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남해의 금산(錦山) 아래에서 뜬금없이 ‘서복(徐福·또는 서불)’을 만났습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진시황의 명령으로 죽지 않는 약, 그러니까 ‘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3000명을 이끌고 동쪽으로 갔다는 서복이 등장합니다. 먹으면 늙지도, 죽지도 않는 불로초를 찾아 나섰던 그가 여기 남해까지 왔다고 했습니다. 자그마치 2200여 년 전에 말입니다. 그가 찾으려던 건 무엇이었을까요. 남해의 명산, 금산을 가장 길게 오르는 산길을 걸으며 그가 찾던 것을 짐작해 보았습니다. # 남해 금산에서 ‘서복’을 만나다 남해 두모마을을 지나는 19번 국도변에는 금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다. 한려해상국립공원 구역으로 출입이 통제되다가 6년 전쯤 새로 조성된 탐방로다. 탐방로 주차장에 서복의 석상이 우뚝 서 있다. 도포 자락 휘날리며 서 있는 3t짜리 석상은 중국 본토의 ‘중국 서복회’와 ‘서복 연구회’가 기증한 것이다. 2014년 남해에서 서복을 주제로 한 한·중 학술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는데, 그때 중국의 학자들이 가져와 기증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남해에 왜 뜬금없는 서복일까. 중국 학자들은 왜 서복의 동상을 가져와서 남해에 기증했을까. 두모마을에서 출발하는 남해 금산 등산로 중간쯤에 있는 거북 형상 바위에 그 답이 있다. 바위에 ‘양아리 석각’이 있다. 양아리는 마을 지명이고, 석각은 ‘돌에 새긴 글씨’를 말한다. 보통 이름난 명승에는 8경(景)이니 10경(景)이니 하는 명소들이 있지만, 남해 금산에는 자그마치 38경(景)이 있다. 금산의 38개의 경치 중 35번째가 바로 ‘양아리 석각’이다. 그 석각을 보러 두모마을에서 금산을 오른다. 두모마을에서 금산을 오르는 탐방로는 인적이 드물다. 금산 정상으로 가는 가장 먼 길이니, 왜 안 그럴까. 탐방로에 들어서 20분쯤 걸으면 길 오른쪽으로 승용차 크기만 한 거북 모양 바위를 만나게 되는데, 그 바위에 양아리 석각이 있다. 돌에 새긴 석각은 해독되지 않았다. 상형문자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하다. 거란족의 글씨라는 설도 있고, 수렵의 모습을 새긴 그림이라는 주장도 있으며, 고대문자라거나 별자리를 표시한 것이란 얘기도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건 이 글씨가 바로 불사약을 구하러 동쪽으로 떠난 서복이 남긴 글씨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주장하는 이들은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서불기례일출(徐市起禮日出)’ 여섯 자라고 설명한다. ‘서복이 뜨는 해를 보고 절을 했다’는 뜻이다. 서복이 이곳 남해의 금산 자락에 머물렀다는 얘기다. 그는 왜 여기 머물렀을까. 그는 이곳에서 불로초라도 발견했던 것일까.
# 서복의 ‘불사약’이 은유하는 것 내친김에 서복 얘기를 좀 더 해보자. 과연 진시황의 명을 받들어 불사약을 구하러 떠난 서복은 어디까지 갔을까. 주장은 여럿이다. 제주에서는 서복이 서귀포까지 왔다 돌아갔다고 주장한다. ‘서녘 서(西)’에 ‘돌아올 귀(歸)’ ‘물가 포(浦)’ 자를 쓰는 ‘서귀포(西歸浦)’란 지명부터가 ‘불사약을 구하러 한라산에 올랐던 서복이 끝내 약을 구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되돌아간 곳’이라는 데서 유래됐다는 설명이다. 제주뿐만 아니다. 인천의 덕적도와 백령도, 군산 선유도와 진도군 진도, 여수 백도 등 섬은 물론이고, 구례의 지리산이나 남원의 삼신산에도 서복의 전설이 보인다. 반면 일본인들은 서복이 한반도를 거쳐 오사카(大阪) 서쪽의 와카야마(和歌山)까지 왔다고 주장한다. 일본 전역에 공원이나 사당, 상륙지 등 서복과 관련됐다는 곳이 스물다섯 군데나 된다. 심지어 와카야마 현 신구(神宮)에는 서복의 묘라 주장하는 곳도 있다. 서복이 제주에 다녀갔다는 주장의 근거는 서귀포 정방폭포 절벽에 새겨져 있었다는 글씨로부터 시작한다. 조선 말에 편찬된 파한록에 폭포 옆 바위에 ‘서복이 다녀갔다’는 뜻의 ‘서불과차(徐市過此)’란 암각문이 새겨져 있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1877년 서복의 전설에 흥미를 느낀 제주지사쯤 되는 벼슬을 가진 이가 직접 밧줄을 타고 내려가 그 글씨를 탁본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암각문의 탁본은 전해지지 않고, 바위에 새겨진 글씨도 비바람에 풍화돼 실물은 물론이고 흔적도 확인할 수 없다. 암각문 대신 서귀포의 서복 전시관에는 남해의 양아리 석각 모조품을 전시해 두었다. 