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백두대간의 지붕 대덕 함백산

醉月 2013. 7. 11. 01:30

빗속에서 차를 타고 단숨에 올라간 함백산 정상에서 바라본 태백 매봉산 일대의 풍경. 풍력발전기가 세워진 매봉산이 마치 구름 바다 위의 섬처럼 떠 있다. 요즘처럼 비가 잦은 장마철에 함백산에서는 파도처럼 물결치는 정선과 태백 일대 산군(山群)의 능선들을 따라 운무가 흘러다니는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한여름 폭염 속의 산행은 고되고 숨찬 땀 범벅의 고행입니다. 그걸 모르는 바 아닙니다만, 여기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태백과 정선을 가르는 함백산과 만항재, 그리고 그 능선을 북쪽으로 잇는 분주령 너머 대덕산 얘기입니다.

백두대간의 지붕을 이루는 이 산들은 한여름에도 맑고 서늘합니다. 진초록 사이로 난 두 뼘 남짓 넓이의 산속 오솔길에서 반팔 아래 팔뚝에는 자주 소름이 돋았습니다. 차갑고 청량한 기운 때문일까요. 함백산과 대덕산의 초록에서는 탁한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습니다. 숲 사이로 난 유순한 길이며, 초록의 이파리에 맺힌 빗방울, 나무 둥치를 뒤덮은 이끼, 산새들의 경쾌한 울음소리까지 모든 것이 맑은 기운으로 가득했습니다. 숲은 깊디 깊었고, 그 깊은 숲속에서는 풍성한 여름 꽃들이 앞다퉈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숲에서는 오락가락하는 장맛비를 만난다 해도 좋습니다. 하늘을 가리는 나뭇잎으로 후드득 듣는 빗소리도 좋았고, 빗물에 촉촉하게 젖어 올라오는 흙내음도 향긋했습니다.

발 밑이 좀 질척이긴 했지만 물을 빨아들여 반짝이는 초록색 이끼며, 이파리 위를 동그르르 구르는 물방울의 운치, 첩첩이 이어진 능선을 따라 운무가 파도처럼 몰려드는 풍경은 이즈음 같은 장마철이 아니면 좀처럼 만나볼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한여름날의 산행. 다른 곳이라면 고행에 가까운 일이겠으되, 백두대간의 지붕을 따라가는 이 길만큼은 감히 ‘천상의 산책로’라 이름하기에 모자람이 없었습니다.


# 대덕산과 함백산, 그 갈림길에 서다

태백의 분주령과 대덕산, 그리고 만항재와 함백산은 본디 하나로 이어진 산줄기다. 툭툭 불거진 굵은 힘줄처럼 굽이치는 산의 맥(脈)이 이어진다. 정선군 고한리에서 태백시 삼수령으로 넘어가는 두문동재 터널 위쪽의 두문동재 정상쯤에서 옛 38번 국도와 이 산줄기가 ‘열 십(十)’자로 딱 만난다.

여기서 잠깐. 두문동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고 넘어가자. ‘두문(杜門)’이라 함은 곧 ‘문을 닫아 둔다’는 뜻. 고려가 망하자 황해도 개풍군 광덕산의 두문동에 숨어들어 두문불출하던 일흔 두 명의 고려 충신. 그들 중에서 전오륜을 비롯한 일곱이 여기로 옮겨와 망국의 한을 달래며 살았다고 해서 두문동이라 불렸다고 전한다. 그런데 실제로 일곱 충신들이 은거했던 곳은 두문동재에서 서북쪽으로 한참 떨어진 낙동리의 서운산 부근이었다. 그 산자락 아래 ‘칠현이 은거했다’는 뜻의 마을 이름 ‘거칠현동(居七賢洞)’이 있다. 충신을 모신 사당 칠현사(七賢祠)가 있고, 일곱 충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칠현비(七賢碑)도 여기 세워져 있다. 그렇다면 거칠현동이 진짜 두문동일 텐데 왜 이 고갯길에 ‘두문동’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일까. 짐작하건대 아마도 이쪽 고갯길이 꼭꼭 숨어 살 수 있을 정도로 깊기 때문인 듯하다.

