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움과 무력감. 죄책감과 분노. 한 달째 계속되는 세월호의 비극 속에서 관성처럼 떠밀리듯 살아왔던 삶의 방식을 되돌아봅니다. 돌연 찾아온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처참한 이별들을 목도하면서 아직 하지 않은, 언젠가 하게 될 게 분명한 후회와 회한을 미리 가늠하게 됩니다. 다른 이의 죽음과 비극으로써 내 삶의 이야기를 주워드는 것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러움을 무릅쓰고서 말입니다. 후회와 회한은 이내 살아가는 목적과 방식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왔습니다. 과연 지금처럼 살아가는 게 옳은 일인지, 더 소중한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전북 무주군 설천면 대불리. 석기봉 아래 깊디깊은 계곡의 오지마을을 찾아갔던 건 그 질문 때문이었습니다. 무주의 설천면은 이웃 무풍면과 함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의 한 곳으로 꼽힙니다. ‘정감록’이나 ‘격암유록’ 같은 예언서들이 천지개벽의 난리통에도 온전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한 땅 말입니다. 십승지지의 뜻은 목숨을 부지한다는 ‘보신보명(保身保命)’에 있고, 이 보신보명의 중심에는 전란과 흉년, 그리고 전염병이 들지 않는 ‘삼재불입지지(三災不入之地)’가 있습니다. 전쟁과 굶주림, 돌림병의 위협이 사라진 지금, 십승지지란 남을, 또 스스로를 해치는 칼날 같은 욕망에서 벗어나서 순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쯤으로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대불리에는 신불사가 있습니다. 부처를 모시는 절(寺)도 아니고, 그렇다고 신주를 모신 사당(祠)도 아닌 곳. 그곳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느슨한 공동체 마을을 이루고 있는 한산대사(72)를 만났습니다. 스물아홉에 출가해 토굴생활 10년을 거쳐 오지마을에서 두문불출 30년째 세상 이치에 대한 공부로만 살아온 그에게 하고 싶은 질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신불사의 다실 ‘아름정사’에서 향긋한 황차를 앞에 두고 나눈 대화가 세 시간을 훌쩍 넘겼습니다. 한산대사의 이야기를 간추려 보자면 이렇습니다.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가정의 윤리 도덕, 국가의 법과 제도, 종교의 절대가치에 일제히 균열이 발생한 상황에서 사회를 지탱하는 새로운 작동원리를 찾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한산대사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자연의 이치’에서 찾았다고 했습니다. 자연을 누리거나 소비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를 삶 속으로 가져오면 그것이 바로 머리가 중심이 되는 ‘관념사회’에서 가슴이 중심이 되는 ‘문명사회’로 건너가는 징검다리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공부로 다져진 그의 생각들이 잡힐 듯 말 듯했습니다. 행여 그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싶어 신불사를 나와 무주 땅에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호젓하게 자연과 만날 수 있는 곳들을 둘러봤습니다. 등정이란 목표가 뚜렷한 등산도, 관광명소의 구경거리인 계곡도 아닌, 그저 무심한 듯 거기 있는 자연 속에서 제 발짝 소리만 데리고 걸을 수 있는 곳들을 골라서 찾아간 길입니다. 무념으로 걸으면서, 때때로 걸음을 멈추기도 하면서 봐야 할 것은 ‘밖’이 아니라 ‘안’인 것 같았습니다. 제 삶이 옳은 것인지, 혹 놓치고 사는 것은 없는지, 그 대답은 그 걸음 속에서 얻어질 듯했습니다.
# ‘십승지지’에서 다가올 세상과 삶의 방편을 묻다 ‘정감록’과 ‘격암유록’ 등의 숱한 예언서에서 ‘십승지지(十勝之地) 중의 한 곳으로 꼽히는 곳이 전북 무주의 설천면과 무풍면 일대다. 설천면 대불리 석기봉 자락. 백두대간의 단전 쯤 자리에 ‘신선동(神仙洞)’이 있다고 했다. 내복동 마을을 지나 가파른 산길을 치닫고 오르는 길 끝. 거기에 신선처럼 마음을 닦으며 사는 이들이 띄엄띄엄 거처를 짓고 산다고 했다. 산촌에서 차 한 대 겨우 지나가는 위태위태한 시멘트도로를 타고 오르자 계곡을 끼고 거짓말처럼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났다. 이름하여 ‘신불사 마을공동체’다. 먼저 ‘신불사’ 얘기부터. 신불사는 절도 아니고 사당도 아니다. 칠순이 넘은 한산대사란 이가 거기 단군을 모시고 삼십 년째 머물면서 명상과 공부를 하고 있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출가해 사찰로 들어갔다가 종교보다는 세상 공부 쪽으로 뜻을 세운 그는 경북 봉화의 청량산에서 토굴생활 10년을 거쳐 30여 년 전에 이곳 심심산골로 들어왔다. 그리고 두문불출의 공부가 시작됐다. 공부는 곧 가르침으로 이어졌고, 배움을 따라 이 깊은 산중까지 찾아온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자연스레 공동체를 이루게 됐다. 말이 공동체지 모여서 살거나 함께 공부를 하는 건 아니고, 한산대사가 거저 내놓은 땅에다가 저마다 집을 짓고 제 나름으로 공부하는 생활을 하고 있다. “머리에서 시작한 공부가 이제 가슴으로 뿌리를 내렸지요. 