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는 소설가 성석제가 수많은 이야기를 길어낸 고향 땅입니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상주의 지명은 두 손으로도 다 못 꼽을 정도입니다. 경천대, 공검지, 남장사, 도남서원, 이안천, 침천정…. 공간이나 배경을 넘어 경상도의 투박한 정서까지 따진다면, 고향이 스며들어 있는 작품 숫자는 훨씬 더 많아지겠지요. 그는 아직도 고향의 산천에서 이야기를 줍고 있다고 했습니다. 중학생 때 서울 가리봉동으로 전학했다니 고향을 떠나서 산 날이, 고향에서 산 날보다 몇 배가 더 많지만 말입니다. 한국문화원연합회가 문화체육관광부의 후원을 받아 한식에다 인문학을 접목한 ‘한식×인문학 여행’을 기획하면서 경북 상주로 떠나는 인문여행의 길잡이 역할을 그에게 맡기기로 한 건 탁월한 선택입니다. 게다가 그 여행의 주제가 ‘전통 한식과 인문학의 결합’이니, 지역 고유의 음식에 유독 애정이 깊은 그와는 더 이상 잘 어울릴 수 없겠지요. 첫 장맛비가 촉촉이 내리던 지난달 26일에 고향 땅으로 내려온 성석제 작가는 30여 명의 여행자와 함께 상주여행을 했습니다. 그 여행에 동행해 그가 권하는 음식을 맛보고,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누각에 앉아 빗소리와 함께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꼽아준 상주의 명소를 돌아봤습니다. 당일치기 짧은 여정이 아쉬워서 하루를 더 보태 상주에서 가장 후미진 함창읍을 기웃거려 보았습니다. 비가 와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소설가가 길 위에서 들려준 차분한 이야기 때문이었을까요. 상주로 떠난 여정이 줄곧 문학이나 서정, 혹은 추억 쪽으로 기울었던 까닭이 말입니다. # 장(醬) 팔아서 절집을 지은 곳 한식에다 인문학을 접목한 ‘한식×인문학 여행’의 일행이 찾아간 경북 상주의 도림사는 ‘장(醬)맛’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누리는 절집이다. 도림사야말로 소설가 성석제가 고향 상주에서 첫손으로 꼽는, 그래서 30여 명 여행자를 이끌고 방문한 ‘음식과 인문학’의 명소다. 도림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게 600개가 넘는 장독이다. 이 장독을 보면 도림사가 장 담그기에 얼마나 많은 공력을 들이고 있는지 짐작되고도 남는다. 절집의 대웅보전이며 와불전, 요사채, 공양간도 도림사 비구니 스님들이 담근 장을 팔아 번 돈으로 지은 것이다. 마당의 미륵불도 역시 도림사의 된장과 간장 판 돈으로 세웠다. 도림사 장맛을 진두지휘하는 건 주지 탄공(59)스님이다. 불교미술학을 전공하다가 출가해 25년 전에 도림사로 부임한 뒤 한방자원학을 공부하며 약초를 배웠고, 사찰음식에 손을 대면서 식품공학 석사학위를 땄다. 탄공스님이 사찰음식이나 장 담그기에 몰두하게 된 건 도림사의 사찰전통을 잇기 위한 것이었다. 예로부터 도림사가 들어선 자리는 한양으로 가던 옛길이었다. 도림사에 기도를 보태고 상경해 급제한 이들은 금의환향하며 다시 도림사에 들러 시주를 했고, 그렇게 도림사는 절집의 위세를 키워왔다. 인근에 행사가 있을 때마다 도림사는 공간을 내줬다. 지역을 대표하는 연회장 역할을 했던 것은 도림사가 그만큼 큰 음식을 내놓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30여 년 전 탄공스님이 절집 살림을 물려받을 때 놋그릇이며 백자기가 단지 안에 가득했다고 했다. 그릇뿐만이 아니었다. 된장도, 간장도, 식초도 옛 맛으로 남아있었다. 탄공스님은 그 맛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 지금껏 정성스럽게 장을 빚고 있다. 