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한국의 서원’ 아홉 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목록에 등재됐습니다. 이로써 우리나라의 세계유산은 14개로 늘었지요. 세계유산에 등재된 아홉 곳 서원을 하나하나 짚어보니 그중 다섯 곳이 경북 지역의 서원이더군요. 특히 안동이 유일하게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두 개의 세계유산 서원을 가졌습니다. 안동에는 서원 말고도 세계유산이 더 있습니다. 하회마을과 봉정사, 유교책판이 모두 안동이 가진 세계유산입니다. 한 지역이 네 종류, 다섯 곳의 세계유산을 보유한 곳은 아마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을 겁니다. 이번 여정의 목적지를 경북 안동으로 정한 이유입니다. # 서원의 대표선수…도산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아홉 곳 중에서 ‘대표선수’를 꼽으라면 여기가 아닐까.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 말이다. 도산서원의 시작은 퇴계의 ‘도산서당’이었다. 서른넷의 나이로 문과급제해 관직에 처음 나선 퇴계는 벼슬을 하면서도 늘 귀향을 꿈꿨다. 드디어 퇴계는 쉰일곱의 나이에 고향으로 돌아와 4년에 걸쳐 손수 도산서당을 지었다. 퇴계는 현직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벼슬을 버리고자 했다. 도산서당으로 돌아오기까지 퇴계가 벼슬에서 사직하거나 임금의 명령에 응하지 않은 게 스무 번이 넘었다. 도산서당 자리는 본래 도공들이 살던 자리였다. 도공들에게 돈을 주고 옮겨가게 한 뒤에 그 자리에 서당을 지으면서, 퇴계는 ‘도공(陶工)이 살던 산(山)’이었다는 뜻에서 ‘도산(陶山)’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말년에 퇴계가 도산서당에 머물자 인근의 문인들이 수없이 찾아들었다. 어찌나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던지 도산서당이 ‘산속의 시장 같았다’고 적은 기록도 있다. 퇴계는 세상을 뜨던 해까지 서당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퇴계가 길러낸 제자는 320여 명에 달했다. 조선 전체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퇴계가 죽고 4년이 지나서 퇴계의 제자들은 서당에다 퇴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는 사당을 덧붙여서 서원 건립을 시작했다. 2년에 걸친 공사 끝에 도산서원은 완성됐고, 그해에 선조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았다. 서원은 건물의 배치며 현판으로 건 이름까지 모두 성리학적 세계관을 담고 있다. 기숙사 격인 농운정사는 공부에 열중하라는 뜻에서 한자의 공(工) 모양으로 짓도록 했고, 농운정사의 공부하던 동편 마루를 ‘시습재(時習齋)’라고 부르고, 휴식하던 서쪽 마루를 ‘관란헌(觀爛軒)’이라고 했다. 도산서원이야말로 영남 사림의 중심이었다. 퇴계 당시의 정치 상황을 복기해보자. ‘유학적 이상’을 현실에서 실현하려는 도덕적 의지를 무기로 삼은 사림파는 피비린내 나는 몇 번의 사화(士禍)를 겪고 난 뒤에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를 물리치고 권력을 얻었다. 현실정치를 전담하게 된 사림파는 이제 ‘도덕적 순수성이 어떻게 현실을 이상 사회로 만들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여야 했다. 유교적 이상 사회라는 조선의 건국이념이 비로소 철학적 이론으로 모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심에 퇴계가 있었고, 퇴계를 따르던 영남 사림이 있었고, 학파와 학맥을 잇는 도산서원이 있었다. 낙동강을 앞에 두고 아늑하게 들어선 서원은 강변을 끼고 이어지는 진입로의 오솔길을 걷는 것도 운치 있고, 툇마루에 앉아 뻐꾸기 소리를 듣는 맛도 좋다. 천연대(天淵臺)와 운영대(雲影臺)라고 이름 붙여진 강변 벼랑에 서서 강바람을 맞는 기분도 훌륭하다. 서원의 중심이자 강당 격인 전교당의 보수공사가 한창이지만, 공사하면서도 자재 등을 벌여놓지 않아 관람에 불편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 자연과 조화하는 건축…병산서원 유네스코 세계유산의 아홉 개 서원 가운데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서원이라면 단연 ‘병산서원’이겠다. 고려 때부터 있던 풍악서당을 류성룡이 지금의 서원 자리로 옮겼는데, 임진왜란 때 서당이 불탄 뒤에 류성룡의 학덕과 업적을 추모하는 사당을 지으면서 서원이 됐다. 