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류, 술, 멋

포천 빗속여행의 "운치"

醉月 2013. 7. 4. 01:30

포천의 평강식물원 습지원에 환하게 피어난 수련. 개구리 한 마리가 연잎을 딛고 앉아있다. 이즈음 국립수목원의 수생식물원과 육림호에도 수련과 연꽃들이 수면을 뒤덮고 무더기로 피어나고 있다.


아는 이들은 압니다. 오락가락하는 빗속의 여정이 얼마나 운치 있는지 말입니다. 때 이른 무더위를 지나서 길고 지루한 장마철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도시에서 장마는 축축한 습기와 곰팡이, 혹은 우울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녹음의 자연 속에서 만나는 장맛비는 사뭇 다릅니다. 자연 속에서 만나는 비는 이를테면 이런 모습들입니다. 후드득 숲 속으로 떨어지는 빗소리. 무논에 가득한 개구리 울음소리. 비가 막 그치고 난 뒤에 연잎을 동그르르 구르는 빗방울. 온통 운무로 휩싸이는 산의 정취…. 그런 날이면 진초록의 숲은 뻐꾸기 소리와 함께 더욱 짙고 깊어지지요.

장마의 초입에 딱 맞는 여행지로 경기 포천을 추천합니다. 포천을 장마철 여행의 목적지로 꼽는 것은 ‘수도권에서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포천에는 오래돼 깊어진 숲과 빗방울이 동심원으로 퍼지는 호수, 그리고 비가 내리면 콰르르 흘러내리는 현무암 협곡이 있습니다.

‘광릉수목원’으로 더 익숙한 국립수목원이나 산정호수는 어찌 보면 익숙한 곳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숲과 호수의 진면목은 장마가 시작된 이즈음에야 만날 수 있습니다. 비 한 방울 맞지 않을 정도로 하늘을 가린 어둑한 수목원의 숲 속에서 빗소리를 듣고, 우산 하나 들고 90년 전쯤 오대산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훤칠한 전나무들이 도열한 숲길을 거닐 수 있습니다. 비 내리는 숲이 뿜어내는 기운이 얼마나 청신하던지요.

명성산을 끼고 있는 산정호수에서는 비가 내리고 나면 어김없이 암릉마다 구름이 척척 걸리는데, 그런 풍경을 바라보며 물 위로 놓인 나무덱을 따라 걷는 맛이 일품입니다. 포천에 갔다면 우리 땅의 자생식물들이 저희들끼리 자연스럽게 자라고 있는 산정호수 근처의 평강식물원과 한탄강변의 현무암 협곡도 빼놓지 마시길…. 평강식물원에는 지금 수련과 연꽃들이 마치 등불을 켠 것처럼 환하게 피어나고 있습니다.

한탄강을 끼고 있는 기기묘묘한 현무암의 비경에다 이름 붙여둔 이른바 ‘포천 한탄 팔경’은 요즘 같은 장마철에 더 웅장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른 곳이라면 오락가락하는 장맛비가 걸리적거릴 테지만, 포천에서만큼은 비가 서정을 촉촉하게 적셔주는 선물과도 같습니다.

포천 한탄8경의 제7경으로 정해진 구라이골. 가파른 직벽을 아슬아슬 내려가면 비밀스러운 폭포와 근육질의 현무암 주상절리 협곡이 독특한 경관을 펼쳐보여준다. 폭포 위쪽으로 이어지는 협곡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미지의 공간이다.




# 추상같은 왕의 기운이 540년 동안 숲을 지키다

포천에서 가장 이름난 명소 중의 하나가 국립수목원이다. 오랫동안 ‘광릉수목원’으로 불리던 곳. 그곳의 주인은 단연 사람의 간섭 없이 오래 묵은 숲이다. 국립수목원이 되면서 ‘광릉’이란 이름을 떼어내긴 했으되, 국립수목원은 지척에 있는 광릉과 떼어놓고 볼 수 없다. 광릉이 거기 없었다면 그 숲은 없었을 것이었다.

