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익 더 큰 일 찾아내 적극적으로 전진시켜라
<화식열전> 통해 사마천이 주장한 현실적인 부의 법칙
서양인들과 일본인이 중국을 알기 위해 가장 많이 읽는 책은 <사기(史記)>이다. 중국인들은 <사기>를 자신들의 삶의 가치와 지향점을 제시하는 사서(史書)로서 인식해왔으며, 이러한 측면에서 ‘사기’는 중국인들의 정신과 문화를 역사적으로 형성시켜온 조형자(造型者)였다.
고대 시기 인간의 이익 추구 본능에 관해서는 뛰어난 글들이 이미 많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인간의 이익 추구를 어떻게 제한할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즉, 중국 고대의 경제 사상에서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국가를 본위로 하는 경제 사상이 확고하게 주류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법가는 상벌 정책을 시행해 이익을 국가에 환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유가는 도덕으로 교화해 인간의 욕망을 최소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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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들 모든 학설의 공통점은 국가와 통치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책략이라는 것이다. 개인의 관점에서 재산 관리, 즉 이재(理財)의 문제를 논의한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개인의 관점에서 이재의 문제를 논하고 어떻게 부를 이룰 것인가를 언급하는 경우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다만 유통 과정이라는 측면에서 문제의 표피적인 측면만을 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러한 때, 오직 사마천만이 <화식열전>을 통해 인간의 이익 추구 활동을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않은 채, 인간의 이익 추구는 지극히 정당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사마천에 따르면, 국가가 부유해야 백성이 부유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백성이 부유해질(富民)때, 비로소 국가도 부유해지는(富國) 것이었다.
재부(財富)의 점유량이 인간의 지위를 결정한다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국가는 사적 경제 부문에 굳이 간섭을 강행할 필요가 없으며 상인에게 맡겨 자유롭게 발전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로 하여금 적극적으로 생산과 교환의 역할을 수행하도록 인도해야 하며, 특히 국가가 상인들과 이익을 다투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사회 발전에서 공업과 상업 활동의 역할을 강조했고 그것은 사회 발전의 필연이라고 인식했다. 상공업자들이 이익을 추구하는 것의 합리성과 합법성을 인정했다. 나아가 그는 특히 물질적 재부(財富)를 얼마나 점유하고 있느냐가 인간 사회에서의 지위를 최종적으로 결정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그리하여 그는 경제 발전은 국가의 흥망성쇠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경제 사상과 물질관을 가지고 있었다.
<화식열전>은 ‘화식가(貨殖家)’인 52명의 역사 인물을 다루고 있다. 이 중 다섯 명은 역사상 유명한 경제 이론가이자 동시에 사업가이다. 그 외에도 황제의 총신, 봉국(封國)의 현인, 하층 장사꾼, 부녀자 등 각계각층의 인물을 다루고 있다. 이렇게 하여 <화식열전>에는 모두 71개 종류의 사업과 활동이 소개되어 있다. 모든 등장인물과 활동이 각 역사 시기의 구체적인 조건 속에 배치됨으로써 그 내용들에 더욱 구체성과 생동성을 더해주고 있다. 전편이 살아 있는 듯한 ‘입체적인’ 역사 무대가 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마치 사마천이 살던 당시로 역사의 터널을 통해 되돌아가 사람들의 상업활동을 두 눈으로 구경하는 느낌이 들게 한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사기>를 읽으면서 <화식열전>을 읽지 않는다면 <사기>를 읽지 않은 것과 같다고 했던 것이다.
‘화식(貨殖)’의 ‘화(貨)’는 재부(財富)를 가리키며, ‘식(殖)’은 증식을 의미한다. 즉, ‘화식’이란 어떻게 재부를 증식하는가라는뜻이다. 결국 ‘화식’이란 자원의 생산과 교환을 이용해 상공업 활동을 진행함으로써 재물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말한다.
사마천이 말하는 화식에는 그 밖에도 각종 수공업과 농·어업, 목축업, 광산, 제련 등의 경영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른바 ‘화식가(貨殖家)’란 상품 교환의 활동에 전문적으로 종사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상품의 생산과 교환을 동시에 경영하는 사람들 그리고 서비스업에 종사하거나 임대업에 종사하는 등 상품과 관련을 지닌 네 가지 직업군을 지칭한다. 따라서 <화식열전>을 단순히 상인 열전으로 파악하는 것은 분명한 오해이다.
천하 사람들이 오가는 것은 모두 이익 때문이다
▲ 사마천 (司馬遷, BC 145 ?~BC 86 ?)은 전한 시대의 역사가이자 <사기(史記)>의 저자이다. |
인간의 삶을 꿰뚫어보는 사마천의 통찰력은 무엇보다도 그가 인간이 부를 추구하는 것을 불변의 진리로 인식했다는 점에 있다. 그는 “부란 인간의 타고난 성정(性情)이다. 그러므로 배우지 않아도 모두 바라는 바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또 “조정에서 모든 힘을 다하여 계책을 내고 입론(立論)하며 건의(建議)하는 현인들과 죽음으로써 신의를 지키면서 동굴 속에 은거하는 선비들의 목적은 도대체 무엇인가? 모두 재부를 위한 것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는 부를 추구하는 욕망을 ‘귀와 눈에 좋은 소리와 색깔을 모두 즐기려 하고, 입으로는 각종 맛있는 고기를 끝까지 맛보려 하는’ 것처럼 인간의 본성에 속하며,
이러한 본성은 어떠한 외부적 힘으로도 결코 없앨 수 없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여기에서 “천하 사람들이 즐겁게 오고 가는 것은 모두 이익 때문이며, 천하 사람들이 어지럽게 오고 가는 것도 모두 이익 때문이다”라는 그의 유명한 결론이 나오게 된다. 사마천은 나아가 인간의 이러한 천성적 욕망에 대해 인위적으로 그것의 생장(生長)과 발전을 억제해서는 안 되며, 마땅히 그 세(勢)에 따라 인도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전진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실주의자로서의 사마천의 냉정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마천은 재부를 형성해가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능력 차이를 인정한다. 그것을 ‘긴 소매의 옷을 입어야 춤을 잘출 수 있고, 돈을 많이 가져야 장사를 잘할 수 있다’라는 속담으로써 설명한다. 소매가 길어야 비로소 우아한 춤을 출 수 있게 되고, 자금이 충분해야 상업을 훌륭하게 경영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단언한다. “빈부의 법칙은 어느 누가 빼앗아갈 수도 줄 수도 없으며, 지혜로운 자는 능히 부유해질 수 있고, 어리석은 자는 곧 빈곤해진다. 재물이 없는 빈민은 오로지 힘써서 일할 수밖에 없고, 재물이 있으나 많지 않을 경우에는 곧 지략으로써 조그만 재산을 취하며, 부유한 사람은 기회를 노려 투기를 함으로써 큰 재산을 모으게 된다. 이것이 재산을 얻는 통상적인 방법이다.”
청고한 품행도 없으면서 시종 가난하다면 수치스러운 일이다
사마천은 마지막 화룡점정을 이렇게 찍는다. “집안이 빈곤하고 부모가 늙었으며 처자가 약하고 어리며 매년 제사를 지내면서 제사 음식도 장만하지 못하고, 음식과 의복도 자급하지 못하면서도 아직 부끄러운 줄 모른다면 그것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선비의 청고(淸高)한 품행도 없으면서 시종 가난하고 비천하며 그러면서도 고담준론을 논하기를 좋아하고 무슨 인의 도덕을 계속 운위하는 것은 진실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인의는 부귀에서 나오니 먼저 ‘이익’에 눈 떠라 |
평민도 ‘무관의 제왕’이 될 수 있다는 ‘소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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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대의 단추를 훔친 자는 처형을 당하지만, 국가의 권력을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집에서 저절로 인의(仁義)가 생긴다.”
