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상

배달의 꽃 무궁화

醉月 2009. 11. 30. 09:18

무궁화가 배달 겨레와 인연(因緣)을 맺게 된 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만큼이나 유구하다. 배달의 꽃 무궁화는 단군조선의 건국 이전인 신시시대에 환나라의 꽃인‘환화(桓花)’로 배달 겨레와 인연을 맺었고, 단군조선시대에는‘훈화(薰華)’,‘천지화(天指花)’,‘근수(槿樹)’등의 명칭으로 다양해졌다. 이 시대에 무궁화는 하늘에 제사(祭祀)지내는 신단(神壇) 둘레에 많이 심어져 신성시되었고, 15대(代) 단군은‘훈화’를 뜰 아래 심어 정자(亭子)를 만들었으며 국자랑(國子郞)들은‘천지화’를 머리에 꽂고 다니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4천3백여 년 전에 쓰여진 중국 고대 지리서(地理書)인《산해경》의‘훈화초(薰華草)’의 기록 이후 우리 문헌인《조대기》, 《단군세기》, 《단기고사》,《규원사화》등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특히 당·송시대(唐宋時代)나 고려(高麗)때에는 시인(詩人)·묵객(墨客)들이 무궁화를 예찬(禮讚)한 시(詩)가 많이 보인다.


▲<규원사화>


신시시대

〈신시시대의 역사적 배경〉 신시시대란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하기 이전의 시기를 말하는 것으로 계연수(桂延壽)가 지은《환단고기》의 역년(歷年)에 의하면 확실하지는 않지만 환인(桓因) 7대(기원전 7l97에서 기원전 3897까지) 3,301년간과 환웅(桓雄) 18대(기원전 3897에서 기원전 2333까지) 1,565년간 도합(都合) 4,866년간이며 신정(神政)을 베푼 시기이다. 이 시대의 역사적 배경을《규원사화》와 《환단고기(桓檀古記)》,《한국 상고사 입문》에 실린 내용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고(太古)에 상계(上界)에는 한 큰 주신〔一大主神〕인 환인이 있었는데, 온 세상을 다스리는 많은 지혜와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 형체는 드러내지 않고 가장 높은 하늘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수만 리나 떨어진 곳이지만 언제나 환하게 빛났으며 그 밑에는 수많은 작은 신〔小神〕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환(桓)이란 밝게 빛나는 그 형체를 말하는 것이며, 인(因)이란 본래의 근원이며 만물이 이것에서 생겨나는 것을 의미한다. 환웅천왕(桓雄天王)에게 명을 내려 우주를 열고 천지만물(天地萬物)을 창조하게 하였다. 환인은 무리를 거느리며 하늘〔天界〕에 있었다. 돌을 쳐서 불을 붙임으로 비로소 익혀 먹는 법을 가르쳤다. 이것을 환국(桓國)이라 하며 환인을 천제환인씨(天帝桓因氏)라 하고 또는 안파견(安巴堅)이라고도 한다. 환인은 7대를 이어 그 역년(歷年)이 모두 3,301년인데 혹은 63,182년이라고도 한다. 환국의 말년에 안파견(安巴堅)이 아래로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보고 모든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할 수 있다고 여겨“누구를 거기에 사자로 보내면 좋겠느냐”고 하자, 오가(五加)가 모두 다 말하기를“서자(庶子:높은 벼슬의 명칭)중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사온데 용맹스럽고 어질고 지혜로움을 겸하였습니다. 일찍이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는 세상을 이루는 데 뜻을 두고 있었으니 이를 태백(太白)에 보내어 다스리게 하옵소서 하니, 이에 천부인(天符印)세 개를 주며 이르기를,“이제 사람과 물건은 다 완전히 만들었으니 그대는 수고로움을 아끼지 말고 3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가서 하늘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세상을 이치(理致)로 교화하여 자손만세의 모범이 되는 큰 법을 세워라.”하였다. 이에 환웅이 무리 3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白山) 꼭대기 신단수(神壇樹) 아래에 내려왔다.

▲환웅의 하강

이곳을 신시(神市)라고 하였으며 이 분을 환웅천왕이라고 한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시켜서 곡식을 맡아 다스리고, 형벌을 맡아 다스리고, 병을 맡아 다스리고, 선악을 맡아 다스려서 모든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맡아 다스리며, 세상을 이치로 교화하여 인간을 널리 유익하게 하였다. 환웅천왕께서 뒷날 배달 나라인 청구(靑丘)로 옮아가, 94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120살에 돌아가시고, 나라를 다음 대(代)의 거불리 환웅(居佛理桓雄)에게 물려주었다.
첫대 환웅 임금으로부터 맨 마지막 대 거불단 환웅(居佛檀桓雄), 혹은 단웅(檀雄) 임금에 이르기까지 대수는 18대요, 나라 다스린 햇수는 합1,565년 동안이다.

정착생활을 하게 된 사람들이 박달나무 아래에 제단을 만들고 환웅을 수장(首長)으로 추대하니 보본(報本), 경천(敬天), 숭조(崇祖)하는 소도교(蘇塗敎)를 펴고 법질서를 두루 보호하며 교화하여 편히 살게 하였다. 그들이 오랜 신시시대를 지내는 동안 그 지역 원주민과 융화·통혼·혼합하기도 하고 무력 으로 정복·배제하기도 하였다.

〈문헌상의 기록〉
조선 중종 15년(1520)에 찬수관(撰修官) 이 맥(李陌)이 지였다는《태백일사(太白逸史)》의 인용 사서 중에 고구려를 이은 발해의 비장서(秘藏書)인 《조대기(朝代記)》가 있는데, 이것을 인용하여 고려 공민왕 때 학자인 이 명(李茗)이 《진역유기(震域留記)》를 저술하였고, 이것은 또한《규원사화(揆園史話)》의 저본(低本)이 되었다 한다. 이《조대기》에 우리 나라 최초의 무궁화로 보이는 환화(桓花)가 나타난다. 비록《조대기》가 현존하지 않는 관계로 사서(史書)로서의 가치의 비중이 논란이 되고 있긴 하나, 무궁화 역사상 중요한 기록임을 부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조대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衆自相環舞仍以推桓仁坐於桓花之下積石之上羅拜 중자상환무잉이추환인좌어환화지하적석지상라배 之山呼聲溢歸者如市 지산호성일귀자여시 무리들은 서로 돌면서 춤을 추고 환인(桓仁)을 추대하여 환화 밑 돌 쌓은 위에 앉게 하고 줄지어 절하고 만세를 부르니 소리가 울려 넘쳤고 돌아와 의지〔歸依〕하는 자가 많아 저자〔市〕와 같았다. 여기에서 환인(桓仁)은 환인(桓因)을 달리 부르는 명칭인 것 같은데《조대기》와 《삼성밀기(三聖密記)》, 《단기고사》등에는 환인(桓仁)으로 되어 있다. 환인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단상(壇上)주위에 온통 환화가 둘러싸여 있었던 것 같은데, 그 신성한 자리를 환화 밑에 마련한 것을 보면 환화는 보통의 꽃이 아닌 특별한 꽃이었을 것이다. 안호상(安浩相)은 9환 겨레〔九桓族〕를‘환〔桓, 天, 韓]한’곧‘밝은〔明〕’겨레라 하고,이들이 차지한 땅을 환한(밝은)나라라는 의미에서 환나라〔桓國, 天國, 韓國〕라고 하였다. 이 말을 살펴보면‘환(桓)’은 곧‘하늘〔天〕’‘밝음〔明〕’‘한(韓)’의 뜻임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환화는‘하늘 꽃’‘밝은 꽃’으로 해석할 수가 있고, 또‘환나라의 꽃’‘하늘 나라의 꽃’‘한나라의 꽃’으로도 풀이할 수가 있다. 그리고 환인은 하늘의 신(神)들 중 주신(主神)을 말하는 것인데, 환인의‘환’이 또한 환화의‘환’과 같이‘밝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로써 환화는‘환인’을 상징하는 꽃이 되기도 하여 신(神)을 상징하는‘신의 꽃’으로 불려져 신성시되었던 것 같다. 이 환화(桓花)는 무궁화를 말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고조선시대에서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환인(桓因)이 임금으로 된 후 7대를 이었는데, 그 역년(歷年)은 3,301년(기원전 7197∼3897)간이라 한다. 곧 지금으로부터 약 9,000여 년에서 5,800여 년 전의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당시의 사실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이나 고고학자들이 계속 연구해야 할 부분이므로 더 이상의 자세한 사실은 생략하기로 한다. 이렇듯 무궁화는 환나라의 나라꽃인 환화로서 우리 민족의 시원(始原)과 그 역사를 함께 한 것이다. 또한, 신령한 꽃으로 인식되어 신의 꽃으로 불리어짐은 그 연원(淵源)을 신시시대에서부터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고조선시대

〈고조선시대의 역사적 배경〉 고조선에 대해서 최태영, 이병도 공저(共著)인 《한국 상고사 입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단군관련 서적들

고조선을 창건한 최초의 제왕(제1대 단군)이전, 즉 환웅까지의 신시시대의 긴 세월을 지내고서, 단군 임금이 인민의 추대를 받아 제위에 올라 조선이라는 강대한 국가를 창건함으로써 큰 나라(고조선)의 제정(帝政), 즉 단군조(檀君朝)의 군주정(君王政)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고조선국의 역사의 시작이다. 이전의 신시(神市)는 아직 고조선국이 아닌 사회였으나, 단 군이 고조선을 세운 때부터는 강대한 광역(廣域)국가인 조선의, 신화나 전설이 아닌 실존 인간인 단군 왕검에 의한 단군 왕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환웅천왕의 신시(神市)까지에 대해서는 신화나 전설적인 사실로, 또한 그것이 국가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귀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단군의 조선 개국부터는 현실의 광역·강대국의 실존 인간인 군주국의 사실(史實)이어서 명백한 국가 역사의 기술인 것이다.

다만 그 사상과 제도와 유속(遺俗)에 있어서 조선이라는 국가 창건 이전 사회(신시시대)의 것을 이어받아 발전시켜서 후대에까지 그 전통을 만들어 온 것일 따름이다. 어쨌든 단군의 조선 건국 기사에서부터는 신화나 설화란 말이 남아 있을 수 없다. 다만 사기(史記)와 사화(史話)일 뿐이다.

 

단군 개국 후 고조선의 국가체계와 국가조직은 단군왕검을 최고의 대제왕(大帝王)으로 삼아, 다수의 대소 분봉(分封)제후국가들이 그 밑에서 분국(分國)하여 소왕(小王)·부왕(副王)·제후들이 통치하는 연합체였다. 고조선의 단군 왕조는 천백여 년 동안 47대를 계속해 다스리더니, 중국 은(殷)의 연속적인 장기 침공을 받아, 끈질기고 굳세게 항전하다가 패하여 일시 피한 적이 있었으나, 미구에 어진 이가 다시 일어나서 그 후손이 거의 천년 동안 약 40대나 존속하였으므로 전·후기를 합하면 고조선이란 나라의 수(壽)가 기원전 2333년부터 기원전 280년 무렵까지 2천 여 년을 존속하였다.

 

그 말기(末期)에 이르러서는 국세가 쇠약해지고 그 제후국들이 분립하여 열국시대를 이루었고, 그 열국들 중에도 부여국(夫餘國)이 강성하여 부여왕이 단군이라고 일컬어지게 되고, 부여에서 고구려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또,《환단고기》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기(古記)에 말하기를, “왕검(王儉)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오, 어머니는 웅씨(熊氏)의 왕녀(王女)이다. 신묘(辛卯) 5월 2일 인시(寅時)에 단수(檀樹)밑에서 태어났다. 신인(神人)의 덕이 있어 멀고 가까운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복종하였다. 나이 14살인 갑진(甲辰)년에 웅씨(熊氏)왕이 그 신성(神聖)함을 듣고 뽑아 올려 비왕(裨王)을 삼고 대읍(大邑)의 국사(國事)를 대행하게 하였다.

