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세계바둑의 하늘로 날아오를 젊은 龍들

醉月 2009. 7. 2. 09:00

바둑계 겁없는 신예들의 전쟁 세계바둑의 하늘로 날아오를 젊은 龍들

 

⊙ ‘황소 삼총사’ 박영훈·원성진·최철한은 신예 그룹에서 밀려나
⊙ 2007년 제4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서 ‘끝내기의 神’ 이창호에 역전승한 강동윤
⊙ ‘전투바둑의 達人’ 조훈현 9단을 매료시킨 神童 김지석
⊙ 입단 첫해에 세계대회(LG배 세계기왕전) 결승무대까지 치고 올라간 ‘괴물초단’ 박정환

孫鍾洙 <월간바둑> 편집장
⊙ 1958년 서울 출생.
⊙ 월간 <바둑세계> 편집장, 주간 <바둑361> 편집국장, <일간스포츠> 농심 신라면배 관전기자 역임.
⊙ 現 세계사이버기원 사업본부장.


지난 2월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에서 열린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전 2국에서 이세돌 九단(왼쪽)과 중국의 구리 九단이 치열한 수싸움을 벌이고 있다.
 黃河(황허) 상류에 龍門(용문)이라는 계곡이 있는데 이곳을 오르면 용이 된다고 하여 수많은 물고기가 모여들었다. 그러나 근처에 흐름이 매우 빠른 폭포가 있어 좀처럼 계곡을 오르지 못했다.
 
  <後漢書>(후한서) ‘李膺傳(이응전)’에 나오는 ‘登龍門(등용문)’이야기인데 훗날, 이 말은 과거급제를 뜻하게 됐고, 오늘날에는 난관을 뚫고 출세의 문턱을 넘어서는 일을 상징하게 됐다.
 
  21세기 세계 프로바둑을 호령하는 한국에도 등용문이 있다. 바로 서울 성동구 홍익동에 자리 잡은 재단법인 한국기원이다. 이곳에 몰려든 수많은 물고기 중 매년 열 마리의 물고기가 거센 폭포의 물살을 거슬러 ‘프로 입문’의 계곡을 오른다.
 
  그러나 험한 관문을 뚫고 한국기원의 프로가 된 신예라 해도 바로 용이 되어 승천하지는 못한다. 입단을 통과한 신예들 앞에는 또 하나의 용문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여의주를 움켜쥐고 하늘 높이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입단의 시련보다 훨씬 가혹한 경쟁에서 승자가 되어야 한다.
 
  2009년 한국바둑, 나아가 세계바둑의 하늘로 날아오를 젊은 용은 과연 누구일까.
 
 
  구-리(구리-이세돌) 시대의 개막
 
1985년생 동갑의 '황소 삼총사'가 나란히 앉아 실전보를 연구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영훈 9단, 최철한 5단, 원성진 5단.

  韓中日(한·중·일) 3국의 강자들이 ‘돌부처’ 李昌鎬(이창호)의 뒤를 쫓는 시대는 끝났다. 지금은 ‘구-리(구리-이세돌) 시대’. 조금 유연하게 말하면 한국의 이세돌과 중국의 구리(古力)가 대표하는 1980년대 출생자들의 시대다. 그것은 2009년에 세계타이틀을 획득한 프로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된다.
 
  현존하는 세계타이틀은 모두 8개. 최근 비씨카드배 월드 챔피언십(한국 주최) 초대 우승으로 3억원의 상금을 챙긴 구리가 춘란배(중국 주최), 도요타덴소배, 후지쯔배(일본 주최), LG배(한국 주최)까지 5개의 타이틀을 움켜쥐었고 李世乭(이세돌)이 삼성화재배(한국 주최), 崔哲瀚(최철한)이 잉씨배(대만 주최)를 차지했으며 이창호가 중환배(대만 주최)를 차지했다. 1975년생 이창호를 제외하면 모두 1980년대 출생자들이다.
 