그저 세상 사는 이치를 궁구하면서 생(生)·성(成)·멸(滅)을 통한 완성과 살아가는 원리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창 밖으로 멀리 덕유산 정상이 건너다 보이는 자리. 송홧가루와 아그배꽃의 향기가 스며드는 신불사의 다실 ‘아름정사’에 들어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이야기가 시작됐다. 이야기는 거침없었다. 그는 생(生)을 ‘본성의 시대’로, 성(成)을 ‘관념의 시대’로, 멸(滅)을 ‘문명의 시대’라고 풀이했다. 덧붙이길 ‘멸’이란 곧 완성을 뜻하는 것이란다. 그의 풀이에 따르면 지금은 ‘관념의 시대’의 끝자락. 그러니 앞으로 전혀 다른 ‘문명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란다. 본성의 시대는 ‘몸’으로, 관념의 시대는 ‘머리’로 살았다면 문화의 시대는 ‘가슴’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러자면 새로운 세상의 틀과 작동원리가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는 ‘자연의 원리’에서 그 답을 찾았다고 했다. 자연의 순환과 흐름 속에서 삶의 법칙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지금껏 해온 공부는 다름아닌 ‘자연공부’라고 했다. 그는 ‘무릇 여행을 한다면 자연도 가슴으로 만나야 한다’고 했다. 자연을 경관 감상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느껴야 한다는 얘기였다.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는 ‘자연 속을 걷는 무념의 걸음’에 대해 말했다. 경관에 함부로 한눈 팔지 않는 그런 걸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 참, 신불사에 가게 되거든 한산대사에게 청해서 아름정사의 창 아래 소나무 한 그루는 꼭 보고 올 일이다. 거대한 소나무 한 그루의 굵은 둥치가 여기저기 부러지고 제멋대로 휘어지면서도 기괴하게 살아남아 번성하고 있다. 잘생긴 소나무는 전국 곳곳에 있지만, 이렇듯 다치고 뒤틀린 모습으로도 펄떡거리며 성성하게 살아있는 건 여태 본 적이 없다.
# 맑은 기운과 고요함을 찾아 깊은 산중으로 찾아든 이들 신불사 일대에 마을공동체를 이룬 이들만 거처하는 건 아니다. 계곡을 따라 더 좁은 길로 거슬러 올라가면 ‘도(道) 나누는 마을’이 있다. 20년 넘게 지리산과 속리산의 도인들과 함께 내면을 수련했다는 이가 세운 명상과 치유의 공간이다. 명상이나 도와는 전혀 관계없이 깊은 산중의 맑은 기운을 찾아 들어온 이들도 있다. 신불사 일대 25가구의 절반쯤은 나머지 삶을 자연에 의탁하기 위해 들어온 이들이다. 정년퇴직 이후 노후를 보내기 위해 찾아든 이들도 있고, 자연 속에서의 삶을 꿈꾸며 무려 7년째 집을 짓고 있는 젊은 부부도 있다. 대체 무엇이 이들을 이 깊은 산중으로 불러모으는 것일까. 때 묻지 않은 자연의 맑은 기운일까, 아니면 번잡한 세상 정반대 쪽의 고요함일까. 신불사 마을공동체에서 석기산 쪽으로 더 오르다 보면 등산로 초입에 제법 근사한 폭포가 하나 있다. 폭포 아래쪽에는 ‘선유산방(仙遊山房)’이란 당호를 내건 번듯한 집이 한 채 있다. 젊어서 무대조명 일을 했다는 김길선(72) 씨가 그 집의 주인이다. 제법 크게 무대조명 일을 하다가 친구로부터 받은 어음이 부도가 나는 바람에 7년 동안 빚을 갚고 난 후에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시를 떠났다. 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충북 단양의 삼태산 아래. 그곳에서 20년 넘게 산중생활을 하다 2년 전쯤 이곳으로 찾아들었단다. 그는 자신의 생활을 ‘하루 놀고 하루 쉬는 삶’이라며 웃었지만, 말과는 다르게 흙 묻은 작업복 차림으로 연방 땀을 훔치며 계곡 건너편에 나무를 심는 중이었다. “제 땅도 아닌 자리에 무엇 하러 나무를 심느라 사서 고생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나무를 심어 그 나무가 꽃을 피우면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집 위쪽의 폭포로 가려면 도리없이 김 씨의 집을 가로질러 계곡을 건너야 하는데, 그는 나무를 다 심고 나서 길을 다듬을 생각이라고 했다. 스스로 택한 깊은 산중의 삶이지만 그렇다고 혼자서 사는 도피와 이기의 생활이 아니라 남들과 나눌 것들을 늘 찾고 있다고 했다. 대개 산중생활을 하는 이들은 봄이면 나물이나 약초를 캐서 살림에 보태는 게 보통. 그러나 그는 나물도 딱 제가 먹을 양만큼만 뜯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생계는 어떻게 유지할까. 그는 “사는 게 참 알고 보면 단순하다”고 했다. 산중생활을 하면 한 달 생활비로 30만 원이면 족하단다. 그렇게 1년이면 360만 원이고, 10년이면 3600만 원이다. 앞으로 30년을 더 산다고 해도 1억 원 남짓이면 나머지 생을 다 사는 데 무얼 그리 안달할 일이 있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산중생활의 노동이 도회지의 그것과 다른 점은 욕심이 아니라 즐거움으로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연과 더불어 즐기는 산중생활은 낭만도 추억도 아니고, 그저 자연과 합일하는 생활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한산대사가 말한 ‘무념의 걸음’이 바로 이런 것은 아닐까. 한산대사가 공부로 깨달았다면, 김 씨는 그 이치를 생활과 몸으로 깨달은 것은 아닐까.