<한서(漢書)>의 저자 반고(班固)는 <한서·사마천전>에서 사마천이 ‘세리(勢利)를 숭앙하고 인의(仁義)를 경시하며 빈천(貧賤)을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사마천이 ‘천하 사람들이 즐겁게 오고 가는 것은 모두 이익 때문이며, 천하 사람들이 어지럽게 오고 가는 것도 모두 이익 때문이다(天下熙熙 皆爲利來, 天下壤壤, 皆爲利往)’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정작 세리(勢利)를 숭앙하고 빈천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은 ‘천하의 사람들(天下人)’이었던 것이지 결코 사마천 자신이 아니었다. 사마천은 다만 세리(勢利)를 숭앙하고 빈천을 부끄럽게 여기는 그 세태를 적확하게 직설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화식열전>을 기술한 이유에 대해 사마천은 <사기·태사공자서>에서 “벼슬이 없는 일반 백성들이 국가의 법에 저촉되지 않고 또 백성들의 생활에 해를 주지 않았으며, 매매는 시기에 따라 결정하였다. 이렇게 그의 재부는 증가하였고, 총명한 사람 역시 취할 바가 있다고 여겼다. 이에 <화식열전(貨殖列傳)> 제69를 짓는다”라고 답하고 있다.
소봉(素封)이란 무엇인가
사마천에게 진정한 화식가는 마땅히 평민 출신이어야 했다. 여기에서 그는 ‘소봉(素封)’이라는 개념을 창조해낸다. 사마천은 이 ‘소봉’에 대해 “지금 어떤 사람들은 관직봉록 혹은 작위와 봉지(封地) 수입이 없으면서도 그것을 지닌 사람들과 더불어 비견될 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경우를 이름하여 ‘소봉(素封)’이라고 한다”라고 규정한다. 재산과 세력을 지니고 있으면서 왕자와 같은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을 사마천은 ‘소봉(素封)’이라고 명명했다. 즉, 무관의 제왕이라는 의미이다.
진한(秦漢) 시대 대상인은 왕자(王者)와 같은 즐거움을 누렸을 뿐 아니라 심지어 황제로부터 칭송까지 받았다. 이를테면 목축으로 부를 쌓은 오지과라는 인물에 대해서 사마천은 ‘진시황은 명령을 내려 오지과에게 제후와 동등한 대우를 하도록 하여 봄가을 두 번 귀족들과 함께 궁궐에 들어와 황제를 알현할 수 있도록 하였다’라고 기록했다. 또 파(巴) 지방에 사는 청(淸)이라는 과부는 그 조상이 단사(丹沙)가 생산되는 광산을 발견해 몇 대에 걸쳐 그 이익을 독점해 재산이 너무 많아 계산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진시황은 그를 절조가 있는 정부(貞婦)로 여겨 그를 존경하고 빈객(賓客)으로 대우했으며, 그녀를 위해 여회청대(女懷淸臺)를 짓도록 했다.
이 지점에서 사마천은 강력한 질문을 던진다. “오지과는 변방 시골 사람으로서 목장 주인에 불과하였고, 청(淸)은 궁벽한 시골의 과부였지만 도리어 천자의 예우를 받아 이름을 천하에 떨쳤으니, 이는 실로 이들의 부유함에 기인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촉의 탁씨와 정정은 본래 조상이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할 때 동방에서 이주된 포로로서 야철업을 경영해 부를 쌓아 노복이 1천명에 이르러, 전답과 연못, 사냥의 즐거움이 군주와도 같았다. 남양 공의 완씨는 야철업으로 부를 쌓아 재산이 수천 금에 이르렀다. 그의 수레는 커다란 대열을 지었고 제후들과 교류해 ‘유한공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다.
반면에 한나라 초기의 수많은 제후의 경우, 어떤 사람들은 쇠락해 우마차를 타야 했다. 오초칠국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장안에 거주하는 많은 열후에게 군자금을 징발하자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고리대업자인 무염씨에게 돈을 빌려야 했다. 전국 각지의 부자 상인들은 큰 부자는 군(郡)을 좌지우지했고, 중등 부자는 현(縣)을 좌지우지했으며, 작은 부자는 향리를 좌지우지해 그 수를 이루 셀 수 없었다.
사마천은 이렇듯 생동하는 역사와 현실을 근거로 하여 ‘소봉론’이라는 관점을 제기했다. 사마천은 “천금을 지닌 집안은 곧 그 도시의 봉군(封君)과 비길 수 있으며, 만금(萬金)을 지닌 부자는 곧 그 왕과 같은 정도로 향유할 수 있다. 이들이 곧 이른바 소봉(素封)이 아닌가? 사정이 그렇지 아니한가?”라고 말한다. “만금(萬金)을 지닌 부자는 곧 그 왕과 같은 정도로 향유할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소봉론’의 가장 간략한 개괄이다. 지금 시대에 돌아보아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이다.
누구든 부를 쌓아 왕자(王者)가 될 수 있다
‘소봉론’은 두 가지의 내용을 지니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만금(萬金)을 지닌 부자는 곧 그 왕과 같은 정도로 향유할 수 있다’라는 내용 외에 다른 하나는 ‘사람이 부유해지면 인의가 저절로 따라온다’라는 것이다. 사마천의 이 명제는 두 가지 인식을 의미한다. 하나는 ‘예의는 가짐에서 비롯되고, 없음에서 폐절된다’라는 것으로서 인의 도덕이 경제적 기초 위에 만들어진다는 인식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배 계급의 도덕이란 단지 점유하는 바의 재부와 권력의 부속물이라는 인식이다.
<사기·유협열전>에서 사마천은 ‘인의(仁義)가 무엇인지 누가 아는가?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곧 도덕을 지닌 사람이다’라는 속담을 인용하고 있다. 돈과 권세만 있으면 곧 인의가 존재하게 된다는 뜻이다. 사마천은 이 논리를 더 이어간다. “혁대의 단추를 훔친 자는 처형을 당하지만, 국가의 권력을 훔친 자는 제후가 된다. 제후의 집에서 저절로 인의(仁義)가 생긴다.”
사마천의 이 말은 위정자들이 주장하는 허위적인 도덕을 통렬하게 비판하는 촌철살인의 경구이다. 여기에서 사마천은 고관대작과 인의를 떠벌이는 거짓 군자들의 얼굴에 씌워진 인의 도덕의 가면을 벗겨내고, “자기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이 곧 도덕을 지닌 사람이다”라는 세간의 시각에 대해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다.
사마천의 ‘소봉론’은 부귀와 예의가 지니는 본질을 꿰뚫으면서 황음(荒淫)하고 후안무치하며 ‘이익을 입에 올리지 않는’ 지배층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백성을 속이면서 백성들에게 오직 ‘의(義)’만을 말하도록 하고 ‘이(利)’는 말하지 말도록 강제한다.
이렇게 하여 사마천은 ‘소봉론’을 통해 사람마다 돈을 벌고 부를 쌓도록 고취하면서 ‘제후의 집에 저절로 인의가 생긴다’라는 불합리한 현실을 바꿔낸다. 이러한 ‘전투성’은 귀천(貴賤)이라는 사회적 등급의 구분이 타고난 불변의 것이 결코 아니며, 반대로 모든 사람이 자기의 총명과 재능에 의해 부를 쌓아 왕자(王者)와 같은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변화의 관점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리하여 사마천의 ‘소봉론’은 진나라 말기 전국적인 반란의 불씨를 지폈던 진승·오광의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는가!”와 같은 메시지를 담고 있다.