  구리가 8개의 타이틀 중 5개나 가지고 있으니 2009년만큼은 ‘구-리(구리-이세돌)시대’가 아니고 ‘구리 시대’ 아니냐는 말도 있다. 사실 바둑계의 호사가들이 하고 많은 표현을 제쳐두고 ‘구-리 시대’라고 명명했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구-리 시대’는 ‘구리 시대’ 또는 ‘구리-이세돌 시대’의 함축이다. 2009년 실적으로 볼 때 이들 라이벌의 힘겨루기는 양립 구도가 아니라 어느 정도 구리 쪽으로 기울어졌다는 게 호사가들의 속내라는 얘기다.
 
  어쨌든 세계 타이틀 8개 중 7개를 1980년대 출생자들이 가지고 있으니 이들이 세계바둑의 중심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중 양국 모두 1980년대 출생자들의 각축전이 최정상부터 산기슭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개월 동안 한국 랭킹 1위를 질주해온 이세돌은 5년 전 이창호가 그랬던 것처럼 1차 ‘등용문’을 통과한 모든 프로의 목표다. 그중에서 ‘공공의 적 쎈돌(이세돌)’을 외치며 턱밑까지 따라붙은 1985년생 ‘황소 삼총사’ 朴永訓(박영훈), 최철한, 元晟溱(원성진)은 더 이상 신예가 아니다.
 
  최철한(입단 12년차, 2009년 제6회 잉씨배 우승)과 박영훈(입단 10년차, 2007년 제20회 후지쯔배 우승)은 이미 세계 정상을 경험했다. 입단 11년차 원성진은 세계 제패 기록은 없지만 동년배 중 가장 먼저 세계대회 4강(2003년 제7회, 2004년 제8회 LG배)에 올라 이창호와 자웅을 겨루었다.
 
  또 2009년 韓中(한중)천원전에서 세계 최강으로 꼽히는 구리를 2 대 0으로 격파했으며, 최근 한국 랭킹 1위 이세돌을 상대로 연승을 거두는 등 삼총사의 한 멤버임을 입증했다.
 
 
  ‘거물 신예’ 강동윤
 
  황소 삼총사의 거센 돌진은 박영훈보다 1년 앞서 후지쯔배 정상을 밟고 이듬해 이창호와 중환배를 다툰 朴正祥(박정상·25)의 영광을 순식간에 덮었으며 2003년 제16회 후지쯔배 준우승으로 맹위를 떨쳤던 ‘소년장사’ 宋泰坤(송태곤·23)의 미래까지 날려버렸다.
 
  원익배 준우승을 두 차례 기록하며 정상을 꿈꾸었던 白洪淅(백홍석·23)도 2007년 한국바둑리그 우승팀 영남일보의 에이스 李映九(이영구·23)도, 이창호로부터 국수를 물려받은 尹畯相(윤준상·22)도 어느새 주변인으로 밀려났다.
 
  황소 삼총사의 폭주와 꼬리를 물고 등용문을 넘어오는 새내기들 때문에 입단 10년을 넘어서거나 나이 스물다섯을 넘긴 프로들은 더 이상 신예 대접을 받을 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돌부처’와 ‘쎈돌’, ‘황소 삼총사’의 뒤를 이을 한국 바둑의 희망은 누구인가.
 
  전문가들은 1989년생 姜東潤(강동윤)과 김지석을 차세대 선봉으로 지목하고, 그 뒤로 1990년 이후 출생자인 朴廷桓(박정환), 姜儒澤(강유택), 韓雄奎(한웅규) 등 입단 초년병들이 맹렬하게 따라붙을 것이라고 예견한다.
 
  차세대 선두주자로 주목받는 강동윤은 1989년생으로 이제 막 나이 스물을 넘어섰고 2002년에 프로 관문을 돌파했으니 입단 7년차. 그는 신예가 분명한데 어쩐지 이 청년에게는 신예라는 수식어가 어울리지 않는다.
 
  겉모습이 노숙해서? 아니다. 얼굴만 봐서는 이제 고등학교에나 다닐 듯한 10대 청소년이다. 강동윤이 도무지 신예 같지 않은 이유는 입단 이후 7년 동안 쌓아온 기록이, 그 결과로 차지한 현재의 위치가 신예의 것이 아닌 거물의 것이기 때문이다.
 
