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섬멸하듯 마음을 다스려 천하를 굽어보다
절의와 기백의 화신, 남명 조식
재야의 호걸지사가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고 시폐(時弊)를 고발하던 전통은 낯설지 않다. 그중에서도 조식의 서릿발 같은 날카로운 비판과 엄격한 처신은 따라올 만한 자가 없었다. 천 길의 절벽처럼 우뚝한 ‘벽립천인(壁立千)’의 자세(寒岡集, 祭南冥曺先生文), 가을 서리와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뜨겁고도 매서운 ‘추상열일(秋霜烈日)’의 정신이 바로 남명을 상징하던 유명한 문구다.(東岡集, 南冥先生言行錄) 천리 밖에서도 사람 머리칼을 쭈뼛하게 만드는 매서운 가르침을 받았노라고 전한 이도 있다.(吳健, 歷年日記) 그의 문인들이 임진왜란 의병장으로 활약하며 혁혁한 공훈을 세운 것도 스승의 가르침과 무관하지 않았다. 수제자 정인홍의 실각으로 대북(大北) 정권이 몰락하자 조식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냉각됐지만, 사관(史官)도 남명이 홀로 초야에 묻혀 안빈자락(安貧自樂)하며 평생 출사(出仕)하지 않은 절의의 인물이란 점을 부정하진 못했다.
조식은 경세의 포부를 지닌 열혈남아였다. 출사한 적이 없지만 무진봉사(戊辰封事), 을묘·정묘사직소에서 보이듯 국정에 지대한 관심을 평생 가졌다. 그 역시 사화의 칼날을 빗겨가지 못했고 기묘사화(1519년) 때 숙부 조언경(曺彦卿)을, 을사사화(1545년) 때 절친한 벗 여럿을 잃었다. “사대부의 큰 절개는 오직 출처(出處)에 달려 있을 뿐이다”고 본 남명은 명종~선조 연간에도 출사할 시점이 아니라고 판단했다.(來庵集, 南冥先生病時事蹟) 퇴계가 도산에 물러나 은거한 자신을 ‘퇴도만은(退陶晩隱)’이라 표현하려고 했을 때, 남명은 무도(無道)한 세상에 출사(出仕)한 경험이 있던 퇴계가 어찌 은사(隱士)로 불릴 자격이 있겠냐며 비판했다.(練藜室記述, 宣祖朝儒賢條) 이런 점에서 볼 때 남명이 임종하는 순간을 맞아 오로지 ‘처사(處士)’로만 불러줄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했던 것은 자신에 대한 최대 찬사였다고 볼 수 있다.(南冥集, 補遺, 行錄)
하지만 그는 세상을 잊은(忘) 사람이 결코 아니며 다만 물러날 때 물러나고 나아갈 때 나아간, ‘시중(時中·정확히 상황에 맞게 처신)’의 성인(聖人) 공자를 배우려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南冥先生編年) 맹자가 그랬듯이 도(道)가 없는 세상에선 물러나 홀로 선을 닦고(獨善其身) 도가 있는 세상에 나아가 천하백성을 함께 구제하는 것(兼濟天下·兼善)이 그의 평생 포부였다. 과거 준비에 한창이던 20대 중반 그는 ‘성리대전(性理大典)’을 탐독하던 중 원나라 유학자 허형(許衡)의 말을 접하고 큰 감명을 받았다. 세상에 나가선 은나라 탕왕 때 재상 이윤(伊尹)처럼 경세제민(經世濟民)의 뜻을 품어 사업을 일으키고, 물러나면 공자의 수제자 안연(顔淵)처럼 그의 학문을 목표 삼아 자신을 단속하는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리라 다짐한 것도 이 무렵이다.(南冥集, 行狀)
그는 자세히 따지며 변론하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고 이런 빈말(空言)은 도리어 실천궁행에 해가 된다고 보았다.(南冥集, 行狀) 입으로는 천리(天理)와 성정(性情)에 대해 떠들면서도 행실에선 오히려 못 배운 자보다 못한 사대부들의 세태에 염오(厭惡)를 느꼈다.(南冥集, 與吳御史健書) 조식은 송대 유학자들 이후 저술이 완비되었고 학문 방법도 확연해져서 초학자가 책만 펼치면 세상 이치를 알 수 있기 때문에 뒷날 아무리 훌륭한 스승이 가르쳐 봐야 더 보탤 게 없다고 판단했다.(南冥集, 奉謝金進士肅夫) 그래서 정주(程朱·북송시대 정호, 정이 형제와 주희) 이후 더 이상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가 하면(桐溪集, 學記跋), 제자들에게 경서(經書)를 강독하지 않은 채 오로지 본인 눈만 뜨면 천지일월을 알 수 있기에 홀로 ‘반구자득(反求自得)’할 것을 강조했다.(東岡集, 南冥先生行狀) 개인의 자각과 구체적 행위에 바탕을 둔 철저한 실천유학을 지향했던 것이다.
