軍史관련

세계 장군 열전

醉月 2008. 8. 11. 08:29

군의 최고봉 장군

군인의 길을 걷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으로 땅의 별, 장군이 되기를 원한다. 최종 인생 목표나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생각보다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하늘의 별을 딸 만큼 지난하다.
주요 국가별로 살펴 보아도 사관학교 동기졸업생 중 장차 장군이란 별을 따는 사람은 고작 많아도 10명 전후.

대장 이상 원수(元帥)까지 올라가는 숫자는 불과 1~2명 정도이다.

별을 쟁취한 장교는 사관학교 성적이 최저 5위권에 들어야 하고, 예외도 있기는 하지만 군대학을 반드시 우수성적으로 나와야만 했다.

개중엔 ‘만년 소령’으로 있다가 군복을 벗을 것으로 지목되었던 장교가 대장으로 출세하는 기적같은 일이 있어, 화제를 모은 자도 있었다.
2차대전이 한창일때 프랑스, 북서해안에서 감행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총지휘,

성공시킨 아이젠하워 장군도 육사시설 성적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만년 소령’이란 별명과 함께 16년 동안 진급이 되지 않았다.

그는 뒤늦게 능력을 인정받아 대장까지 오른 입지전의 주인공이었다.
독일육군 롬멜 원수도 무려 20년 동안이나 소령으로 있었다.

그가 천신만고 끝에 원수로까지 오르자 히틀러가 되려 정적으로 몰아 희생시켰다.

장군들 중에는 이름값을 옳게 한 자도 있고, 함부로 명령만 남발한 자,

또는 무리하게 전공을 남기려다가 부하만 희생, 실패한 장군들도 많다.

이번 ‘세계 장군 열전’ 대상에 오른 장군들 중에는 관점 차이로 과대·과소 평가된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인물 평가(업적평가)는 무엇보다 공정무사해야 겠지만,

공과중 공이 많으면 과는 묻어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한 두가지 정도 과오가 있다고 생각된다.

물을 씻듯 지나치게 따져서는 도리가 아니다. 되려 문제를 흐리게 할 뿐이다.

한국에도 6·25와 베트남전 참전으로 많은 장군이 배출되었다.

그들 중에는 길이 빛나는 전공을 남긴 자도 있고,

어깨의 별만 자랑하다가 물러간 자도 있다.

한국 장군들의 평가는 시기상조론이 우세해 보류했다.

자화자찬 분위기에 휘말려 객관성 확보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데서다.

인물 내지 업적 평가는 사람마다 같을 수 없다.

물론 자료를 찾기도 쉽지 않다.

비록 적장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점은 과감히 수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지금도 지구상에는 전쟁, 분쟁, 테러 등에 몸살을 앓고 있다.

언제쯤 비극이 사라질지? 그럼 시대, 국적을 초월,

아군과 적으로 나눠져 격전을 지휘했던 세계장군들의 인생역정과 함께 공과를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분명 반면 교사로 남을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2차대전때 널리 이름이 알려진 장군으로는

미 맥아더 원수, 아이젠하워 대장, 나밋츠 대장, 독일 롬멜 원수, 소련 주코프 대장, 영국 바나드·몬트고메리 중장, 하룰드·알렉산더 대장, 프랑스 드골 대장, 독일 에릿피·폰·만슈타인 원수, 그리고 일본에서 악명을 떨친 도우죠히데키(東條英機·대장), 일본 해군함대사령관 야마모도 이쇼로쿠(山本五十六·대장) 등을 꼽는 이들이 많다. 이들 외에도 기라성같은 장군들도 적지 않았다. 특이한 전략·전술로 기적같은 전공을 남긴 흥미로운 일화도 숨어 있다.

 

군신(軍神) 이순신 제독

 

이순신 제독은 바로 군신이었다. 새삼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경(不敬)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장군열전을 쓰면서 그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서는 주관적인 평가보다 이웃 일본 군사전문가들과 역사학자들이 제3자의 관점에서 평가한

이순신 제독에 대한 것을 그대로 옮겨 보기로 한다.
즉 이순신제독을 평가할 때 영국 넬슨 제독과 비교하기를 학자들은 좋아한다.

그러나 이순신 제독은 넬슨을 훨씬 능가한다. 병술면은 물론 조국을 위난에서 구하겠다는 애국심이 특별했다.

전투를 끝까지 지휘하다가 쓰러진 점도, 두 번에 걸쳐 백의종군한 점도 달랐다.

넬슨 제독은 비교적 순탄한 군대 생활을 했지만, 이순신 제독은 한마디로 고행의 연속이었다. 그런데도 굴하지 않았다.
새삼 이순신 제독에 대해 논의하게된 동기는

한 시사 종합지가 특집으로 계획한 ‘세계군인 10명’을 선정한다면 누구를 첫 번째 순위에 둘 것인가에서 였다.

①이순신 제독, ②넬슨 제독, ③나폴레옹 황제, ④워싱턴 장군, ⑤알렉산더 대왕, ⑥징기스칸(成吉思汚) 등등.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유명한 군인이란 부제가 붙어 있었다.


이순신 제독은 37세 때 무과(武科)에 합격, 함경도로 파견돼 수시 침략을 일삼는 여진족(만주족)을 격퇴하는데 전공을 남겼다.

그 무렵부터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그 후 임진왜란(일본측·文祿の役)이 일어나자 수군함대를 지휘, 적의 함대를 코너로 유인,

모조리 격침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그때부터 특이한 병술이 세계해전사를 장식, 주목을 끌었다.
만일 임진왜란에서 조선이 승리하지 않았더라면 세계지도에서 조선은 사라졌을지 모른다고.

이상의 평가는 지난 70년대초 일본의 권위지로 이름나 있는 월간 문예춘추(文藝春秋)가

창간 60주년기념 특집으로 펴낸 기획물에 실린 내용이다.

일본 역사학자들 중에는 세계적인 불침함대 제정러시아 발틱함대를 ‘丁字戰法’으로 단숨에 격침시켜 세계를 놀라게 했던

당시 함대사령관 도우고우 헤이하치로우(東鄕平八郞·원수)를 견주기도 했지만,

대다수 학자들이 이순신 제독과는 비교될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장군도 등급(등위)이 있다.

①성장(聖將), ②명장(名將), ③지장(智將)), ④모장(謀將), ⑤범장(凡將)으로 구분짓는다.

이순신 제독은 성장에 속한다고 학자들은 덧붙였다. 참으로 학자의 양심에 의한 평가였다.

 

명장(名將) 넬슨 제독

 

호레쇼·넬슨(Horatio Nelson)에 살았던 시대는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초였다.

이순신 제독은 16세기. 약 20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넬슨 제독의 계급은 중장이었다. 그는 프랑스함대와 스페인 연합함대를 상대로 격돌할 무렵 영국지중해 함대 사령관이었다.
즉 1805년 프랑스황제 나폴레옹이 자국함대에 대해 영국함대의 말세인유 인근 투우론해역 봉쇄를 돌파,

대서양으로 진출해 서인도제도(諸島)에 집결, 영국함대를 격침시키라고 명령했다.

프랑스함대는 지브랄탈 해역을 벗어났지만, 당초 목표인 영국본토 진공작전이 좌절된 상태였다.

그때 프랑스함대는 스페인 카데이스항에 정박하고 있었다.

함대는 프랑스 지상군이 오스트리아를 진격중임을 알고, 지원을 위해 투우론항으로 항진중이었다.

영국함대가 공격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주력이 넬슨 제독이 지휘하는 지중해 함대였다. 편성은 전함과 구축함 등 27척. 프랑스와 스페인 함대가 33척,

해전 장소는 지브랄탈해역 서북방 50㎞ 트라팔가 근해였다.

기함 빅트리호에 타고 있던 넬슨 제독은 ‘지휘관 선두’란 구호답게 함정 15척과 함께 함수에 나와 직접 작전을 지휘했다.

부사령관 크린구웨드 제독이 함정 15척을 지휘했다.

모두를 2열종대로 나눠 미리대기 했다. 이윽고 함정 33척을 2열종대로 전투해역에 돌입해온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와 격돌하게 되었다. 영국함대가 적함대의 중앙 허리를 돌파, 후미쪽으로 회전시켜 함포와 함께 충돌 전법을 구사했다.

부사령관 크린구웨드 제독 역시 전함 로얄·소브린호 함수에 나와 적탄을 무릎쓰고 진두지휘, 넬슨 제독의 명령에 따랐다.

그때 나온 말이 ‘지휘관 선두’란 유명한 구호였다. 그 구호는 세계 전해군으로 퍼져 나갔다.
당시 해전의 형태는 대부분 함포의 위력만 믿고 적진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가 근접 사격을 일삼았다.

마지막에는 서로 함정으로 승선, 육박전을 벌려 승패를 결정했다.

함포는 주로 현측(舷側)에 배열해 있어, 진행방향에서는 포격이 어려웠다.

때문에 넬슨 제독의 중앙돌파 전술은 크게 전과를 기대할 수 없었다.그런데도 ‘트라팔가 해전’에서 기적같은 성공을 거둔 것이었다.

그에게 운이 따른데서였다. 그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는 19척이 격침되고, 4척이 나포되었다. 영국함대는 전혀 피해가 없었다. 그러나 작전을 지휘도중 넬슨 제독이 프랑스전함 레부다블호에서 쏜 기관포에 명중, 오후 4시 30분에 전사했다.

그는 “나는 신에게 감사한다. 나는 의무를 다했다”는 말을 남겼다.

