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점봉산 곰배령

醉月 2019. 8. 9. 21:52

장마가 끝나고 가을이 오기 전까지 점봉산 곰배령 초지에는 여름 야생화가 가득 피어난다. 올해는 예년보다 꽃이 더 좋다. 곰배령은 이때만큼은 ‘천상의 화원’이란 이름값을 능히 하고도 남는다.


점봉산. 낯선 이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계령을 두고 설악산 대청봉과 마주보고 서 있는 산이 바로 점봉산입니다. 설악산국립공원에 속한 오색약수나 주전골이, 실은 여기 점봉산에 있는 것들입니다. 1982년 유네스코에 의해 생물보전 핵심지역으로 지정된 점봉산은 ‘생태환경의 보물창고’라는 이유로 2006년부터 오는 2026년까지 산행이 제한됐습니다. 점봉산 정상엔 갈 수 없지만, 점봉산 자락을 넘어가는 낮은 목 고개, 곰배령까지는 발을 디딜 수 있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지배하는, 여름꽃 만발한 곰배령에 가본다면 왜 점봉산 탐방을 20년 동안 통제하고 있는지, 왜 이 폭염에 산을 권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을 겁니다.

곰배령은 바다와 내륙을 잇는 고갯길입니다. 오래전에 양양에서 봇짐장수들이 당나귀에 소금을 싣고 넘었고, 약초꾼들과 심마니들이 드나들던 곳이었습니다. 봇짐장수도, 약초꾼도 사라진 지금, 곰배령의 주인은 여름 야생화와 서늘한 바람입니다. 곰배령의 초원에는 여름꽃이 만발했습니다. 개구릿대, 둥근이질풀, 도라지모싯대, 동자꽃, 마타리, 곰취, 노루오줌, 큰뱀무, 각시취…. 계곡의 물소리를 끼고 햇볕 한 줌 들지 않는 나무그늘로 이어진 오름길에서도 내내 마중 나와 흐드러진 야생화를 만났습니다. 올해는 곰배령의 여름꽃이 유난히 좋더군요. 예년에 비해 꽃도 많고 색도 진했습니다. 고백하자면 곰배령을 두고 ‘천상의 화원’이라고 부르는 게 좀 과하다 싶었던 적도 있었습니다만, 적어도 올여름만큼은 그 별칭이 전혀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 한여름 곰배령 가는 길

한여름에 점봉산 곰배령에 간다는 건, 다른 산행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다. 걷는 길이, 걷는 방식이, 걷는 이의 마음가짐이 완전히 다르다. 이를테면 이런 차이다. 곰배령 가는 길은 산을 오르거나 고개를 넘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곰배령에 가는 목적이 ‘온통 흐드러진 여름꽃’이라는 것도, 길 끝의 목적지가 아니라 길 위의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걷게 된다는 것도 보통의 산행과는 다르다. 곰배령 가는 길은 막판의 짧은 구간만 빼면 가파르지 않아, 숨이 턱에 닿는 등산과는 달리 여유 있는 산책에 더 가깝다는 차이도 있다.

곰배령. 먼저 그곳으로 가는 길 위의 아름다움부터 얘기해보자. 지금은 길을 새로 열어 반대편 귀둔리 쪽에서도 오를 수 있지만, 곰배령으로 가는 가장 좋은 들머리는 예나 지금이나 인제 진동리 설피마을이다. 귀둔리보다 설피마을 쪽에서 오르는 것이 훨씬 더 길이 좋고 경사도 완만하기 때문이다. 우선 설피마을까지 가자.

탐방객 주차장이 있는 설피마을까지 이어지는 418번 지방도로는 줄곧 방태천 물길을 따라간다. 드라이브 코스로만 그곳을 간대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길이다. 장마 뒤끝 방태천 계곡은 차고 맑은 물로 그득하고, 계곡 군데군데의 진초록 소(沼)는 수정처럼 맑다. 여기서는 그저 내키는 자리에다 차를 세워두고서 차고 시린 방태천 계곡 물에 발을 담글 수 있다.

