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_14

醉月 2013. 7. 7. 01:30

복스럽고 천진한 모습에 세상 근심마저 사라지네

 백자도… 아이들이 가득한 집

▲ ‘백자도’ 10폭병풍 중 제 10폭 매화따기장면, 비단에 채색, 88.8 x 39㎝.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 ‘백자도’ 10폭병풍 중 제 2폭 닭싸움장면, 비단에 채색, 88.8 x 39㎝.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열폭 병풍 화폭마다 아이들이 뛰어논다. 동물놀이, 장군놀이, 꽃놀이, 물놀이 등 여러 가지 게임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칠 새가 없다. 우리 집에 아이들이 한 백 명쯤 태어나서 모두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자라나길, 나의 자손들이 무궁하게 번창하길 꿈꾸는 그림이다.

아이를 점지해 달라고 산신령께 빌고 사찰에 시주하는 시절, 아이를 가지려고 남몰래 씨내리 남성이며 씨받이 여성을 고용하던 시절, 양자를 들리는 건 사회의 통례였다. 혼인 후 아이가 없으면 마음이 간절했다.

아이를 원하는 부부의 애절한 기도가 조선시대 설화집에 실려 있다. “신령님, 저희에게 아이 하나 주세요. 아들이 없으면 딸이라도 주시고, 건강한 아이가 없으면 아픈 아이라도 주세요.” 산신령이 거절한다. “너희들은 만복을 가졌으되 자식복은 없으니 물러가거라.” 그래도 부부가 간청하자 산신령이 할 수 없이 아이를 약속하는데, 어려서 죽을 아이란다. 부부는 감사의 절을 올리고 돌아온다.

자손이 번창하는 福!

“복을 구하여 모든 복을 얻었으니,

자식과 손자가 천억이로다.” -『시경』·「대아」편

(干祿百福 子孫千億 간록백복 자손천억)



중국 고대의 노래집 『시경』의 한 구절이다. 아들손자 천억이면 자손만대가 보장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묘지명에 평생의 덕(德)으로 복을 받아 ‘자손천억’이라는 축복이 종종 사용되었고, 비유의 표현에는 베짱이가 자주 거론됐다. “수많은 베짱이들 옹기종기 화목하듯, 그대의 자손들이 번성하기를”이란 노랫말이 『시경』의 「주남」편에 있기 때문이다. 베짱이는 한 번에 99개의 알을 낳는다고 알려져 있었다.

『서경』의 오복에는 자손의 종목이 없다고들 말한다. 오래 사는 수(壽), 풍요로운 부(富), 건강하고 편안한 강녕(康寧), 덕을 베푸는 유호덕(攸好德), 탈 없이 천명을 누리는 고종명(考終命)이다. 한(漢)나라의 환담(桓譚)이 다시 쓴 신론(新論)에도 오복은 장수(長壽), 부(富), 무병(無病), 식재(息災), 도덕(道德)이라, 표현만 다를 뿐이다. 그러나 사실, 서경의 오복이란 사회복지의 차원이다. 나라가 안정되어 백성들이 건강하고 부유하면 인구증가는 당연지사다.

가문 중시의 사회제도가 발달하면서 개인적 구복 차원에서 오복이 새로 생겼다. 청나라 적현(翟顯)이 지은 함해(函海)의 통속편의 축송구절이 그 증거다. 축송된 오복이란 수, 부, 귀(貴), 강녕, 그리고 자손중다(子孫衆多)이다. 어느 시점부터인가 자손종목이 사람들 사이에 오복의 하나로 통용되고 있었다는 뜻이다. 고대정치서의 오복과 통속편의 오복에서 다른 점은 딱 한 가지. 덕을 베푸는 유호덕의 도덕 대신 자손중다가 삽입된 것이다. 조선후기 학자들도 새로운 통속적 오복의 내용을 거듭 인용하며 다자다손(多子多孫)을 기원했다.

호사자들은 역사를 거슬러 자식 많은 사람을 물색했다. 동양의 기네스북이라 부를 만한 명대의 『용당소품』과 청대의 『견호비집』 등을 참고하면, 중국 역사상 아들이 100명 이상이었던 사람이 한나라의 이름난 회계사 장충, 명나라 주원장의 손자 경성왕을 비롯하여 총 7명이 집계된다.