  강동윤은 바둑돌을 처음 만진 어린 시절부터 ‘주머니 속의 송곳’이었다. 1989년 1월 23일 서울에서 아버지 강상훈(54· 공인회계사)과 어머니 이욱(50) 슬하의 2남 중 막내로 태어난 강동윤은 세 살 위의 형 동우를 따라 바둑학원을 다니다 바둑을 배우게 되었는데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여느 아이들과 다른 재능을 드러냈다.
 
  전국어린이바둑대회에 나가 우승을 차지했고, 최강부를 3회나 휩쓸었다. 초등학교 2학년이 쟁쟁한 고학년들을 누르고 최강부를 세 차례나 석권한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다.
 
  이때만 해도 집에서는 ‘프로기사 강동윤’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1년 정도 바둑돌을 놓다가 우연히 나간 어린이유단자바둑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자 비로소 아이의 특별한 재능을 의식하고 프로의 길을 찾아 나섰다.
 
 
  성공이 보장된 아이
 
천원전 결승 5번기 최종국서 승리한 강동윤(왼쪽)이 이세돌과 복기하는 장면. 강동윤은 지난해 마인드스포츠게임즈 개인전 우승 이후 폭발적 상승세를 계속했다.

  강동윤의 첫 번째 프로수업은 영등포 화랑기원, 金鍾秀(김종수) 6단으로부터 시작됐다. 아마추어 최강자로 군림하다 강동윤이 태어난 해에 용문에 오른 김종수 6단은 프로 중에서도 손꼽히는 ‘속기의 달인’이었다. 이때 김종수 6단에게 받은 수백 판의 지도대국이 강동윤의 기풍에 큰 영향을 끼쳤다.
 
  “동윤이는 순발력이 뛰어나고 승부의 끼가 특히 강한 데다 어린아이답지 않게 침착했다. 전문기사로서 성공이 보장된 아이였다.”
 
  강동윤은 김종수 6단의 말 그대로 성장했다. 바둑 입문 이후 성공한 스타들의 이야기에 으레 따라붙는 그 흔한 좌절 한 번 없이 엘리트 코스를 질주했다.
 
  초등학교 4학년 세계청소년바둑대회 주니어부 우승을 비롯해 이창호배, 오리온배, 삼신생명배 등 이름 있는 어린이바둑대회를 휩쓸고 한국기원 연구생을 거쳐 초등학교 5학년 때 프로육성의 명문 ‘권갑용 바둑도장’의 문을 두드렸다.
 
  權甲龍(권갑용) 7단은 ‘승부’를 말할 때는 평범하지만 ‘교육’을 말할 때는 눈빛까지 달라지는 최고의 지도자였다. 그의 말이다.
 
  “처음 테스트할 때 동윤이의 스타일은 일본의 다카가와 가쿠(高川格) 9단 같은 안정형이었다. 모든 면에서 미숙한 시기에 이런 스타일의 바둑을 두면 곧 한계점에 이른다. 그것을 교정하기 위해 일부러 거친 스타일의 아이들을 스파링 파트너로 붙여주었는데 동윤이의 적응력은 놀라웠다. 수읽기는 한발 앞서 도장에 입문한 홍석이, 영구, 준상이보다 떨어지는 것 같았는데 어느 순간 깨달은 것들을 자기 스타일로 소화하는 능력은 발군이었다.”
 
  강동윤은 권갑용 7단의 맞춤형 교육을 마른 솜 물 빨아들이듯 받아들여 도장 입문 2년 만에 제92회 일반인 입단대회를 통과했다. 8승 3패, 2위 성적이었지만 기량은 연구생 1조 1위를 유지해 입단후보 0순위로 꼽혔다.
 
  입단 후 2년간 각 기전 본선무대를 오르내리며 숨고르기를 하다 2005년 제5기 오스람코리아배 신예연승최강전, 제9기 SK가스배 신예 프로 10걸전에서 우승. 刀山劍林(도산검림)의 경쟁 속에서 제7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국가대표로 선발됐다. 신예 최강자의 탄생을 알리는 첫 번째 폭발이었다.
 
 
  ‘돌부처’와 ‘황소 삼총사’를 밀어내다
 
  첫 폭발은 2년 뒤 더 큰 폭발로 이어졌다. 2007년 제4기 전자랜드배 왕중왕전 우승으로 첫 번째 메이저 타이틀을 기록했는데, 종반 역전승으로 물리친 상대가 ‘끝내기의 神(신)’으로 불리는 이창호였다.
 