산마을의 지방도로 위에서 만나는 풍경은 푸근하다. 한낮 더위 속에서 정물 같은 손바닥만 한 소읍을 지나기도 하고, 담 아래 접시꽃 피어난 외딴 산마을도 지난다. 여름날의 산마을은 고요하다. 옥수수라도 삶아 휴가객들에게 파는 노점이라도 있을 법한데, 이쪽 마을 주민들은 그런 수완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저 가지런한 옥수수밭과 한낮의 열기로 뜨겁게 달궈진 콩밭, 붉게 익어가는 고추밭을 지나서 길은 굽이굽이 이어진다. 떠나온 거리(距離)로 따져도 그렇겠지만, 이런 풍경만으로도 이 길은 ‘도시에서 가장 멀리 떠나온 느낌’을 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모름지기 여름 휴가라면, 도시에서 이만큼은 벗어나야 하는 게 아닐까.


강선마을을 지나 곰배령으로 오르는 순한 길. 숲속으로 빨려드는 듯한 길이다. 길이 편안해서 굳이 등산화나 등산복을 갖춰 입지 않아도 곰배령까지 다녀올 수 있다.




# 설피마을에서 강선마을까지

곰배령으로 가는 트레킹 출발지점은 제법 넓은 탐방 주차장이 들어선 ‘설피마을’이다. 겨울철에 워낙 눈이 많이 내려 덧신인 ‘설피(雪皮)’를 신지 않으면 아예 움직일 수 없는 곳이라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이름만 그런 게 아니라 진짜 설피마을은 겨울이면 폭설이 쏟아져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눈밭이 된다.

곰배령 가는 길은 두 구간으로 나눌 수 있다. 설피마을에서 출발하면 강선마을을 지나서 곰배령으로 오른다. 곰배령 가는 길에는 양치식물과 신갈나무, 복장나무, 고광나무 등이 원시림을 이뤄 햇빛 한 줌 들지 않는다. 그러나 설피마을에서 강선마을까지 구간과 강선마을에서 곰배령까지 구간은 길의 분위기는 전혀 다르다.

먼저 설피마을에서 강선마을까지 물길을 끼고 이어지는 2.2㎞ 남짓한 길은 평지와 거의 다름없는 오솔길이다. 장마 뒤끝에 불어난 물소리가 내내 따라오는 이 길은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다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순하다.

이 길에서 간혹 멈추게 되는 건, 지천으로 피어난 여름꽃 때문이다. 나비나물, 영아자, 짚신나물, 참나리, 꿩의다리, 터리풀, 물레나물, 촛대승마…. 어디 꽃만 각별할까. 아무런 간섭 없이 자라 하늘을 가린 나무들이 숲속에서 몸을 뒤틀고 있는 모습도 볼만하다. 고사리 닮은 이파리를 화관처럼 둥글게 펼치고 있는 양치식물 관중으로 그득한 촉촉한 숲의 청량감도 훌륭하다.

지금은 가구 수래야 10호 남짓. 그것도 모두 매점이나 민박집을 하는 외지인들뿐이어서 ‘마을’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지만, 강선마을은 한때 화전민들이 몰려들어 북적이던 곳이었다. 1968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사건으로 인한 화전민 소개령 이전까지만 해도 설피마을과 강선마을에는 200호가 넘는 주민들이 살았다. 그때 강선마을과 설피마을 일대에는 객줏집은 물론이고 술을 빚는 술도가까지 있었다고 했다. 동해안의 소금을 싣고 내륙에 팔러 곰배령을 넘어온 이들이 이곳 강선마을의 객줏집에서 쉬어가며 탁주 한 잔으로 기운을 차렸으리라. 지금은 소금장수 대신 곰배령을 다녀온 행락객들이 강선마을에서 물소리를 들으며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인다.


