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이런 단어를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삼둔사가리’. 강원 지역 첩첩산중의 오지마을 일곱 곳을 한데 묶어 부르는 이름이 이렇습니다. ‘삼둔’이란 ‘산기슭에 자리 잡은 평평한 둔덕 세 곳’이란 뜻으로 강원 홍천의 세 곳, 살둔(생둔)·월둔·달둔을 말합니다. ‘사가리’는 ‘계곡 가의 마을 네 곳’으로 강원 인제의 아침가리와 연가리, 적가리, 명지가리를 모아 부르는 이름입니다. 이곳들이야말로 ‘은둔의 땅’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조선 시대 난세의 피란처를 예언한 비결서 ‘정감록’이 삼둔사가리의 출처로 들먹여지지만, 정감록에는 사실 삼둔사가리는 물론이고, 홍천이나 인제의 땅이름은 한 곳도 나오지 않습니다. 근거 없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진짜인 양 그럴듯하게 전해져오는 건, 삼둔사가리 오지마을이 워낙 깊고 외지기 때문입니다. 거기 숨는다면 아무도 찾아낼 수 없을 듯하니 난리쯤이야 능히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요. 삼둔사가리 오지 중에서 한 곳, 인제의 아침가리를 다녀왔습니다. 전쟁이나 난리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만, 그곳에서 확실하게 피할 수 있었던 건 끈적끈적 달라붙는 ‘더위’였습니다. 계곡으로 몇 발짝만 걸어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짙은 초록의 숲과 차고 맑은 계곡 물이 뿜어내는 차가운 기운에 소름이 돋았습니다. 차고 맑은 계곡 물에 허벅지까지 담근 채 잘박잘박 건너는 아침가리 계곡 트레킹에서 더위 따위는 감히 따라붙지 못했습니다. 쥘부채 하나 없이도 신선처럼 여름을 날 수 있는 곳. 이곳은 한여름에도 서늘한 아침가리입니다. # 가까워져 더 멀어진 곳… 아침가리 삼둔사가리의 일곱 곳 오지(奧地) 중에서 가장 이름난 곳이 바로 이곳 ‘아침가리’ 골짜기다. 강원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 아침가리는 ‘아침 조(朝)’에 ‘밭 갈 경(耕)’ 자를 써서 ‘조경동(朝耕洞)’이라고도 부른다. 산세가 험하고 골짜기도 깊으니 갈아먹을 밭이라고 해봐야 아침나절이면 다 갈 수 있을 만큼 손바닥만 하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는 얘기도 있고, 노루 꼬리만큼 해가 드는 첩첩산중이라 겨우 아침나절에만 밭을 갈 수 있다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라는 얘기도 있다. 어떤 게 옳은지는 모르겠지만, 전해지는 두 가지 이야기가 공통되게 말하는 건 아침가리 골짜기의 궁벽함이다. 여행의 욕망이 다양화하고, 번듯한 도로가 놓이면서 오지는 빠르게 사라지리라 믿었던 때가 있었다. 길과 욕망이 꼭꼭 숨어 있던 곳들을 다 들통 내리라고 생각했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한때 오지였던 곳이 대부분 세상과 가까워지긴 했지만, 더 멀어진 곳도 있다. 아침가리가 바로 그런 곳이다. 아침가리는 오래전부터 오지 여행의 대명사였다. 여행깨나 다니던 이들이 열망했던 오지 중의 오지였다. 가는 길은 지금과 비할 수 없을 만큼 멀고 험했지만, 아침가리의 이름은 지금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 그렇다고 아침가리를 찾는 사람이 지금보다 많았던 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20년 전, 아니 30년 전쯤이었을까. 