그가 전투개시 직전에 전투원들에게 당부한 말도 명언으로 영국해전사에 기록돼 있다.
“영국해군은 각원(各員)이 자기의무를 다하는 것을 기대한다”며 기함(旗艦) 빅트리호 마스터에 기류신호(旗旒信號)를 펄럭였다.
그의 유해는 센트플성당 지하에 안치, 그 옆에는 높이 145피트 동상이 서있다. 이순신 제독의 동상이 서울 광화문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그의 동상에는 “트라팔가 스크웨아”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더욱 영국이 그를 자랑하는 이유중엔 나폴레옹과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자부심에서였다.

러·일전쟁시 발틱함대 중간 허리를 돌진, 혼란의 틈을 타 격침시킨 전법이 바로 넬슨이 고안했던 것이었다.

 

이순신과 넬슨의 비교

 

첫째 두 사람은 시대상황과 여건이 달랐다. 넬슨은 이순신 제독보다 200년 정도 후의 군인이었다.

프랑스 나폴레옹과는 비슷한 시대를 살았다.

함대의 위력이나 무장면에서 이순신 제독의 ‘수군시대’와는 비교가 안될 만큼 현대화 돼 있었다.

때문에 두 제독의 전략전술, 승리의 가치를 단순 비교해서는 곤란하다.

정말 이순신 제독은 극히 어려운 여건 속에서 승리를 이룩했던 것이다.
넬슨은 영국 오오포크주 목사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진로를 해군으로 정했다.

10대 후반에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20살 때 구축함 함장으로 바다를 누볐다.

몇 년 뒤 대령으로 진급, 28문의 함포가 장착된 전함 힌칭브럭크호 함장에 임명되었다.
나폴레옹은 육군유년학교를 거쳐 육사를 나왔다. 특히 수학이 천재였다.

포조준에 뛰어나 포병 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넬슨보다 9년 정도 늦게 섬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도 파란만장했다.
세계해전사를 아무리 훑어 보아도 이순신 제독만큼 전공이 빛나는 위대한 제독은 지금껏 없었다.

열악한 함대를 이끌고도 조류를 이용해 대승했고 수모를 무릎쓰며 백의종군까지 했다.

저명 역사 학자들도 그점을 더 높이 평가했다.


일본 점령군 사령관 더글라스·맥아더 원수

 

맥아더 원수는 2차대전시 주로 남방지역 미군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필리핀 주둔 중 적의 공격이 격렬해지자 멀리 호주까지 주둔지를 이동하기도 했다.

전쟁이 일본 패전으로 끝나자, 일본점령군 사령관으로 일본 도쿄에 주둔했다.

그의 전공은 2차대전때 보다 1950년 한국전때 유엔군사령관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는 6월 25일 새벽 일본 도쿄 제1보험빌딩에 마련된 점령군 사령부에서 북한군 침공소식을 보고 받았다.

서울이 불과 3일만에 공산군 수중으로 떨어졌고, 대구 가까이 진출했다는 긴급 상황이 날라들자, 그는 급히 전선으로 날라갔다.

그날이 6월 29일. 그는 한강 남단에서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다. 곧바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다.

그같은 생각은 2차대전시 뉴기니어섬 상륙을 위해 일본군과 격전을 치룬 끝에 성공시킨 경험에서였다.

그러나 참모들은 인천은 조수의 간만차가 극심하므로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며 적극 반대했다.

맥아더의 생각은 그 길 외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울과 가까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의 주요전선을 교란시키고, 보급로를 차단, 포위해 적을 완전 섬멸하겠다는 구상에서였다.
문제는 8월 현재 부산교두보 전황과 인천이란 지리적 여건, 환경이었다.

그 문제를 두고 도쿄 소재 GHQ(연합국최고 사령부)에서 긴급작전회의를 가졌다.

회의는 순조롭지 못했다. 특히 극동지역에 머물러 있는 연합국 해군수뇌가 인천상륙작전 계획을 한사코 반대했다.

자칫하면 바다 가운데 함정이 얹혀 함포조차 쏴 보지 못하고 당하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북한군의 전력도 생각외로 강력하다는데, 뜻을 같이했다.

북한군은 “우리는 승리를 위해 여기 있으며, 승리가 눈앞에 다가왔다”는 태세였고,

유엔군은 전의를 잃었으며, 더 이상 병력증원은 없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군 제1진 제24사단이 불과 17일만에 7,000명 이상의 병력손실을 입은 상태였다.

8월 들어서도 북한군은 계속 사기를 잃지 않았고, 후퇴나 철군계획 움직임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인천항은 부산교두보로 설정된 낙동강전선과 직선거리만도 240㎞. 자칫하면 부산교두보쪽 미 8군 전선이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상륙작전시 인천에 상륙할 미 10군단과 부산교두보에서 북상하게 될 미8군과 연대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도 부담이었다.

또 한가지, 더 큰 문제는 인천만 조수의 간만차이가 최대 10m나돼 간조시는 선박접안이 불가능할뿐더러

상륙에 필요한 접안시설 조차 없는 점, 그리고 상륙하면 곧바로 해안에서 시가지로 이어져,

적전상륙(敵前上陸)과 같은 모험을 각오해야하므로, 여건상 매우 불리한 점 등을 들어, 참모들은 한결같이 반대했다.

심지어 주술사(무녀)까지도 반대했다. 불리한 여건을 들어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난색을 표시했다.

참모들의 반대의견을 듣고 있던 맥아더는 자기아버지 ‘아사아’가 들려주었던 경구를 떠올렸다.

“회의란 망설임과 패배주의를 낳기 쉽다”고 한 말. 그 순간부터 45분 동안 자기구상을 설명한 후 인천상륙작전 결행을 명령했다.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미명에 감행되었다. 작전은 신이 돌보아 준 듯, 예상외의 기습효과를 거두었다.

그동안 거듭했던 아군의 퇴각이 일거에 만회되었다. 북한군은 완전 고립되고 와해돼 버렸다.

맥아더는 ‘세기적 도박’에서 기어코 성공을 거두었다. 전세는 단번에 역전되었다.

지금껏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은 뒤통수를 맞은 듯, 당황한 나머지 혼란 속에 도망치기 바빴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성공 한달 후인 10월 15일 투르맨대통령과 웨키섬에서 회담을 가졌다. 중공군개입설에 대한 대책문제였다.

맥아더는 대수롭지 않다는 입장을 보였다. 판단착오였다. 자신이 기습을 당한 꼴이였다.

이윽고 중공군 개입이 현실로 나타났을 때 뒤늦게서야 맥아더는 생각을 바꾸게돼, 최고 지휘관으로서 판단실수를 후회했다.

다급해진 맥아더는 11월 24일 유엔군이 앞장서 북상, 압록강 국경까지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동시에 그도 전황을 살피기 위해 압록강 상공을 전용기로 돌아보았다.

25일 마침내 중공군이 본격 압록강을 건너 공격을 퍼부었다. 유엔군은 부득히 320㎞ 가까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엔군이 어려움에 처하자,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으로 미군전사에 전례가 없는 불리한 상황이 닥쳤다.”는 현지보고서를 통합참모본부에 제출, 위기상황을 털어 놓았다.
결국 한국전은 새로운 복병 중공군 개입으로 인해 당초 맥아더 구상과 미본국의 인식과 거리가 멀어 맥아더만 희생(해임)되었다.

누가 뭐라해도 맥아더원수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이야말로 오늘날 한국을 잊게 했다.

그러므로 맥아더는 한국인들의 영원한 은인이며, 인천 월미도 공원에 우뚝 서 있는 그의 동상은 영구히 보존돼야 할 것이다.

 

일본연합함대사령관 야마모도 이소로쿠 대장(山本五十六)

 

일본해군은 그가 비록 미드웨이해전에서 결정타를 입고 남방전선 시찰도중 공중에서 피격돼 죽었지만,

명장으로 손색이 없다며, 원수로 추서했다. 개전시 하와이 진주만 기습작전을 성공시킨 공을 높이 평가한데서라 하겠다.
야마모도는 미국과 전쟁시 단기전으로 승부를 결정지어야 한다는 일관된 생각때문에 하와이기습을 선택한 것이었다.

이어 여세를 몰아 미본토로 진격, 결전에 돌입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는 주미무관을 거쳤기에 누구보다 미국의 국력, 군사력을 잘 알고 있었다.

어이없게 한방 먹은 미국은 1942년 6월 미드웨이해전에서 일본함대에 치명타를 가함으로써 복수를 했다.

일본기동함대 주력 항모 4척이 보기 좋게 격침당했다. 전력은 순식간에 내리막길이었다.

기동함대사령관 나구모츄이치(南雲忠一·중장)와 참모장 쿠사카 료우노스케(草鹿龍之介·소장)가 전황보고차

본함대 기함 야마토(大和·7만톤)로 야마모도를 찾아왔다.

참모들은 그들의 작전 실패를 신랄이 비판하며, 냉대했다. 사령관 야마모도는 경과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참모장 쿠사카제독이 “한 번만 기회를 더 주길 바란다”고 간청했다.

그러나 본함대 참모들은 즉각 교체를 강력 주장했다. 야마모도가 조용히 말했다.
“전투란 장기와 비교된다. 잘 두던 장기도 때로는 질 수 있다. 전쟁도 순간 실수로 패할 수 있다.

더욱 승부욕이 강한 자는 상대의 감정을 기민하게 읽을 수 있어 운좋게 승리를 낚을 수 있다.

반면 최선을 다하고도 반대의 경우를 맞을 수도 있다.”고 타일르듯 참모들게 말했다.

그는 끝으로 “한 번 더 시켜보자! 아이디어를 주어 적극 행하게 하자! 칭찬하면 고래도 춤을 출 것이다.

