 새로운 질서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이른바 삼국정립(三國鼎立)의 형세를 만든 위, 촉, 오 세 나라를 둘러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14세기에 만들어진 이 장편소설은 영원한 베스트셀러로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영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그야말로 쟁쟁한 영웅호걸들과 지도자들이 등장하는 이 책의 인물 중에서 단연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은 도원결의(桃園結義)로 의형제의 연을 맺게 되는 유비, 관우, 장비다. 그밖에 세 의형제에 견줄 만한 스타급 등장인물로는 제갈공명, 조자룡, 조조, 여포 등을 꼽을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수호지 등장인물들을 삼국지의 영웅들과 비교해본다면, 무송은 관우형 인물이고 무송과 견줄 만한 또 다른 호걸 임충은 조자룡형 인물이라고 하겠다.

 

아무튼 삼국지연의의 수많은 등장인물 중 관우는 무용에서나 그 인품 면에서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독보적이다. 오관참육장(五關斬六將)의 무용담을 필두로 삼국지연의 곳곳에서 그의 활약은 별처럼 빛난다. 특히 그는 무장으로서의 출중한 실력을 넘어 인격적으로도 여타 장수들과는 격이 다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오죽하면 후세에 그의 사당을 지어 신(關神)으로 모시며 추앙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줄을 짓겠는가. 이런 관우가 아직 세상에 제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책 초반부 이야기다. 당시 한 왕실을 유린하고 있던 동탁에 맞서 원소를 맹주로 한 중국 천하의 제후 연합군이 대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유비와 함께 관우, 장비도 비록 변변치 못한 지위였지만 연합군에 합류하고 있었다.

 

화웅의 목을 벤 관우

그런데 연합군은 사수관(?水關)이란 곳에 이르러 동탁군의 맹장 화웅에 의해 가로막히고 만다. 사나운 화웅은 연합군 장수들을 추풍낙엽처럼 처치하며 연합군을 꼼짝도 못하게 만든다. 원소는 연합군의 제후, 장수들과 대책을 논의하면서 뾰족한 수를 내지 못하고 “이 자리에 나의 장수 안량과 문추 중 한 사람만 있었더라도 저까짓 화웅 따위에게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라고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자 당시 마궁수(馬弓手)라는 보잘것없는 직책에 있던 무명의 관우가 앞으로 나서면서 자기가 화웅의 목을 베어 오겠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듣고 원소의 사촌 아우 원술이 대뜸 “아무리 우리가 이런 처지에 있다고 하더라도 미관말직의 현령(유비를 일컬음) 밑에 있는 마궁수 따위를 장수로 삼아 화웅의 상대로 내보낸단 말입니까?”하고 말하며, 당시 시골 현령 직에 있던 유비까지 싸잡아 조롱한다. 관우의 발언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좌장 원소도 원술의 의견에 동조한다. 이때 장차 삼국지연의 내내 관우와 특별한 인연이 지속되는 삼국지의 또 다른 주인공 조조가 나서면서 “그의 용모가 예사롭지 않으니 한번 기회를 주어봅시다”라며 관우를 거들고 나선다. 이에 관우도 “화웅의 목을 베어 오지 못하면 저의 목을 바치겠습니다”라며 출전 의지를 다시 내세운다. 그러자 원소도 마지못해 그의 출전을 허락한다.

 

여기서 그 유명한 ‘데운 술이 식기도 전에’라는 일화가 탄생한다. 즉 출전하는 관우에게 조조가 데운 술을 권하며 “이 술 한 잔을 들고 가시오”라고 하자, 관우는 “술은 그냥 두십시오. 갔다 와서 마시겠습니다”라며 일단 사양한다. 그러고는 출전하자마자 순식간에 화웅의 목을 베고 온 뒤 그 술을 마시니, 술은 식지 않고 여전히 따뜻한 상태였다는 것이다.

 

   

일본 전통주 사케.

 

이때 관우가 마신 술도 삼국시대(189~280)의 시대적 배경을 감안할 때 당연히 발효주였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술을 데워 마셨다’는 그 기술이다. 술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고량주와 같은 독한 술을 데워 마신다는 개념 자체가 매우 어색하다. 더욱이 관우가 마신 술이 증류주는 아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쉽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발효주만을 놓고 보면, 술을 따뜻하게 해서 마시는 풍속은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술을 마시는 것은 오랜 옛날부터 세계 각국에서 행해지던 음용법이었다. 일본의 전통술인 일본주(사케)는 오늘날 우리에게 데워 먹는 술로는 가장 널리 알려졌다. 물론 지금도 고급 일본주는 차가운 상태에서 그대로의 향과 맛을 즐기지만, 추운 겨울날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사케 한 잔은 그 특유의 풍미로 애주가들을 사로잡고 있다.

 

데워 마시는 사케와 글루바인

또 독일에서 유래된 글루바인(Glu‥hwein, warm wine)은 와인에 각종 향료들과 과일, 그리고 설탕을 넣은 뒤 데워 마시는 술로, 유럽의 대표적인 ‘데워 마시는 술’이다. 이 술은 영어로는 멀드 와인(Mulled Wine), 프랑스어로는 뱅쇼(Vin Chaud)라고 한다. 주로 크리스마스 시즌을 중심으로 겨울철에 마시는 이 술은 적포도주를 이용해 만드는데,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일부 와인 바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중국에서도 주로 데워서 마시는 유명한 술 종류가 하나 있다. 앞서 삼국지연의에서 관우가 마신 술이 발효주라는 것과 데워서 마셨다는 두 가지 점을 고려하면 이 술과 거의 같은 형태의 술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황주(黃酒)라는 이름을 가진 또 하나의 중국 전통술이다.