가본 사람은 적었지만, 아침가리 이야기는 마치 전설처럼 전해졌다. 그 전설 같은 이야기의 정점에 계곡 길을 3시간 꼬박 걸어서 당도한 아침가리 골짜기에 살고 있던 한 명의 사내가 있었다. 흔한 이름이 아니어서 그 사내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억한다. 사재봉. 그 뒤로 그가 살던 계곡 위쪽에 2명의 주민이 더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풍문처럼 들었다. 아침가리가 멀어진 순서는 이렇다. 아침가리도, 그곳에 사는 사재봉이란 이름도 과거에는 로망이었다. 그 로망이 간절했던 건 그곳이 ‘멀어서’였다. 그러니 그곳이 가까워진 지금, 예전의 열망이 사라지게 된 건 당연한 일이다. 열망이 없으니 발길이 뜸해진 것도 마찬가지로 당연한 수순이다. ‘가까워져서 더 멀어진 곳.’ 그것이 바로 ‘아침가리의 역설’이다.
# 허벅지를 적시며 계곡을 걷는 길 아침가리는 과거에는 벼르고 벼르다 마음을 내서 찾아가는 곳이었다. 그만큼 멀기도 했고, 외지기도 했다. 지금은 그냥 대수롭지 않게 전날 예약한 산악회 버스를 타고 아침가리를 찾는다. 아침가리 계곡은 여전히 오지다. 그렇지만 딱 한철, 여름만큼은 예외다. 그때만큼은 아침가리는 오지에서 벗어난다. 여름철 계곡 산행을 즐기려는 동호인들이 알음알음 찾아들더니 수년 전부터는 주말은 물론이고, 주 중에도 산악회 버스들이 간혹 드나들고 있다. 그래 봐야 장마 직후부터 폭염이 지나가는 여름철 한 달 남짓에만 해당되는 일이지만 말이다. 한여름에 아침가리를 찾는 이가 많아지는 건 트레킹을 즐기면서 더위를 피할 수 있어서다. 가마솥처럼 푹푹 찌는 날에도 아침가리 계곡에서 허벅지까지 적시며 물 이쪽과 저쪽을 건너다 보면 입술이 새파래지고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니, 피서도 이만한 피서가 없다. 아침가리 계곡 트레킹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방동약수를 지나 방동리 고개까지 차로 가서 비포장 임도로 조경교까지 간 뒤에 거기서부터 아침가리 계곡을 걸어 진동 2교 쪽으로 내려오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진동 2교에서 출발해 계곡을 거슬러 조경교까지 갔다가 올라간 길을 되짚어 돌아오는 방법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걸리는 시간은 6시간 남짓으로 비슷하다. 첫 번째 방법은 숲길과 물길을 두루 걸을 수 있고, 계곡 구간을 내리막으로 걷는다는 게 장점이지만, 임도 길이 지루한 데다 출발 지점과 종착 지점이 달라 택시를 불러야 한다는 부담이 있다. 두 번째 방법은 갈 때와 올 때 같은 길을 걷는다는 단점이 있지만, 언제든 중간 지점에서 돌아 나와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더위를 피하고자 가볍게 휴가 삼아 다녀오는 피서 트레킹이라면, 아침가리 계곡의 물길을 왕복하는 두 번째 방법을 권한다. 모든 구간이 계곡의 물길을 따라가니 더위를 식힐 수 있고, 저마다 체력에 맞춰 걷고 싶은 만큼만 걷고 내려올 수 있으니 누구와 함께 가도 좋다. # 물길을 따라 제 맘대로 걷다 지금은 번듯한 주차장도 있고, 트레킹 구간 안내판도 세워져 있어 찾기 쉽지만, 예전에는 방태천에 합류하는 아침가리 계곡의 물길을 찾아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때는 계곡으로 들고나는 길이 없어 방태천 물길을 바지 걷고 첨벙첨벙 건너야 했으니 들머리를 찾는 것부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이정표 역할을 했던 것이 418번 지방도로(조침령로)의 식당 ‘진동산채가’다. 