문책만이 능사가 아니다. 그러면 조직에 쓸 사람이 없어진다”며,

가능한 책임을 묻기보다 기회를 한 번 더 주어 재기하도록 부하를 이끌었다. 정말 관대하고 통이 컸다.

야마도는 초급장교시절 항공통이었다. 늘 전쟁은 도박에 비유했다. 물론 이기기위한 도박이라고 토를 달았다.

주변에서는 그를 은정주의(온정주의)를 우선시하는 인자한 해군제독이였다고 평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야마모도의 은정주의를 비판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군률이 엄격한 군대분위기상 알맞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미드웨이해전의 패장 나구모 제독을 오자와 지사부로우 제독(小澤治三郞·중장)으로 미리 교체했더라면

패전은 면했을 것이라고 예를 들었다.
하지만 당시 해군인사는 깰 수 없는 한 가지 불문율이 존재했었다. 바로 군령승행령(軍令承行令)이란 것이었다.

즉 인사시 해군병학교(사관학교) 졸업기수를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인사시스템이였다.

나구모제독은 병학교 36기, 오자와는 37기였다.

게다가 야마모도의 지론인 한 번 실패를 문제삼아 음지로 보내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는 방침때문이었다.

야마모도는 입버릇처럼 말하기를, “해군은 기계를 조작하며,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를 상대로 활동하기 때문에 실책이 일어날 수 있다.

그때마다 ‘징벌인사’를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한 번만이라도 재기의 기회를 주는 것이 각나라 해군의 전통이다.”

“만일 실수를 문제삼아 1계급 강등이라도 시켰다면 일정기간이 지나면 즉시 원상회복시켜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야 사기가 유지될 수 있다.”
과거 일본해군은 중요인사 때 병학교 졸업 기수를 서열로 삼았다.

절대 어기지 않았다. 물론 장단점을 알고 있었다.

특히 야마모도는 인간적으로 정이 많은 편이었다고 전한다.

만일 그가 일본패전시까지 생존, 전범으로 기소되었더라면, 교수형을 선고받았을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미드웨이해전을 스토리로 한 명화 ‘도라! 도라!’에서 저녁 노을이 짙게 깔린 기함 갑판위를 혼자 터벅터벅 걸으면서,

“우리는 호랑이 꼬리를 밟았노라” 앞으로 결과는 어떻게 전개될지...? 그때의 야마모도 제독의 고뇌에 찬 모습.

 

핀란드군 총사령관 칼·만넬하임 원수

 

만넬하임 원수는 핀란드의 국부적인 존재였다.

그는 오랫동안 핀란드군총사령관을 지냈다.

특히 우리에게는 생소한 이름이다.

핀란드는 옛 소련과 국경을 이루고 있는 나라다. 국경선은 레닝그라드(현 산크트 패텔 블크)에서 서쪽방향으로 30마일(50㎞)정도.

옛 소련은 안전보장상의 이유를 내세워 라드가호(湖)와 핀란드 사이에 끼어있는 핀란드땅 카레리아지역을 할양하라고 압박하는 바람에 1939년 11월 양국간 일명 ‘겨울전쟁’을 치루었다.
소련군은 병력 30개사단 50만명에, 전차 1,500량, 항공기 800대 등을 동원, 선제공격을 했다.

그에 맞서 핀란드는 예비역까지 동원, 9개사단 32만명, 전차 600량, 항공기 104대를 동원했지만 전력면에서 상대가 안됐다.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한 핀란드는 72세의 노병 만넬하임을 전격 현역으로 복귀시켜 총지휘관에 임명했다.

핀란드군은 그의 작전 계획대로 선전분투 끝에 소련군 1차공세를 모두 격퇴했다.

그러자 소련군은 다시 병력을 증강시켜 2차 공세를 펼쳤다. 핀란드는 다시 위기에 몰렸다.

바로 그때 총사령관 만넬하임원수가 전군에 대해 특별메세지를 발표, 장병들의 전의를 가다듬었다.
“조국의 운명, 미래는 지금 당장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위기에 처해있다.

오직 장병들의 불굴의 신념과 희생정신만이 조국을 구할 수 있다. 본인은 모든 부하가 그 신성한 의무를 다할 것으로 굳게 믿는다.”
만넬하임 원수는 러시아 지배시 핀란드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다.

헬싱키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후 러시아군 장교로, 궁정 경비대에 근무했다.

이어 근위기병장교로 러일전쟁때 러시아장교로 전선을 누볐다.

러시아혁명때 중장으로, 기병단장으로 있었다. 고국 핀란드로 돌아온 그는 즉시 핀란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얼마 후 핀란드군은 소련이 지원하는 적위군(赤衛軍)과 독립전쟁을 시작, 승리했다.

그때부터 그가 흰 모피로 된 코트를 입고 눈보라가 펄펄 휘날리는 전선에 나타나기만 하면 장병들은 ‘흰장군’이라고 탄성을 질러되었다. 독립전쟁후 그는 예편했다. 그후 다시 유럽에 전운이 감돌자 32년 군사위 위원장으로 군에 복귀했다.

그의 신념은 “스스로 지키지 못하는 나라를 누가 지켜 주겠는가?”하고, 장병들에게 되 묻는 것이었다.
그같은 신념에 쫓아 소련과 국경선에 강력한 방위선을 구축했다.

이른바 ‘칼·만넬하임라인’이었다. 그리해 ‘겨울전쟁’때 핀란드군은 소련에 의해 암살될 것으로 우려했지만,

소련군 주력이 방위선에 의해 저지당해 전력을 더 이상 발휘할 수 없었다.

게다가 동부국경지대에 적설량이 많아 소련군이 핀란드스키부대에 의해 포위당하는 바람에 전력이 분산돼 버렸다.

그 전법이 ‘못티전법’이라고 불리었다. 결국 소련군의 2차공격도 실패로 끝났다.
1940년 3월 만넬하임 원수는 전쟁계속을 고집하는 군수뇌를 강력 설득,

소련과 휴전을 정부에 건의, 강화조약을 성사시켰다.

때문에 국토 일부인 카레리아지역을 잃은 대신 독립을 확보하게 되었다.
1941년 6월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다. 핀란드군은 이에 편승, ‘겨울전쟁’때 잃은 실지회복에 나섰다.

핀란드군으로서는 소련과 2차 ‘겨울전쟁’을 시작한 것이었다.
총사령관 만넬하임 원수는 자기영토 밖으로의 진격은 용납지 않았다.

히틀러는 물론 핀란드 국민들도 진격을 바랬으나 그는 끝까지 응하지 않았다.

남의 국토를 탐내서는 안된다는 신념에서였다. 1943년으로 접어들자, 소련군의 공격이 재개되었다.

핀란드는 전쟁으로부터 이탈을 모색했다. 하지만 6월 카레리아지역에 대한 소련군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핀란드군이 재차 밀리게 되었다. 만넬하임 원수가 서둘러 소련과 휴전협상에 나섰다.

우여곡절 끝에 강화조약을 성립시켰다. 핀란드는 약소국으로 수난의 영속이었다.

1930년대부터 40년대만해도 대국에 농락 당하고, 늘 고뇌하고 고투로 이어져 왔다.

그런 어려운 시대를 위대한 군인 칼·만넬하임 원수의 지혜로 헤쳐 나왔다.

그는 핀란드의 국부로 지금도 존경받고 있다. 핀란드는 비록 소국이긴 하지만,

과거 동구권 소국들과는 위상이 다르다는 평가다. 한 군인영도자의 뛰어난 방향설정의 결과였음이 틀림없었다는 것.

그는 1952년 1월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세계 수많은 장군들 중 드물게 조국의 독립보전과 영광을 안겨준 위대한 장군으로 남게 되었다.

 

일본 제14방면 군사령관 야마시다 도모유키 대장(山下奉文)

 

야마시다는 2차대전 당시 남방전선을 책임지고 있던 일명 남방군총사령관이었다.

전시수상겸 육군대신 도우죠히데키(東條英機·대장)와는 사이가 좋지 않아 늘 찬밥신세였다.
일본군이 장악해온 남방지역중 마리아나군도 여러섬이 전쟁 막바지인 1944년 9월 적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자,

크게 위기감을 느꼈다. 연합군은 여세를 몰아 필리핀 재탈환을 위해 진격해올 것으로 판단, 그는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는 그 자리에 오기전 관동군 제1방면 군사령관이였다. 그는 외유내강형 타입이었다.

결국 그는 ‘남방전선 호랑이’로 변신했었다. 일본군내에서는 오래전부터 용장(勇將)이란 평을 들어왔다.
야마시다는 개전초 육군 제25군단을 지휘, 말레이반도 1,000㎞를 쾌속으로 진격,

영국 식민지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전공을 세워 이름을 날렸다. 그같은 전공으로 중장에서 대장이 되었다.

당시 야마시다는 싱가포르 수비대장인 영국군 사령관 아사·파시발중장에게 항복에 대해 “No냐? Yes냐?”하며 무조건 항복을 압박했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주요 언론은 비록 적장을 상대로 한 말이지만 좀 지나친 일이라고 논평했다.

그 후 두 사람의 운명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일본의 패전때까지 파시발 중장은 포로신세로 수용돼 있다가 석방돼,

필리핀 마닐라 연합국이 주도한 전범재판의 군사재판장에 임명되었다.

야마시다가 B급전범으로 체포돼 법정으로 불려 나왔다.

파시발은 내심 원수를 갚아야겠다고 벼루고 있었다.

“피고는 침략전쟁을 주도했을뿐더러, 특히 전쟁포로를 심히 학대했으며,

민간인들까지 학살하는 등 도저히 정상참작이 불가능하다.”는 검찰의 논고와 함께 교수형이 구형되었다.