 

무진(戊辰) 당요(唐堯)때에 단국(檀國)으로부터 와서 아사달(阿斯達)의 단목(檀木)있는 곳에 이르니 나라 사람들이 천제(天帝)의 아들로 추대하였다. 구환(九桓)을 하나로 만들고 신화(神化)가 멀리 미치니 이를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고 하였다. 비왕(裨王)의 자리에 있은 지 24년, 임금〔帝〕의 자리에 있은 지 93년이니 수(壽)는 130세이다. 첫해〔戊辰〕대시신시(大始神市)때에 사방에서 모여든 백성들이 산골짜기에 두루 퍼져 살면서 풀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발을 벗고 삼았다. “개천(開天) 1565년 상달(10월) 3일에 이르러 신인왕검(神人王儉)이라는 분이 있어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무리 800명을 거느리고 단목(檀木)있는 곳에 왔다. 무리들과 함께 삼신(三神)에게 제사드리니 지극한 신(神)의 덕(德)에 성인의 어짐을 겸하였다. 명을 받들어 능히 하늘을 계승하여 높고 넓고 매우 굳세었다. 이에 구환(九桓)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여 지성으로 복종하고 추대하여 천제(天帝)의 화신(化身)으로 제(帝)라 하니 이 분이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신시(神市)의 옛 법을 다시 회복하며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세우고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단군이 단정히 손을 마주잡고 하염없이 세계에 좌정(坐定)함으로 현묘(玄妙)한 도(道)를 얻어 모든 사람을 만나 교화하였다. 팽우(彭虞)에게 명하여 토지를 개척하게 하고 궁실(宮室)을 만들어 일으키게 하였으며, 고시(高矢)에게 씨를 뿌리고 농사짓는 일을 주관하게 하고, 신지(臣智)에게 문자를 만들어 기록하게 하고, 기성(奇省)에게 의약(醫藥)을 베풀도록 하고, 나을(那乙)에게 판적(版籍) 희전(羲典) 괘서( 筮)를 맡게 하고, 우작(尤作)에게 병마(兵馬)의 일을 맡게 하였다. 비서갑(菲西岬) 하백(河伯)의 딸을 맞아 황후로 삼아 누에를 치게 하니 인정이 후한 다스림이 천하에 흡족히 퍼졌다. 또,《규원사화》에는 위의 사실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지금부터 거슬러 올라가 대충 계산해 보면 약 4천 여 년이나 된다. 연대로 보아 당요(唐堯)와 같은 시대이므로 세상에서 소위 요(堯)와 아울러 함께 있었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단군이란 박달임금을 번역한 것이기 때문에 단군(檀君)이라 한다. 신시씨가 박달나무[檀木〕아래에 내려오고 환검신인이 다시 박달나무 아래에서 임금 자리를 이어 받았기 때문에 단(檀)으로써 나라 이름을 삼은 것이다. 단군(檀君)이란 단국(檀國)의 임금이라는 뜻이다.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이라고 하며 흑은 백달(白達:배달)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임금을 임검이라 한다. 당시에는 한자가 없었기 때문에 백달임검이라고 한 것이다. 《동사강목(東史綱目)》에선 말하기를,“배달〔檀〕은 나라 이름인 까닭에, 그 자손들은 모두 배달 임금(단군)이라 한다”하였고,《동국여지승람》에선“단군이라 일컬음은 곧 배달 나라 임금의 칭호인 까닭에, 그 나라를 잇는 임금〔嗣君〕들을 모두 단군이라 일컫는다”라 하였다.

단군왕검은 배달 나라의 제 1대 임금이요, 단군은 단국군(檀國君) 곧‘배달 나라 임금’으로서 배달 나라의 47대 임금들을 통틀어 가리키는 말이다.

 

고조선의 사회와 문화에 대해서는 윤내현, 박성수, 이현희 공저(共著)《새로운 한국사》에 실린 내용으로 간략히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고조선 사회는 대체로 지배귀족·서민·노예의 3계층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지배귀족은 단군을 정점으로 하여 각 지역의 통치를 맡고 있는 제후, 단군과 제후의 통치를 보좌하기 위하여 설치된 상(相)·장군(將軍)·대부(大夫)·박사(博士) 등 여러 종류의 문관과 무관 관료들이 주축을 이루고, 그들과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사회적 신분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력과 경제적 이권도 차지하고 있었다. 농경지도 대부분 그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서민은 농민·수공업자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농민이 주류를 이루었다. 수공업자는 청동기·질 그릇·골각기 등의 제조자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청동기 제조자는 지배귀족을 위하여 봉사하였다. 농민 가운데는 작은 토지를 가족이 경작하는 자경농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부락구성원이 집단으로 경작하는 부락공동체를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부락공동체가 고조선 사회의 기층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 인구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노예는 사회 신분이 가장 낮은 계층으로서 사람으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고 동물이나 물건과 같이 재산으로 취급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생사에 대한 권한은 그의 주인이 가지고 있었다.

고조선 사상의 중심을 이루었던 것은 다른 지역의 고대 사회와 마찬가지로 종교였다. 고조선의 종교는 선교(仙敎)였다. 선교의 핵심은‘단군신화’에 함축되어 있는데, 그것은 고조선이 건국되기 전부터 전해 오다가 고조선 건국과 더불어 한민족의 종교와 사상으로 확산되었다.

선교는 하늘을 가장 높은 신으로 숭배하였으며 선교를 주제한 사람은 단군이었다. 따라서 단군을 포함한 선교의 주요 인물들을 선인(仙人)이라고도 하였다. 고조선에는 종교적 중심지로서 하늘에 의식을 행하는 신단(神壇)이 있어서 선인(仙人)을 신선(神仙)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신선사상은 후에 중국 도가의 신선사상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선교의 정치사상·사회사상의 요체는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하고 귀하게 여긴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이었다. 단군신화에 의하면 환웅은 지상에 내려 올 때 태백산이 인간을 널리 이롭게〔弘益人間〕하기에 알맞은 곳이므로 그곳에 내려와 신시(神市)를 베풀었다. 따라서‘홍익인간’정신은 고조선 건국 이전부터 있었던 사상인데 고조선 건국과 더불어 한민족 전체의 사상으로 확산·정착되었다.‘홍익인간’정신은 현실정치와 사회에 크게 영향을 미쳐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 사이에 갈등이 심하지 않은 사회를 유지 시켰다. 고조선에는 종교적 조직으로서 중앙과 제후국에 신에게 제사지내는 성지가 있었다. 중앙의 것을 신단(神壇), 제후국의 것을 소도(蘇塗)라고 하였다. 단군은 제후를 봉할 때 제사 의식에 필요한 종교적 상징품인 규(圭)를 그들에게 하사하여 종교적 권위를 일부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각 제후국에는 종교적 우두머리로서 하늘에 대한 제사를 관장하는 천군(天君)을 두었다. 단군은 종교적으로 천군들의 우두머리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조직을 통하여 단군은 정치적·종교적으로 최고 위치에 있으면서 신권통치를 하였던 것이다. 단군의 고조선 통치는 중앙에서는 상(相)·장군(將軍)등의 관료가 보좌하였고, 지방조직으로는 제후(諸候)·박사(博士)등이 있었다. 대체로 각 지역의 제후국은 원래 각 지역에 있었던 부락연맹체들이었는데,그들이 조선족 부락연맹체에 복속되어 고조선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조선족 부락연맹체 안에서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원조선족(原朝鮮族) 취락의 구성원들이 가장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고, 다른 일반 부락들은 그 기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따라서 원조선족 취락 구성원들이 고조선의 최고 지배 귀족이었다. 한편 제후국도 원래 각 지역의 부락연맹체였으므로 제후를 중심으로 한 제후 일족 취락의 구성원들이 그 지역의 지배귀족이 되었고, 다른 부락은 그 기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조선 초기에는 대부분의 제후가 고조선 왕실과는 혈연관계가 없는 각 지역 부락연맹체의 우두머리들로 구성되어 있었지만, 세월이 흐르고 중앙 권력이 강해지면서 단군의 아들이나 근친이 제후로 봉해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즉, 세월이 흐르면서 봉건제도가 점차 왕실과의 혈연에 기초한 조직으로 변모되어 갔던 것이다.

 

〈문헌상의 기록〉 신시시대에는 무궁화를 환화(桓花)라 하여 환국(桓國)의 꽃으로 불려졌으나, 단군조선시대에는 환화(桓花)·근수(槿樹)·훈화(薰華)·천지화(天指花)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나타난다. 또한, 환화를 노래한〈애환가(愛桓歌)〉가 있었는데, 무궁화 5천년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고구려 멸망시에 평양성 함락으로 인하여 사고(史庫)가 불타 없어지고《신집(新集)》5권을 비롯한 많은 사서 문헌이 모조리 소각되자, 고구려의 유장(遺將) 대조영(大祚榮?∼719)이 발해(渤海)를 건국한 즉시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에게 명하여《단기고사(檀奇古史)》를 참수케 하였다. 대야발은 왕의 명을 받고 천통(天統) 9년(707)부터 13년간 돌궐(突厥)을 세 차례나 왕래하면서 사료(史料)를 수집·섭렵하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천통 21년(719)에《단기고사》를 완성하였다고 하는데, 현존하는《단기고사》는 1959년 10월 3일 개천절을 기하여 정해박(鄭海珀), 이종국(李鍾國), 김재형(金在衡) 등이 복간하여 놓은 복간본(復刊本)만이 남아 있다.

제5대 단군은 구을(丘Z)이며, 16년간 재위하였는데《단기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十六年帝行幸古歷山築祭天壇多樹周邊以槿樹 십육년제행행고력산축제천단다수주변이근수 16년에 임금께서 고력산(古歷山)에 행차하여 제천단(祭天壇)을 쌓고 주변에 근수(槿樹)를 많이 심었다. 또, 《단군세기(檀君世紀)》에 5대 단군 구을(丘Z) 에 대한 사실(史實)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丁丑十六年親幸藏唐京封築三神壇多植桓花 정축십육년친행장당경봉축삼신단다식환화 16년 정축(丁丑)에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쌓고 환화(桓化)를 많이 심었다.

제5대 단군 16년은 기원전 2,090년 즉, 지금으로부터 4,082년 전의 일이 된다.〔
편집자주(註):이후에 기록되는 연대는《규원사화》연대력에 따른 것임〕 위의 두 사실은 서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근수와 환화라고 적고 있다. 근수는‘무궁화나무’이다. 따라서‘환화’는‘무궁화’가 된다. 《단군세기》는 고려 공민왕 12년(l363)문정공(文貞公) 행촌(杏村) 이 암(李 )이 강화도에서 지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신라의 고승 안함로(安含老)가 지은 《삼성기(三聖記)》와 원동중(元董仲)이 지은《삼성기(三聖記)》및 고려 공민왕 때 휴애거사(休崖居士) 범장(范樟)이 편찬한 《북부여기(北夫餘紀)》, 조선 중종 15년(1520)에 이 맥(李陌)이 편찬한《태백일사(太白逸史)》 등의 문헌들과 더불어 운초(雲 ) 계연수(桂延壽)가 대한 광무 15년(1911)에 발간한《환단고기(桓檀古記)》에 실려 있다. 이렇게 다른 시대에 다른 사람이 지은 문헌 속에 동일한 사실(史實)이 기록됨은 그 사실의 신빙성을 더욱 확고히 하는 바, 환화가 무궁화임은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한 《단군세기》에는 환화(桓花:무궁화)에 대한 다른 사실도 여러 가지로 기록하고 있다.

 

 

 

 ◀<단군세기>

    
11대 단군(十一代檀君) 도해(道奚)는 57년간 재위(在位)하였는데, 그 원년(元年)은 기원전 1906년이다. 겨울 10월에 명을 내려 대시전(大始殿)을 지었는데 매우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한다. 그때에 천제환웅(天帝桓雄)의 유상(遺像)을 받들어 안치하였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坐於檀樹之下桓花之上 좌어단수지하환화지상 박달나무 아래 환화(무궁화) 위에 앉았다. 유상(遺像)이란 죽은 사람의 초상화를 말하는 것인데, 초상화 그림의 내용이 박달나무 아래에 환웅이 앉아 있고, 그 둘레에 무궁화가 많이 피어 있음을 설명하는 말이다. 또, 13대 단군은 흘달(屹達)또는 대음달(代音達)이며, 61년간 재위하였는데, 원년은 기원전 l843년이다. 이때의 사실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戊戌二十年多設蘇塗植天指花使未婚子弟讀書習射 무술이십년다설소도식천지화사미혼자제독서습사 號爲國子郞國子郞出行頭揷天指花故時人稱爲天指 호위국자랑국자랑출행두삽천지화고시인칭위천지 花郞 화랑 20년〔戊戌〕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여 천지화(天指花)를 심고 아직 결혼을 안한 자제(子弟)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으니 이를 국자랑(國子郞)이라 하였다. 국자랑이 나와 다닐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天指花)를 꽂았기 때문에 그때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불렀다.

