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허시명의 우리술 이야기_01

醉月 2014. 5. 8. 20:14

평양 명주 감홍로의 맥

유명한 술을 하나 꼽으라면 무엇을 꼽을까? 술을 논하다보니, 어떤 술이 제일 좋더냐고 사람들이 자꾸 내게 물어온다. 변덕스럽게 내 마음과 혀는 계절따라 달라지고 연년마다 달라진다. 술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마시고 나면 사라지고 마니 어떤 것 하나를 꼬집어 말하기가 난처하다. 엊그제도 자꾸 내게 물어오는 이가 있어서, 대뜸 감홍로라고 말하고 말았다.

이기숙씨(오른쪽)와 남편 이민형씨가 경기 파주의 감홍로 제조장에서 감홍로에 들어가는 조누룩을 만들고 있다.

 

감홍로를 가장 잘 알고 있던 이는 아마도 평양 기생들이었을 것이다.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평양 3대 명물로 냉면, 골동반, 감홍로를 꼽았다. 모두가 평양기생이 차려낸 음식상에 올랐던 품목들이다. 감홍로가 평양을 대표하는 소주였다면, 조선을 대표했던 소주라고 확대해석해도 그릇되지 않을 것이다. 소주로 가장 명성이 높았던 곳이 북쪽이고, 평안도였기 때문이다.

새해 들어 내가 맛본 감홍로는 2년 숙성된 제품이었다. 우리술에는 숙성 개념이 희박하다. 오래 숙성되었다고 자랑하는 술을 좀처럼 찾기 어렵다. 그런데 2년 숙성이라니, 그 정도라도 내게는 반가운 정보였다. 감홍로를 빚은 이기숙씨(54)에게 물어보니, 일본 수출 물량으로 두어해 전 빚어둔 술이라고 했다. 술은 황금빛을 띠는데, 약재 향이 또렷하지만 삼키고 나면 깔끔하게 사라져버렸다. 도수가 40도인데도 코끝을 튕기는 듯한 사나운 맛이 없고 부드러웠다. 숙성의 힘 때문에 얻은 부드러움이었다.

감홍로는 어떤 술인가? 옛 문헌 속에 그 명성은 자자했다. 최남선은 조선 3대 명주(이강고, 죽력고, 감홍로)로 꼽았고, 이규경은 조선 4대 명주(평양 감홍로, 한산 소국주, 홍천 백주, 여산 호산춘)로 들었고, 홍석모는 <동국세시기>에서 평안도 지방에서 알아주는 술로 감홍로와 벽향주가 있다고 했다.

감홍로를 빚는 이기숙씨는 아버지 이경찬씨(1993년 작고)로부터 감홍로를 배웠다. 이경찬씨는 문배주로 1986년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가 된 인물이다. 혼인이 늦었던 이기숙씨는 아버지가 문화재 지정을 받기 위해 시험술을 만들어낼 때부터 아버지를 도와 술을 빚었다. 아버지는 문배술과 감홍로 중에서 어느 것을 문화재로 신청할까 고심하다 약재가 들어가지 않은 술을 선택했다고 한다.

감홍로는 좁쌀누룩과 멥쌀 고두밥으로 빚어 두 번에 걸쳐 증류한 뒤에 8가지 약재를 넣어 침출시켜 완성한다. 장에 좋다는 용안육, 정기를 북돋아준다는 정향, 비타민이 풍부한 진피, 풍을 막아준다는 방풍, 그리고 향긋한 계피, 활달한 생강, 달콤한 감초, 붉은 지초가 들어간다. 이기숙씨는 인간을 기분 좋게 만들어주는 먹을거리로 술과 마약이 있는데, 마약은 만들 수 없으니 술을 만든다는 얘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모든 술에는 독이 있으니, 술을 빚으려면 독기운이 적은 술을 빚어야 하는데 그게 감홍로라 했다.

감홍로는 넓게는 홍주의 범주에 들어있다. 홍주는 술 색이 붉어서 이름에 ‘홍’자가 들어간 술을 일컫는다. 소주류로 진도홍주, 감홍로, 관서감홍로, 내국홍로방이 있고 발효주로 천태홍주방, 건창홍주방, 홍국주가 있다. 붉은색을 내는 데는 지초(또는 자초)라는 약재를 쓰거나, 붉은 누룩인 홍국을 쓴다. 홍국을 써서 만든 전통술은 사라져버렸고, 지초를 사용한 술들만 진도홍주와 감홍로가 남아있는 실정이다.