조식은 동시대를 호흡한 사림의 종장 이황으로부터 여러 번 비판적 언질을 받았다. 양자 모두 서로에 대해 학문적 거리감과 세계관의 차이를 숨기지 않고 드러냈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간의 ‘사칠논변(四七論辨)’이 한창 벌어지던 때(1561년), 퇴계문인 금난수(琴蘭秀)가 합천에 살던 남명을 방문했다. 금난수에게 조식은 이렇게 말했다. “호남 유생 한 명(기대승)이 퇴계와 함께 성리설(性理說)에 대해 논쟁한 것을 아는가. 후생(後生)은 전현(前賢)에 미치지 못하므로 전현의 말씀을 실천하기도 부족한데 고원하게 성리(性理)의 학문을 논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네. 비록 묻는 이가 있어도 퇴계가 저지했어야 마땅한데 오히려 논쟁을 확대시킨 것을 납득할 수 없네. 만약 나더러 논쟁하라고 하면 나는 전현의 말씀을 아직 행동으로 옮기지도 못했는데 무슨 여유가 있어 성리를 논하겠는가. 이 말을 퇴계에게 꼭 전해주게.”(惺齋日記, 辛酉年 4월 18일) 논쟁이 실천에 무용하다고 보고 극력 배척한 것을 알 수 있다.
남명은 퇴계에게 서신을 보내 고담준론(高談峻論)을 일삼는 행태를 직접 따지기도 했다.(1564년) “요즘 학자들은 손으로 청소하고 비질하는 방법도 알지 못하면서 입으로만 천리(天理)를 말하며 헛된 이름이나 훔쳐 남을 속입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 상처를 입고 그 피해가 결국 다른 사람에게 미치니, 선생 같은 장로(長老)께서 꾸짖어 그만두게 하지 않기 때문인 듯합니다. 저 같은 사람이야 마음이 황폐해 찾아오는 이가 드물지만 선생께선 경지가 높아 우러르는 사람이 많으니 그들을 억제시켜 타이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南冥集, 與退溪書) 고원한 논의(上達)에 빠지지 말고 ‘쇄소응대진퇴(灑掃應對進退)’와 같은 일상사의 작지만 꼭 필요한 생활윤리(下學)부터 먼저 가르치란 말이었다. 문인 오건(吳健)에게 준 서신에서는, 내실도 없이 겉만 화려하게 꾸미는 시속이 퇴계 때문에 더 증폭되었다고 비판한다.(1571년) “시속에서 숭상하는 것을 보면 당나귀 가죽에 기린 모형을 뒤집어씌운 것과 같은 고질병이 있습니다.… 이는 실로 사문(斯文·유학)의 종장이란 자가 오로지 상달만 추구하고 하학은 궁구하지 않아서 어려운 습속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그와 더불어 서신을 왕래하며 따졌지만 돌아보질 않았습니다.”(南冥集, 與吳子强書)
남명이 퇴계를 비난하며 잘못된 사대부 풍속을 꼬집은 것은 단순한 감정 차원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실제 퇴계는 공부하는 첫 관문에서 이치를 투철히 알지 못하면 공부가 중도에 끊기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빠질 우려가 있다고 경계했다. 그래서 배움의 첫 단계부터 ‘태극도설(太極圖說)’ ‘서명(西銘)’ 같은 우주자연의 원리와 인간 본성을 알 수 있게 하는 철학서를 숙지할 것을 강조했다.