뚜렷한 글씨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서복의 자취는 남해의 양아리 석각이 유일하다. 양아리 석각이 서복의 자취가 맞는다고 전제한다면 물증으로 증명되는 서복의 알리바이는 남해까지만 확인된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남해까지 온 서복은 과연 진시황의 명령대로 불사약을 찾았을까. 아니, 진짜 죽지 않는 약이 있기나 한 것일까. 이쯤에서 또 다른 해석이 있다. 서복이 찾아 헤맨 불사약이 늙지 않는 명약인 불로초를 말하는 게 아니라 도교적 이상세계에 대한 은유로 해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해 뜨는 동쪽은 이상세계였던 셈이다. # 부소암에서 푸근한 남해를 내려다보다 양아리 석각을 지나면 숲은 어둑해지고 산길은 가팔라진다. 아슬아슬한 수직의 바위 벼랑에 나선형 철제 계단을 놓아둔 구간도 있다. 계단을 오르면 이내 ‘부소암’이다. 부소암은 바위(巖)이기도 하고, 바위를 등지고 있는 수도승이 거처하는 암자(庵)의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탐방 안내판에는 줄곧 바위 암(巖)자만 쓴다. 안내판만 보면 암자는 없다. 짐작되는 건 맞은 편 금산 저쪽 자락의 이름난 절집, 보리암의 견제다. 이건 부소암을 지키고 있던 처사도 동의하는 바다. 보리암과 부소암이 서로 데면데면한 건, 같은 금산 자락에 있지만 소속한 사찰이 다르기 때문이다. 보리암은 경남 하동의 쌍계사 말사이고, 부소암은 경북 영천의 은혜사 말사다. 거기다가 위세가 하늘과 땅 차이라는 것도 두 암자 사이를 서먹하게 만들었을 것이었다. 보리암이 관음기도의 명소로 여러 전각을 거느리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당당한 위세의 암자라면, 부소암은 옛 건물을 다 헐어내고 새로 짓고 있는 중이지만, 그 전까지만 해도 겨우 비를 가릴 붉은 양철지붕을 두른 초라한 가건물 하나가 암자의 전부였다. 그럼에도 부소암에서 내려다보이는 두모마을의 다랑논과 남해바다 풍경은 금산의 보리암이 보여주는 경관에 못지않다. 낮은 돌담 너머로 펼쳐지는 탁 트인 시야의 규모와 아늑하고 푸근한 맛에서는 부소암이 오히려 앞선다. 간절한 기도를 하거나 마음을 내려놓기로 겨룬다 해도 적막할 정도로 고요한 부소암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다. 부소암이 소박한 기와 건물로 다시 지어지는 올가을 무렵이면, 그 정취는 더 깊어지리라.
# 부소대에서 다시 서복을 불러내다 부소암 암자가 병풍처럼 두른 것은 바위 부소암이다. 암자와 구분하기 위해 바위 부소암을 ‘부소대’라고도 부른다. 그 자체로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는 집채만 한 바위 부소대는, 신기하게도 사람의 뇌 모양을 꼭 빼닮았다. 바위의 형상이며 질감이 너무나 닮아서 징그럽게 느껴진다. 누군가 일부러 만든 게 아닌가 여겨질 정도다. 이렇게 기묘한 바위 부소대의 ‘부소(扶蘇)’ 앞에서, 서복의 이름은 또다시 호명된다. 서복에게 불사약을 찾아오라 명령한 진시황의 맏아들 이름이 부소다. 전설에 따르면 아버지 진시황이 죽고 막내 동생 호해가 황제 자리를 이어받자, 쫓겨난 부소는 불사약을 찾으러 간 서복의 행적을 뒤따라 와 여기 남해의 부소암에서 머물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중국의 기록은 다르다. 중국에서는 부소가 스스로 자결했다고 알려져 있다. 진시황이 죽고 난 뒤 부소는 음모에 휘말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로 인한 혼란으로 진나라가 멸망했다는 게 중국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다. 전설의 결론이 어찌 됐든지 눈길을 끄는 건, 여기 남해의 금산 자락에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구하러 온 서복의 이야기와 서복을 뒤따라 온 진시황의 맏아들 부소 이야기가 겹쳐 전해진다는 것이다. 서복이 새겼다는 양아리 석각의 글씨와 부소가 머물렀다는 부소암의 기묘한 바위가, 전해지는 전설 혹은 설화의 증거로 제시된다. 상상력을 발휘해보자. 서복이 진시황의 명령으로 불사약을 찾으러 나서고, 진시황이 죽은 뒤 부소가 뒤따라 서복을 찾아온 건 기원전 200년 무렵.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200여 년 전이다. 먼저 떠난 서복과 뒤따라온 부소는 과연 여기 남해에서 만났을까. 왜 부소는 서복을 따라왔고, 서복은 과연 불사약을 찾았을까. # 수명을 관장하는 별을 보는 자리 부소대에 놓인 철 사다리를 건너면 이내 보리암으로 이어지는 금산의 주 능선으로 이어진다. 이쪽 길로 접어들면 금산의 상사바위가 가깝다. 