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전주 ‘가톨릭의 성지’

醉月 2014. 4. 30. 22:06

‘호남의 사도’로 불리던 순교자 유항검의 일가족이 합장된 전북 전주 치명자산의 묘역 뒤편 바위에 세워진 십자가. 성모 마리아 형상의 기암 곁에 아무런 치장 없이 세워진 십자가는 단정하면서도 경건하다. ‘치명자(致命者)’란 산 이름은 순교자라는 뜻이다.


프랑스의 화가이자 판화가, 조르주 루오. 그는 종교를 주제로 한 자신의 연작 판화 하나하나에 독특한 제목을 붙였습니다. 그의 판화는 종교적인 미감으로 빛나기도 하지만,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제목의 문장만으로도 마음을 붙잡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판화의 제목이 이랬습니다. “의로운 이는 백향목처럼 자신을 치는 도끼에 향을 바른다.” 여기서 ‘의로운 이’란 믿음을 지키는 사람이겠고, ‘자신을 치는 도끼’란 곧 순교(殉敎)를 이르는 것이겠지요. 박해와 죽음의 두려움 앞에서도 자신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던 이들. 자신의 주검에도 기꺼이 도끼에 향기를 묻혔던 이들을 찾아나선 길이었습니다.

최초의 순교 핏자국을 주춧돌로 삼아 지어올린 전북 전주의 전동성당에서 길은 시작됐습니다. 그 길은 전주천을 따라 치명자산으로, 숲정이성지로, 초록바위로 이어졌습니다. 전주라면 흔히 ‘한옥마을’부터 떠올리겠지만, 전주는 한국 가톨릭의 가장 빛나는 성지(聖地)라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을 성지로 만드는 건 물론 수많은 순교자들이 오래전에 믿음으로 바쳤던 죽음과 여태 그 죽음을 잊지 않는 이들입니다.

오는 8월 프란치스코 교황이 한국을 방문합니다. 새삼 전주에서 순교의 자리를 찾아나서기로 한 건 그 때문이었습니다. 교황은 한국을 방문해 우리 땅에서 죽음으로 믿음을 증거했던 순교자 124위의 의로운 주검에 ‘복자’의 지위를 부여하는 이른바 ‘시복시성식’을 거행합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지난 1984년 ‘성인’의 자리에 오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순교자 103위가 있습니다만, 당시의 시복시성은 푸른 눈의 이방인 선교사들의 노고에 힘입은 것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이들보다 먼저 믿음을 목숨으로 바꾼 이들이 있었건만, 사료의 부족으로 여태 이들은 ‘신도’의 이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신앙을 갖고 있느냐는 질문에 부인(否認)이 아닌 죽음을 택한 이들 중에는 당대의 거부였던 이들도, 천민의 낮은 신분이었던 이들도, 칠순을 바라보고 있던 노인도, 이제 갓 10대를 벗어난 청년도 있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끝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순교의 피가 묻은 돌을 주춧돌로 삼아 지어진 성당을 찾아, 처참한 참수가 있었던 현장을 찾아 그걸 물었습니다. 믿음을 죽음 너머에 두는 일이 가능한 것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대답은 듣지 못했지만 순교의 자취에는 묵주를 든 이들의 맑은 기도가 넘실거리고 있었고, 스테인드글라스 창을 통과해 성당 안으로 쏟아지는 빛은 영롱했습니다. 고백하자면,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목숨을 넘어선 신념이, 죽음을 넘어선 평화가 그곳에 있는 것만은 확실한 듯했습니다. 죽기 전까지 매만지고 매만져 다 닳아버린 십자가에서 그 신념과 평화를 봅니다.

가톨릭 전래 이후 첫 순교자의 피가 묻은 성벽을 주춧돌로 삼아 지어진 전북 전주의 전동성당. 죽임으로도 꺾지 못했던 믿음의 지극함으로 기둥을 삼았고, 신도들의 눈물을 벽돌로 삼아 23년 동안 지어낸 성당이다.