이기숙씨에게 술을 빚는 데 무엇이 가장 어렵냐고 물어보니,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라고 했다. 술을 먹는 사람이나 사는 사람이나, 상표에 적힌 재료나 도수나 성분에 대해서 제대로 살피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술 속에 어떤 역사가 있고,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왜 이 가격으로 책정되었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평양 최고의 술이자 조선 최고 증류주로서 위용을 자랑하던 감홍로조차 전통의 단절로 속절없이 무명의 설움을 겪어야 하니, 세월이 야속하기만 하다.

 

단절된 ‘조선 청주’를 살려내자

술은 문화가 끌고 가고, 기술은 그 뒤를 받쳐줄 뿐이다. 알코올 20도에 1000원을 간신히 웃도는 희석식 소주는 값싼 노동력의 피로를 덜어주기 위한 동반자로서 득세했다. 1960~70년대 경제개발시대의 저곡가 저임금 정책과 소주를 함께 바라보지 않으면, 한국 소주의 성장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맑은 술 청주는 어떠한가? 청주는 일제가 한반도를 장악하면서, 일본 청주가 한국 청주 시장을 이끄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지금도 한국 주세법의 청주는 국(麴·일본식 누룩)으로 빚는 일본청주를 지칭한다. 그 와중에 조선 청주는 길을 잃었다. 조선 청주는 일본 청주에 자리를 내주면서 약주라는 이름으로 피신했다.

그렇게 한 세기가 흐르고 나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우리 술의 영역에서 맑은 술 청주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약재가 들어간 약주만이 청주의 영역을 대신하고 있다. 일제가 패망하여 한반도에서 철수할 무렵 한반도에 남아있던 일본 청주 회사의 수는, 1942년 조선총독부에 등록된 청주 제조장이 119개였던 것으로 보아, 100개가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청주 제조장의 내력을 이어받은 회사가 현재 딱 한 군데, 1945년에 조선양조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어 백화양조-두산백화-두산주류-롯데주류로 변신해 온 군산 공장이다.

일본식 청주를 제조하기 위해 밑술에 해당하는 주모를 만드는 모습.

일본 청주의 계보를 이은 청주회사가 한국에 딱 한 군데 남아있게 된 것을 누구도 안타까워하지 않고 주목하지 않는 것은, 그 문화가 우리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다시 불고 있는 일본 청주 바람도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과 2006년 일본 무비자 여행으로 조성된 것이다. .

다시 조선 청주 이야기로 돌아가자. 우리 술 문화는 탁주, 청주(약주), 소주 그리고 청주와 소주를 혼합한 과하주의 문화로 구분할 수 있다. 과하주 문화는 사멸된 지 오래이고, 청주는 약주로 기울어 있다. 문화재나 민속주로 지정된 명주 중에서 약재가 들어가지 않고 쌀과 누룩만으로 빚은 청주는 경주 교동법주와 해남 진양주 정도를 꼽을 수 있다. 다른 민속주들은 솔잎이 됐든, 진달래가 됐든 약재나 꽃이 들어간다. 나의 견해는 조선 청주를 버리고 약주라는 개념을 사용하면서, 맑은 술 청주의 세계가 우리에게서 고갈되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새로운 청주의 싹이 보인다. 명절 제사용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제주(祭酒) 시장이 그것이다. 그동안 백화수복과 경주법주가 독과점하던 제주 시장에 차례주와 차례술들이 등장해 ‘진정한 전통주가 무엇이냐’는 새로운 문화 논쟁 속에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다. 5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제주 시장의 쟁탈전을 타고 맑은 술 청주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가양주(家釀酒) 문화가 발달했던 우리네는 본디 제주를 직접 빚어서 올렸다. 제사를 지낼 때 올리는 메(밥)를 보면, 새로 지어 가장 먼저 떠서 올린다. 귀한 것을 조상에게 먼저 올리려는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잘 빚어진 술은 지게미가 밑으로 차분히 가라앉고 위로 맑은 액체가 뜬다. 그 맑은 술이 청주다.

청주는 차례술이나 제주로 한정될 술이 아니다. 쌀 술, 청주는 세계시장에서 한국과 일본이 주도권을 다퉈야 할 영토다. 쌀 문화권에 살면서, 쌀을 주식으로 삼고 쌀로 술을 빚어 마시는 우리 문화가 엄존하기 때문이다.