결국 그는 마닐라 교외에서 교수형으로 사라졌다.

그의 사형집행에 대해 논란도 많았다. 형량이 지나쳤으며, ‘보복판결’이란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는 대개 승자편.
야마시다는 군정(軍政) 계통으로 육군대신 후보로 많이 거론되었다.

일왕 쇼와(昭和·裕仁)도 그를 좋아하지 않아 끝내 대신(장관)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전쟁 내내 야전장수(野戰將帥)로 전선만 누비다가 생을 끝내었다

 

소련 레닌그라드 방면군 사령관 게을개·쥬코프대장(Zhukov)

 

쥬코프는 소련 레닌그라드 방면군사령관으로, 2차대전때 독·소전을 지휘했다.

1941년 6월 독·소전의 막이 올랐다.

거침없이 진격해온 독일북방군집단은 그해 8월 30일까지 레닌그라드로 통하는 모든 철도와 길목을 차단했다.
9월 8일에는 라드가호반인근 슈릿센블크 지역을 점령, 레닌그라드를 완전 포위했다.

독일군 포위 지역에는 소련시민 300만 명 정도가 거주중인 곳이었다. 문제는 시민들의 생업이었다.

어떤식으로 물자를 보급해 줄 것인가였다. 물론 시위같은 집회는 허용될 수 없었다.

시가지를 철저히 파괴한 후, 재사용할 수 없도록해 시민들의 생업활동을 허용해주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같은 독일군의 위력에 대항하기 위한 야전지휘관을 물색중 수상 스탈린이 직접 쥬코프(Zhukov)를 지명,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쥬코프는 자리에 오르자마자 군수뇌회의를 소집, 지금까지의 전략전술을 변경,

레닌그라드를 최후까지 사수한다는 결의를 다졌다. 그는 다수의 시민들을 끼고 어떻게 싸워야 할 지하고,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 하급지휘관을 수상한 자로 몰아 숙청해버렸다. 독재자 스탈린이 무색할 정도로 비정했다.
쥬코프는 1차 세계대전때 징병으로 러시아군에 입대했다.

병과는 기병이었다. 러시아혁명이 성공하자 곧바로 공산당에 입당, 적군(赤軍) 부사관에서 스타트, 순조롭게 승진했다.
1937년 스탈린에 의한 적군 대숙청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5명의 원수중 3명이, 195명의 사단장 중 110명이 모습을 감추었다.

그래도 쥬코프는 건재했다.
소련군은 대숙청으로 사기가 급격히 위축되었다. 전투보다 자기신변부터 걱정돼 공포심이 떠나지 않았다.

그 직전까지 참모총장직에 있었다.
레닌그라드는 대도시일뿐더러 최전방 북단 거점지역이었다. 양군 모두 전략상 요충지로 중요시 했다.

위기가 닥칠때마다 스탈린은 오랜 친구인 크림·브로시로프를 일선부대에 파견,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요람, 레닌가(街)에 위기가 닥쳤으니, 모두가 힘을 합쳐 극복하자”고 외쳤다.
당시 레닌그라드는 소련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단번에 호전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혁명의 성지 레닌그라드의 운명을 전적으로 쥬코프에게 맡겼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쥬코프도 숙청당했다.

이유는 카에프지역을 포기하자고, 건의한데서였다. 대답은 사령관 해임.
쥬코프는 한동안 예비방면군사령관으로 있었다. 전황이 계속 불리하게 돌아가자 스탈린은 쥬코프를 야전사령관에 복귀시켰다.

쥬코프는 다시 군개혁을 단행했다.
먼저 작전에 별도움 안 되는 장교부터 계급, 직위 여하를 불문하고 가려내어 ‘징벌 부대’로 발령했다.

시민 약 100만 명 넘게 아사자를 내면서까지 전투중 명령을 어기고 후퇴한자는 집단총살해 버렸다.
레닌그라드는 무려 900일 동안 독일군 폭위작전을 견뎌냈다. 쥬코프의 공포적인 통솔결과였다.

쥬코프 자신이 그 지역에 머문 것은 불과 한 달 정도.

그는 야전사령관외에도 독일 베를린 공략때는 제1백러시아 방면군사령관을 겸임했다.

그가 지휘한 소련군이 가장 먼저 베를린에 입성, 독일군 항복문서 서명을 받아냈다.
그런데 그는 숙청당했다가 되살아나는 등 개인적으로 어려운 고비를 넘기기는 했지만,

역사적 평가는 부정적이다. 부하통솔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총살을 함부로, 스탈린을 능가했다는 평가다.

결국 군장군이라기보다 ‘악한(惡漢)’이란 명칭이 어울렸다는 것이다.

그는 스탈린 사망 후 국방상으로 있다가 1957년에 물러났다.

 

일본 육군제8방면군 사령관 이마무라 히토시 대장(今村 均)

 

이마무라 대장이 지휘한 제8방면군은 1945년 9월 6일 일본해군 남동방면 함대와 함께 뒤늦게 패전소식을 듣고 호주군에게 항복했다.

이마무라는 즉각 전범으로 체포돼 호주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는 조금도 비굴하지 않았다. 함께 체포된 참모들에게 “우리는 영광스런 희생자다.

그리고 우리부대는 특별히 빛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정신적으로는 항복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호주군 군사재판관은 그 말을 듣자, “용기있는 외침”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일본인의 특유한 ‘사무라이 정신’이라고, 비꼬기도 했다. 이마무라는 사형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 후 당시 일본 최고 명문 제1고교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 무렵이 러·일전쟁을 앞둔 싯점이었다. 그런 관계로 육사모집인원이 늘게 되었다.

그는 결국 육사 19기생으로 입학,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동기중 대장 4명중에 끼었다. 육대도 수석으로 졸업할 정도로 수재였다.
그는 2차대전 서전시 남양 쟈바섬공략 작전을 지휘한 제16군 사령관이었다.

뒤이어 가달카날섬 철수시 제13군단을 무사히 철수시켜 화제를 모았다.

1944년 3월 아드미날티군도(群島)가 연합군에 점령당해 일본군 수비대 제8방면군이 완전 고립되었다.

병력은 해군을 합쳐 11만 명. 후퇴작전 성공으로 생명은 구할 수 있었다. 그는 패전때까지 살아 남아 있었다.

군사재판에 회부돼 사형 대신 유기징역을 선고 받았다.

그는 유언을 남기기를 “내가 죽은 후 옛 부하들 영령과 합사를 원한다”고 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일본점령군 사령관 맥아더 원수도 감명을 받았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드와이트·아이젠하워 대장(Dwight David Elsenhower)

 

2차대전 막바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파리를 해방시키고, 전세를 획기적으로 유리하게 이끌었던 아이젠하워 대장.
1944년 6월 5일 저녁무렵 영국본토에 대기중이던 상륙부대 300만 명은 두 손을 합창, 상륙작전 성공을 비는 기도를 올렸다.

그 정점에 선 아이젠하워 장군은 두 어깨에서 반짝이는 8개의 별 무게가 1톤 정도로 느낄만큼 중압감에 젖어 있었다.

고심 끝에 마련한 작전 계획은 변덕스러운 날씨때문에 혹 차질을 빚을까봐 마음 놓을 수 없었다.

당초 잡아놓은 6월 5일 상륙개시는 계속된 악천후 탓으로 중지해야 할판.

다음날 6일에나 감행할 수 있을지? 아니면 더 연기해야 할지? 오직 최종 결단은 지휘관 아이젠하워 장군의 마음에 달려 있었다.
독일계 이민의 자손인 아이젠하워 장군은 웨스트·포인트 즉 육사재학시 성적은 별로 좋지 않았다.

호트·레븐와스 지휘참모대학에서는 수석졸업, 육사 동기들의 관심을 모았다.

그 성적 덕으로 전사편찬위원에 선발돼 제1차세계대전사를 연구하기 위해 유럽 전적지(戰跡地)를 찾아 곳곳을 누볐다.

이어 육군 차관보에 임명돼 군수품 생산계획과 수송업무를 담당했다.

장차 대전 발발시 그가 유럽전선을 누비게 될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무렵 군인들에게는 겨울철과 다를바없는 세계군축시대였다.
아이젠하워 장군은 차관보가 되기전 소령을 16년동안 못면했다.
그중 8년 동안은 참모총장부관을, 그 후에는 필리핀고문의 선임보좌관을 했다.

그때마다 직속상사는 더글라스·맥아더였다. 기연(奇緣)으로 생각되었다.

만일 그대로 평시가 계속되었더라면 아이젠하워는 중령정도에서 군생활을 마감했을지 모른다.

4년간의 필리핀 근무 후 일본을 거쳐 귀환한 아이젠하워는,

1941년 6월 제3군 참모장으로, 9월 루이지아나주에서 있은 군작전연습에서 비로소 주목을 끌었다.
그로부터 3개월후 12월 8일 일본군의 도발을 알리는 하와이 진주만 기습공격 시작으로 미국은 대전에 뛰어 들게 되었으며,

아이젠하워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리게 된 셈이었다.
상황이 날로 긴박하게 돌아가자, 육군참모총장 죠지·마샬대장이 아이젠하워를 주목하게 되었다.