‘시간’과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오라 |
‘화식열전’이 가르치는 여섯 가지 성공 원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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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이 ‘화식열전’에서 ‘화식가’의 대표로서 선택해 기술한 인물은 10여 명뿐이다. ‘화식열전’의 대표로 선택되는 데는 엄격한 제한이 있기 때문이다. ‘화식열전’에서 언급되는 화식가는 당시의 수많은 화식가 중에서도 군계일학의 상인이었다. 그들이 탁월할 수 있었던 것은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장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이들에 대해 자본과 실력 축적 과정에서 각자가 지닌 장점을 잘 묘사하고 있다. 사마천의 눈에 사업 현장에서의 이들은, 전쟁터에서 계책을 내고 천리 밖의 승리를 결정하는 모사(謀士)와 지자(智者)들에 비해도 전혀 뒤지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일러스트 유환영 |
▒ 주나라 백규와 선곡 임씨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상업 경영에서는 “때를 알고(지시·知時), 때에 맡기며(임시·任時), 때를 따르는(취시·趣時) 것이야 말로 반드시 준수해야 할 원칙이다”라고 지적했다. 사마천이 말한 ‘시(時)’는 이른바 주로 시장 상황의 변화를 가리킨다. 시장 상황이란 천변만화의 복잡다단한 과정으로서 오로지 그 복잡한 현상에서 변화의 추세와 규율성을 찾아낼 때 비로소 ‘여시축(與時逐; 때에 맞추어 따라가다)’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시(時)에는 자연적 시기와 정치적 시기 그리고 시장에서 상품 가격이 등락하는 시기가 있다. 값싼 물건을 구매하고 값이 나가는 물건을 판매하는 최적의 시기를 포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기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게 되며, 이것이 현대에서 말하는 ‘상품 동향의 예측’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기를 과연 어떻게 포착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서 핵심적인 관건은 무엇보다 시장에서 상품의 가격 변화 규칙을 파악하는 것이다. 시장 상품의 가격 변화를 예측하고 시기를 포착해 시기가 왔을 때 그것을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전쟁과 동일한 이치이다. 적이 생각하지 못한 곳에 모습을 드러내고, 상대가 준비되지 못한 곳을 공략함으로써 일거에 상품을 시장에 투입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상인들이 아직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한 상품을 수집하고 비축해 때를 기다리다가 정확한 시기에 시장에 내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어느 상품의 가격이 극에 이르면, 생산자들은 더욱 생산에 박차를 가해 결국 시장이 포화 상태가 되고 가격은 자연히 하락하게 된다. 가격이 바닥에 이르게 되면, 생산자들이 감소해 서서히 그 상품이 희귀해진다. 그리하여 계연은 ‘가뭄이 들 때 배를 준비하고, 홍수가 들 때 수레를 준비하였고’, 범여는 ‘여시축(與時逐; 때에 맞추어 따라가다)’했으며, 백규는 ‘때의 변화를 살피는 것’을 즐겨했다. 이 모두 시장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시장 수요를 조사해 ‘시기에 맞춰 비축하고’, 수요·공급의 규율을 활용해 큰 이익을 얻는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이 전략을 가장 효과적이고 성공적으로 구사한 사람이 바로 주나라의 백규와 선곡 임씨이다. 백규는 때의 변화를 즐겨 관찰하고 ‘사람들이 버리면 나는 취하고, 사람들이 취하면 나는 버린다’라는 원칙에 따라 곡물이 익어가는 계절에 그는 양곡을 사들이고, 비단과 칠(漆)을 팔았으며 누에고치가 생산될 때 비단과 솜을 사들이고 양곡을 내다팔았다. 백규는 상품이 계절에 따라 시장에 나타나는 이러한 틈을 교묘하게 이용해 커다란 이익을 얻었다.
선곡 임씨가 구사한 치부(致富)의 방식은 백규의 그것과 달랐지만 효과는 동일했다. 임씨는 전쟁 상황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곧 식량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진나라 말기 호걸들이 모두 앞을 다투어 금과 옥을 차지할 때, 임씨는 반대로 땅굴을 파고 그곳에 식량을 저장했다. 과연 전쟁이 계속되자 백성들이 농사를 짓지 못해 쌀값이 만금에 이르렀다. 이때 임씨는 저장된 식량으로 호걸들의 금은과 바꿔 큰 재산을 모았다.
또한 다른 부자들은 모두 앞을 다투어 사치했으나 임씨는 오히려 자신의 신분을 낮추고 겸손했으며 절약을 숭상하면서 스스로 힘써 농사와 목축업에 종사했다. 논밭과 가축도 다른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모두 싼값으로 매입했지만 오직 임씨만은 비싸고 우량한 것을 매입했다. 그들 가문은 몇 대에 걸쳐 모두 커다란 부호로 살았다.
그 밖에 범여와 교요 역시 사업의 시기를 포착하는 데 정확했다. 교요는 국가가 변경을 개척하는 기회를 이용해 목축업을 발전시켰다. 소와 말 그리고 양이 만 필이었으며, 식량은 만 종으로 계산했다.
도간의 뛰어난 용인술
<사기·유경숙손통열전>에서 사마천은 속담을 인용해 이렇게 말한다. “천금의 갖옷은 여우 한 마리의 겨드랑이 가죽만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높은 누대의 서까래는 한 그루의 나무 가지만으로 만든 것이 아니듯이, 하·은·주 삼대의 태평성대는 한 사람의 지혜로써 이룬 것이 아니다.”
무릇 천하의 모든 일은 많은 현재(賢才)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고객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의 일꾼, 즉 직원을 만족시켜야 한다. 직원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반드시 적재적소, 적절한 직원을 적절한 자리에 배치해야 한다. 적절한 직원을 적절한 자리에 배치하는 것에는 이른바 ‘인물을 알아보는 혜안’을 지녀야 한다. 고객의 수요에 따라 직원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그런 연후에 장점을 키우고 단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적절하게 사람을 기용하고 일을 맡겨야 한다.
‘화식열전’은 수미일관하게 사람을 잘 알아보고 기용함으로써 부를 쌓은 경우를 기술하고 있다. 사람을 잘 알아보고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가의 여부와 믿을 수 있는 조력자를 고르는 능력 역시 화식가의 능력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범여는 ‘사람을 선택하는’ 데 능했으며, 연로했을 때는 자손에게 맡겨 경영하도록 해 부호가 되었다.
도간(刀間)의 경우는 더욱 전형적이다. 제나라의 풍속은 노예를 낮고 비천하게 여겼지만, 오직 도간은 그들을 아끼고 중시했다. 교활하고 총명한 노예는 주인들이 골치 아프게 생각하는 대상이었지만, 오직 도간만이 그들을 받아들이고 또 이용해 그들을 파견함으로써 자기를 위해 고기잡이나 제염을 하도록 하거나 혹은 상업에 종사하게 해 이익을 얻도록 했다. 그러면서 노예들을 관리들과 교류하게 했고, 갈수록 그들에게 커다란 권한을 맡겼다. 마침내 그가 이러한 노예들의 힘에 의해 가문을 일으키고 커다란 부를 쌓아 재산이 수십만 금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관직을 받느니 차라리 도간의 노복이 되겠다’라는 속담까지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도간이 노복 스스로의 부를 쌓게 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위해 모든 힘을 다하도록 만들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도간은 교활한 일부 노예들의 본성을 활용함으로써 노예들 스스로도 부자가 되었고, 자신 역시 엄청난 거부가 되었다. 일부 성격이 좋지 못한 사람이라도 좋은 지도자가 이끄는 ‘상황’과 ‘교육’의 힘에 의해 자신에게도 이익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을 주는 일을 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사마천은 이러한 사례를 통해 이들 상인들이 용인(用人)에 능하고 부하들이 그들을 신뢰하게 하며 그들이 지니고 있는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게 함으로써 마침내 재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고 강조하고 있다.
