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설악의 다른길 백담사~오세암~봉정암

醉月 2019. 6. 19. 22:09

내설악의 명승인 만경대에 올라서 내려다본 오세암의 모습. 오세암 뒤쪽으로 병풍처럼 펼쳐진 바위 능선이 공룡능선이다. 공룡능선은 험준하기로 이름났지만, 만경대에서 보면 초식공룡처럼 순한 모습이다.


설악산을 다녀왔습니다. 설악의 정상 대청봉이 아니라 소청 아래 적멸보궁의 사리탑이 있는 봉정암이 목적지였습니다. 내설악의 입구 백담사에서 시작해 영시암을 거쳐 오세암으로, 거기서 가장 가파르고 거친 길을 걸어 봉정암에 올랐습니다. 왕복 20㎞가 넘는 이 길은 허리 굽은 할머니들이 기도 하나 품고서 오체투지하듯 오르는 길입니다. 그게 어디 제 한 몸을 위한 것이겠습니까. 자식을 위한 소망과 기도를 품고 걷는 길. 쉬운 길 두고 하필 어려운 길을 택한 이유는 단 하나. ‘쉽게 가면 기도를 안 들어 줄 것 같아서’입니다. 이 길 위에서 설악은 울긋불긋한 등산복이나 화려한 경관만으로 해독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는 설악이 품고 있는 ‘다른 결’을 보고 돌아온 이야기입니다.


# 백담(百潭)… 대청봉에서 100번째 연못

내설악의 들머리는 백담사다.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백담사 앞 계곡의 우윳빛 바위를 보면 ‘흰 백(白)’ 자를 쓰는 것 같지만, 일백 백(百)자를 쓴다. ‘백담(百潭)’이란 이름의 뜻은 100개의 연못(潭), 더 정확히는 대청봉으로부터 ‘100번째의 연못’을 의미한다.

백담사는 흔히 ‘내설악의 산문’으로 불린다. 내설악 산행의 기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고, 내설악의 암자인 영시암과 오세암, 봉정암으로 가는 관문이 되는 절집이기 때문이다. 내설악의 탐방로는 산행길로 걷지만, 암자와 절집을 도는 순례길로 딛기도 한다. 설악산 산행의 목적지가 정상인 대청봉이라면, 순례길의 정점은 부처의 진신사리가 봉안된 석가사리탑이 있는 봉정암이다.

굳이 산행이냐 순례냐를 구분하지 않아도 괜찮다. 산행에 순례를 끼워 넣어도, 순례에다 산행을 슬쩍 보태도 좋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다면 그뿐 아닌가. 산행이자 순례가 시작되는 백담사 산문 앞에서 등산화 끈을 바싹 당겨 묶었다.

돌밭이 넓게 펼쳐진 백담사 앞의 계곡에는 크고 작은 돌탑이 수 천기가 넘는다. 절집을 찾은 이들이 계곡의 돌들로 소망을 쌓아 올린 탑이다. 여름 장마가 지나면 계곡의 돌탑은 불어난 계곡 물에 남김없이 죄다 허물어지는데, 다 무너진 자리 위에서 탑 쌓기는 다시 반복된다. 간절한 소망이 어디 큰물 한번 지나간다고 허물어질 것인가. 돌탑을 쌓고, 돌탑이 허물어지고, 돌탑을 다시 쌓는 과정은 무한 반복된다. 백담사에서 오세암을 거쳐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암자 순례 행렬도 역시 무한 반복된다. 새로운 소망과 기도가 돌탑으로, 또 걸음으로, 설악의 물과 길 위에 한 켜씩 쌓이고 있는 것이다.