(聖學十圖, 第一圖·第二圖) 물론 퇴계도 ‘소학(小學)’을 중시하며 평이하고 명백한 도리에서 출발해 높고 어려운 이치를 깨우쳐야 한다고 했지만, 진리를 명백히 이해하는 것이 자기 완성을 위한 학문의 토대란 것을 무엇보다도 강조했다.(退溪全書, 重答黃仲擧) 남명은 퇴계가 ‘주역’ ‘역학계몽(易學啓蒙)’을 먼저 읽으며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순서를 뒤바꿔서 성명(性命)의 이치(理)를 강조했던 유폐가 육구연(陸九淵)의 심학(心學)보다 심하다고 비판하면서, 공부의 순서상 ‘소학’ ‘대학’ 등 윤리적 행위지침서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南冥別集, 言行總錄)
정인홍 등 문인제자들이 펴낸 행장(行狀)을 보면, 초학자가 성명(性命)의 이치에 대해 고담(高談)하는 것을 배움이 진실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 남명이 ‘취명멸실지죄(取名蔑實之罪·헛된 명성을 쫓고 실질을 버린 잘못)’로 통렬히 비판한 것을 알 수 있다. 논쟁과 분석을 배척하며 수행 위주의 실천원칙만을 고수한 조식의 태도는 이전 시대 사림파 선배인 소학동자들을 연상시킨다.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등 선배 사림의 과도한 ‘소학’ 준수와 완물상지(玩物喪志)의 폐해를 일으킨다고 본 시문(詩文)에 대한 비판 태도를 남명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평소 남명의 언행을 담은 ‘언행총록(言行總錄)’과 ‘편년(編年)’의 몇 가지 기록을 보자. “어렸을 때 대접에 물을 가득 담고 두 손으로 받들어 밤새 엎지르지 않게 지키면서 고행을 했다.” “닭 울음 소리를 듣고 새벽에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혁대를 맨 뒤 자세를 바르게 해서 꼿꼿이 앉아 있었는데 바라보면 마치 그림이나 조각상 같았다.” “규칙에 따라 확실하게 움직이며 과단성 있게 행동했고 엄숙하고 공경스러운 마음을 유지해서 절대 방만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식은 ‘경의(敬義)’의 철학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신명사도(神明舍圖)’와 ‘신명사명(神明舍銘)’을 작성했다. ‘신명’이란 신령스러운 작용을 하는 마음(心)을 뜻하며 ‘신명사’는 마음의 집을 가리킨다. ‘신명사도’는 마음의 집을 그린 그림이고 ‘신명사명’은 이 그림에 대한 해설이다. 남명은 마음 작용을 국가 운영에 비유해 설명한다. 마음을 ‘태일군(太一君)’이라 부르고 마음이 추구하는 이념인 천덕(天德)과 왕도(王道)를 실현하기 위한 경(敬) 공부를, 성곽 안의 국가 내부를 지키는 우두머리 신료 총재(宰) 역할에 비유했다. 또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곽 밖을 지키는 백규(百揆)와 대사구(大司寇)의 직책을 마음에선 의(義)의 역할로 대비했다. 외적을 방어할 때처럼 사욕(私欲)을 막는 공부를 남명은 ‘치찰(致察)’과 ‘극치(克治)’라고 불렀는데, 이것은 마음에 부정적 욕망이 일 때 그 기미를 세심하게 살피고 힘써 이겨내 극복하는 공부를 의미한다.