  2008~2009년에 걸쳐 새로운 1인자 이세돌과 펼친 하이원배 명인전, 박카스배 천원전 10번기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었다.
 
  명인전은 국내 상금 랭킹 1위(우승 1억원)의 기전이고 박카스배는 ‘젊은 용’들의 ‘여의주 쟁탈전’으로 불리는 기전이었다. 여기서 1승 3패로 명인을 놓치고 3승 2패로 천원을 따낸 강동윤은 바둑저널로부터 ‘황태자’란 별명을 얻었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제1회 세계마인드스포츠게임 바둑 부문 개인전 8강전에서 중국의 1인자 구리를 꺾고 승승장구, 금메달을 획득했고 그 뒤로 중·일 정상급 프로들을 상대로 한 제10회 농심신라면배 본선에서 파죽의 5연승이 이어졌다.
 
  돌부처, 쎈돌, 황소 삼총사들이 얽힌 정상의 각축전에 새로운 경쟁자가 들어섰음을 알리는 대폭발이었다.
 
  2009년 4월 3일, 매월 한국기원이 발표하는 한국 프로바둑 랭킹을 지켜본 팬들은 충격에 사로잡혔다. 이세돌이 18개월 연속 1위를 굳히리라는 것은 익히 짐작하고 있었으나 ‘한국 프로바둑의 얼굴’ 이창호가 3위로 밀려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창호가 물러난 자리에는 ‘타도 이세돌’의 깃발을 들고 정상 문턱까지 올라선 황소 삼총사의 그 누구도 아닌, 그보다 앳된 얼굴의 강동윤이 앉았다.
 
  이창호가 제6회 응씨배 결승 5번기(대 최철한)에서 1승 2패를 기록하고 제1회 비씨카드배 월드바둑 챔피언십 16강전에서 중국의 신예 朴文堯(박문요)에게 패해 랭킹 점수 9609점으로 주저앉는 사이, 3월 성적 4승 1패로 13점을 추가한 강동윤이 9617점을 기록하며 2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시간은 강동윤 편이다
 
  ‘거물 신예’ 강동윤의 강점은 무엇일까. 한때 한국 프로바둑 4천왕의 한 자리를 노리던 강자였으며, 이제는 승부보다 유려한 TV 해설로 인기 높은 양재호 9단의 말은 이렇다.
 
  “강동윤은 曺薰鉉(조훈현), 이세돌의 계보를 잇는 감각파다. 행마가 빠르고 실리에 밝으며 타개와 공격에 강하다. 스타일은 좀 다르지만 승부처에서 드러나는 감각과 기질은 조훈현, 이세돌과 흡사하다. 우연한 행운이라도 이창호를 상대로 종반 역전승을 이끌어내는 ‘한방’은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가끔 쉬운 승부를 터무니없이 놓치는 단점이 있고, 국제전 경험도 부족하지만 그런 것들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 시간은 강동윤의 편이다.”
 
  농심 신라면배 5연승, 1인자 이세돌과 가진 10번기 大會戰(대회전)으로 야망의 밑그림을 그린 강동윤은 다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2009년 5월 현재 강동윤의 종합 전적은 9승 6패. 정상을 꿈꾸는 초일류의 성적이라고 하기에는 겸연쩍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부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4월의 마지막 승부에서 일본의 희망 이야마 유타(井山裕太)를 꺾고 제22회 후지쯔배 8강에 올라선 그의 시선이 어느 곳을 향하고 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한 놈 발견했다”
 
  1995년 11월 27일, 바둑TV 개국기념으로 戰神(전신) 조훈현 9단과 광주에서 올라온 여섯 살짜리 바둑 신동의 4점 지도대국이 펼쳐졌다. 이 지도대국에서 6집을 이긴 ‘싸움의 神(신)’은 패한 여섯 살짜리 바둑 신동을 다음과 같이 극찬했다.
 
  “어린 녀석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것 같아서 두고 봤더니 과연 그렇더라. 이창호 이후로 오랜만에 한 놈 발견했다.”
 