어린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빼앗고 수많은 신하들을 죽인 ‘피의 군주’ 세조. 그가 죽어 정희왕후와 함께 묻힌 곳이 바로 ‘광릉’이다.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거침없이 칼을 뽑아들었던 생전의 추상같았던 모습 때문일까. 세조의 묘가 있는 광릉에서 사방 15리의 숲은 오래도록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성역’이었다. 모르긴 해도 누구든 거기서 나무 한 그루라도 베어냈다가는 치도곤을 면치 못했을 것이었다. 조선 왕조 몰락 후에 일제의 강점이 시작되면서 1913년부터 임업시험림으로 지정돼 보호돼왔다. 해방 이후의 혼란기나 6·25전쟁에도 숲은 다치지 않았고, 자연 재해나 인위적인 훼손도 없었다. 왕조시대부터 식민지 시험림을 거쳐 지금의 수목원에 이르기까지 무려 540년 동안 사람들의 손을 타지 않고 남은 숲, 거기가 바로 광릉수목원이라 불렸던 국립수목원이다.

국립수목원은 아직도 문을 활짝 연 것은 아니다. 수목원을 볼 수 있는 날은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일요일과 월요일에는 문을 닫는다. 입장을 원하는 날 하루 전까지는 인터넷으로 예약을 해야 한다.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하루 입장객이 5000명으로 제한된다. 주말인 토요일에는 입장객 제한 숫자가 3000명으로 오히려 줄어든다. 제한하는 입장객 숫자가 적지 않아 예약은 그닥 어렵지 않지만, 적어도 미리 ‘가겠다’고 마음먹었던 사람들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이게 좀 불편하다 싶지만, 국립수목원의 짙고 거대한 숲 속에 들어선다면 이곳이 왜 까다롭게 문을 열어주는지, 예약 없는 무례한 방문자들에게 문을 닫아걸고 있는지 금세 이해하게 된다. 500년이 넘는 시간이 만들어낸 수목원의 숲은 그만큼 귀하다.

국립수목원에서 최고의 숲길로 꼽히는 전나무 숲길. 육림호에서 산림동물보존원에 이르는 600m의 구간에는 오대산에서 가져다 심었다는 전나무들이 울창하다.

# 우람한 전나무 숲길과 자연스러운 원시림의 숲길

국립수목원은 포천의 남쪽 끝에 아슬아슬 걸려 있다. 세조가 묻힌 광릉의 행정구역은 남양주시. 그런데 광릉의 숲은 경계를 넘어 포천 땅까지 이어져 포천 쪽의 숲이 국립수목원이 됐다. 그러나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보자면 국립수목원은 포천의 관문이 되는 셈이다. 수목원으로 가는 길에서는 누구나 기대로 가슴이 두근거리게 된다. 퇴계원에서 포천으로 이어지는 47번 국도에서 국립수목원, 광릉, 봉선사 방면으로 길을 잡아 98번 지방도로로 갈아타면 하늘을 찌를 듯 우람하게 서 있는 전나무들이 미리 마중을 나오기 때문이다. 도열한 전나무 뒤로는 떡갈나무며 서어나무들이 극상림의 숲그늘을 만들고 있다. 이곳의 나무들은 대부분 일제강점기에 시험림으로 조림된 것들. 족히 100년을 훌쩍 넘긴 것들이다.

노거수의 숲길을 지나서 국립수목원으로 들어서면 첫인상이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블록을 깔아놓은 바닥이며 다듬어 놓은 시설들이 오래돼 투박한 데다 거대한 기념비들까지 곳곳에 서 있어 좀 어수선한 느낌이다. 그러나 숲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서면 실망은 곧 탄성으로 바뀌게 된다. 가장 먼저 놀라게 되는 건 수목원과 시험림의 규모다. 국립수목원은 시험림까지 포함한 면적이 총 2118㏊(약 660만 평)에 달한다. 공개된 수목원의 구역은 일부 중의 일부일 뿐, 그러나 그마저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다. 이곳저곳을 대충 둘러보는 데만도 적게 잡아 3시간쯤이 걸릴 정도다. 수목원에서 가장 빼어난 곳이 바로 인공호수인 육림호에서 산림동물보존원(동물원)에 이르는 산길까지 이어지는 600m의 전나무숲 구간이다. 여기는 1927년 오대산의 월정사 일대에서 가져다 심은 전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다. 당시 5년생 전나무를 심은 것이라니 수령이 90년은 넘는다. 그동안 굳게 문을 닫아두었다가 3년 전부터 관람객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동물원의 반달가슴곰사에서 백두산 호랑이사로 이어지는 길도 꼭 걸어봐야 한다. 수목원 구역 깊이 숨어 있어 관람객들의 발길이 덜 닿는 곳인데, 졸참나무와 서어나무, 신갈나무들이 극상림을 이룬 원시림 사이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길이다. 수목원의 숲해설사들이 너나없이 ‘수목원에서 최고의 숲길’이라고 손꼽는 곳이다.