즉시 그를 참모본부에 배치했다. 바로 작전계획차장에 이어 작전부장에 임명, 단독으로 대독 작전계획을 입안하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아이젠하워는 미 육군 유럽 전역사령관으로, 영국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 후 북아프리카, 이태리에 대한 진공작전을 지휘, 1943년 12월 연합군 최고사령관과 함께 대장으로 진급했다.
원래 그 자리에는 미 육군 참모총장 마샬대장이 예정돼 있었으나 참모본부 멤버가 극열 반대하는 바람에 대신 임명되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총지휘관에 아이젠하워 대장이 맡았다.
작전의 목적은 프랑스 파리를 해방시키고, 동시에 독일본토 진격에 초점이 맞춰지고 있었다.
프랑스 북서부해안 노르망디에서 ‘오버로드(over lord·大君主)’란 암호명으로 최대의 결전인 상륙작전을 전개한 것이다.
병력 300만 명. 함정 6,000척, 항공기 1만 4,000대, 군수물자 650만 톤 등이 연합국에서 동원했다.

그 무게만해도 “영국본토가 바닷속에 가라앉을 정도”였다.

문제는 그같은 병력과 장비, 군수물자를 굳이 노르망디 해안으로 양륙시켜야 하는지? 상륙지역 환경, 지형은 적합한지?

그리고 작전계획은 잘 짜여 있는지? 꼭 성공할 수 있을지?
총지휘관 아이젠하워 머리는 복잡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파리를 점령중인 독일군의 방위태세는 철통같았다.

그래서 적의 감시가 소홀한 북서지역 노르망디를 택하게 되었다.

그 지역은 연합국의 도하작전 원칙과도 부합되기 때문이었다. 상륙작전시 공정작전(空挺作戰)도 병행키로 했다.

군사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달빛도 필요하고, 상륙지점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조조(早潮)시는 간조때가 유리했다.
그러한 조건들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6월은 5일~7일 사이가 적절했다.

게다가 배후 폭격의 정밀도를 한층 더 높이기 위해서는 청명한 날씨가 바람직했다.

해상이 몹시 출렁이면 군수물자 양륙작업에 차질이 우려되었다.

그래서 결행날짜 6월 5일은 주저스러웠다. 악천우가 사그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작전을 연기할 것인가? 그럼 다음날을 D데이로 정할 것인가? 내일도 날씨가 어떨지?

더 미루게 되면 지치게 되고, 병사들의 사기도 저하되고, 함정들의 연료도 바닥나게 되고,

아무래도 7일까지 연기는 곤란했다. 다시 다음 기회로 연기하려면 준비관계로 빨라도 2주후로 날짜를 잡아야만 했다.
더 확실한 좋은 날짜는 4주후가 적당했다. 지휘관 아이젠하워 장군은 중얼거렸다.

“기계는 기다릴 수 있다. 인간은 기다리기를 싫어한다.”

두 번씩이나 연기해 전투원들의 긴장이 풀리면 어떻게 될지? 그 점이 더 큰 고민이었다.

긴급작전회의가 다시 소집되었다. 참모들의 의견은 하나같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즉시 결행하기를 바란다.”였다. 그래도 아이젠하워는 숙고를 거듭했다.
드디어 결단을 내렸다.
“그럼 큰 도박을…”
“제군!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군. 행동을 개시하자!”
결행날짜는 미동부 표준시각(서머타임) 1944년 6월 5일 새벽 4시 15분. 종전 후 공개된 그의 수첩에 적힌 작전 감행일시였다.

그는 그런 전공으로 34대 대통령을 두 번 연임했다.

 

전시수상겸 육군대신 도우죠 히데키 대장(東條英機)

 

그곳을 잃으면 패전은 필지의 사실로 나타날 것이다. 그곳은 절대적 국방선 요충지다.

“전원 옥쇄(玉碎·집단자결)할 각오로 싸워라” 대전막바지 일본육군대신 명의로 발표된 독전(督戰) 주요 내용이었다.
트락섬이 미군의 대대적 공습에 의해 일본군 전방 거점기능이 상실될 위기를 맞았다.

그때가 1944년 2월 17일. 그 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일왕 쇼와(昭和·裕仁)는 도우죠에게 참모총장직까지 겸임토록 조치했다.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해군대신에는 사마다 시게타로우(嶋田繁太郞·대장)에게는 군령부총장을 겸임토록 발령했다. 군부도 놀랐다.

도우죠는 군수상까지 4개 직책을 맡았다.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된 것은 일본근대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일부에서는 도우죠를 두고 그가 군인인지? 정치인인지? 아니면 막부(幕府·무가정치)인지? 모르겠다는 비판이 자자했다.

심지어 패전 이후에도 도우죠는 ‘동양의 히틀러’라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그로인해 군령과 군정에 혼란을 초래, 작전에도 영향이 미쳐 군내부의 비난도 거세었다.

주변국에서는 ‘도우죠’란 말만 들어도 소름이 끼친다며 듣기 싫어했다.

도우죠 한 사람에게 권력집중은 일본헌법정신에도 어긋난다는 학계의 소리도 높았다.

고이즈미(小泉純一郞)가 수상으로 있을때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 참배문제로 이웃나라들의 비난을 받은 것도

누구보다 전쟁 원흉 도우죠가 그곳에 합사돼 있다는데서였다.
평소 도우죠는 자기를 히틀러와 비교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히틀러는 정통파 군인이 아니며, 굳이 평가한다면 히틀러의 계급은 오장(伍長) 정도이고,

자기는 대장이므로 상대가 안된다.”며 하시했다.

선악문제를 떠나서라도 “히틀러는 독일의 생존권을 동양으로까지 확대하려는 야심을 실행에 옮긴 세기적인 침략자였다.”고,

도우죠는 덧붙였다. 그 때문에 2차대전계획을 히틀러가 독단적으로 밀어 붙였던 것이라고 도우죠는 주장했다.

도우죠는 계속 언급하기를 “그런 히틀러와 나를 왜 동일시하느냐?며 불평했다.

일본 극우인사들은 지금도 여전히 “아무리 ‘지나사변(支那事變·중국침략) 확대책임이 일본에게 있다손치더라도,

도우죠에게만 물을 수 없다.”며, 그를 옹호했다.
“태평양전쟁도발도 도우죠 주도로 ‘영미격파’라고하는 비젼에 의해 결정된 것은 아니였으며,

당시 세계적인 격동의 파도가 일본까지 밀려온데서 비롯되었다.”는, 전쟁 불가피론을 폈다.
그런 관점에서 도우죠가 전적으로 태평양전쟁책임을 지고,

A급전범에 몰려 교수형에 처해진 것에 대해 동정론을 늘어놓는 우익인사들이 적지 않다.

그런 관계로 독일 히틀러와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지론이다.
인간 도우죠는 성격이 섬세하고, 괴팍스럽고, 신경질적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을 노골적으로 구별했다.

부하가 만일 실책을 저지르면 그 자리에서 질책을 서슴치 않았다.

‘면도날’이라는 별명답게 공포의 적으로 가급적 그와 만나는 것을 피했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최악이었다. 내각회의인 이른바 어전회의(御前會議)때도 각료들은 그와 스치는 것 조차 싫어했다.

그런데도 도우죠가 어떻게해 대장까지 진급했을까? 궁금하게 여긴 일본인도 많이 있었다.
즉 도우죠 아버지 도우죠 히데노리(東條英敎)도 과거 육군소장을 지냈다.

히데노리는 육군대학을 우등으로 졸업, 수재취급을 받았지만, 일찍 예편되는 바람에 동정론도 많았다.

그 동정론이 장남 히데키에 모아져 비록 흠은 있지만 한 번 써보자는데서 운좋게 대장까지 된 것이었다.
대장이 된 후에도 영전으로 이어진 것은 그가 화를 잘 내기에,

그같은 성격이 오히려 군 기강확립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을 쇼와(昭和)가 한데서라는 것.

그래서 도우죠는 누구도 감히 손될 수 없는 골칫꺼리였던 왕족출신 장교들을 죄다 좌천시켜버려, 과단성이 높이 평가되었다.

그렇게 되자 역시 군통제에 최적의 인물이라는 평까지 들었다.
전시수상까지도 겸임. 위기의 시대에 정치군사지도자로서 최적격이라는 생각이 내내 일왕 쇼와(昭和)의 머리에 남아 있었다.

패전직전까지도 그는 실질적인 왕으로까지 군림했다.
그러나 패전후 일본국민의 평가는 360도 달랐다. “도우죠는 독일 히틀러나 다를바 없는 자로서,

군국주의 화신이었다.”는 비난이 끊이질 않았다.
결국 도우죠는 도쿄 극동군사재판에서 A급전범으로 기소돼 일왕 쇼와(昭和)의 몫까지 전쟁도발 책임을 지고,

교수형으로 생을 끝냈다. 그에게는 도쿄대학 출신 장남이 있다.

 

독일 B집단군 사령관 엘빈·롬멜원수(Erwin Romel)

 

롬멜원수는 2차대전시 유럽전선에서 활동한 독일 B집단군 사령관이었다. 1차대전때도 참전했다.

그는 1933년 나치당에 들어간 후 1938년 친위대 간부로, 2차대전때는 주로 북아프리카 전선과 프랑스 전선을 누볐다.

1942년 원수가 된 후 그해 10월 엘 아라멘 지구 전투에서 영국군을 맞아 고전끝에 패했다.

자결을 강요당해 종말은 비참했다. 먼저 그의 인생 역정부터 간략히 소개해둔다.
그가 지휘한 주요 전투로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 후 저항을 포기, 교두보를 포기하고 퇴각한 일이 우선 꼽힌다.

1944년 6월 27일에는 셀불항만까지도 연합군에 점령당해 병력을 전면 철수했다. 전세가 계속 불리하게 돌아가자,

롬멜은 직접 전황을 설명하기 위해 서방방면 총사령관 겔드·폰·룬터슈텟트 원수와 함께 히틀러를 면담했다.
면담내용은 전반적인 전황과 국내 상황이었다.