낙동강을 끼고 이어지는 비포장길 끝의 강변에 있는 병산서원은 자연과 조화된 건축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낸다. 강물은 느리게 흘러갔고 미루나무 사이에는 구름이 걸렸는데, 강변 어디쯤에선가 뻐꾸기 소리가 들려왔다. 서원 주변에는 배롱나무들이 이제 막 붉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병산서원에서 백미로 꼽히는 건물이 누각인 만대루다. 기둥으로 받쳐 올려 널찍하게 지어낸 만대루는 서원으로 드는 중문이기도 하고 누각이기도 하다. 만대루에 올라서 한쪽 팔을 난간에 기대고 마루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운치가 최고였는데, 아쉽게도 얼마 전부터 만대루 출입이 통제됐다. ‘안전점검 관계로 당분간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이 붙여져 있는데 정작 점검하는 것 같지는 않고, 문화재보호 차원에서 출입을 막는 듯하다. 유네스코 세계유산까지 등재됐으니 앞으로 관리는 더 엄격해지지 않을까. 안전문제만 없다면 만대루의 누각을 다시 열어줬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서원의 중심인 입교당 툇마루에 앉으면 유장하게 흘러가는 낙동강 너머로 이어지는 산자락을 성글게 가리는 자리에 만대루가 서 있다. 입교당 툇마루에서는 독특한 시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만대루가 앞산을 가리니 만대루 뒤로 보이는 산이 실제로는 가까이 있는데 뒤로 한참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까운 풍경을 살짝 가리는 것으로, 뒤편의 경관을 보다 빼어나게 만드는 이른바 ‘차경(借景)’의 마술 같은 경험이다. 건물을 가까이 둠으로써 먼 곳의 풍경을 끌어오거나, 가까운 풍경을 밖으로 밀어내는 기교와 솜씨야말로 병산서원을 찾았다면 꼭 느껴봐야 할 것이다. 더불어 입교당 마당에서 만대루의 가로 일곱 칸 누각 기둥 사이로 마치 일곱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강변의 경관도 유심히 보자. 옛 선비들에게 자연은 유희가 아니라 ‘도(道)’였다. 자연은 곧 학문과 도리의 은유였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에서, ‘기다림’ 끝에 피어난 꽃에서 선비들은 올바른 세상의 이치와 삶의 방향을 찾았다. 그런 점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을 거느리고 있는 서원은, 그러므로 가장 올곧은 정신을 품은 서원에 다름 아닌 셈이다. # 밋밋해서 더 각별하다…봉정사 ‘산사(山寺), 한국의 산지 승원’으로 다른 절 6곳과 함께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안동의 봉정사는 ‘극락전’ 하나만으로도 존재감이 각별한 절집이다. 극락전은 지금 남아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이다. 그런데 사실 극락전이 언제 지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800년이 더 됐을 것으로 보는 건 ‘고쳐 지은 기록’을 뒤져 추정해낸 것이다. 극락전의 나이를 추정하는 과정은 이렇다.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은 1972년 뜯어서 보수했는데, 지붕을 고치던 중에 서까래를 건 도리에서 ‘1363년에 고쳐 지었다’는 글씨가 발견됐다. 보통 절집은 처음 지은 지 100∼150년 뒤에 고쳐 짓는 법. 이렇게 역산하면 극락전이 처음 지어진 건 1200년 초로 추정된다. 물과 불에 취약하고, 사람이 살지 않으면 이내 쓰러지고 마는 목조건축물이 이만한 세월을 건너온 건 기적 같은 일이다. 극락전에서 글씨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영주의 부석사 무량수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량수전의 나이에 대한 단서도, 해체 수리과정에서 나왔다. 1916년 무량수전을 수리하다가 ‘1376년에 고쳐 지었다’는 기록이 나왔다. 순서로 보면 봉정사 극락전을 수리하고 13년 뒤에 부석사 무량수전을 수리한 것이었다. 극락전이 먼저 고쳐 지은 건물이라면, 지은 시기도 앞설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상식이다. 봉정사 극락전이 최고(最古)의 목조건축물로 인정받기까지의 과정이 이렇다. 봉정사 극락전이 수리된 때는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내려온 지 2년이 지난 뒤다. 