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고흥은 ‘지붕 없는 미술관’을 자처합니다. 고흥 땅 곳곳의 경관이 빼어나서 미술관에 걸린 예술작품 못잖다는 뜻에서 내걸고 있는 구호입니다. 고흥에서 그 구호에 딱 맞는 곳은 어디일까요. 자연에 사람의 손길이 보태져 더 아름다워진 곳, 그래서 그것 그대로 ‘예술’이 된 곳. 고흥 땅에서 그런 곳들을 찾아봤습니다. 다음은 그렇게 찾아낸, 들꽃과 미술로 예술이 된 섬 두 곳과 그림 같은 풍경을 ‘걷는 길’에 대한 얘기입니다. # 서정의 꽃밭을 가진 수수한 섬 전남 고흥에는 ‘쑥섬’이 있다. 섬의 정식 행정지명은 ‘애도’다. ‘쑥 애(艾)’자와 ‘섬 도(島)’자를 쓴다. 지도에도 그렇게 써 있다. 하지만 입말로는 그냥 ‘쑥섬’이다. 주민들은 물론이고, 섬을 드나드는 관광객도 모두 그렇게 부른다. 이름처럼 섬이 작고 소박해서 그럴까. 쑥섬이란 이름이 입에 찰싹 달라붙는다. 쑥섬은 나로도항 ‘코앞’에 있다. 나로도항에서 여객선을 타면 3분이면 섬에 닿는다. 선착장에서 섬까지가 직선거리로 350m에 불과하다. 수영을 아주 못하지만 않는다면 너끈히 헤엄쳐서 건널 수 있겠다 싶은 거리다. 섬은 가깝기만 한 게 아니라, 작기도 하다. 고구마 모양의 본섬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의 거리가 850m 남짓이다. 해안선의 길이를 다 더해도 3㎞를 조금 넘는 정도다. 섬이 작으니 섬에 사는 주민 수도 고작 서른 명 남짓이다. 삼치잡이로 섬이 제법 번성했던 1980년대에는 파시가 들어서 인구가 400명을 넘겼던 때도 있지만, 지금의 적요한 섬 분위기로 보면 좀처럼 믿기지 않는 전설 같은 얘기다. ‘예술이 된 고흥 풍경’이란 주제의 첫 번째 목록에 쑥섬을 올려놓는 것은 섬이 가까워서도, 작아서도 아니다. 이유인즉 쑥섬이 마을 주민의 손에 의해 통째로 매혹적인 비밀 정원으로 가꿔지고 있기 때문이다. 쑥섬 마을 돌담 뒤로 발을 들여놓으면 아름드리 후박나무와 동백, 가지를 뒤튼 육박나무들이 원시 난대림을 이룬 당숲이 있고, 그 숲의 터널을 지나 섬 정상에 오르면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꽃밭이 펼쳐진다. 주민들이 가꾸는 섬 정상의 꽃밭은 바다와 어우러져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서정적이다. 쑥섬 전체를 통틀어 가장 낭만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섬 정상의 꽃밭 ‘별정원’은 중학교 교사인 김상현(51) 씨와 약사 고채훈(48) 씨 부부가 섬 주민들과 힘을 합쳐 10년 가까이 가꾸고 있는 곳이다. 쑥섬에 가는 관광객들은 모두 이 꽃밭을 보러 간다고 해도 틀린 얘기는 아니다. 쑥섬이 ‘전남 1호 민간 정원’으로 지정된 것도, 행정안전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찾아가고 싶은 섬’이 된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섬 속의 이 꽃밭 덕분이다.