저물 무렵의 산정호수 둘레 산책로에서 바라본 호수 풍경. 명성산의 산자락과 우뚝 솟은 망무봉의 산그림자들이 호수에 잠겨 있는 모습이 그림 같다.

# 호수에 잠긴 산봉우리를 감상하는 맛

산정호수는 일제강점기인 1925년 농업용수를 활용하기 위해 광덕산에서 내려오는 물길을 막아 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생긴 인공호수다. 저수지가 행정구역상 산정리에 있어 ‘산정(山井)’이란 이름을 얻었다는데, 본래 산정리도 산안마을(山內洞)과 우물목(井項)의 이름이 합해서 붙여진 것. 산(山)과 우물(井)의 지명 위로 거대한 호수가 조성된 셈이니 희한하게도 땅이름이 먼저고 호수가 나중이다.

산정호수는 이미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됐을 정도로 일찌감치 관광명소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일찍 관광지가 되면서 상가와 위락시설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면서 언제부턴가 ‘낡은 여행지’의 이미지로 추락했다. 하지만 상가구역 등이 정비되고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뜸해지면서 고즈넉한 예전의 분위기를 찾아가고 있다.

본래 산정호수가 명소로 꼽힌 건 주위를 두른 산들이 호수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경치 때문이었다. 해발 922m의 명성산의 암릉에다 망봉산, 망무봉 등이 호수 위에 반영되는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매혹적이다. 호수를 도는 5㎞ 남짓의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이런 경치를 만끽할 수 있다. 산책로의 일부 구간은 물 위에 나무덱을 설치해 걸을 수 있도록 해놓았는데, 이른 아침이나 해질 무렵에 나무덱 위를 걷다가 난간에 팔꿈치를 올려놓고 호수의 잔잔한 수면 위로 비친 물그림자를 바라보는 맛이 그만이다.

산정호수까지 찾아갔다면 평강식물원을 빼놓지 말자. 본래 포천에는 식물원들이 곳곳에 있었다. 그러나 꽃양귀비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포천뷰식물원이나 다양한 꽃들을 정원처럼 가꿨던 유식물원은 전원주택단지가 들어서거나 캠핑장으로 탈바꿈했다. 남은 것은 평강식물원과 신북리 쪽의 허브아일랜드 단 두 곳뿐이다. 평강식물원은 기존의 지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꾸며놓았는데, 자생식물원, 고산습원, 암석원 등 12개 생태정원이 잘 관리되고 있다. 개병풍, 노란만병초, 조름나물, 독미나리 등의 멸종위기식물을 보유하고 있어 환경부지정 멸종위기식물 서식지 외 보전기관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 주상절리와 협곡이 만들어낸 기괴한 풍경

찾아가는 길이 쉽잖은 탓에 뒤로 미뤄두긴 했지만, 포천에서 가장 빼어난 풍경을 꼽으라면 추가령구조곡을 이루는 한탄강 곳곳의 현무암 지대를 들 수 있다. 수만 년 전 북녘땅 오리산에서 분출해 끓어 넘치던 용암이 한탄강변 곳곳에 기기묘묘한 풍경을 빚어놓았다. 포천시는 이런 현무암 명소 여덟 곳에 ‘포천 한탄 8경’이라 이름 붙였다. 그중 가장 빼어난 경치를 보여주는 곳이 바로 ‘한탄 6경’인 영북면 대회산리의 비둘기낭폭포다. 논 옆으로 흐르던 물길이 땅이 푹 꺼진 현무암 주상절리 벼랑으로 떨어져 굽이친다. 나무덱 계단을 따라 어둑한 협곡으로 내려가면 기이한 지형과 이국적인 정취가 어우러지는 폭포가 나타난다. 비둘기낭폭포는 장마철에 진면목을 드러낸다. 스프레이로 물을 뿌린 듯 자욱한 물안개 속에서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와르르 쏟아지는 폭포의 물줄기가 장쾌하기 그지없다.