‘신명사명’에서 남명은 이런 공부 태도를 “낌새가 있자마자 용감하게 이겨내고 나아가 반드시 섬멸토록 한다”고 매우 강경하게 풀이했다. ‘남김 없이 모조리 죽여 없앤다’는 섬멸을 의미하는 ‘시살(殺)’이란 한자어를 사용했는데, 이에 덧붙인 해설을 보면 남명이 얼마나 과격하게 자기수양을 전개했는지 엿볼 수 있다. “밥해 먹던 솥도 깨부수고 주둔하던 막사도 불사르고 타고 왔던 배도 불 지른 뒤 사흘 먹을 식량만 가지고 병사들에게 죽지 않고는 결코 돌아오지 않으리란 의지를 보여줘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 비로소 ‘시살(殺)’이라고 말할 수 있다.”(南冥集, 神明舍銘, 附註) 사생결단의 각오로 자기 마음에 임하는 남명의 자세가 매섭기 그지없다. 그는 50세 무렵 감악산(紺岳山) 아래 포연(鋪淵)에서 동향 선비들과 유랑할 때 ‘욕천(浴川)’이란 시를 지으며 비슷한 감정을 피력한다. “사십 년 동안 온몸에 찌든 때, 천 섬 맑은 물로 깨끗이 씻노라. 만약 오장(五臟)에 조그만 티끌이라도 있다면, 지금 당장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부치리라!” ‘장자’ 소요유(逍遙遊)에 나오는 거대한 붕새의 목적지 ‘남명(南冥)’을 호로 삼을 만큼 호탕하고 드넓은 기상도 지녔지만, 시살, 섬멸, 고복(腹·배를 갈라 도려냄)에서 드러나듯 남명이 극렬하고 섬뜩한 정서를 강조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엄정하다 못해 잔혹할 정도로 극심했던 자기수련에 매진한 남명에 대해 퇴계가 내린 평가는 그리 좋지 못했다. 남명이란 본인의 호, ‘계부당(鷄伏堂)’ ‘뇌룡사(雷龍舍)’ 등 그가 지은 서실(書室)의 당호(堂號)가 선가(禪家)의 작품인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그리고 ‘장자’ 재유(在宥) 및 천운(天運)편 등에서 유래했다는 점 때문에 조식의 사유는 노장(老莊)의 기미를 띤 것으로 비판받았는데, 퇴계는 노장에서도 보기 힘든 기이한 논설이 많다고 지적했다.(退溪全書, 答黃仲擧(辛酉)) 더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이황은 사직소의 원색적인 비난성 글과 서신 중 극단적 발언들을 지적하며, 남명이 새롭고 기이한 것을 내세워 세상을 놀라게 하는 데 힘쓴 별난 선비(奇士)일 뿐 도리를 안 자가 아니라고 폄하했다.(退溪先生言行錄, 論人物) 남명이 끝내 출사하지 않은 점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그가 개결(介潔)하고 고상한 인물이라고 말하지만, 학문에서 이렇다 할 공부를 해놓은 게 없기 때문에 출사하지 못했을 뿐이다”라고 혹평했다.(上同) 이이도 마찬가지다. 남명이 지조 있는 깨끗한 선비로서 처사로 불릴지는 모르지만, 학문에서 체득한 주견이 없고 경세제민의 방책에서도 내세울 것이 없으므로 정치에 참여했더라도 성취한 점이 없었을 것이라는 비판적 발언을 남겼다.(栗谷全書, 經筵日記)
18세기 실학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조식에 대한 평가는 점차 반전되기 시작했다. 경기지역 남인(南人) 실학의 선두주자인 이익(李瀷)이 오로지 퇴계의 평가 때문에 남명이 협기(俠氣) 있는 일개 처사에 불과하다고 폄하된 것은 우스운 일이라고 입을 뗐다.(星湖僿說, 人事門, 退溪南冥條) 안정복도 퇴계 당시에는 도의 근원이 무엇인지 밝혀야 할 때였지만 자기 시대에서 보면 학자가 할 일이란 결국 남명이 말한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했다.(順菴集, 答南宗伯漢朝書) 입으로만 천리를 논하는(口談天理) 자들의 폐해를 지적할 때마다 남명의 발언은 새롭게 등장했다. 20세기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서 마지막 세대의 유교 지식인은 “퇴계가 도를 밝히는 데 바빴다면 남명은 세상을 구제하는 일에 독실했다”며 후자를 비호했다.(河謙鎭, 東儒學案, 德山學案) 관념과 이론이 아니라 현실을 구제하고 변혁하려는 열기가 드높을 때 남명 조식이 새롭게 해석되고 조명받은 것을 알 수 있다.
조식이 유학의 원리를 단순명료한 실천적 지침으로 한정한 것에 대해선 재고할 필요가 있다. 그는 천도(天道)와 성리(性理) 등 추상적 개념을 분석하고 논쟁하는 것을 싫어했지만, 이런 개념적 논쟁과 성찰이 현실의 강상윤리를 돌아보게 하는 역설적 역할을 맡기도 한다. 우리가 개념을 동원해 철학적 사유를 개진하는 것은 현실을 메타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새로운 이해의 지평을 열기 위해서다. 맹렬한 실천지향의 유학자, 도덕적 원리주의자에겐 이것이 사유의 과잉 혹은 잉여로 보일지 모르지만, 오히려 강고한 자기 신념, 시대의 통념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 우리는 사유의 초월적 능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시대의 장막을 벗고 유학 담론의 새 얼굴을 보려고 할 때도 추상적 이념과 논쟁은 불가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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