# 산상의 꽃밭, 곰배령의 여름꽃

설피마을에서 강선마을까지 2㎞가 ‘오솔길’이라면, 강선마을에서 곰배령까지는 3㎞ 남짓의 ‘산길’이다. 산길이라고는 하지만, 설피마을에서 강선마을까지 이어진 오솔길에 비해 그렇다는 얘기지, 다른 등산로처럼 길이 험하거나 종아리 근육이 팍팍해지는 정도는 아니다. 곰배령을 앞둔 마지막 200m 남짓의 오르막 구간만 빼면 말이다.

‘산길’은 강선마을에서 개울을 건너자마자 시작된다. 신갈나무와 당단풍, 거제수나무, 박달나무, 서어나무, 고광나무, 난티나무, 들메나무…. 활엽수들이 활개를 펴고 초록의 그늘을 만드는 길이다. 숲이 어찌나 깊고 짙은지 한 줌 햇빛도 들지 않는다. 나무들 밑동은 초록색 이끼로 뒤덮였고, 그 주변에는 양치식물들이 그득하다. 이런 순한 길이 곰배령으로 가는 내내 이어진다. 이런 초록의 숲길을 걷다 보면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청량하고 깊은 숲이 걸음을 저절로 이끌어서 마치 자석처럼 딸려 가게 되는 것이다.

길이 순하다는 건 체력 소모가 적고 걷기 쉽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장점도 있다. 유순한 길은 주위를 살필 여유를 만들어준다. 숨이 턱에 닿는 가파른 등산로에서는 밖을 볼 여유가 없다. 힘든 자신의 모습만 보이는 탓이다. 반면 곰배령으로 가는 부드러운 흙길에서는 꽃과 나무와 이끼에 줄곧 시선을 두고 걸을 수 있다. 여유 있게 걷거나 부담 없이 멈춰 서서 작고 여린 것들까지 세심하게 살필 여유가 생긴다는 것이다.

곰배령 정상이 가까워 온다 싶으면 일순 하늘이 열린다. 이어 드넓은 산상 초원이 펼쳐진다. 나무가 없는 고산 초원은 말 그대로 ‘야생화 천국’이다. 곰배령에서는 지금 여름꽃들이 절정의 시간을 지나고 있다. 드넓은 초지를 가득 채운 개구릿대를 비롯해 지금까지 오름길에서 봤던 여름 야생화들이 빠짐없이 모두 다 이곳에 있다. 야생화 도감 한 권 챙겨 들고 가서 하나하나 이름을 불러 주다 보면 한두 시간쯤은 훌쩍 지나가고 만다.

도시는 물론이고 곰배령 아래 설피마을까지도 찜통더위로 뒤덮인 날이었는데, 곰배령의 대기는 깜짝 놀랄 만큼 서늘했다. 분홍, 주황, 노랑, 보라 등 각양각색의 꽃이 초원을 지나가는 바람에 연신 고개를 흔들어 댔다. 고개를 타고 넘는 서늘한 바람 속에서 야생화를 감상하며 나무 덱을 따라 산책하는 맛이라니….


# 곰배령을 오르는 다른 길들

곰배령 초지 길은 모두 나무 덱이다. 야생화 군락 훼손을 막기 위한 조치다. 다른 계절이라면 가까이 다가가서 야생화를 보지 못하는 게 안타까웠을 법하겠지만, 장마가 끝나고 가을 초입까지는 여름꽃이 절정인 시기라 나무 덱 위를 걸으면서도 원 없이 야생화 군락을 감상할 수 있다.

인상적인 건 야생화뿐만 아니다. 고개 숙여 꽃들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면, 사방을 둘러싼 우람한 봉우리와 능선이 눈 안에 들어온다. 설악산을 비롯해 운이산, 한석산, 가리산 일대의 경관이 마치 병풍처럼 펼쳐지는데, 특히 곰배령 일대를 내려다볼 수 있는 쉼터에서는 점봉산 정상은 물론이고 설악산 중청봉, 대청봉 등이 손에 잡힐 듯이 바라다보였다.