 

소도(蘇塗)는 고조선(古朝鮮)의 제후국에 있는 성지(聖地)로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이다. 이곳에는 천군(天君)이라는 제사장이 살며 죄인이 이곳에 도망을 해도 잡지 못하는 신성한 곳이었다. 이러한 장소에 심는 꽃인‘천지화’는 당연 보통의 꽃이 아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당시에‘환화(무궁화)’를 하늘의 꽃으로 여겨 하늘에 제사지내는 신성한 제천단 둘레에 심은 것으로 볼 때 천지화는 곧 환화일 것으로 짐작된다. 천지화(天指花)의 의미를 알아보면, 지(指)는‘가리키다’,‘곤두서다’,‘뜻하다’,‘아름답다’의 뜻을 가진 글자이므로 천지화란 곧‘하늘을 가리키는 꽃’, 하늘로 곤두선 꽃’,‘하늘을 뜻하는 꽃’,‘하늘의 아름다운 꽃’이 되는데,‘하늘의 꽃’은 전술(前述)했듯이 환화를 일컫는 것이다. 따라서 천지화는 무궁화임을 알 수가 있다. 또, 천지화랑은 신라시대 화랑도(花郞徒)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후술(後述) 하기로 한다. 16대 단군은 위나(尉那)인데, 재위는 58년간이며, 원년은 계해년(기원전 1738)이다. 이때의 사실로《단군세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28년〔戊戌〕에 구환(九桓)의 제한(諸汗)을 영고탑(寧古塔)에 모아 삼신(三神)과 상제(上帝)에게 제사지내고 환인(桓因), 환웅(桓雄), 치우(蚩尤) 및 단군왕검(檀君王儉)도 함께 배향(配享)하였다. 닷새 동안 크게 잔치를 베풀고 무리들과 더불어 밝은 등불은 밤을 밝혔으며 경(經)을 외우면서 뜰을 밟았다. 한편에서는 횃불을 줄지어 세우고 한편에서는 돌면서 춤을 추며 〈애환의 노래〔愛桓歌〕〉를 함께 불렀다. 애환(愛桓)이란 곧 옛 신가(神歌)의 류(類)이다. 선인(先人)들은 환화(桓花)를 가리켜 이름은 부르지 않고 그냥 꽃〔花〕라고 하였다. 〈애환의 노래〉에 이르기를, 山有花山有花 산유화산유화 去年種萬樹 거년종만수 春來不咸花萬紅 춘래불함화만홍 有事天神樂太平 유사천신락태평 산에는 꽃이 있네 산에는 꽃이 있네 지난해에 만 그루를 심었고 금년에도 만 그루를 심었네 봄이 불함산(不咸山)에 오면 꽃은 만발하여 붉고 하느님을 섬겨 태평을 즐기리 위의 기록들은 모두 고동영(高東永)의 《단군조선 47대사》에도 실려 있는데, 한결같이 환화(桓花)가 무궁화임을 언급하고 있다. 특히 16대 단군에 대한 기록의 각주에는 '경(經)을 외우면서 뜰을 밟는 것'은 제천의식의 일종으로 오늘날 '지신밟기'로 이어지고 있으며 '둥글게 돌면서 춤을 추며'는 제1대 환인 임금 때에도 똑같은 기록이 있는데, 이 역시 지금의‘강강 술래’로 이어졌다 한다. 또〈애환가(愛桓歌)〉는 본문에 나오는 가사로 보아‘나라꽃 무궁화’를 사랑하는 노래〔愛桓花歌, 애환화가]의 약칭일 것으로 짐작된다 하였다. 위의 노래 가사 중 불함(不咸)은 백두산(白頭山)을 일컫는 것이다. 이러한 노래가 사실상 옛부터 불려 온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영원한 시인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의 〈산유화(山有花)〉가 바로〈애환가〉의 박자감각과 어휘감각 일면에 닿아 있다는 느낌 또한 지 울 수 없게 된다. 이 문제는 앞으로의 우리 학맥이〈애환가〉를 인정하느냐 아니하느냐에 따라 논의될 성질의 것이므로 여기서는 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이와 같은《단군세기》와 《단기고사》의 기록으로 단군조선시대에 환화 즉 무궁화는 배달 겨레의 꽃으로 사랑받아 왔음을 알 수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조선 숙종 원년(1675)에 북애자(北崖子)가 저술한 도가 사서로서 일명《단군실사 (檀君實史)》라고도 하는데,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庚寅歲壬儉伐元年種薰華於階下以爲亭 경인세임검벌원년종훈화어계하이위정 경인년은 벌음 임금 원년이다. 훈화(薰華)를 뜰 아래 심어 정자를 만들었다. 벌음(伐音) 임금은 제15대 단군으로 재위는 32년간이며 원년(元年)은 기원전 1771년이다. 또한,《규원사화》의 만설(漫說)은 결론이자 저자의 사관(史觀)을 피력하고 있는 부분인데, 郭璞贊之則曰有東方氣仁國有君子薰華雅好禮讓 곽박찬지즉왈유동방기인국유군자훈화아호예양 禮委論理 예위논리 곽박이 칭찬하여 말하기를,‘동방에 어진 나라가 있는데 군자와 아름다운 훈화가 있고 사양하는 것을 좋아하며 예는 이치로 따진다’고 했다.

 ▲<규원사화>

위의 곽박의 말은《산해경》에 기록된 내용으로 북애자(北崖子)가 인용한 것인데, 훈화(薰華)는 무궁화를 일컫는 것이다. 또,《규원사화》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단군이 제후를 봉하여 다스리니 세상은 더욱 밝아지고 고요했다. 그러다가 십년 만에 갑비고차(甲比古次)에서 남이(南夷)의 난이 있었다. 갑비고차는 벌써 남이인(南夷人)의 땅이었다.

임금은 부여(夫餘)에게 군사를 주어 평정하게 했다.

 

후에 부소(夫蘇)와 부우(夫虞)도 보내어 갑바고차에 성을 쌓게 하여 남쪽을 지키게 했다. 이곳이 지금 강화도의 삼랑성(三郞城)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참성단(塹城壇)이 있다. 이것이 단군이 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지내던 머리산〔頭嶽〕이다. 위의 글로써 참성단이 고조선시대에 하늘에 제사 지내던 신단(神壇)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시대의 신단 주변에는 전술(前述)했듯이 무궁화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물론 현재에는 참성단 주변에 무궁화를 심어 놓았지만, 이곳에는 상고(上古)시대부터 무궁화가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 위의《단군세기》에는 제2대 단군 부루(扶婁)때의 사실로 다음과 같은 기록도 보인다. 신시(神市) 이후로 하늘에 제사지낼 때마다 나라 안 사람들이 많이 모여 함께 노래부르며 화합하고 어아(於阿)를 노래로 하여 감사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았다. 신(神)과 사람이 화합하고 어디서나 이를 법으로 삼으니 이것이 참전계(參佺戒)이다. 그 가사(歌詞)에 말하기를, 於阿於阿我等大祖神大恩德어아어아아등대조신대은덕倍達國我等皆百百千千勿忘배달국아등개백백천천물망 於阿於阿善心大弓成惡心矢的成어아어아선심대궁성악심시적성 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絃同善心直矢一心同아등백백천천인개대궁현동선심직시일심동 於阿於阿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一衆多失的貫어아어아아등백백천천인개대궁일중다시적관破沸湯同善心中一塊雪惡心파비탕동선심중일괴설악심 於阿於阿我等百百千千人皆大弓堅勁同心倍達어아어아아등백백천천인개대궁견경동심배달 國光榮

국광영 百百千千年大恩德我等大祖神我等大祖神백백천천년대은덕아등대조신아등대조신 어아 어아! 우리의 성조(聖祖)그 큰 은덕배달 나라 우리 모두 영원히 잊지 마세.

 

어아 어아! 선심은 큰 활이 되고악심은 과녁 일세. 우리 백성 모두는 활시위같이 바른 선심곧은 살 같은 한마음일세. 어아 어아! 우리 백성 모두는 큰 활 하나로수많은 과녁을 뚫고 보니 끓는 물 같은 선심 중에 한 덩어리눈과 같은 악심일세. 어아 어아! 우리 백성 모두는 활같이 굳은 마음배달 나라 광영일세. 영원한 큰 은덕 우리 성조 우리 성조. 위는 고동영(高東永)의 역(譯)으로《단군조선 47 대사》에 실린 것이다. 그는 또 이것을 원래(原來)의 가사라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아어아 나리한배검 가미고이배달나라 나리다모 골잘너나 도가오쇼어아어아 차마 무가하라다시 거마무니셜데나라나리골잘다모 한라 두리온차무 구셜하니 미무은다.어아어아 나리골잘다모 한라하니 무리셜데마부리야디미온디 차마무니 하니 유모거마무다 어아어아 나리골잘다모 한라고비온다무배달나라 달이하소 골잘 너나가미고이 나리한배검 나리한배검 이와 같은 기록들을 보건대 고조선시대에는 하늘에 제사지낼 때〈애환가〉로써 나라꽃을 찬양하였고, 어아를 노래하여 성조(聖祖)인 신(神)들의 은덕에 감사하였다. 이러한 부분들에 대해서는 연구가들의 깊은 고찰을 기대하는 바이다.

 

그리고 조선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의 화훼(花卉)에 관한 저서로《양화소록(養花小錄)》이 있는데, 강희안이 무궁화를 화보(花譜)에 수록도 하지 않고 또 화평에도 논하지 않았다는 점에 대하여 무궁화 애호가였던 안사형(安士亨)이 항의한 글 중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우리 나라에서는 단군께서 나라를 여실 때에 이미 목근화가 나왔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우리 동방(東邦)을 반드시 근역(槿域)이라고 말하였다.” 또, 심당(心堂) 이고선(李固善)이 단군 관계 서적 40여 권을 정리하여 편저한《심당전서(心堂全書)》에는 단군시대의 사실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庚午七年命 泰養馬于鞍山植槿于南崗名曰槿域경오칠년명극태양마우안산식근우남강명왈근역 경오년에 극태에게 명하여 안산에 말을 기르게 하고, 남강에 무궁화를 심으니 근역(무궁화 동산)이라 한다. 위의 글은 제1대 단군[《심당전서》에서는 천일태제(天一泰帝)라고 한다.〕때의 사실인데,지금으로부터 약 2,300여 년 전의 일이다. 또 제3대 단군(이 책에서는 태일성제(太一聖帝)라고 한다.〕때의 사실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辛酉五十四年命植槿于國內山川신유오십사년명식근우국내산천 신유 54년에는 국내 산천에 무궁화를 심게 하였다.

이상과 같은 여러 문헌들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보건대 무궁화는 고조선시대(古朝鮮時代)에도 우리 겨레의 생활 터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었고, 신령스런 하늘의 꽃으로 여겨져 신성한 신목(神木)으로 추앙되어 왔으며, 환나라〔桓國〕의 얼을 이어받아 무궁화가 고조선(古朝鮮)의 나라꽃으로 숭상되어 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상고사(上古史)를 연구하는 학자(學者)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단군 영정(影幀)의 어깨와 허리에 두른 것을 쑥잎과 마늘잎이라고 일반적으로 주장하고 있으며, 대종교에서는 쑥잎이라기보다는 박달나무잎일 것이라고 하는데, 편찬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단군왕검

물론 쑥과 마늘은 의약에서 중요한 약재로 쓰이고 단군신화 속에서 웅녀(熊女)의 탄생과도 관계가 있고, 박달나무가 신단수(神檀樹)로 신성시되었지만, 무궁화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시시대부터‘하늘(天)’,‘신(神)’,‘삼신(三神)’을 표상(表象)하는 꽃으로 신성시되어, 왕으로 추대되거나 삼신(환인·환웅·환검)에게 제사지내는 제단 둘레에 심어져 왔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단군의 어깨에 두른 것을 쑥잎이나 박달나무잎으로 보는 것보다는 단군을 상징하는 무궁화잎으로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할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학자들이나 연구가들의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단군(한배검)을 숭배(崇拜)하는 민족 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서는 오늘날 단군 영정(대종교에서는 천진상이라고 한다.)둘레에 항상 무궁화-비록 조화(造花)이긴 하지만-를‘천화(天花)’라 하여 신성하게 여겨 장식해 두고 있는데, 그 이유 또한 여기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의 역사적 배경〉 삼국시대는 우리 나라 역사에서 중앙집권국가(中央集權國家)가 성립하여 발전한 시기이다.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는 작은 국가로 출발하여 정복 할동을 통해 주변 여러 나라를 지속적으로 통합하면서 중앙접권적 국가로 발전하는데 성공하였다. 삼국은 각기 독자적인 문화 기반 위에 상호 친선(親善)과 대립(對立)을 번갈아 하면서 화려한 고대 문화를 꽃피웠다. 삼국시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이병도, 최태영 공저(共著)《한국 상고사 입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시대에는 안으로는 불교를 받아들여 사상을 통일하고 법령을 제정하여 중앙집권 통치를 강화시켰으며 국사를 집필하게 하였다. 고구려는《유기(留記)》백 권을 편찬했고, 그후 이 것을 정리하여《신집(新集)》5권으로 편찬하였다. 또한 백제에서는《서기(書記)》, 신라에서는《국사(國史)》를 편찬하였다. 그 고기(古記)들의 내용이 고려시대에 저술한 사기(史記)들에 인용되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고구려·백제는 물론이요, 후진국인 신라에서까지 국가사업으로 국사서를 편찬한 것은 모두 바른 전통과 자립정신을 분명히 전하고자 함이었다. 일찍이 삼국시대에 불교보다 먼저 한자(漢字)와 함께 유학(儒學)이 전래되고 각각 국립대학과 사립 학교가 설립되어 글과 활쏘기를 익혀서 인재를 양성했다. 국선(國仙) 단군왕검에서 연원한 훈련단인 백제의 소도무사(蘇塗武士), 고구려의 조의선인(早衣仙人), 신라의 화랑도(花郞徒)는 모두 우리의 고유한 현묘의 도(道)에다 외래의 유·도·불 3교에서 필요한 것을 섭취하여 그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화랑도의 세속오계 같은 것은 바로 그 예이다.

