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광복절을 맞는 소회는 예년과 사뭇 다릅니다. ‘의병’ 얘기가 나올 정도로 한·일 양국 관계가 최악인 상황에서 맞이하는 광복절은,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일본의 진정한 반성과 참회가 전제되는 화해의 길은 과연 없는 것일까요. 전남의 해남으로, 또 진도로 떠난 여정은, 그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습니다. 핍박과 수난의 역사를 찾아 나선 걸음이라 그늘이 드리운 곳들만 골라서 들르게 됐습니다만, 사실 해남과 진도에는 더 밝고 이름난 명소가 여럿 있습니다. 그곳에 가면 더 아름답고 더 화려한 곳을 목적지로 삼되, 여기 소개하는 곳들 중 한 곳만이라도 들러보셨으면 합니다. 모두 깜짝 놀랄만한 감동의 이야기들이 깃들어 있는 곳들입니다. 익히 알고 있었다고 믿었던 역사적 사실이라도, 공간과 실재가 주는 실감이 더해진다면 묵직한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 죽어서 돌아온 강제동원 피해자들 진도에 가려면 어찌 됐든 해남 땅을 먼저 밟아야 한다. 진도를 육지로 잇는 진도대교의 저쪽이 해남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남 해남부터 여정을 시작하자. 먼저 가야 할 곳은 전남 해남군 황산면 옥동리 떡봉산 아래 ‘옥동방파제’다. 옥동리는 해남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마을. 진도의 벽파항을 마주 보고 있는 이 마을의 방파제 주변에는 좀처럼 용도를 알 수 없는 아파트 4층 높이의 거대한 시멘트 구조물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아사다(淺田)화학공업주식회사가 한국인 징용자를 동원해 인근 옥매산에서 캐낸 명반석(明礬石)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임시저장고다. 해방 3년 전부터 짓기 시작했다는데, 완공은 하지 못했고, 해방되던 무렵 미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다. 명반석은 알루미늄의 원료가 되는 광물이다. 일제는 전쟁 말기에 전투기 제작을 위해 명반석을 확보하는 데 혈안이 됐다. 옥매광산은 국내 최대 규모의 강제동원지였다. 광산에서는 줄잡아 수백 명의 강제동원 피해자를 수용했다. 노동은 고됐다. 명반석을 캐면서 산을 깎아 원래 173m이던 옥매산의 높이가 160m까지 낮아졌을 정도였다. 강제동원돼 옥매광산에서 일하던 조선인 200여 명은 해방을 넉 달쯤 앞두고 일본 무장군인의 위협 속에서 강제로 제주도로 건너갔다. 무장한 군인이 광산의 인부를 포위해 부두에 정박해 놓았던 배에 태운 다음, 제주의 모슬포항에 수용했다. 이들은 산방산 일대에서 동굴이나 방어진지를 파거나 해안동굴을 만드는 일을 맡았다. 영문도 모르고 해남으로, 또 제주로 끌려간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제주에서 해방을 맞았다. 어찌어찌 어렵게 배를 구한 이들은, 해방된 지 1주일여 만인 8월 23일 조선인 222명과 일본인 관리자 3명을 태우고 환호 속에서 제주를 출항했다. 그리고 반전처럼 다가온 비극의 정점. 제주 남쪽 추자도와 보길도 사이를 항해하던 배의 기관실에서 불이 났다. 불은 쉽게 꺼지지 않았고 기관 고장으로 4시간여 동안 표류하던 배는 결국 침몰하고 말았다. 마침 이곳 해역을 지나던 일본 배가 있었는데, 일본말로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람부터 건지고는 이어 몇 사람을 더 건지는 시늉만 하다 사람들을 버려둔 채 떠나버렸다. 배에 탄 118명이 이 사고로 생목숨을 잃었다. 명반석 임시저장고 앞에는 당시의 비극을 기록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옥매광산 광부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네티즌 모금이 이뤄져 덩그러니 시멘트 건물만 서 있던 곳에 2007년 1월 ‘옥매광산 역사 이야기’ 안내판이 세워진 것이다. 그해 9월에는 1300명의 기부자가 1400만 원의 성금을 모아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는 저마다 주머니를 털어서 낸 1만 원 남짓의 자발적 성금으로 세운 것이어서 참으로 소중하고 귀하다.