# 쑥섬의 힐링코스를 걷다 나로도항에서 쑥섬을 오가는 ‘쑥섬호’ 여객선은 왕복 7000원의 요금을 받는다. 도선료 2000원에다 섬 탐방요금 5000원을 따로 붙인 가격이다. 5000원은, 말하자면 쑥섬 입장료인 셈이다. 섬에 들어갈 때 왕복요금을 내고 섬에서 나올 때는 그냥 배를 타고 나온다. 쑥섬에서 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지붕을 갈매기 모양으로 꾸민 카페다. 갈매기 카페는 마을회관 겸 여행자 쉼터. 섬 전체를 둘러보는 탐방로 들머리가 이 카페 뒤쪽에 있다. 탐방로에 발을 들여놓으면 원시 난대림으로 가득한 별세계다. 어둑한 숲에는 태풍으로 뿌리가 뽑혔으나 죽지 않은 육박나무가 있는가 하면, 기이한 형태로 몸을 비틀며 자라는 후박나무도 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굵은 둥치의 붉가시나무도, 마을 아이들을 위한 그네가 매어 있던 구실잣밤나무도 있다. 땔감이 부족한 작은 섬인데도 이렇게 울창한 숲이 베어지지 않았던 건, 섬사람들이 그곳을 당숲으로 여겨 신성시했기 때문이다. 주민들이 섬 안에 무덤을 단 한 기도 쓰지 않았던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나뭇가지가 하늘을 가려 대낮에도 어둑한 당숲을 지나면 오솔길은 금계국이 환하게 피어 있는 언덕으로 이어진다. 언덕에서는 가슴이 탁 트이는 전망에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먼바다 쪽으로 소거문도와 손죽도, 초도 등의 섬이 뚜렷하다. 여기서부터 해발 83m의 섬 정상 부근까지는 꽃의 영역이다. 섬 정상의 꽃밭 ‘별정원’은 섬 밖에서는 보이지 않고 짐작도 되지 않는 비밀의 정원이다. 선홍색의 꽃양귀비며 수레국화, 서양 봉선화 등 원색의 진한 색감을 뽐내는 꽃들이 어찌나 요염하고 화려한지 정신이 다 아찔해질 정도다. 지금 별정원의 꽃밭을 차지하고 있는 건 야생화가 아니라 원예종 꽃들이다. 봄꽃은 다 지고 여름꽃은 아직 먼 이즈음에는 주민들이 농사짓듯 일일이 원예종 꽃을 심어 기른다. 고되기로만 보면 꽃 가꾸기는 농사일과 진배없다. 이랑을 만들고 씨앗이나 모종을 심고 틈날 때마다 김을 매는 것도 같다. 종류에 따라 시기를 맞춰 꽃을 피우려면 온갖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렇다 해도 이만한 크기의 꽃밭은 사실 뭐 그리 특별할 게 없다. 쑥섬의 꽃밭이 특별한 이유는 딱 한 가지. 꽃밭이 ‘작은 섬에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있기 때문’이다.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흐드러진 꽃의 서정은 작은 섬이 아니고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풍경이다.
# 중빠진굴에서 만난 스님 쑥섬을 찾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별정원 꽃밭만 둘러보곤 이내 마을로 내려간다. 쑥섬을 이렇게만 둘러보고 발길을 돌린다면 애석한 일이다. 애도등대가 있는 쑥섬 북쪽 끝 해안에 뜻밖에도 박력 넘치는 바위 풍경이 숨겨져 있으니 말이다. 하늘의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을 두고 거문고를 타며 놀다간 자리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 거대한 수직의 기암이 어우러져 장엄한 경관을 보여주는 ‘신선대’다. 신선대 수직 절벽 아래에는 특이한 지명의 굴이 있다. 이름하여 ‘중빠진굴’이다. 신선에게 법력을 과시하기 위해 신선대를 찾아온 한 탁발승이 절벽과 절벽 사이를 건너뛰다가 떨어져 죽었다는 곳이다. 일대의 해안 지형이 워낙 험준해 6·25전쟁 때 섬 주민 두 명이 이곳으로 몸을 피해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중빠진굴을 보러 등대 아래로 내려갔다가 공교롭게 나들이 온 고흥의 팔영산 아래 사찰 능가사의 주지 스님을 만났다. “하필 중빠진굴에 스님이 어인 일이시냐”고 웃음을 섞어 묻자 스님은 “굴에 빠진 대사님을 구하러 왔는데, 안 계신다”며 유쾌한 농담으로 받았다. 그러고는 기운이 좋아 보이는 갯바위에 올라 바다를 향해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기도를 했다. 설핏 해가 기울고 있었다. 섬에서 만난 주민들은 이곳의 해넘이가 섬의 풍경 중 최고라고 입을 모았다. 등대에서 내려와 해안을 따라 잠깐만 걸으면 돌담을 두르고 있는 쑥섬 마을로 되돌아가게 된다. 쑥섬은 한때 ‘고양이섬’으로 알려졌었다. 고양이를 좋아하는 한 애묘가(愛猫家)가 섬을 방문했다가 섬에 고양이가 많은 것을 보고, 동물구조단체로부터 고양이 사료를 기증받아 섬에 무료로 지원한 것이 계기가 됐다. 뭐 여기까지는 괜찮았는데, 고양이를 보러 관광객들이 드나들고 쑥섬이 ‘고양이섬’으로 유명해지면서 문제가 됐다. 