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성부대 초병의 삼엄한 경계 속에서 민간인통제선(민통선)을 통과했을 때는 아직 별빛이 반짝이는 푸른 새벽이었습니다. 서로 겨눈 긴장의 총부리 때문일까요. 어둡고 차가운 대기 속에서는 비릿한 쇳내가 나는 듯했습니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의지해 민통선 너머 북한강 수계의 최북단 물길을 가로지르는 철교 위에 섰습니다. 다리 위에서 하류 쪽으로 바라다보이는 습지. 여기가 강원 화천의 민통선 너머 야생동물의 천국이 된 습지 ‘양의대’입니다. 양의대. 무슨 연유로 이런 이름이 붙여졌는지, 그 이름 안에 어떤 이야기가 스며있는지 도대체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북한강의 물길을 따라 금강산에서 금강송을 가득 실은 떼배와 한강에서 소금을 실은 소금배가 오가던 곳. 반세기도 더 이전에는 네댓 가구가 고작인 작은 마을이 있었다고 전설처럼 전해오는 곳. 치열했던 전쟁으로, 오랜 통제의 삼엄한 경계로 양의대에서 사람의 자취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입니다. 이제는 띄엄한 기억마저 단단한 자물쇠처럼 닫혀버렸습니다. 사람의 자취가 감쪽같이 휘발해버린 곳에서 북한강의 물길이 자욱한 새벽 물안개를 피워 올렸고, 그 물을 마시러 온 야생동물만 간혹 출몰했습니다. 화천에는 도처에 가둬지고 닫힌 땅이 있습니다. 민통선의 철조망이, 군부대의 담장이, 그리고 지뢰지대의 삼각 경고표시가 길을 막아섭니다. 그 너머에는 틀림없이 오랫동안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땅이 있습니다. 전란과 수복의 와중에 폐허가 되다시피한 화천 땅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단 하나의 보물 ‘계성리 석등’을 찾아가는 긴 숲길도 그랬습니다. 쇠울타리 안에 덩그러니 있는 육각형의 석등보다 대전차종합훈련장 차단기 너머로 이어지는 깊고 유연한 숲길에 더 오래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석등이 서있는 자리에는 원천초등학교 괴산분교가 있었고, 지척에 또 다른 분교 하나가 더 있었을 정도로 컸다던 마을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오래된 옛길의 적막을 가로질러 가는 길 끝에 뻐꾸기 울음과 물소리만 빈자리를 메우고 있었습니다. 여기다가 용화산 아래 하남면 삼하리의 약초마을을 덧붙입니다. 가마솥 뚜껑만 한 잎의 병풍취부터 쌉싸래한 맛의 곰취와 진득한 산마늘 산나물이 어둑한 숲 그늘 아래 지천이고, 청정한 자연을 빨아들여 자라는 산양삼들이 잡초처럼 자라는 마을입니다. 이곳에서 가장 매혹적인 건 주민들의 ‘무심함’이었습니다. 욕심도 기대도 없이, 주민들이 씨 뿌려서 길러낸 산나물들이 자연 속에서 거저 자란 것들과 한데 뒤섞여서 산중에서 자라고 있었습니다. 산양삼도 여기서는 그저 무성한 잡초와 그다지 다를 게 없습니다. 산 깊은 화천에서도 용화산은 굵은 뼈대를 이룹니다. 본디 화천이란 이름에서 천(川)은 북한강에서, ‘화(華)’는 용화산에서 따온 것입니다. 화천읍 학교의 교가마다 첫마디의 가사로 ‘용화산의 정기’를 들먹일 정도이니 깊은 자연의 기운이 갓 뜯은 쌉싸래한 산나물에 그득 담겨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 민통선 너머 통제의 땅에서 만난 양의대 습지