그에 못지않은 곳이 한탄 7경으로 꼽히는 구라이골이다. 운산리에서 중리 쪽으로 87번 국도를 타고 가다 영노교에 닿기 전에 오른쪽으로 무선기지국 탑이 보이면 좌회전해 잡초 무성한 묵은 밭 사이로 비포장 길을 끝까지 들어간 뒤 거기서 길을 더듬어야 한다. 강변에 꼭꼭 숨어 있어 지도를 들고도 웬만한 눈썰미로는 찾아가기 어려우니, 도로변의 주유소나 마을 주민들에게 물어서 찾아가는 수밖에 없다.

구라이골은 한탄강변의 아슬아슬한 벼랑 아래 있다. 가파른 내리막의 희미한 길을 내려간 뒤 강과 합류하는 물길을 따라 오르면 날카롭게 날을 세운 서늘한 현무암의 주상절리 벽을 만나게 된다. 주상절리 틈으로 자그마한 폭포가 흘러내린다. 크기나 위용은 비둘기낭폭포에 어림도 없지만, 기괴한 분위기는 못지않다. 폭포 위쪽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좁은 협곡 안쪽의 풍경이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아쉽게도 폭포 너머로 도무지 접근할 방법이 없다.

비둘기낭폭포와 구라이골 외에도 냉정저수지를 지나서 당도하는 한탄 1경인 대교천 현무암 협곡과 한탄 5경인 관인면 교동마을의 교동가마소, 화적연 등도 함께 둘러보면 좋을 곳이다. 반면 한탄 8경 중에서 2경인 샘소와 4경인 멍우리주상절리대, 8경인 아우라지베개용암 등은 지형의 특이성에 비해 경관은 그닥 감흥이 없으니, 풍경을 보고자 한다면 건너 뛴다 해도 그리 아쉽지 않다.


◆국립수목원 가는 길 = 북부간선도로 신내나들목이나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퇴계원나들목에서 나와 47번 국도로 갈아타고 퇴계원, 진접읍을 지난 뒤 국립수목원, 광릉방면으로 우측방면으로 빠져나와 98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광릉을 지나 국립수목원 입구다. 47번 국도를 타고 가다 이동면사무소를 지나 이동교차로에서 좌회전, 여우고개를 넘어가면 산정호수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 한화리조트 산정호수가 최근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통해 한화리조트 산정호수 안시란 이름으로 재탄생했다. 이름에 쓰인 ‘안시’는 맑은 호수를 가진 프랑스의 휴양도시. 산과 호수로 둘러싸인 산정호수와 잘 어울리는 네이밍공모를 통해 붙여진 이름이다. 리조트 외관이나 객실내부는 짙은 회색과 흰색을 주로 쓰고 붉은색으로 포인트를 줘 세련된 느낌이다. 리모델링을 통해 수영장을 없애고 그 자리에다 실내에서 농구, 배구, 배드민턴, 탁구 등을 즐길 수 있는 다목적 공간을 만들었다. 20명 이상이 투숙할 수 있는 단체실도 독특한 콘셉트로 눈길을 끈다. 전면의 채광창으로 환한 볕이 드는 자리에는 카페 ‘라끄’가 문을 열었다. 숙박을 하지 않더라도 유독 매끄러운 온천수를 사용하는 리조트 온천사우나는 추천할 만한 곳. 리모델링을 기념해 오는 19일까지 숙박패키지를 판매하고 있다. 주중 2인 기준 10만5000원부터. 식사와 레포츠 이용 유무 등에 따라 금액이 달라진다. 02-729-3833

한탄강을 끼고 있는 포천은 매운탕으로 유명한 맛집이 많다. 그중 첫손으로 꼽히는 집이 냉정저수지 부근의 ‘샘물매운탕’(031-533-6880)이다. 점심시간에만 영업을 하는데 메기와 잡어를 듬뿍 넣어서 고추장 양념으로 끓여내는 매운탕이 얼큰하다. 산채정식을 내는 민들레울(031-543-0981), 직접 만든 순두부와 보리밥을 산나물과 함께 차려내는 ‘원주파주골순두부’(031-532-6590)도 추천할 만한 맛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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