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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화가이자 판화가, 조르주 루오. 그는 종교를 주제로 한 자신의 연작 판화 하나하나에 독특한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의 판화는 종교적인 미감으로 빛나기도 하지만,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제목의 문장만으로도 마음을 붙잡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판화의 제목이 이랬습니다. “의로운 이는 백향목처럼 자신을 치는 도끼에 향을 바른다.” 여기서 ‘의로운 이’란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겠고, ‘자신을 치는 도끼’란 곧 순교(殉敎)를 이르는 것이겠지요. 박해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던 이들. 자신의 주검에도 기꺼이 도끼에 향기를 묻혔던 이들을 찾아나선 길이었습니다. 최초의 순교 핏자국을 주춧돌로 삼아 지어올린 전북 전주의 전동성당에서 길은 시작됐습니다. 그 길은 전주천을 따라 치명자산으로, 숲정이성지로, 초록바위로 이어졌습니다. 전주라면 흔히 ‘한옥마을’부터 떠올리겠지만, 전주는 한국 가톨릭의 가장 빛나는 성지(聖地)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을 성지로 만드는 건 물론 수많은 순교자들이 오래전에 믿음으로 바쳤던 죽음과 여태 그 죽음을 잊지 않는 이들입니다. 오는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합니다. 새삼 전주에서 순교의 자리를 찾아나서기로 한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교황은 한국을 방문해 우리 땅에서 죽음으로 믿음을 증거했던 순교자 124위의 의로운 주검에 ‘복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이른바 ‘시복시성식’을 거행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지난 1984년 ‘성인’의 자리에 오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 103위가 있습니다만, 당시의 시복시성은 푸른 눈의 이방인 선교사들의 노고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이들보다 먼저 믿음을 목숨으로 바꾼 이들이 있었건만, 사료의 부족으로 여태 이들은 ‘신도’의 이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신앙을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부인(否認)이 아닌 죽음을 택한 이들 중에는 당대의 거부였던 이들도, 천민의 낮은 신분이었던 이들도, 칠순을 바라보고 있던 노인도, 이제 갓 10대를 벗어난 청년도 있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끝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순교의 피가 묻은 돌을 주춧돌로 삼아 지어진 성당을 찾아, 처참한 참수가 있었던 현장을 찾아 그걸 물었습니다. 믿음을 죽음 너머에 두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순교의 자취에는 묵주를 든 이들의 맑은 기도가 넘실거리고 있었고,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과해 성당 안으로 쏟아지는 빛은 영롱했습니다. 고백하자면,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넘어선 신념이, 죽음을 넘어선 평화가 그곳에 있는 것만은 확실한 듯했습니다. 죽기 전까지 매만지고 매만져 다 닳아버린 십자가에서 그 신념과 평화를 봅니다.
# 첫 순교의 핏자국 위에 세워지다…전동성당 ‘한옥마을’로 대표되는 전주는 ‘가톨릭의 성지’이기도 하다. 우리 땅에 가톨릭이 전해진 이후 첫 순교가 이곳 전주에서 있었다. 첫 순교뿐만이 아니었다. 박해의 시기. 믿음을 죽음과 맞바꾸는 일이 전주 땅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옥마을 인근의 전동성당도 첫 선교의 자취가 주춧돌로 남아있는 자리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동성당에서 성당 건축의 아름다움만 바라보지만, 성당에는 그보다 더 경건하고 깊은 의미가 새겨져 있다. 죽임으로도 꺾지 못했던 믿음의 지극함으로 기둥을 삼고 신도들의 눈물로 벽돌을 삼아 서 있는 곳이 바로 전동성당이다. 종교의 이름 아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첫 순교자는 윤지충이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진사 벼슬에 올랐던 그는 어느날 서울 명례동(지금의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와 ‘츨극’이란 제목의 천주교 책 두 권을 빌려왔다. 그게 바로 믿음의 시작이었다. 책을 다 읽은 그는 다산 정약용의 형인 약전으로부터 교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나서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는 ‘두려움 없는 실천’으로 신앙인의 자세를 지켰다. 중국 베이징(北京)의 주교로부터 비밀리에 ‘제사와 미신을 금하라’는 서신이 들어오자 그는 종교적 실천을 위해 집에 모셔둔 신주를 땅에 묻고 교리를 따랐다. 그러다 1791년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어머니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했지만, 그는 종교적인 이유로 위패를 만들지도, 제사를 지내지도 않았다. 당시 조문객들이 이런 그의 행동을 천인공노할 패륜으로 받아들인 건 당연했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졌다. 와전된 소문은 급기야 ‘시체를 내다 버렸다’는 말로 비약됐다.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이른바 ‘폐제분주(廢祭焚主)’사건의 시작이자, 최초의 박해였던 ‘신해박해’의 시작이었다. 당시의 도덕적 시선으로 본다면 윤지충의 행위는 단지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유교 사회에서 아비가 없다는 건, 곧 임금도 없다는 것이었다. 신주를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임금을 능멸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지배층이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건 순교자들이 최고의 형벌인 ‘죽임’의 위협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해 불가는 곧 두려움이었다. 순교자들은 형벌로도 도저히 다스릴 수 없었던 ‘흉악범 중의 흉악범’으로 취급됐다. 조정에서는 체제에 대한 위협을 우려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대신들의 청원도 잇따랐다. 정조는 마침내 윤지충과 그의 사촌 권상연을 참수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충남 금산에서 전주로 압송돼온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해 12월 8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됐다. 형장에서 관리들이 ‘앞으로 조상의 신주를 공경하고 국왕에게 복종하지 않겠느냐’는 마지막 물음이 있었지만, 윤지충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우리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교는 이렇게 이뤄졌다. 전동성당은 그 핏자국을 증거한다. 전동성당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처형될 때 피가 묻은 성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지어졌다. 신도들에 의해 성당이 완성되기까지에는 무려 23년이 걸렸다. 믿음의 피를 뿌린 자리 위에 그 믿음을 이어가는 신도들이 가늠할 수 없는 정성을 보탰던 것이었다. 그러니 전동성당에서는 성당의 자태나 위용보다는, 성당이 딛고 선 자리와 벽돌을 믿음처럼 단단하게 쌓았을 사람들의 정성과 마음을 깊이 들여다볼 일이다.
