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김해. 인근 부산이나 경남 창원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김해는 외지 여행자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입니다. 우선 지척에 관광명소가 즐비한 대도시 부산을 두고 있다는 것부터가 치명적입니다. 부산과 창원의 배후도시로 자리매김하면서 중소 공장들이 몰려들어 도처에 공단이 즐비하게 들어서게 된 것도 매력을 반감하는 요인입니다. 김해는 대도시도 아니고, 농촌도 아닙니다. 베드타운이라고 하기에도 마땅치 않고, 공장이 많지만 그렇다고 위성 공업도시라고만 할 수도 없습니다. 30층이 넘는 초고층 아파트와 세련된 타운하우스가 우뚝 서 있는가 하면, 모내기를 마친 너른 김해평야가 있고, 진초록의 산자락을 타고 흘러내리는 계곡이 있는가 하면, 그 발치에 크고 작은 공장이 늘어서서 동거하고 있습니다. 딱 하나로 지향점으로 정의할 수 없는 모호한 정체성의 도시, 고백하자면 그것이 김해의 첫인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태엽을 2000년 전 과거로 돌리면 사정은 달라집니다. 우리 고대사 최대의 미스터리 중 하나인 가야시대. 당시 가야 연맹을 이끌던 금관가야의 중심이 바로 김해 땅입니다. 신라에 백기를 들고 투항할 때까지 가야가 이어온 시간이 무려 491년. 역사의 깊이로만 보자면 부산과 창원에 댈 바가 아니지요. 하지만 항복한 패자였던 가야의 기록이 변변할 리 없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수수께끼입니다. 고대국가 가야가 신라보다 훨씬 더 멀어 보이는 건 그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김해에서 만나는 가야는 다릅니다. 유적 발굴로 얻어진 사실의 얼개에다 신화와 전설이 교직되면서 가야는 분명한 실체로 다가옵니다. 김해에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과 멀리 인도에서 건너왔다는 수로왕비의 능이 있고, 처음 수로왕이 하늘에서 내려온 자리인 구지봉이 있으며, 도시 곳곳에 순장의 흔적이 남아있는 고분이 있습니다. 사슴뼈가 섞여 있는 패총도, 청동기 시대의 유적도 이곳저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고층아파트 단지 안에 천연덕스레 고인돌과 집터가 남아있을 정도입니다. 인도에서 배를 타고 이 땅에 당도했다는 수로왕비. 이런 비유가 좀 불경스러운 것일지 몰라도 지금으로 본다면 ‘다문화 신부’쯤 되겠지요. 수로왕비가 이 땅에 도래한 지 2000여 년이 지난 지금 공교롭게도 김해의 도심 한쪽에 다문화 공동체가 구축되고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공장을 따라 김해로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은 무려 1만9000여 명. 이들이 동상동 일대에 자연스럽게 상권을 형성하면서 다문화의 이국적인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주민들은 이곳을 ‘김태원’이라고 불렀는데, 듣자니 ‘김해 이태원’의 줄임말이랍니다. 다양한 국적의 레스토랑과 다양한 식자재 등을 파는 김태원의 이국적인 분위기는 매력적이었습니다. 가야의 중심은 김해였지만, 김해에서 가야가 전부는 아닙니다. 가야의 자취는 아니지만, 김해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중 하나가 화포천습지입니다. 쓰레기로 가득했던 낙동강의 배후 습지를 자연의 모습으로 되살린 곳입니다. 애초에 큰 기대 없이 그곳을 찾았다가 자연이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낸 습지의 빼어난 풍경을 만났습니다. 버드나무와 다양한 수생식물들이 함께 이뤄낸 습지의 그윽한 모습은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개발의 삽날에 다친 풍경을 이렇듯 자연스레 되돌릴 수 있다는 것도 놀라웠습니다. 김해의 모호한 정체성의 첫인상은 여정의 끄트머리에서 가능성으로 읽혔습니다. 도시가 자연스레 만들어내고 있는 다문화의 공간과 자연을 되살려낸 거대한 습지에서 그 가능성을 봅니다.