 

삼국이 정립되어 각각 자국이 삼국을 통일하고 대륙의 고조선 옛 땅을 회복하려는 생각 때문에, 삼국간에는 반도내에서의 공방전이 쉴새 없이 밀고 밀리기를 거듭하였고, 북으로는 중국과의 전쟁이 끊이지 아니했다. 신라가 당(唐)의 힘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 당군(唐軍)을 반도에서 몰아내어 불완전한 대로 통일신라국을 형성하였다. 압록강 이북의 넓은 고구려의 고토(故士)에는 고구려의 계승자로 자처하는 발해대국이 건립되었기 때문에 신라의 삼국통일은 반도의 대부분을 통일한 데 불과한 불완전한 것이어서, 실은 통일신라와 발해의 남북 양국이 대립한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가 전개된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산업·해운·종교·사상·과학·건축·공예·음악·예술 등 모든 방면에 있어서 선진국인 고구려나 백제 못지않게 발달했으나, 말기에는 중앙귀족사회의 부패로 재정이 궁핍해지고, 지방에는 지방호족들의 세력이 강성해졌다. 발해는 옛날의 부여와 고구려와 반도의 일부분을 차지한 대국으로 당(唐)으로부터 종교, 학문, 제도 등을 수입하여 독자적인 문화로 발달시켰다. 통일신라 말기에 백제의 부흥을 표방한 견훤(甄萱)의 후백제와 고구려의 부흥을 표방하고 일어난 궁예(弓裔)의 후고구려가 신라와 정립하여 후삼국시대가 전개되었다. 후고구려의 궁예가 피살된 후 왕건이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라 하고 도읍을 송악으로 옮겼다.

그 뒤, 신라의 경순왕이 국토를 고려에 바치고 다음해에 왕건이 후백제를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발해가 거란군에 의해 멸망하여 요동의 고토(故土)는 남의 땅이 되고 말았다.
 

〈문헌상의 기록〉 삼국시대는 무궁화 역사상 기록의 공백기(空白期)라 할 정도로 무궁화에 관한 기록을 찾기가 어렵다. 《산해경》같은 중국 쪽의 기록이 이미 우리 나라를 가리켜‘무궁화의 나라’로 표명한 것으로 볼 때 우리 나라에 무궁화가 많았을 것이고, 상고시대에 신단(神壇) 둘레에 무궁화가 많이 심어져 있었으며, 또한 신성시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므로 삼국시대에도 그 기 록이 많았을 것 같으나 실제 그 기록을 찾아보기가 어렵다. 물론 삼국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조대기》와 발해 때 대야발이 지은《단기고사》에 무궁화 기록이 있으나, 내용상으로 상고시대 이전의 것이라 앞에서 다루었다. 전술한《유기》,《신집》,《서기》,《국사》나 통일 신라시대 때 편저(編著)한 것으로 보이는《신라고기(新羅古記)》,《신라고사(新羅古事)》,《백제신선(百濟新選)》, 김대문(金大問)이 지은《한산기(漢山記)》,《선사(仙史)》나 신라 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 2년(888)에 각간(角千)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이 왕명으로 수집, 편찬한 향가집(鄕歌集)《삼대목(三代 目)》등에 무궁화 내용이 수록되었을 지도 모르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문헌들이 현전(現傳)하지 않는 관계로 알 수가 없다. 편찬자가 조사한 바로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를 통하여 전하는 기록은 다음의 것이 전부이다.

 

《최문창후문집(崔文昌候文集)》권 1 표(表)가운데 〈사불허북국거상표(謝不許北國居上表)〉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신라의 효공왕(孝恭王) 원년(897) 효공왕이 당나라의 광종에게, 발해(渤海)의 국민들이 당나라 북방지역으로 들어가 사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다는 뜻을 표시하고자 보낸 국서(國書)이다. 그 당시 신라와 발해 두 나라는 사이가 좋지 않 았던 시절이었다. 그 국서는 당시의 명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이 임금의 명을 받아 지은 것이다. 이 국서 가운데 이러한 구절이 있다. 槿花鄕廉讓自沈 矢國 毒痛愈盛 근화향렴양자침고시국 독통유성 무궁화 나라(신라를 일컬음)는 염양한데 점점 쇠약해 가지만, 고시국(발해)은 강포한데도 더욱 강성해 가고 있다. 또, 위의 내용은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의 《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지리편(地理編)〉근역(槿域)의 조(條)에도 다음과 같이 보이고 있다. …니를테면, 崔致遠(최치원)의 所撰(소찬)으로 新羅孝恭王(신라효공왕)이 唐(당) 昭宗(소종)에게 보내여 新羅(신라)·渤海(발해)의 관계를 말한 國書(국서) 가운데 …則必槿花鄕廉讓自沈  矢國毒痛愈盛(즉필근화향렴양자침 고시국독통유성)이라 하야 新羅(신라)를 槿花鄕(근화향), 渤海(발해)를  矢國(고시국)이라고 닐커럿슴이 그一例(일례)이다. 이로써 신라시대의 우리 나라는 외국(外國)에 보내는 국서에 스스로를 근화향, 즉‘무궁화 나라’라고 일컬을 정도로 무궁화가 많이 피는 나라였고, 무궁화가 곧 신라를 표상(表象)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신라의 나라꽃 또한 이미‘무궁화’였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화랑도와 무궁화〉 우리 지구상에 오랜 자기 나라 역사를 가지고 있는 민족 중 그 민족 고유의 정신적 사상과 전통이 없는 민족은 없을 것이다. 우리 민족 역시 화랑도(花郞徒)라는 대표적인 민족정신의 유산이 있다. 화랑도의 기원에 대한《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을 살펴보면, 진흥왕(眞興王) 37년(576)봄에 인재(人材)를 구하기 위하여 조직을 시작한 것으로 나와 있다. 즉, 신라에서 화랑도의 전신으로 여자들로 원화(源花)를 만들었으나 남모(南毛)·준정(俊貞)간의 질투로 말미암아 원화를 폐지하고, 그 뒤 미모의 남자를 선발해서 화랑(花郞)을 만들고 우수한 인재를 뽑았다는 것이다. 또한《삼국유사》에도 《삼국사기》의 내용과 비슷한 남모와 준정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고, 이어

始奉薛原郞爲國仙此花郞國仙之始 시봉설원랑위국선차화랑국선지시 처음으로 설원랑을 국선에 봉한다. 이것이 국선 화랑의 처음이다. 라 하여 초대 국선(國仙), 즉 단장(團長)의 이름을 밝히고, 아울러 그것이 국선화랑(國仙花郞)의 처음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위의 기록에서는 화랑의 기원이, 처음에 원화라하는 예쁜 여자들로 삼았으나 그것이 여의치 않아 다시 귀족의 자제 중 얼굴이 아름답고 품행이 단정한 소년들로 구성하여 그 단장을 국선화랑이라 했으며, 설원랑(薛原郞)이 최초의 국선화랑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화랑도의 원류(源流)는 우리의 상고시대부터 있어 왔음을 다음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삼국사기》에 살펴보면 최치원(崔致遠)의〈난랑비서문(鸞郞碑序文)〉에 “우리 나라에는 현묘한 도가 있어 이를 풍류라 하였는데 이 교(敎)를 설치한 까닭이 선사(仙史)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풍류교는 실로 3교(三敎)를 포함하고 군생(群生)을 교화하는 것이다.” 라고 했다. 위의 기록을 살펴볼 때,‘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다.’라고 했는데, 여기의‘나라’는 외국과 구별한 것으로 바로 신라국(新羅國)이며,《선사》는 단군(檀君)이래 고구려·백제까지의 유명한 도사(道士)를 적은 것이다. 또‘3교를 포함하고’라 한 것은, 3교의 성격을 포함했다는 뜻으로 이것을 보면 화랑도 사상의 근원(根源)은 우리의 고유사상을 바탕으 로 유(儒)·불(佛)·도(道)의 외래사상을 포함하여 이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화랑도의 연원(淵源)에 대하여는 여러 견해가 있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1880∼1936)는 신라의 화랑도 조직과 유사한 청년 단체가 고구려에서도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본래 화랑은 상고(上古) ‘소도제단(蘇塗祭壇)의 무사(武士)’라고 하였고, 고구려에서는 무사(武士)들이 조의( 衣)를 입어 조의선인( 衣仙人)이라 했으며, 신라에서는 미모(美貌)를 취(取)하여 화랑(花郞)이라 하였는데, 화랑을 국선(國仙)이라 부른 것은 고구려의 선인(仙人)과 구별하기 위해서 앞에‘나라〔國〕’자(字)를 붙인 것이라고 했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화랑을‘부루’교단 (敎團)이라 하였으며, 이 교단의 중심된 성동(聖童)을 풍월주(風月主)·원화(源花)·국선(國仙)또는 선랑(仙郞)등 여러 명칭으로 부르고, 이 교단에서 지키는 신조(信條)와 덕목(德目)을 풍월도(風月道)·풍류도(風流道)·화랑도(花郞道)또는 선풍(仙風)이라 일컬었으니 그 언어는 모두‘부루’에서 나왔고,‘부루’는 상고조선(上古朝鮮)의 고유한 신앙인 태양숭배(太陽崇拜) 곧‘밝의 뉘’광명세계(光明世界)가 변한 것이고, 이‘부루’가 한자(漢字)로 적을 때 풍류(風流)라고 이름한 데까지 변했다고 하였다.

 

위의 내용으로 보아서 화랑도는 신라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고 상고시대부터 우리 민족 내부에 형성되어 온 우리 전통 고유사상(固有思想)에 의거한 청소년의 단체임을 알 수 있다. 결국 화랑도는 신라사회의 후진성으로 깊이 남아 있던 씨족사회(氏族社會)의 유제(遺制)를 진흥왕 때 당시의 현실에 맞게끔 국가 적인 차원에서 재조직(再組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화랑도를 일명(一名) 국선도(國仙徒)라고 하는데, 그 국선도의 의미는 국가종교(나라의 종교)라는 뜻이다. 이때의‘국(國)’은 고조선 민족국가를 의미하며, ‘선(仙)’은 고조선시대의 단군 숭배의 형태를 가진 유신적 신앙(唯神的信仰)에서 출발한 원시종교를 의미한다. 선(仙)은 신(神)과 음(音)이나 뜻이 서로 상통하여 지상신인(地上神人)을 의미한 듯하며, 신인(神人)인 단군(檀君)을《삼국사기》에는平壞本仙人王儉之宅也或云王之都王儉 평양본선인왕검지택야흑운왕지도왕검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의 집터이다.

혹은 임금의 서울인 왕검성(王儉城)이라 한다. 라고 하여 선인(仙人)이라고도 하였다. 단군신화에 나타난 3천의 무리들은 환인(桓因) 통치하의 천계(天界)에 있던 무리들로 이해되거니와 이것은 우리 선조대(先祖代) 사람들의 고유 신앙으로서‘천(天)’의 내용으로 생각된다. 또한 한자(漢字)로 전사된 환인(桓因)은 우리 상고의 원명(原名)내지 원음(原音)으로‘하느님’또는‘수릿님’으로 추측된다. 이상은 오강석(吳康錫)의《화랑도의 성립과 그 사상적 배경》이라는 연구논문 중에서 해당되는 내용을 간추려 본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신라의 화랑도가 단군왕검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단군세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戊戌二十年多設蘇塗植天指花使未婚子弟讀書習射 무술이십년다설소도식천지화사미혼자제독서습사 號爲國子郞國子郞出行頭揷天指花故時人稱爲天指 호위국자랑국자랑출행두삽천지화고시인칭위천지 花郞 화랑 20년(戊戌)에 소도(蘇塗)를 많이 설치하여 천지화(天指花)를 심고 아직 결혼을 안한 자제(子弟)들에게 독서와 활쏘기를 익히게 하였으니 이를 국자랑(國子郞)이라 하였다. 국자랑이 나와 다닐 때에는 머리에 천지화(天指花)를 꽂았기 때문에 그때 사람들은 이들을 천지화랑(天指花郞)이라 불렀다.

 

위의 기록은 13대 단군 흘달(屹達) 20년의 일이고 ‘천지화’는 무궁화일 것이라고 전술(前述)하였다. 이 기록으로 보아‘천지화랑’이 곧 신라시대의‘화랑도’로 이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위의 논문을 통하여 화랑도의 수련방법(修鍊方法)을 알아본다. 화랑도의 수련방법은《삼국사기》의 다음 기록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或相磨以道義 或相悅以歌樂 遊娛山水 혹상마이도의 혹상열이가악 유오산수 혹은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써 서로 기뻐하고, 산수(山水)를 돌아다니며 즐거워했다. 첫째의‘혹상마이도의’는 씨족(氏族)의 전통과 신앙을 숭배(崇拜)하면서 상호부조(相互扶助), 화합단결(和合團結)하는 사회 정의를 연마·체득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화랑이 이성적(理性的)인 슬기를 터득하여 그 사회에서의 우수한 엘리트로서의 자격과 여건을 갖추는 데 그 근본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둘째의‘혹상열이가악’은 원시사회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가무적(歌舞的)인 기능을 말하는 것이다. 이 역시 도의(道義)연마와 연관이 있으며, 이 방법을 통하여 서로의 우정(友情)과 집단(集團)의 공동의식을 도모하고, 엘리트로서의 수양에 보다 더 예술적인 정서적 훈련(訓鍊)을 위한 것이다. 즉, 보다 쾌할(快活)하고 보다 멋진 생활을 영위하기 위함이다. 셋째의‘유오산수’는 내 나라의 멀고 가까운 명산(名山)과 대천(大川)을 두루 돌아다녀 국토와 대자연에 끝없는 애착심을 갖게 함이다. 그런데 간혹 화랑의‘유오산수’를 화랑도 운동사상 후대적인 혹은 말기적인 현상으로 보려는 논자(論者)들이 있다. 즉 손진태(孫晋泰)는“삼국통일 이후 평화시대의 문약(文弱)에 빠진 화랑단(花郞團)들이 유오(遊娛)·사교(社交)를 목적(目的)으로 하였다.”고 하였으나, 이는 단순히 놀고 먹는 유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원시사회에 있어서의 성지순례(聖地巡禮)라는 신성한 종교적인 기능을 가졌다는 것에 큰 의미와 가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화랑도의 생활은 심신연마(心身練磨), 도덕수행(道德修行), 친목단결(親睦團結), 정서오락(情緖娛樂)등 청소년 생활의 전반에 걸쳐 필요한 수행을 해나갔다.