옛 38번 국도의 두문동재 정상에 닿으면 왼쪽으로는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산길이고, 오른쪽으로는 함백산으로 오르는 산길이다. 대덕산과 함백산. 둘 중 어디가 더 낫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한여름, 더구나 요즘 같은 장마철 무렵이라면 날씨에 따라 길을 선택하는 게 요령이다.

일단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숲길을 먼저 고려한다. 맑은 날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 오락가락하는 보슬비가 내린대도 대덕산 쪽이 더 낫다. 그러나 빗줄기가 제법 굵다면 뒤로 물러서 산행 대신 차로 함백산을 올라가길 권한다. 맑은 날이면 대덕산의 숲길을 걷고, 비가 쏟아지는 날이면 물러서 함백산을 차로 오르면 된다는 얘기다. 왜 그런지는 차차 얘기하기로 하자.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분주령의 숲길에는 온통 초록빛으로 가득하다. 가득한 초록빛 사이로 난 유순한 오솔길을 걷는 맛이 청량하기 이를 데 없다.

# 분주령 너머 대덕산에서 만나는 초록빛

먼저 대덕산부터 시작하자. 무릇 귀하고 빼어난 것들은 쉽게 만나지 못하는 법이다. 여행지도 마찬가지다. ‘아무나 언제든 오라’며 손짓하는 곳보다는 출입을 막고 까다롭게 구는 장소일수록 더 나은 곳일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두문동재 정상에서 분주령과 대덕산이 바로 그런 곳이다. 두문동재 정상 분주령을 지나 대덕산으로 오르는 숲길. 그 길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는 건 하루에 딱 300명뿐이다. 그런데 실제로 분주령에 발을 들이는 인원은 300명을 다 못 채우는 날이 더 많다. 최소 나흘 전에는 출입 예약을 해야 한다는 까다로운 규정 때문이다. 출입만 까다로운 게 아니다. 출입을 허가받았다고 해도 지켜야 할 게 있다. 탐방로에서 한 뼘도 벗어나지 말아야 하고, 입산은 오전 9시 이후, 그리고 오후 6시 이전에는 내려와야 한다. 카메라는 괜찮지만 삼각대는 가져갈 수 없다.

지리산처럼 거대한 산군(山群)이 아니고 길어야 4시간 남짓의 산길을 출입하는 게 이렇듯 까다로운 것은 두문동재 정상의 금대봉에서 대덕산을 잇는 분주령 능선 일원이 일찌감치 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발길을 통제하기 시작한 게 1993년이니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다. 그 이전에도 이쪽의 산은 워낙 멀고 깊어서 산나물을 뜯는 동네 주민 말고는 거의 손이 닿지 않았다. 인간의 간섭 없이 수십 년을 자연이 저희들끼리 우거져 깊어진 숲이란 얘기다. 차가 닿는 두문동재 정상의 높이는 이미 1268m. 여기서 금대봉을 넘고 분주령의 능선을 지나 대덕산에 올랐다가 검룡소 주차장 쪽으로 내려가는 모두 9.4㎞의 길이 시작된다.

앞만 보고 타박타박 걷는다면 4시간 30분쯤. 야생화 앞에서 자주 걸음을 멈추고, 하늘이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오래 머물고 싶다면 6시간쯤은 잡아야 한다.

웬만한 산의 정상 높이에서 시작하는 길이니만큼 숲길은 유순한 내리막이라 편안하다. 대덕산으로 오르는 잠깐의 구간을 빼고는 숨 한번 차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부담스럽다면 분주령에서 대덕산으로 오르지 말고 바로 검룡소 주차장 쪽으로 내려오면 된다. 이렇게 길을 잡으면 4㎞ 정도 거리가 줄어들고 전 구간이 내리막이다. 산행시간도 서너 시간이면 넉넉하니 아이들과 함께 걷는다 해도 별 부담이 없다.

왼쪽부터 분주령 일대에서 만난 종 모양의 초롱꽃, 나비가 꿀을 빨고 있는 범꼬리, 복슬복슬한 꽃술의 분홍터리풀.

