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 찾아나선 곤궁한 詩人… 얼어버린 입에선 詩가 술∼술
파교심매도… 마음이 가난해야 하는 이유
# 죽은 시인의 혼령
고려시대 문학을 가르칠 때 학생들에게 반드시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주인공은 고려시대 이름난 문인들 정지상(?∼1135)과 김부식(1075∼1151)이고, 출전은 이규보의 ‘백운소설’이다. 내용이 이렇다. 김부식이 정지상의 멋진 시구를 탐내다가 거절당했다. 그 후 김부식은 현달하고 정지상은 죽어 혼령이 됐다. 하루는 김부식이 “버드나무 천 가지가 푸르고 복숭아꽃 만 송이가 붉도다”라 읊었더니, 정지상 혼령이 나타나 뺨을 때리며, “누가 그 수를 헤아렸냐. 버드나무 가지가지 푸르고 복숭아꽃 송이송이 붉도다!”라 고쳐 읊었다. 김부식은 정지상의 혼령 앞에 당당하려 애썼다. 하지만 측간에서 혼령에게 음낭이 붙들린 채 ‘가죽주머니’란 놀림을 당한 뒤 숨이 끊어졌다.
정지상의 이별시 ‘송인(送人)’은 우리나라 최고의 명시로 인정받을 만큼 뛰어났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쓴 문장가로 현실적 승리자였지만 그 내면엔 정지상의 수준으로 시를 짓지 못한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었다. 현대심리학을 빌리자면 이야기 속 혼령은 열등감으로 빚어진 환상이요, 환청이다. 그러나 김부식이 측간에서 홀로 쓰러진 이유를 누가 알겠는가. 이 이야기는 사람들이 고안해낸 그럴듯한 사연이었다. 호의호식 김부식은 명구 창작에 한계가 있고 가엾게 죽은 시인은 칼날 같은 한 글자 한 마디로 김부식의 기를 누르고 숨통마저 끊어냈다고, 옛 문사들은 명구의 위력에 환호했다.
일상에서나 큰 행사에서 시문으로 재능을 발휘하던 시절. 좌중을 놀라게 하는 명구는 두고두고 칭송됐다. 문인이라면 그런 칭송을 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죽은 시인이 산 명인을 죽일 수 있었던 이유다. 이제 감상하려는 나귀 탄 시인의 그림이 오래도록 애호받은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옛 시인의 명구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 옛 시인의 환영
당나라 시인 맹호연(689∼740)의 시가 뛰어났다. 맹호연의 시는 눈바람 속 장안의 파교란 다리를 나귀 타고 지나가며 고심할 때 튀어나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었다.
개인의 과거가 기억 속에 얽히듯, 역사의 과거가 해석으로 재정리된다. 맹호연의 이야기도 불완전한 기억과 해석으로 만들어졌다. 맹호연이 남겨놓은 수백 편의 시에서 그가 나귀 타고 파교를 건넜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반면 당나라의 정경(?∼899)이 “시상은 눈 나리는 파교에 나귀 타고 지날 때 나온다”고 말했다. 이는 송나라 손광헌의 ‘북몽쇄원’과 ‘전당시화’(全唐詩話)에 버젓하게 기록돼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맹호연의 말로 옮겨 전해졌다. 수백 년 동안 기억되는 파교 위의 나귀 탄 시인 이미지의 주인공이 맹호연이었던 이유다.
맹호연에 대한 기억을 공고하게 해준 것은, 송나라 대문인 소식(소동파)의 시구다.
또 보지 못하였나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이
시 읊노라 눈썹은 찌푸리고 어깨는 산처럼 솟은 것을.
(又不見 雪中騎驢孟浩然 皺眉吟詩肩聳山우불견 설중기려맹호연 추미음시견용산 )
- 소식, ‘초상화 그리는 수재 하충에게(贈寫眞何秀才)’
소식은 그가 보았던 맹호연 그림의 이미지가 이와 같았노라고 묘사하고 있다. 눈 속에 나귀 탄 맹호연의 초상은 이 시구로 인해 고착됐다. 맹호연이 정말로 그랬던가 묻는 사실 추적은 무모한 일이 됐다. 정경보다 맹호연의 시가 좋았기에, 사람들은 맹호연의 창작 행적에 관심이 있었고, 소식이 기억해준 맹호연의 행적은 역사적 사실이 됐다.