백담사를 나서면 수렴동 계곡을 끼고 줄곧 부드러운 흙길이 1시간 남짓 이어진다. 여기가 설악을 통틀어 가장 편안한 길이리라. ‘수렴(水簾)’이란 계곡 이름에서 ‘렴(簾)’이란 햇볕을 가리기 위해 창이나 문에다 치는 ‘발’이다. 그렇다면 수렴이란 곧 ‘물로 친 발’을 뜻한다. 물방울을 매달아 발로 쳐놓은 계곡이라니, 이름이 그대로 시(詩)가 아닌가. 수렴동 계곡을 끼고 이어진 길에는 이런 이름에 걸맞게 옥빛 못과 작은 폭포가 이어진다. 그 길로 빨려 들어가듯 걸으면 저절로 닿게 되는 곳이 무심하게 길가에 나앉은 암자, 영시암이다.


내설악 산행의 기점이 되는 백담사 앞의 수렴동 계곡. 수천 기가 넘는 돌탑이 계곡의 돌밭 위에 세워져 있다. 큰비가 한 번 내리면 돌탑은 모두 흔적도 없이 다 쓸려가지만, 돌탑은 다시 하나둘씩 쌓아진다. 그 어떤 것도 소원과 기도를 허물어버릴 수 없듯이 말이다.




# 화살은 어디로 날아가는가

영시암은 350년 전쯤 내설악의 골짜기를 찾아 들어온 세도가 집안 출신의 선비, 김창흡이 창건한 암자다. 김창흡은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가 기묘사화로 죽임을 당한 뒤에 모친이 세상을 떠나고, 큰 형까지 사약을 받고 죽자 은거를 결심하고 설악의 깊은 산중으로 숨어들어 영시암을 지었다. 세상을 등지고 깊은 산중으로 들어온 건 아마도 ‘세상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그는 암자 이름으로 길다는 뜻의 ‘영(永)’ 자에 ‘화살 시(矢)’ 자를 걸었다. 뜻을 풀면 ‘영원한 화살’ 혹은 ‘돌아오지 않는 화살’로 읽힌다. ‘다시는 세상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임을 암자의 이름으로 맹세한 것이었다. 그는 과연 이 깊은 산중에서의 적막한 삶을 살면서 위안을 받았을까 아니면 하나의 화살이 되어 어디론가 날아가고 싶었을까.

김창읍의 은거는 그러나 7년째 되는 해에 함께 지내던 거사 최춘금이 호랑이에게 물려 죽으면서 막을 내렸다. 김창흡은 최춘금의 죽음에 곡하고 영시암 생활을 정리하고 설악산과 작별했다. 훗날 그는 설악을 잊지 못하고 백담계곡 입구에 집을 짓고 살았지만 다시는 영시암으로 돌아오지 않았다고 전한다. 흉흉한 세상을 피해 숨어들었던 한 선비의 은거지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선비의 11대 후손에 의해 다시 지어져 순례객이나 탐방객들이 차가운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이거나 다리쉼을 하는 암자가 됐다.


백담사에서 영시암 가는 길을 끼고 이어지는 수렴동 계곡의 초록 물빛이 환상적이다.


# 고통과 맞바꾸는 간절한 기도

영시암을 지나면 길이 둘로 나뉜다. 둘 다 봉정암을 거쳐 대청봉 정상으로 가는 길인데 하나는 수렴동 대피소를 거쳐 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오세암을 들러 가는 길이다. 두 길은 봉정암에서 합류하니 어느 길을 택하든 상관없다.

울긋불긋 등산복을 차려입은 탐방객들은 열이면 열 모두 갈림길에서 수렴동 대피소를 거쳐 오르는 길로 들어섰다. 좀 더 멀긴 하지만, 오르기가 훨씬 쉬운 까닭이다. 계곡의 경관도 이쪽이 더 낫다. 반면 오세암을 거쳐 오르는 길에는 인적이 드물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길이어서 숨이 턱까지 차고 시간도 더 걸리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지막 1.6㎞ 구간은 내내 오르막이어서 악명이 높다.

▲ 설악산 봉정암의 석가사리탑. 어렵게 봉정암을 오른 이들은 이 탑 앞에서 두 손을 모은다.