# 꽃이름을 불러주며 우중의 숲을 걷다

본디 이곳은 봄부터 가을까지 야생화들이 교대로 피고 지는 곳이다. 들머리의 길섶에서부터 야생화들이 마중을 나온다. 산꿩의다리, 초롱꽃, 태백기린초, 함박꽃, 눈빛승마, 광릉갈퀴…. 여기에다 터리풀과 범꼬리가 군락을 이뤄 피었다간 지고 있다. 선홍색 요염한 빛깔의 하늘말나리와 털중나리가 이제 막 피기 시작했으니 하늘나리와 말나리가 그 뒤를 이을 것이고, 동자꽃과 둥근이질풀도 지천으로 피어날 것이다.

이 길을 걷자면 야생화 도감 한 권쯤 챙겨 가는 건 필수다. 마주치는 꽃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는 것과 그냥 눈으로 훑고 지나치는 것은 감흥의 격이 다르다. 이름을 불러주려면 자세히 봐야 하고, 허리를 굽혀 눈높이를 맞추고 찬찬히 들여다볼 때 비로소 꽃의 아름다움이 보인다. ‘이름 부르기’. 그게 바로 야생화를 가장 아름답게 보는 방법인 셈이다.

야생화가 무리지어 피어 있는 구릉을 지나 숲으로 들면 피나무, 당단풍, 신갈나무, 물푸레나무, 까치박달, 층층나무들이 하늘을 가린 채 초록의 그늘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장마가 길어지면 꽃은 쉬 지고, 새로 필 꽃들도 개화를 미루기 마련. 열흘쯤 전에 구릉마다 지천으로 피어 나비떼를 불러모으던 연분홍의 범꼬리들도 지금은 비바람에 져가고 있을 터다. 하지만 이 숲에 꽃만 있는 건 아니다. 꽃이 다 진다 해도 빗방울이 도르르 구르는 초록의 잎들만으로도 숲길은 충분히 아름답다. 그 길은 두 뼘 남짓 폭의 오솔길 외에는 모든 게 다 초록빛이다. 한껏 물을 빨아들인 이파리들의 초록이 얼마나 싱그럽고 청량한지는 그 길을 걸어 보면 알 수 있다.

여기다가 비에 젖은 숲에서 듣는 새소리는 또 얼마나 매혹적인지. 깊은 숲의 저쪽 능선에서 검은등뻐꾸기가 이렇게 운다. “쪽박바꿔주∼”. 그 틈으로 큰유리새 울음이 끼어든다. “주이찌,주이찌∼”. 온 산이 다 울리는 벙어리뻐꾸기 소리는 또 이렇다. “웅쿵∼웅쿵∼”. 새소리를 벗 삼아 걷다가 줄딸기의 탱글탱글한 열매 하나 따서 입에 넣는다.

새큼한 맛에 입안에 침이 가득 고인다. 후드득 비가 쏟아지면서 골짜기마다 운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비 내리는 숲길에서 오히려 걸음을 더 늦췄다. 빗물에 미끄러워진 나무 뿌리를 피해 딛느라 그러기도 했지만, 이 길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면 과연 믿으실는지….

# 장마철, 함백산 정상에서 만나는 구름의 바다

다음은 함백산 차례다. 두문동재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은대봉을 넘어 함백산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예약도 필요없고 출입 제한도 없다. 이쪽 길에서는 가지를 뒤튼 신갈나무와 물푸레나무들이 주인이다.

살아서 천년을 산다는 주목의 군락도 당당하다. 짙은 이끼를 두른 나무 그늘 아래는 흙목욕을 하며 땅을 뒤집은 멧돼지의 흔적이 이어진다. 이쪽의 길은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제법 허벅지가 뻐근해지는 오름길을 따라 줄잡아 4시간쯤은 헉헉대며 올라야 함백산 정상에 닿는다.

함백산의 해발고도는 1573m. 남한 땅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산이다. 우리 산을 높이 순으로 줄 세워 보면 한라와 지리, 설악산에 이어 덕유산, 계방산이 있고 그 뒤가 함백산이다. 태백산이며 오대산도 다 함백산의 뒷줄이다. 시야에 들어오는 일대의 모든 것을 다 발 아래로 두는 산인 셈이다. 그러니 함백산을 두 발로 오르는 일은 만만치 않다.