북한의 임남댐에서 남한의 평화의댐까지 이어지는 북한강 본류의 물길은 38㎞. 군사분계선을 두고 남북한이 정확하게 물길의 19㎞씩을 나눠 가지고 있다. 양의대 습지는 그 물길이 평화의댐에 담기기 직전의 구간에 있다. 민통선 너머에서 가장 울울(鬱鬱)한 자연이 남아있는 땅. 거기에는 반세기가 넘도록 누구도 딛지 않았던 원시림의 숲이 있고, 북한강 상류가 만들어낸 습지가 있다. 북한이 전력발전을 위해 임남댐의 물길을 동해 쪽으로 돌린 이후부터 수량이 크게 줄어들긴 했지만, 비가 잦은 여름철이면 양의대 일대는 천혜의 습지를 이룬다. 극상의 원시림을 이룬 습지에는 멧돼지와 고라니는 물론이고 산양과 사향노루도 물을 마시러 온다고 했다. 습지의 무른 땅 위에 야생동물들이 만들어낸 발자국이 길게 이어졌다. 민통선 출입이 자유로워질 때를 대비해 화천군은 여기다가 사파리를 만들겠다는 꿈같은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북한강의 물길을 건너가는 다리, 양의대를 마주보는 안동철교 위에서 푸른 새벽을 만났다. 물이 줄어 습지의 풍성한 모습은 없었지만, 사방을 첩첩이 가로막은 산중에 새벽 안개가 걸렸다. 수면 위에는 피워 올린 안개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아마도 무시로 드나들 수 없는 곳이어서였을 것이었다. 풍경은 무거웠고, 감격은 더했다. 재안산 너머로 햇살이 비껴들자 수면 위를 낮게 날던 백로 몇 마리가 습지에 고요하게 내려앉았다. 습지 하류 쪽에서는 이쪽을 흘낏거리며 풀을 뜯던 고라니 몇 마리가 겅중거리며 초지 위를 뛰었다. 노루나 산양과는 맞닥뜨리지 못했지만, 고라니의 탄력있는 질주와 습지에 찍힌 다른 동물들의 어지러운 발자국만으로도 충분히 가슴은 벅찼다. 양의대 습지를 끼고 흐르는 북한강 물길은 한때 금강산에서 베어낸 금강송을 한양까지 운반하던 뗏목이 다니던 길이었다. 이 물길로 싣고 간 아름드리 금강송이 경복궁의 기둥이 되기도 했다. 김포에서 한강의 물길을 거슬러 여기까지 소금배가 올라오기도 했다. 양의대 습지 인근에는 수상리와 수하리란 이름의 작은 마을도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반세기도 훨씬 더 된 이야기들은 모두 시간의 자물쇠 속에 잠겨버렸다. 전쟁 당시 불바다를 이룬 곳이기도 했거니와 해방 직후 북한 땅이었다가 6·25전쟁으로 수복된 땅이니 체제를 오가며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흐릿한 기억으로나마 당시의 풍경을 기억하던 이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서 단 한 줄의 기록도 남아있는 게 없다. 양의대는 지금도 민통선의 바리케이드에 막혀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그런 곳을 여기 소개하는 까닭은 딱 한 가지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화천군이 운영하고 있는 시티투어를 이용하면 민통선 너머로 들어가 양의대 일대의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최소 인원이 10명은 돼야 한다는 것과 10일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는 불편쯤은, 반세기 넘게 꼭꼭 닫아건 바리케이드 너머로 들어가 때묻지 않은 생태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능히 감수할 수 있다. # 반세기 동안 숨겨진 깊고 유연한 숲길을 만나다