이곳까지 쫓겨온 왕과 왕실의 위기를 직접 목격했던 안동 사람들은 부처님의 힘으로 외적의 침입을 막아 국가와 왕실, 그리고 백성을 지켜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을 것이었고, 그런 마음이 극락전을 고쳐 짓게 되는 계기가 됐으리라. 봉정사의 울타리 안에는 고려 때 건물인 극락전과 특이하게도 툇마루를 두르고 있는 조선 초 건물 대웅전, 조선 중기 건축물인 화엄 강당과 고금당이 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봉정사는 밋밋하다. 주위를 둘러봐도 무엇하나 시선을 붙잡는 게 없다. 최고의 목조건물이라는 극락전에서도 특별한 건축적 미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봉정사에서는 무엇을 봐야 하는 것일까. 봉정사의 특별함은 ‘편안함’에 있다. 봉정사는 밋밋하고 심심하지만, 그곳에 들면 어쩐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경건하고 위세 있는 사찰에 왔다는 느낌보다는 고향 같은 산에 올랐다는 푸근한 느낌이다. 보통 명당이라면 권력과 부를 기원하며 후세의 발복을 비는 자리를 말하지만, 진짜 명당이란 욕망이나 기원 대신 그저 그곳에 오는 이를 편안하게 쉬게 하고, 또 미련 없이 떠나보내는 곳이 아닐까. 그렇다면 봉정사가 앉은 자리야말로 명당이라고 할 수 있겠다.
# 부용대에서 섶다리를 건너 하회마을로 지난 2010년 8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하회마을을 둘러보려면, 마을 맞은편의 부용대에 올라서 마을 이름 ‘하회’부터 새기고 가는 게 순서다. 부용대는 낙동강을 끼고 있는 하회마을 맞은편의 바위 벼랑인데, 여기 올라서면 하회마을과 마을을 U자로 감아 도는 낙동강의 물굽이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하회(河回)란 이름은 낙동강이 마을을 휘돌아간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부용대를 들렀다면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퇴계 제자 류성룡이 지은 옥연정사와 류성룡의 맏형 류운룡이 지은 겸암정사다. 두 곳 모두 마루에 앉아 낙동강의 물길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운치 있는 한옥인데, 하회마을로 가는 길목이어서 찾는 이가 많은 옥연정사는 자주 닫혀있지만, 부용대를 지나 막다른 길에 있어 인적이 드문 겸암정사는 늘 문을 열어두고 관리인이 음료를 팔고 있으니 툇마루에 앉아서 강변을 내려다보며 풍류를 즐길 수 있다. 부용대에서 하회마을로 가려면 낙동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동안에는 돈을 내고 나룻배를 이용해야 했지만, 지금은 섶다리가 놓여 있어 걸어서 건널 수 있다. 섶다리는 안동시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차남 앤드루 왕자의 안동 방문에 맞춰 지난 5월에 놓은 것. 앤드루 왕자가 이용한 뒤 곧바로 다리를 철거하려던 계획이었으나 정작 앤드루 왕자는 섶다리를 딛지도 않았고, 개통 이후 섶다리가 하회마을의 명물로 자리 잡자 안동시가 철거를 오는 8월 14일까지로 미뤘다. 섶다리를 건너면 하회마을이다. 하회마을이 풍산 류 씨의 씨족 마을이 된 건 17세기 무렵 족보에서 외손 범위가 축소되고, 자녀의 순서를 나이가 아닌 성별로 정하게 되면서부터다. 아들딸 차별 없이 공평하게 이뤄지던 상속이 장자 중심의 차등상속으로 변한 건 이 때문이었다. 상속을 받지 못하는 사위나 외손은 경제적 기반을 잃고 마을을 떠났고, 아들만 대를 이어 마을에 뿌리를 내리면서 집성촌이 형성된 것이다. 풍산 류 씨가 하회마을에서 배타적인 동족 마을을 형성했던 건 든든한 경제적 기반 때문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중이던 1594년 당시 류성룡의 아버지 중영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은 1700마지기나 됐다. 노비는 전란으로 도망가고 질병과 기근으로 사망한 이를 빼고도 146명에 달했다. 풍산 류 씨의 대종택으로 하회마을을 대표하는 양진당의 솟을대문과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이 이런 위세를 보여준다. 지어질 당시의 99칸에서 53칸만 남아있는데도 그렇다. 양진당과 더불어 하회마을의 중심으로 일컬어지는 건물이 충효당이다. 류성룡 선생의 후학들이 그의 학덕을 흠모하며 지었다고 전해지는 52칸짜리 건물이다. 충효당 앞에는 20년 전에 하회마을을 방문해 생일상을 받았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심은 구상나무가 있고, 그 옆에는 여왕에 이어 20년 만에 하회마을을 찾은 앤드루 왕자의 방문을 기념하는 기념 표식이 세워져 있다. 