히틀러는 “국내문제는 그만두고, 군사정세에 대해서만 설명하라”고 미리 롬멜에게 제동을 걸었다.

롬멜은 가만히 있으면 앞으로 좀처럼 의견을 직접 전달할 기회가 없을 것으로 판단, 거침없이 털어 놓았다.

그러자 3번의 주의 끝에 히틀러가 화를 내며 “원수! 귀관은 이 자리에서 나가 있는 것이 좋겠어.…”

히틀러와 단독으로 만남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롬멜원수는 내심 못마땅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때부터 둘 사이는 금이 가고 말았다.

롬멜은 1차대전때 이태리 전선에서 세운 전공으로, ‘풀·룰·메리트’라는 무공훈장을 받았다.

그같은 전공때문에 10만 명으로 줄인 감군계획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있었다.

그래서 롬멜은 장차 독일군 중추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기대를 모았다.
비록 군경력 20년만의 소령진급은 늦었지만, 어딘가 행동이 달랐다.

그가 보병학교 교관으로 있을 때 「보병은 공격하는 것이다」라는 저서를 펴냈다.

자신의 전투경험이 투영된 저서로, 베스트가 되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그 저서를 히틀러가 탐독, 주요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령으로 진급되자 롬멜은 총통 친위대장에 임명되었다. 1938년 3월에는 프라하주둔 사령관으로, 히틀러 가까이 있었다.

2차대전의 도화선이 된 폴란드 침공때 소장으로 진급했다.

곧 총통 본진영 사령관에 임명돼 히틀러의 총애를 받았다.

다시 프랑스 파리 점령때는 제7기갑 사단장으로, 히틀러가 추천했다.
적으로부터도 칭찬받은 롬멜은 2차대전이 시작된 후 불과 3년 사이에 5번 진급끝에 원수까지 올라갔다.

‘만년소령’에서 기어이 탈출에 성공했던 것이다.
롬멜의 군력은 작전술의 기본원칙을 때로는 무시해버린 모험에서 얻은 케이스가 많다는 지적도 있다.

그때부터 참모본부 정통파 그룹은 그를 위험한 인물로 분류해 견제가 심했다. 롬멜의 반응은 말없이 두고 보자는 식이었다.

참모총장 푸란츠·활다원수조차 롬멜에 대한 비판만은 피했다. 히틀러가 아끼는 사람이기에 비판보다 오히려 칭찬해줘야 할 처지였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귀환 후 롬멜은 이태리 전선으로 다시 가있는 동안 프랑스 전선 총지휘관인 B집단군 사령관으로 발탁되었다.
그럼 그는 적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작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을까?

그는 그때 말하기를 “적은 아직도 바다 멀리 진을 치고 있다. 작전은 최초 24시간이 상황을 좌우할 것이다.

그날이 가장 긴 날로 기억될 것이다.”라고 혼자 중얼거리듯 언급했다.
그로 미루어보아 적의 상륙작전을 어느 정도 예상했다. 그는 적이 상륙시 연안에서 곧바로 격퇴해야한다는 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통파는 이를 적극 반대했다. 정통파는 적을 코너로 유인, 한꺼번에 격멸할 것을 내세웠다.그래야만 승산있다고 보았다.
반면 롬멜은 그같은 전술은 적의 막강한 화력과 항공전 그리고 엄청난 규모의 병력을 고려할 때 자유로운 기동이 불가능하다며 맞섰다. 결국 현실은 롬멜원수 판단이 정확했다.
결과적으로 독일군 참모본부의 작전구상에 융통성이 결여됐던 점이 노르망디에서 주요 패인이 되었다.

즉 적의 교두보를 무너뜨릴 수 없다는 확실한 판단이 섰을 경우,

긴급박전회의를 소집, 휴전제의를 포함한 대안을 모색해야만 했었는데도, 쌍방 주장만 하다가 기회를 놓쳤던 것이다.
롬멜은 재차 말하기를 “당신들은 자신을 신뢰하고 있지만, 당신들 자신은 나를 신뢰해주지 않은 결과였다”고 불평했다.

“나는 이곳에서 뿐만아니라 독일에서도 결코 사라질 수 없다.”고 말해 히틀러의 부당한 관섭과 독재까지 직접 비판했다.
그 말이 전해지자 히틀러는 예측한대로 국내 정치문제까지도 넘어다 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무렵 크라우제·비츠저 ‘전쟁론’이 바이블로 여겨졌다. 내용 중 군사정치에 대한 해답은 유보돼 있었다.

히틀러의 행동을 몹시 두려워 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기 히틀러의 머리속에는 “이제 롬멜이 나를 배신하기 시작하는구나”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며칠 후 돌연 긴급한 일이 벌어져 군수뇌회의가 소집되었다. 곧 히틀러 암살미수사건이 일어났다. 핵심인물로 롬멜을 지목했다.

즉시 히틀러는 그에게 자결명령을 내렸다. 결국 롬멜은 히틀러의 총애로 승승장구 했다가 히틀러에 의해 비극으로 막을 내렸다


일본 육군항공총감 아나미 코레치카 대장(阿南惟幾)

 

아나미는 2차대전시 공군을 대신할 일본 육군항공대 총사령관이었다.

호주와 필리핀 사이에 끼어있는 북쪽 지역 일본 육군 제2방면 사령관으로 있다가 1944년 12월말 육군항공총감으로 전임되었다.

그가 그 자리에서 옮겨올 무렵 남방함대가 괴멸되고, 육군부대마저도 고립무원 상태였다. 전투를 유지할 방법은 항공기밖에 없었다.

아나미는 원래 항공병과가 아니였기 때문에 참모들은 그가 어떤 전술을 선보일지 관심꺼리였다.

아나미도 그런 분위기를 의식 “나도 필요하면 용감하게 적진으로 뛰어들 수 있다.”고 소리쳤다.
이윽고 일본군이 최후까지 발버둥쳤던 항공전도 무위로 끝나버렸다. 아나미는 군부의 마지막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다.

군부는 항공전마저 물거품이 되자, 패전을 앞당기게 될 것 같다고 아나미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 말을 듣자 아나미는 책임을 통감, 단도로 배를 갈라 자결하고 말았다.
패전날(8월 15일) 아침,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있다.
“‘용왕매진(勇往邁進)’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 말을 두고 해석이 각각이었다. “일본의 전쟁도발은 만용이였으며, 젊은이들의 희생만 강요했다.”는 의미가 많았다.
아나미에 대한 군역(軍歷)을 좀 더 설명해둔다. 대기만성(大器晩成)형. 대좌(대령)때까지는 별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저 군률에 충실했던 장교였다.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시종무관(侍從武官)과 근위 보병 제2연대장이 되고 부터였다.

이어 유년학교장이 되어 소장으로 진급했다. 자신의 생각은 소장에서 군생활이 끝날 것으로 예측했지만,

그 무렵 예상치 않은 돌발사태가 발생했다. 요즘말로 군 내부 개혁을 요구하는 젊은 장교들의 하극상(1936년 2·26사건)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수습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육군성에 병무국이 신설되었다.

초대국장에 파벌에 좌우되지 않는 중립적인 인사로 아나미가 발탁되었다. 그 후 인사국장도 거쳤다.

그는 누구든 납득할 수 있는 인사원칙에 따라 공정한 인사를 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4개월 뒤, 중국침략을 의미하는 지나사변(支那事變)이 일어났다. 비상령과 함께 부대가 속속 중국대륙으로 모여들었다.

아나미에게 행운과 불운이 교차했다. 결국 2차대전 막판에 이르자 그를 불운으로 이끌었다.
일본전쟁사는 그를 무능한 장군이었다고 낙인찍었다. 그는 자결직전 “한 몸의 죽음이 대죄(大罪)와 바꾸기를 희망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물론 그에게도 군지휘관으로 뽐내던 때도 있었다.

1941년 9월 태평양전쟁 시작 두 달전 육군 제11군을 지휘, 중국 호남성 장사(長沙)를 향해 진격했을 때다.

보병 46개 대대를 투입끝에 9월말 그곳을 점령, 이름을 날렸다.
얼마뒤 장개석군의 반격에 밀려 불과 점령 5일만에 퇴각했다.

2차공격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되려 적에 포위돼 6,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결국 그의 최종 평가는 범장(凡將)으로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

 

소련 노농적군 국방위원 마하일·트와첼스키 원수

 

“오늘 역시 참신한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
1936년판 적군야외교령(赤軍野外敎令)에 나와있는 트와첼스키 원수의 말이다.

그가 일찍이 숙청당하지 않았더라면 독·소전쟁 양상은 달라져 있을지 모른다는 말이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앞의 말은 누구를 겨냥해 한 말이였을까? 구구한 말들이 많았지만 누구도 정답을 내놓을 수 없었다.
그는 2차대전 발발 2년전, 스탈린에 불려간 후 모습을 감추었다. 그때 지위는 영농적군국방 인민위원 겸 노농적군 국방위원이었다.

결국 그의 인생역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의 뿌리를 알려면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된다.

그의 조상은 벨기에 서부에서 프랑스 북부를 중심으로 위세를 떨친 프란들백작 일가로,

십자군에 가담, 성지 예루살렘으로 진출하려다가 이슬람군 포로로 잡힌 것이었다.

그 후손이 러시아로 이주, 트와첼스키 원수를 있게 했다. 그의 가계를 볼 때 유럽 왕족이나 귀족 대부분은 조상과 인척관계였다.
그는 일찍이 군인을 지망, 사관학교를 나왔다. 첫 근무지가 근위기병장교였다. 얼마후 1차대전을 맞았다.