# 지금은 사라진 심적암을 찾아가는 길 해남의 명소를 꼽으라면 대흥사가 세 손가락 안에 능히 꼽힌다. 유서 깊은 호남 전통 사찰의 맥을 잇고 있는 대흥사는 ‘한국의 산지 승원’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대흥사는 오랜 내력과 이야기들이 스며 그게 자연스럽게 운치와 풍류로 드러난다. 청량하고 짙은 숲길과 계곡의 경관도 그렇고, 사찰 들머리의 고풍스러운 유선여관이며, 원교 이광사의 글씨가 걸린 대웅보전에 새겨진 이야기도 그렇다. 한번 시작했다 하면 이야기들이 두루마리 휴지처럼 풀려나오지만, 대흥사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자. 해남의 대흥사까지 갔던 건, 대흥사를 가고자 해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따로 있다. 대흥사가 거느렸던 암자 ‘심적암’이다. 이곳에는 절집의 운치 대신, 암자의 고즈넉함 대신, 110년 전의 뜨거운 죽음이 묻혀 있다. 대흥사는 두륜산에 모두 9개의 암자를 품고 있다. 하지만 심적암은 9개 암자에 속하지 않는다. 허물어져 지금은 빈터만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부서진 기왓장이 나뒹구는 그 텅 빈 공간을 찾아간다. 심적암 터는 관음암, 남암으로 이어지는 두륜산 짙은 숲에 있다. # 구한말 항일운동의 최후 격전지
심적암 의병을 이끌던 대장은 전북 진안 출신의 황준성이었다. 대한제국 군대에서 참령(參領·지금의 소령계급)이었던 황준성은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 강제 해산조치가 내려지자 항일운동에 나섰다 체포돼 전남 완도로 유배됐다. 유배된 이듬해 그는 항일민병대를 조직하고 완도의 유배지에서 탈출해 완도와 해남 일대에서 무장 의병활동을 하면서 의병 자금을 모집하고 일진회원과 일본 헌병의 밀정을 처단했다. 그는 심적암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두 달여 만에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졌다. 심적암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은 해남 의병들의 죽음은 금세 잊혔다. 그건 아마도 ‘승전(勝戰)의 이야기’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암자가 언제 허물어졌는지조차 기록이 없고, 깨진 기왓장만 나뒹구는 암자 터가 110년 동안 버려지듯 방치됐던 것도, 패전이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의병의 의로운 죽음이야말로 오래 기억하고 기려야 할 일이 아닌가. 승전의 영광보다 패전의 치욕 속에서 죽음으로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들이 더 감동적으로 다가오지 않는가 말이다. 건물터의 일부 기단과 우물터, 석축 등이 남아 있는 심적암 터에서는 지난 6월부터 발굴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오는 10월까지 발굴작업을 마친 뒤 암자를 복원할 계획이다. 심적암의 110년 전 모습은 천안의 독립기념관 전시실에 딱 한 장 흐릿한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다. 일제가 발간한 ‘남한폭도 대토벌기념 사진첩’에 실린 사진이다. 일제는 항일 의병을 사살을 사살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를 기념하는 사진첩까지 냈다.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다. ‘폭도’라니, ‘토벌’이라니…. # 적군의 죽음을 거두어 묻다
해남에서 진도로 건너가는 진도대교 아래 바다가 울돌목이다. 그곳에서 열세 척의 배로 왜군을 초토화시킨 명량대첩이 있었다. 명량대첩은 세계 해전사에 기록될 만큼 대승을 거둔 승전이었지만, 진도 사람에게 명량대첩은 비극의 전조였다. 전투가 끝난 뒤 이순신 장군은 곧바로 신안의 당사도로 돌아갔다. 조선 수군이 돌아간 뒤에 패전한 왜군들은 진도에 상륙했고 닥치는 대로 주민들을 도륙했다. 해전에서의 패전에 대한 복수였다. 왜군들은 무기조차 없는 양민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승전의 환호 뒤에는 이런 처참한 비극이 있었다. 명량해전이 끝나고 왜덕산 아래 내동마을의 바다에는 왜군들의 시신이 수없이 떠밀려 왔다. 해전에서 수장당한 왜군이 줄잡아 4000명이었다니 왜 안 그랬을까. 바닷가로 연방 떠밀려 오는 시신을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진도 사람들은, 왜군의 시신을 거뒀다. 그러고는 일본이 바라다보이는 산자락에 묻어주었다. 전쟁 중 자신들을 죽인 적의 시신을 수습해 안장한 사례는 세계 전사에서 전무후무한 일이 아닐까. 자신들에게 칼을 겨누고 가족과 이웃의 목을 벤 왜군의 시신을, 도대체 어떻게 거둬줄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 왜덕산의 감동, 코무덤의 야만 근본적인 이유는 늘 죽음과 가까이 생활해야 하는 바닷가 사람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었다. 