이 식당 앞에서 아침가리 계곡을 흘러온 물이 합수하니 식당만 찾으면 아침가리 들머리를 찾은 거나 진배없었다. 진동산채가에는 산채비빔밥 하나만 주문해도 귀한 석이버섯과 목이버섯을 접시 가득 담아 쓱 밀어주던 주인 할머니가 있었다. 얼추 20년이 다 된 일이다. 식당을 인수한 중년 부부가 운영하는 지금도 버섯을 내긴 하는데, 값이 비싸 산채비빔밥 상에는 못 내고 산나물 정식 상에 ‘맛이나 보라’고 내어주는 정도다. 진동산채가 앞에는 방태천을 건너는 작은 시멘트 다리가 있다. 이 다리를 건너면 아침가리 계곡 물길 왼쪽으로 숲길이 시작된다. 사실 아침가리 트레킹에는 정해진 길이 따로 없다. 군데군데 산악회가 매 놓은 리본이 길을 안내하지만, 그건 그냥 예시일 뿐이다. 숲 그늘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든지, 계곡을 따라 첨벙첨벙 걸어가든지 제 맘대로다. 아침가리 계곡을 걸으면서 무릎까지, 혹은 허벅지까지 적시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계곡 입구에서 아침가리의 조경교까지는 도합 열댓 번쯤 계곡을 건너야 하기 때문이다. 아침가리 계곡을 걷는 요령을 조언하자면, 신발을 신은 채 과감하게 물속으로 들어가라는 것이다. 그게 안전에도 좋고, 정신건강에도 좋다. 물론 더위를 식히는 데도 그만이다. 처음에는 신발이 젖지 않게 애를 쓰다가 신발을 벗어들고 조심스레 물을 건너던 이들도, 트레킹 코스 중간쯤이면 포기한 채 신발을 신은 채 물속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막상 물로 들어가면 걷는 게 훨씬 즐겁다. 그러니 출발부터 신발은 물론 허벅지까지 젖을 요량으로 트레킹을 시작하는 게 여러모로 좋다. # 굽이굽이 협곡을 따라 가는 길
아침가리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잔가지처럼 합수하는 수많은 물길이 있다. 계곡에 합수하는 물이 흘러드는 이끼 계곡도 있고, 계곡에 물을 보태는 실핏줄처럼 가는 폭포도 있다. 어찌나 물이 맑은지 마치 유리판을 올려둔 것처럼 바닥의 자갈이며 모래톱이 훤히 보이는 너른 소(沼)도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맑은 물에서는 쉬리며 갈겨니가 무리 지어 빠르게 물살을 거슬러 올라간다. 협곡의 굽이를 하나씩 돌 때마다 이쯤이면 근사한 명소다 싶은 곳들이 잇따라 등장하는데 그만한 풍경은 여기서는 이름조차 가질 자격이 없다는 뜻일까. 어찌 된 게 이름 하나 변변히 붙여진 곳이 없다. 아침가리 계곡을 통틀어 지명이 붙여진 곳은 딱 한 곳이다, 힘찬 물줄기로 쏟아지는 폭포 아래 검은 물빛이 인상적인 뚝발소다. 수심 4m가 넘는 뚝발소는 물이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어 한 번 들어가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니 주의해야 한다. 실제로 5년 전쯤 트레킹을 하러 왔다가 물에 빠진 어린아이를 구하러 뚝발소에 뛰어들었던 의사가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 # 깊은 곳에서, 더 깊은 곳으로 뚝발소를 지나서 지금까지 온 것만큼 더 걸으면 아침가리 골, 즉 조경동에 당도한다. 계곡을 왕복하는 코스를 택했다면 반환점이 되는 곳이다. 조경동은 1960년대 말까지 화전민 50여 가구가 살았던 마을이다. 아직 남아 있는 1967년에 폐교한 방동초교 조경분교 건물이 그 증거다. 