# 가야의 구지봉에서 거북의 모습을 보다 경남 김해 땅에 당도한다면 첫머리의 여정은 미리 정해진 거나 진배없다. ‘가야의 땅’ 김해에서는 도리없이 가야시대 자취가 먼저다. 강성한 고대국가를 이루었으되, 신라에 투항한 뒤 가야의 역사는 덧없이 지워졌다. 역사가 지워진 빈자리를 채운 건 신화와 전설이다. 그러니 김해에서 가야의 자취를 만난다는 건 곧 신화와 전설을 찾아간다는 뜻이다. 신화와 전설을 길 잡아 삼는 여정은 흥미롭다. ‘무슨 따분하고 무거운 역사 얘기냐’는 푸념은, 2000년 전의 시간과 ‘지금 여기’를 전설로 이어서 퍼즐처럼 맞춰보는 즐거움을 몰라서 하는 말이다. 뜻밖에 그 맛을 아는 일본인 여행자들이 부산을 제쳐 두고 김해를 찾아오고 있었다. 김해에 머무는 이틀 동안 관광지도를 펼친 중년의 일본인 여행자를 여럿 만날 수 있었다. 김해에서 가장 먼저 찾아갈 곳은 가야의 첫 하늘이 열린 곳, 구지봉(龜旨奉)이다. 가야의 시조 수로왕은 구지봉에 내려온 금색 상자 속의 황금 알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그 구지봉이 김해 한복판에 여태 뚜렷하다. 구지봉은 이름에서 짐작되듯 ‘거북’의 형상이다. 그 거북을 보려면 뒤로 물러나야 한다. 가장 적당한 자리가 바로 분산(382m)이다. 분산의 정상 바로 아래 절집 해은사까지 차로 가면 거기서 봉수대까지는 10분이 채 안 걸린다. 분산의 봉수대에 올라선다면 깜짝 놀랄 게 틀림없다. 김해 도심은 물론이고, 그 너머의 김해평야와 낙동강의 물줄기와 그 너머의 남해바다까지 넉넉하게 품으로 들어온다. 봉수대 뒤쪽 바위에 대원군의 친필로 전해지는 ‘만장대(萬丈臺)’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해발 400m도 못 미치는 높이를 ‘만장(萬丈)’이라고 한 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허풍이지만, 조망으로 체감하는 높이는 이름에 넉넉히 값하고 남는다. 봉수대에서도, 봉수대 너머 용의 잔등처럼 구불거리며 이어지는 분산성 위에서도 구지봉이 내려다보인다. 누가 짚어주지 않아도 찾을 수 있는 건, 봉긋한 야산이 영락없이 거북의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가 바로 가야의 역사가 시작된 탯자리다.
# 매끄러운 동선으로 이어지는 가야로의 여정 김해 시내의 대성동고분군에서 해반천까지 이어지는 길이 ‘가야거리’다. 구지봉과 수로왕릉, 수로왕비릉, 국립김해박물관, 봉황동 유적지 등 가야의 유적들이 모두 이 길을 따라 매끄럽게 이어진다. 분산에서 내려와 구지봉에 올랐다. 그저 야트막한 야산이다. 바위 하나를 심듯이 세워놓은 정상에서는 고인돌 하나가 눈길을 붙잡는다. 덮개돌에는 한석봉의 솜씨로 전해지는 ‘구지봉석(龜旨奉石)’이란 글씨가 음각돼 있다. 청동기 시대 무덤인 고인돌은 가장 늦게 만들어진 것도 기원전 1세기까지 올라가니 지금의 자리에서 수로왕의 출현도 지켜봤을 것이었다. 고인돌 앞에 서서 두 눈으로, 또 덮개돌을 쓰다듬으며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의 깊이를 느껴볼 일이다. 가야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인물이 수로왕비다. 구지봉 바로 아래 수로왕비릉이 있다. 수로왕의 아내 허황옥은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가야 땅으로 건너왔다고 전해진다. 아유타국은 과연 어디일까. 수로왕릉 정문에 그려진 ‘두 마리 물고기 문양’이 수수께끼를 푸는 단서다. 이 문양은 인도의 아요디야 지방에서 흔히 보인단다. 허황옥의 고향이 인도가 된 까닭이 이렇다. 그런데 이 문양은 사실 조선시대 그려진 것. “왕비가 세상을 뜬 지 1100년 뒤인 조선시대 문양 하나로 그렇게 볼 수 있냐”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지만, 그건 의미 없다. 이런 질문은 ‘수로왕이 황금알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나 ‘수로왕과 왕비가 150세 넘게 살았다’는 게 말이나 되냐는 질문과 다를 게 없으니 말이다. 어차피 가야사의 해독은 신화와 설화, 그리고 상상력에 기댈 수밖에 없다. 김해의 가야 유적의 하이라이트라면 단연 수로왕릉이다. 지름이 22m에 이를 정도로 거대한 왕릉 뒤쪽으로 제법 깊은 능림이 펼쳐져 있고, 그 너머에는 공원인 ‘수릉원’이 있다. 수릉원은 수로왕과 왕비의 만남을 테마로 조성한 공원이다. 여기서는 ‘수로왕을 위하여’라고 이름 붙은 산책로를 걸어보자. 구실잣밤나무와 가시나무, 상수리나무 사이로 나무계단을 따라 낮은 언덕을 오르면 거대한 팽나무 한 그루와 마주치는데 여기서 수릉원의 전경과 수로왕릉의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볼 수 있다.