하지만 함백산 정상까지 단숨에 차가 올라간다. 그것도 제법 잘 포장된 시멘트 도로다. 함백산 정상에 방송시설물을 설치하면서 닦은 길인데 찾아가는 길도 간명하다. 정암사에서 만항재로 향하다 고갯마루 못미처 태백선수촌 이정표를 따라 좌회전한 뒤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바리케이드가 열린 시멘트 도로로 접어들면 근래 새로 만든 헬기장을 지나 정상까지 단숨에 오른다.

포장도로가 끝나는 지점에서 내려 5분만 걸으면 암릉 위의 함백산 정상표지석이다. 거기 오를 때마다 드는 생각이란 ‘이런 거대한 산을 차로 쉽게 오르는 게 혹 불경스러운 일이 아닐까’하는 것들이다.

장맛비가 제법 굵은 날에 대덕산 대신 함백산을 권한 건 차를 타고 쉽게 오를 수 있기도 하거니와, 비 내리는 날 함백산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구름 바다의 아름다움 때문이기도 하다. 함백산 정상에서의 조망은 가히 탁월하다. 거대한 산줄기가 겹겹이 겹쳐서 일렁이는 것이 마치 파도와도 같다.

비가 내리는 날에는 어김없이 이런 산줄기들이 온통 운무로 휘감긴다. 구름이 발 아래로 바다처럼 펼쳐지면 구름의 수면 위로 높은 봉우리들이 마치 수묵화 속의 섬과 같다. 매봉산의 풍력발전기들이 구름 속에 갇히기도 하고, 낮은 구름이 초록의 능선을 타고 넘어가거나 능선과 능선이 만나는 협곡 사이로 구름이 피어나기도 한다. 악천후나 꼭두새벽의 산행을 마다하지 않는 열혈 산꾼들에게만 간혹 허락되곤 하는 귀한 풍경인데, 함백산에서는 이런 풍경을 이렇게 쉽게 볼 수 있다. 불경스럽게도….


◆가는 길 = 중앙고속도로 제천나들목에서 영월 방면 38번 국도에 올라서 사북, 고한을 지난다. 태백으로 들어가는 두문동재 터널 입구에서 오른쪽 옛길로 오르면 고갯길 정상에 주차장이 있다. 두문동재 정상에서 금대봉-분주령-대덕산-검룡소 주차장을 잇는 산행 코스는 9.4㎞ 남짓. 차를 두문동재 정상에 두고 산행을 한 뒤 검룡소 주차장에서 택시(합동콜택시 033-552-4747)를 불러 출발지점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택시 요금은 3만5000원 정도. 분주령과 대덕산 코스는 태백시 환경과(033-550-2061)에 적어도 나흘 전까지 예약해야 한다.

함백산을 차로 오르려면 고한터널을 나와 태백 방면으로 가다 상갈래삼거리에서 정암사 방면으로 우회전, 만항재 못미처 태백선수촌 방면으로 좌회전해 1.5㎞쯤 가다 왼편으로 시멘트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된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하이원리조트가 가장 추천할 만한 숙소다. 가족 단위라면 마운틴 콘도가 낫겠고, 호텔에서 묵겠다면 강원랜드호텔보다는 컨벤션호텔을 추천한다. 강원랜드는 최근 카지노 시설을 대폭 확충하면서 어수선했던 로비 공간이 훨씬 깔끔해졌다. 스키리조트의 슬로프에 다양한 꽃들을 심어 운치 있는 산책 코스도 조성해 놨다. 하이원은 스키리조트지만 한여름 기온이 낮아 여름철도 겨울 못지않게 투숙객들이 몰리니 예약을 서둘러야 한다.

태백의 먹을거리라면 단연 한우. 저렴한 가격에 질 좋은 한우를 내는 이른바 ‘실비집’들이 즐비하다. 태성실비(033-552-5287)가 대표격. 돼지갈비는 조선옥(033-552-5631)이 유명하다. 두부조림과 갈치·고등어를 얼큰하게 조려내는 초막고갈두(033-553-7388)도 이름난 맛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