선견지명·지략으로 얻고 근검절약으로 지켜내라 |
‘화식열전’이 가르치는 여섯 가지 성공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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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화식가는 반드시 효과적인 전략을 지니고 있다. 상업 전략에는 반드시 장기적인 안목이 필요하다. 결코 일시적인 이익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화식열전’은 이에 대한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다.
촉군(蜀郡) 탁(卓)씨의 선조는 본래 조(趙)나라 사람으로 야금업을 통해 부호가 되었다. 진나라 군대가 조나라를 멸망시키고 탁씨를 강제로 이주시켰다. 탁씨는 포로로 잡히고 약탈을 당해 부부가 수레를 끌며 새 이주지로 옮겨갔다. 그곳으로 이주한 다른 사람들은 인솔하는 진나라 관리에게 앞다투어 뇌물을 바치고 최대한 가까운 곳에 살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탁씨는 “이곳 토지는 협소하고 척박하다. 문산(汶山) 아래에는 드넓고 비옥한 전야(田野)가 있고 땅속에는 토란이 자라나 능히 양식할 수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죽을 때까지 전혀 굶지 않는다고 들었다. 그곳에 사는 많은 사람이 거리에서 일을 하고 있어 상업을 하기에 유리하다”라고 생각해 일부러 먼 곳으로 이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탁씨는 임공 지역에 배치되었는데, 마음속으로 크게 기뻐했다. 그리고 곧 철이 생산되는 산에 가서 광물을 채굴해 풀무질하고 주조했으며, 인력과 재력을 기묘하게 운용하고 심혈을 기울여 경영했다. 결국 그는 큰 부자가 되어 한 국가의 군주에 비견되었다. 탁씨가 이렇게 큰 부호가 된 것은 장기적인 안목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이런 안목은 그들이 정보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던 데에서 비롯했다.
▒ 역발상의 지혜를 발휘하라
선곡(宣曲) 임(任)씨의 선조는 독도 지방에서 양식 창고를 관리하는 관리였다. 진나라가 멸망할 때 진나라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호걸들이 모두 금, 옥, 보물을 탈취했으나 임씨만은 땅굴을 이용해 곡식을 저장했다. 그 뒤 항우와 유방이 형양에서 오랫동안 대치하고 있었을 때 부근 백성들이 농사를 지을 수 없었기 때문에 쌀 1석(石) 가격이 1만 전으로 뛰자 호걸들의 금, 옥, 보물이 모두 임씨에게로 넘어왔다.
임씨는 이때 큰 재산을 모았다. 다른 부자들은 모두 앞다투어 사치했으나 임씨는 오히려 자신의 신분을 낮추고 겸손했으며 절약을 숭상하면서 스스로 힘써 농사와 목축일을 했다. 논밭과 가축도 다른 사람들은 앞다투어 모두 싼값으로 매입했지만 오직 임씨만은 비싸고 우량한 것을 매입했다. 그들 가문은 몇 대에 걸쳐 모두 커다란 부호로 살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을 뛰어넘어 그 상식 뒤에 있는 본질을 꿰뚫어보고 남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대상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비범함으로써 부를 획득할 수 있었다.
▒ 시장을 예측하라
중국 춘추 시대에 ‘억(億)’이라는 글자는 ‘예측(豫測)’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주희는 이 ‘억(億)’에 대해 ‘의탁야(意度也)’라고 풀이했다. 자공은 “물건이 희귀해지면 비싸진다”라는 원칙에 따라 상품의 수요·공급 관계로부터 시장의 변화를 예측했으며 정확하고 시기에 맞는 결정을 내렸다.
그는 정확한 시기를 포착해 가격이 저렴할 때 매입하고 가격이 등귀했을 때 판매해 상품과 화폐의 상호 전화(轉化)를 통해 재부의 증식을 거둠으로써 시장을 성공적으로 운용한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또 계연은 천시(天時)의 변화와 농업 생산의 수준에 근거해 자신의 경영 방식을 예측하고 이를 실행했다. 그는 “농업 생산은 6년에 한 번 풍년이 들고, 6년에 한 번 가뭄이 들며 12년에 한 번 큰 기근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농업의 풍작과 흉작을 미리 알고 식량의 수요·공급 추세를 예측해 풍작이 들 때 사들여서 비축하고 수해나 흉작, 가뭄이 들 때 판매했다. 백규는 목성의 운행을 농업 생산의 작황과 연결시켜 시장의 변화를 예측했다. 사업에서의 성공은 시장에 대한 정확한 예측으로부터 비롯된다.
▒ 근검절약하라
평범 속에 진리가 있다. 근검절약이야말로 재원(財源)을 늘리고 지출을 줄이는 지름길이다.
<사기>는 이러한 근검절약의 좋은 전통을 소개하고 있다.
백규는 “재산을 움켜쥘 시기가 오면 마치 맹수와 맹금(猛禽)이 먹이에게 달려드는 것처럼 민첩했지만” “음식을 탐하지 않았고 욕망의 향수를 절제하며 기호(嗜好)를 억제하고 극히 소박한 옷만 입으면서 해마다 그를 위해 일하는 노예들과 동고동락했다.” 사사는 “100대의 수송용 수레를 가지고 있었고 천하의 각 군국 무역에 있어 그가 일찍이 가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조(曺)의 병씨는 “야금업으로 흥기해 수만금의 부호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집은 부자 형제가 규약을 제정해 엎드리면 줍고 하늘을 쳐다보면 받아서 천하의 모든 곳에 고리대금업과 무역을 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들은 재산이 왕후와 비견될 정도였지만 오히려 검소한 생활을 유지했다.
선곡 임씨는 그 부가 몇 대에 이르렀지만 자신의 신분을 낮추고 겸손했으며 절약을 숭상하면서 스스로 힘써 농사와 목축 일을 했다. 그는 가훈을 정해 자신의 밭농사와 목축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면 입지도, 먹지도 아니하고 공적인 일이 완결되지 않으면 절대로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도록 했다. 그래서 그는 마을에서 본보기가 되었고, 부유해져서 황제로부터도 존중받았다.
성실하게 노력하고 자신의 장점을 발휘하라
‘화식열전’은 말한다. “절약과 검소 그리고 노동은 재산을 늘리는 정확한 길이다. 원래 농사는 가장 우둔한 업종이지만 진양(秦楊)은 농사로써 그 지역에서 가장 큰 부를 모았다. 도굴(盜掘)은 본래 법을 어기는 일이지만 전숙(田叔)은 그것으로써 부를 일으켰다. 도박은 비열한 업종이지만 환발(桓發)은 이것을 통해 부를 이루었다. 행상을 하며 물건을 파는 것은 대장부가 하기에는 천직이지만 옹(雍)의 악성(樂成)은 오히려 그것에 의지해 부유해졌다. 동물의 유지를 판매하는 것은 치욕을 느끼게 하는 일이지만 옹백(雍伯)은 이 일로써 천금의 이익을 얻었다. 장(漿)을 파는 일은 아주 작은 장사에 지나지 않지만 장씨(張氏)는 그것으로써 천만금의 재산을 모았다. 칼을 가는 일은 보잘것없는 평범한 기술이지만 질씨는 대귀족처럼 진수성찬을 먹을 정도의 생활을 누렸다. 이들은 모두 하나의 일에 전심전력해 비로소 부를 모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재물이 없는 빈민은 오로지 힘써서 일할 수밖에 없고, 재물이 있으나 많지 않을 경우에는 곧 지략으로써 조그만 재산을 취하며, 부유한 사람은 기회를 노려 투기를 함으로써 큰 재산을 모으게 된다. 이것이 재산을 얻는 통상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직업에 귀천이 없다’라는 명제는 일찍이 사마천이 천명했던 바였다.