▲ 설악산 봉정암 적멸보궁에서 기도하는 모습.

갈림길에서 오세암 쪽으로 길을 잡았다. 오세암 가는 길로 접어들자마자 계곡은 좁아지고 인적은 끊겼다. 간혹 기도하러 가는 할머니들이 오체투지하는 순례자처럼 이 길을 오른다. 할머니들이 이쪽 길을 택하는 건 오세암을 들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목적은 ‘더 힘들고 어렵게 봉정암에 오를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할머니들은 길이 어렵고 힘들수록 기도를 더 잘 들어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었다. 바꿔 말하자면 ‘편하게 오르면 (기도를) 안 들어준다’고 믿는다는 얘기다.

어렵고 힘든 길을 가면서까지 이루고자 하는 소망은 무엇일까. 할머니들이 아무렴 본인들을 위한 기도로 순례의 고통을 감당하고 있을 리는 없겠고, 짐작하건대 자식을 위한 기도였을 것이었다. 더 늙고 굽은 몸일수록 기도의 순도는 높으리라. 당연한 일일까. 그 길 위에 할아버지는 없다. 스스로의 고통과 맞바꾸는 자식을 향한 간절한 기도는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다.


# 만 가지 경치를 보는 자리… 만경대

오세암에 당도하기 전에 가봐야 할 곳이 한 곳 있다. 내설악 만경대다. 설악산에는 만경대라 부르는 곳이 세 곳이 있다. 여기 오세암 인근에 내설악 만경대가 하나 있고, 양폭산장 위쪽에 외설악 만경대가 있으며, 오색근처에 남설악 만경대가 있다. 만경대(萬景臺)란 ‘만 가지 경치가 보이는 자리’라는 뜻. ‘경치를 바라보는 자리’라는 망경대(望景臺)와 발음과 의미가 비슷해 구분 없이 섞어 쓰기도 한다. 여기서는 일단 ‘만경대’로 쓰기로 하자.

설악의 만경대 중 가장 빼어난 경관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오세암으로 넘어가는 고개 정상에서 찾아가는 내설악 만경대다. 내설악 만경대는 바위로 이뤄진 해발 922m의 암봉인데, 오세암 가는 길에서 나와 제법 가파른 구간을 10분쯤만 오르면 닿는다. 만경대 바위에 서면 발밑 왼쪽으로는 오세암이 손톱만 하게 보이고, 오른쪽으로는 가야동 계곡의 관문인 천황문이 내려다보인다. 고개를 들면 공룡능선과 용아장성을 비롯해 대청봉 일대가 눈에 다 들어온다. 그 뒤쪽으로는 귀때기청봉에서 대청으로 이어지는 서북 능선이다.

만경대는 문화재청이 지정한 ‘대한민국 명승’이다. 그런데 문제는 만경대를 명승으로 지정해 놓았으면서도, 설악산 국립공원사무소가 그곳으로 가는 길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만경대에 오르는 길은 이른바 ‘비지정 탐방로’다. 기왕의 탐방로에서 갈림길로 고작 10분 남짓만 가면 되는데도 굳이 이 길을 막아놓은 까닭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따로 길을 내야 해서 훼손이 되는 것도 아니고, 길이 그리 위험한 것도 아니다. 짐작하건대 ‘관리상의 번거로움’ 때문에 닫은 게 아닌가 싶은데, 코앞까지 가서 명승을 보지 못하는 이유가 만일 그렇다면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 오세암에 쏟아지는 별

만경대에서 내려서면 이내 오세암이다. 오세암에는 매월당 김시습의 자취가 새겨져 있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김시습은 서울의 삼각산 절 방에서 공부하던 책을 불사르고 뛰쳐나왔다. 사육신의 시신을 수습해 노량진에 묻은 김시습은 곧바로 유랑 길에 올랐다가 설악의 오세암으로 숨어들었다. 백담사에서 걸어서 두 시간 이상 더 들어가야 하는 첩첩산중.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얼마나 깊고 깊은 곳이었을까.