금산이라면 보리암의 경치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실상 보리암은 금산의 일부분일 뿐이다. 보리암의 명성이 오히려 금산의 기기묘묘한 풍경을 가린다. 보리암으로 이어지는 금산 능선의 서남쪽 끝에 솟아있는 상사바위는 금산을 통틀어 가장 웅장하고 큰 암봉이다. 이 바위에는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남자가 뱀이 됐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상사바위 위에선 270도 전망이 펼쳐진다. 발 아래로 상주해수욕장의 코발트색 바다가 펼쳐지고 좌선대며 보리암 일대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상사바위에서 능선을 따라 걷다 보면 금산 정상 턱밑쯤에 보리암이 있다. 지금도 이른바 ‘기도발’ 잘 받는 기도 명소로 꼽히지만, 보리암은 일찍이 신라 때부터 해수 관음 도량으로 이름 높던 절집이었다. 보리암이 성지로 간주됐던 것은 금산의 치솟은 암봉과 그 암봉이 뿜어내는 범상찮은 기운 때문이었으리라. 보리암에는 다른 절집에서는 한 번도 못 본 현판이 있다. 요사채로 쓰이는 전각이 내건 현판에 새겨진 글이 ‘간성각(看星閣)’이다. ‘볼 간(看)’에 ‘별 성(星)’ 자를 쓰니, 풀면 ‘별을 보는 전각’이란 뜻이다. 보리암은 장엄한 일출 풍경이 으뜸이라고 알려졌는데, 웬 별 얘기일까. 요사채 현판의 ‘볼 간(看)’ 자로 가리키고 있는 별은 ‘노인성(老人星)’이다. 노인성을 다른 말로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목숨별(수성·壽星)’ 혹은 ‘카노푸스(Canopus)’라고 부른다. 밤하늘에서 두 번째로 밝고 태양보다 65배나 큰 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노인성의 고도가 너무 낮아 남쪽의 해안가에서 춘분이나 추분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다고 전해진다. 노인성은 예로부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이 별을 본 사람은 오래 산다고 믿었다. 세 번을 보면 무병장수하고, 아홉 번을 보면 구천에서 태어난다는 별. 노인성을 보러 토정 이지함은 제주까지 가 한라산에 세 번이나 올랐고, 제주에 관리로 파견된 청음 김상헌은 제주에 머무는 6개월 동안 노인성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노인성은 나라에서도 길조로 여겼다. 노인성이 나타나면 그해는 병란이 사라지고 국운이 융성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고려 때는 개성에서 국가 제사로 노인성제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춘분과 추분에 두 번에 걸쳐 노인성제를 치렀다. 이쯤에서 다시 서복을 불러내 보자. 서복이 남해까지 와서 찾아낸 불사약은 혹 별이 아니었을까. 인간의 수명을 관장한다는, 지구와 313광년 거리에 있다는 노인성 말이다. 한국천문연구원에 문의해보니 올해는 남해 금산의 보리암에서 노인성을 지난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까지 오후 7시부터 오후 10시 사이에 관측할 수 있었다는데, 별의 고도가 워낙 낮고, 매일 달라지는 시간에 짧게 떠서 그럴까, 그걸 봤다는 사람은 없다. ■ 남해 금산 가는길 먹을 것 묵을 곳 남해의 향토음식 중 가장 이름난 것이 새콤하게 무쳐 먹는 굵은 씨알의 멸치(대멸). 하지만 봄 멸치 철은 이미 끝났다. 지금은 호래기(꼴뚜기)가 제철이다. 갓 잡은 호래기를 초고추장에 찍어 먹으면 야들야들한 맛이 일품이다. 남해읍 남해전통시장의 ‘짱구식당(055-864-6504)’은 시장통의 허름한 식당이지만, 그날그날 제철의 물 좋은 해산물을 들여놓고 음식을 차려 낸다. 봄에는 멸치 쌈밥과 도다리쑥국을, 가을에는 전어회와 구이를, 겨울에는 물메기탕을 낸다. 요즘은 칼칼한 생갈치조림이나 서대 매운탕이 제맛이다. 식당 주인이 최근 어깨 수술을 하고 회복 중이어서 식당 문을 여는 시간이 짧다는 게 흠이라면 흠. 내친김에 남해 전통시장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구입하는 것도 좋겠다. 남해에서는 해산물을 잡아 배 위에서 맛보는 경험도 해볼 수 있다. 통발어선을 타고 앵강만 바다로 나가 어부와 함께 통발을 건져 문어나 해삼, 고기 등을 잡는 ‘남해 어부체험’이다. 미리 던져둔 통발을 건져서 해삼이며 문어, 생선 등을 잡아내는데, 이렇게 잡은 해산물을 배 위에서 맛보고 남은 것은 싸가져 간다. 체험비용은 1인 2만5000원. 최소 6명, 그러니까 체험자가 낸 돈이 15만 원이 넘어야 출항한다. 055-862-42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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