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여름 폭염 속의 산행은 고되고 숨찬 땀 범벅의 고행입니다. 그걸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여기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태백과 정선을 가르는 함백산과 만항재, 그리고 그 능선을 북쪽으로 잇는 분주령 너머 대덕산 얘기입니다. 백두대간의 지붕을 이루는 이 산들은 한여름에도 맑고 서늘합니다. 진초록 사이로 난 두 뼘 남짓 넓이의 산속 오솔길에서 반팔 아래 팔뚝에는 자주 소름이 돋았습니다. 차갑고 청량한 기운 때문일까요. 함백산과 대덕산의 초록에서는 탁한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숲 사이로 난 유순한 길이며, 초록의 이파리에 맺힌 빗방울, 나무 둥치를 뒤덮은 이끼, 산새들의 경쾌한 울음소리까지 모든 것이 맑은 기운으로 가득했습니다. 숲은 깊디 깊었고, 그 깊은 숲속에서는 풍성한 여름 꽃들이 앞다퉈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숲에서는 오락가락하는 장맛비를 만난다 해도 좋습니다. 하늘을 가리는 나뭇잎으로 후드득 듣는 빗소리도 좋았고, 빗물에 촉촉하게 젖어 올라오는 흙내음도 향긋했습니다. 발 밑이 좀 질척이긴 했지만 물을 빨아들여 반짝이는 초록색 이끼며, 이파리 위를 동그르르 구르는 물방울의 운치, 첩첩이 이어진 능선을 따라 운무가 파도처럼 몰려드는 풍경은 이즈음 같은 장마철이 아니면 좀처럼 만나볼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한여름날의 산행. 다른 곳이라면 고행에 가까운 일이겠으되, 백두대간의 지붕을 따라가는 이 길만큼은 감히 ‘천상의 산책로’라 이름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 대덕산과 함백산, 그 갈림길에 서다 태백의 분주령과 대덕산, 그리고 만항재와 함백산은 본디 하나로 이어진 산줄기다. 툭툭 불거진 굵은 힘줄처럼 굽이치는 산의 맥(脈)이 이어진다. 정선군 고한리에서 태백시 삼수령으로 넘어가는 두문동재 터널 위쪽의 두문동재 정상쯤에서 옛 38번 국도와 이 산줄기가 ‘열 십(十)’자로 딱 만난다. 여기서 잠깐. 두문동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고 넘어가자. ‘두문(杜門)’이라 함은 곧 ‘문을 닫아 둔다’는 뜻. 고려가 망하자 황해도 개풍군 광덕산의 두문동에 숨어들어 두문불출하던 일흔 두 명의 고려 충신. 그들 중에서 전오륜을 비롯한 일곱이 여기로 옮겨와 망국의 한을 달래며 살았다고 해서 두문동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그런데 실제로 일곱 충신들이 은거했던 곳은 두문동재에서 서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낙동리의 서운산 부근이었다. 그 산자락 아래 ‘칠현이 은거했다’는 뜻의 마을 이름 ‘거칠현동(居七賢洞)’이 있다. 충신을 모신 사당 칠현사(七賢祠)가 있고, 일곱 충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칠현비(七賢碑)도 여기 세워져 있다. 그렇다면 거칠현동이 진짜 두문동일 텐데 왜 이 고갯길에 ‘두문동’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일까. 짐작하건대 아마도 이쪽 고갯길이 꼭꼭 숨어 살 수 있을 정도로 깊기 때문인 듯하다. 옛 38번 국도의 두문동재 정상에 닿으면 왼쪽으로는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고, 오른쪽으로는 함백산으로 오르는 산길이다. 대덕산과 함백산. 둘 중 어디가 더 낫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한여름, 더구나 요즘 같은 장마철 무렵이라면 날씨에 따라 길을 선택하는 게 요령이다. 일단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먼저 고려한다. 맑은 날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 오락가락하는 보슬비가 내린대도 대덕산 쪽이 더 낫다. 그러나 빗줄기가 제법 굵다면 뒤로 물러서 산행 대신 차로 함백산을 올라가길 권한다. 맑은 날이면 대덕산의 숲길을 걷고,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물러서 함백산을 차로 오르면 된다는 얘기다. 왜 그런지는 차차 얘기하기로 하자.