도림사는 요즘 정월이면 1㎏짜리 메주 3000장으로 장을 담근다. 대웅전 불사가 한창일 때는 지금의 두 배가 넘는 7000장의 메주로 장을 담갔다고 했다. 도림사의 장 담그는 과정은 마치 구도의 과정과 비슷하다. 탄공스님이 들려준 장 담그는 이야기 한토막. “봄 소금을 잘 볶아서 물을 부으면 소금이 ‘옷을 확 벗는데’, 그렇게 옷 벗은 소금을 여러 번 걸러내 유리관에 넣어놓으면 다시 소금 결정이 만들어진다. 그걸 다시 녹여 단지에 넣고 1년간 놓아둔 뒤 맑은 웃물을 떠낸다.” 메주 띄울 소금물 하나 만드는 과정이 이렇게 복잡하다. 메주를 띄워 만든 간장과 된장은 최소한 2년 8개월이 지나야 겨우 먹을 수 있고, 4∼5년은 돼야 제맛이 난다니 도림사의 100년 된 독에는 장이 아니라 ‘시간’이 익어가고 있는 셈이다.
# 작가의 안내로 먹고, 구경하다 그동안 여행 콘텐츠로서의 ‘한식’이라면 화려한 궁중음식을 조명하는 것이 당연시돼 왔는데, 한국문화원연합회가 각 분야 명사를 초청해 계절별로 진행하고 있는 ‘한식×인문학 여행’은 대중들이 즐겨 먹는 소박한 음식을 찾아 나서는 걸 원칙으로 한다. 경북 상주로 떠나는 한식×인문학 여행에 동행한 김태웅 한국문화원연합회장은 “그동안 정부나 기관 등에서 궁중음식을 한식의 대표로 알리고자 했지만, 사실 한식의 전통은 대중적인 음식에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강조했다. 투박하고 소박하지만 깊은 맛이 있는 우리 음식을, 여행과 결합해 인문학적으로 읽어보자는 게 이날 여행의 취지였다. 여행 목적지나 음식의 종류, 관광 코스 등은 성석제 작가에게 일임했는데, 그는 전혀 고민 없이 자기 고향인 상주로 떠나는 여행을 제안했다. 상주에서 뜻밖에 그가 선택한 음식은 장(醬)이었다. 해마다 3000장의 메주를 빚어 정성으로 장을 담그는 상주 도림사와 도림사가 운영을 거들고 있는 사찰음식점 ‘들밥상’에서의 건강한 한 끼는 그가 엄지손가락을 들어 추천하는 것이었다. 도림사 주지 탄공스님과 지용스님, 법연스님이 합세해 차려 내는 ‘들밥상’의 음식은 자극적이지 않지만 그렇다고 밋밋하지도 않았다. 음식은 순하고 담백했으며 공을 들였음이 분명한 조리법의 반찬도 훌륭했다. 자연 그대로의 제철재료로 만든 것이라서 그럴까. 다 먹고 난 뒤에도 속이 편하다. 성석제 작가는, 따라나선 여행자들을 상주 유림이 영남 5현, 그러니까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이황을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도남서원으로 안내했다. 낙동강의 물길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누각에서 작가의 강연이 있었다. 문학작품 얘기부터 상주의 역사적 전통, 그리고 토속음식에 이르기까지 이야기의 실타래가 술술 풀려나왔다. 특히 흥미 있었던 건 막걸리와 칼국수에서 시작해 묵과 한우, 장터의 된장 시래깃국과 향토 음식 ‘골곰짠지’ 얘기였다. 작가는 이어 여행자들을 경천대로 안내하고 경천대 밑에 정자 무우정을 짓고 은거하던 우담 채득기의 삶을 짚었다. 장맛비가 촉촉하게 내리는 날이라 불편하긴 했지만, 실은 그래서 경천대는 더 운치가 있었다. 특히 경천대 전망대로 이어지는, 비에 젖은 소나무 숲길의 정취는 그윽한 맛이 최고였다. 작가가 마지막으로 추천한 상주의 명소는 화서면 상현리 반송이다. 잘 알려진 곳은 아니지만, 밑동에서부터 여러 가지로 갈라진 잘생긴 소나무가 들판에서 활개를 치듯 서 있는 모습이 자못 당당했다. # 쇠락한 소읍을 미술로 치장하다
함창읍에는 5년 전 마을미술프로젝트가 시도됐다. 그 덕에 다양한 설치미술과 소박한 마을 골목을 바느질처럼 이어붙인 길이 있다. 프로젝트가 이뤄진 지 5년이 지났으니 작동하지 않거나 부서진 것도 있긴 하지만, 마을 골목을 돌며 낡은 소읍의 매력과 적재적소의 미술품을 감상하며 돌아볼 수 있는 훌륭한 도보 코스다. 