사업은 전쟁 같은 것…유리할 때 움직여라 |
‘화식열전’이 가르치는 여섯 가지 성공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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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화식열전’에서 백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경영을 할 때는 이윤(李尹; 상나라 탕왕 시기의 명재상)이나 강태공이 계책을 실행하는 것처럼 하고, 손자와 오기가 작전을 하는 것처럼 하며, 상앙(商鞅이 법령을 집행하는 것처럼 한다. 그러므로 변화에 시의 적절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없거나, 과감한 결단을 내릴 용기가 없거나, 구매를 포기하는 인덕(仁德)이 없거나, 비축을 견지할 강단이 없는 사람은 비록 내 방법을 배우려 한다고 해도 나는 결코 알려주지 않겠다.”
백규는 자신의 치생지술(治生之術)이 춘추 전국 시대의 병가와 법가 사상 및 학술에 대한 연구와 활용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글은 백규의 치부(致富)에 대한 근본적 경험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병법학에 따라 화식의 대강(大綱)을 논하는 사마천의 시각이 분명하게 드러난 대목이기도 하다.
‘태사공자서’에서 사마천은 자신의 조상이 군공(軍功)을 세운 것을 자랑스럽게 기술하면서 자신이 병가(兵家)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있다. “조나라로 간 (사마천의) 조상 중 일파는 검술 이론을 전수하여 명성을 날렸는데, 괴외(蒯聵)가 그의 후손이다. 진(秦)나라로 간 사마착(司馬錯)은 장의와 논쟁을 벌였는데, 진나라 혜왕은 사마착에게 군사를 이끌고 촉을 공격하도록 하였고, 사마착은 이를 함락시킨 뒤 촉군 군수로 임명되었다. 사마착의 손자 사마근은 무안군 백기(白起)를 수행하였다. 사마근과 무안군은 조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장평에 주둔한 조나라 군사들을 생매장시키고 진나라로 돌아왔다. 진시황 시대에 괴외의 현손(玄孫) 사마앙은 무신군(武信君)의 부장으로 있었는데 조가(朝歌)를 순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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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유환영 |
군사는 전쟁에서, 사업은 시장에서 결정된다
뿐만 아니라 사마천 자신 역시 20세 청년 시절 전쟁터를 누비며 낭중(?中)의 직책을 맡아 몸소 전쟁의 세례를 받았음을 묘사하고 있다. “낭중으로서 한나라 조정의 사명을 받들어 서쪽으로 가서 파촉(巴蜀) 이남 방면을 토벌하고 남쪽으로 가서는 공(邛), 작(笮), 곤명(昆明) 등의 지방을 경략하고 비로소 조정으로 돌아왔다.”
병가의 후예이자 자신이 직접 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은 그로 하여금 병법에 심취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태사령이 된 뒤 그는 병법서를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환경에서 각종 병법서를 독파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군사 전쟁은 전쟁터에서 결판이 나고, 상인의 승패는 시장에서 결정된다. 상업의 경쟁은 사실상 일종의 전쟁이다. 전쟁과 상업은 그 기본적 전략 원리에서 공통적인 성격을 지닌다. 상품 경제는 일종의 경쟁 성격을 지닌 경제 형태이고, 전쟁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경쟁의 형태이다. 이것은 상인이 처음부터 병법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근본 이유이다.
병법가들은 “이익이 있을 때 움직이고, 이익이 없으면 머무른다(合迂利而動, 不合迂利而止)”라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좋은 계책을 채택한 뒤,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작전 실행을 돕는다(計利以聽, 乃位之勢, 以佐其外, <손자병법>)”라고 한다.
이 ‘이익’이라는 말이 곧 상가(商家)의 생명이다. 병가(兵家)는 “아직 싸우지 않고도 미리 승리를 안다. 승리를 예측하는 것에서 보통 사람들의 식견을 뛰어넘지 못하다면 고명하다고 할 수 없다”라고 지적한다. 상가(商家)에서도 이익을 예측하는 일에서 보통 사람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가의 여부가 경영의 성패를 좌우하게 된다.
병가는 “작전을 잘 구사하여 승리를 거두고 그것을 알게 되지만, 사람들은 그 속에 있는 오묘함을 알지 못한다. 모든 사람들이 우리 군대가 적군을 격파한 사실 그 자체는 알고 있지만, 사람들은 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는지 그 이치를 알지 못한다. 전쟁은 기존 방식을 답습해서는 안 되고, 서로 다른 상황에 맞게 다른 방법을 채택해야 한다. 변화에 대응하는 것은 무궁하다”라고 강조한다.
상가(商家) 역시 경영 책략에서 동일한 이치로 시장 변화에 따라 유연하고 적절하게 변화를 추구해야 하고, 새롭게 창조해나가야 한다. 바로 이러한 공통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사마천은 전국 시대부터 진한 시기의 성공한 화식가들에 대해 기술할 때 <손자병법>의 원리를 적용시킨 것이다.
큰 홍수 뒤에는 가뭄이 따른다
사마천은 화식 활동에의 종사를 용병술(用兵術)과 동일하게 파악해 사전 예측과 상업 기회 포착 그리고 뛰어난 사전 기획 등의 방책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화식 경영의 환경은 전쟁 상황과 동일하게 복잡하고, 변화무쌍하며, 잔혹하고, 대결과 경쟁 등 불확실한 환경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 이른바 “상장(商場)은 곧 전쟁터이며, 경쟁은 전쟁과 같다”라는 말이 성립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군인이나 상공업자는 모두 하나의 동일한 생존 과제에 직면하게 된다. 즉, 어떻게 기회를 포착하고 위험을 극복하며 이로부터 자신의 생존 발전을 획득해나갈 것인가의 문제이다.
군사 전문가들은 지피지기(知彼知己)와 시기에 따른 대응을 강조한다. <손자> ‘모공편(謀功篇)’에서는 “자신을 알고 상대방을 알면 백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 자신을 알지만 상대방을 모르면 1승 1패가 된다. 자신도 모르고 상대방도 모르면 매번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다”라고, ‘계편(計篇)’에서는 “아직 싸우지 않고도 미리 승리를 안다면, 승산은 매우 많다”라고 했다. ‘허실편(虛實篇)’에는 “물은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그 방향을 조정해나가고, 작전은 상이한 적정(敵情)에 따라 상이한 책략을 세워야 한다. 그러므로 용병과 전쟁에는 고정된 방식이 없으며, 불변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적정(敵情)의 변화에 대응해 기민하게 움직여 승리를 거두는 것을 용병의 신이라 하는 것이다.”
‘화식열전’은 시기에 따른 변화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전쟁을 이해하는 사람은 곧 평시에 군사 준비를 정비한다. 물건을 세상 흐름에 맞추어 사람들이 찾게 하려고 하면, 즉 평시에 물건을 이해해야 한다. 시세의 수요와 물건의 특징이 세상에 분명하게 알려진다면, 이 세상 수많은 물건의 생산과 수요·공급 규율 역시 알 수 있게 된다. 세성(歲星: 목성)이 금(金: 서쪽)의 위치에 있을 때에는 풍년이 들고, 수(水: 북쪽)의 위치에 있을 때에는 수해(水害)가 들고, 목(木: 동쪽)에 있을 때에는 기근이 들며, 화(火: 남쪽)에 있을 때에는 가뭄이 든다. 큰 가뭄이 든 뒤에는 반드시 홍수가 있기 때문에 가뭄이 든 해에는 곧 미리 배를 잘 준비해두고, 큰 홍수 뒤에는 반드시 가뭄이 있으므로 홍수가 난 해에는 곧 미리 수레를 준비해야 한다. 이것이 물자의 등락을 장악하는 도리이다.…”
가격이 올라 일정한 수준을 넘어서게 되면 곧 떨어지게 되고, 가격이 떨어져 일정한 수준을 넘게 되면 곧 오르게 되는 법이다. 따라서 가격이 올라 일정한 수준을 넘게 되면 물건을 마치 인분(人糞) 보듯이 하여 한 점 주저함 없이 내다 팔아야 하고, 가격이 떨어져 일정한 수준에 이르게 되면 물건을 마치 진주 보듯이 하여 아무런 주저함 없이 사들여야 한다. 물건과 화폐는 마치 흐르는 물과 같이 끊임없이 유통하고 움직이는 것이다.