설피마을에서 강선마을을 지나 계곡을 따라 곰배령으로 올라오는 코스(1코스)를 소개했지만, 사실 곰배령을 오르는 다른 길도 있다. 하나는 설피마을에서 곧바로 능선으로 올라붙어 오르는 길(2코스)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쪽 점봉산 능선인 인제 귀둔리 쪽에서 오르는 길(귀둔리 코스)이다. 하지만 1코스를 제외한 두 길 모두 오르막이 심하고, 거리도 멀다. 그렇다고 이렇다 할 경관이 있는 것도 아니다.

곰배령에서 하산할 때도 올라온 1코스로 되돌아 내려가는 걸 추천한다. 올라올 때와 같은 길로 내려가는 것이 지루하다면 능선으로 내려서는 2코스를 택하면 된다. 이 길은 계곡이 아닌 능선으로 이어져 덥고, 오르내림이 심해 계곡 길보다 하산 시간이 30분 이상 더 걸린다. 하지만 인적 드문 원시림 숲길을 새소리를 들으며 고즈넉하게 걸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또 하나 주의할 점은, ‘체력단련’이 목적이 아니라면 점봉산 반대 능선인 인제 귀둔리 쪽에서 곰배령을 오르는 코스를 택하지 말라는 것. 귀둔리 코스는 본격 등산을 방불케 할 정도로 길이 가파르고 거친 데다 설악산국립공원관리공단이 통제·관리하고 있어, 귀둔리에서 출발했다면 산림청에서 관리하는 곰배령 1, 2코스 쪽으로 하산할 수 없다.


■ 여행정보

점봉산은 1987년부터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오는 2026년까지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지만, 곰배령까지는 인터넷 사전 예약을 통해 다녀올 수 있다. 강선마을을 거쳐 곰배령을 다녀오는 동쪽 코스는 산림청이 관리하고, 반대편 귀둔리에서 곰배령으로 이어지는 서쪽 코스는 설악산국립공원관리공단이 관리한다.

산림청과 국립공원관리공단은 자연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1일 탐방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 인터넷 예약 450명, 민박이나 식당을 운영하는 마을 주민을 통한 대행 예약 450명, 이렇게 하루 총 900명까지만 탐방을 허가한다.

탐방 예약은 월 1회만 할 수 있으며, 신청자 외에 동반자 1인까지만 예약할 수 있다. 18세 이하 청소년은 사전 예약한 부모와 동행할 경우 별도의 예약 없이도 입산이 가능하다. 탐방 예약은 매주 수요일 오전 9시에 주 단위로 4주 차 일요일까지 받고 있다. 탐방 당일에는 생태관리센터에 신분증을 제출하고 예약자 명단을 확인한 뒤 아크릴로 제작한 탐방 허가 표식을 받아야 탐방로로 들어갈 수 있다. 강선마을 초소에서 표식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생태탐방센터 033-463-8166

설피마을에는 ‘설피밭 지수네’(033-463-0411)와 ‘꽃님이네집’(033-463-9508)을 비롯해 민박집이 30여 곳이 넘는다. 민박으로 내놓은 방이 많아서 여름 휴가 피크 시즌만 아니라면 현장에서도 숙소를 얻을 수 있다.

설피마을의 식당 ‘산골나들이’는 일대에서 난 산나물로 차려 내는 밥상이 인상적이다. 쫄깃한 토종닭을 삶아 내는 토종 닭백숙도 좋다. 설피마을에는 토속 된장과 산나물 장아찌를 내는 식당 ‘곰배령가는길’도 있다. 된장찌개만 주문해도 다양한 나물 반찬과 장아찌를 내온다. 곰배령 트레킹 코스로 거쳐가는 강선마을에는 여느 산의 등산로 초입처럼 막걸리와 부침개 등을 내는 식당들이 있다.

오가는 길에 진동계곡을 끼고 이어지는 418번 국도변의 방동막국수(033-461-0419)에서 막국수와 편육을 맛보거나 진동산채(033-463-8484)에서 산채비빔밥이나 산채정식 밥상을 받아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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