참전하자마자 불행히도 독일군의 포로로 잡혔다.

탈주상습범으로 주목돼 뮌휀 북쪽 슈타트 소재 요새감옥에 감금당했다.

그 감방에서 프랑스 드골을 만났다. 두 사람의 역사적 조우였다.
그때까지만해도 러시아혁명은 마무리되지 않았다.

그 소식을 듣게되자 중위인 그는 탈출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요새감옥’을 용케 탈출했다.

탈출직전 그는 포로들 앞에서 “나는 장차 장군이 될 것인지? 아니면 죽어 시체로 변하고 말 것인지, 매우 고민스럽다”는 말을 남겼다.
포로생활에서 벗어나 페텔블크에 도착하자, 그의 신분은 적위군(赤衛軍)으로 바뀌어 있었다.

귀족출신인 그가 왜 공산당을 적극 지지했는지 의문이었다.

그는 곧 중대장에 임명되었다. 이유는 그의 군사적 재능과 인간적인 매력이 남다르다는데서라고 했다.

러시아혁명과 토로츠키 조차도 암살당하기전 육해군 인민위원으로 있을 때 그를 주목,

‘붉은 나폴레옹’이란 별명을 지어주었다. 장차 그가 군의 중추부가 될 것이란 예고였다.
그무렵 소련의 국내사정은 공산혁명 이후 3년동안 반혁명세력과 각국의 내정간섭에 시달리는 상황이었다.

그 진압을 위한 작전이 ‘내전작전’이었다.

그런 어려운 사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대세력이 뿌리내리기전 각개전투로 격파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젖어 있었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연속적인 군기동력이 필요했었다.

기병출신 트와첼스키가 더 절실하게 느꼈으나 소련군에는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했다.
한 가지는 각급 지휘관의 군사지식과 전투경험 부족이었다. 또 한가지는 군사과학기술 후진성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22년 독일과 체결한 ‘랏파로조약’을 활용하기로 했다.

즉 독일은 국내에서 제조가 금지된 군사장비를 소련서 생산·실험하는 대신,

소련은 독일에서 기술교육을 통해 배운다는 것이었다.

트와첼스키 원수도 독일육군장군 젝트로부터 직접 지도를 받았다.

그처럼 당시 군장비 근대화란 점에서는 독일과 소련은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었다. 최종 목적은 군의 기계화였다.
그로인해 전투의 연속성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또한 야전부대를 종횡으로 배치할 수 있어, 적을 연속적으로 타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섬멸까지도 기대할 수 있었다.

그 전법이 ‘종심전략이론(從深戰略理論)’이란 것이었다. 전술적으로는 ‘전종심동시제압(全從深同時制壓)’이라고 불리었다.

적중탐구까지 타격을 가하는데는 긴 팔 같은 것이 필요했다.

그리해 공정부대가 투입되었다. 항공기에서 뛰어내리는 광경은 당시로는 기상천외한 일이었다.

그런 군사기술을 세계 최초로 실용화 한 것이 소련군이었고, 그 방법을 창출한 군인이 바로 트와첼스키 원수였다.

그로인해 1930년 4월부터 낙하산(Parachute)을 생산하게 되었으며,

1931년에는 낙하산을 이용해 소형 전차와 중화기까지 공중투하를 가능케했다.
1936년 트와첼스키 원수는 동서 양쪽 정면에서 ‘종심공격(從深攻擊)도 가능하다고 공식 확인했다.

그것은 지상군의 기계화 촉진과 양쪽 정면에 공정부대 배치가 완료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했다.

결국 그는 소련뿐만 아니라 세계군사장비 현대화에 크게 공헌해 족적을 남기긴 했지만, 인생 종착역은 비극이었다.

독재자들이 그러했듯이 스탈린도 그를 장차 정적이 될 것으로 예상, 그만 숙청해 버렸다.

독재자의 전형 히틀러나 스탈린은 부하가 크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무자비하게 제거해 버리는 숫법을 썼다.

 

일본연합함대사령관 도우고우 헤이하치로우 원수(東鄕平八郞)

 

일본인들은 대부분 도우고우를 일본의 유일한 명장으로 여기고 있다.

역사학자들은 우리나라 이순신제독에 견주기도 한다. 만약 1905년 러·일전쟁때 러시아 발틱함대를 격침시키지 않았더라면,

지금도 일본은 러시아 지배를 받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일본인이 부지기수다.
세계적인 불침함대 발틱함대를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독특한 전술로 단번에 수장시키고,

러시아 함대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제독까지 생포해 기세를 올린 인물이었다.

때문에 그를 일본인들은 조국을 위난에서 구출한 구세주처럼 여기고 있다.

도우고우가 함대사령관이었던 시대는 1세기전쯤이다.

비록 장구한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이름만 들으면 일본인들은 화제꺼리로 삼기 마련이다.
그럼 도우고우와 관계되는 주요 일화를 소개하므로써, 그에 대한 논의를 대신하고자 한다.
즉 1894년 청일전쟁이 시작되기전 전운이 감돌자, 일본 해군은 도우고우가 함장으로 있는 구축함을 청국 상해방향 해역으로 파견,

압박을 가했다. 주요 임무 중에는 군수물자를 싣고가는 선박에 대해서는 국적여하를 불문하고, 검색 압류하도록 지령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 영국화물선이 군수물자를 가득 싣고, 상해 방향으로 항진중이었다. 발견 즉시 정선을 통고했다.

그런데도 이를 무시, 속력을 내고 있었다. 3차례나 신호를 보내도 막무가니였다.

곧바로 발포해 화물선을 격침, 선원 3명만 구조했다.
그 소식이 로이타 통신에 의해 영국으로 퍼졌다. 영국정부, 군부가 왈칵 뒤집어졌다.

당시 영국과 일본은 동맹국 수준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도우고우가 일본 국회 사정위원회(청문회)에 급히 소환되었다.
“왜 하필 영국화물선을 그렇게 했는가?”
“나에게 부여된 임무대로 였다. 왜 내가 이 자리에 불려나와야 하는가? 지금도 같은 상황이라면 그 방법이외는 없을 것이다.…”
방청석에는 해군대신 사이고우 쯔구미치(西鄕從道·대장)와 군무국장 야마모도 콘베애(山本權兵衛·소장)가 지켜 보고 있었다.

결국 일본정부는 영국 정부에 공식 사과하는 대신 도우고우를 무능자로 규정 인사조치하기로 결정했다.
며칠 후 군무국장 책상에 서류 하나가 올라왔다. 도우고우를 예편 1호로 하는 함장 인사이동 문건이었다.

야마모도가 결재를 미루고 도우고우를 급히 자기방으로 불러들였다.
“미안하지만 당분간 당신은 연안경비정을 맡아 주길 바란다.”
도우고우는 백의종군 심정으로 경비정정장으로 좌천된 것을 탓하지 않고 충실히 복무했다. 그런 후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함대사령관 이또우 유우코우(伊東祐享·대장)가 청국 북양함대(사령관·丁汝昌·대장)를 격침, 청일전쟁은 일본 승리로 끝났다.
다시 러시아와 전운이 감돌았다. 명치(明治)가 해군대신을 불렀다.

사이고우가 미리 예측하고 야마모도와 협의끝에 새로운 함대사령관에 도우고우를 추천키로 합의했다.
명치가 물었다.
“함대사령관에 누구를?”
명치가 사이고를 응시했다. 사이고는 야마모도에게 눈신호를 보냈다. 즉시 야마모도가 말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예비해둔 인물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누군가?”
”도우고우 헤이하찌로우제독이란 사람입니다.”
“그런가. 그럼 그렇게 하지.”
그 결정이 군부를 좌우하는 육군쪽에 알려졌다.
육군이 적극 반대하고 나섰다. 반대진정서를 명치에게 보냈다. 다음날 명치가 해군대신과 군무국장을 다시 불러들였다.

명치가 진정서를 내밀며 의견을 재차 확인했다. 이번에도 답변은 군무국장이 했다.
“…운이 좋은 사나이입니다. 도우고우는…”
“정말 그런가?”
함대사령관에 끝내 육군쪽 반대를 무릎쓰고 도우고우가 내정되었다.

 일부 해군쪽에서도 구축함함장 당시 영국 상선을 격침시켜 물의를 빚은 사람이 예편은 커녕 함대사령관으로,

대 러시아전의 총지휘관으로 발탁된데대해, 너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도우고우는 군무국장 야마모도가 점 찍어 두었던 인물이었다.

사정위원회에 나왔을 때 보여준 당당함과 책임의식, 그리고 충성심 등에 깊은 감명을 느낀데서였다.
군사전문가들은 도우고우가 러시아 발틱함대를 단번에 수장시킨 것은,

영국 넬슨제독의 ‘丁字’전법을 응용한데서 였다는 분석을 내놓은 바 있다.

작전개시전 전투원들에게 특별히 당부했던 훈시내용도 비슷했다.
일본 해군제독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은 대개 카고시마(鹿兒島) 출신이었다.

러일전쟁 당시 해군대신(西鄕從道·대장) 군무국장(山本權兵衛·대장·수상), 청일전쟁시 함대사령관(伊東祐享·원수) 도우고우(東鄕平八郞·원수) 등이 같은 고향이었다.
도우고우는 인재였다. 1921년 11월 런던에서 세계해군군축회의가 열렸다.

도우고우는 “일본은 주력함정을 최소한 미·영의 70%선은 되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 그나마 60%선을 관철했다.

그 자리에서 도우고우는 해전(海戰)을 계량적으로 파악한 방정식을 예로 들었다.