적군을 묻어준 것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죽음에 대한 존중’이었다는 것이고, 하나는 죽음을 수습하지 않으면 해를 입을 것이란 두려움이었다는 것이다. 진실이 어디에 있든 분명한 건 진도 사람은 적군의 죽음을 기꺼이 수습해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는 것이다. 진도에 왜덕산이 있다면 일본 교토(京都)에는 ‘코무덤’이 있다. 조선인들의 코를 잘라 소금에 절여 승전의 전리품으로 본국으로 가져간 왜군들의 잔인성과 야만을 보여주는 곳이다. 왜덕산과 코무덤. 이만큼 극명한 대립이 또 있을까. 하나의 전쟁에서 두 나라의 적군 죽음에 대한 태도는 그야말로 극과 극이다. 적의 죽음마저도 버려두지 않고 거뒀던 마음은 일본인들에게도 감동이었던 모양이었다. 지난 2006년 8월 15일, 광복절에 명량해전에서 전사한 일본 수군의 무장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의 후손과 히로시마(廣島) 수도대학 교수 및 대학생이 진도의 왜덕산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그때 이후로 후손들은 해마다 명량대첩 축제 기간인 10월 진도를 방문해 위령제를 지내고 한·일 양국이 다시는 서로에게 칼을 겨누는 일이 없도록 평화를 기원하고 있다. 400여 년 전 왜덕산에서 잠든 왜병의 무덤은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과오에 대한 반성, 그리고 반성과 사죄의 토대 위에서 가능한 양국 평화의 기원을 보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곳에서 아쉬운 건 왜덕산에 어떠한 표식도 기념물도 없다는 것이다. 소박한 기념비나 안내판이라도 세워서 무덤의 내력이라도 전해줄 수 있다면 좋겠건만…. 아, 그리고 순서가 바뀌었지만 명량해전 전투에서 숨진 수군과 상륙한 왜군에게 목숨을 잃은 진도사람을 묻은 ‘정유재란 순절묘역’은 왜덕산에 앞서 먼저 들러야 하겠다. 확인된 것만 232기에 달하는 조선 수군과 진도 사람들의 무덤이 산자락 가득 들어선 곳이다. 해남과 진도를 넘나드는 역사여행은, 고통과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진도에서 깊은 한을 품은 소리 한 자락 듣는 것으로 여행을 마무리하는 것이 맞춤하다. 진도에서는 죽은 자들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 극락으로 보내는 ‘씻김굿’이 있다. 공연 무대에 자주 오르는, 출상 전날 밤에 상가의 마당에서 밤샘하며 유가족을 위로하는 ‘진도 다시래기’도 죽음에 관한 소리다. 진도에서는 금·토·일요일과 수요일에는 늘 민속공연이 펼쳐진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매주 토요일 오후 2시 진도읍 향토문화회관에서 열리는 진도토요민속여행. 민요부터 소고춤, 북춤, 씻김굿, 풍류가 등이 옴니버스의 형태로 이어지는 무료 공연이다. 금요일에는 국립남도국악원에서 금요국악공감 공연이, 일요일에는 해창민속전수관에서 일요상설공연이, 그리고 수요일에는 진도군무형문화재 전수관에서 ‘진수성찬’ 공연이 펼쳐진다. ■ 여행정보 해남 옥동리의 명반석 임시저장고는 내비게이터에 ‘옥동리방파제’를 입력하고 가면 된다. 심적암은 대흥사 종무소에 문의하고 찾아가는 게 좋겠다. 대흥사로 드는 차로에서 관음암, 남암 이정표를 보고 길을 꺾어 들어가야 한다. 심적암을 알리는 이정표는 없고,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는 컨테이너와 발굴작업을 알리는 현수막이 길옆에 있으니 그걸 보고 찾아가야 한다. 가장 찾아가기 어려운 곳이 왜덕산이다. 내비게이터에 ‘전남 진도군 고군면 내산리 산162’를 입력하고 찾아가야 하는데 막상 주소로 찾아가서도 어디가 왜덕산인지 알 수 없다. 왜덕산 곁에서 살면서 무덤을 돌보다가 8년 전 작고한 이기수 씨의 공적비가 서 있는 오른쪽 언덕이 바로 왜덕산이다. 진도에는 삼별초의 유적도 곳곳에 있다. 몽골군에 항복한 고려정부군에 반기를 든 삼별초는 강화에서 10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이곳 진도로 내려와 진도에 성을 쌓고 자주와 평등 세상을 기치로 내걸며 또 하나의 고려정부를 선언했다. 하지만 삼별초는 진도로 내려온 지 아홉 달 만에 여몽연합군에 의해 함락됐다. 진도에는 삼별초의 대몽항전의 근거지였던 용장산성과 삼별초군이 끝까지 항전했던 남도 진성, 삼별초를 이끌다 진도에서 최후를 맞은 배중손 장군을 기리는 사당 등의 유적이 있다. 임회면 굴포리 포구의 배중손 사당만은 꼭 들러보자. 주먹을 불끈 쥔 배중손 장군의 동상은 결연하고, 경주 배씨 문중의 후손들이 세운 사당 앞 비석의 문장은 뜨겁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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