기차역과 전통시장, 옛 양조장 등을 잇는 이 길은 바삐 걸으면 1시간 남짓, 느긋하게 걷는다면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 마을미술프로젝트 코스를 걷는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은 ‘작은 것일수록 유심히 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 골목의 누추한 담 아래 내놓은 깨진 화분에서 자라는 꽃, 철 대문 집의 반들반들한 문 손잡이, 말갛게 빨아 빨랫줄에 걸어놓은 옷가지…. 마을미술 사업을 통해 문 닫은 양조장은 근사한 갤러리로 바뀌었고, 낡은 빈집은 마을 주민들의 추억이 이식됐으며, 쓸모없어진 우물가는 가야의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됐다. 함창의 마을미술프로젝트를 찾아가는 출발지점은 함창역이다. 1924년 들어선 함창역은 양정역과 점촌역을 잇는 경북선 5대 기차역이었으나 지난 2004년 무인(無人)역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역사 내부에는 마을미술프로젝트 전체 지도와 설명 등을 걸어두었다. 여타 마을미술프로젝트를 둘러볼 때 가장 불편한 게 ‘길 안내’다. 이정표를 살펴 찾아간다 해도 몇 곳을 빠뜨리거나,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다. 하지만 여기 함창에서는 그럴 염려가 없다. 길 위에다 그려 넣은 흰 명주실이 초행길을 훌륭하게 안내해주기 때문이다. 5년 전에 그린 도로와 보도 위의 명주실 그림은 아직도 선명하다. 차도와 보도에 전통 톱날을 넣은 뒤 그 틈에 흰 물감을 넣어 만든 것이어서 그렇다. 길 안내의 명주실은 유연한 곡선인데, 제 자리에서 빙글 돌기도 하며 느긋하게 길을 안내한다. # ‘카페 버스정류장’의 창가 자리 마을미술프로젝트도 인상적이었지만, 사실 함창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받았던 곳은 원고지 빈칸 같은 타일 외벽을 가진, 70년 된 낡은 집에 들어선 카페였다. 모든 풍경이 다 정물 같은 소읍 도로변 일본식 2층 건물에 들어선 ‘카페 버스정류장’. 병원행 혹은 목욕탕행 버스를 기다리는 노인들만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함창버스터미널이 도로 맞은편에 있어서 붙인 상호라고 했다. 그 옆의 작은 건물까지 세를 내 ‘북 스테이’로 쓰고 있는 카페는, 눈에 확 띈다. 카페의 분위기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렇다’는 말로는 표현해낼 자신이 없으니 ‘이렇지 않다’는 말로 대신한다. 돈 들여 치장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궁상을 떠는 것도 아니며, 촌스럽지도 않으면서 경박하지도 않다. 카페는 일관된 주제나 통일된 색감이 없다. 그야말로 좌충우돌. 벽에 시가 걸려있고, 느닷없이 오래된 서양 배우 사진이 붙어있는가 하면, 시집이나 소설의 신문 서평이 꼼꼼하게 오려져 붙여져 있다. 두서도 맥락도 없지만, 카페는 혼란함 대신 품위가 느껴진다. 의도된 소품과 장식의 힘으로 오래된 시간이나 소박한 외양을 시늉하는 곳이 아니라, 누추함을 본래의 진정한 모습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리라. 카페는 ‘환갑만 안 넘으면 다 젊은이’라는 함창에서 8년 전 문을 열었다. 이른바 ‘도시재생’이란 개념이 알려지기 한참 전의 일이다. 카페 주인은 마흔두 살에 중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남편을 따라 경북 문경으로 귀농했던 박계해(60) 씨다. 