# 첫 순교의 핏자국 위에 세워지다…전동성당

‘한옥마을’로 대표되는 전주는 ‘가톨릭의 성지’이기도 하다. 우리 땅에 가톨릭이 전해진 이후 첫 순교가 이곳 전주에서 있었다. 첫 순교뿐만이 아니었다. 박해의 시기. 믿음을 죽음과 맞바꾸는 일이 전주 땅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한옥마을 인근의 전동성당도 첫 선교의 자취가 주춧돌로 남아있는 자리다.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동성당에서 성당 건축의 아름다움만 바라보지만, 성당에는 그보다 더 경건하고 깊은 의미가 새겨져 있다. 죽임으로도 꺾지 못했던 믿음의 지극함으로 기둥을 삼고 신도들의 눈물로 벽돌을 삼아 서 있는 곳이 바로 전동성당이다.

종교의 이름 아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인 첫 순교자는 윤지충이었다. 스물다섯의 나이에 진사 벼슬에 올랐던 그는 어느날 서울 명례동(지금의 명동)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실의’와 ‘츨극’이란 제목의 천주교 책 두 권을 빌려왔다. 그게 바로 믿음의 시작이었다. 책을 다 읽은 그는 다산 정약용의 형인 약전으로부터 교리를 본격적으로 배우고 나서 천주교에 입교했다. 그는 ‘두려움 없는 실천’으로 신앙인의 자세를 지켰다. 중국 베이징(北京)의 주교로부터 비밀리에 ‘제사와 미신을 금하라’는 서신이 들어오자 그는 종교적 실천을 위해 집에 모셔둔 신주를 땅에 묻고 교리를 따랐다. 그러다 1791년 어머니가 세상을 떴다. 어머니의 죽음을 진정으로 슬퍼했지만, 그는 종교적인 이유로 위패를 만들지도, 제사를 지내지도 않았다. 당시 조문객들이 이런 그의 행동을 천인공노할 패륜으로 받아들인 건 당연했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졌다. 와전된 소문은 급기야 ‘시체를 내다 버렸다’는 말로 비약됐다.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살랐다는 이른바 ‘폐제분주(廢祭焚主)’사건의 시작이자, 최초의 박해였던 ‘신해박해’의 시작이었다.

당시의 도덕적 시선으로 본다면 윤지충의 행위는 단지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유교 사회에서 아비가 없다는 건, 곧 임금도 없다는 것이었다. 신주를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임금을 능멸하는 행위로 받아들여졌다. 당시 지배층이 가장 이해하지 못했던 건 순교자들이 최고의 형벌인 ‘죽임’의 위협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해 불가는 곧 두려움이었다. 순교자들은 형벌로도 도저히 다스릴 수 없었던 ‘흉악범 중의 흉악범’으로 취급됐다. 조정에서는 체제에 대한 위협을 우려하는 상소가 빗발쳤고 대신들의 청원도 잇따랐다. 정조는 마침내 윤지충과 그의 사촌 권상연을 참수형에 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충남 금산에서 전주로 압송돼온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해 12월 8일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전주 풍남문 밖에서 참수됐다. 형장에서 관리들이 ‘앞으로 조상의 신주를 공경하고 국왕에게 복종하지 않겠느냐’는 마지막 물음이 있었지만, 윤지충은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그때 그의 나이 서른셋이었다. 우리 천주교회 역사상 최초의 순교는 이렇게 이뤄졌다.

전동성당은 그 핏자국을 증거한다. 전동성당은 윤지충과 권상연이 처형될 때 피가 묻은 성 벽돌을 주춧돌로 삼아 지어졌다. 신도들에 의해 성당이 완성되기까지에는 무려 23년이 걸렸다. 믿음의 피를 뿌린 자리 위에 그 믿음을 이어가는 신도들이 가늠할 수 없는 정성을 보탰던 것이었다. 그러니 전동성당에서는 성당의 자태나 위용보다는, 성당이 딛고 선 자리와 벽돌을 믿음처럼 단단하게 쌓았을 사람들의 정성과 마음을 깊이 들여다볼 일이다.

치명자산 위에 소박하게 지어진 기념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성당의 문을 들어서면 가톨릭 신자가 아니더라도 절로 숙연해진다.