그러나 지금은 딱 1명, 아직 조경동을 떠나지 않은 사재봉(73) 씨가 그곳에 살고 있다. 췌장암에 걸린 아내와 함께 조경동에 들어왔다는 그는 버섯이며 약초를 내다 팔며 37년을 살았다. 사씨는 지금은 등산객들에게 라면이며 막걸리 따위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뜻밖이다. 거처가 계곡 곁에 있던 집이 아니라, 다리 위에 올려놓은 컨테이너다. 이야긴즉슨 8년 전쯤 한 기업의 회장님이 아침가리 일대의 땅 70%를 사들인 뒤 아침가리에 들어왔던 2명의 주민이 나갔고, 집을 내놓은 사 씨는 수년째 컨테이너에서 생활하는 중이란다. 양쪽 다 사정이 있을 것이니 섣불리 누구의 손을 들어줄 수도 없는 일. 다만 전기도 아직 들이지 않은 이 깊은 오지가 개발의 욕심으로 흐트러지지 않기를 소망할 따름이다. 조경동을 지나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삼둔사가리에 속하는 명지가리와 월둔으로 이어지는데, 이 구간은 사전 예약을 거쳐 허가를 받은 뒤에야 출입할 수 있는 ‘백두대간 트레일’ 인제 구간이다. 그러니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조경동 분교 앞에서 발길을 돌려야 한다. 삼둔사가리의 오지인 아침가리를 지나서 더 깊은 명지가리와 월둔은 또 얼마나 깊은 곳일까. 그곳으로 몸을 숨긴다면 누가 찾아낼 수 있을까. 한여름 폭염의 더위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아침가리 계곡까지 찾아가는 것도 좋겠고, 번잡한 일상사에서 문득 도망치고 싶을 때 더 멀리 명지가리와 월둔까지 가보는 건 어떨까. 아침가리 계곡 6㎞를 걷고나서 14.5㎞를 더 걸어야 하는 산길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면, 마음으로나마 그곳을 피난처로 담아두는 건 어떨까. 언제든 가서 숨을 수 있는, 피난처 하나쯤 갖는 것이 때로는 사는 데 힘이 돼줄 수 있지 않을까. ■ 여행정보 인근에 방태산 휴양림이 있지만, 휴가철 예약은 일찌감치 끝났다. 휴양림 인근 민박집도 여름 피크 시즌은 거의 예약이 다 끝났다. 남은 민박을 찾아보거나 인제읍이나 양양읍 쪽에서 숙소를 찾아보는 방법이 있겠다. 아침가리 계곡 트레킹을 하겠다면 특히 유의해야 할 것이 비다. 비가 내리고 있거나, 폭우가 내린 직후라면 미련 없이 돌아서야 한다. 아침가리는 계곡이 좁아 폭우가 내리면 삽시간에 걷잡을 수 없이 물이 불어난다. 계곡을 건널 때마다 등산화를 벗고 건너는 건 위험하다. 발바닥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발목을 다칠 수도 있다. 슬리퍼나 샌들, 아쿠아슈즈를 신는 것도 적당하지 않다. 가장 좋은 건 젖어도 되는 헌 등산화다. 아침가리 계곡 들머리의 진동산채가(033-463-8484)에서는 산채비빔밥이나 산채 정식을 맛볼 수 있다. 민박을 함께 운영한다. 인근의 맛집으로는 내린천의 피아시매운탕(033-462-3334)이 첫손으로 꼽힌다. 메기 매운탕이나 메기와 빠가사리를 함께 넣어 끓인 매운탕이 대표 메뉴인데, 인상적인 건 매운탕 냄비에다 간 마늘을 자그마치 밥 한 공기 분량을 넣는다는 것. 이게 흙내나 비린내를 잡는지 칼칼한 매운탕에 자꾸 손이 간다. 고향집(033-461-7391)의 두부구이와 두부전골도 추천한다. 불판에 들기름을 넣고 즉석에서 구워 먹는 고소한 두부구이의 소박한 맛도 좋고, 새우젓으로 간해 끓여내는 두부전골도 좋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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