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이들은 압니다. 오락가락하는 빗속의 여정이 얼마나 운치 있는지 말입니다. 때 이른 무더위를 지나서 길고 지루한 장마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도시에서 장마는 축축한 습기와 곰팡이, 혹은 우울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녹음의 자연 속에서 만나는 장맛비는 사뭇 다릅니다. 자연 속에서 만나는 비는 이를테면 이런 모습들입니다. 후드득 숲 속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무논에 가득한 개구리 울음소리. 비가 막 그치고 난 뒤에 연잎을 동그르르 구르는 빗방울. 온통 운무로 휩싸이는 산의 정취…. 그런 날이면 진초록의 숲은 뻐꾸기 소리와 함께 더욱 짙고 깊어지지요. 장마의 초입에 딱 맞는 여행지로 경기 포천을 추천합니다. 포천을 장마철 여행의 목적지로 꼽는 것은 ‘수도권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포천에는 오래돼 깊어진 숲과 빗방울이 동심원으로 퍼지는 호수, 그리고 비가 내리면 콰르르 흘러내리는 현무암 협곡이 있습니다. ‘광릉수목원’으로 더 익숙한 국립수목원이나 산정호수는 어찌 보면 익숙한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숲과 호수의 진면목은 장마가 시작된 이즈음에야 만날 수 있습니다. 비 한 방울 맞지 않을 정도로 하늘을 가린 어둑한 수목원의 숲 속에서 빗소리를 듣고, 우산 하나 들고 90년 전쯤 오대산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훤칠한 전나무들이 도열한 숲길을 거닐 수 있습니다. 비 내리는 숲이 뿜어내는 기운이 얼마나 청신하던지요. 명성산을 끼고 있는 산정호수에서는 비가 내리고 나면 어김없이 암릉마다 구름이 척척 걸리는데,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물 위로 놓인 나무덱을 따라 걷는 맛이 일품입니다. 포천에 갔다면 우리 땅의 자생식물들이 저희들끼리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는 산정호수 근처의 평강식물원과 한탄강변의 현무암 협곡도 빼놓지 마시길…. 평강식물원에는 지금 수련과 연꽃들이 마치 등불을 켠 것처럼 환하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한탄강을 끼고 있는 기기묘묘한 현무암의 비경에다 이름 붙여둔 이른바 ‘포천 한탄 팔경’은 요즘 같은 장마철에 더 웅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른 곳이라면 오락가락하는 장맛비가 걸리적거릴 테지만, 포천에서만큼은 비가 서정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선물과도 같습니다.
# 추상같은 왕의 기운이 540년 동안 숲을 지키다 포천에서 가장 이름난 명소 중의 하나가 국립수목원이다. 오랫동안 ‘광릉수목원’으로 불리던 곳. 그곳의 주인은 단연 사람의 간섭 없이 오래 묵은 숲이다. 국립수목원이 되면서 ‘광릉’이란 이름을 떼어내긴 했으되, 국립수목원은 지척에 있는 광릉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광릉이 거기 없었다면 그 숲은 없었을 것이었다.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인 ‘피의 군주’ 세조. 그가 죽어 정희왕후와 함께 묻힌 곳이 바로 ‘광릉’이다.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거침없이 칼을 뽑아들었던 생전의 추상같았던 모습 때문일까. 세조의 묘가 있는 광릉에서 사방 15리의 숲은 오래도록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성역’이었다. 모르긴 해도 누구든 거기서 나무 한 그루라도 베어냈다가는 치도곤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조선 왕조 몰락 후에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면서 1913년부터 임업시험림으로 지정돼 보호돼왔다. 해방 이후의 혼란기나 6·25전쟁에도 숲은 다치지 않았고, 자연 재해나 인위적인 훼손도 없었다. 왕조시대부터 식민지 시험림을 거쳐 지금의 수목원에 이르기까지 무려 540년 동안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고 남은 숲, 거기가 바로 광릉수목원이라 불렸던 국립수목원이다. 국립수목원은 아직도 문을 활짝 연 것은 아니다. 수목원을 볼 수 있는 날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요일과 월요일에는 문을 닫는다. 입장을 원하는 날 하루 전까지는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하루 입장객이 5000명으로 제한된다. 주말인 토요일에는 입장객 제한 숫자가 3000명으로 오히려 줄어든다. 제한하는 입장객 숫자가 적지 않아 예약은 그닥 어렵지 않지만, 적어도 미리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사람들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게 좀 불편하다 싶지만, 국립수목원의 짙고 거대한 숲 속에 들어선다면 이곳이 왜 까다롭게 문을 열어주는지, 예약 없는 무례한 방문자들에게 문을 닫아걸고 있는지 금세 이해하게 된다. 500년이 넘는 시간이 만들어낸 수목원의 숲은 그만큼 귀하다.