 

황주는 흰색(실제로는 투명한 색)을 띠고 있어 백주라는 이름이 붙은 중국 전통 증류주에 견주어, 술의 색깔을 감안해 붙여진 이름이다. 참고로 와인의 경우 적포도주의 특징적인 색깔 때문에 중국에서는 홍주(紅酒)로 불린다.

황주는 찹쌀 또는 차조를 주원료로 만든 발효주로서 발효에 보리누룩을 사용해 짙은 황색을 띤다. 알코올 도수는 같은 발효주인 와인이나 일본 청주와 비슷한 14~18% 이고, 맛이 진하면서도 부드러워 각종 요리 맛을 내는 데에 사용된다. 황주는 그 오랜 역사와 함께 종류도 셀 수 없이 많지만, 현재는 백주가 워낙 인기를 끌면서 상대적으로 생산지가 줄어 그 생산량도 함께 줄고 있다.

 

황주 중 가장 유명한 술은 단연 소흥주(紹興酒)다. 소흥주의 생산지인 사오싱(紹興) 현은 중국 저장(浙江)성에 있는 작은 도시로, 역사적으로는 춘추시대 월(越)나라 수도가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바로 그 유명한 와신상담(臥薪嘗膽) 고사의 주인공인 월왕 구천이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역사를 썼던 곳이다. 월왕 구천이 쓰라린 패전 이후 오왕 부차에게 바쳤던 술이 소흥주라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와신상담 과정에 구천이 온갖 모욕을 견디면서 복수의 칼날을 갈며 부하들과 남몰래 마셨던 술도 바로 소흥주였을 것이다. 사오싱현은 근대 중국의 대문호 루쉰(魯迅)을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황주의 대표 소흥주

소흥주는 이렇게 황주 중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술이다. 찹쌀을 보리누룩으로 발효시켜 사오싱현 교외에 있는 약간의 미네랄이 포함된 젠후(鑒湖)의 물로 빚는다. 누룩 이외에 신맛이 나는 재료나 감초를 원료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제조 방법은 찹쌀에 누룩과 술, 약을 넣어 발효시키는 복합발효법이 주로 사용된다. 색깔은 황색 또는 암홍색으로, 오래 숙성하면 향기가 더욱 좋아져 상품가치가 높아진다.

 

소흥주는 만드는 방법에 따라 원홍주(元紅酒), 가반주(加飯酒), 선양주(善釀酒), 향설주(香雪酒) 4가지로 나뉜다. 이 중 원홍주와 가반주는 약간 쓴맛이 돌고, 나머지는 단맛이 난다. 원홍주는 소흥주 전체 생산량의 80%를 차지할 정도로 생산량이 많다. 1979년 전국평주회의(全國評酒會議)에서 우량주로 선정되기도 했다. 원홍주라는 이름은 술 가마에 붉은 칠을 해 붙여졌다고도 하고, 첫째로 맛있는 술이라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반면 가반주는 그 이름 때문에 반주로 마시는 술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다른 소흥주에 비해 찹쌀을 10%가량 더 사용하기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향설주는 도수가 20% 정도로 비교적 높으며 그 맛은 달고 향이 진하다. 선양주는 원홍주를 2~3년 묵혔다가 빚은 것으로, 옛날 어떤 선량한 노파가 신선으로부터 이 술을 얻었다 해서 이러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소흥주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사오싱 인근에 살던 한 남자가 아내가 아이를 갖자 기분이 좋아 아이가 태어나면 친구들에게 대접하기 위해 술을 빚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딸이 태어나자 화가 나 술을 마당 한구석 나무 밑에 묻어버렸다. 훗날 딸이 총명하게 자라 시집을 가게 되었는데, 즐거운 마음으로 친지와 함께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옛날 묻어버렸던 술이 생각나 땅을 파보니 아주 맛있는 술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술을 ‘뉘얼훙(女兒紅)’이라고 불렀으며 그 후 사오싱 지방에서는 딸을 낳으면 술을 빚어 땅에 묻어두는 관습이 생겼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소흥주 뉘얼훙이 탄생한 배경이다.

 

이밖에도 소흥주에는 유명한 화조주(花雕酒)가 있다. 이것은 가반주의 하나인데, 소흥 지방에서 예로부터 딸을 갖게 되면 가반주를 빚어 꽃을 그려 넣은(花雕) 항아리에 담아두었다가 딸의 혼례를 치르는 날 축하주로 내놓는 습속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는 술을 담은 술독에 꽃무늬가 배어나온다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한다. 보통 10년 정도 숙성시켜 만든다. 이런 까닭에 술을 얼마큼 묵혔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화조주도 가반주에 속한다. 이렇게 해서 특히 오래 묵힌 술은 이름 앞에 ‘천녠(陳年)’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여기서 ‘천(陳)’은 오래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소흥주는 앞서 말한 대로 따뜻하게 데워서 마시는 것이 그 풍미를 감상하는 데 제격인데, 이때 마른 매실을 술에 넣으면 그 맛을 더 풍부하게 해준다고 알려져 있다. 소흥주는 우리나라에서도 웬만한 중국집에서는 어렵지 않게 즐길 수 있는 술이기 때문에, 고량주와 같은 백주 일변도의 중국 술에서 벗어나 한 번쯤은 새로운 장르의 중국 술을 접해보는 것도 생활의 또 다른 즐거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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