# 일가족 일곱의 믿음이 담긴 자리…치명자산 최초의 순교가 있은 뒤에도 전주에서는 믿음을 죽음과 바꾼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다. 전주에서 전동성당과 함께 순교의 성지로 꼽히는 곳이 한옥마을에서 멀지않은 ‘치명자산’이다. ‘치명자(致命者)’란 순교자를 이르는 말이다. 해발 360m 남짓한 치명자산은 중머리산 혹은 승암산으로 불렸으나 호남에 복음을 전하다 국사범으로 처형된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거기에 묻히면서 치명자산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 치명자산의 구부 능선쯤에는 유항검의 가족 일곱이 합장된 묘가 있다. 그 묘를 찾아 오르는 산길.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치렁치렁 달렸던 동백들이 떨어져 낭자한 선혈처럼 그 길을 덮었다. 예수의 수난을 순서대로 기록해놓은 ‘십자가의 길’이 자연스럽게 길잡이가 된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걷는 길. 산비탈을 따라가는 길은 발걸음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고친 신도들의 경건한 기도가 넘쳐났다. 이 길은 가톨릭 신자들의 것만은 아니다. 새소리와 함께 고요한 명상에 잠길 수 있어 가벼운 소풍지로도 훌륭했다.
치명자산으로 오르는 길 끝에는 합장묘가 있고 바로 그 밑에 1994년 지어진 기념성당이 세워졌다. 아래로 낮추어 지어진 성당 안은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으로 영롱했다. 성당 내부에서 눈길을 끌었던 건 모자이크로 장식된 강단의 벽화였다. 벽화 속에는 동정녀 마리아와 요셉이 어린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있었고 그림 양 옆으로는 부부가 무릎을 꿇고 있다. 유항검의 며느리 이순이와 아들 유중철의 모습이다. 혼인을 하지 않았다가 자칫 금지된 천주교를 믿는 것이 들통날 수 있어 결혼을 했으나 신앙으로 수도자적인 순결한 삶을 택했던 ‘동정부부’였다. 부부의 모습 옆에는 며느리 이순이가 옥중에서 남긴 굳은 신앙심을 담은 편지글이 새겨져 있다. 합장 묘의 위쪽 바위에는 4m 높이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아무런 치장도 없이 세워진 십자가는 성모 마리아 형상의 기암과 어우러져 비장감이 느껴진다. 그 십자가로 이어지는 암반 위에 오르면 전주천 일대와 한옥마을의 풍경이 시야 가득 펼쳐진다. 이쪽의 경건한 자리에서 번잡한 저쪽의 일상을 바라보면서 이순이가 죽음의 문턱에서 편지로 남긴 당부의 말을 떠올린다. “죄를 짓지 않도록 자세히 살피고 매사에 순명하며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비록 작은 허물이라도 큰 허물처럼 살피시고…선을 베풀 기회이거든 작은 선이라도 버리지 말고….” # 참혹한 주검의 자리를 기도로 씻는 곳들 전동성당과 치명자산 말고도 전주에는 박해와 순교의 자취들이 곳곳에 있다. 신록이 녹음으로 옮아가고 있는 전주천변을 따라가다 보면 도처에서 순교터를 만날 수 있다. 먼저 전주 가톨릭신학원이 있는 숲정이성지부터. 숲정이는 전라감사 이서구가 북쪽의 허한 기운을 닫고자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한 자리다. 이곳에서는 유항검의 아내와 처제, 그리고 며느리와 조카가 처형된 이래 수많은 순교자들의 죽음이 이어졌던 장소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13년간의 옥고를 치른 다섯 명의 순교자가 참수됐고, 1866년 병인박해때도 여섯 명이 여기서 목숨을 믿음과 바꿨다. 이듬해에도 몇 명의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순교자들의 이름만으로도 숨이 다 가쁠 정도다. 숲정이성지는 도시 한복판에 떠있는 하나의 경건한 섬이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목소리는 낮추어졌으며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졌다. 종교를 가진 이들도,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성지의 중앙에는 다섯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기해·병인·신해·신유·정해…. 다섯 번의 박해 때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믿음의 말이 스러지지 않고 그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그 비석 앞에는 고요한 묵상과 마음을 다한 기도가 가득했다. 성지를 찾아온 중년의 부부도, 허리 굽은 할머니도, 친구와 함께 온 청소년들도 기도처에서 나지막이 기도문을 외웠다. 이들의 낮은 음률의 기도는 길게 끌리는 종소리와도 같았고 그 기도로 성지는 더욱 경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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