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허시명의 우리술 이야기_02

醉月 2014. 5. 23. 01:30

손쉬운 포도주 빚기

술평론가라 하니, 내게 많이 묻는 질문들이 있다. 첫 번째가 술을 얼마나 많이 마시느냐는 것이고, 두 번째가 좋은 술을 추천해달라는 것이고, 세 번째가 술에 얽힌 에피스드를 듣고 싶다는 것이다. 세 번째 질문은 술을 마시고 사고를 친 이야기일 텐데, 내게 가장 오래된 추억은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가족이 함께 포도주를 빚기 위해서 포도알을 으깨고 있다.

빈집에 홀로 남아 있었다. 군것질감도 없고 심심하던 차에, 어머니가 담가 두신 포도주 생각이 났다. 항아리에 담겨 비닐로 입구가 봉해진 포도주를 국자로 떠 마시니 혀에 달콤한 맛이 깊이 박혀 왔다. 그러나 순전히 달콤한 맛 때문이었을까, 마음속으로는 마셔서는 안되는 금단의 열매를 맛보는 떨림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급해졌다. 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생각에, 포도껍질이 동동 떠 있는 항아리를 국자로 눌러가면서 포도주를 떠 마셨다. 포도주 양이 줄어드는 것이 무섭긴 하지만, 입에 착착 감기는 단맛은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진국이었다. 그 무렵 단맛을 맛볼 수 있는 것으론 명절에 떡을 찍어먹기 위해서 내놓던 조청, 그리고 국수를 말아먹던 설탕물 정도였다.

그렇게 한 국자 한 국자 홀짝홀짝 마시다가 술에 취하고 말았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숨이 가빠오는데 매스꺼운 속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 얼굴을 마루 바깥으로 내민 채 엎드려서 포도주를 모질게 토해야 했다. 정신을 잃을 정도였으면서도 내 머릿속에는 식구 중 누군가에게도 들켜서는 안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은 아직까지 내 뇌리에 남아 있을 정도로 강렬했다. 그래서일까 가을이면 항아리에 담긴 포도주가 생각나, 포도주를 담게 된다. 요즘도 초여름 매실주와 함께 가을 포도주는 우리네 가정에서 가장 많이 담는 술일 것이다. 거기에 하나를 더 추가하자면 소주에 인삼을 넣는 인삼주 정도겠다.

내 어머니도 그랬지만, 일반적으로 가정에서 흔히 빚는 포도주는 포도와 설탕을 비슷하게 넣고, 소주를 넣어서 발효시키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하면 알코올 발효는 잘 일어나지 않고, 달기만 하고 소주 맛만 강할 뿐이다. 제대로 된 포도주라면, 소주를 넣지 않고 담아야 한다. 소주를 넣지 않으려면 설탕량을 잘 조절하면 되는데 그 방법이 그리 까다롭지 않으니, 여기서 소개해보겠다.

우선 포도를 흐르는 물에 가볍게 씻어, 한 알 한 알 따내어 함지에 담는다. 함지에 담긴 포도를 맨손으로 치대듯이 으깬다. 포도껍질과 포도알이 분리되고, 포도즙이 흥건히 고이도록 주물러 터뜨린다. 포도주를 빚을 때 가장 기분 좋은 순간이다. 포도주 담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을 첨가하는 과정이다. 재배기간이 길어 일조량이 많은 지중해의 포도는 설탕을 넣지 않아도 되는데, 우리 포도는 당도가 부족하여 설탕을 보충해줘야 한다.

포도 10㎏(당도 14브릭스)으로 알코올 도수 12% 포도주를 얻으려면, 설탕을 1.3㎏을 넣어주면 된다. 설탕을 포도 무게의 13%만 넣어주어야 하니, 일반적으로 집에서 담글 때보다는 적은 양이다. 그리고 이스트라고 부르는 효모를 2g 정도 넣어주면 되는데, 굳이 효모를 넣어주지 않더라도 발효는 일어난다. 포도껍질이나 대기 중의 효모가 작동하기 때문이다. 유리병이나 항아리에 담아 공기구멍만 몇 개 뚫어주고 잘 밀봉하여, 섭씨 25도 정도에서 1주일쯤 보관하면 발효가 마무리된다. 1주일 뒤에 체에 걸러 발효된 포도주와 포도껍질, 씨를 분리하고 분리한 포도주를 시원한 곳이나 냉장고에 보관하여 서너 달쯤 숙성시킨다. 서너 달 뒤에 가라앉은 앙금을 제거하고 나서 포도주를 마시면 된다.

이 정도 지식을 가지면 설탕 잔뜩 넣고 소주 넣고 빚는 포도주보다는 월등하게 부드럽고 풍미 있는 포도주를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우리가 흔히 먹는 포도 품종인 캠벨얼리나 MBA보다는 머루를 사용하면 좀 더 진하고 깊은 맛의 과일주를 얻을 수 있다. 고두밥과 누룩으로 술을 빚을 때 물을 조금 넣고 포도를 으깨 넣으면 쌀포도주가 된다. 조선 중기에 저술된 <동의보감>에서도 ‘익은 포도를 비벼서 낸 즙을 찹쌀밥과 흰 누룩에 섞어 빚으면 저절로 술이 된다. 맛도 매우 좋다’고 전하고 있다. 쌀 포도주든 그냥 포도주든 빚는 법이 그리 어렵지 않고 맛이 좋으니 올가을엔 포도주 빚기에 도전해보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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