# 무척산 천지에 가득 고인 기도 김해의 도심뿐만 아니라 외곽에도 가야의 신화와 전설이 깃들어있다. 그중 추천할 만한 곳이 생림면과 상동면의 경계에 우뚝 솟은 무척산이다. 겉으로 보면 부드러운 육산이지만, 안에 들면 기묘하고 거대한 바위들로 가득하다. 무척산의 정상 턱밑인 해발 700m의 고지대에는 백두산이나 한라산에나 있을 법한 산정의 호수가 있다. 이름 하여 ‘천지(天池)’다. 정상 바로 아래 가득 고여 하늘의 구름을 비춰내고 있는 호수는 신비로운 느낌마저 준다. 필시 연못 한가운데서 물이 솟는 듯한데, 이렇게 높은 산중에서 물이 솟아난다는 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수로왕의 전설이 등장한다. 수로왕이 승하한 뒤 지금의 자리에 왕릉을 조성하려는데 파는 자리마다 물이 나왔단다. 이에 수로왕비를 보필하던 신하가 ‘무척산에 못을 파서 물을 가두면 물이 솟는 것이 멈출 것’이라고 했고, 그래서 만들어진 게 바로 천지라는 얘기다. 천지의 물가에는 무척산 기도원이 있다. 1940년에 일제에 항거하던 목사가 이곳을 기도처로 정한 뒤, 따라 들어온 신도들이 모여 이뤄낸 기도원이다. 1955년에 돌로 지어진 교회 모습에서는 소박하지만 깊은 신심이 깃들었던 옛 교회의 정신이 느껴진다. 무척산 천지까지는 수로왕의 아들이 어머니인 수로왕비를 위해 지었다는 절집 모은암에서 출발해 갈 지(之)로 난 산길을 걸어 1시간 남짓 걸린다. 무척산 정상까지는 천지에서 1시간을 더 걸어야 한다.
# 화포천 습지, 그리고 ‘김태원’의 골목 김해에서 가야를 뺀 명소를 꼽으라면 딱 두 곳을 들 수 있겠다. 첫 번째로 꼽을 곳이 한림면의 화포천 습지다. 낙동강 지류인 화포천은 2008년 경남 창원에서 열린 람사르총회를 계기로 습지생태를 복원한 곳이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쓰레기로 몸살을 앓던 곳이라 해서 별 기대 없이 찾아갔던 길이었는데, 습지의 규모며 잘 보존된 생태에 그만 깜짝 놀랐다. 습지에는 크고 작은 버드나무의 무성한 잎들이 저마다 다른 채도로 반짝이고 있었고, 물에는 줄풀이며 마름, 창포로 가득했다. 수변에는 노랑무늬붓꽃이, 수면에는 노랑어리연꽃들이 이제 막 수런거리며 꽃을 피우고 있었다. 화포천 습지생태관에서 다리 건너 노랑어리연꽃뜰을 바라보며 이어지는 수변 길을 걸으며 만난 습지 풍경은 환상적이었다. 이곳 하나만으로도 김해를 찾는 이유로 삼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또 한 곳이 시내 한복판인 동상동과 서상동 일대다. 주민들은 이곳을 ‘김태원’이라고 불렀는데 그게 ‘김해의 이태원’이란 뜻이란다. 김해는 전국에서 두 번째로 중소기업이 많은 도시. 공장의 일자리를 따라 김해로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1만9000여 명에 이른다. 이들은 임대료가 저렴한 동상동과 서상동 일대의 시장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상권을 형성해가고 있다. 외국인들은 처음에는 생필품을 사러 시장으로 모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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