  조훈현 9단의 마음이 더욱 흡족했던 이유는 가르침을 받은 바둑 신동의 기질이 제자 이창호와는 전혀 다르게 조훈현 자신을 닮았기 때문이다.
 
  ‘싸움의 신’을 매료시킨 여섯 살짜리 바둑 신동은 그 평가를 저버리지 않았다. 복잡하게 뒤얽힌 사정이 있어 조훈현 9단의 두 번째 내제자(스승의 집에서 함께 생활하면서 가르침을 받는 제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권유대로 서울로 올라와 프로수업을 받았고, ‘林宣根(임선근) 바둑연구실’과 ‘권갑용 바둑도장’을 거쳐 2003년 11월 제97회 일반인 입단대회를 통과했다(9승 1패, 1위).
 
  한국 프로바둑 최고의 무대, 한국바둑리그를 2년 연속 제패한 <영남일보>의 에이스 金志錫(김지석)이 그때의 여섯 살짜리 바둑 신동이다.
 
  김지석은 1989년 6월 13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몇 달 지나지 않아 아버지 김호성씨가 전남대 교수로 부임하는 바람에 광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두 살 위의 형 우석을 따라 세종바둑학원을 드나들다 바둑을 배우게 됐는데, 처음에는 너무 어리다고 난색을 표하던 김정열 원장(현재 서울 골든벨 바둑학원 원장)도 곧 아이의 재능을 발견하고 심혈을 기울여 지도하기 시작했다.
 
  김지석은 주위가 산만한 보통 아이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아이였다. 사활문제를 내주고 “다 풀 때까지 자리에서 꼼짝 말라”고 하자 화장실이 바로 옆인데도 자리에 앉은 채 오줌을 지릴 만큼 집중력이 강했다.
 
  바둑돌을 손에 쥔 지 1년 만에 1급이 됐고, 지역의 어린이바둑대회 유치부에서 우승했다. ‘바둑은 수읽기 싸움’이라는 지론을 가진 김정열 원장이 사활 훈련에 집중한 탓인지 유난히 돌 따먹기를 좋아했는데, 세종바둑학원을 다닐 때 김지석의 별명은 ‘따먹기 대마왕’, ‘걸어다니는 현현기경’이었다. 깊은 수읽기를 바탕으로 한 전투기풍은 이때 형성됐다.
 
여섯 살 때 ‘싸움의 神’ 조훈현 9단을 매료시킨 바둑 신동 김지석의 어린 시절(키 작은 아이). 오른쪽은 현재의 모습이다.

 
  좌절, 방황
 
  거침없이 뻗어오를 것 같았던 김지석의 성장은 서울로 올라오면서 문제를 일으켰다. 초등학교 1학년 무렵에 연구생이 됐으나 스승 임선근 9단이 “분명히 재주는 보이는데 이상하게 늘지 않는다”고 우려할 만큼 제자리걸음을 반복했다.
 
  서울 유학 2년의 와중에 조훈현 9단의 집에서 다시 한 번 지도대국의 기회를 가졌으나 내제자의 연은 맺지 못했다. 조 9단 내외가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는데다 대입을 앞둔 고2, 고3 연년생 자녀가 있고 낡은 집의 신축을 앞둔 처지라 도저히 집안으로 아이를 받아들일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번째 지도대국을 가졌던 조훈현 9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을 매료시켰던 다이아몬드의 원석처럼 빛나던 아이의 기질이 처음 대면했던 때보다 오히려 퇴색했기 때문이다. 김지석은 당시의 자신을 이렇게 회고했다.
 
  “처음은 잘 생각나지 않지만 중간에는 그만두고 싶었던 적이 많았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오랫동안 바둑을 둬서 그런지 바둑이 재미없어졌고, 친구들과 노는 게 더 좋았다.”
 
  김지석은 그 시절의 부진을 한순간 찾아오는 무료함 정도로 얘기했지만 아버지 김호성 씨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는 지석이의 환경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서울에서 연구생 8~9조를 오르내리던 김지석은 초등학교 3학년 때 다시 광주로 내려갔다.
 