 

이상에서 화랑도의 수련방법을 간략히 알아보았다. 화랑제도가 고조선시대의‘천지화랑’에서 시작된 것이라면 수련방법 또한 이때와 비슷했을 것이다. 수련방법 중‘유오산수’는 성지순례라는 신성한 종교적인 기능을 가진 것이라고 하였다. 소도(蘇塗)는 고조선의 제후국에 설치된 하늘에 제사지내는 신성한 성지였다. 따라서 이러한 성지를 순례하는 화랑들이 머리에 성화(聖花)인‘천지화(무궁화)’를 꽂고 다닌 듯한데, 이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더욱 깊은 연구가 있었으면 한다. 화랑도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인 고유 민족정신의 유산이다. 고조선시대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화랑도는 신라에서 꽃을 피워 삼국 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 민족정신을 이어받은 화랑들이 무궁화를 사랑하지 않았겠는가? 무궁화가 이미 환국(桓國)의 꽃인 환화(桓花)였고,선인(仙人) 왕검시대에도 신성시해 온 꽃이었음을 어찌 몰랐으랴. 우리의 주체성을 간직함이 나라의 발전 요소가 됨을 일깨운《규원사화》의 저자 북애자의 말이 떠오른다.

“기후가 다르고 땅의 형세가 다르며 나라마다 풍속이 다르고 사람마다 각각 재주가 있는데, 제 능한 장점을 버리면 어찌 위태롭지 않으며 사람이 배운다고 그 본성이 쉽게 바뀔 것인가.”  

 

고려시대

〈고려시대의 역사적 배경〉 10세기 초에 이르러 우리 나라는 고대사회에서 중세사회로 전환되어 갔다. 고려의 성립으로 호족세력이 통합되어 중앙집권 체계가 완성되었고, 사회적·문화적 혁신으로 민족 의식이 강화되었으며, 문화의 폭이 크게 넓어지면서 여러 방면으로 발달하였다. 고려는 이와 같은 문화적 기반을 마련함으로써 보다 새롭고 활기찬 역사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고려 문화는 문종(文宗) 때를 전후하여 전통적인 불교문화(佛敎文化)와 새로 일어난 유교문화(儒敎文化)가 복합됨으로써 그 전성기를 맞았다. 그러나 그 뒤, 고려는 밖으로는 금(金)의 압력을 받은 데다가 안으로는 사회 모순이 격화되어, 이자겸(李資謙)의 난, 묘청(妙淸)의 난,무신정변(武臣政變) 같은 내란이 잇달아 일어났고, 이와 같은 사회의 동요(動搖)가 근본적으로 수습되기도 전에 몽고족(蒙古族)의 침입을 받아 그 간섭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공민왕(恭愍王)은 원(元)이 쇠약해졌을 때 반원정책(反元政策)을 추진하였으나, 당시의 집권 세력인 권문세가(權門勢家)의 방해로 실패하였다. 그동안 지방에서 성장해 온 중소 지주층과 지식계층은 새로 일어난 이성계(李成桂)와 연합하여, 권문세가의 세력을 타도하고 사회개혁을 추진하였다. 〈문헌상의 기록〉 고려시대는 무궁화 역사상 중요한 의의(意義)를 가지는 시기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중국 문헌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목근(木槿)’또는‘근화(槿花)’와는 아주 다른,‘무궁화(無窮花)’라는 명칭이 최초(最初)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고려 고종 때의 문장가로 유명한 이규보(李奎報 1168~1241)의 문집인《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 14의 고율시(古律詩) 가운데에‘문장로(文長老)와 박환고(朴還古)가 무궁화를 논하여 지은 시운(詩韻) 을 차(次)하다’라는 제목의 시에 앞서 병서( 序)한 부분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長老文公東皐子朴還古各論槿花名或云無窮無窮之 장로문공동고자박환고각론근화명혹운무궁무궁지 意謂此花開落無窮或云無宮無宮之意謂昔君王愛此 의위차화개락무궁혹운무궁무궁지의위석군왕애차 花而六宮無色各執不決因探樂天詩取其韻各賦一篇 화이육궁무색각집불결인탐락천시취기운각부일편 亦勸予和之 역권여화지 장로 문공과 동고자(東皐子) 박환고가 각기 근화(槿花)의 이름을 두고 논하는데, 한 사람은‘무궁은 곧 무궁(無窮)의 뜻이니, 이 꽃이 끝없이 피고 짐을 뜻함이라’하였고, 또 한 사람은‘무궁은 곧 무궁(無宮)이니, 옛날 어떤 임금이 이 꽃을 사랑하여 온 궁중〔六宮〕이 무색해졌다는 것을 뜻함이라’하였다. 이처럼 각자가 자기의 의견만을 고집하므로 끝내 결론에 이르지를 못하였다. 그래서 백낙천(白樂天)의 시운을 취하여 각기 한 편씩을 짓고 또 나(이규보)에게도 화답하기를 권하였다. 이로 미루어 목근(木槿)또는 근화(槿花)로만 일컬어 오던 것이 이미 고려 때에‘무궁화’로 그 이름이 일반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국서(國書)에 신라를‘근화향(槿花鄕)’이라 일컬은 이후 고려도 ‘근화향’이라 일컬은 기록이 보인다. 우리 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적 저술인《지봉유설(芝峰類設)》은 20권 10책(冊)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조선 중기 실학의 선구자 지봉(芝峰) 이수광(李 光 1563∼1628)이 세 차례에 걸친 중국 사신왕래에서 얻은 견문을 토대로 1614년(광해군 6)에 간행한 것이다. 우리 나라의 일은 물론, 중국·일본·베트남·오키나와·타이·자바·말래카 등 남양 제국과 멀리 프랑스·영국 같은 유럽의 일까지도 소개하여 우리 민족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새롭게 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당시의 학자 남창(南窓) 김현성(金玄成)은 이 책의 제문(題文)에서 “위로는 천시(天時)를 밝히고 아래로는 인사(人事)를 말함에 의리(義理)의 정미(精微)와 문장의 득실(得失)을 보이며 곤충초목에 이르기까지 모아 남김이 없고, 파헤쳐 남김이 없어,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총명(聰明)을 계발하게 하고, 지려(智慮)를 진익(進益)하게 하니, 마치 귀머거리에게 세 귀가 생기고 장님에게 네 눈이 얻어짐과 같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말하여 이 책의 가치를 짐작케 하였다.

 

내용을 살펴보면, 권 1에 천문(天文)·시령(時令) ·재이(災異), 권 2에 지리(地理)·제국(諸國), 권 3 에 군도(君道)·병정(兵政), 권 4에 관직(官職), 권 5 에 유도(儒道)·경서(經書), 권 6에 경서, 권 7에 경서·문자(文字), 권 8∼14는 문장(文章), 권 15는 인물·성행(性行)·신형(身形), 권 16은 언어(言語), 권 17은 인사(人事)·잡사(雜事), 권 18은 기예(技藝)·외통(外通), 권 19는 궁실(宮室)·복용(服用)·식물(食物), 권 20은 훼목(卉木)·곤충(昆 ) 등으로 분류되어 있으며 총 3,435항목에 이른다. 이러한《지봉유설》권 2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山j每經曰海東有君子之國衣冠帶劍好讓不爭有菫花 산해경왈해동유군자지국의관대검호양부쟁유근화 草朝生夕死又古今記曰君子之國地方千里多木槿花초조생석사우고금기왈군자지국지방천리다목근화 按唐玄宗謂新羅號爲君子之國且高麗時表詞稱本國 안당현종위신라호위군자지국차고려시표사칭본국 爲槿花 盖以此也 위근화향개이차야 《산해경》에 이르기를,‘바다 동쪽에 있는 군자의 나라는 의관(衣冠)을 갖추고 칼을 차며 양보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으며 무궁화가 있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고 하였다. 또,《고금기》에 이르기를,‘군자의 나라는 땅이 사방 천리인데 무궁화가 많다’고 하였다. 상고하건데 당(唐)의 현종(玄宗)은 신라(新羅)를 군자의 나라라고 하였거니와, 또 고려 때의 표사(表詞)에 본국을 일컬어 근화향(槿花鄕)이라고 하였음은 대개 이것(《산해경》의 기록)을 가지고서이다. 또, 조선 영조 46년(1770)에 왕명을 받아 홍봉한(洪鳳漢) 등이 엮어 낸 고금(古今)을 통한 우리 나라 문물제도를 수록한 책인《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는 상위(象緯)·여지(輿地)·예(禮)·악(樂)·병(兵)·형(刑)·전부(田賦)·재용(財用)·호구(戶口)·시적(市 )·선거(選擧)·학교(學校)·직관(職官)의 13고(考)로 분류하여 100권으로 편찬한 것이 최초였다.

 

그러나 사실(史實)에 어긋난 점과 누락된 부분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시대의 변천에 따라 법령(法令)과 제도가 많이 변경되었으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1782년(정조6)에 이르러 이를 보편(普遍)토록 이만운(李萬運)등에게 왕명을 내렸는데, 이것이 제2차의 편찬이다. 왕명을 받은 이만운은 9년에 걸쳐《동국 문헌비고》의 13고(考)중에서 오류를 바로잡고 누락된 것을 채웠을 뿐만 아니라, 새로이 물이(物異)·궁실(宮室)·왕계(王系)·씨족(氏族)·조빙(朝聘)·시호(諡號)·예문(藝文)의 7고(考)를 증보하여 146권을 편성하고 이를《증보동국문헌비고(增補東國文獻備考)》라 하였다. 그러나 이 책은 간행되지 못하고 100여 년 후인 고종 광무 연간에 이르러 제3차 보편(補編)을 하게 되었다. 즉 1903년(광무 7)에 특별히 찬집청(撰集廳) 을 설치하고 박용대(朴容大)등 30여 명의 문사들에게 명하여 이를 보수하게 한 것이다. 그리하여 박용대 등은 5년에 걸쳐《증보동국문헌비고》에 수록된 20고(考)중에서 물이(物異)는 상위(象緯)에 궁실(宮室)은 여지(輿地)에 시호(諡號)는 직관(職官)에 포함시키고, 왕계(王系)는 제계(帝系)로 고쳐서 씨족(氏族)에 포함시켰으며, 조빙(朝聘)을 교빙(交聘)으로 고쳐 상위·여지·제계·예·악·병·형·전부·재용·호구·시적·교빙·선거·학교·직관·예문의 16고(考) 250권으로 편성하고, 이를《증보문헌비고》라 이름 붙여 1908년(융희 2)에 간행하였다. 이렇게 간행한《증보문헌비고》권 14〈여지고 8〉에 《산해경》《고금기》등의 무궁화에 관한 기술이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실려 있다. 李 光曰山海經曰海東有君子國衣冠帶劍好讓不爭 이수광왈산해경왈해동유군자국의관대검호양부쟁 有槿花草朝生夕死又古今記曰君子國地方千里多木 유근화초조생석사우고금지왈군자국지방천리다목 槿花唐玄宗謂新羅號爲君子之國且高麗時表辭稱本 근화당현종위신라호위군자지국차고려시표사칭본 國爲槿花鄕 국위근화향 이수광에 따르면, 《산해경》에는 해동에 군자국이 있는데, 의관을 정제하고 칼을 차며 양 보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으며, 무궁화가 많은데 아침에 피고 저녁에 진다고 하였다. 또,《고금기》에는 군자국은 지방이 천리인데 무궁화 나무가 많다고 하였으며, 당나라 현종 은 신라를 군자의 나라라고 불렀고,

또 고려 때 표사에서는 고려가 스스로를 근화향이라고 일컬었다.

 

그리고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를 서술한 우리 나라의 역사서인《해동역사(海東繹史)》는 85권 6책이다. 조선 정조·순조 때의 사학자(史學者) 옥유당(玉 堂) 한치윤(韓致奫 1765∼1814)이 편술한 원편 70권과 그의 조카 한진서(漢鎭書)가 보충한 15권 6책으로 되어 있는데, 우리 나라의 서적은 물론, 중국· 일본 등 외국서적 550여 종에서 자료를 뽑아 편술한 것이다.