주민들은 고양이섬으로 불리는 것을 영 탐탁지 않아 했던 것. 관광객이 고양이 얘기만 꺼내도 손사래를 친다. 심지어 ‘고양이가 없다’며 시치미를 떼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고양이를 쫓아낸 건 아니어서 섬에는 지금도 서른 명 남짓의 주민 수보다 고양이 수가 더 많다. # 예술로 단장된 섬, 연홍도
연홍도도 쑥섬처럼 뱃길이 가깝다. 선착장에서 연홍도까지의 거리는 500m에 불과하다. 선착장에서 보면 섬에서 누가 배를 기다리는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연홍도에는 연홍미술관이 있다. 섬 안에 미술관이 들어선 건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의 일. 불편하기 짝이 없는 작은 섬에서, 미술관이 살아남은 건 순전히 미술관장의 헌신과 연홍도를 사랑한 예술가들의 힘 덕분이었다. 연홍도는 ‘미술관이 있는 섬’에 주목한 전라남도가 2014년부터 ‘가고 싶은 섬’ 사업대상지로 선발해 지원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미술관이 있는 섬’이란 주제로 5년에 걸쳐 40억 원을 투입한 사업은 올해 끝난다. 지금의 연홍도가 ‘미술관이 있는 섬’의 완성된 형태라는 얘기다. 섬 가꾸기 사업으로 연홍도 곳곳이 설치미술품으로 장식됐다. 배가 닿는 방파제 끝에는 소라껍데기 조형물과 가족을 형상화한 원색의 철제 구조물을 세웠고, 마을 골목의 담벼락에는 독특한 소재를 활용한 조형물이 설치됐다. 바다를 끼고 있는 미술관 주변의 해안도로에도 상상력을 자극하는 다양한 조형물이 세워졌다. 미술관은 새로 다듬어졌으며 띄엄띄엄 열던 미술 전시도 이제는 1년 전시 일정을 꽉 채웠다. 식당과 찻집이 없어 관광객이 불편을 겪자 미술관은 근사한 음식점과 카페를 열었다. 이렇게 5년 만에 연홍도는 ‘미술섬’이 됐다. ‘지속가능’이란 큰 과제가 남아 있긴 하지만, 연홍도는 예술이 섬을 살려내는 충분한 동력이 될 수 있음을 훌륭하게 보여줬다. # 길이 보여주는 예술적인 미감 예술로 가꿔진 두 섬에 이어 바다와 아름다운 해안 풍경 사이를 걷는 매혹적인 길 얘기를 덧붙인다. 고흥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걷기 길이 있다. 고흥 우주발사전망대에서 영남 용바위까지 4㎞의 해안을 잇는 ‘미르마루길’이다. 미르는 순우리말로 ‘용’을, 마루는 ‘하늘’을 뜻한다. 이 길은 고흥에서 드라이브 코스로 이름난 영남 해안도로의 바다 쪽 절벽을 끼고 이어진다. 때로는 순한 흙길로, 때로는 나무 덱으로 다듬어낸 이 길 위에서는 해안 경관은 물론이고 다랑이논이며 몽돌해변까지 다채로운 경관을 두루 감상할 수 있다. 미르마루길의 출발은 고흥 남열리의 우주발사전망대. 전망대 앞에서 나무 덱을 딛고 해안 절벽을 내려가면 모내기를 마치고 찰랑찰랑 물을 담고 있는 다랑이논과 사자 형상을 한 바위섬 ‘사자바위’를 지난다. 미르마루길 구간에는 바닥을 유리로 마감해 절벽에 세운 스카이워크 ‘미르전망대’도 있고, 바다 가까이 내려가 용이 승천했다는 전설 속의 용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다. 걷기 길의 종점은 영남 용바위다. 용바위는 기이한 형상으로 가득한 거대한 바위인데, 이곳에서 용이 승천할 때 떨어진 비늘이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 가는길 먹을 것 묵을 곳 연홍도로 가려면 먼저 거금도로 건너가야 한다. 고흥읍에서 27번 국도를 타고 거금대교를 건너 금산면사무소를 지나자마자 중촌삼거리에서 배천·신양 방면으로 우회전해 2.7㎞를 가면 연홍도 가는 배가 뜨는 신양선착장이다. 선착장에서 하루 7번 연홍도 가는 배가 뜬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고흥의 유일한 호텔인 빅토리아호텔(061-832-3711)은 발포해수욕장에 있다. 프라이빗 비치(단독해변)를 연상케 하는 해변을 거느린 호텔이다. 마복산 아래 포두면 목재문화체험장(061-830-5123)은 전통한옥 체험숙소를 숙박객에게 내준다. 남열리 해안도로 부근의 전망좋은창펜션(061-835-9978)은 빼어난 전망을 자랑하는 곳이다. 운치 있는 숙소를 원한다면 풍양면 풍남리의 풍남모텔(061-833-9350)을 추천한다. 건물이나 시설은 다소 낡았지만, 자그마한 프라이빗 비치를 두고 있어 독특한 정취를 빚어낸다. 연홍미술관(061-844-4884)과 도화헌미술관(061-832-1333) 등도 숙소를 갖추고 있어 ‘미술관에서의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맛집이 몰려 있는 녹동항에는 생선구이백반을 푸짐하게 내놓는 정다운식당(061-843-0217)과 장어를 통째로 넣은 장어탕으로 이름난 득량식당(061-840-2082)을 추천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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