하회마을의 민가 중에서는 ‘북촌댁’을 빼놓을 수 없다. 대지 1700평에 72칸의 규모를 자랑하는 하회마을에서 가장 큰 집이다. 안채, 사랑채, 큰 사랑채, 대문간채, 사당 등을 두루 갖춘 이 집에 들어서면 무딘 눈을 가진 이라도 단번에 한옥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 국보 하회탈과 기록유산 유교책판 안동의 하회마을에 들렀다면 월영교 인근의 안동민속박물관까지 들러보자. ‘민속’이란 이름에서 마이너 박물관을 연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안동의 시립박물관은 이곳 딱 한 곳뿐이다. 안동을 대표하는 박물관이라는 얘기다. 안동민속박물관에서 봐야 할 것은 하회마을에서 별신굿 탈놀이를 할 때 쓰던 하회탈이다. 안동에 워낙 문화유적이 많아 흔전만전한 것 같지만 국보는 딱 두 개뿐이다. 하나가 하회탈이고, 다른 하나가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이다. 안동 하회마을의 하회탈은 800년 전에 제작된 것으로 1964년 국보로 지정된 후 줄곧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해오다가 2017년 12월에 이곳 안동민속박물관으로 돌아왔다. 무려 53년 만의 귀향이었다. 안동으로 돌아온 하회탈을 안동민속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하회탈과 병산탈 13점은 안동민속박물관이 7000만 원을 들여 만든 특수전시실에서 3점씩 돌아가면서 상설전시하고 있는데, 지금은 오는 9월 열리는 안동국제탈춤축제의 올해 주제인 ‘여성’에 맞춰 기존의 전시품 외에 각시탈, 할미탈, 부네 등 여성 탈을 보태서 공개하고 있다. 안동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도 있다. 지난 2015년 영남 지방의 305개 문중과 서원 등이 한국국학진흥원에 맡긴 718종 6만4226점의 책판이 ‘한국의 유교책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책판이란 책을 찍어내는 목판을 말한다.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책판은 한국국학진흥원의 장판각에 보관돼있다. 책판은 성리학 관련 서적, 족보, 연보, 예학서, 역사서 등 다양하지만, 80% 정도가 문집이다. 문집은 보통 글쓴이가 세상을 떠난 뒤에 제자들이 모여 펴내는데, 문집 자체에도 의미 있지만 문집에는 제자들이 모여 스승의 글을 읽고 토론하며 스승의 저작을 추려내는 과정에서 발휘하는 집단지성의 가치도 깊게 새겨져 있다. 출입이 통제되는 장판각 대신 국학진흥원의 유교문화박물관에서 세계기록유산 책판의 원본 일부를 볼 수 있다. 목판에 담긴 글도 글이지만, 목판에 글씨를 정교하게 새겨낸 솜씨도 혀를 내두르게 한다. 국학진흥원에는 현판만을 모아 전시하는 현판 전시장도 있다. 국학진흥원은 고택이나 서원 등의 현판을 위탁 보관하고 있는데,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의 현판 원본을 비롯해 내로라하는 고택과 서원의 현판이 모두 이곳에 있다. 현판 전시장에는 한석봉과 추사 김정희, 석파 이하응 등 당대 명필이 쓴 현판이 전시돼 있다. ■ 여행정보 안동의 음식으로는 찜닭이 첫손으로 꼽힌다. 안동 구시장에는 찜닭 식당들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찜닭골목이 있다. 식당마다 맛은 조금씩 다르지만 우열이 있다기보다 ‘다르다’는 쪽에 가깝다. 외지인들은 다들 찜닭골목으로 가지만, 안동 사람들은 삼산동 우체국 옆의 장수안동찜닭(054-852-4568)을 최고로 친다. 맛도 좋고, 인심도 좋다. 안동은 건진국수로도 유명하다. 칼국수와 비슷한 건진국수는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어 반죽하는데 면을 얇게 밀어서 가늘게 썰어낸다. 정통 건진국수는 낙동강에서 잡은 은어로 국물을 내는데, 은어가 귀해 닭고기나 양지머리를 쓴다. 골목안손국수(054-857-8887)는 차게 말아내는 건진국수를 여름에만 낸다. 건진국수는 아니지만 소면짱(054-859-8896)의 멸치국수를 추천한다. 멸치냉국수도 시원하다. 국수 공장에 배합비율을 주문해 납품받는 면을 써서 면발이 쫄깃하다. 아침 식사는 옛마을(054-859-2691)의 콩나물해장국을 권한다. 깔끔하게 끓여내는 콩나물해장국이 시원하다. 매일 이른 아침부터 안동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집이다. 꼬리곰탕과 양탕, 도가니탕, 설렁탕 등도 수준급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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