# 우람한 전나무 숲길과 자연스러운 원시림의 숲길 국립수목원은 포천의 남쪽 끝에 아슬아슬 걸려 있다. 세조가 묻힌 광릉의 행정구역은 남양주시. 그런데 광릉의 숲은 경계를 넘어 포천 땅까지 이어져 포천 쪽의 숲이 국립수목원이 됐다. 그러나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보자면 국립수목원은 포천의 관문이 되는 셈이다. 수목원으로 가는 길에서는 누구나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리게 된다. 퇴계원에서 포천으로 이어지는 47번 국도에서 국립수목원, 광릉, 봉선사 방면으로 길을 잡아 98번 지방도로로 갈아타면 하늘을 찌를 듯 우람하게 서 있는 전나무들이 미리 마중을 나오기 때문이다. 도열한 전나무 뒤로는 떡갈나무며 서어나무들이 극상림의 숲그늘을 만들고 있다. 이곳의 나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시험림으로 조림된 것들. 족히 100년을 훌쩍 넘긴 것들이다. 노거수의 숲길을 지나서 국립수목원으로 들어서면 첫인상이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블록을 깔아놓은 바닥이며 다듬어 놓은 시설들이 오래돼 투박한 데다 거대한 기념비들까지 곳곳에 서 있어 좀 어수선한 느낌이다. 그러나 숲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서면 실망은 곧 탄성으로 바뀌게 된다.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건 수목원과 시험림의 규모다. 국립수목원은 시험림까지 포함한 면적이 총 2118㏊(약 660만 평)에 달한다. 공개된 수목원의 구역은 일부 중의 일부일 뿐, 그러나 그마저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이곳저곳을 대충 둘러보는 데만도 적게 잡아 3시간쯤이 걸릴 정도다. 수목원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 바로 인공호수인 육림호에서 산림동물보존원(동물원)에 이르는 산길까지 이어지는 600m의 전나무숲 구간이다. 여기는 1927년 오대산의 월정사 일대에서 가져다 심은 전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당시 5년생 전나무를 심은 것이라니 수령이 90년은 넘는다. 그동안 굳게 문을 닫아두었다가 3년 전부터 관람객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동물원의 반달가슴곰사에서 백두산 호랑이사로 이어지는 길도 꼭 걸어봐야 한다. 수목원 구역 깊이 숨어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이 덜 닿는 곳인데, 졸참나무와 서어나무, 신갈나무들이 극상림을 이룬 원시림 사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길이다. 수목원의 숲해설사들이 너나없이 ‘수목원에서 최고의 숲길’이라고 손꼽는 곳이다.
# 호수에 잠긴 산봉우리를 감상하는 맛 산정호수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농업용수를 활용하기 위해 광덕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막아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저수지가 행정구역상 산정리에 있어 ‘산정(山井)’이란 이름을 얻었다는데, 본래 산정리도 산안마을(山內洞)과 우물목(井項)의 이름이 합해서 붙여진 것. 산(山)과 우물(井)의 지명 위로 거대한 호수가 조성된 셈이니 희한하게도 땅이름이 먼저고 호수가 나중이다. 산정호수는 이미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됐을 정도로 일찌감치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일찍 관광지가 되면서 상가와 위락시설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면서 언제부턴가 ‘낡은 여행지’의 이미지로 추락했다. 하지만 상가구역 등이 정비되고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뜸해지면서 고즈넉한 예전의 분위기를 찾아가고 있다. 본래 산정호수가 명소로 꼽힌 건 주위를 두른 산들이 호수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경치 때문이었다. 해발 922m의 명성산의 암릉에다 망봉산, 망무봉 등이 호수 위에 반영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매혹적이다. 호수를 도는 5㎞ 남짓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이런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산책로의 일부 구간은 물 위에 나무덱을 설치해 걸을 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에 나무덱 위를 걷다가 난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호수의 잔잔한 수면 위로 비친 물그림자를 바라보는 맛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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