 

▲해동역사

《해동역사》의 권 1∼16은 세기(世紀)로, 단군으로부터 고려까지의 역대 왕조를 편년체(編年體)로 서술하고, 권 17은 성력지(星曆志), 권 l8∼21은 예지 (禮志), 권 22는 악지(樂志), 권 23은 병지(兵志), 권 24는 형지(刑志), 권 25는 식화지(食貨志), 권 26∼27 은 물산지(物産志), 권 28은 풍속지(風俗志), 권 29는 궁실지(宮室志), 권 30∼31은 관씨지(官氏志), 권 32 는 석지(釋志), 권 33∼41은 교빙지(交聘志), 권 42∼59는 예문지(藝文志), 권 60은 숙신씨고(肅愼氏考), 권 61∼66은 비어고(備禦考), 권 67∼70은 인물고(人物考), 속편 15권은 모두 지라고(地理考)이다. 원래 필사본으로 전하던 것을 조선고서 간행회(朝鮮古書刊行會)에서 양장(洋裝) 4책으로 간행하였고, 또 광문회(光文會)에서 한 장(漢裝) 6책으로 1913년에 간행하였다. 조선 정조(正祖)때의 학자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권1 〈동이총기(東夷總紀)〉에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按東方朔神異經曰 … 唐玄宗謂新羅號爲君子之國 안동방삭신이경왈 당현종위신라호위군자지국 且高麗時表詞稱本國爲槿花鄕是爾我邦自古有君子 차고려시표사칭본국위근화향시이아방자고유군자 之稱而夫子欲居之意安知非爲此耶 지칭이부자욕거지의안지비위차야 살피건데 동방삭(東方朔)의 《신이경》에 이르기를, …당 현종은 신라를 군자의 나라라 일컬었다. 또 고려 때 표사(表詞)에 본국을 일컬어 근화향이라 일컬었음이 이것이다. 우리 나라는 예로부터 군자의 일컬음이 있었으니 공자께서 살고자 하신 뜻이 어찌 이를 위함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조선상식》〈지리편〉근역의 조에서 이러한 것을 부인(否認)하면서, “고려의 문(文)에서 이것(근화향)을 쓴 예를 아직 보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문일평(文一平)의 《화하만필(花下漫筆)》목근화의 조에서는 위육당과는 달리“…고려 이전은 문헌이 결핍하므로 알 수 없으나, 고려 예종(睿宗)때 근화향이라 일컬은 것을 보임이 현존하는 사료로서 최초인 듯하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의견이 다름은 육당(六堂)과 호암(湖岩)두 학자가 그때까지 본 고기록(古記錄)의 가짓수가 다름에서 기인하는 결과일 것이다. 또, 1927년 우호익(禹浩翊)이 조선사상통신사 간행의 《조선 급 조선민족(朝鮮及朝鮮民族)》에 쓴〈무궁화고(無窮花考)〉라는 글과 이 글을 옮겨 실은 것인 1928년 청년잡지사 간행의 《청년(靑年)》6호 및 7호의 〈무궁화 예찬(無窮花禮讚)〉이란 글에서도 근화향을 고려의 이칭(異稱)이라 한 바 있다. 이상의 여러 기록들을 볼 때 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 때에도 우리 나라에는 무궁화가 많아 대외적(對外的)으로 고려를‘근화향’이라 일컬었으며, 무궁화는 고려를 상징하는꽃(즉,나라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조선시대

〈조선시대의 역사적 배경〉 고려에서 조선 사회로의 전환은 단순한 왕조의 교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걸친 커다란 진전(進展)을 가져 왔다.

15세기에는 왕권이 강화되고, 양반관료(兩班官僚) 중심의 지배체제가 정비되면서 국가 재정이 충실해 졌다. 한편, 민생의 안정과 권농정책(勸農政策)의 적극적인 추진으로 인구와 농지가 증가하면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과 사회, 경제적 기반 위에 민족의식의 발달과 실용적(實用的)인 학문의 숭상으로 민족문화가 창달되었다. 16세기에는 농업과 상공업의 발전과 함께 새로 성장한 사림(士林)이 성리학적 질서를 지방 사회에까지 확산시켜 향촌 사회의 발전을 가져 왔다. 그러나 16세기 말의 임진왜란(壬辰倭亂), 17세기 초의 병자호란(丙子胡亂) 등 외침을 잇달아 겪게 되어, 그간의 발전에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16세기 중엽 이래로, 조선의 지배체제는 여기저기에서 모순(矛盾)을 드러내더니, 두 차례의 전란(戰亂)을 겪은 뒤로는 더 이상 그 체제를 유지하기가 힘들 정도로 무너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층은 현실의 모순을 깊이 인식하여 이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려 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의 간격은 날로 커갔다. 일부의 농민들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생산력 증대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대다수의 농민들은 양반 계층의 토지 집적(集積)과 광작(廣作)의 실시로 농토에서 밀려나야만 했다. 계층분화(階層分化)가 촉진되는 가운데 18세기에 이르러 농민들은 현실 사회의 모순을 깨닫게 되었고, 마침내 이의 개선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조선후기 사회에서는 역량이 증대된 농민을 주축으로 변혁이 추구되어 사회·경제·문화의 모든 부문에서 커다란 변동이 일어났다. 조선사회는, 안으로부터 싹트기 시작한 근대적인 요소를 충분히 발전시키지 못한 채 제국주의(帝國主義) 열강에 의해 개항(開港)을 하였다. 이로부터 열강의 침략이 잇달았으며,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日帝)에 의하여 대한제국(大韓帝國)은 붕괴되고, 일제의 식민지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대항하여 위정척사운동, 동학농민운동, 항일의병전쟁 등을 전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갑신정변(甲申政變), 갑오개혁(甲午改革), 독립협회활동, 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 등을 통하여 근대 국가의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경제면에서는 개항 이후 열강의 경제적 침탈(侵奪)에 대항하여 근대적 경제 건설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으며, 사회면에서는 양반 중심의 신분제도(身分制度)가 폐지되고, 근대의식도 보편화되어 갔다. 또, 과학기술과 문명시설이 수용(收容)되고, 교육운동과 국학운동(國學運動), 문예활동과 종교활동도 근대적,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고 전개되어 갔다.

 

〈문헌상의 기록〉
조선시대에는 세종 25년(1443)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 창제되어 28년(1446)에 반포되었다.

이로써 ‘무궁화’의 한글 명칭이 쓰이게 되었다. 또한, 실학자들의 실학 서적에 무궁화에 대한 많은 기록이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앞에서 살펴본 조선 세종 때의 강희안(姜希顔 1417~64)이 지은《양화소록(養花小錄)》에 실린 무궁화 애호가였던 안사형(安士亨)과 무궁화에 대한 의견의 서신(書信) 교환 내용 중 안사형이 항의한 글의 일부를 다시 살펴보기로 한다.

 

목근(木槿)은 본디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화목인데, 형은 그것을 화보에도 수록하지 않았고 또 화평(花評)에서도 논하지 않았으니 어찌해서 그리하였는지요? 정풍(鄭風)에“여인과 수레를 함께 탔는데 그 여인의 예쁜 얼굴은 마치 순화(蕣華)같았네.”하였는데 이것은 목근을 이름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단군께서 나라를 여실 때에 이미 목근화가 나왔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은 우리 동방(東邦)을 반드시 근역(槿域)이라고 말하였으니, 근화는 옛날로부터 우리 나라의 봄을 장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략〉··· 목근화도 붉은 것과 흰 것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흰 꽃은 그 꽃잎이 백작약(白芍藥)과 같은데, 형께서 혹시 흰 목근화를 보지 못한 까닭에 화보에 넣지 않은 듯합니다. 《시경(詩經)》에“그 여인의 얼굴이 순영(蕣英)과 같구나.”하였음은 흰 목근화를 가리켜 비유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6, 7년 전에 제가 충주(忠州)지방에서도 백근화(白槿花)를 본 일이 있습니다.

 

위 글에서 무궁화를 목근(木槿), 목근화(木槿花), 백근화(白槿花)라 지칭했으며 우리 나라를 근역(槿域)이라 일컬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조선 세종 29년(1447)에 신숙주(申淑舟) 등이 《홍무정운역훈(洪武正韻譯訓)》이 너무 광대하여 보기가 불편하므로 간편하게 엮어《사성통고(四聲通故)》를 편찬했다고 하나 지금 전하지 않는다. 다만 최세진(崔世珍 ?~1542)의《사성통해(四聲通解)》하권에 붙어 있는〈사성통고범례(四聲通故凡例)〉와 상권 서문 중에 들어 있는《사성통고》에 대한 기사로 그 편찬의 유래와 내용의 일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내용은 《홍무정운역훈》을 근거로 하여 살펴보면, 동일음 등을 모은 다음 이것을 사성(四聲)에 따라 구별 유취하고, 한자(漢字)마다 한글로 음만을 달아 훈의(訓義)는 없고 사성만을 방점(傍點)으로 찍은 일종의 한자음(漢字音) 일람표 같은 것으로 추정 된다. 따라서‘槿(근)’자에는‘근’이라는 음만 적었을 것이다.


▲<사성통해>

그후 중종 12년(l517)에 위의 최세진이《사성통고》가 글자마다 자음(字音)은 표기되었으나, 그 글자의 해석이 없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하여《홍무정운》을 기초로 하여 실용에 적합하도록 엮어《사성통해》를 편찬하였다. 상권은〈사성통해서(四聲通解序)〉·〈운모정국(韻母定局)〉·〈광운36자모지도(廣韻三十六字母之圖)〉·〈운회(韻會)35자모지도〉·〈홍무운(洪武韻)31자모지도〉·〈범례(凡例)26조〉·〈사성통해상(四聲通解上)〉, 하권은〈사성통고범례(四聲通故凡例)〉·〈번역노걸대박통사범례(飜譯老乞大朴通事凡例)〉. 〈동정자음(動靜字音)〉·〈사성통해하(四聲通解下)〉로 되어 있다. 상권에 실은 각 자모도에는 하나 하나 훈민정음으로 발음 대조를 붙였고, 본문은 운목(題目) 에 따라 한자를 먼저 배열하고 한 운목에 딸린 각 글자는 사성의 차례로 나열하여 방점(傍點) 표시를 안 하도록 하였다.

또한, 한자의 주(註)는 주음(註音)을 정음(正音)과 속음(俗音)으로 나타내고, 속음은 다시 《사성통고》에 표시된 속음과 금속음(今俗音)으로 구별하였다. 한자의 해석은 주로 한문으로 하였으나 더러는 당시의 우리말을 금속호(今俗呼)라 하여 표기하였는데, 《사성통해》 상권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槿, 也, 今俗呼木槿花, 무궁화근츤야 금속호목근화 근은 츤이다. 목근화를‘무궁화’라고 부른다. 라고 하여 목근화를 한글로‘무궁화’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것이 최초의 무궁화 한글 표기로 여겨진다. 물론 한글(훈민정음)이 1446년에 반포되었으니, 《사성통해》가 편찬되기 이전에 세상에는‘무궁화’라는 명칭이 널리 사용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 시대의 이규보의 시에서 이미 살펴보았다. 또, 최세진이 중종 31년(1536)에 지은《훈몽자회(訓蒙字會)》는 한자 학습서인데 상·중·하3권으로 나누어져 있다.

▲홍몽자회

▲한거만록

▲산림경제와 중보산림경제

그 상권에는 다음의 기록이 보인다. 槿, 무궁화근, 俗呼木槿花 근 속호목근화 蕣, 무궁화슌, 詩 蕣英 순 시 순영《동의보감(東醫寶鑑)》은 중국과 우리 나라 의서(醫書)를 한데 모은 의서로서 허 준(許浚?∼1615)이 선조 30년(1597)부터 광해군 3년(161l)까지 지은 것이다. 그《동의보감》의〈탕액편(湯液篇)〉목근조(木槿條)에“木槿-무궁화”라 되어 있으며, 조선 효종(孝宗)의 사위인 죽헌(竹軒) 정재륜(鄭載崙 l648∼1723)이 지은《한거만록(閑居漫錄)》은 효종과 현종(縣宗) 2대에 걸친 여러 가지 사항을 뽑아서 쓴 수필집인데,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목근의 속명이 무궁화임을 표시하였다. 木槿俗名無窮花詩所謂蕣英者也 목근속명무궁화시소위순영자야 목근은 속명이 무궁화인데, 《시경(詩經)》에서 순영(蕣英)이라 이르는 것이다. 또, 홍만선(洪萬善 1643∼1715)이 숙종 때 지은《산림경제(山林經濟)》는 농사·의약 및 여러 분야에 걸친 농촌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지식을 서술한 소백과 사전적인 책으로 4권 4책으로 되어 있다.