  아버지는 처음 바둑을 배웠던 세종바둑학원에 지석이를 보내 낯익은 아이들과 어울리게 했다. 마음이 편해졌기 때문일까. 연구생 10조까지 곤두박질쳤던 기량이 그때부터 서서히 고개를 쳐들었다. 광주와 서울을 오가며 연구생리그에 참여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 연구생 4~5조까지 치고 올라서자 아버지는 다시 지석이의 가방을 꾸렸다.
 
  서울 생활의 재도전은 ‘권갑용 바둑도장’에서 시작했다. 그리고 3년 뒤 입단의 꿈이 실현됐다. 14세 입단은 동갑내기 강동윤보다 1년 6개월 늦고 조훈현(62년 9세), 이창호(86년 11세), 이세돌(95년 12세), 최철한(97년 12세)과 비교할 때 거리가 있다.
 
  그렇지만 프로보다 더 강하다는 연구생 120명(1~10조 각 12명)이 치열한 경쟁을 벌여 연령제한 18세를 넘기지 않고 입단만 해도 다행이라는 요즘 추세를 생각하면 결코 늦은 나이는 아니다.
 
  어린 시절 아마바둑대회 최연소 우승(11세)의 신기록을 수립하며 7개의 대회를 휩쓴 ‘어린왕자’ 박영훈도 14세 입단이다. 김지석과 비슷한 마음고생으로 번번이 입단에 실패해 8전9기의 입단 진기록을 세웠으니 등용문 통과의 액땜이라면 4년 선배 박영훈이 한 수 위인 셈이다.
 
  그런데 박영훈이 프로 입문과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데 비해 김지석의 입단 이후는 조용했다. 바둑 신동으로 주목받았던 김지석의 입단 초년생 시절은 평범했다.
 
  2004년 20승 14패, 2005년 35승 21패. 이때까지 눈에 띄는 기록이라곤 제10회 삼성화재배 본선 진출뿐이었다. 김지석은 와일드카드로 출전한 2006년 한국바둑리그부터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2006년 44승 26패, 2007년에 한국 랭킹 20위 안으로 진입했다. 종합성적 109전 78승 31패로, 일류의 잣대인 50승 이상 70% 승률을 가뿐하게 넘어섰다. 2008년에 37승 24패로 프로 랭킹 20위권 밖으로 밀려났으나 2009년 들어 16위까지 올라섰다.
 
  김지석에게는 징크스가 있다. 성적은 나쁘지 않은데 정상에 올라선 선배들과 같은 훈장(타이틀 획득)의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2007년 국내 최대기전인 강원랜드배에서 4승 2패로 선두에 나섰다가 뒷심 부족으로 2패를 추가한 채 물러섰고, 지난해에는 하이원배로 명칭이 바뀐 무대에서 동갑내기 강동윤이 이세돌과 명인을 다투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런데도 많은 바둑家(가)의 관측자들이 김지석을 포기하지 않는 건 그의 재능 때문이다. 안목이 높은 전문가들은 결과보다 과정을 더 유심히 들여다보는데, 치열한 전투 의지가 꿈틀거리는 김지석의 바둑에는 그런 ‘가능성’이 반짝거린다.
 
  김지석은 2008년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지명해준 <영남일보>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2009년 현재 15승 1패의 고속질주, 2년 연속 LG배 세계기왕전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 팬들도 잊지 않았다. 김지석은 천하의 조훈현이 인정한 ‘블루칩’이니까.
 
 
  선배들이 꼽는 ‘최고 유망주’ 박정환
 
올해 1월 바둑TV 스튜디오에서 펼쳐진 제4기 원익배 10단전 장면. 오른쪽이 박정환이다. 한국기원의 젊은 프로들은 박정환을 ‘가장 유망한 신예’로 꼽았다.

  2007년 1월 초 인터넷 바둑 사이트 사이버오로(www.cyberoro.com)는 한국기원의 젊은 프로 10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가장 유망한 신예’를 지목하는 이 설문조사에서 한 소년이 압도적인 득표로 ‘최고 유망주’에 올랐다.
 