설악산 암자순례의 목적지 봉정암에서는 불자건, 등산객이건 가리지 않고 밥을 내주고 재워준다. 여기 오세암도 마찬가지다. 하루나 이틀 묵어가며 암자순례를 하거나 대청봉 등반을 하기로 했다면, 저잣거리만큼 붐비는 봉정암보다 한적한 오세암을 더 권한다. 오세암에서는 된장을 풀어 끓인 미역국에다 밥을 말아 김치를 얹어 내주는데, 부엌살림을 맡은 보살의 솜씨 때문인지 봉정암보다는 몇 배는 더 맛이 있기도 하거니와 잠자리도 봉정암보다 훨씬 더 편하다.

오세암에서는 독경 소리가 밤늦도록 이어진다. 고즈넉해서 그럴까. 늦은 밤 소쩍새 울음소리와 어우러지는 독경 소리가 청아하다. 새벽 세 시 도량석 시간을 알리는 목탁소리에 잠이 깨 절집 마당에 나와 서니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떴다. 굳이 불교를 믿지 않는다 해도 그저 이 시간에 깨서 평온한 시간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몸과 마음에 묻은 때를 씻어내는 듯한 기분이 든다.


# 기도와 고행으로 오르는 봉정암

이튿날, 이른 새벽에 봉정암을 향해 나섰다. 오세암에서 봉정암으로 이어지는 산길은 만만찮은 고행을 동반하는 길이다. 탐방로 이정표에는 소요시간이 3시간이라고 적혀있지만, 날랜 걸음의 등산객이 아닌 순례자들은 웬만해서는 그 시간을 맞추지 못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수없이 반복하는 고갯길에서 숨은 턱까지 차고 걸음은 하염없이 늦어진다.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든 할머니들이 후들거리는 다리로 이 길을 기다시피 걷는 모습을 보면, 눈시울이 다 붉어질 정도다. 어떤 기도가 저리도 간절할까.

봉정암을 1.6㎞쯤 남겨두었을 때부터 오름길의 경사는 더 급해졌다. 비록 느리지만 순례객들은 다들 이 고비를 넘기고서 봉정암 경내로 들어섰다. 고통 속에서 산을 오르면서 어쩐지 눈빛이 더 순해진 듯했다. 봉정암에 도착했지만 순례자에게 그건 ‘이제야 기도할 곳에 당도했다’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할머니들은 봉정암의 사리탑 앞에서 끝없는 절을 시작했고, 적멸보궁 법당의 차가운 마룻바닥에 꿇어앉아 불경을 외웠다.

평생 한 번 다녀가기도 쉽지 않은 곳. 그런데 수년 전 봉정암에서 여기를 750번 오른 할머니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750번 고행의 목적은 순전히 자식을 향한 것이었다고 했다. 나중에 그 할머니의 아들과 전화통화를 하고 나서 그게 뜬소문이거나 과장된 게 아니라 더도 덜도 아닌 사실이란 걸 알았다. 아들을 향한 750번이나 된다는 ‘기도의 결과’를 기대했는데, 정작 아들은 평범한 중견기업 직원이었다.

그렇다면 기도는 이뤄지지 않은 것일까. 그 답은 봉정암에서 들었던 할머니의 마지막 등정 얘기 속에 있다. 관절염 수술을 앞둔 할머니의 마지막 봉정암 등정에 아들이 동행했는데, 백담사에서 봉정암까지 길고 긴 산길을 내내 아들이 업고 올라왔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기도는 이뤄진 게 아닐까. 설악을 오르는 고행의 산길에, 봉정암의 사리탑 앞에, 오세암의 밤하늘에, 오늘도 순례자들의 간절한 기도는 켜켜이 쌓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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