#‘파교심매’의 이미지
시인 맹호연의 초상은 ‘파교심매’(橋尋梅·파교에서 매화를 찾다)라는 회화이미지로 그려졌다. 겨울 끝자락 하얀 잔설이 두툼한 산으로 나귀 타고 드는 시인. 그 시인이라면 눈 속에 피어난 첫 매화를 찾아낼 것이다. ‘파교심매’는 ‘파교음시’(파교 위에서 시를 읊다)와 ‘답설심매’(눈을 밟고가며 매화를 찾다)가 합해진 것이다. 매화는 추위 속에 피어나는 봄의 전령이다. 모습은 가냘프고 성질은 강인하다. 추위 속에 고심하는 가난한 시인의 의지에 부합한다. 항재선생 정종영(1513∼1589)이 ‘패교음설’이란 제목의 맹호연 그림을 감상하고 읊었다. “흩어져 날리는 눈 난만한 은빛 더미, 나귀 등에 시 짓는 신선은 매화처럼 야위었네.”(輕盈飛雪爛銀堆 驢背詩仙瘦若梅 경영비설란은퇴 여배시선수약매)
명시를 품고 가는 시인과 매화가 숨어 핀 설산이 조합된 그림. 이러한 그림들은 대략 ‘파교음설’(吟雪), ‘파교방매’(訪梅), ‘파교탐매’ 혹은 ‘설중기려’ ‘설중탐매’ ‘설행’ 등으로 불린다. 조선시대에 수도 없이 그려졌고, 지금까지 전하는 ‘파교심매’의 대표작만도 10여 점이나 된다.
일본 나라(奈良)의 대화문화관에 소장된 커다란 화축 ‘파교심매도’가 그 가운데 하나다. 이 그림을 보관한 나무궤짝 위에는 ‘송나라 사람의 산수(宋人之山水)’라 적혀 있다. 그림을 펼치면 왼편 아래에 남송의 화원화가 마원의 인장이 찍혀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조선시대 중기의 작품으로 판정되고 있다. 그 외 이 그림 위 인장들은 모두 후날(뒤에 찍음)이라, 이 그림이 정작 누구의 필적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조선 중기 솜씨 좋은 화원화가의 작품으로 보인다.
옛 그림의 기법이나 스타일의 변화를 모른다 하더라도, 이 그림의 산수표현이 다소 특이한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첩첩의 주름으로 그려져 있는 거대한 산 덩어리는 원근의 처리가 모호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 기세가 주는 인상이 매우 강렬하다. 기이한 형상으로 표현된 설산의 무게와 깊이다. 이러한 표현은 중국 명나라 초반의 강남지역으로부터 한 시절 유행한 스타일이었기에, 이 그림을 16세기 정도의 작품으로 추정하는 데 중요한 단서이다. 이밖에 비단이며 붓질의 스타일에서 중국의 것이 아니라 조선의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호연시궁’(浩然詩窮)
‘파교심매’라는 그림의 대주제는 ‘시궁’(詩窮·시인의 곤궁함)이다. 맹호연은 변변한 벼슬이 없고 몸도 건강하지 못했다. 시절 좋은 당나라 때 빈궁하게 살았다. 조선 전기 남효온이 병풍에 그려진 맹호연의 모습을 보며 읊기를, “지위 잃은 맹호연이 시 짓느라 곤궁했지…. 긴 파교 다리 위 저녁에 눈이 개고, 남은 술기운에 스스로 몽롱하리.” 가난한 시인에게 겨울의 끝은 추위가 지겹고 배고픈 고비다. 그 와중에 절룩대는 나귀로 나선 이유가 매화도 찾고 명구도 얻기 위함이라니 궁상이 이를 데 없다.
‘시궁’이란 말은 원래 송나라 시인 구양수가 벗 매요신을 평한 시론이다. 구양수는 “예로부터 좋은 시는 곤궁한 자에게서 나온다”며 “곤궁한 사람이 된 뒤에 그 시에 멋이 든다(窮者以後工 궁자이후공)”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시궁론은 시창작론에서 중요한 개념이 됐다. 시인의 궁색함과 시의 공교함이 결합한다는 이론은 가난한 학자들을 위로할 뿐 아니라, 글 짓는 마음의 근본을 깨끗하게 다스려야 한다는 원칙을 제공했다.
조선의 시인들이 ‘파교심매’를 펼치면, 혀를 차며 맹호연의 가련한 꼴을 마음껏 탄식했다. 조선 전기 서거정이 여러 차례 그림을 감상하며 “가련해라. 추위 참는 맹호연 고생스러운데, 눈 속에서 나귀 타고 어깨는 산처럼 솟아 으쓱이네.” 혹은 “얼어버린 입으로 시를 읊으니 뼛속으로 추위가 파고들겠지!” 어떤 이는 마음이 화락해야 좋은 시문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까지 풀어놓지만, 대개 시인이라면 시궁의 엄숙함에 동의했다. 맹호연의 이미지가 시인의 초상으로 자리 잡은 이유다.