# 분주령 너머 대덕산에서 만나는 초록빛 먼저 대덕산부터 시작하자. 무릇 귀하고 빼어난 것들은 쉽게 만나지 못하는 법이다. 여행지도 마찬가지다. ‘아무나 언제든 오라’며 손짓하는 곳보다는 출입을 막고 까다롭게 구는 장소일수록 더 나은 곳일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두문동재 정상에서 분주령과 대덕산이 바로 그런 곳이다. 두문동재 정상 분주령을 지나 대덕산으로 오르는 숲길. 그 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건 하루에 딱 300명뿐이다. 그런데 실제로 분주령에 발을 들이는 인원은 300명을 다 못 채우는 날이 더 많다. 최소 나흘 전에는 출입 예약을 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규정 때문이다. 출입만 까다로운 게 아니다. 출입을 허가받았다고 해도 지켜야 할 게 있다. 탐방로에서 한 뼘도 벗어나지 말아야 하고, 입산은 오전 9시 이후, 그리고 오후 6시 이전에는 내려와야 한다. 카메라는 괜찮지만 삼각대는 가져갈 수 없다. 지리산처럼 거대한 산군(山群)이 아니고 길어야 4시간 남짓의 산길을 출입하는 게 이렇듯 까다로운 것은 두문동재 정상의 금대봉에서 대덕산을 잇는 분주령 능선 일원이 일찌감치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발길을 통제하기 시작한 게 1993년이니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다. 그 이전에도 이쪽의 산은 워낙 멀고 깊어서 산나물을 뜯는 동네 주민 말고는 거의 손이 닿지 않았다. 인간의 간섭 없이 수십 년을 자연이 저희들끼리 우거져 깊어진 숲이란 얘기다. 차가 닿는 두문동재 정상의 높이는 이미 1268m. 여기서 금대봉을 넘고 분주령의 능선을 지나 대덕산에 올랐다가 검룡소 주차장 쪽으로 내려가는 모두 9.4㎞의 길이 시작된다. 앞만 보고 타박타박 걷는다면 4시간 30분쯤. 야생화 앞에서 자주 걸음을 멈추고,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오래 머물고 싶다면 6시간쯤은 잡아야 한다. 웬만한 산의 정상 높이에서 시작하는 길이니만큼 숲길은 유순한 내리막이라 편안하다. 대덕산으로 오르는 잠깐의 구간을 빼고는 숨 한번 차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부담스럽다면 분주령에서 대덕산으로 오르지 말고 바로 검룡소 주차장 쪽으로 내려오면 된다. 이렇게 길을 잡으면 4㎞ 정도 거리가 줄어들고 전 구간이 내리막이다. 산행시간도 서너 시간이면 넉넉하니 아이들과 함께 걷는다 해도 별 부담이 없다.
# 꽃이름을 불러주며 우중의 숲을 걷다 본디 이곳은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들이 교대로 피고 지는 곳이다. 들머리의 길섶에서부터 야생화들이 마중을 나온다. 산꿩의다리, 초롱꽃, 태백기린초, 함박꽃, 눈빛승마, 광릉갈퀴…. 여기에다 터리풀과 범꼬리가 군락을 이뤄 피었다간 지고 있다. 선홍색 요염한 빛깔의 하늘말나리와 털중나리가 이제 막 피기 시작했으니 하늘나리와 말나리가 그 뒤를 이을 것이고, 동자꽃과 둥근이질풀도 지천으로 피어날 것이다. 이 길을 걷자면 야생화 도감 한 권쯤 챙겨 가는 건 필수다. 마주치는 꽃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것과 그냥 눈으로 훑고 지나치는 것은 감흥의 격이 다르다. 이름을 불러주려면 자세히 봐야 하고,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찬찬히 들여다볼 때 비로소 꽃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이름 부르기’. 그게 바로 야생화를 가장 아름답게 보는 방법인 셈이다. 야생화가 무리지어 피어 있는 구릉을 지나 숲으로 들면 피나무, 당단풍, 신갈나무, 물푸레나무, 까치박달, 층층나무들이 하늘을 가린 채 초록의 그늘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장마가 길어지면 꽃은 쉬 지고, 새로 필 꽃들도 개화를 미루기 마련. 열흘쯤 전에 구릉마다 지천으로 피어 나비떼를 불러모으던 연분홍의 범꼬리들도 지금은 비바람에 져가고 있을 터다. 하지만 이 숲에 꽃만 있는 건 아니다. 꽃이 다 진다 해도 빗방울이 도르르 구르는 초록의 잎들만으로도 숲길은 충분히 아름답다. 그 길은 두 뼘 남짓 폭의 오솔길 외에는 모든 게 다 초록빛이다. 한껏 물을 빨아들인 이파리들의 초록이 얼마나 싱그럽고 청량한지는 그 길을 걸어 보면 알 수 있다. 여기다가 비에 젖은 숲에서 듣는 새소리는 또 얼마나 매혹적인지. 깊은 숲의 저쪽 능선에서 검은등뻐꾸기가 이렇게 운다. “쪽박바꿔주∼”. 그 틈으로 큰유리새 울음이 끼어든다. “주이찌,주이찌∼”. 온 산이 다 울리는 벙어리뻐꾸기 소리는 또 이렇다. “웅쿵∼웅쿵∼”. 새소리를 벗 삼아 걷다가 줄딸기의 탱글탱글한 열매 하나 따서 입에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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