용감하게 귀농을 했지만 일머리도 없고, 체력도 부쳤던 그는 천연염색을 하고 동네 할머니를 상대로 옷가게도 하고 방과 후 연극강사도 했지만, 생계가 어려워지자 장사를 결심했다. 무엇을 할까 고민하던 그는 8년 전 추석을 앞두고 친정 가는 길에 버스를 갈아타려고 들른 함창버스터미널 근처에서 우연히 마주친 낡은 건물에 반했다. 6년 동안 비어 있던 집이었다. 앞뒤 잴 것 없이 덜컥 전세 계약부터 했고 ‘그 집에 가장 맞겠다 싶어서’ 카페를 냈다. 교사를 그만두고, 귀농하고, 이혼하고, 카페를 열고….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는 세 권의 책을 냈다. 촌구석에 있지만, 카페를 알아본 이들이 좀 있다. 그의 책 ‘나의, 카페 버스정류장’을 읽은 가수 요조가 카페를 찾아왔으며, 카페를 다녀간 시인 강은교는 ‘카페 버스정류장’이란 시를 발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페가 매력적인 것은,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낡은 창문 밖으로 적막한 소읍의 도로를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 언제든 가서 앉을 수 있는… . # 효자 정재수가 데려온 추억 효자정재수기념관이 상주 화서면에 있다. 정재수의 모교 사산초등학교가 1994년 문을 닫자 폐교에 기념관을 들여놓은 것. 기념관 마당에는 추념비와 동상이 세워져 있고, 기념관 안에는 정재수가 죽음에 이르게 된 이야기와 함께 낡은 돌사진과 기록 등이 전시돼 있다. 전시실을 둘러보다 문득 의문이 들었던 건 아들 정재수가 아버지에게 자신의 외투를 덮어줬다는 대목. 이 사건이 감동적인 것은 영하 20도 추위에 정재수가 제 옷을 벗어 쓰러진 아버지를 덮어줬다는 사실에 힘입는다. 당시 사건을 처음으로 보도한 신문기사에는 시신 곁에 ‘아버지를 깨우려고 발을 동동 구르며 끌어당긴 재수 군의 발자국과 애쓴 흔적’이 있었다고 보도했고, 이튿날 다른 신문에서는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겨울 방학 전 아버지가 사준 잠바를 벗어주었던지 그의 옷이 아버지의 시신을 덮고 있었다’고 썼다. 그리고 다시 이틀 뒤, 또 다른 신문은 경찰서 수사과장이 “일부 보도와는 달리 숨진 정 씨(아버지)에게 아들이 자기 옷을 덮어준 사실이 없다”고 말한 내용을 보도했다. 그렇다면 ‘죽음과 맞바꾼 효’는 진실일까. 당시 사건을 극화한 영화 ‘아빠하고 나하고’를 보면 고갯길을 넘다가 눈밭에 쓰러진 아버지는 술을 마신 것으로 나온다. 아들이 죽은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동사했다는 사실도, 열 살 난 아들이 그때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보면 판단이 어렵다. 압축성장이 막 시작되던 시대. 우리는 어쩌면 안타까운 부자의 죽음에서 ‘보고 싶어 했던 것만’ 본 것은 아닐까. 그걸 ‘보여주고 싶어 했던’ 이들의 의도에 따라서 말이다. 요즘 아이들은 효자정재수기념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가족 단위 관람객도 거의 없다. 간혹 학생단체 방문객이 있지만, 아이들은 기념관을 둘러보지도 않고 그저 잔디밭에서 공만 차다가 간다. 다만 교과서에서 효자 정재수 이야기를 배웠던 중년의 나이를 넘긴 이들만 이곳에서 자신의 유년을 추억한다. 문득 잊고 있었던 이름을 기억해내는 것만으로도 국민이 ‘계몽의 대상’이었던 시절의 아릿아릿한 추억을 넘겨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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