# 무념의 걸음으로 자연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다 수십 년의 산중생활과 명상으로 얻은 깨달음을 받아들인다면 번잡하지 않은 채 ‘무념의 마음’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게 순서겠다. 무주의 명소라면 덕유산 자락의 무주구천동이 첫손에 꼽히지만 일찌감치 관광지로 개발된 계곡은 행락객들의 발걸음으로 어지럽다. 숲의 깊이나 자연의 청정함이야 두말 할 나위 없지만, 계곡마다 33경 중의 하나임을 알리는 팻말로 영 소란스럽다. 그러니 이곳보다 덕유산 서남쪽 자락의 칠연계곡을 권한다. 덕유산국립공원 안성탐방지원센터에는 동엽령을 거쳐 백암봉 중봉을 지나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까지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다. ‘무념의 걸음’을 경험하겠다면 목적지를 겨눈 가파른 등산은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들머리에서 왕복 3㎞ 정도 되는 칠연폭포까지만 다녀오는 편이 더 낫다. 숲터널이 계속되는 이 길은 거의 평지와 다름없는 순한 길이다. 숲길로 발을 들이자 온통 초록의 세상이다. 신록에서 녹음으로 건너가고 있는 나뭇잎들이 그 길 위에 쏟아지는 광선을 남김없이 말간 초록빛으로 채색하고 있었다. 들숨을 따라 청량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밀려들었다. 팥배나무, 다릅나무, 물박달나무, 호랑버들, 서어나무, 단풍나무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한 새잎을 막 내놓은 참이다. 병꽃나무꽃들은 무리지어 피었고, 발 아래로는 노란괴불주머니가 꽃을 틔웠다. 숲길의 부드러운 오르내림을 따라 계곡의 물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했다. 빠른 걸음이라면 30분 남짓이면 칠연폭포에 당도한다. 암반을 따라 층층이 이어지는 폭포는 7개의 소(沼)를 이루고 있다. 하나의 소를 넘친 물이 폭포 하나를 만들고, 폭포 아래 고인 소가 다시 넘쳐서 도합 여섯 개의 크고 작은 물줄기를 만들어낸다. 폭포의 규모는 웅장한 물소리를 내기에는 어림없지만, 경관이 아닌 ‘걸음’에 마음을 두고 걷는 길이라 오히려 그게 더 맞춤하다. 웅장하고 거대한 풍경이라면 경관에만 마음을 다 빼앗기고 말 터. 걸어보니 알겠다. 경관이 ‘밖’을 보게 한다면, 걸음은 ‘안’을 보게 한다. 그제야 한산대사가 말한 ‘무념의 걸음’이란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경관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목적을 향해 걷지 말고 그저 무념의 걸음을 통해 자신을 보라는 말이렷다. 그러기에는 칠연폭포를 찾아가는 이 숲길만큼 맞춤한 곳이 또 있을까. 여기다 무주에서 숲길 하나를 더 보탠다면 무주 적상산의 절집 안국사에서 출발해 향로봉까지 왕복하는 4.5㎞남짓의 숲길을 꼽을 수 있겠다. 안국사는 적상산 정상인 향로봉의 턱밑에 들어서있는데 여기까지는 차로 오를 수 있다. 절집에 차를 두고서 향로봉을 향해 숲길을 걷는다. 전체 숲길 중에서 오르막이라 할 수 있는 구간은 고작 200m 정도. 나머지는 순한 숲길이다. 이 숲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잘 빗은 머리칼처럼 자란 초록의 풀과 한쪽 사면을 온통 뒤덮은 노란 꽃을 피운 피나물 군락이다. 무주에는 또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윽한 강변길도 있다. 금강을 끼고 강을 굽어보며 이어지는 잠두마을 옛길이다. 잠두 1교에서 잠두 2교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벚꽃 흐드러진 봄날의 들뜬 걸음을 불러들이는 곳이지만, 화려한 꽃이 다 지고 만 자리에 초록이 무성해지는 지금이 걷기에 한결 차분하다. 이 길 위에 서면 몸이 마음보다 몇 발짝쯤 먼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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