터골, 은골, 소년골, 피나무골…. 이름마저 희미해진 계성리의 옛 마을로 이어지는 길에 들어섰던 건 계성리 석등을 찾기 위해서였다. 희미하게 흔적만 남은 마을 한복판 분교터에 화천의 유일한 보물인 ‘계성리 석등’이 있다고 했다. 고려 때 만들어진 국내에는 단 두 개뿐인 육각의 둥근 창을 가진 석등이다. 6·25전쟁의 포화가 지나간 화천 땅에 국보는 한 점도 없고, 보물도 딱 하나, 이 석등이 유일하다. 그렇다면 이 석등은 치열한 전쟁통에 어찌 살아남았을까. 이유는 간명했다. 석등이 선 자리가 깊고 또 멀기 때문이었다. 길의 출발은 하남면 계성리의 터골이다. 계성천과 보령골의 물길이 모이는 터골에는 토종닭 백숙을 파는 식당 ‘개울건너집’을 포함해 여섯 가구가 고작이니 출발부터가 오지마을인 셈이다. 그 마을에 50여 년 전에 전차훈련장이 버티고 있다. 계성리 석등까지 이어지는 길은 훈련장을 관통한다. 이곳 훈련장에서 전차가 불을 뿜는 건 1년에 서너 번에 불과하니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드러내서 알리지는 않지만 토요일 오후 1시부터 일요일 오후 8시까지는 일반인들의 출입도 허용한다. 전차훈련장을 끼고 계성천 물길을 따라 명지령 쪽으로 향했다. 황토흙이 드러난 황량한 전차사격장을 지루하게 지나자 이내 울창한 숲길이었다. 조림의 흔적 없이 저절로 자란 숲이다. 길 옆으로 바짝 계곡물이 따라왔다. 높낮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길은 편안했다. 뻐꾸기 울음소리 사이로 가끔 딱따구리 소리가 섞여 들었다. 인기척에 놀라 툭 튀어나온 고리나가 숲속으로 달아났다. 징검다리가 놓인 물길을 대여섯 번쯤 건너가면서 이런 길을 따라 1시간 30분을 걸으면 그 길 옆에 석등이 있다. 계성리 석등은 숲길 곁에 철제 울타리 안에 있었다. 육각의 석등은 화사석 둥근 창이 여섯 개다. 소박하면서도 연꽃 무늬까지 제법 멋을 냈다. 본래 석등은 지금의 자리 위쪽의 절터에 있던 것이었다. 지금은 분교나 마을이 있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지만, 본래 이곳에는 인근의 형석 탄광에 생계를 대던 63가구가 살았다고 했다. 그러다 1968년 마을을 휩쓴 수해로 주민들은 하나둘 떠났고, 그때 비워진 터가 원시림으로 들어가 지금껏 남아있다. 가지 않고 멀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자연이 저 스스로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 그 길에 오르면 알 수 있다. # 용화산의 숲과 파로호 물길 속의 오지 해발 1000m를 오르내리는 험준한 산들로 포위된 화천에서 주민들에게 ‘이 중에서 대표하는 산 하나를 꼽아보라’면 십중팔구 용화산(878m)을 꼽을 게 틀림없다. 우선 화천읍내 학교의 교가가 대부분이 ‘용화산 정기를 받아…’로 시작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화천’이란 이름에서 ‘화(華)’자가 여기 용화산의 이름에서 딴 것이라니 더 말할 게 없다. 용화산 아랫 자락을 파고드는 물푸레골 일대에는 산나물과 산양삼이 지천으로 자란다. 인근의 삼화리 주민들이 약초마을 산림영농조합을 만들어 이 일대에다 곰취와 눈개승마, 산마늘과 더덕과 산양삼 씨앗을 심어 기른 것들이다. 이즈음 강원도 일대의 산촌에는 약초마을이 흔하다. 대개 차광막을 쳐놓고 밭을 갈아서 농사짓듯 나물과 산양삼을 기른다. 하지만 이곳 용화산 약초마을은 다르다. 그러면서 그저 심은 건 심어진 대로, 저절로 자란 건 또 그것대로 한데 섞이면서 자란다. 이른바 ‘인간방임재배’다. 병풍취는 잎 하나가 우산으로 써도 될 만큼 컸고, 곰취는 쌉사래한 향이 독하다 싶을 정도로 짙었다. 용화산 약초마을에는 따로 체험프로그램이 없다. 정성 들여 심기는 했으되 판로도 시원치 않은 데다, 시세도 좋지 않아 무심하게 놓아두고 있는 중이다. 단체입장객을 받아낼 일손도 없고 홍보를 할 자신도 없다. 대신 외지 사람들이 찾아오면 싼값에 나물이며 산양삼을 내주고 있다. 산양삼 7∼8년근을 한 뿌리에 시세의 절반인 1만5000원에 구입할 수 있고, 1㎏짜리 박스에 넉넉하게 담은 곰취를 1만 원쯤이면 사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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