조선후기 학자 이규경(李圭景·1788∼1856)이 다자(多子)에 대하여 논설한 <다자변증설>을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아들이 4∼5명만 되어도 부러워하지 않는 이가 없고, 7∼8명이면 기이하다 하고, 10명 이상이면 드문 일이라 홍복(弘福)을 일컫는다”고 했다. 효(孝)를 최고의 덕목으로 치던 시절, 『맹자』에서 지목한 가장 심한 불효는 ‘무후(無後)’였다. 후손이 없다는 말이다. 자식을 두지 못하는 죄는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초래할 불효막심이었다.

다자자손의 바람 ‘백자도’

자손번창의 축복을 담은 그림이 ‘백자도’(百子圖·백 명의 아들)다. 조선왕실의 기록에는 ‘백자동도’(百子童圖)라 불렸다. 현전하는 그림들은 대개 6∼10폭의 민화류 병풍이며, 8폭이 가장 많다. ‘백’(百)이라지만 100명을 헤아려 그릴 필요는 없었다. 옛 그림에서 백화도란 꽃이 많이 그려진 그림이요, 백안도는 기러기, 백록도는 사슴, 백마도는 말, 백학도는 학이 화면에 가득한 그림이다. ‘백’이란 풍성함이다. 소개하는 《백자도》는 드물게 전하는 ‘10폭’ 병풍으로, 각 폭마다 10명 남짓 아이들이 장군놀이, 닭싸움, 잠자리잡기, 파초 아래 잠자기와 새놀이, 연못 속 물놀이, 행차놀이, 사슴놀이, 학놀이, 원숭이놀이, 매화따기 등을 즐긴다. 병풍 속 아이들을 모두 합하면 100명이 넘는다. 백자도에서 모델로 삼은 자식복의 주인공은 누구나 존경하는 주나라 문왕이라지만, 성덕군자에게 마땅한 자식복의 풍요와 복됨이 나에게도 임하기를 바라는 소망이 주제였다.

여기서는 지금의 때에 가까운 매화따기 장면과 닭싸움 장면을 보겠다. 매화 핀 화면을 보면, 정원의 괴석이 눈에 띈다. 중국 강남산 태호석(太湖石)으로 값비싼 괴석이라 부의 상징이다. 기와에 금빛 장식도 그러하다. 정원에는 매화와 동백이 활짝 피었다.

소한이 지나는 추위 속 이른 봄에 피는 꽃이다. 매화와 동백은 옛 그림에서 겨울정원을 대표하여 쌍으로 어울린다. 계절따라 꽃이 피는 정원도 선비들의 바람이었다. 복두를 쓴 아이들이 매화나무에 올라 꽃가지를 꺾는다. 화병에 꽂아 봄소식을 전할 참이다. 다른 두 아이는 커다란 꽃가지를 들고 급히 집으로 간다. 활기찬 아이들은 봄맞이의 즐거움에 추위를 잊었다.

닭싸움은 봄이 지날 무렵에 벌어진다. 단오의 풍속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닭은 농가의 귀한 가축이라 닭싸움으로 죽일 일은 아니다. 닭은 싸움에 임하면 죽기 전에 물러서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서구선진국에서 법으로 금지된 놀이다. 이미 조선시대 유학자들도 그 잔인함과 우매함을 우려하여 거듭 만류했다.

이 그림 속 아이들은 가정의 부유함과 남자다운 기상을 뽐내고 있을 뿐이다. 그림에는 목털을 치켜세운 두 마리 닭이 싸움을 벌이려고 대결하는 순간이다. 머리에 붉은 볏이 곤두섰고 꼬리는 둥글게 뻗쳐 내려온다. 수탉들의 긴장 포즈에 숨을 멈춘 아이들이 퍽 귀엽다. 싸움 후의 난장판은 상상할 때가 아니다.

이 그림들은 비단바탕에 채색이 화려하다. 하늘에는 오색구름, 아이들은 색 고운 비단옷, 다채로운 보석바위에 구슬처럼 영롱한 이끼, 이 세상이라기보다는 신선세상 풍광처럼 환상적이다.

조선후기 백자도의 수요와 유행 속에서 베껴 그린 그림의 한 경우다. 화가의 창의적 표현보다는 장식그림 고급품의 제작상을 반영하는 물건이라 할 수 있다.

백자도 병풍의 유행

아이들의 여러 가지 놀이장면을 세트로 구성하여 병풍으로 그렸던 방식은 중국 원나라의 기록에 보이고 조선전기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중국과 조선에서 모두 백자도는 새해정초에 복스러운 이미지로 사용되었고, 혼인과 잔치에 펼쳐졌다. 특기할 것은 백자도 ‘병풍’의 유행이 중국보다 조선에서 더욱 성행하였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궁정의 혼인을 기록한 가례도감, 잔치를 기록한 진연도감의 의궤에 백자동도 병풍이 사용된 기록이 실려 있다. 이러한 왕실문화가 사대부에게 전파되어 그들의 혼례에 사용되면서, 거리에서 일반에 판매되기에 이르렀다. 조선후기 팔폭병풍의 유난스러운 성행 속에서 백자도는 걸맞은 주제였다.