 

섣달 그믐 초백주, 설날 아침 도소주

3년 동안 훔친 국록(國祿) 이미 부끄러운데

 새벽 시간 묻다 보니 어느새 세모(歲暮)가 닥쳤어라

주사위 노는 애들 모습 그래도 어여쁘다만

초백주(椒柏酒) 마신들 장부의 근심 풀어지랴

타 들어간 등화(燈火) 보며 분분한 세태 생각하고

어김없는 물시계 소리 곤곤한 천기가 느껴지네

말 안장 또 올려놓고 대궐 조회 서두나니

얇은 솜옷 파고드는 새벽 찬 바람.

조선시대 4대 문장가로 꼽히는 택당 이식(1584~1647)의 ‘섣달 그믐날 밤에 우연히 쓰다’라는 시다. 섣달 그믐밤에 초백주를 마시고, 설날 아침인데도 대궐로 출근하는 모습이 보인다. 얼마나 유행했는지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섣달 그믐에 초백주를 마시고, 설날 아침에 도소주를 마신 풍습이 우리네에겐 있었다.

서울약령시 한의약박물관에서 설을 맞아 도소주를 빚었다. 접시에 놓인 것은 도소주를 빚을 때 쓰는 약재인 길경, 육계, 방풍, 산초, 백출, 호장근 등이다.

초백주는 그리 복잡한 술은 아니다. 서유구가 쓴 <임원십육지>에 나온 제법으로는 섣달 그믐날 후추 7알과 동쪽으로 뻗은 잣잎 7개를 따서 술에 넣으면 된다. 이 술을 마시면 괴질이나 전염성이 강한 질병을 예방할 수 있다고 한다. 흔히 술 빚을 때 동쪽으로 뻗은 복숭아 가지로 술을 저으라는 처방이 있듯이, 동쪽으로 뻗은 잣잎을 넣으라는 것은 삿된 것을 물리치는 벽사의 의미를 지닌다.

설날 아침에 마시는 도소주는 훨씬 복잡하게 만들고, 의미 부여도 많이 되어 있다. 도소주(屠蘇酒)의 한자를 해체하면 재미있는 뜻이 나온다. 도소주(屠蘇酒)는 돌아가신(尸) 분(者)을 위하여, 나물( )과 생선(魚)과 밥(禾)을 차려두고 모여 앉아 마시는 술(酒)이라는 뜻이다. 곧 설날 차례상에 올려놓았다가 마시는 술이다.

<동의보감>에서는 도소주 마시는 것을 도소음이라 하며, 그 제법과 마시는 법을 소개하고 있다. 백출 1.8냥, 대황·길경·천초·계심 각 1.5냥, 호장근 1.2냥, 천오 6돈을 썰어 빨간 주머니에 넣고 12월 그믐에 우물 속에 담갔다가 정월 초하루 새벽에 꺼낸다. 이것을 청주 2병에 넣고 몇 번 끓어오르게 달이고 동쪽을 보면서 마신다.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한 잔씩 마시고, 찌꺼기는 다시 우물에 담가 두고 그 물을 마신다고 했다.

약재를 넣은 술을 몇 번 끓어오르게 달인 뒤에 마셨다는 것은 알코올을 많이 날려보내고 순하게 해서 마셨다는 얘기다. 설날에 남녀노소 모두가 마시기 위한 배려로 여겨진다. 도소주를 나이 어린 사람부터 마시게 했던 이유는, 어린 사람은 나이 먹는 일이 축하할 일이지만 늙은 사람은 세월을 잃었으므로 벌을 주는 의미라고 한다.

설날 아침부터 술을 격식을 갖춰 마셨던 이유는 무엇일까? 고작 한 잔씩 마시는 술에 많은 의미를 부여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내 눈엔, 술에 의미를 두었다기보다는 술을 빌려서 의미 있는 날을 만들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섣달 그믐을 그냥 넘길 수 없고, 설날을 싱겁게 보내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날에 선물을 주듯이, 특별한 날에 술을 짝지어 놓았던 것이다. 그게 이른바 우리 세시풍속과 함께 했던 절기주들, 대보름날의 귀밝이술과 삼짇날의 두견주, 청명일의 청명주, 단오의 창포주, 추석의 신도주, 중양절의 국화주들의 위상이었다.

조선시대 선조 때 14년 동안이나 영의정을 지낸 박순(1523~89)이 쓴 ‘음도소주(飮屠蘇酒)’라는 시가 있다. 그는 도소주를 마시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산초와 잣잎으로 술을 빚으니 그 향기 그윽하네/ 도소주는 옛날부터 이 세상에 이름이 나있었구나/ 한 잔을 마시고 세상을 잊으려 하건만/ 떠도는 인생 머무를 계책 없으니 수심만 더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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