사람을 끄는 동고동락의 힘, 장군이나 상인이나 똑같다 |
‘화식열전’이 가르치는 여섯 가지 성공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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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식 활동에서 상인들은 마땅히 장군이 몸소 사졸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친히 전쟁에 나서는 것과 같아야 한다. <손자-모공편(謀功篇)>은 “장수는 국가의 보좌(輔佐)이다. 보좌가 용의주도하면 국가는 반드시 강해지고, 보좌가 허술하면 국가도 반드시 허약해진다”라고 했다. 또 “상하가 뜻을 같이하면 승리한다”라고 했다.
부하들과 일심동체가 되다
또한 지도자의 소질과 임용 기준에 대해 <손자병법>은 “장자, 지, 신, 인, 용야(將者, 智, 信, 仁, 勇, 嚴也)이다”라고 말한다. 즉, 장군은 지(智), 신(信), 인(仁), 용(勇), 엄(嚴)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智)는 계략을 낼 수 있게 하고, 신(信)은 상벌을 내릴 수 있게 하며, 인(仁)은 사람들로 하여금 따르게 하고, 용(勇)은 과단성이 있게 하며, 엄(嚴)은 권위를 세울 수 있게 한다.
한편 상업에서는 백규의 ‘상재사품(商才四品)’론이 있다.
1) 지족여권변(智足與權變):
시장의 경쟁은 무정한 것이며, 상업 상황의 변화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므로 상업 경영자는 반드시 시장 상황을 분석하는 것과 시장의 정세를 예측하는 것에 능해야 하고, 충분한 지혜와 많은 방책을 지님으로써 정확한 경영 전략 및 정책 결정을 수행해야 한다.
2) 용족이결단(勇足以決斷):
시장의 정보는 항상 불확정 상태에 있기 때문에 상업 경영과 이익 추구에서는 항상 위험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상인은 행동에서 과감해야 하고, 정책 결정에 용감해야 한다.
3) 인능이취여(仁能以取與):
상인은 모름지기 먼저 줌으로써 얻을 줄 알아야 한다. 직원에게 관심을 베풀고 좋은 물질적 보상과 격려를 제공함으로써, 직원들이 적극성을 충분히 발휘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또한 고객과 소비자에게 합리적인 가격과 좋은 품질 및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상업 경영자는 장기적인 이익을 얻게 된다.
4) 강능유소수(强能有所守):
상인은 모름지기 강건한 의지가 있어야 하며, 신용을 분명하게 지키고 규정을 엄수해야 한다. 재능이 출중한 경영자라도 항상 상황이 좋을 수는 없다. 오직 의지가 강건하고 신뢰를 지키며 상업 규칙을 준수할 때만 성공할 수 있게 된다.
어떻게 효과적으로 지도를 해나갈 것인가라는 문제에서 지도자는 이신작칙(以身作則), 즉 스스로 모범이 되어 실천하는 자세로 임해야 하고 함께 비바람을 맞으며 위신을 세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기-손자오기열전>은 오기에 대해, “오기는 언제나 가장 낮은 병사와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잘 때도 자리를 깔지 않았으며 행군할 때도 마차에 타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의 식량은 자기가 직접 가지고 다녔다. 그는 항상 병사들과 함께 있었으며 고락을 같이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렇게 부하들을 자신의 몸처럼 돌보는 모범을 보였기 때문에, 당시 “사람을 잡아먹고 인골(人骨)로 취사를 해야 하는 처지에 몰리고도 병사들이 등을 돌리거나 도망치지 않는 군대는 손빈과 오기의 군대뿐이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오기의 통솔력은 훌륭했다.
병법가와 장군으로서의 오기는 실로 뛰어나
<오자>라는 책을 보면, 오기가 위나라에 있을 때 76회의 전쟁을 했는데 그중 68회는 이겼고 나머지 8회는 무승부였다고 쓰여 있다.
또 <사기-이장군열전>에서는 “이광 장군은 사병과 함께 식사를 했다. 군사를 인솔해 행군 중에 식량과 식수가 부족할 때 수원(水源)을 찾게 되면 모든 군사가 물을 마신 뒤가 아니면 마시지 않았고, 또 모든 병사가 식사를 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도 식사를 하였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사람은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해 죽는다
한편 사마천은 화식열전에서 백규에 대해서 “음식을 탐하지 않았고 욕망의 향수를 절제하며 기호(嗜好)를 억제하고 극히 소박한 옷만 입으면서 해마다 그를 위해 일하는 노예들과 동고동락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대부호로서의 허세를 부리지 않고 자기가 고용한 일꾼들과 함께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것이다. 성공한 상인과 걸출한 장군의 행위는 이처럼 유사하다. 백규의 이러한 모습은 <손자-계편(計篇)>에서 언급되는 ‘도(道)’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도는 백성들로 하여금 장군과 더불어 뜻을 같이하고, 장군과 함께 죽을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백규는 상업이라는 전쟁에서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내기 위해 손자병법의 ‘도(道)’ 원리를 거울로 삼아 일꾼들과 동고동락한 것이다. 그 목적은 일꾼들이 일을 하는 데 곤란한 점이나 생활상의 고초를 이해하고 해결하며, 그와 일꾼들 간에 존재하는 장벽을 없애 감정이나 물질적인 은혜로써 일꾼들에게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라는 정신을 배양하는 것이다. 이로써 일꾼들의 적극성을 충분하게 자극하고 발휘하게 해 최종적으로 ‘백성들과 장군이 더불어 뜻을 같이하는’ 단계에 이르고, 합심 단결해 경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게 하는 것이다. 경영자가 이러한 자질을 갖추게 된다면, 실의에 빠졌을 때에도 부하들의 충성을 받게 되며, 그로부터 상하가 합심해 다시 사업을 개척해나갈 수 있게 된다.
사람을 잘 선택하고 , 때를 파악하라
‘화식열전’에서 선곡 임씨는 “가훈을 정하여 자신의 밭농사와 목축에서 생산된 것이 아니면 입지도 먹지도 아니하고 공적인 일이 완결되지 않으면 절대로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지 않도록 했다”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가문은 몇 대에 걸쳐 부유하였다.
<손자병법-작전편>은 “병사들을 아는 장군은 백성의 생명을 책임지며, 국가 안위의 주인이다”라고 했다. <세편>은 “전쟁을 잘하는 자는 자신에 유리한 태세를 잘 이용하며,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을 잘 임용하여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낸다”라고 했다. <지형편>에서는 “병사를 젖먹이처럼 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깊은 골짜기로 들어갈 수 있으며, 병사를 사랑하는 아들처럼 보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죽음을 같이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모두 장군이 그 병사를 이해하고 그들을 신임하며 그들에게 가혹하게 책임을 묻지 않고 그들을 기용할 때, 비로소 전쟁의 승리를 거둘 수 있으며 가족을 지키고 국가를 보위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화식열전’은 범여에 대해 “천시(天時)에 맞춰 이익을 내는 데 뛰어났으며, 고용한 사람을 야박하게 대하지 않았다. 경영에 뛰어난 자는 반드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잘 선택하고 좋은 시기를 파악할 줄 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 도간에 대해 “도간만이 노예들을 받아들이고 또 이용하여 이익을 얻도록 하였다. 그러면서 노예들을 관리들과 교류하게 하였고, 갈수록 그들에게 큰 권한을 맡겼다. 마침내 그가 이러한 노예들의 힘으로 집을 일으키고 치부하여 재산이 수십만 금에 이르렀다”라고 묘사한다.