# 일가족 일곱의 믿음이 담긴 자리…치명자산

최초의 순교가 있은 뒤에도 전주에서는 믿음을 죽음과 바꾼 사건들이 끊이지 않았다. 전주에서 전동성당과 함께 순교의 성지로 꼽히는 곳이 한옥마을에서 멀지않은 ‘치명자산’이다. ‘치명자(致命者)’란 순교자를 이르는 말이다. 해발 360m 남짓한 치명자산은 중머리산 혹은 승암산으로 불렸으나 호남에 복음을 전하다 국사범으로 처형된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거기에 묻히면서 치명자산이란 이름을 얻게 됐다.

치명자산의 구부 능선쯤에는 유항검의 가족 일곱이 합장된 묘가 있다. 그 묘를 찾아 오르는 산길. 가지가 휘어질 정도로 치렁치렁 달렸던 동백들이 떨어져 낭자한 선혈처럼 그 길을 덮었다. 예수의 수난을 순서대로 기록해놓은 ‘십자가의 길’이 자연스럽게 길잡이가 된다.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걷는 길. 산비탈을 따라가는 길은 발걸음을 멈추고 옷매무새를 고친 신도들의 경건한 기도가 넘쳐났다. 이 길은 가톨릭 신자들의 것만은 아니다. 새소리와 함께 고요한 명상에 잠길 수 있어 가벼운 소풍지로도 훌륭했다.

▲ 전주 숲정이성지 기도처에 새겨진 예수 수난상. 14곳의 기도처마다 이곳을 찾은 신도들의 기도와 묵상이 끊이지 않는다.

유항검.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지자 전라도 지방에서 가장 먼저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전북 완주의 거부였던 그는 신품을 받은 정식 신부는 아니었지만 ‘임시 준성직자’로 전라도 일대에서 복음을 전파하고 있었다. ‘호남의 사도’란 별칭은 이때 붙여진 것이었다. 천주학을 믿고 교리를 전파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는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죄’라는 굴레에 갇혔다. 능지처참형을 받은 그는 전주감영으로 이송돼 지금의 전동성당 터에서 마흔여섯의 나이로 참수됐다. 살육은 가족으로 이어졌다. 동생 유관검, 아들 유중철과 유문석, 부인 신희와 며느리 이순이, 조카 유중성과 제수 이육희가 전주 풍남문 밖과 전주천 일대에서 살육되거나 고문을 받다가 옥에서 숨졌다. 조정에서는 이들의 흔적을 없앤다며 집을 헐고 집터를 파서 연못을 만들어버리는 ‘파가저택(破家宅)’의 형까지 내렸다. 유항검 일가의 시신은 노비와 인척들이 거둬서 김제 땅에 합장했다. 그후 전동성당의 완공에 맞춰 전주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치명자산의 구분 능선쯤에 합장했고, 이로써 치명자산은 성지가 됐다.

치명자산으로 오르는 길 끝에는 합장묘가 있고 바로 그 밑에 1994년 지어진 기념성당이 세워졌다. 아래로 낮추어 지어진 성당 안은 스테인드글라스의 빛으로 영롱했다. 성당 내부에서 눈길을 끌었던 건 모자이크로 장식된 강단의 벽화였다. 벽화 속에는 동정녀 마리아와 요셉이 어린 예수님의 손을 잡고 있었고 그림 양 옆으로는 부부가 무릎을 꿇고 있다. 유항검의 며느리 이순이와 아들 유중철의 모습이다. 혼인을 하지 않았다가 자칫 금지된 천주교를 믿는 것이 들통날 수 있어 결혼을 했으나 신앙으로 수도자적인 순결한 삶을 택했던 ‘동정부부’였다. 부부의 모습 옆에는 며느리 이순이가 옥중에서 남긴 굳은 신앙심을 담은 편지글이 새겨져 있다.