 

내용은 16지(志)의 제목별로 나누어 제1지〈복거(卜居)〉에서는 주택 등 건축물의 터 선정·기초공사 등에 관해, 제2지〈섭생(攝生)〉에서는 심신(心身)단련법, 제3지〈치농(治農)〉에서는 특용작물의 재배법을, 제4지〈치포(治圃)〉에서는 각종 원예작물의 재배법을, 제5지〈종수(種樹)〉에서는 과목(果木)과 임목의 재배에 관해, 제6지〈양화(養花)〉에서는 화목(花木)·화초·.정원수의 배양법, 제7지는 양잠(養蠶)에 관해, 제8지〈목양(牧養)〉에서는 가축의 양식과 양봉(養蜂)·양어·양록(養鹿)등에 관해, 제9지〈치선(治膳)〉에 서는 식품가공 및 저장에 관해 논하였고, 제10지〈구급〉에서는 사고 처치법과 구급법을 기술하였다. 제11지〈구황(救荒)〉에서는 흉년에 초근목피를 이용하는 방법을, 제12지〈벽온( 瘟)〉에서는 전염병을 물리치는 방법을 소개하였고, 제13지〈벽충법( 蟲法)〉에서는 여러 해로운 동물을 물리치는 방법을, 제14지〈치약(治藥)〉에서는 각종 약재의 소개와 채약 법(採藥法), 제15지〈선택〉에서는 길흉일과 방소(方所)를 가려내는 방법을 기술하였다. 끝으로 제16지 〈잡방(雜方)〉에서는 일상생활에서 알아 두어야 할 사항들을 여러 항목에 걸쳐 설명하였다.

 

이 저술은 우리 나라 최초의 자연과학 및 기술에 관한 교본(敎本)인데, 간행을 보지 못한 채 수사본(手寫本)으로 전해 오다가 저술된 지 약 50년 후인 1766년(영조 42) 류중림(柳重臨)에 의하여 16권 12책으로 증보되었고, 이 저술을 바탕으로 서유구(徐有 )의 대저(大著)《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가 순조 때 나오게 되었다. 《산림경제》의 제1지〈복거〉에는 귀문원(龜文園)에 심은 화목(花木)을 열거하는 가운데 무궁화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木槿 舞官花 목근 무관화 목근(木槿)은 무관화(舞官花)이다. 또, 후술하는 《임원경제지》에 언급되는《증보산림경제(增補山林經濟)》에는 다음과 같이 槿卽舞宮花 근즉무궁화 근(槿)은 곧 무궁화(舞宮花)이다. 라고 하여 무관화의‘官’자가‘宮’으로 변화되어 있다. 이로써 일부 학자들은《산림경제》의‘무관화’의 ‘官’을‘宮’의 오기(誤記)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증보산림경제》는《산림경제》가 저술된 지 약 50년 후인 1776년에 지어졌기 때문에 그동안‘官’자 가‘宮’으로 변한 과정이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해당 학자들의 좀더 깊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위의《한거만록》과 《증보산림경제》의 사실로 그 당시(1700년대)에는 무궁화를 한자로‘무궁화(無窮花)’와‘무궁화(舞宮花)’로 표기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궁화를‘무궁화(舞宮花)’라고 쓴 데 대해서는 특별한 뜻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고 단지 무궁화 (無窮花)의‘무(無)’와‘무(舞)’가 음(音)과 글자가 비슷하니까‘舞(무)’자를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實學者)인 성호(星湖) 이 익(李瀷 1681∼1763)이 지은《성호사설(星湖僿說)》 은 시문전집(詩文全集)으로 30권 30책이다. 사설(僿設:새설이라고도 함)은 작고 좀스러운 말이 라는 뜻으로 겸사(謙辭)이다. 내용은 천지문(天地門) 3권, 만물문(萬物門) 3권, 인사문(人事門) 11권, 경사문(經史門) 10권, 시문문(詩文門) 3권 등 5문(門)으로 나누고 각 편마다 수시로 생각나고 의심나는 점을 그때 그때 적어 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 저작은 이 익의 실학사상을 연구함에 있어 기본적인 자료로서, 《성호문집(星湖文集)》속의 잡저(雜著)와 함께 그의 폭넓고 깊은 학식이 명확한 고증과 아울러 정채(精彩)를 띠고 있다. 또한 시문편(詩文篇)은 그의 문학관을 엿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며 권말의 곽우록( 憂錄)은 이 저술의 요약이라 할 수 있다. 초고로 전하던 것을 1929년에 서울 문광서림(文光書林)에서 간행하였다.


▲성호사설

《성호사설》의〈만물문〉에는 다음 기록이 실려 있다. 爾雅 木槿似李樹花朝生夕落可食莊子所謂朝菌不 이아츤목근사이수화조생석락가식장자소위조균부 知晦朔者是也潘尼朝菌賦序亦云世謂之木槿或謂之 지회삭자시야반니조균부서역운세위지목근혹위지 日及詩人以爲舜華宣尼以爲朝菌今人爲朝菌生糞土 일급시인이위순화선니이위조균금인위조균생분토 上朝生暮死未知誰得也彼以宣尼爲證似有據 상조생모사미지수득야피이선니위증사유거 《이아》에‘츤은 목근(무궁화)으로 오얏꽃과 비슷하고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떨어지는데 먹을 수 있다.’하였으니, 《장자》에 이른바‘조균(朝菌) 은 그믐과 초하루를 알지 못한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반니(潘尼)의 〈조균부서(朝菌賦序)〉에도‘조균을 세상에서는 목근이라 하고 혹은 일급(日及)이라고도 하며, 시인(詩人)은 순화(舜華)라 했고, 선니(공자)는 조균이라 했다.’고 하였다. 지금 사람들은‘조균은 썩은 흙에서 생기는 것인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죽는다.’고 하니,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저 반니가 선니의 말을 인용하였으니, 의거한 것이 있는 듯하다.

위 기록을 통하여 츤( )·조균(朝菌)·일급(日及)·순화(舜華)등이 모두 목근(木槿) 곧, 무궁화를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숙종 16년(1690)에 사역원에서 간행한 중국어 단어집인《역어류해(譯語類解)》하권에는“木槿花-무궁화”라 되어 있고, 영조 때 이가환(李家煥 1742∼1801)과 그의 아들 이재위(李載威)가 물명(物名)을 한자로 적고 그 아래 한글로 우리말 이름을 붙여 엮은 《물보(物譜)》〈화훼부(花卉部)〉에는“木槿-무궁화”라고 되어 있다.

▲재물보

또, 정조 22년(1798)에 한산(韓山) 이만영(李晩永)이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재물보(才物補)》는 천(天) ·지(地)·인(人)의 삼재(三才)와 만물(萬物)의 옛 이름 및 별칭, 한명(漢名),속명(俗名) 등을 모아 분류하고 이에 일일이 각주(脚註)를 붙이고, 필요에 따라 한글 해석도 달았으며, 우리 나라 역대의 제도와 문물, 지리 등도 기록한 책이다. 《만물보》 권지 8 〈물보3〉목조(木條)에는 무궁화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 명칭들을 나열하고 있다. 木槿무궁화 蕣日及朝開暮落花花奴玉蒸愛老花 목근 단츤순열급조개모락화화노옥증애로화 上花扶桑佛桑朱槿赤槿 상화부상불상주근적근 위의 기록으로 무궁화 명칭이 단·츤·순·일급·조개모락화·화노·옥증·애로·화상화·부상·불상·주근·적근 등으로도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조선 말기 농업정책과 자급자족의 경제론을 편 실학적 농촌 경제 정책서인《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는 그 내용이 16부문으로 나뉘어 있어《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또는 《임원경제십육지》라고도 한다. 순조 때의 실학자 풍석(楓石) 서유구(徐有  1764∼1845)가 만년에 저술한 것으로, 일상생활에서 긴요한 일을 살펴보고 이를 알리고자 하여《산림경제》를 토대로 우리 나라와 중국의 저서 900여 종을 찾고 이용하여 엮어 낸 농업 위주의 백과전서이다.

 

이《임원경제지》예원지(藝 志) 권2〈목근조〉에는《본초강목》, 《(증보)산림경제》《포박자》, 《군방보》등의 내용들이 실려 있는데, 〈명품(名品)〉에, 一名 一名橓一名日及一名玉蒸一名朱槿本草綱目 일명단일명순일명일급일명옥증일명주근본초강목 此花朝開暮落故曰槿曰橓猶僅榮一瞬之義也詩云顔 차화조개모락고왈근왈순유근영일순지의야시운안 如舜華卽此草花譜有千瓣白槿大如勸盃有大紅紛紅 여순화즉차초화보유천판백근대여권배유대홍분홍 千瓣(增補)山林經濟俗號無宮花 천판 증보 산림경제속호무궁화 일명 단·순·일급·옥증·주근이다. 《본초강목》에는 이 꽃이 아침에 피어 저녁에 떨어지므로 근·순이라 하는데, 겨우 얻은 영화가 한 순간이 라는 뜻이다. 《시경》에서‘순화 같은 얼굴’이라 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초화보》에 있는 겹꽃잎을 가진 백근은 붉은 색과 분홍의 겹꽃잎을 가진 권배(勸盃)와 크게 같다. 《(증보)산림경제》에는 ‘세속에는 무궁화(無宮花)라 부른다.’ 라고 되어 있고,〈종예(種藝)〉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木槿斷植之則生倒之亦生橫之亦生生之易者莫過斯 목근단식지즉생도지역생횡지역생생지이자막과사 木也(抱朴子)二三月新芽初發時截作段長一二尺如揷 목야 포박자 이삼월신아초발시절작단장일이척여삽 木芙蓉法卽活若欲揷籬須一連揷去若小住手便不相 목부용법즉활약욕삽리수일연삽거약소주수편불상 接( 芳譜) 접 군방보 목근은 잘라 심으면 살고, 거꾸로 심어도 살고 눕혀 심어도 사는, 잘 사는 나무로는 이 나무 이상 없다(포박자). 2∼3월에 새싹이 처음 나올 때에 1∼2자(尺)로 길게 잘라 목부용(木芙蓉)과 같은 방법으로 꺾꽂이 하면 산다. 만일 꺾꽂이로 울타리를 하고자하면 반드시 하나로 이어지게 간격을 두고 꺾꽂이 해야 한다.

만일 심는 곳이 협소하면 서로 붙어 있지 않아야 돌보기 편리하다. 또, 조선 철종(哲宗) 7년(1856)에 수암(睡庵) 정윤용(鄭允容 1792∼l865)이 《훈몽자회(訓蒙字會)》를 본 떠 한자(漢字)에 한글로 음을 달고 풀이하여 간행한 《자류주석(字類註釋)》〈초목류(草木類)〉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槿 무궁화근 木槿 朝華暮落 亦可食 白曰 근 목근 조화모락 역가삭 백왈  赤曰  蕣 舜단적왈츤 순 순蕣 무궁화슌 橓仝 槿榮  무궁화츤 木槿  무궁화단 槿也 목근은 아침에 꽃 피어 저녁에 떨어지고 또한 먹을 수 있다. 흰꽃을 단( ), 붉은 꽃을 츤( )이라 한다. 순(蕣)·순(舜)이다.

 

 

 

◀임원경제지

또 최남선은《조선상식문답》지리편에서 “李氏朝鮮(이씨조선)에는 光海朝(광해조), 許筠(허 균)의 〈高平詩(고평시)〉에‘大野通蒲類 長墻限槿源’ (너른 들은 창포꽃이오, 긴 담은 무궁화동산이로다.)이라는 구(句)가 잇스니 근원(槿源)은 근화향(槿花鄕)의 일류어(一類語)이다.” 라고 하였다.

또, 대종교(大倧敎)2대 교주인 무원(茂園) 김교헌(金敎獻 1868~1923)이 지은《신단민사(神檀民史)》에도“청구(靑邱)에 근화(槿花)가 많으므로 근역(槿域) 이라 했다.”라는 구절이 있다.

위의 여러 기록들을 볼 때, 조선시대에도 무궁화가 많았으나 초기에는 조선(朝鮮)왕조(王朝)의 상징인 이화(李花)에 가려 빛을 말하지 못했던 것 같다. 후기(後期)에 들어와 실학자(實學者)들에 의해 활발히 소개되였고, 한말(韓末)의 국학(國學)운동에 의해 무궁화는 우리 나라을 상징하는 꽃으로 부각되어 ‘근역(槿域)’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게 되었다. 오세 창(吳世昌 1864~1953)이 지은《근역서화정(槿域書畵徵)》이란 책 이름은 그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어사화·진찬화·번리초
〈어사화(御賜花)〉 우리 나라의 과거 풍속(科擧風俗)을 《한국문화사대계(韓國文化史大系)》IV권(卷)의 내용을 근거(根據)로 하여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원성왕 4년(788)에 설치한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를 우리 나라 과거제의 효시로 볼 수 있으나, 본격적인 과거제는 고려조에 와서 시작되였다. 즉, 광종 9년(958)에 후주(後周)의 귀화인(歸化人) 쌍기(雙冀)의 건의에 의하여 중국식 제도를 모방하게 되면서 부터였고, 이로부터 인재 등용은 주로 과거제에 의해 왔다. 고려시대의 과거 풍속을 보면, 최종 급제자는 동당감시방방의(東堂監試放榜儀)라는 의식을 통해 발표된다. 당일 전상(殿上)에 마련한 은막(隱幕)에 국왕이 임어(臨御)하고, 중신(重臣)이하 신료(臣僚)들이 참석한 가운데 방방(放榜)의 의식이 행해지는데, 급제자는 호명에 의해 입정(入庭), 정렬하여 일제히 숙배(肅拜)한다. 이어 국왕은 이들에게 주과(酒果)를 하사(下賜)했다. 또한, 급제자에게는 어사화(御賜花)가 주어졌는데, 한재(旱淡)등의 천재(天災)가 있을 때에는사화(賜花)하지 않았다 한다.