즉 기본적으로 동적 전력은 정적 병력의 2승(乘)에 비례한다고 설명했다.

정적비율의 10:7 내지 10:6은 실제로 전투를 교환할 동적 전력으로 행하게 되면, 100:49 내지 100:36으로 된다고 풀이했다.

따라서 전력이 3분의 1까지 격차가 벌어지면 다음과 같은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포격전을 교환하게 되면 일정시간 후엔 열세쪽은 전멸하게 되며,

우세쪽은 당초 전력의 80% 가량을 보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가지고는 전투를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세계해군군축회의에서 불과 60%만을 얻게된 일본 해군력은 어디서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인지를 두고, 다시 방정식을 내놓았다.
즉 전투력은 함대의 선복량, 함포문수 등 유형적 요소와 전투원 사기, 전통, 전략전술, 운용능력, 지휘관의 두뇌 등 무형적 요소 등을 2승한 것이라고 거듭 설명했다.

무형적 요소를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교육과 훈련을 부단히 실시해야하며,

가령 ‘10’을 가진 적을 상대한다고 하더라도 ‘5’를 가지고도 승산이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어떻든 도우고우는 일본전쟁사에 남다른 족적을 남긴자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영국본토함대사령관 죤·트베이 대장

 

트베이 제독은 2차대전시 독일함대주력을 격침시킨 이름난 군인이었다.

그는 평소 비록 적일지라도 사력을 다했을 경우, 경의를 표해야 하는 것이 무인(武人)의 도리라고 말했었다.

이율배반적인 논리이지만 전쟁이란 서로가 생사를 걸고 적이되어 싸울 수 밖에 없기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1942년 3월 지중해에서 트베이제독이 독일 순양함이 함기(艦旗)를 마스트에 올린 채로 서서히 물속으로 잠기는 것을 보고,

거수경례를 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1940년 11월 독일 해군이 진수시킨 배수량 4만 2,000톤에 15인치 8문, 속력 30놋트인 거대전함 비스말크호가 1941년 5월 22일 노르웨이 벨겡해역에 위용을 드러냈다.
영국 해군은 세계해군 강국답게 독일 비스말크호를 반드시 격침시켜야만 체면이 설 수 있었다.
그린랜드와 아이슬란드 사이 덴마크해역에서 5월 24일 영국 순양함 훗드호와 전함 프린스·오브·웰즈호가 협공을 폈지만,

되려 훗드호가 격침당하고, 웰즈호가 대파되었다.

비스말크호도 곳곳에 포탄을 맞아 수리를 위해 프랑스 방향 산나젤항으로 함수를 돌렸다.

영국 해군은 총력을 다해 추적했다. 동원된 함정만도 전함 8척, 항모 2척, 중순양함 4척이었다.
5월 27일. 트베이 제독이 타고 있는 기함 킹·죠지5세호와 전함 르드니호도 가세했다. 연료가 거의 바닥나고,

게다가 그 인근해역은 독일공군 위력권이었다. 오전 8시 47분 르드니호에서 발사하는 초탄이 비스말크호를 향해 불을 뿜었다.

1분 뒤 킹·죠지5세호가 포문을 열었다. 이미 함미쪽에 어뢰에 명중, 이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도 비스말크호는 8시 50분께 다시 적극 반격에 나섰다.
킹·죠지5세호 함교에서 영국함대사령관 트베이 제독이 쌍안경에 의지, 해전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옆에 있는 포술장이 독일 비스말크호의 함포발사 섬광을 관측해 ‘55초’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트베이 제독은 ‘38센치 포탄이 횡복(橫腹)으로 명중하는 정확한 시간을 어렵구나”하며 웃었다.

영국함대는 모든 함포를 집중, 1만 미터까지 적과 거리를 좁혔다.
전함의 주포가 수평사격으로 바뀌었다. 어뢰 공격도 병행했다. 그래도 전함 비스말크호는 끄덕하지 않았다.

드디어 오전 10시 40분 명중탄이 작열했다. 비스말크호는 좌현으로 기울어 횡전(橫轉)을 거듭, 최후를 맞았다.

다만 폭발은 면했다. 트베이 제독의 함대술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그는 비록 적이지만 사력을 다한 적의 함정 침몰 광경을 바라보며, 거수경례, 노고를 위로하는 아량을 보였다.

영국해전사는 트베이 제독이야말로 해군의 체면을 지켰다고 써두었다.

 

일본육군교육총감 와다나베 죠타로우 대장(渡邊錠太郞)

 

와다나베는 군인칙어(軍人勅語)에 나와 있는대로 “군인은 세론에 현혹되지말고, 정치에 휩쓸리지 않는 것이 본분이다.”

“그러나 군인도 사회일원이므로 명분대로 행할 수 없는 부득이한 경우도 있다.”
1934년에서 35년사이 발표된 ‘천황기관설(天皇機關說)’을 둘러싸고 사회가 소용돌이 칠 무렵이었다.

와다나베는 이를 적극 반대했다. 그를 평소 군내부에서는 박학다재한 문학박사로까지 일컬었다.

그래서 어설픈 지식을 자랑하는 군장교들을 대할 때마다 고소(苦笑)를 지었다.

어느날 기회를 얻어 도쿄대 미노베 타쯔키치(美濃部達吉) 교수가 주창한 ‘천황기관설’에 대한 반박 훈시를 했다.

바로 나고야(名古屋) 주둔 육군 3사단 장교들을 모아놓고 했다.
그는 말하기를 “일본의 주권은 나라에 있는지? 아니면 천황에게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순수한 학문적 문제일 뿐이다.

결단코 일본의 주권은 천황에게 있다.”
“만약 천황을 일개 기관으로 본다면, 순사(순경)와 격이 같을 것이다. 이는 불경죄를 범하는 행위이다.”고 역설했다.
육군은 와다나베의 이론을 받아들이고, 미노베 교수의 논리를 배척했다.

 “육군은 천황자체가 국가이고, 군을 지휘하는 대원수이고, 상사와 부하,

명령과 복종을 규율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한편에서는 와다나베 대장 훈시 후 젊은 장교들의 암살위협이 고조되고 있었다.

바로 ‘2·26사건(군개혁)’의 진원지로 자리잡았다. 그 무렵 미노베교수는 파면되었다.
와다나베는 겉으로는 초연, 군 현대화를 위한 교육과 훈련에 전념했다. 그는 아이치현(愛知縣) 출신이다.

드물게도 초등학교 졸업 학력으로 육사를 나와 육대를 수석으로 졸업해 화제를 모았다.
러·일전쟁때는 노기마레스케(乃木希典·대장)가 지휘했던 육군 3군단 장교로 여순요새 함락작전에서 부상당하기도 했다.

그는 끝내 ‘천황기관설’때문에 암살당했다.

 

영·미 연합군 부사령관 하룰드·알렉산더 대장

 

2차대전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영국군과 미군이 연합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영국군이 연합군 부사령관을 맡았다.

그가 바로 알렉산더 대장이었다.
1942년 11월초 미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했다. 때문에 영국군은 고립무원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승리마저 기대되었다. 그런데 미군은 대부분 신참인 풋내기였다. 전혀 전투경험과 군대생활 경험이 없는 오합지졸 같았다.

그저 영국군 꽁무니만 뒤쫓아 다니기 일쑤였다. 때문에 연합작전은 말뿐이었다.

상호간 불신감만 증폭되고, 날이 갈수록 균혈이 심화돼 갔다. 알렉산드 장군이 보다못해 바늘로 찌르듯, 한마디했다.
“출신모체와 전통만 과시하는 행위는 일반사회나 학교에서나 있을 수 있다. 여기는 생사가 엇갈리는 전쟁터다.

시기, 갈등, 공다툼은 모두 무용지물이다. 오직 서로 협력해 연합전선을 펴 전투에 몰입하는 일이다.”
영국 제8군은 리비아에서, 영·미 연합군은 알제리에서 각각 진격, 튀니지 중부 산악지대를 거쳐 해안선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그리고 미군의 한 단일부대는 인근 카세리누 고지에서 독일군의 강력한 반격작전에 휘말렸다.
그 전투에서 속칭 ‘호랑이 새끼’로 불리어온 미군 제1기갑사단 3개 중대중 2개 중대가 괴멸되고, 2,000명 이상이 포로가 되었다.

그러자 전세를 만회하기 위해 미군은 B17폭격기편대를 투입, 카세리누고지 일대를 맹폭했다.
미군폭격은 어찌된 셈인지 그 지역에서 150㎞나 떨어진 북방 아랍인 집단거주 지역에 폭탄이 떨어져 쑥밭이 되어 버렸다.

예상치 않은 사태가 발생한 것이었다. 그 상황을 보고 받은 루즈벨트 미 대통령은 “미군병력만으로 전투를 하는가?”하고,

강한 불쾌감을 나타냈다. 그 사태를 원만히 수습한 책임자가 영·미 연합부사령관 알렉산드 대장이었다.

그로인해 미군의 인기도 대단했다.
버마를 비롯 단켈, 북아프리카 전선을 두루 누빈 알렉산드 장군은 미군의 행동을 보고 끝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미군은 영국군에 비해 정신적인 면이나 단체행동면에서 해이돼 있는 것 같다고 탄식했다.

그렇지만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연합체제에 악영향을 끼칠까봐였다.

그는 재차 말하기를 “군인은 무인(武人)답게 행동해야 하며, 더더욱 고위장교는 외교관이기도 하다.

때문에 때와 장소 또는 자신의 위치를 잘 분별해 말하거나 행동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거기엔 평소 남다른 수양과 교양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역시 ‘영국 신사’다운 장군이었다는 평가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