합장 묘의 위쪽 바위에는 4m 높이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아무런 치장도 없이 세워진 십자가는 성모 마리아 형상의 기암과 어우러져 비장감이 느껴진다. 그 십자가로 이어지는 암반 위에 오르면 전주천 일대와 한옥마을의 풍경이 시야 가득 펼쳐진다. 이쪽의 경건한 자리에서 번잡한 저쪽의 일상을 바라보면서 이순이가 죽음의 문턱에서 편지로 남긴 당부의 말을 떠올린다. “죄를 짓지 않도록 자세히 살피고 매사에 순명하며 마음을 편히 하십시오.…비록 작은 허물이라도 큰 허물처럼 살피시고…선을 베풀 기회이거든 작은 선이라도 버리지 말고….”

# 참혹한 주검의 자리를 기도로 씻는 곳들

전동성당과 치명자산 말고도 전주에는 박해와 순교의 자취들이 곳곳에 있다. 신록이 녹음으로 옮아가고 있는 전주천변을 따라가다 보면 도처에서 순교터를 만날 수 있다. 먼저 전주 가톨릭신학원이 있는 숲정이성지부터. 숲정이는 전라감사 이서구가 북쪽의 허한 기운을 닫고자 나무를 심어 숲을 조성한 자리다. 이곳에서는 유항검의 아내와 처제, 그리고 며느리와 조카가 처형된 이래 수많은 순교자들의 죽음이 이어졌던 장소였다. 1839년 기해박해 때 13년간의 옥고를 치른 다섯 명의 순교자가 참수됐고, 1866년 병인박해때도 여섯 명이 여기서 목숨을 믿음과 바꿨다. 이듬해에도 몇 명의 신자들이 이곳에서 순교했다. 순교자들의 이름만으로도 숨이 다 가쁠 정도다.

숲정이성지는 도시 한복판에 떠있는 하나의 경건한 섬이었다. 그곳에 들어서자 목소리는 낮추어졌으며 발걸음은 조심스러워졌다. 종교를 가진 이들도, 그렇지 않은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성지의 중앙에는 다섯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기해·병인·신해·신유·정해…. 다섯 번의 박해 때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믿음의 말이 스러지지 않고 그 비석에 새겨져 있었다. 그 비석 앞에는 고요한 묵상과 마음을 다한 기도가 가득했다. 성지를 찾아온 중년의 부부도, 허리 굽은 할머니도, 친구와 함께 온 청소년들도 기도처에서 나지막이 기도문을 외웠다. 이들의 낮은 음률의 기도는 길게 끌리는 종소리와도 같았고 그 기도로 성지는 더욱 경건해졌다.

전주천변에는 초록바위 순교터도 있다. 순교터는 전주천이 흘러가는 남부시장에서 싸전다리 건너 버스정류장 자리에 있다. 숲정이성지에서 전주천변을 타박타박 걸어서 당도할 수 있는 곳이다. 이 터에 남아있는 건 순교의 내용을 적은 순교비와 그 옆에 세워둔 모자이크 그림 하나가 전부다. 행인들이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는 이곳은 1867년 고작 열다섯 나이의 소년 둘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한 자리다.

처형된 천주교 신도들만 무려 1만 명을 헤아렸다는 병인박해 당시 대원군이 ‘천주교의 괴수’로 꼽았던 인물은 승지 남종삼과 진사 홍봉주였다. 둘은 함께 서울 서소문 밖에서 처형됐다. 가족들도 화를 피해갈 수 없었다. 당시 열네 살 동갑이었던 남종삼과 홍봉주의 아들도 함께 잡혀갔다. 법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나이는 열다섯. 그래서 전라감사는 둘을 전주 옥에 가두고 배교를 회유했으나 돌아온 건 단호한 거절이었다. 결국 이듬해 옥중에서 나이가 차자 죽임을 당했다. 차마 목을 벨 수 없었던지 두 소년을 이곳 초록바위에서 전주천 물로 떠밀어 죽였다. 이로써 남종삼의 가문은 할아버지부터 손자까지 3대가, 홍봉주의 가문은 4대째 순교했다. 믿음으로 무릅쓴 죽음의 비극이 이렇듯 잔인했다.