범여와 도간은 정확하게 사람을 파악하고 기용해 재능에 따라 각자에게 적절한 자리를 맡겼으며, 신임하고 존중하여 마침내 그들의 힘을 활용하여 백만장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병사들과 함께 동고동락하고 그들을 신임하며 대담하게 기용한 것은 대전략가들과 대상인들의 또 다른 성공 요인이었다.
남들이 버리면 나는 가지고 남들이 취할 때 내가 준다 |
‘화식열전’이 가르치는 여섯 가지 성공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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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규(白圭)는 전국(戰國) 시대의 유명한 상인으로서 사람들은 그를 ‘천하 치생(治生)의 비조(鼻祖)’라면서 속칭 ‘인간 재신(財神)’이라고 불렀다. 송나라 진종은 그를 상성(商聖)으로 추존했다. 백규는 경제 전략가이자 이재가(理財家)로서 범여도 그에게 치부(致富)의 방법을 자문받았다고 전해진다.
전국 시대에 들어서면서 사회는 극심한 변화를 겪게 되었고, 신흥 봉건 지주제가 각국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확립되었다. 생산력의 신속한 제고에 따라 시장의 상품도 급속하게 증가했고, 사람들의 소비력도 급속히 확대되었다. 이에 따라 많은 거상이 출현하게 되었는데 백규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백규는 일찍이 위나라 혜왕의 대신이었다. 당시 위나라 수도인 대량은 황하에 가까이 있어 항상 홍수의 피해를 받아야 했다. 백규는 뛰어난 치수 능력을 발휘해 대량의 수환(水患)을 막아냈다. 뒤에 위나라가 갈수록 부패해지자 백규는 위나라를 떠나 중산국과 제나라를 유력했다. 이 두 나라의 왕이 모두 그로 해금 자기 나라에 남아 치국에 도움을 받고자 했지만 백규는 이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는 제나라를 떠난 뒤 진(秦)나라로 들어갔는데, 당시 진나라는 상앙의 변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백규는 상앙의 중농억상 정책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진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백규는 천하를 주유하면서 정치에 대해 혐오감이 강해졌고, 마침내 관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기로 결심했다.
낙양은 이전부터 상업이 발달했던 도시였다. 낙양 출신이던 백규는 본래부터 상업에 뛰어난 눈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 시대 최고의 대부호가 되었다. 당시 상업이 급속히 발전해 상인 집단이 대규모로 형성되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공평한 매매와 정당한 경영을 실행했다. 하지만 일부는 희귀한 물건을 엄청나게 매점 매석하고 시장을 독점했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고리대를 해 폭리를 취했다. 그러므로 당시에 상인들을 두 종류로 분류해 한 쪽을 성고(誠賈)나 염상(廉商) 혹은 양상(良商)이라 했고, 다른 쪽은 간고(奸賈)나 탐고(貪賈) 혹은 영상(?商)이라고 지칭했다.
ⓒ일러스트 유환영 |
상성(商聖)으로 숭앙된 백규
당시 상인들 대다수는 보석 장사를 특히 좋아했다. 대상인 여불위의 부친은 일찍이 보석 사업은 백배의 이익을 남긴다고 말했다. 하지만 백규는 당시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그 직종을 택하지 않고 대신 다른 길을 선택해 농부산품(農副産品)의 무역이라는 새로운 업종을 창조했다.
백규는 재능과 지혜가 출중하고 안목이 비범해 당시 농업 생산이 신속하게 발전하는 것을 목격하고 농부산품 무역이 장차 커다란 이윤을 내는 업종이 될 것이라는 점을 알아챘다. 농부산품 경영이 비록 이윤율은 비교적 낮지만 교역량이 커서 큰 이윤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해 백규는 농부산품과 수공업 원료 및 상품 사업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백규는 재산을 움켜쥘 시기가 오면 마치 맹수와 맹금(猛禽)이 먹이에 달려드는 것처럼 민첩했다. 그래서 그는 언젠가 “나는 경영을 할 때는 이윤(李尹)이나 강태공이 계책을 실행하는 것처럼 하고 손자와 오기가 작전하는 것처럼 하며 상앙(商?)이 법령을 집행하는 것처럼 한다”라고 말했다.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다
백규는 자기만의 독특한 상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영 원칙을 여덟 글자로 만들었다. 즉, “인기아취, 인취아여(人棄我取, 人取我予)”라는 것으로서 바로 “사람들이 버리면 나는 취하고, 사람들이 취하면 나는 준다”라는 뜻이었다. 구체적으로 상품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서 아무도 구하지 않는 그 기회에 사들인 뒤, 수중에 있는 상품의 공급이 수요를 따르지 못해 가격이 크게 오르는 그 기회에 판매하는 것이다.
어느 날 많은 상인이 모두 면화를 팔아넘겼다. 어떤 상인은 면화를 빨리 처분하려고 가격을 헐값으로 팔기도 했다. 백규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부하에게 면화를 모두 사들이도록 했다. 사들인 면화가 너무 많아서 다른 상인의 창고를 빌려서 보관할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면화를 모두 팔아넘긴 상인들은 이제 모피를 사들이느라 혈안이 되었다. 본래 그들은 누구에게서 들은 소식인지는 몰랐지만, 앞으로 모피가 크게 팔릴 것이고 겨울에 사람들이 아마도 시장에서 살 수도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크게 돌았었다. 그런데 당시 백규의 창고에는 때마침 좋은 모피가 보관되어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백규는 모피의 가격이 더 오를 것을 기다리지 않고 모든 모피를 몽땅 팔아 큰돈을 벌었다.
뒤에 면화가 큰 흉년이 들었다. 그러자 면화를 손에 넣지 못하게 된 상인들이 면화를 찾느라 야단법석이 되었다. 이때 백규는 사들였던 면화를 모두 팔아 다시 큰돈을 벌었다.
백규의 ‘인기아취, 인취아여(人棄我取, 人取我予)’의 경영 원칙은 일종의 상업 경영의 지혜이며, 그것은 맹목적으로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재산을 움켜쥘 때는 마치 맹수가 먹이에 달려들듯
사마천이 보기에 성공한 상인들은 모두 때를 아는(知時) 사람들이었다. 범여는 “도 지방이 천하의 중심으로서 각국 제후들과 사통팔달해 화물 교역의 요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곳의 산업을 경영해 물자를 비축하고, 적절한 때에 맞추어 변화를 도모했다. 그는 천시(天時)에 맞춰 이익을 내는 데 뛰어났으며, 고용한 사람을 야박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영에 뛰어난 자는 반드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잘 선택하고 좋은 시기를 파악할 줄 아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범여는 장소를 알고(知地), 때를 알아(知時) 부를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백규의 ‘지시(知時)’는 주로 사물에 내재된 규율을 정확히 파악하는 데 있었다. 이로부터 시장 동향을 예측하고 자신의 정책 결정에 있어 맹목성을 감소시킴으로써 객관적으로 상품을 언제 매입하고 매도하는지를 파악했다. 백규는 상가(商家)에서의 ‘지시(知時)’는 곧 ‘때의 변화를 즐겨 살핀다’라고 인식했는데, 이는 풍흉의 예측에 근거해 경영 방침을 적시에 조정하는 것이었다.
백규는 초절정의 시기 포착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천문학과 기상학의 지식을 응용해 농업 풍흉의 규율을 알아냈으며 이러한 규율에 따라 교역을 진행했다. 풍년이 들어 가격이 저렴할 때 사들여서 흉년이 들어 가격이 등귀할 때 판매함으로써 커다란 이익을 얻었다.
그 밖에도 백규는 일단 기회가 오면 곧바로 신속하게 결정하고 과감하게 행동에 옮겨야 함을 강조했다. 사마천은 이러한 백규의 모습을 ‘재산을 움켜쥘 시기가 오면 마치 맹수와 맹금(猛禽)이 먹이에 달려드는 것처럼 민첩했다’라고 묘사했다.