  그런데 23%의 득표율로 2위 강동윤(21%), 3위 김지석(13%), 4위 이영구(11%)를 따돌린 소년의 이름이 팬들은 물론, 바둑 관계자들에게도 생소했다. 朴廷桓(박정환)? 박정환이 누군데 강동윤, 김지석보다 더 유망하다는 거야?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박정환은 2006년 5월 제105회 입단대회를 통해 갓 입단한 새내기였고, 2007년 하반기 성적도 7승 5패로 지극히 평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본 선배들은 박정환을 지목했다.
 
  같은 해 11월 15일. ‘2007 엠게임 마스터스 챔피언십’ 결승 대국이 열린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막 대국을 끝낸 소년이 안경을 고쳐 잡으며 환하게 웃었다. 신예 최강그룹의 1인으로 꼽히는 김지석을 2승 1패로 꺾고 이창호 이후 14년 만에 탄생한 14세 챔피언. 초등학생처럼 앳된 소년의 이름은 박정환이었다.
 
  박정환을 ‘최고 유망주’로 지목한 선배들은 가장 큰 이유로 ‘어린 나이’를 꼽았다. 박정환의 13세 입단은 이창호, 이세돌, 최철한의 입단보다는 조금 늦지만 동등하게 봐줄 수 있는 기록이라는 것이다.
 
  최근의 입단대회는 갈수록 문이 좁아져 통과자의 기량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연구생 1, 2조쯤 되면 당장 프로무대에 올려놓아도 상위 50위 안에서 살아남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박정환의 나이가 어리다는 것 하나만으로 선배들이 ‘최고유망주’로 꼽는 건 아니다. 스승 권갑용 7단의 회고다.
 
  “정환이는 원생 시절 柳時熏(류시훈) 9단(이창호 9단의 소년기 라이벌로 일본기원에서 입단. 일본 프로기전 서열 5위 천원전 3기 연속 제패, 서열 6위 왕좌전 우승)과 호선 연습바둑에서 3연승을 거둔 적이 있다. 또 중국의 네웨이핑 도장과 합동 수련회를 가졌을 때 그쪽 최강의 신예들과 내기를 벌였는데 6 대 4로 우세했다. 기질이 강하다. 상대를 불안하게 하는 야수의 본능 같은 기세를 가졌다. 근성이 대단해서 조훈현, 이세돌의 계보를 잇는 승부사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스승 권갑용 7단의 예상은 2009년 1월 18일 한국기원 바둑TV 스튜디오에서 펼쳐진 제4기 원익배 10단전 결승 2국으로 이어졌다. 14세 챔피언의 영예를 안겨준 ‘2007 마스터스 챔피언십’은 시니어와 일부 청년 프로들이 불참한 제한 기전이었는데 십단 쟁취로 나이 16세, 입단 2년 8개월 만에 공식 메이저기전 타이틀을 획득하는 진기록을 세운 것이다.
 
  2009년 한국 랭킹 19위에 이름을 올려놓은 박정환은 본선 2회전에서 랭킹 4위 원성진을 밀어냈고 4강전에서 랭킹 2위 이창호를 무너뜨렸다. 결승에서는 랭킹 13위 백홍석을 2 대 0으로 누르고 우승했다.
 
 
  볼 때마다 성장하는 박정환
 
제10회 LG배 시상식에 참석한 우승자 구리(오른쪽)와 준 우승자 천야오예.

  입단 후 출전 첫해에 세계대회(LG배 세계기왕전) 결승까지 올라가 ‘괴물 초단’이란 별명을 얻었던 韓尙勳(한상훈)은 박정환의 기질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은 실력만 느는 게 아니라 성적도 올리는 단계에 와있다. 수읽기의 깊이와 속도, 전투력, 상대를 끊임없이 압박하고 굴복을 강요하는 스타일은 이세돌 9단과 비슷하다.”(<월간바둑> 2008년 신년호 정용진의 新기사론 발췌).
 
  박정환의 강점은 나이가 어린데도 스스로의 장단점을 잘 알고 그 발전과 보완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것이다. 가까운 거리에서 늘 지켜보는 선배, 동료들조차 “볼 때마다 키가 부쩍부쩍 큰다”며 혀를 내두른다.
 
  오늘도 박정환의 걸음은 ‘왕십리연구회’를 향하고 있을 것이다. 대국시간을 제외하고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항상 찾아가는 이곳에는 朴正祥(박정상), 최철한, 원성진, 김지석 같은 젊은 강자들이 모여든다.
 