 

이 사화의 예(例)는 당 의종(唐懿宗)이 신급제(新及弟)자들이 동강(同江)에서 연회(宴會)를 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꽃을 꺾어 보내며 그것을 머리에 꽂고 술을 마시게 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등과자(登科者)에게는 또 남포(藍袍)와 서대(犀帶)및 일산(日傘)등이 하사되었다. 한편, 급제자는 머리에 꽃을 꽂고 일산을 받고 풍악을 잡혀서 가로(街路)를 행진한, 이른바‘유가(遊街)’의 영광을 가졌는데, 이 유가의 풍속도 역시 당대(唐代)부터 시작된 것이다. 또, 조선시대의 과거 풍속을 보면, 방방의 의식이 근정전(勤政殿) 뜰에서 거행되었는데, 이 의식석상(儀式席上)에서 급제자에게 홍패(紅牌)나 백패(白牌)가 수여되고, 주과(酒果)가 하사되고 어사화가 사급(賜給)되었다. 또한 갑과(甲科) 급제자에 한하여 조개( 蓋)가 별사(別賜)되었다. 방방 후 대체로 3일 동안 유가를 가졌는데, 이때 우인(優人)들이 유희를 연출하며 악수(樂手)가 앞에서 인도했다 한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京都雜誌)》에 의하면, 유가 때에 동원된 악수는 세악수(細樂手:장구·북·피리·저·해금의 악수)였고, 광대는 비단옷에 황초립(黃草笠)을 쓰고 채화(綵花)·공장깃〔孔雀羽〕을 꽂고서 난무(亂舞)하며 익살을 부렸으며, 재인(才人)은 답색(踏索)·곤두박질 따위를 연출했다고 한다. 위에서 살펴본 고려와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서 급제자에게 내리는 어사화가‘무궁화’라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최영전(崔永典)의《백화보(百花譜)》에는 “무궁화는 어사화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문무과(文武科)에 급제하면 임금께서 종이로 만든 무궁화를 하사하여 복두( 頭)에 꽂고 삼일 유가에 나서게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하였고, 한국문화재보호협회 발행의《한국의 복식》에는 숙종 45년(1719)에 있었던 계회(契會)를 그린 《기사계첩(耆社契帖)》의 ‘봉배귀사도(奉盃歸社圖)’를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중에는 “기신(耆臣)이 남여(藍與)를 타고, 뒤에서는 파초선(芭蕉扇)을 받들어 머리 위를 가리우고 있다. 머리에는 은화(恩花) 즉, 어사화를 꽂고 있는데, 이 어사화는 원래 과거에 급제한 사람에게 임금이 주던 꽃으로, 길이 약 90cm의 참대에 푸른 종이를 감고 다홍색, 보라색, 노랑색의 세 송이 무궁화 종이꽃을 달아서 모자 뒤에 꽂았다.” 라고 적고 있다. 또한, 노벨문화사, 서문당, 학원사 발행의《세계대백과사전》에도 어사화는 무궁화라고 적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하다. 노벨문화사 발행의 백과사전 내용을 참고(參考)로 실으면 다음과 같다.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에게 왕이 내리던 종이로 만든 꽃. 진찬(進饌)때에 신하들이 사모에 꽂기도 하였다. 길이 약 90cm의 참대오리 둘을 푸른 종이로 감고 비틀어 꼬아서 군데군데에 보라, 다홍, 노랑의 3색 무궁화 송이 조화(造花)를 끼었으며 한 끝을 복두( 頭)의 뒤에 꽂고 길이 10cm의 붉은 명주실을 비끄러 맨 다른 한 끝은 머리 위를 휘어 넘기어 실을 입에 물었다.” 한편, 김석겸의 《겨레얼 무궁화》에서는 고려시대의 어사화는 생화(生花)였다고 적혀 있으나,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 못했다. 후일에 이러한 부분에 대한 연구가 계속되길 바라는 바이다.

 

류희경의《한국 복식사 연구》에 “무릇 관모(冠帽)에 삽식(揷飾)하는 풍습은 상고 시대부터 우리 나라에 있었다. 수렵시대에는 새의 깃털을 꽂는 호족(胡族)계통의 풍습인 삽조우(揷鳥羽)에서 농경시대로 옮겨감에 따라 식물 형태를 모상(模像)으로 하여 꽃을 꽂아 장식하기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이것의 예로써 앞에서 언급한 단군시대의 천지화랑(天指花郞)들이 천지화(天指花)를 머리에 꽂고 다녔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다. 이러한 풍습이 고려시대에는 복두에 처마 형태의 첨화( 花)를 꽂는 풍습으로 이어져 어사화를 첨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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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찬화(進饌花)〉 조선 때의 궁중(宮中) 잔치는 진작(進爵), 진찬, 진연(進宴), 진풍정(進 呈) 등으로 구별되고 이 중에서 진풍정이 가장 규모가 크고 의식(儀式)이 장중하다. 진찬 때에는 임금이 내린 꽃, 즉 어사화를 신하들이 사모(紗帽)에 꽂았는데 이를 모화(帽花) 또는 사화(賜花)라고도 하였다. 이 꽃을 일러 진찬화라고 하는데 엄격히 말하면 어사화의 일종이다. 이 꽃이 무궁화임은 앞서 《세계 대백과사전》에 실린 내용으로 짐작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좀더 살펴보기 위해 명승희의 《서설 한국무궁화운동사》에 실린 내용을 옮긴다.  

진찬(進饌)이라는 것은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임금에게 좋은 음식을 바치는 잔치를 말하는 것인데, 이때에 신하들이 사모에 무궁화 꽃을 꽂는 것은 역시 임금과 백성이 모두 무궁하게 번영하고 강인하게 발전하기를 기원(祈願)하는 뜻에서 위로는 임금의 무궁한 만수무강을 빌고, 아래로는 만백성의 나라 사랑〔忠誠〕과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책무(責務)를 다지며 불의와 타협(妥協)을 하지 않을 충직(忠直)을 임금에게 맹세하는 신하의 소명(召命)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얼마나 소중하고 훌륭하게 생각했으면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행사 때마다 이 무궁화(無窮花)를 사용했을 것인가!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더욱 크다 하겠다.

 

〈번리초(藩籬草)〉 무궁화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인류가 무궁화를 발견한 이래 참으로 많은 명칭을 얻고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들이 한번쯤 재고(再考)해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울타리꽃’이라는 뜻으로 쓰여지는‘번리초’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 김석겸의 《겨레얼 무궁화》에 실린 내용을 옮긴다.

원래 번리초란 뜻은 울타리꽃이란 뜻으로 고대 중국에서는 정원(庭園)의 관상수(觀賞樹)로서 울타리 변에 심어졌으나, 근세 우리 나라에 와서는 주거(住居)의 형태상 울타리라는 것은 잘 돌보지 않는 영역이었으므로 자연 소홀히 다루게 되는 공간(空間)인 것이다. 다시 말해, 관심 밖이라는 강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므로 대궐 밖이나 민가의 울타리에 심어져 천대와 멸시의 나무로 전락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근세 사회(近世社會)에 들어오면서 무궁화가 겪었던 첫번째 수난 중의 하나이다. 첫 이유는 유교(儒敎)의 상징인 이화(梨花) 때문이었고, 더 나아가 울타리에 심어져 버린 것이 두 번째의 이유가 된 것이다. 번리초는 한 악(韓 )의 〈목근시(木槿詩)〉에 보면, 揷槿作藩籬 叢生覆小池 삽근작번리 총생이소지 무궁화를 꺾꽂이 하여 번리(울타리)에 심었더니 짙게 자라서 작은 못을 덮는다.

했는데, 이는 무궁화의 아름다움과 함께 그 강한 번식(繁殖)을 말한 것일 게다. 아울러 이 번리초는 《본초강목(本草綱目)》 목근조(木槿條)의 석병(釋名)에도 나타나 있다.

 

그리고 당(唐)나라 사람 우곡(于鵠)은 그의 시(詩)에서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槿籬生百花 근리생백화 무궁화 울타리에는 백 가지 꽃이 피어난다

그러므로 워낙 번식률이 좋은 이 울타리꽃 무궁화는 버림받은 것 같아도 자강불식(自彊不息) 하였는지라 크게는 가로수(街路樹)로 작게는 공원 등지의 울타리 가에서 번식되어 갔었다.

한편, 이런 울타리에서나마 그 향기가 좋아 방근(芳槿)이란 속명도 가지고 있는데 다음의고문(古文)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籬揷芳槿門拂長楊 리삽방근문불장양

울타리에 향기 좋은 무궁화 심고 대문 쪽엔 긴 가지 수양버들이 너울거린다.

이는 완상(玩賞)의 정원수로서 손색없는 전원(田園)의 운치를 북돋아주는 시구(詩句)다.

또, 위의 김석겸이 예시한 것 이외에도 익재 이제현(李齊賢)의 문집 《익재난고(益齋亂藁)》에 실린 〈고정산(高亭山)〉이란 제목의 시(詩)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도 보인다.

人家處處槿花籬 인가처처근화리 이 마을 저 마을 집집마다 무궁화꽃 울타리

또한 다음 구절은 고대 중국인 구종석(寇宗奭)의 말인데, 《중간경사증류대전본초(重刊經史證類大全本草)》와 《본초강목》의 목근조에 실려 있다.

湖南北人家多種植爲籬障 호남북인가다종석위리장 호남·호북 지방의 인가(人家)에는 울타리로 많이 심는다.

또, 《정자통(正字通)》은 명나라 장자열(張自烈)이 지은 음운자서(音韻字書)인데, 목근에 대한 설명 중

南人以植籬 亦名藩籬草 남인이식리 역명번리초 남쪽 샤람들은 이것[槿:무궁화]으로써 울타리로 심고, 또한 이름은 번리초라 한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14세기 경의 일본(日本)의 중요한 고전인 《문명본절용집(文明本節用集)》에 근화(槿花:무궁화)의 설명 중 송나라 사람의 시(詩)를 인용한 부분에서는 다음의 구절이 보인다.

槿花籬下占秋草 근화리하점추초 무궁화 울타리 밑에 우거진 가을 풀

위의 여러 가지 기록들은 모두 무궁화가 인가(人家)의 울타리로 사용된 것을 말해 주는 것이다.

이것을 천대와 멸시로 받아들일 것인가. 우리의 농촌에 가보면 지금도 탱자나무나 대나무로 울타리를 삼은 곳이 많이 있다. 대나무는 4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여러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는 것인데, 울타리로 심는다고 천시의 개념으로 생각할 것인가. 오히려 집을 지켜 주는 보호수(保護樹)의 역할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김정상(金正詳)의《무궁화보(無窮花譜)》에 실린 내용인데, 이러한 생각을 더욱 짙게 한다.

◀무궁화보

우리 나리에서나 중국 지방에서 무궁화는 거의 전부가 울타리로 이용되는데 이에 대한 습속을 고찰해 보면 무궁화는 음장(陰 )-천지사이에 불순한 기운을 말함인데 탄산가스 따위를 의미함인듯-을 제거하는 효력이 있으므로 사람의 집울타리로 쓰면 장기를 막는다는 옛 기록을 믿음에서 된 것이오, 또 물리적으로는 산울타리〔生藩籬〕로 세워두면 울막기에 편리하고 꽃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잎은 나물로 쓰고 소[牛]가 지칠 때에 죽 끓여 먹이면 쉽게 회복되므로 우마의 먹이가 손쉽게 들어오고 약으로도 필요하므로 사람의 가장 가까운 울타리로 쓰게 되었고, 번식이 빠르고 그 키가 작지도 크지도 아니하고 울타리에 적당한 까닭이다.

본시 무궁화는 옛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집 둘레에 심어져 아름다움을 뽐냈던 것 같은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좋은 의미를 왜곡하여 나쁜 개념으로 전략시킨 것 같다. 앞서 소개한 《임원경제지》의 내용을 다시 되새겨 보자.

若欲揷籬須一連揷去若小住手便不相接 약욕삽리수일련삽거약소주수편불상접 만일 꺾꽂이로 울타리를 하려면, 반드시 하나로 이어지게 간격을 두고 꺾꽂이 해야 한다.

만일 심는 곳이 협소하면 서로 붙어 있지 않아야 돌보기 편하다.

오늘날 길가나 울타리로 빽빽이 심어 제대로 돌보지 않고 내버려 둔 무궁화를 보면 위의 문구는 하나의 경종을 울리는 것이 된다. 조선 후기 실학자(實學者)들의 우리 것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궁극에는 무궁화 재배 방법으로까지 미쳐 무궁화 꺾꽂이 방법을 소개하기에 이르렀다. 울타리 꺾꽂이가 언급된 것을 보면 이때까지 무궁화 울타리는 상당히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 같다. 무궁화 울타리를 소외되고 버려진 꽃이라는 사고(思考)에서 벗어나, 친근하고 가까이서 정겨움을 주는 꽃이라는 의식으로 전환하여 심어진 무궁화를 알뜰히 소중하게 가꾸고 다듬어야 하겠다. 이것이 실학자들이 벌인 우리 것 찾기 운동의 의미를 이어 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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