포만감 속에서 좋은 시를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고금의 지론이다. 예전에 드라마 대장금을 연출한 PD와 우연히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이 방송작가의 상황이 좋아지면 대본에 맥이 빠지고 아파트 골방에 처박혀야 기막힌 대본이 나온단다. 그의 경험담 속 후끈한 현장감은 고전시론 속 ‘시궁’의 의미를 내게 제대로 알려줬다. 맹호연의 이미지가 보여주는 ‘궁(窮)’의 이미지는 그가 뱉을 시구의 긴장감을 보장하는 개연성이었다.
시궁에 대한 의논이 성해지면서 그것이 몸의 궁함이냐, 마음의 궁함이냐는 논의가 개진됐다. 항상 궁할 수 없고 그러기를 조장하고 싶지 않았기에, 풍요롭게 살더라도 마음이 가난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있다는 논리도 마련됐다. 시궁에 관련된 조선후기문학론은 특히 흥미롭다. 말하자면 그림 속 맹호연의 모습은 가난한 마음자리의 상징으로 자리 잡혔다.
# 시동(侍童)의 서사
그림의 주제는 시인의 궁색함인데, 조선 중기 ‘파교심매도’ 속에는 더욱 궁색한 인물이 등장한다. 시인을 따라오는 시동. 그의 존재는 이 그림에 잔잔하고 따뜻하게 서사의 결을 더해 준다. 시인은 뒤를 돌아보고 시동은 겨우겨우 따라온다. 그림을 들여다보라. 시인은 절룩대는 나귀에라도 올라탔고 모자에, 목도리에 가죽신을 신었다. 따라오는 시동은 홑바지저고리, 민머리에 맨발로 눈길을 걷고 있다. 시인의 표정이 안타깝고 시동의 표정이 실쭉하다. 시궁의 주제를 살짝 비껴간 시동의 이야기로 그림에는 따뜻한 심리적 교차가 발생한다. 시인과 시동 사이로 오가는 시선을 바라보며 그림 밖 감상자는 추위 속 궁색함과 다정함을 생생하게 감상할 수 있다.
또 다른 16세기 대작 ‘파교심매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에도 돌아보는 시인과 쭈물대는 시동이 이 그림과 흡사하다. 서파선생 오도일(1645∼1703)은 ‘패교방매’라는 제목의 맹호연 그림을 감상하며, “겨우 한 마리 나귀에 의지해 가면서, 오히려 게으른 시동이라 재촉하여 부르는구나”라고 묘사했다. 그림 속 이러한 시동의 서사가 조선 중기 한동안 ‘파교심매’의 화면 위에 인상적으로 그려졌던 상황을 포착할 수 있다.
# 가난한 마음을 유지하고자
사실 이런 대작을 수장하고 감상하던 사람들이 추위에 나갈 일은 별로 없었다. 겨울이면 청동화로를 끌어안고 여름이면 비단부채를 흔들면서 그림 속 시인의 가난하고 따뜻한 마음을 상상했을 것이다. 더하여 소개하는 심사정(1707∼1769)의 ‘파교심매’는 조선 후기의 수작이다. 이 그림 속 시동은 두건에 목도리를 두르고 거문고와 붉은 서화보따리를 짊어졌으니, 전달하는 분위기가 사뭇 낭만적이다. 사실 이후로 그려지는 민화류의 파교심매엔 매화꽃 가득 핀 봄 산으로 맹호연이 들고 있어 봄나들이 분위기가 풍기기도 한다. 물론 심사정의 ‘파교심매’는 설산의 시객이란 고전적 이미지를 분명하게 유지하고 있지만, 조선 중기 ‘파교심매’의 서늘함과는 다르니 파교심매 전개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이 그림의 상단 오른편에 “파교심매, 병술(丙戌) 초하(初夏) - 현재(玄齋)”라고 적혀 있다. 1766년(심사정 나이 60세) 초여름에 그렸음이다. 현재는 심사정의 호이다. 그림을 요구한 선비는 옛 시인의 겨울풍경에 더위를 피하고자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들의 피서법이 춥고 힘든 시인을 상상하며 그 마음을 쓸쓸하고 가난하게 유지하려는 오랜 전통의 향유였다는 것, 명구를 추구하여 고심하는 가난한 마음에 대한 존경이고 그리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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