  앞의 세 청년은 한국기원의 젊은 프로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내용을 옮긴 것일 뿐이다. 한국바둑의 유망주는 이밖에도 많다.
 
  연구생 퇴출 직전까지 몰렸다가 입단 도전 15번째에 프로가 된 1988년생 한상훈 3단은 입단 첫해에 LG배 세계기왕전 결승에 올라 이세돌 9단과 자웅을 겨루었다. 또 왕위전 도전자 결정전에 진출해 ‘괴물 초단’이란 별명을 얻었다. 한때 한국 랭킹 10위까지 올라섰으나 지금은 7계단이나 떨어져 김지석의 뒤에 서있다.
 
  언제 어디서 더 유망한 신예가 등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언젠가 가까운 사람들과 저녁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던 이창호 9단이 말했다.
 
  “요즘 초단은 다 무섭죠. 초반 포석부터 끝내기까지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구석이 없는데다 그 친구들은 나를 잘 알고 있는데 나는 그들에 대해서 전혀 모르니까요. 기세도 이때가 가장 좋고 공부도 이때 가장 많이 합니다. 알려지지 않은 새내기들은 다 까다로워요.”
 
 
  알려지지 않은 무서운 신예들
 
  실제로 몇 년째 한국바둑리그에서 실험적으로 신예들을 등용한 팀은 이들이 정상의 강자들을 무너뜨리는 이변을 연출하면서 톡톡히 재미를 봤다. 그 희생자 중 첫 번째 거물이 이창호였다.
 
  2008년 한국바둑리그 신인왕을 다툰 李元道(이원도·20), 柳東完(류동완·20), <영남일보> 우승의 견인차 金炯佑(김형우·20), 姜儒澤(강유택·18)이 모두 20세 이하의 청년이다. 이 중에서 이원도, 김형우가 이창호에게 검은 별(패배를 지칭하는 은어)을 안겨줬고 강동윤은 한국바둑리그 1승을 포함한 4승을 이창호에게 얻어냈다.
 
  컷오프 상금제 기전 개혁의 신호탄으로 상징되는 제1회 비씨카드배도 지금까지 세상에 노출되지 않은 연구생과 신예 프로들의 기량을 엿볼 수 있는 무대였다. 연구생 1조 金庭賢(김정현·18)과 李志賢(이지현·17)이 한·중·일 강자들의 경쟁을 뚫고 본선에 진출했다.
 
  김정현은 64강전에서 이창호와 맞붙어 분패했으나 녹록지 않은 기량을 과시한 뒤 여세를 몰아 4월 119회 일반인 입단대회를 통해 프로의 관문을 돌파했다. 이지현은 64강전에서 중국의 신예 강자 스웨(時越·18·중국 랭킹 11위)를 꺾고 32강전에 진출, 한국기원 연구생의 수준을 세계에 알렸다.
 
  비씨카드배 최대 파란의 주인공은 2008년 4월 프로에 입문한 입단 초년생 韓雄奎(한웅규·19)였다. 64강전에서 중국 신예 강호 저우룽양(周容羊·18·중국 랭킹 9위)을 꺾었고, 16강전에서는 강동윤을 침몰시켰다.
 
  8강전에서 조훈현에게 반집패를 당하지 않았다면 비씨카드배는 첫 대회에 초단우승이라는 대박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한웅규를 행운의 반집으로 밀어내고 8강전에서 중국랭킹 1위 구리와 맞선 조훈현이 반집차로 패해 구리가 초대 비씨카드배 우승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한국과 세계바둑 판도를 양분하고 있는 중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비씨카드배 우승으로 세계바둑 5관왕에 오른 구리는 최근 천야오예(陳耀燁·20)에게 완패하며 천원 타이틀을 잃고 그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이창호, 이세돌은 여전히 나의 목표지만 그들을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이제는 그들을 충분히 알고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게 가장 까다롭고 거북한 상대는 천야오예 같은, 그리고 그 뒤를 쫓아오는 알 수 없는 신예들이다.”
 
  정상의 고민은 다 같다. 노출된 강자는 노출되지 않은 약자를 더 경계한다. 그게 프로의 세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