초록바위 순교터 인근에는 서천교 순교터도 있다. 병인박해 때 아버지와 함께 체포된 열여덟 나이의 조윤호. 같은 장소에서 부자를 처형할 수 없어 아버지는 숲정이에서 먼저 처형됐으며 아들 조윤호는 이곳 서천교 다리 아래 장터에서 군중이 보는 가운데 비참하게 처형됐다. 병사들이 번갈아가며 200대의 매를 때렸지만 죽지 않자 목에 밧줄을 걸고 장터의 걸인들에게 줄질을 시켜 죽게 하였다. 생목숨을 끊기가 이렇게 어려웠다. 작은 비석과 함께 세워진 모자이크 벽화 속에는 포박당한 조윤호의 목에 밧줄을 걸어 처형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이쯤에서 순례를 마무리해도 모자람이 없지만 기왕에 나선 길, 익산의 여산순교성지나 완주의 천호성지를 함께 들러봐도 좋겠다. 아예 전주에서 출발해 완주와 익산, 김제의 경계를 넘나들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240㎞의 ‘아름다운 순례길’을 밟아보는 건 어떻까. 가톨릭과 기독교, 그리고 불교와 원불교의 자취를 모두 다 아우르는 이 길이 상징하는 건 종교 간의 화합과 교류. 그러나 종교를 두루 아우른다는 건 한편으로는 교리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도 그 길을 걸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도, 종교를 갖지 않은 이들에게도 길은 늘 열려 있다. 하지만 그 길에서 참사의 비극을 목도하면서 우리들이 입었던 깊은 내상과 치미는 분노가 과연 묵상과 기도만으로 치유될 수 있는 것인지는 도무지 장담할 수 없다. ‘저를 치는 도끼에 향기를 묻힌다’는 의인의 길은 멀고도 멀다.


◆ 전주 가는 길 = 호남고속도로 익산갈림목에서 익산∼포항 간 고속도로에 이어 완주∼순천 간 고속도로로 갈아탄 뒤 동전주나들목으로 나온다. 이어 우아사거리에서 남원·임실 방면으로 우회전한 뒤 동부대로를 따라가면 이내 한옥마을이다. 전주의 가톨릭 성지는 도보로 이동할 수 있다. 치명자산 성지를 먼저 올라갔다 내려와 전동성당과 풍남문을 거쳐 전주천 일대의 순교지를 둘러보는 순서대로 돌아보는 게 좋겠다.


◆ 전주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한옥마을에는 다른 관광지와 비교해 유독 여성 관광객들이 많다. 그 이유의 절반쯤은 ‘안전하고 쾌적한 숙소’ 때문이다. 한옥마을 일대에는 호텔부터 한옥민박까지 가격이나 시설별로 다양한 숙소들이 마련돼있다. 한옥마을을 굽어보는 자리의 전주코아리베라호텔(063-232-7000)은 첫손에 꼽히는 숙소다. 완산구 고사동의 번화가 한복판에 있어 젊은이들의 활기를 느낄 수 있는 전주한성관광호텔(063-288-0014)도 빠지지 않는다. 한옥마을의 고택민박 중에서는 학인당(063-284-9929)과 양사재(063-282-4959), 부용헌(063-284-8587) 등을 최고로 친다.

곳곳에 내로라하는 집들이 즐비한 전주에서 맛집을 꼽으라는 건 참으로 곤란한 질문이다. 일단 비빔밥부터. 덕진동의 고궁(063-251-3211)과 중앙동 성미당(063-287-8800)이 첫손으로 꼽힌다. 남부시장의 ‘조점례피순대’(063-232-5006)와 콩나물국밥을 내는 ‘웽이집’(063-287-6879)과 ‘동문원’(063-284-3339)도 유명세를 타고 있는 곳. 술 생각이 난다면 2만 원짜리 기본상에 푸짐한 안주가 나오는 평화동, 삼천동, 서신동 등의 막걸리 골목도 빼놓을 수 없다. ‘가게 맥주’의 준말인 ‘가맥’도 유명한데, 황태포, 계란말이 등의 안주를 저렴하게 내는 ‘전일슈퍼’(063-284-0793)가 대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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