가장 나쁜 정책은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 |
‘화식열전’이 가르치는 여섯 가지 성공 원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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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은 말한다.
“선자인지, 기차이도지, 기차교회지, 기차정제지, 최하자여지쟁(善者因之, 其次利道之, 其次敎誨之, 其次整齊之, 最下者與之爭).”
‘선자인지(善者因之)’는
상품 경제의 발전을 그대로 순응해 방임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인(因)’은 순응과 맡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자인지(善者因之)’는, 가장 좋은 경제 정책은 경제 발전의 자연에 순응해 개인들이 생산하고 무역하는 활동을 그대로 맡기고 간여나 억제를 하지 않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에 반해 ‘여지쟁(與之爭)’은 국가가 직접 상공업을 경영함으로써 이익을 얻으며 동시에 경제의 모든 분야에 간여해 전면적으로 상품 경제를 억제하는 것으로서, ‘선자인지(善者因之)’와 대비되는 양 극단의 정책이다.
한편 ‘이도지(利道之)’는 개인이 경제 활동을 진행하는 것을 순응하고 방임한다는 전제 하에 국가가 사람들이 어느 특정 분야의 경제 활동에 종사하도록 일정하게 유도하고 격려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인도에는 마땅히 일정한 경제적 이익과 정치적 이익이 결합되어야 한다. 이것은 농업과 공업이 균형적인 이익을 얻도록 보호하는 정책이다.
ⓒ일러스트 유환영 |
국가의 간섭과 규제가 경제 피폐시켜
‘교회지(敎誨之)’는 국가가 교화의 방법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어느 분야의 경제 활동을 하도록 권장하거나 혹은 어느 분야의 경제 활동은 하지 말도록 유도하는 정책이다. 유가가 주장하는 예의로써 욕망을 절제하는 정책이다. 승상 공손홍이 “한나라 조정 승상의 신분으로서 남루한 포의(布衣)를 입고 식사도 한 가지 반찬만 먹으면서 검소하며 소박하게 생활한다”라고 말한 것, 한 무제가 복식을 존중해 백성들에게 국가에 재산을 바치도록 권했던 정책 등이 이에 속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승상 공손홍의 검소함에도 세속의 사치스러운 분위기는 전혀 바로잡지 못했다. 오히려 공명과 이익을 좇는 풍조는 더욱더 만연해질 뿐이었고, 복식에 대한 존중 역시 효과가 거의 없었다. ‘정제지(整齊之)’는 국가가 행정 수단과 법률 수단으로써 사람들의 경제 활동에 개입하고 개인의 경제 활동에 대해 제한하고 강제하는 것을 말한다. 전통적인 중농억상 정책으로서 그것의 강화가 곧 ‘여지쟁(與之爭)’이었다.
사마천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생산·무역 활동에 종사하는 것은 개인들의 일로서 국가 혹은 그 관리들이 그러한 일에 종사하는 것은 인민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나쁜 정책이라고 인식했다. 그는 국민 경제를 관리하는 가장 ‘좋은’, 즉 ‘선(善)’의 정책은 ‘인지(因之)’라고 역설했다. 이를 ‘선인론(善因論)’이라 지칭한다.
사마천에 따르면, 민간들의 사적 상업 활동과 관련해 국가에게 가장 좋은 정책은 경제 발전의 자연 규율을 준수해 상인 활동에 개입하지 않고 사람들의 재부 추구에 따라 생산을 발전시키게 되면 국가는 무한대의 재부를 얻는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이익으로써 장려하는 것이며, 다음으로는 교화 혹은 계도하는 것이고, 그 다음은 국가 권력을 운용해 조정과 제한을 하는 것이며, 가장 나쁜 정책은 바로 국가가 직접 경영함으로써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것이다.
사마천은 도가의 ‘청정무위’와 ‘여민휴식(與民休息)’ 경제 사상에 따라 인간들의 영리 추구 활동을 자유롭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있다. 그리해 그는 “빈부의 도는 줄 수도 뺏을 수도 없다(빈부지도 막지여탈, 貧富之道 莫之予奪)”라고 천명한다. 그는 인간의 영리 추구 활동은 본래부터 자체적으로 내재된 규율을 지니며, 재부 증식을 존중하는 객관적 규율이 있을 때만이 비로소 국가가 부강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한나라 초기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예로 들고 있다. “한나라가 흥기해 이미 70여 년이 지났을 때, 국가는 태평무사해 홍수나 가뭄도 없었고, 백성들은 모두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각 군과 현의 곡식 창고는 꽉 차 있었고, 정부 창고에는 많은 재화가 보관되어 있었다.”
한 고조와 한 혜제까지의 문경지치(文景之治) 시기에 시행한 요역과 과세 경감 조치 및 여민휴식(與民休息)의 재정 정책은 한나라 중기의 번영을 가져왔다. 즉, 문제(文帝) 때 전조세(田租稅)를 완전 면제하고 적대국에 대한 출병도 최대한 삼갔으며, 궁실 내 거기(車騎) 의복을 증가시키지 않고 휘장에도 문양을 넣지 않도록 했으며 지방에서의 특산 공물도 바치지 않도록 했다. 결국 문경지치(文景之治)는 중국 역사상 경제 발전 수준이 최고조에 올라간 성세(盛世)로서 한 무제의 흉노 토벌은 기실 이러한 경제력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한나라 초기의 ‘무위’ 경제 정책이 경제 발전에 가져온 긍정적 효과를 설명하고 이로부터 국가가 강대하고 인민이 부유해지는 좋은 기능을 수행했다는 점을 드러내주고 있다.
국가가 자원·생산 독점해 이익 내는 행태는 사회 혼란의 근원
하지만 한 무제가 제위를 계승한 이래 잦은 흉노 정벌과 각종 수리(水利) 및 토목 사업과 궁중의 호화 생활로 인해 70여 년 계속되어온 ‘휴양생식’ 정책으로 이루어놓은 재부가 모두 탕진되어 국고가 텅텅 빌 정도가 되었다. 이에 한 무제는 동중서, 장탕, 상홍양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점차 국가의 거시 경제 정책을 바꿔 간섭주의를 실행했다.
그러나 국가가 추진한 이러한 재정 확대 정책으로 인해 해내(海內)가 텅텅 비도록 고갈되고, 인구가 반감했으며, 대농부(大農府) 창고에 비축해놓은 금전도 모두 써버렸고 세금도 모두 군사비에 사용되어 병사들을 뒷받침할 수가 없게 되었다. 또 상공업 발전의 억제를 초래한 재산세 징수, 즉 산민령(算緡令)과 고민령 정책으로 “중간 이상의 상인 대부분이 파산했으며, 백성들은 맛있는 음식과 좋은 의복만 찾고 향락을 추구해 두 번 다시 전답을 사들여 생업을 경영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특히 한 무제가 상홍양을 기용해 염철의 국영화와 균수, 평준 정책을 강행한 조치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거두지 않았다. 즉, 그러한 정책들은 결국 경제 발전의 객관적인 규율을 위반하고 그것이 ‘백성들의 생활에 해를 주지 않고, 시기에 따라 매매를 결정해 재부가 증가하는’ 경제 자유주의와 배치된다는 것이었다. 특히 ‘관리들에게 시장에서 장사시키며 물건을 팔아 이익을 도모하는’ 관영 상업은 백성과 이익을 다투는 가장 나쁜 정책의 극명한 사례라고 비판하고 있다.
결국 사마천은 국가가 자연 자원을 독점하고 상공업 생산을 독점해 국가의 ‘이익을 내는’ 행태를 극력 반대했고, 그러한 행태들이야말로 사회 혼란의 근원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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