백자도 속 모든 아이들 머리가 두 갈래 상투의 쌍계이다. 삼국시대 우리나라 동자들의 헤어스타일도 두 갈래 상투였다. 조선시대 그림에서 선녀의 머리도 그러하다. 쌍계는 고전적 이미지이고 천상세계 신선다운 고귀한 이미지다.

아이가 많으면 발생하는 문제

그런데 아이가 정말로 수십 명 혹은 일백 명이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이규경의 <다자변증설>은 다자(多子)의 실상에 대한 씁쓸한 현실을 늘어놓는다. 못난 자식이 많이 나오면 제일문제다. “제 부모만 못하여 조상을 욕되게 할 것이다.” 그뿐인가.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가 열댓이 넘어간다면 예상되는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누가 누군지, 누가 형인지 아우인지 어떻게 구분하나? 교육은 어찌 시키나? 때맞추어 혼인시키는 건 어쩌나? 재산분배는 어떻게 균등하게 하나? 먹일 때는 행인들이 역에서 급히 먹듯 법석일 것이요, 질병은 갈마들 듯 끊이지 않겠지. 곤란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겠구나. 아이 많은 것을 누가 좋다고 했던가?”

이규경의 현실적 걱정은 무자식상팔자의 결론에 도달해야 맞을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곧장 소망으로 글내용을 옮기면서 자식복의 변증을 마무리한다. 만약 그들 “하나하나 문(文)을 잘하고 무(武)에 능해 호랑이 같고 용 같이 자라 집안에서 경영을 잘하고 벼슬에 나가 쓰임이 있다면,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근심도 없고 수고도 없겠지.” 글의 마무리가 다소 급하지만, 세상 모든 부모의 바람이 바로 이것이었다. 바람대로 된다면 문제가 있을 리 없다.

그림의 환상, 아이를 소망한 그들

백자도 속 아이들은 세상 부모들의 바람대로 건강하여 용처럼 범처럼 씩씩한 모습이다. 아이들은 이마가 넓고 볼이 토실토실하다. 아이들의 복스럽고 천진한 모습에 보노라면 세상의 근심마저 사라진다. 그림 속 환상이다.

한 이십 년 전이다. 지금은 세상을 떠나신 열상 이가원 선생님 댁으로 나는 초서강을 들으러 다녔다. 하루는 좀 일찍 갔더니 벌써 오신 분들이 사사로운 시사토론을 벌이면서 누구누구 잘잘못을 논하느라 떠들썩하였다. 이가원 선생님이 방으로 들자 모두들 일어났다 앉느라 잠시 조용하더니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선생님께 그들의 잘잘못에 대하여 의견을 여쭈었다. 선생님의 답변은 뜻밖이었다. “보래. 내 자식이 여럿이래. 이놈들이 지금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 내가 몰라. 자식이 많으면 남의 집 자식들의 잘잘못을 왈가왈부할 수 없지.”

자식이 많아 봐야 이 자식 저 자식의 어리석음과 아픔을 보면서 세상의 고충을 이해하고 겸손함의 기회도 얻게 된다. 요순시절 요임금의 말이다. “자식이 많으면 근심도 많다.” 논어 속 공자의 말이다. “부모는 자식의 아픔을 걱정한다.” 그러니 자식이 많으면 그들 심신의 상처를 보느라 부모의 걱정은 그칠 틈이 없다. 세상의 어려움을 견뎌내기 두렵고 못난 내면을 드러내기 싫어서, 자식 낳기를 겁내는 현실이다. 예전에는 생활고가 지금보다 심하였고, 아이를 낳다가 몸을 버리기도 일쑤였다. 그래도 그들은 그림 속 아이들의 환상을 바라보며 자식을 넉넉히 두고자 소망하였다. 유교적 사고의 이유도 적지는 않았겠지만, 기본적으로 삶과 출산과 육아에 임했던 옛 분들의 용기는 오늘날의 젊은이들과 사뭇 달랐던 것 같다. 백 명쯤 아이들이 뜰 가득 집안 가득 뛰어노는 그림이 그 시절에 널리 그려졌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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